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25. 3. 1. 12:26


[12월의 말픽션의 언어

 

 

 

 

    12월에는 하루하루 저물어 가는 날을 산다. 상징적으로 그렇다. 상징이 우리를 그런 감정으로 이끈다. 상징을 말하자면 혼돈이 바다에서 태어났다는 태양신 ‘라’부터 떠오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그러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말씀이 먼저였다.

 

    인류는 보도 듣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는 신들을 혹은 신을 우러르면서, 보고 듣고 만지는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신들에 또는 신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는 허구에 기대어 살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먼 오래된 허구가 우리의 구원이었고 구원이다.

    허구, 픽션이라는 말은 사실에 없는 일을 사실처럼 꾸며 만드는 것을 이름한다. 좁게는 소설이나 희곡 따위에서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해 내는 것을 말한다. 창조는 오직 신의 것이다? 포이에르바흐에 기대어 말해보자. ‘신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면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추상화해서 절대적인 존재로 신격화 것, 그것이 인간이 신을 창조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한 창조 행위, 물질적, 비물질적 질료를 이용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사피엔스의 언어적 특성 때문에 가능했다. 단세포 생물로서 바닷속을 떠다니다가 ‘자연선택’에 의해 현재에 이른 생물학적 인간은 초파리와 유전자 70퍼센트 정도를 공유한다. 최근 14만개의 뉴런과 5,000만개 이상의 시냅스로 구성된 초파리의 신경구조를 담은 뇌 지도를 그려낸 연구 결과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어느 시기부터인가 뇌의 특별한 진화로 인해서 놀랍도록 유연하고 독특한 언어적 기능이 생겨났다. 이것은 유발 하라리의 설명이다. 언어가 뒷담화와 수다에 사용되면서 사회적 협력이 발달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없는 것,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 다른 동물들의 언어와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허구를 말하는 능력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허구는 거짓의 영역이 아닌 포이에시스의 영역이다. 비존재로부터 존재로의 모든 움직임의 원인으로서.

    물론 동물들도 언어적 소통에 능하다. 이를테면 사바나 초원의 기린도 말을 한다. ‘얘들아, 사자다! 뛰어, 무조건! 살짝 오른쪽으로! 저 바위 무더기를 넘으면 곧 포도나무 숲이야.’ 매우 실용적인 언어생활이다. 인간의 어른은 아이에게 곧잘 거짓말도 한다. ‘쉿, 거짓말하면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진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수많은 허구를 말한다.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혁명이었다. 신화 종교 문화 나아가서 국가 이데올로기까지. 허구를 말할 수 있는 언어가 해낸 것이 바로 파피루스에 적은 신들의 세계요, 신들에, 신에 대한 온갖 희망적 픽션에 기대어 인류는 현실과 현실의 고통을 그 불합리성을 견디어냈다. 대자연을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세계가 구동하는 힘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어떤 위대한 개념으로 숭상함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 개념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음으로 해서 실체가 아닌 가상으로 존재하는 힘이었다. 그 가상, 즉 픽션의 힘으로 신들을 창조했고, 신들 혹은 신을 숭배하면서 살아왔다. 그리하여 파피루스에 남은 문서들에서부터 발견된 픽션의 언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거쳐 유일신의 질서를 떠받드는 중세에 이르러 어쩌면 단테의 『신곡』(1472)에서 정점을 이루었을 것이다. 단테의 상상력이 녹아든 「지옥」 편과 이를 형상화한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형도〉(1495)만 보더라도 온갖 앞선 허구들이 망라되어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이 픽션의 정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와 정신문화적 변화를 거듭하는 동물이다. 신의 권능이라는 픽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인간들은 이번에는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역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개념을 그 자리에 대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에 문학과 사학과 철학의 흠결들을 말해서 무엇 하리. 오늘날은 해체의 구조마저 해체하기에 남은 것이 없다. 그 다음은? 준비된 것도 없다.

    보르헤스의 단편 「기억의 천재 푸네스」(1942)의 주인공 푸네스가 말한다. ‘내 기억은 쓰레기장이다.’ 한번 들었던 것은 정확하게 반복될 수는 없는데…… 나무가 나무라고 지칭되는 것은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특징을 보편적으로 수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내 손은 정말 내 손일까. 거울에 비칠 때마다 다르게 인식되는데. 이 믿거나 말거나의 픽션, 이것이 보르헤스의 힘이다.

    이러한 전통소설 형식의 파괴 또는 초월은 이미 로베르트 무질에게서도 극점에 이르렀다. 미완성 장편소설 『특성 없는 남자』(1930~1943)에서는 계몽과 합리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대시민계층의 사회가 현대의 대중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병발되는 개인과 사회 사이의 단절이 관심사이다. 가장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 울리히의 ‘가능성 감각’이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좋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가능성,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는’ 감각을 말한다. 정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 어떤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샘 솟아나고 꽃 피어나는 그 무엇으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토피아로 나아간다. 주인공은 작가를 대신하여 생각한다. ‘서사문학의 영원한 비결은 생 그 자체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의 생은 이야기 될 수 없다. 그것이 패러독스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음이, 보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음이 픽션의 힘이다.

 

    인간만이 지닌 가능성 감각, 아직 없는 것을 말하는 픽션은 우리를 살 수 있게 하는, 숨 쉴 수 있게 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어쩌면 살기 위하여 숨을 쉬기 위하여 소설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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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2024년 12월 통권 305호, 10~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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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0. 11. 15. 23:30

[소설시대 18호 권두언]


불모지에서 더 성한 나무, 문학

 

유난히 무덥고 지루했던 장맛비 속의 여름이 갔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벌써 여름을 잊습니다. 잊은 체합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맞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잊은 체하는 어제가 오늘을 결정하기에 우리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디디거나 아예 가슴을 부여안고 주저앉습니다. 밖으로는 씩씩하게 걷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미소까지도 지으며.

이 숙명적인 굴레 - 선택의 오류와 그 결과의 회환에서 오는 결핍의 감정은 그러나 우리들 작가에게는 유일무이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마 신(들)처럼 무오류성의 성질에 인간이 근접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애당초 문학이고 예술이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한 우리의 내면의 충동 뒤에는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한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습니다. 이 동경은 우리들 대부분에 내재해 있는 것이, 인간은 일반적으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감정은 지속적인 상황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하며, 이 결핍은 배고픔과 아픔 같은 육체적 유형일 수도 있지만, 고독이나 권태라는 정신적 ․ 영적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필수적 소여가 아닌,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향한 달랠 길 없는 동경은 아마도 오늘날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위 문화산업의 동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을 생의 단조로움으로부터 기분 전환시키는 일이 수요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로부터의 도주에 있어 그 강도가 격심한 경우는 아마도 작가가 되고야 말 숙명적 요인일까 싶습니다. 때로는 그가 중심에서 너무나 떨어진 곳에 서 있음으로 해서 정상인과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라 해도, 바로 그 비정상적인 격렬한 사고가 이 사회를 자극해서 정신이 들게 하기도 하는, 그 이상한 숙명 말입니다. 그러기에 문학은 오히려 불모지에서 성장합니다. 작가 스스로 어느 중심에 안주하기보다는 경계인이라고 느끼는 동안 더욱 무서운 기세로 중후한 작품들을 내놓는 증거가 세계문학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가까운 예로는 우리의 신문학 운동만 해도 국권피탈의 역경 속에서 폭발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학, 특히 내용적으로 응집력이 있다고 느껴지는 모든 소설은 다음의 세 요소로 약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와 둘의 기본 대립, 예컨대 개인/사회, 시민/예술가, 덕/악덕, 선/악, 자유/부자유, 빈/부, 현세/내세 등을 일컬을 수 있는 대립,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제 3의 요소. 한 소설에서 기본 대립은 적어도 한 사람의 등장인물로부터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으로서 받아들여진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 결핍은 줄거리를 전개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종결 상황에까지 밀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소설은 유일한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으니, 결핍의 지양입니다. 이러한 결핍의 지양을 위한 투쟁이 드라마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해설자/서술자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설의 장르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간접적’ 접근은 이 적극적 시대에 매우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이 소설쓰기가 점점 난항에 부딪힘을 우리 모두 실감합니다. 김현 선생은 언젠가 사물을 해석하는 힘의 뿌리가 욕망이라고 전제하고,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생생해지고 활기 있게 되며, 특히 소설은 그 욕망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적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우선 소설가의 소설 쓰는 욕망마저 그가 구하는 다른 욕망들에 눌려 변질된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 소설가의 욕망, 소설 속의 인물들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실어 참여하는 독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세상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은 고도로 발전하여 독자란 그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인문학 일반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위한 지도적인 힘을 상실해 간다는 염려가 식상할 만큼의 언어로 아우성이면 그럴수록, 그래도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문학이 무엇인가를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정보오락의 시대는 우리가 본래적 의미의 인간성을 기억하며 그저 인간답게 사는 일조차 실로 어렵게 하고 있음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인류가 거대 우주를 품기 위해서라면 우선 그 작은 파편인 이 지구와 먼저 화해하고 섞이는 일부터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쉬이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첨단과학기술을 자연정복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게 하는 데 써야함은 우리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처럼 화석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인류는 몸을 낮추고 키를 줄이며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를 모색해야 합니다. 다만 그 첩경은 무엇보다 우리 몸뚱이[재산]를 부풀리고 무한정 먹어대는[소유] 공룡이 되라고 부추기는 파괴적 세력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힘을 꿈꾸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고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이 불발을 성찰하고 이 결핍을 생채기 나도록 파헤집는 문학, 문학 활동이 인류의 꿈을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자각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어딘가를 향합니다. 어딘가를 향해서인가 용케 우리가 방향키를 잡았다 하더라도 바다는 비웃듯이 늘 풍랑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행여 편한 대양이더라도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잠시, 한시적 삶에 갇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 애써 소용돌이를 만들거나 다시 폭풍우를 호려내고 맙니다. 잔잔함은 뱃사람을 늘보로 만들 것이고, 정지해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한국작가교수회>는 소설 창작과 그 교육에 관한 연구와 정보를 교환하며 후진을 양성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2000년 2월 25일 창립총회를 가지며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온이로 열 살을 먹었습니다. 집필과 강단의 활동으로 온 힘을 소진하는 것, 한 방울의 에너지라도 남아 있다면 잠을 청할 수 없을 정열에 떠는 것 - 우리 한국작가교수회에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 온갖 소여의 현란한 폭풍적인 기세에 맞서는 증거로서 또 한 권의 『소설시대』를 내놓습니다. 늘 그렇듯이 편집을 맡아 무진 애를 쓴 편집위원들께, 그리고 원고청탁에 마다않고 좋은 글들 보내주신 여러분께 진정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미미하게나마 사람들의 가슴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이 책을 펴든 여러분과 함께 꿈꾸렵니다.

 

 

 2010년 때마침 한글날을 기리며,

다시는 ‘언문, 암클, 아햇글’ 등으로 폄하되는 일 없기를,

 ‘그랜드 바겐’을 내놓는 지도층부터 한글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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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