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파면과 구속… 친구란 무엇일까? | ||||||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5. 친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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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한국에서 뉴스 채널을 외면하고 살기는 면벽수도를 실행하고 있는 이가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 같다. 엄청난 뉴스들이 토네이도처럼 솟구쳐 오르니 피할 도리가 없다. 무엇보다 세월호가 올라와서다. 1073일 만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세월호는 다시 한 번 텔레비전 화면에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고정시키고 있다. 제발 무사히 이제라도 무사히 오너라, 와서 비밀을 열자! 그 사이사이 탄핵으로 파면돼 마침내 구속되기에 이른 전직 대통령 관련 소식들과 새 대통령직을 향한 열기들이 점멸한다. 무엇인가 먼저 해야 할 숙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소심한 사람인지라, 내 머리는 아직 벌건 상처를 드러내고 있는 어제로 향한다. 세월호의 아픔과 반비례 곡선으로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또 하나 비선이라는 이름의 ‘40년 지기’ 관계가 그것이다.
계산하지 않았던 그 시절 친구 사이
친구가 뭘까. 근묵자흑이려니, 친구를 사귀려면 너보다 뭐라도 더 나은 사람을 사귀어라! 옛날 우리가 어려서 듣던 충고다. 나는 좀 괴팍했는지, 어린 심보에도 반항을 했다. 누구나 다 더 나은 친구들을 사귀고자 해 화살표가 계속 한쪽으로만 가면 어떻게 마주보며 손뼉을 치는 친구를 만나겠는가, 라고. 큐피드의 화살은 상호 조응하기는 아주 어려운 일방통행으로 쏘아댄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예외인 셈이다.
한때는 피검사로 처음 알게 된 혈액형에 관심들이 많았다. A형은 돌다리도 두드리지만 답답하고, B형은 진취적이나 흔들리고, AB형은 천재형이라지만 가볍고, O형은 진중하지만 속내를 모르고…. 이 모든 멋대로 얻어들은 허튼 정보들을 가지고서 모이고 흩어지고를 되풀이하곤 했다. 물론 그 시절 우정에도 요즈음 말로 썸타기와 밀당이 있었다. 마음이 가는 친구 앞에서 부러 토라지거나, 며칠간 말도 걸지 않는다. 주의를 끌려는, 유치하지만 애교 있는 행동들이었다.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그때 그 시절에는 친구 사이 유불리를 따지는 계산들은 없었다.
친구라고 하면 가슴 아프게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떠오른다.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런던과 파리를 오가면서 서술된 다른 명문들은 차치하고, 한 남자가 다른 남자를 대신해 목숨을 내던진다는 뭉클한 이야기였다.
프랑스 귀족 청년 다네이는 폭풍의 파리를 떠나 이제는 루시와 결혼한 몸으로 런던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운명적으로 다시 파리의 감옥에 갇힌다. 루시를 혼자서 흠모하던 영국인 변호사가 그녀를 위해 다네이를 구출해 내고자 파리로 간다. 그는 마침 닮은 몸을 빌미로 죄수와 자신을 바꿔치기에 성공한다. 다네이는 술에 떡이 된 채로 감옥 밖에서 정신을 차린다. 친구 일행의 무사 탈출을 확인하면서 단두대에 설 수 있는 용기와 사랑, 그 비장감에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고등학생이 소화하기에는 벅찬 내용이었지만, 작은 도서관에는 책들이 많지 않았고, 소설책들은 무턱대고 읽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이 봄까지 우리의 일상을 앗아가다시피 한 저 두 사람(박근혜·최순실) 40년 지기는 어떤 사이일까. 그들의 엄청난 계획과 추진력과 성과물(?)들을 보면 팀워크가 아주 빼어난 공동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그들의 행위의 적법성이 문제가 되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러 ‘시녀 같은’ 사람이라 규정했으니, 자신은 여왕이라는 전제였을까. 그 말처럼 단순하게 여왕과 시녀 사이인지, 실은 시녀 역이 제작 감독하고 여왕 역은 다만 주연을 맡은 연극인지 누가 알랴. 어떻게도 이해가 되지 않은 끈적끈적한 관계다. 오죽하면 ‘피보다 진한 물’이라고 표현됐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관계 자체를 넘어서 재판에 임하는 태도다. ‘시녀 같은’ 사람은 무례하다시피 항변하면서 자신과 여왕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여왕은 시치미를 떼고서 시녀에게 그 모든 잘못의 책임을 미루는 분위기다. 물론 일심동체란 말은 부부사이에도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다. 하물며 여왕과 시녀 사이에야. 하긴 또 어딘가에 복병이 숨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돈과 몸을 가진, 그러니까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머리도 체력도 우수한 그들이다. 일단 여왕역이 살아남아서 곧 다시 권력을 쥐고, 곧 시녀역을 구한다는 시나리오일까? 시녀께서 그 동안 쓴 시나리오는 상상을 절하니까, 다음 속편을 누가 짐작하랴.
재미없다. 여왕이 스스로 내뱉은 단어라서 사용해보았지만, ‘시녀’ 버전은 여왕의 비인간성마저 드러내는 마중물에 가깝다. 공공의 장에서 직간접적으로 의견을 개진한다는 것은 어렵다 못해 위험한 과제다. 단어 하나하나의 선택이 무심코 던지는 돌멩이가 돼 애꿎은 개구리를 맞추지나 않을까 사려야 한다. 탄핵 전후로 멀쩡한 학벌에 빛나는 지위에 있지만 골 빈 사람들이 내뱉는 사극 버전들은 또 어떻게 이해할까. 세상을 통째로 이해해야 할 의무는 없지만 괴롭다.
손상된 자아가 잉태한 비극
원론적으로 회의가 든다. 친구란 무엇인가. 진정한 친구에게라면 내 생각을 지배하게 내버려둘 수 있는가. 아니, 친구란 그저 함께 걷는 동행일 뿐이다. 함께 걸어서 좋은 동행이다. 오늘 이 순간을 늘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좋은 동행을 만나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허용되지는 않기에 행운이라 부르고 싶다.
다만 자본집중이 가속화되는 이 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인과 맺는 관계는 우리가 어려서 철없이 지냈던, 유불리를 모르던 시절만 못하게 됐다. 마르틴 부버는 그것을 ‘나와 너’의 관계와 ‘나와 그것’의 관계로 구분했는데, 친구를 ‘그것’ 즉 객체화한 이용가치로서 대한다면 진정한 인격적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멀어질 따름이다.
우리가 부지중에 바라게 되는 지고지순의 친구, 염화시중의 관계라 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완전한 평등을 전제로 해야 하리라. 진정한 ‘나와 너’의 관계란 쉽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건 지배 또는 의존관계가 시작되면 자아는 손상을 입게 되고, 손상된 자아는 비극을 잉태한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이 작은 개념, 형체도 없는 것 하나, 왜소한 자아를 유지하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비록 세상살이에 거치적거리더라도 그것만큼은 내어줄 수 없는 마지막의 것, 자아를. 하여 두 건강한 자아가 만나진다면, 비로소 그때 서로를 친구라 부를 수 있으리라. 마음을 나눌 친구 하나를 얻는다는 것은 세상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타인들의 존재를 믿는 첫걸음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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