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
하이네의 시구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오자 특별히 부산한 일이 생겼다. 졸업 50년 홈커밍을 앞두고 흩어져 살던 동문들이 단톡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단톡 반장이 혹시나 하면서 초대 전화를 걸어왔을 때, 그 목소리는 참으로 신기했다. 50년 세월을 마치 축지법처럼 축시법을 쓰는 마법이었다.
명실공이 이 할머니들은 분주했다. 갑자기 아침 문안에서 결혼 50주년 소식까지, 미국에 나가서 그쪽 사람이 되어버린 친구들까지 불려 나와서는 다른 시간을 살면서도 부지런히 톡 시간을 맞추곤 했다. 현안은 50주년 나들이에 있었다. 전야제로서 1박2일 남도 여행, 그리고 본 행사인 메이데이에 이대 캠퍼스를 정중히 방문하는 일이 준비되었다.
두 번의 나들이라고? 여행과 운동, 운동과 여행을 기피하는 행동 1, 2순위로 꼽는 나로서는 둘 다는 어려웠다. 물론 더 많은 얼굴들을 만날 본 행사에 무게가 갔다. 그런데 하필 남도 여행이라니! 여수 또는 순천의 1박은 유혹적이었다. 한 시간 남짓 차를 달린다면 저녁에 숙소에 든 친구들 얼굴을 잠깐 보고 올 수는 있으리라. 돌아오는 밤길 고속도로가 좀 걱정이긴 하지만 …….
그런 염려는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새벽에 눈을 거의 감은 채 화장실에 들어가려던 발이 슬리퍼 한 짝을 잘 못 꿰었고, 그것으로 여행계획은 물 건너갔다. 다행하게도 왼쪽 손목만 골절이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받으며 붓다 못해 뒤틀린 손목에 깁스를 하고 돌아오는 시간에, 친구들은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는 중이었다. 하필 그날에. 내 불쌍한 왼팔, 이라고 써서 깁스한 사진을 보냈다. 오늘 못 참, 이라고 쓰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그렇다고 졸업 50주년 나들이까지를 포기하기에는 단톡방에서의 늘그막 우정이 너무 진했다.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전국이 일일생활권인 나라에서 50년 만의 해후를 포기할 순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니까. 병원에 실려 간 것도 아니니까. 두 발은 성하니까. 기차표를 예약해서 프린트아웃을 해 놓았다. 사진으로 단톡방에도 올렸다. 마음 흔들리는 것을 막는 방편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 날이 왔다. 깁스한 팔을 감추기 위해서 머플러로 감싸면서, 요즈음 보기 흔한 장면, 수갑을 감싸는 스카프가 생각나서 혼자 킥킥 웃었다. 그렇게 나타난 내 모습을 친구들은 정말 반겨주었다. 허리까지 늘어뜨렸던 긴 머리 소녀는 조신한 스타일 머리로 놀라게 했고, 목소리들마저도 3도 화음정도로 알토 음으로 변해 있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의 작용은 참으로 신기했다. 다행하게도 눈도 함께 노화작용을 겪는 우리는 현미경 눈이 아님으로 해서 친구들이 예쁘기만 했다.
흐뭇한 것은 이제는 후배들이 튼실하게 동창회를 꾸려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초창기부터 오래도록 협력하던 후배들도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왜냐하면 우리가 독문과 1회였기 때문에, 졸업하고 곧 동창회를 이끌어야 했던 초창기 그룹들은 평생을 봉사하고 있는 셈이었다. 당연히 눈에 띄는 후배가 있었다. 선의에 가득 찬 긍정적인 얼굴이 참 고운 사람이었다. 나를 만나면 매번 똑같은 인사를 하곤 했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무슨 뜻일까 애매하면서도, 처음엔 멋쩍어서 대답이 서툴렀다. 광주에서 기차로 오를락 거리며 뒤늦게 공부를 다니고 있는 선배의 처지가 고달파 보였거나, 비실비실한 몸으로 사서 하는 그 고생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박사과정이라는 것이 지난한 과정이다 보니 또 얼마 후에 만나게 되고, 또, 또, 모교의 행사에 가면 만났다. 그 같은 인사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 후배는 부산이나 대구에서 서울의 모교에 나들이 오는 선배들을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을. 다만 광주라는 ‘불온한’ 고장에서 사는, 살아가야 하는 선배가 내심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대학에서 살아간다니……. 그 착한 마음이 떠올라서 후배에게 진한 미소를 보냈다. 웬일인지 이번에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대신, 팔 웬일이세요? 라는 변형을 들었다.
그러니까 믿음의 문제다. 믿음은 믿는 마음이다.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무엇인가에 대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의 심리가 믿음이다. 그것이 정치나 사회 또는 철학적 가치와 관련될 때는 신념이라고 주로 한자어로 쓰게 되며, 뭔가 객관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그러나 믿음이건 신념이건 다분히 주관적인 것이다.
신념이라는 것의 정체를 생각하면 곧 깊은 회의가 드는 것은 우리가 신념으로 인해 빚어지는 반목을 밥 먹듯이 경험하고 살기 때문이다. 다 같이 신 또는 신들을 믿으면서도, 다 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증오와 박해를 일삼아 온 종교적 반목이 가장 큰 문제다. 다 같이 이념들을 신앙하면서도 그 이념의 내용이 다르다는 것만으로 반목의 극치를 달리는 정치도 적 아닌 적들을 양산한다.
예컨대 아주 간단히 줄여서 5‧18이라고 부르는 그 해 5월 10일간의 광주의 일은 신념대로 해석되는 것이다. 만날 때마다 ‘험지’에서 고군분투 살아가야 하는 선배를 걱정해주는 고마운 후배는 광주와 광주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고, 상당 부분 오해했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알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기 전에는 진실이 무엇인가는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법이다.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실상에 관해서 들으면 ‘설마’ 하고서 의심하며 부인을 해버리는 쪽을 선택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참혹하니까, 차마 믿을 수 없으니까, 내심 믿고 싶지 않으니까.
마침 올해 그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광주에서는 의미 있는 두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크라운판 216쪽 분량의 『5.18 10일간의 야전병원』과 신국판 608쪽 분량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되었다. 『야전병원』은 ‘전남대학교병원 5‧18민주화운동 의료활동집’이고, 『넘어 넘어』라고 불리는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은 32년 전의 소위 ‘지하 베스트셀러’를 전면개정판으로 내놓은 것이다.
특히 이번에 새로이 알려진 대학병원의 열흘간 진료기록은 광주사람들에게도 놀라운 부분이 많았다. 설마, 대학병원까지야. 적군을 정성스레 간호하는 전선에서의 간호장교의 모습들을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우리들로서는 병원만은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었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처참했다.
대학병원 구성원으로서 이름과 명예를 걸고 말하는 진솔한 실상, 수술실에도 날아드는 총탄에 대한 증언과 이름표가 붙어있는 의사가운에 뚜렷이 남아있는 관통 흔적 등은 1%도 픽션이 아니었다. 의식도 없고 신원이 확인 되지 않아서 ‘파추하(파란 추리닝 하의)’ ‘검파상(검고 푸른색 상의)’ ‘남광여(남광주역에서 발견된 여자)’ 등으로 환자를 불렀던 새내기 간호사의 증언에 가감이 있을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깁스한 팔은 통증이 거의 멎었는데 명치끝이 막히고 가슴이 쓰려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반가웠던 50년 친구들, 후배들, 특히 나를 늘 걱정해주던 후배의 얼굴, 아니 이화 캠퍼스를 가득 채운 그날의 행복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이 얼굴들은 오래도록 아파왔고 여전히 아프고 있는 광주를 잘 알지 못 한다. 몸과 마음이 멀어서 알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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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아름다웠던 5월의 그날들 - 『그대에게 가는 꽃길』 이대동창문인회, 에세이문학출판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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