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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29 장편소설 <날마다 시작>
- 2024.09.22 침묵 7 - 울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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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8 침묵 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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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7 – 울타리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 기형도, 「장미빛 인생」(1987)에서
울타리가 높다. 높으면 담장이라던가. 담장들은 점점 높아간다. 일인가구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는 그가 슬픔에 민감하게 된 것은 이중으로 이유가 있다. 군대 내에서 사회불안장애 판정으로 고생했던 이래 한 세대가 지난 오늘까지도 사회생활 적응에 능숙하지는 못하다. 그 중 하나가 그 사회불안장애의 약자를 해마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도 이유일 수 있다고 느낀다. 사회불안장애를 의사들처럼 영어로 해보다가 약자로 읽으면 SAD - 이건 문자 그대로 슬프다는 뜻이다. 사회불안장애는 슬픔을 뜻한다.
슬픔은 기쁨, 신뢰, 두려움, 공포, 놀람, 혐오, 분노, 호기심 또는 사랑, 미움, 노여움 같은 정서의 하나로 분류된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노여움에 사로잡혀 현실을 부정하려다가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의 복받쳐 오는 감정, 느리게 또는 급하게……. 결국은 현실을 외면함으로써 울타리 안으로 숨어들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그 단계에 이르면 슬픔이 극복되는 것이겠거니. 그래야 살아남을 것 같다. 심리학 서적은 열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는, 승욱은, 그 나름대로 슬픔에 대항하기 위해서 숨을 크게 쉬는 버릇을 키웠다. 비릿한 슬픔이 서서히 밀려올 때면 말이다.
비릿함으로 버물려진 여러 감정들, 그 가운데는 우선 비굴함이 섞인다.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비굴해지는 하루하루는 군대 이후가 아니었다. 실은 군대로 도피하려던 시절부터의 버릇이었다. 군대로의 도피는 어떤 의미에서는 특권이었다. 군복을 입어보고 싶어도 군대 밥을 먹어보고 싶어도 입대 자격에 미달했던, 그러니까 학력미달로 병역면탈된 불우한 청년들도 함께 살았던 나라였으니까. 남북의 철조망이 아니더라도, 쉽게 넘을 수 있어 보이는, 그러나 쇠심줄 같이 넘지 못할 울타리들이 널브러진 세상이었다. 갈대 울타리로 보인다 해도 한 올 한 올 와이어로 감아서 결코 넘지 못하는 울타리들 말이다. 신의 아들들, 장군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리고 어둠의 자식들 – 모두 영화나 소설작품들의 이름을 딴 은어인데, 이런 부류들이 각각 울타리로 나뉘어 살았음 직하다. 아무튼 그는, 승욱은 그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범주였나, 실존의 고뇌로 인하여 대학캠퍼스에서 군대로 피난을 갔었다.
군 생활은 그러나 도피에 최적인 무릉도원일 리가 없었다. 지금도, 십 년 이십 년 해가 바뀌어도 그 시절 군부대 내의 의문사 이야기가 불려 나왔다. 젊은이들의 이야기라서 언제나 또 오래오래 가슴을 후벼 파는가. 시도 때도 없이, 최근에 부쩍, 군사정권 시절에 관한 관심들이 고조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영화 《서울의 봄》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두 사람 몫의 영화표를 샀다. 그런데 노쇼를 택했다. 함께 갈 사람을 구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혼자서 보러 갈 것이었으니까. 그저 그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를 표한다는 심정으로 표를 샀고, 그러다가 실화를 굳이 영화로 보고 싶지 않아서 안 갔다. 그는 인지의 폭이 넓지 않아서 정우성으로 장태완을 보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것도 아닌 이태신이라는 제3의 이름으로 장태완을 봐야하는 것이 불편했다. 울타리 이쪽저쪽으로 편 가르기, 더럽고 치열한 싸움을 재차 체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돈이 남아돌아서 표 두 장을 산 것은 아니었다. 어떤 다른 영화 때는 다섯 장을 샀었고, 혼자서 갔다. 가끔은 책도 두세 권, 또는 딱 한 번이었는데 10권도 샀다. 실업 중인데! 실업 중이라도 살 것은 샀다.
이야기가 삼천리로 빠졌다. 이야기란 늘 그런다. 설명하려던 가닥을 잃고 더러는 주제도 잃고 헤매게 되는 것이 이야기다. 다시 의문사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시청한 PD수첩에서 시작된다. 80년대 초 군대 내 비극들, 그가 입대하기 전에 생겼던 일들이다. 그 시절에는 어딘가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고 했다. PD수첩과 상관없이 또 다른 끌려간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무렵 국보위에서 사회정화를 위한답시고 삼청교육대를 만들어놓고는 할당량을 주니까, 술 과하게 먹고 전봇대 아래서 토하던 공무원도 끌려갔다 했다. 심지어는 말썽꾸러기들을 정신개조해서 보내준다는 선전을 믿고 어머니가 아들을 일부러 집어넣었다고도 했다.
군 입대도 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도 부동시다 뭐다로 태어나서 또는 그렇게 만들어서 군대라는 단어를 모르는 특권층이 있었지만, 가끔 느닷없이 아무데서나 잡혀서 끌려간 대학생들도 있었다. 잡혀서 군대로 끌려갔다, 이것은 승욱의 표현이 아니라 팩트였다. 그들은 경찰서에서 조사받는 중에 입영통지를 받아들고 휴학계를 써야했고, 특수지원자로 분류되어 신체검사도 없이 바로 훈련소를 거쳐서 주로 전방 GOP 소총수로 배치되었다. 입대했다기 보다 입대 당했다. 강제입대, 강제입영. 요즘 요양원 강제입원과 맞추어보면 강제입대, 강제입영이라는 단어가 적정하다.
강제로 끌려간 병들일랑 그냥 거기 처박아 두지. 거기서, 울타리에 갇혀 30개월쯤 썩다 보면 – 썩다, 아주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때 그들은 딱히 그런 기분이었다. - 대개는 꺾이어 나오는데, 그냥 놔두지.
문제는 꺾이다가 못해 더러는 자멸한다는 데에 있었다. 자멸시킨다, 죽게 한다, 죽인다가 더 옳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그날 티비 프로그램에서 다룬 L이병들 말이다. 40년도 더 넘은 옛 이야기이지만 너무도 시퍼렇게 가슴을 도려내는 살아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승욱이 아직 중학생일 때쯤의 일들이었다. 연두는 더 후배인데도 해직교사인 오빠에게서 들었다고 종알거리는 것들이 많았다. 뭘 모르는 자신과 비교 되어 늘 불편했었다.
5.18을 죽어라 감추고 왜곡하려던 군사정권 최악의 시절, 광주 밖에서 5.18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가가 먼저였다. 군은 대학가를 차단의 첫 목표로 삼았고, 여차 하면 강제입영, 이어서 군대 내에서 소위 녹화사업을 벌였다. 푸른숲 가꾸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죽음을 가꾸었다. 그날 프로그램 도입부에 소개된 경우는 1962년 생 L, 2대 독자로, 그러니까 입영대상자도 아니었던 2학년 학생의 죽음이었다. 체포 3~4일 후 군대에 처박았다는데, 6개월 차 의가사제대 일주일을 남긴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했다. 이유야 무엇이었건 군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고 나와서, 소속 GOP도 아닌 2xx 보안부대에서, 하필 목을 매달기조차 위태로워 보이는 테니스장 심판대에 매달린 채로.
그 프로그램은 6명의 젊은이들을 다루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서러운 것은 48장의 유서를 남겼다는 1961년 생 H군의 이야기였다. 눈물 없이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철도고를 마치고 서울대 장학생,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입대했을 때까지는 꿈을 실현해 나가는 탄탄한 인생이었단다. 그러던 것이 1년 만에 정기휴가를 나왔다가 귀대 후에 곧바로 군 수사기관에 연행되었고, 5일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문제는 그 직후였다. 제출했던 진술서에는 주로 본인의 학생회 활동과 동료들을 위한 변명이 담겼다지만, 바로 그 진술서가 그로 하여금 죽음을 결행케 한 범인이었다.
특별정훈교육 대상에겐 두 갈래 길 뿐이다. 프락치가 되느냐, 죽느냐! 승욱이 그런 생각에 미치자, 티비 시청 도중에 순간 엉뚱한 인물이 떠올랐다. 근년 들어 엄청나게 이슈화되었던, 초고속으로 벼락출세한 경찰간부 K였다. 그 네모난 얼굴의 소유자는 조사의 막바지에서 살 길을 택했던 사례였다고, 여론은 술렁거렸다. 삶을 택한 네모난 K도, 죽음을 택한 얼굴 없는 H도 다 같이 시대의 강요로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던 청춘들이었다.
프로그램 말미에서 누님이 읽어 내려간 H의 유서 한 대목이 귓속에 박혔다. 그간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주위의 모든 분들께 이 땅의 민주주의가 오기도 전에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합니다. 수 없이도 삶에 대한 미련이 많은지 몇장을 새로 써도 드릴 말씀이 적당치 않고 제가 부족하여 [……] 하느님과 제 이웃형제들의 사랑에 저희 가족을 맡깁니다.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와 경제 정의를 이루어 주십시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의…… 책임…… 티비 프로그램이 사람을 울렸다. 그를 울렸다. 승욱은 목 놓아 울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H를 찾아서 치열했던 그 삶을 돌아다보았다. 스물 두 살의 그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노동자 야학인 샘터교양교실에서 교사로 활동했었고, 울톨릭(서울대가톨릭학생회)에서의 활동도 적극적이었고, 3년 여 울톨릭 사무실에 남겼던 글들은 사후 자료집으로 나왔다고 했다. 다 찾아서 읽어보진 못했다. 소개에 의하면 그의 사상적 중심은 가톨릭신앙이었고, 수난자 예수의 삶을 따라 졸업 후 노동사목 신부를 꿈꾸고 있었다는데. 참으로 열심인 청년을 자살로 내몬 것은 ‘80cm 길이의 곤봉’으로 초죽음이 되어 ‘확인하면 다 나타날 부분’만 써낸 40장에 걸친 진술서와 반성문이었다. 그렇게 풀려나온 이튿날 새벽근무를 자청한 그는 실탄 15발을 지급받아 나갔고, 곧 죽음을 선택했다. 전 현실에 순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전 현실이 요구하는 비인간적이고 나태한 길을 거역한 사람입니다.
안타깝다. 아깝다. 몇 년 전 승욱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속없는 동기들의 괴롭힘을 못 이겨 생을 마감했던 중학생의 유서가 다시 떠올랐다. 자살한 사람들의 유서가 왜 이렇게 진지한가, 생각하다가 그는 자신의 천박함에 놀랐다. 얼마나 진지한 사람들이 자살을 준비했겠는가. 그 참담한 절명의 순간들에 공감을 못하면서 그들의 유서나 읊는 비인간적인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살은 유서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사고보다도 무섭게 다가왔다. 티비 프로그램에서 거론되었던 다른 이름들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의문사라고 하더라도 사고사이기를, 차라리 타살이기를 바라면서 옛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1960년생 K, 고려대학 경제학과 80학번, 현대철학연구회 등에서 활동하다가 4학년 봄 강제징집당한 그도 유서를 지니고 있었더란다. 그러니까 자살이었다. 아, 그 특별한 유서!
기다림밖엔 / 그 무엇도 남김 없는 세월이여 / 끝없는 끝들이여 / [……] /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 죽기 전엔 디뎌보마 / 죽기 전엔 / [……] / 끝없는 끝들이여 / 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 죽기 전엔 기어이 / 결별의 글 한 줄은 써두고 가마 //
유서는 곧 그가 쓴 글도 그의 필적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너무나도 유명했던 김지하의 시 「끝」을 친구가 적어 보내주었던 것이랬다. 그때까지는 대학생들의 우상 중 하나였던 시인 김지하!
시를 다시 읊어보던 승욱의 마음은 좀 복잡해졌다. 당시 김지하는 매사에 어중간한 그도 들어서 알게 된 저항시 「오적」 의 시인이었다. 시인이 일찍이 무엇인가로 – 그때 그는 민청학련사건 같은 것을 이름도 잘 몰랐었지만 - 사형 언도를 받았던 일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국제PEN클럽 세계본부며 사르트르며 세계적 석학들이 구명 탄원서를 냈을 정도의 거목이라 했었다. 그뿐이 아니라 그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노래로 불리어, 그것을 모르면 간첩이었다. 아니, 간첩도 부러 따라 외웠을 것이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 내 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 목마름의 기억이 /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그런데 승욱이 아직 군에 있던 1991년, 대학가에서 P양의 분신으로 촉발된 분신행렬들 속에서 「오적」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걷워 치워라.’ 불이나면 누군가는 불을 꺼야하고 찬물도 끼얹어야 했겠다. 하지만 그때는 찬물의 효과는 보려하지 않았고, 찬물 끼얹는 사람에 대한 증오만 증폭되었다. 몇 해가 흘러도 무엇이건 격한 소용돌이 속이었다. 젊은 시절이었나. 그런 시절이었나.
또 다른 죽음들도 출발은 시위 도중의 체포였다. 1982년 또는 1983년 어느 날 가두시위 중 체포당하여 두 세 명이서 45인승 버스에 실려 병무청 직원 5~6명, 경찰 2~3명 함께 새벽 1~2시경 전방에 도착했던 K 일행을 마중(?)나온 보안부대 중사의 손에는 급조된 병적기록카드들이 들려있었겠다. 이름과 생년월일, 학력이 적혀있고, 오른쪽 상단에 빨간색 고무인으로 특수지원(대학에서 시위하다 강제입영)이라고 찍혀있었겠다. 그리고 누군가는 3개월을 또는 얼마를 버티다가 자살로 타살로 의문사로 생을 마감했겠다.
자살자 상당수는 녹화사업에 다녀오면 죽었다. 녹화사업이란 것의 정체가 바로 살인의 시작이요 완성이었다. 가장 양심 있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양심 없는 변절을 강요했으니.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실토한 동지들의 이름, 동지들의 미래에 대한 죄책감, 그것을 넘지 못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더러는 이겨내고 살아남은 모두를 긍휼히 여길밖에. 누구라도 그 무서운 시험에 들게 되면 떨었을 것이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해주십시오.’(마태오 26:39) 예수님을 따라 이렇게들 기도했을까. 신앙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무서웠을까. 다행히 K도 또 다른 학생들도 교회 대학생부에서 활동한 신자였다 하면 그것이라도 위안이 되었다. 하느님께서 예비해두신 천국이 있다면, 있을 것이다, 분명 거기에 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H도 K도 또 다른 K도 과거의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과거에 끝나버린 사람들이다. 끝났다고 그 과거를 외면할 수도 없다. 사는 것이 목적인 생명체, 그 생명체를 누가 짓밟았는가.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닌, 내몰린 죽음의 원한을 꼭 기억해야한다.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할 것 같다. 슬픔도 좌절감도 비릿함으로 녹아든다. 창문을 연다.
한편으로, 같은 1960년 1961년 1962년에 태어난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세상의 주인이 되어있다. 떠들썩한 주인공들, 젊은 시절의 공으로, 또는 그저 운이, 타고난 수저가 좋아서 세상의 중심에 서서 세상을 흔드는 그들 말이다. 심지어 아주 밉상도 있다. 많다. 세상의 정점들, 검찰이라는, 국회라는, 여러 이름의 어마어마한 권력 집단에도 득시글득시글하다. 그들이, 저들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어디로? 그들은 오늘도 공개적인 울타리를 쳐서 안과 밖을 가른다. 울타리는 견고하다. 철옹성이 고수된다.
나머지, 승욱이 우리들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그들은 무엇인가가 불발인, 많은 것이 불발인 시간을 살아간다. 우리들 – 그렇게 말하자면 조금 비겁한 느낌도 든다. 그가 생각하는 우리들 1969년생도 어쩌면 세상을 이끌어가는 저들과 동년배다. 잘난 사람들은 벌써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무리에 속해있다. 낭패다. 세상을 한탄하기에는 위정자들 탓만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니! 그는 다시 울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이들의 책임, 아니 이미 젊지도 않는 우리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는 운다. 인간의 책임이라는 단어는 짐이자 모멸감으로 돌아온다. 그는 모멸감에 운다.
지금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불우했던 군 생활도 끝나는 날이 왔었다. 1992년 여름이었다. 그때 브이 자를 그리면서, 웃자면 두부라도 먹으며 나서야했던 철문을 나서서 집으로 향할 때, 승욱의 발걸음은 보무가 당당하기는커녕 비실거렸다. 두발로 걸어 나왔으니 소위 꺾이고 망가졌다기 보다는, 아마 배추절임 정도였을까. 여름에 푹 절여져서 돌아온 그는 아팠다. 아프고 싶어서 아팠다. 등록 기간을 놓쳐가면서 아팠다. 가벼운 입퇴원을 반복했다. 군대에서의 병명이 핑계가 되어주었다. 어머니에게는 정말 미안한 마음이 일면서도, 입대 전에 그 나름 겪었던 악몽의 가을학기가 떠올라서 등록의 손이 머뭇거려졌다.
복학을, 왜 2학기 등록을 망설였을까. 그는 몇 십 년이 지난 오늘도 그때의 자신을 모른다.
그래, 집에서 푹 좀 쉬자이. 무탈하게 제대했응께 얼마나 이뻐! 기특한 겨!
꾀병 같아서.
꾀병이라니. 원래 재수들도 하고 뭐, 또 연수도 가고 그런담서. 대학공부가 이러저러 뽈강 4년만 걸린다냐. 몸이 몬자제이.
예, 엄니.
숨 좀 돌리고요, 라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대한민국 젊은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군 생활을 마치고 온 것이 무에 대단해서 숨을 돌리겠다고 말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더라도 그렇게 시골집에서 9월을 넘겼다니. 복학 기간을 완전히 넘기고도 미적거리고 있었다. 군인도 학생도 아닌 젊은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군 입대를 정하고 비실댈 때보다 더 미묘한 일렁임으로 편치 않은 날들이었다. 일단은 대학가로 돌아와야 했다. 슬그머니 돌아왔다.
가을 들어서는 느닷없는 방향에서 뉴스가 튀어나왔다. 이름도 특이한 M교수의 소설책 한 권이 질러댄 불꽃이었다. 서울 명문대에서 강의 중이던 교수가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혀가서 구속되었다. 출판인도 함께였다. 말을 섞는 사람이거나 말을 숨기는 사람들 모두가 속으로는 다 같이 불이 붙었다.
엥? 필화사건인가? 필화라고 하면 「오적」 쯤이라야 되는 줄로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승욱의 눈으로는 실망스러운 주제였다. 이 판국에 외설이라니! 문제의 소설 제목은 『즐거운 oo』였다. 그래도 승욱의 느낌으로는 일단 표현의 자유 편을 들고 싶었다. 그러다가 잠시 곧 막혔다. 외설 그것은 아무래도 편들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제목도 너무 진부하다고 느꼈다. 문학작품이라면, 문학작품에서 문제적 성생활을 쓰고 싶었다면, 제목이 이렇게 순진무구하다면 그건 아니다 싶었다. 통속 중에서도 통속소설들과 다를 게 뭐야. 최소한의 아이러니도, 그런 빌미도 없는 적나라한 그냥 이야기라면.
문득 「장미빛 인생」 이란 시가 떠올랐다.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그렇게 끝났더라 싶어서 책을 찾아보았다. 군대에 유일하게 들고 들어갔던 시집이라서, 늘 가까이 있던 시집이라서 곧 찾았다.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 [……] /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 [……]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밋빛 인생을 증오할 수 있어야 시다, 라고 승욱은 생각했었다. 시인 기형도가 – 앗, 그때 문제된 M교수와 같은 대학이었다 - 첫 시집도 나오기 전에 서른 해도 못살고 요절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아깝고 서러워도, 그 때문만이 아니라 시가 끌어당겼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놀라고 놀랐다. 2학년 2학기를 비실댈 때, 그도 인생을 증오했었다. 차마 증오까지는 못가는 에너지로, 비실비실 인생을 피했다. 장밋빛은커녕 우선 연두를 피했다. 강의실을 피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시집이었고, 이후 그 작은 시집은 늘 그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외설 논란이 들끓을 때, 어쩌다 들린 서점에서 또 다른 기형도를 발견했을 때 승욱은 너무 놀랐다. 놀랍고 반가웠다. 유고시집 『입 속에 검은 잎』 아닌 또 다른 유고가 발표되어 있었다니. 유고들이 쌓여있었구나, 참 다행이었다. 그때 발표된 것은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었다. 그 중 1984년 6월 「편지11」을 읽었다. ‘이상해. 요즈음은 매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어제는 국문과 ooo교수와 장밋빛 인생인가 하는 데서 마셨다. oo형이 나에게 성격 파탄자라고 말했다.’ 아아, 그 둘은, 아홉 살 차이 그 둘은, 문학회 소속의 정외과 복학생과 신임 국문과 교수는 바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카페에서 맥주를 마셨었구나. 누구는 장밋빛 인생이라 쓰고 인생을 증오했고, 누구는 장밋빛 인생을 외설의 빌미로…….
단어가 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단어는 그냥 거기에 있다. 단어를 삼키는 것은 인간이고, 그것을 소화해서 내뱉는 것도 인간이다. 그렇게 재창조되어 나온 단어를 확산시키는 것도, 파묻는 것도 인간이다. 칭송과 매장은 어느 지점에서 갈리는가, 누가 가르는가.
평생 공부하려고 했던 역사학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역사적 사실은 사건들의 파편으로 존재한다. 역사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파편들을 모으고 정리한다. 파편들은 우선순위로 배열되고 단어들에 의해서 채색된다. 우선순위는 누가 정하는가. 수채화 물감은 누가 고르는가. 아예 유화물감으로 덧씌우지는 않을까. 진실의 파편들도 두껍게 덧입혀 가릴 수 있다. 그러고도 명화가 탄생한다. 세계적으로 그 나이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화들은 지속성이 탁월한 유화작품들이다.
언뜻 고등학교 미술시간이 떠올랐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키 작은 여선생님이었다. 처음 반년은 연필화만 그리게 하셨다. 대상을 마음대로 크게 또는 작게 스케치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예요. 데생이 기본이라고 하시면서도, 머리통을 너무 크게 그려도, 너무 작게 그려도 괘념치 않으셨다. 칠판에 여섯 장 씩 늘어놓고 품평을 할 때, 그림을 그린 애들도 왼쪽 오른쪽으로 세 명씩 서 있었다. 자신의 데생이 이야기될 때면 어깨 넓은 녀석들도 대개는 고개를 숙였다. 보는 아이들도 가끔 키득거렸지만, 선생님은 다 괜찮다 하셨다. 그렇게 보여서 그렇게 그리는 것이라고, 보이는 대로 그려진다고. 자신감 있는 터치만 강조하셨다.
다음 반년은 수채화만 그리게 하셨다. 이번에는 무슨 색을 칠해도 괘념치 않으셨다. 다만 덧칠했을 때 속에 비치는 색깔 때문에 나중에 칠한 색이 달라 보이는 것을 유념하라고 하셨다. 그랬다. 누가 덧칠한 초록과 다른 누가 덧칠한 초록이 사뭇 달랐다.
앗, 초록, 초록들! 그러니까 녹화사업! 빨갱이 빨강 물을 빼내고 초록물을 들이는 사업! 그런데 대개는 단순 시위중 잡혀갔던 그들에게, 상당수 기독교인이었던 그들에게 빨강 물이 들어있었을까. 억지 빨강 위에 덧칠한 초록은 뭘까. 노리끼리, 노르스름, 누런, 연노랑, 샛노랑, 진노랑 등 하고 많은 노랑에, 하늘도 푸르고 숲도 푸르다는 우리 민족의 색감은 예민하면서도 너그러운 편이다. 다만 그것이 무슨 사업이 되면 혹독했다.
선생님은 그때 인생은 늘 덧칠을 하는 것이라고, 처음 도화지 상태에서 색칠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젊어서 너무 섣불리 너무 확 칠해버리면 살 여유가 적어져요. 살 여유 – 그런 단어는 피 끓는 열혈 남자애들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단어였다. 아예 귓등을 스쳐가버린 단어였었다. 그게 왜 장밋빛 인생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랐을까.
그는 고개를 휘둘렀다. 보이는 것은 무색, 그러니까 회색 그리고 침묵뿐이었다.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주제는 실은 역사학이었다. 그가 복학을 실행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도 역사학은 이미 복학한 다른 친구들의 형태로 그의 주변에 있었다. M교수 사건에 열을 올리고 교수를 성토한 것도 그들이었다. 그는 약간의 거부감에도 옹호하는 쪽 울타리에 들기로 했다. 예술의 자유에 비하면 반대 논리가 마땅치 않아서였다.
이 쑥맥이가! 복학은 안 해놓고 뭔 딴 소리다냐!
친구들은 그를 놀렸다.
소설이 윤리도덕은 아니잖어. 작가가 이 소설은 인간의 자아확립이 주제라고 하잖아! M교수는 대학 수석졸업에 어디까지나 실험정신이 강한 교수로서……. 게다가 유럽에서는 성인이 성인물을 향유하는 것을 개인의 권리로 인정하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
뭐라? 문학평론이라도 하려는 거여? 사회학과로 전과할 텨? 게다가, 너, 노승욱 투틸로! 너네 교황님은 뭐라시는데?
사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황이 되시어 10여년 만에 한국을 두 번이나 방문하셨으니 한국에서도 유명인사였다. 세계 평화와 반전사상을 설파하셨고, 개신교와도 경직되지 않고, 모든 면에서 너그러우신 특출한 분이셨다. 물론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좀 심하지만, 밥 딜런도 좋아하신다는 교황님은 연애소설에 대해서도 한없이 너그러우실 게다. 친구들에게 딱히 말로는 안했지만 그런 생각이었다.
승욱은 그 당시 M교수의 편에 서는 것이 문학, 심리학 또는 윤리학 측면에서 옳다기보다는 그냥 소수자에 대한 동조라고 믿었었다. 그렇게 괜한 일에 열을 올리면서 실제의 문제인 복학과 대학생활에 대한 확신의 부족을 감추었다. M교수 사건도 그의 뇌리에서 곧 희석되었다. 다른 교수들도 다른 이유들로 해직, 복직, 재임용탈락, 복직의 험난한 교수생활을 맞닥뜨린 경우들도 드물지 않았으니까. 울타리 밖은 늘 그렇게 쉬이 잊히곤 했다.
승욱이 다시 M교수를 떠올린 것은 얼마 전 70대 독거노인의 고독사 기사 때문이었다. 노인이 영어교사였었다는 기사를 보면서, 가만, 언제더라, 결국 M교수도 외롭게 사망한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자살이라고 했었다. 짧은 유서가 있었다. 그리 되도록 세상은 이슈에만 민감했었다. 덩달아 가슴이 덜컥했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그렇게 마감하는구나. 그렇게 마감되는 것이구나.
평범해도 잊히는 사람들 천지다. 평범했을 그 영어교사는 끔찍하게, 더는 끔찍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발견되어서야 신문에 났다. 어떻게 된 것이, 약을 먹은듯한 쥐들이 죽어있는, 밀폐된 쓰레기통 같은 방 안, 삶을 포기한 흔적이 가득한 곳, 한쪽에 그대로 쌓여 있는 택배박스, 그 안에서 나온 건강보조식품이라는 이질적 존재는 인생이란 불가해의 존재라고 믿기에 족했다. 더욱 그로테스크한 조합은 또 있었다. 유명한 역사인물의 자서전이나 『행복론』과 같은 책들, 마치 수험생의 교재처럼 여러 번 그어 짙어진 밑줄과 동그라미 표시들. 그 지독한 더러운 불행 속에서 인생행복론을 외우려고 했을까.
『행복론』 - 기자는 굳이 저자를 밝히지 않았지만 세네카의 책이었겠지 싶었다. 평생 교사였던 노인은 재산과 명예 또는 쾌락은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고 설파한 대목을 믿고자 했을까, 믿었을까. 최악의 밑바닥에서 과연 정신의 건전성에 기댈 수 있었을까. 그런 책들일랑 조각조각 찢어버리는 것이 제 정신이 아니었을까. 최종적으로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잡힌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죽은 쥐, 건강보조식품, 책들? 곰팡이 슬은 벽 혹은 천장? 보이지 않은 울타리? 울타리.
아무튼 엄동설한에 고장 난 보일러가 차라리 다행이었다는, 시신이 그나마 덜 흉측하게 보존되었다는 그 기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했다. 냉혹한 아니러니 그 자체였다. 기록만이 아니라 애초에 인생이 아니러니일 터다. 장밋빛 인생을 증오한다는.
생의 마감 – 저절로 마감된다. 스스로 마감된다. 차이는 차치하고, 마감은 말 그대로 죽음이다. 그는 긴 생에 관해서보다 짧은 죽음, 순간의 죽음에 대해서 왜 더욱 가슴이 아픈지 의아했다. 긴 삶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분명 합리적일 것인데 죽음이 늘 선두로 다가왔다. 그가 바라다보는 천장, 하늘대신 바라다 보이는 천장은 죽음의 파편들로 가득하다.
사실 누운 채로 천장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는 그것을 실감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발딱 일어나야 정상이다. 젊은 놈이. 물론 젊은 놈은 이미 아니다. 상대적으로는 행여 젊겠다. 아무튼. 눈 뜨고 할 일이 배를 채우는 일이라면, 그 다음 급한 일도 없이 그뿐이라면 서두를 필요가 없질 않은가. 그만한 일로 서두르기가 민망했다. 시간표가 필요해, 시간표가. 그에게는 시간표라고 하는 나사가 필요했다.
시간표에 의해 요일에 따라 움직여 온 그의 삶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의 이니셔티브가 아니었다. 그가 살았다기 보다는 어떤 거대한 기구가 그에게 주는 과제 또는 계획에 따라 맞춰 돌아갔음이 분명해졌다. 풀이 자라면 풀을 매주고 병충해가 생길 조짐이면 병충해 약을 치는 농부와도 비슷했다. 결정은 농작물이 하고 농부가 서두르듯이, 강의라고 하는 일이 대단히 적극적이기는커녕 매우 수동적인 무엇이었다. 강의란 그 내용에서도 전혀 주관적일 수 없고, 최소한 표준화된 전문지식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간의 노력으로 점철된 세월들은 독창적인 학문의 고지에 이르는, 행여 이를 수 있을까 조바심 내는 과정이었다. 첩첩산중을 넘어 무지개 같은 것을 바라다가, 도중에 멈추어버렸다. 어쩌면 이대로 도태될 수도 있을 그의 상황은, 그의 상태는 회색 안개다. 3년마다 채용되는 전공 시간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글쓰기와 같은 교양과목으로라도 방향을 틀어보는 것이 현명할까, 비굴할까. 행여 다른 대학을 시도해볼까. 겹치기 하는, 잘 나가는 동료들도 있었다. 왜 그는 못할까.
실패의 먼 원인은 대학생활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제대 후에 곧 바로 복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전공에 대한 방만한 회의였었다. 역사학이란 이름으로 된 기록물들은 승리자의 시각에 의한 것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자 – 그것들이 무의미한 군대생활을 이겨내면서 깨달은 결론이었다. - 모래위에 짓는 집을 어찌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었다는 말이다.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집이라면 외면하자, 그것이 하나였다. 그런데 외면은 간단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 것은 맞다. 그럼 반석을 찾아……. 딱 거기까지였다.
예컨대 『세계문화사』 , 15cm x 21cm 크기에 370쪽 안에 깨알같이 함축된 내용들은 어떻게 간추려졌을까. 또는 앙드레 모루아가 쓴 『영국사』도 『미국사』도 객관적일 것이라는 장점을 지닌 채 번역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일사』 그리고 당연히 『프랑스사』도 있었는데, 물론 사학과에서는 이 모든 것이 기본적인 추천도서들이었다. 한 인간이 이 나라들의 역사를 다 쓸 수 있다는 생각에 감탄도 하면서 의아하기도 했었다. 한꺼번에 다 빌려와서 넷을 포개어 놓는다면 목침 베개 높이도 넘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일까. 그땐 몰랐었지만, 만일 모루아가 유대인임을 감안하면 달리 읽혔을까. 유대인들은 역사란 목적이 있고 인간에게는 도달해야할 목표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하니까.
아니다. 어쩌면 이 모든 변명은 다 거짓이다. 사학과로 복학하는 일에 울타리를 친 것은 과가 아니라 그였다. 그 자신이었다. 지금에 와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때 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선뜻 그리고 당연하게 복학을 결정하지 못한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작용하고 있었다. 연두, 연두였다. 어떻게든 그 거리를 정돈하지 않고서는 연두를 다시 만날 첫 순간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연두는 교정에서라면 눈을 뜨면 바로 보이는 과 후배였다. 그때 입대를 결정하고 나서 연두에게는 무슨 의미 있는 말이라도 해야 했을까. 대신 아주 대수롭지 않게 휴학을, 군 입대를 말했었다.
왜? - 응. 공부가 안 되네.
왜? - 그냥. 학교생활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왜? - 왜는 왜! 안 되니까 안 되는 거지.
덜컹거리는 맘을 접었다. 와락 껴안을까, 아냐. 흔들리는 각도를 접었다. 사랑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수평이 되어버리면, 수평이 되어버린 사랑은 순간에 멈춤을 깊이 느꼈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하지 않았던 말, 그의 침묵은 30개월의 시간동안 켜켜이 쌓여만 갔다. 숨구멍이 없었으므로 침묵으로 상상하는 단어들도 희미해갔다. 이제 와서 연두를 어떤 말로서 만날 것인가. 와락 껴안을까, 미친 듯. 연두가, 캠퍼스가 두려움이었다.
어느 여름 한낮, 온 나라가 휴전선을 돌아 돌아 북쪽으로 날아간 여학생의 일로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 때, 승욱이 도서관에서 맥없이 쓰러졌었던 일이 그 시작이었다. 전깃줄에 내려앉으려는 순간 풀썩 땅바닥으로 꽂혀 널브러진 새의 이미지와 더불어 끊겨버린 기억, 그리고 도서관 앞 풀밭에서 눈을 뜬 순간 바로 코앞에서 만났던 간지러운 머리카락. 연두, 처음 본 여자애, 과 새내기라던.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이 황새는 참새와 달리…….
연두는 나중에 그가 지껄였다던 이상한 말의 뜻을 묻곤 했었다. 그는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더란다. 그가 다시 눈을 감았을 때, 어쩌면 널브러진 큰 황새의 이미지를 찾고 있을 때, 그는 다시 한 번 감전된 느낌을 받았었다. 그 애는 손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누르면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팔은 맨 팔이었다. ㄱ의 팔과 ㄴ의 손바닥은 전류가 통하는 물질이었을까. 눈을 감은 깜깜한 세상 속에서는 소리 없는 마른번개가 흘렀다. 감은 눈을 치켜뜰 힘도 없었고, 뜨고 싶지도 않았다. 살살 간질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시 한 번 전류의 습격이 왔다. 그는 그냥 꿈을 꾸기로 했다. 지면과 연결된 철탑이나 전봇대에 닿으면 참새든 사람이든 감전을 피할 수 없어요. 그 순간, 어린 시절 선생님의 말씀이 귓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다.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그 애가 뭐? 그러게나. 그 애가 뭔데? 그는 그러고 있었다. 군대생활 30개월 동안 그가 주소를 알리지 않았고 휴가도 어머니에게로 가 보냈으므로, 연두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연두와 연락이 닿지 않도록 주소도 보내지 않았고 휴가도 고향 어머니 집으로만 갔다는 표현이 정직할까. 그냥 있는 사물들처럼, 그냥 있는 친구들처럼 걸리고 켕기는 것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걸리고 켕겼다.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었다.
여자애가 꼭 ‘형’이라고 나를 부르며, 학과에서 추천된 역사책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는! 엉뚱한 독일현대소설 과목이나 수강하자 했던 연두. 어떤 소설의 부제가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낼 수 있는가’ 라고, 꼭 듣자고 졸랐었던.
승욱은 최근에 알만한 교수의 책 『자유의 폭력』을 손에 들었을 때,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연두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 세월 지나고서도 연두의 목소리가. 그런데 그 때는, 군대로 피신해서도, 복학을 앞둔 당시에도, 그 애의 목소리는 부담스럽기만 했다. 무섭기까지 했다.
울타리는 있거나 없거나 부담이었다. 캠퍼스를 떠나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실감하며 숨을 죽였던 30개월은 간질거리는 머리카락에 대한 그리움을 잊게 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 그리움만으로 연두를 맞닥뜨리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무심한 듯 소화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낼 연두의 입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거기에 더해서 그림자처럼 떠오르는 연두의 오빠, 독문과 출신이라던 오빠도 여전히 무거운 존재였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 무거운 부류, 전교조 해직교사는 연두가 박씨처럼 물어 나르는 이삭이 널린 밭이었다. 누군가는 또는 많은 사람들이 심어 가꾸어야 하는 씨앗들은 더러 자라고 있었을까. 연두는 그대로라면 4학년일 것이고, 그 가을 겨울을 지나면 졸업을 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 못할 두려움에 대한 비겁한 답은 침묵 그것이었다. 게다가 세상이란 기어코 도망치려는 사람에게는 옆길을 슬쩍 보여주기 마련이었다. 순간 울타리를 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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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문학, 2024, vol.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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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자락 - 이 노래를 피아노 반주로 들었다.
김동률의 노래로 김정원의 피아노 반주였다.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악이었다. 음악이라니......
음악이 사치이던 몇 년이 지나갔었다. 귀가 먹었었나. 귀가 먹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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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의 일환으로 용아문학상을 수상하게됨은 저에게는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에 앞서 어느 지자체에서 이토록 문화융성에 중점을 두는지, 광주광역시의 관심에 감탄하게 됩니다. 물질문명이 전대미문의 최고조에 달한 21세기 지금, 인류의 미래는 이제 정신문화에 달렸음을 광주광역시는 알고있는 것입니다. 최근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했던 세계한글작가대회를 광주에서 유치하도록 적극 뒷받침해준 사실도 그것을 입증합니다.
한편 우리가 순수시의 대명사로 인식하고 있는 용아 박용철 선생은 비단 시인만이 아니셨습니다. 겨우 서른다섯 해도 살지 못하고 떠난 그의 유고시집만 보더라도 창작시는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유명한‘시적 변용’에 관한 평설 그리고는 괴테와 릴케의 시들, 셰익스피어와 입센 등 해외문학의 번역이었지요. 용아의 정신세계는 이미 세계문학에 깊이 경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에는 시공간의 경계가 없음이요, 문학이란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보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작용하는 오묘한 무엇임이 확인되는 지점입니다.
이제와, 만일 그가 폐병의 저주를 극복 했더라면, 만일 서른다섯 해를 더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으로써 인사말씀을 갈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11.22.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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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6 - 불으한 어리니 한태
불으한 어리니 한태 – 한 노인이 성금을 보냈다는 뉴스에 그는 머리가 멍해졌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왠지 더 불안해진다. 연말이면 대단한 뉴스들이 많다. 연말이면 불우한 사람들이 많다. 성금이 필요한 사람들도, 성금을 보낼 법한 외관을 하고서 성금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겨울답게 - 무엇이 겨울다운가? - 모교에 또 전임 티오가 났었다. 그는 일차 서류심사에서 탈락했다. 몇이 지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셋이 남았다고 하는데 보나마나 유학파 박사들일 것이다. 최근에 임용된 전임들은 상대적으로 젊은이들이다 보니, 그는 서류에서 1969년생이란 숫자가 보이는 순간 탈락했을 지도 모른다. 논문 편수에는 그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소용없었을 것이다. 외국 저널에 게재된 논문이 없었으니까. 더구나 지금은 시간도 탈락한 신세이니까.
시간을 할 때가 그립다는 생각에 그는 흠칫 놀랐다. 정말 그립다니. 강의하던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정말 몰랐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들켰을 세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빈 방, 좁아터진 빈 방에 누가 있을까 만은.
빈 방에 손님이 들었다. 느닷없는 친구 녀석이다. 이른 나이에 동네 여자애, 그러니까 중딩 동창이랑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그런대로 잘 사는 녀석이다. 어쩐 일로 초저녁에 불러내더니, 어슬렁거리면서 길게 길게 밥 먹고 술 먹고도 자리를 뭉개고 있었다. 마침내는 슈퍼에 들러 이것저것을 주워 담고는 그를 따라 오피스텔로 올라왔다.
왜? 늦어도 되냐?
엉. 그러더니 친구는 깜짝 놀랄 말을 했다. 1박 자유부부, 그게 뭔 줄 아냐. 세상에, 생일선물 주라더니, 1박 자유부부 해달란다. 하룻밤 놀다 오겠다, 이러는 거야. 애들은 울 엄마한테 맡길 테니까 자기도 자유부부 해! 내 참 환장 하겄다.
무슨 말인가. 멀쩡한 부부가 1박 자유부부? 얼핏 보아서는 그리 부정한 단어는 아닌가 싶지만, 또 어찌 보면 매우 부정한 단어다. 자유가 이리 해괴망측하다니. 자유를 그리는 아내와의 일평생이라니. 이 친구 꽤 불우한 심정이겠다. 37㎡ 오피스텔 방에는 자유가 널려 있고, 대신 자유를 갈망하는 아내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날 저녁 불우하지는 않은가. 모르겠다. 그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소리를 중얼대다가 앞으로 고꾸라진 친구에게 침대를 내주었다. 다른 침구가 없었으니까. 누구랑 밤을 함께 지새본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잠을 청할 수 없었고, 책상에 앉아서 꼬박 밤을 샜다. 불우한 친구, 그의 아내의 자유는 무엇일까. 친구의 아내는 불우해서 1박 자유를 선물이라 여길까.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는 그의 오지랖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 자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실업 중의 불우한 싱글일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미래에 중독된 종이라고 하는데, 그는 미래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 모양인가 싶었다. 생각이 일렁인다. 생각은 늘 그 속에서 미리 무엇인가를 한다. 목표를 세우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그가 알 수 있거나 느낄 수 있는 일은 이미 일어났던 어떤 것들뿐이다. 수많은 가르침들처럼 어떻게 목표에 집중할 수 있는가 말이다. 아직 모르는 것들에, 느낄 수조차 없는 것들에.
과거의 어떤 기억을 떠올려서 판단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잘 해보려고 할 때, 행위는 현재에 그친다. 현재 행위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기억이 미래에 무슨 일을 영향할 수 있다는 것인지.
왜 그는 과거지향적일까. 과거에 잡혀있을까. 먼 과거, 아주 가까운 과거에.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성금을…… 그 기사가 다시 떠올랐다. 한글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복지관에서 배웠다는, 평생 비문해자로 살았던 할머니, 많은 사람들의 눈에 불우하게 비쳤을 할머니가, 더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그러니까 여전히 어린이들도 불우한 세상이다. 실제로 그가 어렸던 시절에는 밥 먹고 못 먹고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렇게 행불행을 깊이 느끼지 않았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그의 마음을 일렁이던 단발머리 여자애는 그 나름 부잣집 아이였지만, 그것 때문에는 어떤 차별도 없었다. 그냥 단발머리가 마음을 흔들었고, 그것이 전부였었다. 예컨대 아버지가 술고래라서 – 동네에서 별명이 그랬다 – 가끔 동생 광순이를 데리고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 광식이도 그의 집이나 또 다른 집에 숨었다가 가곤 했어도 늘 명랑했었다. 근년 들어서는 어린이들도, 그의 눈에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중학생들도 여러 이유로 불우하다. 심지어 불우함을 못 이겨서 세상을 떠난다. 어린아이의 자살 – 그런 단어는 입에 올리기도 무섭다.
몇 년 전이었을 게다. 중학생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충격적 기사를 본 뒤로는 자살 뉴스 따위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극단적 선택이 왜 자살의 대명사인가. 오히려 방화나 살인이 극단적 행동 아닐까. 매우 불우한 순간의 가장 비극적 선택을 극단적이라고 말하다니. 21세기 오늘엔 밥걱정 아닌 모멸감이나 폭력 등에 시달려 살기를 포기하는 것이란다. 이 비극을 누가 강요하는가. 살기가 얼마나 끔찍하면 죽는 쪽을 택하는가.
가톨릭에서는, 틀림없이 개신교 교회에서도,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므로 그것을 함부로 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고 가르친다. 자살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중죄라고. 지금은 완화되었지만 자살자의 장례미사는 불가했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스스로 삶을 버리는 중학생 또는 어른은 모두 기독교 신자가 아니려나. 가장 충격적이었던 몇 년 전 그 사건의 경우, 어머니가 중학교 교사인데도 중학생인 아들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고 유서를 쓰고 뛰어내렸다. 뛰어내리기 – 결정적인 선택이다. 약이 부족해서 또는 줄이 풀려서 미완성일 수도 없는, 단호하고 완벽한 비극적인 선택이다.
저, 진짜 죄송해요. 물론 이 방법이 가장 불효이기도 하지만, 제가 이대로 계속 살아있으면 오히려 살면서 더 불효를 끼칠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말이었을까. 아직도 그 비슷한 말이 그의 해마 어느 구석에 박혀있다. 어머니가 근무하시는 동안 그 점을 이용해서 집까지 쳐들어왔던 동급생들의 만행을 털고, 오해도 풀고 나서 죽겠다는 너무도 차분한 유서. A4 용지 4장에 쓴 유서에는 가족과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감사 마음도 들어있었다. 일전에 사망한 명사 스님의 유서 비슷한 메모들이 보도되었을 때는 헛웃음이 나왔었다. 참담했다. 아이가 썼던 유서에 비하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아차, 목숨은 떠나고 없는데 유서들을 비교해서 무엇 하랴. 하지만 그 아이의 유서는 정석이었다. 그런 반듯한 글을 쓰는 열 세 살짜리가 그 불우한 시간들을 잘 버티었더라면 지금쯤 20대 대학생 – 생각의 깊이와 글 솜씨로 보아 아무래도 인문계 - 또는 군 복무 중일 게다. 역시 반듯한 언어로 살면서. 안타깝다. 아깝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그의 생각은 자신의 군 시절로 돌아갔다. 성인의 불우함은 좌절에 앞서 일단 행복의 쟁취라는 방향성을 먼저 제시받는다. 시골의 단출한 가정에서 폭 좁게 자랐던 그가 88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맞닥뜨린 현실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숙제였다. 순진했던 희망 같은 것은 무지와 비겁함이요, 세계관의 충돌은 그를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신세로 내던졌다. 그가 살아갈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거물이자 괴물이요, 그는 속수무책, 연대라거나 소속감 없는 무기력한 개인으로서 자아상실감에 빠졌다. 나라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숨이 막혔다. 입을 열려고 해도 적당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과묵한 인상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렇지만 한계가 왔다. 말을 토해내고 싶은 욕구와 강요당한 – 스스로 강요한 - 침묵 사이에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비겁한 선택, 군대를 선택했다. 어차피 사회입장권이니까 일단 현실에서 후퇴하는 기분이었을까, 비겁함을 침묵의 미덕으로 위장한 채, 조용히 학교를 떠났었다. 그러니까 그는 2학년 2학기를 스스로 망쳐놓고 그렇게 이등병이 되었다. 월급 6,600원을 받는 이등병 노승욱은 더 이상 투틸로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그 이름이 그렇게 그리울 줄 그는 몰랐었다.
1990년의 전방은 복학생 형들에게서 듣던 그대로였다. 그가 아무 짓도 안 한 것, 다시 말해 학생운동권이 아니었던 사실은 특별한 고통을 예비하지는 않았다. 다만 군대는 전혀 다른 질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 치열했던 KBS 4월 사태도 수월한 여느 파업 정도로 넘어갔고, 파행이 한 달을 넘겨도 의견들은 없었다. 없어야 했다. 군인은 의견을 가지면 안 되는 사람, 사람 아닌 그냥 군인이다. 북예멘과 남예멘이 통일 되었단다. - 아, 우리도 남북통일을 이루어 냈음 바로 제대 아냐! 그 정도였다. 어디서 통일이 되건 걸프전쟁이 나건 외국은 멀기만 했다. 우리나라도 멀었으니까. 한강의 제방이 무너져 대홍수로 백 명이 넘는, 150이랬던가, 사망자가 나와도, 10만, 20만 이재민이 발생해도 군대에선 어쩔 수 없었다. 전방의 군인은 국방만이 우선이니까.
내무반에서는 다들 침묵하듯이 침묵이 미덕이었다. 이병에서 일병으로 대단한 진급에도 불구하고 짬밥 서열은 서열이었고, 졸은 졸이었다. 걸레 대신 빗자루를 든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랴. 진급을 해 봐야 상병이 있었고, 또 진급해도 병장이 있었다.
다만 일요일은 대단했다. 아침 일찍 수송대의 차량을 타고 부대 가까이 있는 다른 부대의 본당에 나가서 미사를 드렸다. 세상에나, 그때 군대 내에 공소도 아니고 성당이라니, 그가 입대 전 1989년 가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2차 한국방문에 맞물려 우리나라에 군종교구가 설립되었다. 그 전까지는 군종 신부님은 지역 교구에 속하셨다. 아무튼 군대생활 중의 미사는 입당성가를 부르면서부터 빨리 끝나버릴까 떨렸다. 날 어여삐 여기소서, 참 생명을 주시는 주~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하면서 느리게 느리게 불렀다. 봉헌성가 때면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주시어~ 감사하는 맘으로~ 하면서 눈물도 났다. 2절은 더욱 좋았다. 나의 삶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시어~ 선한 일을 하도록 나를 인도 하소서. 어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매번 어머니 생각을 했다. 선한 일, 그것도 숙제였다.
그런 군대 생활 첫해 10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일 년이 된 동서독이 정식으로 하나의 독일이 되었다. 1/365 확률로 독일재통일의 날은 우리나라 개천절과 날짜가 같았다. 우리는 그저 통일이구나 했었는데, 신부님께서 독일에서는 재통일이라고 한다고, 19세기 때 독일제국의 통일과 구분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결과적으로는 흡수통일이지만, 양쪽에서 그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신부님들 중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이탈리아 아니면 독일에서 공부하신 분들이 많았다. 군종 신부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성경> 말씀보다 더 신선한 감동을 주셨다. 군대 내의 미사는 평상시와 달리 왠지 짧게만 느껴졌다.
그 무렵, 앞섰던가, 뒤섰던가, 나라를 통째로 뒤흔들어버린 사건이 터졌다. 물론 군대와 관련해서였다. 탈영 Y이병의 양심선언이라 불리는, 엄청난 군대 관련 폭로 사건이었다. 자대배치를 받은 지 불과 몇 달, 여차여차 우여곡절 끝에 – 동료를 팔았던 말았던 – 보안사에 근무하던 Y이병은 어느 날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가 혼비백산했다고 했다. 1,300장인가 그만한 엄청난 양의 기밀문서들이 그 캐비닛 안에 있었으니까. 캐비닛, 오늘날 그토록 민감한 키워드가 된 그 단어 말이다. 캐비닛 속 그 문서들은 탈영의 촉진제였다. 그것들을 들고 도망쳤으니,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때 승욱은 자문해 보았다. 자신이라면 그런 용기가 났을까. 고개를 저었다. 용감함이라는 유전자는 분명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런데 문제의 1966년생 Y는 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이라 했다. 아, 또 외대생! 지난 해 방북 여학생도! 외대 캠퍼스에는 마약 같은 공기가 있어 폐부까지 세상을 뒤집어놓는 용감한 행동들을 감행케 하는가.
양심선언 과정은 Y의 학보사 활동이 끈이 되었다고 했다. Y는 우선 한국기독교협의회를 찾았다. 급히 양심선언문과 80일간의 국군보안사령부 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대학 학보사 선배 Y2를 찾아 만났더란다. 사실 이런 디테일은 승욱이 군에 있던 당시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들이다. Y2는 지금도 막후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정치인이다. Y2는 다시 역시 대학 학보사 선배였던 〈한겨레〉 기자에게, 그 기자는 편집국장에게……. 그렇게 해서 보안사에서 운영했던 대학가의 위장카페 ‘모비딕’까지 들켜버렸단다. 그 이름은 20년쯤 지나서 동명의 영화가 나온 뒤에 널리 알려졌고, 그, 승욱도 그때서야 알고 더더욱 놀랐다. 세상은 모르는 것 천지였다.
암튼 그때 Y이병의 탈영에서 양심선언문 발표까지는 열흘이 걸렸다. 세상은 뒤집혔고 순간에 국방부장관과 또 무슨 장관의 목이 날아갔다. Y는 양심선언 이후 도피 생활에 들어갔고 곧 잊혔다. 1990년 우리나라 국군 졸병들은 스스로 움츠러든, 뇌가 없는 두더지처럼 살았다. 인생 어디인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밝기만 할까만, 군대는 어두운 일들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젊은 영혼들의 들끓음을 세상이라는 공간은 보듬어주지 못하는 곳인가 보았다.
그렇게 첫 군대스마스를 - 어머니의 말로는 크리스마스를 – 맞았다. 그쯤에 휴가도 나올 수 있었고, 위문편지도 기다려 보았다. 어라? 위문편지는 없었다. 그가 초등 중등시절 그렇게 열심히 썼던 ‘국군장병 아저씨에게’나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군인 아저씨에게’라는 위문편지가 없었다. 쳇, 그런 것들이 없어진 지 한 두해 되었다 했다. 곰신의 출현은 더욱 기대난망이었다. 고무신 거꾸로 신을 여친을 두고 온 일도 없었으니, 면회 올 여친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쓸쓸하게 그 한 해가 갔다.
한 겨울, 그러니까 양력과 음력의 새해 사이는 꽤나 길었다. 2월 15일 금요일이 설이다 보니 일요일까지 나흘을 쉬게 되었다. 하지만 설 맞춰서 휴가 가는 행운이 있기 전에야 그저 쉬는 날에 불과했다. 그는 까치설날이 그리웠다. 투틸로, 이리 와 봐! 어머니가 새 조끼나 목도리를 떠서 입혀주던 섣달그믐날이었다. 그런데 까치설날은 옛 속에 묻혀버렸다.
오히려 밸런타인데이라는 말이 막 유행하던 때였다. 물론 갑론을박도 셌다. 일본 따라 하는 것이 무슨 의미냐? 웬 일본? 원래 서양에서 있던 것이라던데? 여자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라니 생소했지만, 한편 수줍은 남자들에게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남자라고 해서 무슨 고백이 쉽지만은 않은 것이니까. 군대에서라면 연인으로부터의 편지나 면회를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사실인즉슨 할 일이 딱히 없어서 그랬던 것일 터.
그런데 너절한 기대들로 어정거리던 그 때, 그 싱거운 시간들을 찢는 뇌관이 터졌다. 2월 3일 일요일 저녁뉴스였다.
자살 - 이번에는 탈영 정도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자대배치 첫날이었다는 N이병의 자살 소식이 터졌다. 불발탄을 잘 못 밟아서 죽었다는 사고 소식이었어도 오금이 저렸을 것을, 자살이라니. 논산인가 어디선가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는 퇴소해서 열흘 쯤 기다리다가 연대배치 그리고 자대배치를 받았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자대에 왔다. 그런데 그 첫날 자살을 했다니.
오리무중에, 알려진 원인이 없으니 수군대는 소리들만 난무했다. 입대하기 전 전대협 한라산 선봉대인가 어디서 활동했다고들, 그런 쪽으로 소식통 빠른 일병이 있었다. 소총부대로 갔더래, 그럼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것은 아닐 텐데. 아, 또 외국어대학이다! 외국어대학 영문과 89학번! 외국어대학이란 대체 어떤 곳일까.
그러고 보니 신년 초 외대생들이 높은 등록금 인상에 반발하며 학생처 사무실을 폐쇄하고 총장실을 점거해서 농성을 벌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외대생들, 주로 서양언어를 목표언어로 공부를 하다보면 서양의 사회구조나 서양의 민주주의에 관해서 정확한 눈을 뜨게 되어서일까? 그가 다녔던 지방대학에서도 숱한 학생운동을 봐왔지만, 그의 눈에는 외국어대학이라는 글자만 들어왔다.
나중에 알려진 것으로는, N이병은 새벽에 도착해서 곧바로 첫 번째 한 일이 교회에 다녀온 일이었단다. 이어 의무반에 가서 무릎의 상처를 치료받고, 감기약까지 타 갔더란다. 그러고서 누군가가 봤는데, 몇 사람 분의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갔다고 했다. 오전에 그랬던 사람이, 아니 군인이, 두세 시 경에 부대 밖에서 목을 맸다고? 매우 믿기 어려운 행적이었다. 무릎 상처는 훈련소에서? 곧 죽을 것이면 무릎 치료를 뭣 하러, 감기약을 뭣 하러, 빵을 뭣 하러?
더 한참 나중에 알려진 것으로는, 죽기 바로 열흘 전 전방입소 훈련을 떠나기 전에 내무반에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는데, 그때부터 아주 어두운 얼굴이었다는 것이다. ‘아무 말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을 네가 유추 해석해야 한다.’ 라거나 그 비슷한 선문답 같은 문구였다니, 믿거나 말거나. 어떤 연유건 간에 그런 심리적 불안은 자신에게 닥쳐올 끔찍한 상황을 직감해서였을까. 물론 이 모두는 떠돌던 이야기였다. 누구는 그 신병이 08에서 소총부대로 주특기가 바뀌었는데, 08 적격심사에서 탈락한 것 아니겠냐고! 사실 08이라면 보안 및 정보요원 쪽인데, 그걸 받으려면 엄격한 성분조사가 필수적인데 통과 되었겠냐고! 그것들 또한 그냥 해보는 소리들이었다. 쉬쉬하면서도.
우울한 설이었다. 소고기떡국은 나중에 가야 고기가 많다고 늦게 간 것이 아니라,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랬다. 떡국, 어머니는 혼자서 식은 떡국을 드실 게다. 차례상을 물리고서야 다 식은 떡국을. 그런데 군대 내 사고 소식들을 어머니들은 어떻게 견디실까. 뉴스들을 알기나 하실까? 하기는 신부님은 어떻게든 소식을 아실 것이고, 동시에 모든 어머니들께 위로말씀도 충분히 해주실 것이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리 크게 걱정할 일은.
군대라는 조직에서는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무튼 그 설 주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너무도 황망한 사건이 또 터졌다. 음력으로는 정초였지만 벌써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우수가 들었는데, 그러니까 봄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가 군인 신분을 순간 망각하고 언 몸이 조금 녹아서였을지 괜히 좀 신이 나서, 신이 난다면서 왜 슬픈 노래였는지는 모르지만, 돌아선 그대 등에 흐르는 빗물은 빗물은~ 이 가슴 저리도록 흐르는 눈물 눈물~ 송골매의 <빗물>을 흥얼거리고 있다가……
듣게 된 뉴스는 또 자살이었다. 아니 곧 다시 더 이상한 안전사고라고 발표되었다. 나이도 지긋한 S일병, 그러니까 87학번, 아, 다시 또 서문학과, 서울대라지만 외국어문학과였다, 외국어학과의 수난? 웬 수난들이 그쪽 환경들에서 빈발하는가.
나이로 보아서 재수 삼수나 아니면 일반 휴학을 했었다가 군대에 들어왔을 S일병은 포병으로 동계훈련 중이었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어떻게 한 밤중에 좁은 박스카 안에서 목이 졸린 채 발견되었을까. 그것도 ‘사고로’ 목이 졸린 채! 박스카는 이동식 상황실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 좁은 박스카 안에 다른 몇은 깊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데, S일병이 목숨을 잃게 된 여러 상처들이 아무도 모르게 어떻게 순간의 사고로 발생했는가. 소지품도 손상당한 채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안전사고사였다. 이번에도 그가 학생회 활동을 했었다거니, 녹화사업 운운 하는 뜬구름 같은 풍문만 짙은 안개처럼 내렸다. 안개는 그대로 차갑게 굳어서 그들의 몸을 꽁꽁 얼려버렸다.
그들 이병들과 일병들은 군인이라고 쓰고 군바리라고 읽었다. 땡보직으로 꿀을 빠는 일은 별 따기, 땅개들은 그저 고달픈 인생이었다. 최악의 영창이나 육교의 ‘o’자는 꿈에서도 피할 단어였다. 영창만 다녀와도 진급은 물론 제대 날짜도 늦어질 것이며, 아, 육교라니, 그건 교도소니까 전역하고 나서도 전과가 따라다닐 터였다. 아니, 행여나 군기교육대에라도 안 가려면 여우가 돼서는 가스 뿌려대는 선임병들을 잘 피해서 마찰 장면 자체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기불릭 모두를 섭렵하더라도 선임병들 입맛을 맞춰주고, 그들의 짬밥 숫자를 잘 외워 두어야 한다. 군번 따라서 아버지 또는 아들 손자까지 매기는 곳에서니까. 암튼 눈만 뜨면 군번줄 확인하고 관물대부터 신성히……
의식을 잃고서 그가 실려 나간 것은 사실 4월과 5월로 이어진 무시무시한 죽음 사태를 견디지 못할 즈음이었다. 어떻게 시위학생을 잡아서 때려죽이는가! 때려죽였다! 대학생 K군의 죽음으로 흩뿌려진 붉은 피는 5월을 뒤덮고 말았다. 입이 있어도 침묵만이 살 길이었던 그때 그곳에서, 누구라도 눈 뜨고도 의식이 없어야 했던 그때, 그는 의식을 잃었다.
그러니까 시초에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 학생이, 여학생이 먼저 불을 지폈다. 소신공양은 그럴 때 쓰는 말인데도 그냥 분신이라 불렸다. 이어서 이어서 이어서…… 무엇이 그들 분신과 그들 투신의 행렬을 만들어냈던가. 생각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봄을 견디면서 되뇌었던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나는 군인인가 대학생인가? 군인인야, 대학생이야……. 그 무렵이었다. 어디에서 어느 순간에 기억이 멈췄는지는 모른 채로, 그가 눈을 뜬 것은 의무대였다.
여단 의무대, 군의관이 말했던 것 같다. 스트레스가 심했더냐? 사내새끼가! 꼴싸를 봉께 먹물쟁이고만, 해도 운동권도 못했겄는디. 그에게 익숙한 말투는 고향 사투리였다. 그것도 지독한 사투리. 얌마, 침상에서 넘어진 거이 다행이였제. 거그 좀 둔눴거라! 잔말 말고 둔눠!
며칠 못 가서 또 다시 의식 소실로 두 번째 여단 의무대에서 눈을 떴다. 야가, 참말로 뭔 일이다냐. 불안장애여, 뭐여! 인자사 일병 달았고만, 이래 싸면 지대로 전역이나 하겄냐!
사단 의무대 대신 바로 군병원에 보내진 그는 의식이 돌아온 채로 이런저런 검사들을 받았고, 거기 군의관이 부사관에게 흘리는 말에서 제풀에 엄청 놀랐다. 왜 의사들은 영어를 좋아하는지, -싸이어티 라는 말도 싸이코로만 들렸고, 소셜- 어쩌고 하는 말에서는 얼핏 비슷한 쏘시오패스라는 단어만 떠올랐고, 그에게는 모든 단어들이 설마 하면서도 무서움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름도 모르는 크고 작은 알약들을 보따리로 처방받았을 따름인 그는 내무반에 쥐죽은 듯 기어 돌아왔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여단 의무대 군의관에게 다시 보내졌다. 약 보따리를 들고 가랬다. 잘 있는가 볼라고 불렀다. 약봉지 요리 조 봐! 사투리 군의관이 말했다. 되얐네! 자세히 알 것까장은 없고! 얌마, 일단 아찔하거나 그랄 꺼 같음 우선 앙거, 둔누등가. 다리 올릴 수 있음 올리고! 참, 김치 같은 거 더 많이 묵고, 넘 보담 짜게 묵으라 그 말이여! 극도의 긴장 말고 다른 원인은 없단 말잉께. 봐라, 사회불안장애 - 소셜 엔싸이어티 디스오더 - 그리 말했겄네. 사내새끼가, 더구나 군대에서 실신이 뭐여! 평생 사회생활 해묵을 수 있겄냐. 정신 똑바로 차려, 얌마! 그는 정신 똑바로 차리기로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다행으로, 내무반 최고참 병장이라고 모두 고약한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살짝 그의 머리를 쥐어박는데, 그 손길이, 조심해라 임마! 그러는 것처럼 느꼈다. 성한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문 병장, 그는 원래 말 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입을 열면 목소리는 테너처럼 우렁찼지만 그랬다. 군대에서 소통 할 수 있는 말들이 무엇이었을까.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10월 들어 놀란 것은 달력 때문이었다. 아니, 이미 1991년 달력이 나왔을 때부터 그들 모두를 화나게 했던 10월이 왔다. 그것은 1일 국군의 날이 시커먼 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그들의 날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 해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의식행사며 할 것은 다했는데도 뭔가 내동댕이쳐진 느낌이었다.
울 나라 역사에서 10월 1일이 어떤 날인지 아나. 그렇게 목청을 뽑은 김 병장의 말로는 – 그때 김 병장은 내무반 고참 순위 2번이었다. - 우리 육군 제3보병사단이 처음으로 38선 넘어 북으로 진격했던 날이다 말이고. - 예, 알겠습니다. 즉각 그 아래 쫄들이 복창했다. 알겠나? 그런 말이 떨어진 뒤에야 복창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상불가의 순간을 초래했으니까.
마, 잊지 말거래이. 머 한다꼬 국군의 날을 법정공휴일에서 뺀 긴가. 내 말한대이, 이그는 곧 원상복귀 될 끼다. -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10월에 일요일 빼고는 빨간 날이 3일 개천절 단 하루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공휴일 숫자를 줄이려 한다 해도 좀 심했다. 한글날이 공휴일이 아니라니!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면, 한글을 경축하지 않으면 무엇을 경축한단 말인가. 이번에는 국문과에 다니다가 입대했다는 변 상병이 열변을 토했다.
공휴일을 70일에서 67일로 줄였다는 것도 우리한테는 억수 손실이지만, 하필 한글날이라니! 쉬고 안 쉬고를 떠나서 한글날이 국경일이 아니라니! 어린이날, 현충일, 제헌절만 못할 이유가 어디 있냐. 한글 문자 없이 민족이 있냐, 나라가 있냐. 문화가 있냐.
말이 문화에 이르니까, 승욱은 첨엔 너무 나간다 싶어서 갸웃 했다가 이어 수긍이 갔다.
옳습니다! 박수!
아, 그것은 그의 섬뜩한 실수였었다. 감히 선임병장의 발언에 일병 주제가 응수를 하다니.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두 무릎을 세워 고개를 쑤셔 박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를 각오하고 머리통에 힘을 주었다. 이병들도 함께였기에 창피한 순간이 더 창피했다. 그때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야, 미주! 이리 나왓!
선임들은 그가 실신했던 이래 미주신경성실신이라는 긴 병명 대신에 미주라고 놀리듯 불렀다. 홍당무가 된 그는 구부정하게 앞으로 나갔다. 불호령이나 주먹 대신 그에게는 엉뚱한 숙제가 떨어졌다.
야, 한글날 노래 외우제? 함 불러 봐라.
노래를 아무래도…….
예 말고 무슨 토를 달아! 한글날 노래도 모르나.
아니, 원체 노래를 못하는 음치…….
그만들 두지!
그때 또 한 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최고참 문 병장이 등장했다. 전역을 겨우 일주일 정도 남긴 시점이었다. 노래 배우자, 됐나?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돋았네~
난데없이 그들은 목청을 가다듬어 음악 수업을 했다. 문 병장은 분명 테너인가 바리톤인가 싶었다.
이제 나도 뭔가 들어보자! 노 일병, 문자란, 한글이란 무엇인가 연설 한 번 해봐라. 구해줬음 갚아라! 문 병장님의 명령이었다.
아뿔싸. 그것은 더 어려운 숙제였다. 그럴 것이 수업 때 발표라도 걸리면 미리 준비해 간 발표문 읽는 것도 우물거렸던 그가 준비는커녕 갈피를 잡을 시간도 모자랐으니까. 그렇지만 군대 내무반에서 머뭇거림이란 존재하지 않는, 태어난 적이 없는 단어였다. 좌중을 애처롭게 둘러보아도 문 병장 같은 흑기사가 또 나올 리 없었다.
저, 문자라는 것은 소리를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한글은 한민족의 소리를 기록합니다.
엉? 제법이네! 계속하라우! 선임들은 그를 놀려댔다.
그러니까 언어란 말과 글이라고 할 때, 한글 창제 이전의 우리민족의 언어는 소리말뿐이었다가 한글로서 비로소 글이 되어 완전한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한글이라는 문자가 있어 말소리를 시공간의 제한 없이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시공간 제한 없이 전달? 편지도 쓰고, 써서 후세에도 남긴단 말이지. 야, 미주, 국문과야 뭐야? 골치 아픈 사학과라 안했나. 계속!
저,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말을, 단어를, 창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가슴이란 문자가 있었고 아프다는 문자가 있었는데, 가슴이 아프다 가슴을 앓다 그러다가 가슴앓이 이렇게 단어를 만들고. 안 보이는 것도 보이게 만들고, 아름다움이라는 것, 보이지는 않지만 문자로는 남고. 그리고 가끔은 귀한 문자들이 되어, 감동적인 글이 되어 우리들에게 미적 향수를……
우와, 한글날, 봐라! 한글날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국경일이 아니다 그 말이다. 한글날을 엎다니, 멍청한 놈들! 인간이란 게 높은 데 올라가면 더 멍청해진다. 땅이 중요함을 모르게 되니까. 땅이 안 보이니까. 땅이. 문 병장이 모처럼 길게 말했다.
그는 우물쭈물했던 몇 마디 말로 문 병장님께 어쩐지 보답이 된 것 같아서 기뻤다. 잘 해! 너 잘 해 낼 거야. 병장님은 말없이 말했다. 이번에는 뒤통수가 아니라 어깨에 가만 손을 얹어주었다. 개인적으로는 문 병장과의 마지막 교류였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지, 촌스럽게 신파조 넋두리를 되뇌었다. 소리 없이. 숨소리도 없이.
이별의 선물이 가능할까. 흔히 고참들이 나갈 때 군팔을 모아서 주기도 했었다. 군팔은 밖에서라면 600원이나 하는 담배 88라이트를 말한다. 군대에서 배급받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88디럭스도 한라산도 밖에서 700원 하던 때였다. 입대 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던 그도 조금씩 물들어 갔는데, 태생은 아닌 듯 했다. 냄새도 독했지만, 담배를 피우는 자세 그 자체가 어색하고 잘 안되었다. 담배를 피우는 남자, 가끔은 멋진 아버지들에 대한 기억이 있는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따라서 담배를 즐길까. 그는 생각해 보았다. 어떤 형식으로나 어른 남자 아버지라는 모범이 없는 그로서는 모범이 그리웠다. 아버지가 그리웠다.
어떠한 선물도 징표도 없이 문 병장님과 이별했다. 겨울이 오며 상병이 되었다. 그렇게 1991년 군 생활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고향, 할머니들과 어머니만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했다. 그때의 할머니들은 할머니들끼리였다. 왜 할아버지들은 없었을까. 동네에 드물게 할아버지들이 있었지만, 그, 승욱의 주변에는 할머니들 그리고 어머니만 있었다. 그 할머니들도 이제는 없다. 고향에는 어머니만 있다. 그가 그리는 것이 고향이고 어머니라면, 그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야 마땅했다.
고향으로 가서 살까, 그는 고민해 본다. 이 37㎡ 방은 1인 가구용이다. 아내의 1박 자유부부 선언에 경악을 했다가 풀이 죽은 친구가 찾아오는 용도는 너무 가끔이다. 이 넓이의 방은 결혼은커녕 연애도 할 수 없게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와 어쩌다 잠시 마음 가까이 지냈던 여자들은 이 좁은 방에 올라온 적이 없었다. 그녀들이 조신해서일지 그들에게 희망이 없어서일지는 모를 일이다. 그녀들 역시 고만고만한 방에 살거나 해도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없다.
강의도 끊어진 지금, 그렇다고 학원가도 쓸쓸한 지방도시에서 일타강사의 기회도 없을, 이 무용지물과도 같은 생활을 이렇게 이어갈 명분도 없다. 올해도 이른 김장을 해서 들고 오셨는데, 오피스텔 비번을 잊어서 어리둥절했다는 어머니는 어쩌면 불안하기까지 하다. 왜 전화라도 하시지, 라는 걱정 반 핀잔에는 전화 생각을 못 하셨다는 더 놀라운 대답이 왔다.
어머니는 온전하신가. 이 뉴스 속의 할머니, 불으한 어리니 한태 성금을 보내신 할머니보다는 분명 젊은 나이다. 그런데도 곰곰 비교해보니 어머니는 최근 어딘가 총명함에 금이 간 것 같다. 홀아비 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면…… 이라고, 그를 키우실 때 단호하고 강했던 어머니가 어딘가 무디어졌다. 이 뉴스 할머니는 짐작컨대 무한 고생을 해 오신 것이 틀림없는데, 정정하고 강단이 있다. 눈뜬 멩인이라 글노자복지관 한글공부로 배운 글이라 말이 안 대는 개 있서도 라고 썼지만, 참 잘 쓰셨다. 인생길 마주막에 조훈 일 한 번 하는개 원이라…… 빈 병을 모아 팔면 돈이댈 것 같타 …… 파란는개 십원도 안 쓰고 12월까지 모운 개 15만원 내 아이들 용돈 조금 주는거 았계 쓰고 15만원을 보터 30만원…… 동장님이 잘이 해 라고 써서 맡겼단다.
글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 글 배워 처음으로 쓴 편지글을 떠올려 보면서, 글을 많이도 오래도 배운 그는 침묵한다. 부끄러움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잠은 내려오지 않고 천장에서 그를 노려본다. 먼 데, 아니 가까이에 어머니가 보인다. 혼자서 잠든 어머니는 자꾸 뒤척이신다. 말 좀 해 봐요! 왜 꼭 거까지 내려갈라고 했었냐고! 뭣이 당신을 불러 갔어! 왜! 거긴 남쪽이잖아! 바다잖아요, 시퍼런 바다!
이런 밤 어머니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신다. 50년이 넘은 오늘도, 아버지가 떠나시고 50년이 넘은 오늘도. 어머니는 1973년 1월 25일 아침 일찍 목포에서 조도 가는 배를 타셨던 아버지의 기일을 음력으로 12월 20일로 치신다. 채 5년을 함께 살지 못했고, 50년을 넘어 그리워한다. 그리움은 침묵이 된다.
어머니는 성당에서가 아니라면 거의 목소리가 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소리들을 다 멀리하고 살아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신 주~ 시작 없으시~며~ 마침도 없고~ 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말소리에 비해 노랫소리는 높고 맑다. 그만 아는 비밀이다.
어머니, 아버지이……. 그는 어두운 천장에 대고 불러본다.
얼굴 없이 존재하는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거룩함이란 무엇입니까. 성스러움은 무엇입니까. 배워도 쓰임이 없는 저의 삶은 무슨 의미입니까. 투틸로는 부끄럽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이. 공기 중에는 어떤 소리도 어떤 움직임도 없다. 회색의 침묵만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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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고문학 10호, 5월 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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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있었다. 아마도 그가 아는 새다. 거기 산책로는 천변이고, 얕은 물에서 살아가는 큰 새들은 서너 마리에 불과했다. 이름이 훌륭한 백로도 처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천변의 버드나무들은 운치가 있었지만, 개량사업 탓에 뽑혀나가고 한 두 그루만 남았다. 백로가 올라가 앉곤 하던 큰 나무들도 많이 사라졌다. 나무들을 뽑아내고 무엇을 개량했는지. 새들은 이전만 훨씬 못해 보이는, 시멘트로 갈무리된 물에서 살아간다. 안쓰러운 풍경이다.
어려서 그가 알게 된 처음의 새는 참새였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들의 이야기에서다. 책에서만 그렇게 쓰인 것이 아니라 참새들은 정말로 전깃줄에 앉아 있었다. 전깃줄은 참새들의 철봉이거니 생각했다. 난생 딱 한 번 보았던 줄 타는 아저씨에 비하면 전깃줄 위 참새들의 묘기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니, 묘기 중의 묘기였다.
장맛비가 많이 내렸던 어느 날, 경식이 엄니는 읍내 길가에서 쓰러졌고 그렇게 경식이는 어머니를 잃었다. 감전사! 전기에 맞아 감전이 되어서 사망했다는 해괴망측한 소식이었다. 참새에 비할 수 없이 큰 몸집의 경식이 엄니는 전깃줄에 올라가기는커녕 전깃줄을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그랬다. 수군대는 말들로는 전깃줄 하나가 끊어져 내려 우체국 앞 인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 그럼 전깃줄을 밟았다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는 얌전한 아짐이었단다. 남자들 그림자도 밟지 않는 사람이 전깃줄을 밟았다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아니라고 했다. 그때 픽 웃음이 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죽어다 깨어날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무슨 영문인지, 하필 우체국 앞 거긴 드물게 흙바닥이 아니고 듬성듬성 패인 시멘트 길이라서 물이 많이 고였단다. 물을 밟았을 뿐인데 전기가 저절로 물을 타고 건너왔다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다. 전깃줄을 피하자면 온 하늘을 다 피해야 했다. 땅이 웬수도 아닌데 쿡쿡 차고 부비고 다녀서 신발들은 더 더러워졌고 더 닳았다. 구멍도 났다.
감전이란 몸에 전류가 흘러 전기적인 충격을 주는 현상입니다. 감전은 몸체의 두 부분 사이에 전위차가 생길 때 전류가 흐르게 되어 몸체에 전기적 충격이 가해질 때 발생합니다. 전류는 저항이 작은 쪽으로 흐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더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학교에서 나중에 감전이란 단어를 배우게 되었을 때는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는 놀람에 앞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식이 엄니가 더 쉬운 길이었다니. 사람이 물건보다 더 쉽다니.
선생님, 전기라면 자기랑 짝꿍인 전깃줄 쪽으로 가야지 왜 사람 쪽으로 흘러요? 그럼 그 쪼만한 참새들은요? 사람이 참새보다도 못하냐고요? 그는 서투른 질문을 해댔다.
아, 그건, 참새는 병렬을 알아서예요. 두 다리로 전선 위에 올라 서기 때문에, 두 다리 사이의 전깃줄 부분과 새의 몸통이 서로 병렬로 연결된답니다.
…….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참새와 전선의 전위차는 ‘0’이라서 감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물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잖아요. 여러분,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봐요. 그대로 있지요. 물 높이가 같으니까요. 그런데 기울이면 금방 낮은 쪽으로 흐르잖아요. 물로 실험해 볼 수 있어요. 전기로는 절대 실험 금지입니다.
무서운 전기와 별 무서울 것 없는 물을 함께 말하다니. 선생님은 죄가 없었다. 경식이 엄니가 장맛비 오는 날 감전된 것을 모르시니까. 다만 물과 전기라는 이 두 가지 상극이 같은 성질이라는 것에서 두 배로 세 배로 화가 날 뿐이었다. 어쨌거나 여전히 어린 마음으로 그 둘을 따로 보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 흔히 보게 되는 것은 물이었다. 물은 눈에 보였으니까. 숟가락 위의 물은 손을 떨기만 해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곧 수평이 되었다. 수평이 보기에 좋았다.
아들, 밥 묵다가 뭣 허고 있어어! 어서 묵어, 투틸로, 다 식는다아! 엄니는 딴 생각에 빠진 아들도 이쁘기만 했나 보다. 엄니는 아들의 이름이 승욱이라는 것을 평생 잊고 사신다.
옳지, 그것이구나. 수평을 이루고 나면 흐르지 않는 것, 그것은 물과 전기만이 아니었다.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훨씬 나이를 먹고 나서였다. 사랑이라는 것도 똑같은 이치임을.
ㄱ이 ㄴ을 마음에 두고 애가 단다. ㄴ도 조금 그런가. 알 길이 없다. 이런 전위차에는 무한정으로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전류다. 헌신적인 짝사랑이 그렇다. 그 반대도 똑같다. ㄴ이 ㄱ을 마음에 두고 애가 단다. ㄱ도 조금 그런가. 알 길이 없다. 이런 전위차에는 무한정으로 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전류다. 헌신적인 짝사랑이 그렇다. 사랑은 그때에 한한다. 흐를 때가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낸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그것은 어설픈 희비극이 된다. 앞에 가는 종종걸음을 내가 스쳐 지나가면 종종걸음은 나를 눈여겨보리라. 눈길을 느끼면 돌아서서 마주 보아야지. 놀란 눈일까, 따뜻한 눈일까. 아니, 눈을 뜨고 나를 보기나 할까. 웬걸, 가슴이 뛰어서 뒤돌아보기는커녕 마구 달리다시피 교문을 들어선다. 나를 보았을까. 내가 분명 옆을 지나서 앞섰으니 내 모습을 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아니다, 종종걸음이 나를 본 것이 아니라, 내 모습이 그저 보이기만 했을 수도 있다. 아차, 지나치는 순간에 팔을 잘못 뻗은 시늉으로 가방이라도 건드려 볼 걸.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눈으로는 눈을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을. 그는 애가 달았다.
종종걸음의 눈은 무슨 색일까. 설마 푸른 눈일까. 그 어린 시절에 푸른 눈에 대한 오묘한 동경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쨌거나 그는 주변에서 푸른 눈을 본 적은 없었다. 서양사람이 아닌 바에야 누구의 눈도 푸를 수는 없겠지만, 종종걸음의 눈은 신선하고 푸른 기운을 내뿜을 거다. 그것은 상상에서 확신이 되어갔다. 종종걸음의 눈빛은 푸르고 눈동자는 새까만 포도알 같을 것이다. 까만 눈동자란 것도 이미지였을 뿐일까. 실제로 또래들의 눈동자는 다 같이 누런 흙빛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놀라운 상상이 피어올랐다. 종종걸음은 어쩜 내 앞에서만 종종걸음이 되는 거야. 하필 내가 교문 께에 이르는 바로 그 시간에. 종종걸음은 누군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더욱 종종걸음이 되는 것 같았다. 아니, 틀림없이 그랬다. 다른 친구들은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저만치 종종걸음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눈에 넣고 따라가다 보면, 왼쪽 다리가 살짝 짧은가 싶기도 했다. 짧았다. 균형이 100퍼센트가 아니었다. 똑똑똑똑 걷는 것이 아니라, 또독또독 걷는 느낌이었다. 아무도 몰라, 그만 아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만 주는 리듬 메시지일 수도 있었다. 그들이 배운 노래들 중에서 어떤 리듬인가를 찾아 맞추어보려고도 했다. 뭔가 발견한 것 같은 날에는 꾸물대다가 옆을 스쳐 지나는 일은 잊곤 했다. 종종걸음이 교문에 들어가 버리면 그때는 가방을 흔들어대면서 완전 갈지자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교실에서는 ‘내 사랑 종종이’를 볼 수 없었다.
칠판에 선생님이 써놓은 글자들을 배경으로 떠있는 그림, 그게 예쁜 절름발이다. 절름발이도 편차가 있다. 사알짝 두 발을 다르게 딛고 걸어가던 아이, 종종이의 걸음은 2/4 박자 강약강약. 그것이 강약중강약으로 살짝 변형되기도 했다. 수평으로 잘랐을 단발머리가 살짝살짝 수평을 깼다. 물론 다시 수평이 되었다. 그렇게 방학이 되었고, 아쉽게도 그 다음 방학은 졸업이었다. 면단위 중학교, 그 이상 인문고는 없었다. 성적이 좋아도 형편까지 좋아야 읍내로 또는 도시로 진학할 수 있었다. 졸업과 함께 종종이도 속사랑 같은 것도 사라졌다. 밋밋한 고등학교는 오직 대입준비로 지나갔다.
88년도 대입학력고사, 12월 그날은 날씨까지 얼어붙어 기껏 13~14도에 종일 두 손을 떨었다. 답안을 작성하는 오른손 말고 왼손도 함께 떨었고, 마음은 더욱 떨었다. 논술은 없어졌지만 선지원 후시험이라니, 밤중에 고르지 않은 숲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예상경쟁률은 3.5대 1이라고 더 높아졌다 했고, 정원은 18만 6,340명이라 했지만, 전년보다 1만 명 이상이 줄었다 했다. 응시생 26.9%가 입학 가능하다고 했으니, 열 중에 셋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무서운 전망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았다. 날개 없이도 날아갈 것 같았다. 창공을 가르는 새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거기에 전깃줄은 없었다.
노승욱에서 이번에는 새내기라고 - 새는 아니고 - 독특한 공동이름을 부여받은 1학년 생활은 일단은 희망과 부채감의 뒤범벅이었다. 경식이들은 고향에 남았고 고향을 떠나온 몇 안 되는 우리들은 처참한 날들에 내맡겨졌다. 어머니의 밥이 없는 나날들, 공부가 뭔지, 이 삭막함으로 무엇을 얻어낼 지 막막했다.
수강신청을 하면서 시작되는 대학생활에서 우선 교양과목이란 단어가 생경했다. 교양이란 ‘가르쳐서 기름’을 뜻하니까, 전체가 교육이거늘 새삼 교육과 비슷한 단어를 쓰는 것이 이상했다. 자세히 알아봤더니, 기껏 사전적 정의였지만,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교양이라 했다. 아직 사회생활다운 사회생활에 다가가지 못한 대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이란 학문, 지식, 품위, 문화 그런 단어들의 조합인 교양을 심어주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진 필수 교양과목들은 ‘국’자 중심이었다. 국민윤리, 국어, 국사……. 역시 나라가 주인공이었다. 선택과목들은 도무지 무슨 과목을 선택하여야 할 지, 서로 다른 열매들을 달고 손짓을 하는 나무들 앞에 선 느낌이었다.
법학개론 – 사시를 꿈도 꾸어보지 않았던 그가 굳이 법학 과목을 선택한 것은 사람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자면 법은 어느 정도 알아야 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중에 습득한 대로 이해하자면 그의 희망은 타자의 희망들, 헛것들이었지만, 물론 당시에는 새로운 것은 늘 대단한 가치로 보였다. 우와, 법학개론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를 혼돈에 빠뜨린 문장들이 오히려 그를 사색의 바다로 안내했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것을 위한 수단은 투쟁이다.’ - 교수님이 이 한 문장만큼은 외워야 하리라고 강조했을 때, 법은 막연히 정의라고 생각했던 그는 상식이 무식이었음을 느꼈다. ‘권리 추구자의 권리주장은 그 자신의 인격주장이다.’ 권리가 인격이라니! 이러한 문장들을 알려고, 그래서 대학생이 되려는 것이구나 싶었다. ‘자기 존재의 주장은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최고의 법칙이다.’ 처음으로 그는 ‘나, 나의 인격’이라는 단어를 직시했고, 그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탐구하고자 했다.
마침 함께 선택한 철학개론은 샘 깊은 물이 되었다. 그때 만난 책은 동서양철학이 함께 쓰인 책이었다. 하지만 개론이라는 말의 인상처럼 홀가분한 개론서가 아니라 4차원 혹은 5차원의 방정식 같았다.
서론에 쓰인 예지의 활동이라거나, 정신의 탄력성을 길러 삶의 의미를 깨닫고 바른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문장들, 아, 어려움 그러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인간다움의 조건으로서의 철학 공부, 근원적 진리 탐구, 나아가서 이런 책을 집필할 수 있는 인간, 그를 철학인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 역시 기꺼이 철학인이 되고 싶었다. 사학과 학생이니 역사학, 그 중에서도 역사철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사색의 대양에서 나침판도 없이 허둥대면서 동서남북 방향을 잃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해 여름 온 나라를 집어삼킨 열정의 도가니 올림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빈국 대한민국의 쾌거라느니,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될 거라느니, 그러려무나. 아돈케어! 오직 철학이 그의 날개가 될 터였다. 그는 좌고우면 없이 진정으로 학문에 진력했다. 가끔 최루탄 가스가 강의실까지 뚫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 그리고 상당수의 학생들은 공부만 했다.
그렇게 2학년이 되었다. 공부만 하려는 귀에도 세상의 어수선함은 도를 넘었다. 노동절 즈음 느닷없이 부산이 전쟁터로 바뀌었다. 어느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잡혀가자 반대로 전경 납치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결과는 처참했다. 화마에 휩쓸리거나 불길을 피하려다가, 사고 당일 현장에서 경찰관이 6명이나 사망했다. 중상자는 부지기수였다. 90여명이 잡혀갔다. 신성한 학문의 전당은 어디에도 없었다. 광주에서는 수배 중이던 대학생이 수원지에서 수상쩍은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없는 살벌한 봄이었다. 도서관에 골방에 틀어박힌 젊음은 젊음도 아니렷다 싶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폭탄이 아니라 미사일급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날개 달린 새도 아닌 한 여학생이 비행기를 타고 또 타고 공포의 철조망을 넘어갔다. 누군가가 북한을 가려면 베이징을 통해서 갔을 것을, 그 여학생은 일본 관광 핑계로 나갔더란다. 그리고는 도쿄에서 베를린으로, 거기서 모스크바로 갔다는 것이다. 아, 모스크바! 상상에도 없는 도시! 한국인 여권으로 그런 것도 가능한 것인지. 한국인 생각으로 어떻게 그런 생각이 가능한지. 그는 정말로 의아했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듣고 또 듣고 보고 또 보고 외운 그들 아닌가. 반공이 곧 민주이거늘, 그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13차라던가,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것이랬다. 7월의 1주일 남짓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했다는, 이전의 모스크바 대회만큼은 아닐 지나 대성황을 이루어 서울의 88올림픽과 비교될 평양축전임을 자랑했더란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대학가의 진통은 당연히 올림픽 때를 능가했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있던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아직 학생이면서 어떻게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한 달 여 행사를 마치고 나서, 세상에나, 이번에는 날개를 접고 휴전선을 두 발로 걸어서 남으로 넘어왔다. 한반도 군사분계선이 가로막힌 이후 첫 공개적 일이라 했다. 물론 그 순간 바로 안기부에 구속되었고.
휴전선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는 도서관에 있었다. 그때 그는 이상한 전기를 느꼈다. 볼펜이 들려 있던 오른손 엄지검지 사이에서 시작되어 순간적으로 온몸을 찌르는 전기였다. 딱딱한 나무 의자와 연결된 엉덩이가 불에 덴 것 같았다. 이건 전위차인가? 어디선가 번개 같은 전류가 흘렀다.
참새 같은 작은 새는 두 다리로 전선 위에 올라 서기 때문에 병렬로 연결된답니다. 그러면 전위차가 ‘0’이라서 감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귓속에서 소용돌이침과 동시에 그는 귀를 싸매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그를 일으켰다. 낯모르는 여학생이었다. 여학생은 그를 밖으로 이끌었다. 벤치에 뉘였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하늘이 아닌 땅의 모습이 보인다. 듬성듬성한 풀밭에 흑백으로 널브러진 날개, 커다란 새. 180도를 회전해서 다시 하늘이 보인다. 전신주 꼭대기,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다른 한 마리가 유유히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더니 주위를 도는가 싶다. 다음 순간, 어쩌면 전깃줄에 내려앉는 순간인가 싶다. 풀썩, 그대로 땅바닥으로 꽂힌다. 멋진 깃털 날개가 파르르 떨더니 이불처럼 몸뚱이를 덮는다. 바람에 여진이 인다. 감전사 – 왜 이 큰 새가 떨어지는가. 작은 참새들도 잘들 알고 피하는 것을.
참새류와 달리 한쪽 날개 길이가 1미터 가량 될 정도로 몸집이 큰 황새는 다른 새에 비해 전깃줄 감전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습…….
언제 적이었더라. 낭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는다. 뭐야, 그러니까 큰 새들이 더 위험하다고. 그러니까 경식이 엄니도, 어쩌면 나도……. 그는 의식을 잃는다.
그게요, 전류가 흐르려면 전위차가 있어야 해요. 이 황새는 참새와 달리…….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형, 쉿, 조용히! 조용히 있어 봐요! 여기 황새가 어디 있다고!
형? 여자애가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남자 선배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애들은 다 그쪽 애들이다. 교정 풀밭에서 1:1 교육을 받는다는 애들 말이다. 네가 나를 찍었더냐, 나를 설마? 그는 눈을 감았다. 어디서 봤던 애더라? 그는 무엇인가에 감전된 것인가. 여자애는 손으로 그의 팔을 가만히 누르면서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ㄱ의 손바닥과 ㄴ의 팔은 전류가 통하는 것일까 아닐까. 생각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고, 깜깜한 세상 속에서는 가늘지만 번쩍번쩍하는 전류만 보였다. 소리 없는 마른 번개였다. 감은 눈을 치켜뜰 힘도 없었고, 뜰 수 있었다 해도 뜨고 싶지 않았다. 살살 간질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다시 한 번 전류의 습격이 왔다. 그는 팔을 떨어뜨렸다. 지면과 연결된 철탑이나 전봇대에 닿으면 참새든, 사람이든 감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의 말이 귀를 때렸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 몇이 몰려들었다. 인문대 벤치 쪽에서 몰려왔을 것이었다. 누군가가 건넨 찬물을 먹여준 그 여자애는 성연이, 과 후배라 했다. 그날 이후 가끔씩 만난 연이는 새내기 주제에 아는 것이 꽤나 많았다. 무슨 애가 이리 유식한가. 기분이 나빴다. 입학하자마자 소위 운동권에 포섭된 걸까. 알고 보니 큰오빠가 독일어 선생님인데, 전교조 소속 해직교사라 했다. 큰오빠에게서 이런 저런 것을 듣는 모양이었다.
전교조? 그런 단어도 모르고 있던 그는 사회 속의 인간이, 더불어 사는 인간이 아님을 느꼈다. 4.19 혁명과 함께 조직되었던 교원노조가 5.16 쿠데타로 바로 해체되어 버렸다가 정신만큼은 살아남아서 20년 30년 세월이 흐른 그해 초 교직원노동조합으로 결성되었다 했다. 봄 학기 시작하자마자 전교조 활성화 움직임이 일었고, 2만 명도 넘는 교사들이 합류했단다. 그런 활동에 따른 탄압의 소용돌이는 불 보듯 뻔했고, 1,500명도 넘는 교사들이 파면되거나 해임되었다고 했다.
교사가 노동자? 노동계급으로서의 교사? 노동자의 시각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역사 선생님이 되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던 그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뭔가 참담했다.
철조망을 넘나든 새에 관해서는, 정확히는 여학생의 방북 활동 그리고 구속에 관해서는 찬반 견해들로 정신이 사나웠다. 연이를 통해서 그 가정의 사연을 - 사연이라는 말이 왠지 미안하지만 – 그 사연을 들었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왜 그리도 끔찍한 사연들로 점철되는 것일까. 누구라도 고2 때, 6년 터울의 오빠가 죽었다면. 하필 전방 부대에서 죽었다면. 다음 날 가족 면회가 예정되었던 오빠가 죽었다면. 그것도 자살했다고 한다면. 여고생에게 그 충격은 평생 갈 것이었다. 그 방북 여학생은 그들 또래 아님 바로 위 누나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이태 전 그들이 고3 때 학교 정문 앞 시위에서 최루탄에 사망한 대학생도 그들의 바로 위 형 또래였다. 연이는 그 사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 형은 운동권이면서 공부에도 엄청 열심이었고, 운영하던 만화동아리도 위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끌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또 2학기가 시작되었다. 연이는 그를 느닷없는 독일현대소설이라는 과목으로 이끌었다. 큰오빠가 추천해준 과목이라 했다. 유럽의 현대사회를, 학생운동을 곧바로 알 수 있는 과목이랬다.
나 학생운동 별 관심 없는 줄 알면서.
학생운동 빼놓고 어떻게 유럽의 현대사를 알아? 우리 역사전공 아냐!
우리 과 학생들이 읽을 필독서는 따로 있잖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못 들었어? 유럽의 역사라면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영국사』 그거면 되는 것 아냐. 또 가볍고 폭 넓게 『이야기세계사』 두 권도 있잖아. 고대 오리엔트부터 중세까지, 르네상스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젊은 사학자들이 써서 재미있어. 이건 과 선배로서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공부 좀 제대로 합시다, 성연이 학생!
형은!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나 해! 독일현대소설 수강하면 틀림없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소설도 공부하게 될 거래.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 모르지? 나도 몰라. 암튼 70년대 중반에 발표 되자마자 곧 영화화 되었고. 소설에 부제가 붙어 있는데,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며 어떠한 결과를 낼 수 있는가’ 라네.
기껏 폭력 이야기구만.
아니 그보다도 더한 살인 이야기. 너무도 평범한 독신 여자가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랑 마음이 맞아 자기 집에 갔어. 이튿날 아침 무시무시한 가택수색을 당한 거야. 은행강도를 은신시켰다는 죄목이었대. 강도란 물론 누명이었고. 그럼에도 순간에 매장당하는 거지. 당연히 신문들의 보도태도가 한 평범한 여자의 명예를 짓밟아버린 것이야. 여자는 가치관의 혼란 끝에 극도의 절망 속에서 기자를 살해하게 된다는.
뭐야, 멀쩡한 기자를? 다만 명예를 실추시킨 왜곡 보도 때문에? 당했으니 원수 갚고…… 그렇고 그런 평범 그 자체구만.
형! 울 큰오빠, 전교조 해직교사 이전에 독문과 졸업생이라니까, 과대도 했고! 독문과 졸업생이 독문과 강의를 추천할 때는 그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어?
독일현대소설 – 이 과목 첫시간은 다른 놀람의 순간이었다. 언젠가 깨진 강의동 유리창 사이로 스며드는 최루가스에 코를 막고 달리다가 층계참에서 맞닥뜨렸던 여자, 아무에게나 치약을 나누어주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순간 멍했다. 독일현대소설은 다만 소설이 아니라 사회적 배경에 집중되는 강의였다. 연이의 말을 듣기를, 연이오빠 독일어 선생님을 믿기를 잘했다.
어쩜 좋아, 10월의 어느 날엔가 연이가 울상이 되었다. 흙빛 얼굴이었다.
형, 세상은 너무도 잔인해. 이번 사고가 하필 y대 그 만화동아리에서 터진 거야. 이oo열사가 그렇게 떠난 뒤에도 계속 동아리는 유지되고 있었다 거든. 어떻게 그런 일이. 하필 거기에서.
무슨 사고? 연이 넌 입만 열면 사고 소식을 물고 오더라.
듣고 보니 끔찍했다. 참혹했다. 비참했다. 예상을 상상을 모든 것을 넘었다. 그 만화동아리에 드나들던, 만화에만 진심이던, 정말 애먼 전문대생이 소위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4년제 대학생이 아니니까, y대생도 k대생도 아니니까 틀림없이 프락치라는 오해로 인해서…….
그 이름은, 그 일은 글로는커녕 말로도 옮길 수 없다. 그런 뉴스는 듣지 않은 것으로, 내 머리에 입력되기 전에 귓가만 스쳤을 때 회수해 갔으면 했다. 세상에는 입술을 달싹거려서도 안 되는 일들이 있다. 인간에, 인간 세상에 관해서는 어쩌면 침묵이 답이다.
침묵은 당연한 결과였다. 말은 입술 안에 갇혔고, 글자들은 책 속에서 먼지 조각들이 되어 증발해버렸다. 강의실에서 펼쳐진 책들은 뿌연 공간으로 흐늘거릴 뿐이었다. 교수님들의 강의 목소리며 동기들의 말소리들이 귓바퀴에서 바람처럼 쓸려 나갔다. 소리들을 따라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올라가던 그는 어떤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곤 했다. 그는 여기 이곳을 피해서 날고 싶었다. 날개가 없었다. 그는 새가 아니었다.
10월 초, 그러니까 그 무서운 일이 벌어지기 바로 일주일 전에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왔었다. 두 번째 한국방문이었다. 그에게, 어머니에게 교황이 누구인가. 그가 열 살 때였을까, 어머니가 하도나 숨 가쁘게 교황님 교황님을 불러댔다.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1세, 요한 바오로 2세로 교황의 이름이 바뀌던 그해, 어머니의 불안한 슬픔과 기쁨의 교차는 당시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에게 교황은 하느님 바로 다음이라고 각인된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국인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식이 있던 1984년의 한국 방문은 어머니에게는 천국이 이 땅에 열린 날이었다. 교황이 한국에 와서 첫 번째로 방문한 곳이 전라남도 광주시, 그때는 아직 광주시였다. 미사집전을 위해서는 광주공항에서 무등경기장으로 바로 가면 되었을 것을 5.18 민주화운동 눈물의 현장 전라남도 도청을 돌아서 갔다. 그런 결정은 바티칸에서부터 했기 때문에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틈만 나면 강조하곤 했다. 전남도청 앞과 금남로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1980년 5월 이후 처음이었다고 했다. 사실 어머니는 교황의 광주 방문 전날부터 광주로 나갔고, 차가 끊겼다던가 무슨 핑계로 이모 집에서 주무셨다. 다음날 아침 미사에 늦지 않기 위함인 걸 누군들 몰랐으랴.
또 뭐냐! 투틸로! 교황님이 글쎄 그 먼 데 소록도 나환자촌엘 가시겠다고 작정하셨대. 솔직히 우리들 모두 그 무서운 사람들과는 배라도 같이 탈라고 했더라냐! 선착장도 따로따론데, 그런 데를!
아무튼 어머니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겸한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대회까지 못 가신 것을 너무도 애석해하셨다. 시상에나, 미사도 한국말로 보신다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입을 맞추며 ‘순교자의 땅’이라고 하셨대. 한국말이라고? 어머니가 잘 못 아신 줄 알았다. 실제로 교황님은 10개 국어를 하신다는 걸 듣고는 2개 국어도 잘 하지 못하는 그는 그때 아직 중3이었음에도 몹시 부끄러웠다. 평생 3개 국어라도 하게 될까? 하긴, 그는 뭐 사제가 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지금은 그가 대학생이니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 교황이 한국에 다시 왔으니, 시성식 때만은 못했어도 대단한 뉴스였다. 서울에서 열린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라나. 65만 명이 몰린 여의도광장 행사에서 남북한 화해를 기원하는 평화메시지를 낭독했더란다. 이번에는 또 어떤 한국인을 몰래 만나서는 ‘쉿, 혼나’라고 위트를 남발했다는. 그래서 고향의 어머니가 또 얼마나 좋아하실까 생각하며 무심코 흠뻑 웃었더니만.
그런데 그런 기억조차 하얗게 세어버렸다. 세상에 종교가 있는 것일까.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어떻게 대학생들이 대학생을. 살아있는 사람을. 어머니의 교황님은 무엇이라 하실 것인가. 교황님이 다녀가신 서울에 그를 통한 은총 같은 것은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1주일의 효력도 없는 은총이라니, 은총은 빈총이었다.
형,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연이는 정말 호박씨를 물어 오는 제비처럼 소식을 물어 날랐다. 그 애는 전깃줄에서 지직~ 하고 떨어질 바보 같은 새는 아니길 빌어야 했다. 사실 그는 소식보다 찰랑거리는 단발이 좋았다. 달까말까 스치는 머리카락이 은근히 그리웠다.
저기 베를린에서, 그러니까 동베를린 군중들이 베를린장벽을 밤사이 망치로 무너뜨렸다는 뉴스요! 들었죠? 동독의 국경이 전쟁 그런 것 없이 완전히 개방되었다고요.
사실 그는 뉴스를 잘 듣는 편은 아니었다. 고향에 살 때부터 뉴스는 어머니가 성당에서 듣고 오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 바깥일에 관심이 적었다고나 할까. 집에 라디오도 없었고, 도서관에서도 신문을 챙겨 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동구의 상황은 좀 알고 있었다. 철의 장막이 붕괴되는 소리는 여름부터 들려왔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가 사실상 개방되었다. 그 가을 라이프치히에선가 7만 명 시위대가 ‘우리는 민족이다.’를 외쳤다고 해서 ‘민족’이 무슨 뜻일까 살짝 고민도 했었다. 정관사를 썼을까, 부정관사를 썼을까. 그 문장 때문에 여름에 철조망을 높이 넘어 날아간 새가 북에서 읊었다던 표어 ‘조국은 하나다’를 다시 떠올리기도 했었다. 그렇더라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고? 사람들 수천이 몰려드니까 밤사이에 수비대가 장벽을 열었고, 사람들은 장벽을 깼고, 낯선 사람들끼리 만나서 포옹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니. 만우절도 아닌데 사실이겠지.
형! 듣고 있어요? 사람들은 왜 왕창 서베를린 쪽으로 몰렸을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아는 것도 없고. 다만 동서 할 것 없이 유명한 텔레비전 탑들로 양 방향 방송이 터진 건 오랜 일이고, 한 해 500만 600만씩 단기 방문여행이 가능했다는 기사도 보았었다. 한쪽의 풍요로운 경제지표도 다 알려진 사실이었고. 뭔가 자유로운 분위기, 강요된 안정 보다는 선택하는 무엇, 하다못해 나태 같은 것. 그러니까 실업급여 같은 것, 왠지 잠시 덜 먹고 놀 수도 있을 것 같은 자유…… 그 비슷한 것을 상상했다. 상상만 했다. 기적과도 같은 분단국 독일의 소식에도 그는 무감각했다. 세상에 대고 언급할 단어들이 사라져 버렸다.
침묵 속은 희뿌연 공간이었다. 어딘가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나름 온전한 길이라고 믿었던, 면학을 통해서 성과를 내고 어엿한 직장인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정석은 깨어지고 없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를 어떻게 살까. 어디로 도망갈까. 돌부리를 차고 걸었다. 연이는 그를 슬슬 피하는 눈치였다. 슬픈 무서운 진실들을 날갯짓에 날라 오는 일에 스스로 소스라쳐 하는 것 같았다.
강의실 대신 책방을 기웃거렸다. 혼을 빼놓을 책을 읽자. 시집에서 안정감을, 언감생심 낭만을 찾게 되려나. 그렇더라도 한편으로 당시 인기 절정의 『홀로 서기』 같은 것, 그건 아니었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이상한 거부감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홀로 서 있는 인간이 웬 홀로 서기 주장인가 싶어서였다. 이렇게 날이 넘어서야 무슨 시를 읽나. 좋아, 우리들의 자화상을 읽자. 그는 ‘우리’를 골랐다.
『슬픈 우리 젊은 날』 -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로맨스 영화에 대한 반발로 이름 붙였다는 시집이었다. 대학가의 서클룸, 화장실 벽, 술집, 카페의 메모장에 적은 낙서까지 수집해 놓은 글들이라면 그들 대학생들 모두가 필자일 터였다. 어라, 그때의 살짝 놀람이 지금도 생각난다. ‘너무 맑아 서러운 날’이라는 1부의 맑은 서러움을 넘기면, 2부는 역시 ‘혼자 서는 연습’이었다. 홀로, 혼자가 역시 젊은이들의 화두였다.
제비 - 나는 겨울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겨울에 이땅을 찾아옵니다. 나는 날개가 있어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따뜻한 곳으로 날아가지 않느냐고요? 왜냐하면 따뜻한 곳으로 가면 희망이 사라질까봐 그래요. y대 자유교양이라는 써클의 누군가가 쓴 낙서의 일부였다.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얼어붙은 땅에 온다고? 눈이 내리면 얼어서 죽고 – 역시 제목이다. 정말 낙서인지 시인지 공감 가는 글들이 많았다. 게서 구한 것은 위로도 낭만도 아니고 아픔이었다. 그는 아파서는 안 되고 건강하게 학업을 마치고 건전한 직업인이 되어야할 숙제를 살고 있었는데도, 고개를 들어보니 도처에 아픔뿐이었다. 슬픔까지는 그 나름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어휘였지만, 아픔은 달랐다. 아픔은 아픔이었다.
멍든 하늘을 이고 살아가는 청춘들, 애초에 하늘은 시퍼런 멍이 들었는지 모른다는 상상에 공감하면서, 그 가을 겨울에는 철학에도 지진이 일었다. 서적은 뒤죽박죽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는 68운동을 들여다보았다. 지금까지와 달리 어둠에서 구한 금지된 책들을 읽었다.
아,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서구의 68운동의 모토는 그냥 너무 멋있는 문구였다. 1945년 종전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영광은 기울고 있었고, 50년대 탄생한 독일 라인강의 기적도 영원치는 않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는 독재스타일 대통령의 결단으로 경제가 살아나고 있었던 그때, 전쟁에 팔려(?) 가서도 달러에 환호하던 그때,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시작되었다더니, 68년 베트남 구정 대공세를 기점으로 유럽의 대학생들은 폭발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성장도 사회주의 국가들의 복지제도도 모든 인간의 해방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러니까 자유로운 인간들의 평등한 세상은 어느 곳에도 없다는 인식에 폭발했다.
그는 그들이 꿈도 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읽는 『희망의 원리』라는 책에서는 그런 꿈을 낮꿈이라고 했다. 낮꿈이라고? 그는 눈을 크게 떠보았다. 아무리 크게 떠도 물고기 눈이었지만.
밤꿈이 리비도의 충동에 기인한다면, 낮꿈에는 자아의 고유 의지가 보전되어 있다. 밤꿈은 정신분열적, 낮꿈은 편집광적이다. 낮꿈은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 결핍과 장애가 낮꿈을 꾸게 하므로, ‘만일 구운 비둘기가 식탁에 널려 있다면’ 사람들은 낮꿈을 꾸는 것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 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한편 세상에 만연한 관료주의가 자유를 억압하는 데에 지친 그들은 ‘굶어 죽더라도 지루한 건 못 참겠다.’라고 외쳐댔다. 벌써 20년 전에. 그때 그리고 20년이 지난 그날도 한국 국민들은 얌전히 반공 민주정신으로 살고 있었는데. 살아야 했는데.
침묵 속에서, 낮꿈이 무엇인지, 구체적 유토피아가 무엇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아는 것도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닫아야 했던 나날들이었다. 침묵 속에서 결정한 첫 번째 행동이 입대였다. 불안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전방에 배치될까. 그는 운동권이 아님은 물론 단순 시위 전력도 없었다. 그래도 대학생이니 전방으로 가게 되려나. 가게 되면 갈 일이었다. 우연히 죽게 되면 죽나? 막연한 공포로 미칠 것 같았지만, 험할지라도, 무서울지라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과에는 친구가 없었다. 법학개론에 훅 갔다가 철학서에 빠져서는 단 한 치도 옆을 돌아보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를 빼먹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학기 중간에 넋이 나가버렸으니 학기를 망쳤다. 학기를 망치다니! 그런 단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일은 그리 닥쳤다. 2년의 대학생활에서 세 학기만 건져 놓은 채 입대를 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차곡차곡 블록쌓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벌써부터 절름발이 블록이 되었다.
연이, 입대를 결정하고 나서 연이를 보아야 했을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을까. 모르겠다. 이제 침묵은 회색 숲을 넘어 블랙홀처럼 그를 빨아들였다. 덜컹거리는 맘을 접었다. 흔들리는 각도를 접는다. 사랑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수평이 되어버리면, 수평이 되어버린 사랑은 순간에 멈춘다. 안다.
사람은 어떠냐고요? 사람도 이론적으로는 참새와 마찬가지입니다. 두 손으로 전선에 매달려도 감전되지 않습니다. 제발 몸으로 시험하지 말아요. 아득히 선생님의 말이 들려온다.
전깃줄의 참새는 둥지에 넣을 사철쑥을 입에 물고 가다가 쉬는 것일까. 참새가 두 발로 한 줄에 서듯, 그도 두 손으로 한 줄에 매달리면 된다. 그는 무얼 하다가 전깃줄에 닿았을까. 그는 어쩌면 감전되었었다. 감전되기를 바랐었다. 아니, 새들은 유리창에 부딪쳐서도 죽는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왜소한 몸뚱이가 눈앞에 일렁였다. 숨은 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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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 『국제PEN광주』 , 국제PEN광주위원회, 400~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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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심판의 날에
저의 죄를 묻지 말아주소서!
- 교황 바오로 3세, 1541년 시스티나 성당
* * *
투틸로 –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이름, 너는 오늘 너에게 빠진다.
1969년 3월 28일, 교황 바오로 6세가 한국의 김 스테파노 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신 바로 그날 세상에 나온 그는 바로 그것으로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유아세례 때 어머니는 그에게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받게 하고 싶어 했더란다. 아니면 이그나시오, 주임신부님을 따라서 이그나시오라고. 하지만 신부님은 생일의 성인을 따라 투틸로라 이름지어주셨다.
성 투틸로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은 자라면서야 풀렸는데,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단다. 지혜와 웅변술로 수도원 학교에서 학장을 역임한 시인이며, 회화, 조각, 공예를 두루 섭렵한 미술가이자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졌다는 만능 예술가였단다. 베네딕토는 우리나라 가톨릭에서는 베네딕도라고 쓴다. 대구수녀원이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소속이다. 바른 표기라면 툿칭일까, 아무튼 뮌헨 근교의 지역이름이니까 의미는 없다. 어쩌다 베네딕도수녀원의 긴 이름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일가 수녀님 때문이다. 평생을 미국 중부 어디 오마하의 수녀원에 있는 그 수녀님은 일가이니까 한국인인데, 법적으로는 미국인이겠지만, 한국에 피정을 오면 매번 대구를 방문한다. 같은 베네딕도수녀회라서 그런다 했다. 수녀님은 그곳을 다녀오면 꼭 들려주는 말이 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요한1서 어쩌고 한다. 그의 특기는 ‘예’도 아닌 침묵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영원히, 어디에 남아, 뭣 하러?
다른 이야기로 갈 것은 없고, 그 투틸로 수도승 같은 만능 예술인의 이름을 받은 기분은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유전이 아닌 만큼 불행하게도 그가 예술적 감각과 관련해서 유전자를 갖지 못한 것이 분명해졌다. 웅변, 글쓰기, 음악, 미술 어느 것에서도 소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겁이 많은 사내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그렇게 머나 먼 성 투틸로 대신에 그는 그에게 투틸로라는 이름을 주신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신부님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로는 큰 도시의 성당으로 나가셨다고 했다. 자라면서 괜스레 궁금해진 그는 이그나시오 신부님을 찾아보았고, 로마 유학을 떠나셨고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셨다는 것까지, 그리고 돌아오셔서 곧 세상을 떠나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에게는 모른 체 했다. 침묵은 말보다 편한 도구였다. 다만 마음속에 만일 로마를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레고리오 대학과 성 이그나시오 디 로욜라 성당에는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170㎡가 넘는다는 성당의 천장화 <성 이그나시오의 영광>을 꼭 보고 싶었다. 그 성당을 완공할 즈음 재정난으로 돔을 만들 수 없었을 때 – 돔이 없는 성당이라니! - 포초라는 화가가 실제로는 평평한 천장에 돔을 그려넣었다는 것 아닌가. 착시현상을 이용해서 돔과 하늘을 드높고 드높게, 그러니까 다만 시각적으로 공간을 무한 확장했단다. 하늘에서 떨어져내릴 것 같은 사람들의 형상들도 함께 그려넣었다니. 두 눈으로 보면서 눈속임에 빠져보고 싶다. 물론 로마에 갈 수 있다면 그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놓칠 수야 없겠지.
천장화 – 그런 것들을 새들이 그린다면 또 몰라, 어떻게 사람이 그릴 수 있었을까. 4년을 천장화에 매달린 미켈란젤로, 이런 것만으로도 옛날 사람들은 그에게서 경이를 자아낸다. <최후의 심판>은 어떻고. 167.14㎡의 벽면에 391명의 온갖 모습을 7,8년의 세월에 걸쳐 그렸다니. 당시 교황님의 김탄사가 의아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하긴 모든 예술이 그렇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석고형으로 구체화하는 데에 꼬박 37년을 보냈다잖은가. 서울에 있는 No7/8 청동작품 제작만도 2년 반이나 걸렸다는데, 대중이 관람할 수가 없다니 애석하다. 작품을 전시하던 로댕갤러리는 폐업을 했고, 해서 지금은 다른 미술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니, 혼도 따라서 수장고로 들어가 잠을 자고 있을까. 그의 내면은 멀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채워졌다.
왜 현대에는 지독한 완벽한 일꾼이 없을까. 우리는 현대인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그는 단정했다. 어느 부분 발전을 말하지만 능력 면에서 퇴보가 더 드러난다. 혹시나 기록되지 않은 태고의 역사 속에서는 인간에게 날개도 있었을까. 그 감각으로 천장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창세기의 인물들처럼 몇 백 년을 살 수 있었을까. 최초의 인간 아담이 930세를 살았다지만, 그 기록을 노아가 950세로 므두셀라가 969세로 깬다. 현대인에게 평생의 작업이 무슨 의미일까.
몸은 그렇다 치고 머릿속은 어떻게 그렇게 심오했을까.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의 이름을 그는 수학 시간에 알게 되었다. ‘두 직선이 만나면 마주보는 두 각은 같은 각을 이룬다.’ 라거나 ‘임의의 원은 지름에 의해서 이등분 된다.’ 이런 간단해 보이지만 완벽한 정리를 할 수 있었다니, 공책에 그것들을 눌러 쓰면서 그는 어지러움을 느낄만큼 감탄했다. 현대의 심오한 지식이라는 것들은 파편적일 뿐, 전체적으로는 위축된 인간들. 그는 자랄수록 배울수록 과거라는 시공간이 무한 매력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역사를 공부하자, 그랬다.
투틸로, 학교 이름으로는 노승욱, 그가 택한 사학자의 길은 수월한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실업급여를 받고 있는 전 대학강사에게 미래는커녕 현재도 없었다, 없다. 남사스럽다, 라고 부끄러워할밖에. 어머니의 속뜻대로 그는 신학대학으로 진학을 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종신서원까지도. 극단적으로는 카르투시오회의 모토처럼 오직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도 있었겠다. 천 년 전에 주교직도 마다하고 엄격한 은수 수도생활을 시작한 성 브루노의 후예들, 봉쇄수도원은 영화 〈위대한 침묵〉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들 봉쇄수사의 삶은 기본적으로 은둔 지향, 그렇다고 현대에 와서는 완전한 은수 개념은 불가능하고 반쯤 숨어서 생활한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세상에는 스물도 넘지만 우리나라에는 두 곳, 20년 전쯤 세워진 상주시에 있는 남자 수도원에는 한국인 봉쇄수사 두 분과 외국인 몇 분이 계신다. 평수 사님들은 몇 분 더 계시고. 아, 그곳에 관한 한국영화도 있다. 그리고 수녀회는 보은에 있다던가. 믿거나 말거나 거친 빵과 밥 중 선택해서 먹는 것이 전부라니, 그로서는 그런 절제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인간의 기본 욕구, 그러니까 생리적 욕구인 의식주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안전에 대한, 소속감에 대한, 설마 존중에 대한, 자아실현에 대한 고차원적 욕구들이 채워진들 진정일까. 영화를 본 다른 누구는 봉쇄수사들이 자발적으로 시간과 미래를 버렸으므로 이미 천국에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로서는 선뜻 동의는 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속세가 맞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천국인 그곳에서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초월할 것이다. 봉쇄수도원이 아니더라도 특정 종교에서는 죽음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에 수혈을 거부하는 사례가, 그래서 기쁨으로 죽음을 맞는 사례가 있다. 〈위대한 침묵〉에서의 드문 인터뷰도 생각났다. 한 장님수사가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자신을 장님으로 만드신 것에 감사한다고, 그것이 영혼에 더 이로울 것이기 때문이랬다. 이 무한 신앙도 한 인간의 것이다. 다른 인간은 그런 상태를 도취라고, 마취라고, 마약이라고 할 게다. 묵상과 기도와 독서와 노동이 전부인 삶을, 그 자발적 선택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20년에 걸쳐 인내하면서 영화를 찍은 감독 또한 수사 못지않다. 옛날만은 못하지만 세상은 대단한 사람들 천지다. 태어나지 말았어야할 존재들 또한 현실이건만. 그러니까 살아서 벌써 천국과 지옥이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속을 끓이면서 그는 답을 몰랐다. 아스팔트에 둘러싸인 방, 열린 또는 닫힌 창문 하나, 이 침묵은 봉쇄수도원의 그것과 비슷하려나. 그의 그것은 헌신도 외경도 없이, 부끄러움만 더한, 그래서 더욱 소외된 침묵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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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 『작가교수세계』, 한국작가교수회, 474~478쪽.
[짧은 소설]
5월이 되었다. 4월보다 더 아픈 5월이다. 아픔은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무엇이든 꼬리가 있다. 꼬리가 밟힌다.
장미 축제에 다녀왔어요! 무심한 페친이 흐드러지게 핀 장미 정원을 보여준다. 그는 토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네요! 한 가정의 행복은 지상 최고의……. 이렇게 선한 톡을 보내와도 그는 토한다. 그해 5월 깨어진 가정은 어쩌란 말이냐. 봄은 생명이고 죽음이었다. 생명과 죽음이 혼동되었을 때, 그는 말을 잃어갔다.
그는 어린 시절에 벌써 친구를 잃었다.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흔히 이별을 생각하게 되고, 이별은 헤어짐,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가는 일,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러운 흩어짐 같은 것이 먼저다. 그러나 그들 또래의 어린 시절의 이별은 달랐다.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1969년 봄날, 우리나라에서 첫 추기경이 탄생한 바로 그날 태어난 그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우리 애가 글쎄 우리나라에 처음 추기경이 서임되신 날 태어났어요! 터무니없이 그의 탄생을 축복으로 여겼다던 어머니 루시아는 지쳐갔다. 신에게 애원하다 지쳤을까. 말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귀머거리라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서는 침묵했다. 침묵은 모르는 것에 대한 침묵이었을 것이다. 다른 말들은 했다. 그의 말도 알아들었다. 어머니처럼 말 수 적은 아이, 그는 그렇게 자라고 있었다.
열두 살이 된 봄, 그해도 봄날의 시가지는 큰길가 푸른 나뭇잎 사이로 초파일 연등들이 내걸리면서 한껏 화려함을 더했다. 아이들은 운동회 날의 풍선들을 보듯이 그냥 좋아 뛰어다녔다. 그런 그때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어떤 젊은 아저씨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맞아죽었다 했다. 장애인, 잘 듣지 못해서 대답도 잘 못하는데 군인들한테 맞아죽었다. 사람들이 죽어갔다. 어린이들도 죽었다. 소문은 소문이 아니었다. 또래 아이들이 폭도라서 죽다니. 죽은 아이들은 폭도였다. 그런 뉴스들이 있었다. 그때 죽은 사람들은 폭도이니까, 어린이들이라 해도 폭도였다. 마을 앞동산에서 놀다가 드드득 총소리에 놀라 몸을 피하려다 죽었다. 벗어진 고무신을 주우려고 돌아선 순간 서너 발의 총알이 옆구리를 관통! 관통이란 말이 너무 무서웠다. 뚫고 지나갔다는 말이라 했다. 작은 몸을! 그 바보는 고무신 때문에 죽었다. 간첩이나 무장공비만 국군들의 총에 죽는 줄 알았었다. 폭도도 국군들의 총에 죽는다.
다른 아이들도 죽었다. 저수지에서 놀던 어린이도 죽었다 했다. 두개골이 아예 없어질 정도였다 했다. 어린이에게는 총탄들이 너무 큰가 보다, 생각했다. 무서웠다. 그냥 무서웠다. 일이 이쯤 되니 중학생 아들을 마중나간 엄마도 있었겠다. 그 엄마도 죽었다. 하수관로에 숨었지만 관통상을 입고 죽었다. 엄마도, 그러니까 어른도 관통 당했다. 웅크린 채 숨은 엄마에게 죽어라고 총을 쏜 사람, 사람 아니 국군. 아니, 국군은 사람이 아니었다. 국군, 계엄군, 폭도, 어린이 - 단어들은 혼돈의 세계였다. 고무신 바보랑 함께 놀았다가 용케 살아남은 친구, 그 애는 완전 벙어리가 되었다. 또래들도 따라서 말을 잃어갔다.
추상적이고 절대적인 자유가 최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자유의 반대인 폭력도 최대화된다. - 『자유의 폭력』이라는 책에서 읽은 글이다. 마음대로 총을 쏠 수 있었던 그들의 자유는 우리에게는 폭력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우리에게 폭력이었고, 그 폭력은 우리를 침묵케 했다.
벙어리도 내력인가 봐. 애처로운 눈길을 받으며 자라는 동안 공부 밖에 할 게 없었다. 그에게 책은 말을 시키지 않아서 편안한 친구였다. 시험도 곧잘 봤다. 등록금 걱정을 덜 하는 국립대학에 들어갔고, 무엇인가 깨어진 불균형 속에서도 학위까지는 거뜬했다. 거기까지였다. 취업은 바늘구멍이라더니, 바늘구멍이었다. 국내파 – 그런 파에 속했다. 가입한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불렀다. 국내파는 아무래도……. 아무래도 밀렸다. 비정규교원, 그것마저 모교에서도 밀렸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저절로 선후배 차례로라는 관행은 20세기의 법이었다. 3년마다 경쟁 입찰로 바뀌었다. 멍때리고 있다가 한 차례 밀리고는 제자리다.
그때, 다음 채용 공고에 과목 자체가 없어지고 계약종료를 통보받은 다른 누구보다는 나은가? 당사자가 중노위에 구제신청을 냈다는 뉴스에 그는 덩달아 촉을 세웠다. 신청 자체가 기각되었다. 재임용 갱신기대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장기간 3년이 만료된 이후 근로계약이 갱신되리라는 신뢰관계가 형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 게다가 재임용 만료 강사들이 신규채용 절차에 지원하고도 불합격되기도 하는 그것이 강사법이라고. 다만 창피한 일이다.
더 창피한 일, 그 사이에도 과에 전임이 채용되었다. 충격이 그를 덮쳤다. 신임교수는 그가 강의를 시작했던 초창기, 그의 제자였었다. 그 아이도 이제 40, 물론 해외파다. 파가 다르면 사람도 다르다. 좌파 우파만 다른 것이 아니로구나! 다시 한 번 내외가 다름을 느낀다. 단어로 풀자면 그는 ‘내’를 좋아한다. 어쩔 수 없이 국내파다. 이런 말을 누구랑 나눌 수 있는가.
침묵이다. 선별적 함묵증이 강의의 질을 떨어뜨렸을까. 강의를 한 적이나 있었던가. 그때 내가 말을 했었나. 내 목소리는 어떤 음색이었을까. 우울한 바리톤?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강의실을 떠올린다.
강의실 – 어라, 강의를 하던 강의실 대신 강의를 듣던 강의실이 먼저 떠오른다. 최루탄을 던지며 난입하던 전경들, 깨어진 유리창, 많지 않은 여자애들이 쇳소리를 질러댔다. 층계에서 맞닥뜨린 처음 보는 교수가, 여자였다, 아무나 치약들을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은 치약을 팔자수염처럼 바르거나 광대뼈에도 발랐다. 선배들은 이건 약과라고 했다. 최루탄 하면 떠오르는 Y대학생 이야기였다. 나중에는 어느 대학병원 정형외과 수술실 근처에도 오발탄이 투척되어 수술이 중단됐었다고도 하니까. 오죽하면 영국의 유수 언론이 한국에는 최루탄 재벌과 치약 재벌이 등장했다고 모멸적인 보도를 했을까. 재벌설은 설이 아니었다. 최루탄을 독점 생산했던 S화학이 고액납세자 당당 1위를 차지했다는 국내 보도도 있었으니까. 삼성도 현대도 제치고!
다시 봄이다. 느닷없이 최루탄이란 단어가 떠도는 이 봄, 아카시아 향기 스멀거리던 5월은 아득하다. 어린 시절 망가져버린 봄의 기억이 칼끝 상처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동안, 천진했던 참외 서리며 그런 추억들일랑 저 멀리 가슴 구석에 짓눌려버렸다. 보리그을음, 잘 붙지 않는 불을 지피며 연기 그을음 마셔가면서 풋보리 알을 그을려 먹던 친구들은 꽁꽁 얼어붙어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가슴을 열자 해도 맞댈 가슴들이 없다. 오늘도 춥고, 그는 침묵 속에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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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 『여성문학』 창간호: 167~169쪽.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란츠 카프카 1904
*
말의 시작을 생각해 보았다. 기억할 수 없을 유년기 어느 날 ㅁ이라는 소리가 새어나오면서 시작되었을 말, 어머니를 향했을 그 말 그 언어가 한국어였다. 말을 애교 있게 재잘거리는 귀여운 아이는 아니었던 것이 말과 관련한 처음 기억이다. 첫 아이였으니 또래는 없었고, 온통 어른들로 둘러싼 환경에서 사실은 내 ㅁ자로 시작되었던 어머니 찾기도 쉽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다. 하긴 생명체라면 모두 적응을 통해서 살아남을 것이다. 세상은 경이 그 자체였고 아이에게 변별력은 최소 능력, 사물과 말의 연결은 엄청난 어려움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며 사물들을 어떤 소리로써 지칭할 수 있단 말인가. 어른들의 팔에 안겨 시장을 구경하면서 김이 모락모락 쪄서 팔고 있는 고구마를 어찌 고구마라 말하며, 뜬 눈알 때문에 무서워 보이는 생선들을 뭐라 칭할 것인가. 한번은 소금 가게 앞 ‘소금팝니다’라는 비뚠 글자를 읽고 와서는 소금을 보면 ‘소금팝니다’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겼더란다. 그렇게 그림책도 시원찮던 시절, 무언가를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이 우선이었다. 아무 말 않기 – 그것이 상책이었다. 말 수 적은 아이는 그다지 흠은 아니었다. 머피의 법칙은 존재한다. 애가 어른 말을 먹어버리네! 어른들은 말을 먹어버리는 것이 반항이 아니라 수줍음 때문인 것을 잘 몰랐다.
학교에 들어갔다. 글자로 말하기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글자를 익히자 글자로 말하기가 말로 말하기보다 나았다. 글자로 말하기는 순발력이 없어도 괜찮았고, 글자로 말하면 기특해 했다. 말을 먹어버리는 아이에서 글을 좋아하는 아이로 살짝 변신하면서 말에서 조금 해방된 느낌이었다. 글자는 질문 같은 요구사항도 없었다. 글자를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글자들의 집합, 책은 제법 편한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고립이 된다는 것 따위는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어른, 대학생 말이다.
독문과 대학생 – 왜 하필 독문과? 중고등학교 시절,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겠지만 운동장 활동을 면제 받았던 터라 도서실은 무궁무진 소설책들이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240명이 졸업한 지방도시 중고등학교의 작은 도서관이 더 이상 소설책들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칸트가 손에 잡혔다. 『순수이성비판』 - 한 줄도 읽어낼 수 없었을 때, 나의 기본 지식의 결함과 미진한 독해력 탓을 하지 않고 번역문 탓을 했다니. 무지가 용맹이었다. 독문과로 진학해서 기필코 이 글을 원전으로 읽으리라. 고백하건대, 독문과 시절 내내, 대학원 시절에도 그 뒤로도 칸트의 원전을 통째로 펼쳐보지 않았다. 근시안인 내게 독일어는 눈앞의 숙제였고, 독일어로 쓰인 소설들에 푹 빠져버렸다.
소설들은 경이였다.
인생의 동반자, 반세기를 함께 한 동반자가 곁에 있지만, 나의 뇌 속에는 소설들이 녹아 살고 있다. 어려서 만났던 글자들은 뇌의 딱딱한 표피를 뚫고 증발해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하기, 철학이 녹아있는 독일 소설들은 소설 이상이었다. 칸트 철학은 2천년 본질주의적 존재론에서의 대전환이었고, 비로소 개별자가 된 인간들이 진리와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 인간들이 소설 속에 살아있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혁명적 사고는 2차 대전 직후 빈곤한 독일 정신세계에 폭발적으로 수용되었다. 실존에 대한 탐구는 무궁무진한 보고인 것 같았다. 아니, 주체로서가 아닌 구조로서의 인간! 욕망 또한 타자의 욕망! 현대독일소설은 작은 뇌세포 하나하나를 풍선처럼 부풀게 하는 작용으로 들끓었고, 다른 어떤 것, 현실 속 인간에게 필요한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관심을 꺼버린 아이러니로 작용했다. 겉으로는 숨길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내면은 불균형의 존재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소설이자 문학이자 예술의 세계는 언어종속적인 무엇이라는 진리가 뇌를 때렸다. 카프카가 말한 의미에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말이었다. 외국말로 된 외국 소설들을 파먹으며 살아가던 나는 스멀스멀 꼬리가 돋아나는 느낌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다른 누군가가 사냥해 놓은 시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 말로 내 글을 쓰고 있었다. 소설이라는 이름의 무엇을 쓰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시작의 무서움을 모르는가. 누군가가 읽을 수도 있는 글자들을 어쩌라고 내놓는가! 내가 나이고 싶어서 나의 말로 나의 글을 썼노라는 변명은 서툴고 못나기 그지없었다. 한국문학의 대양에 수영의 초보 지식도 없이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뛰어든 이방인이었다. 잘해야 의붓자식이었다.
겁이 났다. 가장 무서운 것은 독자라는 존재다. 미지의 누군가가 글을 읽는다는 상상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아니, 누군가 읽기나 할까, 그것도 무서웠다. 글을 쓰는 작가들 중에도 더러 지인이 생겨났고, 누군가는 스스럼없이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솔직히 독자로서 정말 재미는 없더군요! 긴박한 갈등이 있어야……. 엄청 고마운 일이었다. 읽었으니까.
그렇게 소위 문우들을 만났다. 내가 공부했던 존경하는 소설가 하인리히 뵐이 서독과 세계 PEN International 에서 활동했다는 기억으로 PEN을 기웃거린 늦깎이는 이화동창문인회라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고, 서울 그리고 고향에서도 더러 동지들을 만났다. 누구나 문학소녀였다는 그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의 선후배들과도 의미 있는 공간을 나누게 되었다. 의미는 늘 무의미를 동반하지만, 어찌되었건 큰 범주로 문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외국문학 연구보다는, 취업 효율성 떨어지는 강의보다는 소박한 소설가로의 변신이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그러나 피는 피다. 정신의 묽은 피는 몸속의 빈혈과 마찬가지로 현기증과 무기력으로 이어진다. 전혀 괜찮지가 않다. 짝사랑 출판사는 무심하고, 자존심과 품위를 무기로 활동을 하는 위상 드높은 작가를 만나기라도 하면 무참히 상처를 받기도 한다. 나이하고도 키하고도 비례할 리 없는 낮은 함량의 속아지 때문에 앓는다. 그러니까 문제는 나다. 덜 떨어진 나다.
우물 안 개구리, 개구리도 되지 못한 우물 안 올챙이 – ‘우올’로 생긴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하늘과 해를 달을 별을 볼 수는 있겠지. 늘 평강을 빈다! 스스로 안부를 한다. 그런데도 편치는 않다. 외부의 어떤 무엇보다 빈약한 글 때문에 앓고 있다. 글과의 만남은 진정 숨쉬기의 단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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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 『아름다운 만남』, 이화동창문인회, 317~3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