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이다. 유명 시인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4월은 유난히 산불을 불러와 태고의 숲들을 불사른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뉴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사이사이 미담이 터져 나온다. 소방관이야 직업적 성실성과 의무감이 투철한 것으로 설명된다지만, 시민들의 희생을 무릅쓴 적극적인 도움을 어떻게 설명할까. 희생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철로에 뛰어든 사람을 구하고 대신 스러져간 극단적인 이타적 행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처럼 수많은 재난 속에서의 미담들을 대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선의와 희생정신을 칭송한다.
하지만 나는 살짝 날이 넘었을까. 애국애족이란 단어를 들으면 늘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려서야 물론 유관순언니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통째로 떨리고 했었지만, 자라면서는 이타적 행위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기적 유전자의 덩어리인 인간이, 크게 보아서 동물이, 그 이기적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철저하게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개체임이 분명하다. 그런 내가 눈곱만치라도 이타적 사고와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교육, 즉 사회화 과정의 세뇌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느새 한껏 넓어져 있다. 나와 몸과 피를 나눈 가족이 나이며, 내 친구가 내 이웃이, 나아가서 내가 속한 집단이 내가 되어 있다. 나 혼자서만 잘 살아도 불편하고, 그래서 이웃이, 크게는 겨레가 잘 살아야 편하고 행복감이 더해진다. 무의식적 불편함 때문에 이웃을 외면할 수 없는 이 집단의식이 각각의 개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뭇 이타적으로 보일 뿐이다.
내가 좀생인가 아닌가는 나의 경계가 결정한다. 내 유전자의 확실한 보존만을 위한, 나의 이익만을 의식하는 나는 평범 그 자체이다. 그런 개체로서의 나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 인간, 그들이 우량종이다. 넓게 넘을수록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그 경계이다. 내가 죽어 우리를 구하는 데 기여할 때, ‘우리’가 어디까지냐 그것이 문제이다. 나를 희생하더라도 내 가족의 이익에 집중하면 이타적인가, 혹시 가족이기주의는 아닌가. 나의 애향심은 다른 지역에 대한 경계심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동포애는 타민족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지는 않은가. 나의 인류애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에 대한 우월감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하물며 동물들도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 다툼과 협력의 필요성을 안다고 한다. 식물들마저 협력과 다툼의 계기를 알고서 행동한다. 인간도 다름 아니다. 애국애족의 거룩한 행위도 나를 버림으로써 (나는 없더라도) 우리가 흥성함을 기대하고 믿는, 더 큰 이기심의 발로에서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그 본성에서 이기적 존재이니까. 물론 그렇더라도 나를 버리고 우리를 택하는 정신이 월등하게 우월함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자발적이건, 세뇌되어서건. 결론적으로 이타적 존재에게 박수를 보내며, 좁은 나의 경계를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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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30. 「나의 경계」,『더불어 봄꽃울 볼 수 있다면』, 한국여성문한인회, 도서출판 소소리, 188~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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