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3. 6. 16. 08:04

포이동 266번지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포이동 226번지 - 이 지번은 픽션이어야 한다. 포이동 226번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거기 사람들의 허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달을 허비한 것이 잘 한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를 그리로 데려간 것은 아직 이른 나이에 요양병원에 들어있는 당숙모다. 아버지의 사촌동생, 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당숙의 부인, 그 당숙모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챙기신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 둘째 큰아버지는 벌써 옛날 결혼 전에 미국에 가서 안착하셨으니까 - 아버지가 집안의 연결고리가 되신 것 같았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 뒤에서 늘 분주하시다.

 

 

요양병원 로비는 정작 환자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화려한 셈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간단한 음식을 챙겨 오셨다.

(누구?)

나 금실엄마.

(금실엄마 누구?)

여기 우리 금실이. 나 금실엄마. 우린 동갑내기 한실이들!

한실이란 말이 당숙모를 움찔하게 한다.

한종남 씨 아내!

어머니가 길게 부르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머니는 아차 하는 작은 소리를 내시더니만 그냥 가져온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여기, 아지매 좋아하는 파전 있어요. 동래파전! 아이쿠 다 식어버렸네, 꼭꼭 싸 왔는데.

눈동자가 음식 쪽으로 옮겨가지를 않는다.

어머나,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올 걸 그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엄마, 정구지 지짐이라뇨?

아, 부추전을 거기선 그렇게 부르나봐. 하긴 네 숙모 말 듣다보면 웃겼다. 할머니는 얇은 솔전을, 외할머니는 두툼한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주더란 말이지.

잘 드시는 것도 있군요.

응, 조금. 네 고모는 수완이 좋으시잖냐. 헌데 지금은 무릎 땜에 많이 못 다니시더라, 칠순 때까진 펄펄 날더니. 해서 네 당숙모를 이쪽 병원으로 옮긴 것 아니냐. 고모한테 대면 내가 한참 젊지 뭐.

엄마가 뭘 젊다고 그러세요. 엄마도 좀 쉬엄쉬엄 하실 나이신데.

며느리도 없는 사람이 무슨 쉴 복? 하긴 요샌 며느린 소용없다더라. 난 딸이 셋이나 되니 좀 쉬엄쉬엄 살아 볼거나. 아차, 이를 어쩌나. 아지매! 이간호사님! 이선생!

어떻게 불러도 당숙모는 영 모른 체 하시고 만다.

음식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도와주니 조금 받아든다. 규칙적으로 벌리는 입이 아기 같다. 요양병원 생활에도 이력이 붙나 보다.

보세요,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먹이면 곧잘 드세요.

어떻게 요령이 좋으시네요, 다행스레.

안 먹으면 혼내준다고 그러시나요?

내가 엉뚱하게 끼어들었다.

예, 정말 그래요. 이걸 안 먹으면 뭘 안주겠다. 뭐 좋아하는 간식 같은 것. 그렇게 어르기도 하고. 차라리 아기 같은 분들이 우린 쉬워요. 말은 안 해도 크게 고집을 부리시지는 않으니까.

그럼 왕고집부리는 환자들도 있어요?

그럼요, 폭력도 있어요. 사정없이 손을 휘저어버리죠. 무작정이니까 얻어맞기도 해요. 지난달엔 신출내기 요양보호사가 울고 그만 두기도 했는걸요.

울어요?

꼭 아파서라기보다. 여기 일 작정하고 나서기 쉬운 건 아녀요. 여기가 처음인데 크게 충격이었나 봐요. 다음 직장에선 잘 하게 될 거예요. 누구나 첨엔 견디기 어려워요.

자, 어르신, 이묘순할머니, 이묘순아줌마, 한번만 더!

몇 입 먹이다가 지친 요양보호사는 소용없다 싶으니 입이 귀에 걸리는 미소를 순간 해보이고는 자리를 뜬다. 당숙모는 멍하니 멈추어 있다. 주섬주섬 그릇을 챙긴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 숙모 몸은 멀쩡해 보이지 않더냐?

저를 잘 모르시던걸요. 실어증뿐 아니라 아무래도 눈도 좀. 아니 기억 자체가.

그럴 것이다. 어떻게 정신을 붙들어 매고 살아갈 것이냐, 식구 모두를 다 잃고. 그런데 어찌어찌 버티다가 하필 포이동에서 장롱에 목매단 사건 이후로 더 저리 되었다고,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 설레야.

장롱이라뇨?

신문도 안보고 사냐.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모르는 것 없이 다 뒤져 본다던데.

재작년엔가 포이동 화재사건이야 알죠, 그 다음 더욱 처량해진 사람들. 하긴 당숙모가 저리 되신 건 한참 전이죠? 포이동이면 당숙모 사시는 데도 아니잖아요.

그게 가까운 거리지. 걸어서 15분, 20분도 안 되는 거리야. 네 숙모 사는 데가 물론 포이동 재건마을하고야 같겠냐. 개포 시영은 재건축 기대로 한 때 잘 나갔었다더라. 그럼 또 뭐하겠어, 당사자가 저리 되었는데. 또 성한들 24평 그런 걸 받으려면 들어갈 돈이 얼마고……. 모르겠다. 아무렴 네 숙모 정신이 돌아오려나.

그런데 장롱 사건은 뭔데요?

그게 화재사건 한참 전 일이지, 저 사람 저리 멍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어디서부터 하랴? 아서라. 말죽거리 네 고모가 저 사람들 서울로 불러들일 때만해도 희망은 있었지. 아니, 우리가 볼 때는 어처구니 없더라만.

어머니는 섣불리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러다 결국 털어놓으신 것은 고모를 통해서 알게 된 당숙모의 얄궂은 포이동 가슴앓이였다.

1979년 마산의 작은 병원의 간호원 이묘순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늦깎이 대학생 한종남과 미래를 설계하는 사이였다. 종남을 처음 만난 것은 전방으로 오빠 면회를 갔을 때, 간호고등을 졸업하고 간호원이 되어있을 때였다. 시를 좋아했지만 언감생심 대학은 꿈도 안 꾸었던 그가 제대 후에 대학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묘순 때문이었다.

한종남은 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지만, 아직 꼬마였던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함흥에서 1.4후퇴를 피해 흥남부두를 떠나온 어머니가 거제도 피난민촌에 도착한 다음날 철 이르게 세상에 나왔다. 북에 남은 아버지 - 우리 아버지의 막내삼촌 - 생사를 모른 채 흥남이라 불리며 부산에서 자라고 있었다. 입학할 때가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정문리 본가로 모자가 찾아온 뒤로 항렬자를 따라 종남이 되었지만 부산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는 많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부마사태의 와중에서 체포되었는데, 며칠 뒤 대통령 사망뉴스가 나갈 즈음 구토를 하며 의식을 잃다시피 병원으로 실려 갔다. 뇌와 관련하여 응급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불행했다. 그렇게 그의 생은 졸업은커녕 그 상태에서 정지해버렸다. 중환자실로 달려온 여자 친구는 - 그이가 당숙모다 - 놀랍게도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고, 그 길로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해서 4인 가족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한 두 해를 버티다가 치료에 대한 희망으로 서울로 왔다. 아빠는 아기가 재롱을 부리면 함께 친구하며 웃었다. 아기는 겨우 아장거리다가 넘어지다가 점점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아빠는 점점 움직이는 일을 못하게 되었다.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흔한 감기에도 입원을 반복했다. 생활은 기울고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다시 직장을 구했다. 간호원 자리는 점점 대졸로 채워졌고 지방의 간호고등 출신으로는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야간 담당만을 자원하면서 준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아기는 저녁마다 자장가를 불러주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랐다. 어머니도 아내도 온갖 힘을 쏟았지만 종남삼촌은 감기에서 폐렴으로, 폐렴에서 패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시장엘 갔으려니 했다. 그날따라 아일 데리고 어른걸음으로도 10분도 넘는 양재천엘 왜 갔을까. 징검다리 부근에서 빠졌을 리는 없다. 거긴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깊이이니까. 혹시 모른다, 먼저 아기를 놓치고 구하려다가……. 멀리서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아기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했다. 할머니는 잠깐 아기를 잃었다가 뭔가를 소리치며 물속으로 정신없이 뛰어든 것 같았다고. 그렇게 할머니와 아기가 갔다. 혼자 남은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병원에도 다시 나갔다. 낮이면 양재천엘 자주 나갔다.

당숙모가 포이동 266번지와 연을 맺은 것은 일단 양재천변 코앞의 동네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심코 천변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곤 하다가 이상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두 세 시쯤이면 폐지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이 박혀버린 때문이었다. 누굴까. 당숙모는 할아버지들의 얼굴과는 친숙치 않았다. 친가 외가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조차 일찍이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란 어떤 얼굴인가를 몰랐다. 그런데 등 위쪽이 마르고 아기처럼 수줍은 얼굴의 할아버지란 당숙모에겐 상상이 안가는 어떤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 할아버지는 꿈에선가 어디에선가 분명 만났던 사람이었다. 누굴까. 몇 번을 그렇게 스치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곳이 포이동 266번지였다. 개포 시영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그곳에, 사람살이인가 싶게 살아가는 동네. 아니 동네 느낌이 아니라 쓰레기하치장 같은 곳. 거기가 그 아기 같은 할아버지가 몸을 누이고 사는 데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도통 말이 없었다. 처음 쭈뼛거리는 인사에도 알아듣는 듯 마는 듯. 귀가 안 들릴까. 그렇게 기웃거리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뉘시우? 그 양반 무신 말 잘 안허걸랑.

아유, 죄송해요. 제가 아는 분인가 싶어서 따라왔는데, 언젠가 헤어진 누군가 싶기도 하고.

에고, 잘 되었우, 행여 아는 사람이믄. 이 양반 평생가야 사고무친에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걸랑.

아니, 어떻게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게, 우리 아저씨가 하꼬방 살 때부텀 만난 사람인데 말이우.

하꼬방이요?

아, 그 청계천서 폐지 하다가 이리로들 왔다는 것 아니우. 난 여기 온 뒤로 만났다우.

그럼 아저씨께선 잘 아시겠네요?

알다마다요, 그 사람을 살렸다는데. 뭔 인연인지 여기꺼정 함께 왔으니.

아저씨는 해가 넘어가서야 판자촌으로 들고, 당숙모는 밤 근무를 해야 해서 주말에야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설명도 아리송하기만 했다.

한참 군사정권 때 일인데, 어느 새벽 청계천변 하꼬방 판자문 앞에 모로 누워서 새우잠을 자다가 발견된 사람이란다. 첨엔 자는 줄로 알았는데, 정신을 잘 못 차려서 일단 끄집다시피 하꼬방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자기 이름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말을 시켜도 못하고 알아듣는지 마는지 그런 사람이었다. 하꼬방에서 한데 살던 둘 중에서 나이든 사람이 삼십 중반의 김 씨였다. 이 노인네를 어쩌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렇게 며칠, 가만 앉은자리에서 폐지를 혼자 정리하고 그러더니 고물 책 하나를 보고 눈이 뒤집히더란다. 그걸 품고 자는 것이 신기해서 구경거리가 났나 싶었단다. 다음날엔 두 사람이 각각 일을 나서는데 엉거주춤 따라나서더란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성 싶었는데도. 결국 첨엔 뒷짐을 지고 따라다니더니 오후엔 뭔가 글자가 있는 것이면 슬며시 집어 올리더니, 그제서는 버린 책이며 휴지를 집어오는 일을 곧잘 하더란다. 어수룩한 사람 버리기도 뭣하고. 그러다 하꼬방 사람들이 한꺼번에 재건마을로 쫓겨 올 때 묻어왔는데, 이름이 난감했다. 순간 김 씨가 얼른 생각을 해낸 것이 이 노인이 처음 집어든 책에 적힌 이름이었다. 그것을 비슷하게 따서 김수용이라고 둘러댔다. 일가 아저씨인데 말을 잘 못한다고 하고. 나이도 대충 적어 넣었으니까 실제 나이는 모른다. 일단 서류들을 만들어 재건대원등록증을 나누어 받았으니까 유령에서 사람이 된 것. 어쩜 다행인 것이 호적 없는 사람들도 그땐 주민등록 취득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포이동 200-1번지. 정말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서인가는 이 동넬 완전히 유령 취급을 해서 아예 주민등록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 뭐 그런 정보였다.

김수용이래요, 유령이었다가 사람이 되었다네요. 참 그런 일들도. 그래도 유령처럼 되기 이전엔 분명 사람이었을 거 아녜요? 어디서 뭘 하다가 청계천 하꼬방 문간에 나타났을까요? 그 얼굴이 뭔가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설까, 알 수가 없어 고민 중이예요.

걸 뭘 고민하고말고. 거야 병원에서 그 많은 환자들 보며 살아온 세월 때문이겠지. 자네 살기도 힘 드는데…….

양재동 고모가 그렇게 말하면, 글쎄요, 난 포이동 거길 꼭 들여다봐야 숨이 쉬어지는 걸 어쩌죠, 하면서 웃곤 했단다. 이후로 고모가 당숙모의 입에서 듣는 말은 모두 그 재건마을 이야기뿐이었다.

포이동 266번지 - 장화 없인 살 수 없는 진흙탕 속. 어쨌거나 땅을 개간하고 얼기설기 판잣집을 지어 만든 마을이래요.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꼬, 했어요. 망태할아버지들 말고도 일가친척이 없는 고아 출신도 느닷없이 이리로 팽개쳐졌다고도 해요. 어쨌거나 양재천 저쪽 사람들은 여길 양아치 소굴이라 한다네요. 무슨 특별단속기간 같은 때는 난데없이 절도범이라고 잡혀가는 사람도 있고. 그게 실적을 세우려는 형사들이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도 하고. 죄 있고 없고를 누가 그리 훤히 안대요? 그래도 이렇게 여자들도 들어왔고 아이들도 생겨난 것이 사람 사는 동네죠.

포이동아재 - 숙모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언제 다리를 다쳤을까요? 보아하니 상이군인은 아닌 것 같고, 뭐 총상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요.

포이동아젠 가족이 없었을까요? 도통 가족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질 않으니. 김 씨 아저씨네가 옆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집 꼬마 애를 보면서 눈가가 축축해지는 걸 난 봤어요.

포이동아젠 나이도 알 수 없으니. 누런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는 걸 보면 환갑이나 되었을까? 책은 고물에서 골라낸 것들. 신문도 날짜 관계없이 샅샅이 보는 것이 뭘 찾는 사람인지…….

아, 포이동아재가 처음에 꼭 껴안다시피 내놓지 않고 읽었다는 책이 뭔 줄 아셔요? 눈 큰 김수영의 시집이에요, 아마 첫 시집이죠. 『달나라의 장난』. 작은 나무상자 위에 그 책이 있더라고요. 1950년대에 나온 데다 버려진 것이니 너덜너덜했지요. 원래 주황이었을 바닥 몇 센티미터 위로 펜 하나로 그린 고층과 저층의 상징적인 집들, 그 위로 한 가운데 둥글게 뜬 달. 글자들이 종이 속으로 녹아들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보다 온전했어요. 그보다 기가 막힐 일은요, 집엔 애 아빠가, 종남 씨가 남긴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가 있거든요. 함께 샀어요, 900원 주고. 양장본인데 표지 색깔이 독특해요. 처음 그걸 샀을 때 난 무심코 바다색이라고 했더니, 제목의 달을 보고서도 우주보다 바다가 먼저 생각나느냐고 나를 놀렸던 얼굴이 떠올랐어요. 우린 「복중」에 애를 배서 조용해진 계수 이야기에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나도 그럴까? 너무 조용한 것도 병이다, 너무 생각하는 것도 병이다…… 그런 구절들을 외었지요. 그 얼굴이 갑자기 포이동아재 얼굴에 겹쳐지는 거예요. 아이 같던 그 표정에 주름이 깊어지더니……. 아, 세상에 어떻게 똑같이 김수영의 시집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달 어쩌고. 세상엔 닮은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어떻게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같은 취향을 나누죠? 형님도 그 아재 한번 보면 안 될까요? 얼굴만 좀…….

물론 고모가 포이동까지 가서 그 노인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사람이 우연도 있는 것이지 뭘 그러나. 봉산가 뭔가 이젠 좀 그만 하지, 자네도 요새 보면 얼굴이 부숭부숭하고 그러는걸.

고모가 그렇게 말리면 당숙모는 이젠 포이동 들르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거기 종남 씨 얼굴이 겹쳤던 주름진 얼굴을 보러 가야만 한다고. 언제 어느 순간 옛날 생각이 나거나 입이 열리거나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게 실어증이라기보다는 함구증일지…….

그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때서. 병원에서 보는 환자들로 모자라는가. 이젠 자네도 뭔가 앞날 생각을…….

고모는 실어증인지 함구증인지 말을 거의 못하는 답답한 노인을 찾아다니는 당숙모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거긴 여름에도 방역 한번 안 나와요. 사람 사는 동네에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마을 생긴 것이 언젠데 아직 수돗물도 없어요. 어떻게 여기 한 동네만 빼놓고 공사를 해요? 사람들은 땅에 구멍을 파놓고 지하수를 길러다 먹죠. 물을 떠다 붓고 한나절이면 물이 퍼렇게 변해요. 숯을 놓거나 짚 같은 거나 베 쪼가리를 깔고 걸러보기도 하고.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사는 포이동아재한텐 물이 젤 문젠거라요. 밭은기침도 가끔 하는데. 참 형님, 구룡사 물이 아주 좋다지요? 불공드리러 가서 안 드셔봤어요?

당숙모는 불심과는 상관없이 고모를 따라 약수라고 소문난 구룡토수를 길러 다녔다.

아, 그런데 재활근로대가 해산되었다는 것이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포이동아젠 요즈음엔 마을 출입이 통째로 통제되니까 좀 쉬겠지요?

그건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이 동네 밖으로 출입이 통제될 때 한 말이라 했다. 실제로 나라 안팎이 88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들뜬 때였다. 서럽게도 이들 빈민들의 꼬락서니가 국가의 수치라며 마을 밖 출입을 통제했단다. 고모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당숙모는 더 자주 그를 찾을 밖에.

포이동아젠 큰일 났어라. 포이동 266번지가 개포4동으로 번지수가 바뀌면서 주민등록을 안 해준다는군요. 더 큰일 났어요. 자활근로대 해산이란 게 심상치 않은 거라네요. 원래는 우선으로, 그러니까 재건마을 사람들을 먼저 선착순으로 땅을 불하해준다는 조건이었는데. 그게 글쎄, 이미 살고 있는 땅을 새삼스레 돈을 주고 사가라는 것인데. 아무튼 법이 바뀌어서 266번지 사람들이 불법점유자가 되었다네요. 첨엔 하천 가에다 잡아넣다시피 억지로 데려다 놓고서 조용히 살면 땅을 준다고 했었다는데. 고달픈 삶에서 제 각각 나름대로 꿈같은 것을 품고 왔었을 것 아뇨. 고물상 김 씨 아저씨도 청계천 사과상자보단 나은 집을 가질 줄 알았다네요. 그러다 십년 살고 나니까 불법점유라고.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만, 그게 원래 서울시 도서관 부지였다는 것이 말이나 된가요. 십년만 더 살면 일 없을 텐데, 아니, 그리 될까봐 미리 수 쓰는 거래요. 나라가 국민한테 수를 쓰다니. 고르고 골라서 제일 비참한 국민한테.

진짜 큰일 났어요. 한번 불법점유자라 딱지를 붙이니깐 이젠 무단 점유 변상금을 내라고 세금이 날아들었대요. 각 집에 30만원도 넘는데 그게…….

당숙모의 근심은 해가 갈수록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이어졌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못 해내라. 옆집은 둘이 벌어도 다 못 한대요. 김 씨네 아줌만 청소일 다녀요, 벌써 언제부터. 근데 이자가 20퍼센트나 된다는데 그게 자꾸 불어나면 어쩌냐고요.

포이동아젠 분명 병이 있어라. 몸 움직이는 것이 더 근들근들한데 병원엘 가지 않으니 알 수 없지요. 내가 간호사라고 해도 들은 신청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 알아들었다는 말인지, 내버려 두란 말인지. 오늘은 피붙이는 없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퀭한 눈을 한번 크게 뜨더니 눈을 딱 감아버리더라고요. 말은 안 해도 분명 알아는 듣는 거예요. 무안해서 혼났는데, 얼결에 잘 계시라는 소리도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맘 아픈 걸 물어요…….

당숙모의 근심걱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포이동아재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진즉에 그를 등졌으므로, 그는 쉽게도 떠났다. 옆집 김 씨 아저씨가 한 이틀 꼴을 보지 못해서 들여다보았다는데 숨소리 없이 천장을 보고 누어있더란다. 그제는 놀라서 뛰어 들어가니 오른 손 검지로 나무상자 하나를 가리키더니만 눈을 스르르 감았다고 한다. 몸을 일으키려하니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계속 상자를 가리키고. 해서 상자를 열었더니 거기 몇 소장품이라는 것 중에 처음 발견해서 가슴에 품고 읽었다는 시집과 낡은 회중시계가 하나 있었고.

장례랄 것도 없이 김 씨 아저씨하고 동네 몇 사람이 구룡산 언덕에 뿌려주면서 승천하라고 빌었다. 아홉 형제들 함께 승천을 못하고 남은 막내 용이 승천을 기다린다는 구룡산, 여기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살아서 못 오른 하늘에 죽어서는 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고도 바로 흩어져버리지 못하고 포이동아재의 빈 단칸방에 돌아와 앉은 몇몇 사람들. 임자 없는 세간들, 그것이라도 대충 필요한 사람이 써보자고 챙기는 실팍한 사람들. 실팍하지 않고서야 곤곤한 삶을 어찌 살아남겠는가. 작고 낡은 나무상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상자를 고이 가져갈 사람은 우리 간호사 선생 밖에 누가 또 있겠냐고, 딸도 아니면서 그만큼 극진히 위했으면 당연히 뭐라도 간직하라고. 또 우리들 중 누가 책 같은 걸 보겠냐고 했다. 그렇게 동네 이웃도 아닌 당숙모에게 상자가 돌아왔단다. 『달나라의 장난』과 낡아서 서버린 회중시계가 들어있는.

이게 무슨 조화예요. 이 시집이 나한테 오다니. 또 이 회중시계는 뭘까요. 쇼와 18년 HDK - 이게 이름이면 김 씨는 맞나? 고 씨, 구 씨도 있지만 김 씨일 확률이 높고. 얼결에 붙인 이름이 성이라도 얼추 맞았네요. 참, 쇼와 18년이면 해방 전이잖아요, 사십 몇 년? 이게 포이동아재 것은 아니겠죠, 설마? 그때 벌써 이런 시계를 가진 사람이 누구였을까? 포이동아재 아버지였을까요? 젊어선 부잣집 도련님이었을까요? 아참, 성을 앞에다 썼으면 한 씨? 안 돼. 잠깐, 설마 종남 씨 아버님 항렬은 뭐죠? 규자 맞지요. 하긴 진자 규자라셨으니 그것도 아니고.

고모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다시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이북에 있을, 살았건 죽었건 북에 남았다는 진자 규자 삼촌을 떠올리다니. 아닌 건 확실하겠지만, 너무 그럴싸한 예감에. 하지만 어떻게든 가운데 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으셨단다.

세월은 또 흘렀다. 뭔가 들뜨게 하는 새천년이 되어도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더욱 풀이 죽었다. 당숙모의 말로는 원래대로라면 이제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가질 때가 되었는데 현실은 무단점유자로서 빚 방석에 주저 앉아버렸으니 말이다. 1998년에야 서초구와 강남구가 서로 밀던 수도공사가 완성되어 사람들이 순간 환성을 질렀다. 그 기쁨도 잠시, 이것이 내 집 수도가 아니라는 박탈감은 차라리 수도 없는 내 집을 원하게 했다. 마을은 여전히 결함투성이였다.

그 사이 김 씨도 젊지 않은 나이가 되고, 간호사인 당숙모의 지식으로서도 다 알 수 없는 병을 주저리주저리 달고 살았다. 심부전 등 치료가 불가능한 건 아니나 산소공급이 문제라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한 번에 몇 십만 원씩 하는 치료비 감당을 해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그가 덜컥 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의료보험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무슨 일일까. 그들은 국민건강보험도 기초생활수급자 지정도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냐고! 난 그런 걸 정말 모르고 있었다. 재작년 초여름 심각한 화재사건 보도를 보면서도 몰랐다. 어떻게 초등학교 아이의 불장난이…… 라고 애석해 하면서도 재건마을이 뭔지 몰랐다. 아버지가 70년대 80년대를 가족을 돌보면서 묵묵히 맡은 일만 하시면서 살아온 것을 후회스럽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보다도 더 많은 공부를 하고서도 이렇게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불발인 내 처지만 통곡하면서.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 인권이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구나. 그걸 까맣게 몰랐다. 자유와 평등과 박해의 상징인 파리 복판에 가서 박사학위를 했으면 뭣 하는가.

포이동 이야기는 장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청소일로 병마 속 남편을 돌보던 김 씨의 아내가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되어 따라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가 말이다. 장롱에 목을 맨 참극은 로맨틱 러브스토리로 먼저 간 짝을 따라 죽는 환상이 아니다. 2,3십 년 전 아웅산테러사건 뒤에 극도의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고관의 아내와도 전혀 다른 결정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렇게 끼적거린 메모를 남겨 놓고 죽어버린 참담함. 의식주 - 문자 그대로 의식주 해결을 못해서 죽어야 했던 삶. 하필 그들의 아들은 명예와 충성심과 용기로 무장하고 무엇보다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군복무 중이었다니.

이 아들은 실제로 군대에 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는 어머니가 직장이 있다는 이유로, 겨우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다고 한다. 막상 어머니마저 죽었을 때에는 이제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역시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고. 병마와 가난 속의 부모를 지킬 수 없는 젊은이들이 필승의 신념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이 군인에게는 15년째 밀린 토지 변상금 4,5천에 자동차세 천여만 원 등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굴러왔다.

뭐 자동차세라고? 그럼 그 동네에도 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네.

그렇지만 차가 다 차인가. 고물 일을 하느라 고물 차 하나를 얻었는데, 명의를 이전하자마자 압류를 당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법을 모르는 그들. 설상가상. 명의만 있지 압류당해서 탈 수도 고물을 실어 나를 수도 없는 차는 그들의 저승사자였다.

하필 장롱에서, 키가 작다고 어떻게 장롱에서.

그 아줌마,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아주머니가 발견된 다음날 당숙모는 혼 빠진 사람 같았다고 한다. 사실 포이동 백 가구 가까운 사람들은 끈끈한 정이 양재천 북쪽 강남과는 사뭇 다르다 했다. 둘, 셋 모이면 비교요 갈등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워낙 가난의 평준화 속에 가라앉으면 키 재기할 기운이 나지 않는 법인지. 설마 싶으면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회고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안다.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그것이 숙모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더란다. 그리고는 말을 접었다. 어떻게 실어증이 걸리는가. 가족의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너덜너덜한, 눈 큰 시인의 닮은 꼴 시집 두 권을 가슴에 품고, 호주머니에 쇼와 18년의 회중시계를 감추고 방안에 들어 앉아버린 여자를.

얼음장 같은 냉기에 놀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족보를 뒤져본다. 우리할아버지 상자 규자, 그 아래 덕자 규자, 진자 규자 할아버지들. DK라면 덕자 규자의 이니셜일 순 있지만 그 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학도병에 끌려가셨다 했다. 또 확실히 돌아가셨다, 해방에서 동란 사이에. 아니다, 혹여 일본 유학생 인텔리 작은할아버지의 시계를 막내할아버지가 지니고 있었을 확률은? 해방과 동란 사이 두 할아버지들은 뜻이 맞아 늘 함께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니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 아들을 한 번도 못 만난 채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생면부지의 며느리를 마주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숙모의 혼돈은 분명 포이동 266번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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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30. 단편 「포이동 266번지」,『광주문학』 2013 봄호(통권 66호), 197-21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7:59

초혼장

 

겨울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

강의보다 몇 배 어렵고 성가신 성적처리가 끝나자 슬그머니 집이 그리웠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그리웠다. 서둘러 기차를 탔다.

엄마, 어머니이!

그래, 다 저녁에 오는구나, 날이 춥구나!

어머니는 이번에도 부엌에서 나오셨다.

뭐 하세요, 또 부엌이세요?

아, 너도 오고.

얼굴에 웃음이 핀다.

뭐 좋은 일 많으세요?

좋은 일은. 하긴 좋은 일이지. 김실이가 숨 줌 돌렸지 않냐. 김 서방이 제 자릴 찾아가는 중이니까. 지금 다시 출근한지 며칠 안 되었다.

엄마, 이제 좀 김실이라 그만 하세요. 외가에서나 엄마한테 한실이 그러지, 누가 요즈음 그렇게 불러요? 엄마니까 은실이라 이름 부르든지 애 따라 승연엄마 하든지. 김실이 때문에 금실, 한금실, 내 이름이 사라지잖아요.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시잖냐. 괜스레 이름 가지고.

그런데 아버진 안 계세요? 또 정문리에 가셨어요?

아니, 이 추운데. 방에 계시는데 너 오는 것도 모르시네, 어째.

아버지는 살짝 잠이 드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내가 방문을 열자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으신다.

한박사, 왔구나아. 방이 따뜻해지면서 졸음이 왔나 보다.

말씀마다 또 그 한박사다.

아버지 저 왔어요, 금실이. 더 주무실 걸 그랬네요. 요새 어디 편찮으세요? 엄마 말씀은…….

아니다, 내가 궁리가 많아서 요새 잠을 좀 설쳤드니라.

그러게, 느 아부지가 요샌 개포동 종수씨 땜에 저러신다. 그 집 일이라면 지난 윤삼월에 끝났나 했었지만 여태도…….

소생이 없질 않소. 그러니.

그렇다고 꼭 그렇게 당신이, 당신 혼자서.

아무도 없질 않소.

지난 윤삼월에도…….

그건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소. 그것이 선친의 뜻이라고 헤아리자고…….

알았어요. 하지만 또 종수씨 일이 마냥.

그게 난들……. 애한테 무슨. 거 너무 긴 긴 이야기가 되놓으니 여기서 그만 둡시다.

평상시와 다르게 불평조의 말을 털어내던 어머니는 거기서 멈추셨다.

곧 있어 이모, 이모~ 하면서 승연이 승주가 들어왔다. 은실도 함께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종이연필 한 자루 씩에 입이 귀에 걸린다.

이모, 이모~, 이게 종이라고요, 엉?

그래, 나무가 아니고 폐휴지를 재생 한 것이지.

신기하다, 승주야, 그치?

누나, 이게 안 부러질까?

야, 조심 해야지. 걱정되면 나 줘! 난 이 초록이 너무 예쁘다.

아이들 수다로 떠들썩해지자 대번에 집안에 온기가 퍼졌다. 아이들이 온기다. 엄마가 된 은실의 공이다. 둘러앉아서 먹는 저녁밥은 밥맛도 사는 맛도 넘쳐나게 한다.

아직 차가운 방바닥에 요를 펴놓고 책상에 앉아본다. 내가 썼던 이 방은 지금은 누구나의 공부방처럼 쓰인다. 아직 한 쪽으로는 내 책들이 남아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아버지가 건너오셨다.

예, 아버지. 어머닌 일찍 주무시나요?

그래 요사인 좀 일찍 주무신다. 해서 내가 보통…….

아, 책 보시다 주무시고 그러시는군요.

아니 뭐, 오늘은 너라도 알아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뭐를요?

아, 네 어머니가 좀 성가시게 여기는 그 일 말이다.

아, 정문리…….

그러게. 그게 묘를 썼다고 끝나는 건 아니지 않냐.

묘를 쓰셨다고요? 누구를?

그게…….

아버진 말을 꺼내시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고 계셨다. 그러면 나는 늘 저런 이야기는 아들이 있어 나누고 싶으셨을 종류라는 인상을 받는다. 관습적으로 부자 사이에나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잘 모른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냥 계셨다. 그러다 결국 작정하고 입을 떼셨다.

윤삼월에 새로 묘를 쓴 분은 내 막내삼촌이셨다. 내가 새삼스레 이야기를 해두려는 것은 언제라도 한번은 너도 정문리엔 가 볼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언제라도 한번은.

아차. 정문리 이야기라면 두말없이 청주 한 씨 우리 집 내력이다. 우리 아버지는 장손의 막내시다. 1910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가 장손이셨고, 그 아래로 작은할아버지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삼촌들이다. 진사를 한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일찍 가장이 되시자 동생들에게 신학문의 길을 적극 열어주셨단다. 그런 동생들이 블랙홀로 빨려들듯이 가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여기까지는 몇 번이고 들어서 알고 있는 내력이다. 어느 집안인들 일제와 동란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만은.

쇼와 18년, 오늘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알아듣기 어려운 시절로.

그러니까 1943년 본격적으로 징병이 난무할 때 나는 아직 잉태도 되지 않았지. 선친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동생 하나를 징병으로 보내야했다더구나. 학도병으로 끌려간 삼촌 이야기는 처음부터 너무도 슬펐단다. 그렇게나 가슴 아픈 것은 하필이면 당신 딸이 당신 동생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부분이야. 일제가 고향 경찰서에서 ‘아버님 위독’이라는 전보를 도쿄 등지로 보내서 유학생을 귀국을 하게 해놓고서는 부산에서 배에 내리자마자 온갖 회유와 강요로 지원서에 도장을 찍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흰 설마 하겠지. 그뿐이냐. 순진한 소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일본 유학 중에 고향으로 숨어든 대학생들을 색출했단다. 아홉 살 난 여자애가 스무 두 살 제 삼촌을 일러바치는 일은 누어서 식은 죽 먹기였겠지.

내겐 누이가 둘 있었는데, 큰 누이가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그런 초여름 날, 학교에서 예쁜 일본 선생님이 최면을 걸었더란다.

일본에 유학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형이나 오빠가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 보세요!

누이는 번쩍 손을 들고 말했겠지, 우리 집엔 오빠 말고 삼촌이 왔는데요!

일본은 천진한 아이들도 이용했어. 그렇게 해서 큰삼촌은 일본군이 되었던 거야. 그렇게 해서 병을 얻었고 그리고…….

그래, 또 내 막내삼촌은 이번엔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인민위원회에 붙들려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북으로 패주하던 중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돌아오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그랬다. 실은 큰삼촌이 학도병으로 편입되었을 때 막내삼촌은 농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만주로 보내셨다고 들었지. 종전 후 두 삼촌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학도병 때 쇄약해진 몸으로 큰삼촌은 회생을 못했더란다. 난 너무 어려서 그렇게 들은 데로만 믿었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된 비밀은 무섭고도 슬펐다.

선친이,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배운 것 없는 농부의 자격으로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었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구나. 아버지는 당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삼촌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셨다고 했는데. 그게,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하필 국치의 해에 태어난 할아버지에게 땅만 파고 살라고, 일제의 교육 일체를 거부하신 것과는 대조적이었단다. 아마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셨을지. 어떻든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이상재 선생의 노선을 신봉했고, 신석우 선생의 문자보급운동을 숭앙했으니. 뭐 그건 그렇고.

해방에서 6.25전쟁까지는 어느 가정이나 상당부분이 덮인 채로 기억되곤 하지 않더냐. 우리 집에서도 아깝게도 삼촌 둘이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다만 병사요 납북이라는 통상적인 설명으로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었다. 추억은 아름다워라 - 그런 셈이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픈 과거를 잊으려 하니까.

해방된 대한제국에서 - 맞는지 모르겠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었다가 해방되었으면 대한제국이 맞겠지? 아니다, 대한민국 임정이 성년이 될 나이를 먹었으니, 이미 대한민국의 땅이었나? 그 사이시간에 삼촌 둘은 매우 적극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거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그것이 비밀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나중에 알게 된 내막은, 그래 무섭고도 슬펐다. 막 일제가 떠난 땅에서 내가 태어났지만, 흩어진 가족들이 다 모이기는 어려웠더란다. 종전이 되고도 한참을 기다렸을 때야 돌아온 큰삼촌은 병을 얻어왔다고 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진출했었으니까 기후인들 견딜 수 있었을까. 병중에도 큰삼촌은 막내삼촌과 더불어 청년답게 새나라 건설에 열정적인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지. 해방되던 해 스물두 살이 된 막내삼촌은 몸도 마음도 건강했고, 징용 갔다 온 형이 또 감옥을 드나들 때도 형을 우상처럼 존경했을 수밖에. 그러다 그 형은, 그러니까 학도병삼촌은 그만 더욱 쇠약해진 몸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대. 겨우 아장아장 걸었을까 말까했던 내게는 물론 손톱만큼의 기억에도 없지만.

그리고 막내삼촌 말이다, 같은 말 또 한다만, 남북이 여전히 대치 상태인 나라에서 남북과 관련된 꼭지는 공개된 비밀 아니더냐. 물론 이제는 그나마 좀 비극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러니까 막내삼촌은 납북당한 것이 아니었단다. 민전 활동 중에 뜻하는 바 있어 벌써 1948년도 봄에 월북하는 인사들을 따라가신 거래. 민전이 뭔 줄 네가 알 리가 있겠냐. 나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는걸.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고, 미군정 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계열의 연합단체 이름이 그랬단다. 암튼 해방되던 그해 연말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나오자 우리 한민족이 좌우 이념으로 갈라서는 사단을 겪게 된 것 아니냐. 바로 반탁과 찬탁이 갈등의 시작이었지. 김구 선생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는 반탁운동을, 그에 맞서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던 민전이 찬탁론을 편 것이지. 아무튼 오늘 이념논쟁 이야기가 아니고…….

-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렸지.

- 우리나라하고는 무슨 상관?

- 그 무렵에 파리회담에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한 인물들이 있었지. 역사를 봐, 당연히 좌절하였지. 하지만 거기서 바로 이듬해 3.1 만세운동을 기획하게 된 것이야.

- 누가?

- 김규식 선생도 모르냐. 지금은 여운형 선생이랑 좌우합작운동을 준비하시지.

이런 대화들, 아버지는 두 삼촌들의 대화를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둘이가 민전과 관련해 활동하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 동생들이 만일을 위해 큰형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 했지만, 만일, 만일……. 만일 형제가 모두 위험에 빠질 수는 없다는 논리를 무언중에 나누고 있었겠지. 아버지는 동생들의 일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는데, 그러다가 덜컥 큰삼촌이 떠나버린 것이야. 폐병이 사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옥고의 후유증인 것을 다 알았다더라. 그러나 그것은 사실 약과였던 셈. 생사의 갈림길은 어쩌면 인사가 아닐지도 모르잖느냐. 그런데 막내삼촌은? 막내삼촌의 운명은 외려 사람의 책임이라고 해야지. 큰삼촌과 세 살 터울이었는데, 형을 따라서 여운형 씨를 가장 존경했다고 그러더라. 그게 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여름 여운형 씨도 사망하고 나서 막내삼촌은 충격과 회의 속에서 방황도 했던 모양이더라.

아버진 어려서 도통 모르셨겠죠?

그렇지. 내가 중학생이 된 다음에야 아버지한테, 네 할아버지께, 듣게 되었지. 할아버지는 동생들을 다 잃고서 넋이 나가셨을 거야. 그때가 막내삼촌의 아들이라고, 내게는 유일한 사촌동생이 집에 왔다 간 즈음에야 말씀을 하셨어. 그때도 난 잘 이해를 하면서 들었던 것은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것도 한참 지나서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지.

아무튼 그 시절, 삼촌은 좌우합작운동이란 그 말만으로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네 할아버지께 말했더래. 김규식 선생이 이어 민족의 자주노선을 표방하는 의미의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니까, 47년인가, 겨울이었대. 강령은 독점자본주의도 아닌 무산계급독재사회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었고.

제3의 길이요? 한반도에서? 같이 분단의 운명을 겪은 독일 땅 젊은 지식인들의 노선과 같았네요. 민주주의를 사회화 하는 길, 사회주의를 민주화 하는 길 - 제3의 길. 그것이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독일도 한반도도 분단국의 운명 속으로 끌려들었던 것이군요.

그래, 너도 공부를 했으니 그만큼은 알겠지. 1948년은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더욱 불안한 형국이었단다.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어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는 생각으로,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고 해야 할지. 결국 그 결과가 우리나라니 그걸 부정해선 안 되겠지만. 2월 초에는 밀양에서 농민들이 아침 일찍 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져서 경찰이 발포까지 했고, 물론들 다쳤겠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었대. 한 보름간에 이곳저곳에서 200만 명은 참가했을 정도라니. 그때 무슨 일을 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막내삼촌은 그 사건이후 북으로 옮겨간 셈이지. 그해 4월에 열렸던 남북협상에 김규식 선생의 일행을 따라 간 것이 삼촌의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적극적인 참여를 천명했고 평양에서 연석회의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래. 하지만 늘 깃발에 쓰인 문구와 실상은 다르기 마련.

4월 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지만, 협상의 결과는 실천과는 거리가 먼 길이었겠지. 공동성명서라는 것이 조항마다 이견이 없었겠느냐고. 김규식 선생은 김구, 김일성, 또 누구더라, 암튼 4김회담까진 참석했어도 이후 연석회의에 불참했던 모양이야.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논의되지 못하였으며, 북은 백범과 우사가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약속했던 전기와 농업용수도 다 끊어버렸다는데 뭘.

그럼 막내할아버지는 왜 돌아오지 않으신 거죠?

말 말아라. 그것은 정말 두고두고 의문이었다. 삼촌이 그토록 존경하던 김규식 선생은 분명코 반공적이었는데, 삼촌은 왜 함께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 시기 일은 종내 의문 투성이었다. 반공주의자 김구 선생은 왜 반공주의 남한에서 암살당했을까? 어쨌거나 남북협상에 참여한 탓으로 빨갱이라 의심되던 김규식 선생은 왜 북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했을까? 난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뭘 알 수가 없었다! 암튼 이듬해 6월인가 평양에서 무슨 회의가 열릴 때부터 민전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간단히 조국전선으로 통합되었다는데, 그때까지는 삼촌에게서 소식이 있었단다. 그러나 곧 함흥으로 갔던 모양이라. 함흥은 벌써 해방 이듬해 초봄에 반공학생의거가 일어난 이후 불안한 곳이었는데.

함흥에서 반공의거요?

그렇다니까. 조직된 인민위원회가 함남중학교를 인민위원회 청사로 차지하자 학생들이 학교를 빼앗기려 했겠느냐. 5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위를 하자 시민들이 합세해서 만 명도 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보안서원들이, 아니 소련군까지 동원되었다던가, 아무튼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사건 말이다. 사상자가 생겼다는 소문도 있었고. 남북이 다 같았어야. 삼촌이 그런 사건이 터졌던 곳에를 왜 갔을까. 세세한 이야기들은 결국 아무도 모르게 되었지. 함흥까지 간 사실도 전쟁으로 완전히 두절될 뻔했지. 난리는 각각 집안에서도 난리였던 거야, 생이별이 어디 한 두 집이었냐 말이다. 삼촌 소식은 1.4후퇴 전에 피난 내려온 만삭의 아내가 전해준 것이지, 단편적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거기서 결혼을요?

그래 뭐. 결혼 소식은 몰랐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무튼 만삭의 아내, 삼촌이 동지이자 아내로 맞았던 여자의 피난길은 유행가에도 나오는 처절한 흥남부두를 그대로 상상하면 된다. 삼촌이 함께 배에 오르지 못한 것인지 안탄 것인지는 이제와 누가 알랴.

아버지는 맥없이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흥남이, 너희가 어렴풋이 부산삼촌으로 들어 알고 있는 분이 그때 그 역사적인 흥남부두 철수작전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막내삼촌이 아이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헤어져버려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태어난 내 종제 말이다.

흥남은 너희 세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명이겠지만, 6.25 세대에겐 9.28 서울 수복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미연합군이 혼비백산 패주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대표하는 곳이지. 그 당시 중공군 - 그땐 그렇게 불렀어, 요즈음 말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보낸 조선전쟁인민지원군이라 해야겠지 - 40만 명 가까이가 참전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평양-원산 라인은 저들의 손에 넘어갔지. 인해전술에 맥아더라고 철수명령을 안 내릴 재간 있었겠냐.

인해전술을요?

엄청난 병력 투입을 그땐 그렇게 불렀단다. 집중적으로 투입한 전투원의 희생을 상관 않고 계속 공격하여 수적인 압도로 돌파구를 만들고 방어부대나 방어지역을 고립시켜 궤멸하는 작전 말이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수반했겠지만 일시적으론 승리를 거두었지. 퇴로가 막힌 한국군 제1군단과 미국군 제10군단 병력만 해도 10만 명에, 차량에, 보급물자 전부를 흥남항구로 철수시켜야 했으니. 거기에 몰려든 또 10만 명 피난민들을 어쩐다더냐. 그런 건 영화에서도 드물 것이다.

그때 인구로 10만이나요?

그래, 그때 인구로 피난민만 10만. 미10군단장이었다지, 그가 헬기에서 흥남부두를 시찰하다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더러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피난민들을 보고 사람들을 데리고 가리라고 결정을 했더란다. 그런 점은 서양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지는 부분이지. 결정이 내려지자 군함이고 상선이고 차출된 배가 200 척인가 뭐 엄청 동원되었단다. 그 마지막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인 거라. 그 배의 선장이 이미 실었던 모든 무기며 보급품들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은 12월 21일. 아무튼 군인과 민간인 등 무려 14,000명이 승선한 이 배가 소리 없이 마지막으로 흥남 항을 빠져나온 것은 이틀 뒤. 이 기록적인 숫자는 나중에 기네스북에 올랐지. 그렇다고 이 배가 타이타닉 수준이냐! 어림없지, 겨우 60명 정원인데, 벌써 선원들이 40여 명 승선해 있었다니까 탈 수 있는 인원은 열댓 명 수준이었나 봐. 선장이 나중에 회상하는 이야기는 처절하다 못해 공포 그 자체야.

선장이요, 직접?

그래, 선장이 쌍안경으로 본 비참한 광경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드는 피난민들 옆에 닭과 겁에 질린 아이들이었단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떻게 그 작은 배가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어떻게 단 한사람도 잃지 않고 끝없는 위험들을 안고 갈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이 배의 조타장치를 잡고 계시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를 느꼈다고 했대. 그거 다 어디 기록에 남아 있어. 암튼 그 모든 것이 독실한 가톨릭 신앙의 힘이었는지, 그는 50년대에 바로 바다를 영영 떠나서 수사가 되었단다. 뉴저지의 베네딕트회 무슨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더라고. 선장 라루가 아닌 마리너스라는 이름의 수사로서 십여 년 전 87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아버진 어떻게 그렇게 나중 일까지 소상히…….

그게, 그 양반이 한국과 인연이 깊게 닿아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 수도원이란 곳이 경북 왜관의 베네딕트 수도회와도 연결이 되었다던가 뭐, 그렇더라. 또 그뿐이냐. 그 배에서 항해사였다던가, 스물두 살 항해사의 회고는 가슴이 찢어지지. 캔 속의 정어리들처럼 쑤셔 박혀서 거의 모두가 서서 어깨를 부딪치며 서서, 그런대도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이. 음식도 물도 거의 없이 사실상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아무리 극기심이 많은 한국인들이라 해도 어떻게 꿈쩍 않고 서있을 수 있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단다. 그는,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암튼 이 피난민선을 기네스북에 등재하는 데 일조를 했더래.

그래요. 2000년 대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에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 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본 기억이 나네요.

그뿐이냐, 항구에서 피난민들의 승선을 사수하던 미군은 몇 명 전사한 반면 배에서는 사상자는커녕 새 생명이 다섯이나 태어났다는 믿기지 않는 기록도 있단다. 사실 안 그러느냐, 내 사촌도 게서 태어날 뻔 했으니. 아슬아슬하지. 헌데 정작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피난민을 내리지도 못하게 했단다, 피난민이 하도 넘쳐서. 그렇게 해서 거제도 장승포항에 내린 이들 피난민들의 자취는 지금은 박물관처럼 되어 있다던 걸.

- 서른 시간도 넘었어요. 살을 에는 바람이 무서웠어요.

- 아기가 잘 버텨주었지만, 그 전에 죽을 것 같았어요.

- 외투 주머니 속에 붉은 지폐가 남아 있었어요. 여기서는 쓸 수 없는 돈.

- 가마니로 비바람을 겨우 막을까말까, 수용소 거적에 눕자마자 아기가 태어났지요. 아비 생사도 모른 채. 나이든 여자들이 도왔죠, 그저 앞날이 캄캄했어요. 어미의 한숨과 눈물로 맞은 아기라니.

아버지의 말씀 사이로 바람이 말하고 바람이 실어다준 속삭임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수용소 첫날 아기를 낳은 1927년생 함흥 여자. 애 아버지는 만삭의 아내를 배에 태우고는 그만이었다. 누군가는 양보해야할 흥남부두에서 건장한 애 아버지는 부두에 서서 아내와 작별했다,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가겠노라고. 그 아버지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도록 부산바닥에 나타나지 않았다.

1950년 12월 25일생 흥남이. 흥남에서 온 흥남이. 아기의 이름을 그저 흥남이라 부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서 태어난 아이 다섯 모두 흥남이가 아닌가. 흥남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호적을 만들어야 했고, 엄마와 아들이 정문리에 나타났다. 그때서야 우리는 막내삼촌이 북에 남은 것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난 사촌이 있는 것을 알았단다. 사촌은 일단 가계를 찾았으니 더 이상 흥남이가 아니었지. 족보의 이름을 따라 한종남으로 불리게 되었으니까, 나에게는 유일한 사촌동생 종남이. 부산에서 피난살이 살림을 혼자 꾸리던 어머니랑 그렇게 단 둘이 부산사람이 되었지. 숙모는 함흥에서는 여고를 다닌 신식 여자였지만 따로 여자가 할 일은 없어서 수선 바느질을 업으로 살아내셨다고 해. 아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려주려고 사고무친의 부산을 떠날 수 없었을 그 심정을 누가 알랴. 흥남부두에서 탄 배가 부산으로 향했으니까,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올 것이라 믿고. 배가 끊겼으니 육로라도. 차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근 삼십년을 흘러가고 있었다.

 

1979년 한종남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4학년 재학 중이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졸업반인 이유는 애초에 초등학교 입학부터 늦어진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했었던 때문이었다. 대학은 종남에게는 사치였다면 사치였으니.

종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좀 늦게 1972년. 처음 초등학교 입학부터 호적 때문에 늦어졌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그만 부산상고로 진학하겠다고 원서를 고집하는 와중에 일 년을 놓쳤단다. 어머니의 힘든 일이 늘 맘에 걸렸던 그는 그 일 년을 놀면서 제법 돈을 벌었대. 깡통시장에서 - 지금은 부평시장이라 부르는 재래시장이지 - 게서 심부름하는 마술 같은 일을. 그러니까 어머니 수선 집에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군복 같은 것들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서 깡통시장에 낼 물건들을 받아다가 대주는 일. C-레이션 박스를 지붕으로 한 가리개 판잣집에서 시작된 미제물건이 구호물자에서 거래물자로 탈바꿈되는 세상이었지. 물론 어머니 몰래. 꼬리가 길면 들키는 것은 사필귀정, 그런 일을 들킨 뒤 종남은 손을 털고 고등학교에 잘 입학했으나 이번에는 문학에 빠졌더래. 공부보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일에 열중했고, 수업시간에 그런 책들을 읽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 것은 다반사였다더라고.

집안에 난데없는 문학 지망생이라? 내 큰삼촌은 선린상고 시절 김수영의 동기생으로, 김수영이 오스카 와일드의 영문을 줄줄 외며 두각을 나타냈을 때나 이어 도쿄상대에 진학했을 때에도 동기였다더라고. 하지만 김수영이 학병 징집을 피할 수 있었을 때 삼촌은 끌려갔고, 김수영이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할 무렵 삼촌은 이미 병사하고 말았지. 그렇다고 막내삼촌이 문학적인 자질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안 해보았지만, 종남은 그런 기질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 예민함으로 오히려 대학을 포기했겠지. 어차피 연좌제 비슷한 일로 종남이 공무원이나 법조인이 될 길은 요원했을 것이니. 살았건 죽었건 - 그 당시에는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 아비를 북에 둔 사람이라. 뿐만 아니라 대학은 그에게는 돈 지출과 같은 단어였으니까. 그 시절 우리 모두 그랬지. 나도 겨우 2년제 교육대학엘 진학하지 않았더냐. 종남인 어머니의 성화를 피해 달아난 곳이 군대였더래. 그런데 군대를 마치고 온 그가 변했다더군. 사람은 떳떳한 직업을 가져야 하리라고. 젊은이의 변화의 원인은 더러는 여자야. 군부대에 면회 온 선임병의 여동생 - 그 여자를 위해서 반듯한 직업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시인이 되는 길은 막연했으니 국어선생님이 되리라 - 그렇게 해서 국어교육과 진학을 목표로 뒤늦은 대학입시 준비를 했고, 경남대학에. 마산에 애착이 간 건 여자가 마산에서 작은 병원의 간호원이었나봐.

개포동 당숙모가 그럼…….

그래, 그 양반이다. 고향은 섬진강 어디라던데, 순천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외가 쪽 마산으로 취업을 했었나 봐. 그땐 간호고등만 졸업해도 충분히 간호원 노릇을 했었지. 아차, 지금 말로는 간호사라지. 그것 보다, 그해 1979년 여름을 아비규환의 태풍 쥬디로 마감하며 마산의 인심은 흉흉했더래. 마산-진해 간 도로도 유실되고 사람 몇 천에 차량 몇 백 대가 혼란 속에서 마비되었고, 마진터널에서는 산사태 위험으로 사람들을 철수시키던 해군장병들이 그대로 매몰되는 사고까지 났더란다. 암튼 그해 여름엔 전국적으로 백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났던 것 같아. 뭐 가물가물 하지만.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국회위원에서 제명되는 사태가 벌어진 거야. 유신정권은 데드엔드를 향해서 내리막을 달리고 있었지. 택시기사가 택시에서 대통령 욕을 한 승객을 신고하면 그 포상으로 그렇게 어려운 개인택시를 받는다는 루머까지 떠도는 지경이었어. 그 정도면 공포정치나 뭐가 달랐냐. 유신반대데모는 사필귀정이었지.

공포정치요?

그럼 뭐라 말하랴? 실체도 없는 재건윈가 뭔가로 엮은 사람들을 사형판결 해놓고, 판결 열여덟 시간 만에 처형하는 정치를 공포정치 아니고 뭐라 해? 그렇게 몇 년을 엎드려서 지냈으니 폭발할 만도 했지.

그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죠, 아닌가?

너희 중 둘은 태어났었지, 넌 다섯 살 쯤 되었을 걸. 난 참 평범한 가장에 불과했다. 초등 근무하면서 중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너무 내 앞가림만 했어. 늘 부족하여 공부는 열심히 했다지만 다 나 자신을 위해서였지, 선생을 할 자격은 한참 부족했었다 싶어.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었어야 말이지.

아버지가 아버지죠, 그럼!

들어 봐라, 그때 경남대학에서는 여학생들이 오히려 주도권을 잡았다고 알려졌어. 같은 국어교육과 3학년이던 종남은 뒤늦게야 그들에 합류했다더라고. 여학생들은 이미 9월 말에 대학 방송실 장악 기도에 실패한 뒤에,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더래. 죽음을 불사하는 모습으로 호령을 해대는 여학생들에 혼쭐나기도 부끄럽기도 해서 모두들 거리로 진출했겠지. 마산시청을 거쳐 3․15탑 주변으로까지 나갔지만, 경찰과 대치하던 초반에 모두들 연행되고 말았겠지, 수가 없어.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자꾸나. 어쨌거나 주모자 급은 아니었던 종남이도 군필에 나이까지 많은 상황이라 위험한 부류로 분류되었을지 모르지. 그때 일 주일인가 구치소 안에서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들었다더라고. 누구라도 귀를 의심했는데, 어떤 간수가 너희 놈들은 기쁘냐고 묻더래. 죽음 때문인지 그 질문 때문인지 바로 그 순간 종남이 구역질을 시작했다는 거야, 같이 있던 학생들 말이 그랬어.

종남이 구토와 어지럼증을 못 이기며 뒹굴자 일단 병원으로 이송되었나 보더라. 의식 소실이 온 것은 여자 친구가 도착한 직후였다고. 생각해 보렴. 그렇게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할까 걱정되는 상황에서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뜨고 말을 하고……. 얼마간 희망이 자라는 것 같기도 했었대. 하지만 아름다운 환상은 그 다음 장면에서는 그만 깨지고 말았단다. 종남인 그길로 이미 저만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야. 뇌수술에 이어 근 반년 간의 사투에도 그냥 그렇게 어린아이의 얼굴로 깨어난 채 퇴원을 했지. 그 후론 그대로 그냥 살았으니 산 것인지 아닌지. 심한 것은 그 사이 여자 친구가 낳은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지. 결혼식도 하지 않은 사람 병간호에 매달리던 여자가 곧 배가 불러와도 놀라지도 않더니, 아일 낳고는 혼인신고에 호적정리를 다 마쳤고. 종남네는 어정쩡한 그런 상황에서 서울로 옮겨왔어. 부마사태 후 한 2년인가 지난 후였지.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병원이 있을까 하고. 함흥 숙모님이, 종남 어머니가 결단을 내리신 거야. 북에서 나타나줄 남편을 기다리기보다는 아기처럼 세월을 놓아버린 아들을 구하기로 마음 잡수신 거지. 혼자 사시는 서울고모가 늘 간이역 구실을 하시지. 말죽거리가 이름부터 그런 곳 아니더냐. 나중엔 너희도 데리고 계셨었고. 암튼 종남네가 올라갈 때는 고모가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재천 건너 개포동에 방 두 개짜리 주공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셨지. 변두리라지만 그때 돈 천만 원이 쉬운 건 아니어서 조금씩 십시일반 돕기도 했어, 그렇게라도 해야 집안 우애 아닌가 하고들. 그래도 말도 말아라. 아이는 자라고 애 아빠는 더 아이 같아지고. 그러다가 종남이 결국 떠났지. 어머니의 태중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생사도 모른 채. 그때 깨달았지. 금실아, 난 알았어. 북에 남았다는 막내삼촌은 이미 떠도는 영혼이 되었을 것임을.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떠났음을.

 

세월이란 것 참 무심한 물건이다. 그러고 다시 삼십 년이 다 되어가더라. 그 사이 그 집안일을 말로는 다 못하지. 네 당숙모 입장에선 남편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님과 아기를 한 번에 잃었지. 그렇게 넋 놓고 살아오더니 결국엔. 아서라, 작년 윤삼월, 사람들은 윤달이라고 해서 이장들을 하는 데, 일부는 그게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나를 말리더라. 나에겐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윤달을 기다렸다.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기다려왔다. 마침내 여건이 되었으니 윤삼월을 왜 피한단 말이냐. 큰아버지도 작고하신지 언제냐, 결국 고향에 남은 당숙들 제당숙들과 어찌어찌 상의해서 전체를 손을 보았지. 성가 전에 세상을 버린 큰삼촌도 제대로 자리를 찾아드리려고. 특히 설마 설마 생사를 몰라 엉거주춤했던 막내삼촌을…….

초혼장 - 지령석을 모셔 그걸 통해서 영혼을 불러다 모시는 장사법을 그리 말한다. 양재천에 뿌려진 함흥 숙모도 함께. 그렇게 아내도, 또 어렵게 탈출해 보낸 태중의 아들을 저 세상에서나마 만나보시라고. 어떻게든 피붙이들 속으로 가서 살라고 보낸 그 서러운 아들도 죽어 삼십년이라고. 허니 이제 이승과는 연을 끊고 훨훨.

아버진 ㄹ 받침에서 멈추셨다. 나도 덩달아 입이 얼어붙었다.

아버지, 이젠 그 짐을 벗으셨나요? 대체 왜 그렇게 가슴 무겁게? 먼 먼 가족사의 짐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아버지는 아들이었고 조카였고 종형이었고…… 또 우리 아버지시군요.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묻고 싶은 궁금함을 감추느라 거짓 하품을 참는 체 손으로 입을 막아본다. 꿀꺽 보따리를 삼킨다. 앞으로도 삼십 년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는 한 자락 귀퉁이를 풀어도 될까? 핏 속으로 핏 속으로 녹아든 이해와 불가해의 접점을 찾아서. 허나 그 전에는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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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15. 단편 「초혼장」,『문학춘추』 2013 봄호 (통권 82호), 38-56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 16. 21:39

일기

 

 

 

   2011년 11월 11일. 날씨, 흐리다가 부슬비.

 

 

   어느 하루가 깨어난다. 몇 십 년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점점 밝아져야할 시간임에도 점점 더 어두워지는 창밖으로 눅눅한 시선을 내보낸다.

   말라가는 식빵조각을 커피 물에 적셔 뜯으며 오늘을 시작한다. 출입문 하나로 바깥세상과 면한 줄 알았더니 모니터 화면이 더 넓고 무섭다. 사람들은 백년 만에 맞는 11-11-11을 기념하기 위해서 떠들썩하다. 산부인과 병원에 제왕절개가 밀렸다는 뉴스까지다. 누가 힘이 세서 11시에 수술을 받게 될까? 필시 아기 아버지는 ‘사’자 돌림에, 산대에 누워있을 여자는 천진하고 예쁘기까지 한 부잣집 따님일 게다. 그 누군가의 드높은 경쟁력에 임신 경험도 없는 내가 쓸데없이 기가 죽는다. 임신 경험? 그럼 내가 은근히 엄마가 된 동창들을 부러워했더란 말이냐.

삐리리리. 구원은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다.

  

   한샘, 안녕하쇼! 이박입니다.

   예?

   이박, 오얏리 이가, 이박임다.

   아니, 이샘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이냐 되물으시면, 아니할 전화를 제가?

   어쩌자고 이 세월 지나 전화기 들고서도 뒤틀리세요?

   뒤틀리다뇨! 암튼 제가 지금 그리로 갑니다. 출발합니다. 기다려 주세요. 너덧 시간 후엔 도착합니다.

 

   그렇게 불쑥 나타난 이순규를 만나러 나가려는데 비가 질척거렸다. 은행잎들이 빗물에 젖어 떨어져 내려 발길에 짓밟히고 있었다. 보도는 차가운 회색의 물기였다. 찢긴 은행잎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물감이 회색을 따뜻하게 보완한다.

 

   이런 날 이런 시간에 어떻게?

   시간이 있느냐고요? 시간 있지요. 시간이 없어서요. 없어져서요. 시간 다 말아먹었어요.

   다섯 번 ‘시간’이 읊어졌는데 물론 뜻은 다르다. 첫 번째 시간은 시각, 또는 때. 두 번 째 세 번 째 시간은 여유다. 여가시간  말이다. 아무 소용없는, 시쳇말로 아무 영양가 없는 여자를 만날 시간 말이다. 마지막 두 번, 이때 시간은 수업시간이다. 시간강사가 수업시간이 없단다. 없어졌단다.

 

   역사철학 관련 수강생이 엄청 줄었어요. 10년 다 되가는 보따리장사 세월에 선배라는 게 외려 핸디캡이 되잖아요. 자리를 못 잡으면 너나 나나 동등한 것이 함께 간이역의 삶 아니던가요. 늘 추운 곳에서 지내다 보니 마음도 얼어붙더라고요. 먼저 떠나신 한샘 생각이 난 것은…….

   뭔 동병상련 정도 말입니까? 한국인, 비인기 인문학 전공, 비정규직 젊은이, 그밖에는 공통점은 적죠.

   예.

   뭐가 예? 공통점이 적다는?

   예.

   어째 목소리에 실망감이.

   예.

   공통점 적어 실망하실 일은 없지요. 남자 여자는 영원히 다른 동물인걸요. 이샘은 유난히 더듬이가 안쪽으로 휜 것도 또 다른 특징이죠.

   설마 더듬이라면.

   곤충으로 비하하냐고요? 비하라뇨. 곤충이 얼마나 위대한데. 특히 모기는. 연간 모기로 인한 사망자가 세계적으로 200만 명에 달한다는 뉴스 못 보셨나요? 킹코브라보다도 무섭다고요. 평균 몸길이 3m로 살아있는 모든 것을 한순간에 즉사시킬 수 있다는 코브라의 신경독 뺨쳐요. 치명적 촉수를 보유한 해파리, 백상어, 아프리카 사자, 악어, 코끼리, 북극곰, 아프리카 물소, 독개구리 보다도 더하죠.

   아니 뭘 외우세요? 모기, 코브라, 해파리 어쩌고. 제가 언젠가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라 했을 때, 뭐 그런 걸 외우냐고 핀잔준 분 아니시던가?

   핀잔은요.

   핀잔이었지 그럼.

  

   나는 그런 대화들을 기억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교양한국어 강의시간에 그것들이 되살아나서 나 혼자 떠들었을 때 스스로도 놀랐으니까. 그러자 뭔가 긴가민가했던 말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 났다.

   아니, 그 보다는 일본족도 동이족이라고 하시던 말이.

   그렇다니까요, 바로 그걸 잊지 말아야.

   일본인 1/4 정도에서 한국인 디엔에이를 찾아볼 수 있다던 말씀요?

   예. 그리고 지금 한국엔.

   지금 한국엔? 한국엔 뭐요?

   지금 배달의 원형인 한국인 중엔…….

  

   달변의 그가 오늘은 더듬거린다.

   아, 한국인 중에도 다른 민족의 디엔에이가 섞였다고요? 거야 당연하겠죠. 순정한 핏줄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나는 벌써 그, 여기 이 이박이 아니라, 그, 배승한의 가족사에 젖어든다. 온 세상에 흩어져 핏줄을 지키거나 흩뜨려놓는 유대인 이야기는 삼가리라. 그것은 승한의 가족사에서 비밀 같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나에게 금기일 리 없지만 나도 모르게 삼가졌다. 그런데 이박은 기어코 그 금기를 건드린다.

   실제로 열린사회 치고, 예컨대 유럽처럼 애매한 경계의 이웃나라들 사이에선 더욱. 암튼 열린사회 치고 핏줄이 온전할 리 없지요. 열린사회라. 그냥 조금 열린사회, 아님 ‘베륵손’적 의미의 열린사회?

   이샘, 오늘은 그쯤 하시죠. 지금 프랑스어 발음 놓고 또 토 달려고?

   아니, 폴란드 태생이라 그래야 한다면서요. ‘베르흐손’인가?

   이샘, 제발 편하게 합시다. 어째 갑자기 베르그송인데요?

   거야 그는 유대인 순종이다 그 말이고. 유대인의 경우 순종이 문제되지는 않죠. 베르그송의 공헌이라면, 정지된 인식에서 운동, 변화, 진화의 가치로! 이 문외한이 맞게 이해하나요?

   문외한이라니, 철학도가 이 경우 문외한이란 말씀은 뭔가. 그런데 뭔 말씀을 하려고? 프랑스어 좀 한다고 베르그송 아는 척은 말라 그거죠? 당연한 말씀, 맞아요, 국어로 읽는다고 모든 책이 읽어지나요? 그보다 선생님의 역사철학은…….

아, 그거 아닙니다. 저 요새 역사고 철학이고 다 보따리 싸맸습니다. 꽁꽁 동여 매버렸죠. 제가 지금 순례 중인것 안 보이시나요?

  

   그랬다. 순례자 이박.

   배낭을 짊어졌지만 배낭족이 아닌 것이 개량한복 차림이다. 순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나그네 몰골이 선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어디 다녀오는 길 아니면? 제가 한샘 찾아서 여기 왔다면 믿으실래요?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럴 리 없죠, 당연히. 참 그런데 이 고장엔 어쩐 일이세요. 원래 여행을 하시는 편인지?

   여행 안 좋아합니다. 안 좋아 했어요. 존재와 영속성의 가치에 파묻힌 동안은 정말 그랬지요. 그 다음 모든 실재를 역사적  성격으로 규정하려던 시절엔 운동과 에너지에 현혹되었지만, 그 운동은 이런 여행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개념들이었죠.

   이샘, 저 오늘 머리가 무거운데요. 본원적 이야기 빼고, 오늘 이 고장엔 웬 일로?

   아 참. 거의 실직 상태인데 뭐 따로 할 일이 있나요. 먼저 서울 생활 털고 내려간 한샘이 부러웠다고나 할까. 한번 보고 싶었어요, 그냥.

   저요? 제가 부러워요?

   예, 진실로. 건 그렇고. 한샘은 식구가 단출하시다고?

   단출하다기보다, 아들 없는 집 큰딸이죠. 현상으로 말하면 오래 독신가족. 왜 난데없는 호구조사세요?

   제가 마음먹고 낙향을 할까 생각 중인데 동반자를 구하거든요.

   아뿔싸. 나는 숨을 죽였다. 그럼 지금 이순규가 하는 말이, 아니 내가 그 후보 중 하나라는 말을 지금?

 

 

   동반자 구함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창문너머를 바라보던 내가 서둘러 실없는 말을 시작했다.

   창밖엔 아직도 비가 내리나 봐요, 음, 가장 긴 노래제목이 뭔 줄 아세요, 창과 관련되는데?

   창밖의 여자? 무관하게 밖에 서있다 그 말?

   에이, 것도 모르시네!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나는 양쪽 손가락을 다 오므렸다 펴가면서 열여섯 글자를 헤아렸다.

   아, 그런 노래도 있었네요. 창문 넘어 어렴풋이…….

   그도 따라 손가락을 구부리며 세어보다가 놀란다. 정말 열여섯 자네요? 그보다 많기는 어렵겠어요.

  

   나는 가만 노래를 읊조린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잠깐. 난 시를 외워보겠소. 염병헌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 어지러워라 환장허것네 /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겄다 시방. 어떻소, 제목은.

   진달래, 김용택.

   아니 뭐 한샘은 시도 줄줄 외는 거요?

   아뇨, 제가 무슨. 이 ‘시방’ 땜에 알죠. 이샘이 만날 그렇게 했잖아요. 미처불겄다, 시방, 그렇게.

   그랬군요, 내가 그랬어요. 사투리 아무한테나 잘 안쓰는디.

   방금도 쓰시네요.

   그러니께 아무헌테나는 잘 안쓴다고라.

   에이, 치우세요. 이상합니다. 평소대로 하세요.

   그러지라.

   그만 하시래도요, 저 오늘 앉아있기가 좀 피곤하네요.

   그럼 좀 나가서 걸을까요?

   걷기는 더 힘들 것 같아서요. 이샘도 오늘 고향에 가시는 길이라 하셨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시리.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군요. 예, 뭐. 그래도 제 고향 이야기나 좀. 오뎅 국물에 한잔 하면 피곤감도 풀릴 것이고.

 

 

   그렇게 이순규는 고향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두워지자 불조차 꺼진 농협인지 무슨 건물 앞 간이 튀김집에서. 튀김집에 어떻게 소주가 나오는지는 글쎄.

 

   그의 고향은 전라남도 고흥.

   고흥군 봉래면. 거의 처음 들어본 지방이다. 아니다, 우주선 발사 때문에 몇 번 뉴스의 중심에 섰던 지방이다. 봉래면은 1996년 나로1대교와 나로2대교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고립되었던 섬 외나로도에 위치한단다. 군청에서 차로 달리면 한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곳. 그러니까 지금은 연육교로 인해서 교통 상으로는 섬이 아니다. 물론 섬이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니.

   면소재지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있다고, 그는 장난말처럼 패밀리 마트도 들어왔고, 모텔도, 비치호텔도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아직도 충무공 따라서 진터라고 부른다는 진기마을이 이웃해 있고, 나로도 항이 가깝고 유람선 선착장도 가까이 있다고. 무슨 빌라라나 아파트도 물론 있다고. 어차피 현대 사회는 방 한구석에서 인터넷으로 온 세상과 교류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니.

   그는 갑자기 머쓱해 한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도시여자라도 마음만 먹으면 살만 한 곳이라고?

   봉래면, 삼십 제곱킬로미터 쯤 면적에 인구가 이만이천 조금 더 될 뿐이랍니다. 어디나 처럼 여자가 조금 더 많고요. 경로인구가 팔백 이상. 노인들이 외롭지요. 우리 집은 좀 낫지만.

   그의 고향집은 그의 말대로 외로운 집은 아니란다. 아버지는 계시지 않으나, 동생이 결혼해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단다. 바로 이웃에는 종형도, 조금 건너 또 둘째 종형도 결혼해서 살고 있다. 모두 생업에 열중해 있다. 제법 화기애애한 가족이다. 그는 어떻게 그리 멀리 빠져나올 수가 있었을까? 왜 이제서 돌아가려는 것일까? 스무 살에 떠나와서 스무 해를 떠돌다가.

지금의 OO고등학교가 봉래종합고등학교였을 때, 그곳 아이들은 모두 외나로도 내에서 진학을 했다. 고등학교가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집안일도 거들고 고등학교에도 가고. 그런 터에 그는 순천고로 진학하는 행운을 잡았다. 지금은 전교생이 50명도 안 되는 상황으로 학생들이 귀하지만, 봉래중은 6.25 후에 곧 개교한 유서 깊은 학교란다. 중학생 이순규가 유난히 수학에 두각을 나타냈으니, 시골에서 천재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개천의 용은 합심해서 키우는 것이 시골 인심인지라, 교사와 학부모들이 힘을 합쳐서, 지역사회 전체가 힘을 합쳐서 일단 순천고 진학을 가능케 했다. 순고는 전국 어디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고등학교이다 보니, 특히 수학을 잘하던 학생의 미래는 밝았다. 그가 고등학교 시절 조숙한 친구를 만난 탓에 공부는 철학이라고 방향을 돌려버린 것이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비극이 되었다. 그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는 기대를 충족시켜야할 사명과 의무를 저버렸다. 법대는 아무튼 고향의 소원이었다. 서울의 다른 괜찮은 대학 진학까지만 해도 모두에게 희망을 아직 남겨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법전을 파고들기도 전에 눈이 다른 곳을 향했고, 그는 배고픈 철학도가 되었다. 여전히 고향의 기대는 살아 있었다. 게다가 장학금으로 해외유학을 떠날 때는 고향은 다시 사그라지려던 꿈을 부풀렸다. 박사 공부라니! 박사가 되어 돌아올 고향의 아들. 교수직은 따 놓은 당상일 것이고. 바로 그 지점에서 꿈과 현실이 엇갈렸다. 이제 그 철학박사님이 낙향을 하시려 든다?

 

   마침 군 전체가 지역 내 사회단체와 더불어 ‘고흥사람은 고흥에서 살자’는 캠페인을 들고 나온 터요. 지역경제 활성화와 인구증가를 위해서라고. 인구를 늘리려면 우선.

   그렇겠다. 물론 그의 문제다. 난 가만 있었다.

   헤, 저 농담 잘 하잖아요. 맨 정신으로도. 아직 지칠 나인 아닌데, 어째 오순도순 사는 고향이 좀 그립더이다. 고흥. 뭘 아시요, 혹시?

   고흥 유자!

   아니 어떻게 그런 걸 다. 어쩌나 그런데, 그건 우리랑은, 우리 집이랑은 거리가 멀죠. 고흥 유자가 전국의 반에 반은 커버한대죠. 이천 가구 이상이 유자농에 종사하니까, 한집 건너 정도죠. 헌데 우린 아니어요. 우린 그냥 농사죠. 그냥 농사. 농군에게는 기회가 별로 없어요. 그것도 섬에서. 큰아버지랑 아버지랑 함께, 함께 그렇게 풍랑만나 그리되신 뒤로 우리 집에선 배타는 것도 금기고. 우리 형제들이 그러니까 겨우.

   그는 너무 멀리 갔다. 너무 깊이. 아무래도 그의 가족사를 들을 계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말을 돌렸다.

   가만, 우애와 우정은 왜 다르게 쓰이게 되었을까요? 이샘은 우애와 우정 둘 다에 지극하신 편인가 봐요?

   왜 그 다음 애정이라고 묻지는 않나요? 우애와 우정 다음 애정은?

   와, 철학자의 궤변 앞에서 내 어찌 당하려고. 그만 둡니다. 이러다 없는 우정마저 떨어지겠어요.

   우정이라고요? 그럼 우정은 있다고?

   우정까지야. 우리 모두 피 마르는 동병상련에 동류항이라 느끼는 족속들 아녀요?

   동병상련.

   예, 뭐.

   동류항.

   …….

   동반자!

   오늘 그가 실제로 동반자를 구하고 있었는지 동반자 일반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자 했는지는 조금 애매했다. 오늘은 애매했다. 그는 그러다 말고 아무튼 고향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고향 집

 

   깊은 가을날에도 흐느적거리던 날씨가 오늘따라 저녁이 되자 급격히 추워졌다. 오뉴월 식혜처럼 변하는 것이 여자의 마음이 아니라 날씨다. 어떻게, 기승을 부리는 모기 소리가 아직 어딘가에 머무는데, 책상에서는 발이 시려온다. 이박과 함께 안주삼아 먹은 오뎅 국물과 떡볶이만으로 저녁을 셈 쳤더니 시장기인가. 시장기와 추위는 오면 함께 온다.

   밤이다. 춥고 배고픈 밤이다. 자판 위의 손이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말이 좀 안 되는 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엔 마침내 그일까? 독일 또는 어딘가에서 전화를 하는 거라면 시간을 잘 못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는 독일엔가 어딘가에 있을 그가 아니라 고향으로 간 이박으로부터였다.

  

   오늘 불쑥 여름난 중의 꼴로 미안했수다. 고향으로 향하다보면 회까닥해요, 제가.

   웬 중?

   아, 여름내 입은 후줄근한 중의적삼 말이요.

   그는 딴청이다.

   이 시간에 전화하시면 제가 방해받아 발끈하는 것 모르세요?

   아 발끈 하셨구나, 허 참.

   그럼 담에!

   아 잠깐만. 오늘 아님 나 말 못해요. 잠시만, 아니.

  

   술김에, 그러고도 마주보고 말할 용기가 모자라서 밤늦게 전화를 했나? 무슨 고백이라도? 그것은 어리석은 여자의 지극히 상식적인 추측이었다. 우린 사실 그럴 수 있을 사이가 전혀 아니었으니까.

   그가 말을 더듬거리는 동안 내 손은 점점 더 떨렸다. 몸도 떨렸다. 내가 기억하는 한 한 시간 넘게 간헐적으로 쏟아낸 내용은 그의 늘상의 화두 ‘배달민족’에 관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론적 해박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 인물들에 관한. 그의 고향 집에 관한.

   우리 집엔, 사촌들까지 다 이웃해서 우리 집은 시골치고는 북적거린다고 그랬죠, 아까.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골이 아니라. 무슨 조화냐고요? 배달민족의 확장이랄까, 아주 새로운 대처방식이 먹혔던 셈입니다.

  새로운 대처방식이라뇨?

  에이, 다 아시면서.

  뭘 안다고 하셔요. 설마?

  설마 뭐요! 예, 설마요. 설마 중국, 필리핀, 베트남여자들 이야기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엄청 머리 좋으신 거예요. 종형들, 덩달아 제 동생도.

  

   이순규가 횡설수설 내뱉은 이야기들은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종형이 불행을 씻고 40을 훌쩍 넘겨서 새장가를 들었다. 동네사람 모두가 축하할 일이었다. 다만 말씨가 이상하여 사람들이 수군거리게 될 때 쯤, 조선족 여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얼마 안 있어 그의 동생이 필리핀의 호기심 많은 간호사를 아내로 맞았다. 어학연수를 필리핀으로 간 것이 발단이었다. 정말 씩씩한 이 필리핀 댁 때문에 국제결혼에 대한 선입견이 금세 사라질 무렵, 둘째 종형 또한 베트남 색시를 맞게 되었다. 각각 이름도 없이 중국, 필리핀, 베트남으로 불리는 세 여자들은 일곱 째 아이를 기다리고 있고, 동네는 화목하고 떠들썩하다.

  

  고향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자세한 버전으로 써둘 필요가 있지 싶다. 하도 길게 말한 내용을 단 몇 줄로 쓰는 것은 말한 사람에 대한 존중이 아니다.

  이순규는 어느 날 인천 공항으로 도착하는 종형을 마중 나가라는 고향의 전화에 많이 놀랐다. 외국 여행을 감행할 종형이 아니었으니까. 형은 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은 놀랍게도 씩씩해 보이는 젊은 여자였다. 네 종형 말이다, 공항에서 고향 가는 길 잘 돌보아 주거라! 하시던 어머니의 전갈이 무색했다. 왜 보살펴주어야 하는지? 인사를 건네자마자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어, 형. 아, 축하합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고향으로 가는 금호고속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다행히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론 고향까지 직행은 아니라 해도 거기선 문제없을 것이었다.

   공항에 혼자 남은 이순규.

   잇따라 시내로 들어오는 버스들은 정신없이 들이닥쳤다. 이태 전 금의환향처럼 귀국할 때의 힘찼던 발걸음이 생각나서 서글퍼졌다. 책으로 꽉 채운 기내가방으로 쩔쩔매면서도 발걸음은 사뿐했던 그 순간이 그리웠다. 현실은 곧 냉엄하게 닥쳤다. 기회는 희박했다. 그런데 이 공항을 통해 살러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구나. 또 다른 희망을 안고.

얼른 정리가 안 되는 것이 종형의 반전이었다. 종형은 시골에서 동창생과 결혼한 행운아에 속했었다. 여자 동창생들은 숫자도 적었지만 왜 하나같이 외지로 나가서 게서 결혼들을 해버리는지. 종형과 중학교까지 함께 다닌 동창생이 종수가 되었을 때 젊은 사람들은 은근히 부러워들 했다. 상고를 나온 것도 아닌데 주판을 잘하고 똑똑해서 단위농협 사무실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똑똑한 아가씨였으니까. 홀어머니 모시고 연애도 한번 안하고. 사람들이 다 알아줄 만큼 착실한 아가씨가 종형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였다가 마침내 혼인식을 올렸다. 당시에도 벌써 농촌 총각이 스물일곱에 제대로 장가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종형이야 면소재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별 야심 없이 주저앉아 그 나름대로 버거운 집안일을 도맡고 있었다. 그러다 단위농협에 드나들면서 영농 후계자 문제도 있고. 드물게나마 꾸준한 만남이 옛 우정을 결혼으로 이끌었을 신실한 젊은이들. 두 사람이 결혼을 했을 때 정말 예쁜 신혼부부였다. 정말 오랜 만에 동네 처녀가 동네에 남아 시집을 갔으니까.

 

   종형이 결혼했을 때는 서울올림픽에 대한 열광으로 온 나라가 들끓던 때였다. 이순규는 아직 고향에 있을 때였지만, 그 다음엔 곧 순천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들은 이야기다.

   종형은 농협대학 진학을 고려하고 있었어요. 집안의 장손인데, 아이도 태어날 것인데, 아부지 노릇 잘하려면 조금은 더 배워야겄제, 그랬답니다. 종수님이 적극 권하기도 했고. 그때 농협대학에 농업조합학과 말고 농공기술과가 생긴다고 해서 좀 편하게 준비해도 된다 했었고. 그 사고 이후로 결국 다 깨어졌지만. 그러니까 그 사고라는 것이. 제가 어찌 자세히 안답니까. 맘 찢어지니 집안에서도 쉬쉬하는 것인걸. 만삭은 아니지만 아무튼 임신 후기에 시멘트로 된 바깥층계에서 실족한 것이 그만. 그렇게만 알죠. 고흥으로 나오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 아녀요. 수술도 못해보고. 지금이야 바로 내나로도로 이어서 포두면으로 연육교들이 개통되어 있으니 일도 없지만요, 그땐 보건소 여직원이, 대개 간호사죠, 발을 동동 구르며 함께 이송 중이었지만 사람을 영 놓쳤다는 것 아닙니까. 종형의 인생이요? 더 말해서 뭐해요. 남들 장가도 안 든 나이에 상처라니, 것도 거의 두 생명을 함께.

   그러니 어떻게?

   전설이랑 같지요. 외나라도의 절경 중 하나인데, 곡두여 이야기 모르시죠. 당연히 모르시겠지요, 서울 양반이니.

   서울은 무슨, 저도 서울 촌사람이죠.

   곡두여 전설이 그냥 전설이 아니라요. 그곳 바다 밑이 고르지 않아서 지금도 비바람 모진 날에는 위험하죠. 가끔 항해주의보가 떠요. 그러니까 바닷길 건너 시집 장가가다 풍랑 만나서 빠져죽은 신랑신부의 원혼이죠. 거기 신부가 탄 가마가 벌러덩 누워있는 형상의 작은 섬, 그 반대로 뾰쪽하니 솟아 신랑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섬, 암튼 두 개의 무인도이지요. 거기 도시에서 낚시꾼들이 찾아들곤 하는데, 강성돔인가 그런 것 철 따라 잘들 온다는군요, 그런 낚시꾼들이랑 어울리지 않으려고 이상한 곳으로 낚시만 다녀서 큰어머니 애간장 좀 녹였었나 봅디다. 그러기를 십년 넘어, 그래요, 근 십오 년, 겨우 마음을 잡고 생전에 종수씨가 권했던 농협대학 일로 알아보려고 서울에 갔다가.

   그러니까 서울서 만난 조선족이었군요. 결혼소개소가 아니라?

   그게 마찬가지요. 둘이가 서로 결혼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으니까.

   누군들 필요에 의해서 결혼을 하지, 안 그런가요?

   아니, 종형은 재혼 권유에 시달리고 있었고, 지금 종수가 된 조선족아가씨는 한국 사람과의 결혼이 꼭 필요했겠죠. 하북성 천진에서라던가, 사촌언니 한 사람이 암튼 중국 업체와 한국 무역상들을 연계하는 가이드로 일하면서 꽤 잘나가는 또순이였던 모양입디다. 그런 걸 괜히 한국 무역상들이 바람을 넣어가지고 한국으로 왔는데. 중국어 하나로 충분했던 사업이 한국에 오니까 조금 달랐겠지요, 한국어도 배워야 했고, 그래도 다시 돌아가기에는 한국물이 좀 들었겠어요? 양고기 구이 식당을 낸 언니는 사촌동생을 어찌어찌 초청해 와서 데리고 있는데, 이 동생은 장사 체질이 아니라 힘들어 하고. 암튼 종형 입장에서는 초혼도 아닌데, 결혼이 필요하다는 사람하고 결혼해보자, 뭐 그런 심정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조선족도 민족은 같으니까 국제결혼은 아니다 싶기도 하고. 예상 밖으로 튼실한 사람이었던 거죠. 서울에서도 북쪽에서 만나서 한반도 남쪽 끝까지 따라나선 걸 보면,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낸 걸 보면. 서울에, 그러니까 고양시에 사촌이 살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위안이겠죠. 어쨌거나 한국에 혈혈단신 시집오는 동남아 등지의 여성에 비하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산에 올라갔던 길이라지요, 삼송역인가 무슨 역에서 갈아탈 버스를 잘 못 타서, 몇 정거장 다음에 분명 농협대학이 나와야 하는데, 한참을 가도 안 나오니까 두리번거리던 참이었나 봐요. 그러다가 ‘필리핀참전비’라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정류장 말이 들려서 무조건 내렸더래요. 농협대학 길이 아니니까 일단 빨리 내리려고. 거기 그 이상한 지명에 내려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그만 하세요, 슬쩍 무서워지는데요. 으슬으슬 비 내리는 오후는 아니었겠지요?

   왜 아뇨. 암튼 처녀 한 사람이 달랑 눈에 뜨여서 길을 물으려고. 그런데 그 처녀가 잽싸게 어떤 식당으로 들어가더래요, 혼자서. 종형의 입장에서는 혼자서 식당으로 들어가는 처녀도 이상하려니와 간판에 양고기라 적힌 것이 희한해서 자기도 모르게 따라 들어 갔더라나. 자세히는 모르죠. 암튼 그 조선족 처녀가 종수가 되었으니.

   그럼 농협대학은 그대로 잠잠해졌고요?

   예, 아무래도 종형은 학교하고는. 허나 이번엔 행운의 기회가 된 거죠. 자세한 건 몰라요. 우리 집 남자들 내력이기도 하고, 뭔 말을 안 하지요. 누군들 속내를 아나요. 지금은 묵묵히 가업을 이어가죠.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났죠. 종수네 친정엔 딸들만 줄줄이 있었다는데, 그래서 슬펐고, 종수는 아들을 먼저 낳아서 겁 없이 아이들을 낳았더래요. 애들 씩씩하게 낳아서 씩씩하게 기르고, 씩씩하게 일하고, 무서운 것이 없다느만요. 흔히 말하는 결혼이민자의 문제 같은 건.

   웬 사설을 오늘 이렇게.

   한샘, 좀 들어 봐요.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가 한정 없어요. 그러던 차, 내 동생 놈이 말이오, 내가 서들어 필리핀으로 연수를 보내놓았더니.

   설마, 이번에도?

   예. 이 녀석이 군대를 연기하고 또 연기하고 그러다가 졸업을 딱 한 학기 남겨 놓고 군대를 간 거예요. 군대를 마치고는 명색은 짝 학기 복학하면 취업문제가 복잡하다는 핑계인데, 복학을 안 하고 놀고 있는 거예요. 서울에 데리고 있을 처지도 아니고, 강의 맡기 시작한 첫해인데 고시방 생활일 때라. 그래도 형이 대학 강사인데 싶어서 필리핀으로 단기 연수를 보냈죠, 그랬더니…….

   아, 이번에도 결혼정보회사 그건 아니네요 뭐.

   그게 그리 다른 건 아닙니다. 국제결혼은 국제결혼이에요. 피가 섞이는 겁니다. 아무튼 거기 병원에서 간호대학 실습생을 만났다는데, 어떻게 가톨릭 신자라더군요. 필리핀에 가톨릭 신자가 많다고는 들었지만, 우리 선입견으로는 우리만 못한 곳 아닌가요. 그런데 참 개화된 여성이죠, 동생이 한국에 돌아와 복학해서 나머지 한 한기 마치고도 계속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이 필리핀 처녀가 한국으로 쫒아 온 겁니다. 그렇게 개방된 곳이 필리핀이더라고요. 그곳은 흔히 국제결혼 때 신부집에 주는 거금을 요구하는 부모들도 없고, 딸만 행복하면 된다는 식이라더군요. 모르죠, 그 집만 그랬는지. 결혼 후에 이곳 간호사 자격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잘 몰라도, 아무튼 보건소에서 보조원으로 일도 하고, 우리말도 엄청 잘 한다네요, 결혼이민자 대상 한국어 강사노릇도 한다니 뭐. 면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무료강의이지만, 듣는 사람이 무료고, 강사료는 제법 받는대요. 큰어머니가 자랑삼아 하시는 말씀 얼핏 들으니, 우리들 강의료나 별반 차이가 없어요.

   설마.

   대학 강의료가 어디 문화원 같은데 강의료만 못하기도 하니까요. 비문해자 대상 국어강의 같은 것들. 우리들 상태라고 하는 것이 사업소득세를 납부하는 소득자이면서 방문판매자나 우유배달인과 동급의 자영업자죠.

   설마 자영업?

   한탄할 것 없소이다, 자영업이죠, 교육자로 분류되고 싶으시다? 알아서 하시지요. 오늘은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라니까.  동반자 구함.

   동반자?

   아니, 종형이나 암튼 고향 식구들 이야기요. 종수씨나 제수씨가 그렇게 행운을 가져오니, 마을 사람들은 단번에 국제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우려를 걷어냈죠. 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잘 살고 있는 국제결혼 짝들 이야기가 매주 나오고 그러잖아요. 우리 동네에선 아주 다 같이 반기는 프로그램이 되었답니다. 전에 일용엄니 나오는 프로그램 마냥.

   전원일기요?

   그게 무슨 전원이라요! 전원이라고 하면 어디 그냥 단어 그대로 논과 밭이라는 뜻으로 들리나요? 비록 청빈하다 할지라도 한가롭고 어딘지 낭만이 묻어나잖아요? 실제 논두렁 밭두렁 사이의 삶은 전원과는 별개요. 말 그래도 흙탕이지, 두엄 속, 아니 그 보다도 못한 화학비료와 싸한 농약냄새. 어머니들은, 아니 여자들은 향기가 따로 없지요. 향기는커녕 형태도 없지만요.

   형태가 없다뇨?

   형태가 없지 그럼. 농어촌 여자들이 형태가 있소? 킬힐은 아니더라도 일단 굽이 있는 신발에 달라붙은 내복 같은 걸로 다리를 가리면 형태가 쫘악 나오질 않소. 농어촌 여자 누가 굽이 있는 신발을 신는단 말이오. 그러니 여자는 아니지요.

이샘, 참 이상한 분이시네. 기껏 고향 이야기라서 참고 있었더니, 여자들 킬힐 이야기시라면.

   아, 물론 죄송합니다. 헌데 고향 여자들도 여자들인데, 여자들 이야기를 할라치면 하이힐은 빼고서는 어찌. 단도직입적으로 여자는 하이힐에서 탄생된다 이거 아닙니까!

   치우세요, 그만. 이샘과 여자들 형태 이야기를 할 군번은 아니외다.

 

   이 사람이! 하고 전화를 끊으려다, 우선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숨을 죽이고 듣고 있으려니 수화기를 놓은 줄 아는 모양이다. 한참 타령인데, 이쪽에서 듣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는 어조다. 에이, 한금실, 이렇게 쌀쌀 맞으면 내가 어떻게…….

   그쯤에서 정말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살짝 후회했다. 내가 어떻게…… 다음을 들어둘 걸 그랬나 싶어졌기 때문이다. 어쩜 그 다음을 속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에 필시 이 사람이 내게 조금 기대려는가 하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아서면서 생각하니까 다만 이야기를 계속할 사람이 없어져서 답답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누구라도 한번 빗장을 열면 그 속의 전부를 털어내고픈 순간이 있지 않겠는가. 정말 뜨거운 물이라도 마셔야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왜요, 한샘! 왜 하루 저녁 전화를 못 받아주시는 거죠?

   아예 시비조에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정말 수화기를 내려놓든지 해야 할 터인데, 나는 가만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해버려야 한다, 누구라도.

   이샘, 또 웬일이세요. 아직 이야기가 남았어요?

   예, 아직. 아까 말처럼 종수씨와 제수씨가 잘 살아주니까.

   그럼 좋은 일이겠죠.

   아니, 그게 다가 아니라, 둘째 종형이 마저. 마저 국결을 선택한 겁니다, 이번에는 결혼정보회사를 통해서. 그게 그리 무서울 것이 아니니까요. 헌데 그냥 조선족이나 필리핀 누구 하나를 더 알아보든지 할 것을. 첨엔 그리도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두 사람이 되면 저울이 안 맞다고.

   저울?

   아, 그게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혼자인 사람이 더 외롭다고. 그러니까 조선족 둘, 필리핀 하나, 그렇게 되어도 그렇고, 그 반대도 그렇고. 그러니 공평하게 다른 나라 사람으로 결혼정보회사를 찾았답니다. 그렇게 해서 베트남 아가씨가 시집을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동네사람들이 사람 이름을 부를 생각은 않고 중국, 필리핀, 베트남 그렇게 부르는 것이오. 시집온 순서대로, 결과적으로 나이대로. 그런데 베트남이…….

 

 

   이름

 

   아닌 밤중에 이순규가 토해내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내가 이해한대로 정리해 두고 싶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 핵심은 정리해 놓은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면 알게 되지 않겠는가. 아무튼 베트남 신부의 경우를 이야기할 때쯤엔 이야기하기가 좀 힘들었었던 모양이다. 이야기가 자꾸 끊어졌고, 그것은 그가 전화 저편에서 소주잔을 홀짝거리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베트남 신부가 시집을 올 때에는 결혼정보회사에서는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응우엔 티 탄죽 - 그렇게 써서 혼인신고를 마쳤지만, 어느 것이 성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응우엔이 성이고 나머지가 이름이라 해서, 티 탄죽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아니고 탄죽이면 되는 모양이었다. 티는 여자이름이라는 뜻으로, 누구에게나 붙어있는 이름이라 했다.  그러니까 그냥 탄죽.

   탄죽이 뭐냐. 그 여동생 이름이 죽느안인 걸 감안하면 그보다는 나은지 모르겠지만, 탄죽이라니. 왜 트엉, 완 또는 람 등으로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오는 이름도 아니고. 하필 탄죽? 죽이 타면 뭐가 될까?

   아무튼 탄죽은 그나마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긴 손위 동서도 사람들이 이름을 무시했다. 명화는 분명 한국식 이름이었고, 조선족인 그녀를 굳이 중국식 발음인 밍화라 부를 필요가 없는 데에도 그랬다.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저 ‘중국’이 이름이었다. 탄죽의 이름은 ‘베트남’일 뿐. 그녀들은 그냥 중국, 필리핀, 베트남이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베트남이 무척 힘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겉보기엔 조용했더라도. 조용하더라도.

   베트남은 무엇보다 나이가 어렸고, 어린 사람은 확실히 의지보다는 감정이 성하다는 것이 드러났단다. 외로움을 타고, 다른 여자들, 중국과 필리핀에 비해 말 수가 너무 없었다. 문제를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으로 전화를 해대지도 않았고, 베트남의 어머니를 초청하겠다고 조르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아주 어려서 떠나버렸단다. 베트남도 남자가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릴 수 있는 나라인가? 아무튼 어머니뿐이었고, 어머니는 여행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병을 얻은 어머니의 병원비만 송금하면 그것으로 참았다. 어머니가 걱정이겠지만 고향에 가고 싶어 하는 내색도 없었다. 다만 갑자기 겉늙은 아주머니 꼴이 되어가는 것이 이상했다.

   어메, 베트남은 밥도 안 묵나? 한국 음석이 안 받는당가?

   어메, 베트남은 언제 애기 갖는당가?

   참말로, 살이 좀 붙어야 애도 서는 거인디. 애가 생겨야 확실히 살겄제.

   확실히 살다니? 젊은 새댁이 아이가 얼른 생기지도 않자 불쑥 의심들도 튀어나왔단다. 아주머니 몰골인데 미숙아 같은 것. 미숙아 상태에서 아주머니가 된 듯. 형님네가 낳아놓은 세 아이들, 그리고 한 해 전에 결혼한 사촌동서가 연년생으로 낳은 두 아이들 틈에서 베트남은 그냥 덜 자라고 늙어버린 아이 같았다. 아이들은 앞집으로 뒷집으로 깔깔거리고 다녔고, 형님과 동서는 아이들 따라 소리 지르며 달려 다니며 부산했다. 소리를 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녀는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아무도 그러는 줄 몰랐다.

   탄죽이 시집왔을 때 사람들은 외톨이 외국인이 아니라서 쉽게 적응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녀 자신은 오히려 힘들었다는 것. 집안사람들이나 동네 사람들이 아무래도 별로 배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 왜 다들 알아서 잘 적응하고 사는 조선족 며느리와 필리핀 며느리를 봐왔기 때문에, 무엇이 어려운지, 심지어 말을 잘 못하는 것조차 고려를 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 살이 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드디어 아기 소식이 생겼다. 삼 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엄마보다 더 까무잡잡한 여자아기가 태어났다. 웃음기 가득한 실눈인 아버지를 닮아서 눈이 퀭한 엄마 모습은 없었다. 퀭한 눈에는 실망의 빛이 어른거렸다. 아들을 원했을까? 사람들이 아들을 원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아들을 원했을까? 그래서 지금 둘째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 자식 사랑이 애틋한 것이 베트남 사람이라고 하니, 아들이고 딸이고 더 바랄 것이다. 더구나 형제자매가 단출했던 서러움으로 아이를 더 많이 원할 것이다. 죽느안, 그 여동생 하나가 어머니 곁에서 병든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을 뿐이니까. 어쩌면 형제자매들이 많았다면 한국에 시집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으로 시집오는 것은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이었으니까. 안쓰럽게도.

   그러면 정말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심정이었겠지. 너무 흔한 비유다,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인접국가의 여자들이 이곳 한국의 농촌이라는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가? 농촌에는 용왕이란 없는데.

  

   나는 교양한국어 강의에서 만나는 외국학생들의 얼굴에서 청운의 뜻만 읽었다. 체류외국인이 140만을 넘어선 지금의 한국 땅. 여기에 얼마나 많은 심청이들이 살아가고 있을까. 또 얼마나 많은 부모가 한국으로 흘러들어 고국의 자녀들을 부양하고 있을까. 만주의 조선족들의 경우 절반도 넘는 가정에서 사람들이 한국으로 떠나와 있다고 한다. 떠난 한쪽 부모가 결국 한국의 양풍에 젖다보니…… 불륜에 이혼에, 남겨진 아이들은 어머니를 그리며 고모나 이모집으로 떠돌다 결국 기숙사 학교로 보내지고. 부모들이 떠나는 경우보다는 명화 씨처럼 처녀가 한국에 시집오는 경우가 훨씬 바람직하다. 조선족 형님에 비해, 용감한 필리핀 동서에 비해, 베트남 사람 탄죽의 경우는 사뭇 다른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말이 우선 서툴렀으니.

   그런데 말을 잘 못하는 것도 고려를 하지 않았다?

   무슨 뜻인가 들어보았더니, 별로 말을 걸지도 않았다는 말이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이 원래도 여자이름을 그리 챙겨서 부르는 습성이 아닌 탓도 있었을 것이란다. 시집온 새색시에게는 새댁이라면 통하고, 동네에 새댁이 겹쳐 들어오면 아무개네 새댁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들 이름은 아예 아이엄마이니까. 이제는 딸아이의 이름 따라 진주엄마다.

 

   그거야 이순규네 고향만 그러는 건 아니다. 한국 어딜 가도 맞대놓고 사람 이름 부르는 일이 적다. 어릴 적 기억을 해 봐도 어머니조차 ‘금실아’ 하고 이름을 많이 불러주진 않았던 것 같다.

   울 애기, 잘 다녀왔어?

   아가, 너 그렇게 꽁하면 못쓴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말을 하실 적에도 그랬다. ‘우리 금실이가’ 라고 하는 대신에 ‘우리 큰애는’ 이라고 하실 때가 대부분이었다. 학교에 가서야 이름 석 자로 불렸다. 한금실. 발음 때문에 황금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어려선 그런 뜻인 줄 알았다. 금실. 금빛이 나는 실. 그런데 한자로 쓰면 달라진다. 금으로 된 방, 최고로 좋은 방이다. 동생들이 줄줄이 은실과 옥실이다. 그 다음에도 여동생이 있었으면 어떤 이름이었을까. 설마 청실홍실이었을까. 그보다 어차피 시집가면 시댁 성씨 따라 김실이 박실이 등으로 불릴 우리들에게 왜 미리 ‘실’자를 붙여 이름을 지으셨을까? 나는 금씨에게 동생들은 은씨 옥씨에게 시집을 간다면 이름이 그대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시집을 안가서 여전히 금실인데, 둘째 은실이는 김실이 되었다. 금실이 김실이 소리가 헷갈릴 즈음해서 나는 한박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한박사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한박사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김실이 우세해서다. 그 대신 은실인 사라졌다.

 

 

   한박사

 

   나는 한박사라 불리자마자 곧 하현달로 접어들었다. 초승달에서 반달까지, 그 반달에서 보름달까지는 누구나처럼 꽃피어나는 시기이다. 내게도 화려하지는 않으나 어쨌거나 한 작은 꽃에 비유하더라도 괜찮을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굳이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라고 읊지 않더라도, 꽃 한 송이는 많은 눈물겨운 양분들로 피어난다.

   그 나름대로 힘든 세월에 대한 대가가 박사라는 이름이면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다 그것 또한 한쪽의 시각이란 것을 깨달았다. 한번은 모교에서 정반대 편 다른 대학까지 급히 택시를 타고 가야할 일이 생겼다. 그때 운전기사의 질문이 삐딱하게 나왔다.

   거, 학생은 아니시겄고, 강사요 교수요?

   아니, 그거야.

   아, 거 강사든 교수든 하니까 대학교에서 대학교까지 택시를 탈 것 아니요! 그러니까 외국서들 박사까정 해 오시고. 이런 말 좀 뭐 하지만서도, 그런데 우린 영 맘에 안든 것이 있거덩요. 내가 지금 한국 들어온 것은 얼마 안 되고, 배를 타던 사람 아니오. 원양선박 말이오. 안 돌아다녀 본 데가 없는데 그게 참. 한국선원들이 항구에 내리면, 어딜 가나 한국여자들이 나온단 말이오. 그런데 니스 항에서는 - 그 말을 듣는 나는 얼마나 놀랐었던가, 하필 프랑스라니 - 놀라운 세상입디다. 그때 나온 야무진 여자가 하는 말이, 자긴 원래 그런 여자가 아니라 유학생이라요. 내 그 말에 더욱 놀랐거덩요. 아니 그런 데 돈 벌라고 내놓고 나간 여자라믄 그렇다 치지, 한국서 나갈 때는 유학갑네 해 놓고서 그런 델 나오니, 거기 놈들하고는 그런 짓 안 하겄소 어디. 유학 가서 박사 따왔다 하면 누가 그런 상상이나 하겄소. 내 딸은 절대 유학 못 보낸다! 우리 다들 그러고 왔거덩요.

   아니 뭐 그런 심한 말씀을.

   그러다 운 좋게 거기 놈 꼬셔서 박사 대충 해가지고 나오는지 누가 알겄소.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녀요.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사람이니까. 아니, 그보다 그 유학생입네 했다는 사람이 정말 유학생인지 기사님이 아셔요? 아무도 모를 일이죠. 괜스레 죽어라 공부하는 유학생들…….

아, 거야 그렇지요. 그런데 그 여자 똑똑한 폼이 유학생 맞아보였어요. 프랑스말로 거기 사람들이랑 똑같이 야무지게 허덩걸요. 박사 아니라 뭔가라도 헐만 헌 여자여서.

   그렇다고 그리 다 뭉뚱그려서 말씀하시면.

   그냥 말이 그렇다 그 말이요. 한국 돌아와서 박사님! 소릴 듣고 있을 사람 중에 행여라도…….

   그런 걱정일랑 마셔요. 그렇게 한가하게 돈 벌어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이 공부가 아니니까요.

   허긴, 그런 사람이 박사 따기까지야 허겄소만.

  

   그래도 그런 엉뚱한 험담까지 들어가며 이 대학 저 대학을 오가던 시절이 행복한 만월의 시절인 것을 그땐 몰랐다. 조금 있으면 전임이 되어, 아니 강사 경력을 인정받으면 바로 조교수에 임용이 되어서……. 정말 보름달 같은 세월을 누릴 것으로 알았다. 그러니까 누구도 자신이 자신의 생에서 보름달에 와 있다는 것을 모른다. 보름달에 이른 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 나름대로 보름달인 것이다, 한 번은. 짧게라도. 내 경우는 해외파 박사로 귀국하여 안정적인 미래를 바라보며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쏟아내어 강의를 준비했던 그 시절. 밤이면 얼마나 정성스럽게 강의안을 준비했던가. 50분이면 50분, 75분이면 75분을 단 일이 분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서. 뚝배기보다 장맛이 좋다는 것은 옛말이다. 50분 강의면 낙타 등은 하나면 된다. 75분의 경우에는 쌍봉낙타의 등을 그린다. 하나의 초점으로는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전공강의를 준비할 수 있었던 시절은 갔다. 나는 물론 다른 강의를 시작했다. 걸음마 단계.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이것이 다른 보름달을 그릴 수 있을지는 완전히 미지수다. 거의 불가능이다. 이것도 비정규직이니까. 언제라도 그쳐야 할. 그러므로 보름달일 수 있는 시절은 갔다.

   그런 나날 가운데 우리가 그냥 서로 편하게 이박이라고 부르던 이순규는 실로 엉뚱한 하루를 선사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따뜻한 가정을 꾸린 형제들이 부러운 사람. 우린 말은 통했을까. 둘 다 멋모르고 죽어라 공부했고, 설 곳이 마땅찮은 어중간한 세대로서.

   이런 현상은 시쳇말로 글로벌한 듯, 유럽 어느 작가는 이를 ‘연구직 세대’라 부르며 그들의 비애를 소설로 써냈다. 많이 읽혔다. 『서른 살 제시카』인가 『예시카』인가…… 이름이 중요할 리는 없다. 한 마디로 좋은 학벌에 최고의 능력을 지녔고, 게다가 잘 빠진 서른 살 독신녀의 이야기. 그러고도 무보수나 작은 보수로 불확실한 직업에 종사해야 하는 젊은이들. 우리 사회의 스터디 룸펜족은 넘어섰을까. ‘고급두뇌 비정규직’과 비슷한 개념이다. 나라를 불문하고 인문사회학 분야에서는 이러한 연구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정식으로 취업되기가 어렵다. 주인공은 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여성주의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대도시의 원룸에 살면서 자원 형식으로 여성신문에 <섹스와 유행>이라는 테마의 기고를 연재하고 있다. 전통적인 표상으로는 벌써 가족을 꾸렸어야 할 나이이지만, 학위와 실습에 외국여행 경험까지 두루 갖춘 그녀가 경제적으로는 부모에 의존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전형적인 실패자 모습. 이 젊고 예쁜 여자는 교육의 결과로서의 확고한 지성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신의 일상이 주는 통속성에 굴한다. 이상적 몸매를 잃을까 걱정하는 피트니광이고, 유행을 따르는 경박함에, 마스카라를 떡칠하는 여자.

   그래, 나는 적어도 마스카라를 떡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년을 기다려 전임자리가 났을 때 마스카라를 떡칠한 후배에게 덜컥 고배를 마셨다. 이 나라에선 마스카라가 통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 때문이 아니다. 유연성 없는 답답한 내 좁은 소견이 나를 제자리걸음하게 하는 것이리라. 전임 경쟁에서 밀려 모교를 떠난 이후로도 제자리걸음은 여전하다. 아니 거의 후퇴의 지경 아닌가. 해마다 신진 박사들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강의시간 지키기도 어려운 형편이니. 내가 누군가의 메모 쪽지들에 붙들려 그것을 소설화 하려고 고심했던 일도 결국 또 한 번의 자발적 후퇴인지도 몰랐다. 그 일을 마치 과제인 것처럼, 아니 나의 절대적 과업인 것처럼 착각하는 동안 제법 치열한 작업에 바깥 세월을 잊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업을 마치거나 내 화면은 늘 바닥으로 돌아간다. 배승한의 메모들. 그에게서 더 이상 소식이 없는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멈춰버렸다. 하지만 폐부는커녕 머리에서도 나오지 않은 글을 어찌 쓴단 말인가.

 

*

 

   마치 외도처럼 일기를 한 장 쓰는 데 실은 한 달이 넘었다. 그러니까 일기가 아니다. 다만 정확성에 더해서 글의 리듬감과 독창성을 꾀한답시고 이 파일을 완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를 넘길 수는 없다. 섣달그믐에는 이 파일을 닫으려고 한다.

   또 하나 열려있던 화면에는 아직 김용택의 시들이 떠 있다.

   밥풀 같은 눈이 내립니다. / 빈 들판 가득 내립니다 / 그러나 나는 아직도 / 당신으로밖에는 채울 수 없는 / 하얀 빈 들을 거머쥐고 서서 / 배고파 웁니다.

  

   빈 들 - 빈 화면이 오버랩된다.

   실제로 눈이 내릴 겨울이지만, 근래에 눈을 본 적이 없다. 베란다 쪽 삐걱대는 유리문을 칸칸이 창호지로 발라 버렸기 때문이다. 세탁기와 가스레인지가 한꺼번에 들어있는 그곳을 통해 세상으로 향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너머 창밖이 보일 리가 없다. 희멀건 빛으로 또 하나의 새벽이 밝아오는 것을 느낄 뿐이다.

 

...........................................

「일기」『가로 사람 세로 인간』, 한국작가교수회, 2013, 29-57쪽

 

* 투고에서 출간까지 좀 시간이 걸렸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12. 19. 10:24

파도소리

  어머니이, 아버지!

  어머니는 부엌에서 나오시는 모양이 이른 저녁준비 중이셨나 보다.

  어떻더냐? 그래, 김 서방은 어떻더냐고?

  그게요, 아직 잘 모르죠. 검사다 뭐다.

  웬 검사? 몸이 부실해서 링건가 맞는다며? 은실이 어쩌고 있을꼬!

  그냥, 입원한 김에. 암튼 염려 마세요, 별일 없겠죠.

 

  아버지는 그날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5년째, 아버지는 은퇴생활에도 집에서 느긋하게 쉬시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일을 본격적으로 하시는 것도 아니다.

 

  아버진 어디 가셨나 봐요.

  늘 그러시지. 요사인 부쩍 정문리엘 가시는구나. 차로 가믄 사오십분이면 너끈할 걸 기어코 버스를 타고 가시니. 오산까지 올라갔다가 게서 또 내려가는 길을 왜 우기시는지. 뭔 볼 일은 그리 있으신지.

  아버진 정문리 좋아하시죠. 어머니가 밀양 박 씨인 것도 얼마나 자랑하시는데 그러세요.

  밀양 박은 다 열년가, 네 아부지도 참.

  열녀라서 그러나요, 일단 청주 한 씨와 밀양 박 씨 하면 뭔지 어울리는 건 사실이죠 뭐.

  밀양 박은 빼고, 한 박사나 들어가서 쉬려무나. 아니, 점심은 먹은 거야?

  예, 먹었지요. 시간이 언젠데요.

  그럼 어서 들어 가 쉬어. 네 아부지 오시려면 멀었다.

 

  어려서 ‘아빠 방’이라고 불렀던 건넌방은 언제 보아도 먼지 냄새 느낌이었다. 지금은 내 책상도 거기에 끼어 있다. 한국 떠난 4년 반, 돌아와서 보니 내 물건들이 건넌방 한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내가 프랑스로 떠난 뒤 은실이 결혼을 하게 되자 우리 자매들이 함께 쓰던 부엌 옆 상하방에 자연스레 신혼살림을 차렸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또 그 사이 더 큰 변화라면, 막내 옥실이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버지 바로 위가 우리가 서울 나가 살던 곳 고모이시고, 그 위 셋째 큰아버지가 일찍이 미국에 가서 정착하셨는데, 다 함께 회갑에 초청받아 갔다가 옥실이 거기 남은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설마 하면서 옥실을 남겨두고 오셨다 했다. 큰아버지가 너무도 간절히 원했고, 옥실도 스스럼없이 남겠다고 했더란다. 결국 버티어 냈고.

 

  아차, 그러니까 아버지는 한 해에 딸자식 셋을 다 어딘가로 떠나보내셨구나!

늦은 봄에는 내가 떠났고, 여름엔 옥실을 두고 오시고, 그리고 그 겨울 은실이 결혼을 했으니까. 은실이 결혼해서도 함께 지낸 것이 얼마나 위인이 되셨을까. 새삼스레 제부가 고맙다. 어서 퇴원을 해야 할 텐데.

 

  내 책상은 짐짝처럼 올려진 책들로 빼곡하다. 노트북을 올려놓으면 남는 공간도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고 질서정연한 아버지의 책장에 얹어둘 수도 없다. 오늘 따라 책장 맨 위, 먼지가 누렇게 깃든 족보로 눈이 간다. 화성시 양감면 정문리 마을에서 유래한 청주 한 씨 후손들은 양절공파에 속한다던가. 아버지는 은근히 정문리 충렬문에 대한 자부심이 있으신 편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상주목사 한 씨를 따라 자결로서 정절을 지킨 부인 밀양 박 씨를 기리는 충렬문이다.

 

  난 물론 요즈음엔 자주 집에 오지 않는 편이다. 아버지 보기가 어째도 늘 면목이 없다. 우리 셋 중 하나라도 아들이 되어드리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렇다. 아버지는 실제로 첫째인 내게 기대를 걸으셨던 것 같다. 더구나 은실이 대학을 포기했고, 옥실인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셈이니까. 초등에서 시작하여 중등으로 옮기시는 동안 힘드신 기억들을 떨치고, 딸애는 보다 확고하고 늠름한 학교에 남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한때는 아버지 은퇴 전에 내가 자리를 잡게 되리라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런 희망을 아예 접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책상 위에 덜렁 공책 한 권이 놓여있다. 읽다 둔 책처럼 종이가 끼워져 있다. 아버지가 책갈피로 쓰시는 종이들은 다양하다. 약간 두께가 느껴지는 종이들을 버리지 않고 적당히 오려두신다. 이를테면 광고지도 거기에 해당된다. 사용된 봉투들도 마찬가지다. 거기 노란 봉투를 잘라낸 종이가 끼워져 있는 공책. 나는 겨우 노트북을 올려놓았지만, 이상하게 시선이 자꾸 아버지의 공책 쪽으로 간다. 내 책상과의 경계 쪽에 놓여서 열어주기를 재촉하는 듯한 환상에 젖는다. 나는 유혹에 굴하고 만다.

 

*

 

  파도소리는 그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은실이 대입에 실패하고 집에 처박힌 겨울을 뒤로하고, 3월엔 다시 기지개를 켜게 하려고 탐색 차 서울에 나갔던 차였다. 은실을 데리고 개학 전에 입시학원 등록도 하고, 아무튼 다시 서울로 나갈 수 있게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양재동 누님도 은실일 그렇게나 챙기셨다. 서초동까지만 가면 좋은 학원들이 엄청 많다고. 그날 은실인 어디서도 건성만 같아 보였다.

 

  갑자기 새로 완공되어가고 있다는 그 다리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은실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새 다리가 완공되기 전에, 아무튼 잊을 건 잊고 털 것은 털도록. 과거는 과거의 그 자리에 두어야 쉽게 잊힌다 싶었고.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8분경.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 붕괴. 우리 아이들이 그보다 15분 쯤 늦게 8시를 막 지나서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10분 15분의 간격은 찰나에 비하면 영겁이지만, 영겁에 비하면 찰나다. 은실인 지각하더라도 언니와 재잘거리며 같이 가려고 늑장을 부린 통에 살아남았다. 꾸물대다가 지각을 자주 했다는 은실이 고맙고 아슬아슬하다. 은실이 지각하지 않게 언니인 네가 함께 서두르라고, 늘 큰애를 다그쳤던 일이 생각나서 바지를 적실 뻔 했다. 녀석은 결국 고등학교 시절 내내, 아니 그 다음에도 울렁증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아니, 고등학교를 미리 서울로 내보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금실인 아무 일 없이 대학엘 들어가지 않았나. 큰애 혼자 내보내느니, 아무리 누님 댁이라지만 둘이 함께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누님도 이상하게 은실이랑 함께 보내라고 극성을 떠셨다. 하긴 뚱하다 싶은 큰애만 보내놓으면 혼자 사시는 누님이 아무 재미도 없으실 것 같기도 했었다. 후회가 무슨 소용, 은실이 고등학교 생활을 망친 건 아무래도 이 애비 탓이렷다.

 

  다시 찾아본 다리, 새 다리는 교하 공간이 넓어서인지 미완성인 그 자체로 광활한 한강수면에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강물은 여전했다. 아니 여전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날의 피를 삼킨 물은 아닐 터. 무심한 강물.

 

  파도소리는 그 강물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날의 강물이 씻기고 씻기어 내려난 천 날의 시간들. 밤낮으로 우는 탄식 소리가 어디로 흘러들었겠는가. 이제는 먼 바다에 흩어져 먼지만큼도 핏방울을 지니지 못한 채 흩뿌려졌더라도. 핏빛 물소리는 지금도 거슬러 올라와 강가의 아비어미의 귓전을 때리리라. 그날이면 그곳을 찾아 목이 찢어지게 뿜어내는 통곡도 눈이 찢어지게 흘리는 눈물도 다시 강물에 섞이어 뒤따라갈까?

 

  등 뒤로 학원들의 안내장을 힘없이 쥐고 있는 은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딸이, 여기 내 곁에 서있는 내 딸의 모습이. 우리는 뒤돌아서 서둘렀다. 계획으로는 뭔가 맛있는 것이라도 사 먹일 양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쫒기는 듯 집으로 내달았다. 파도소리가 뒤따라왔다. 한강물이 파도쳐 넘실거릴 리가 없는데, 그것은 분명 파도소리였다. 파도소리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리는가 싶었다.

 

  강남 길로 해남 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 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바람 소리 파도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올 뿐~

 

  밤새, 그 이튿날도 파도소리가 멎질 않았다. 온 세상이 파도소리로 뒤덮였다. 소리를 막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돌발성난청입니다.

  동네 이비인후과의 나이든 의사의 말이었다.

  보통 한쪽 귀에 이런 일이 오는데, 돌발성난청입니다. 큰 병원에 가셔서, 입원치료를 시작하세요. 응급상황입니다.

  의사는 밀려든 다른 감기환자 치료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큰 병원에 가는 날엔 두 애들이 다 따라나섰다.

  큰 병원에서도 단 한 가지 검사, 그 흔해 빠진 청력검사 하나를 했을 뿐인데, 약간 애송이로 보이는 초진의사 말도 이 질병은 바로 이비인후과의 응급상황이란다, ‘물론 죽고 사는 일’과는 무관하지만. 이런 증상이 언제부터냐, 혹시 다른 병원에서 대강 치료받은 적이 없냐는 등을 두어 번씩 묻고 다짐받고서 그가 하는 말이 진지했다. 돌발성난청은 거의 대부분 노년과 관계없이 이유 없이 찾아들고, 결국 문제는 스트레스일 가능성이 높지만 심지어 1/100 쯤은 뇌종양의 가능성도 있고 또……. 이유야 어떻든 간에 치유되는 확률은 발병 일주일 이내에 시작했을 때에도 1/3 수준이라는 것. ‘난청’이란 듣기 좋은 말이고, ‘청력상실’ 그러니까 귀먹을 확률이 더 높은 질병이란다.

 

  질병이란 단어가 내 남은 귀를 의심케 했다. 내 의식을 흠집 냈다. 또 질병이라면서 치료해도 별 소용없을 수 있다는 말도 이상했다. 절대로 죽을병도 아니면서 치료확률이 절반도 안 되는 질병이라니 진짜 웃겼다.

치료방법은 입원해서 일정기간 강도 높은 스테로이드 주입식이 최선, 다음이 통원치료로서 일정 시간에 귓속에 직접 소량의 스테로이드를 주입하는 방식이란다.

  최선은 지금 입원 하시는 방식입니다!

 

  입원? 방학 잘 지내놓고서 신학년도 개학 첫날 입원하겠다는 말이 나올까? 안 된다, 못한다. 또 갑자기 2주일을 쉬게 되면 담임이며 수업은 어떻게 되는가? 요즈음은 고2도 이미 입시 체제다.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학기 초 2주 병가는 마음 무거운 일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귓속에 약물을 주입하고서 비뚤게 누웠다. 아마 약물이 잘 들어가도록 하는 조치 같았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 느낌이 문제였다. 돌아오는 길에서부터 애들은 입원치료가 마땅한 것이라고 종알거렸다. 은실이 더욱 졸라댔다.

 

  밤이 깊어갈 수록 치료받은 귓속에서 버걱대는 소리는 무서웠다. 파도소리를 넘어 날개달린 벌레가 파닥거리는 소리였다. 바퀴벌레 새끼가 알에서 깨어나는가? 겁이 났다. 어색한 미봉책을 다 참고 입원을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입원하러 가는 환자라지만 멀쩡한 사지육신이라 어딘지 어색했다. 아내 보기도 그렇고. 아무튼 보호자가 필요 없는 환자였으니까.

 

  병실은 식구들을 돌려보내고 혼자 남게 되자 오히려 호젓함으로 편안했다. 앞 침대의 환자나 병실에 들락거리는 인력들은 관계가 아니어서 편했을까? 방해받는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 신기했다. 그보다는 오른 쪽 세상, 내 귀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상이 방해였다. 온갖 소리를 섞어서 몇 성부의 음악일는지.

 

  노트북 앞에 앉아 보았다. 학교랑 연결은 되어야지 싶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담임을 떠맡게 된 동료선생님에게도 인사라도 쓰고. 아니, 인터넷이 안 된다. 치료 장비들에 대한 보호라는 미명에 노트북을 쓸 수 없다니. 복도 한 켠 휴게실 구석에 동전 넣고 쓰는 컴퓨터에선 가능하단다. 각종 질병과 환자들로 뒤범벅된 병원에서 공동으로 컴퓨터를 쓰라고? 그래도 이메일 정도는 확인해야겠다 싶어서 컴퓨터 쪽을 기웃거렸더니 두 대 다 젊은이들의 차지였다. 온 세상은 붕붕거리고 머릿속은 혼란하고…….

 

  바깥쪽으로 시선을 돌려 한 시간여를 들락날락하다가 드디어 한 쪽 컴퓨터에 않았지만 웬걸, OO학교를 치려는데 ‘교’자에서 ‘ㅛ’가 들어가지를 않았다. 어찌어찌 홈페이지엔 접속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로그인 이름자에서 ‘ㅗ’자가 먹지를 않았다. 시간은 6분, 7분이 지나는 데도 끄떡없다. 하릴없이 10분이 넘어가자 분통이 터졌다. 사방이 분통 나는 세상이다.

 

  밤이 늦었다 싶었는데 담당의가 간호사실로 불러낸다. 엠아르아이 결과 내 뇌 속은 깨끗하다고 했다. 살았다. 뇌와 혈관이 나이에 비해서 젊다면 젊은 편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는 뇌졸중의 위험은 낮은 사람이다. 혈당이 올라도 혈압은 오르지 않고, 그러니 심근경색으로 죽을 확률도 낮다. 복장이 터져서 복막염 수술을 하게 된다면 몰라도.

 

  치료방식에 관련하여 자세한 설명을 한다. 스테로이드요법이란, 처음 4일간을 하루 한 번 80mg씩 투여하다가 차츰 줄여나가는 방식이란다. 스테로이드? 그건 간혹 욕심내는 운동선수들의 치팅용 약물 아닌가?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이 끄덕이고 있다가 들어오는데 오른 쪽 세상의 소리는 더욱 자지러진다.

 

 

  진단서를 들여다본다. 그 사이 첫날의 패닉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벌써 며칠 째인가. 진단서가 꼭 필요해서 발급받은 것이다. 정식 병가서류에 첨부해 제출해야하는 서류다.

 

  우측돌발성감각신경성난청. 한국질병번호 H91.2 - 뭐? 91.2 메가헤르츠로 들리네.

  상기환자 상기병증으로 1997년 3월 4일부터 3월 14일까지 입원치료 요함.

  의사 아무개. 동그란 도장/싸인. 네모다란 큰 병원 직인.

 

  나는 그러니까 천천히 주로 왼쪽 귀로 찾아오는 노인성 난청이 아닌, 특수한 난청의 습격으로 입원치료를 요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스테로이드를 팍팍 근육주사로 집어넣는 것은 ‘기’를 올리는 방식이란다. 이명과 관련해서는 타마민이라는 약물을 하루 2회 한 앰플 씩 생리식염수에 혼합하여 혈관에 주사한다. 전에는 피검사나 혈관주사를 맞아야할 때 팔의 혈관이 잡히지 않아 무진 애를 썼는데, 요사인 조금 좋아졌나 보다. 팔에서도 곧잘, 또 여러 번 찌르다보면 손등에 바늘이 꼽힌다. 또 타마민을 주사하는 바늘은 아예 팔 어느 한곳에 심어놓는다. 3일 동안은 그대로 바꾸지 않기 때문에 팔을 뚫리는 고통은 훨씬 줄었다.

 

  물론 주사요법이 만능은 아니다. 약물마다 병발하는 문제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이 스테로이드만 해도 평소 혈당이 높은 환자에게서는 혈당이 급격히 높아지는 문제가 병발한단다. 그것을 인슐린주사로 컨트롤해야하기 때문에 입원이 불가피하단다. 또 1/100 확률이긴 하지만 엠아르아이 검사를 해야 했다고. 왜냐고? 뇌 속의 청신경 주변의 작은 종양이 이러한 돌발성난청을 유발하기도 하는 거란다. 무섭다.

 

  하기는 그 어디에 속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입술에 조금 묻힌 만큼만 손상을 입은 것이다. 조금 우습게 보이면 어떠랴. 행동거지가 너무 바보 같다면 정년을 앞당기면 그만이다.

이제 입원 후의 내 몸은 내가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 나는 그저 낮에도 침대에 누운 채 과거의 파편들을 다른 사람 이야기를 읽듯이 되돌아보고 있다. 썩 괜찮은 일들도 많았다.

 

 

  수돗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운동장 한쪽에 있는 것 같은 공동 수돗가였다. 수학여행 중이었다. 화장실은 남녀가 있었지만 세면실은 그렇게 수도꼭지가 앞뒤로 여남은 개 씩 달린 공동수돗가였다. 여중학교에서 남교사들은 마이너리티에 속한다. 그때는 한참 젊을 때였고 교장선생님부터 여자인 교정에서 늘 어색한 기를 못 펴던 때였다. 젊은 수학교사는 담임 우선순위에 들기 때문에 담임을 맡게 되고, 또 담임을 맡다보면 수학여행이 따른다. 그날도 그렇게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입에는 칫솔을 문 채 수돗가 빈자리를 기웃거리던 참이었다. 학생들이 선생님이라고 선뜻 내주지는 않는다. 여학생들은 남선생님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줄줄이 세수를 하는 광경은 어찌 보면 너무 적나라했다. 목이며 발이며를 드러내놓고 문질러대는 장면은 자칫 외설스럽기까지 했다. 가능하면 먼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저 끝 수돗가 여자의 동작에 시선이 빨려갔다. 귀를 씻고 있었다. 귀를, 한참 동안을 귀만 문지르고 있었다.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다시 귓바퀴를 위아래로, 귓바퀴를 앞으로 숙이면서 뒷부분을, 귀 안쪽을 바깥에서부터 안쪽으로, 귓속을, 귓가를.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귀를 만졌다. 귀로 손이 갔다고 하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귀, 귀가 어때서 저리 빡빡 문지르나?

 

  귀가 어때서? 물론 귀도 코만큼은 아니라 해도 돌출부분이니 대충 씻다보면 손에 걸리고 그러면 씻긴다. 하지만 저리 공을 들여서?

 

  귀를 한정 없이 씻던 여자는 얼굴에 비누거품을 내어 박박 문지르기를 한참 하더니 이내 목으로 내려갔다. 가을이라지만 산간의 아침, 추운 공기에 노출되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얄따란 스웨터가 젖어드는지도 모르고 세수에 열중한 여자. 여자의 모습은 난생 처음 보는 깨끗함 그 자체였다.

 

  상대적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의 세계는 더러웠단 말인가! 그랬다, 나는 귓바퀴를 잘 씻지 않고 아내와 함께 잠들었을 나날들이 부끄러워졌다. 그 수학여행 이래로 나는 정말 잘 씻기 시작했다. 귓바퀴만이 아니라 온 얼굴에서 후미진 곳을 찾았다. 팔다리로 나오면 팔꿈치 안쪽, 팔목, 손등, 손가락들 사이, 발가락들 사이, 발가락과 발바닥이 붙는 곳, 발뒤꿈치, 발바닥 움푹한 자리, 복숭아 뼈 아래, 몸속에도 움푹하거나 으슥한 곳을 찾아 나섰다.

 

  어느 날 갑자기 온 몸을 후벼 씻는 내가 아내에겐 이상했었는지도 모른다. 바람피우고 들어온 남편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늘 씻어댄다는, 그런 속설? 아내는 의심을 키워 갔을까? 의심이 100% 틀린 것만도 아니었다. 내가 욕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산간 수도꼭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교무실에서는 오른 쪽 비껴 옆으로만 보이는 그녀의 자리를 향하느라 고개가 삘 지경이었고, 운동장 조회시간이면 어떻게든 그녀가 서는 자리가 잘 보이는 곳으로 내 자리를 잡았다.

 

  그 동안에는 왜 한 번도 그녀가 눈에 띄지 않았을까? 미녀도 아닐뿐더러 젊지도 않았고, 여자냄새 없는 그냥 보통 사람 같은, 조금 깐깐해 보이는 것 이상으로는 별다른 특징 없는 아줌마교사. 그녀가 내 눈에 띄었을 리가 없다. 결국 평상시에 단 한 번도 따로는 쳐다보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은 그날 새벽 산간의 수도꼭지 아래에서 내 망막에 입력되고 말았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떨림과 불안과 환희로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동 학년을 맡은 ‘우리’는 가끔 가까이 만날 기회가 생겼다. 교무실 내에서의 무심한 접촉 하나에도 전기가 일 줄을 누가 알랴. 무신경해보였던 그녀에게서 감춰진 섬세한 감각을 발견하고서는 얼마나 떨렸던가. 담임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예정이 발표된 그날부터 막혀오는 숨을 고르기가 고통스러웠다. 고통은 이상한 행복을 수반했다. 방향이 달라서 택시도 한번 함께 탈 수 없었던 나날들. 무슨 일이었는지, 학기말 성찬이 끝나고 동료들이 하나 둘 술이 취해서 흩어진 어느 날 밤. 추운 겨울 밤. 어려서 한 방에 들 수 없었던 오누이마냥, 어디 한 데 참새구이 집으로 유인한 나를 따라나서 준 그녀. 내 평생 알고 있는 멋진 위인들 인용을 죄다 끌어내어 멋있어 보이고자 했던 처절한 짧은 시간. 그녀는 그렇게 함께 택시를 타고 오고간 시간만을 허락했다. 그녀의 집께 이르러 따라 내리려는 나를 말리며 잠시 내 손등에 얹어준 그녀의 손가락, 다섯 아닌 넷. 아니 짧아서 미처 못 닿은 새끼손가락 빼고 셋. 겨울이어서 차가왔을까? 오싹하리만치 얼어붙어서 꼼짝할 수 없었던 순간. 차가운 그 손가락을 마주잡지 못한 나. 그때부터 나는 내 오른 손 등을 철저히 씻어야할 몸에 넣을 것인지 아닌지 혼란 속에 살게 되었다. 나는 어느 새 오른 손을 덜 쓰는 양손잡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앙상한 손. 밖으로 뻗친 너무 짧은 새끼손가락. 완벽한 샤워. 비누칠이 아까운 오른 손 손등.

 

  그것은 참 길고도 오랜 어쩌면 영원한 이야기가 되었다. 생애에서 어떤 순간은 나도 모르는 사이 영원으로 변해있다고 깨닫게 되면서 나는 가끔씩 감정의 발작을 경험했다. 그해 겨울을 나면서 지독한 열감기에 시달리다 못해 봄방학에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녀가 타교로 전출되던 시기였다.

 

 

  소문은 멀리 빙빙 돌아서야 내게 이르렀다.

  수돗가 선생님이 다른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난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설악산 모퉁이에 이은 참새구이집 기억에 사로잡힌 내가 세상 물정과 담을 쌓고 멍하니 집과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는 진정한 진통의 시절로 들어가고 있었다. 교원이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지 못한, 대부분 타성에 젖었던 우리와 달리 앞서 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첫 단추에 끼이지 못했고, 조금은 미안한 느낌과 죄스런 마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고칠 것이 기본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진단 부분에는 동감했지만, 그것이 노조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천지가 그러거늘,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도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그런 우리는 그 조그만 생활안정으로 마치 기득권 세력에 속한 양, 꼭 그런 붙박이형은 아니라 해도 세상을 뒤바꿀 꿈 따위를 꾸어본 적이 없었던 셈이었다. 좀 더 열심히 좀 더 양심적으로 잘 가르쳐 보자는 것. 입시위주 공부만이 아닌 무엇인가를 더 심어주어야 하리라는 막연한 생각. 어쨌든 최선을 다해보자는 정도. 무엇 보다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한다면! 그런 변명으로 안이해져 버린 세월이었다.

 

  비겁했다. 그 동안 교육현장이 들끓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면 나는 비겁했다. 처음 전교조 결성 과정의 파장에 이어 이듬해 가을에는 조합원 교사들이 천 여 명씩 해직되었다. 그때도 가슴 아픈 한 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외면 한 것이 사실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몇 번씩 오고 가는 동안, 학교 한번 이동하고 거기에 적응하고 하다보면 생이라거나 교육이라거나 원래의 의미 같은 것에 골몰할 시간도 틈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듬해, 해직교사 거의 전원의 복직신청 뉴스와 물려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흘렸다, 나의 그녀인 것을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 새침데기 선생도 복귀했다는군요!

  누가, 그 새침데기 선생이 언제 해직되었더랬소?

  그걸 몰랐어요, 열성당원이었다던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그 꽁한 성격으로 어찌!

  성격하고 전교조하고 무슨 상관이요! 외려 꽁한 사람들이 거기 많으면 많았지.

  하기는.

  그러니까 삼년을 넘게 해직?

  그랬대요, 그게 공동운명체 아뇨!

  아니, 가정과에서 따로 무슨 참교육을 한다고!

  하기는.

  하기는 말고는 뭔 말이 없소? 아, 고로켄가 카스텔란가 그런 것 안 만들고 이밥에 쇠고깃국 맛있게 끓이는 법 가르치면 안 되겠소!

  이 양반들이, 빈정대기는. 하기는 여자가 시집가믄 밥 맛 좋게 짓는 것이 제일로 중하제요.

  아 거기선 어디 여자더러만 밥을 지으라 하는가요! 남녀평등하고 역할구분도 안하려 드니까 문제지.

  밥이 꼭 역할구분과 관련은 안 되지요, 전 혼자서 밥 잘 짓습니다.

  노총각 박샘이사 욕심에서 그리된 것뿐이고.

  욕심요?

  각시 벌어 먹이자믄 아까워서 혼자 살고.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 일로 이혼까지 갔다니까 그렇죠.

  누가? 아까 그 새침선생말여요?

  암튼, 그것도 시작하면 신앙이 될 거요.

  아무리 그것이 이혼사유가 될까요?

  것도 어찌 보면 이데올로기인데.

  그래요, 살을 섞어도 머리를 섞지 못하면 비극인거라…….

  맘 다른 사람하고 이혼 하지 않고 살면 뭐 하겠소. 더 끔찍하지.

  거 무섭네요.

  그만들 둡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가지고.

 

  1990년대 만해도 이혼율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으니 이혼이 화제감은 되었다. 그 여자가 이혼을 했다고? 이혼을 했구나! 그럼 더구나 복직이 되어야 했겠구나. 그제야 나는 전교조 관련 뉴스를 귀담아 듣기 시작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이유에서. 대개 학교마다에 전교조 가입교사들이 있었으니, 조금 관심을 가지면 열성 노조원인 그 여자의 소식을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전교조 탈퇴확인서를 쓰라는 정부에 맞서 위원장은 공무원법 준수 각서로 대체하는 조건에서 정부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단안을 내렸고, 교사들은 돌아왔다, 물론 나의 그녀도 함께.

 

  그러나 다시 한 번 같은 학교에서 근무 할 수 있는 확률은 매우 낮았다. 내가 우선 여학교 발령을 원칙적으로 선호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수돗가 사건 이후 그녀가 먼저 전근했고, 한 해를 더 근무하고 내가 전근신청을 할 시기부터는 단연 남학교를 택했다. 남자에게 편한 성은 역시 남성임을 절감하면서. 녀석들하고는 수학여행을 떠나도 수돗가에서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고, 경이로운 어떤 장면들을 보게 될 일도 없으니 편했다. 삶이 무엇인가, 편한 것이 편한 삶이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제 다시 그녀의 해직과 복직이 화두로 떠돌 때에 이르러서야 잠복성 바이러스가 다시 활동기에 들어갔다. 또 다시 열심히 박박 문질러 씻기가 도졌다. 난 늘 그 수돗물 소리를 듣는다.

 

 

  강박증이 나를 삼켰다. 갑자기 내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지나 않을까 겁이 났다. 가슴통증 때문에 순환기내과를 찾았을 때, 내과의사는 정신신경과를 권했다.

 

  나에게는 어떤 더러운 것에 대한 억압된 생각, 감정 또는 충동이 내 의사와 관계없이 끈덕지게 되풀이하여 의식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경우라는 판정이 내려졌다. 책상서랍에 열쇠를 채우고 퇴근하는 길인지 몰라서 다시 교무실에 들르곤 했다는 고백은 나를 강박신경증적 소질이 있는 소심한 사람으로 낙인찍었다. 강박관념에 불안이나 공포가 따르는 것은 병은 아니라는 전제에서도, 나의 경우 남자가 살갗이 벗겨질 정도까지 씻어댄다면 분명 어떤 지우고 싶은, 잊고 싶은 불편한 기억의 방해라는 진단이었다.

 

  천만의 말씀. 나는 사실 내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녀와 비교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녀와 비교해서. 상상 속의 그녀와 비교해서. 의사의 말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고민에 빠지게 되는 지적 강박증보다는 순한 놈이라고, 다만 나의 경우는 보통 손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강박신경증과는 달리 온 몸을 씻어대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겠느냐고.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은 완전한 청결을 유지할 수 없다는 대 전제를 나에게 인식시키고자 오랜 정기적인 상담을 권했다.

 

  그런 주인공들을 문학작품들에서 볼 수 있으셨겠지요?

  무슨?

  강박신경증적 행동의 주인공들 말입니다. 손을 너무 자주 씻는 사람, 또는 문은 제대로 잠갔는지 물은 잘 잠갔는지 나가다가 다시 들어가서 보고 또 보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강박신경증 때문에 신경정신과에서 예컨대 그로민을 아침엔 25mg, 저녁엔 60mg 정도는 처방받아 복용중인 사람 말입니다.

  약물처방만 빼고는 제가 바로 그런데요. 남이 봤을 땐 우스워 보이지만 저로선 매우 피곤한 일입니다. 인도를 걷다보면 제가 무심코 빗금 선을 밟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으니.

  이런 행동들이 본인 스스로도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행동이라고 인지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중지하려고 하면 심한 불안감을 경험하게 되신다는 거죠!

  예, 제 스스로는 제어할 수 없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초조해지기 때문에…….

  네, 그렇습니다. 그 정도가 생활에 장애가 된다고 느끼셔서 진료상담을 받으러 오신 게지요. 본인 스스로 인지한 것을 다시 확인하려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판단하시는 건가요?

  당연하죠, 비이성적, 그래요, 비이성적 행동인 줄을 알기에 이렇게.

  그렇다면 그런 비이성적 행동을 무시하는 연습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조금 쉽게 해보는 방법으로, 머릿속으로 자신의 다른 자아를 설정해놓고, 이 다른 자아를 진정한 자아라고 간주하시고, 원래의 자아를 별개의 자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이성적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너는 참 이성적인, 비합리적인 녀석이다.”라고 큰소리로 외쳐보는 것입니다. “이런 멍청이야, 너 지금 뭘 하고 있어!” 이렇게 욕을 해보시거나.

  예, 바보 멍청이죠. (단 한 순간도 이 떨림을 말해보지 않은 너. 꿈에도 생각도 해보지 않은 너. 가슴앓이는 당연지사라고 믿고, 뭔가 낌새를 들키는 짓일랑 대한민국 남아로 태어나서 가장 못난 짓, 몹쓸 짓이라 규정해버린 너. 거짓 평화가 최선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는 너…….)

  더 심한 모욕도 좋습니다. 만일 효과가 있으려면…….

  네? 꿈의 효과요?

  꿈이라뇨! 꿈 이야기는 드린 적이 없는데요. 선생께선 꿈속에서 불안감이 가중되시는 건가요?

  (아니, 꿈이라면……. 나의 꿈은 무엇이련가!)

  일반인들 가운데 유병률은 2~3%나 되니까 극히 드문 장애는 아니십니다.

  그건 그리 위안이 되는 말씀이 아닌데요.

  아니 위안이란 이 경우 본인 스스로……. 그보다 발병 시기가 보통의 경우에 비해서 좀 늦게 나타나신 경우인데…….

  어른들이 걸리는 확률이 낮다 말씀이십니까? 확률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가 만일 강박신경증 환자군에 분류된다면 그건 1/2 확률이지요, 이다, 아니다.

  사실 이 경우 환자들은 대개 학력이나 지능이 높은 수준일 때가 더 많지요.

  지능이 높아서 걸리다니요? 지능을 감별하는 바이러스라?

  선생님도. 바이러스 감염이 아닌 것은 잘 아시면서. 차라리 유전성이라거나 가족성 발병 경향이 높은 셈이죠. 그러니까 가족력으로 미루어 우울증이나 대인공포증 등과 같은 정신과적인 질병이 공존하든가?…….

  그러면 저는…….

  선생께선 안정된 직장이 있으시고, 교사라는 직업 상 아무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실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문제에 대한 통찰력이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분석정신치료로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환경 여건에서 오는 자신의 증세 악화를 인정하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으신 것으로 보아서. 참 그런데 감정표현은 잘 하시는 편인가요?

  실은 그것이…….

  감정 표현을 스스로 억제하려는 것, 전형적으로 가부장제 하의 가장증후군입니다.

  가장증후군요?

  하하 농담입니다. 출세지향형이 아니라 해도, 이 시대 가장들께서 흔히 붙들려 계시는 군자삼락 말입니다.

  삼락? 우선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라지만, 어디 양친도 형제도 마음대로…….

  그것도 실은 자괴감을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불효로 돌아가신 것만 같고, 우애를 다하지 못함도 불효인 것만 같고. 그런데 이 시대에 효다 우애다 그것이 보통 일이 아니지요.

  예? 우애요? (아차, 내겐 유난히 나를 따르던 사촌이 있었지. 친 동기간은 아니라 해도 유일한 동생. 밭둑을 지나다가 무도 쓰윽 뽑아 그냥 옷에다 쓱싹 문지르고 먹던 녀석.)

  남자들이 터놓고 말을 못해 그렇지, 가부장제는 안팎으로 협공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그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근거도 무너지고 있는 것이고. 게다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자니 힘에 부치는 것 아닌가요? 물론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마지막 즐거움은 저절로 누리시겠지만.

  무엇인가 전도된 느낌이었다. 소위 정신과의사 자신이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라 할까?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정신과의사나 상담치료사는 자신이 말하기보다는 환자의 입을 마음을 열게 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사는 내가 사내 살갗이 닳도록 씻어야 직성이 풀리는 이 병을 고쳐줄 뜻이 없어 보였다.

  다른 강박적 행동들을 수반하지 않고, 다만 강박적 씻기라면 중년남자들에게서는 흔치 않습니다. 능욕을 당한 처녀들에게서나 흔히 보이는 과민반응이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에게서는 병적 증후와 연관될 트라우마가 발견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원인이 이렇듯 애매하다면…….

  숨겨진 원인이 꼭 있어야 합니까?

  원인이 될 수 있을 심적 타격 등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대응기제를 찾아가기가 어렵다고나 할까요. 선생님께서는 혹시 마음속에 멀리…….

 

  중년남자가 혹시 ‘몸을 더럽힌’ 기억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눈빛에는 이상하게도 어스름 물기가 아닌 붉은 기름기가 번져 나오는 듯 했다. ‘마음이 더럽게’ 흔들렸으되 몸을 더럽힌 적이 없는 남자는 이곳에서 치유될 수가 없다고 판단되었다. 남자의 마음 흔들림을 상상하지 못하는 남자 의사라!

 

  선생께선 반복적인 손 씻기 이외에도 강박적 행동이 발견되시는지. 예컨대 물건 정돈은 어떠십니까? 정리정돈에 억매이시나요? 대문을 닫고서 의심하고 다시 올라간다거나, 아니, 책의 읽은 부분을 다시 읽고 확인하려는 것, 것보다 과거에는 어떠셨습니까? 학생 시절 시험답안지 같은 것을 제출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확인 또 확인해야…….

  지난 시절에까지 거슬러서요?

  아니, 뭐. 청소년 시절 손톱 물어뜯기 등도 강박행동에 속합니다만. 앞날에 대한 지나친 걱정, 걱정을 이미 걱정하신다거나?

  저는 그러니까 뭐랄까 다른 증상은, 아니 저는 실상 고민이 될 일이……. 그러니까 말씀드릴만한 일이. 해서 이만…….

  아니, 치료를 거부하실 의향이시라면…….

  아니, 제가 급한 다른 일이 생각이 나서. 그럼…….

 

 

 아차, 그럼 그 파도소리는 서러운 강물의 울음이 아니라 귀를 씻는 수돗물 소리였을까? 아니다, 지금은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는 대신에 내일을 생각하려고 한다. 나에게는 어쨌거나 내일이 있다. 아직은 병원에서 맞을 아침이겠지만. 언젠가는 새소리도 들려올 것이다. 어쩌면 벌레소리도.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복도 끝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다가 커피봉지를 쏟아놓고 앉은 참이었다. 어느 녀석이 전화라도 하려나? 휴대전화를 살아있는 귀 쪽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미미한 삐이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이명이거니 했다. 기다리자, 어제 오늘은 이명도 가만히 참고 있으면 더 빨리 잦아든다. 아니? 청각검사실에서 들려준 쇳소리인데 착각인가? 아니다. 그 미세한 불규칙한 것은 쇳소리가 아니라 분명 벌레 우는 소리였다. 살아있어서 불규칙하다. 아직 추운 3월 어느 아침, 내가 아직 벌레소리를 듣는다! 경이에 가까웠다. 1/6 확률을 뚫고 내 귀가 회복되어간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그저 벌레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이 뛸 듯이 기뻤다.

 

  어라? 벌레소리를 따라 무심코 따라간 눈. 그곳엔 수풀도 동산도 아닌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시멘트벽사이에 난 나무문. 그 너머엔 길고긴 복도밖에 없는 병실건물. 벌레소리를 따라 병원복도로 향한 내 엉뚱함은 코미디였다. 청각 따라 방향감각을 잃게 되는가. 더 또 무엇을 잃어갈까.

 

  정말이었다. 내 고개는 창밖이 아닌 복도 쪽 닫힌 문을 향하고 있었다. 오른 쪽 귀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창밖의 나무는 오른 쪽인데, 벌레는 그냥 왼쪽 귀에서 울고 있었다. 내 세상은 이제 모두 왼편이다. 오른 쪽에 몸담고 왼쪽을 동경해온 삶의 귀결이런가. 내 오른 쪽 귀는 더 이상은 오른 쪽 말을 듣지 말라한다. 새가 울어도 벌레가 울어도 그것은 왼쪽 세상이라 한다. 왼쪽 온 세상. 반쪽 온 세상.

 

*

 

  아버지의 공책은 거기서부터는 하얀 여백으로 멈춰 있었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남은 귀 하나로 무서움을 타시는 구나. 회갑이란 그런 것인가. 정년이란 그런 것인가. 늙으신 아버지에게 변변한 자식도 없으니…….

 

  드르륵, 어머니가 방문을 여신다.

  어둡지 않아? 불이나 켜고 있지. 아버진 아예 늦으신단다. 건너 온, 저녁 먹자.

  승연이 승주는요?

  빨리도 챙긴다. 아까 승연이가 방문을 열어도 모르고 있더니. 애들은 벌써 먹였지, 시간이 몇 신데.

 

  밥상은 늘 소박하다.

  엄마, 아버진 정문리 가심 맨날 늦으세요?

  낸들 알아. 윤달 앞두고 뭘 궁리하시는지. 느닷없이 부산삼촌 이야길 하시질 않나, 원.

  부산삼촌요?

  그래, 그 왜 부산에서……. 관둬라, 너흰 잘 모른다.

  어머닌 그 이야기를 접으신다. 그리고는 관심의 화살을 내게로 정조준하신다.

  그런데 넌 여태도 달랑 혼자서…….

  엄마, 엄마 나물들 언제나 맛있어요. 나물 맛이 어쩜…….

  나는 부지런히 밥을 먹는 척, 엄마의 화살을 피해보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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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국제펜광주』 제10호, 2012, 238-26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12. 4. 01:55

 

편지

 

 

                                     베케트의 <행복한 나날들> 중에서 :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 말해버리지요. 할 수 있는 전부를.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죠.”

가을은 은행잎으로 가을입니다.

비가 오거나 아니 오거나.

연구실은 춥지 않으신가요.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을에. 이런 편지를 엿보게 된 나는 궁금증에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대 밖에서 진부하게라도 이야기를 꾸며봅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자신의 말 대신 명작의 인용 뒤로 숨습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춥지 않은지 가벼운 안부가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신은 연구실이 있는 사람이며, 연구실이 추울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사람이며, 그래서 당신을 잃었고,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또 한 가지 사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편지는 아니며 흔히 지금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메일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과 그 사람은 이메일주소를 아직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두 사람에게 남아있을 뭔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구실이 있는 사람의 이메일주소라면 그것은 감추고자 하더라도 감춰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의 이메일주소 노출 정도가 관계의 정도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면 정정하렵니다. 그러나 얼마나 먼 관계인가, 얼마나 사무적인 관계인가, 그런 말을 하고자 할 때도 써야 하는 단어가 ‘관계’인 점을 강조하렵니다. 그러면 오해는 풀릴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편지에 답을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봅시다. 당신은 이런 편지를 곧 바로 지워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답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시작하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런 편지를 아예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보낸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난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는 진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편지의 성격 상 열려버리기도 합니다, 사소한 잘못으로. 여러 개의 편지들 중에서 하필 하나만 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방심한 순간에 마우스의 작동으로 열려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이 편지는 그래서 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열고 보니 당신의 가슴이 조금 찡합니다. 평상시의 당신의 태도로 보아서 당신이 답을 쓸 리 없음을 아는 사람이 이런 편지를 쓰다니.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묻어나는 편지를 쓰다니. 한 순간, 아주 짧은 한 순간 마음이 닿았더라도, 스쳤더라도, 만남은 만남인 것을. 당신은 그것마저 부인할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만남은 순간이며, 특히 괘도가 다른 직선의 만남은 순간 중의 순간일 뿐임을 누군들 부정합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순간이 정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동서고금 남녀노소의 일입니다. 만일 아름다운 순간이 허락된다면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당신과 같이 이성적이고, 많이 이성적이고, 최고로 이성적인 사람으로서는.

 

   그러므로 당신은 회신이라는 간단한 장치를 뚫어지게 봅니다. 절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답을 쓸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읽지도 않고 지우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음에 스스로 뿌듯해할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동안에도 매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이 편지를 더 이상 거기 아이티 세상에 살려두지 않을 만큼 이성적입니다. 간단합니다.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서 편지는 휴지통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전에 어쩌다가 우연히 나의 편지함으로 ‘전달’되어버린 것을. 방해꾼은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휴지통에 쌓인 수많은 쓰레기들 중에 섞여 얼마를 더 연명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당신의 눈앞에 다시 존재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꿈을 꾸는 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편지는 게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꿀 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고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러나 아무 소용없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끝나지 않아도 희망은 끝납니다. 어느 날엔가는 당신이 휴지통을 말끔히 청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편지를 쓴 사람과는 참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잊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비이성적인 순간이 있었음을. 하늘과 바다가 맞닿고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절해의 고도. 상상의 자리에서는 당신도 마그마처럼 끓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당신이 이성적인 것은 지나간 순간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서입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훌륭하게도 이성적입니다.

   만일, 만일에 훌륭하게도 이성적인 당신이 조금 흐트러질,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시간이 올까요? 아무리 이성적인 당신도 사람이고, 사람이면 조금 흐트러지는 때가 왜 없을까요? 그래서 당신도 아주 드물게라도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해 봅시다. 물론 이 편지와 관련해서는 이미 편지는 죽어버렸을 때입니다. 그저 전혀 다른 계기로 당신의 몸속에 알코올 성분이 많아졌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인위적으로 이성의 자리를 감성이 꿰찬 겁니다. 아니, 감성이 당신을 송두리째 꿰찼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지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조금 상스럽게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고쳐봅시다, 감성이 우위를 점한 때.

   당신에게서 감성이 우위를 점할 때는 드문 일입니다. 그래도 가능한 일입니다. 당신도 사람이니까요. 원래도 감성을 이성으로 누른, 실은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사람이고 보니, 어느 날엔가는 감성이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니까요.

 

   그럼 이제 한번 편지를 쓴 사람을 떠올려 보시지요.

   그(녀)는 - 이렇게 굳이 괄호 속에 (녀)를 쓰는 이유는 누구의 성별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소심 때문이니, 당신도 또는 독자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로 왔습니까? 이 표현은 다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왔다는 말은 옳지 않겠지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오게 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의지가 없었을 때 그(녀)가 당신에게로 왔을 리가 없는 이유는 압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오는 것을 그냥 허용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혹은 그 순간, 당신이 찰나에 감상적이 된 때문이었겠지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무래도 어떤 외부적인 힘이 작용했겠지요? 말하자면 있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야 마는 자연 법칙 같은 것. 우리가 잊거나 잊으려 한다고 해도 한번 태어난 것은 사라지지 않지요. 우리가, 생명체가 한번 태어나면 그것이 죽어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성분은 어떤 형태든 모양이든 찌그러들 대로 찌그러들어도 썩어서도 어딘가에 남아있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예컨대 한 겨울 바닷가의 눈물 같은 것도 볼의 열기 때문에, 닦아준 손수건에 적셔져서, 또는 덮어버린 입술에 묻혀서, 아무튼 어떻게든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 녹아들어 남게 되지요.

 

   나는 이제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녀)가 갔습니다. 떠났다는 말입니다. 겨울은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하더니, 그때 정말 겨울에 떠났습니다. 유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겠죠. 물론 지병으로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들이 아닌 바에야 누가 얼마나 유언을 남기나요? 어쨌거나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자에 <미리 쓰는 묘비명> 비슷한 코너에 보낸 글이 남았습니다. 물론 보낸 것 보다 더 길게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답니다. 연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여기에 마저 그 편지의 계속이라고 치부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마그마를 향하여

 

   은행잎 우수수 지는 어느 늦은 오후.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라는 문자를 보내 왔다. 선배 문우께서.

   아, 그런 오후이면 잠들기 좋은 시간 아닌가.

   비가 내린다면 빗물에 젖은 은행잎 따라 흘러가기 좋을 것이다.

   발길에 찢기어도 여전히 노란 은행잎 부스러기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들기 좋을 것이다.

   그들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아래로 아래로 어디까지 가는가.

   우리는 지표를 뚫고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 것이다.

   몸과 맘 모든 속성들을 끌고 아래로 아래로 간다.

   속성들은 원자와 분자가 되어 밀고 당기고 마그마에 섞일 것이다.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마그마 속에 한데 섞이어

   몸도 맘도 초월한 마그마가 되어 흐를 것이다.

 

 

   마그마 - 얼마나 뜨거우면 돌덩이가 녹을까.

   얼마나 녹아서 ‘돌물’이 되어 흐를까.

   지각 바로 아래 외핵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암석층 맨틀에 이르기는 할까.

   아니, 맨틀 최상부의 섭씨 100도를 견디기나 할까.

   맨틀의 대류는 혼돈 과정. 내핵은 고체이고, 외핵은 액체이며, 맨틀은 가소성 고체라.

   지구 표면에서는 낮은 온도로 고체이던 광물질들이 마그마에 이르면 소용없다.

   암석 농축액 마그마, 그 속에 섞인 은행잎 부스러기들은 설마 불순물일까.

   마그마에 섞여 녹으면 지표면의 일들을 기억이나 할까.

   몸을 기억하지 못해도 맘도 잊을까.

   몸은 형체가 사라진다.

   맘은 무엇이 사라질까.

 

 

   몸은 실존의 현장이었다, 인간이면 예외 없이.

   겨울의 나무 - 길고 부실한 몸은 용적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첫아이라서 아이는 버리고 태만 주어다 길렀나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났다.

   좋아하는 움직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것들…… 있었을까?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탐한 적이 있었을까?

 

 

   단연 아니었다.

   손을 뻗치면 무엇이건 다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바보같이.

   준비성 만점의 (외)할머니는 욕구의 싹이 자랄 틈을 내주시지 않았나 보다.

   할머니가 엄마였다. 어머니는 우리랑 함께 할머니의 딸이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일찍 학교에 보냈다.

   네 살 때 벌써 문전옥답 값으로 가죽 란도셀 가방과 호랑이(?) 모피코트를 준비해놓으셨다 했다.

   그것들을 맸거나 입었던 기억은 없어도 작은 모피코트가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천리 길 먼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가 부모자리가 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할머니의 아기였다.

 

 

   맘은 늘 아기는 아니었다.

   물병자리 B형. 천성적으로 집단과 강요에 약한 고립적 고집적 마음의 소유자.

   체육시간 내내 벤치에 머물며, 소외되어, 마음은 오히려 일찍 성장했다.

   성장? 한껏 조숙하여 개똥철학에 기울었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시를 썼다. 첫 발표는 「무제」.

   가소롭게도 인생은 주제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표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건방짐이 오래 갔다.

  

 

   농축된 시를 쓸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유트릴로의 하늘을 따라 그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절대음감으로 피아노를 두드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책 속에 정신이 있다고 믿었다. 재능과 달리 읽으면 되는 것이 책이라고.

   책이 유일무이한 벗이었다.

   책들은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거기에 존재했고, 나는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그들과 노닐었다.

   단조로움 속에 단정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희로애락은 장신구일 터였다.

   장신구는 있어 좋기도 하고 있으면 불편하기도 한 존재가 아닌가.

 

 

   정신에 집중하기를 소망했다.

   육신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그 둘이 똑같은 비율로 섞이지 않을 것이므로.

   더 정신으로 뭉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까.

   정신은 날개 없이도 한없이 날 수 있을 것이니까.

   어디로? 목적은 없었다.

   목적을 초월할 수 있음을 우수한 자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구체적 목적에 들린 삶을 조금은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목표지향적 삶을, 욕망이 많은 삶을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조금 안쓰러워했다. 건방지게.

 

 

   내 맘은 내 정신은 강했다고 믿었다.

   내 맘은 내 정신은 상처입지 않았다고 믿었다.

   내 상처를 두려워하여 행여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겁을 먹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구나.

 

 

   예 - 참 어려운 단어였다.

   함께 가자 하면, 예 하고 서두르지 못했다.

   확신이 안 선다는 생각에 더듬거리기만 했다.

   효, 우애, 우정과 사랑의 이름으로도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니, 애국애족은 언감생심.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엉터리 산수를 믿지 않았다.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둘이 정직한 답이다.

   아니 넷일 수 있다는 상상을 더 신뢰했다.

   왜? 원래 하나의 마음도 늘 하나가 아니니까, 적어도 둘씩이니까.

  

   마음은 늘 갈래였다. 누구의 마음인들 그러지 않았을까. 동시에 둘을 원하기는 오히려 어려웠다. 직장을 쉬이 갈아 치운 것만 보아도 드러난다.

   한번은 다 놓고 소설만을 쓰겠다고 작정하기도 했다.

   그랬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문학작품들을 파먹고 산 세월 동안, 손가락이 하이에나의 그것들처럼 넷으로 변하고 꼬리가 돋는 기분에 소스라쳐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여러 주제를 섞어 담은 장편 출판을 계기로 어정쩡 소설가가 되었다. 시를 쓰는 젊은 선배는 소설 다섯 편을 쓸 이야기를 한 데 엮어 넣었다고 ‘비경제성’을 탓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적어도 한참 동안 무엇인가로 쏠렸다. 다른 것들을 다 잊었다. 그러다 식었다. 다른 무엇인가로 한참동안 쏠렸다. 그러다 식었다. 오래 식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식을 것이다. 아니, 이제는 시간이 없다.

 

 

   아니오 - 참 어려운 단어였다.

   비가 내리면, 아니오 하고 우산을 쓰거나 집안으로 뛰어들 만큼 신속하지 못했다. 비는 내리면 맞는 법. 사람의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오는 색으로 맞는 법. 비도,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자연을 신앙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아래로 아래로 간다.

   마그마를 향하여 간다.

   뜨거운 돌물은 나의 레테의 강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남아 있던 글입니다.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그(녀)에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으니,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묘비명이란 단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터, 무명 소설가에게는 사치스러운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인간적으로 문학적으로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문자를 받았더랍니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답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그(녀)는 왠지 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막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진다고. 그(녀)는 ‘너절한 연습’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는, 만나고 싶은 마음들이라면, 대기 속 보다는 땅속을 꿈꾸는 것이 소박할 것이라고.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하늘보다는 땅의 그런 이미지가 우리의 미래(?)에 어울린다.

 

 

   마지막 인터뷰

 

   어떻습니까? 이 묘비명의 어딘가에 편지처럼 당신에게로 뻗는 촉수가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조금은 부담이 되시려는지요? 아니, 그거야 모를 일입니다. 책임이 없다면 누구는 어떤 일에서든 자유로울 수 있는 법입니다. 꿈을 꾸는 건 꿈꾸는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꿈의 대상은 억울할까요? 예,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억울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아는 한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언뜻 무뚝뚝했습니다.

   - 어떤 때에는 타협이 어려웠고요.

   - 많이 정직한 편이었어요.

   - 보기보다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수식어를 줄이고 말해봅시다.

   - 무뚝뚝했습니다.

   - 타협이 어려웠고요.

   - 정직한 편이었어요.

   -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덧붙일 말이 떠오르겠지요?

   - 괴팍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 타고난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정말 그뿐입니까?

   - 순수? 바보처럼 늘 뭔가에 골몰했던 것 같아요. 그만 하시죠.

 

   아니, 하나만 더. 미안합니다. 제가 좀이 쑤셔서 그만. 골몰했다 하시면 집착 같은 것입니까?

   - 표현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굳이 말하면 긍정적인 집착, 적어도 타인에게는 긍정적인 집착으로 나타났지요. 그게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편이었지요. 자신의 잘못, 부족함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매달렸으니까요. 상대가 무슨 말을 못했지요.

 

   마지막으로, 당신과 그(녀)의 벤다이어그램을 상정한다면 어떤 형식이었나요?

   - 벤다이어그램? 참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집합이라, 합집합의 크기가 커지려면 교집합은 작을수록, 아니, 합집합을 생각할 게제는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교집합을 키웠나? 그것은 더욱 어불성설, 두 개의 자아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인 것을.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 아니, 나는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을 잘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희망했습니다. 그(녀)가 상대적으로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왜들 가벼움을 탓하나요? 이 지상의 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존재가 왜 무거워야 합니까? 가벼울수록, 깃털처럼 가벼울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부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당신의 위트와 유머와 센스와 아이러니와 패러디와 리듬과 심지어 즐겨 쓰시는 모순어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느꼈습니다. 지금도 느낍니다. 수사학에서 탁월한 당신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여 ‘달콤한 이별’이라 하시렵니까? 아예 오비디우스를 빗대어 ‘이 충만이 나를 가난케 하였도다!’라고 응수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인가 감정이 충만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은 이성의 가난이었나요?

 

   당신 : 바람 불면 은행잎 우수수 져서

   그(녀) : 당신이 스틱스 강을 말할 때에도

   당신 : 어딘 가로 씻겨 내려갈 것 아니오?

   그(녀) : 나는 그것을 암호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 내려가다 썩든가

   그(녀) : 나는 차라리 레테의 강을 믿습니다.

   당신 : 썩은 물이 어딘 가로 흘러 들어가

   그(녀) : 많은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당신 : 스며들어가

   그(녀) :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들이

   당신 : 지구 복판의 마그마가 끓고 있는 곳에서

   그(녀) : 무엇인가가 지나면

   당신 : 한 조각 성분이 되어서라도

   그(녀) : 그 끝이 좋았던 고통스러웠던

   당신 : 그렇게라도 만날 것 아니오?

   그(녀) : 언젠가는 거의 잊혀진다고.

 

 

   벌써 끝나가는 이야기이군요.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했습니다그려. 늘 그랬습니까?

   -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제 말만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당신은 추억에 잠깁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밤을 지새우던 때를 불러봅니다.

   어느 바닷가. 둥지 틀고 사는 곳에서 260km 또는 450km 쯤 움직인 곳.

   싸구려 불빛에 드러난 군상. 따닥따닥 붙어있는 횟집과 손님을 불러대는 아주머니의 앞치마. 부엌의 행주치마가 아닌 돈주머니. 돈주머니들은 제법 불룩하다. 임신하기에는 늙은 여자들의 부풀어 오른 배 위에서 더 부풀러 보이는 돈주머니 앞치마. 앞서 지나간 손님들의 때 묻는 돈, 그 때 묻은 돈에서 옮겨간 인생의 때로 뒤범벅되어 갑옷처럼 무장된 돈 통.

   일행은 예닐곱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한다. 중요하지도 않은 말들만.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 중요하다. 적당한 간격의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시간을 죽이려고 할 때.

   왜 시간을 죽여야 하는가. 공적인 일들이 끝나면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 푹푹 씻고 건강한 잠을 자면 그만인 것을. 그 편이 다음날의 진행에도 합당하다. 그런데 왜 바닷가를 서성이며 시간을 죽이려드는가. 할 말도 없으니 말을 못하고, 할 말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누구도 누구에게서라도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바닷가 부둣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내가 이전에 여기 유명한 어시장을 갔더랬어요. 어부인이 워낙 생선을 좋아하니까 사가지고 갈까 했었지요. 아니, 아예 돌아오는 길에 어시장엘 다녀오라는 엄명이 떨어졌지요. 해서 시장을 갔었죠. 그런데 아짐씨들이 앉아서 영락없이 붓칠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아예 노란 페인트칠을, 생선에다가. 멍하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아짐씨 말이 뭐랬는지 참.

   뭘 보냐고 퉁이나 맞으셨지요?

   퉁만 맞은 게 아니라 혼이 났지요. 아자씨, 집에 아지메는 화장 안하나? 야들도 화장을 곱게 해야 시집을 잘 가는 기지, 이러는 겁니다. 노오란 물색으로 맛있어 보이는 조기가 화장발이라니. 그 다음부터는 조기매운탕 맛이 확 가버리더군요.

   참 섬세하시기는. 그게 어디 오늘 하루 이틀 일이던가요.

   조기 장사는 조기를 속이고, 고춧가루 장사는 고춧가루를 속이지요. 일가 형님이 시골서 그대로 터 잡고 사는데, 글쎄 고추 다듬고 밭두둑에 아무렇게나 버려둔 고추꼭지를 밤 새 실어 가버린다고 합디다. 그걸 어디에다 쓸 것이요, 참. 그러니 누가 고춧가루를 믿고 사 먹을 수 있나요. 그러다 중국물건이 싸고 이문이 난다 싶으니까, 깨 있지요? 야무진 주부들이 시골에 가서 깨를 사가지고 와서 의기양양 하는 것도 다 헛것이라.

   직접 시골에 가서 사도?

   그러니까 깨를 털기 전에, 깨를 터는 것이 무엇인지나 아시오? 깨를 털기 전에 아예 덕석 에다 중국산을 쫘악 깔아놓고 그 위에서 깻대를 턴다는데 말 다했지요. 온 동네가, 다시 말하면 온 나라가 그러는데, 혼자서 순수히 자기 밭에서 난 깨만 팔고 있으면 바보 되는 느낌이라서 별 수 없다지 않소. 불 보듯 뻔한 손해인데다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농촌 사람 야단 못하지요.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인데. 요즈음엔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흔치 않다가 가을걷이할 때나 더러 드나든다는군요, 쌀도 실어가고 뭐 그런 정도. 헌데 시골 노인들이 다른 집 자식들을 알고 지내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긴다더라고요. 옛날엔 뉘 집 자식 할 것 없이 누가 하나라도 오면 온 동네가 다 나서서 반겼고, 또 젊은이들도 으레 동네 인사 할 줄 알고 그랬는데. 아무튼 형님네 시골에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가을걷이해서 쌓아둔 나락가마니를 통째로 실어 가버렸다지 뭐요. 저쪽에 젊은이가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 싣는 것을 노인정에 앉아서 먼발치로 본 노인이 있었다지만, 그 노인 생각으로 저리 천연스럽게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를 실어내니까 그 집 자식이나 되나보다 그랬다지 뭡니까.

   아무리 그런다고 참 노인네도! 어르신이라요, 할머니라요?

물어보나 마나지요. 할머니들이 혼자 노인정에 앉아있기를 하나요? 잔손가는 일이든 어디로든 몰려다니지. 칠십 줄 안 넘은 할아버지가 그랬답니다. 아파서, 병중이라 시들시들하기도 했더래요. 요즘 시골에도 암환자들이 많은 걸 보면 공기 좋은 시골이 별 노릇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시골도 음식들이 개화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아니,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요. 한번은 사라질.

 

 

   그렇게 당신은 그 밤의 대화에 끼었습니다.

   한번은 사라질.

   마치 생사의 암투에서 해방된 초연한 느낌을 주며 좌중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좌중이라야 어느새 대여섯으로 줄었습니다만. 이제 모두들 당신의 입만 쳐다봅니다. 당신의 개입으로 진부한 어시장 놀음이나 가을걷이 도둑 이야기에서 삶과 죽음으로 이야기의 차원이 바뀌었으니까요. 당신은 처음엔 모르는 척 입을 다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실은 언제나 철학을 시작하곤 하는 당신을 알아보고 있었으니까요. 해서 당신은 그날 밤의 강연(?)을 하게 됩니다.

 

 

   오늘 그것을 되풀이하실 의향은 없으신 거지요? 간략하게라도?

   - 그럼요. 기억도 못합니다. 강연이라니, 그저 알코올 기운에 떠들어댄 개똥철학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날 밤의 강연(?)에서 당신의 영혼과 그(녀) 그것이 불꽃 튀는 접속을…….

   - 그만, 그만 하시죠. 순간은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때는 순간은 영원이 되어버린다고도 했고. 늘 말이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매 순간의 영원성 운운하면, 헤세가 쓴 『싯달타』에서도 나왔던 말 같습니다만. 삶마다의 불멸성과 더불어.

   - 예,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전히 새 말을 합니까? 세상 어디에 새로운 주제가 있답니까? 쪽지 한 장에 매달리시는 댁은…….

   죄송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제가 하는 쪽이라서. 제 역할이 질문 쪽이라서…….

   - 예, 뭐. 그렇다고 제가 답변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죄송하지만 처음 주제에 한해서만큼은.

   - 주제가 있었나요? 도대체 인생에 주제가…….

   자 그럼, 그(녀)는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서 떠났습니까? 이 표현은 정말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떠났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버렸습니다.

   - (침묵)

   그럼 당신은 왜 그(녀)를 단호하게 자르셨습니까?

   - (침묵)

   당신이 침묵하더라도, 몇 백 년을 침묵하더라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녀)가 이 편지에 쓴 대로,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는데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물론 당신의 침묵이 그(녀)를 질식시켜서 스스로 단념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 (침묵)

   하긴 다시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그 단념이라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군요.

   - (침묵)

   예, 이 편지의 답이 침묵인 것을 알았습니다. 진즉에 알고서도 궁금했습니다. 가펑클의 노래를 들어 ‘침묵의 소리’를 실현하시는 군요.

 

 

 

   여기까지입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이 편지와 관련해서 뭔가 의미심장한 주제를 끌어내볼까 혹했던 나는 여기서 단념했습니다. 그러면서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 무기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빼앗겼거나, 아니 조금이라도 설레었거나 하는 정도만으로도 마음 졸이는 상대였다면 그런 무기가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았으리라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편지의 수인인은 참으로 말을 아끼는 수준 높은 인격자였습니다. 그것이 내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고백하건대, 이야기를 창작하는 대신 누군가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 애초에 틀렸습니다. 편지 한 마디를 실마리로 하여 쉽게 정신적 투쟁의 흔적 같은 것을 꺼내보려고 했으니. 본격적인 글쟁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음을 느낍니다.

   대신에 조금이나마 배운 것도 있습니다. 물론 사전적으로야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더이다. 거기까진 통상 알고 있는 것이지만, 유독 그것을 가리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할 때 늘 고개가 기웃거려졌지요. 그 의심을 이제 확신해도 될 듯합니다. ‘감성’이 ‘이성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고 정의되면, 처음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감성과 이성의 대응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립개념이 아니라 충돌개념이라는 것. 두 단어를 함께 쓰는 일에는 뭐랄까 물리적 이항이 아니라 화학적인 얽힘으로 폭발성이 내재되어 있으리라는 것. 비슷하게 감성과 이성을 나누어 가졌을 두 사람의 경우에도 어떤 쏠림 현상 때문에 한 사람은 폭발해 버릴 수도, 다른 한 사람은 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 미션이 가득한 영화에서, 폭발 직전 몇 초를 남기고 뇌관이 제거되는 폭약처럼. 그러니까 폭발 여부는 순전히 에이전트의 활약 덕택입니다. 이 때 에이전트의 이름은 언제나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최후의 보루는 이성이다? 그러한가 봅니다. 그런 것을 배웠습니다.

 

   아차, 덧붙일 말이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도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을 강조한 책을 공유합니다. 아까 당신이라고 지칭된 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서가를 슬쩍 훔쳐보았거든요. 그리고 편지를 쓴 그(녀)의 다른 노트에서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이란 지적 정체성과 변화의 요구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메모를 본 적이 있었답니다. 그 책이 출간되었던 1996년에 - 아니, 훨씬 이후라야 되겠지요, 여태껏 그런 마음이 지속될 리는 없을 테니까요 - 누군가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했음직하다. 어쩌면 ‘당신’ 쪽이. 간접적 이별의 통고로서. 감성 따위를 극복하련다는 통고 같은 것. 그런 경우 이성은 잔인성의 비슷한말이 되겠습니다그려. 호모 사피엔스의 독재. 물론, ‘당신’ 쪽의 철학에 얼마만큼 동조할 것인지는 좀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편지가 영영 사라져버린 데 대한 쓸쓸함을 반추할 길은 없으면서 여전히 자꾸 그쪽으로 내 마음이 적시어지니 말입니다.

......................................................................................................

 

* 『문학세계』 통권 221호, 도서출판 천우, 2012.12.1. 211-226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2. 28. 16:12


파리하고 세상사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인 그대 - 마그마로!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내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 그런 어느 가을날 문자를 받았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나는 왠지 늦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어느 늦가을,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아니면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

<문학에스프리> 2012 봄 창간호,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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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nglish2012. 2. 14. 01:40


Why Hesse again, and of all books Siddhartha?


Hermann Hesse (1877~1962):

 

 

 

 

                                            Text: Siddhartha by Hermann Hesse, 
                                                     translated by Hila Rosner, 
                                                     MJF Books, New York 1951.


- a German-Swiss poet, novelist, and painter

- grew up in a household steeped in Pietism

- began his career as a bookshop apprenticeship

- a 14-month mechanic apprenticeship at a clock factory

- a new apprenticeship with a bookseller

- began to write poems and later also novels
- received Nobel Prize in Literature (1946)

Siddhartha (1922):

- reveals his love for Indian culture and Buddhist philosophy
- is composed of 2 parts

        Part One          Part Two
   The Brahmin's Son

  With the Samanas

  Gotama

  Awakening



   Kamala

  Amongst People

  By the River

  The Ferryman

  The Son

  Om

  Govinda


* Siddhartha
: he who has achieved self-realization 

* four "varnas" [or classes]:
                the Brahmins, the Kshatriyas, the Vaishyas, and Shudras
.
* Samana : Hidu ascetic

..................................

Why Hesse again, and of all books Siddhartha?

I came across the book unexpectedly. I read Hesse's Siddhartha for the third time recently. In English this time. First time was in Korean when I was a teenager in high school, then in German as a college student. Why in English now? As long as I teach 'Korean as Foreign Language' to foreign students at CNU, I believe having a better command of the English language would serve me to communicate better with students from other countries. The English version that my English teacher Michael S. showed me, originally published in 1951, has this amazing antique quality to itself. Reading Siddhartha after all these years since I first attempted to decipher its wisdom, I felt that it was no coincidence that the book came to me again. I now feel almost obligated to deliver some messages of the book to young people today, through my own prism of trail and errors in understanding these elusive messages.

Hermann Hesse (1877-1962) was a German-Swiss poet, novelist, and painter, was born in Calw, Germany. Both of his parents served in India at a mission, a Protestant Christian missionary society. He grew up in a household steeped in Pietism, a movement within Lutheranism, but he showed his rebellious character in early days, and, in one instance, he fled from the seminary and was found in a field a day later. After schooling he started a bookshop apprenticeship, but he quit after three days. Following a 14-month mechanic apprenticeship at a clock tower factory, he began a new apprenticeship with a bookseller, and he spent his Sundays with books rather than friends. Pretty soon, he began to write poems and later also novels.

Through his parent's experience in India, Hesse's interest in Buddhism probably came relatively naturally. Schopenhauer and theosophy renewed his interest in India. Through Siddhartha (1922), he showed his love for Indian culture and Buddhist philosophy that had already been developed in his earlier life.

Siddhartha is composed of 2 parts. Part One: The Brahmin's Son, With the Samanas, Gotama, and Awakening, and Part Two: Kamala, Amongst People, By the River, The Ferryman, The Son, Om, and Govinda.

The story begins with a young Indian named Siddhartha, who seeks spiritual enlightenment. By the way, in Sanskrit, the name Siddhartha means he who has achieved self-realization. Young Siddhartha was a perfect son of the Brahmin, the highest varna (or the class) - in the Hindu law "Smriti," which decreed four "varnas": the Brahmins, the Kshatriyas, the Vaishyas, and Shudras. He was intelligent, with a seemingly insatiable thirst for knowledge. He left home and lived for a while as a Hindu ascetic among the Samanas, with his friend Govinda.

After seeing the limitation of asceticism, however, the two left the Samanas three years later, to meet Gotama who has claimed to have achieved spiritual perfection. Gotama Buddha talked about the human suffering, the origin of suffering, the way to release from suffering: Life was pain, the world was full of suffering, but the path to release from suffering had been found. Govinda was immediately impressed and joined the community of Gotama's followers.

Siddhartha, however, felt that he could not find salvation through teachings of another. Leaving the groves of Gotama, he felt he had also left his former life behind him. Siddhartha realized that he had been afraid of himself. He was newly born, and finally awakened. Upon this awakening, the world was transformed in his eyes. All things had been regarded with distrust before, because the reality lay on the other side of the visible. But now his eyes lingered on this side, his goal no longer on the other side.

He next sampled the pleasures of materialism. Not only the thoughts but also the senses were fine things, behind both of which lay hidden the ultimate meaning of life. In the groves of Kamala, the well-known courtesan, and Kamaswani, the richest merchant, opened him a simple and easy life amongst people. The more he became like them, the more he envied them and the sense of importance, with which they lived their lives. They seem perpetually in love with themselves. His face assumed the expectation of discontent, of sickness, of displeasure, of idleness of loveliness. Suddenly he realized that all this pleasure only degraded him and how passion was closely related to death. He felt as if something inside him had died. He left this material garden and never returned.

Siddhartha wandered into the forest, and when he reached a meandering river in the woods, fatigue and hunger had weakened him, until he heard a sound Om, the perfect sound of all. Then he suddenly awakened and realized the folly of his previous actions. After long sleep under the tree, it seemed to him as if ten years has passed. He looked at the world like a new man. Now he again stood empty and naked and ignorant without any preconceived knowledge in the world. He changed from a man into a child, from a thinker with worldly knowledge into an ordinary being. He had to have experienced so much stupidity, so many vices, so many errors, just in order to become a child, again and again beginning anew.

Vasudeva, the ferryman knew how to listen. Siddhartha also learned from the river how to listen, to listen with a still heart, with a waiting, open soul, without passion, without desire, without judgment, without opinion.

He realized that nothing was, nothing will be, and everything has reality and presence.

Many years passed and he met Kamala, who was dying. To Siddhartha she introduced her son, who she had named Siddhartha after his father.

In this hour he felt more acutely the indestructibleness of every life, the eternity of every moment. After the burial, Siddhartha wanted to raise his newfound son in this simple life, but the eleven-year-old child was a spoilt mother's boy. A day came when the young Siddhartha openly turned against his father and returned to the city. Even so he felt a deep love for the runaway boy, like a wound that won't heal. The wound lasted for a long time. Siddhartha began to envy other people who were living with a son or a daughter, he felt the sorrow of the lost love for his son, and he felt these ordinary people were his brothers. Their vanities, desires and trivialities no longer seemed absurd to him.

Still, Siddhartha grew slowly and began to understand the knowledge of what wisdom really was. Siddhartha continued to listen to the river. One day he felt his wound healing and his pain was dissipating. He ceased to fight against his destiny. He discovered that the river is all life flowing toward a goal. It sings the great song of the thousand voices, which consists of this word, Om-perfection. Siddhartha heard it and he smiled. Siddhartha's 'Self' had flown into oneness, and he achieved enlightenment. Vasudeva heard the same sound in the same way, and he also achieved nirvana. At that moment Vasudeva said farewell and went into the woods, into the unity of all things.

Meanwhile Govinda was also regarded with respect for his age and modesty, but there was still restlessness in his heart and his seeking was unsatisfied. Govinda heard talk of an old ferryman and went to meet him. When Govinda asked for advice, Siddhartha, who had remained as the ferryman after Vasudeva's departure, answered, "You seek too much that as a result you cannot find it. It happens quite easily that you only see the thing that you are seeking, that you are unable to find anything, unable to absorb anything, because you have a goal, because you are obsessed with your goal." Seeking means to have a goal, but finding means to be free, to be receiptable and to have no goal.

Govinda was pleased to see his friend of youth again. They talked about the doctrines, beliefs and knowledge. What they found in each other's discoveries were:

- Knowledge can be communicated, but wisdom may be incommunicable. The wisdom, even coming from a wise man always sounds foolish to others who have not attained it themselves.

- Everything that is thought and expressed in words is one-sided, only half the truth. It all lacks totality, completeness and unity. But the world itself is never one-sided. Never is a man wholly a saint or a sinner.

- Time is not real. The dividing line that seems to lie between this world and eternity is also an illusion. The potential Buddha already exists in the sinner, his future is already there. Therefore, everything that exists is good - death as well as life, sin as well as holiness, wisdom as well as folly. Leave it as it is, love it and be glad to belong to it.

- One can love things, but one cannot love words. Therefore teachings are of no use. Nirvana may be a thought, but there is not very much difference between thoughts and words.

Govinda saw no longer the face of his friend Siddhartha. Instead he saw other faces, many faces, a long stream of faces, and Siddhartha's peaceful face had just been the stage of all present and future forms: Nirvana.

What the whole text tries to tell might be: Experience is the aggregate of conscious events that demand participation, learning and knowledge. We should not believe in words or lessons but in actions and in observing the "things" of the world as they are. According to Hesse, these individual events bring about more Samsara [circle of life or suffering], but they are not a kind of hinderance or obstacle, because these experiences only could lead Siddhartha to attain understanding, deep comprehension of what life is. In most Indian religions, life is not considered to begin with birth and end in death, but as a continuous existence in the present lifetime of the organism and extending beyond.

In our post-modern capitalist society where the excessive competition rules supreme, this seemingly aimless type of mindset might appear outdated and of no use. What is then the usefulness of human being? How dangerous it is, if we would judge people mainly by efficiency and productivity! Are humans to be measured against working machines? Have we replaced humanity with calculating meritocracies in the name of fairness and progress?

In that respect, Hesse is still worth reading, leaving aside the fact that the hippies in 1960s and 1970s worshiped this book. Siddhartha gives us a rarely-found yet well-deserved pause to think about our life, about ourselves, whether we know where to go and how we might get there. Or is there?

........................................................................

Text: Siddhartha by Hermann Hesse, translated by Hila Rosner, MJF Books, New York 1951.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1. 12. 31. 16:47


고아가 되었다.
올 봄.
나의 어머니는 당신 나이 이른 다섯에 고아가 되시더니만, 우리더러는 더 일찍 고아가 되라시며 떠나셨다. 막둥이는 1963년생, 겨우 마흔 아홉이다.

피를 나누어주거나 물려준 후손 27명, 법으로 후손이 된 14명을 더하면 41명의 후손을 남기셨다. 그 중에서 참석자는 29명. 290명이 훨씬 넘었을 조문객을 생각하면 불참 수가 부끄럽다. 어머니 앞선 불효녀는 어쩔 수 없다. 머나먼 외국에 아기들이랑 사는 경우도 어쩌랴. 그래도 불참이 많다. 누구도 예상 못할, 설마 하던 불참도 있었다.

*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세월은 저 뒤편에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슬하를 떠난 셈이다. 대학시절은 정신적으로는 독립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는 서울 살이. 젊디젊은 ‘엄마’는 서울나들이를 즐기셨다. 우리들 -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이 함께 이화캠퍼스를 누볐다. ‘누볐다’는 물론 엄마의 표현이다. 실제로 이대 앞과 명동을 누빈 것은 엄마였다.

어머니는 이대 앞과 명동만이 아니라, 설악산과 제주도를, 전국을, 나아가서 가히 세계를 누비셨다. 어머니가 빠진 저녁밥상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았던 세월. 불평도 별로 없는 집안에서 나 혼자 불평분자였다.

왜 엄마는 빨리 안 들어오셔요?
우리 학교에 가면 빨리 나갔다가, 우리 돌아오기 전에 미리 들어와 있지 않고!

외할머니가 할머니였다. 외할머니가 엄마였다. 엄마가 밥을 지어주거나 된장찌개를 끓여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엄마가 등록금을 함께 걱정해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는 엄마가 아니었다. 집에는 다른 여러 엄마가 있었다. 물론 엄마도 엄마 노릇을 하긴 했다. 소질이 없어도 피아노다 미술공부다 시켜서 소질을 ‘계발’해내는 극성 엄마였고, 또 엄마의 유일한 자랑인 ‘밤 채’ 솜씨 덕분에 늘 예쁜 김장김치를 먹었다. 그래도 엄마의 부재를 못 참았다. 엄마를 엄마답지 않다고 볶아댔다. 엄마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도 엄마를 닮지 않고 불평만 해대니까, 집안에선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라고까지 놀렸다. 연속극을 보면 더러 첫아이는 누가 낳아놓고 죽던가 도망가지 않던가. 대체로 나는 비판적인, 회의적인 인간이었다. 속으로 진단하기를, 일찍이 엄마에게 불만이 많아서 나는 그런 인간이 되었다고까지 했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는 참 어려운 것이었다. 참 어려운 것이다. 첫 아이가 태어나 의사의 손에 거꾸로 매달려 자두 빛보다 더 붉어진 모습으로 울음소리를 내었을 때, 나는 기절을 했다. 산고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놀라움 때문이기도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무엇인가 꼼지락거리는 포대기가 옆에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생명체가 밖으로 나온 것이란다. 눈을 채 뜨지도 못한다. 입은 뭔가를 향해 움질거린다. 내 아기, 내 젖을 탐하고 나와의 관계를 탐하는 아기. 어렵게 어렵게 겁을 잔뜩 먹고 만져본 손가락. 작은 손가락들이 무엇이라고 종알거린다. 이것은 대체 어떤 암호인가.

손가락을 통해 전달되는 형언할 수 없는 감각 - 그것을 남성 화가가 어떻게 알았을까? 짐작이나 했을까? 새삼스레 위대했다. 아담의 손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그림의 발상이 이 진자리가 아니고 어디였겠는가?

그렇게 나는 기절과 함께 새로이 태어났다. 그 어려운 엄마가 되었다. 불평을 하는 자식이 아니라 불평을 받는 엄마가 되었다. 내 아이들은 어떤 불평을 할까, 별안간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몰랐다. 나는 계속 괜찮은 딸이었고, 엄마는 나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엄마는 부족했다. 물론 불평의 말이 단번에 줄었다. 불평의 마음은 한 치 변함없이 여전했다. 반면 나는 그 나름대로 괜찮은 엄마이리라고 착각했고, 애들은 정말 괜찮았다. 제 엄마에게 불평을 해대지 않았다. 적어도 대놓고는 불평을 하지 않았다. 유전자가 더 좋아져서 그랬는지도 모르는데. 물론 나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죽을힘을 다하고 조금 얻어도 행복해 했다. 나는 내가 인내심이 많아진 줄 알았다.

*

어머니가 떠나셨다. 조문객들이 무슨 소용. 41명의 후손 중에서 29명만 참석한 장례식장. 어쩌면 가장 사랑했던 자식이 불참 속에 들어있을지 모를 일이다. 열 손가락 깨물면 다 똑같이 아프다고 하셨다. 당연하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네 언니는 참 쌀쌀해야. 동생들이 그 말을 전해주어도 당연하다 느꼈다. 나는 내 불평소리가 줄었더라도 어머니가 내가 못마땅해 한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랐다. 사실이니까. 인생관이 다른 것을 어쩌라고. 나는 평생 어머니에게는 단 한 톨의 인내심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긴 세월 동안 큰 딸년의 부당한 불평을 감내하시던 어머니. 겉으로만 화려했던 어머니가 떠나셨다.

갑자기, 너무나 늦게 깨닫는다, 얼마나 서운했을꼬. 인생관이 다른 딸을 두고 평생 얼마나 참담했을꼬. 단 한 톨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이 이제는 없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나는 또 얼마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까. 아름다운 관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참아야 할까. 내 멋대로,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엄마’가 이제는 없다. 49재를 지났으니 어딘가로 정말 떠나고 없다. 머리에 꼽았던 하얀 리본이 타들어가는 초라한 불꽃과 함께 영영 떠나버렸다.

나 홀로.
이제 나 홀로다.
단 하나 지지대가 무너져버린 지금.
처음으로 처연히 외로운 순간을 맞는다.

.............................................

「아무렇더라도 나를 사랑해준 사람」, 『첫 클릭클릭』, 이대동창문인회, 2011, 8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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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nglish2011. 12. 23. 01:31


Three Days

 

On a Wednesday, in April.

While hurrying out the door, neither one of the two sisters realizes it would be the beginning of the first day. The older sister looks back repeatedly, her husband alone at home weighing on her mind. Even on a day when she knows he will go out to meet his friends for lunch, her instinct forces her to worry about his lunch. He is probably one of those men who still cannot bear to eat alone, let alone fixing one for himself. Probably he can, but then he might become sad, she utters to herself. The idea of cooking own meals has become the anathematic source of sorrow and disgrace, for Korean men. Her brother-in-law appears considerate enough, to let his wife stay with her for a couple of days. Her house is near the hospital, where his mother-in-law, her mother, lies dying.


From the entrance of hospital the two are almost running. A nurse remembers them and smiles at them.

No need to rush! Your mother has been getting better through the night!

Getting better through the night?

Getting better? It seems impossible. But the nurse's insistent tone gives her a faint pause. The two stop to take a breath and move toward their mother's sickroom.


They greet.

Mother, Mom!

Her mother's condition looks unchanged. Stunned by the news that Mom's health took a sudden turn for the worse, her siblings came gathered at the hospital. And some remained and monitored Mom all through the night.


Mother, Mom!

How are you? Are you still very sick?

It's been a couple of days since her mother has said anything. Now Mom just greets her with an expressionless face. Is it a greeting? Can Mom hear anything at all?



She leaves the room to run an errand. Her sister comes out with her.

Do you mind, if I...?

No worries, unni - big sis. I heard our brothers are on their way back here too.

See, I still need to finish something that should have been done yesterday.

I know, something that should be done needs to be done. It's just what if it happens....

No way, it cannot happen today.



After a lunch break, she's back with her sister, and their mom.

How come you are by yourself?

No, yes. Our brothers were here earlier, but I told them to go, because you would be coming soon. We have to take turns somehow.

See, you should go home today.

I know I should. Anyway, the youngest will come around 7 from work. Till then, can you stay here until then?

OK, no problem.

Mom, I have to go home today, and see you tomorrow. Unni will be here.


She thinks she hears Mom answering, "Uh-huh." Perhaps not a definite word, but some murmuring sound, a faint acknowledgement, she imagines.

She remains alone. Alone with Mom.



*



I keep a vigil at my mom's sickbed just like I am on some duty to maintain daily logs. Mean as ever, I catch myself. Her breathing seems even but a little heavier than in the morning. Her feet and legs are swollen up as before, but for a moment I sense some bluish color on her pale feet. The hands on the abdomen just fall to the side every time I put them back up. Maybe I should just leave her hands down. Her eyes are closed. Sleeping?


Mother!

....

Mother!

No movements in her eyes. Even in her better conditions, she did not talk to me that much. She seems to have slight fever. Her blood pressure is low, so says the nurse. I know it's one of the traits in my family. Anyway, there are no changes, no response.

What next? I wish I had brought something to do, knitting or....



Around 4 in the afternoon.

A relative, the wife of my late father's elder brother, comes by the hospital, herself leaning on a cane. A cousin arrives with her, assisting her visit.

I have had bad dreams for several days.

But, thank you for coming all this way, aunt!

Your mother, no longer recognizes me, does she?

I can't tell. Mom doesn't say anything. It's been a couple of days.

Well fit and energetic, since her youth - spend money freely. Until recently, she was a healthy senior....

You take a good care of yourself, aunt!

I should die first, me going senile, as good as dead.

Don't say that!

The aunt leaves after it's clear that Mom no longer can communicate. Only the sound of her walking stick remains in the hallways outside. And that remnant calls out the past in my mind.



Mother has lived it up. In every sense of that phrase. Still, why did I complain so vehemently about every single thing she did? Did she feel hurt because of me, with my cold, piercing disapproval? Or was she hurt because of the eldest son who had disappointed her? The son whose opulent lifestyle that partly benefitted from his betrayal of his own mother?

Mother refused to accept the traditional housewife's role from the beginning. Instead of the mundane, household chores, the bright-red manicured nails served as the ironic coat-of-arms for her freedom as a woman. Yeah, I just couldn't forgive her for that. No, I just wanted a mother, a normal mom, whenever she was not around. She was nowhere close to being a feminist nor did her life seem like the culmination of the empowered women. She was just not around. She just did not care for the banality of daily life. Images of buying tofu and bean sprouts and sweeping the floors simply did not exist in her life. I always felt guilty about her extravagant style, at that time when I was young, knowing some of my friends' mothers sometimes skipped meals to feed their children. I imagine the old woman lying next to Mom in her own sickbed may be one of those starving mothers. The woman's bony, leathery hands put me to shame. Sitting in a small chair next to Mom's bed, I get lost in thought, deeply, more and more.



So, when was it? I recall a dark room, where there was a photo inside of a drawer. Why did I enter the room? It was not Mom's room. But that of my younger siblings, near the well in the backyard. It must have been before we got running water in the house because the well was the source of our drinking water. Perhaps after washing my face with cold water, - It certainly was on a hot summer day. - I absentmindedly sat on the room's entrance and then.... Why was the photo there in that drawer? That curious photo! The woman's face turned away. If I think about it now, could it be a pose for a nude picture? And the model was my Mom? That ring with a big jewel on the model's finger, unmistakably belonging to Mom. It was Mom. She knew a lot of people, unlike other normal mothers. Was there an artist among her acquaintances? I couldn't fathom such things at that time. Was (or is) it easier to grasp, if I imagine that it was an artistic endeavor? Surely it was a work of art! Who took that photo? That question still haunts me. An unknown photographer's artistic photo whose object of adulation was also the object of my hatred. And it only grew bigger from then on.


Why are you late?

See, I was out only for a while.

You should go out earlier and come home earlier than us children. Why do you come home only now, this late!

What time is it now? What's the big deal? I told you, I went out a little while ago. Was the dinner OK, eh?

What dinner? Is it all OK to you, just because we have regular meals? What a sweet home where Mom comes home late every evening! From socializing!

Who talks like this to her mom? My dear ice princess! Your siblings don't' seem to mind, do they?

Other daughters come home late and make troubles, not their moms. What kind of home is this! I hate my life.


Every single day I talked back to Mom. An outgoing mother, and a nagging daughter. In a society, where talking back to your elders is frowned upon, we had a surreal relationship. We were trapped in a vicious circle, each with no discernible way out. With deep-seated distrust of my mom, and by extension, of the entire world, I was depressed for many years. I hated my life, really. Nobody knows other person's life, because everyone exists outside of those of the others. Mom's was an outgoing personality - what's this? why I am using the past tense? - while I usually avoid people. Among hundreds of guests who came to my wedding, there were only four people I knew: one married couple and two classmates. The rest came to see my mother's first daughter getting married. I wanted to be a mother who would focus on home. I did not want to be berated by my own daughter someday. Succeeded, a little?



It's 10 to 7.

My eyes look up at the clock on the wall. Mother is alive, the only sign being her regular breathing. I tremble with guilty about using past tense while thinking about Mom. No facial expressions on her. Fortunately, don't see a pained look on her face. It's calm, even when the nurse feeds her some porridge using a tube through her nose.

I'm anxious about the dinner at home. Nothing is prepared, because I hurried out in the morning when I left the house. My cell-phone rings.


Unni, how is Mom? I'm at the bus terminal. Don't wait for me and go home now. Soon I'll be at the hospital.

Oh, yeah, well, not yet. No need to rush.

Don't worry. I am almost here.

Yeah, you have the entire night shift coming up for you.

Don't worry about me, you know, oppa - big brother - is coming too, I hear.


Oppa's coming, really? I check on Mom while wondering. How desperately has she been waiting for her first child, first son? After seven months in the hospital she seemed to give up the hope. She gave up, at least according to her own words.


You want call him?

...

You want call him?

Leave him be.

Shall I call him?


Mom turned without a word, so said the younger sister. Mom surely knows that her son obviously doesn't want to talk about all the things that followed that incident. Besides, like well-ripe mung beans' shells in summer days - they burst hardly before you touch them - he easily storms up a temper. No one dares to, wants to talk to him anymore.


Is big brother coming?

Anyway it's time for me to leave. I hesitate; look at Mother's face, then at the clock. Still a couple of minutes left to seven o'clock. The nurse says to me, "just go, go ahead." Two nurses are always around the patient. Does that mean it could be a dangerous moment, soon? Who knows? The youngest sister will arrive soon. 


I stepped toward the car. A blinking sign on the dashboard - the gas is almost out. It was blinking since yesterday. I drop by at a gas station, feeling anxious. The youngest sister calls already from the hospital.

I'm with Mom now. Don't worry. You'd better rest easy.

Rest easy?

We - her children - won't let her die alone. To be with dying parents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filial piety - a Confucius virtue to show one's respect for one's parents. It's our custom. Even a prodigal son will be forgiven, if he stands by dying parents. But Mom is still breathing. So maybe she will be fine. But I recall, she cannot even swallow, even fluids since lunchtime. The dinnertime meal was fed through a rubber hose directly in to the stomach. A tube supply feeding is necessary and not necessarily dangerous, so said the nurse. "Some people go on in such a state for several months ...." Thinking back and forth I arrive home, late.




Mom is not so good. On top of it, I had to stop by to get gas.

Nobody blames me for being late, but I murmur something by myself, an inaudible excuse to an unspoken accusation. Meanwhile, I put the rice into the pot. The soaked rice begins to boil soon. Now I let the rice settle in its own steam and prepare side dishes. I cut the Kimchi fresh each time - a simple, traditional trick to liven up its tangy flavor. Otherwise, he won't touch a single piece of Kimchi. My ears are focused the phone. That couldn't be happen yet, but....



The telephone starts ringing. I can't quite pick it up quickly. The sudden finality of it also surrounds me. I run to the phone. It happened, I am told. Is that what I waited for? To end the battle that had no hopes? After all, Mom was critically sick. The doctors try to console me, "She passed away without any acute pains, and it's almost like a miracle."  Even so, I realize that it hasn't been even a half hour after leaving the Mother's bedside.  By a half an hour, I missed being at Mom's deathbed. Is it acceptable because I had to prepare a supper meal for my own family?


Your older sister is really cold.

It was Mother's last word the other day, according to my younger sister. She probably meant to say I was judgmental. It is stuck not only in my ears but also in my heart now. I have no opportunity to stop being icy cold to my mom. Mom passed away.

And I was not around.




Mom's offspring - children and grandchildren - came home from everywhere and all seemed surprised at her death. Wasn't it a predicted result, the end of an incurable patient, and what else then? Sooner or later, it would have come true. But it still astounds. The fact that there isn't Mom in the world, an unrecoverable loss. The one who believed in her children, come what may. Who believed in them - us - even in some exaggerated ways. The "icy cold" one, the "sweet" one, even the one that betrayed her.... To her, all her children were a poignant reminder of life, with all of their weaknesses, including those she chose to ignore.


It was good that the youngest child, short on sweetness but with solid grasp of reality, stayed by Mom's deathbed. It was said to be a kind of peaceful death, without a single word, single sound.

She's not breathing.

The nurse, standing and watching the patient together, said, and just like that Mom was breathless. Not a single word.

You want call him? - Leave him be.

Those were her last words. Mom died without a will.


It's not true. There used to be her will, long time ago. Mom had to handle the family's properties when my father passed away - I cried and cried and thought that my father died because he couldn't stand Mom's bright-red manicures on her nails any more. The hatred against Mom grew exponentially. To her sons, she divided and gave them some property. She also announced that the remaining property - a large commercial building - is going to be fully her daughters' after her death. Over the years, the circumstances were changing, and my mom lost that building. She had to hand it over to a creditor, because of the loan payments, unpaid by her first son, my Oppa. Mother seemed to be embarrassed about that, especially in front of her daughters. She no longer could take pride in herself for being equally generous to all of her children regardless of their gender, as she used to brag.


Even then, it was her first son, - no, his wife to be exact, - showed anger to Mom for losing the property. Her first-daughter-in-law couldn't, wouldn't forgive Mom even though she had promised the building would be bequeathed to her daughters. Regardless of Mother's will, perhaps the daughter-in-law thought it would be hers one day? No way. When Mom lost the last property, she also lost the first son. In recent years, Mom's fortunes have been waning. Imagine, Mom did sometimes her own cooking!  But she never went buying tofu and bean sprouts, ever. It was simply not in her repertoire. Now I realize it was rather good for her, if it could keep her dignity in her own way. Perhaps that vane pride she wore outside turned inward and became cancer cells, when she no longer could bear the discord between her plentiful past and her increasingly diminishing present.




"The fact is" Mother passed away. And she did not get to see her first son. But now we have to think about the funeral. A big funeral hearse arrives and takes Mom from the hospital. Ah, that's the last moment. It hits me again, from now on, Mother doesn't exist. Now we're orphans. We don't have our Mom any more who loved us, even if so judgmental, so disloyal we might have been. But my mother's mitochondria, like the powerhouse of our bodies' cells, will live in me, who didn't know how to love Mom. Not in his loved first son, because only daughters carry on the mitochondrial lineage.


What now? Funeral must be held. We still debate whether to contact the big brother or not. Who decides it? The second son is responsible, of course. Basically the phrase 'will he attend or not' at the funeral of one's own mother doesn't make sense. We all agree that he should be told. We all are equally capable of good and evil, so someone among us, even the betrayer deserves to have a chance to make up.


Will he come?

Well, once it is informed.

Has he answered the phone?

Yes, he picked up the phone, amazingly.


Any news?

He said he will.

When?

Well, he said he will and is on his way.

I doubt he'll show up.

You don't really mean it.

Everyone's still talking about whether he is coming or not at the funeral.

Any news?

Nothing new, but he said he will.

When?

Well, and his son told me, he'll come too, with his father.

Mom loved my niece. I recall she ordered to install extra window-casting when he was born.


Then, shall we postpone the casketing?

How?

But he comes and can't see Mother's face?

But how can we...?

Yeah, though we should put on our mourning vests.


We cannot wait any longer and attend the prearranged casketing ceremony. Shrouded and dressed in powder pink and pale blue clothes that she had prepared long time ago, Mother looks like a woman from the royal court centuries ago. Too beautiful to be in a coffin, I am thinking, just like sleeping, even beautiful. - Curious, I've never thought that my Mother was beautiful. Shortly, they place the body in the coffin and close nails it shut. It's the end.


Can we pull out the nails? Someone asked hesitantly.

What nails?

Say, the casketing is over, but. What if he'd persist stubbornly to see Mom later?

Gee, I don??t know.

Will he come?

He said he will.


We all together wonder in silence why someone asked that silly question. An image of that snarling face might have struck him, what a casketing without the main mourner! All keep glancing toward the front door. So the second day was over.



The next morning, the funeral takes place.

The funeral cortege leaves the funeral home at 10 a.m. Unlike the loud crowd of mourners from yesterday, only the calm, even chilly, atmosphere sets in the room. We avoid each other, making sure we make no direct eye contacts. Nobody asks the question from yesterday. The second eldest brother looks tense, holding extra armband for in his hand. His hand is poised to give it to his big brother if needs be. The clock is ticking away.


It rains all day long. In the corner of the open field, all in light green, a group of white vinyl raincoats flutters. The evening shadows are beginning to fall. So the third day 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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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h Yong-Jwa is a Korean novelist, Prof. Emeritus, Dept. of German Language & Literatur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and Instructor of Korean as Foreign Language at CNU. Prizewinner of Ewha Literature Award (2004) and PEN-Gwangju Literature Award (2010). Published 3 Novels: Eleven Pieces of Jigsaw (2001), A Dim Life (2004) and Antonym ․ Synonym (2010) and many other books including Germany and German Literature (2008).

 

「3일 Three Days」, 『펜광주』 9호, 2011.12.12. 19-32, 33-5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2. 13. 00:13

 

3일


 

4월의 어느 수요일.

자매는 서둘러 집을 나서면서 둘 다 그것이 그 첫 날의 시작인 줄은 몰랐다. 언니는 자꾸 집을 돌아본다. 혼자 있는 남편이 마음에 걸려서다. 오늘은 그가 외출하는 날이니 점심 염려는 없는데도 본능적으로 점심 걱정이다. 혼자서는 밥을 챙겨먹지 못하는 남자인 셈. 챙겨먹지 못하기야 할까만, 그러면 슬퍼지는 남자니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손수 제 식사준비란 한국남자들에겐 치명적인 설움이요 수치의 근거였다. 동생의 남편은 하루쯤 아내를 언니 집에 두고 갈 만큼은 속이 넓다. 언니 집은 병원 가까이 있으니까, 게서 장모님이 오늘내일 하는 터에.


병원 입구부터 둘은 종종걸음이다. 간호사가 알아보고 웃는다.

뛰지 마세요, 밤새 많이 좋아지셨어요!

밤새 좋아지셔요?

좋아진다니? 불가능한 단어다. 그래도 간호사의 단호한 어조에 작은 안도를 느낀다. 둘은 숨을 돌리며 어머니의 병실로 향한다.


아침 인사.

어머니, 엄마!

그대로다. 급격히 악화된 상태라는 통에 자식들이 밀물처럼 닥쳤다. 몇은 남아서 밤새 곁을 지켰다.


어머니, 엄마!

좀 어떠셔요? 많이 아프셔요?

말을 끊다시피 한 것이 하루 이틀. 다만 무표정의 인사. 인사도 아니다. 듣기는 하실까?


언니가 서둘러 병실을 나간다, 일 때문에. 동생이 따라 나간다.

혼자 괜찮겠어?

걱정 마, 언니. 이따가 또 오빠랑 동생도 다시 들른다는데.

그래, 난 어제 해 줘야 할 일을 못해서.

알고 있어, 해 줄 일은 해 줘야지. 뭔만 안 나면…….

설마 뭔 일이야, 오늘은 아닐 거야.


점심시간이 지났다. 다시 언니와 동생이다, 어머니랑 함께.

어머, 혼자 있어?

아니, 응. 다들 다시 왔었는데, 언니 올 거라고 가라 그랬어. 교대해야지 어떻게.

그래, 너도 오늘은 집에 가 봐.

그래야지. 참 막내가 퇴근해서 오면 7시에는 온다네. 그때까지는, 그때까진 있겠지?

그럼, 당연하지.

엄마, 저 오늘은 집에 다녀와요, 낼 뵈어요. 언니랑 계셔요.


어머니가 뭐라 대답하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으응. 그렇게까지 정확한 단어는 아니지만, 무슨 웅얼거리는 소리, 희미하게나마 알아듣는 척하는 소리인 것 같다.


*


나는 당번이 되어 일지를 쓰는 기분으로 어머니의 병상을 지킨다. 내가 원래 그 모양이다. 숨소리는 고르다, 다만 아침 보다 조금 커진 것 같다. 두 발과 다리는 여전히 부어있고, 가만, 창백한 발이 어쩐지 푸르스름하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은 자꾸 미끄러진다. 아예 내려놓는 것이 나을 듯싶다. 두 눈은 감겨있다. 주무시는 걸까?


어머니!

…….

어머니!

눈을 뜨시지도 않는다. 더 좋으실 때에도 나랑은 별 말씀이 없으셨다. 미열이 있는 듯. 혈압은 낮다고, 간호사가 그런다. 원래도 그런 것이, 집안 내력 중 하나인 걸 안다. 어쨌거나 무변화, 무반응.

뭘 하지, 뭔가 뜨개질거리라도 가져올걸 그랬다 싶다.



네 시경.

주렁을 집으신 백모님이 들어오신다. 사촌이 모시고 왔다.

꿈자리가 며칠 너무 안 좋아서야.

그렇다고 고맙게도 어떻게 걸음발을 하셨어요, 큰엄니!

느그 어무니 영 사람 못 알아보는 갑다.

글쎄요. 어째 말씀이 없으시네요, 어제 오늘.

젊어 이래 육덕 좋아, 기운 좋아, 멋대로 쓰며 살더니만. 나이 들어서도 펄펄 날고 다니던 사람이…….

큰엄니라도 건강하셔야 해요!

나가 먼저 가야하는디. 이 망령, 산송장이.

뭔 말씀을.

결국 어머니가 아무런 소리도 못 알아듣는다 싶으니 그냥 나가신다. 멀리 주렁의 여운만 남는다. 여운은 내 마음에 과거를 불러낸다.



어머니야 신나게 사셨지. 문자 그대로. 그렇다고 그렇게나 사사건건 어머니한테 대들었을 건 뭔가. 쌀쌀맞은 큰딸이 서운했을까, 콕콕 찔러대는 불평이? 어머니를 실망시킨 큰아들이 더 서운했을까? 어쩌면 그 배신의 대가로 더 잘 먹고 잘 사는 아들이? 

어머니는 전통적 가정부인의 삶을 일찍이 거부했다. 진부한 집안일 대신 새빨간 매니큐어가 자유부인의 상징이었다. 그래, 난 그냥 어머니를 용서 못했지. 아니, 어머니를, 정상적인 어머니를 원했을 뿐이다. 어머니가 없는 순간에. 어머니는 그렇다고 여성해방론자들과 가깝지도 않았고, 어머니의 삶은 자율권을 가진 여성의 정점에 이른 것 같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그냥 없는 순간이 더 많았다. 그냥 삶의 진부함을 잊는 것. 두부와 콩나물을 사고 마루를 훔치는 이미지를 간단히 버렸다. 너무 멋진 어머니는 늘 죄스러웠다, 내가 어렸던 그 시대에는. 난 알고 있었다, 다른 어머니들은 더러 굶고 있었다, 자식들을 위해서. 젊어서 더러 굶었을 어느 어머니가 옆 침대에 누워있다. 그런 상상에, 저 새까맣게 말라빠진 저 손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간병 의자에 앉아서 멍한 상념에 빠진다, 점점 더 깊이.



그래, 언제였을까? 희미한 방, 서랍 속의 사진. 왜 그 방에를 갔을까? 그곳이 어머니의 방은 아니었다. 뜰의 샘가에서 가까운 동생들의 방. 집에 수도가 들어오기 전이었던 것 같다. 그 때 우물이 식수의 유일한 원천이었으니까. 샘에서 찬물로 세수를 하고 어쩌고 - 분명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 무심코 그 방문턱에 앉았다가……. 그게 왜 그 서랍에서 나왔을까? 이상한 사진 한 장. 얼굴을 뒤로 한, 지금 생각하면 누드화의 모델 포즈? 피사체는 어머니? 그 반지, 보석 알이 큰 반지는 분명 어머니임을 알아보게 했다. 분명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다른 보통 어머니답지 않게 발이 넓었다. 어머니에게 화가 친구도 있었을까? 어린 마음에 화가 생각은 못했다. 예술적 시도라고 상상했다면 더 이해하기가 쉬웠을까? 분명 예술작품이었다! 사진을 누가 찍었을까? 그 의문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누가 찍었는지 모를 사진. 사진이 찬미하는 대상은 곧 나의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미움은 더욱 자라나기만 했다.


왜 지금 와요?

응, 조금 전에 나갔다.

미리 나갔다가 우리들보다 먼저 오지 왜. 왜 이제야 오느냐고, 이리 늦게!

몇 신데 그래? 무슨 일인데? 조금 전에 나갔다니까. 저녁들 잘 먹었지, 응?

저녁? 제때 밥이면 다야? 엄마가 날마다 늦게 오는 집이 어딨어! 놀다가!

다른 집 딸들도 이런다냐, 제 엄마한테. 이 쌀쌀아. 오빠동생들도 조용하고만.

다른 집은 딸들이 늦어 야단이지, 뭐 이런 집이 다 있어. 이렇게 사는 것 싫어.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를 할퀴어댔다. 어머니 나들이에 잔소리를 하는 딸. 어른들에게 말대꾸는 영 버릇없다는 사회에서, 아주 이상한 관계. 출구를 모를 악순환이었다. 엄마에 대한, 그러므로 온 세상에 대한 깊은 불신으로 우울한 세월이었다. 나는 내 삶이 정말로 싫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모른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존재하니까. 어머니는 발이 넓었다. - 아차, 이게 뭐야?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나는 왜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지? - 반대로 나는 사람들을 피하는 편이다. 내 결혼식에 온 수백 명 손님 중에 내 손님은 단 네 명이었으니, 한 신혼부부와 두 동창생. 나는 집에 집중하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언젠가 딸에게 질책당하는 엄마가 되는 것은 싫었다. 어느 정도 성공했을까?



7시 10분 전.

내 눈은 벽시계로 간다. 어머니는 규칙적인 숨소리만으로 살아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과거형으로 말했던 죄책감에 떤다. 어머니는 무표정. 다행하게도 고통스러운 표정은 아니다. 간호사가 고무호스로 코로 죽을 집어넣는 순간마저도 아주 조용하다.

은근히 집 저녁 걱정이 인다. 아침에 서둘러 나오느라고 아무런 준비도 안 해 놓았다. 휴대전화 벨 소리.


언니, 어머닌 어떠셔? 나 터미널에 도착했어. 나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 봐. 곧 병원이야.

응 그래, 뭐 아직은. 서둘지 마.

염려는. 다 왔다니까.

그래, 그럼 밤새 고생 하겠구나.

아니 걱정 마, 큰오빠도 올 거라 그러던걸. 



큰오빠도 올 거라니, 정말? 의아해 하면서 어머니를 바라본다. 오빠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을꼬. 병실 생활 7개월째를 접어들면서는 포기하신 줄 알았다. 적어도 말씀으로 그러셨다.


연락할까요? 

…….

연락할까요?

관 둬라.

연락해야죠?


묵묵히 고개만 가볍게 돌리시더란다, 동생 말이었다. 어머니는 오빠가 그 사건이래 모든 상황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은 줄 다 아시는 게다. 게다가 오뉴월 녹두 깝대기 터지듯 하니, 큰오빠에겐 사실 누가 말을 붙이지도 못한다, 하고 싶지도 않고.


오빠가 온다고?

아무튼 갈 시간이다. 나가려다 말고 어머니의 얼굴을, 다시 또 시계를 본다. 아직 2, 3분이 남았다. 간호사가 그냥 가란다. 하긴 간호사 둘이 번갈아 붙어있다. 그걸 보면 위험하신 상황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막내가 곧 도착한다지 않은가. 


차로 향한다. 계기판에 표시등이 들어온다. - 기름이 바닥이다. 아차, 어제부터였지. 주유소까지 들리다 보니 마음이 더 바쁘다. 막내는 벌써 병원에서 전화다.

엄마 병실에 도착했어. 걱정 말고, 언니나 안심 해.

안심? 

최소한 아무도 없이 운명하시게 놔 둘 수는 없다는 뜻에 불과하다. 임종 자식이 효자다, 뭣보다 우선하는 효다. 유교에선 부모에 표시하는 최고의 존경이다. 관습이 그렇다. 어떤 탕자도 임종 시에는 용서된다. 아무튼 어머닌 숨을 규칙적으로 쉬고 계시는데. 큰 염려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심때부터는 삼키는 기능도 떨어졌다는 생각이 난다. 저녁식사는 호스로 직접 위에다 공급했지 않은가. 간호사는 그랬다, 호스공급은 필요하고 또 꼭 위험하지도 않다고. 그러고도 보통 몇 달을 가는 환자들도……. 왔다갔다 상념 속에 집에 이른다. 늦었다.



어머닌 참 안 좋으시네요. 하필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까지 들르느라고.

누가 늦었다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혼자 중얼거린다, 무언의 고발에 대한 보이지 않은 변명처럼. 그러면서 서둘러 쌀을 앉힌다. 불린 쌀이라 금방 끓어오르고, 뜸이 드는 동안 반찬들을 챙긴다. 김치만큼은 매번 새로 썬다. 간단하면서 전통적 맛내기 방식이다, 톡 쏘는 풍미를 살리려면. 또 그인 그래야 한 젓가락 먹을 것이다. 귀는 전화 쪽으로 향해 있다. 설마 하면서도.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따르릉. 차분하게 전화를 잡을 수가 없다. 갑작스럽게 종점에 다가왔다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전화 쪽으로 내닫는다. 올 것이 왔단다. 기다리던 것이었을까? 희망 없는 싸움을 끝내는 것.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심각하게 아프셨다. 어머니는 그간 특별한 고통 없이 돌아가셨습니다, 기적이나 같죠, 의사들이 우릴 위로했다. 그렇다고 그건 어머니 병실을 나선지 겨우 30분만이라는 생각이 났다. 그 30분으로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놓쳤다. 제 식구 저녁식사 준비하느라. 말이나 되는 소린가?


니 언니는 참 쌀쌀해야.

불과 며칠 전 겨우 말하실 때 그러시더라는 동생의 말. 내가 늘 어머닐 비난만 했다는 말씀이시렸다. 그 말이 이젠 귀가 아니라 가슴에 박힌다. 쌀쌀함을 그만 둘 기회가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난 거기에 없었다.



다시 서둘러 사방에서 모여든 자식 손자들은 다들 놀라는 것 같았다.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나? 회복불능 환자의 끝은 예견되던 것이었을 뿐인데, 아니면? 빠르건 조금 느리건 다가온 일. 그래도 놀라웠다. 세상에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 그것은 진정 회복불능의 손실이었다. 아무렇더라도 자식들을 믿어준 존재. 자식들을 어쩌면 과장해서 믿어준 존재. 쌀쌀맞은 놈도, 살가운 놈도, 배신 때린 놈까지도……. 어머니에게는 다 같이 가슴 아픈 암시였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만 보여서. 어머니가 무시하고 싶었던 부분까지를 더해서.

 

다행이다. 살갑지는 않아도 도리를 잘 알던 막내가 있어 임종을 지켰다니. 임종이라야 평화스러운 끝이란다, 말씀 한마디 없고 소리 한 토막 없이 그냥 끝.

숨 안 쉬시네요.

함께 지켜보고 있던 간호사가 말했는데, 정말 숨이 그치셨더란다. 어쩌면 단 한 마디도.

큰오빠 연락할까요? - 관 둬라.

며칠 전 그것이 마지막 대화셨다. 유언은 없었던 셈.


아니, 유언이 있었다, 오래 전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큰살림을 정리하시던 무렵. 나는 그때 울고 또 울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새빨간 손톱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극에 달했다. 어머닌 아들들에겐 그때 벌써 상당한 유산을 분배했다. 그리고 남아있던 재산 - 상당한 큰 건물은 어머니 사후 전적으로 딸들 몫이라고 공언하셨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황은 바뀌어 어머니는 건물을 남기시지 못했다. 대부금 상환 때문, 큰아들 때문에 건물은 넘어갔다. 어머니는 난처해하시는 것 같았다, 특히 딸들 앞에서는. 아들 딸 차별 않는 관대함을 노래를 하셨던 평상시의 유세를 못 떨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딸들이 아니라 정작 큰오빠가, 정확히는 큰며느리가 어머니가 재산 잃은 것에 분기탱천했다. 분명 딸들의 몫이라고 천명했던 건물이었지만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용서할 수도 용서되지도 않았을까. 어머니의 유지와 상관없이 언젠가는 자신의 몫이라고 기대했던 터여서? 웃겼다. 그렇게 어머니는 마지막 건물과 더불어 큰아들을 잃었다. 어머니에겐 마지막 몇 년은 행운이 저물어 갔다. 더구나 상상해 보라, 어머니가 가끔은 손수 밥을 지으셨으니! 단 몇 번이라도! 그렇지만 어머니는 결코 두부나 콩나물을 사러 나가지는 않았다, 결코. 그런 건 어머니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러시길 잘 했다. 어차피 그렇게 어머니 나름의 자존심을 지니셨기를. 밖으로 향한 허영심이 어머니 몸속으로 들어가서 암세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화려했던 과거와 점차로 고갈되어가는 현재의 불협화음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분명한 것 하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큰오빠를 못 보고. 하지만 이제 장례절차를 생각해야 한다. 장례식장에서 차가 와서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문을 나선다. 아, 이젠 정말 끝이다. 다시금 아득하다. 이제는 세상에 어머니가 안 계신다. 이제 우리는 고아다. 쌀쌀맞아도, 배신 때려도 사랑해준 어머니가 없다. 다만 어머니의 미토콘드리아, 세포의 발전소나 같은 그것은 어머니를 사랑할 줄 몰랐던 딸에게도 남아서 살아갈 것이다. 어머니가 사랑했던 큰아들에게서가 아니라, 그는 미토콘드리아를 나르는 딸의 계보가 아니니까.


그런데 어쩐다? 몸을 버리는 절차가 남았다. 우리는 갑론을박, 큰오빠에게 연락을 해? 말아? 누가 결정하는가? 작은 오빠 책임이야, 당연히. 원칙적으로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 여부라는 단어는 어불성설이다. 만장일치로 알려야 한다는 쪽이었다. 우리 모두 선할 수도 악할 수도 다 가능하니까, 누군가가 흘렸다. 배신 때린 자식이라 해도 마지막 이별의 자리에서 용서를 빌 시간은 있어야 한다는 것.


온대?

글쎄, 일단 알리기는 했으니까.

전화를 받긴 했어?

그러게, 어떻게 어젠 전화를 받데.


소식 있어?

응, 온다고는.

언제?

글쎄, 오겠다고 했으니 오겠지.

설마 싶은데.

설마 안 올까.

다음 하루 종일 화제는 문제의 아들이 초상마당에 오는가 아닌가에 집중된다.


소식 있어?

응, 온다고 했다니까.

언제?

글쎄, 조카 말이 아버지 모시고 온다 했다니까.

어머닌 맏손자를 무척 좋아하셨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이렇다 할 아파트에 새시까지 새로이 해주셨다던 생각이 난다.


그럼 입관 시간을 미룰까?

어떻게 그래?

그래도 와서 어머니 얼굴도 못 보면?

그렇다고 입관 시간을?

하긴 상복을 입으려면 미룰 수도 없고.


얼떨결에 입관 시간이 닥쳤다. 곱게 화장하신 얼굴에 평소에 준비해둔 연분홍과 연하늘의 수의를 입으신 모습은 옛날 궁중의 여인 같았다. 관속으로 내려가기에는 아까운 모습이다, 잠을 자는 듯, 아름답기까지. - 이상하다. 나는 평생 한 번도 어머니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곧 몸이 관 속에 내려진다. 그리고는 못들이 박힌다. 정말 끝이다.


못을 다시 뽑을 수도 있는 거야? 그때 누군가 자신 없이 물었다. 

무슨 못?

아니, 입관 식을 해버려서. 나중에 어머닐 보겠다고 우기면?

글쎄 뭐.

오긴 올까?

온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말없이 그 애가 왜 그런 엉뚱한 질문을 했는가를 느꼈다. 상주가 오기 전에 입관하는 법이 어디 있냐고 호통 칠 얼굴이 떠올랐을 것이다. 다들 슬슬 출입문 쪽을 힐끔거렸다. 그렇게 이틀째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 발인 식.

장례행렬은 10시에 장례식장을 출발할 예정이다. 조객들로 북적대던 어제에 비해 텅 빈 공간에는 조용하다 못해 썰렁한 기운이 감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피한다.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아무도 어제의 그 질문을 꺼내는 사람은 없다. 둘째오빠가 여전히 두 줄짜리 완장을 여벌로 손에 들고 안절부절못한다. 여차하는 순간에 형의 팔에 끼울 태세다. 시계는 똑딱똑딱 잘도 간다.


종일 비가 내린다. 무심한 봄 녘. 여린 초록빛 너른 들판 한 구석에 두루마기 대신 허연 비닐 비옷들이 춤을 춘다.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그렇게 셋째 날 하루도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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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Three Days」, 『펜광주』 9호, 2011.12.12. 19-32, 33-50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