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6. 10. 1. 23:30


오늘
이별하다



제법 따스한 기운이 스미는 시간, 낮이 겨워서야 깨어난 그녀는 우선 창가로 간다. 고목이 된 호야 줄기는 마른 등나무같이 완강했다. 창 아래 여린 연둣빛 봄이 지나도록 그는 새 순을 거부했다. 좁은 창으로 빨아먹는 햇볕에도 초록 잎을 나름대로 번득이던 지난 여름의 기세와는 사뭇 달랐다. 잎사귀 형상만을 간직한 채 드문드문 매달린 그것들은 플라스틱 모조 잎에 다름없었다. 아예 톡 부러지지 않을 만큼의 물기가 남아있기나 한 것인지, 겨울을 버티어낸 것만으로 고맙기도 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식물 따위에 뭔가 주술을 걸어둔 자신이 야속했다. ‘해마다 꽃을 피워다오, 그러면 어쩜…….’ 막연한 기대요, 맹세였다. 혼자서 새 삶을 살기 시작할 때, 강아지도 금붕어도 없는 집에서, 그녀 말고 생명을 가진 것이라곤 이 작은 화분뿐이었다. 꽃은 없어도 맹목적으로 뻗어 나가는 줄기가 막연한 희망에 이르게 할 것처럼, 마치 누군가와의 수 미터 수백 미터의 거리를 단축해 줄 수 있을 것인 양 기분 좋은 식물. 그것이 그 초여름에 형언할 수 없는 귀한 꽃을 피워냈었다. 호야꽃이 피었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건 그저 덩굴식물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렇듯 화분에 갇혀 아무렇게나 자라는 식물에도 환상이 숨어 있었다니! 누군가를 집에 불러서 증인을 세워야 했을 일이다. 그 첫 해에, 그때는 도무지 안팎으로 흥분상태에서 꽃들이 지는 줄도 몰랐다. 간신히 매달린 잔 꽃대들 몇 개를 두고서 괜히 주술을 걸었을 뿐이다. ‘해마다 꽃을 피워다오, 그러면 어쩜…….’

천천히 씻고 아무 거나 요기를 한다. 그래도 시간은 남는다. 말을 나누지 않고 움직이다보면 시간이 참 많이 남는다. 문화센터에 가는 요일도 아니다. 그녀에게 일이 시작되는 저녁까지는 길다. 정사각형 작은 식탁 겸 책상에 앉아서 초소형 노트북을 펼친다. 그녀의 재산목록에 드는 품목이자 친구다. 여러 가지 물음에 꽤 친절한 응답을 해주는, 이만한 상대가 또 없다.

“호야. 용담목 박주가리과 호야속 식물. 덩굴성이며 늘푸른 여러해살이 풀. 줄기는 갈색이고, 잎은 마주나고, 타원형으로 끝이 뾰족하고, 다육질이며 광택이 있다. 꽃은 5월에 잎겨드랑이에서 짧은 꽃자루가 나와 산형꽃차례를 이루고 반구상으로 달리며, 향기가 있다.”

‘것 봐, 꽃이 피잖아.’

“꽃잎은 흰색으로 별 모양이고, 중심부는 담홍색이며 광택이 있으므로 아름답다.”

‘아닌데, 연한 분홍색이었는데.’

상관할 바는 아니다. 백과사전을 어쩌지는 못한다. ‘책에 써 있다’ 하면 모든 근거가 되는 법인데, 하물며 백과사전의 글인데. 보통은 흰색 꽃이겠지만, 그녀의 호야는 연하디 연한 분홍빛일 수도 있다. 그렇게 큰 꽃대 끝에 잔 꽃대들이 살만 남은 우산대 모양으로 뻗어 내리고, 그 끝마다 별 사탕보다 작은 꽃들이 하나씩 붙어 피어나서 스물 서른씩이 어울려 한 송이를 이루는 것도 처음 보았다. 그것을 산형(繖形)이라 하는 것도 처음 듣는 소리다.

오늘의 걱정은 꽃이 아니다. 그 늘푸른 여러해살이 풀이라는 게 아예 새 잎 하나가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식물이 땅속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소생하는 것을 그는 신비한 ‘오시리스의 신화’로 이야기 해 주었다. 식물의 동면은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가 죽은 오빠이자 남편을 찾아 지하로 내려가는 기간으로 설명된다고. 난생 처음 듣는 먼데 신화 이야기에 감동한 그녀가 그만 호야꽃이 피는 것에 그 마음의 부활을 걸었나 보다.


*


“어쩌다 끝나는 거야, 언제 어쩌다가, 왜?”

불안에 들뜬 영혼들은 의심에 들려 허우적거린다. 내 가게에서 보게 되는 그녀들은 대개가 그런 의심에 들린 때쯤이다. 사람 사이를 의심하고 괴로워하기 시작할 때다. 언젠가 한두 번 그녀들은 내 가게에 남자와 함께 들렀을 것이다. 남녀가 그렇고 그렇게 다닐 때에는 내가 특별히 주시하지 않는다. 흔한 것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사랑한다고 느끼며 팔짱을 끼고 혹은 팔짱을 끼지 않고 다니는 남녀이니까.

나는 그러니까 흔한 말로 카페 마담이다. 내 경험으로 보아, 언제부턴가 차를 놓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는 흔치 않다. 대개가 옆자리를 선호한다. 그러다보니 가운데 오뚝한 테이블과 의자들은 멀쩡한데, 가장가리 쪽 소파들만 더러워지고 꺼지기 시작했다. 때 국물이 찌든 소파를 당목으로 대충 씌워놓아 허옇게 볼품 사나워도, 역시 그쪽이 인기였다. 등 뒤로 걸린 싸구려 액자 속의 그림들도 그들에겐 별반 트집잡히지 않았다. 연필로 확대해서 그린 얼굴 부분이나 아무렇게나 드로잉된 나체들의 곡선은 오히려 가끔 칭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것이 실제로 미대에 입학도 해보지 못한 내 솜씨라는 것을 안다면 어떨지? 그걸 밝힐 이유도 틈도 없이 날은 오고 날은 갔다. 대관절 사랑에 빠져있는 동안 사람들은 관대하다. 마담이 평범할수록 드나드는 여자들이 좋아한다. 장사는 그런 틈에서 되어 간다. 물장사라니, 반찬 가짓수가 많은 밥장사보단 일단 편하다. 아니 나는 반찬냄새를 많이 싫어한다.

돈을 벌면서 내가 굳이 독한 취미를 가져서 그들의 속내나 들여다보려는 건 아니다. 그냥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들이 처음엔 맥주 한 병 쯤으로 여자친구를 앞에 두고 시들해 한다. 짐짓 염려스런 표정의 친구는 기실은 반질반질한 눈빛으로 마주하고 있지만, 고통의 주인공이 이런 저런 것을 개의치 않고 있으면, 그때 난 알아차린다, 벌써 심각한 상태로구나. 앞에 앉아 귀 기울이는 친구나 건성으로 보이는 마담에게서, 그러니까 상대의 본성에서 비뚤한 기쁨을 읽어낼 여력이 없는 것이 그 시기의 특징이다. 아니 그들의 특징이다. 멍청한 것들!

“사랑? 그런 것에 들리거나 환상을 갖는 사람들은 열등하다.”

한번은 한 남자가 그런 섬뜩한 발언을 해댔다. 비슷한 또래 어중간한 남자들 셋에 여자가 하나 섞인 그런 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추가 카프리를 들고 가던 참이었다.

“핑카라는 언어학자 말이, 우리의 심리적 모듈은 차에 치여 네 다리를 쑥 뻗고 나자빠져 있는 죽은 동물의 부어오르고 갈라진 뇌의 틈새보다 더 뒤죽박죽이라오.”

핑크, 또는 핑커 그 비슷한 이름이었지만 그건 대수가 아니다. 내가 들은 건, “나자빠져” 어쩌고 할 때부터야 분명했다. 어려운 단어 “모듈”도 나중에 채워 넣어 알게 된 단어다.

“그게 마인드라는 것인데, 왜 사내들은 서로 결투에 도전하는가, 왜 사내들은 전처를 살해하는가, 다 그 탓이라오.”

아니 이 남자가 웬 말을? 전처를 살해한 과거를 가졌을 리 없는, 아니 전처라는 단어를 모를 법한 이 남자가. 처와 마찰 중?

그러면서도 나는 실은 그 이상한 논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인드’는 뭔가 어렵고 애매했지만, 일단 전체적으로 은근히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나는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해볼 계획도 없기 때문이었다. 부서진 한 몸 멀쩡한 듯 살아가기도 힘들다. 사랑 같은 것은 시간 남고 배부른 사람들이 찾는 진한 양념이다. 밥냄새도 반찬냄새도 싫은 내게 자극적 양념은 더더욱 필요 없다.

나는 근처에서 얼쩡거리려고 옆 테이블의 냅킨그릇을 들었다 옮겼다 했다. 말하던 사람은 하이네켄을 마시고 있었다. 처음 그 상표를 들었을 때, 혹시 하이네 이름을 따서 지은 캔 맥주인가 생각했던 어리석은 기억이 늘 따라다녔다. <로렐라이> 같이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를 지었다는 하이네. 누군가 하이네켄을 찾으면 그 사람도 혹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지 궁금해지곤 했다. 게다가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난 자꾸 이 유식한 남자에게로 신경이 쏠렸다. 아니다, 꼭 그건 아니다.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유식하기로 치면 너나 할 것 없으니까.

차츰 알게 된 것으로, 그 말을 내뱉은 사람도 언어학자라 했다. 언어학자라면 국문과 교수와 다른지, 국문과 교수는 소설가와 다른지, 어느 것도 잘 모르던 나에게는 그것이 그것이었다. 온통 유식한 사람들. 그들의 낮 세계와 동떨어진 나는 그들의 밤의 틈새를 훔치는 것으로 만족한다. 어쨌거나 인형가게에 들르는 호들갑스런 대학생들 보기보단 낫고, 왠지 영화나 브라운관이 내게 가까이 와 있는 듯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후후, 낄낄거리는 소리에 저 쪽 테이블로 시선을 옮겼다. 근처에서 몇이 내는 소리였다. 비껴 옆의 여자를 흘끔거리는가 싶다. 여럿의 눈길이 머무는 쪽은 여기선 꽤 단골에 속한다. 동그란 얼굴에 단발머리를 고집하고 앞머리까지 동강 잘라서 내린 여자로, 사랑병에선 꽤 중증이다.

여자는 홀에 들어서면 곧 왼쪽으로 굽으면서 제 자리를 훔친다. 실은 ‘거기’로 출입하는 길목이라서 별 인기 없이 늘 비어있는 자리인데도. 여자는 앉으면 의자 등부터 쓰다듬는다. 등의자를 통째로 씌운 희멀건 당목은 몇 번이고 세탁한 나머지 제 남자의 체취는 온데간데없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행여 뭔가 호주머니의 먼지 부스러기라도 떨쳐놓고 갔다 해도, 내가 아직 세탁을 안했다 해도, 의자를 스쳐간 숱한 여자들의 머리카락도 함께 묻어있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슬며시 웃어주면, 여자는 자신을 알아주어 고맙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아니면 알아보는 것이 무색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리곤 곧 멍하니 고개를 떨군다.

여자가 주문하는 것은 남자랑 마시던 버드와이저에서 이런 저런 칵테일로, 다시 데낄라로 바뀐 지 오래다. 앞자리에 앉아 고민을 들어 줄 친구도 있다 없다 한다. 친구의 수는 술잔과 반비례한다. 마스카라가 번진 한 쪽 눈두덩이 때문에 저쪽 테이블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나 보다. 여자는 아랑곳없다. 손등의 소금을 핥다가 뭉개진 검붉은 입술이 영 서글픈 정취를 발산한다.

“자 얼른 일어서지! 오늘은 더는 안 되겠어요. 알바들도 다 퇴근해야 하고, 이제 곧 셔터맨이 올 시간이야. 내 남자는 여자 이런 꼴 못 보는 신사거든요. 업어다주려다가 동티나게? 장군아, 아니 멍군 네가 이 손님 좀…….”

그녀들이 뜸한 날엔 장군과 멍군이 심심해한다. 알바 아이들이다. 하나는 장 뭐라는 아이가 맞다. 나중에 온 녀석이 내가 선임더러 “장군아” 부르는 소릴 듣더니 저는 멍군으로 부르라 해서 그냥 그리 되었다. 이곳에선 호적상의 이름 같은 건 아무도 관심 없다. 이런 곳 이런 시간에는 얄팍한 거짓이 일상이다. “내 남자는 신사”라고, 후후? 혼자 사는 여자 행색이 이런 곳 이런 시간에 어울리지 않아서 멋대로 창조된 남자일 뿐이다.


나는 카페에 오는 멍청한 남녀들의 어리석음을 적당히 비웃는다. 그리고는 새벽이 오는 시간 책상에 앉은 나는 내 비밀을 푼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대숲에 나가 소리칠 데가 없는 세상에 살자면, 그런 세상을 미치지 않고 살자면, 이런 컴퓨터란 이름의 대숲 창고가 참으로 다행이다. 암호만 걸어두면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내 글〉. 그것은 내 고백성사요 어쩌면 종부성사가 될 것이다. 누구라도 열지 못하는. 물론 해커인지 뭔지 엄청 대단한 기술을 가진 아이들은 누구의 어떤 파일도 다 연다지만,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인재들을 동원해서 시답잖은 나의 〈내 글〉을 열어볼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러니 안심이다.

나는 쓰기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게 이렇게 사는 것은 자유 그 자체다.’

‘거짓말, 그건 외로움이야.’

내가 한 마디 적을 때마다 허수가 토를 단다. 나는 정해수라는 제대로 된 이름이 있었지만, “해수애비”로 통하는 아버지 때문에 늘 ‘허수아비’라 놀림 받았다. 어렸을 때 나는 내 이름이 정말 허수인가 할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왜 ‘정 선생’도 ‘정 씨’도 못되고, 늘 그렇게만 불렸을까? “해준에미야” ― 할머니가 그렇게 부르는 엄마는 다른 아이들인 해정이 해은의 어머니였다.


나는 그냥 내 이야기만 하기로 한다. 허수도 조용하다.

내 처음 직업은 경리였다. 경리직원 정양이 사장님과 사모님에게서 도망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피스텔은 실제로 그들의 체모로는 슬그머니라도 나타날 수 없는 곳이었다. 빌라 아니면 대형 아파트 단지 또는 호화로운 호텔의 로비가 그들의 세계였으니까. 돈이 적은 대로 단독 2층을 세 들어 살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살림으로 정착하지 못하는 내 생활 또한 오피스텔의 생리에 맞았다. 어딘가에서 김치찌개나 감자 넣고 비릿한 생선 끓이는 냄새가 넘어 들어오지 않을 잠자리 ― 그건 건 바로 이런 종류였다.

내 자신의 몰골을 이곳에 맞추려고 무진 애를 쓴다. 어디에 살건, 누군가가 삽을 들고 나와서 퍼 내 버리고 싶은 개똥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물론 처음 바로 술집을 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빵집을 내서 빵을 가져다 판다거나, 액세서리 집을 내어볼까 궁리에 궁리를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던 경리직원 생활을 접은 순간, 제발 아침엔 늦잠을 자고도 살 수 있기를 희망했었다. 어린 시절 이래 늦잠 한번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때문이다.


일찍 일어나서 어머니, 그러니까 해준엄마를 거들어야 했던 건 순전히 할머니 때문이었다. 그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할머니가 참 고마웠다 싶었지. 붓기를 잘하는 해준엄만 조그만 내게 많은 것을 의지했고, 그래서 나를 미워하지 않았을 거야. 쓸모 있는 딸을 미워할 계모는 없어, 아주 심성이 비뚤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은 제 할 탓이다.”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아무데서고 조금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랬다 난. 그렇지만 일찍 철들어 살림을 도맡았던 어린 시절은 내게 찌든 찬장냄새도 심지어 밥이 익어가는 냄새도 다 싫어하는 괴벽만을 남겼다. 난 정말 음식냄새가 싫다. 사람이 음식냄새를 싫어하면 뭔가, 반은 죽은 목숨이다.


야간 상고에 진학한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새벽부터 집안일과 아이들 챙기는 일 끝나고 나면 다시 집안일. 새엄마는 부성한 발등을 하고 겨우 앞마당 뒷마당으로 뒤뚱거리기 일쑤였고, 한낮이 겨워야 숨을 돌리고 마주 앉은 밥상에서 내겐 항상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곤 했다.

“학교엘 못 가 어쩐데냐, 야간이라면 또 모른데, 하긴 야간은 또 집이 멀어 통금되게 생겼고…….”

“늦는 건 안 무서운데,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렇게 해서 일년 늦게 야간 공부가 가능했다. 천장이 높고 썰렁한 교실은 참 고상했다. 우선 퀴퀴한 음식냄새와 멀었다. 누군가의 피아노 연습 소리도 서툰 대로 고상했다.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 짓고……. 그러다가 어두워진 저녁 시간 교실만 밝은데, 노래공부는 교실을 천상으로 바꾸었다. 영어를 읽어도 잘은 모르지만 무슨 신기한 노래 같았다. 그 대신 답이 확실한 산수와 수학시간이 즐거웠던 나는 정작 상고 시절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의무가 되고 수단이 되려니까 그랬을지.


그나마 제대로 졸업을 했더라면 이보다는 나은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새엄마는 내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새엄마가 인생에 썩 도움이 된다는 이야긴 들어 본적이 없으니 크게 억울할 거야 없다. 어쩌면 새엄마가 병만 처지지 않았어도……. 새엄마는 그 살림으로는 죽느니 비슷한 병을 앓았다. 살아서 피를 걸러내야 하는, 일주일분 온 식구의 생활비를 혼자서 다 써야 하는 병을.

남은 한 학기를 못 마치고 학교를 접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담임선생님이 알선해준 경리 자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듬해에 복학해서 남은 한 학기를 졸업하게 해주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졸업을 하고도 직장을 옮기는 배은망덕한 꿈은 감히 꾸지 않았다. 웬걸, 대학에는 내가 책임지고 보내주마 하던 사장님.

사장님은 친절했고 그리고 도둑이었다. 어려서 죽은 딸만 같다고, 공부하라고 마련해준 뒷방은 분에 넘치게 감사했지만, 수능시험 준비를 할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밤낮없이 일감을 들고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난 어느새 나쁜 여자가 되어 있었다. 몸도 마음도 나쁜. 머리는 썩지 않았다. 사모님과 결산을 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믿었다.

“절대로 나타나지 않겠어요, 마침 결혼하자는 남자친구가 있으니.”

거짓말은 서로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전 그냥 아무 내색 없이 시집가겠어요, 사모님께서 도와주신다면.”


나름대로 목돈을 가지고 궁리를 하면서 준비한 것은 봉제 인형들을 들여다 파는 작은 선물의 집이었다. 대학을 그렸던 마음이 대학동네를 흘끔거리게 했다. 그러나 대학가 길목은 너무 비쌌고, 한두 블록 떨어진 미용실과 PC방 사이, 딱 한 팔 너비의 가게는 장소를 잘못 고른 셈이었다. 미용실에서 내다 널어놓는 수건 빨래걸이와 PC방 앞의 두들겨 패는 놀이판들 사이에서, 내 흰곰들은 누렇게 변해갔다. 너무 심심하면 나는 그놈들을 스케치했다. 그도 심심하면 바깥에 스쳐가는 사람들을 그리곤 했다. 가끔 점심 먹으러 가는 떡볶이 아줌마는 차라리 소주방을 하라 했고, 미용실 아가씨들은 빠를 하라고 했다. 떡볶이 아줌마는 다시 새벽 해장국집을 권했다. 모두가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하는 세상이랬다.

“대학가에서 곰인형이 뭐야. 그런 건 요샌 초등 애들도 별로야.”

“생긴 것과는 참 다르네여…….”

이건 미용실 아가씨 말이었다.

“내 생긴 게 왜 어때서여?”

말꼬리를 흉내 내자 모두들 피식 웃었다.

“머리를 더 길러서 확 층을 내고, 앞과 옆은 과감히 흩트려서 볼륨을 넣고 좀 섹시하게 연출한다면!”

“한다면?”

“한다면, 영락없는 카페 마담 스타일이지여.” 젊은 것 같지만 나이 들어 보이는, 그런 분위기가 여러 층의 사람들을 사로잡는다고! 미용실 아가씨는 모처럼 전공을 살리게 되어서인지 말에 기운을 얻었다.


그들은 내가 인형들에 집착했던 이유를 알 리 없었다. 아버지 없는 아일 상상하기 무서워서,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내 스스로가 무서워서 미리 포기해버린 내 미래의 아기. 난 인형들에서 사라져간 아기의 영혼의 파편들을 만난다. 동그란 눈도, 찌그러진 눈도 가능했을 내 아기. 눈웃음으로 눈이 보이지 않는 갈색 곰, 놀란 토끼 눈처럼 만들어진 아기 곰. 앞치마까지 차려 입은 엄마 곰. 곰 가족, 내 인생에는 있을 수 없을 가족, 엄마와 아빠와 아기.

할머니는 처음 집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내게 당부하셨다.

“여자는 버스를 타거나 어쩌거나 항상 양 무릎을 떼어선 안 되느니.”

그 “어쩌거나”가 무슨 의미였는지는 이미 무릎이 젖혀진 뒤에서야 깨달았다. 강요가 있었지만 뭔가 자포자기적인 충동과 얼버무려진 혼돈. 누구든 치를 것에 대한 겁 없는 대처이기도 했다. 대학의 꿈을 접지 못한, 겨우 스물한 살 때였다. 가벼운 행동의 결과는 증폭되어 나타났다. 규칙적인 피흘림을 단 한 달 걸렀을 때, 난 미련 없이 아기의 가능성을 차단하기로 결심했다. 평상시 뭉클하게 쏟아지던 행사 정도에 그칠 그냥 피의 덩어리일 뿐일 그것을. 어디에서도 제대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 그것을.

“내참, 의사 생활 몇 년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긴가민가 하는 상태에서 떼 달라 조르는 아가씨도 다 있구먼. 새파란 나이에 뭐야.”

“병적인 순결집착증 아닐까요, 원장선생님?”

“쉿, 들릴 지도 몰라. 대충 마취한 거잖아, 별 꺼낼 것이 있기나 한지 원.”

‘미친 것들! 순결집착증이 있는 여자가 이 모양 이 꼴로 여기 누워 있겠냐! 미친 것!’ 그렇게 속으로 속으로 이를 악물고 외쳤다. 치욕은 자진해서 다리를 벌린 그곳에서 더욱 심했다. 월급을 주는 남자와 월급을 받는 여자 사이를 통째로 의심하던 나에게 그들 또한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미친 것!’ ― 이 말은 내 입버릇이 되고 말았다. 저기 저렇게 술병을 앞에 두고 너덜거리는 군상들을 보면, 아무에게나 그렇게 내뱉었다, 미친 것!


오늘도 그녀다. 반듯한 외모에 강사씩이나 된다는데, 여기 와서 만날 넋두리다. 대학에서 선생을 하는 여자라니, 내 처지로 보면 하늘이다. 그런데 밤에 보면 별 것도 아니다.

“같이 보따리장사 시절 동병상련 가까워 졌었지…….”

보따리장사란 여기 오는 사람들 용어로 시간강사다. 남자가 신임교수가 되자마자 여자가 채였단다. 어지간히 뻔한 일이다. 박식한 박사들이 널린 세상에서 결정적인 것은 ‘전임’이라고들 했다. 첨엔 나도, 시간강사는 하루 한두 시간만 하고 전임강사는 온종일 하는 강사인줄 알았었다. 대학가 근처에선 배워지는 것도 많다. 또 강사와 교수가 무엇이 다른지, 다같이 대학교의 선생님들 아닌가. 한번은 두 비슷한 남자 둘이 앉아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교수님”이라 호칭하고, 다른 한쪽은 상대에게 꼭 “선생님”이라고 해서 의아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 쪽은 시간강사이고 교수님 쪽은 전임강사란다. ‘선생님’이 가장 높여 부르는 것인 줄 알았던 나는 매번 놀랬다. 어느 고장에선 ‘전(前)대통령’보다 ‘선생님’이라고 해야 존경심을 나타내는 줄 알기도 하는데.

아무튼 “결정적인 순간에 이 남자가 좋은 혼처에 안착해버렸다”는 것이다. 남자는 결혼 후로도 “마음만은…… 이런 대화를 나눌 상대는 오직……” 하면서 여자에게 기댔더란다. 습관에서 탈피하지 못하듯이 꼭 그렇게 그녀는 그의 곁에 남았고. 그가 원하면 달려갔고. 완벽하지 못한 그의 결혼에 마지막 화룡점정이 되어도 좋다고 느껴질 만큼 그는 그녀를 간절하게 원했었다고. 그러더니 코가 비뚤게 술을 마신 어느 날 느닷없이 그러더란다, 날 좀 놔주지 왜 이러느냐고, 알고 보니 여잔 다 같은 수준이더라고!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 자식, 논리가 대단했어. 그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그를 원한다, 유부남을.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는 자신을 나에게 내어주느라 죽을 지경이다. 반대로,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하지 않겠는가.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원이니 내가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것도 술 핑계로 그런 논전을 걸어왔다니까.”

‘그래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겠구나, 너, 미친 것아!’

밖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소리가 나온다.

“어마 그럴 리가……. 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어쩜 예민한 아내 쪽에서…….”

나는 마음에 없는 말로 사회적 웃음기를 흘린다.

“야아 그놈의 말장사, 보따리장사. 누가 그 말장사를 따라가겠어. 나요? 나도 강사 아니냐구요? 그래요, 저나 나나 같이 보따리장사였죠. 하지만 난 화학이요. 우린 말장사라기보다는…….”

알만 하다. 마담 퀴리가 되려는 듯이 화학과에 진학하는 여학생들. 공부는 잘 해도 인간미 없을 확률이 높은 똑똑한 부류. 보아하니 땅딸보도 아니고. 공부도 잘하고 예뻐서 같은 반 친구들 꽤나 마음 다치게 했었겠다!

그런 여자들은 죄 없이도 좀 당해도 싸다. 왜, 공부도 잘하고 예쁜 부잣집 딸이면 더욱 뒤틀린다. 그 중 하나도 갖지 못한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들을 그들은 모른다. 중학교 졸업 후 희망이 끊어진. 갈아입을 여러 벌을 다 포기하고서도 제대로 된 옷 한 벌을 만져보지도 못하는 열여섯 살 여자애를. 함부로 청바지를 입고 싶지 않고,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서 무통 다리에 스커트를 입고 싶어 하는 스무 살짜리를. 애매한 미소 속에 술을 팔아 살아가느라 겉 나이 먹어가는 여자를. 서른도 전에 마음 닫아 건 여자를.

어쩌나, 난 그 병을 지금도 못 버렸다. 대학가 가까이 집을 구하고, 요조숙녀에 가까운 대학원생쯤으로 보이기 위해서 살짝 긴 컷을 고수하는 것 하며, 향수도 레이스 치장도 피하고, 가능하면 직선 라인을 선호하여 몸매의 곡선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며……. 올빼미족을 상대로 술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가 사무실 분위기의 오피스텔에는 어떻게 맞추느냐고? 그건 간단했다. 오후 출근길에 노출 없는 깔끔한 옷과 맨얼굴이면 통과였다. 밤늦은 시간에는 보는 사람들이 적다. 또 술을 팔되 술은 아예 하지 않는 원칙이다. 바보들이 사랑에 빠지듯이, 바보들이 술을 마시니까. 난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


‘저 바보는 또 왜 이리로 오는 것일까?’

이번엔 굵은 웨이브의 긴 머리. 어디선가 술에 젖어 온 그녀는 들어오면서 바로 주인인 내가 왜 그를,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따졌다.

“이 그림 아래, 여기서 그가 나를 무릎에 뉘인 적도 있었는데.”

그때 실은 많이 취해서는 아니고, 그들은 술은 많이 하지 않고 토론을 즐겼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은…….”

그녀가 말끝마다 내뱉는 유럽 사람들 마냥, 그 둘은 한 잔 놓고 앉아서 오래 떠드는 부류였다고 기억된다. 그녀의 남자 또한 기억한다. 왜, 무처럼 희멀건 얼굴에 안경테는 검은, 상투적 샌님. 다만 잘 코디도 안 된 채 입는 캐주얼한 복장이 얼핏 자유의 냄새를 풍겼을 뿐이다. 그 정도 자유의 냄새를 풍기는 인물은 실로 널려 있다.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그녀가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멍청한 것!


나는 멍청한 남녀들의 어리석음을 한껏 비웃어준다. 지열이 가시면서 새벽이 오는 시간 책상에 앉은 나는 내 비밀을 푼다.

비밀? 비밀이라 할 밖에 없는 것은, 세상에서 알 리 없고, 그 사람마저 알 수 없는 내 감정의 소용돌이다. 일층 편의점에서 햇반을 집어 들다가 만난 사람을 스물 네 시간 안에 다시 마주치면 누구라도 일순간 가슴이 움직인다. 역시 일층 문방구 계산대에서 부딪친 그의 바구니에는 말갛게 비치는 홀더 뭉치와 작은 집게 한 통, 그리고 연둣빛 형광펜 옆에는 놀랍게도 연필과 지우개가 들어 있었다. 연필? 요새도 연필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딱풀과 크레용 그리고 작은 가위. 그 사람 역시 나를 따라서 내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어쩌나, 나를 초등학교 학부형쯤으로 보았으면 어쩌나? 내 가능한 아기가 만일 태어났다면 초등학생쯤일까?’

무슨 대수였을까? 어떤 남자가 연필로 연애편지를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곤 하거나 말거나. 처음으로 마주친 그가 그 가벼운 차림의 몰골로 미루어 같은 오피스텔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오피스텔의 생리가 무엇인가? 옆방에서 통절한 싸움이 나도 모르도록 되어있는 구조를 즐기려는 것 아니었나? 홀더와 작은 집게들, 그리고 연필과 지우개를 사서 햇반을 먹으며 일하는 사람이 한둘이겠는가?

나 또한 딱풀을 사서 얇은 화장지로 부챗살을 덧바르고, 종이가 완전히 마르면 파스텔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려 넣을 참이었지만, 낡은 부채를 버리지 않고 붙이려는 나를 누가 관여한단 말인가. ‘어머나, 대단하다, 말끔히 새것이 되었네!’ 혹은, ‘처음보다 더 예쁜데!’ 하고 감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괜한 짓 하고 있구나, 거 뭐한다고 헌 부채를 가지고 몸살이냐!’ 그렇게 핀잔할 사람마저도 없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대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혼자다. 혼자라서 이곳에 산다. 이렇게 좁은 공간을 선택한 것이 돈이 적은 이유에 겹쳐서, 마치 사람들이 싫어서 반드시 혼자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시위하려는 몸짓들 같다.


난 정말이지 다시 집으로 갈 순 없었다. 떠나올 때와 너무 달라진 나 자신 때문이기도 했고, 생모도 생부도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집이 집은 아닌 것 같았다. 독립을 위해서 야멸차게 받아낸 큰 돈도 있었다. 물론 내 경우로 큰 돈. 그 돈으로 수고로운 몸을 뉘일 작은 집과 밥을 벌어먹을 가게를 꾸린다.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내가 이쯤이면 스스로 대견하다. 그 나름대로 대도시, 이런 곳에서 누군가에게 생활을 의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난 혼자서 잘 산다. 무엇을 특별히 기대하지 않으며, 그래서 무엇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야간에서 만난 친구들이 보통 그랬다. 기쁨과 슬픔의 표현이란 인문계 고교로 진학한 순진한 아이들, 있는 집 아이들의 것이었다. 우리에겐 미래의 꿈은 먼 것이었다. 우리에겐 우선 현실이 존재할 뿐이었다. 나 또한 지독한 현실에 내팽겨졌다가, 겨우 이리로 숨어들었다. 상의할 형제도 없이, 친구도 없이, 난 한 격랑을 탈출했다. 내가 만일 이제와 그들을 찾는다면, 만일 그런다면, 그들 중 누구라도 내 이상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나를 반길 것이다. 더한 불행들이 부도덕한 소문쯤을 가볍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은 내 불행에도 호들갑을 떨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정말 힘들어지면 누군가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나만큼 외롭고 무미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를. 다들 성공(?)해서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 또한 가슴 아플까?

나에게 더 아플 가슴은 없다. 처음부터 잘 발달되지 못한 내 정서다. 애정 없이, 아니 증오심과 함께, 상당기간 몸을 버렸고, 내 몸은 굳었다. 피기 시작하지도 않고 시드는 꽃.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감동적인 안치환의 목소리로 들은 노래가 가슴을 저몄다. 고향의 옛 시인이 쓴 가사라 해서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내 고향엔 내 이른 죽음을 서러워할 사람도 없다.

꽃봉오리들이 다 피는가? 다 못 필 수도 있기 때문에 피어난 꽃들을 아름답다고 할 게다. 연거푸 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갓난애조차 업은 채 강에 뛰어들었다는 내 어머니. 누가 크게 구박도 안했는데 무엇이 혼자 서러워서였는지, 스물두 해도 넘기지 못한 여자. 그 주검이 달구지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고서도 그 자리에 시집온 새엄마. 반은 넋 나간 남편과 아이들과 병마와 얽혀 들어간 여자. 누구도 피어본 적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할밖에.

내 생채기? 회오리바람은 도처에 있는 법이다. 그만하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산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잘 안배하며 산다. 내 어머니처럼 돌아버리지 않게, 새엄마처럼 병들어 처지지 않게. 그냥 할 수 있는 일로 밥을 벌고…….


그러다 그 스물네 시간 안에 누군가를 세 번째 조우하기에 이르면, 누구라도 뭔가 운명적이라는 환상에 빠지기 쉽다. 내가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천천히 문 쪽을 향할 때, 서둘러 계단에서 올라온 걸음걸이가 나를 지나쳐 내 방문을 잽싸게 열고 들어갔고, 그것이 그였다. 곁을 밀치듯이 지나친 뒤에도 나를 별 의식하지 않던 그가 방문을 닫기 전엔 살짝 돌아다보았다. 내가 어처구니없어 하며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나 보다. 그래도 조금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그 순간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속도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은. 누가 내 면전에서 내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아거는가? 한두 발 더 걸어가서 확인한 방문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 4층이었다. 5층에서 내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무 일도 아닌 우연한 실수에 멍해진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있기가 멋쩍어 계단으로 5층을 향했다.

‘아차, 그러니까 4층에 사는 남자였구나! 내가 잘못 내린 거네 뭐!’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그를 스물네 시간 안에 세 번씩 만나려고? 그런데 어디서 보았더라? 홀더와 작은 집게들, 그리고 연필과 지우개를 사서 햇반을 먹으며, 나와 천장두께만큼 떨어져서 일하고 있을 이 사람을?

그것은 경이이자 슬픔이었다. 인생의 시작부터 망가진 채, 이제는 사람 사이를 초월해서 살리라, 그렇게 마음 단단히 먹고 살기 시작한 그때, 하필 그때 그 무심한 맑은 시선과 마주친 것은.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깨끗한 눈빛. 그것이 다른 사람의 원과 소망을 자아낼 수 있음을 그땐 사실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무려나 일상은 계속되었다. 다시 하이네켄을 찾는 언어학자가 나타나는 일도 일상에 속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였다. 언어학자라던 그 남자, 그 남자가 그였다. 그 남자의 일행은 갑자기 자주 들렀고, 온갖 외국어에서 비슷한 공통점인가를 찾아 연구하는 팀이라 알려졌다.

‘혹시 하이네도 강의하시나요?’

하이네켄을 계속 들고 가면서 묻고 싶은 말이었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뭔가 그럴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슈퍼에서 문방구에서 오피스텔에서 마주친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핑계가 되어 가까이 앉으면 알아볼까? 알아보는 것이 좋을까 아닐까? 그래서 망설였다.


그쪽 테이블에서 돌연 큰 소리가 들려왔다.

“글의 주제? 아니, 난 그저 인생의 주제를 말하는 거요. 내 인생에 주제가 뭔가……”

나는 그의 목소리만을 크게 듣는다. 내 귀의 기능에는 최신 디지털 보청기들처럼 그의 목소리만 가려서 크게 듣는 장치가 되었나 보다.

‘인생의 주제? 주제라는 게 대체 뭐라는 것일까?’

그렇게 나도 덩달아서 고민이 시작되었다. ‘주제’가 들어간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옷주제가 뭐다냐?’ ― 그런 뜻과는 다른 무엇인 듯했다. 하지만 ‘인생의 주제라…….’ 아무래도 ‘중심’이 아닐까 생각했다. 중심을 가지고 사는 일, 그런 것을 말했을 것도 같았다. 인생의 주제를 두고 논할 계제가 아니었다, 나는, 술파는 여자는.


나는 술을 팔아 살아가는 내 신세를 비웃게 되었다. 새벽이 오는 시간 책상에 앉으면, 나는 내 멍청하고 슬픈 비밀을 푼다. 들킬세라.

나는 당신을 향해 오감을 열었습니다. 여럿이서, 그것도 드물게 나타나시는 당신은 나를 별로 의식하지 않으십니다. 하이네켄을 파는 여자를, 필요 이상으로 병을 들고 테이블 주위를 도는 여자를. 그러다 당신은 마침내 나를 알아보았습니다. 공휴일이 끼어서 한가한 오후였지요. 진한 커피도 듣지 않고, 아스피린도 한 알 밖에 남지 않아 약국을 향하던 나를 알아보셨습니다. 단화를 신고, 그러나 옷은 산보 차림은 아니었던 저에게 그랬습니다. “산보 가십니까?”

나는 아스피린도 잊고, “예”라고 말했습니다. 유식하고 멋스러운 당신과 산보길이라면 어떤 것도 접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가 물장사 몇 년 만에 대학 내를 산보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빠른 산보 걸음을 쫒아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 당신은 벤치에 함께 앉았습니다. 감히 옆에 앉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거의 땅바닥에 앉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있었습니다. 메마른 땅바닥에 섞여 있는 돌과 돌가루 틈새로 풀잎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풀잎으로 보아 오월이었습니다. 당신은 내 이름을 묻고는, “해수 또는 허수”라는 말에 너무 통쾌하게 웃었습니다. “허수라고요, 시니컬합니다. 좋습니다.” 그리고는 술자리에서 내가 한두 번 대화에 낄 때 속으로 놀랐다고, 산문적 현대에서 뭔가 시적인 세계 같은 순수를 보았다고. “특히 그 분위기에 맞지 않게.”

“그” 분위기는 술집 분위기겠지요. 그러니까 오피스텔에서 마주친 여자하고 술집여자하고를 동일시하기가 어려웠었다는……, 그런 고백이어도 좋았습니다. 한껏 높은 세계에 존재하는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것이면 되었습니다. 대학에 가보지도 못하고 대학가에서 술을 파는 나에게. 대학생도 과한 나에게 모든 것을 졸업한 대학교수라니. 알게 모르게 유린당한 내 몸뚱이가 부끄러웠을 뿐입니다. 실전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뚫린 방패, 꺾인 창.


며칠 후 다시 일행과 함께 온 당신의 모습. 그 며칠 후. 그 며칠 후. 그러나 곧 긴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대학가의 여름이 그렇지만, 그해 여름은 참 길었습니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더위 속에, 그러나 저녁이면 시원해지는 어느 날 밤, 당신이 다시 가까이 있음에 나는 돌아버릴 만큼 행복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붕 뜬 것, 아니 어지러운 멀미 같은 이것을 무어라 한답니까? 차가운 가을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려 가게 문을 못 열면 어쩌나 걱정되었습니다. 혹시 폐렴에 걸려 죽을까 더욱 겁났습니다. 더는 당신을 못 보고 죽을까 겁났습니다. 절대로 날마다 오실 리 없는 당신을 날마다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오신 것은 두 학기의 공동프로젝트 때문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8개월, 7개월…… 3개월. 줄어드는 숫자의 의미를 당신은 모르십니다. 어차피 당신이 한시적으로 있습니다. 멀찌감치라고 해도 공기를 통해 섞일 수 있는 시간을 탐하는 내 욕망이 꿈틀거렸습니다. 그것을 오래지 않아 들켰습니다. 죽을 죄였습니다. 당신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왜냐하면 당신이 곧 멈췄으니까요. 아니 찬물을 끼얹으셨던 것, 압니다.

“어련히 알아서 마실까봐서요.”

어느 날 저녁, 그날도 자꾸 당신의 테이블을 맴도는 나를 향해서, 바라보지도 않고 내뱉으신 말. 퍼뜩, 부끄러워서, 카운터 뒤로 도망쳤습니다. 아예 두통을 핑계로 알바들에게 뒤를 맡긴 채 가게를 뛰쳐나왔습니다. 콧물 핑계로 계속 울었습니다. 마음에선 어쩌면 그렇게 차갑지 못하실 것이라 생각도 해봅니다. 어쩌다 일행들과 오시면, 이제는 내가 없는 것처럼 완전히 무시하시는 당신. 당신의 무심함에 죽어갑니다. 더 빨리 죽고 싶습니다. 이사를 떠날 수는 없어, 아니 떠나지 못합니다. 떠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의 시간이 정해졌으니까요. 시간이 가면서 나는 점점 미치는 게 아닌가 싶어졌습니다.

‘한 계단 내려가서 오른 쪽으로 굽는다. 정확히 열네 걸음이면 손에 잡히는 손잡이.’

몇 번씩 초인종을 눌러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나를 미치게 합니다. 수돗물을 밤새 틀어 놓아 물이 넘치고 넘쳐서, 당신의 천장을 스며, 혹은 당신의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상상을 합니다. 물은 쉽게 당신에게 이릅니다. 이 바보는, 정신 나간 바보는, 수돗물을 부러워합니다. 속을 썩힐 대로 썩혀 다 녹으면, 그게 물이 될까요?

일에 빠지자는 처방도 잘 듣지 않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야 가게 문을 여니, 긴긴 낮 시간을 잠이라도 자보려고 안간힘을 써도 소용없습니다. 수면제를 먹었다가는 가게 문을 열고서 졸게 되어 안 됩니다. 시간을 보내려고 문화센터를 기웃거립니다. 초상화반에 등록도 했습니다.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되려고. 당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되려고. 떠나신 뒤에 그리는 초상을 보고서 누가 뭐라겠습니까? 떠나신 뒤 걸려있는 초상화를 보고서 누가 뭐라겠습니까? 그러나 아주 떠나시기 전에, 몇 분간만 함께 있을 수는 없겠습니까? 한번만 버스 정류장 혹은 기차역까지 함께 가면 안 될까요? 당신은 나를 살게 하는 약이고, 나를 살 수 없게 하는 독이십니다. 나의 독, 나의 약이시여! 몇 분만 함께 할 수는 없나요? 몇 분의 약이면 몇 년은 버틸 것 같습니다. 아니 영원히 간직해 두고 조금씩 꺼내보겠습니다. 알사탕은 보기만 해도 그 단맛을 느끼듯이. 사탕이 닳을세라 그렇게 보기만 하면서, 달콤함을 조금씩 핥아가면서.

호야의 스물 서른 작은 꽃봉오리들처럼 수없이 매달려 서로 아무렇지도 않은, 당신의 마음 한 조각은 귀한 만큼 그러나 여렸습니다. 애당초 열정이었을 리도 없습니다. 그저 나락에 빠졌던 내가 그 여린 줄기를 구원의 밧줄로 믿어버렸던, 초여름의 마파람 한 번이면 흩어져버릴 만큼 가벼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당신에게서 들었던 말을, 뜻도 모르고 되뇝니다. 그것이 다였습니다.


끝은 언제 오느냐고? 그것은 처음부터 병행이다. 다만 너흰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서야 화들짝 놀랄 뿐이다. 예컨대 CD 같은 하찮은 네 선물을 되돌려 받을 때, 그때도 넌 사실을 믿지 않고 다른 핑계를 댄다. 너를 위해서, 너의 필요를 위해서 돌려준 것이리라고. 그러다 혹시 조금 취한 말로 “너 때문에 힘들어” 라고 중얼거리면 다시 전부를 건다. 그러나 마침내 너는 알게 된다. 예컨대 작은 보시기에 귀한 음식을, 네 생각으로 귀한 음식을 그에게 몰래 두고 나왔을 때, 급해서 네 손가방도 문 밖에 두고, 물론 그 문을 닫는 것도 잊고 네 방안으로 숨어들었을 때. 그때 그가 그것을 거부할 때. 그것을 다시 들고 와서 고개만 내민 채, “저, 많이 있습니다.”라고 정중하게 혹은 정중하지도 않게 말할 때. 손에 닿는 현관 어디 첫 번째 가구 신발장 같은 위에 아무렇게나 두고 나갈 때. 나가려다 말고 친절하게 혹은 별 친절하지도 않게, 오히려 칠칠맞음을 나무라듯이, “여기 가방을 이렇게 밖에 놔두고 그래요!?” 하면서, 네가 밖에 잊어버리고 있던 지갑을 디밀어 넣어주고 나갈 때. 문을 닫고 아주 나갈 때.


일상은 평온했다. 사람들이 줄어든 느낌이었을 뿐이다. 웰빙 바람을 타고 좋은 것을 찾으니 술은 덜 마시는 것이다. 아니, 그가 보이지 않는 날은 홀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 무렵 자살과 타살이 나오는 책을 읽었다. 순전히 그의 테이블에서 얻어들은 때문에 읽었다. 주인공이 남자냐 여자냐, 뭔가 대단해보여서 읽었지만 오리무중이다. “이반과 함께 행복하게”로 시작해서 “그것은 타살이었다.”로 끝난다. 실제로 죽은 시체는 없다. 실제로 죽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남자 이반이 떠나기 전에 떠나는 여자가 스스로 살해되었다고 규정한다. 사랑에 목숨 건 자신을 죽이고서, 난 죽고 싶지 않았는데, 죽임을 당했다고 설명한다. 이제 남은 사람은 그 여자의 반쪽 아니무스다. 여자는 남자로 살기로 한다. 그는 남자 이반이 걸어온 전화를 ― 아마 이별을 고하고자 ― 받으면서, “이곳엔 여자가 없(었)다.”고 답한다.

남자만이 인간이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벌써 알았어야 한다. 남자가 인간이다. 인간은 남자다. 책 속의 여자는 똑똑하다. 다행히 똑똑하다. 그녀가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되어 살면 그만이다.

그런데 작가는 여자였는데 죽었다. 실화인지 방화인지 화재로 죽었다. 책 속에서는 절반 아니마만 죽였는데, 책 밖에서는 통째로 죽었다. 혹시 이별이 아파서 죽었을까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내 검색 실력으로는 ‘1926년생, 1973년 사망’ 정도 겉핥기만 나왔다. 같이 살다가 이별한 남자는 역시 유명한 작가였는데, 15년 연상이었고, 전에도 후에도 여자들을 만났고, 20년 쯤 더 살았다. 하긴 서양의 이야기이니, 서양에선 남자가 더 장수하는지도 모른다. 그쯤이면 되었다. 내가 그런 것들을 찾아서 또 무얼 할 것인가.

그를 알았던 8개월 동안 평생에 읽었던 만큼보다 더 많은 소설책을 읽었다. 그가 떠난 뒤 다시 책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슨 책이 읽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없기 때문에 모른다. 그는 일 따라서 어김없이 한 겨울에 떠났다. 떠났을 것이다. 봄이 되어 대학가가 웅성거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


그를 처음 보았던 5월은 해마다 다시 돌아온다. 4월 뒤에 온다. 그런데 5월이 되도록 호야는 새 순을 낼 줄 모른다. 스물 한 개의 호야 잎이 겨울을 살아남았다. 쌍떡잎이 다 온전하지는 않지만, 살아남기는 했다. 화분들에 물을 주려고 안경을 찾아든다. 스물한 개의 잎들이 조금이라도 푸른 기운을 띠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아,” 하고 어느 날 너는 혼자서 탄성을 지른다. 저 아래 밑둥치 부분에 스물둘 그리고 스물세 번째 쌍떡잎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그 둘은 옛 줄기에서가 아니라 아예 새 순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둘을 밀어 올리는 새 줄기는 그 작은 잎들마저 무거운지 비틀거리며, 애써 그들을 위쪽으로 볕이 비치는 창쪽으로 들이밀고 있다.

다음 날이다. 물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순전히 조금이라도 자라났을 모양새를 보기 위해서 기어간다. 기어간다기보다는 기듯이 간다. 다가가는 속도의 에너지만으로도 놀라서 가녀린 줄기가 다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시작의 위치가 좋지 않아서인지 볕을 탐해서인지 큰 잎들 쪽으로 너무 기운다. 플라스틱처럼 완강한 늙은 잎들에 다치면 정말 굽을지도 모른다. 줄기인지 잎인지도 아직 구분이 가지 않은 연한 살이 굽다 못해서 아예 찌그러들지도 모른다. 너는 새끼손가락으로 가만히 여린 줄기를 밀어본다. 큰 늙은 잎에서 멀어지도록.

또 다음날 아침이다. 여전히 물을 주는 날이 아니다. 그래도 화분 쪽으로 향한다. 어제보다 더 자란 느낌인데 잎을 펼치는 기세는 그대로다. 해가 덜 나서 그럴까? 종일 창가를 서성댄다. 오후 늦게 방을 나서려다말고 또 한번 창가로 간다. 해는 반대쪽에서 비치고 있고 그리 맑은 날도 아니어서 앞쪽 창가는 어스름하기까지 하다. 너는 새끼손가락을 뻗어 가느다란 줄기를 바로 잡는다.

“조금만 더 바로 자라거라……, 조금만 더 바르게…….”

가만히 주문을 왼다. 아차, 그 순간 미세한 떨림이 네 손끝을 통해 온몸에 전해진다. 무언가 동강나는 움직임이다. 그것이 잘려 나동그라져 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인가. 그것이 끊어졌다. 그 여린 줄기에 좁쌀만도 못한 크기의 수액으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

너는 운다, 여린 줄기와 함께 작은 희망이 잘려나갔음을. ‘바르게’에 사로잡혀서, 네가 그것의 방향을 틀다가 그것을 죽였구나. 그렇다. 그의 방향을 ‘쪼끔’ 고쳐 잡고자 했을 때, 언감생심 네 쪽으로 인위적으로 정향코자했을 때, 아니 그런 소망이 꿈틀거렸을 때, 그때 벌써 그가 ‘절단났다’는 것을 너는 불현듯 깨닫는다.


너는 서둘러 가게로 향한다. 저녁에서 밤사이, 너털거리는 불행한 군상들을 서둘러 위로하고 싶다. 조용히 바라보아줄 사람이라도 그리워하는 안쓰러운 그들. 너는 그 얼굴들을 향해서 되뇌고 싶다. “인생은 끊임없는 이별하기다. 우리는 저녁마다 하루와 이별한다. 가끔은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그러나 가끔은 고통을 느끼며.” 어떤 시인의 글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구절이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리카르다 뭐라는 이름으로 보아 여자다.

‘그에게서라면 한두 마디 이 시인에 관해서도 들었을 것을.’

너는 순간 자동적으로 그를 떠올린다. 아차, 네 마인드는 여전히 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나 고통과 함께라도 너는 결국 오늘과 이별하게 된다.

예전에 녹아 굳어버린 네 몸의 층 위로 네 맘이 녹아내린다. 몸과 맘이 함께 상실 속에서 용광로에 든다. 이 소용돌이를 지나면 너는 오히려 단단해진 상처의 유약으로 치장한 어른이 될까? 너는 여태 변방에만 있었고, 네 인생의 무대는 아직 비어있음을 느낀다. 중심이 비어있다. 주제가 비어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죽은 자의 신 오시리스에 덜컥 홀려있었다. 너는 이제 비뚤어진 밤의 관찰자 역할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 느낀다.

‘할머니, 다시 밥 짓기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느닷없이 먼데 할머니를 속으로 부르면서, 삶의 중심에 놓인 것이 설마 밥일까 생각해 본다. 따뜻하게 지은 밥 한 그릇이 너의 버려진 듯 초라한 삶과의 이별식이 되어줄까? 너의 발걸음은 정상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어디로일까? 확연하지는 않지만 가게가 종착역이 아닌, 그 너머인 것을 너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끝.
                                           
<PEN 문학> 200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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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