독문학2005. 4. 3. 23:30

   Ingeborg Bachmann  소설 : 히스테리적 여성인물 중심으로    

 

I. Bachmann (1926-1973)                                  
                                         

 
    - 오스트리아 출신
    - "Heidegger 철학의 비판적 수용"에 관한 연구로 학위.
    -  시집『유예된 시간』에서부터 방송극, 단편집 등 작품마다 성공.
    -  후반에는 소설 작품을 발표했고
『죽음의 방식들 Todesarten』구상.
    -  화재 후 치료 중 사망.

                                                                     
  ≪ (59-63) :  Max  Frisch! (1911-91) ≫
 

 

『죽음의 방식들 Todesarten』3부작:
             80년대 페미니즘 문학연구의 기폭제
             장편 『말리나 Malina』
             미완 『프란차의 경우 Der Fall Franza 』
             단편 『파니 골드만을 위한 진혼곡 Requiem fü r Fanny Goldmann』

          * 이들의 죽음은 예고된 죽음이요, 예고 방식은 암시라기 보다는 명시적으로........

바흐만은  자신이 계획한 삼부작 소설에...... 죽음의 방식이라는 제목을 달고자 하였다.
바흐만은 세 여성 주인공들의 죽음의 원인이 모두 "타살"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들에서
묘사하고자 하였다. 마리안네 슐러가 나타낸 바 있듯이, 만일 바흐만이 이러한 죽음을
서구의 상징화 과정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밝히고자 한다면, 여기에서 살해의
끔찍함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살해는 여성적인 것에 가해진,
사회적으로 인정된 범행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바흐만의 텍스트들을 통해서 우리는
후기구조주의에 의해 열렬히 받아들여진 바 있는 여성적 주체성의 비실존이 바로 이것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참기 힘든 것인지를 느끼게 된다. (Lindhoff)

☆  Ingeborg Bachmann 연구: 2 계열                                                      

- Marlis Gerhardt, Rückzüge und Selbstversuche (1983):
       입센의 『인형의 집』의 노라 - 『말리나』의 여성적 자아 대비:
      『말리나』의 여성적 자아와 남편과의 노예화된 생활에 결별을 고하는
       노라의 결단을 대치시킨다.

- Marianne Schuller, Wider den Bedeutungenswahn. Zum Verfahren
                              der Dekomposition in "Der Fall Franza". (1984)
            프로이트의 『히스테리분석의 단편 Bruchst ck einer Hysterie-Analyse』(1905)
            에서 공개한 환자 도라, 이 전조된 징표를 드러내는 히스테리 연구
            "도라의 경우"에 비추어서『 프란차의 경우 Der Fall Franza』를 해석.

         * 프란차의 남편은 그녀를 자신의 창조물로 만들려고 하고 그녀 안의 "타자"를
            죽이려고 시도, 프란차는 정신분석학자인 남편에 의해 병에 걸리게 된다.
            프란짜의 히스테리는 그녀로 하여금 이러한 가부장적 "의미의 망상"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자기동일화들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게 해주면, 추방된 타자를
            다시 불러들일 수 있게 해준다는 것 (Schuller, 153)

히스테리 여성환자들에게 특징적을 나타나는 것은 여성적인 대면 상대자의 결여인데,
....... 엘리자베스 브론펜은 쥴리엣 미첼의 규정, 즉 모든 여성작가는 확실히 히스테리
여성 환자라고 하는 것을 인용한다:

                    "히스테리적인 목소리로서 이것은 여성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여성의 남성적 목소리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남성적 담론에 대한 모방을 가리키고 있다. 서술전략이 비유어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건, 양가적인 태도의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건, 혹은 문화적인
공동 장소의 배후에 숨겨진 전제들의 정체를 벗겨 던지건 간에, 이러한 것들은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어쨌든 간에 히스테리적 목소리의 패러디나 탐닉은 텍스트의 테마
층위에서나 수사적 층위에서나 여성들이 처해있는 딜레마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것이다.
                                                                                               (Bronfen, 583)

뒤라스와 바흐만의 텍스트들은 아마도 여성적 경험의 정교화가 패러디를 지시하기도
하고 탐닉을 지시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들일 것이다......
이들의 남성 화자들은 ..... 주체일 수 없는 여성 자아와 남성(화자) 주체 사이의 분리를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이미 일찍부터 전적으로 희생당하는 프란짜의 몸짓에서, 정신은 육체와의 공동행위
속에서 도피처를 발견함으로써 육체와 결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그녀의
육체로 인도하는 이 같은 작업은 어떻게 이러한 문화를 입증하고 사물화시키는가 하는
한에서만 문화를 초월한다. ..... 바흐만이 이 여주인공에게 부여하는 절망적인 논리는
.... 문화가 자신의 딸들을 미리 매장한다면, 딸들은 스스로를 매장시킴으로써만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이다. (Bronfen, 614)


[참고]
- 레나 린트호프: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 Elisabeth Bronfen: Nur  über ihre Leiche. Tod, Weiblichkeit und  Ästhetik. 1994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5. 3. 4. 23:30

   노라 와  도라:  해방과 히스테리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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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라: 입센 Henrik Ibsen(1828~1906)
                           『인형의 집 Et Dukkehjem』(1897) 의 노라 :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
                             남편과의 노예화된 생활에 결별을 고하는  해방된 여성

        70년대 및 80년 대 초기 페미니즘의 상징 인물.
          -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적인 규정으로부터 해방되는 인물로 여겨짐.
            (남성문학 경전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재 독해 방향: 보브와르 Beauvoir)
          - 본래적  여성적 글쓰기 전통을 찾아 나섰던 버지니아 울프의 추구 속에서
            표현된 것처럼, 독자적 여성의 동일성이 구체화된 인물.
             (버지니아 울프: 여성문학사 서술)

도라: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
                    『히스테리분석의 단편 Bruchstü ck einer Hysterie-Analyse』(1905)
                      그에 의해 "도라"라고 명명된 18세의 여성환자에 대한 분석

        후기구조주의 진영(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 식쑤, 이리가레이....... )의
        여성성 이론은 히스테리 환자 도라를 상징적인 대표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아래]==>
도라 르네쌍스

도라의 근원≪ 

Freud u. Breuer, Studien über Histerie 1895

정신분석의 시작: 여성환자 Anna O. (본명: Berta Pappenheim)가 의사를 놀래주기 위해서
최면생태에서 자신의 무의식적인 기억, 환상, 갈등 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증상을 사라지게 만들었을 때,  안나 O. 는 자신에 의해 명명된 대화치료라는 치료방식을 발견,
당시 의사는 상담해주는 사람 역할, 브로이어는 그녀의 진술과 토로의 내면적 필요성을 전적으로
따랐으며, 그녀에게 어떠한 자기해석도 강요하지 않았다.
반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의사는 분석가의 역할을 한다. 의사는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통해
권력관계를 만들어냈다. 즉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 계몽하는 사람 ... 가르치는 사람, 더 자유로운
세계관을 혹은 탁월한 세계관을 대표하는 사람, ....또는 환자가 고해하면 면죄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간주한다. (F/B, S. 299)
                       

................................................................................................................................
 "상상 속의 창녀 - 인류의 구원자"

                         
 Berta Pappenheim(1859~1936):

      
Martin Buber 의 조사: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나 정열적인 사람은 흔치
                                      않다고들 한다. 그러나 기지가 뛰어나면서도
                                      정열적인 사람은 더욱 드물다. 베르타 파펜하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죽기 3년 전 자신의 추도사를 써 두었던 장난기의 기지.

    <일생> 1899: 사회비판극 『여성의 권리』발표.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번역 자비 출판.
               1902: <여성 구제협회> 창설
               1904: <유태 여성협회> 창설
               1907: <위협받는 처녀와 사생아를 위한 집> 자비 설립
                                                                       [38년 나치의 테러로 파괴]

    1912년 친구에게:
    "나는 일 자체나 일하는 방식에서는 물론 인격적으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꼭 필요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무엇에 대해서도 누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고독하고 금욕적이며 우울한 여자로 만든 것은
             1) 루시 프리만의 추측대로: 이 몽상 체험이 자신의 억압된 성적 욕망
                 때문이었는지
             2) 그루넨베르크의 말대로: 성폭력 경험 때문이었는지......

 ≫ 안나  O: 1880년 21세로 병에 걸렸을 때 ----

                   * 왜  안나  O. 인가?  Kleist의 <후작부인 O.>에서처럼
                      O.가 불러일으키는 외설스런 연상과 관련되었을 것.

     브로이어의 진료 기록 의하면 :
        
 "낮에는 비정상적이며 환각에 쫒기는 환자, 밤에는 명석한 두뇌의 소녀.
          참으로 기이 한 대조를 이룬다."

    브로이어가 더욱 기이하게 여긴 것은 극단적인 <언어 혼돈 > 현상으로,
    처음에는 심한 언어 장애를 보이더니, 나중에는 <모국어>를 완전히 상실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영어만 하다가, 가끔씩 불어와
    이태리어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이야기 치료>를 통한 자발적인 치유로 일년 만에 치료가
    완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수년 뒤에야 약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짐.[이야기 치료와 모르핀 등 약물 치료를 병행 한 듯]

    브로이어는 몽유병 증상도 심리적 증상도 완쾌시키지 못했고, 환자는 의사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환자는 <신경질적>이었다고 탄식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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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 르네쌍스:
              
               
『히스테리분석의 단편 Bruchstü ck einer Hysterie-Analyse』(1905)
                    속칭< 도라 분석>

  
 1900년 18세의 소녀:
                 대 부르조아 집안 출신으로,
                 프로이트는 환자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
                <우선 아버지가 강제로 그녀를 내게 데려왔다>고 진술.
                3개월간 치료 후 환자에 의해서 중단됨.

       아버지, 아버지 친구인 K.그리고 프로이트에 대한 불신으로, 도라는 프로이트의
       해석에 강하게 반발.
 
       예) 도라가 어머니에게 보석상자의 열쇠를 달라고 한 부탁을 프로이트는 곧바로
            생식기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임.
            그가 <보석상자>는 여성의  성기를 가리킬 때 즐겨 쓰는 표현>이라고 하자,
            도라는 즉각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고 조롱했다 함.

  *도라 분석의 문제점:
        환자는 기가 꺽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빼앗긴다.
        정신분석가 프로이트 + 도라의 아버지 + 아버지의 친구가 이 과정에 참가.
        <소유권 몰수과정>은 정신분석가의 해석에 환자가 굴복하게 되는 과정이다.

       ※ 도라의 고집스런 결정으로 프로이트는 <의사가 얼마나 무력하며 무능한지>
           아프게 깨달아야 했다. 환자의 협조가 없는 한, 그는 무력하며, 그의 해석
          기술도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라 분석>은 "환자 이야기"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법"에 구금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여성적인 자아동일성 및 외디푸스 이전 단계의 억압된 엄마와의 관계 등과
연관지어질 수 있는 욕구불만을 호소한다. 라깡과 이리가레에 따르면, "히스테리"여성 환자의
담론이 서구 문화에서의 여성적 담론 일반이라고 본다면, 히스테리 여성환자의 "치료"라는 것은
또 다른 여성 주체성의 [비본질주의적] 구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이러한 치료에서의 여성적인 것은 히스테리 여성환자에 의해 분열된 자아 경험 속에서 재생산
되는 하나의 "타자"
[낯선 것, 이질적인 것의 담지자로서, 남성적인 자아상으로부터 배제된
자로서의 여성]
와 하나의 "또 다른" 여성[겉보기에는 동일적인 개체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낯설게 된 주체로서, 그리고 남자가 마음대로 다를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여성]
으로 문화적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의학적기고 철학적으로 기초가 다져진, 남성적으로 규정된 동일성 개념 및 주체 개념들은
여성적인 것을 하나의 병으로 취급하여 이것을 배제시킨다. 그런 한에서 히스테리는 여성의
병을 특수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전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히스테리에 대한 논의에서 말로 여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Schuller, S. 24)

도라의 무의식적 병인을 재구성하려는 프로이트의 시도의 기저에는 여성의 소망이
수동적이고 매저키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이 놓여있었다. 그래서 도라에게
가해졌던 성폭력을 중요한 발병요소로 관찰하는 것은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른 한편 도라와 엄마, 또 다른 여성들에 대한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간과하게 했다.


 육체의 글쓰기와 분열된 자아

프로이트/브로이어에 따르면 히스테리 질병의 근원에는 격렬한 감정적 동요 및 정신병적
증세가 있다고 한다. 히스테리 여성환자들은 "회상들"로 인해 괴로워한다. 즉 이들은
육체적인 신경분포를 발생시키는 고통스러운 회상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바흐만의 프란짜는 자신을 무의식에 빠지게 만드는 "회상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고통스런 기억들은 히스테리 여성환자에게 현존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기억들은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자리에는 경험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기록하고 늘 새롭게 상연하는 수집된 증상들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히스테리는
히스테리 증후 형성과정에서 이용되는 상이한 육체의 기능과 감각의 기능을 거의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나의 체험이 자아가 허용하지 않는,
그리고 또한 자아에 의해 행해질 수 없는 강력한 감정의 자극을 일으키게 될 때, 그것은
히스테리적 증후 형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근거는 바로 자아로 하여금
본래의 감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해주는 내적인 모순 혹은 양심의 갈등이다.
       예)
안나 O.가 치명적인 병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는 동안 들려오는 춤곡에
            사로잡혀 그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의 정점에서 자신을 질책하게 되었을 때
            히스테리적 기침이라는 증세가 나타났다.... 안나를 여러달 동안 침대에
            묶여 있게한 심한 마비 증세의 원인은 바로 "잠들어 버린 팔" 이었다고 한다.
                                                                                                (F/B, 58)

브로이어는 안나의 경우 질병의 원인과 히스테리 일반의 원인이 결국 채워질 수 없었던
공명심, 즉 여성에 대한 역할규정과 충돌되었던 지적인 관심들 및 쓰여지지 않고 방치된
능력들에 있었다고 보았다:

          " 나중에 히스테리적 증세를 갖게 되는 사람들의 사춘기를 보면, 이들은 .....대부분
            활기 있고 특별한 자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풍부한 정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F/B, 259)

......자신들의 증후들을 통해서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그러한 증상들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자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히스테리적 증후에는 자기 공격, 즉 자기 증오의
특징이 기입되어 있다. 그러한 특징은 그녀를 상당히 이중적인 존재로 만든다.
히스테리는 육체에 효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육체를 파괴하고 손상시키기도 한다.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자아에게 자신을 상상적인 환각생태에 빠지게 하는 육체적 만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안나 O. 는 식욕부진으로 말미암아 아사 상태로 이끌게 될
음식물 혐오증, 심한 시각 장애, 청각 장해, 언어 장해, 팔과 다리의 심한 마비증세, 그리고
공포와 두려움에 이르는 정신분열증적인 환각으로 인해 고통받게 된다.

히스테리는 자아상실의 병이다:
        예)
도라: 유희에 참가한 사람들과 거의 무한한, 무한히 반복되는 동일화 과정에서
                     동일성 형성을 위한 필사적인 시도.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거울도 발견하지 못한다.
                     가정주부 노이로제의 엄마, 방해받지 않고 K부인과의 관계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 K씨에게 그녀를 넘겨버린 아버지, 그녀 또 다른 여성들을 성적으로
                     위협한 K씨, 겉으로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사실은 아버지에게만 관심을
                     두었던 엄마의 대체인물들, 가정교사, K부인....... 자신을 희생시켰다고
                     느껴지는 연인들에 대한 불만족스러움과 이러한 배반에 의해서 야기되는
                     도라의 비실존 감정은 정신분열적인 증후로 나타난다.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생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가 된다." (Freud 1905, 204)

[결어]
서구문화의 기저에 놓여있는 상징적 질서 내에 존재하는 여성의 비실존과 대면한
여성적 주체성의 구성:
버지니아 울프의 신비적 시인의 모습(셰익스피어의 여동생?) ... 한 신비주의적 여성작가가
결국 잉태되기를 원하는 여성들 속에서 타자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
이러한 "자기 이중화"는 거울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즉 주체가 될 수 있기 위해서
여성 자신은 스스로 대상이 되어야 하며, 오직 상호 주관적인 구조 안에서만 여성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기와의 새로운 관계를 오직 다른 여성을 통해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Lenk, 1976, 73)
          예) 도라는 이러한 여성적 거울을 K부인 속에서,
               베티나 폰 아르님은 카롤리네 폰 귄더로데 속에서,
               뒤라쓰의 욕망의 자아인 롤은 안네-마리 스트레터 속에서 찾는다.
                                                                 
                                   [참조]  뒤라스
 

노라는 자신을 부정하는 가부장제적 사회 체계의 상징적 기초들을 반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그러한 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반면,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상징적 체계 자체를 문제시했다. 이는 담론적 비판의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또 다른 행동 논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녀는 남성적 질서에 의해 억압된 것을 재현하는데 자신을 바치며,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그 둘은 개별적으로는 히스테리와 해방 간의 숙명적인 순환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한 쌍으로서, 즉 하나가 다른 하나의 거울이 됨으로써 그들은 이러한 순환관계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참고]
- 레나 린트호프: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 Freud/ Breuer: Studien über Hysterie, 1991.
- Elisabeth Lenk: Die sich selbst verdoppelne Frau, 1976.
- Marianne Schuller: Im Unterschied, 1990
.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4. 12. 1. 21:49

하인리히 뵐: 1967년 뷔히너문학상 수상자로서, 수상연설집
문학은 아직도 고혹한  피의 작업(뷔히너학회편 2004)에 실린 것.

 

                        뷔히너의 현재성


저의 감사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만, 저의 연설은 고언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이 상이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명칭을 지녔기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언에서 생겨날 것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즉 앞서 간 선배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쉴 수 있을 중심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가장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저 소란스런 동시대인으로서의 감정이 주는 가장자리요, 바로 그 점이 그의 시대의 동지 게오르크 뷔히너를 이렇게 현존하게 해줍니다.

뷔히너의 생과 작품을 파악하기는 간단해 보입니다. 그의 생은 너무도 짧았고, 그의 작품은 단편적이자 독창적이며, 매끄럽게 주머니 속에 들어갈 만 한, 단 한권 분량입니다. 그런 사실은 숭배적인 단순화를 낳는데, 시적 통절함을 실은 비문에 어울릴 이상적인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완성되고, 일찍이 사망한, 이별, 결말, 영면. 그렇지만 뷔히너의 생과 작품은 이 영면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땅 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아름답고 궁극적인 광고문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뷔히너가 불러일으키는 소란은 놀라우리만큼 현재성을 지녔고, 여기 이 강당에 현존합니다. 다섯 세대를 건너뛰어서 그 소란은 우리에게 다가들며 우리를 덮칩니다. 죽음의 예감으로 명명된, 이 거친 아름다움과, 우리 문학사에 정말 드물었던 어둠의 열정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이러한 움켜 쥠,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의 확신, 그가 붙잡은 모든 대상에서 보는 이 인간적인 물질의 정의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을 비로소 예술로 만드는, 그렇지만 인위적이어서는 아니 되는, 저 미숙함의 숨결, 또한 조바심의 숨결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모순 속에 그 정의가 있지요, 그러니까 결코 인위적 조바심, 인위적 미숙함이 아니라, 그냥 현존합니다. 마치 『레옹세와 레나』에서 레나가 설명하는 그런 사람들 같습니다. “나는 단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하고 구제불능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예술을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너무 생물학적이며, 아마추어리즘의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뷔히너는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저는 그가 두개골 신경에 대한 강의에서 생명체에 대한 생물학도로서가 아니라 표본화된 물질에 대한 해부학자로서 발언한 그 부분에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 개인의 육체적 현존재 전체는 철학적 방식으로 보자면 (그는 목적론적 방식과는 반대로 이 방식을 제시했습니다만), 고유 개체의 보존을 위해 내세워진 게 아니라, 태초의 법, 그러니까 아주 단순한 균열과 선들에 의해 최고의 아주 순수한 형태들이 야기되는 그런 아름다움의 법을 고지하는 것이다. 모든 것, 형식과 소재는, 그 방식으로 보자면 이 법에 메어있다.” 뷔히너의 작품에 대한 모토로 내세울 수 있을 이 발언에서 그는 자연과학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현재합니다. 제가 또 하나 다만 구전되어 온 사회적 성격의 발언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날마다 스프와 야채와 고기 먹을 게 있다면, 훌륭한 사람 되기는 누어서 식은 죽 먹기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사실주의의 조야한 유형을 독일 드라마 상 최초이자 거의 동시에 마지막 노동자라 할 보이첵의 입으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천당에 가게 되면 천둥치는 일을 도와야 할 거라” ― 그러면 저는 한 사람에게서, 한 입에서, 두 사람의 시인을, 두 독일인을 보게 됩니다, 한 세기 후에 나타나 서로를 배제하는 것으로 보였던 벤과 브레히트, 두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뷔히너 안에서 현재합니다.

뷔히너의 정치적 미학적 현재성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뷔히너의 친구이자 대학생이었던 미니게로데가 겪은 지하 감옥에서의 고문을1) 공공 거리에서 공직자들에 의해 자행된 두 건의 살인, 저 베를린 대학생 오네조르크와2) 연방군 병사 코르스텐의 사살과 관련짓자면 말입니다. 둘 다 국가 권력으로 인한 공개 살인이라는 몸서리치는 경우입니다. 또는 「헤센 급전」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거나, 아예 독일어로 팸플릿으로 만들어서 새로이 주석을 붙여서 보급하는 일 말입니다. 물론 박지 인쇄의 고전판 포장을 해선 안 되지요, 그랬다간 게르만 학술원 취급 같은 조짐이 일어나, 거기서 정치적 가시바늘을 뽑아버릴 테니까요. 귀족과 오두막에 대한 풍자는 이 신판에서 변경할 필요가 없겠고, 다만 해석을 달면 될 것입니다. 대연정은 충분히 독재적이요, 더는 작은 투표함을 두려워할 게 없지요.3) 그것으로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면 그래도 우리의 정치적 문맹을 표현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보는 눈을 가진 이에게는 히죽거리는 합의와 정말 히죽거리는 독재성이 충분히 보이지요, 두 개의 권력에 익숙해진 왜소한 남자의 새로운 봉건주의가 보입니다. 그는 거의 전권적인 대 정당의 거대한 관료 기구에서 안전을 느끼고 있는데, 그 안전이란 게 어느 여자 가신이 어떤 궁정에서 느낄 수 있을 그런 것보다 더한 정도겠지요. 자신의 양심을 정당에 바친 자들에게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에서 강력한 일절을 인용해 드립니다. “양심이란 원숭이가 그 앞에 놓고 고민하는 거울이다. 각자는 할 수 있을 만큼 씻고 닦으며, 제 고유의 방식으로 제 재미를 찾아 나서는 것. 그건 서로 드잡이해서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팸플릿에도 어떤 장례식의4) 묘사가 빠져서는 아니 될 겁니다. 저 마비적인 행사 말인데요, 그것은 반년 전 일로서, 지난 한 시대를 종결하고 새 시대를 위한 표식이 되었고, 거의 일주일 내내 TV 우산을 장악했었지 않습니까. 국내외, 유럽, 그리고 해외 입법자들이며 정부의 수반들의 입성 행진, 제국시대의 십자훈장 수상자들이며 추기경들 사이에 유행에 걸맞게 차려입은 입법자들이 부대 부대를 이루어 입성했습니다. 그것은 현대적이었지요, 그런데 그것은 ― 어떻든 저에게는 ― 몸서리치게도 전혀 현재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장례의식을 이론의 여지없이 치러내는 이런 마비적인 당연시에 더해, 표정들, 의상들, 자동차들 하며. 현대적 정치가들, 현대적 주교님들, 현대적 정치인들, 그리고 현대적 군대, 그들은 쾰른 대성당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스스로 민주주의라 하는 이 사회에서도 두 계급은 의상의 강요에 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민주주의를 창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해서 입증할 수 있을 만큼 비우호적이었던 두 계급, 곧 성직자와 군대 말입니다. 이 두 계급은 항상 현대적으로, 항상 사회적으로 유능하게 의상을 갖춥니다.

이제 뷔히너를 인용할 때인데요, 「공산당 선언」보다 13년 전에 씌어진 「헤센 급전」에서 입니다. “법은 자신들의 졸렬한 작품으로 지배를 보장하려는 고상한 자들과  학자들이라는 하찮은 계급의 소유물이다. 이 정의란 여러분을 규칙 속에 잡아두어 더 편안히 착취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저들은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법,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원칙,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파악할 수 없는 판결들에 따라서 말한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와 또 독일인들에게 타격을 입은 여타 유럽 국가의 대표자들도, 유행적 변형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제국 십자훈장을 두르다니, 비록 현대화한, 꾸며 장식한, 민주화한, 게서 갈고리를 빼낸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십자는 어쨌거나 십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는 ― 예술에서나 사회에서나 ― 현대적입니다. 어쩌면 보다 나을 유행적 변형은, ‘사람들이 여전히 십자가를 하고 다닌다.’라고 할런지요. 제 민족들의 고행을 위해 십자가는 표창으로서 수여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부조리성에서 현대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이 몇날 며칠을 천연하며 공포심마저 자아내는 행사를 현대적으로 만들겠으며, 또 그리 해낼 수 있겠습니까만, 그러면서도 몸서리치게도 현존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로소 영상매체의 우산위에서 엄청난 제곱을 함으로써 그 행사는 능란한 방식의 서양식 픽션, 곧 연극과 편집에서, 현실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의 해설이 아니라, 다만 다시금 그의 신부에게 편지를 쓴 스무 살 뷔히너에게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나는 역사의 소름끼치는 숙명론에 절망감을 느낀다오. 인간본성에서 경악스러운 유사성을, 인간의 제 관계에는 피할 수 없는 폭력을, 그것도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개인은 파도 위의 물거품이요, 위대한 자는 다만 우연일 뿐, 천재의 지배권은 인형극이요, 철칙에 거슬리는 우스꽝스런 고투라, 그것을 인식함이 최선의 것이요, 그것을 극복하기는 불가능입니다. 역사의 사열식용 폐마들과 모퉁이에 선 자들 앞에 굽혀서 절을 한다는 건, 저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저는 이 새로운 ‘헤센 급전’에 다음 사실의 면밀한 분석을 넣고자 합니다. 곧 이 나라에서 한 요상한 외교문서에 근거하여 국가를 방문하는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번거롭고 관을 쓴 우두머리들과 압도적인 매력을 지닌 영주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영접 받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만일 새로운 의식이 자라는 대학생들이 이 외교문서에 대항해서 소란을 통해, 그리고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 거역한다면, 누가 게서 놀라겠습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식인걸요. 이 요상한 외교문서가 경찰의 폭력을 통해 그들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그런 예절에 그들이 어떻게 의무감을 갖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일들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문서 문제들로 좌절당하고 맙니다. 초대장에 쓰인 간단한 기재, 예컨대 “짙은 색 양복” 또는 “외출용 정장”이란 기재만으로도 꽤나 육중한 압력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짙은 색인지 누가 저에게 말해줍니까? 외출 시에는 제가 무엇을 입나요? “흡연” 같은 육중한 경고문들은 아마 아이러니의 가치도 없겠지요. 누가 우리 위에서 규정하며, 누가 우리를 처리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불문율을 부여합니까? 청년의 항변이 복장과 두발에도 표현되는 것을 누가 이상하게 여긴답니까? 책임이 위임되어야 하고 다른 선택을 허용하지 않을 투표함으로 충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소란과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와 또 다르게, 복장과 두발로 표현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자 스무 살의 뷔히너가 가족에게 쓴 편지 구절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뭔가 도움이 되어야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주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승인했던 모든 것은 필연을 통해 강요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폭력 사용이 비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폭력의 상태에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뷔히너의 미학적 현재성을 그의 정치적 현재성과 분리할 결심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역사에 의해서 놓치게 된 두 독일인의 만남을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뷔히너와 그보다 불과 몇 년 젊은 마르크스의 만남 말입니다. 「헤센 급전」의 힘에 넘치고 그렇게나 민속적이며 물질의 정의에 넘치는 언어는 의심할 여지없이 “공산당선언”만큼이나 영향력 넘치는 정치적 문서입니다.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뷔히너의 꿈같은 확신은 「급전」에서부터 중단 없이 바로 그의 극작품들, 산문, 편지들에 이입됩니다. 시인이자 자연과학자요 동시에 정치적 작가였던 뷔히너가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꿈같은 확신에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많은 오류와 우회를 문학에 관한 한 면할 수 있을 기회, 그리고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작가들의 고뇌를 탕감할 기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실제 역사에서는 놓쳐버린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사후에 성사시키게 될 수 있을지, 그러니까 오늘 날 실행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주의적 미학을, 어쨌거나 마르크스의 동시대인이었고 결코 그의 나쁜 동지가 아니었을 뷔히너의 물질의 정의와 대질시키는 것 말입니다. 뷔히너의 작품과 또한 그가 작품에 대하 언급한 모든 글에는 몰인정도 그 반대도 들어있지 않고, 오직 물질의 정의에 대한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당통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사실 경악했던 가족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맙소사 젊은 여자들의 독서를 위해 창작된 것이 아니어요, 그리고 만일 저의 드라마가 그런 데에 적합하지 않다 해도 불쾌히 여길 것도 없답니다. 저는 당통이란 사람과 그 혁명의 도당들에게서 덕행의 영웅들을 만들 수는 없어요……. 그가 그러한 소재를 선택한 것을 두고 날 비난하려면 하래지요. 그런 항변은 벌써 반박되었어요. 그 항변이 타당하다 하려면, 문학작품 중 정말 위대한 대작들이 비난되어야 하겠지요. 작가는 도덕교사가 아닙니다. 작가는 인물들을 창안하고 창조하지요. 작가는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역사를 학습해야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 속에는 너무도 많은 부도덕한 일들이 서술되고 있으니까요. 또 눈을 아예 동여매고 골목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랬다가는 추잡한 짓거리들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신에게 비명을 질러야 할 것이에요, 세상엔 너무도 많은 방탕한 짓거리들이 일어나니까요. 그런데요, 만일 누가 저에게 작가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서는 안 되고 어떠해야 마땅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면, 전 이렇게 대답하겠어요, 나는 세상을 신보다 더 좋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신은 이 세상을 틀림없이 어떠해야 마땅한가 그대로 만드셨을 것이라고.”

신사 숙녀 여러분, 게오르크 뷔히너의 이름은 제게 저의 감사말씀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의무를 지워줍니다. 동시대 동지의 소란한 변두리에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확신은 부서지기 쉽고, 자기 확신이란 불가능한 그런 입장, 비판적인 것이 격분으로 오해되어 울릴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말하라고 합니다. 마치 비판도 자신을 거기에 함께 관련시키는 제안을 포함하지 않은 듯이 말입니다. 뷔히너의 생애와 작품에는 몇몇 현재성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의 편지 왕래 특히 구츠코와의 편지 왕래에서 묘사되었던 망명의 문제, 그리고 「보이첵」에서 표현되듯이 그의 다른 작품 어느 것만 못하지 않은 뷔히너의 의사로서의 현재성 말입니다.

제가 다만 암시적으로나마 뷔히너 또는 당통이라면, 이러한 연설을 생략해도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라끄르와는 당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름 그 자체로다. 그는 나서서 연설을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단두대에 서려는구먼.” 그리고 빌헬름 뷔히너5)에게 쓴 편지에서 뷔히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내 자신 매우 만족하고 있다, 장마 비나 북서풍이 불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럴 때면 난 사실 저녁에 잠자리 들기에 앞서 발에 양말 한 쪽이 걸려있으면 그 순간 방문에 목을 매달고 싶어 하는 그런 부류에 속하게 되는구나, 다른 한 쪽마저 벗을 일이 너무 너무 피곤하니까 말이다.” 그로써 뷔히너가 공공연히 그렇게 지냈던 게으름의 장을 넘어서 그의 유머라는 거대한 장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머는 그토록 난폭하고 또 그토록 부드러울 수 있으며, 그가 그것을 잃었을 때조차 틀림없이 여전히 현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취리히에서 엘사스의 친구 뵈켈에게서 편지를 받았던 경우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 편지 중 일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에서 나는 매우 잘 지낸다네, 자네가 생각하는 절반만큼도 나쁘지는 않다는 말일세…….”

(하인리히 뵐: 번역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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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두막에 평화를! 궁정에는 전쟁을!”이라는 유명한 대목은 1834년 7월자 『헤센 급전. 최초의 전령』에 인쇄되었다. 이를 배포하다가 붙잡힌 대학생 미니게로데에 관한 기록이 1834년 10월 15일자 카셀의 내무부 문서에 나온다. http://www.digitales-archiv.net 2004-4-15

2) 베노 오네조르크는 이란의 팔레비국왕 방문 반대 시위 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1967.6.2.)

3) 비상사태법 추진 반대투쟁에서 서독 국민들에게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을 선동하고 나선 것은 예컨대 마르틴 니묄러목사를 들 수 있다.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의 이유는 당시 현실화된 기민·기사연과 사민당 간의 대연정(大聯政)은 “히틀러가 무색할 정도”의 독재체제로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4) 1967년 4월에 있었던 아데나워 수상의 장례를 말한다.

5) 뷔히너의 아우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4. 4. 1. 21:12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솔출판사 1088면, 1296그램


한국의 독어독문학계에서 개별 작가의 연구로 깊이를 더해서 “한국카프카학회”가 구성된 것은 카프카 탄생 100주년 기념인 1983년이었고, 이듬해부터 학회지 『카프카연구』가 발행되었다. 이후 카프카학회의 최우선 과제로 전집번역이 추진되었다.


총 10권으로 계획된 전집 중에서, 원래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한《카프카의 편지 1900~1924》는 한국에서 초역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카프카의 작품들과 연인 또는 약혼자에게의 편지들이 이미 번역되어 있는 것을 최종적으로 완역한다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수신인들은 주로 글쓰는 친구들과 출판 관계 지인들로, 번역의 난관은 이 실존인물들을 파악한 이후에야 한글의 단계별 경칭과 어투를 정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원전은 문우였던 막스 브로트가 펴낸 《프란츠 카프카. 편지 1902~1924》였는데, 1999년 『카프카의 편지 I』비판본이 출판되었다. 완전한 원전은 번역에 커다란 고무가 될 것이었으나, I 권은 1912년까지의 편지만을 포함했고, 나머지 네 권의 출판은 요원했다. 더구나 완전히 새로운 편집으로 인해서 한창 진행 중이던 번역의 체제를 흔드는 일이 되었다. 그밖에 영문판은 브로트판과 날자확인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번역의 원전은 셋으로 늘어났고, 총 2000페이지를 육박했다. 번역 원고는 80만 글자를 넘어갔다. 


그렇게 해서 여기에 번역된 카프카의 편지들은 620여 통에, 수신인은 50명을 웃돈다. 비판본이 포함하고 있는 1912년까지는 비판본을, 그 이후 1913년부터는 브로트판을 기준으로 번역에 임했고, 심지어는 영문판에서 그 일부 혹은 전체를 번역하는 경우도 생겼다.


기본적으로 독일어 번역에 도움을 준 것은 성균관대의 로스바흐 교수(전남대학의 동료였고, 함께 책을 낼 정도로 형제처럼 일한다), 체코어 발음은 프라하와 뉴욕에서 각각 체코어 사전들을 구해다 외래어 표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그런 체코어 고유명사들을 한글로 손수 적어준 체코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야로슬라흐 바린까 선생님은 2001년 현재 한국에서 국제학술진흥원의 협력으로 세종대왕 등 우리역사를 공부하는 중이었고, 그 일을 기쁨으로 해주었다.


수신인은 오누이들을 포함한 가족 또는 직장과 출판관련 인사들에게 보내는 몇 장의 편지를 제외하면,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대부분이다. 일상의 단순한 편지왕래라기 보다는 글쓰는 일에 대한 논의요, 실제 쓰는 연습을 포함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연인들에 가려져 잊혀진 첫사랑 헤트비히 바일러와의 교제, 그 외에도 꾸준히 편지왕래를 계속한 여자들과의 관계도 알게 된다. 환자로서 요양소에서 알게 되어 마지막을 동반한 젊은 로베르트 클롭슈톡과의 독특한 우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무엇보다 막스 브로트의 경우, 1902년 만난 두 사람은 2년 후부터 편지왕래를 시작했고, 그것은 1924년 카프카의 생애 마지막까지 20년간 계속되었으니, 250여 통의 편지로 남은 우정을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제목《행복한 불행한 이에게》는 카프카가 브로트에 보낸 편지의 일절에서 중에서 골랐다.


하나의 위안은, 카프카의 편지들은 편지들이 줄 수 있을 단순히 정보가 아닌 심오한 감정이입을 동반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기대이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이런 편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인가? “서신으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서신이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해변 가에 철렁거리는 바닷물과 같은 것이오.”라고 탄식하는 사람... 바로 그곳에 자연인 카프카가 숨쉬고 있으리라.


무수한 도움을 받으면서도 번역에 4년 출판에 2년이 걸린 세월이 보람으로 마무리되길 바란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의 난해함이 이 편지들을 읽음으로써 이해의 첩경이 될 수 있다면, 역자로서 초역으로 인한 오류들을 걱정하면서도 그 의미에 마음을 둘 수 있은 까닭이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9. 8. 31. 23:00
 

한국문화사 1999.8.31.


 

길고도 생소한 제목이 어리둥절한가요? 이 책은 DAAD(독일학술교류처) 파견으로  우리대학에서 88-93년 동안 객원교수로 계셨던 로스바흐 Rossbach 선생님과의 공동 저작이랍니다. "낭만주의" 에 대한 안이한 인상을 불식하고, 어떠한 문학작품도 언어학적인 접근을  일차적으로 시도해야 하는  필요성을 직접 체험하게 할  목적으로 구상 되었지요. 
하필 선정된 작품이 독문학사에서 "유령의  호프만" 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에.테.아. 호프만이냐구요? 왜 하필 모래귀신 Der Sandmann  이냐구요? 글쎄, 여기에서는 서론과 개요만을 소개합니다.  대답은 직접 책에서.......
 


서론: 서술 텍스트 이론 


이 책은 새로운 시도이다. 텍스트 해설이자 교과서인 것이다. 텍스트 해설로서는 특히 한국인 독자들을 겨냥한다.  교과서로서는 텍스트 언어학적 근간에서의 화술적 텍스트의 분석에 대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분석 대상인 소설에  대한 이상의 것을 다룰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독문학의 가장 어둡고 환상적인 텍스트 중 하나라 할  이  작품의 구조에 대한 통찰 뿐만 아니라, 서술 텍스트의 구조법칙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는 하나의 텍스트에 관한 지식 만이 아 닌, 다른 텍스트들과 관련해서 전용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되리라.  

해설의 특이점은 무엇보다 그 물샐틈없는 완벽함과 조직성이다. 완벽함이란 문장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설에서 드러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난점들을, 즉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독자가 정복해야 할 모든 난점들을   다룬다. 그러나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의 중급수준의 독일어 지식을 전제로 한다.

 

해설의 체계는 항시 반복되는 순서에 의하되, 다음의 정보를 제공한다:  사전적 - 문장론적   - 서술적 (문장들을 포괄 하는)  각 문장마다 우선 특이한 단어들과 관용어법들을 찾는다.  단어의 설명은 때때로 일반적인 의미와 텍스트 내의  특정 의미를 포함하며, 독일어와 한국어로 의역한다. 실망스런 사전적 설명작업은 배제한다. 사전적 설명에 이어  문장론적 언급이 이어진다. 이 경우 길고 복잡한 문장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단어 하나 하나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항상  경고된다. 그 대신 문장들은 우선 그 핵으로 단축된다. 그 다음 한 걸음 한 걸음씩 구축되어 가며 독창적 복잡성을 넘어간다. 도표 제시는 문장들의 거시적 구조(대강의 구조)를 통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들의 문장론적 설명을 위해서 우리는 전통 문법의 이론과 용어들을 사용한다. 전통문법의 이점은 이것이 모든  분석의 길로 통하는 것이다. 즉 ― 단계적으로 ―- 복잡한 전체에서 전체의 성분으로 가는 길 말이다. 다음에는 발화의 논리라는 전통문법이 따른다:  주어 내지 주어부는 발화의 대상을 지칭하고, 술어는 이 대상에 진술을 부가한다.  오늘날 성행하는  전통적 주어-술어-문법(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 사이의 대립은 두 문법모델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충한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 N. Chomsky 또한 그의 다른 면에서  전통적 분석체계에 이 의존의 개념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의 장점들을 통합하고 있는 아주  손쉬운 문법모델은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문장론적 해설의 목적, 즉 복잡한 문학텍스트의 문장들의 거시구조를 통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또한 도표로서도),  전통적 용어들의 도움으로 가장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시 구조적 설명(예를 들어 원자가 제시)은  포기한다. 이것은 매우 유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해설 분량은 이미 문제가 될 정도이므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작업에서 문장문법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은 기대할 것이 없다. 이 영역에서는 이해력의 도움을  제시하는 것이지,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은 화술적 텍스트구조를 위한 정보들을 포함한 세 번째 분석  범주에 들어있다.


이 분석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은 마부르크 Marburg 대학 일반 언어학 및 독일 언어학 전공학과에서 십여년 이상 수행되어 온 "화술적 텍스트 분석"에 관한 연구들이다. 우선 서술(Erza"hlen) 또는 더  상세하게 서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서술은 일어난 사건의 재생이자, 수신자를 고려한 시점적 재생이다. 이 정의는 세 요소를 지니고 있다:  

            - 서술자 (= 화자) 

            - 사건

            - 수신자

  
 마부르크 팀의 서술적 텍스트 분석(Narrativik = 서술텍스트의 분석)연구의 관심은 모든 서술텍스트의 중심을  형성하는 서술자에 둔다. 서술자의 포괄적 활동 ( 사건의 언어화) 은 다음과 같은 부분 활동들로 분류될 수 있다:

            - 선택 (무엇을 서술하고 무엇을 서술하지 않을 것인가?)

            - 배열 (무엇을 먼저 서술하고, 무엇을 그 다음에, 무엇을 마지막에 서 술할 것인가?)

            - 시점 선택 ( 복합적 시점 대 단일 시점

            - 해설,주석 및 평가 여부


서술자는 이야기하는 "목소리"이다 (프랑스인 Narrativik학자 Ge'rard Genette 의 "La voix" 범주에 든다).그러나 그는 텍스트-의미의 원천이다. 서술자를 기술하는 것, 서술자를 그 특성에서 확정짓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이 서술자에 대하여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관념은 이 책에서 설명되고 사용될 것이다.  물론 한정 없이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제한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전면에는 서술이론이 아닌 서술분석이 자리한다. 이 중점은 이 다음에 계획하고 있는 책에서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론이 전면에  놓이고 구체적 분석은 예로서 배경에 놓이게 된다. 이 책의 모든 텍스트 기술의 출발점은 텍스트 내재적 화자이다. 이 화자(Narrator)는 작가(Autor)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작가는 실재의 신분을 지니며, 외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화자는 허구의 신분을 지니며, 내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도표로 보자면 : 


 작가의 입장에서 보아 모든 (또는 대부분의) 서술된 사실들은 '창안된' 것이다.


이것은 이 경우 결코 작가인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닌, 오직 텍스트 내재 적 (= 허구적) 서술자만이 나타나엘을 그의   "친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결말에 가서 클라라가 어찌 되었는지를 들었노라고 주장하는 것은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니라, 그만큼 애매하게 정보를 받은 서술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요약하면:


 허구적 서술자는 허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작가에 의해 창안된 것이다. 허구의 내적 세계와  사실의 외적 세계 사이를 통제없이 넘나드는 일은 이 해설에서 방지할 것이다.


물론 텍스트 내적 현상을 텍스트 외적사건들과 상관시키는 것도 적법하다. 예를 들어 전기적, 역사적 또는 사회학적 사실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그러한 정보들을 취급하게 될 네 번째 분석 범주 ― [I] 해설: 그런 종류의 정보들을 수용하게 될 ― 를 예견했었다. 그렇지만 해설들을 네 개의 다른 분석 범주 ― [L] 사전적, [S] 문장론적, [N] 서술 구조적, [I] 해설적 정보들 ―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너무 일목요연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네 번째 분석 범주의 정보들은 세 번째 범주에 수용하였다: [N]은 이제 우선 문장들을 통괄하는 성향의 텍스트 내재적 정보들, 예를들어 모티브의 회귀 (주도모티브) 같은 것을 포함하며, 다음으로는 문화사적 성향의 텍스트 외적 정보들을 포함한다. 이 외부의 포착은 원천적인 텍스트접근적 분석에 논리적 모순을 낳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외관상 그러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맥락(Kontext: 어원적으로는 "통합적 텍스트"라는뜻)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한 텍스트가 적확하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Cagliostro" 또는 "Chodowiecki"라는 이름이 기지의 것으로 전제되거나, 또는 연금술 실험자에 대한 암시를 포함할 때를 이른다. 그러나 문화사적 지식은 텍스트가 이것을 분명히 전제로 할 때에 한해서 전달된다. (문학적) 텍스트를 (문학 외적) 맥락과 연결함에 있어서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난제들은 당장 여기에서 논의될 수는 없고, 그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사안에만, 즉 텍스트 안에 머물기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래귀신」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를 수단으로 해서 해석하려는 유혹도 거부한다. 특히 대중적인 것은 소설 주인공의 행동을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첫째 프로이트 자신이 이 소설에 대해 언급했고, 둘째 소설 주인공 나타나엘의 이상한 행동은 심리분석적 소설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2차문헌의 제목을 보자:


 Ingrid Eichinger: E.T.A. Hoffmanns Novelle "Der Sandmann" und die Interpretation Freuds.  In: Zeitschrift fu"r  deutsche Philologie 95 (Sonderheft E.T.A. Hoffmann 1976), S. 113-132

   

이것은 그와 관련된 인식의 소득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함을 예견케 해준다: 왜냐하면우리는 하나의 해석 대상  텍스트 대신에 두 개의 텍스트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가아니라,  프로이트를 끌어대고 있는 모든 텍스트들과 프로이트에게 비판적인 모든 글들 또한 동시에 접근되 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끝없는 해석논쟁이 열리게   될  것 이다. ― 그 대신 이 소설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고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충실하게 따를 것이다.


텍스트는 구조의 원칙에 따라 통찰되어야 한다 어떠한 수법으로 그렇게 하는가는 이 서문에서 설명될 수도 또는  설명해야 할필요도 없다. 앞으로의 분석이 이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줄 것이다. 문장 하나 하나에 관련된 상세한  텍스트의 설명이 곧 이 책이 학습자들에게 제공하려는 유일한 이해에의 도움이 아니다. 그 밖의 도움으로는: 소설  제목의 충분한 설명, 개관 및 중점적 내용 설명을 부가한 텍스트의 상세한 분류, 전체 소설의 보조번역, 일련의 도표  및 그래픽 등이 있다. 우리는 이 책이 한 복잡한 텍스트의 미로에서 독자에게 신뢰할 만한 안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독서의 <대상으로서는 외국어로서의 독일어(외국에서의 독어독문학) 중급과정의 학생들을고려하고 있으며,  이 분석은 그러나 그 방대한 외연으로 인하여 교육자 및 호프만 전공자들에게도 여기 저기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독자를 기다리는 것은 모험이다. 모험 중에는 때로 고생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으리라. 



 0.1 개요


독일의 어린이들에게는 "모래아저씨(Sandmann)"의 모습이 대체로 "모래아찌(Sand- ma"nnchen)"라는 축소형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아찌는 밤이면 어린이들에게 눈에 모래를 뿌려 줌으로써 아이들이 피곤을 느끼고 잠이 들 수 있게  해주는 동화의 인물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침이면 눈에서 "모래"를 부벼낸다.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밤새 그가   왔었다는 증거가 된다. 작은 키에 빨간 뾰쪽 모자를 쓰고 등에는 모래 자루를 지고 있는 모습의 모래아찌는 정말 귀엽다. 그렇지만 나타나엘(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그는 마성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한 노파가 그에게 얘기해 주기를,  모래아찌는 착하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밤새 눈을 훔쳐 가는 무서운 귀신같은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타나엘을 숙명적 공포로 내몰고, 마침내는 대 재난을 초래한다. 

눈-모티브는 "Sandmann"이라는 인물 내지는 소설의 제목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사랑스러운 동화에서는 아이의 눈이  감기기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늙은 유모의 변종 이야기에서는 영원한 실명이 위협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눈-모티브를 상세히 취급한다.  왜냐하면 전체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눈의 상실에 대한  나타나엘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줄거리: 


나타나엘의 유년 시절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유모의 말에 따르면 모래귀신은 잠을 자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시력을 앗아간다. 부모님은 어떤 날 저녁이면 변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화급히 아이들을 잠자리로 보내면서  말한다: "모래귀신이 온단다". 그런 다음 실제로 나타나엘은 불길한 형상이 층계를 쿵쿵거리며 올라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아버지의 방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타나엘은 호기심에 못 이겨 숨을 곳을 찾아 들어서, 모래귀신이란  다름 아닌 음침한 변호사 코펠리우스임을 알게 된다. 나타나엘은 발각되고, 모래귀신/코펠리우스는 그를 붙잡아 눈알을  뽑으려 한다. 아버지는 간청해서 그 자를 만류한다. ―코펠리우스는 잠적했다가 일년쯤  지나서 다시 그 도시로 돌아온다.  다시금 그자의 발자국 소리가 층계를 쿵쿵거린다. 한밤 중 폭발 소리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아버지는 바닥에 숨져 있다. 코펠리우스는 사라졌다. 아이는 그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년이 흘러 나타나엘은 그 사이 약혼도 하고 G.시에서 대학에 다닌다. 어느 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한 행상이   ― 그는 코폴라라는 이름이다 ― 그에게 물건들을 권한다.   나타나엘은 그가 코펠리우스 (= 모래     귀신 )라고 믿게  된다. 그는 놀라고 혼란에 빠진다. 뭔가 도움을 구하는 심정에서 그는 고향에 편지를 쓴다. 그의 약혼자 클라라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그 숙명적인 코폴라는 그에게 아무런 힘이 없으며, 모든 경악은 다만 그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클라라의 논리는 완전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타나엘은 실제로 안심하지 못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귀향한다. 모두가 포옹한다. 그러나 이견들이 고조되면서 그들의 행복을 흐려 놓는다.  환상가 나타나엘과 냉정한 인간 클라라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극심한 갈등이 초래된다. 나타나엘은 클라라를   "생명 없는 저주받을 자동인형"이라고 욕한다. 클라라의 오빠는 분통해 하고,  결투가 예고되지만, 결국에는 화해가  이루어진다.  


나타나엘은 대학 도시로 돌아온다. 그 동안 그의 숙소에 화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물리학 교수인 스팔란짜니 댁   건너편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 창문 너머로 그는 올림피아를 바라본다. 그때 다시 코폴라가 찾아와 그에게 망원경을  판다. 망원경을 통해서 바라보는 동안 그는 올림피아의 미에 굴복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무도회에서 그녀와 춤추게  된다. 스팔란짜니는 그들의 약혼까지를 승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팔란짜니와 코폴라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의 놀라움이 그토록 큰 것이다. 증류기, 병, 플라스크들 사이에서 그들은 텅 빈 검은 동공을 지닌 생명없는 인형  올림피아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스팔란짜니는 올림피아의 눈을 집어 나타나엘에게 뿌렸고, 그는 곧 광증에 빠진다.   (올림피아가 자동인형이었음이 밝혀진 뒤 소위 지성인들로 구성된 차 모임의 실태는 가관이다. 본문 355의 차 모임  에피소드 참조)


나타나엘이 깨어났을 때 과거의 공포는 극복되었다. 두 약혼자, 처남이 될 로타르, 그리고 어머니는 행복하게 화합한다.  그 무렵 두 사람은 정오쯤에 탑에 오른다. 먼 곳을 바라보다가, 클라라는 작은 회색의 수풀이 그들을 향해 움직여 오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 말에 나타나엘은 망원경을 꺼내  드는데, 시야를 클라라가 가리고 있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광증에 빠져, 소리치고 날뛰며 클라라를 아래로 내던지려 한다. 로타르가 급히 달려가 그녀를 구한다. 아래 군상들  사이에 코펠리우스가 서있고, 그는 나타나엘을 유혹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타나엘은 뛰어내린다. 


이제 상당히 긴 본론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4. 2. 23. 00:00

도서출판 삼문 1994.2.1



어떤 사람들이 마약중독 또는 일중독에 걸리듯이 빵중독에 걸린 소년의 체험에서 비롯된 젊은이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원제는 하인리히 뵐의 1955년 작

 "지난 시절의 빵 (Das Brot  der frühen Jahre)",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종전 후 기아와 궁핍의 시절의 빵을 가리킨다. 빵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성사적 의미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는 인간성의 척도가  된다. 궁핍의 시절,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 준 빵과 그렇지 않고 부의 축적을 위해서 모아둔 빵의 의미는 그렇지 않아도 흑백논리를 비판 받는 작가의 눈에는 선악의 기준이 된다.


이야기는 어느 월요일 아침, "담요를 머리 위까지 푹 끌어 덮고만 싶었던" 주인공 젊은이가  집에서 속달편지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홀로 도시로 나와 살게 된 일곱 해 동안에" 어머니의 사망통지, 아버지가 다리 부 러진 사고 때나 받던 속달편지에 놀란  주인공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약간은 성가신 부탁을 발견한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마중을 나가거라!"

이렇게 역으로 마중을 나가게 된 그가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자동세탁기의 수선과 정비를 담당하고 있는, 손에 적당한 일 값을 지닌, 나름대로 장래가 순탄한 젊은이. 1955년 현재 수입과 자동차를 가진 기술직 젊은이가 되기까지 ㅡ 그는 배고픈 숱한 기억들을 가지고 자랐다. 가장 끔찍한 기억은 고교 교사인 아버지의 고결성을 담보로 담임인 빵집 아들을 핑계로 빵집 가게에 "우연인 척" 들리자고 졸랐던 일이었다. 아들의 낙제점수에 빵집 주인이 화를 내고서 문을 닫아 버리기 전까지, 아버지는 배고픈 아들을 위해서 그 일을 감수했었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아버지의 책들을 내다가 빵과 바꾸는 아들을 위해서 책들을  "직접" 골라준 아버지 ---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아들의 "빵중독"은 가라 앉지 않았다. 그것은 배고픔 자체보다는 중독성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막 다 잡은 행운들을 물리치고, 게다가 그는 사장의 딸과 공공연한 약혼
 사이었다. 겨우 탄 이 "순탄한"  인생이라는 기차---  그러던 그가 갑자기, 어느 월요일,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하차를 결심한다. 왜? 어디로? 

 "나는 내가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후퇴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느 방향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무튼 후퇴하고자 했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후퇴: 한 소녀와의 예기치 못했던 사랑의 격정은 지금가지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매어있던

            가치들의 무의미성을 일순간 인식케 한다. 복고적 자본주의와 패덕의 윤리라는 현실로

            부터 하차를 감행한 그의 새로운 인생은 기존문화에 대한 퇴행적 반대기투와 더불어

            제시된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가?

            이것이 작가 하인리히 뵐, 주인공과 함께 우리가 언젠가는 생각해야 할 하나의 명제로

            남는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1. 5. 15. 23:30

Der Mauerspringer 
<장벽을 넘는 사람> -
페터 슈나이더Peter Schneider(1940~  ) 원작,
들불 1991


                        

는 문학의 사망이 공공연히 고지되었던 1968년, 베를린 대학 연좌데모에서 유창한

    연설로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다. 슈나이더는 문학사에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저

    유명한 연설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 한 토막:
 
 

 
 
우리는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우리는 순응했지요. 적응력이 있었구말구요.
 그리고 우리는 과격하지를  못했습니다. […] 우리는 대학인이라는 특권을 누려왔습
 니다.  […]  학업을 시작했고, 필수과목 강좌에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 ]  



   이 연설에서 그가 속죄하는 것은 대학인이라는 현존 자체였다. 시간소모에 불과했던 세미나, 복종을

  강요당했던 시험 공부들이 비판되었다. 그의 눈에는 거리에는 사람간의 진정한 왕래도, 의견교환도

  없고, 집에는 사람들 대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가구들이 버티고 산다. TV는 이 가구들이 진실하다고

  외쳐대기 위해서 존재한다. 기존의 예술은 무용지물이다. 상상력의 천재들이 그들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기존의 예술, 또는 작가의 상상력과 꿈들이 자존에 의해 잠식 당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 참상을 그리는 데 그친 사실주의자들, 그 어느 것도 "인간적 소망을 자본주의로부터 보호하려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보쉬공장의 보조노동자로 일했다.


  이 경험은 세계적 대기업의 작업환경의 의외적인 열악성, 콘베이어 벨트의 리듬에 종속되는 인간의

  문제, 도급수당제의 살인적 노동력 착취의 관행 등에 대한 폭로적 글들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체류가 준 경험 --- 독일 운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대한 인식 등이 반영된 작품

 
『렌츠 Lenz』(1973)로서 문단에 복귀했다. 이어서 『자칫하면 빨갱이』로 번역된 .....

   schon bist du 
ein Verfassungsfeind (1975)등의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
『장벽을 넘는 사람 』에서는 "머리 속의 장벽"을 경고했다.

 

          장벽을 넘는 사람  Der Mauerspringer             

   이 작품은 그가 문학으로 복귀한지 10년이 흐른 1983년 작이다.
 
   베를린 장벽을 적법하게 통과하면서 동쪽의 친구를 가진 주인공 과 그 동쪽  친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장벽에 얽힌" 이야기들을 뼈대로 하고 있다.  "샴의 쌍둥이" 도시

   베를린에서는, 우리에게는 놀랍게도 적법한 절차의 통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1970년대 브란트수상의 동방정책에 의한

   <독독기본
협정> 이후  다시 적법한 통행의 길이 열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상적인

   통로를 두고서도 "장벽을 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질문은 남겨두는 것이

  쫗을 것이다.  소설 읽기의 재미를 미리 빼앗지 않고  싶지는 않으니까.

  족:                                                                                                                     
         필자가 1992년 베를린 도착 이튿날 방문한 곳은 바로 이미 무너진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훼였다. 장벽에 남아있는 그림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물론 
『장벽을 넘는 사람 』의 표지를 그린 그림이었다. ( 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물론 그 일부는 사진으로 구할
수 있었다.

        
우리 독문과 과실에 걸어둔 그 중 하나의
        사진은 담장을 헐어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담고 있다:

          
    ~~ 아직도 허물어내야 할 벽들이 많이 있다.
                     Es gibt noch viele Mauern, abzubauen. ~~


▲ 1992년 가을 필자 촬영. 베를린 장벽 잔훼에 남아있는그림들은 분단 당시의 염원들을 보여주고 있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9. 5. 20. 14:54


한신문화사 1989. 5.20.


전후 독일문학 세계문단에 끌어올린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자 전후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1917-1985)의 방대한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섭렵한 입문서. 아직은 학문의 깊이보다는 넓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생들에게  안내서가 되기를 바라며, 그 차례를 소개합니다
.

  1. 개괄 및 연구방향
 
  2. 앙가즈망
 
     1) 시간적 현재성           2) 공간적 연대감

  3. 인도주의 미학  
     1) 언어의 도덕성           2) 인간의 존엄성           3) 문학의 자유와 한계

  4. 전쟁과 개인
     1) 전쟁의 무의미    
                  전후 단편들/ 『기차는 정확했다』/ 『아담아, 네 어디 있었더냐?』
     2) 평등의 허위
                  50년대 풍자적 단편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빵』
     3) 과거의 부담  
                 『돌보는 이 없는 집』/ 『아홉시 반의 당구』

  5. 현실과 이상사회
     1) 사회로부터의 탈영    
                 『어릿광대의 견해』/『부대 이탈』/ 『마지막 군복무』
     2) 이상사회의 싹  
                 『문둥병』 /『여인과 군상』
    
     3) 어떤 사회주의  
                 『카타리나 블룸의 실추된 명예』/ 『국민의 성향 보고』/
                『보호라는 이름의 포위』/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6. 요약과 정리       
       각주
       참고 문헌  
       연보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9. 5. 23:30

              문 둥 병 ................

    


   
이 작품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매우 예외적 장르인 극본 <Aussatz>로서,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던 독문과의  축제인 독문학제(1996)에 번역극으로서
   공연하기 위해서 급히 번역되었다.  1986.9.5. 전남대학교출판부

   
                        
 얼마나 급했던지 등장인물의  이름 중 Gerta를 Greta로 보고서
                         잘못 번역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그 이름이 시사적 이름(telling name)
                         으로서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암시하지만, 다행이도 이 경우는 그것을
                         면했기에, 부끄러운 가운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위안한다.)  


  
 하인리히 뵐은 방송극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지만, 첫 극본
 
  『 한 줌의 흙  Ein Stueck Erde 』(1961)은 초연에 실패했고, 이 두 번째

   극본인 이 작품은 그러나 아헨의  무대에서는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문둥병은 누구나 알 듯이 천형의 벌이라 간주되는 격리치료의 질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문둥병에 감염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인물을 위해서  사회가 빙자한 질병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

  이라서 격리가 필요한가? 성직자의 독신 계율을 구체적 소재로 다루는 이 작품은 사실

  평신도에게도 의무로 되어있는 정절의 덕행마저 이미 기만적인 현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혼인에 관한 "추상적 질서원칙"( 63년 작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참조!)에 대한 기만적 복종은 대기업주 부르의 <민주적> 작태에서 드러난다.

  아내에게 아내의 자유를 준 남편!  매우 민주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선행(?)은 그러나

  그의 성공적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 그는 자산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도 필요한 것이고, 또 가톨릭 신자로서의 평판을 위해서sms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임을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나 APO의 동조자인

  젊은 쿰페르트신부가 외치는 장면이다:
 
 
 
              
저는 다만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성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내연의 관계나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순결의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또한 이미 결혼 한
              사람들까지도  […] 순결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은 우리가 정말이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너그럽고, 죄악 자체에만 혹독하지요
  
  심지어 "신앙을 버리거나 여자를 보더라도 눈감아 줄" 여생의 성직 대신 "특권을 부여

  받고서 특권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일, 그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젊은 신부, 그리고 "포도주를 즐기고, 신학서보다는 소설 읽기를 즐기는, 그것도 최근의

  초현대적 소설을, 또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고 고백하면서도,  감히 "부랑자 신세"를 택하지 못하고 조금 타협하고 신학 안에 남아있

  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의  노 신부.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검역소에 억류된다. 젊은 신부의 자살이 '신원미상의

  문둥병자 사망'으로 둔갑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낌새>를 알아챈 형사 -- 그는

  시체에 접근했었으므로 잠정적 감염자로  분리된다 --, 죽은 신부의 <동쪽> 친구 --

  그는 신부의 동구행 잠적이라는 시나리오에 어울리도록 함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이자 대 부호의 아내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여자,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뛰쳐나온 주인공 쿰페르트신부 등이다. 이 특이한  문둥병

  아닌 문둥병의 치료 또는 해결은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둔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2. 25. 14:37

 

삼성출판사 1986.2.25


― 라인강변의 호화로운 별장지대를 무대로한 권력층 부유층 그러나 매우 서러운  여자들의  이야기 ―

이 작품은 1985년 여름에  타계한 하인리히 뵐에게는 그가  탈고하고 출판사에 넘긴 마지막 작품이다.


원제 Frauen vor Flusslandschaft


 "라인강의 기적"의 결과를 흠뻑 누리며 살고있는(?) 정치가 혹은 사업가의 아내들의 이야기


이런 여자들의 서러움과 고통이 무엇일까? 고통을 알기나 한가? 기껏해야 풍요의 권태가 주는 실존적 위기감 또는 잘해야 예술적 또는 정신적 일에 관계된 사치스러운 고민이겠지 …

그러나 그러한 기우는 첫 장면에서 사라진다. 이들의 고뇌는 보지 말아야 했던 것을 보았던, 듣지 말아야 했던 것을  들었던자의 매우 인간적 고통이다. 제 1장이 시작되면 라인강을 바라보는 별장 발코니에서 우수 속에 잠겨 일생을  회고하는 에리카 부플러가 등장한다. 그녀의 성공한 남편 헤르만, 그는 쿤트를 축으로 하는 정당의 기획자로서,  그의 두뇌 속에서   40년간의 연방독일의 정치가 요리되어 왔다. 이 정객들의 권모술수의 <연극>에 얽혀든 여인들은 일종의 배우들이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득표를 위한 행동이다, 그들은 체제의 긍정적 산물인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대신 공허한 내면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안신경증적인 상태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그 <연극>에서 이탈하면, 치유할 수 없는 우울이나 절망, 자살에 이른다. 종전 직후 옛 나치들이 민주주의자로 둔갑하여 정치의 일선에 뛰어들 무렵, 그들에 의해 영도되는 연방공화국의 땅 대신 차가운 라인강물을 택한 여인이 그런 경우이다. […]

그녀는 이 죽음을 통해서 당시 다섯 살 난 아들에게 결코 군복(유니폼)을 입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갔다. 그 아들은 당연히 군복무 거부자에 합류한다. 이 백작가문의 <빗나간> 황태자는 아버지의 칭호인 "백작"을 거부한다. "민주주의자 백작 ooo", 예컨대 이러한 불협화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야기는 호화판 요양소에 감금되어 살고 있는 정치가의 아내, 엘리자베트의 죽음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녀는 "결혼의 파기"와 더불어 정신병원에 유폐되어 있다. 남편 역시 쿤트 주변의 인물이다. 그는 한 귀족의 딸을 아내로 원했기에 그녀와 결혼했다. 당시, 아버지를 소련군에게 잃고 자신은 그들에게 겁탈당한 귀족의 딸은 매우 값진 액세서리였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다. 전쟁 말기  나치당 남작이었던 아버지는 극렬당원이던 누군가  - 작품 내에서 "피의  사냥개"라고만 불 린다 - 의 사주에 의해서 남자 아이들을 다 목매달고 자신도 목을 맨 애국적 군인들 중의 하나였고,  남겨진 딸 그녀의 처녀성은   "하등인간" 소련군의 겁탈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랑에 바쳐진 것이었다. 그녀는 그 디미트리를 평생 사랑했고, 남편은 오히려 그녀를 겁탈해야 했다. 그녀는 결국 출산은 거부했지만, 표밭을 모으는 연극에는 동참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피의 사냥개가 변성명해서 복권되어 나타났을 때, 그를 알아본 그녀는 자제심을 잃고 광기에 내맡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매력은 본의 정치사회를 깡그리 부정하는 듯한 비판의 안목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비판서가 아닌  문학작품을 읽는 독자는 예를 들면 제 4장의 에파의 독백에서 넋을 읽게 된다:


 

     에파:  […] 저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빨강이건 초록이건 배의 각등들 하나 없구나.

             정박 금지인 봐 .

             아마 여기 어느 곳엔가는 니벨룽겐의 보물이 발견될지도 모르지 ― 라인강 기슭으로

             떠밀려 올라와, 찌그러진 왕관들, 황금쪼가리가 라인의 강물과 자갈에 오랫동안

             씻겨서, 구르는 잔돌에 맞아, 뭔가 사육제의 휘장처럼 시달려서 […]

             오오, 크림힐트와 브룬힐트, 그대들의 팔찌들, 구르는 돌에 쇠잔하여 강의 해초들이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겠지, 아마 미국의 장갑차가 진압했을 대 놀란 어느 시민이 급히
             떼내서 내버린 나치의 
표장과 비슷하겠지. 거기 초록빛 수렁 속에서 사라져버렸을 모든 것들 ― 

 

바로 그것이다. 니벨룽겐의 흥망성쇠를 태고의 유산처럼 음미하다가 갑자기 섞이는 "미군 장갑차", 그리고 어느  놀란 시민이 황급히 떼서 내버린 나치의 표장  ― 이렇게 인류의 속성과 원죄적 약점에 대한 평이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찾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