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8. 1. 25. 14:21

 

제 33회 PEN문학상 - 국제PEN한국본부

 

 

 

2017.12.22.

 

 

 심사평 [소설 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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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작들 중 서용좌 작가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소설은 우선 독특하다. 문체도, 구성도, 내용도 독특하다.

주인공 한금실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왔지만,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40대의 독신녀다. 그녀는 시간 강사로 객지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과 만나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기도 한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 속에서>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그녀는 예술에서 구원을 찾고자 한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열심히 써내려 간 단상 같기도 하다. 어떤 서사보다 사유가 돋보이는 글이다. 그러나 그 속에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있고, 제목 그대로 흐릿한 하늘에서도 해를 기다리는 희망이 있어 좋았다.

 

심사위원:  안 영[글], 전영애.

 

 

후보작들 중 서용좌 작가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소설은 우선 독특하다. 문체도, 구성도, 내용도 독특하다.

대체로 소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는 줄거리가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없다. 대신에 한 서술자가 자기 자신, 가족, 이웃, 그리고 전혀 모르는 주변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관찰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덧붙이며 묘사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시종일관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연민 어린 눈길이 있고, 지식인으로서의 고독과 고뇌가 표출되어 있다. 한마디로 줄거리 중심의 서사라기보다는 사유가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이 새로움이 선자의 마음을 움직였다.

 

- PEN문학 2018.1‧2월호 vol. 141. 23쪽 -

심사위원:  안 영[글], 전영애

 

 

 

 

                        ▲제33회 PEN문학상 시상식

 

 

 

 


 ▲ 수장자들과 PEN 임원진들

 

 

 

  *전경애 PEN부이사장 
  * 김선주 한국여성문인회 이사장

  * 안영 심사위원장

 

 [수상소감]   삶은 파편들의 우연한 조우
 

저에게 PEN문학상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이 기적을 행여 손끝으로 느끼는 날을 설마 꿈꾸었겠습니까. 글을 쓰면서 늘 열에 들떠 있었습니다. 쓰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은 안에서 밀려나왔으니, 굳이 비교하자면 인상주의가 아닌 표현주의 그림입니다.

 

하필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말로 된 소설들을 파먹는 하루하루가 하이에나 같은 삶이라고 깨닫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저도 모르게 ‘내 말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한글로, 아주 서툴게. 그래서 제가 쓰는 이야기는 겨우 파편들입니다. 저의 서술자는 순전한 우연으로 조우하는 인물들에 대한 ‘시선’을 기록할 뿐입니다. 인물들은 우연히 가까이 또는 멀리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거리는 지척이 없고 항성의 간격입니다. 삶은 늘 외롭고 불발입니다. 꿈을 꾸기 때문에, 또는 꿈도 꾸지 않기에 불발입니다. 인생에는 개연성의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글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집니다. 소설의 기본이라고 하는 플롯은 제 관심사가 아닌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인생에는 플롯이 없으니까요. 순간의 채색은 순간으로 남아 영원으로 향합니다. 다음 순간은 명도도 순도도 우연히 바뀌어 옵니다.

 

어떻게 담아낼까. 열심히만 쓴다고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정년도 못 채우고 캠퍼스를 떠나는 초랭이짓을 하고도 소용없었습니다. 이제 이 과분한 PEN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겁이 덜컥 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소설가의 정체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더 잘 쓰지는 못해도 소설가로 살겠습니다. PEN International 헌장처럼 ‘인간의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길이 전승되는’ 예술작품을 향하여, 쉽지 않은 이 길을 가겠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을 종교 밖에서도 써도 된다면, 저는 이 상으로 거듭납니다.

 

 

 

 

 
- 축하해주신 분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기억해야할 일이다 싶어져서

기억나는 대로 올린다. -

 

 

  •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김선주 이사장님, 이대동창문인회, 조한숙 회장,
  • 국제PEN광주지역위원회, 박판석, 박신영, 조숙형 부회장님들, 구용수선생님.
  • 이대독문과 총동창회, 이대독문과 이병애 명예교수님, 최민숙 교수, 이봉무 교수,
  • 이대독문과 동기모임, 강영옥, 김경희, 김성희, 김영자, 김영희B, 민용자, 오영란.
  • 전남여자고등학교 동창회 (서울) 김문자, 신소영, 이금자, 이성자, 정민옥, 정방하, 한정원, (광주) 이강자.
  • 전남대학교독문과교수일동, 제자 신성엽.
  • 전북대학교 독어교육과 제자 소현숙의 따님.
  • 일고제자들: (57) 김정기, 오한권, 이상칠, (58) 안영근, 김선윤.
  • 아들 재호, 윤기,
  • 조카 조유영, 조병광.
  • 사돈 등 이름 말씀 드리기 어려운 분들....중에는 아사모 회원님들도 있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8. 1. 25. 14:21

 

 

 

 

2017년 한국하인리히뵐학회는

하인리히 뵐 탄생 100주년 사업으로

《하인리히 뵐과 행복사회》를 펴냈다.
하인리히 뵐은 전후독일문단을 대표하며

국제PEN독일본부, 국제PEN세계본부의

회장을 맡았고,

197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공동저자:
공선옥, 곽정연, 사지원, 서용좌, 안은영,
원윤희, 이화경, 정인모, 정찬종, 최미세 .

 

 

 

 

 

 

하인리히 뵐의 독자 구하기

서용좌

 

내 친구는 묘한 직업을 가졌다. 그는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가 정서법의 몇몇 잠재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문장론의 몇몇 규칙들을 막연하게나마 통달했고, 이제 타이프 한 장 한 장을 문체의 연습들로 점철하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런 한 뭉치를 만들자마자, 그것을 그는 원고라고 부른다.

그는 수년 간 이 문화의 황야에서 예술이라고 하는 마른 풀만을 겨우 뜯어먹고 살다가 마침내 출판사를 찾아냈다. 그의 책이 출판된 뒤에, 나는 극심하게 낙담해 있는 그를 만났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 기가 꺾일 만했다. 출판사의 정산에 따르면, 반년 동안 350권이 비평을 부탁하려고 무값으로 배포되었고, 몇 우호적인 비평도 나왔고, 실제로는 13권의 책이 팔렸단다. 그로써 내 친구에게는 5,46마르크의 대변이 발생했단다. 그런데 그는 800마르크를 선지급 받았기 때문에, 같은 비율로 셈하자면 이 선지급금은 대략 150년이 되어야 상쇄될 수 있는 것이란다.

이제 문제는 한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이 평균적으로 그만 못하다는 점이다. 그게 대략 몇몇 거의 전설적이다 싶은 터키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강 70살을 본다. 더러 우리 잃어버린 세대의 기념비적인 혹사를 생각할 때는 안심하고 한 십년을 더 칠 수도 있다.

나는 친구에게 두 번째 책을 쓰라고 충고했다. 책이 출판되자 전문가 권에서는 기쁘게 환대를 받았다. 비평용 책은 400권으로 급등했고, 반년이 지났을 때 판매고는 29권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담배 두 개비를 말아주고는 어깨를 도닥거리며 제안했다, 이제 세 번째 책을 쓰라고. 그런데 친구는 그 말을 아이러니로 이해하고는 모욕을 당한 듯이 물러서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투명작가 비트”라고 문학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에 관한 평전 한 권이 나오자 평전이 그의 작품들 전체보다 더 많이 팔렸다.

근 반년동안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는 다시 고독한 천재성의 영역에서 맴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와서는 후회막급하다고, 그래 아무튼 세 번째 책을 쓰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나는 그에게 이번에는 젤라틴판 등사기로 밀어서 30에서 50권쯤을 서적상에 넘겨주라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선지급금을 받았다. 둘째 아이가 태중에 있었고, 그는 말하자면 몇몇 식자공과 인쇄업자, 포장이나 발송담당 여직원들의 실직에 협조하는 죄를 짓기는 싫었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공익적 감각은 항상 정말로 강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에 관한 근 100편 정도의 호의적인 비평이 나왔고, 두 권을 합친 판매부수는 90권을 넘었다. 출판사는 “독자 구하기”이라 명명한 작전에 돌입했다. 곧 각 서점마다 쪽지가 발송되었는데, 내용인즉, 비트-구매자를 확보해놓고 바로 출판사에 알려달라고, 그러면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을 개시할 수 있도록 한다는 말이다.

이 작전의 결과는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작해서 4주 만에 저 위쪽 북부에서 한 남성이 나타나서 내 친구의 책에 대해서 묻고 그것을 사고 돈을 지불했음에 틀림없었다. 서점주인은 곧 전보를 보내왔다. “비트­구매자 출현 - 다음 지침은?” 그러는 사이에 서점주인은 구매자를 대화로 붙잡아 놓고 커피를 따라주고 담뱃갑을 권하고 그랬다. 이 모든 행동들이 구매자를 놀라게 했지만, 그는 조용히 그러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자 번개처럼 빨리 출판사의 답변이 왔다. “구매자 이쪽으로 보낼 것 - 전 비용 이쪽 부담.” 다행하게도 구매자는 교사였고 마침 방학이어서 남독으로의 공짜여행을 마다할 리 없었다. 그는 첫날은 쾰른까지 갔고 그곳에서 하루저녁 좋은 호텔에서 묵고, 이튿날 아름다운 라인 강변을 따라서 남쪽으로 향하며 여행을 즐겼다.

이틀째 오후 4시경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역에서 출판사까지 택시로 이동했고, 출판사에 가서는 출판업자의 매력적인 부인과 더불어 커피와 케이크를 즐기면서 조금은 들뜬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 새로 여행경비를 받아 챙겨서는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2등 열차로 내 친구가 뮤즈에 봉사하고 있는 그 소도시로 갔다. 그곳엔 그 사이 둘 째 아이가 태어난 지 한참 시간이 흘렀고, 친구의 아내는 영화관엘 가고 없었다. - 작가의 아내에게라면 어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불허해서는 아니 되는 휴식 아닌가. 구매자는 그러니까 내 친구를 마침 그가 아이들 저녁우유를 데워가지고 그들을 달래려고 노래를 부르고 있던 참에 만나게 되었다. 그 노래란 게 하찮은 어휘들로 구성되었을 밖에. 아무튼 이 말이 최근 독일문학에 언짢은 빛을 던지게 되었으니…….

내 친구는 자신의 독자에게 감동어린 인사를 하고서 대뜸 그의 손에다 커피 분쇄기를 밀어주고는 재빨리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이행했다. 곧 커피 물도 끓었고, 이제 대화가 시작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 수줍은 사람들이어서 서로 묵묵히 감탄하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동안을. 그러다가 마침내 내 친구가 외침소리를 토해냈다.

“선생은 천재이시오 - 제대로 자라난 천재이시란 말이외다!”

“아, 아닙니다,” 손님은 온유하게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작가선생이 그렇소.”

“틀린 말씀,” 내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침내 커피를 따랐다, “천재의 주요 특징은 그 희귀성에 있지요, 그리고 선생이야말로 저보다 더 희귀한 인간계층에 속합니다.”

방문객은 겸손한 이의를 달려고 했지만 혹독한 방식으로 훈시를 받고 말았다. “거 말 마쇼.” 내 친구는 말했다. “책을 쓰는 일은 그게 만들어지는 일에 비해 그저 반쯤 나쁜 일이오, 출판사를 발견하기란 장난질이요. 그러나 책을 산다는 것 - 그것을 저는 천재적 행위라 하는 것입니다. - 그나저나 우유와 설탕을 치시지요.”

그 남자는 우유와 설탕을 치더니만, 수줍어하면서 외투 오른 쪽 안주머니에서 그가 저 위 북쪽 지방에서 샀었던 책을 내밀며 헌정 사인을 부탁했다.

“단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내 친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단 한 가지, 선생이 제 원고에다 헌정 사인을 해주는 조건이오!”

그는 서가에서 바인더를 꺼내더니 거기서 빼곡히 쓴 원고뭉치를 꺼내 와서 손님의 커피 잔 옆에 놓고는 말했다. “부디 저에게 기쁨을 주시오!”

손님은 혼란스러워 만년필을 덜덜 떨면서 원고뭉치 마지막 장 맨 아래 여백에다 머뭇머뭇 썼다. “진정한 존경심을 담아서 - 귄터 슐레겔!”

그러나 내 친구가 잉크를 말리기 위해서 그 원고를 난로위에서 흔들고 있던 한 30초쯤이 지나서 손님은 이번에는 외투 왼쪽 안주머니에서 타이프가 되어있는 종이 다발을 꺼내더니 내 친구에게 청했다, 그가 최근 독일문학에 대한 기여라고 간주하는 이 결과물을 출판사에 감정 의뢰해달라고.

내 친구는 내게 이야기해주었다, 자기는 실망감에서 몇 분간 말을 잃고 있었노라고. 이 남자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 그를 깊은 비통에 빠지게 했었노라고.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다시 몇 분간을 묵묵히 건너다보고 앉아있었다. 마침내 내 친구가 나직이 말했다. “제발 간청하건대 그만 두십시오 - 선생의 독창성을 처분하는 일이외다!”

손님은 고집스레 침묵하고 있더니 자기의 원고를 쓸어 모았다.

“선생께선 여행경비를 받으실 수 없을 겝니다,” 내 친구는 말했다, “생크림케이크가 나오지도 않을 것이고요. 출판인의 부인은 찡그린 낯빛을 할 것이구먼요. 선생을 위해서 간청 드리는 것이니, 제발 그만 두시지요!”

그러나 손님은 찡그린 채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내 친구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한 인간을 구한다는 뜨거운 노력으로 출판사의 정산서를 가져오는 일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슐레겔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여기에서 내 친구는 이야기를 중단하고자 했지만, 나는 그가 방문객과 그만 드잡이를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어쨌거나 여기에서 휴지부가 발생했고, 그 동안 내 친구는 불끈 쥔 주먹을 생각 깊게 내려다보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들은 것은 슐레겔이 짤막한 인사와 함께 떠났다는 것이고, 그의 원고는 놓아두고 갔었더란다.

그러는 사이에 슐레겔의 장편 『슬프도다, 페넬로페여!』가 귀향소설로서 전문가 권에서 상당한 주목을 이끌어냈다. 슐레겔은 교사직을 떠났고, 그러니까 제대로 된 직업을 떠났는데, 말하자면 다른 직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다. 나로서는 여전히 직업도 아니라고 간주하는 그런 직종에 종사한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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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구하기 Die Suche nach dem Leser」는 하인리히 뵐이 1954년에 함부르크의 《일요신문 Sonntagsblatt》에 발표한 단편이다. 여기에서는 Böll, Heinrich: Romane und Erzählungen 2. Hrsg. von Bernd Balzer, Köln 1977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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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공선옥, 곽정연, 사지원, 서용좌, 안은영, 원윤희, 이화경, 정인모, 정찬종, 최미세 공저,《하인리히 뵐과 행복사회》, 한국문화사, 13~18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8. 1. 25. 14:21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

― 서용좌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장두영(문학평론가)

 

 

1. 한금실의 시선

 

서용좌의 《흐릿한 하늘의 해》를 장편소설이라 불러야 할지, 소설집이라 불러야 할지 망설여진다. 책표지에 떡하니 ‘장편소설’이라고 적혀 있으니 당연히 장편소설이 아닌가? 작가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 《표현형》이라는 전작에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 곧 한 편의 장편소설 아닌가?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보면 <슬픈 족속>부터 <안개>까지 12편의 단편소설을 묶어놓은 소설집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작품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어, 굳이 책을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시작과 중간과 끝을 지니고 있어, 따로 떼어 발표하더라도 단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서술자의 존재와 관련이 있을 듯하다. 12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한금실’이라는 인물이 서술자로 설정되어 있다. 한금실의 눈과 귀를 통해 소설의 모든 내용이 포착된다. 이야기 12편은 각기 다른 주제의 이야기들을 펼쳐내고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서술자가 그것을 묶어냄으로써 이야기들 사이에는 제법 견고한 연결 고리가 형성된다. 굳이 장편소설이 아닌 단편소설에 가깝다고 보더라도 뚜렷이 연작소설을 떠올리게 하게끔 만드는 소설적 장치가 바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서술자 한금실의 존재이다.

 

실상 《흐릿한 하늘의 해》는 한금실의 시선으로 읽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작가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쓴다」에서는 글의 말미에 ‘한금실, 가공의 서술자’가 썼다고 적혀 있다. 굳이 작가의 이름대신 한금실의 이름을 들고 나온 것, 그것도 ‘가공의 서술자’임을 또 다시 강조한 것은 실제 작가의 존재를 소설 속 가공의 인물로 완벽히 대체하고 싶은 소설가의 원초적 욕망의 반영일 터이다. 물론 작가와 소설 속 인물의 분리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달려 있으며, 분리의 성공이 작품의 성공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허구적 형상화의 성취 정도를 따지는 차원에서는 참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흐릿한 하늘의 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소설을 읽다보면 한금실에 관한 신상정보들이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그것도 반복적으로 뛰쳐나온다. 1975년생, 여성, 미혼 혹은 비혼, 프랑스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현재는 광주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시간강사.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어떤 성격이고, 동생은 몇 명인지 따위.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아무리 《흐릿한 하늘의 해》를 독립된 12편의 단편들로 여기고 읽어나가더라도 어느새 한 손에는 한금실의 프로필이 슬그머니 쥐어진다. 어느 한 편이 아니라 12편 전체 곳곳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어, 소설은 연속성을 확보하고, 일단 확보된 연속성은 구체성의 획득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2편 이야기의 모든 내용이 결국 그녀의 사상과 감정을 경유한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그녀가 취할 태도나 반응은 무엇일지 궁금하게 여기면서 따라가게 된다. 곧,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따라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어가는 일은 그녀와 나누는 대화가 된다. 또한 12편 이야기는 오롯이 그녀의 초상이 된다.

 

 

2. 관찰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에 속한 12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서술자 한금실은 예민한 관찰력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남들은 지나치기 쉬운 작고 사소한 일상적 소재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 진득하게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다. 이를 테면 <유예된 시간>에서 발견한 ‘농게’가 그러하다. 남들 같았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을 양념게장 속 아직 살아 있는 게 한 마리, 한금실은 묻어 있는 게장 양념을 씻어내어 기어이 농게의 분홍색 집게발이 드러나도록 만든다. 물론 표면적으로 ‘게장 파동’은 친척 아이들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사건이지만, 그것은 허구적 형상화의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다. 정작 솟아오르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한 채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농게의 꿈틀거림을 관찰하고, 나아가 유예된 시간에 속박되어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해 사색하는 인물이 바로 한금실이기 때문이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금실 앞에 관찰의 대상들이 툭툭 던져진다. 그녀의 관찰이란 우연을 거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다리 밑>의 첫 문장은 우연이 소설의 시작임을 분명히 한다. “거기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149면) 농게(<유예된 시간>)와 윤동주 시집(<슬픈 족속>)은 여행 중 우연히 마주친 것들이었고, 집 마당에서 굴뚝새를 관찰하거나(<굴뚝새>), 판교에 가서 노부부를 만나게 된 것(<화학 반응>)은 본인의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심지어 출판 관련 일 때문에 민 선생을 만나러 가던 도중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을 ‘우연히’ 만난 것(<삼천리강산에 새봄이>)을 보더라도 한금실의 관찰이 얼마나 우연에 의존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우연의 강조는 곧 개연성의 법칙을 따르는 플롯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플롯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물의 운용 방식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막상 주된 관찰 대상이 등장하고 나면 그 전에 나왔던 인물은 서사의 중심에 완전히 밀려나버리는 현상이 심심찮게 발견된다. 농게를 집어들고 즐거워했던 친척 아이들은 어느새 사라져 다시는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친척 아이들은 한금실에게 농게라는 관찰 대상을 던져주기 위해 동원된 인물에 불과하며, 일단 주어진 역할을 마쳤으니 무대에서 퇴장한 셈이다. 졸을 잘 움직여 나중에 장군을 부르겠다는 욕심은 없는 듯하다. 극적인 갈등의 고조라든가 숨통을 끊는 최후의 일격(coup de grâce)이 자아내는 짜릿함을 찾아볼 수 없다. 사건은 평탄하고 밋밋하다.

 

대신 《흐릿한 하늘의 해》에서는 한금실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변화의 궤적에 초점을 맞춘다. 관찰은 소설의 장면 묘사를 감당하는 풍경 스케치로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한금실이라는 한 인물의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젖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우연히 마주친 농게로 하여 나는 나의 유예된 시간을 보았다. (……) 대야 속의 농게와 원룸 속의 나. 나는 농게다. 농게는 나다.”(<유예된 시간>, 61-62면) 간장게장 속 우연히 발견한 농게에 대한 관찰이 거듭되는 파편적인 단상을 거치고, 어느 순간 깊이 있는 사색과 회의, 반성을 거쳐 급기야 자기 자신이 농게랑 다를 바 없다는 비약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되는 내면적 변화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급기야 한술 더 떠서, 온 인류가 농게이자 진드기라고 규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면서 폭발적인 비약을 거듭한다.

 

그보다 우리 모두가 은접시 위 치즈 덩이 속에서 생성된 진드기들의 운명은 아닐까? 지구째로 우리를 삼켜버릴 거인은 원전 폭발일까? 억눌린 사람들의 자폭일까? 오늘날 잘나가는 신자유주의 자유시장경제 맹신자들도 포함될까? 우리에게 유예된 시간은 얼마일까? 유예된 시간이 있기나 할까? 나는 불혹이 되도록 살아보지도 못한 나의 삶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 인류를 걱정하는 오지랖으로 빠져든다. 비혼 여성 세입자, 대한민국 400만 넘는 1인 가구의 한 사람으로 최저 생계비 월 61만 7,281원을 벌어야 하는 코앞의 사실을 잊다니.(<유예된 시간>, 62-63면)

 

‘오지랖 떨기’와 ‘옆길로 새기’야말로 한금실의 주특기이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광폭의 행보다. 구속적인 플롯의 짜임새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소한 일상적 소재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거기에 상상력을 날개를 달아주는 것, 관찰이 자유로운 연상으로 이어지고 다시 연상에 연상을 거듭하여 전 지구적인 차원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 뚜렷한 목적지와 결론에 도달함 없이 끝없이 관찰과 상상과 사색을 거듭하는 것. 소설에서 펼쳐지는 내적 변화의 방향은 구심적인 것이 아니라 원심적인 것에 가깝다. 이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관찰자 한금실은 동시에 한없이 자유로운 몽상가 한금실이다.

 

 

3. 번역가의 시선

 

미라보 다리―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 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슬픈 족속>, 30-31면)

 

한금실의 시선에서는 강한 서구지향성이 감지된다. 용정 용문교에서 ‘미라보 다리’를 떠올리는 그녀의 아련한 눈빛을 보라.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한 해란강과 거기 놓인 용문교의 초라한 모습을 마주하고 실망과 허탈함을 느끼면서, 한금실은 미라보 다리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를 떠올린다. 무등산을 오르면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떠올리거나(<산의 소리>), 다리 밑에서 올려다 본 하늘을 두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틈새로 푸르스름한 하늘은 다니엘 오테이유의 차가운 눈빛 그대로였다.”(<다리 밑>, 149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단순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사가 서구문화와 문학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제대로 포착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을 요한다. 관찰의 내용은 일종의 ‘번역’ 과정을 거쳐서 표현된다는 것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별도의 목록이 필요할 정도로 서구작가와 작품이 빈번하게 언급된다. 아폴리네르, 빌헬름 베클린, 잉에보르크 바흐만, 하인리히 뵐, 다니엘 오테이유, 지브란, 라 보에시, 쿠젠베르크, 토마스 만, 헤세 등. 대체로 프랑스와 독일에 집중되어 있는 목록은 서구문학에 문외한인 독자들에게는 두꺼운 장벽이 될 수 있다. 서술자도 그 점을 의식한 듯, 서구작가나 작품이 언급될 때는 주석에 가까운 학구적인 설명을 첨부하는데, 이는 서구문학의 배경 속에서 작품을 풍성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역으로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이 자칫 소설의 흥미를 감퇴시킬 위험성도 지닌다.

 

서구지향성은 심리의 표현뿐만 아니라 사태의 해석이나 판단의 영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2014년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소설 속에서 다루면서 서독 초기 공산당 해산의 역사를 언급하며 비판의 날을 세운 것은 대표적인 예시다.(<날마다 비겁함>)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밝히는 외사촌과의 대화에서도 동성애와 동성애 차별의 역사를 프랑스의 경우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목소리>)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서 경험한 서구의 사례를 한국에 도입하여 적용해보는 것, 이것이 그동안 한국의 학계가 수십 년 동안 수행해온 작업이다. 어떻게 보면 서구의 중심지에서 유학을 한 한금실은 서구의 문화와 문물을 철저히 내면화한 인물이며, 그러다보니 소설 속에 내면화의 영향이 자연스럽게 녹아 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금실이 무턱대고 서구를 추종하는 얼치기라는 뜻은 아니다. 정반대로 그녀는 자신이 서구의 문화와 지식을 내면화하고 있음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다. 마치 강의하듯 라 보에시의 사상에 대해 한참 떠들다가도 “느닷없는 파리 시절에 대한 향수가 멋쩍게 느껴졌다.”(<날마다 비겁함>, 185면)고 깨닫는 순간, 그녀는 과거 유학시절 프랑스가 아닌 현재 한국에 있는 자신의 현실과 대면한다. 소설을 쓰게 된 동기를 “외국 문학 평원에서 하이에나가 된 느낌이었어요”(<날마다 비겁함>, 175면)라고 밝히는 대목에서도 그녀가 맹목적인 서구지향성과는 뚜렷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흰 고무신……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라는 윤동주의 시구를 읽으며 자신이 나이키를 신고 캘빈 클라인을 입고 있음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한다거나(<슬픈 족속>, 35면),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청출어람>, 78면)라면서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 또한 그녀가 서구와 한국을 ‘동시에’ 관찰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원본의 언어와 번역본의 언어를 동시에 아우르는 것이 번역가의 기본 임무가 아니던가.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환기되는 서구 문화의 조각들은 한금실과 우리들이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과 일상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양쪽을 들여다보면서 비교·대조하면서 번역하는 작업은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우리를 반성으로 이끈다. 이것은 세심한 관찰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예민한 감각으로 대상을 관찰하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의의를 추출하기 위한 판단의 잣대가 필요하다. 한금실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잣대를 소설 속에 끌어들여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우연한 관찰을 넘어 진지한 해석과 통렬한 반성으로 거침없이 도약하는 곳, 그곳이 바로 번역가의 시선이 향한 곳이다.

 

 

4. 여행자의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다양한 종류의 여행을 서사의 실마리로 활용하고 있다. 맨 앞에 실려 있는 <슬픈 족속>은 백두산 관광 여행을 다루고, <유예된 시간>은 가족 여행 중 겪은 에피소드가 중심이며, <산의 소리>에서는 친목 도모를 위한 무등산 등반에 나선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사전적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여행으로, 여행지에서 관찰한 내용에 여러 상념과 사색이 얹어지면서 소설의 내용이 펼쳐진다. 판교에 사는 친척 할머니를 방문한다든가(<화학 반응>) 옛 도자기 마을에 사는 민 선생을 방문하는 식의 짧은 여행(<삼천리강산에 새봄이>)도 있다. 한금실은 그곳에서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그것을 소설로 옮기는 형식을 취한다. 만약 그곳으로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관찰’은 없었을 것이고, 소설 또한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한금실은 방학이면 부모가 계신 평택에서 머물다가 다시 학기가 시작되면 광주의 원룸으로 돌아오는데, 평택과 광주 사이에서 오고가는 것도 일종의 여행으로 볼 수 있다. <굴뚝새>, <목소리> 등이 평택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 속하며, 특히 <굴뚝새>는 평택에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쌍용차 고공 농성을 작품의 전면에 내걸고 있다. <다리 밑>에서처럼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길을 가다가 잠깐 천변으로 내려가 보는 것 같은 여행 같지도 않은 여행도 있다. 평택이든 천변이든 우연히 그곳 여행지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관찰했다.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행은 곧 소설 쓰기의 시작이 된다. “나는 천변에 더 나가보기로 했다. 찬찬히 살펴보거나 가능하면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쪽이 훨씬 생생한 체험이고 글감일 터였다.”(<다리 밑>, 160면) 만약 광주의 원룸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소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은 소설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여행과는 별로 관련 없어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간접적으로 여행을 다룬다. <청출어람>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시청으로 소설을 시작하고 있어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외규장각 의궤의 머나먼 여정을 다룬 셈이라서 결국에는 여행에 한 발을 걸친 셈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안개>에서 배승한은 유럽 여행 중이다. 그는 한금실에게 ‘안개 속입니다, 이곳도.’라는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녀는 배승한이 머물고 있는 그곳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프랑스 유학 시절의 기억은 적어도 내면의 차원에서 그녀가 여전히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흐릿한 하늘의 해》는 시종일관 여행 중인 한금실이 남긴 메모와 일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여행은 항상 두 개의 장소를 비교하게 한다. 하나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터전, 다른 하나는 일상을 벗어난 여행지. 두 개의 장소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상정한 채 이루어지는 것이 여행이라 할 때, 그것은 두 개의 언어를 오고가며 양쪽을 다 살펴보아야 하는 번역의 작업과도 닮아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여행을 하거나, 끊임없이 여행의 기억이나 여행자의 존재가 상기된다는 것은, 서구 작가의 이름과 작품명이 소설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모습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때 두 개의 장소, 두 개의 언어는 서로 얽히고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해석과 반성의 가능성으로 나아감은 당연한 일이다.

 

한편 <삼천리강산에 새봄이>에서는 공간의 축이 아닌 시간의 축을 따라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YH 무역 농성 사건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죽은 남순과 여동생의 트라우마에 전염된 동순 할머니의 사연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과거의 상처를 현재로 불러온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 농성 걱정하는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삼천리강산에 새봄이>, 243면) 과거와 현재가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오랜 침묵 속에 망각되었던 과거의 상처는 뒤늦은 애도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과거가 현재에 되살아남으로써 과거의 YH 무역 농성 사건은 현재의 평택 쌍용차 굴뚝 농성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재가 과거를 위로하고, 과거가 현재에 힘을 실어주는 연대의 방식이자 협력의 방식이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 수록된 12편의 이야기들은 간혹 서로 간에 연결고리를 마련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여행이나 번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양자 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가령 홈리스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다리 밑>을 이어주고, 쌍용차 고공 농성 소재가 <날마다 비겁함>과 <굴뚝새>를, 다시 똥물 소재가 <굴뚝새>와 <삼천리강산에 새봄이>를 연결한다. 소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날마다 비겁함>에서는 배승한도 바흐만의 시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유예된 시간>과 연결되기도 한다. 엄연한 간극을 지닌 채 따로 존재하는 이야기들이지만, 그래서 어쩌면 별개의 단편소설들을 묶어놓은 소설집처럼 보이지만, 작고 사소한 연결고리를 근거로 서로 엮인다는 발상이 12편의 이야기를 연작소설처럼 보이게 하고, 한 편의 장편소설이라 부를 수 있게 한다.

 

쌍둥이 형제의 아버지는 무한한 지식욕으로 아들들에게 대백과사전을 암기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페터에게는 알파벳 ‘에이’에서 시작하여 ‘엘’까지를, 파울에게는 ‘케이’에서 ‘제트’까지를 통달하게 하였다. 결과는 완벽했고, 쌍둥이 형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지식을 보충하여 완벽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쌍둥이들이 서로 소통해야 할 경우였다. 그들은 ‘케이’에서 ‘엘’ 사이만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 작은 영역이 그들의 천국이 될 수 있었을망정, 파울은 ‘에이’로 시작하는 사과도 몰랐고, 페터는 ‘피’로 시작하는 복숭아를 몰랐다고.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굴뚝새>, 215면)

 

두 개의 공간을, 두 개의 언어를, 두 개의 작품을 오고가기에 바쁜 여행자 한금실이 12편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긴 여정의 끝에 도달한 지점에는 ‘소통을 향한 갈망’이 놓여있다.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 서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세상 밖으로 나와 어딘가로 여행을 시작할 때, 남들은 미쳐 눈여겨보지 않았던 무언가가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제야 그녀는 관찰을 시작하고, 그 의미를 해석·번역할 수 있다. 끊임없이 맞은편을 향해, 혹은 누군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노력이야말로 여행자의 시선에서 진정으로 요구되는 미덕이라고 《흐릿한 하늘의 해》는 말하고 있다.

 

 

5. 교집합을 찾는 시선

 

《흐릿한 하늘의 해》를 읽으면 안개가 자욱한 고흥 앞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순규의 고향이 그곳 ‘섬마을’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아직 유럽을 떠돌고 있는 배승한이 여전히 ‘안개 속’이라고 했기에 그런가. 바다 위 섬들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저마다 외따로 자신을 지키려 안간힘을 쓰기에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서로에게는 눈을 감을 채, 자신만의 백과사전 조각을 암기하기에만 급급하기에 무척이나 위태롭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압축한다. “밤이다. 안개보다 짙은 회색의 밤이다.”(<안개>, 336면)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과 섬을 횡단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하는 한금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무척 호기심 어린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신이 발견한 조각들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돌아다닌다. 그러고 나서는 번역자의 시선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관찰 조각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기에 바쁘다. 교집합을 찾으려는 노력, 장소와 장소 사이의 교집합, 언어와 언어 사이의 교집합, 과거와 현재 사이의 교집합,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집합을 찾으려고 그녀는 부단히도 애를 쓴다.

 

과연 그녀는 그토록 갈망하는 교집합을 찾아 외로운 섬들을 횡단할 수 있을 것인가? 톱니바퀴 인생을 살아가는 1975년생 지방시에게 자신을 가둔 굴레를 파괴하고 횃불을 들어 밤을 밝히기를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너무도 연약하고 가냘프다.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화해나 통합의 가능성은 털끝만큼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결말은 달콤할 수 있겠지만 기만적인 위안에 불과하므로. 대신 한금실의 시선과 목소리를 경유한 우리 독자들에게 ‘그녀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전달된다. 아니, 교집합을 찾으려는 여행은 소설이 끝나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또 시작해야만 한다는 가냘픈 외침이 잿빛의 흐릿한 하늘 너머에서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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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소설시대』 통권20호, 405~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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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10. 25. 18:46

요가교실

 

 

하아나 두울, 하나 두울.

요가선생님은 깡마른 작은 체구에도 목청껏 단어들을 내뱉는다. 첫해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호들을 이젠 대충 알아듣는다. 소 - 고양이 - 소 - 고양이 - 자, 손바닥하고 무릎, 발등까지 완전히 바닥에 밀착시키고, 이제 완전 고양이자세요, 두 팔 바닥으로 쭉 벋고 가슴 눌러서 바닥에, 자, 이제 아기자세로 풀고요.

이상하다. 아기자세라고 하면 그냥 그대로 ‘한하고’ 있고 싶어진다. 정말 우리 모두 어머니 몸속에서 그렇게 아기자세를 취하고 있었을까. 조그맣게 몸이 수축되면서 아주 편안함 그 자체다. 하긴, 누워서 길게 뻗고 팔까지 올린 기지개자세가 더 편해야 맞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따사로운 햇살아래 푸른 초원을 생각하면서.

 

따사로운 햇살아래……를 생각하면 곧 다른 장면으로 빠져든다. 오래 전에 서양 소설책에서 읽은 독특한 소녀가 떠오른다. 영성체 빵이 왜 그리 맛이 없는 마른 빵이어야 하는지를 이해를 못하는 아이, 갓 구운 빵을 탐닉하는, 그만큼 감각에 충실한 아이. 햇살아래 초원에 누워서 사람들이 ‘무한한 행복감’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한 소녀 말이다. 그것이 나중에 사람들이 오르가즘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깨닫고 의아해했던 아이, 그런 일이 남자와 여자의 교접 시에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녀 말이다. 나는 반대로 웅크려야 편하고 행복감을……

 

남이 씨, 나남이 씨, 뭐하세요, 고만 일어나세요. 나남이 씬 아기자세만 나오면 그렇게 꼬부라져갖고 어푸러져 있으니 참. 여기요, 요가 하는 동안엔 눈들 감지 마세요. 눈을 감으면…….

 

나는 행동이 느리다. 느린 것으로 정평 나 있다. 내가 잘 못 듣는 것을 요가반 사람들은 모른다. 주민센터에서 그것까지는 알 리 없다. 장애자 등록이 될 정도로 청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언뜻 보면 그냥 가끔씩 멍한 사람이라는 정도, 그나마 다행이다.

 

자아, 그대로 그 자세에서 다리 쭉 뻗어 좀 털고요, 예, 이제 누우세요. 편안하게 다리 펴고, 두 팔 올려놓고 차려자세요, 뒤꿈치 쭉 밀고, 밀어내고……, 양팔 옆으로, 이제 악어자셉니다. 왼발 90도 들어 올려서…….

카톡. 카톡. 왼발을 오른쪽으로 넘기고 고개는 반대쪽으로 하다 보니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눈은 그 쪽으로 쏠리지만 선생님의 곁눈질을 피하려면 그냥 나중에 봐야지. 어, 카톡. 카톡. 누가 뭘 한꺼번에?

다시 차려자세, 이번엔 반대로. 자, 다시 완전 차려자세로 풀고요, 두 팔 머리 위로 쭈욱, 양팔 기지개…….

 

휴, 다시 차려자세네. 햇살아래 잔디밭이라 상상하고 쉴까. 햇살아래 황홀감…… 소용없어, 아름다웠을 처녀시절을 전쟁으로 보냈지. 선배가 보고나서 준 책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시작하자마자 48세 여자의 일상이 펼쳐졌지만, 평범하진 않았다. 멀쩡한 독일여자가 골칫거리 터키노동자의 애를 배다니, 것도 고향에 처자가 있으니 혼외자를. 누군가가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에’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는 여자를 누가 이해해. 주변의 노골적인 질시는 당연, 등 뒤에선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욕설까지 나왔다.

그때는 그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딱딱하기도 했고, 읽다말다 했다. 그래도 유복한 가정의 예민한 소녀가 겪은 전쟁이야기는 뚜렷이 남았다. 그래 히틀러가 죽인 건 군인들과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지. 죽은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야. 책 속의 레니, 그 여자의 평범했을 인생도 죽었지. 탈영으로 총살당한 오빠, 자포자기로 죽은 아버지, 전선에 나가는 젊은이들과 결혼하는 여자들, 그녀도 얼결에 사촌오빠와 결혼했고, 전사했고. 여자는 묘지에 딸린 화원 노동자로 몰락했지.

 

자아, 뒤꿈치 밀고요, 쥐가 안 나려면 항상 뒤꿈치를 밀어내야…….

 

장례사업은 호황이었겠지, 얼마나 일손이 부족했음 포로들을 거기다 배당했을까. 하필 소련군 포로를 만났지. 그가 온 첫날, 여자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넨 일이 사람들한테 ‘경악할’ 노릇이었다고 했다.

선배, 따뜻한 커피 그게 뭐가 경악스러운 일이래요? 하등인간에게 커피를 줬다고? 소련사람이 왜 하등?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게르만은 아리안의 후예라고 선전한 정치 때문이었지.

이상하네, 아리안, 그거 이란 어쩌고 하는 것 아닌가?

맞아. 그 이란과 같아. 몇 천 년 전 중앙아시아 스텝지역에서 살다가 서쪽으로 가서는 유럽 아리안, 남쪽에서는 인도 아리안의 선조가 된 것이니까.

아리안, 그러니까 독일인들 대부분 기독교인 아녔나요, 기독교나 유대교나?

그렇게 말하자면 이슬람도 같은 뿌리지. 아브라함의 자식들의 자식들이니까.

머리 아파.

암튼 아리안 아님 무조건 하등인간, 순정한 피의 문제였지. 그 땐 할머니 할아버지 중 한 쪽만 유대인이어도 유대인 딱지였지. 친위대에선 더 했대. 사병은 1800년도까지, 장교가 되려면 1700년도까지 거슬러 올라가 순수혈통을 증명해야 했다니, 끔찍했지.

선배, 뭐예요, 생물에서 인간으로 전공을 바꾸려고?

아니, 이건 아직 피 흘리고 살아있는 역사야. 소설이 아냐. 실제로 하등인간 분류가 유효했다는 것이지. 친위대장 히믈러는 ‘유대인 소개, 유대인 섬멸’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잖아.

소개?

그래, 강제소개. 하등인간은 파괴욕과 원시적 탐욕 때문에 밝은 인간들을 해칠 것이므로 소개시켜야 마땅하다! 페스트균 같은 게 건강한 육신을 넘보지 못하도록! ‘유대-볼셰비키’라고 하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동물보다 더 낮은 단계라는 판정이었어. 상상이 가? 동물보다 더 낮은 인간들. 그들 법으론 유대, 슬라브, 소련의 아시아계 모두 하등인간이었으니까.

하등인간, 죽어도 바꿀 수 없는 피 때문이네.

그 책이 그러저러 내 많지 않는 책들 속에 섞여 있었고, 내가 실제로 마흔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정확히는 마흔 여덟을 다 보낸 겨울에 그 해를 돌아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읽었다. 머리 아프기는 비슷했지만, 좀 읽히는 것은 나이 탓이었을까.

 

인종, 인종도 사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언제부턴가는 한국말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쉽게 마주친다. 다문화 가정도 날마다 는다.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가계에도 진작 혼혈이 발생했다. 도희가 미국에 잠시 교환학생으로 다녀왔을 뿐으로 그리 되었다.

언니, 어떻게 해. 누가 한국에 오겠다는데.

누가?

으응, 미국에서 만났던.

뭐야, 너 그 틈에 연애했어?

연애는 아니고, 그냥 캠퍼스에서 친절하게, 차분한 선배였는데.

선배? 어떻게 외국사람이 네 선배야?

그럼 뭐라고 불러, 다카하시상…….

미국에서 만난 일본인이 청혼을 위해 한국에 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일본인 청년은 친척집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더란다. 그를 모습으로는 얼른 외국인이라 알아보지 못했다.

혈통은 지켜야지!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청소년기를 일제 밑에서 보낸 세대였으니 두말한 나위가 없었다. 더구나 둘째 형은 ‘묻지마라 갑자생’이었다. 징집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사도 묻지마라. 결국 우리 집엔 둘째큰아버지란 이름이 생겨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도희는…….

 

자, 차려자세 그대로요, 팔을 넓게 벌리고, 오른 손 만세, 상체 들어서……

내 자리는 맨 가라서 손을 조금 더 뻗는 순간 핸드폰이 만져진다. 살짝 엿본다. 꼬마 4자가 걸려있는 동그라미 안이 완전 초록이다. 맙소사, 초록이면 숲 사진의 도희다. 도희에게서만 넷이다. 도희, 도희가 웬일일까.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찬성할 수 있는 이유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았었다. 첫째가 혈통이고, 그것도 하필 일본인이라니. 외아들에, 너무 부자에. 그 와중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때 다녀갔던 청년이 다시 또 다시 찾아왔을 때 어머니는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어머니는 무엇에도 버틸 힘이 없었을 것이다.

 

롤링, 자 롤링 다섯 번 하고 일어나세요. 팔 벌려 숨 쉬기 하고요, 다시 한 번, 자, 반대로…… 어깨 흔들고…… 그대로 숨쉬기, 네에, 수고하셨습니다아.

 

수업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집어 든다.

못 보고 가겠지, 아마. 엄마한텐 전화 못 했어.

100평이라는데 침실은 두 개 뿐이네. 베란다에 풀은 엄청 좋으네, 애들 왔음 정말 좋아했을 텐데. 언제 시간 맞춰서 하루 이틀 사용해.

어제 늦게 펜트하우스에 들어왔어, 기장이라고 알아, 해운대에서 고리 쪽, 부산 끝.

언니, 여기는 THE ANANTI COVE.

거꾸로 찾아 읽으니 도희가 부산엘 왔었단다. 아난티 코브? 매트를 접을 것도 잊고 애꿎은 네이버를 두드린다. 부산 끝 시랑리, 부산 시민들도 잘 찾지 않았다는 한적한 어촌 마을. 느닷없이 300실 규모의 힐튼호텔과 100실 가까운 아난티 펜트하우스 그리고 100채가 넘은 프라이빗 레지던스를 갖춘 관광 명소가 되었단다.

그래, 지친 도시인들을 위한 도심 가까운 명소도 필요하겠지. 쉬고 싶고 돈이 되면 명소에 가서 쉬어 마땅하지. 일본에서도 오는 걸 보니까 일단은 성공한 관광지인 모양이다.

 

도희는 결혼하고서 일본에 정착하는 줄 알았는데 곧 중동으로 나갔었다. 시댁 회사의 지점이 있는 두바이에 가서 살았다. 어머니가 늘 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다행히 아이를 낳은 뒤로 애 교육 문제가 생겨서부터 도쿄에서 살았다. 도쿄 서울은 쉽게 오갈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머니한테는. 그러다 아이가 자라면서는 아예 미국 지사에 나가서 살았고, 오랫동안 한국엔 오지 않았다. 한국에 오더라도 집에까지 내려와서 어머니를 보고 가는 일은 드물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지금에는 다시 도쿄에 살고 있으니까, 부산도 마음만 먹으면, 또는 비즈니스면, 쉽게 오갈 수 있나 보다.

 

다시 네이버. 아난티 코브, 연결된 힐튼호텔 10층 로비의 전경은 지상낙원?

어,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다가 미치면, 뛰어내리면 어쩌나. 하긴 바다를 보고 미칠 인간이면 아난티 코브 힐튼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위인이 못 되겠지. 돈이고 명성이고 완벽한 그들, 현대판 귀족들이 바다에 뛰어내릴 염려는 1도 없단다, 이 소심아!

몸 말고 맘도 두뇌도 융숭한 대접을 받는군. 500평에 달하는 대형서점 이터널 저니에는 여행, 인문, 철학, 예술 등을 주제로 2만여 권의 책을 비치해 놓았단다. 여행, 인문, 철학, 예술이 돈의 소유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허나 돈이 모자라면 여행, 인문, 철학, 예술 모두에서 영영 이삭줍기 인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는 대목이다. 7, 8천 그루의 교목과 관목을 자랑한다는 아난티 정원, 참 낙원이겠다. 힐튼호텔 앞 쪽에는 장흥의 시골마을에서 300년 넘은 은목서를 옮겨 심었다고. 대단하구나.

문자 내용으로 보아서 체크아웃이 임박했다는 것 같았다. 곧 있으면 부산 도쿄 비행기에 오르겠지. 나도 문자를 쓴다. 그래, 300년도 넘었다는 장흥 산 은목서는 안녕하시든? 어디에 있던 행복하면 돼!

 

행복하면 된다! 행복하자면 최소한 열등하진 말아야 하는데. 우선 장애는 열등이다. 그런데 난 듣는 데 장애가 있다. 거기다가 또 어딘가 아프면 큰일이다.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건 곤란하지. 귀찮아도 요가교실에 다닐 이유를 또 한 번 확인한다. 우리 중 누가 회복불능으로 아프면, 어차피 죽을 거면, 몰래 수면제 치사량을 먹이기로 약속하자! 도희랑 고등학교 땐가 약속했었는데, 아마 도흰 잊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확인할 계제가 안 된다. 우선 너무 멀다. 태어나면서 미모도 우열을 갈랐지. 뚱한 언니에 비해 상큼하게 예뻤던 도희!

 

그런데 미모로 사람을 나누는 것은 해결된 것도 같다, 잘만 하면. 10년도 넘은 이야기다. 그때 비비씨 뉴스라던가 런던타임즈라던가에서, 아니면 둘 다에서, 남편이 성형의 나라 한국 이야기를 보고는 한숨을 쉰 적이 있었다.

내 참, 이럴 줄 알았으면 성형외과를 하는 건데.

…….

이거 봐, 제목이 아예 ‘프라이스 오브 뷰티 인 사우스 코리아’, 미모의 값이라. 미모에 대한 광증이 지배하고 있는 남한. 여기 봐, ‘얼짱’이라는 한국어도 그대로 소개되었다니까. 20대 여성 50%는 어떤 방식이건 성형을 했다는 거야. 스물다섯 살 여자가 몇이야, 80만 명은 태어났을 것이니 여자가 40만, 그 중 절반이면 20만 이상이 어딘가 손을 댔다는 말인데, 어휴.

이비인후과 환자 수는 그에 비길 바가 못 될 것이다. 게다가 거의 노인들이 오겠지. 잘 못 듣고 어벙한, 기침감기가 오래되어 목이 쉰 노인네들. 그래도 썩은 이빨을 내미는 치과 보다는 낫지 않을까. 무슨 과이건 하루 종일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라는 직업이 개인에게는 상쾌한 직업은 못 될 것이다. 그렇담 하루 종일 범죄자만 다루는 경찰이나 검찰, 그러니까 판검사들도 개인적으로 쾌적한 직업은 못되겠다. 꽃나무나 꽃을 파는 화원이, 문방구를 파는 가게가 좋겠다. 다음 생에서는 소소한 그런 일들을 했으면 싶다. 아니, 아주 만일에 다음 생이 있다면 그보다는 먹을거리를…….

암튼 그 순간에는 우선 남편을 위로하고 싶었다.

성형외관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매번 확실하게 더 예뻐지라는 법도 없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쑤나. 본인들이 선택하는 건데 뭐.

마취 같은 것도 무섭고.

마취가 무섭지 않은 사람은 없지 그래, 그렇다고 마취 무서운 의사가 의사인감. 의사를 말던지. 하긴 피부과 지원자도 엄청나다더라고, 전엔 성적 좋은 애들이 피부과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피부과를?

피부과에서 간단한 성형을 상당히 해결하제, 수술을 많이 안 하고도.

나라면, 내가 만일 의사라 해도, 확실히 성형외과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었다. 의사가 아닌 주제에 가정법으로 말해 무슨 소용인가.

 

지금은 요양병원을 운영하는 선배도 있다. 베드가 100에 육박한대나, 그거 다 쌍수해서 벌은 거라니. 내과은사님 떡하니 모셔다 놨더구만. 개원 때 다녀와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모습이 좀 안타까웠다. 내과와 정형외과 위주의 종합병원을 차린 후배들 여남은 틈에 끼어 혼자 파리 날리는 이비인후과를 맡아서는.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살면 어쩌나.

 

남편이 왜 이비인후과를 택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오빠 고등학교 동기로 함께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빠완 일찍 갈렸다. 오빠는 본과에 가자마자 탈락했다. 무작정 작파했다. 결국 해부학교실 때문임이 드러났다. 그러고도 사내 녀석이냐! 인생이 그게 땅 파먹고 살 거냐? 호미로 지렁일…….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가 우리 방 창문까지 흔들었다.

오빠, 해골 봤어? 시체해부도 했어? 좀 있다가 도희는 풀죽은 오빠에게 짓궂게 물었다. 멋쩍은 오빠 표정은 우리 어려서 샘가에서 한 솥 가득 토막 난 허연 뼈다귀들을 보고나서 도망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도희는 샘가에 그냥 있었지 싶다.

누이들아, 실망했지? 그래, 나 구역질해서 쫌생이 됐다. 망신 산 것? 것보다 그 애, 그 애가 키득거렸어. 샐샐 웃고 있었다고! 입을 꼭 다문 오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어렴풋이 오빠의 ‘그 애’를 알고 있었다.

오빠가 진로를 바꾸어 서울로 간 뒤에도, 오빠가 집에 오는 방학 때면 친구도 어김없이 왔다. 오빠가 유학을 앞두었을 무렵엔 우리의 결혼 말이 오갔고, 곧 결혼을 하게 되었다. 사윗감이 이비인후과 레지던트란 사실에 우리 부모님들은 뭔가 안심하셨을 것이다. 딸이 요상한 병, 먼데는 잘 듣고 가까운 데는 잘 못 듣는 병에 걸려있었으니까. 그것이 이비인후과 소속의 병일 것이라 믿고 계셨으니까. 그런데 남편의 세부전공은 귀가 아니라 목이다, 뭐 그런.

 

편한 운동화 위에서 걷고 있는 내 몸을 내려다본다. 요가하는 날에는 기장이 긴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못 살게 뚱뚱한 건 아니지만 운동하려면 몸을 덮는 게 편타. 남자 회원들이 두엇 섞여서 불편한 점도 있다. 팔을 위로 뻗을 때면 허리가 드러날지, 고양이자세 같은 것을 하려다간 정말 배통이 나올지. 더러는 민망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막상 그런 회원들은 무신경하다. 무신경하니까 행복한가. 요가시간 마지막쯤에는 스트레스 해소 웃음을 웃으라고 할 때가 있다. 억지웃음이 잘 안 나오는데, 제일 잘 웃는 건 배통을 보통 내놓는 영님 씨다. 몽글몽글한 몸매로 귀여운 여자인데, 엉덩이는 쳐들고 배가 훌러덩 벗겨져서 뱃살이 바닥에 눌릴 때면 솔직히 나도 모르게 눈이 감아진다. 그런데 제일 행복한 얼굴이다.

 

나남이 씨, 뭐해요. 파란 불이구만, 언능 갑시다.

건널목에 서있던 내게서 누가 가방을 잡아당긴다. 바로 행복한 영님 씨의 친구다.

어, 내가 젤 늦게 나온 줄 알았더만요. 근데 오늘 친구는 안 보이든…….

예에, 해외여행 갔다요, 7박8일이나 된다요. 신랑이 환갑잉게 환갑여행인디요, 사돈네랑 같이 갔다요. 거그는 내년인디 한테 가자고.

사돈네랑 해외여행을? 나도 모르게 말하고서 움찔했는데, 다행히 스스럼없는 반응이다.

며늘애가 참 좋아라. 긍께 그라고 항꾸네 여행 모시고 다니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우리는 건널목을 건넜고, 건널목을 건너자 바로 헤어졌다.

 

나도 하와이엘 간 적이 있었다. 도희네가 카일루아 쪽에 집을 통째 빌려 놓았다. 우리는 한 달 내내 함께 있지는 않았다. 코앞의 해변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그런데 희극적으로 뚱뚱한 사람들, 배통을 다 드러낸 남자들 여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덜렁덜렁, 출렁출렁, 거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몸매들. 임신 후반기처럼 보이는 여자도 배를 한껏 밀어 벼슬처럼 쳐들고 뒤뚱거리며 휘젓고 다녔다. 가까이 보면 발가락들하며 발 모양은 희한하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저런 발을 몸을 뭣 하러 내놓을까.

다음 순간, 우리가 우리 몸을 누구를 위해서 누구를 보라고 내놓는 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등신이 아니라고, 배가 출렁거린다고, 그것이 밝은 대낮에 따뜻한 모래사장에서 햇볕을 즐겨서는 안 될 이유는 아니었다. 한번 그만큼으로 살아있으므로.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법, 그것이 문제야. 도희는 달랐다. 예쁘기도 했지만 뭔가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 그래서 고향을 멀리 멀리 떠나서도 자신 있게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우수한 형질이란…….

플라잉 인 더 스카이~~, 핸드폰 벨 소리다. 모르는 번호다. 그것까지 응대할 마음도 여유도 없다.

어라, 도희에게 썼던 문자가 그냥 거기에 그러고 있다. 그래, 300년도 넘었다는 장흥 산 은목서는 안녕하시든? 어디에 있던 행복하면 돼!

놀라서 근처 아이들 놀이터 그네에 가서 앉는다. 카톡을 전송을 아직 안 한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앞줄을 주르륵 지운다. 은목서 안부를 물어서 뭐하려고! 그 순간 내가 어딘가 팍팍 꼬였었나 싶다. 살짝 바꾼다. 울 도희, 어디에 있던 행복해라!

 

내가 짜릿한 행복감을 잘 모른다고 해서 그리 불행한 것도 아니다. 밥걱정해 본 적 없이 불행 어쩌고 하면 죄로 간다. 행불행은 돌고 돈다는데 나머지 생에서 밥걱정하게 될 까 그것이 걱정될 때도 있다. 꼭 그 때문은 아닌데 가끔 귀가 울만큼 머리가 아플 때가 많다. 예컨대 예쁘고 활달한 도희 사는 걸 듣다보면 혹시 우리는 하등인간인가? 아난티 코브를 거닐 수 없으면, 또는 수억 짜리 명품시계 안내행사에 초대된 적이 없으면.

그 얘기도 슬쩍 들었었다. 서울, 유수의 호텔 브이브이아이피 룸, 아직 붐비지 않은 늦은 오전 시간,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장갑까지 끼고서 단 대여섯 명의 귀빈들에게 ‘신상 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 눈에 선하다. 절제된 몸놀림, 조용한 목소리.

그러게, 5억 그런데도 별 게 아니더라. 시계얼굴은 뭐 예뻤는데, 줄이, 보석장식들도 너무 자잘자잘하고. 스타일은 괜찮아서 차보기는 했어. 점심대접까지 해줘. 서울 사는 친구, 숙인이 알지, 숙인일 데려갔어. 샴페인 곁들인 메뉴판 보고는 눈 좀 휘둥거리더라!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집값을 훨씬 넘는 시계나 아난티 코브 수준의 펜트하우스는 사람을 나누어 팽개쳐버리는 것 같다는 말이다. 120만 원을, 내가 잘 못 들었나, 잘 못 들었기를, 그 돈을 하루 숙박에 지불해야하는 데를 누가 쉬이 구경하겠는가. 누군가가 지불할 수 있는 숙박요금의 상한선 말인데, 그게 바로 자존감의 높이다. 그렇게 취급된다. 숙박비 말고도, 아무라도 기분 따라서 이삼일 그냥 쉴 수 있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여행을 떠날 수나 있는가.

집은 안 그런가. 서울 어딘가 평당 5천만 원이 넘는 아파트도 있다고, 올 초에 뉴스에 나왔다. 그때 누군가 티브이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다, 꽈당, 꽈다당! 아래층인가?

 

날마다 수많은 아파트들과 빌라들이 들어서고, 날마다 수많은 모델하우스들이 공개되지만, 손님들을 선별적으로 조용하고도 융숭하게 안내하는 곳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사람들은 다 아는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몰랐었다. 어떤 특정 모델하우스에 초대되어 살며시 다녀왔다는 도희가 전화를 했었다. 그때도 부산이었다.

전망 끝내주더라. 아파트 보다는 레지던스가 관심이 가던데.

레지던스? 부산에 주택을 사려고?

무슨 주택을, 브렌드 레지던스지.

브렌드?

점점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5성급 호텔과 한 건물에 있어서 똑같은 서비스를 받거든. 아래는 호텔이고 위는 아파트라고 생각하면 돼. 살림도 하지. 젤 좋은 건, 언니, 사서 등기도 할 수 있어. 서울 어디 레지던스는 평당 일억도 한대나. 좀 되긴 하지. 그래도 외국인은 투자이민 식으로 영주권도 받을 수 있고, 내국인은 일가구이주택도 해당 안 돼서 좋고.

 

그냥 들은 풍월이라고, 도희가 무심코 이야기하는 일상은 내게는 특별한 영상이다. 비교할 수 있는 일상의 꼬투리가 없기 때문에, 비교가 되지 않아서, 일상의 자리 어딘가에 묶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내가 언니니까. 언니가 시시콜콜 그런 것을 묻는 건 아니다. 자매라 해도 각각 결혼해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세월들. 세월 따라 변하는 게 많겠지. 아니, 서울로 진학을 고집했을 때부터 남다르기도 했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난 아마 그리 꿈이나 욕구가 높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대학 때부터였나. 잘 듣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다 보니 더 멍해진 것도 사실이다. 헬렌 켈러도 그런 말을 했다더라, 청각상실이 시각상실보다 더 불행하다고. 시각상실은 사물들로부터 고립시키지만, 청각상실은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기 때문이라고. 사람과의 연관을 어렵게 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 수 없게 하니까. 좀 충격이어서 어렵사리 영어원문까지 찾아보았다. 프럼 띵스, 프럼 피플.

아, 선배는, 청력장애였던 선배는 어땠을까?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저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난 정말 못 들었다. 못 됐다.

 

어차피 잘 못 듣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오기를 부리는 편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초라함에 질린다. 월 만원 수업료를 내는 주민센터 요가교실에 다녀오는 길, 하릴없이 아이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는 나. 스파 앤 클럽 입회보증금으로 집 한 채 값을 슬쩍 긁어대는 마이다스 손들은 우리 모두를 하등인간이라고 치부하겠지. 반려동물만 못한, 동물보다 아래 부류의 인간. 으스스 떨린다, 알 수 없는 모욕감에. 땅을 차고 두어 번 굴려본다. 하늘 - 땅 - 하늘 - 땅.

 

하늘에서 땅으로 곤두박질 친 사람들도 있다. 다이애나가 죽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다. 우르릉 꽈당! 지하차도를 달리던 차가 벽을 들이받는 소리가 난다. 헉, 하고 쓰러지는 사람, 사람들. 끼익, 끼이익! 뒤쫓다 멈추는 차량들. 파박, 파팍! 터지는 셔터소리, 소리들.

셔터 소리야, 셔터 터지는 소리, 소리들.

나남이, 뭐하고 있어!

가만, 고통스런 저 숨소리. 응급처치는 않고 셔터들만 눌러대고 있어, 파박 파팍!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래! 정신 차려, 남이야, 다 끝난 일이야. 뉴스에 뜬 건 이미 끝난 일들이라니까.

그러네, 연인이랑 함께 있었다고, 불행 중 다행이네.

갔는데 무슨 소용.

그래도. 이집트 무슬림이라면 이제 피는 안 따지는 세상이 되었나 봐.

무슬림이지만 누구냐가 문제지! 런던 한 복판 세계적 수준의 해롯백화점 상속자라잖아. 혈통이나 피부색이 별 문제가 아닌 거지.

왜 아냐, 영국 왕실에선 그 일로 크게 노했다는 음모설도.

설은 설이고. 인간 등급의 새로운 기준은 이제 혈통이 아니라 돈이라는 것이지. 돈이 되면 되는 거야. 돈이 안 되는 인간은 하등인간이고. 돈의 피라미드, 상부에 오르려면 최강 맹수처럼 살아내야 해. 누구든 제껴야지. 메피스토 말이 맞아, 인간은 신이 짐승들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준 이성을 사용한답시고 외려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되었다고.

언제 적 사람?

왜 이래,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 유혹자!

애초에 그리 말하지. 인간도 약육강생이란 말이지?

너 왜 이래 오늘, 약육강식! 인간 정글에서 철저히 계산된 약육강식을 누가 말리냐고. 합리적 이성이란 다른 말로는 잇속 따른 철저한 계산일뿐야.

졸업 후 일만하다가, 일하면서 누군가를 사랑만 하다가, 그러다가 그냥 혼자, 평생을 혼자 공부만 하며 살아가는 미선은 가끔은 너무 어려운 말을 한다. 지난번에 집에서 커피 마시다가도 그랬다. 발아래 모래땅을 톡톡 건드리다 일어서려니, 모래가루에서 커피향이 올라온다.

 

여전히 폴저스 깡통이구나.

뭐 그냥. 인스턴트 때부터지. 네 말대로 합리적이다, 왜!

합리? 커피 값도 요지경이야. 저번 서울에 갔을 때, 우연히 소문난 중국식당엘 갔었다.

커피 값 말하다가 웬 식당?

으응, 요리골목 그런 데. 요리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네 식당이라고.

맛이 다르든? 비싸겠지 뭐.

맛에 돈에 놀란 것 아냐. 웬만하더라고. 근데 식당 영수증을 가져가면 근처 커피집에서 1,000원에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다는 거야. 괜찮은 오퍼지.

괜찮으네.

그게 다가 아냐. 바로 옆 다른 커피전문점 앞을 지나는데 섬뜩하더라고. 전문점이면 나름 비싼 아라비카 원두를 쓸 테니 4,000원은 되겠지. 누가 거길 가느냐고. 값싼 로부스타 원두면 어때, 식후에 아메리카노 한 잔이면 충분한 것이 보통 우린데.

대기업의 문어발 공격은 막아준다 안했었냐. 프랜차이즈 빵집, 식당, 그런 것들 중소기업 적합업종 뭐 그런 것 정해주지 않았어?

소용없다니까. 호랑이 없는 굴 속 여우가 왕 노릇이지. 여우는 꾀를 낸다고, 여기서 식사하고 이 커피로 가세요! 밥집과 커피집이 한통속이더라고. 알바도 같이 쓰고.

설마.

커피 주문받는 애 손톱 땜에 기억이 났어. 열 손가락 무지개. 내가 기어코 물어 봤어, 아까 저쪽 식당에서 본 것 같다고. 뭐랬는줄 알아? 맞아요, 같은 사장님이 운영하세여. 점심 바쁠 땐 그 쪽으로 순환근무죠. 저녁시간엔 더 많이요. 그랬다니까.

설마.

남이야, 내 귀로 직접 들었어. 꿩 먹고 알 먹고, 여우같은 인간들.

우리는 네 눈을 둘 데를 몰라서 뚫어지게 커피 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는 식어갔다.

왜, 여우라고 하니까 로트카-볼테르 공식이 떠오르네. 내가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너 어떻게 그걸? 바로 그거야, 포식자 피식자에 관한 로트카-볼테라 방정식. 여우 까짓것 한껏 늘라지. 첨엔 여우가 늘수록 토끼가 줄겠지. 토끼가 아예 줄어들면 여우도 따라 줄어. 그럼 다시 토끼가 늘 것이니까. 움츠려 보자고!

응, 로트카-볼테라.

난 가끔 단어들을 틀리게 말해서 무안할 때가 있다. 주홍이나 주황이나, 분홍이나 분황이나. 뭐 내가 언어학잔가.

 

아파트 하나를 건너서 걷다 보니 집이다. 우리 아파트다. 문을 열면 바로 작은 욕실이 있는 구조는 참 이성적인 생각에서 만들어진 결과다. 청결을 추구하는 우월한 이성이 좋구만! 메피스토며 미선을 생각하면서 웃었다.

 

사람의 몸 중에서 어디가 제일 불결한 곳이죠?

우리 꼬마들은 말을 못하고 키득키득 웃었다. 다들 대변 소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더러는 매일매일 새까매지는 양말을 보면서 발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선생님은 말했다. 손이 젤 더러운 곳이에요, 손이! 손이 무엇이든 만지고 다니잖아요, 하루 종일! 그러니까 손을 잘 씻는 사람이 젤 깨끗한 사람이에요!

 

어려서 배운 것은 정말 평생 간다. 내가 만지는 것들이 다 문제가 많은 것들이 맞다. 요가매트는 공용이다 보니 첫날 바로 몸이 쑤시고 간지러웠다. 곧 누비천으로 덧깔개를 만들어 갔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다른 회원들도 여럿 깔개를 쓴다. 문제는 계속 생긴다. 요가선생님은 앞쪽으로 누우라고 했다가 다음날은 또 뒤쪽으로 누우라고 한다. 머리와 발을 바뀌지 않게 하려고 이름까지 수를 놓았지만 소용이 없다. 이름 표시 자체는 정말 필요가 없다. 날마다 가지고 다니니까. 뭣한데 짊어지고 다니요! 여기 요레 놔둬도 안 없어진디! 누군가가 친절히 말해 주었지만, 내 맘 속에서는 아니다. 내가 결석을 했을 때 누가 내 깔개를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 아니, 다른 사람들 거랑 함께 쑤셔 박혀있는 상상이 그리 유쾌하지 못한 걸 어쩌라고. 집에 가져오면 여름철엔 매번 널기도 하고 또 자주 빤다. 빨래는 세탁기 몫이니 문제없다. 날마다 물청소를 할 수 없는 물건들이 심각한 것들이다. 하긴 날마다 물청소를 한들, 빨아 쓰는 걸레도 그 나름 불결하겠지. 그렇담 쓰고 버리는 종이걸레를 써야 할 텐데 그건 또 못하겠다. 이율배반이다. 일회용 걸레를 쓰지 못하면 하등? 아 참, 오늘 왜 이리 등급 타령일까.

 

괜찮다. 난 괜찮다. 밀걸레질을 하려면 수건걸레를 다섯 번은 바꾸어야 하지만 괜찮다. 대신 깨끗한 마루를 내가 좋아하니까. 오늘은 샤워를 먼저 하고 머리를 싸매고 나와서 마루를 닦았는데, 매번 갈팡질팡한다. 걸레질이 먼저인가 샤워가 먼저인가.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일단 손을 먼저 씻고 나와서 청소를 마치고나서 샤워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손 을 씻다가 순간에 샤워 꼭지를 틀고 만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나서 밀걸레를 들자면 쭈욱 뻗고 쉬고픈 마음과 싸워야 한다. 그래도 결국 한다. 의심도 따른다. 나에게 깨끗한 마루가 그렇게 중하다면, 몸을 짓이겨서라도 청소를 하러든다면, 내 몸은 마룻바닥보다 아래인가. 소중한 것, 소중한 것들. 판단의 시금석이 불안하다. 곧 바로 혼란이다.

 

세상도 그러하다. 시금석 같은 건 없다. 어떤 이성은 아내를 남편을 부모를 버리고 보험금을 택하고, 어떤 감성은 강아지를 위해 남편을 지인을 이웃을 죽인다. 메피스토도 절반은 몰랐다. 지상에서 신이라 자처하는 인간들, 이젠 이성뿐 아니라 감성도 함께 통째로 미치고 있답니다!

아, 편지를 쓰자, 메피스토에게.

햇살이 마루 깊숙이 왔지만, 여전히 긴 하루가 남아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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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 단편 「요가교실」, 『한국소설』 2017 12월 (통권 221호), 98~115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10. 20. 18:35

 

파면

 

파면이었어요, 파면되었다고요.

파면? 무슨 말이야?

첫 발령지에서 파면되었다고요. 사흘 째 되던 날에요.

무슨 말인지…… 대관절 뭘 잘 못해서?

 

5월의 첫날이었다. 우리 몇은 해마다 5월의 첫날이면 옛 학교 근처에서 만난다. 벌써 여러 해 째다. 추억 삼아 대학 후문 근처 식당에서 만나는 것이다. 모처럼 뭔가 카페 분위기 식당에서 양 칼질도 해보고 생맥을 나누어 마시고……
그렇게 만난 우리는 대게 미선의 주문을 따르고 느긋하게 기다린다. 미선은 우리 각각에게 다른 음식들을 시켜놓고는 이리저리 나누어주느라 법석이다. 연어살 샐러드는 짙푸른 채소들과 섞이어 꽃밭처럼 보이면서 상큼하고, 오리엔탈 어쩌고 하는 목살 스테이크는 매콤해서 고기를 꺼리는 성주도 거부감 없이 가져간다. 재미있다. 이런 곳에서 스파게티가 빠지랴. 나는 한번 먹어본 것만을 좋아하는 애들처럼 옛날 처음 먹었던 보통 스파게티를 고집하니까 미선은 그것도 시켰나 보다. 케첩이 듬뿍 묻은 면발을 집어들고 입술에 묻을까 조심하려고 살짝 멈춘 순간,

 

파면은 그 순간에 건너온 화두다.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한 자리 다음 그 건너 옆 자리에 서로 다른 나이로 보이는 두 여자가 있었다. 편안하게, 거의 아무렇게나 입고 나선 것으로 보일 정도로 편한 차림의 둘은 식사를 거의 끝낸 모양이다.

어서 계속해 봐요, 그래서 그 다음엔? 냉택없는 내 기다림과는 달리 둘은 말이 없었다.

 

쟤 좀 봐. 또 넋 나갔네.

뭐해, 스파게티 떠서 들고 뭐 하냐고!

손이 굳은 거야 뭐야?

으응, 아니. 귀에…….

뭐야, 또 이명인 거야?

왜, 쟨 이명보다 더한 뭐라더라, 응, 메니에르 병으로.

그래, 쓰러지고 그랬었지?

갑자기 어지러운 것 이제 우리들에게도 낯선 증상 아냐.

원인을 모르니 예방도 못하고.

그래, 림프액의 압력차이로 생기다고 말하면 우리가 알아들어? 림프액이 뭐고, 그 압력 차이는 왜 생기는데?

암튼, 것도 싱겁게 먹으라는 병이라던데?

 

난 오이피클을 집으려다 말고 다시 귀를 먼 쪽으로 기우린다. 가까운 소리를 필터링하고 먼 데 소리를 듣는 건 가벼운 고문 같다. 그 통감을 나는 즐긴다. 그쪽은 좀체 말을 잇지 않는다.

말해 보라고, 웬 영문인지.

그게 첫 발령에서 두 군데로 발령이 났어요.

웬 일? 그런 일이 어떻게?

에이 참. 말 좀 끊지 말고 그냥 계속하게 두지……. 내 핀잔을 들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림없다. 내 목소리는 입 안에서 삼켜지고 만다. 정말 참견했다가는 되레 큰일 당하리라. 벙어리 냉가슴으로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난 꽤 먼 소리를 듣는 장기가 있다. 헌데 오늘따라 먼 데 사냥이 잘 안되고, 들리는 건 코앞의 소리들뿐이다.

 

올봄엔, 어때, 다들 좀 들 뜨지?

뭐가, 그날이 그날이고만.

선거잖아, 선거!

무슨 큰일이라고. 큰일은 지났잖아.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대선에?

우리 58개띠도 나왔잖아.

어, 그러고 보니 유승민이 개띠라지.

거기까지 출세한 이도 있네!

대선후보만 출센가. 정치 쪽에도 꽤 많지 이젠. 추미애도 이정현도 그럴 걸. 단식 위문 갔을 때 둘이 동갑이랬어. 힙합 춤 멋쩍던 김성태도 그래.

그게 무슨 상관인데. 동갑이라고 찍나?

그렇다는 말이지.

암튼 올봄도 우리 58개띠들 씩씩히 나가자. 완전 대량생산, 우린 시작부터 대세였다잖아. 정인이 느닷없이 개띠 타령이다.

설마 했는데, 우리 동갑내기들이 100만이라더라.

무슨 100만까지야, 암튼 90만은 넘었다더라.

에이, 그게 그거고만. 베이비붐이라더니, 유명인사도 그래서 많은가. 가수만 해도 신형원 진미령 나미…….

참, 너 무슨 신원조회 했어?

그렇다는 거지.

하긴 우린 중학교 고등학교 편하게 들어갔다 했더니, 갑자기 대학 문턱에서 경쟁률 덕에 혼쭐났었지. 우리 77 대학정원이 겨우 6만5천이었던 것 알아? 것도 76들에 비해서 5천 쯤 늘어났다는 게 그 정도였어.

세상에, 90만 명 태어났는데 겨우 6만5천명 정원? 생각도 못해 봤네. 예비고사를 29만인가 봤었지? 경쟁률 피터진다 했는데, 세상에, 60만 이상이 미리 제풀에 탈락이었네, 예비고사도 안 봤으니.

예비고사 통과해도 힘들었잖아. 대입에서 또 탈락했으니까. 예비고사 수험표 눈에 선하네, 여섯 자리 수험번호, 너 외어?

얘들은! 뭣 땜에 옛날이야기야. 오늘 낼이 중하지.

그렇게 말하는 미선은 옛날을 누구보다 싫어한다.

 

나는 오직 저 건너 쪽으로만 귀를 쟀다. 이상하다. 두 사람은 말을 끊었다. 하긴 아무 상관없는 생판 남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사연인데, 선뜻 내뱉기야 하겠는가. 뜸을 들여야 할 거다. 둘 다 커피 잔만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파면, 파면이라니! 동명이인이었을까. 왜 그것을 묻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궁금해보았자 그들의 대화에 끼일 재간은 없었다. 착오가 있었으면 바로 잡으면 될 일이지 웬 파면? 처음 학교로 돌려보내지……. 설마 내 안달을 느꼈는지(?) 듣고 있던 쪽이 먼저 묻는다.

그래서 장학사는……

그렇게 말을 끄집어내던 이는 상대가 아무 말 없자 멋쩍어서인지 그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엘 가려나. 곧 이어 또 한 사람이 일어선다. 어라, 카운터 쪽으로 가네.

 

남이 너 뭐해.

정인이가 꾹 찔렀다. 뭔데 그쪽만 흘겨 보냐고!

아아니, 왜?

어쩐다고 움직임 하나하나 그쪽만 보고 있냐고. 너 그 스파게티 다 불어터진 것 몰라.

아니 그냥.

스파게티는 네 메뉴잖아. 다른 것도 덜어가지도 않고. 식욕 없어지고 체중 빠지면 우울증 와. 부신기능저하증 땜에.

무슨 소리. 나 체중 안 빠져.

빠져 보여. 너, 완벽주의 그것만 봐도 부신기능저하증 오게 되어 있어. 너 저혈압에 저혈당 아니었어? 혹시 짜게 먹는 건 아니지?

아차 싶다. 그러고 보니 감자 한 알도 소금 없인 안 넘어간다. 소금 좋아하면 병인가, 쇠약감, 무기력증, 손톱에 거무스레한 색소도 그런 것 때문일까.

 

나중에 일어섰던 사람이 먼저 돌아온다. 파면 당했다는 말을 했던 쪽이다. 그쪽은 화장실 간 것이 아니라 계산을 하고 온 것 같다. 뒤 이어 먼저 갔던 사람 역시 카운터 쪽으로 가더니 이내 돌아온다.

아니, 웬 계산을? 내가 빌 가지고 갔었는데.

빌 없이도 하죠. 제가 대접해 드려야죠.

무슨 사이일까. 아까 그 이야기는 언제 계속 하려나.

 

남이 너 아까부터 스파게티는 안 먹고 피클만 계속 먹던걸. 얘 큰일 났네. 물 좀 마셔!

밥 먹다 말고 찬 물을 어찌 마셔, 생맥 하나 시켜, 나눠 마시게.

미선이 벨을 누르고 서빙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도 내 눈은 저 쪽의 둘 사이를 오간다. 벗어 둔 옷과 백들을 집어 드는 것이 일어날 모양새다. 젊은 쪽은 모자도 있다. 어쩌나, 그 이야기의 후속을 들을 기회가 없구나. 영 없구나. 따라나설 수도 없고.

 

그들은 일어서고, 마침 출입문 쪽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은 나는 그들을 눈으로 쫒는다. 더 나이든 쪽이 문을 열고 틈을 내어준다. 애프터 유~ 라고 하는 입술이다. 상상인가. 유아 웰컴, 하면서 더 젊은 쪽이 나간다. 나가버린다. 말의 줄기를 쥔 이가 나가버린다.

 

휴우, 한숨을 짓는 나를 다들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왜?

왜 그래?

실은 대화를 엿들었어. 엿듣다 보니 빠졌고. 그런데 이를 어째. 뒷이야기를 못 들었잖아.

우리가 자꾸 널 말려서?

아니, 아직 거기까진 이야길 안 했으니 못 들었지. 끝까지 안 하고 그만 나가버리네.

그 참, 신기하다. 웬 남의 이야기에 목매달 일 있어?

목매달기는, 말도 무섭게 하네.

무섭긴, 너가 웃겨서 그래.

그게 엄청…….

엄청, 뭔데? 썰 풀어 봐, 중요한 건지 아닌지 보게. 나 이래 뵈도…….

미선이 말끝을 흐린다. 나 이래 뵈도 판사 각시야, 라고 할 수 없어서인 걸 모두 안다. 판사 각시 하겠다고 뒷바라지 하다가……. 그건 여기서 풀 말이 아니다. 다만 남의 일이라도 절대 안 잊히는 그런 것들이 있다.

응, 그게 졸업하자마자 중학교 교사로 신규 임용되어 갔다가 사흘 만에 파면당한 이야기야.

뭐라고? 전교조였대?

도둑도 이르다. 무슨 발령 나자마자 전교조야. 그리고 전교조는 90년 다 되어서 생긴 거잖아. 그보다 더 전의 이야기 같았는데. 거의 우리 또래로 보였어.

우리 또래? 그럼 58개띠?

아니, 무슨 그런 걸 알아, 내가 점쟁인가. 그냥 또래로 보였단 말이지.

또래라 치고, 그럼 80년대 초 이야기네.

그럼 부임하자마자 과외 섭외했다가? 그땐 교사가 과외하면 감옥에 가고 그랬었잖아.

설마.

울 큰언니 말이 그랬어, 감옥 간 이야기. 내 결혼 무렵에 언니가 집에 자주 왔지. 울 언니 근무하던 여고에서 영어샘이 동료 딸 과외 해주다가 잡혀갔대. 딸 과외 시킨 선생님은 해직인지 사푠지 뭐 그랬고. 조용하던 성주의 말에 다들 놀랐다.

잡혀갔음, 감옥까지 간 거야?

서슬 퍼런 세상이었네 참.

그건 다른 얘기고. 어쩌다가 사흘 만에 파면이었을까. 부임하자마자 과외란 말도 안 되지, 더구나 시골에서 뭔 과외가 그리 심했을라고.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그만 하래도. 뭐 탐정 났어?

아니, 부임지 잘 못 갔으면 정정해주면 그만이지, 왜 파면이냐고. 완전 인생을 종치게. 파면이 어떤 건지 난 알거든.

뭘 알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그 문구 몰라? 그 보다 더 대단한 파면도 있어? 대통령 ……를 파면한다.

어마무시한 문장이다, 사실.

어마무시하지, 그래서 설마 하고 있다가 막상 닥친 일일 것이고.

설마 안 될 일은 없겠지, 사람들은 행여 그걸 걱정했는데, 당사자만 설마 그리될까 방심했다고?

설마 설마 설마라니, 점쟁이도 내일 일 몰라.

파면, 누구에게나 엄청난 사건이야. 대통령 자리 아니라도 엄청난 건 똑 같아. 파면은.

 

파면 - 엄청난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의 해외여행으로 파면이 되셨다. 집안 송두리째 날벼락! 그때 해외여행은 자랑이면 자랑이었지, 불법인 줄은 몰랐었다, 아무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랑 은행본부의 간부 몇 명이 거래처 재벌의 임원직을 도용해서 5년짜리 상용복수여권을 만든 것이 죄목이었단다. 아버지는 갑작스레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얼굴을, 체면을 잃은 것이 컸고, 건강을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집에서도 친지들 사이에서도 도망쳤다. 혼자서 꼭두새벽에 나가시거나 오밤중에 들어오셨단다. 내가 결혼해서 이태쯤 되었을 때니까, 집에는 졸업을 앞둔 도희랑 어머니 아버지뿐이었다. 막둥이는 군대에 가 있었고.

 

남이야, 나남이!

엉?

뭐해 말하다 말고. 파면은 누구에게나 엄청난 사건이라고, 그래 알아들었으니 잊어, 너도. 그거 병 된다, 생판 남의 일에.

어디서 다시 만나면 알아볼 것 같아. 난 그래, 그쪽이야 날 전혀 모르겠지만.

병 다 나버렸네 뭐. 우리 무슨 얘기하다가.

으응, 알았어. 그래 소금 이야기던가? 커피에 소금을 넣는 사람도 있대.

소금이고 뭐고, 난 특별히 기피하거나 특별히 챙기는 것 없어. 먹고 싶은 것 있음 먹어야지, 더 늙으면 먹고 싶은 것도 없다고 그러시더라, 울 엄마.

할미 되서도 엄마 타령이냐!

그 말 알 것 같아. 맛있는 것이 점점 없어져. 정말 그래.

그래, 집에만 있음 안 돼. 운동을 좀 해 봐.

제일 좋은 건 운동보다 춤이라는데, 어디서 춤을 추나 그래.

문화센터 그런 데 있겠지. 알아볼까?

치, 남이가 가겠어? 낯은 된통 가리는 애라.

운동이 무슨 의무라고 그래. 점심 먹으러 나오는 건 운동 아닌가. 힘들다 벌써. 일어서자.

 

이상하다. 활기가 아닌 스산함이 대학가 거리를 메우고 있다. 미선은 기어코 캠퍼스 안으로 이끈다. 잠시라도 걷잔다. 친구들에게도 원하는 일을 기어코 시키는 미선은 분명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캠퍼스는 이맘때면 늘 이맘때 모습이다. 물이 오른 연둣빛 잎사귀들에, 잎사귀들 사이로 비치는 가녀린 햇살들에 답답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저쪽으로 가자, 저기 대강당 옆 홍매화 피는 곳! 미선은 계속 우리를 채근했고, 홍매화는 지고 없을 거라는 정인의 말에도 아랑곳 않는다. 적당한 보폭을 두고 흩어져서 발길을 옮겨본다. 개나리 진 가지들 옆으로 철쭉이 주르르 피어있다. 진달래 분홍빛 철쭉이 아니라 흰 철쭉들이다. 붉은 철쭉 무더기와는 달리 시원함을 준다.

 

 

의 생김새를 봐, 도란형라고 해. 거꿀달걀꼴, 달걀꼴 거꾸로란 말이지. 수술은 열 개나 되는데 암술은 하나지. 진달래도 마찬가지. 생물학적으로 암술이 늘 강해.

그는 생물과 복학생이었다. 청력 손실로 다소 멍한 것이 눈에 띠었다. 사격훈련 중 스스로 총기를 잘 못 다루다 생긴 일 때문이었단다. 말을 잘 못 듣는다고 해서 옹고집은 아니고,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진달래 철쭉을 어떻게 구별해요?

뭐?

진달래 철쭉 구별! 둘 다 분홍색에, 둘 분홍색, 참꽃 개꽃 이름만 달라……. 내가 큰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색시 하렸는데 안 되겠네. 시골 살면서 개꽃 따먹다 죽으면 어떻게 하나.

누가 색시 한다고!

색시 한다고? 알았어. 그럼 내 가르쳐주지.

안 한다고요! 색시 안 해!

색시 안 해도 좋아. 가르쳐줄게.

선배의 말로 진달래 철쭉 구별은 확연했다. 이른 봄 개나리와 함께 피어 있으면 진달래. 개나리 없는 곳에서라면 잎은 없고 꽃만 피어있으면 진달래. 그러니까 4월에 꽃만 피는 건 진달래, 5월에 잎과 함께 피는 건 철쭉. 또 홑꽃이면 진달래.

홑꽃이 뭐야? 홑꽃 뭐냐고!

응, 홑꽃은 꽃잎들이 한 겹이란 말이지. 그래서 수채화 같다고나 할까? 철쭉은 꽃잎이 여러 겹이야, 또 꽃잎에 짙은 자주색 반점들이 박혀 있어. 나리꽃에서처럼.

알 것 같아요. 알았어요!

그래 조심해, 철쭉 꽃 따먹지 말고. 색시, 죽지 말고.

누가 꽃을 따먹는다고 그래요. 진달래도 철쭉도 안 따먹어요. 안 따먹는다고요!

네가 화전을 몰라서 그래. 너무 예뻐서 보기만 하고 있다가 밤늦어서 먹어야 되는 화전을.

왜 밤늦게 먹는데? 왜 밤에? 왜 밤?

아침 되면 못 먹게 될까 봐서. 밤새 사라지거나.

사라져요? 사라진다고?

거야 누군가의 입으로 사라진다는 말이지.

참.

 

그런 그는 당연히 말이 적었다. 상대가 힘을 들여야 겨우 소통하는 상황을 버거워했다. 결정적으로는 그가 옳았다. 힘을 들여도 들여도 소통이 안 되는 일이 많았다. 대화의 내용이 객관성을 띈 경우에는 큰 소리로 떠들어댈 수 있으니 좀 나았다. 진달래 철쭉은 괜찮았다. 힘든 것은 심상을 나타내야하는 경우였다. 그래서 마음을 전달하지 못했다. 나는 소리를 질러가면서 내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애초에 언어라는 것이 마음을 나타내는 도구가 아니라는 생각도 한다. 말로 규정하지 말고 그냥 옆에 있을 수는 없었을까. 아니, 지금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건 아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질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썹에 또 다시 떠오르나~

그 가을엔 이 슬픈 노래를 어찌 합창하면서 다녔을까. 노래는 늘 정인이 배워다 퍼뜨리곤 했었다.

 

 

아파트 외벽에 스파이더맨 여럿이 줄에 매달려 있다. 위를 보고 걷다가 여자와 부딪힐 뻔 했다. 여자는 땅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마, 뭐래요? 뭐 하는 거예요?

세척이요.

세척? 청소요?

예, 세척. 세척 나가고 말라야 뺑끼 발르제라!

가만 올려다보니 줄 타는 남자들은 물줄기를 쏘아대고 있다.

아, 아래서 보고 있는 사람이 감독이시네?

감독은요, 이 아래 차들도 덮고 청소도 하고 그래야 하는디.

그러고 보니 띄엄띄엄 주차된 차들에 비닐 커버가 덮여있다. 무엇인가 가느다란 작은 조각들이 바람 속에 섞여 눈으로 날아드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다 덮고 있다.

 

며칠 전 아파트 새 단장을 한다고 페인트칠을 한다는 공고문이 있었다. 입구에 꼬마 스티커를 붙이라는 입간판도 서 있었다. 푸르스름 계열과 누르스름 계열의 두 가지 최종 안을 이미지로 올려두고 찬성 쪽에 투표를 하랬는데, 투표 천지네, 하고서 지나쳤던 기억이 났다. 오늘은 입간판이 치워지고 없다.

작은 일에도 기회를 지나쳐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요즈음 부쩍 시들하고 느슨해진 삶이 슬쩍 염려가 된다. 그날도 그랬다, 무슨 색이면 어때! 아파트 외벽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 부엌이라면 몰라도. 그랬으니 외벽 페인트 색이 어찌되던 싫고 좋은 내색을 할 자격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세척이 먼저라니? 내 삶도 가끔씩 새 단장을 하려면 색칠 전에 오염된 구석부터 씻어내야 하는가? 오염된 구석, 어디?

 

문을 열면 넓은 현관이 문제다. 모델하우스 때는 현관 넓은 것이 좋은 인상을 주었다. 입주 후에는 그 넓은 공간이 창고로 변하는 데 놀랐다. 남편이 운동기구들을 놓아두기 시작하더니 심지어는 간이 쓰레기장이 되어있다. 버리고 싶은 물건들을 내다 놓고는 몇 달이 지나도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다. 더러 다시 집어 들여오기도 한다.

죄다 내다버리고 싶은 심정을 누른다. 나갈 때도 참고 들어올 때도 참는다. 착한 심성에서가 아니다. 나도 그 자리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마음으로는 나도 이미 그 자리에 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꼭 그런 것만 같다. 내 마음 자리에서도 남편이 들락날락하니까 안다. 내가 물건들 쌓여있는 모양새를 참지 못하는 것쯤은 이젠 남편도 안다. 다만 못 참는 내가 과민이라는 표정이다. 사는 게 뭔데, 집이라는 것이 뭔데. 어질러지기도 하고 젖은 수건 아무데나 던져도 되고……. 그거 못 참는 내가 외려 병이라는 눈초리, 그것 나도 안다. 하나 뿐인 남편의 눈초리쯤은 안다.

 

일단 씻자. 집에 들어오자마자 씻는 건 누구나 한다. 하지만 내가 좀 심한 것도 안다. 나는 얼굴을 씻기 위해 세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씻기 위해서 한다. 선배의 청혼을 흘려들은 다음부터 귀를 열심히 씻는 버릇이 생긴 것 같다. 그땐 귀를 잘 씻지 않아서 잘 못 들었다고 믿기 위해서. 이젠 열심히 씻는다. 귀를 씻어 옛날 들은 것들을 다 지우지 않으면 그 다음 새로운 말을 들을 수 없다는 핑계로. 클렌징 쭉 짜서 북북 문지르고 이태리타월에 또 비누를 묻혀서 문지르고…… 귓바퀴, 귓불, 귓속……

 

 

, 계속이다.

그게요, 그게 첫 발령지에서 두 군데 발령이 났거든요.

무슨 말인지…… 어떻게 두 군데 발령이 나는데?

그 다음을 확실하게 들은 것 같다. 그대로 생각난다.

글쎄요. 저야 모르죠. 지금도 몰라요. 제가 첨에 ㅂ군으로 ㅂ중학교로 부임을 했거든요. 그런데 마침 그곳에 옛 은사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실은 두 군데 발령이 났고 일단 여기 왔다고 했더니, 듣자마자 ㅆ면의 ㅆ중학교로 가래요. 둘 다 어차피 집에서 통근은 못하지만 일단 더 가까운 곳이고, 또 학교 자체가, 암튼 ㅆ중학교가 낫다고. 은사님이 교육청에 전화도 해주셨어요. 그래서 그길로 ㅆ중학교로 가서 근무를 시작했지요. 그쪽은 왜 그런지 분위기가 좀 냉랭하다 싶었어요.

둘 중 하나니까 뭐.

그러다가 사흘 째 되는 날 파면을 당한 거죠.

뭘 잘 못해서?

명령불복종이랬어요. 갑자기 교장실로 불러서 갔더니 명령불복종이라고 …….

말을 잇지 못한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소리에 물기가 섞여 배어나는 것 같았다.

명령불복종으로 당신은 이 순간 부로 파면이요. 그러니 교무실로 소지품도 가지러 가지 말고 그대로 현관으로 나가서 이 학교 근처에 얼씬도 말라…… 그런 말이었죠.

말도 안 돼. 이중 발령으로 간 것이지 잘 못 간 것도 아니고. 파면이라 해서 소지품도 다 놓아두고 바로 현관으로 나가라고? 말도 안 돼.

국립사대 졸업생이, 저 성적 좋았어요, 정식 발령을 받고 갔는데, 사흘 근무하고 파면이랬어요.

아니 글쎄. 근무지가 잘 못 되었으면 바로 잡아주면 될 일이지 파면이라니.

다시 말을 멈춘다. 손이 얼굴 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 것 같다. 눈물을 훔쳤을지도 모르겠다. 듣고 있던 쪽이 오히려 흥분한 것 같았다.

그런다고 현관을 나왔어? 그냥 나와 버렸냐고? 장학사든 교육청이든, 완전 그쪽 잘못이었잖아!

네. 도교육청으로 갔지요. 담당 장학사에게 갔어요. 그 양반도 하필 중학교 시절 은사였고, 나를 알아보시더라고요.

알아봤겠지, 최우등생이었으니까.

히. 제가 그랬어요. 선생님, 제자 아닙니다. 여기 교사로서 장학사를 만나러 왔지 제자로 온 것 아닙니다, 하고. 당연히 따졌지요. 대학에 와서 임용 설명하실 때도 성적순이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실은 발령이 시내로 날거라 생각했었죠. 저 성적 좋았거든요. 꼭 발령 받아야했으니까 죽어라 공부했죠.

거야 미루어 알지.

군 단위 면 단위로 밀렸어도 발령이 났으니 좋았죠. 저 그때 월급이 정말 필요했으니까요. 대학입시 때 왜 사범대학을 갔겠어요. 그것도 인기학과를. 그래야 졸업과 동시에 월급을 받아다 엄마아빠한테 드릴 수 있을 거 아녜요!

그런데 사흘 근무하고 파면이었다고? 파면이면 다른 공립에 발령이 다시 나지도 않을 거 아냐?

것보다 제가 걸어 나올 때, 다른 교사가 가져다 준 가방 달랑 들고 빠져나올 때, 교무실은 물론 창문마다에서 내 등 뒤를 바라보던 어린 아이들의 눈빛이 얼마나 따가웠던지. 못 잊을 것 같아요. 못 잊나 봐요. 지금도 등이 따가워서 잠들지 못할 때가 있어요.

맙소사! 참 희한한 일도 있었네. 그거 소송 감 아냐!

지금 시대 같음 그랬겠지요.

그래서 어찌 되었냐고!

발령 낸 총 숫자도 몰랐냐고 따졌지요! 저 졸업성적 아주 좋았단 말도 했지요!

가만있지 말지. 시골로 발령난 것도 실은 억울했을 텐데. 왜 첫 학교로 돌려보내지 파면이냐고!

거긴 그 사이에 후임이 왔었나 봐요. 그래서 따진 거였죠, 대체 총 발령 숫자를 알기나 하냐고!

그러니까, 그럼 교사를 했다고, 못 했다고?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ㅆ중에 저 쫓겨난 다음 날 바로 새로 교사가 왔더래요. 그래서 저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고요.

무슨 말인지 원.

실은 저 있는 삼일 동안 저한테 다들 냉랭했던 이유가…….

뭐야, 잠깐, 잠깐만. 한 사람을 ㅂ중에 ㅆ중에 양쪽 발령내놓고, 이젠 ㅆ중에 두 사람?그럼 수산은, 스잔은, (이름이 불분명하다) 그냥 ㅂ중으로 다시 보냈으면 될 것 아냐? 거길 왜 또 다른 사람을 발령냈는데?

그러니까요. 그보다도 ㅆ중에서 저를 일단 아주 오해했더래요. 제 자리 전임자가 전근을 원치 않았던 경우였대요. 순환근무제 때문에 근무 연수가 차면 옮겨야 하잖아요. 그래도 일 년인가는 사유서 내고 유보되고 그러는데,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던 여교사였나 봐요. 새 학교에 전근가자마자 출산하게 되면 미안코 하니, 암튼 전근을 정말 원치 않았겠죠. 그런 사람을 기어코 전근 보내놓고 그 자리엘 제가 갔었나 봐요. 그래서 낙하산인가 하고서 저를 경계했더래요. 그러다 곧장 쫓겨나니까 낙하산은 아니었구나 싶어서 동정하게 된 거고요.

뭐가 그리 복잡해.

네. ㅆ중에 여럿이 얽혔던 거죠. 하나는 전근, 다른 하나는 파면, 그 다음 또 새로 부임한 선생이 진짜 낙하산이었던 거죠, 아마. 집도 통근거리였고, 그 보다도 어디 무슨 다른 과 장학사 딸이었다고요. 장학사 딸들은 괜히 오해를 받기도 하겠지만요. 보세요! 자동 발령나는 국립도 아닌 사립대학 출신에, 너무도 가까운 통근거리니. 집이 바로 인근 ㅅ시내였대요. 게다가 두 사람이나 물 먹이고 부임했으니, 그렇게 의심할 밖에요. 요새말로 합리적 의심!

 

 

생각이 솟아난 거다.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소리들이 튀어 나온다. 둘이서 그런 말을 하고 있었구나. 내 레이더는 원거리 소리 청취에 민감하다. 근시와 원시가 있는 것처럼 내 귀는 먼 데 소리를 더 잘 듣는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가을학기 개학하자마자 대학가요제란 것이 열렸고, 사람들이 덩달아 나 어떻게해~ 나나나나 나나나~ 그러고 다닐 때였다.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난 정말 못 들었다. 나무 아래 함께 서 있었던 선배의 목소리는 잘 못 들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만을 기억한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새의 모습도 기억한다. 모양은 참새지만 훨씬 큰 새. 울음소리가 너무 큰 새. 울음이 아니라 말소리였겠지. 무슨 말이었을까? 청혼이었을까?

그놈들은 지금도 그런 찌익 찌익 소리를 내며 아파트 하늘을 누빈다. 아까 들어올 때도 보았다. 이 철엔 전혀 돋보이지 않는 동백나무 윗가지에 앉아 있었다. 그때 그놈들 후손이라면 몇 대 째일까. 일 년에 한번 씩은 후손을 낳았겠지.

하필 그런 자리엘 왜 갔을까. 첫 발령지 처음 갔던 학교에 그냥 있지, ㅂ중학교에 그냥. 하긴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겠지. 그 사람이 괜스레 안타까웠다. 우리랑 비슷한 또래가 틀림없었다. 우리처럼 퍼진 건 아니었지만, 톡톡 튀는 세대는 분명 아니었다. 그때 그 상실감으로 어찌 살았을까. 나중에라도 교사를 할 수나 있었을까. 월급이 필요했던 상황을 어찌 이겨냈을까. 내가 오지랖이 넓다. 너무 넓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 땜에 그런지도 모른다. 파면된 사람. 아버지는 난데없는 파면을 억울해 하시다가 병을 얻었다. 결국 일찍 돌아가셨다.

얼굴의 물기를 닦으면서 밀걸레를 찾는다. 거실 마루를 또 한 번 훔친다. 오전에 청소를 해놓고 나갔기 때문에 걸레가 깨끗한 채로다. 약간의 물기가 지나가고 난 마룻바닥이 말끔해지면서 맘도 차분해 진다. 그러나 거실에도 실은 서로 어울리지 않은 가구들이 눈에 띈다. 단 둘이서 사용하는 가구들이 서로 엉뚱한 것만큼 서로 소통과 이해도는 낮다.

물론 나는 괜찮다. 내게 필요한 것들이 필요한 장소에 있다. 그것이면 되었다. 신방을 꾸린 새댁도 아니고, 사돈네를 맞을 준비로 부산떨었던 날들도 지났다. 며늘애도 어느 정도 익숙할 것이다. 어쩌다 애들이 오는 때면 다소 치워 놓기도 하니까 잘 모르기도 할 것이다. 알아도 할 수 없다.

 

오월엔 오후가 길어진다. 저녁 준비는 아직 멀었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바느질감을 집어 든다. 뜨개질보다는 바느질이 더 편하다. 뜨개질은 멈추어두었던 상황을 계산하느라 시작이 더딘데 비해, 바느질은 바늘이 멈추어 있는 그 자리에서 그냥 계속하면 된다. 아무 데서나 멈추고 아무 때나 시작하는 것이 좋다. 설사 잘 못 되어도 곧 뜯고 고치기도 쉽다.

그이는 바느질감을 그냥 두고 일어서곤 하는 내게 늘 염려의 눈길을 보낸다. 염려인지 핀잔인지, 바늘이 걱정되는 것이다. 실제로 알바늘 하나를 집어준 적도 있다. 나도 위험을 느끼긴 한다. 인형을 만들거나 수를 놓을 때는 실이 푸석하달까 바늘귀 안에 곱게 들어가 있다. 그런데 작은 가방이나 지갑들을 만들다 보면 퀼팅실이란 놈은 동실하고 매끄러워서 바늘귀에서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혼자 남아 도르르 굴러가버린 바늘을 찾으려고 막대자석을 둘, 원형 자석을 하나 그렇게 두고도 잘 찾지 못할 때가 있다. 시아버지 밥에 뉘 들어간다고, 내가 못 찾던 바늘이 남편 눈에 뜨일 게 뭐람.

 

바늘은 아플리케 부분에 멎어 있다. 아플리케는 정답게 여러 모양을 표현하지만, 실을 자주 바꾸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바늘이 여러 개 필요한 것이다. 필통인데 겉에 다섯 자루 연필들을 아플리케로 붙이는 중이다.

메시지 음, 그이가 늦는다고 알려온다. 아침에 나가면서 늦을 거라 했었는데. 흘려들었나. 남편은 저녁식사에 관해 잘 알려주는 편이다. 그래서 스스로 민주적인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민주주의가 뭔지 보려면 뉴스를 틀어야지. 여론조사 공표를 못 하는 깜깜한 기간에 앞서 마지막 결과들이 뜰 것이다. 아니, 뭐야, 깡패 버금가는 막말후보가 티비 토론을 잘 했다고 지지율이 올랐다고? 천재 교수출신이란 사람은 웬 뚱딴지 자살골을 터뜨리더니 이젠 2위 3위 싸움이라고, 나쁜 패는 아니구나. 어라, 대구 3천여 명 노동자들, 후보들의 노동공약 맹공. 2020년에 1만원은 하나마나한 공약이라고. 알 수 없어. 저건 뭔가, 서울대, 서울대 총학생회 소속 학생들은 지난 27일부터 총장 퇴진과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를……. 쟤네들은 대선 아랑곳없이 밥그릇 싸움 아냐! 강남 도로에서 부탄가스 트럭 화재, 2천여 개 가스통 연쇄 폭발…… 언제고 안전사고지. 저런, 또 크레인 사고? 50∼60미터 길이 32톤 크레인, 넘어지면 어떻게 해, 다섯 명이나 사…….

 

밥맛 떨어지는 뉴스다. 꽃 지는 저녁에도 배는 고파라 했던가.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였나. 햇반을 하나 데워서 식탁에 앉는다. 접시 하나에 김치며 두어 가지를 담고, 계란도 하나 익혀 얹었다. 다이어트 어쩌고 이유로 밥을 거르는 일은 없다. 시댁에 혼자 가곤 했을 때면 유난히 밥 챙겨주는 데 인색했던 시어머니가 떠오른다.

집에 가서 먹어라……, 그 말을 처음 듣던 날이 안 잊힌다. 수 십 년이 지나도 안 잊힌다. 남편은 미국에 나가있던 때였다. 그땐 대학에 남을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낯선 데 가서 유학생 아내로 머저리처럼 지내기는 싫어서 남아 있기로 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힘든 상황에 빠지신 것도 내가 남는 데 작용했을지 모른다.

한번은 이틀을 불려가서 김장을 했는데, 첫날 열 시가 다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아침나절엔 배추를 절였고, 비벼낼 양념 준비한다고 칼질만 하다가 오밤중이 된 거다. 열시면 겨울엔 오밤중인데, 야야, 가서 자고 온나, 다섯 시면 차 다닌다, 일찍 오니라! 기가 찼다. 난 당연히 잘 것으로 알고 옷가지랑 싸 갔었다. 시댁에 잠 잘 생각으로 갔던 내가 바보였나. 작은 트렁크를 들고 갔으니까 다 아셨을 텐데. 오밤중에 길을 나서는데 깜깜하니 무섭기도 하고, 버스 끊어졌을까 걱정도 되고. 김장을 끝낸 날은 저녁시간을 지나쳤는데 밥 먹고 가라고도 안하시고, 김치 한쪽을 안 넣어 줬다. 느그는 언제 할래? 니가 이틀 도와줬으니, 나도 가서 도와주마. 시어머니가 어떻게 그런가. 김장 날 끓여 먹겠지 싶어서 사들고 간 동태는 먹어보지도 못했다. 힘들게 사시는 것도 아닌데 인색했다. 결혼 첨엔 몰랐는데, 울 아버지가 그렇게 되신 뒤로 갑자기 인색해지셨다. 내가 자격지심에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원래 인색했는데 원래대로 다시 인색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욕하면서 배운다? 가깝고도 먼 거리에서 살아온 동안 나도 인색한 사람으로 변했을지 겁난다.

 

아버지가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해외여행을 떠날 때 그것은 온통 자랑거리였다. 다녀와서도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선물은 또. 어머니는 자수정 목걸이세트를 받아들고 너무 좋아하셨다. 어때, 남이야, 도희야, 엄만 이 보라색이 참 어울리지? 엄마 살빛이 흰 편이지? 시댁에 선물도 가짓수로는 이바지 때를 방불케 했다. 시어머니에게는 실크머플러와 영양크림, 친척 여자들에겐 립스틱세트나 콤팩트 그런 것들을 수대로 챙겨 보냈다. 아이들에겐 목이 움직이는 인형이랑 초콜릿 상자 아니면 색연필이 들어있는 필통이 돌아갔다. 우리들은 예쁜 볼펜세트에서 하나씩 골랐다.

너희 아빤 자상도 하시지, 어머니의 만족한 멘트였다.

뭘 이정도로…… 실은 돌아오는 비행기 편에서 쫙 다 산 거요, 당신이랑 새 사돈 거 머플러만 빼고. 첨엔 그것만 사고 별 생각 없었는데, 일행들이 비행기 안에서 엄청 뭘 사더라고요. 그 자수정 그건 진주하고 둘 중에서 망설였는데, 당신 좋아하니 좋구려. 내가 첨엔 진주를 골랐어요, 우아한 우유 빛에. 그런데 임본부장 말이 진주는 눈물이라 해서 얼른 놓아버렸소.

 

그렇게 화기애애하고 행복했던 해외여행이 불법이었다니. 5년짜리 상용복수여권을 만든 것이 파면될 죄목이었다니. 누구를 해친 것도 누구에게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단 한 번의 해외여행으로 파면이 되신 것은 정말 날벼락이었다. 상용여권은 유력한 회사와 상사 임직원들에게만 엄격한 추천제로 발급되었었는데, 제약이 막 누그러지는 때 쉽게 상사 임원으로 발급받은 것이 화근이었다고. 그리 옛날도 아닌 옛날에 그런 제약이 있었다니. 그것이 파면에 해당되는 죄였다니. 차별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상용여권 가진 사람만 사람일 때.

아버지의 파면으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가장 큰 아픔은 아버지를 잃은 거였다. 아버지는 그 일을 이겨내지 못하셨다. 갑작스런 병, 갑작스런 죽음이 답이었다.

 

파면이었어요!

앗, 낮의 그 여자.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자마자 파면이라는 날벼락을 맞는 그 여자는? 그 여자는 어찌 살아왔을까. 그 여자는 말을 멈추고 사라졌고, 내 귓속에 살아 있다가 불쑥 튀어나온다. 이 여자를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두어야 할까. 고개를 저어본다. 귓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나. (88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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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 단편 「파면」, 『소설시대』 통권20호, 265~287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10. 7. 01:11

2017. 9.8.

 

창작 노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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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나의 심장에서 이웃들의 심장에서 일렁이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인다. 왜 우리는 저 혼자서 제 삶을 생경해하는 것일까. 가을 비 차갑게 내리면 더욱.

 

                                              

                                                  *

 

아침에 서평/논문에 대한 페친의 글을 읽다가 글쓰기와 서평/논문의 관계가 생각나서 옛날에 썼던 글을 올린다. 2004년 『한국소설』 11월호(64호)에 단편 「건들장마」를 발표할 때 함께 쓴 글이다. 그때는 ‘창작 노트’를 따로 써달라고 했다.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몇 해 안 되는 때로, 만나는 사람마다 안정된 교수직에서 왜 느닷없는 소설 쓰기로 곁눈질인가 하는 질문을, 최소한 그런 눈초리를 보내던 때였다. 나는 분명 다른 사람들의 소설 파먹고 사는 일에 지쳐 있었다. 결국 정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강단을 떠났다.

지금은 그럼 행복하냐고? 또 그런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슬쩍 비웃으면서. 왜냐하면 여태 완전 무명이니까.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일에서 완전 무명이라는 것을 참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이 오니까 그렇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다.

내리는 비는 맞는다는 것, 오명만도 못한 무명의 비라 할지라도 내리면 맞는 것이다. 또 영영 그치지 않는 비는 없으려니.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8. 8. 00:19

서술자 한금실 사소한 사건들 언어화

서용좌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 나와

 

광남일보 http://www.gwangnam.co.kr/

2017. 08.02(수) 16:26 확대축소

독문학자이며 소설가인 서용좌의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가 푸른사상 소설선 14번째 권으로 출간됐다.

지방대학 시간강사로 살아가는 서술자 한금실을 통해 그녀가 만나는 우울한 군상과 암울한 일상, 그 속에서도 숨은 해를 찾아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추적한다.

특히 이번 이야기는 장편 ‘표현형’에서 나 한금실이 ‘동반자를 구한다’는 남자를 만나러 바닷가 마을을 찾아가다가 거의 마지막 장소와 마지막 순간에 물에 빠졌던 이야기에서 이어진다.

‘표현형’에서 세계 도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유전자의 표현형을 추구하던 그녀는 말미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쫓아 물에 빠져 익사 지경의 모습으로 사라졌었다. ‘흐릿한 하늘의 해’는 한금실이 의식이 돌아오면서 더 깊었던 물에 대한 기억으로 다시 생의 갈피를 잡아내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의식 저 아래 깊이 가라앉았던 백두산 천지의 기억과 더불어 멀고 가까운 과거가 불려나오고, 그로 인해 오늘을 있게 하고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돈은 없으나 시간은 넉넉한 비정규직 강사로서 현실을 살고 있다. 하여 단조로운 일상은 삶의 순간들을 천착하는 계기가 된다.

한금실은 등장인물이자 서술자로서, 자신과 이웃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소한 사건들을 언어화하고 있다.

서용좌씨는 광주 출생으로 독문학자를 거쳐 늦깎이 소설가로 데뷔했다.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 연작소설 ‘희미한 인(생)’,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펴냈다. 이화문학상과 광주문학상, 국제PEN문학활동상 등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고선주 기자  rainidea@gwangnam.co.kr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11. 23:54


‘글쓰기’ 절실해 떠난 강단 …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할 뿐”

 

퇴임교수가 사는 법_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출간한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

2017년 07월 10일 (월) 15:44:18 김홍근 기자 mong@kyosu.net

 

   
     
 

때로는 한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냉철하고도 날카롭게, 때로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이 나라, 이 사회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교수가 있다. 현재 <교수신문>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을 연재하고 있는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다.

독문학자이지만 우리말로 글을 쓰고 소설을 쓰는 것이 행복하다는 서 명예교수는 어느 날 강단에서 내려왔다. 이유는 ‘소설가’로서 좀 더 매진하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2001년 『열하나 조각그림』을 출간하며 소설가로서 첫 발을 내딛은 후 이화문학상(2004년), 제6회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2013년), 제30회 PEN문학상 문학활동상(2014년) 등 다양한 수상경력 또한 갖고 있다.

“왜 소설을 쓰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 교수는 본인의 소설 작품 끝에 실었던 ‘작가의 말’ 한 구절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퇴임 이후 소설가로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서용좌 명예교수를 서면으로 만나봤다.

 

 

△중학생 때 교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소설가를 꿈꾼 배경이나 계기가 궁금하다.

 

“소설가?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을 했다기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그리됐다. 2001년 얼결에 『열하나 조각그림』이라는 장편을 발표한 것이 문단에 디딘 첫 발이었다. 독문과 졸업한 제자들 가운데 출판사를 차렸다고, 글 좀 내자고, 수필이라도 출판하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비밀이 터져나와버렸다. 수필은 말고, 소설이라면 끼적거리고 있노라고. ‘막고 품는다’는 말을 아는지 모르겠다. 둑을 막고 물을 모조리 퍼내면 고기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에 쓰는 말이다. 옛날에는 부족한 실력으로 교수가 되고 했으니, 무조건 뿌리째 또는 송두리째, 중요성의 경중을 따지기 이전에 모조리 공부하는 방식이라서 시간을 많이 써야 했다. 전공이 독일소설이었는데, 공부를 하다하다 지치면 나도 모르게 ‘소설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소설쓰기가 무엇인지 배워 본 적도 없이. 무엇보다 외국어에 매달려 살면서 그 반작용으로 우리말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제목에서와 같이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흐릿한 하늘의 해』에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자 했나.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이다. 유토피아란 아무데도 없는 곳을 이르는 말이기 때문에. 더구나 오늘 이 땅의 삶이 점점 녹록치가 않다. 국민총생산이니 하는 지표의 성장과는 무관하다. 한 겨울에도 집이 따뜻하다 못해 반쯤 벗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라고는 하나, 우리들 마음속 어디에도 온기라고는 없다. 사회라는 궤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뇌세포는 주판알 굴리는 상처로 피범벅이다. 특히 지식을 환전하지 못하는 젊은 지식인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느끼면서 애달파 하다 보니, 그들을 위해 글을 쓰게 됐다.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픔을 보듬고 살아간다. 그런 것들을 확인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동료애, 인류애 같은 것을 되살려 낼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유명한 시인의 시구이지만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는 담쟁이넝쿨의 이미지를 오래도록 마음에 두고 있다.”


 

△퇴임 이후의 삶은 어떤가. 강단에 있을 때와는 여러모로 달라졌을 듯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퇴임’이란 단어는 생소하다. 곧 다가올 정년을 기다리지 못하고‘명퇴’를 한 것은 충동이자 절실한 선택이었다. 강의하던 것을 정리해서 『도이칠란트. 도이치 문학』으로 내놓고는 회의가 깊어졌었다. 평생 공부한 것이 이 부끄러운 수준이구나, 해도 해도 잘 안 되는 것 그만 하자, 교수라면 객관적으로 책임이 막중하지만 글 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겠지……. 그래서 교단을 떠났다. 소설로 등단은 했었지만 여전히 무명이었고, 그건 지금도 그렇고, 그래도 무작정 한 가지 일에 몰입하련다는 심정이었다. 그때로서는 내 소설에 독자를 얻을 일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쓸 일이 절실했었다. 또 다른 고통이 밀려올 것을 예감하지 못한 채로. 선택, 그러니까 앞서 말 한대로 하이에나처럼 사는 일을 그만두고서, 그럼 만족하느냐? 최소한 문학작품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 일차적 작품을 쓰는 일이 그리 좋으냐?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글로 살고 있다는 점에서 뭔지 모를 행복감을 느낀다. 소설가로서의 불발은 행복한 고민에 속할 것이다.”

 

△이번 소설에는 “나는 글을 쓴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라고 선언한 크리스타 볼프의 말이 등장한다. 소설가로서 생각하는 어떤 ‘신조’ 같은 건가?

 

“‘…… 그러므로 살아있다’라는 명구에는 숱한 변형들이 있다. 글 쓰는 사람들의 경우 누구에게나, 글을 쓰느라고 살아있다는 말은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밀도가 강하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도 신조 같은 것은 정립해놓고 살지는 못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모르는 것이기에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하는 것, 그것으로도 벅차다. 오늘 살 수 있다면 공들여 살 것이고, 오늘 쓸 수 있다면 정성들여 쓰는 것뿐이다.”

 

   
  ▲ 1997년 10월 추월산에서  
 

△후배 교수들에게, 혹은 학문후속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후배 교수들, 특히 인문학에 몰두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뭔가 말해도 된다면, 자긍심을 가지고 현실을 버티자는 것이다. 늦게라도 다른 현실이 필연코 닥친다. 학자들에게는 그렇게 만들 책임도 있다. 문학과 문학연구를 포함해서 인문학은 사람에 관한 학문이라는 사실은 불변이다. 사람의 도구에 관한 학문들이 사람에 관한 학문을 추월하여 학계를 주도하고 ‘자본주의의 돈’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이 현실이 영원할 리는 없다. 진자운동을 생각한다. 인류의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진자운동 같아서, 감성과 이성이 주도하는 시대상이 번갈아 나타난다. 합리적 계산의 과학이 그네의 최고점에 다다르면 그만 내려오고, 그네는 다시 우아하게 다른 쪽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틀림없이 멋진 호의 곡선을 그리며.”

 

김홍근 기자 mong@kyosu.net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6. 10:31
서용좌 3년 만의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  

2017년 07월 06일(목) 00:00

 

 

 

 

 

 

소설가 서용좌(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사진) 교수가 신작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푸른 사상)를 펴냈다.

2014년 ‘표현형’ 출간 이후 3년 만에 펴낸 작품에서 작가는 우리사회 대표적인 비정규직 중 하나인 시간강사의 삶을 들여다본다.

소설은 공부를 잘해 외국 유학까지 갔다 왔지만, 현실은 ‘지방시’(지방대학 시간강사)를 전전하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주인공이 저자의 전작 ‘표현형’의 서술자 한금실이라는 점이다.

이번 작품 ‘흐릿한 하늘의 해’에선 한금실의 의식이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삶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가진 것은 없고 시간은 넘쳐나는 비정규직 강사의 현실은 막막하고 고달프다.

어느 순간 한금실은 일상의 순간들을 천착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등장인물이자 서술자로서, 자신과 이웃의 사소한 사건들을 언어화한다. 소설 전편에는 소외되고 배제된 이웃들에 대한 애잔한 시선이 깔려 있다.

저자는 한금실이라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려 “글을 쓴다는 것은 인생을 그렇게 어설프게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리라”면서 “그러므로 나의 이야기는 다만 근저에 놓인 사건들의 주관적 변형에 불과한 것임을 안다”고 밝혔다.

/박성천기자 skypark@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7. 7. 5. 02:16

장편소설 <흐릿한 하늘의 해>, 336쪽, 푸른사상사 2017.6.20.

 

표지는 아들 - 캘리그라피는 손녀 - 이만한 뿌듯함이 크다.
OK 내고서 돌아서는 순간부터 후회하는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