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4. 12. 21. 12:01
2014 PEN 겨울 이야기 2 -  PEN광주 문학상 

 

수상자: 오인철 희걱작가, 김정희 시인

신설 올해의 작품상: 정태헌 수필가 

 

12월 12일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있었던 이 문학상 시상직을 주관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 하나:

신설된 올해의 작품상은 전 회장 김영관 교수(희곡작가)의 상금 출연으로 시작되어,

초대회장 김종 교수(시인, 화가)의 그름 출연까지 아름다운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프로그램:

 

 

 

 

 

 

 

 

  사진: 축사를 하는 강만 광주문협 회장, 오인철 김정희 정태헌 수상자들,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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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12. 21. 12:01

2014 PEN 겨울 행사가 이어졌다  - 『국제펜광주』 제12호 탄생

 

엄청 대단한 편집국장: 서연정 시인

표지 그림 : 김종

출판사: 디자인 감

 

시와 수필 46편 한영대역이 특징이다.

번역과 윤문은 주로 전남대학교 언어교육원 '원어민영어회화' 담당 선생님들이 맡았다.

특집으로는 고 범대순 시인 조명, 문순태 교수, 김종 교수, 박연성 대우교수의 글이 실렸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류명선 회장을 포함한 펜부산 회원 작품들.

 


 

 

 

 

 

 

 

2014. 10.18. 서구문화원, 편집회의

서연정 편집국장, 김정희 사무국장, 나, 박판석 부회장님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12. 21. 12:01

 

화학반응

 

널따란 침대 이쪽저쪽으로 링거 줄이 걸려있다. 훤한 낮 시간에 침대에 누워서 링거액을 맞고 있었을 노부부는 평범하고 유복한 노년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다르다면, 노인들의 안방이라고 하기에는 꽤 너른 공간에 가구 또한 세월을 묵힌 때가 없이 성글다.

영감님이 손님들을 맞아 안내하는데, 그 얼굴을 아내 쪽으로 향하면서는 입이 귀에 걸린다.

임자, 팔은 안 아프고? 여기 이종동생네 가족들, 또 고향에서도 모두 왔소!

…….

아내 쪽은 대답도 않는다.

임자, 괜찮으냐고?

그래도 대꾸가 없자 살그머니 아내의 몸을 흔든다.

자, 어디 이쪽으로 좀……. 친척분들 오셨는데 눈인사라도 좀…….

그제야 눈을 슬며시 뜬 아내는 느닷없는 하품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왜, 어디 소화가 안 되나?

할아버지의 극진한 보호를 받는 이 할머니는 어머니의 이종언니시다. 오늘 이 댁을 방문하게 된 건 순 억지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이 할머니의 고향사람 두 분을 터미널에서 어머니가 만나서 이리로 와야 하는 일인데, 내가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이다. 한번 안 올래? 혹시 올라올 일 없냐고!

자잘한 말씀을 별로 안 하시는 어머니가 모처럼 원하신 일이었다. 우리 금실이 그쪽 사람들 함께 성남에 내리면 엄마가 얼마나 수월할까. 금실이라고 부르시는 소리에 마음이 움찔했다. 그래, 핑계 만들지 말자!

나는 동행할 두 사람을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안내데스크 앞 9시! 어머니가 주시는 번호로 미리 전화를 걸어서, 무슨 접선마냥 내가 새파란 배낭을 지고 있기로 했다. 파란 배낭요, 아주 새파란!

성남 터미널엔 어머니가 미리 와 계셨다.

오시느라 애쓰셨네요, 새벽부터 나서셨겠네요!

아이고, 사돈양반, 제가 금월서 온 질부예요. 우리 어머님이 못 오신다고, 대신 자세히 만나보고 오라셔서.

첨 뵙는디, 선상님 모녀간 신세를 지네요잉. 지는 순창 매우리서 온…….

예, 뭐. 우선 간단히 식사들을…….

어머니가 반가운 전화를 받으셨나보다. 조금 싱글거리시며 택시가 아닌 주차장으로 향하신다.

아버지가 오셨다, 생각도 안 했는데. 인사 겸 함께 가시겠다는구나. 넌 집으로 바로 갈래?

대답 대신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아버지가 보였다. 한박사, 애썼구나. 자, 한박사가 옆에 타라!

판교 집은 부자들이면 찬란한 아파트에서 살리라고 무심코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깔끔하고 너른 주택이었다. 어색한 수인사를 마치고 여자들은 할머니의 침대 곁에, 아버지는 주인 할아버지를 따라 거실로 나가셨다. 나도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방에 남았다.

이 판교할머니는 어머니와 왕래는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한참 떨어진 나이도 그렇지만 어머니의 큰이모,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큰언니가 멀리 떨어진 담양이라는 곳으로 혼인을 했으니 그럴 밖에. 그 딸인 이 할머니는 거기서 자랐고 가까운 순창이라는 곳으로 시집을 갔고 한평생 무탈하게 거기서 살았었는데……. 그런데 어찌 보면 다 살고 나서 느닷없이 기이하게 이사를, 정확히는 엉뚱하게 신도시 판교에 새살림을 냈다고 하니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 간에 누구라도 다녀와서 속내나 알아두자고.

개가라고요? 개가는 무신!

그럼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아무리 혼자됐다지만. 자식들은 어떻게, 뭔 생각들을…….

첨엔 말들이 뒤숭숭했지라. 큰딸이 즈 어머니 모셔갈 사람 없으믄 막지 말고 내부두자 그랬다요. 가들도 거자 환갑 줄에 안겄제, 즈 자석들 치다꺼리에 심들 때 아녀라.

그렇다고 어머니를 팔자 고치라고…….

무슨 팔자를 고쳤다 그라요. 그냥 두 양반이 모타 산다요.

그래도 정식으로 모셔 갔으니까는.

허기는 나라도 늑발에 첫사랑이 손 내밀믄 따라 가겄소. 게다가 여 양반이 정신이 온전허들 못허잖소. 온전치 못헝께 판사아덜도 각시 눈치보니라 못 데리가고 딸들도 막상 친정 어메 못 데리가제. 그 참에 딱 허니…….

여기 사장님은 진작 혼자되셨던가요?

암만, 그짝도 상처허고 혼장께 가당체. 거그도 큰아덜은 공장인가 회산가 다 대물려 허고 둘짼가 셋짼가 또 뭐시냐 의사아덜도 있고 다 잘 되얐다요. 그래도 아부지가 첫사랑 아픈 양반 데리다 산다는디 먼 말 없었당께 효자들이제. 허기사 돈 있으믄 다 효자 받어라. 즈그도 홀아부지 모시다가 아부지가 아부지 돈으로 새 세상 산다는디 뭐시라 하겄소. 긍께 우리가 와보기를 잘 했소안. 솔직히 말혀서 고향서는 긴가민가 허는 사람들도 있었어라. 가문 말허는 사람들도 있고, 안 그러겄소? 다 묵은 밥에 코 빠친다고들도 허고.

이웃에서 일도 봐주고 오래 살아서 ‘참 형지간같이 살었어라’ 하는 매우리 할머니가 속내를 잘 안다고 하는 말에 다들 좀 어리둥절했다.

이야그가 길어라. 여그 김 사장님이 일 년에도 몇 번 씩은 그짝 고향에 들리고 그랬다요. 글다가 여 양반 소식을 듣고는 그냥 자석들한테부텀 상으를 혀갖고. 아, 요양병원 안 가고 여그로 왔응께, 우리가 한번은 꼭 봐야헝께. 글고 나보담은 올라올 수 있으먼 올라와서 함께 살자고 허는디 참. 여그 시방 일허넌 아짐은 낮에만 오고 밤엔 봐줄 사람이 없디야. 나도 자석들하고 상의를 혀야…….

영문도 모르고 들은 긴 이야기엔 첫사랑 소리만 있었지 내용은 없었다. 매우리 할머니로선 결혼 이후의 그쪽 생활만을 아는 때문이었으리라. 이른 저녁을 준비해 내놓고 부를 때까지 무슨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은지. 정작 마나님은 링거액이 끝나자 뽀얀 얼굴로 일어나더니 아장아장 화장실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고모님, 저예요. 순석이 각시, 금월 조합장 동생네 큰며느리라고요.

언니, 저 명순이, 박실이 이모네 명순이 모르겠어요?

…….

가늠이 안 되는 양 반응이 없자 순창서 온 할머니가 얼굴을 들이 밀었다.

지 성구어메라우, 매우리 사는 방촌댁, 성구어메.

성구…….

시상에. 성구어메를 모리면 진짜 암껏도 모리는구먼. 워쩌다가 이려.

콧잔등을 씰룩거리는 품이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저리 사람을 몰라본다면 치매라는 말이 맞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빤히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깨끗한 노인네가 그렇게 고약한 증상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더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자장가 같은 무슨 곡조를 흥얼거렸다, 콧소리로.

에고, 옛날에 금잔디가 다 뭐라냐…….

옛날에 금잔디는 저녁상에서도 여전했다. 노마님은 밥을 먹다 말고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곁에 앉은 영감님이 손을 잡아주면 잠시 그쳤다.

두 손들은 너른 그 집에 짐을 풀었다. 당일로 다녀가기엔 힘든 거리였으니까.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머니는 이종언니의 옛날이야기를 흘렸다.

소문이 나자마자 난리가 났었다 하더라고. 오죽하면 단김에 시집을 보내버렸을까. 학교 다니던 중에 그냥, 것도 산 너머 순창으로 보내버렸다더라고. 저 김 사장 어른이 그땐 볼품없는 집안에서, 아버지가 없음 다 그렇지 뭐, 무지 고생하고 살았다지 아마. 나이도 더 어리고.

첫사랑이 뼈아픈 이별로 끝났다고 해서 한 세월 다 살고서도 그게 유효할까요?

보고도 그러냐, 금실아. 정이 뭔지, 한번 진짜를 줘버리면 그 구멍이 평생 가는가 보다. 아버지가 불쑥 말하셨다.

상대가 잘 몰라도요? 치매든 아니든 어쨌든 잘 기억도 못하고……. 설마 죽어버린 뒤에도요?

거기까지야 알겠냐. 한박사가 연구해 보렴.

 

 

나머지 이야기는 연구가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서 얻어들은 파편들이다. 오후에 두 분이 나눈 이야기들의 조각을 맞춰 본다.

그렇지만 맘이 두 갭디다. 향연이 아프단 이야기 듣고는 내가 홀애비 된 게 천만다행이다 했으니 몹쓸 놈 아뇨?

그렇게까지야.

옛날에 금잔디는 잊을 수 없는 가락이요, 나한테는. 그 옛날, 단 한번 용소까지 함께 산길을 걸었던 날. 바위 위에 앉은 향연이 이상한 노래를 부릅디다. 북망산 수풀은 고요타 매기, 영웅호걸이 묻힌 곳, 흰 비석 두러서 적힌다 매기, 아 우리가 놀던 곳, 고운 새들은 집을 짓고 어쩌고. 나중에 알게 된 그 노래는 다른 가사던데. 한선생도 아시다시피.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내 희미한 옛 생각 지금 우리는 늙어지고 매기, 머린 백발이 다 되었네, 그렇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향연은 북망산 어쩌고 라고 불렀으니.

그건…….

예. 윤심덕이 그리 불렀답디다. 윤심덕도 매기도 죽고 없지만, 어쨌거나 향연은 살아 있잖았소. 고향 갈 때마다 바람결에 듣는, 들어 모아지는 향연의 소식, 소식들. 이른 나이에 시집갔지만 넉넉한 집안에서 아들 딸 잘 낳고 잘 길러서 성공들 하고……. 멀리서 부는 훈풍이거니 하다가도 아린 솔잎처럼 쑤셔댔다가. 그러다가 연전에 혼자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덜커덩했지요. 그래도 차마…….

차마.

내 가정을 되돌아보았지요. 속절없이 새로이 시작했던 인생. 아니 ‘새로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되지. 원래의 인생을 시작한 적도 없었으니까. 더 말이 안 되는 건, 원래의 인생이란 게 대체 뭐겠소? 수수하고 단단한 아내. 깐깐하게 키워낸 자녀들이 눈앞에 얼씬거렸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길다면 길고 단출하다면 단출한 인생이었소.

 

 

아니, 안되겠다. 정리를 삼인칭으로 해서 이야기에 객관성을 주자.

김 할아버지, 김덕숭의 고향 금월마을은 금강수란 이름의 못을 두고 뒷산이 반월형으로 되어 있어서 금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은 농가마을이었다. 인근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흘러 흘러 황해로 입수될 영산강이 제법 물길을 갖추기 시작한 평지에 있어 농사는 잘 되는 편이었다. 지금은 바로 담양 군청 옆에서 시작된 옛 24번 국도를 따라서 금월교까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제법 알려진 마을이었다.

그는 그 길에 메타세쿼이아가 심어진 것이 70년대였다고 기억한다. 그가 사십을 바라볼 때였으니까. 자라면서 나무 몸통은 회색빛에 모양새 또한 부자연스러운 삼각형 모습을 보면서는 왜 하필 이런 수종을 심었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해 가을 불그레한 갈색 단풍을 멀리서 보는 순간 숱 많은 붉은 머리카락의 그녀가 떠오르면서 메타세쿼이아는 어느덧 추억의 시발점이 되곤 했다. 이제 사람 열 길, 아니 스무 길도 넘어 보이는 나무 꼭대기를 보면서 푸른 봄에도 가을의 붉은 단풍 머리카락을 생각하곤 했다. 그의 나이 일흔도 훌쩍 넘어 대머리가 된 걸 아랑곳 않고. 아니, 그녀의 붉은 숱 많은 머리카락도 성긴 백발이 되었을 틀림없을 사실 따위는 그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다 이른 봄 잎겨드랑이 가지 끝에 달려 밑으로 늘어진 꽃에서 스무 남은 개의 수술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벌써 가을의 붉은 단풍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떠올리는 형국이었다.

그날도 한식날을 맞아 고향을 찾은 김 옹은 바람결에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 봄이지만 팔각정 경로당에 나앉은 어중간한 늙은이들의 잡담이었다.

금과 마나님이 치매기가 있다네.

여그 참봉 댁 손녀 말여?

엉, 부잣집 며느리되어 갔다가 인자는 판사님모친에 뭣이 부족혀서 참.

설마 그 고운네도 치매라던가.

일흔 넘어 고운네가 어딧당가. 옛 말이겄제.

무슨 소리. 한번 해병대믄 죽을 때꺼정 해병대고, 한번 미녀믄…….

죽을 때꺼정 미녀라 그건가.

그렁께 그것이…….

덕숭을 힐끗 거리며 분위기를 띄우는 양이 소싯적 동티를 나이 들어도 잊는 법이 없는 동네가 맞다. 한마디로 어떤 홀어미 자식과 풋사랑에 빠진 마을 부잣집 고녀생이 억지 혼인으로 산 너머 순창으로 시집을 가게 된 사연 말이다.

덕숭은 가슴을 쥐어 잡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향연이 혼자가 된 것도 모자라 치매에 걸렸다고?

그가 부르르 떨자 중늙은이 하나가 놀린다.

케미. 이건 케미다. 야, 케미에는 나이가 없소 그랴.

케미? 그거이 뭔 소리?

케미도 몰르요, 이 양반들. 나이 묵는다고 테레비도 헛것으로 보남.

긍께 거이 뭐냐고!

그거이 우리말로 하믄 화학이라고, 우들도 농업학교에서 화학이 뭔가는 배웠제. 아니 화학비료다 그라믄 알지 않남.

화학비료 말이 여그서 왜 나와?

화학이라는 것이, 가만있자, 학교에서 말하는 것 말고, 여그 있네, 우리 김 사장 형님 사업해온 것 있잖은가, 화학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을 죄다 화학물질이라고 하잖던가.

화학물질 그런 것이 여그서 왜 나오냐고.

참도 급한 사람.

긍께 들어 보자고.

그 화학물질이 서로 붙으거나 떨어지는 - 아니 다시. 한 개 물질이란 놈이 다른 물질하고 작용을 혀서 생판 다른 물질로 변허는 것을 화학반응이라고 허는디.

허는디?

물질이 두 개가 만나믄 서로 파괴허거나 서로 결합혀서 어떤 다른 물질로 변허는디.

파괴허고 결합허고.

조용, 좀 들어 보장께.

요즘 애덜 말로 화학반응이라고 허면 남녀가 죽고 못 살게 붙어서 반응을 일으킨다 뭐 그런 것 말이라네. 케미는 화학이란 영어를 줄인 말인디, 어디 요새 애덜이 제대로 말들 허남.

자네랑 나랑 케미다 그라믄 동티났다 그 말이라고?

왜 자네를 거 갖다 붙이나. 좋게 내 첫사랑 찍어 말하제.

첫사랑 - 그 말에서 모두는 움찔거렸다.

덕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첫사랑이 요새 녀석들 말로 그 케미일 걸세. 화학적인 변화는 물리적 변화랑은 다르제.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 물리적 셈법이라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도로 하나 되는 것이 화학적 셈법이네. 나 그거 케미 할라네. 두고 보소들.

그러고서 덕숭은 서둘러 자녀들을 불렀다. 아들 셋에 고명딸. 큰놈은 화학물질 사업 마다않고 이어 받았고, 둘째는 명문대 나와서 행시 준비하다가 안 되긴 했어도 썩 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셋째는 지방 의과대학 나와서 의사다. 막내이자 고명딸은 사대를 나와서 선생을 작파했으니 아깝지만 오빠 친구랑 결혼해 잘 살고 있다. 이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선언을 했다.

아부지가 새로 첫사랑이랑 살고 싶구나.

첫사랑이라뇨?

느그 어무니 삼년상 지난 지도 한참 아니냐. 나 첫사랑이랑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구나. 아프단다. 아파도 좋다. 얼마가 될 지 몰라도 그렇게 할란다. 그리 알아라.

이구동성으로 놀라는 아이들 앞에서 흔들림 없이 말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래, 케미였다.

아이들은, 이제 아이들이 아니라 중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지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원래 자녀에게 부모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냥 부모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 늙으신 아버지에게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도 믿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시 그 비슷한 것이 옛날 옛날에 있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언제인가. 자녀들이란 그렇게만 생각한다.

그랬다, 덕숭은. 그 옛날 배밭 일 도우며 야간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한번 내동댕이쳐진 이래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살아왔다.

단기 4287년 - 1954년이겠으나 그때는 아직 서기를 쓰지 않았다 - 의 일이었다. 그의 나이 열여섯. 아버지는 사오 년 전 전쟁이 날 무렵 벌써 집에서 떠나갔다. 아버지가 떠나신 정확한 날도 알 수 없었다. 여름이 들어 부쩍 바빠지셨던 아버지를 볼 수 없는 날이 많더니, 그해 가을부터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느낌으로 덕숭은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리라 알았다.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아버지 진지를 담아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한 아버지가 집에서 금기의 대상이라니.

크게 달라진 일은 농사를 짓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있는 밭 뙤기에서 짓는 밭곡식으로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기 전이었으니 중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도 이 년을 늦게 야간중학교에 라도 가게 된 것은 마을의 대부이자 향연의 조부 참봉님 덕이었다. 참봉의 눈에 든 몇몇 아이들은 그렇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향연은 참봉의 후대라서 그냥 참봉 댁이라 불리는 그곳, 동네에선 대궐집에 살고 있었다. 별표나 거북선표 검은 고무신 하나로 일이 년을 버티던 당시, 그것도 닳아서 맨발로 뛰던 동네 소년들의 눈에는 하얀 동그란 코 구두를 신은 향연은 나무꾼과 선녀에 나오는 선녀만 같았다. 어쨌거나 액자 속의 그림이라거나 아무튼 근처에도 갈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었다.

그러다가 성적표를 받아들고 참봉 댁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날, 덕숭은 향연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마침 여학교 교복 치마를 날리며 하얀 구두 뒤꿈치를 저으며 안채로 들어가던 뒷모습이었다.

조금만 빨랐더라면 옆모습을 지나쳐 볼 수 있었을 것을…….

덕숭의 걸음걸이가 마을 최고로 빨라진 것이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날, 참봉 댁으로 향하던 길은 덕숭으로서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고, 향연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는 보았어야 맞는데, 어쩌자고 한 발짝 놓쳐서 지나칠 수 없었을꼬. 덕숭은 작은 키와 더 짧은 다리를 원망했다. 아니 범인은 해찰이었을 것이다.

덕숭의 해찰은 유명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속을 썩인 것들이 모두 그 해찰 탓이었다. 심부름을 보내면 갈 때는 곧잘 간다. 하지만 일이 끝나면 천방지축이 되곤 했다. 질퍽한 땅에서 튀는 개구리 한 마리를 따라가다가 물 반 땅 반에 고꾸라져 오거나, 구름 따라 간다고 야산 등성을 넘어가 길을 잃곤 했다. 중학교에 가자 상황은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학교에 지각하는 일은 농사일 때 말고는 없었다. 공부는 하고 싶어 하는 게 맞았다. 그것만이 돌파구요 희망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향연을 만났다. 그녀가 돌아오는 길, 그가 나가는 길. 그 짧은 시간의 불꽃은 타오른 순간마다 전율로 요동쳤다. 다른 표현은 없다. 그런 것이 불꽃 아니라면. 스치기만 하고서, 다만 스치기만 하고서도 가슴은 터졌다.

수요일 하루는 조금 더 늦는 그녀를 길에서 만나고자 그제부터 덕숭은 야간학교 시간을 제 마음대로 맞춰서 나가곤 했었다. 빠르게 빠르게 늦게, 빠르게 빠르게 낮에. 스치고 마는 건 너무 아쉬워서 이내 뒤돌아 멀찌감치 따라가서 그녀가 대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학교로 향했다.

그랬다. 그러다가 그랬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고 떨었다. 눈이 마주치고 떨었고 알았다, 첫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헤어지고 눈에서 멀어졌어도 그 무엇은 타고난 재가 되어서도 불씨가 남아. 덕숭은 쪽지를 준비했다.

- 우리 산책 같이 해요, 누이.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 누이, 우리 용소에 가요.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저 덕숭이가.

- 향연 누이, 우리 용소에 가요.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저 덕숭이가.

또 쓰고, 또 쓰고……. 네모로 접을까, 연애편지라는 일곱 칠 자 모양으로 접을까.

멀리에서 향연의 모습이 보이면 쪽지를 오른 손에 감출까 왼 손에 감출까 가슴은 두 근 반 세 근 반. 향연이 그의 왼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는 쪽지는 오른손 안에 들어 있곤 했다. 반대로 향연이 그의 오른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는 쪽지는 왼손 안에 들어 있곤 했다. 차마 내밀 수 없어 그가 그리 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쪽지가 왼손에 들어있고 향연이 왼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도 손을 더욱 꼬옥 쥐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너무 쥔 탓에 한참 후에도 펴지지도 않았다.

 

 

을 좀 돌리자. 하늘은 인간에게 아주 가끔 마약을 허한다.

아무튼 그들도 꿈의 순간을 누렸다. 그가 쪽지를 건네지 않고서도 둘은 용소 나들이를 갈 수 있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폭포 입구에 이르니 오른쪽으로 출렁다리에 이르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이 너무 가파르기도 하고 길기도 했지만 용소를 내려다본다는 욕심으로, 아니 둘이서 함께 한다는 감동으로 둘을 그 많은 계단을 달렸다. 계단이라야 그때는 지금처럼 완벽한 철계단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산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출렁다리 왼쪽으로 무서 무서워하며 한숨을 내려가자 앞에 못이 있었다. 안개 같은 물방울이 퍼져 오르는 연못 주변은 춥기까지 했다. 추위에 질린 향연 때문에 용연폭포는 포기했었다. 아니 향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떨린 가슴에, 그저 불안에 행복감에 알 수 없는 떨림에 시간가는 줄 몰랐을 뿐이다. 어느 순간 어스름에 햇기가 떨어져 서둘러 내려와야 했었지. 다음 날, 다음 기회에는 용연폭포까지 함께 가리라는 믿음으로. 소리 없는 믿음으로.

믿음이란 소리가 있었건 없었건 깨어진다.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념, 신앙, 그런 믿음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다. 지금 말은, 그냥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 그런 것은 깨어진다고.

그럼 그것이 사랑? 사랑이 무엇인가 누가 알기라도 하는가? 애틋하게 그리운 것? 그냥 아픈 것?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것,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 남을 이해하고 돕는 것 - 사랑을 말하는 공식적인 풀이는 소용없다. 향연은 사라져버렸고. 대상이 없어졌는데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어디로 향한다는 말인가. 생각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이 사랑은 아닐 터였다. 그런 설명도 없었다. 지우지 못하는 것은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채 알기도 전에 이별이 찾아왔다. 향연이 사라졌다. 동네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향연은 시집을 갔다. 가버릴 줄이야. 산 너머로.

덕숭으로서는 닭 쫓던 개꼴이었다. 애초에 덕숭에게는 꼴이 없었다. 꼴도 끈도 꾀도 끼도 깡도 없던 그에게 꿈처럼 나타난 연이, 향연이. 향연은 꿈처럼 왔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4288년 이월 말. 그땐 여전히 태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말했다. 하루 내내 감자를 심고 어스름에야 서둘러 돌아오던 길에도 아무런 눈치를 못 챘었다. 참봉 댁에 신랑이 장가들어 잔치가 벌어졌던 그 일을.

금성산에 꼭대기에 올라 그 너머 순창이라는 곳을 눈이 째지라고 쳐다보며 울부짖던 이튿날. 그 다음날, 그 다음날. 이산 저산을 헤매느라고 어려서는 빨치산 항거지 - 그에게는 아버지의 그림자로서 금기였던 그곳 - 라서 눈길도 돌리지 못했던 용추계곡 너머까지를 돌아다녔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얼마나 울부짖었던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면 원통하고 원통했다. 원통하다고 할 이유는 아무래도 없었지만, 얼마나 급하면 영동달에 시집 장가를 가는가. 얼마나 급했으면, 얼마나 급히 떼어놓고 싶었으면……. 마음은 더욱 처량해졌다.

좋다. 내가 박사라도 되어 금의환향하면…….

환향하면? 이미 산 너머 시집간 향연을 어쩔 것이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직 열여섯 일곱이던 그가 사랑에 눈을 떴다면 말이 아니다. 이팔청춘, 나이로만 따지면 그 스스로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나이를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언감생심 이몽룡이라고? 부사의 아들도 아닌 것이, 중학교 진학도 제 힘으로는 어려운 홀어미 자식이 어사가 될 몽룡에 빗대다니, 어불성설 아니었나. 향연은 절름발이 양반이기는커녕 올려다보다가 목이 빠질 마을 최고 양반 부잣집의 막내딸 아니던가. 애초에 ‘쑥대머리 구신형용’이라 노래할 향연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무꾼과 선녀 버전이 맞다. 아니다, 그것도 틀렸다. 손 한번 잡아 본 주제에 자식 낳고 살다가도 날아 가버린 선녀에 비교하다니. 용소에 한번 가본 것으로 상팔담에 내려앉았던 선녀라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랬다. 용소에 이르는 길은, 단 한번 향연과 용소까지 손을 잡고 사라졌던 날은 그에게는 정지해 있다. 누가 순간을 사라진다고 했는가. 순간은 영원으로 변한다, 가슴 속에서는.

덕숭은 산중의 호수라면 평생 늘 설렜다. 실제로 선녀 이야기의 상팔담에도 가보았다. 회갑도 한참 넘은 2005년,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기를 산다, 해가 바뀌자마자 육로 금상산관광에 나섰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서 등록했다. 비무장지대를 버스로 통과한다는 스릴도 의미도 있었지만, 일정 중에 비로봉 동쪽 구룡대 아래 상팔담이 끼어 있다는 것을 보고 몸이 달았다. 안개구름이 있는 날이면 절벽을 휘감으며 피어오르는 실안개 같은 구름들로 신선들이 사는 선경을 보이겠지.

그러나 금강산에 도착하자마자 그 기대는 멀어졌다. 온통 옷을 벗은 벌거숭이 산, 때는 겨울이었으니까. 다섯 길은 되어 보이는 구룡폭포를 지났지만 물이 아닌 얼음만을 보았다. 하류엔 얼음이 얇아서 그 아래 물기를 느끼기는 했다. 더 꼭대기로 향했다가 상팔담을 만났지만, 선녀의 날개옷은 상상이 가지 않는 얼음뿐이었다.

바위와 물의 어울림을 보려했다면 여름에 올 걸, 옥빛 여덟 개 물웅덩이 물이 얼마나 투명했을까. 향연은 선녀처럼 이곳에서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오르고, 나는 하늘에서 물 길러 온 금 물동이 속에 타고서 하늘로 가면 되었을 것을.

 

 

다시 그의 목소리로 쓰자. 그쪽이 더 실감 날 것 같다.

첫 타격은 나를 쓰러뜨렸지만 이를 악물었소. 참봉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면 박사가 될 각오로 공부를 하고자 했소. 사정은 어림없었지. 그 댁 지원도 끊긴 것이, 더는 성적표를 들고 그 댁 문전을 넘을 수 없었으니까. 검정고시로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도 그렇게 마쳤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바빠서 공부나 하고 있을 여력이 없었소. 박사는 무슨. 요새는 박사 위에 밥사라고 합니다그려, 그때도 밥이 하늘이었소. 대학은 뒷전으로 우선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제대가 임박했을 때는 군에 못 박을까 하는 고심도 했더랬소. 따로 궁리해 둔 미래도 없었고, 뭣보다 군대 3년 동안 촛불만큼도 희망이 자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선임 중에 박 병장이라고 고무신공장 사장 아들이 있었는데……. 함께 일하게 제대하면 들어오라고.

그렇게 찾아간 고무신공장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만나게 했어요. 아버지를 몰랐으니 이런 게 아버지를 갖는 것이구나, 그랬어요. 박 병장 자신은 공장 체질이 아니라고 밖으로 돌고, 느닷없이 영화 쪽으로 정신을 빼앗기더니 조연출입네 하고 다닙디다. 사장님은 나한테 화학공학과를 다녀서 제대로 해보라셨으니, 공장을 위한 공부였지만 고마울 뿐이었소.

공장은 때마침 수출이라는 것이 시작되어 그쪽 대형공장들의 주문으로 호기를 맞으며 승승장구했고. 난 공부 와중에 화학산업에 눈을 떴어요. 독일이 후발주자로서 영국의 산업혁명을 따라잡은 것도 과학자들을 앞세운 화학산업인 걸 알았제. 마취제 클로로포름, 수면제 클로랄, 무기질 비료 등 리비히그 한 사람이 기여한 것만 해도 엄청났으니. 한국에서도 화학물질이 미래다 싶었고, 사장님도 새로운 구상을 적극 지원했고요. 본격적으로 화학산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덜컥 사장님이 쓰러졌으니, 그 일은 참 충격이었소. 요즈음 말로 하면 급성 장출혈인데, 그땐 그냥 하루 이틀 새 손을 써볼 시간도 없이 그리 되어갖고는. 결국 곁에서 운명을 지켜본 내가 공장 둘을 다 맡았는데, 고무신공장은 70년대 수출이 괘도에 올랐을 때 좋은 조건으로 큰 회사에 넘겼어요. 사실 그건 박 병장님 몫이었으니까. 아버지 것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요. 일을 했건 말았건, 아들은 아들이니까.

나머지만으로도 나는 충분했소. 화학물질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보물이었으니까. 이미 몇 화학공업사에서 플라스틱 가공제품을 생산하던 때였는데, 플라스틱시대가 열리고 있었으니 틈은 많았어요. 바닥재다 뭐다 건축자재들이나 자동차 공장 등 온통 화학물질 아니고는 어림없었죠. 파라크실렌과 스티렌, 아크릴로니트릴 등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이…… 아차, 선생은 화학과목이 아니라했지요.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었지요. 지금이라면 환경부 화학물질안전원 감시가 세지만, 그땐 그런 기관도 없었고 막말로 때만 안 묻히면 된다, 그러고들 했어요. 지금에야 화평법이다 화관법 등 엄격한 잣대가 있지만 그때 시절은 이현령비현령이 법이었으니까. 어느 업종이나 다 그랬다고 봐도 좋을 거요. 눈 먼 돈이 눈덩이처럼 굴렀고.

염화비닐부터 시작해서 건축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종류를 안다면 아마 누구도 대형 주택업자가 지은 집에서 살 생각을 못할 거요. 이들 화학물질에는 발암성, 중추신경 독성 등이 있다는 것을 그땐 누구도 몰랐지요. 집은 더 견고해졌고, 무엇보다 플라스틱 표준화된 자재라서 짓기가 편해졌고. 일하기 편하고 돈이 들어오는데 누가 토를 달았겠소. 석유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화학공업은 승승장구였지. 새 집에 들어가서 두드러기나 비염 증상을 느끼면, 실은 못 느끼더라도 건망증이 심해지거나 불안감이 조성된다는 건데, 그것들 연구는 요즈음 말이지 그땐 아무도 몰랐소. 우리 같은 업자들은 면죄부를 받아 마땅해요, 그런 위험성을 말해주는 전문가도 행정 지도도 없었으니까. 성장은 좋은 것이었소. 나도, 나라도.

아내, 아내와는 백년해로를 다하지 못했어요. 조강지처 불하당을 어긴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죄책감은 마찬가지요. 마흔이 다 되어 결혼을 하다 보니 아내는 나이 얼마 아니었어요. 순하고 단단하고. 아들 셋에 고명딸을 끼워 4남매를 낳아 기르며 홀시어머니까지 잘 챙기던 사람이었소. 가슴을 내주었던가? 맘이 아프요. 한참 젊었으니 수를 못할 줄 누가 알았나요. 어머니는 무슨 미련이셨을지, 왜 고향을 못 떠나셨는지. 아내도 참 힘들었어요. 버스깨나 타고 시골 내려다니던 아내는 어머니가 세상 뜨고 나서 조금 수월한 삶을 사는가 싶었는데 그만 갑작스레. 입에 올리기도 싫소. 살만하면 긴장이 풀린다던가?

하지만 그랬소, 두 마음입디다. 향연이 혼자되었다는 소식 때에도 뭉클 흔들렸던 마음이었지만. 헌데 아프다니. 요것이 사악한 마음이건 어리석은 마음이건 어떠랴 싶었소. 늘그막에 하늘에서 내려온 마법인데. 향연의 옆에, 곁에 갈 수 있는 기회라. 가슴이 덜컹거려서는…….

 

 

그렇게 오늘의 장면이 연출된 것이란다. 조금 고쳐 써야겠다.

널따란 침대 이쪽저쪽으로 링거 줄이 걸려있다. 훤한 낮 시간에 침대에 누워서 링거액을 맞고 있었을 연인들은 평범하고 유복한 노년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다르다면, 노인들의 안방이라고 하기에는 꽤 너른 공간에 가구 또한 세월을 묵힌 때가 없이 성글고. 가만, 어디선가 화학반응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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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대 : 바다에 꽃지다, 예원 2014.11.25. 193-222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7. 6. 16:14

 제16회 영호남 문학인 교류 한마당 (부산, 2014.6.28.~29.)

                  by  PEN광주 박판석 부회장님, PEN부산 이영수 시인님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23. 04:01

유전 때문인가 ... 환경 탓인가

 

소설가 서용좌 '표현형' 펴내

- 광주일보 2014.6.19. 에서 펌

 

 

유전자형인가? 표현형인가?

 

현대사회는 변화무쌍한 시대다. 교유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삶을 사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처한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질을 발현하며 산다.

 

소설가 서용좌(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 교수가 신작 장편 '표현형'(푸른 사상)을 펴냈다. 생물학 용어에서 차용한 제목 '표현형'은 인간의 개인적 발현에 초점을 둔다.

 

2010년 '반대밀.비슷한말' 출간 이후 4년 만에 펴낸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소설은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임교수가 되지 못하고 점차 내리막 인생을 사는 지식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의 지식을 빨아먹는다는 점에서 피를 빠는 박쥐와 다음이 없지요. 그는 날고자 하는 꿈 대신, 이야기를 퍼나르는 데 날개를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주인공이자 글을 쓰는 가공의 저자 한금싱늠'샆포세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인물로,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를 전전한다. 그를 둘러싼 현실은 녹록치 않다.

 

강의 여건은 날로 악화되고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에도 그가 버릴 수 ㅇ벗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소설쓰기다.

 

그는 동류항 인간들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유전자형과 표현형 인간에 데한 관심을 늦추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유전자형과 표현형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모습을 추적하기도 한다.

 

작품은 '배달민족' '한국어' '표현형' '은실' '사포세대' 등 모두 11편의 이야기로 구성되 있다. 각각의 제모깅 붙은 잉기는 따로 존재라는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책 제목인 '표ㅕ현형'으로 수럼되기도 한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해주는 주 인물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다.

 

"주인공을 통해 들여다본 삼포세대의 내면은 표류와 공허로 집약이 가능합니다. 한가으이 기적을 일군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특질이요. 성장이라는 화려한 외피 이면에, 심리적 고통을 앓고 있는 이들이 발현하는 양상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서 작가는 '소설시대'로 등단, 장편 '열하나 조각그림', 연작 '희미한 인(생)'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등을 펴냈고, 이화문학상, 국제펜 광주문학상,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11. 11:48

 

가공의 저자 '한금실' 현대인 방황 들춰내다

소설가 서용좌 교수 장편 '표현형' 출간

 

 

2014. 06.08(일) 16:20 확대축소

소설가 서용좌 명예교수

 

   소설가 서용좌 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가 화려한 외관아래 앓고 있는 심층부의 심리적

고통과 정신적 방황을 그린 장편 '표현형'을 푸른사상사에서 펴냈다.

 생물학 용어에서 제목을 차용한 이 소설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을 내세워 머리글에서

부터 스토리 전개, 마무리까지 하게 한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

 등장인물이자 글을 쓰고 있는 '한금실'은 프랑스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아 금의환향

인 줄 알고 귀국한 이래 내리막을 걷고 있는 소위 삼포세대이다. 비정규직 강사의 신분

으로 직업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해야하는 세대. 그러나 인간에 관한 관심은 버릴 수

 없다.

 처음 꼭지 '배달민족'에서부터 디아스포라의 방향으로 세계 도처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유전자의 표현형을 추구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인의 한국으로의 엑서더스를 통해 유입된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도 들어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돼 인간

 관계의 기본 갈등은 가중된다.

 '배달민족'에서는 서독으로 돈 벌러 떠났던 광부와 간호원 세대, 그에 따른 혼혈자의

정체성 혼돈과 뿌리 찾기를, '한국어'에서는 한국을 꿈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현장을,

 '표현형'에서는 미국으로 입양된 막내의 삶을 다룬다. '은실'에서는 성수대교 사고를

 계기로 공부를 접고 성공의 대열에서 밀려나간 동생의 문제를, '삼포세대'에서는 너무

 많이 배우고도 '루저'인 한금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부모 세대를 다룬

 '초혼장'과 '포이동 266번지'에서는 끝나지 않은 최근 역사의 짐과 무게를 드러내

 보인다.

 마지막 이야기 '물'은 물에 빠지는 아이를 쫓아 무작정 물속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서용좌 교수는 2001년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을 시작으로, 2004년 연작소설

 '희미한 인(생)', 2010년 소설집 '반대말 비슷한 말'을 펴낸 바 있다. 현재 국제펜한국

 본부 광주시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고선주 rainidea@hanmail.net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52

장편소설 『표현형』 

 

푸른사상사, 2014. 5. 31. 발행

변형국판 352쪽, 값 15,000원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 등장인물이면서 써나가는  느슨한 연결의 장편.

    한 꼭지 씩 따로 읽어도 되는......

   

- 차례 -

배달민족

한국어

일기

은실

파도소리

초혼장

포이동 266번지

쥐도 인간이다

삼포세대

표현형

 

 

  추신: 내용보다 멋진, 표지 전체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넘쳐나는 표지는

          아들 조윤기의 작품. 매달린 박쥐가 일품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51

「청출어람」

배우는 것은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 순자 『권학』에서

 

 

강의가 달랑 하나로 줄어든 지난 해 봄이었다.

3월 한 달을 애매한 마음으로 보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에 대한 구상이 일렁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순간. 그냥 집으로 기어들었다. 마침 시향제를 앞두고 부산하여 아버지랑은 정색으로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내가 풀이 죽어 온 것을 알아차리신 눈치였다. 이런 저런 준비로 대청소에 음식 장만에 신경을 쏟는 중에도 곁을 살피셨다.

그렇게 일요일 늦은 오후가 되었다. 산에서 함께 왔던 친척들도 다들 떠나고, 집엔 산에서 묻혀 나른 마른 잔디 부스러기들이 뒹군다. 보이지 않게는 얼마나 먼지들이 일고 있을지. 크지도 않은 대청마루와 부엌 바닥을 훔치는데도 숨이 찬다. 시계를 또 쳐다본다. 그날 저녁 꼭 보고 싶은 8시 다큐프로그램 생각을 한다.

금실이 피곤하지. 네가 와서 난 좋았다만. 우리 찜질방 다녀와서 저녁 먹자. 아버지 시장타 안 하실 거다. 은실이랑 애들이랑 다 함께 가자.

어머니가 평소에 안 하시던 말씀을 하신다. 모처럼의 말씀이라 아니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애들은 말고요……, 하려다가 그것도 만다. 조카들까지 함께 갈 생각은 없지만, 속 좁은 노처녀 이모 소리 들을 건 없다 싶어 삼킨다.

그렇게 저녁이 늦어지고, 아무래도 부엌 정리도 평소와 같지 않고 늘어지기만 한다. 아버지는 벌써 9시뉴스를 보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9시뉴스를 본다. 한국인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약 3시간이란 통계를 본 적이 있었다. 일 년이면 1,095시간, 그러니까 45일 이상을 텔레비전 앞에서 산다. 평균수명 80세를 생각하면 10년을 그렇게 산다. 물론 나도 그렇다. 뉴스 아닌 픽션, 드라마를 본다. 중간부터 봐도 괜찮고, 중간만 봐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은 단편이다. 어제는 지나가버렸고 내일은 미지수다. 요즘엔 머리가 멍할 때면 아무거나 어수선한 드라마 조각들을 보며 앉아 있곤 한다.

그래도 그날은 머리를 깨우는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었다. <KBS 스페셜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 카프카의 말로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들’ 비슷한 것 말이다. 그런데 시간을 놓쳤다. 다시보기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에 ‘의궤’라는 것에 대해 조금 공부해둘 시간을 벌기도 한다.

 

의궤 - 발음도 어려운 ‘의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예전에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왜 학교에서 들어보지 못 했나 의아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내가 다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궤는 조선 건국 당시 태조 때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는데,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 1601년(선조 31년) 의인왕후의 장례 기록인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라고 한다. 보통 필사하여 소량을 제작했고, 특별히 제작된 한 권은 어람용이고 나머지는 관련기관과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고.

이 스페셜 프로그램에서 다룬 의궤는 조선왕실의 귀한 기록문서라는 뜻 그 이상이다. 그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도서 300여 권을 꼬집어서 일컫는다. 사실 프랑스 뿐 아니라 일본 궁내청도 조선왕조 의궤를 81종 167책이나 소장하고 있고, 그밖에 『진봉황귀비의궤』, 『책봉의궤』 2종,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 『화성성역의궤』 등 5종이 새로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만하면 의궤에 관한 기초자료는 공부했다.

프로그램에는 결정적인 인물 박병선이 등장한단다. 박병선 - 인물검색을 한다.

사학자. 1929~2011. 서울대학교 학사, 파리 제7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박사과정 수료. 논문은 「버림받은 공주와 민속 신앙에 대한 고찰」로, ‘트레비엔’ 평점을 받았다.

무엇보다 1955년 스물일곱에 (어딘가 자료에는 서른셋이라고 했지만 그건 계산이 틀리다.) 유학길에 올랐다. 동란 후 아직 어수선한 세상에서 최고의 지성과 자유의 상징인 프랑스로 향했다. 스승 이병도 교수는 게 가거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들이 어딘가에 있을 테니 꼭 찾아 보거라, 라는 당부를 하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합리적이었지만, 어디쯤에 있는지,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오리무중 상태의 도서에 관한 당부를 평생 간직했던 제자가 기특할 따름이다. 그는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있으며, 틈틈이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과 고서점 등을 기웃거렸다. 1890년대에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이 펴낸 『한국서지』 - 고려시대의 『상정고금예문』에서 한말의 『한성순보』까지 3800종 이상의 책을 소개한 목록해설서 - 는 프랑스 내 어딘가에 의궤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에 사실성을 더해주었다.

 

청출어람 - 스승 두계(斗溪) 이병도에게서 ‘더 푸른’ 박병선이 나왔다. 이병도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이건, 식민사관의 대부이건 그게 여기서 중요하진 않다. 진단학회, 분명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지만, 한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한국근대사학 성립에 기여한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것이 친 체제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실제로 같은 강점기에도 신채호와 박은식 등의 민족주의 계열의 사학이나 백남운 등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강한 정치적 의지와 현실 참여를 바탕으로 반식민주의 사학의 성격을 지녔지 않은가. 시대가 학자에게 변명의 빌미가 되어줄 리 없다. 그렇다고 이병도를 예서 평가해서 뭘 하겠나. 나는 사학자도 아니다.

그 이병도 교수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한 제자에게 일렀다. 프랑스인들이 ‘훔쳐간’ 우리 것들을 꼭 찾아보라고. 푸른 대나무 조각을 쪼개어 묶어 역사를 기록한 데에서 온 청사라는 말, ‘푸른 역사’의 스승과 제자다웠다.

나도 모르게 이병도를 변호하는 글들을 찾아 읽어본다. 결정적으로 그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군사적 기구가 아니라, 다만 가야와 왜 간의 무역 담당기구였다고 주장했다. 또 식민사관에서는 고조선의 준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된 위만을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여 위만조선에서 한국사의 단절을 강조했지만, 이병도는 『사서』에 기록된 위만의 상투 튼 머리 모양과 복식으로 보아 그가 원래 고조선 유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순간 이병도는 ‘더 푸른’ 제자 때문에 긍정적 평가 쪽으로 저울이 기운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른들, 쪽이 있어 근원이 되었음 아닌가. 어쨌거나 학불가이이(學不可以已), 학문은 그쳐서는 아니 된다는 순자의 권학 말씀이 옳거니.

 

 

다시보기 - 월요일 아침 일찌감치 컴퓨터를 켰다. KBS를 찾아 아이디를 넣고 비밀번호를 넣는다. 서둘다가 한두 번 틀린다.

부욱 하고 휴대전화가 미끄러진다. 속세를 떠나 절로 들어가련다는 선배의 문자메시지에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그 절 이름은 만우절이라고 할 때서야 쿡쿡 웃었다. 이젠 어제의 프로그램은 다시보기가 안 된다는 메시지가 뜨더라도 만우절이라 놀라지 않으리다. 뜬다. <스페셜 프로그램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광고방송이 가볍게 두 번 지나가고 어스름 화면이 시작된다.

1975년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바깥의 화려한 세상과 대조되는 장면 - 적막한 밤을 밝히는 작은 손전등을 든 손이 먼지가 수북이 쌓여 날리는 책을 쓰다듬는다. 효과도 멋지다. 프랑스국립도서관 베르사유분관의 파손 도서 보관실에서였다.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초월한 듯, 그저 진지한 인간의 얼굴, 그 입에서 유창한 프랑스어가 흘러나온다. 박병선 박사 만년의 모습이다. ‘처음 의궤를 발견했을 때 너무 감동해서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어요.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20년 동안을 한 우물을 파다가 마침내 그 대상을 만났다는 것이 믿어졌겠는가. 중국도서 번호를 지니고 있던 우리 것. 한 사람 사학자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보물을 알아본 것이니.

그러나 그것은 시작의 순간에 불과했다. 1978년 10월에는 한국에서 의궤 발견 기사가 떴다. ‘강화도사고문서 파리서 발견’이라는 제하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약탈해간 필사본 등 130종 345권이 112년 만에 발견되었다는 뉴스였다. 더구나 한국에 없는 책들도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보도되었다. 이런 보도에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은 곤란해 했고, 냉대는 극에 달했다. 그쪽 입장에서야 내부인인 사서가 ‘여기 우리’ 도서관 분관 창고에 약탈된 도서가 있노라고 그 해당국에 알린 정황으로 해석될 밖에. 결국 권고사직의 형식으로 도서관을 그만 두고, 우리 대사관 한 구석에 마련해준 연구실에서 홀로 의궤 연구에 들어갔지만, 정작 도서관에서는 열람자 신분의 출입마저 제한했다고 한다. 굴하지 않고 매일 도서관을 찾은 그에게 계절이 바뀌고서야 출입이 허락되었지만, 하루 단 한 권의 열람이 조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곧 바로 책을 반환하라고 할까봐서 점심 거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고 했다.

날마다 점심을 거르고? 먹으려고 사는 세상에서? 이건 아이러니가 아니라 결과적인 철학이다. 결국 오늘 하루 잘 살아서 무엇을 위함인가, 다시 내일 잘 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게 종일 먹지도 못하고 의궤에 매달리기 10년여 세월이 흘렀다. 『조선조의 의궤 - 파리 소장본과 국내 소장본의 서지학적 비교검토』라는 책을 써냈다. 제목과 주요내용은 말할 것 없고, 제작 년도를 분류하여 정리했고, 특히 외규장각 의궤와 한국에 남아있는 의궤 사이의 특징을 비교 설명해 놓은 역작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동영상의 목소리. 그 세월 동안 그는 한국에 의궤를 알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금실아, 아버지 나가신다.

어머니가 부르시는 소리에 화면정지를 눌러 놓고 내다본다.

아버지, 어디 가셔요?

글쎄다. 그런데 넌 오늘 안 내려 가냐?

가야죠. 이따 오후에. 저 화‧목 수업이에요.

화요일 목요일 이틀만 해?

예.

그럼 나랑 산책할까?

산책을요? 어제 피곤하실 텐데요.

산책이야 늘 다니시지. 언제는 피어선학교, 아니 지금은 평택대학교지, 게까지도 가셨더란다. 이십 리 길이니 가시는 데만 두 시간도 넘는데.

어머니가 거드신다.

거길 왜요?

그냥 걷다 보니 거기까지 갔더라. 올 땐 버스 탔지. 헌데 그 대학이 성경학원 때부터면 백년 넘은 역사니까 대단할까 싶었는데, 왜 거긴 미국, 중국, 일본학과만 있는지 모르겠더라.

…….

거긴 원래 신학대학이잖아요.

내가 암말 않고 있자 또 어머니가 거드신다.

아버진 별 공부도 안한 성 싶은데 교수도 되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실 것이 뻔하다. 아버지 기준으로는 확실한 선진국에 유학해서 박사가 되어온 딸 정도라야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런 딸이 시간도 제대로 못하는 거의 백수 신세니.

아버지, 오늘 좀 추운데 나가시게요?

춥나? 젊은 애가?

하늘이 비도 올 것 같네요.

핑계는. 너랑 코앞의 평택호에 가본지도 오래다. 여기 서해대교에도 안 가보았지?

거긴 개통된 지 얼마 안 되니까요.

얼마 안 된다고? 십년도 넘은 게 얼마 안 된 세월이냐. 7,000미터가 넘으니 장관이지. 나들이 좋아하지 않는 네 어머니도 다녀왔지 벌써. 그러고 보니 평택이 징검다리네. 아산과 이어 평택호 만들었지, 당진과 연결해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었지. 넌 이곳 팽성을 땅끝이라 여기는 사람 같아. 바다 쪽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으니.

바다요? 바다라는 게 제겐 좀 상징적일 뿐, 바다라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바다…… 뭣보다 여기 바다는 뭐랄까, 막힌 느낌이죠.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남쪽 섬을 생각했다. 섬이라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일 텐데. 그런 느낌은 뭐랄까 신천지에 대한 발상처럼 다가왔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고서도 바다를 바라본 적이 없이 내륙으로 내륙으로 향해서 살아왔다. 이제 난데없이 다른 사람의 섬을 생각하다니. 이건 무슨 억하심정은 아닐 테고. 방향 상실일까.

놔둬라. 혼자 다녀오마.

그렇게 아버지가 나가시고 난 뒤에도 어머니는 눈으로 나를 붙들고 계셨다.

어머니, 왜요?

아버지 말이다.

아버지가 왜요?

아버진 이럴 때 며칠은 정말 우울해 하신다.

거야, 어차피 늘.

잘나가는 청주 한 씨들이 좀 많으냐. 왜 우리 집안만 손들이 귀해가지고. 하긴 아들들 있어도 시제에 소용 없더라만.

설마요.

이 어미가 없는 소릴 하냐. 너희 어려서랑은 시제 음식 도맡아서 장만하던 정문리 당숙모 알지? 당장 그 집 며느리들 둘 다 교회 다니면서는 손 거들어 주기는커녕 참석도 안 해. 조상 숭배하고 하느님 숭배가 상충이라는데, 어디 같은 거라야 상충이 되고 말고 하지.

꼭 그래서가 아니고, 하는 집들도 요즘 간소화 추세라서 그렇죠. 어머니도 좀 간소…….

간소하게 하고 말 게 뭐 있냐. 사람들 모이면 밥은 먹게 해야지.

음복이라는 것도 참석자만 하면 안 될까, 엄마? 다 챙겨서 싸주고 하려니까 엄마가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미래, 그래. 내가 딸만 낳아놓고 무슨 입을 뗀다고.

어머닌 또!

안다 알아. 요즘엔 아들들도 집안 대소사도 나 몰라라 한다는 판국에. 한국도 미국이다 요샌.

어머니, 너무 괘념 마세요. 세상이 바뀐 걸 어떡해요. 미래만 보고 달려도 살아남을까 말까, 과거로 눈 돌릴 틈이 있어야 말이죠. 변명이 아니라 당장 내일 일도.

그도 그렇다. 잘 배우면 잘 배운 대로, 덜 배우면 덜 배운 대로.

어머니, 전 아무래도 너무 배운 것 같아요.

이 말은 내뱉지는 않았다. 내뱉지 못했다. 힘들여 공부 뒷바라지 해 놓으니 너무 배워서 불통이라는 뻔뻔한 말을 어찌 풀어낸단 말인가. 그렇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 루소가 뭐냔 말이다. 아니 애당초 그런 공부를 하겠다고 작정하기까지 난 도대체 무엇에 씌었을까.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동서양의 진리들을 동등하게 모두 공부해야한다는 원칙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너무 적게 배웠다. 한국과 프랑스가 우리에게 대등할 리 없는데 대등한 것으로, 심지어 석학들이 더 많은 - 더 많이 소개된 - 서양 나라들이 더 위대한 것으로 주입되었다.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

어머니, 저 컴퓨터 보고 있던 게 있어서.

그래라.

 

나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박병선 박사를 떠올렸다. 같은 파리의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 평생을 바쳐온 그와 남의 것을 겉돌다가 중도하차한 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어떤 갈림길에서 인생이 달라진 것일까. 힘이 빠진 채 까만 화면을 다시 불러낸다.

재생 화면을 누른다는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다. 어스름 화면. 1975년 - 어머나, 내가 태어난 해였네! -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막대를 옮겨 아까 멈췄던 곳을 찾아간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프랑스의 한국 보물들 - 그 종류와 가치>란 제목으로 의궤 사본 297권, 인쇄본 45권, 두루마리 8권의 목록을 밝혔고, 책 15권과 두루마리 1권은 분실된 상태임을 알렸다. 그렇지만 반환은 꿈도 못 꾸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서울대학교 규장각 팀에서 콜레주드프랑스와 공동발행으로 의궤 관련 책을 출판했다. 프랑스어 판으로, 저자는 박병선 박사.

콜레주드프랑스는 16세기 이래 유서 깊은 개방대학이다. 파리에 머물던 4년 동안 라틴구에서 만날 바라보던 그곳이 떠오른다. 아련히, 아픔처럼. 롤랑 바르트도 미셀 푸코도, 움베르토 에코까지도 강의를 했던 곳. 콜레주드프랑스의 관심은 당연히 프랑스 석학들에게 의궤의 중요성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의궤 발견으로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뜻하지 않게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1993년 9월, 고속철 테제베의 한국도입과 관련해서 프랑스 측이 한국에 공을 들이는 시기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선물로 들고 왔다. 분명히 반환의 제스처였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코 흘러만 갔다.

한국 내에서 반환운동이 일자 프랑스도서관 측은 의궤 전체를 폐물창고에서 본관으로 이전하고 수선과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에는 반환 반대여론이 정점에 이르렀다. 예술분야 전문 일간지 <라 트리뷰드 아트>는 리크네 편집장을 앞세워 아주 강경했다. 프랑스법에 국외문화재 반환 의무가 없으므로, 비록 국제법에서 반환을 요구하더라도 반환할 의무가 없다는, 자구적인 고집이었다.

그런 명석함은 명석함이 아니라 천착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여론몰이에는 그런 말들이 효력이 있다. 다른 곳을 검색해보니 미테랑 대통령이 의궤 한 권을 우리 측에 선물했을 때 파리국립도서관의 어떤 사서는 자리를 내던지며 맞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작 의궤반환 합의 때에는 사서들 272명이 연대해서 반대성명을 냈다고.

이렇게 의궤 반환에 대한 반발성 기사와 탄원서가 넘치며 반대시위가 일고 있던 상황에서도 참 지식인들은 진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우선 문화부장관 자크 랑이었다. 그는 법적으로는 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재산임이 맞지만, 정신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의궤의 주인은 한국이라고 했다. 파리 제7대학, 제13대학의 교수들도 합세했다. 13대학의 살즈만 총장은 국외 문화재란 거의 군사적 침입이거나 정부 간 협상 없이 가져온 것들이며, 그렇다면 현재의 소유국에서 원래의 소유국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소유국에서 대중에게 전시도 하지 않으면서 타국의 문화재를 계속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참으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인류의 문화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런 뜻에서 당시 문화부장관은 박병선을 가리켜 아름다운 한국국민이자 세계국민이라고, 그의 투지와 용기, 그리고 집념을 온 나라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 - 그것은 결국 드러난다. 세상에는 늘 공평무사한 지식인들이 있어온 때문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아버지가 한번은 어느 노령의 일본인 교사가 공개한 일본 고지도들 이야기를 하셨다. 1880년엔가 발간된 <대일본국전도>와 일본문부성이 발행한 1900년쯤의 <수정 소학일본지도>에는 일본영토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아예 들어있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분명히 알았다는 증거가 되는데, 그럼 지도들을 공개한 그가 매국노인가.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진실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이익과 불이익을 초월하여 진실을 인정하는 자질로서만 평가된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말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진실임을 믿어야 한다. 그런 글을 최근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화면을 멈춰놓고 그 책을 찾는다. 어느 독문학 연구서다. 프랑스문학 관련 독서도 현대문학 쪽을 살필 여력이 없던 내가 독문학 서적이라니. 희망 찬 모교 강사시절 유럽문화연구소에서 독문과 강사들과 교류하던 덕이다. 아니, 지금의 지방대학에서 만난 배 아무개 교수 탓일지. 지방대학이라지만 나와 엇비슷한, 어쩌면 더 젊은 나이에 전임이 된, 정말 부러운 위치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가족사에 관련된 흔적을 찾아 독일로 잠적하다시피 날아갔는데, 그 뒤로 뭔가 얽혀들게 된 것이다. 얽혀들었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그가 나에게 간헐적으로 개인적인(?) 자료를 보내왔는데, 거기에 나치시대의 유명작가가 깊이 관련되어 있던 것이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때문이었다.

찾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의 후예인 서독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에 관한 연구서였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질보다도 살인보다도 더 가공할 죄를 짓는다. 강도나 살인에 대해서는 명시된 법조항이 있고, 일단 언도받은 죄수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터준다. […] 그러나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 불문율 앞에 내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이 법은 불문율이며, 그 점이 그의 예술, 그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다. 그에게는 어느 하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 그가 그 순간 제공할 수 있는 전체를 주거나 - 아니면 무 - 그러니까 침묵이다. 그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 16쪽의 글이다.

언젠가 같은 작가의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이라는 소설에서도 전범국 독일의 청소년의 심리를 가슴 아프게 따라가며 조금 놀랐던 기억도 있다. 이 연구서에는 제목을 ‘고백’이 아닌 ‘견해’라고 했는데 직역인가 보다. 유년시절에 나치를 경험한 어릿광대는 새 인생에 적응하고자 ‘견해’를 바꾼 어른들의 처사에 울분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경악의 비밀이 상세한 작은 일에 있음을 모른다고. 모른 척 한다고. 큰일을 후회하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다. 정치적 과오, 간음, 살인, 반유대주의 등을. 그러나 상세한 -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사실들을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그가 공연을 위해 ‘모으는’ 순간들은 순간적 작은 진실의 총체이며, 이것이 위대한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고. 순간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 그래.

나는 또 옆길로 샌다. 책을 덮자. 유럽 지향으로 굳어버린 내 머리를 다시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돌린다.

 

직지 - 그런 이름의 책은 경이 그 자체다. 존경해 마땅할 스승과 제자의 집념은 전대미문의 성과를 낳았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의 주인공이 한국이라는 증표라니. 오매불망 고서적들을 뒤지던 박병선 박사에게 프랑스인 동료사서가 ‘아주 오래된 동양책’이 있다고 알려준 덕이었다. 『직지』라고 한자로 쓰인 먼지투성이의 책은 선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정식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주제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그 비슷한 뜻이란다.

발견된 책자는 전 2권 중 하권뿐이었고, 하권은 39장이지만 그나마 제1장은 유실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1377년(우왕 3년)에 흥덕사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과, 주자인시(鑄字印施)라는, 쇠를 부어 만든 글자를 찍어서 배포했다는 기록까지 완벽한 물증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떨렸을까. 조선도 아닌 고려 말기에 금속활자본이라니.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1455년을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이는 그보다 근 한 세기를 앞섰다. 확산도 면에서 구텐베르크의 『성서』 배포에 밀렸다지만, 그게 대순가. 1972년 파리의 <유네스코 세계도서의 해 기념도서전>에 『직지』를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노력 끝에 2001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까지, 박병선의 꿈의 한쪽 날개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직지』라는 이름의 책을, 아니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학문이란 것이 얼마나 뾰족한 것인지, 옆의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파리의 하늘에서 그런 위대한 발견이 있었던 사실도 모른 채. 여전히 유일한 그 금속활자본이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음도, 왜 프랑스에 영구 보관될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 채.

내용인 즉, 한말 주한프랑스대리공사였던 플랑시라는 인물이 구입해서(?) 귀국 때 가져간 것을 나중에 골동품수집가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했고, 그가 1950년에 사망한 뒤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기 때문에 소유주가 분명한 셈이란다.

또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된 『직지』는 목판본이라는 것도 모른 채. ‘흥덕사자’라고 명명된 그 금속활자 자체의 흔적은 아직 오리무중이라는 사실도 알 리 없이. 나는 21세기를 맞는 파리에서 오직 남의 정신만을 파먹고 살았다.

언제라도 흥덕사지엘 가보고 싶어진다. 고인쇄박물관이 있다는 그곳에. 네이버 길찾기에서는 평택과 청주 사이라면 버스로 한 시간이라는 정보가 뜬다. 각각 터미널까지 오가는 길을 더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리라. 성남으로 향할까 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있다는 곳. 자동차라면 청주가기보다 더 가까울 것이나 대중교통으로는 세 시간 반이 걸린다고 뜬다. 아서라, 뒷북이다. 아니, 뒷북이라도 무관심보단 나으려나. 방학 때 집에 오면 들러볼 마음을 묻어둔다.

오디세이 - 다시 <의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끄기 위해서다. 어젯밤 찾아본 기록들로는 1975년의 『의궤』 발견도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반환과정도 오디세이의 귀향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직지』의 사정보단 나았지만, 약탈의 증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의궤』의 오디세이는 그 시작이 병인양요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린 양요들, 병인양요 - 기록들을 찾아본다.

1866년 초 병인박해로 천주교신자 수천이 학살되었고, 프랑스인 선교사 9명도 처형되었다. 화를 면한 3인 중 리델이라는 신부가 청나라로 탈출해서 프랑스극동함대 로즈 사령관에게 응징을 요청했다. 함대는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노라.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우리는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10월 16일의 일이었다.

1,000배로 갚아주겠다고? 대단한 복수심이었구나.

강화도엔 왕실의 전적을 보관하는 두 개의 사고가 있었는데, 강화성 내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과 강화읍 남쪽 정족산성 내 전등사 근처의 장사각이었다. 서양인들의 눈으로는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화려한 장정의 신비한 서책에 뜻도 모르고 반할만도 했겠다.

로즈 사령관은 장교들에게 목록까지 만들게 해서 완전한 노략질을 자행했는데, 11월 9일 조선의 정족산성 승첩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를 철수하면서 이들 서책들을 가져갔다.

어쩌면 전쟁기념물 쯤으로 주장될 수 있었을 도서의 약탈 사실은 사령관이 해군성장관에게 보낸 서찰 때문에 폭로되었다. 필요한 책들은 배에 싣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태웠다는 보고내용이 자충수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 계셨던 최석우 신부님이 밝혀냈다. 그분으로서는 병인양요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프랑스인 선교사들 처형 등에 관한 교난 연구가 주목적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의궤 반환의 꼬투리를 찾아주었다.

다시 화면을 본다. 2011년 5월 마침내 의궤 297권 모두가 돌아왔다. 비록 영구임대 형식을 빌려서라지만 어떠랴. 외규장각을 떠난 지 145년이 지나서야 참으로 긴 오디세이를 마쳤다. 그러니까 처음 먼지투성이 의궤를 발견하고 박병선 박사가 마비증상을 느꼈던 그 감동의 순간에서 36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흔적을 찾아 헤맸던 56년만의 일이었다. 56년. 더러는 그 세월을 통틀어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80대 노령에 암 투병으로 휠체어에 앉은 박병선 박사 - 과제의 완벽한 수행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 가을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사람. 그 모습이 처절하리만치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자크 랑, 『의궤』 반환 당시의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말문을 연다. 박병선 박사의 집념,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의궤 환수라는 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다큐멘터리 편을 보았을 뿐으로 나는 멍한 채로 깊은 상념에 든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이 살아있는 사회, 프랑스이므로 반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세계대전 직후에는 나치에 협력했던 비씨 정부의 잔재를 매섭게 단죄했던 그들이다, 평화 시에는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에 혼외자가 참석해도 소동이 일지 않는다. 대통령이 이혼을 반복하거나 미혼의 여성장관이 혼외자를 출산해도 사생활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그런 나라.

하지만 나의 지난 시절은 나에게 무엇인가. 그런 프랑스에 매료되어, 프랑스의 지성에 매료되어, 루소에 심취하여, 프랑스의 혁명적 철학에 몰입했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이 정말 있었던가. 있었던들 무슨 소용인가.

가지를 늘려 그늘을 크게 키우라 시던 나의 어느 날의 스승님은 뿌리를 단속하라는 말씀을 잊으셨다. 이 바보 같은 제자는 뿌리가 마르면 가지도 그늘도 없다는 단순한 지식을 몰랐다. 스승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생득적으로 간직해야 할 보편 진리를 몰랐다. 괜찮은 제자도 못된 나는 스승이 된 적도 제자를 둔 적도 없다. 십여 년의 계약직 강사 이력이 전부일 뿐이다. 내 지식의 계보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나려나 보다.

점심 - 점심 먹자, 아버지도 진작 들어오셨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고 곧 바로 오셨구나. 넌 뭘 들여다보느라 그렇게…….

어머니는 고개만 내밀고 다시 나가신다.

밖엔 제법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빗물에 적신 초록이 봄을 피워낼 것이다.

얌전히 점심을 먹고 얌전히 인사를 하고 기차를 탈 것이다. 내리면 저녁 때. 아직은 남아있는 강의 준비로 밤을 새울 것이다. 해도 해도 모자라는 공부는 해도 해도 별 들여오는 것이 없지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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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그늘』, 제2호, 시더나무문학회, 85-106쪽.

 

 


 

 

이 감점이라니. 환경정리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우리 반 점수가 이게 뭐예요.

생기신 덩치와는 다르게 평소 수줍게 말씀하시는 담임선생님이 그날은 분통을 터뜨리셨다. 중2 때였고, 그때는 환경점리 심사표에 교탁에 꽃을 꽂아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꽃병을 뺀 것은 학급비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급우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이 당연했다.

저, 그것이…… 선생님, 왜 살아있는 꽃을 죽여서 갖다 놓으라고 하는데요?

뭐시여? 꽃을 죽여? 그니까 까먹은 거이 아니고 일부러 꽃병을 안 갖다 놓았다고? 지시사항을 학생 맘대로 어겨요?

선생님은 급하니까 사투리를 해가며 나무라시다가 가죽 표지의 긴 출석부를 탁 덮으셨다. 다들 숨을 죽였다. 더 대들다가는 출석부로 탁 때려분질랑께, 라고 하실 차례였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갑자기 혼이 나면 간경 뒤집힐지 모른다고 염려하셔서, 출석부로 머리를 탁 치시기 전에 꼭 경고를 주시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가셨다.

을, 꽃다발을 볼 때마다 나는 중2 때 담임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은 담당이 농업이셨다. 실습장에서 감자를 ― 고구마였는데 그땐 고구마도 감자라고 했다. ― 캐는 날이면 굵은 알들은 골라서 근로장학금에 내놓는다 했고, 못생기고 작은 놈들은 가사실습실 가마솥에 쪄서 나누어 먹게 하셨다.

주번, 감자 익었는가 가서 보고 와요.

(다녀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솥뚜껑을 열어 봤는데 연기만 났어요.

연기가 뭐예요, 김이지. 또 김만 보고 오면 어쩐데요. 요렇게 꼬챙이를 만들어 갖고 가서 쿡 쑤셔보고 와야제.

그렇게 무심한 듯 유심한 선생님은 꽃을 죽이기 싫었던 어린 제자의 마음을 받아주셨다. 꽃병에 담긴 꽃은 사람들이 죽인 것이라는 발상은 무심코 불교적 배경에서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착함이 지나치게 강조된 동화책들 속의 착한아이 신드롬 때문이었는지.

생명에 대한 외경심 ― 그런 거창한 개념을 알기에는 어렸던 중학생 시절의 건방진 선택도 찰나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꽃다발을 좋아할 수 없다.

결혼식의 신부가 드는 작은 부케도 사랑의 정점을 상징하지만 한편 곧 사라져버릴 최고의 순간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곧 시들 것이니까. 강남 특급호텔들에서는 식장 장식용 꽃값이 천만 원을 웃돈다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

묘소에 가져가는 꽃들은 우습기까지 하다. 조상님들은 이미 풀꽃들과 함께 사신다. 부족하다고 느끼면 꽃나무를 더 심어드리면 될 일 아닌가.

그래도 외할머니 묘소에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상여를, 그러니까 장례차를 생화로 장식해 달라시던 외할머니의 평상시의 유언을 꺽은 것이 그랬다. 할머니, 꽃 몇 백송이 목숨을 꺾어서 함께 데려가시게요? 사치스러운 할머니도 그 말에 꺾이셨다, 차 전체는 말고야…….

하물며 관행처럼 되어버린 (별 볼일 없는) 문학상 수상 같은 자리에서 느닷없이 받게 되는 꽃다발들은 더 없이 곤혹스럽다. 꽃다발을 받으면 미소를 짓는다, 지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말해야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이고, 되갚을 기회를 놓쳐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또 정말로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은 그렇게 내 삶의 환경정리에서 마지막 순위로 밀려난다. 내게는 명사가 아닌 형용사 같은 것, 내용이 아닌 포장 같은 것이다. 꽃을 생업으로 또는 예술적 작업으로 꺾으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 최고의 것일지언정 좋아하지 않을 자유는 있지 않겠는가. 마침 나는 무명이고 이 글이 실릴 책도 동문들마저 심하면 공해라고 여기고 챙겨가지도 않을 것이니 누가 읽으랴. 꽃 사랑이나 문학 사랑이나 다 제 눈에 안경일 뿐이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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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42

 

 

 

「슬픈 족속」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하얀 세상이 비친다. 하얀 세상, 어딜까? 아니, 낮은 지평선 위, 하늘이어야 할 곳은 검회색 천지다. 검회색, 어디에서 보았던 색깔인가.

첨엔 시원한 물속이었다. 따가운 한 낮의 햇볕 속에서 노란 경계석을 넘나들던 여자아이가 사라진 순간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벌써 발은 물에 젖었다. 허리로 가슴께로 물이 올라오는 것은 순간이었다. 꼬마아이의 옷자락을 잡았다고 느낀 순간 뒤뚱거렸을 뿐인데……. 물속은 상상처럼 푸르지 않고 곧 어두워졌다. 어딘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색은 검다 못해 붉어지고 있었다. 이 깊은 물속, 어쩌면 지구 속 마그마가 흐른다는 중심으로 빠져드는 느낌……. 어디였더라?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호수,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서있다. 비몽사몽간이다. 가볍게, 불과 몇 십 미터를 올라갔던 경사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는 느낌에 뭉클해진다. 깊이는 지구의 중심에까지 뻗히는 인상이다. 얼마나 깊은지 표면은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다시 물속에 빠져든다. 흑수 속으로 깊이.

중국에서 이 영산을 헐어 관광길을 내었다 싶으니 허전하군요.

누군가가 옆에서 불쑥 말을 던졌다.

조약에 따르면 천지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나머지 45.5%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느만요.

저기 저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곳이 북한 땅 백두산 아뇨!

예, 진정한 백두의 임자는 말이 없네요.

진정한 백두의 임자 ― 나는 내 말에 정신이 든다. 지금 무슨 말인가. 몇 년 전 이런 말을 했던 기억과 함께 백두산 천지의 검은 물이 덮쳐왔다. 그랬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지만 난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땐 모교에서 희망적인 상황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보름달 시기에 슬픔은 저만치, 방학은 방학대로 즐겁기만 했었다. 영어학 전공의 동료가 연길에 학술행사에 참석하는 길인데, 이어 백두산 관광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 좌석에 여유가 있다고. 백두산을 내 발로 밟고 천지의 물을 내 눈으로 본다는 상상은 학회가 있는 이틀을 묵힐 것을 감안해도 해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공항에서 만나죠!

동료의 말을 떠올리며 우선 공항 내 은행에서 133.90으로 환전을 하고 시계를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동료가 불러냈다. 서른은 넘고 마흔 명은 안 되는, 소년에서 노년의 집합이었다. 부모 따라, 남편 혹은 아내를 따라 나선 경우가 몇 있어 보였다.

그렇게 탑승수속을 함께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금방 중국이었다. 인천에서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하여 대련에 도착한 것이다. 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에어포트호텔로 향했다. 비행시간은 인천에서 대련까지, 대련에서 연길까지 각각 한 시간 정도라지만, 중간에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사이 시간이었다.

닌 하오, 젠따오 닌 헌 까오싱!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습해 간 한두 마디 중국어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말을 하면 되었고, 인천에서 함께 출발한 가이드가 테이블마다 맥주를 한 두병 가져다 놓았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연예인 같은 젊은 아내를 동반한 남자가 혼자서 맥주를 독차지했다. 꽤 예쁜 얼굴을 하고서 다소곳이 계속 술을 따르는 아내가 신기했다. 술을 따르도록 설계된 안드로이드 같았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광장이나 노상에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걸춤이라고, 조선족 현지 가이드 말로는 이곳에서는 춤이 일상이라 했다.

길거리에서 춤이 추어질까요, 한샘?

즐거움에 겨워 춤을 추는 것이겠죠!

즐거워 보이지도 않은데요. 춤을 추다보면 즐거워지는지. 하긴, 리듬을 타면 누구라도 즐겁지 않겠어요?

정샘, 아예 즐겁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즐겁고 싶어서라면, 그 말은, 즐겁지 않아서 춤을 춘다고요? 왜 꼭 즐거워야 하는지, 삶이란 게 보통 지치고 서럽고 아닌가?

흰소리를 해 가며 돌아온 공항 로비에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쾌찬’이라고 쓰인 곳에 가면 앉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레이프주스를 달라했던 누군가는 파파야주스를 받고 투덜댔다. 대규모 항구도시라지만 중앙과는 다른지, 종업원들의 영어가 시원치 않았다. 셰셰 닌! 우리와 똑같은 얼굴에다 대고 그렇게 말하기도 어색했다. 다음 말도 모르고.

비행기는 놀랍게도 예정시간을 앞질러 출발했다. 목적지 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거리엔 한글과 중국어로 위 아래로 쓰인 간판들이 즐비했다. 비행장에서 곧 바로 향한 곳은 보기에는 중국 식당인데 음식은 퓨전이었다. 맛없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더니, 요리접시는 크고 무겁고 개인용 접시는 콩알만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숙소 ‘바이샨따샤’ ― 백산호텔은 싱글과 트윈 룸을 가리지 않고 하룻밤 100불이 넘는, 중앙당에서 지도공작을 나오는 고위급도 게서 묵는다는 대형 호텔이었다. 마음으론 여전히 불편했다. 외국인지 아닌지 도통 애매했기 때문이었을까. 영락없는 닮은 꼴 얼굴들에서 중국말이 튀어나올지 한국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학술 행사장 ― 행사와 관련 없는 몇몇은 하릴없이 시내관광을 나가자고 부추겼지만, 나는 건물 로비에서 책을 읽기로 했었지. 여행길에 바보같이 무거운 양장본을 챙겼으니 읽기라도 해야 덜 억울할 일이었으니까.

[…]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 […]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은 지식인들의 복수라? 지식인에겐 감성이 없다고? 내 직업이란 것도 해석학 아닌가? 고로 나에게도 감성이 없다? 간단히 며칠 놀자고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어. ‘해석에 반대한다’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지성과 감성의 이분론이 부당했고, 감성 우위론도 근거가 없다. 태어날 때 감성의 풍요 속에서 태어난다지만, 천천히 계발된 지성 또한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이자 특권이다. 원초적인 것이 우월하다니, 그것도 편견이다. 인간에게서 따로 우월한 특성은 없다. 제 알아서 신체가, 신체의 주인이 쏠리는 쪽으로 개성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켕기는 것들을 메모하다가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갔지. 「내용 없는 신앙심」 등 다른 글들도 저자 손태크의 삶의 방식만큼이나 흡습성 독서를 요구했어. 여행지의 독서로는 많이 무거워, 영락없이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기 꼴이었지 뭐.

그렇게 이틀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댄 내게 저녁의 연회는 과분했었지. 처음 보는 버섯단자나 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린 38%의 알코올도 맛이 아련히 떠오른다. 알코올 탓인지 연길 현지의 참석자들도 입을 열었던 것 같아. 1950년대에 태어났다는 어떤 교수는 문화혁명 당시 3년 반 동안을 하방으로 시골로 밀려갔지만, 공장 행을 원치 않고 기어코 공부를 더 하겠다고 고집하던 중, 마침 영어교육에 투입되어 영어가 직업이 되었다고. 기어코 원하는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구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어. 적어도 그때까진 나도 내 인생을, 미래를,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두통 때문에라도 눈을 뜨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마가 긴장되지 않아서 편안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비추이던 세상이 실은 겨우 내 속눈썹 사이로 비친 공간임을 깨닫는다. 눈을 감으니 다시 검회색 세상이 되고, 기억은 검은 호수를 향한다.

마침내 백두산과 천지를 향했지. 8월 초 일요일, 입추라지만 볕은 따가웠다는 기억이야. ‘도로수금소’를 지나니, ‘차굴’이 나왔어. 산삼과 꽃사슴뿐으로, 담비가죽 등을 생업으로 하는 동네를 지나자 어김없이 휴식시간이었어. 40여 분 쉬는 시간에 휴게소는 장사가 짭짤한 모양. 관광버스가 서너 대가 한꺼번에 서있었지 아마.

이어지는 버스 내의 분위기가 뜰밖에. ‘뀀’이라는 꼬치구이에 약술을 한 잔씩을 걸쳤거나, 잘 씻지도 않은 장뇌삼을 질겅질겅 씹은 탓이었나? 현지 안내원은 ‘만경대는 꽃동산, 우리들의 봄동산’이라는 북한 노래는 맛만 보여주고, 순 국산 노래방 수준의 ‘아빠의 청춘’을 감칠 맛나게 뽑았어. 참, 노래 잘하는 사람들…….

반딧불이 억수로 많아요!

안내원의 반딧불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낭만과는 멀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쪽 산에는 ‘피복’이 없단다. 그 민둥산 화전에 웬 반딧불만 유난히 많은데, 알고 보니 파종을 한 뒤 그것을 지키는 주민들의 한숨 섞인 담뱃불이더란다. 파종해 놓은 씨앗, 덜 익은 곡식도 마구 훔쳐가는 인심이라니.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일 년에 달포 정도, 그것도 아침과 낮에만. 파종이나 가을걷이 등, 일을 심하게 해야 할 때나.

마음 가득 애절한 동포애가 스멀거릴 쯤 ‘만경 관광 상품 유한공사’라는 곳에 도착했어. 중국에서 건물을 지어주었지만 운영 주체는 북한이라고. 한 더위에도 긴 통치마에 저고리를 받쳐 입은 접대원동무의 자태가 고왔어. 말씨도 조용하고 고왔지. 텔레비전에서 가끔 듣는 조선중앙방송의 아나운서들처럼 가열찬 목소리가 아니어서 신기했지.

상품은 크게 두 종류, 건강 상품과 자수 작품들. 어느 것 하나 가짜일 것 같은 냄새가 없는, 진지하다 못해 약간은 촌스러운 작품들이었어.

한샘, 여기 봄 와 봐요. ‘지저스 래핑’이라뇨! 웬 예수님에 웬 영어죠? 그러고 보니 상품 모두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것이군요. 봐요, 건강 상품들도 한국에서 열을 내는 것들로, 우황청심환, 상황버섯, 뭐죠 이건?

글쎄요, 아예 값이 한화로 표시되어 있군요.

한국 사람들 물건 사기는 좋아하나 봐요.

남의 나라 사람 말하듯?

누가 유럽관광 다녀와서 구찌 백을 샀다고 자랑삼아 얘기합디다.

그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요?

꼭 샤넬을 사려고 했는데 그 매장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 누가 묻습디다. 어디, 파리에서요? 하니까 그 여자 대답이 가관이어요. 파린가, 어디였지? 도시 이름도 몰라요, 이삼백 짜리 물건을 사고도 그 도시 이름도 모른다니까요.

여긴 그런 명품과는…….

우리 둘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지. 건물 주변으로는 장백산정원이 시작되고, 길가 코스모스와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것이 옛날 어릴 적의 정이 묻어났어. 어머니가 우리들 하얀 러닝셔츠에 물감을 들여 주시던 귀여운 패랭이꽃까지도. 그곳이 정말 중국 땅인가 싶었으니까.

버스에 오르니 연변의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어. 1870년대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족은 초가집과 벼농사를 특징으로 정착했단다. 두만강 아래쪽으로는 조선족이 많고 백두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중국인이 많은데, 지붕 모양을 보고도 구별이 된다고. 사방 기와가 조선족의 집이란다.

기와집 ― 그랬다. 우리 민족은 기와집에서 쌀밥에 고깃국을 탐했었다. 기와집 짓고, 아들 딸 낳아서 쌀밥에 고깃국 먹여 키우는 것, 그것이면 되었었다. 땅 따먹기 놀이처럼 재화를 불리려고 혈안이 되지는 않았었다. 옛날에 우린.

버스는 민송이라는 특별한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계속 달렸어. 소찬에 ― 상마다 삶아져 나온 토종닭도 있긴 했지만 ― 점심을 먹고 나서 막상 백두산 천지를 향할 때는 염려와 달리 하늘이 점점 밝아졌어. 미리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어 녹이는 것을 잊진 않았지. 차편으로 게까지 오른다지만, 고산의 환경을 견딜까 염려스러웠으니까. 어느 만큼에 이르니 모두 하차하여 친환경버스로 바꿔 타야 했지. 거기서부터는 사람 당 두 장의 입장권을 받았을 뿐, 일행의 개념이 없이 숫자대로 태워져서 난감했었지. 번호 붙은 짐짝처럼. 친환경버스로 달리는 시간은 25~30분, 다시 6인승 짚 차로 곡예등정이 20분 정도 소요되었나. 묘기행진에 참가하는 기분으로 흔들거리며 덜컹거렸지. 차창 밖 풍경은 점점 달라졌어. 여러 마리 나란히 서있는 소들의 허리나 엉덩이를 닮은 지형을 지나면서, 구름은 더 걷혀서 안심이었어.

백두산 한 귀퉁이가 갑작스럽게 드러난다. 너무나도 가까이에 솟아 있다. 그 너머가 천지란다. 해는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서, 서너 번의 관광에도 천지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사람들로 빼곡한, 저 불모의 언덕 조각이 백두산이라고?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너무 높게 차로 올라온 탓에 뒷동산보다 미약해 보이는 언덕. 모래와 자갈뿐인 산에서 신성은커녕 생명감마저 느끼려야 느낄 수 없다. 백두산 까마귀도 심지 맛에 산다는 말은 비유일 뿐, 까마귀 한 마리 없다.

아, 천지,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 못해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슴이 아프다. 삼사백 미터 깊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표면이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이 끝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확신이 든다. 마그마가 끓고 있다는 그곳. 천지, 그래 그곳이었구나. 그 높은 곳에서 지구의 핵을 실감했던 자리.

여기 사진 열두 장 4만원. 여기 사진 카메라, 여기 번호 잘 봐두세요 ―

유창하지는 않지만 한국말을 하는 왜소한 청년의 옷에는 006이라는 번호가 크게 붙어있었지. 어딜 가나 신흥 자본주의가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었어. 관광객들이 가진 카메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표면을 찍는다는 전제로, 아예 4만원 한국 돈으로 12장짜리 필름에 사진을 찍어주는 직업, 알바, 장사, 그런 것.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니 더는 볼 것도 없었지. 한 발짝 더 올라가면 좀 더 잘 보이겠으나, 장님 코끼리 보기는 매한가지일 터.

일행들보다 미리 내려와 보니, 간이건물 한편에선 커피 등을 팔고, 한편에선 기념품을 팔고 있었지. 기념품이라야 백두산 관련 사진들과 그 사진을 담은 열쇄 고리 정도. 늑장부리는 팀은 늘 있기 마련, 안내원이 흔들던 노랑 깃발이 그들을 불렀지만 소용없었지. 다시 짚 차, 친환경버스를 거치니까 입구였지. 왠지 허망했어. 멀리 돌아 돌아 백두산 한 조각 밟아보고 돌아서는 일이 마치 중간에 깬 꿈만 같았지. 처량하기까지.

장백폭포조선족 안내원은 기어코 백두폭포라고 하는데 ― 폭포관광은 도보였지. 비껴 옆 입구를 통해 처음엔 느슨한 기울기로 시작되고. 사람들은 벌써 멀리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계곡을 보고 놀라 탄성을 올렸어. ‘백두산에 걸린 두 필의 비단’을 일 년 내내 볼 수 있다지만, 그렇게 은색으로 빛날 줄은 몰랐으니까.

나있는 평길은 가파르지 않지만, 멀리 바라보이는 폭포를 보면 중간에는 가파른 곳이 있어 보였지. 아니나 다를까, 입장료를 낸 다음부턴 길은 갑작스레 가파라졌고, 더 가파른 층계를 오르자 곧 물이 나타났지.

한 여름인데도 발을 담글 수 없이 차가운 물에 살짝 씻어보는 것이 고작이었어.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은 오를 수 없다 ― 라고 그리스인들이 그랬다던가. 나 또한 분명코 이 쏟아져 내려 흘러가는 물에 다시 발을 적시는 일은 없을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어 노천지수영지가 있었지. ‘노’는 ‘이슬 로’자를 썼더군. 더 큰 간판은 한글로 ‘세계 제일의 성산 백두산 자연유황온천수탕’, 그 아래 한자로 ‘세계 제일적 성산 장백산 천연유황온천욕’이라 쓰여 있었지. 83℃. ― 게서 의견이 갈릴밖에. 온천욕을 하자는 그룹과 아니라는 그룹. 아닌 쪽 사람들이 한 시간을 기다려주기로 했는데, 바깥바람이 좀 셌나. 길가에는 조선족 풍미의 냉면 등이 20, 30, 40위완, 쾌찬은 20위안이라는 선전이 즐비했고. 길 건너엔 ‘순 한국식 음식’, ‘원두커피’라는 팻말도 보였어, 한국 어디 시골처럼. 낡은 집과 어울리지 않는 새 문구들.

현지 안내원이 불러서 안으로 들어갔었지. 센 바람은 피한다지만, 로비의 커피숍 자리에는 앉기만 해도 10위완이었어. 피곤이 차츰 내려앉을 무렵, 옆방에서 우리 곡조의 단소 소리가 애처롭게 건너왔었지. 그리운 옛 임이여, 언제나 오려나~. 애처롭다 못해 찔찔 짰어. 영락없는 몇 십 년 전의 한국 풍경. 입욕한 사람들은 약속된 6시가 지나도록 감감했고, 결국 15분 이상 지나서야 슬슬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버스 안이 갑자기 술렁거렸지. ‘저녁에 소를 잡는다’는 행사 때문. 송아지 값이 한국의 1/10, ‘겨우’ 50만원이라나. 버스 한 대 사람 모두가 먹고도 남을 값이라면 합리적이라고.

식사 후 이어지는 파티는 지난밤의 연속이라는데, 우리는 그때 빠졌기 때문에 실력들을 잘 몰랐지. 그때 벌써 마이클 잭슨이니 뭐니 별명을 갖게 된 인사가 있었지, 첫날 아내가 따라주는 낮 맥주를 한 없이 마시던 사내. 이번엔 가곡을 부르겠다더니, 일행들의 선택으로 「명태」를 부르는 품이 대단하긴 했어. 깡마른 작은 체구에서…….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 지라도~.

그 사람 뿐 아니라 다들, 정말 다들, 길고 긴 노래, 어렵고도 어려운 노래들을 잘도 불렀어. 배를 움켜쥐어가면서도 불렀으니까. 어디에 살던 가무에 심취하는 민족이 틀림없는 게지. 즐거움이 많은 민족? 삶의 무게, 삶의 슬픔을 즐거움으로 뱉어내는? 속내를 토하는 말은 접고 가무로 상대하니 더 외로울 것 아닌가? 외로움과 슬픔을 음주 가무로 포장해서, 나는 내 노래를, 너는 네 노래를……. 그렇게 함께 외롭게 밤은 깊어 가는 거다.

식중독 뉴스가 다음날 아침 모두를 놀라게 했었지. 그때 묵은 호텔은 장백산대하. 그곳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라 했는데. 5시에 모닝콜 ― 아침 ‘찬청’에 들어가자 그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밤중에 일행 중 한 부인이 병원에 실려 갔다니 놀랄밖에. 우려했던 식중독이었어. 여럿이 배탈을 호소했고, 아예 아침을 굶거나 버스 안에서 운신을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누구는 간밤의 송아지를 의심했고, 또 누구는 생간을 세 접시나 비웠어도 멀쩡하므로 송아지는 아니라 했지. 갑론을박. 대개 생각이 모아지기로는 점심부터의 식당 물이 주범이라고. 한국인들은 현지인들과 달리 물에 오염에 약하지. 무슨 대가를 치렀든 단 기간에 몸이 위생에 민감한 문명인으로 대단한 발전(?)을 했으니까. 동료와 나는 내가 ‘향수에 젖어’ 잔뜩 사 들고 간 에비앙 덕분에 탈을 면한 듯 했어. 향수 ― 사오년 파리 생활의 향수가 고작 생수에 머물다니 초라하지만, 그래도 좋은 일 한 번 한 셈 아닌가.

한국에서 간 가이드는 환자일행과 미리 연길로 향했으니까, 그제서부터는 현지인이 안내를 독점했지. 안내원 자신은 친정 쪽 고향은 합천이지만 시댁이 부안 뿌리이다 보니 전라도식 조선시대를 사는 편이라고 우겼어. 남편이 밖에서는 한턱 쏘기가 일품이며, 집안에서는 짠돌이라 어떤 도움도 안 주더란다. 전라도 남자들이 다 그런가? 일행 중에 전라도 부부가 있었는지 다들 그쪽을 바라보는데, 나이 들어 보이는 남편은 웃고만 있었지. 그런데 안내원은 이삼년 전 한국에서 경험한 사건이 있어 ― 한 여성국회의원이 공개석상에서 남성의원의 머리통을 ‘쥐알리는’ 것을 보고 ― 이젠 집에서 남편에게 엇서기도 한다며 깔깔댔지. 한국 여성의 위상이라니!

어쨌거나 56개 민족의 다민족 국가 중국에서 여자는 조선족 여자를 제일로 친다고. 가무에 능하지, 성격 깨끗하지, 남자들 시중 잘 들지…… 자화자찬이지만 귀여운 여자였어. 조선족 여자는 조선족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제일로 쳤었지만, 그건 과거사다. 이젠 돈과 권력과 학력을 지닌 중국남자와 결혼하는 예도 생긴단다. 고등 졸업 후 대도시의 한국기업에 취업했다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빈자리를 탈북녀들이 들어와서 메운다는데. 다시금 졸다가…….

두통은 여전하지만 배고픔이 눈을 뜨고 싶게 한다. 성긴 속눈썹으로 무거운 눈 뚜껑을 열기가 힘들다.

눈동자가 움직이네요, 잠에서 깬 거 맞지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긴장을 불러온다. 아, 나는 아직 이쪽이구나. 그러니까 그쪽, 내가 있었던 쪽. 배고픔도 그렇고 그 목소리 또한 증거가 된다. 안도감에 오히려 넋이 나갈 것 같다. 눈을 뜰까 말까……. 깬 줄 알면 질문을 해댈 것이고, 난 적어도 변명이라도……. 아직 자신이 없다. 배고픔을 참고 눈을 감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살그머니 멀미가 인다.

용정을 향한다. 기다려지던 마지막 일정이었지. 처음에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어. 한국에서처럼 호화분묘는 아니어서 대리석이나 화강암 묘석은 아닌 듯 했어. 어쨌거나 나무 말뚝에 페인트로 이름을 남겼더라도 이만 명이 조금 못 되는 조선족은 자신의 문화에 따라 매장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니, 좀 놀라운 일 아닌가. ‘작은 거인’ 등소평이 첫째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해주었고, 둘째, 매장문화를 변혁하는 데 성공했지만 조선족은 예외라고. 그러니까 어떤 중국인도 토장을 금하며, 물론 비석도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데, 그런데도 조선족은 생일제 외에 추석과 청명에 제사를 드려도 된단다. 조선족 차별을 선입견으로 지녔던 우리로선 차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한 점에 감동하며…….

용정 길거리엔 대하극 『토지』에서 보던 인력거가 눈에 띄었는데, 이것은 3등 택시로서 도문과 용정에서만 볼 수 있는 열악한 생존조건이랬다. 시내에서는 거리에 관계없이 ‘일인 일위완’인데, 당시 우리 돈으로는 1400원 정도. 하루에 서른 번을 운행하더라도 점심 값 등을 제하고 나면 20위완 정도의 수입이라고. 난 왜 하필 화폐단위에 민감했었지? 한국에는, 고향에는 절대빈곤이 없다는 인식인가. 위안인가. 외면인가.

용두레 우물이 있던 땅에 ― 그래서 용정이라고 했다 ― 1860년대 함북에서 살길을 찾아 이주한 조선인들이 집을 앉히고 밭을 일구었더란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 오른쪽 산 위에 비암산의 천년수가 있었단다. 이 소나무 아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 의지를 불태우곤 했으니, 독립군의 보금자리를 그냥 둘 일본이 아니었는지라, 산 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시켰다 했다. 그렇게 일송정은 죽어 넘어지고 없고, 용주사마저 문화혁명 때 사찰 탄압 가운데서 사라졌다. 멀리 바라보이는 일송정 터는 왜소하기 그지없고, 「선구자」에 일송정과 함께 나오는 해란강 또한 실망스러웠지.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했어. 건너가는 용문교 또한 한없이 초라한 그냥 다리일 뿐. 이 허탈함이 또 어디였더라?

미라보 다리 ― 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미라보 다리는 그러나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퐁뇌프 다리에 비할 수 없이 초라했었지. 그때의 가슴이 멎은 듯 아렸던 기억이 왜소한 용문교를 건너면서 되살아난 거야. 그래, 전설은 전설이어야 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미라보 다리엘 가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진실은 초라할수록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 아파오네. 배가 고프면 아프다고 느끼는 착각은 나이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설마 소리를 질러 누굴 부를 수도 없겠고. 이 이율배반을 어쩌나, 배는 고프고 눈은 뜨고 싶지 않고.

윤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대성중학 ― 「서시」를 새긴 시비는 ‘사립대성중학교’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구관 건물 앞에 있었지. 1921년에 건립되었고 다 무너졌다가 1994년 금성출판사 김낙준회장이 복원했다는 학교는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있었지. 잔디에는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우릴 반겼어. 웃음이 나게 촌스러운 문구가 정답다 느낄밖에.

바로 구관건물 2층이 기념전시관이었어. 사진, 화보,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지. 용정 출신의 다른 인사들의 역사 또한 전시되어 있고,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물론 철혈광복단의 15만원탈취사건 등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을 들었어. 현재 2,200명 남녀 조선족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설명을 끝으로, 마지막 방은 방문록을 작성하는 곳이었지. 이름 칸 옆에는 장학금 기부 의사를 표명해도 좋다는데, 어느 화폐이건 어느 액수이건 환영이라고. 초라한 봉투를 내민 손이 부끄러운 김에 서둘러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 쪽에서 문득 조그만 입구를 발견했어. 층계참을 이용해서 책을 전시하는 곳 같았지. 대개가 스치고 지나갈 위치에다, 실제로 그곳을 들르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어. 하지만 한적하기 때문에 들러보고 싶은 그런 곳. 아니나 다를까 고작 여남은 권의 책들 중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발견하곤 얼마나 기뻤던지. 손바닥 보다 조금 더 넓은, 두께 또한 왜소한 20위완짜리 소책자. 책장을 확 펼치는데 짧은 시가 눈에 들어왔어. 72쪽, 제목은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것이구나, 우리는. 슬픈 몸을 감추고 떨쳐 일어나는, 이것이 우리의 뿌리였구나! 정신이 버쩍 들었지. 난 이 시집을 찾으려고 여기에 왔음을 직감했어.

버스를 타자마자 책을 폈지. 「서시」는 졸업 직전인 41년 11월에 쓴 것이고, 졸업 기념으로 원래 『병원』이라는 시집을 출판하려던 계획은 「서시」를 쓴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로 제목이 바뀌었지만 출판은 좌절되었다는 것. 도쿄입교대학 영문과에 유학했다가 첫 여름방학에 용정을 방문한 것이 마지막 길이 되었다는 것. 아, 동생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던 당부는 혜안이었어. 1943년 징병영장 발부 와중에 체포되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2002년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발행. 용정의 조선족은 용정 땅에 유골로 돌아와서 묻혀있는 윤동주를 잊었고, 1985년에 연변대학 조문학과 교수와 와세다 대학 교수가 함께 윤동주의 묘를 찾았을 때까지도 그와 그의 문학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지. 다행히 용정중학교의 역사과 교사가 ― 언제나 어떤 한 사람이 중요하다 ― 그를 기억하여, 용정 그리스도교인 묘지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니. 지금은 묘소 뿐 아니라 생가도 복원되어 있고…… 그런데 우리 여행 일정에는 거기까진 포함이 되어있지 않았으니 서운할 뿐.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곰들을 보게 되었지. 반달곰의 수명은 25년쯤인데, 동방곰 사육기지에서 집단으로 사육되고 있었다. 총 1,600마리 규모를 자랑하는데, 태어나서 3~5년 사이에는 백두산에 자연 생육했다가 이곳으로 잡아들인다고. 게서 1년간 주 1회의 쓸개즙을 빼는 의무를 다하면 자연수를 누리며 살게 된단다. 죽을 때까지 쓸개즙을 뽑지 않고 자연수를 누리게 해준다니, 퍽도 인도주의적 발상이겠다!

코앞에서 바라본 거대한 곰들은 몸집이 큰 만큼 눈이 작았어. 하지만 말없이 우릴 바라보는 흐릿한 검은 눈알은 영겁의 물, 천지의 표면과 같은 물기에 젖어있었어. 마치 슬픔이 번져난 눈물처럼. 곰들도 울 거라 생각했어, 포유동물이잖아. 사람처럼 발바닥으로 걷는 모습이라니, 갇혀있는 그들이 지능이 낮은 식민지 인종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다 싶었어.

그렇게 해서 연길로 돌아와서 다시 대련으로, 이번에는 그곳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었지. ‘완다구어지판디엔’ ― 대련만달국제호텔은 23층의 최신식 건물로 객실은 383개나 된다는 대형호텔이었지. 숙박료는 60불 정도. 호텔에 투숙한 시간은 거의 11시였는데, 그 시간에도 밤나들이를 가는 일행들 때문에 복도가 떠들썩했지. 아침에 어쩌려고 그러는지, 세상엔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많음에 놀랐어.

어김없이 5시 반,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동료는 부스럭거리고 짐을 챙기고 있었지. 눈도 잘 떠지지 않은 채 집어 삼킨 아침 식사, 단체가 무섭긴 무섭다 싶었어. 늦잠꾸러기인 내가 단 한 번도 늦질 않았으니.

그래도 한 고비가 더 남았었지. 비행장으로 향하던 버스가 어떤 네거리에서 오랫동안 막혀 서 있게 되자 일행들은 조금 술렁였어. 빨리도 이륙할 수 있는 것이 중국항공 아니던가? 그런 불신도 없진 않았지. 무엇보다 우린, 한민족은 늘 조급해. 오랫동안 없었기에, 없음을 체감했었기에 핏속의 허기가 조급증을 일으키는 것 아닐까. 얼핏 풍요의 외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같을까, 곧 사라질 신기루일까 봐 두려운 것일까.

탑승수속을 마쳤을 땐 8시가 지나있었지. 8시 20분 발 비행기에 빠듯했어. 백두산 한 귀퉁이, 망연히 만져보았던 마른 흙의 느낌을, 검은 물 표면의 뭉클한 기억을 함께 할 작은 시집이 손 안에 있었지. 언젠가 고서점에서 1958년 발행된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을 건졌던 때의 뿌듯함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아픔 같은 느낌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쥐고 있었지. 흰 고무신이……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내 운동화는 나이키.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꿰입은 다리가 조금 민망했어.

이 헐렁하다 못해 벗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힘들게 떠본다. 속눈썹이 성기길 다행이다. 반쯤만 뜨고도 세상이 내어다 보이니까. 창 쪽에 걸린 커튼이 여린 연두색 햇살을 통과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시원한 공기는 초봄이라고 말하지 않고 뭔가 인공의 냄새를 풍긴다. 아래를 보니 넓은 흰 천이 내 슬픈 몸집을 가리고 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노란 경계석이 떠오른다. 나는 그것들을 넘어 물속으로 발을 내딛었던 것 같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거꾸로 곤두박질쳤고……. 나는 아직 기억이 살아있다. 느낌도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나 보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짙푸른 물기가 번진다. 천지에서 퍼 올린 검은 물이 범람하고 있다.

..........................

『광주문학』 2014 봄호(통권 70)호, 49~66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3. 25. 23:54

 

「목소리」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졌구나, 라고 느껴졌다. 오늘 아버지와 나누시는 가벼운 대화에서 그랬다.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한다니까요.

빈 밥그릇 국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생소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집으로 가자고 작정한 것은 명절엔 더욱 허전해하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들 없이 딸 셋을 둔 부모님의 얼굴엔 딱히 썰렁함은 아니라 해도 뭔가 어색함이 어른거린다. 애써 괜찮다는 과장으로 포장되어 표피가 평상시의 부드러움을 잃는다. 부드러움을 잃은 주름은 갈라질까 말까 바스락거린다.

 

이번 설에도 막내 옥실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 사는, 미국인이 된, 미국인과 결혼한 옥실인 만일 한국에 온다더라도 설이 아닌 추석에나 올 뿐이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미국의 큰아버지에게로 입양되어 간 옥실을 어머니는 가슴에 두고 사실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지막 미토콘드리아의 전수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머니에게서 딸들로만 유전된다는 미토콘드리아 ― 막내는 정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름도 제이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둘째 은실은 늘 가까이 있다. 바리데기 ― 일곱 번째 얻은 딸은 아니나 부모님 곁을 유일하게 지키는 은실이 바리데기가 맞다. 언니와 막내에 끼어 치인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도 시쳇말로 다 못해서 그렇다. 은실은 고 1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너무 가까이서 겪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대학진학을 접었다. 하지만 일찍 결혼해서, 지금까진 우리들 중 유일하게 손자 손녀를 안겨 드린 효녀다.

 

나 ― 어쩌다 막내서부터 거꾸로 설명이 되었는데 ― 맏이인 나 한금실은 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그러하듯 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일직선으로 나갔다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땐 벌써 은실이 김실이 된 후였으므로, 나는 원래의 금실 대신에 한박사로 불렸다. 더구나 한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엔 어딘가 자랑 비슷한 여운이 깔렸다. 지금도, 그 한박사가 명예도 돈도 별로 들여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건 여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1944년생으로, 요즈음에 말하는 신중년 세대이시다. 일제 강점기 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그들은 일제 때 강제징집당한 146만 한국인의 숫자가 말해주듯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던 세대다. 또한 형제들을 사상의 갈등으로 잃기도 한 세대가 그들이다. 국제평화기금이 들어오던 때에는 갑작스레 경제무대에서 은퇴 당한 신중년 세대의 운명 ― 거기에서 아버진 자유로우시다. 교사는 강제 은퇴는 없었다. 대학 공부는 겨우 열에 하나나 했을 이들 세대에서, 아버지도 사범학교 졸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가 야간대학 과정을 밟아서 대졸에 합류하신 전설적인 분들의 하나이다. 다만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다. 2008년 은퇴하시기 전에는 딸자식이긴 해도 자식인 내가 좋은 자리를 잡을 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박사가 모교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은퇴 후 오륙년의 시간을 우울한 적응기로서 사시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묻지 마라 네 살 터울이시다. 6.25 때 기억은 없다 하시는데, 큰 이모는 엄마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담벼락에 붙어 선 채로 오줌을 줄줄 싸는 세 살짜리 겁쟁이였다고 놀리신다. 물론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겁쟁이란 느낌은 없었다.

 

엄마, 정말이세요?

뭘?

엄마 어려선 무지 겁쟁이셨다고?

느이 엄마 지금도 겁쟁이다.

엄마가 겁쟁이?

그래. 엄마가 뭐 딱히 하는 것 봤냐?

하루 종일 평생 하시는 건 뭐고요?

이런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지. 엄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하고 살다가 죽는 게지.

엄마는.

정말이다, 엄마는 한 것이 없다. 딸 셋 낳은 것 말고는.

우리 키우신 건 다 어떻고요.

키우다니, 그냥 너희가 절로 자란 것이지. 내가 뭘 했냐. 품을 팔아 과외를 시켰냐, 차를 태워 나르기를 했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달라졌다. 무심한 듯 말 속에 심지가 생겼다. 뭘까. 설 명절의 부담 때문일까? 설은 아무래도 세배 문화 때문에 공휴일 상관없이 길어지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떡국상이다. 그러려면 음식 수급도 절묘한 솜씨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어머니가 시장보따리를 여럿 챙기셨다. 내가 유럽에서 가져다드린 낡은 무명 홑겹 가방을 여태도 쓰시며, 그 안에 다른 보자기 가방들을 넣으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추운 체 하면서 어머니의 팔을 꼈다.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외사촌의 전화번호가 떴다. 팔을 풀고, 양손 손가락에 여러 개 시장보따리를 걸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실아, 오빠야.

아이쿠, 웬 일?

너랑 의논할 것이 좀 있어서.

나랑 의논을? 의논을? 어디 있는데?

그렇게 만난 외사촌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따끈한 아메리카노 잔에 손을 굽던 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커피 취향이 바뀌었네! 참, 곤충 연구는 겨울엔 좀 쉬는가?

명색이 학문에 여름 겨울이 있겠어? 금실아, 넌 그런데 왜 결혼 안 하냐?

그러는 오빤 왜 안 하는데?

거야, 나는 남자고.

뭐야, 여름 캠핑장에서랑 똑같은 레퍼토리네. 다른 이유를 대 봐!

외사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환상이 깨진 지 오래였나 봐.

환상이 깨져?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래.

외숙모를? 외숙모가 왜?

그때 왜, 우리 아버지 갑상선 수술 하실 때.

언제 적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술을 앞 둔 날 밤, 어머니는 병원 침상 곁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 주무셨어. 물론 나도 보호자 노릇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수술이……. 기분이 묘했어, 어머니가 고생 덜 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머닌 만일의 사태가 걱정도 안 되셨는지.

그거야, 아버지들이 씩씩하시잖아. 울 아버지 돌발성난청 치료하실 때도 열흘 넘게 아버지 혼자서 병원에 계셨는걸.

그건 좀 다르지, 난청하고 암이 비교나 되나? 또 그 뿐이 아니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하실 때도 좀 거북했어. 아버진 동위원소 캡슐 치료하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 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랬거든. 식구들이 다 같이 동위원소에 노출되느니, 아버지 혼자 계시다 오시는 것이 맞다고. 생수병 둘을 챙겨 호텔로 따라나서는 날 아버지는 말리셨고, 어머닌 화까지 내셨다니까, 나더러 속이 없다고! 그 세월 지나고서도 부부라는 것이 영원한 평행선이고 남남일까, 난 혼란스러웠어.

그만 둬. 외숙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이고. 다 지난 일을 왜 그래. 외삼촌도 건강하시면 되었지. 오늘은 뭔가 다른,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아니었어?

 

외사촌은 더욱 뜸을 들였다.

그게 글쎄.

오빠 뭐? 누구 사귀는 거야? 집에선 반대하고? 아님 선 자리 나온 거야?

그게 글쎄.

글쎄 라니, 어떤 여자인데? 같이 살기라도 해?

살기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신경이 쓰인다는 대상은 …… 외사촌은 아예 더듬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알고 보니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이웃 학과의 연구전임이 된 친구인데, 겨우 한 학기를 멀리서 보고 지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상쾌함과 긴장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단다. 그가 먼저 앉아 있다가 외사촌을 보며 갸웃하고 인사하는 동작, 함께 온 사람이 있더라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앞을 보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사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란다. 해서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판기 커피를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여러 번이었단다. 종이컵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다가 눈을 치뜰 때면 왼쪽 눈썹이 더 올라가고, 미소 또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더 밀려 올라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같은 이공계면 철저히 다름의 매력 그런 것도 아니고.

취민 달라. 나는 사진을 찍으러 숲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그 친구는 사진엔 관심이 없더라고. 대신 영화광이야, 안 보는 영화가 없어.

오빠도 영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난 근년 들어선 뜨악한 편이었어. 그 친구랑 몇이 어울려 꼭 한번 함께 갔었지. <러시: 더 라이벌> ― 에프 원 그랑프리 실화라고, 뜨거운 가슴이 있는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영화라고 부추겨서. 헌데 스크린 속의 무서운 질주나 크리스 헴스워스의 매력 대신 그 친구 옆얼굴만 훔쳐보게 되어 못할 짓이다 싶었어.

병이 깊네.

병이라고? 넌 유럽형 인간 아냐?

유럽이 왜 나와, 여기서?

네가 공부하던 파리는 자유의 심장 아냐?

웬 자유? 평등, 박애까지를 다 말하려면 또 몰라.

그게 아니라, 파리에선 동성애자 시장에, 또 대통령들도 사생활은…….

사르코지나 올랑드? 우리 눈으론 좀 고약하지. 난 성적으로 그렇게 자유분방한 쪽이 못 됩니다요, 오라버니!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석 달 만에 젊은 연예인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 것 쯤 아무도 상관 않았었지, 프랑스 사람들은.

오빠,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어? 20년간 살았던 부부였어, 것도 이미 재혼으로. 그 사이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또 새 여자도 애 엄마고! 아이들 어지럽게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금실이 너 고리타분 맹추구나. 그럼 지금 대통령한텐 더 욕을 해대겠네!

남의 인생에 무슨 욕까지야.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심해. 결혼이 아니고 동거관계라서 그러는 말이 아냐. 애를 넷이나 두고서도 첫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 여잔 사회당 당수였어. 차라리 그 여자나 대통령이 될 일이지. 암튼 따로 애가 셋 있는 두 번째 여잔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있었지, 잠깐. 그러다 또 여배우야? 뇌에서 분비되는 짝짓기 신경물질의 유효기간만 지나면 상대를 갈아치워? 정치적 역량은 역량이고, 난 그런 사람들 너절하다고 생각해. 섹스가 뭔데? 인간사 필수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갈아치우는 게 능사는 아냐. 몸도 맘도 그렇게 둔갑을 한다면 그게 철새지 뭐야.

새는 또 왜!

 

내가 잠깐 실수를 했다. 동물학 전공의 외사촌에게 새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전문가적 지식이 쏟아질 판이 되었다. 나는 커피 잔을 얼른 들어서 식어버린 나머지를 홀짝거렸다.

 

 

갈매기도…….

뭐야, 곤충박사님께선 새를 능멸하는 것에도 분개하시나? 갈매긴 또 뭔데?

분개까진 아니지만, 갈매기도 동성애를 인정받는 세상에…….

동성애? 갈매기가 동성애를?

그래, 갈매기의 동성애.

너무 멀리 간다, 오빠.

아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들 심심찮게 있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둥지를 틀어서는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

알을 낳는다고? 암컷끼리?

아니, 미수정란이나 단위생식 그런 게 아냐.

그럼, 알은?

살림은 암컷 두 마리가 차리지만 짝짓기는 각각 주변의 수컷들을 만나는 방식이지. 어쨌거나 번식에 성공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암컷들의 공동생활이지 무슨 동성애란 이름을 붙여?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오빠, 동성까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 동성애야? 그건 아니지. 암수 간에 사랑해서 살림을 차리고 자식 낳자고 성애와 교접이 따르는 것 아냐? 모르긴 몰라도.

로이와 사일로 이야기도 몰라?

누군데?

맨해튼 동물원의 펭귄들, 만화도 나왔는걸. 그 둘은 암컷 펭귄들일랑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뭐냐, 절정행위도 한대, 목을 감고 그러는 성관계를.

설마 아기도 낳았대?

또 아기 이야기냐! 돌멩이를 알처럼 품으려고 해서 유정란을 넣어주었더니 서른 날 넘게 품어서 알을 깨우고 또 길러냈대. 완전한 입양가족 아냐?

글쎄. 입양가족 쪽은 맞지만 부부도 부모도 아냐, 분명.

부모는 아니지만 동성애 양친!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천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녹청색 계열의 체크 패턴의 무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오빠, 난 이런 무늬가…….

소용없었다. 외사촌은 이야기를 접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다.

 

 

동성애 ― 외사촌의 생각으로 자신은 동성애 성향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데……. 대체 뭐냐, 이건?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외사촌은 아마도 긴 싱글 기간을 보내는 나 또한 그러한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지 탐색하는 눈치였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리에서 한 때 젊음을 보낸 내가 상당히 진보적일 것이라 믿었기에 이해받기를, 뭐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맹꽁이 답답이다. 엄격했다, 그 부분은.

 

외사촌은 알리바이 모양 역사 속 유명인들의 동성애 취향을 꿰고 있었다. 다빈치의 젊은 시절의 ‘불경한’ 행위들, 미켈란젤로가 미소년에 보냈던 소네트며 젊은 귀족에게 헌신했던 만년의 애정, 차이코프스키의 조카에 대한 비뚠 열정. 랭보는 어땠는데? 그건 부정 못할 것이라고 외사촌은 들이댔다. 푸코는 어떻고! 심지어 여자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사포의 레스보스 섬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팅게일도 사촌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거절당해서 전장으로 떠나버렸다는 둥. 외사촌은 마치 공부라도 해 둔 양,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신화며, 소위 그리스 사랑 ― 성인과 소년 간의 사랑 ― 또는 고대 아시리아의 보편적 동성애 문화까지 증거로 들이댔다.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때의 사랑은 분명 우정이 심화된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을 사랑하듯 동료의 철학을, 철학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두고도 갑론을박이었다. 외사촌은 플라톤의 동성애 증거라 했고, 나는 바로 그 말이 동성애가 아닌 정신적 우정에 관한 증거라고 했다. 한 문장이 두 상반된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와 가능한 번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행위는, 그러니까 의사 성행위는 암컷과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결코 성애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몇 명의 잘난, 똑똑한, 개성 있는 유명인들이 동성애를 표방하고 경우에 따라서 결혼예식을 한다고 치자. 사실 파리 시장 들라노에만 해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자임을 표방하고도 당선된 게 맞다. 2,3년 전 파리에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50만 명 시위에 들라노에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며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력한 인사들의 성정체성이니까 특별히 존중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 주장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중에 점점 더 완고해져갔다.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 이게 결혼의 사전적 정의다. 헌법에도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한다고 된 것 같다. 불문율에서도 남녀 양성이 전제다. 남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을 하든, 동거생활을 하든, 흔치는 않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도. 그러나 남녀의 결혼 또는 동거와 동성의 동거를 동일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외사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치 않은 독설에 찔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고?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를 위한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가 이루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의미에서 동성결합을 원하는 생물체는 특이종이다. 어쩌면 불완전하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또는 양성애는 ― 난 그런 이분적인 용어 자체의 도식이 틀렸다고 보는 쪽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것이, 둥근 거울과 네모난 거울 중 어느 것을 살까 하는 소녀의 망설임이라거나, 점심에 설렁탕을 먹을지 순두부를 먹을지 망설이는 직장인의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울은 거울이고 밥은 밥이고, 그런 건 늘 둘 다 똑같은 가치이니까. 하지만 동성애란 ― 성애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암수의 결합이 껄끄럽고 내키지 않은 대신, 동성을 그리워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동성애라고 할 뿐이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 동성애. 뭐라든지 단어는 가능하겠지만, 원래의 성애와는 성격이, 질이 다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생산적 짝짓기를 변호했다. 생물학자 외사촌 앞에서 점점 더 생물학 이야기로 빠졌다. 적진으로.

동성결합은 유전자 복제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복제라는 원초적 욕구를 모르는, 회피한, 버린 생물체들이 벌이는 사랑은 뭔가 자연의 범위를 벗어난다. 키가 병적으로 너무 작아도 커도, 정상 범위를 벗어나도 똑같이, 돈이나 생산성이 많건 적건 똑같이 그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이더라도 인격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최근 교황님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말하는 성 소수자 동등권 운운도 사회적 인격적인 차별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성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의 비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 ― 프랑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때 파리의 동성애자들 시위 때. 어떤 종의 모든 생물체가 동성애 성향이라면 결과는 그 종의 도태다.

 

도태? 그 단어에서 외사촌은 완전히 함구했다.

나는 불확실한 전문용어까지를 동원해가며 개똥철학을 읊어댔다.

밈 ― 문화적 유전자라. 복제 과정에서 진을 살찌운다는 밈이라는 인자, 이 밈의 세력이 대단한 건 증명되었지. 우리가, 수백만 인간들이 예컨대 ‘신’이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처럼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공유하게 된 것들이 그런 작용이라지? 그렇다고 동성애의 밈이 인류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 손해가 나는 방향으로 진화할 리가 없으니까.

 

외사촌은 눈도 껌벅거리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녹음기처럼 지껄였다.

알게 모르게 서양 흉내쟁이인 우리들,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글쎄. 물론 동성 간 혼인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아니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것이 법으로 인정받는 서양 어느 곳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양의 결정이니까 법이니까 옳은 것은 아냐. 옳지 않은 법을 몰라서 그래? 단 기간에 만들어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 전쟁도 법의 이름으로, 인종청소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어. 법 이야긴 접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 ― 소중한 말이지. 정치적 소수의견, 생물학적 약자, 모두 강한 다수가 배려해야할 대상이지.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 그가 그 일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것이 자랑은 아냐. 어쨌거나 프랑스에선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벌금형이 없어졌지, 120년 동안 ‘사회적 장애’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과했던 법이 사라진 거야. 곧 이어 정신병 리스트에서도 동성애가 삭제되었어. 그렇다고 육신이, 정서가 완벽한 건강상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젊고 건강한 암수는 원초적 본능으로 짝짓기를 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넌 뭐야, 넌 왜 이렇게 사는데? 짝짓기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라면서?

침묵하던 외사촌이 내 약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평소에 정리가 된 견해도 아닌 말들을 즉흥적으로 외사촌에게 떠들어대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침묵에 외사촌도 머쓱해졌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빈 커피 잔을 들기도 어색해진 나는 테이블보의 녹색과 짙은 청색 사이에 섞여 짜인 버건디 색상의 가느다란 올에 집중해서 비율을 셈하려고 했다.

 

 

아냐. 아니거든!

건너 편 옆 자리에서 제법 큰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다 같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빠. 아녜요. 쟤네들 좀 봐.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남자애 같은 남자애, 여자애 같은 여자애가 드물어. 유니섹스인지 옷도 저렇게 비슷하게 입고 다니지. 우리 둘 다 쟤네들 쳐다보면서 그게 여자애 목소리라고 느꼈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쪽이 여자애라니까.

그게 뭐.

남자들 입장에선 여자들이 버거워졌을 거란 말이지. 요즘 괜찮은 남자가 되려면 돈이 엄청 많은 집안이거나 빵빵한 직업이 있거나, 그러고도 키가 커야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갖춰? 다 갖췄다고 해도 연인에게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다고들 하지. 바꿔 말해도 그래. 괜찮은 여자란 돈 많은 집 딸이거나 최소한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 있다거나, 그러고도 예뻐야 하는데…… 누가 그래. 다 어렵지. 이성에게 들이댈 자신들이 없어진 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지.

 

오빤 대꾸를 않는다.

아님, 저쪽을 봐. 쟤네들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차렸네. 하지만 뭣들 하고 있나 봐. 각자 휴대폰 들여다보며 뭘 하느냔 말이야. 뭘 하러 만나서는.

우리처럼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음 아저씬가?

그래,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지.

그렇게까지 자조적일 필요는.

자조적이 아니라 현실이 우울하게 하지. 요즘 뉴스 안 봤어? 세계 부유층 85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가진 것과 같다는데 뭐. 1%의 부유층이 50% 빈곤층의 65배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거야. 인구 절반이 버러지야. 절반만 그런가. 아래 절반 보다 나아보았자 상대적 박탈감으로 꼬여있어, 마음들이. 뭔가 자연스러워야 생명력이 넘치고 짝짓기도 하고 싶고 그러지, 후손 번식에 대한 의욕이 솟구칠 것 아냐.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로 위로받고, 가능하다면 유사 성애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부의 불평등 문제까지 가냐! 넌 문학연구가 아니라 사회학 했어?

부의 불평등은 ― 전공과 무슨 상관? ―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부패를 조장한다는 말이 맞아. 부의 완강한 대물림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살 맛 나지 않는 세상이지.

살 맛 나지 않아서, 이성에게 구혼하지도 후손을 구하지 않고 동성 사이에서 안주한다?

뭐,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엔 교육 자체를 포기하고 등 돌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잖아.

그래, 니트라 그러더라. 낫 인 에듀케이션, 엠플로이먼트 오어 트레이닝.

우리나라에선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니트족 통계가 70만 명도 웃돈다고 본 것 같아. 한줄 서기에 아이들이 죽어 가. 옆자리 짝꿍도 경쟁상대로 보라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를 도망치는 거야. 대학에서도 희망이 없어 자퇴하기도 하고. 자괴감이나 대인기피증은 당연, 사회구조 전체에서 비껴서있는 것이지. 가부장제로 받침 되는 건전한 사회조직? 어림없어. 반사회적, 아니, 비사회적인 건 틀림없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거야. 또 교육을 많이 받음 뭐해? 정규직이 안 되는, 못 되는 점에서 우리라고 다른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체제에 들어가? 결혼이 말이나 되냐고. 분업시대 이후론 싫든 좋든 어떤 톱니든 톱니가 되어야 겨우 사는데 말이야.

톱니 인생. 그래 정상적인 톱니만 되어도 다행인 것을.

틈새에도 끼이지 못하니까 다른 돌파구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우린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불어났는데. 밖에 어둠이 내려앉자 커피숍 공간이 살짝 위로 솟은 느낌에 어디선가 스쳐 오는 바람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린 ― 뭔가 위안이 그리운 시대를 사는 것 같아.

그래. 위안이 그리운 세대, 누가 누굴 위로할 줄 모르는 세대.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세대. 간혹 경쟁을 피하게 되면 우정도 사랑이라 믿는…….

 

 

사랑과 우정을 혼동한다고?

외사촌은 눈을 흘겼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구별 못한다는 말에 발끈했나 보았다.

넌 감정의 구분이 확실해서 위안은 그립고 누군가는 필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혼자 버티는데?

혼자, 그래 혼자 잘 지내는 편이야. 하지만 글쎄, 난 요즈음 희한하게 아기를 갖고 싶어. 그건 충동이라기보다는 딸을 낳고 싶은 소망, 낳아야 하리라는 의무감에서. 하지만 수컷이 없네! 암컷 갈매기나 같구나. 하긴 무슨 수로 애를 키워? 나 혼자도 버거운 세상에서. 많이 말고, 그냥 먹고 사는 만큼도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이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아버지 감을 낚겠다고?

감으로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해. 사랑? 가슴이 뭉클하게 아프지는 않아서 사랑은 아니려나? 또 짝짓기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겠지만.

뭐야, 넌 그럼 여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처음 남자가 나빴어. 하필이면 극장 안에서 손을 잡았지 뭐야. 난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손을 잡히긴 싫었어. 그 무렵 어떤 소설을 읽었었는데, 자연 속에서, 이를테면 풀밭에서 햇볕 아래 누워서 혼자 오르가즘을 느낀 소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 그런데 극장은 어둠의 충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어. 사랑은 어둠이어선 안 되는 것 아냐? 암튼 어둠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소름 돋았어.

밝은 사랑?

그래, 밝은 이미지의 남자. 난 분명 남자가 필요해, 내 딸을 위해서.

딸은 무슨. 딸을 낳으라는 보장은 있고?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원한다니 세상 참.

그래, 바로 임신이야.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적 충동은 뭔가 빗나간 것일 게야. 그러니 동성애도……. 맞아, 임신이 좋은 비유야. 임신이란 100%이거나 아니거나 그거야, 누군가 절반만 임신일 수는 없어. 성교도 그래,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교란 반쯤만, 그러니까 성교가 아냐.

생물학자 밥 벌어 먹겠느냐, 어디!

미안해, 공자님 앞에서 문자네 정말. 하지만 사랑은 임신과 같아, 100%이거나 아니거나. 절반만 사랑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야. 사랑에 어떻게 양이 있어. 양이 있는 것이라면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길 가질 거라며!

아길 가지려고 사랑하겠다니까, 온이 사랑할 거야. 만일 누군가를…….

누군가를 만나면? 누군가를? 누구를?

그게 글쎄.

넌 말 다르고…….

아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오빠, 오늘 이야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해 두자. 오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야, 어쩜 나도. 부부가 되려면 팔천 겁의 인연이 필요하댔잖아.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진.

겁?

그래, 겁.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사방 1유순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

유순?

소달구지가 하루 가는 거리라니까 최소 40리라고 하지.

평방 40리?

오빠, 내버려 두자, 단위는 잊고 그냥 시간에 맡겨 두자고. 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설에 또 오기 어려울 텐데 울 아버지 뵙고 가야지.

오늘은…….

가, 가자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쪽은 내내 나였다. 왜 목소리를 높였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소리 뿐, 말에 전혀 자신은 없는 채로.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 자체가 말의 알맹이에 자신이 없다는 신호다. 아니면 진실을 감추려거나.

 

어머니는 요즘 왜 목소리를 높이실까. 혹시 감춰둔 심지가 뭘까? 집을 향하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설을 앞둔 일시적 상황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 만드시면서 짜증스러운 내색을 보이신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늘 그러셨다. 설이래야 수십 명 씩 손님이 오는 대단한 집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북적대고 수선스럽고, 그래도 떠들썩하고 화기 넘치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받쳐주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있는 존재라고 믿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명절이면 딸들과도 다 함께 하지 못하는 허전함에 더해 아들의 부재를 서러워하실까? 민망해 하실까? 아버지에게 미안함 대신, 그 미안함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아들 없이 지내야 할 차례가 다가오면 우리들 몰래 한숨을 쉬시지는 않을까? 그 한숨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극할까? 유전자 복제에 실패하시고서도 한숨도 마음대로 못 내쉬는 울 아버지.

 

 

아버지이, 선준 오빠 왔어요.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 아버진?

내가 느이 아버지 어디 가신 줄 일일이 다 안다니?

어찌할꼬. 어머니의 목소리엔 여전히 싸한 여운이 감돌았다. 울 어머니의 목소리에 심지를 심어 넘은 범인의 정체는 뭘까. 그냥 세월일까. 내 눈으로는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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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문학』 2014. 3,4월호(vol. 119), 국제펜한국본부, 125~143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