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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2.01 도마뱀 - <문학공간>
  2. 2004.11.04 문학, 상상력의 힘
수필-기고2010. 12. 1. 23:30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입니다.

작가가, 소설가가 작품을 쓰는 일은 일종의 도마뱀 꼬리자르기라고, 한 덜떨어진 소설가가 내게 말했다.

뭡니까?

절체절명의 순간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그 피투성이 기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입니다. 몸통을 살려낸 도마뱀은 꼬리만을 물고 허탈해하는 독사에 대해 승리감을 가질 것이고. 꼬리를 자른 선택에 관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도마뱀에게라면 위기 탈출이 절대적 선택이겠지만.

겠지만? 그 이상입니다. 천적을 만났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건 분명 비장의 무기이고, 예컨대 살모사가 아직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틈을 타 도마뱀은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되었지요. 이제 거기에 그 경험을 잘 다듬어서.

다듬어요? 죽다가 살아온 경험을 쓰면 문학작품이라는 말씀이오?

일단 꼬리 잘린 도마뱀은 특별한 경험을 했고, 그런 처절한 경험이 없는 다른 도마뱀들에 비해. 더구나 잘라진 꼬리는 나중에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까요.

그건 좀 다른 문젭니다, 제 생각엔.

다른?

도마뱀을 노리는 적이 주변에 많을수록 꼬리를 재빨리 자르고 도망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그럼 되었지 뭐 또. 게다가 그것을 가공하여.

그래도 꼬리를 자르는 건 도마뱀에게 큰 부담입니다. 꼬리가 없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그 험한 경험을 작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해도 일단 잡아먹힐 위험이 커집니다. 새 꼬리를 만드는 동안에는 몸통 자체도 자라지 못합니다. 동작도 굼떠지고,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도 떨어집니다. 어차피 소설가의 지위야 꼬리 잘린 도마뱀 수준이지만요. 더구나 이제 그 새 꼬리라는 놈은 더 이상 자를 수가 없답니다.

뭐요? 도마뱀 박사가 따로 없으시군요.

게다가 새로 돋아나는 꼬리는 척추가 아닌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다시는 자르지 못한답니다. 소설 한 권 떴다가도 평생 타작만 내놓는 소설가와 다름없지요. 도마뱀으로서도 평생 꼬리 잘라먹은 놈이라는 꼬리표를 함께 달고 사는 것이겠지요. 새 꼬리는 원래 것보다 색깔도 안 예쁘답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 하겠습니까? 소설작품은 취소하고라도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저는 꼬리 자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꼬리를 조금만 물려도 그게 독사라면 금방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잘라야겠지요, 싹둑.

아니 작가님, 뭐 싹둑 잘라낼 원망 같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따라서 해보는 소립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그 독으로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일부를, 이를테면 마음, 심장, 가슴 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을 잘라내고도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가공하여 작품화하는 강심장을 가질 수 있을지, 그건 꽤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니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입니다.

그냥 죽거나 그것을 쓰거나?

예, 실존과 방법의 갈림길입니다. 삶의 내용인가 글쓰기인가 하는 갈림길.

도마뱀과 갈림길이라. 우린 오늘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군요.

그와 내가 구동성으로 말했다. 그와 나는 늘 하나이면서 둘인, 둘이면서 하나인 도마뱀이다. 왜 쓰지도 안 쓰지도 못하는지 언제나 답을 모른다. (문학공간 2010.12월호 통권 253호 4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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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04. 11. 4. 21:41

, 상상력의 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2004. 11.4.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왜 어른들은 자라는 청소년이 이야기에 빠지는 것을 저어했을까?

아침형 인간이 떠오르는 건전한 세계 속에서

   - 밤새 책을 쓰거나 읽는 비생산적인 인간의 무용성

   - 순수문화 영역의 자생력 상실


궁핍의 시대의 시인들

“어찌하여 시인은 궁핍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 wozu Dichter in dürftiger Zeit? - 횔덜린의 「빵과 포도주」7연

  [직역] 궁핍의 시대에 시인은 무슨 목적/필요가 있는가?

 

화평이 깨어지고 정신이 퇴락하는 시대를 궁핍한 시대라 했고, 그때 시인은 “영웅들이 강심장으로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시인은 차라리 잠을 자고 싶다는, 어떤 행동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인의 곤혹스러운 입장, 다만 성스러운 밤을 떠돌았던 주신 디오니소스의 성스러운 사제들일 것”

이라고 정의. 횔덜린은 사회 변화와 경제 발전에 따른 전통 가치의 와해를 퇴행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회의 도덕적 가치의 재건이 시급하다고 보았다.[복고적]

횔덜린이 추구한 근원적 의지는 생과 자연의 합일이며 영혼의 순수함을 구하는 데 있고, 기독교의

유일신과 그리스의 다신론을 총괄하는 신의 세계이다. 


“이 끝없이 풍요로울 것 같은 세상에서 시인은 얼마나 더 궁핍해야 하는가?”

삶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바로 궁핍.

인간에게서 조화의 감정은 지속이 아니다. 부단히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1904년 - 100년 전에 비해 우리는 분명 잘 살고 있다.

가히 전무후무한 풍요의 시대, 빈곤으로부터 상대적인 해방, 진정으로 잘 살고 있는가?

얼핏 보아서 개인과 사회의 욕망은 오래 전에 비인문적 방향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 같다.

무한의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로서의 인간은 한계 앞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하고

-- 범세계적으로 인문주의 정신의 부활을 논하는 것. 인간의 자기치유 능력?


왜 쓰는가?

조정래 - 자본주의의 자기 최면 속,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적으로 가치있는 삶을 쓴다.

          문학성: 감동, 영혼의 떨림. 민족통일에 문학이 기여할 수 있다.

서정인 -  세상은 혼돈 … 캄캄한 미로 벗어나기 위해 쓴다.

“나는 지금도 욕심이 목에까지 꽉 차서 동서남북 천지현황을 모른다. 이 세상은 나에게 혼돈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결코 그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거기에 분명히 있을 원칙도 질서도

정의도 볼 수 없다. 한 사건과 딴 사건 사이의 관계가 내게는 안 보인다. 틀림없이 별들의

운행처럼 필연일 많은 일들이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이다.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과

같다.”


카프카: 갑충으로 변한 현대인의 자화상.

「단식 광대」(1924): 단식하는 광대에서 예술의 정신성, 비생산성, 인간의 무능력.


괴테 『파우스트』:

인간으로서 모든 한계를 지닌 자,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절대적 진리”를 찾아...

“파우스트적 충동” : 다양한 인생을 편력, 체험하면서 자기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 대하려는

 충동. 영원의 여성에 의해 이상의 궁극으로 향상하려는 욕망.
 집필원칙: “모순들을 통합하는 대신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겠다.”


독서의 나라 동독

- 괴테에게로 전진 Vorwärts zu Goethe!(J. Becher)

-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에게 진리에 충실하고, 현실의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표현을

  그 혁명적 발전 속에서 하도록 요구, 노동자들의 이념적인 변형을 위한 기여와 이들을

  사회주의의 궤도 속에서 교육해야 하는 과업을 함께.

- 문화연맹 / 국민 Nation 개념, 사회주의적 독일 국민문화 Nationalkultur

- 형식주의 반대운동: Inhalt, Idee, Gedanke 중시

                     데카당스, 세계시민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 형식주의 거부

- SED 인민재판: 모더니즘, 회의주의,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자유주의, 외설 추방


① 패러다임의 변화

- 테마도 아닌 테마 Un-Thema 서방 도주, 자살기도 : Ch. Wolf

- 의미내용, 서술방식에서 무정부주의 요구: F. R. Fries

- 예술의 자율성 요구: G. Kunert

- 시의 실험적 성격을 고집하면서, 신경제체제의 문화정책에서 요구했던 직접적인 사회적

   유용성에 거부하는 자세: V. Braun


*고전주의, 특히 괴테의 상을 반대, 특히 낭만주의자들에게로 방향 선회 →패러다임의 변화

- 신화수용 변화: 아폴론, 아프로디테, 프로메테우스, 헤라클레스

                → 마르시아스와 오르페우스, 다이달로스, 이카루스, 카산드라, 니오베...

- 다른 해석:

『필록테투스』 H. Müller (58년에서 64년 사이에 집필, 77년에야 동독에서 상연됨)

오디세우스를 영웅도 명장도 아닌, 거짓 술수에 능한 마키아벨리 같은 현실정치가로서 그려냄

으로써, 스탈린주의에서 정점을 이룬 공산주의의 실제 역사를 전술과 테러의 역사로, 휴머니즘의

몰락에 대한 암호로

『카산드라 Kassandra』Ch. Wolf (1983)

그리스 문명의 남성적, 전투적, 합목적적 성격 고발.

“카산드라의 운명은 그 후 삼천년간 여성들에게 일어날 것을 미리 마련하고 있다. 즉 여인은

 대상으로 되고 만다는 것... 여성들의 내면적 역사는 자율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② 상상력/환상을 권좌로!

70년대 문학의 구호: “상상력을 권좌로! Phantasie an die Macht!”

     남성지배, 폭력, 전쟁, 오로지 기술적 합리성에서 나온 공포의 연합에 대항하여,

     생생한 상상력과 비유적 사고의 새로운 결실들이 등장 한 것.


“삶의 무한정 뒤얽힌 평면”(Musil)인 사회의 실제적 조직관계 속으로 들어온 문학 -

유일하게 유용하고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이라고 주장하는 도구적 이성의 독재에 대한 저항.

일차적인, 이미 규정된 현실 →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로 설정

(Adorno)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Bloch): 다른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가없다.


가능성감각

“가능성감각이란 마찬가지로 좋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가능성감각, 존재하는 것을 존재

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는 것.”  “정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 어떤 결론

에도 도달하지 않는, 샘솟아나고 꽃피어나는 그 무엇으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간다.”(Musil)


전면만을 그린 그림에서 나무 전체를, 아예 푸르름으로만 그려진 화폭에서 숲 전체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을,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는 바위와 돌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게

하는 것 - 상상력

기록된 숲 - 비문학

 

※ 독일의 (철저)자연주의는 “하나의 막간극 (H. Bahr)

“최초의 현대 modern” 또는 “문학 혁명”

종족, 환경, 계기가 예술작품을 결정한다.(Taine)

3E: 타고난 천성이란 상속된 것, 교육이란 학습된 것, 생활이란 체험된 것(Scherer)

인간 역시 물질적, 육체적인 현상이므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은 생리적으로 이해

      →“신경과민의 낭만주의, 신경의 신비주의에 의해서 자연주의 극복"(Bahr, 1891)

          비일상적인 것, 비밀스러운, 매직, 경이로운 것 등장. 

 

문학이란 실증될 수 없었던 것,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듯이 구상하는 것. 허구 또는

가구(架構). 픽션은 흔히 산문으로 된 소설·이야기 등. 작가는 대상을 보고 분석하는데, 원칙적

으로는 그 중에서 우연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한편 문학의 개연성이나 논리성을 강조하는 견해. 철학과 문화 즉 과학과 문학을 구별하여 시의

독자성을 제시했을 때에도, 문학은 진실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가는 사실을 진실로서 기술

하지만) 시인은 진실처럼 보이게 모방한다. 소설이 사회의 거울이요 시대의 그림이라 하여 대상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이론: 현실과 시대의 반영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 소설이 현실의 복사이거나

시대의 기록일 수는 없다.

 

독자 여러분! 소설이란 큰 길을 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비치는 거울이라 볼 수 없을까. 여러분은

거울 속에서 푸른 하늘이라든가 혹은 진흙탕 등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런 거울을 들고

니는 사람들은 여러분으로부터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거울은 진흙탕을 비친다.

그래서 여러분은 거울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라리 진흙탕이 된 한길을 비난해야,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진흙탕 그래도 내버려둔 도로 감독을 비난해야 마땅하다.  --  스땅달


소설은 진흙탕이라는 사실(fact) 그 자체가 아닌, 인간성의 진실(truth)을 그리는 것이 목적.

리얼리티(실재성)는 실은 논리성이고 논리성으로 하여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작품은 설득

력이 있고, 만들어진 가공의 세계이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작품, 상상의 세계

실재성은 작품의 존재가치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것의 작가가 창조해낸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상상의 세계일뿐이다. 상상의 세계, 즉 작가에 의해 해석된 세계에는 그 밑바닥에 욕망(꿈)

이 자리한다. 현실 원칙에 억압받은 내면의 욕망은 창작할 때 작용을 한다. 외부의 현실세계와

내부의 욕망과의 갈등의 폭에 따라서 순응적 혹은 혁명적 세계가 창조된다.

 

소설 속에는 세 개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하나는 소설가의 욕망이다. 소설가의 욕망은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욕망이다. 자기 욕망의 소리에 따라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고 소설가는

애를 쓴다. 두 번째의 욕망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욕망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 역시 소설가의

욕망에 따라, 혹은 그 욕망에 반대하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하려 한다. 주인공, 아니 인물들의 욕망은 서로 부딪쳐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의 욕망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욕망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슨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나아가 소설가의 욕망까지를 느낀다.

독자의 무의식적인 욕망은 그 욕망들과 부딪쳐,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부인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부인하기도 하고,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빠져 그들을 모방하려 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모방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 자기가 세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려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 괴로움은 나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왜 즐거워하는가, 그 즐거움에 나도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들을

따지는 것이 독자가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이다.

그 질문은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이 세계의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다. 그 질문을 통해, 여기 내 욕망이 만든 세계가 있다는 소설가의

존재론(存在論)이,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하는 읽는 사람의 윤리학과 겹쳐진다.

소설은 소설가의 욕망의 존재론이 읽는 사람의 욕망의 윤리학과 만나는 자리이다.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한다. 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 김현 『분석과 해석.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중에서

                           김현문학전집 제7권, 문학과 지성사, 1993년.

 

 상상력

여기에서 이 가공의 세계, 다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주는 것”.

상상력은 Imagenation 그리스어 Fantasia와 관련. 공상 Fancy에서 유래, 공상이 곧 상상력은

아니다. 예술적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이다.(Coleridge) 일상적인 인식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차원으로 승화된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 예술적

독립은 콜리지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중요한 주장. 이 독립된 세계, 제 2의 세계는 그러니까

상상력이 창조한 세계.


상상력: “의식의 개념과 지각을 매개하는 작용”[사전적]

의식이 대상을 개념적으로 취하는 작용/ 지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 사이 매개 작용(Sartre)

‘비실재물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가까이 끌어당기는 능력 * 가능성감각


칸트: ‘아름다움’,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다양한 표상들을 만들어내도록

상상력을 촉발함으로써 주관으로 하여금 연상법칙들에서 풀려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표상들, 즉 미적 이념(asthetische Idee)은 특정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지니게 되고, 주관은 그러한 표상들을 통해 “언표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미전개된”

방식으로지만 사유하면서 인식능력의 활기를 얻는다.[판단력비판]


사르트르:- 상상력의 본질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고 함으로써 현실에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의식에서 보충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선험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확장?

“아시아의 별 보아”의 인터뷰:

여가 시간에 “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냉정과 열정 사이』, 『향수』

학교라는 울타리 바깥에도 공부할 것이 정말 많았다고,

소설책과 영화는 학교 이외에서 배우는 것....

학교는 상상력을 죽이는 곳이라고 하는 역설이 가능?


마녀의 이야기

인류가 가진 신화와 모든 문학작품을 통틀어서 최고의 악녀로 각인된 메데이아 이야기 -

Euripides: Medea

Obid: Medea (분실)

Seneca: Medea

Pierre Corneille: Medée  (1634~5)

Franz Grillparzer: Medea (1821)

Hans Henny Jahnn: Medea (1926, 1959)

Jean Anouilh: Médée (1821)

Christa Wolf: Medea: Stimmen (1996)

Heiner Müller: Verkommenes Ufer. Medeamaterial. Landschaft mit Argonauten


메데이아 신화:

가을하늘에 반짝이는 별자리, 양자리가 생긴 신화에서부터 시작. 황금 양피를 가진 숫양은

테살리아의 왕자 프릭소스를 흑해변의 코르키스까지 도피시켰고, 프릭소스는 제우스 신전에

양을 바쳤고, 제우스는 양을 기리고자 양자리를 만들었고, 황금양피는 코르키스의 왕에게

선물로. 왕은 황금양피를 신성한 숲 속에서 잠을 모르는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을 만큼의

보물이었는데....

테살리아의 이웃 이올코스의 왕 펠리아스는 적통의 이아손이 왕위의 반환을 요구하게 되자,

황금 양피를 찾아오라는 영광스러운 모험을 권유했고, 이 제안에 따라 유명한 아르고호의

용사들이 신화에 등장. 50여명의 대선단의 무용담은 간담을 서늘하게. 코르키스에 당도하여

황금 양피의 반환을 요구하는 이아손에게는 다시 엄청난 시험이. 그러나 마력을 지닌 공주

메데이아 - 우리의 낙랑공주처럼 - 의 도움으로 이아손은 황금양피를 찾아 고향으로.

이 과정에서 메데아의 동생살해라는 악명이 시작된다.

이올코스에서도 비극: 원정 동안 일가족이 모두 죽은 것을 알게 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

으로 왕에게 복수. 펠리아스가 죽은 뒤 이아손은 아버지의 왕국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펠리아스의 아들 아카스토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코린토스로 망명의 길: 이아손과 크레온 왕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메데이아의 유명한 복수가 시작된다. 그 결혼을 저지시키고자 크레온과

글라우케 모녀를 불태워 죽이고, 이아손에 대한 복수로(?) 둘 사이 태어난 자식들까지 죽인 후,

날개가 달린 용(뱀)이 끄는 수레를 타고 아테네로 도망쳤다는.


에우리피데스: 흔히 민주적 시민 사회라고 알려진 폴리스에서 행해진 사회적 차별, 즉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구분은 물론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서도 존재했던 차별을 드러내

준다. 차별이 원한이 되어 복수의 회신이 된다.(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

세네카: 스토아 철학자로서 세네카가 가졌던 여성 일반에 대한 인식?

당시 로마 사회의 분위기가 여권 옹호의 풍토와는 거리가 있었는지?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으로 그리스 반도의 이올코스에서 군주 살해까지 저지르고 피신한

정치적 곤혹성, 이방인과의 결혼의 합법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자신의 딸을 이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그리스인 이아손의 목숨을

보전하는 한편,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 메데이아를 추방한다.

꼬르네이유: 1630년대의 파리 무대에서는 잔혹한 장면이 다수 등장, 꼬르네이유는 세네카

류의 잔혹 비극(tragédie de la cruauté) 시도. 여성 옹호적인 메시지가 없고, 이후 발표되는

꼬르네이유 비극의 일반적 경향이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으로, 감정에 대하여 이성을

중시하는 남성적, 극기주의를 강조하는 영웅주의를 옹호.


아버지를 배신, 사랑을 택했던 메데이아는 그 사랑의 배신 때문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제

아들들을 살해하여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 이 이야기는 많은 허구에 의해서 덮여 있다

하더라도 그 근저에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믿게 하는 이유를 가짐.

신화들의 매력은 “전혀 다른 환경 하에서 같은 것들이 되풀이된다는 것. 그럼으로써 역시

같은 것의 되풀이가 아주 다른 것으로 된다는 점.” (H. Müller)

신화의 가공작업에서는 배제되고 청산되지 못한, 단지 미뤄지기만 한 상처의 회귀가 표명

된다.(Hans Blumenberg)

       지상의 행복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그림자!

       지상의 명성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꿈!

       그림자를 꿈꾸었던 너 가엾은 자여!

       꿈은 사라졌노라. 밤만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Was ist der Erde Glück? - Schatten!

Was ist der Erde Ruhm? - Ein Traum!

Du Armer! der von Schatten du geträumt!

Der Traum ist aus, allein die Nacht noch nicht. 

                                         -- Grillparzer


비더마이어의 염세주의적 사상, 바로크 시대의 현세거부를 연상하게.

그러나 부단히 꿈을 쫒는 인간족속의 운명은 오늘 날에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하인리히 뵐은 현대사회를 “소비가 자유를 주노라”는 현판을 내건 거대한 수용소에 비유.

경쟁적으로 성취업적을 만들어 내야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 창살 없는 감옥?

“인간은, 이 말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인간일 때에만 놀 수 있으며, 놀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Schiller)

그리고 통독 이후에도 계속되는 악녀 메데이아 소재의 작품들 - 크리스타 볼프는 아예

메데이아의 혈육살애, 군주살해, 이어지는 자식살해 등을 ‘뼈를 깍는 아픔의’ 정치적 사회적

희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시대에 따라 작가 자신의 시대적 문제점에 따라 같은 신화를 재해석해내는 것 - 여기에,

작가의 욕망은 사회적 산물이며, 그렇다면 상상력의 무궁한 힘이라는 것도 욕망의 사회적

필요요, 토로하고자하는 그 내면에 의존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이른다.

무엇이 결핍되었는가?


결핍의 토로

그래서 문학을 보는 표현론적 관점의 출발은, 문학이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창조적으로

표현한다는 입장. 한편의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의 구현. 이것은 문학을, 한편의 시를

거울이라고 보는 모방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시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등불이 된다.

- 시인이란 신령한 힘에 접신된 상태에서 말하는, 시를 토해내는 것이다. (플라톤)

- 우주의 근본적 창조 정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예술이다. (Schelling)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가? 그의 내면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창조적 개성, 독창성 등의 자유분방한 낭만주의와 더불어 다른 한편 민족의식, 사회의식이

성장했다. 문학을 한 시대의 정신과 한 민족의 성격을 표현하는 가장 뚜렷하고도 특출한

산물로 생각하여 문학의 사회 표현성이 강조됨. 개인이건 민족이건, 결핍에 반응하는 태도,

그것이 정신의 반영이라는 부분. 최소한 문제적 개인의 자기실현. 인간의 내면이 상상력으로

확장되어 반영된 것. 상상력의 진정한 힘은 인간의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

내면이 깊을수록 상상력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될 것.

-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Heidegger)

 

한국문학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何)오」(1917) :

“특정한 형식 하에 인(人)의 사상과 감정을 발표한 자”

“문학은 정(情)의 기초 상에 입(立)하였나니...”


리터래처 - 하면 학문과 문장력을 의미했듯이, 글월文 - 하면 한문을 연상했던 전통.

영어의 novel이나 불어의 roman과 같은, 근대문학의 한 양식으로서의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나 당대의 이야기나 작자가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야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작자가 전제되며, 작자가 없는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


내면의 교감

특히 우리의 근대문학이란 내면을 근거로 해서 예술적 가치를 주장. 엄정한 시학의 규칙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진자운동과도 같은 시간들을 통해서 형성된 서양문학에 비해,

20세기 초 모든 사조를 한꺼번에 경험한 우리의 경우 문학은 정적이고 내적인 인간을 발견

함으로써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문학에서 개인: 고유한 사연과 정신을 간직한 존재,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드러내는 존재

문학에서라면 누군가와 완전한 교감을? 내면을 노출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의 결핍과 외향적인 현실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에서는 보도와 평가를 위한 글쓰기에서처럼 이성의 논리가 중요

하지 않다. 이해와 공감을 꾀하는 문학의 글쓰기는 내면의 토로에서 비롯된다. 자신조차도

공감하기 어려운 내면을 있을 수 있는 개연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우연과 혼돈을 필연성으로 대체해서 제공하므로, 작품세계는 진정한 현실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외면세계의 고통은 내면세계를 더욱 깊어지게 할 것이다. 이 내면을 끌어내는 것,

그것은 상상력의 힘으로서만 가능하다. 문학의 현상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인생 또한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확산된 저 너머 유토피아를 꿈꿀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를 읽는가?

언론의 자유, 결사에 관한 법, 선거조사의 문제 대신 “먹고 사는 빵문제”를 거론했던 뷔히너를,

감히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 근로․채식·금주·금연을 표방하고

간소한 생활의 영위와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를 지향했던 톨스토이를,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집단에 참가하여 러시아정교회 비판에 동참했다가 총살형을 언도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를,

노골적인 묘사 때문에 풍속문란죄로 기소되었던 플로베르를,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재심파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에밀 졸라를 - 하필 그들을 우리는 읽는다.

예술가의, 글쓰는 이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문학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더 이상 우리의 깊은 내면의 샘을

퍼 올리지 못할 때, 그때가 파국이다. 문학의 파국 - 우리를 꿈꾸게 하는, 다른 상황을 상상하는

문학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만의 현실은 우리를 질식하게 하거나 기계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문학을 놓지 마시오. 읽건 쓰건, 그 차이는 그림자를

앞에 두는가 뒤에 두는가 그 차이일 뿐이다. 


무용지용

우리가 문학을 여전히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 중의 하나로 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망이다.

이때 행여 우리는 문학의 효용성 논란에 풀이 죽어서는 안된다. 고띠에 등의 예술지상주의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쓸데 있고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을

성현의 말들을 빌어서 하고 싶을 뿐이다. 노자 제 11장의 무용(無用)은 말해준다. “있는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고. 장자는 혜자에게, “땅이라는 것은 턱없이

넓고 크지만 사람이 걸을 때 소용되는 곳이란 기껏해야 발이 닿는 지면뿐이요,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재어 가지고 그 둘레를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 버린다면 사람들에게 그래도

쓸모가 있겠소?”라고 했다.


디디고 선 땅을 디디고 설 수 있기 위해 무수한 땅이 필요하듯이, 우리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 없이는 현실의 삶을 ‘아마도’ 살아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밥 먹여 주지 않으므로 쓸모없는 이야기여!

세상에 쓸모있는 것들로 하여금 조금만 부끄럽게 하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