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13 –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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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병난 시계같이 휘둥그래지며 멈칫 섰다.
- 박용철 「해후」 전문
해후, 뜻밖의 만남을 그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에 다시 만남이라고. 그 순간 승욱은 ‘병난 시계같이 휘둥그래지며 멈칫 섰다.’ 숨이 멎었다. 뒷모습에서부터 순간 알아차렸다. 스칠 때였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서 알았다. 세월이 흘렀다고 하면 흐른 시간임에도 그 찰랑거림은 눈을 유혹했다. 아니, 그 이전에 코를 습격해서 숨을 멎게 했다.
좁은 길, 좁은 산길이었다. 백두산 한 귀퉁이가 갑작스럽게 드러난 것이 겨우 몇 분 전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이에 솟아 있었다. 해발 한참 높은 자리에까지 차로 올라온 탓인지 뒷동산보다 미약해 보이는 언덕이었다. 모래와 자갈뿐인 산에서 신성은커녕 생명감마저 느끼려야 느낄 수 없어서 이상했다. 이렇게 평범할 수가. 산은 산이고 숲은 숲이잖여, 어디라도 바람 쐬러 다녀오자고 하면 늘 시들하게 대답하시는 어머니 말씀이 맞나 싶었다.
아침에 호텔을 출발할 때는 고산의 환경을 견딜 수 있을까 염려스럽다고 미리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어 녹이는 일행도 있었다. 탤런트처럼 예쁘게 꾸민, 젊어 보이는 여자였다. 산 아래 주차장에 내리자 산정까지는 다른 정해진 차편들로 오른다고 했다. 두 장의 입장권(?)을 받았다. 사람마다 두 장씩이었다. 그 후로는 ‘우리 일행’의 개념도 없이 아무렇게나 숫자대로 태우고 끊고는 해서 난감했다. 마치 번호가 붙여진 짐짝이었다. 그렇게 반시간 정도를 달렸고, 다시 6인승 지프차로 바꿔 태워졌다. 미간이 실제로 찌푸려졌다. 곡예운전은 20분도 넘었다. 묘기 대행진에 나오는 것처럼 흔들흔들 덜컹거리며 올라갔다. 낯선 차창 밖 풍경에 저절로 눈이 갔다. 뾰족한 꼭대기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여러 마리 나란 나란히 서있는 소들의 허리나 엉덩이를 닮은 지형이었다.
어디였지? 곰소였나, 서해 바닷가, 물 빠진 너른 바닷가의 사진이 떠올랐다. 음악 하는 친구, 한두 번 만난 불문과 손 선생의 친구가 어느 자리에서 곰소의 바닷가 사진을 들이밀면서 감탄했었다. 여기, 골골 물 빠진 길들로 패여 가지고, 푸짐한 아니 육중한 여자들의 엉덩이야. 늘어 엎어진, 아, 이 모습들···. 사진을 확대해가면서 들이밀었다. 와우, 놀라워. 동해와는 너무 다른 서해 바다들, 왜 이런 푸근한 바닷가를 묘사한 작품들이 없을까. - 직접 노래로 만들어 부르지 그래요? 하려다가 말았다. 사실 그런 바닷가를 본 적이 없었다. 승욱이 난생 처음 경험한 바다는 유럽 대륙붕에 위치한 북해였다. 가까운 바다를 멀리해온 긴 세월을 지나, 난데없이 천, 2천 ··· 8천 킬로미터쯤 떨어진 바닷가에 서서, 아, 바다가 이렇구나, 그 깨달음으로 모래밭이 멀리 멀리 뻗은 그냥 바다면 충분했었다.
후훗, 산정에 오르면서 바닷가 생각이라니. 구름은 더 걷혔다. 지프에서 내리자 천지를 향하는 설렘이 다시 살아났고, 아직 오를 데가 조금 더 남아서 좁은 비탈길을 오르는 참이었다.
야, 이렇게 맑은 날에 오다니!
저쪽에서 우리 일행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이번 행사주관 학회의 회장님이셨다. 더 나이든 교수님을 향했다.
교수님, 저는 세 번째라니까요. 그런데요, 처음으로 이렇게 맑은 날을 봅니다요.
세 번 만에 맑은 날이 처음이라···.
예에! 천지 물 못 보고 돌아가는 사람들 많아요. 오늘 오신 분들 아주 운 좋으신 겁니다.
우리 일행인 서너 분 교수님들에 이어 여러 서로 다른 일행들이 뒤섞여 올라갔다. 앞선 회장님은 사뿐사뿐 뒷산 오르듯 했고, 소리들은 멀어졌다. 벌써 천지에 닿았을 것이었다. 한국어는 다른 소리들에 묻혀서 조용했다.
노샘, 느리네요! 어서 어서! 우리가 먼저 올라야 했을 것을! 교수님들 기념사진도 찍어드리고.
한눈팔던 승욱을 박 선생이 재촉했다. 박 선생은 영문과였다. 영문과 교수님 두 분과 명예교수님 한 분이 연길대학 프로그램에 참석하시는 길에 동반하는 길이었다. 영어교육관련 학회의 프로그램은 이틀이었고, 나머지 3일은 백두산 여행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리가 남아서 가족이나 친지 동반이 가능하다고. 강사실에서 박 선생이 그 말을 흘렸을 때, 승욱으로서는 귀가 솔깃했다. 산, 백두산이라니. 사실 짧은 독일 체류 중에 바닷가만 떠돌며 공부는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결국 알프스 자락의 신학대학 진학을 포기했던 터라, 백두산 여행은 괜스레 뭉클한 아이디어였다. 알 수 없는 감격 속에 멈칫거리는 승욱을 박 선생이 알아차렸다. 밀어붙였다.
아, 노샘! 무조건 갑시다요! 백두산인데! 우리 과는 사실 다른 프로젝트 땜에 다들 못가요.
예, 뭐. 자리가 있으려나 했지요. 신청할게요. 그렇게 나선 길이었다.
익숙한 말소리들이 들리며 젊은 남녀들이 바짝 앞으로 추월해 나갔다. 그룹까지는 아니지만, 아니, 그룹여행으로 보였다. 커플룩도 보이고···. 그 뒷모습 하나가.
그 높이 그 아득한 곳에서라니. 뜻밖이고 뜻밖이었다. 연두였다. 연두가 아닐 수 없었다. 연두를 연두의 뒷모습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승욱은 굳었다. 세상이 멈췄다. 2,000미터가 넘는 산길을 올라와서 세상이 멈췄다. 몇 발짝 천지를 앞두고 세상이 멈췄다. 그는 주저앉았다. 쓰러졌다.
놀란 것은 박 선생이었다. 뒤돌아보던 그는 다 내버려두고 순간 승욱을 향했다. 다행히 승욱은 옆으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느낌은 없었다. 그냥 아득했다.
형, 쉿, 조용히!
형? 여자애가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는 무엇인가에 감전된다. 여자애는 손끝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누르면서 머리맡에 앉아 있다. ㄱ의 손끝과 ㄴ의 팔은 전류가 통하는가. 깜깜한 세상 속에서 가늘지만 번쩍번쩍하는 전류만 보인다. 소리 없는 마른번개다. 살살 간질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시 한 번 전류에 휩싸인다. 회색 장막이 덮친다···.
노샘, 승욱 형! 형! 박 선생은 그를 흔들었다. 그는 다른 동작을 할 수 없었다.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승욱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눈을 떴다. 하늘뿐이었다. 하늘 속에 둥실 떠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눈이 감겼다.
얌마, 사내새끼가 뭣이여! 꼴싸를 봉께 먹물쟁인갑네! ··· 아이고, 야가 또 실려왔네이. 불안장애여, 뭐여! 인자사 일병 달았고만, 이래 싸면 지대로 전역이나 하겄냐! 얌마! 털고 살어! 스톱이 뭔 말인가 알겄어? 알어 듣냐고! 사투리 군의관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서너 사람 실루엣이 보였다.
아이코, 다행이요! 노샘 뭔 일이요! 정신 들어요? 뒤로 넘어졌더라면 머리가···.
저기 길 옆으로···, 나 옆길로. 사람들 방해···.
치이, 이런 순간에 다른 사람들 걱정할 일이요!
그 사이 그들 일행 중 몇이 합류해서 그는 길섶에서 더 안쪽으로 옮겨졌다. 잠깐이었기 망정이지 소동이 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물이며 이름 모를 음료들을 건넸다. 이마를 짚어 보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더위 먹었나 했더니 열은 없네요, 다행히. 젊은 사람이 왜 이리 부실해!
잠깐만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 소실은 아니고··· 전에도 쓰러진 적 있나요? 어지러웠어요? 메슥거렸나? 하긴 그런 느낌 들기도 전에 쓰러지지 뭐. 피부는 창백해도 식은땀은 없네. 나, 간호사예요.
아, 예. 감사합니다. 박 선생이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가끔 이런 일이, 미주신경···.
에고, 알고 있으니 다행이고. 그치만 습관성 되면 안 되죠. 여긴 그늘도 없어서.
별 일 아닙니다. 모두들 어서 천지를···.
어머나, 살아났네. 우릴 걱정하는 것 보니까. 누군가 어깨를 흔들흔들해주더니 일어났다. 사람들은 안심했다. 흩어졌다.
노샘, 어쩌다가. 우리가 순간 넘 속도를 냈나. 박 선생은 여전히 걱정인가 보았다.
박샘, 나 괜찮아. 이유 없이 그럴 때가 있었어요. 군대 때도 여러 번, 그 전에도···. 천지 보고 와요! 쉬고 있을게.
그건 아니지. 다 왔는데. 쫌만 더 쉬다가 함께 다녀옵시다!
아, 완전히 민폐를 저지르고 있었다.
조금 있다 보니 일행들이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간호사 아주머니는 다시 승욱 쪽으로 왔다. 천지, 요 바로 위예요, 다 왔어요. 얼굴 색 괜찮은데 웬만하면 올라가서 사진만 찍고라도 와요. 여길, 백두산 천지를 언제 또 오냐고요!
정말이지 키만큼만 올라가면 될 듯 고지가 눈앞이었다.
되겠어요? 가겠죠? 나 혼자는 안 올라갈 것이니. 박 선생이 졸랐다.
앞서 올라갔던 일행들이 내려가는 것을 보면 문제의 그 일행들도, 연두가 함께 왔을 그 일행도 벌써 내려갔을 시간이었다.
봤을까?
나를 알아봤을까?
짧은 시, 두 줄 뿐인 시가 떠올랐다. 미쳤구나, 너. 봤으면, 알아봤으면 어쩌려고! 승욱은 애써 사건(?)을 평이하게 정리했다. 다만, 오르막이라 앞쪽이 높았으므로 그 머리카락이 바로 그의 눈높이에서 찰랑거렸을 뿐이다. 아직도 코끝에 남아있는 강아지풀 냄새, 강아지풀 가루··· 이런 건 착각이다. 착각이야. 착각이어야 했다. 말도 안 돼. 하나, 두울~. 승욱은 애써 깊은 숨을 쉬면서 천천히 나머지 몇 미터를 올라갔다.
호수,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이었다. 올라갈 때의 가벼운 경사면과는 비교가 안 될 가파른 깊이였다. 천지는 미궁이었다. 3, 4백 미터 깊이라더니 표면은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저 끝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 깊은 아래··· 더 아래··· 마그마가 끓고 있을 그곳은 지구의 중심, 지구의 자궁이었다. 아찔함에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이곳에를 어떻게. 승욱은 새삼스레 몸을 떨었다. 대학원 진학 전 이런저런 독서에 푹 빠져있을 때, 세계의 신과 신들에 대해서 무작정 읽고 있을 때, 하나의 소망을 품었었다. 그리스, 세계의 옴팔로스, 배꼽이라는 곳 델포이에 가보고 싶다. 헤브라이즘 이전의 역사, 헬레니즘의 매력에 파묻혔을 때였다.
파르나소스 산정의 아폴론 신전, 깊은 신실에서 신탁을 받아 나오는 피티아, 정확히는 그 흔적들이 남아있는 델포이는 짙은 안개에 쌓여있었다. 승욱은 그 안개 속에 있었다. 세기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 또한 예로부터 신전 안쪽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니?! 누구의 말이면 어떤가. 그노티 세아우톤, 그노티···.
그 안개 낀 산정이 왜 백두산 천지 앞에서 떠오르는가. 무슨 맥락이 없었다. 현상이 그랬을 뿐이었다. 파르나소스 산 높이 또한 백두만 하겠지. 너는 자신을 아느냐···. 고개를 젓던 승욱은 이곳이 백두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천지의 물에 발을 적셔보고 싶다는 충동에 내몰렸다. 유럽 끝 북해에서 난생 처음 바닷물에 발을 적셨던 그때처럼. 그 차가움, 각성, 바닷물의 정체를 느꼈던 그대로 이제 천지의 물을···.
노샘, 노 선생니임!
박 선생이 그를 낚아챘다. 거긴 위험해욧! 왜 그래요, 조금 아까 넘어지고도 또! 사람 놀래키는 재주 있어요.
···.
자, 이쪽으로! 여기 사진 한 번! 아무캐도 사진은 남겨 가야지요.
사진은, 그러네요.
고개를 들고 보니 왜소한 청년의 옷 가슴팍에 006이라는 번호가 크게 붙어있었다. 수인도 아닌데 웬 번호일까.
여기 사진 열두 장 4만원. 여기 내 번호 잘 봐두시오.
청년은 유창하지 않으나 한국말을 하고 있었다. 중국인이었다. 관광객들의 카메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표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는 알바들이었다. 사진은 즉석에서 박 선생이 챙겼다.
아, 까마귀는 한 마리 안 보이네. 백두산 까마귀 어쩌고 속담도 있던데.
맑은 대낮에 까마귀 뭐요, 뭔 뻘소리. 오늘 진짜 이상하셔!
시간 때문에 둘은 서둘러 내려왔다. 일부 일행들은 버스승강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더러는 기념품가게에 들렀거나 천지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거나. 다들 다가와 말을 거는 것으로 보아 승욱의 소식이 퍼졌나 보았다. 다시 지프에, 이어 친환경버스에 올랐다. 하산이었다.
조선족 안내인이 부러 백두폭포라 부르는 장백폭포 앞에 이르자 버스가 멈췄다. 폭포관광은 도보였다. 비껴 옆 입구를 통해 오르면서 사람들은 벌써 멀리 하얗게 반짝이는 계곡에 놀라서 탄성을 질러댔다. ‘백두산에 걸린 두 필의 비단’이라더니, 말 그대로 그렇게나 은색으로 빛날 줄은 몰랐다. 입장료를 낸 뒤 그 지점부터는 길이 갑작스레 가팔라졌다. 더 가파른 층계를 오르자 폭포 물을 받아 고이는 듯 흐르는 물이 나왔다.
누구라도 발을 담가보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 차가운 물에 살짝 씻어보았나, 그 정도였다.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라고 그리스 괴팍한 철학자 누군가 말했다더니. 나 또한 분명코 이 쏟아져 내려 흘러가는 물에 다시 발을 적시는 일은 없을 것이리라, 승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순간은 되풀이 되지 않는다. 연두는 연두의 머리카락은 내 생에서 되풀이 되지는 않는다. 정신 차리자. 그러다가 갑자기 철학사에서는 그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원인을 불이라고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이 원소이다. 모든 것은 불의 교환물로서 희박과 농축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대립에 따르고, 전체는 강처럼 흐르며··· 아, 이 대목에서 강물이 나왔었구나.
뭐해요, 일어나요. 발 얼어불겄구만.
한 번 뿐이라.
뭣이 한 번요! 우와, 오늘 정말 이상하셔! 내가 돌겠네! 인자 노샘 옆에 바짝 붙어야겄소. 빨리 와요!
서두르는 일행들을 따라 노천지수영지로 향했다. 로露자로 시작된 간판이었다. 더 큰 한글 간판에는 ‘세계 제일의 성산 백두산 자연유황온천수탕’이라고, 그 아래 한자로는 ‘세계 제일적 성산 장백산 천연유황온천욕’이라 했다. 83℃라고 소개된 탕의 온도를 보고는 의견이 갈렸다. 온천욕 하자 말자. 못 말리는 열성 일행들을 기다려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 한 시간 남짓, 길가에 붙어있는 ‘조선족 풍미’라는 냉면이며, ‘순 한국식 음식’이라거나 ‘원두커피’라는 팻말들이 남은 일행들을 불러갔다. 승욱은 그냥 그 집의 커피숍에 앉았다. 앉는 것만으로 10위안을 내는 것이 생경했다. 공항 내의 은행에서 133.90으로 환전을 했었지만 별로 쓸 일은 없었다. 물론 관광버스가 길목 마다 멈춰 선 매점에서 발칙한 상품들도 발견했지만. 정말 발칙했다. 백두산 가는 길 ‘만경관광상품유한공사’였나. 그 가게에는 ‘지저스 래핑’이라는 상품도 있었으니까. 순전히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아니 한국인들을 표적으로 한 상품들이었다. 아예 물건 값이 한화로 표기된. 점포 운영은 북한이라던가.
우두커니 멋쩍기도 해서 커피를 시켰다. 먼저 받아갔던 자릿값을 빼주었다. 어쩌다 여기에서 홀로 커피를 마시고 있나.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있던 승욱은 아무도 모를 표정으로 먼 날들로 돌아가고 있었다. 좀 늦은 나이었지만 교육대학원 진학 후에는 예정대로 공부를 했고, 졸업하면서 한 번 더 선택의 기로가 있었다. 그때 중등교사 임용고시 대신 일반대학원 박사과정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 지금의 진로가 되었다. 교육대학원 공부를 하다가 깨달은 중등교원의 한계, 특히 자율성이라고는 없는 직업군임을 확인하고서 흔들렸다. 또 다른 하나는 청소년의 인생에 미칠 수 있을 영향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중고등학생들은 크든 작든 선생님들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학생들의, 크게는 타인의 인생에 간섭하기도 영향을 미칠까도 관여하기도 싫은 무신경과 무관심이 한몫을 했다. 대학생들에게는 교수의 영향은 미미할 것이다. 그 대신 수업의 자율성이 보장될 터였다. 타인을 덜 침해하고 그 나름 공부하면서 강의하는 자유가···. 그러는 동안, 더 이상 도망이 아닌 정주의 길을 걷게 된 이래 자신은 역마살이 없는 정주형이라고까지 믿었다. 더 이상 도망해야할 원점을 핑계대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떠날 욕구가 없다고 믿었다. 원점은 원래 연두가 아니라 애매모호한 자신이었다. 이제는 안정된.
그런 의미에서 그날 백두산 여행에 설렜던 2005년, 서른일곱 나이에는 평범한 연구자들에게 막연한 가능성으로 보아 인생의 봄날인 셈이었다. 단 하나, 어머니의 다른 바람은, 많은 어머니들의 공통된 바람이었을 그것은 불편한 예외였다. 말 수 없으신 어머니가 별다른 채근은 하지 않으셨지만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투틸로, 왜 남들처럼 여친이 없냐이···.
혼자, 여기 혼자 있었네, 노샘! 갑시다, 우리가 좀 늦었네요. 일단 탕에 들어가불면 그거이···. 붉게 상기된 얼굴의 박 선생이 머리를 털면서 다가왔다.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은 목욕탕에 들어갔나 안 들어갔나 확연히 구분되었다. 다시 출발한 버스 안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저녁에 소를 잡는다는 말도 안 되는 말 때문이었다. 송아지 값이 한국의 1/10, 겨우 50만원이라니! 버스 한 대 일행들 모두가 실컷 먹어도 남는다더라. 안 먹고 가면 손해지, 입맛들을 다셨다. 단체관광에 그런 것이 숨어 있었나, 박 선생도 몰랐다는데 기획 때 벌써 정해진 코스였다 했다.
오늘 밤 송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위해서 죽는갑네.
뜬금없기는. 송아지야 죽을라고 사는 것 아니요! 노샘 비건 아니잖아요.
나는 그냥, 사람들 육식 과욕으로 덩달아 땅들이 숲들이 턱없이 사라져가니까.
송아지는 뭐고 땅들은 숲들은 또···.
얼마 전에 아마존 수목지역들 강탈이 심하다는 기사를 봤어요. 가축 사육 공간을 확보하려고 수림지대를 아예 불태워버리니. 수목들 연소 때문에 구름은 검게 혼탁해지고 강수량은 줄고.
그런다고···.
그 정도가 심각하다느만. 지난 반세기 아마존 우림 2/3가 사라졌다면 믿어지나, 축산업으로.
에이, 사람 불편하게.
그뿐 아니라니까. 콩이나 옥수수 그런 곡물 총생산량, 세계 총생산량에서 사료에 쓰는 곡물이 거의 절반, 45퍼센트라나. 그거면 인구 20억을 먹일 정도래, 현실에선 10억에 육박하는 인구가 기아에 시달리는데···.
노샘. 고만, 고만해요. 앞뒤에서 누가 듣겠구만요.
아, 오늘 송아지고기 맛 버릴 생각은 없고요. 놀라서, 통째로 한 마리를 잡는다니까 놀라서. 암튼 소고기 1킬로 생산에 들어가는 곡물이···.
쉬잇!
송아지가 죽기로 된 식당에 도착하면서 승욱은 겁이 와락 났다. 설마 그 일행들이 하필 이곳으로 따라오지는 않겠지. 소 잡아먹는 것, 이것은 대형사고(?)이니까. 안 올 거야, 맞아, 소그룹들이 송아지를 잡을 리는 없으니까.
연두랑 단체로 짜장면을 먹은 적이 있었다. 건너 건너 자리였다.
뭐 해! 짜장은 비벼야 맛이지. 옆자리 여학생이 참견이었다. 아아니. 나 안 비비고 먹어. 흰 것은 흰 대로, 까만 쪽은 반찬으로. 그러더니 짜장 쪽을 꽤 남기는데,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한쪽으로 치우는 것이 자잘한 고기들 같았다. 얼마나 된다고 저걸 못 먹나. 식성이 까다롭나. 성격도 까다로울까. 뭐 그런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 연두 일행이 송아지를 잡으러 올 리는 없었다. 그 누구도 승욱의 불안을 알 리 없는 그날 저녁은 어느 식사 때보다도 흥겨웠다. 특별한 부위를 욕심내는 사람들을 경탄하면서, 승욱도 송아지를 먹었다. 술들도 꽤 마셨다. 그러면 두말할 것 없이 가무다. 별명이 마이클 잭슨이라는 남자가 일행들이 원하는 노래는 다 불러주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몇 곡을 잇다가, 맙소사, 뜬금없이 〈명태〉를 부르는 품이 대단했다. ···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 지라도~~. 그 남자뿐 아니라 정말 다들 대단했다.
박 선생도 한 곡조 불렀다. 당연히 팝송으로. 아이 워크트 어크로스 언 엠티 랜드~~. 멜로디는 들어봄직. 텅 빈 길을 걸었네, 너는 사라졌고, 쓰러진 나무들만··· 그런 내용 같았다. 승욱은 굳이 가수도 제목도 묻지 않았다.
추억에 젖었네, 박샘.
추억 없는 사람 있나.
추억···. 추억은 아름다워라. 아니, 청춘은 아름다워라. 청춘은···.
웬 멜랑콜리. 우리가 뭐 아직 청춘인가.
청춘은 쉬이 가고, 추억은 켜켜이 쌓여있을 것이었다. 어디에서 살든 가무에 심취하는 민족이 맞다. 삶의 무게, 삶의 슬픔을 즐거운 가무로 뱉어내는지도 모른다. 속내를 토하는 말은 접는다. 이렇게 침묵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가지 않은 길, 연두. 돌이킬 수 없는 길, 연두. 침묵 속의 단어, 연두. 침묵 속의 단어들은 활성화 될 수 없다. 죽은 단어들이어야 한다.
용정이라니, 날이 밝자 이튿날도 엄청 설레는 일정이었다. 시인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밝아진 기분 때문인지 조선족 안내원의 너스레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중국에 오십 여섯 민족들이 삽네다. 여자는 그중 조선족을 젤로 치지요. - 엥? 아무리요?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들었다. 믿기 어려웠다. 진짭니더. 울 시댁 뿌리가 전라북도라, 남편이 밖에서는 큰 소리로 뻐김서 다녀도 집안에서는 짠돌이더라요. 여자는 잔소리 말고··· 그런 스타일예. 한데 한국은 계속 계속 발전을 해서는 어느 날, 이삼년 전엔가, 국회에서 여성의원이 남성의원 머리통을 쥐알리는 장면을 보았지요. - 에이, 한국서는 모르는 일이요. 일행 중 누군가가 반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드라마였을까. 아무튼 그 장면을 본 다음에는 안내원이 남편에게 엇서기도 하는데, 남편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한단다. 대중매체가 효과 만점이구나, 쿡쿡. 승욱이랑 박 선생은 웃기만 했다.
용두레 우물이 있던 땅 용정에 터를 잡은 조선인들··· 비암산에는 신성한 천년수가 우뚝 서 있었다 했다. 〈선구자〉에서 노래되는 그 일송정, 그런데 왜소하게 터만 남았을 뿐이란다. ‘독립 사람들’ 모여든다고 파헤쳐진 일송정, 물도 말라버린 해란강, 지류라고 해도 두만강의 지류인데 믿을 수 없었다.
두만강 아래쪽으로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백두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중국인이 많음다. 지붕 모양만 봐도 압니다. 딱 구별이 됩니다. 사방기와가 조선족의 집이라요.
맞다. 기와집 짓고 살면서 아들딸 많이 낳아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면 만족했던 우리 선조들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아버지 덕에 기와집에서 살면서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승욱으로서는 머쓱해졌다. 어느 세월에 아들딸은···.
차창 밖으로 인력거가 눈에 들어왔다. 대하극 《토지》에서 본 인력거를 용정 길거리에서 보게 되다니! 시간을 거스르는 실물이었다. 하루 종일 거리에 상관없이 1인당 1위안이라는 독특한 요금제라고 했다. 사람이 끄는 그것을 차마 타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머니는 인력거를 봤다는 말만 해드려도 신기해하실 것이었다. 사진을 찍어다 드려야지, 옛것들을 좋아하시니까. 하지만 동작이 느렸다. 카메라를 꺼내기 전에 인력거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윤동주의 모교 대성중학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승욱은 또 다른 관광차들을 경계했다. 그 팀도 어제 백두산 일정이었던 코스였으니까 오늘은 용정일 수도 있었다. 다행히 사방에 다른 관광차량은 없었다. 휴우! 어쩌면 거꾸로 가는 일정도 있을 것이었다. 먼저 용정, 다음날 백두산 그렇게. 그러다가 백두산에서 우연히 딱!
예상했던 대로 일행들은 맨 먼저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로 안내되었다. ‘사립대성중학교’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구관 건물 앞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라는 잔디의 말이 먼저 반겼다. 2층 기념전시관은 말 그대로 기념전시관이었다. 규모라 할 것 없이 초라한 편이었다. 아래층 내려가는 층계참에 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책들이 있다니. 의아해하면서 둘러보다가, 앗,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가 보였다. 정말 있었다. 20위안짜리 소책자. 공간이 책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질세라 서둘러 책을 사고는 앞선 일행들을 뒤쫓았다.
다시 버스에 오르자마자 책을 펼쳤다. 어라, 파는 책이 있었어요? 옆자리 박 선생이 놀랐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2002년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발행이었다. 차례를 살펴보는데 「슬픈 족속」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라, 72쪽부터.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승욱이 되뇌는 사이 박 선생이 계속 책만 곁눈질했다. 일단 넘겨주었다.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속으로 웅얼거렸다.
박 선생은 읽으면서 말하기를 둘 다 하고 있었다. 원래 구상했던 책 제목은 『병원』이었다네, 신기하네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로 정한 것은 「서시」를 쓴 다음이었고, 것도 불발이었다니 새삼스레 애석하군요. 노샘 넋 놓고 있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 오늘 참으로 애석한 것은 윤동주 선생 묘소와 생가에를 못 가본다는 것. 승욱은 대답했다. 아니, 생각만 했었나···.
곰이요, 진짜 곰들을 본다고! 떠드는 소리들에 고개를 드니, 버스는 정말 곰들의 사육지에서 멎었다. 고대 유럽에서는 경외의 대상이었다는 곰들을 현대 동양에서는 인간이 사육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무엇인가 기념품을 사라고 할 모양이었다. 사육장 앞에서 버스를 내릴 때에도 승욱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도주 중의 죄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몸통에 크게 번호를 써 붙인 버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저 버스들 중에 그쪽 일행들이 섞였을까. 그냥 버스에 남을까 하다가 차라리 모자를 깊숙이, 선글라스도 썼다. 고개를 숙인 채 승욱은 사람들 틈에 섞이는 쪽을 택했다.
천 마리도 넘게 사육되고 있다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죽어가는 반달곰들을 보게 되었다. 어젯밤 죽은 송아지가 생각나서 목이 비릿해졌다. 인간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마주 바라보는 반달곰들의 흐릿한 검은 눈알은 영겁의 물, 천지의 표면과 같은 물기에 젖어있었다. 슬픔이 번져난 눈물, 울고 싶겠지. 곰들도 울 것이야. ‘질끈 동여맬 허리띠’도 없이. 승욱은 생각했다. 이들도 사람처럼 발바닥으로 걷는, 웬만한 지능의 포유동물이다, 백두산에서 뛰어놀던 유년시절에는 앞으로의 지난한 생을 예감이나 했겠는가. 서너 살인가 네댓 살이 되면 포획당해서 이 수용소로 끌려온다. 인간들에게 최고 건강식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안내인의 설명으로는 주 1회 쓸개즙을 빼는 것은 다만 1년이랬다. 그리고는 20년 정도 자연수를 누린다고. 누린다면, 누릴 수 있다면, 왜 산으로 다시 돌려보내지 않을까. 성년의 반달곰들은, 산속의 반달곰들은 다만 위험스러운 존재일까. 지구는 반달곰들이나 송아지들이 아닌 인간들에게만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이다. 하느님은, 신은, 오직 인간들을 위해서 존재하신다. 공정한가, 그런 의문 대신에 인간들은 신의 선물에 기뻐했다. 선물을 사느라 바빴다.
돌아오는 일정은 더욱 바빴다. 다만 돌아오는 일이었다, 다시 연길로, 다시 대련에서 일박,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20층도 넘는 ‘완다구어지판디엔’, 대련만달국제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경, 너무 빠듯한 시간이었다.
새벽에 서두르지 않으려면 짐을 잘 꾸려두어야 한다. 바로 들고 나갈 수 있게. 이런, 여행가방 안에 있던 꿀병이, 어머니 드리려 샀던 꿀병이 깨져있었다. 백두산 가기 전에 들른 가게였다. 건물 주변으로는 ‘장백산정원’ 팻말이 있었고. 길가에는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었다. 아직 여름인데 고지라서 서늘했나, 코스모스도 있었다. 옛날 어릴 적의 뜰 그대로였다. 세상에나, 패랭이꽃들도···. 광식이 동생 광순의 러닝셔츠에 물든 꽃잎, 그 패랭이꽃이었다. 광순이 러닝셔츠 바람으로 오빠를 따라 승욱네 집으로 뛰어들 때였다. 가끔 그러듯이 광식이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소란이 나면.
휴우, 거기서 유리병에 들어있는 꿀을 샀구나. 그대로 버스 안에다 두었던 것을 연길 대련 사이 비행기를 탈 때 무심코 여행가방에다 옮긴 모양이었다. 어떤 바보가, 바로 승욱이 그랬다. 정신 차려, 노승욱 투틸로! 아무리 두꺼워 보여도 유리병인데, 아무리 따로 잘 포장했더라도 유리병인데, 그것을 여행가방 안에 넣어 비행기 짐칸에 싣다니. 꿀을 살 때까지는 멀쩡했던 승욱이 백두산 산정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뒤로는 아예 정신이 어딘가 밖에 있었나 보았다. 종일, 그 뒷날도 버스가 멈춰서는 곳마다에서 두리번거렸다. 겉으로는 멀쩡한 표정을 하고서는 마음의 동요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한국사람들 관광이라고 하는 것이 코스들이 정해져 있을 것이라서, 언제 어디서 그 소그룹과 다시 마주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승욱을 매 순간 옥죄고 있었다. 정면으로 맞닥뜨린다면, 그런 순간이 닥치면··· 아는 척, 모르는 척, 어떤 표정을, 무슨 말을, 상상만으로도 공포였다.
연아, 대체 우리가 스친 것은 맞는 것이냐? 꿈이었을 리는 없어. 꿈이라도 그렇지, 하필 이역만리 산꼭대기에서 그것도 대낮에. 사실로는 눈을 감았다가 뜬 것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나를 못 본 것은 틀림없겠다. 봤는데 못 알아본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91, 92, 93, 94, 95, 96, 97, 98, 99 그러다가 새천년, 01, 02, 03, 04, 05. 새천년 아침에는 무엇이 새로워졌을까. 무엇이 결정적으로 변하였을까. 연두가 있다 없다. 그것도 맞다. 확실히 맞다. 연두는 승욱의 20세기에, 지나간 천년에 있었을 뿐이다. 바뀐 그 세월 동안, 그래 세월은 흘렀구나. 강산도 변했구나. 그런데 그 동안 나를, 형이라 부르던 나를, 생각은 한번이라도 해봤냐. 한번이라도. 아니, 미쳤구나, 너. 봤으면, 알아봤으면 어쩌려고!
···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그래, 차라리 숨죽일 시간이다. 서른 살 시인이 이런 시를 발표했었지. 서른 살에 대단해. 지금쯤 마흔은 되었겠다. 얼마나 더 많이 썼을까, 앵두가 익을 무렵, 연두가 익을 무렵. 승욱은 고개를 저었다. 정녕 미쳤나 보았다.
깨어진 꿀병을···.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아예 화장실로 옮겨앉아서, 난리도 아니었다. 깨진 유리병 주변의 소지품들하며 아예 트렁크 전체를 다 닦아내야했다. 낼 새벽 출발인데 어디서 어떻게 새 가방을 구한단 말인가. 빨랫감들이 된 것들은 따로, 물도 아닌 그냥 액체도 아닌 끈적끈적함의 대명사인 꿀을, 깨어진 유리 파편들을 처리해야 했다. 넋이 나갔는지 손도 손가락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몇 군데서 피가 흘렀다. 날밤을 샜다.
노샘, 뭐해요! 잠을 못 잤으면 식사라도 제대로 해야지요. 이제 또 강행군인데. 박 선생은 좋은 사람이다. 걱정이 심했다. 눈을 거의 감은 채 집어 삼키기에는 너무 푸짐해서 아까운 아침 식사였다. 여느 아침 식사들에 비해도 대단했다. 한없이 길게 차려진 음식들은 접시에 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식당에서도 비행장에 내려서도 그 다른 일행들은커녕 자신의 일행들도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흔들거렸다. 비행기 안에서는 앉자마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인천 도착하면 깨워줄 것이다.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검푸른 물기가 번져온다. 천지에서 퍼 올린 검은 물이 범람하고 있다. 앗, 호수가 바다닷! 그는 호수에 잠긴다. 바다에 잠긴다.
순간적으로 온몸을 찌르는 전기다. 진원지는 손가락인가, 어디선가 번개 같은 전류가 흐른다. 어쩌자고 커다란 날개를 편 채 무작정 주위를 돌면서 한눈을 파는 거냐. 아직껏. 깃털 날개를 방향도 모르는 채 펄럭이기만 하면 어쩌라고. 전위차가··· 지면과 연결된 철탑이나 전봇대에 닿으면 참새든 황새든, 사람이라도 감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아. 그 목소리! 연두는 감전으로 왔었다. 왔었다가 멈춘, 멀어진, 사라진···. 사라진 순간이었다. 때 아닌 시간, 느닷없는 곳의 연두는 다만 환상. 감춰진 벽을 뚫고 드러난···. 그것은 그냥 가지 않았던 순간, 침묵의 순간이어야 했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그는 이번에는 앞으로 고꾸라지는 느낌이 아니라 바다 위에 떠있는 느낌으로 가라앉는다. 가라앉고 있다. 소리 또한 사라진다. 검은 물은 부드럽다. 바닷물이 해안으로 밀려든다면 푸짐한 육중한 모래 언덕에 그를 내려놓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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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교수세계 통권 28호 2025년 12월, 144~ 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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