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 미 한 인(생)
글 서용좌, 그림 조윤기/도서출판 이유, 256쪽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교집합을 갖게 되는
마지막 하나 남은 공간을 상정한다면
그것은 가정이다.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특별할 리 없는 6인 핵가족이다.
희미한 인물들의 희미한 인생이 펼쳐진다.
이상한 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쓰면서
웬지 이 가족이 실재하는 느낌이 드는 일이었다.
- 작가수첩 중에서-
시놉시스 (혹은 초상)
내 나이 스물다섯, 연말 분위기에 나이를 의식하는 것을 보면 벌써 노처녀인가. 아직 개밥을 마구 퍼주지는 않는다. 우선은 퍼줄 개가 없다. 우리는 대부분의 도시인들처럼 아파트 닭장에서 산다.
우리 식구는, 곧 알게 되겠지만, 이야기를 내놓으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남동생 다시 여동생 해서 6인 가족이다. 아버지의 고향인 섬에는 아직 할머니가, 우리랑 같은 도시에는 외할머니가 계시지만 우리 애들이랑은 잘 소통하지는 않는다.
이야기 중에 아버지는 남선생님, 어머니는 여여사로 등장하지만, 실제로 남씨인지 여씨인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누차 말하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이시다. 성이 그렇게 우연이라면 이름은 어떨까? 아버지는 우리를 수희, 수미, 수한, 수인으로 지으셨다. 그것도 우연이었으면 좋겠다. 우연히 - ‘우연’이라는 단어를 너무 자주 쓰면 아버지가 화 내실지도 모르겠다, 젊은 애들은 필연을 믿어야 한다고, 우연이란 다 살아버린 사람들의 푸념이라고 - 정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들의 이름을 한 줄로 부르면 “희미한인”이 된다. 아직도 감이 오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풀어 쓰자면, “희미한 인(생)”에서 하나가 부족할 뿐이다. 나는 아버지가 설마 우리들의 인생에서 희미한 인생을 미리 보셨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연히도 - 나는 정말 이 우연을 너무 자주 쓰는가 보다 - 우리들의 인생은 아직 시작단계이지만 희미하다. 아니면 모든 인생이란 것이 희미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는 딸 둘 아들 하나 적당한 터울로 태어났지만 그저 그렇게 자랐고, 신동하나 없이 지방대학이나 겨우 들어갔거나 그것도 못해서 수한은 재수하고서도 별 기대가 안 되는 모양이다. 꼬맹이 수인은 아직은 상류가 될 희망은 있지만, 내가 추측하기에는 그 애 또한 그저 그럴 것이다. 특출한 과외라곤 없는 가정에서 신동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21세기 한국의 정답이니까.
아버지는 사람들이 그냥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사이시다. 섬에서 중학은 뭍에서 고등학교를, 아슬아슬하게 2년제 교육대학에, 그러다가 4년제 대학에 편입해서 국어교사에 이르신 입지전적인 분이다. 물론 중등학교 국어교사가 입지전적 인물이냐 웃을 사람이 있어도 할 수 없다. 우리 아버지는 적어도 고향 섬에서는 특출 난 분이시다.
어머니는 원래는 사람들이 여사라 부르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실제로 누가 여사라고 부를 일도 없는 분이다. 다만 존중해서 부를 따로 다른 이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딸들까지는 대학진학이 어려운 상황에 따라” 서울로 직장을 찾아갔다면 직종은 물을 것이 없다. 단순노동이지만 정직한 노동에서 착실히 저축을 했던 70년대의 처녀들을 생각하면 된다. 어머니의 손은 그 시절부터 마법의 손이다. 들어가는 것은 적은 데 나오는 것은 많다. 나는 어머니 보다 더 많이 배운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요즘 세상에 딸들이 대학진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상처일게 분명했다. 좋지 않은 대학, 잘 나갈 것 같지 않는 학과의 입학이지만, 입학식 때 어머니의 눈에 묻어나던 눈물을 난 잊을 수 없다, 잊어서도 안 된다. 영문과로 전과에 실패했을 때, 그때도 어머니는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 일년간의 호주 영어 연수, 어머니로서는 출혈이셨음을 안다. 그런데…….
식만 남은 졸업을 앞두고 나는 가슴이 무겁다. 설마 영어가 좀 되니까 취업이야 되겠지만, 이렇게 세상이 불안한지. 하필 조촐한 사은회 때의 교수님말씀도 격려가 아니라 겁으로 다가왔다. “여러분 앞에 펼쳐져있는 인생은 하얀 도화지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도화지에 색칠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이후 줄곧 나는 마땅한 색연필 하나 갖추지 못했다는 느낌이었다. 겨우 일년 몇 개월 차이 나는 수미랑은 곧잘 수다를 떨기도 했었는데. 이게 그냥 달라졌다. 수희가 통 말을 끊은 것이다. 뭔가 궁리하는 표정에서, 그래 너라도 잘 나가 봐라, 하는 마음과, 언니로서 켕기는 마음, 그런 두 가지 마음으로 소원해진다. 수한이 - 그 앤 도통 엄마가 챙긴다. 재수생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막내는 한참 어리다. 처음에 그 애가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인형 같았다. 정말 인형 같은 꼬맹이다. 엄마는 그래서 다른 엄마들 보다 젊은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퍼진 몸매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아이 같은 순진한 구석이 많다. 어찌 보면 유치하달까, 세상 물정에 조금은 느리게 반응한다. 이것이 계미년 우리들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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