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지루한 장맛비 사이로 한줄기 태양이 스민다. 후줄근한 땀이 베이는 오후, 강의실 창밖으로 푸르다 못해 검은 느티나무 잎들이 너울거린다. 벌써 만하인가.
베를린 다음은 어디에서 서성이는 것일까.
그에게서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 무소식이 늘 희소식일까. 어느 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내게 보낼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린다. 한 동안 내가 그 자료들에 매달려 글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도 의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정리할 과제물이 없어진 상태에서, 난 할 일이 없어진 금단현상을 겪었다. 전공논문은 접은 지 한참 되었다. 다시 그리로 돌아갈 여력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렇게는 뭔가 잘 못되었다고 느껴질 무렵 언어교육원에서 벽보를 보았다. 한국어 -
한국어가 무엇인지를 아는 한국인은 별로 많지 않다. 언교원에서 더러 한국어 강사들과 목례를 하고 지냈으면서도 왜 그들이 ‘한국어’ 교원인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한국어는 우리가 쓰는 언어의 객관적 명칭이란다. 우리들의 나라말 ‘국어’를 외국인들이 배우면 그들에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이다. 이 간단한 사실에도 무관심한 것이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한국어는 내게 또 하나의 도피처가 되었다. 반짝 새로운 문을 가리키는 팻말이었다. 넋 놓고 그에게서 자료들이 오기를 기다리느니, 글 쓰는 형식에 다가가자! 글을 읽을 만하게 쓰고 싶었던 감춰진 욕망이 전기 스위치처럼 켜졌다. 한국인이 수강할 수 있는 한국어강의는 한 가지뿐이다.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 등록하기.
그날, 모니터 화면 앞에서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복잡한 마음이 일었다. 자발적으로 심문관 앞에 불려나가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자기소개서의 내용이었다. 단 두 개의 질문이 있었는데, 기대했던 ‘왜 한국어 교사가 되고 싶습니까?’에 앞서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선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엉뚱한 놈이 A4 반 장 크기로 버티고 있었다.
살면서 행한 선한 일? 그것도 가장 선한 일?
그런 빈 칸을 메우려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은 선한 일을 떠올려야 한다. 최상급 ‘가장’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어교사가 되는 일에 선한 일은? 자격증을 출원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교사양성과정 공부하겠다는데 선행 경력을 쓰라고?
괜히 심통이 난다. 휑하니 화면을 바꾸어 <배달민족> 파일을 연다.
…… 한번 흘린 비밀은 쏟아진 물이나 같으니까. 움켜쥔 손이 아프면 그는 또 놓을 것이다. 나는 가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흘려놓은 물에 덩달아 적시어진 채로.
마지막 단어 ‘채로’에 커서가 머물러 있다. 나는 거기 그렇게 정지해 있다. 그는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킨 것인가. 물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보내기 시작했을 때에도 내게 어떤 일을 주문한 적은 없다. 범인은 나다. 스스로에게 덫을 씌운 것은 나였다.
‘편집-찾기’ 메뉴에서 ‘배승한’을 따라가 본다. 그는 다만 파일 안에 등장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안도한다. 그는 적어도 내 파일 속에는 존재한다. 아주 사라질 리가 없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읽을 만하게 잘 써내기 위해서라도 국어공부를 해야 한다. 국어이든, 한국어이든, 무슨 상관이랴.
다시 한국어교사양성과정 지원서로 돌아갔다. 눈을 질끈 감고 역설을 쓰기 시작했다.
1. 살면서 한 일 중 가장 선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 나는 그런 일을 해 본 것 같지가 않습니다. 1970년대 서울 근교 태생의 여자아이가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공부했고 유학 생활 동안에도 삶은 늘 경쟁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받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 오직 지적인 생활을 동경하면서 프랑스에 처박힌 동안 - 여기는 재빨리 고쳐 썼다. 컴퓨터는 고쳐 쓰기 따위 기적과 같은 기능을 밥 먹듯이 가능하게 한다. - 프랑스 체제동안에도 늘 무엇인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고,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 여기에서 정말 막혔다. 거짓말 좀 하자. 너스레 좀 떨자. 너, 문학박사! 인문학이 뭐냐. 세 치 혀, 입 잘 놀리는 학문 아니더냐. - 적어도 공동생활에서 공평했고, 강사생활 근 십년에도 알찬 수업준비와 칼끝처럼 정직한 성적관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굳이 선행이라고는…….
눈 딱 감고 적당히 마무리를 썼다. 2번 질문, 왜 한국어 교사가 되려느냐 따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써내려가는 동안 내가 정말 한국어교사가 되려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만큼 심취해서 썼다는 말이다. 그의 메모를 이야기로 옮기는 지난 한 해 동안 감정이입 능력이 발달했나 보다. 나는 정말 한국어교사가 되려는 심정으로 나머지 서류들을 준비해서 한국어교원양성과정에 등록했다.
그 렇게 해서 강의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학생 자리에서.
스터디 룸펜
6월 중순에 시작된 강의는 8월 초순까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과정은 A4 400쪽이 넘은 복사 교재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수료 기준’이라는 유인물에는 과정 전체 42회 중 34회 이상 출석, 종합점수 평균 60점 이상인 자에 한해 수료할 수 있다는 주의사항 등이 빼곡하다. 수료 후에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동기생들과 스터디를 계속하라는 권장사항도 친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동기생? 얼핏 둘러보니 천차만별의 집합이었다. 풋내기 대학생들과 함께 어디에선가 정년을 했음직한 어른들도 눈에 들어왔다. 성별은 여자가 두 배는 되어 보였다.
하필 첫 시간이 <음성학>이었다. 수강생들은 묻지 마 전공자들로 모두 섞여 있는데, 이런 전문성이 가당키나 한가.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에 음운이 몇 개나 됩니까? 최소대립쌍에서 음운을 판별합니다. 동과 통. 여기에서 ㄷ과 ㅌ의 다름을 알아내는 것이지요. 기역, 니은…… 자음은 몇인가요?
수강생들은 멍하다. 생각보다 더 멍하니 강사를 올려다보고 있다. 누구 하나 기역, 니은…… 하고 세어서 대답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이에 강사가 계속한다.
제가 너무 갑자기 질문했나요? 열아홉 개죠. 그리고 단모음이 열 개. 소리는 있지만 문자는 없는 반모음도 있지요. ‘오기’에서 ‘요기’를 만드는 음.
가나다라는 열네 줄인데……. 열아홉이면 쌍기역 등을 합한 것이구나. 그럼 복모음은 왜 빼고? 다 합치면 몇인가? 바둑아, 바둑아 이리와, 나하고 놀자. 철수야, 가자. 영이야, 가자. 이렇게 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우리 세대만해도 음성이란 자연적인 산물인 줄로만 알았다. 무식함에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혼란스러운데, 강사는 여자 목소리로선 우렁찬 목소리에 달변이다.
자, 먼저 자음의 발성에서 시작하죠. 기동과 발성과 조음의 과정을 거쳐서 자음소리가 나옵니다. 조음위치에 따라…… 왜 거, 훈민정음에서부터 아․설․순․치․후 아닙니까? 조음방법에 따라서 나누면 파열음, 마찰음…… 또. 마찰음엔 귀신들이 좋아하는 소리가 있죠. 이힛, 흐, ‘ㅎ’말예요!
그리고 아무렇게나 쓱싹 칠판에 자음 도표를 그린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휙휙 그려대는 손. 이제 사람들은 강사를 거의 우러른다.
제가 좀 빨랐나요? 아무튼 자음에서는 ‘ㅂ,ㄷ,ㄱ’ 곱하기 3만 알면 거의 다 아는 거죠. ‘ㅂ’소리가 ‘ㅃ’ 또는 ‘ㅍ’로 경음 또는 유기음이 되는 현상 말입니다. 자, 같이 해보실까요? 손바닥을 입 5cm 앞에 두세요. 소리 내어 보세요. ‘ㅃ’소리를 내려면 후두가 긴장되지만 기는 없죠. 하지만 ‘ㅍ’의 경우에는 기식이 많아져요. 자, 해보세요. 불, 뿔, 풀. 불이 났어요. 뿔이 났어요. 풀이 났어요. 조음위치가 같은 파열음의 경우에도 이런 차이가…… 괜찮은가요?
알아듣기나 하느냐고 묻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 휴식 시간이 되었다. 물을 홀짝거리던 강사의 눈빛이 내게 머무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라도 한두 번 스쳐지나간 얼굴인 모양이다. 출석부를 훑어보는 모양새가 내 이름을 확인하려는 듯싶었다. 그냥 자수하기로 했다.
김 선생님. 저, 한금실입니다, 프랑스어.
아 네, 설마 했는데. 그래도 벌써 알아봤어요. 그런데 어떻게 여길?
좀 웃기죠. 저 그냥 국어공부가 좀 하고 싶어서. 새삼 국문과 대학원으로 진학하긴 너무 무겁고.
한샘, 이거 한국어. 한국어는 국어랑.
아, 압니다. 다르게 부르는 것 알지만 저한테는 국어공붑니다. 첫 시간부터 맹타 당했는걸요. 실은, 수강생들 모두가 그렇겠지만, 국어학개론 쯤을 기대했습니다. 교재를 막 받아들자마자, 아니 아직 목차도 채 들여다보기 전에 음운론이라니. 지레 겁먹고 도망치고 싶어지는데요.
한샘도. 별거 아녜요. 원래 개론이 첫 시간에 잡혀요, 헌데 그 강사 샘이 다른 스케줄로.
예, 뭐 그럴 수도. 암튼 화들짝 정신 나는군요.
한샘, 그래도 어떻게 한국어를 등록할 생각을?
그냥. 지금 딱히 하는 일도 없고요. 여전히 스터디 룸펜이라.
자조적이시기는. 실은 이 길도 아직 개척단계라서 전망이…….
전망은 무슨.
첫 시간에 혼쭐이 난 수강생들은 꽁꽁 얼어 보였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서는 맘을 빼곡히 열고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았다. 다시 경쟁자들을 만난 것인가? 한국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이다. 준비성이 강하다. 사람들이 슬슬 그룹이 되어 나타났다. 가을에 있을 자격시험에 도전하는 일. 가만 보니 중간 보다는 젊거나 나이 든 이분적 집단이었다. 정말 스터디 룸펜족도 끼어 있다. 연령제한에 걸려 기업체 입사를 놓쳤거나, 미래가 불투명한 직장을 집어치우고 홀로서기를 꿈꾸거나…… 설마, 국어과 자격증을 가지고서도 임용이 안 된 예비교사도 있었다. 그 둘은 강의 도중에 강사들이 가끔 내던지는 질문에 척척 답을 해서 우리 다른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나이든 쪽이 더 확실한 사정들이 있었다. 정년 후 삶의 무대를 근동 외국으로 옮길 꿈이 있기도 했고, 오지의 선교사로 나가서 벌써 한국어 강의를 벌여놓은 분도 있었다. 그런 경우는 자격취득이 현지 한국어학원의 신분승격에 필수적이라서 자격증에 도전한다고 했다.
평생의 직업을 예상하고 온 젊은 그룹에도, 노후의 종교 활동이나 보람 있는 투자와도 무관한 나는 어정쩡했다. 분류되지 않는 회색분자였다. 그래도 양쪽 그룹 모두에서 세 확장의 의미로 러브콜이 있었다. 난 젊지 않은 쪽으로 끌렸다.
가을은 참 심란했다. 8월에 강의 일정이 끝나는 우리로서는 10월초 자격시험까지 최소한의 유예뿐이다. 한다는 대학마다 이런 수료생들을 일 년에 4회 배출해 내는데, 여름 수료생들의 공부기간이 가장 짧을 밖에. 더구나 설 명절보다는 추석을 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방식 때문에 추석명절은 결정적으로 공부시간을 고스란히 삼켜버렸다.
추석 중심 - 별 것은 아니었다. 벌초에서 차례와 성묘까지 일습을 고향에서 함께 보내자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셨다. 설에는 교통사정도 모를 일이고! 이건 막내가 먼데서 사는 이유를 아버지가 감안하시기로 한 때문이다. 단순히 비행기여행에 기상상태가 미치는 영향 때문만은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안다. 막내는 본격 기독교문화권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면 남편의 고향집으로 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막내가 온다면 언제가 되더라도 추석쯤에나 가능하다. 딸 셋 중 ‘제대로’ 결혼해서 본 둘째(?)사위 얼굴 때문에라도 나더러는 꼭 참석하길 바라신다. 둘째가 결혼을 했을 때 좀 우스운 일이 벌어졌었다. 둘째 딸 신랑이니 둘째 사위가 맞긴 맞는데, 집안에서 처음 보는 사위니까 말이었다. 결국 유일한 사위노릇을 하고 있는 제부가 장인어른 모시고 처갓집 벌초를 도맡는다. 서울에 나가 사는 것도 아니고 근거리에 살면서.
언니, 이거 다 뭐야. 아부지가 또 미안 닦음 하라셨어?
아니거든.
내가 오히려 미안해. 어무니아부지 사랑 나 혼자 다 누리고 살잖아.
네가 복 받게 하지. 너 아님 우린 얼마나 더 죄송하겠어. 더구나 이번엔 내가 시간이 너무 없어서 애기 뭐 사러 갈 틈이 없었거든.
그래 놓고 추석날 차례가 끝나자마자 다시 내 굴속으로 돌아왔다. 스터디 그룹은 거의 비상이었다. 저녁으로만 함께 시간이 나서 대학가 공부방을 빌려서 모였는데, 각자 맡은 부분을 요약해서 ‘강의’하는 수준이 요구되었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학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학, 언어교육론, 거기에 한국문화론이 추가되었다. 한국어학 분야에서 맡았던 ‘조사’만 해도 40쪽 분량이 가도 가도 새로운 정보였다. ‘한국어의 역사’에서는 예컨대 신라어의 특징을 어떻게 공부한단 말인가. 또 무엇 하러?
아니, 시험 준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몇 달 사이에 수험생이 되어버린 기분은 뭔가에 코를 꿰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편한 시간이었다. 코앞에 과제가 있어서 마음속의 일 쏠림을 잠재웠으니까. 미완성 이야기에 대한 그리움을.
기본적인 과목들을 함께 섭렵하고서도 한국문화라는 미지의 숲을 헤매는 동안 9월이 갔다. 10월 첫 일요일, 무슨 공단 지부에 출석해서 하루 종일 시험을 치렀다. OMR 카드에 수험번호 작성부터 엇나가는 손으로 200 문항에 가까운 문제를 풀어야 했다. 확실히 알고서 쓴 문제가 없다시피 했다. 처음 대여섯 문제를 일사천리로 풀고 나서, 자음이 다양한 조음 ‘방법’으로 발음이 되는 단어 고르기에서부터 막혔던 기억뿐이었다. 조음 ‘위치’를 두고 찾으려 했다니, 기본도 안 된 수험생이었다. 막혔던 문제에서 시간을 다 허비하고서는 뒷부분 절반은 지문을 겨우 읽을까 말까 4선지 내용을 채 변별해서 읽을 시간도 없었다. 자살골과 같은 오답들로, 답안 표시는 언감생심. 만 24시간 뒤에 모범답안 발표가 인터넷에 떴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맞춰 볼 수 있는 내 답이 없었다. 스터디 그룹 사람들의 ‘처참한’ 소식에 나도 덩달아 움츠러들었다.
구겨졌다. 이제는 공부도 안 되는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남은 것 같지 않았다. 10월 한 달을 두 손 놓고 지내는 동안 다시 기다림이 꿈틀거리고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도 원고정리를 계속한다면 이제는 실력이 분명 나아졌으리라는 희망이 들었다. 정말 뭔가를 써보고 싶었다.
11월 초가 되어 정작 발표 날에는 다른 스터디 그룹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놀리는 줄 알았다. 2차 면접시험 준비는 각각 혼자의 싸움이 되었다. 누가 도와 줄 수가 없는 성격이다. 난 실은 말을 잘 하지 못하면서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 전날이면 무진장 준비를 한다. 말할 내용을 거의 다 써서 프린트를 하고, 조금 필요한 양념으로서의 농담까지를 특정 부분에 표시해 놓는다. 물론 농담의 수위도 정해 놓는다. 강의 중에 돌발사건이란 거의 없다. 교실에 가서는 어젯밤 책상에서 태어나 이미 죽은 강의를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는 것이다.
왜 한국어 교사가 되고자 하십니까? - 면접시험에서 예상되는 이 뻔한 질문에도 답을 적어 두었다. - 서양문화가 우월하다고 배운 청소년 시기의 결정으로 외국어와 외국문학 연구로 보낸 세월 동안 국어로 논문을 쓰거나 외국작품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미진한 국어 실력에 자괴감이 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라도 그 반대로…….
예상되는 문법 관련 질문에 대비하기는 참 방대한 작업이었다. 공책 두 권이 다 들었다. 실로 어려운 것은 소리, 음운이었다. 서울 근교에서 자란 탓으로 비교적 서울 표준말을 쓰지만 다는 아니다. 시험공부를 하다보니까 발음 마다 오갈이 든다.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는 사람. - 이때는 그냥 [파트로].
팥이 풀어져도 솥 안에 있다. - 이번에는 [파치]로 구개음화다.
구개음화는 표준발음법 18항. 아니, 17항. 표준발음법을 번호까지 외우는 것은 구구법 외우기나 같다. 앞에서 틀리면 죽 이어서 틀린다. 육칠 사십팔에서 틀리면 육팔은 당연히 틀리게 되는 것처럼. 그래서 ‘표발 17항’ 하고 외웠다. 의문은 꼬리를 문다.
‘사건’은 왜 [사ː껀]이고 ‘사고’는 왜 그냥 [사ː고]인가?
왜 ‘머리말’이고 ‘노랫말’인가?
면접시험은 11월 말, 전국의 합격자들이 마포에 있는 산업인력공단 본부에 나타나야 한다. 면접관 세 명 중에는 나보다 더 젊어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고약한 과정을 다 겪고 공단 건물을 빠져나오면서 새삼 지하철 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아니, 어디로 가든지 지하철이 먼저이긴 하다. 서울의 정액권이 있을 리 없는 나는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공덕동, 여길 어떻게 왔더라? 그랬다. 기차에서 내려 바로 이곳으로 향했다. 이제 돌아가는 길은 바로 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지척에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가. 느닷없이 들른 딸을 반기시겠지.
퇴근 시간이 아직 이른 지하철은 곧 자리가 난다. 두 눈을 감자. 종점까지 시간은 넉넉하다. 아예 이렇게 편하게 고향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을까? 이쯤 해서 그냥 연줄 하나를 놓아버리면 되는 것을. 지적인 삶이라고 수놓인 연. 다른 말로는 난 정신적이고 싶었다, 내내. 왜 사람이 정신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누군가는 보다 정신적이면 안 될 것인가? 나는 가장 정신적 부류가 되고 싶었다. 공부했으니까. 공부란 본능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어딘지 뒤엉킨 세상의 소음들이 아득히 멀어진다.
한국어 교실
둘, 넷, 여섯, 여덟, 열…….
내가 학생들의 수를 세는 방식이다.
어, 파블로, 파블로 아모르솔로, 오늘 안 왔군요?
대학 영자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파블로는 필리핀 학생으로, 유일하게 결석이 잦은 편이다.
봄 학기부터 한국어강의를 하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언교원이 아닌 대학에 새로이 교양한국어 강의들이 개설된 덕이었다. 교원양성과정과 자격시험을 위한 한국어공부에 못지않게, 한국어강의는 주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레바논의 이슬람인 시망고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결코 4명의 아내를 갖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어가 공용어, 케냐엔 영어가 공용어. 그래서 다비드 마카우나 패트릭 삼부 같은 이름이 있다. 타이의 잉랏은 지난 학기 학생인데 학기 내내 일주일이 멀다하고 이메일로 질문을 즐겼다. 지난 달 타이가 물에 잠겨가고 있다는 뉴스에 잉랏의 가족 안부를 물었을 정도다. 몽골에서 온 바트수흐 어용다르는 당찬 여학생이다. 수업시간 중에 모르는 말이 튀어 나오면 “OO가 뭐예요?” 하고 바로 묻는다. 대부분 수동적인 중국 학생들과 다르다.
이 가을학기를 기준으로 대학 전체에 오륙백 명 이상의 외국인 학생이 등록했다고 하는데, 그중 오백 명은 중국 국적의 학생들이라고 한다. 중국에 한국어학과가 많이 생겨서인지, 스무 곳도 정도, 한국어과 학생들의 수준은 안정적이다. 교환학생 자격이니 우수한 학생들만 선발되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에 비해서 일본은 그 열 배 가까운 한국어학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유학생은 적다. 다카하시 나미는 매우 조용한 일본인이다. 수줍은 표정이 부드러워서 성숙한 여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번은 선생인 내가 나미에게 미안해 졌다. 글감 때문이었다.
종달새
피천득의 「종달새」를 감상문 쓰기 글감으로 가져갔다. 내가 늘 좋아하던 짧은 수필이다.
피천득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의 해에 태어났습니다. 경술년에 있었던 국치가 뭐냐, 여러분 모두…….
말을 계속하려다 턱이 굳었다. 일본 학생 나미가 맨 앞줄에 앉아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제목 설명으로 넘어갔다.
‘종달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영어가 매개어가 된다, 스카이라크. 종달새는 하늘 높이 까마득하게 떠서 종잘거리는 새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떤 새일까 떠올리지 못할 것이니까. ‘스카이’ 한 마디면 하늘 가장 높이 올라가 지저귀는 새라고 금방 이해한다. 한국어로 한국어 수업하기는 100퍼센트는 안 된다.
서술자는 처음에 조롱 속의 종달새를 보고 뭐라 말했나요? “하늘을 솟아오르는 것이 종달새지, 저것은 조롱새야.” 다음은 이 말을 곧 후회하는 서술자의 생각들이 펼쳐지지요. “종달새는 갇혀 있다 하더라도…… 푸른 숲, 파란 하늘, 여름 보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가 꿈을 꿀 때면, 그 배경은 새장이 아니라 언제나 넓은 들판이다. …… 설사 그것이 새장 속에서 태어나 아름다운 들을 모르는 종달이라 하더라도, 그의 핏속에는 선조 대대의 자유를 희구하는 정신과…….”
이 대목에서야 다시 놀라서 목이 막혔다. 글을 읽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대 일본 저항정신에 관해 말해야하는 나 한국인은 지금은 나약한 일본 여학생을 궁지로 몰고 있다. 나미는 잘 견뎌주었다.
며칠 전에도 음식의 의미와 관련하여 ‘백설기’를 소개할 때 실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백’은 ‘밝다’를 의미하고, ‘밝’은 옛날에는 신과 하늘이란 뜻이었죠. 그대로 태양을 의미하는 것이죠. 우리 민족은 부여 및 고구려에서부터 모든 시대에 걸쳐 흰 옷을 신성하게 알고 즐겨 입었는데, 곧 순수와 평화를 추구한 민족이라고 할 수…….
거기까지면 좋았을 것이다.
반면에 ‘흑색’은 오정색중에서…….
선생님, 오정색이 뭐예요?
또 바트수흐였다.
아, 오정색은, 그러니까 동서남북 알죠? 한국인은 동서남북 방위에 색깔을 대비시켜 생각했어요. 중앙은 노랑으로 정해놓고, 동방은 파랑, 서방은 흰색, 남방은 빨강 그리고 북방은 검정이라고. 여기서 보면 검고 캄캄한 것을 ‘흑’이라 여겼어요.
정말 거기까지만 해도 되었을 것이다.
흑과 백이라는 대조에서 흑은 늘 부정적…….
아차! 이런 설명을 했어야 하는가. 까만 피부의 학생을 앞에 두고서.
그때 다행히 곧 국제마라톤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아프리카 선수들이 1등, 2등, 3등을 모두 차지했을 때 그것을 슬쩍 언급해서 마음을 달래주면 되겠다 싶었다. 막상 교실에 그날따라 케냐 학생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건 큰일이다. 한국어 수업에 회의를 느낀 걸까? 세계 여러 곳에서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한국을 찾은 이들에게 불쾌감을 심어주다니. 졸업 후의 계획을 묻는 설문에 보면 한국회사에 취업하고 싶다는 것이 가장 많다. 한국에 살고 싶다고 대놓고 쓰진 않지만, 관심도 있어 보인다. 발표 시간의 주제로 한국음식, 민속은 물론 더러는 한국의 국제결혼 실태를 조사해 오기도 한다. 한국어를 이들에게 얼마큼 잘 가르쳐야 하는지. 한국어를, 한국을.
이 빚진 기분을 꼬깃꼬깃 쑤셔 넣을밖에. 그러고서 종달새 이야기로 돌아간다.
“칼멜 수도원의 수녀는 갇혀있다 하더라도 그는 죄인이 아니라 바로 자유 없는 천사다. 해방 전 감옥에는 많은 애국자들이 갇혀 있었다. 그러나 철창도 콘크리트 벽도 어떠한 고문도 자유의 화신인 그들을 타락시키지는 못했다.” 어떻습니까? 이 구절에 오면 종달새는…….
선생님, 수녀는 원래 갇혀 있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에 와있는 한주선 선교회는 아주 자유스러운 활동을 하는데요.
이냠바네 해변이 고향이라는 호세가 손을 들고 말했다.
아, 여기 수녀회는 프랑스대혁명 때 집단으로 순교한 수녀회의 일화를 바이런 경이 들춰내 시를 쓴 것이고, 피천득 선생이 인용했습니다. 지금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가톨릭보건의료사업이 들어가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가요? 모잠비크에는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죠?
예, 수도 마푸토는 로마가톨릭이 많습니다. 북쪽은 도착종교가 많고.
도착 아니고 토착! 자, 토착이라고 발음해 보세요. 토착종교!
예, 토착종교. 이슬람, 힌두교도 있어요. 언어도 많이 여러 개입니다. 한국 같이 한국어 하나 아니고요.
참, 그렇군요. 한국은 배달민족이 이룬 나라라서…….
배달이 뭐예요?
이번에도 궁금증이 많은 바트수흐였다.
아, 한국인의 원형이 배달민족입니다. 한민족은 크게는 몽골로이드, 몽골인종에 속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배달민족이라고 합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나라 이름이 배달이었습니다.
발음이 이상해요, 배다르.
이번엔 나미였다. 일본인다운 발음이다. 나미로서는 수업내용에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용기 내어 표현하는 것이리라.
배달, 다 같이 소리 내어 봅시다, 배달. 짧게요. 길게 ‘배애달’이라고 하면 우체부나 택배의 배달이 됩니다. 한국어에도 첫음절에는 장음이 올 수 있고, 가끔은 뜻을 변별해주죠.
자, 짜장면 배달은 길게.
다음, 배달민족은 짧게.
왜 하필 배달인가? 그것은 국조 단군과 관계있는데, 어원에서 박달나무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이랍니다. 또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입니다. 그러므로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한민족은 백산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아뿔싸, 나는 언젠가 이박에게서 주입된 배달민족 신화를 외국인 학생들에게 열심히 주입하고 있구나! - 모교에서 빛나는 강사시절 함께 강사실을 사용하던 이순규 선생. 유럽대륙의 역사철학 전공인데, 자신의 말로 ‘적어도 헤겔에선 고개를 넘었는데……’라고 말하곤 했었다. ‘세계정신’ 운운하는 서양 철학자들은 동양을 우습게 본다고, 그래서 그는 거꾸로 동양에, 한국의 원류에 기대는지도 몰랐다. 나는 재빨리 현실로, 교실로 돌아온다.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로 내려왔기 때문에 언어적으로 통일이 되어 있었죠. 한국에도 지금은 백사십만 외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점점 늘어갈 추세이고요. 자, 다시 「종달새」로 돌아갑시다. 이 글에서 저자가 가장 아끼면서 내놓은 주장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잘 읽고, 감상문을 쓰는 겁니다.
자꾸 멍해지려는 가닥을 다잡아 서둘러 감상문 쓰기 과제를 낸다.
선생님이 독서 감상문을 쓰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정리해서 홈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보다 여러분이 먼저 할 일은 브레인스토밍, 「종달새」와 관련된 모든 것을 생각하는 일입니다. 모는 단어들을 써보고, 모든 생각들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해서 글의 개요를 써오는…….
작문
그렇게 다음 시간에는 좋은 글을 쓰는 방식에 대하여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좋은 글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의 일이리라. 나는 밤새 ‘좋은 글을 쓰려면’ 이라는 제목을 써놓고 궁리에 빠진다. 여러 책들, 여러 사이트들이 여러 다른 조언을 준다.
- 눈을 크게 뜨고 의미를 찾아낸다.
- 짜임새 있게 구성이 무엇보다 중요.
- 말하려는 내용에 어울리는 리듬감 : 대구법, 대조 등을 이용할 것.
- 생략과 확장 등을 통한 변화주기.
부지직, 문자메시지 음이 들린다. 두 번 이어 들어오는 문자들. 하나는 인터넷 변경을 부추기는 유혹이고 다른 놈은 친절한 대출안내이다. 누군가 나를 찾는 일은 드물다. 더 드물어졌다. 나는 아마 세상에 없는 것 같다.
느닷없이 이박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가 화드득 놀랐다. 내가 전화를 한다면 그가 너무 놀랄 것이다. 수업시간에 배달민족 이야기를 하다가……. 그렇게 말해도 놀랄 것이다. 다시 ‘좋은 글쓰기’로 되돌아간다.
갑자기 나는 내가 이전에 썼던 글, 지금 쓰고 있는 글들에 생각이 미쳤다. 미쳤었구나. 미쳤구나. 나는 누구에게서 작문을 배웠던 기억이 없다. 아마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기본은 배웠겠지만, 서양말을 안고 산 세월동안 까맣게 망각했다. 국어에도 글쓰기 방식이 있다는 것을. 그저 입말을 글말로 옮기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 것을.
얼굴이 달아오른다. 분명 이것은 수치에서 오는 홍조다. ‘부끄럽거나 취하여 붉어짐. 또는 그런 빛.’ 박사논문을 초라하지만 프랑스어로 자비출판하고 말기를 잘했다. 번역했더라면 누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 이후의 논문들은 프랑스어 보다 국문이 더 많았다. 프랑스어 논문의 부족함은 용서된다,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니까. 국문 논문의 미흡함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강의하는 인간이 국어를 유린하다니.
아니 괜찮다. 논문은 어차피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 배승한에게서 받은 메모 쪽에서 생성된 내 글은 어떠했을까. 내 글이라 할 수 있을까? 내용이나 어휘는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정리만 했으니까. 구성에 관해, 또는 리듬을 염두에 두었나? 아니다. 갑자기 하나의 명제가 떠오른다. 글은 진실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 누구라도 자신의 명제를 가지고 쓰면 될 것 아닌가.
진실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 잠정적으로 중단되었지만 - 나로서 진실은 내 몫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글을 쓰면서 생각이 변하는 것을 느낀다, 완결된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독창적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고갱을 훔치지 않고, 우리는 얼마큼 독창적이 될까?
답은 나오지 않고, 모니터의 화면은 ‘자러 간다.’ 화면이 그렇게 말하면서 꺼졌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그렇게 말했다. 미국산 휴렛패커드라 그런가 보다. 나도 자러 간다, 한국어로.
잠깐, 사고나 인식보다, 더 나아가 세계보다 언어가 우위에 있다고 그렇게 가르쳐야 하나? 언어를, 외국어를, 외국어 한국어를 가르치자면 그렇다.
우리는 모국어가 설정한 선을 따라서 자연을 분석한다. - 이것이 사피어-워프의 언어 결정론적 입장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과 행동은 우리가 쓰는 언어의 문법적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적는다, 다음 시간에 할 말을.
아니, 그건 소개해야할 이론이긴 해도.
이론이지만, 뭐?
자문자답이 지겹지도 않아? 사람은 영어나 중국어나 아파치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언어’로 생각한다잖아. 자연언어와는 별개의 추상언어 ‘멘털리즈’, 이건 인지과학자 핑커의 말, 아니 그의 글.
작문시간 준비를 하다가 나는 또 분열을 겪는다. 오른 쪽 뇌와 왼쪽 뇌가 다툰다. 나는 내 생각을 지원하지 못하고 늘 토론을 들이댄다. 뭐든 삼천포로 빠진다. 인터넷에서 삼천포는 겹겹으로 쌓이는 창들이다. 문어발도 아닌 것들이 어딘가로 기어가서는 달라붙어 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가. 나를 홀렸던 한국어 몸살에도 결국 틈이 보인다. 틈, 틈새로 쓰다 만 이야기를 그린다. 수십 개 열린 창을 하나씩 닫는다. <한국어>도 닫는다. 쓰다가 멈춰있는 처음 화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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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 단편 「한국어」,
『계간문학』 봄호(통권 18호), 한국문인협회, 2012.3.15. 152-1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