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4. 12. 21. 12:01

2014 PEN 겨울 행사가 이어졌다  - 『국제펜광주』 제12호 탄생

 

엄청 대단한 편집국장: 서연정 시인

표지 그림 : 김종

출판사: 디자인 감

 

시와 수필 46편 한영대역이 특징이다.

번역과 윤문은 주로 전남대학교 언어교육원 '원어민영어회화' 담당 선생님들이 맡았다.

특집으로는 고 범대순 시인 조명, 문순태 교수, 김종 교수, 박연성 대우교수의 글이 실렸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류명선 회장을 포함한 펜부산 회원 작품들.

 


 

 

 

 

 

 

 

2014. 10.18. 서구문화원, 편집회의

서연정 편집국장, 김정희 사무국장, 나, 박판석 부회장님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12. 21. 12:01

 

화학반응

 

널따란 침대 이쪽저쪽으로 링거 줄이 걸려있다. 훤한 낮 시간에 침대에 누워서 링거액을 맞고 있었을 노부부는 평범하고 유복한 노년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다르다면, 노인들의 안방이라고 하기에는 꽤 너른 공간에 가구 또한 세월을 묵힌 때가 없이 성글다.

영감님이 손님들을 맞아 안내하는데, 그 얼굴을 아내 쪽으로 향하면서는 입이 귀에 걸린다.

임자, 팔은 안 아프고? 여기 이종동생네 가족들, 또 고향에서도 모두 왔소!

…….

아내 쪽은 대답도 않는다.

임자, 괜찮으냐고?

그래도 대꾸가 없자 살그머니 아내의 몸을 흔든다.

자, 어디 이쪽으로 좀……. 친척분들 오셨는데 눈인사라도 좀…….

그제야 눈을 슬며시 뜬 아내는 느닷없는 하품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왜, 어디 소화가 안 되나?

할아버지의 극진한 보호를 받는 이 할머니는 어머니의 이종언니시다. 오늘 이 댁을 방문하게 된 건 순 억지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는 이 할머니의 고향사람 두 분을 터미널에서 어머니가 만나서 이리로 와야 하는 일인데, 내가 덤터기를 쓰게 된 것이다. 한번 안 올래? 혹시 올라올 일 없냐고!

자잘한 말씀을 별로 안 하시는 어머니가 모처럼 원하신 일이었다. 우리 금실이 그쪽 사람들 함께 성남에 내리면 엄마가 얼마나 수월할까. 금실이라고 부르시는 소리에 마음이 움찔했다. 그래, 핑계 만들지 말자!

나는 동행할 두 사람을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안내데스크 앞 9시! 어머니가 주시는 번호로 미리 전화를 걸어서, 무슨 접선마냥 내가 새파란 배낭을 지고 있기로 했다. 파란 배낭요, 아주 새파란!

성남 터미널엔 어머니가 미리 와 계셨다.

오시느라 애쓰셨네요, 새벽부터 나서셨겠네요!

아이고, 사돈양반, 제가 금월서 온 질부예요. 우리 어머님이 못 오신다고, 대신 자세히 만나보고 오라셔서.

첨 뵙는디, 선상님 모녀간 신세를 지네요잉. 지는 순창 매우리서 온…….

예, 뭐. 우선 간단히 식사들을…….

어머니가 반가운 전화를 받으셨나보다. 조금 싱글거리시며 택시가 아닌 주차장으로 향하신다.

아버지가 오셨다, 생각도 안 했는데. 인사 겸 함께 가시겠다는구나. 넌 집으로 바로 갈래?

대답 대신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아버지가 보였다. 한박사, 애썼구나. 자, 한박사가 옆에 타라!

판교 집은 부자들이면 찬란한 아파트에서 살리라고 무심코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냥 깔끔하고 너른 주택이었다. 어색한 수인사를 마치고 여자들은 할머니의 침대 곁에, 아버지는 주인 할아버지를 따라 거실로 나가셨다. 나도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방에 남았다.

이 판교할머니는 어머니와 왕래는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한참 떨어진 나이도 그렇지만 어머니의 큰이모, 그러니까 외할머니의 큰언니가 멀리 떨어진 담양이라는 곳으로 혼인을 했으니 그럴 밖에. 그 딸인 이 할머니는 거기서 자랐고 가까운 순창이라는 곳으로 시집을 갔고 한평생 무탈하게 거기서 살았었는데……. 그런데 어찌 보면 다 살고 나서 느닷없이 기이하게 이사를, 정확히는 엉뚱하게 신도시 판교에 새살림을 냈다고 하니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 간에 누구라도 다녀와서 속내나 알아두자고.

개가라고요? 개가는 무신!

그럼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네가, 아무리 혼자됐다지만. 자식들은 어떻게, 뭔 생각들을…….

첨엔 말들이 뒤숭숭했지라. 큰딸이 즈 어머니 모셔갈 사람 없으믄 막지 말고 내부두자 그랬다요. 가들도 거자 환갑 줄에 안겄제, 즈 자석들 치다꺼리에 심들 때 아녀라.

그렇다고 어머니를 팔자 고치라고…….

무슨 팔자를 고쳤다 그라요. 그냥 두 양반이 모타 산다요.

그래도 정식으로 모셔 갔으니까는.

허기는 나라도 늑발에 첫사랑이 손 내밀믄 따라 가겄소. 게다가 여 양반이 정신이 온전허들 못허잖소. 온전치 못헝께 판사아덜도 각시 눈치보니라 못 데리가고 딸들도 막상 친정 어메 못 데리가제. 그 참에 딱 허니…….

여기 사장님은 진작 혼자되셨던가요?

암만, 그짝도 상처허고 혼장께 가당체. 거그도 큰아덜은 공장인가 회산가 다 대물려 허고 둘짼가 셋짼가 또 뭐시냐 의사아덜도 있고 다 잘 되얐다요. 그래도 아부지가 첫사랑 아픈 양반 데리다 산다는디 먼 말 없었당께 효자들이제. 허기사 돈 있으믄 다 효자 받어라. 즈그도 홀아부지 모시다가 아부지가 아부지 돈으로 새 세상 산다는디 뭐시라 하겄소. 긍께 우리가 와보기를 잘 했소안. 솔직히 말혀서 고향서는 긴가민가 허는 사람들도 있었어라. 가문 말허는 사람들도 있고, 안 그러겄소? 다 묵은 밥에 코 빠친다고들도 허고.

이웃에서 일도 봐주고 오래 살아서 ‘참 형지간같이 살었어라’ 하는 매우리 할머니가 속내를 잘 안다고 하는 말에 다들 좀 어리둥절했다.

이야그가 길어라. 여그 김 사장님이 일 년에도 몇 번 씩은 그짝 고향에 들리고 그랬다요. 글다가 여 양반 소식을 듣고는 그냥 자석들한테부텀 상으를 혀갖고. 아, 요양병원 안 가고 여그로 왔응께, 우리가 한번은 꼭 봐야헝께. 글고 나보담은 올라올 수 있으먼 올라와서 함께 살자고 허는디 참. 여그 시방 일허넌 아짐은 낮에만 오고 밤엔 봐줄 사람이 없디야. 나도 자석들하고 상의를 혀야…….

영문도 모르고 들은 긴 이야기엔 첫사랑 소리만 있었지 내용은 없었다. 매우리 할머니로선 결혼 이후의 그쪽 생활만을 아는 때문이었으리라. 이른 저녁을 준비해 내놓고 부를 때까지 무슨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은지. 정작 마나님은 링거액이 끝나자 뽀얀 얼굴로 일어나더니 아장아장 화장실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고모님, 저예요. 순석이 각시, 금월 조합장 동생네 큰며느리라고요.

언니, 저 명순이, 박실이 이모네 명순이 모르겠어요?

…….

가늠이 안 되는 양 반응이 없자 순창서 온 할머니가 얼굴을 들이 밀었다.

지 성구어메라우, 매우리 사는 방촌댁, 성구어메.

성구…….

시상에. 성구어메를 모리면 진짜 암껏도 모리는구먼. 워쩌다가 이려.

콧잔등을 씰룩거리는 품이 여간 속상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말 저리 사람을 몰라본다면 치매라는 말이 맞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빤히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깨끗한 노인네가 그렇게 고약한 증상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더니 몸을 앞뒤로 흔들며 자장가 같은 무슨 곡조를 흥얼거렸다, 콧소리로.

에고, 옛날에 금잔디가 다 뭐라냐…….

옛날에 금잔디는 저녁상에서도 여전했다. 노마님은 밥을 먹다 말고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곁에 앉은 영감님이 손을 잡아주면 잠시 그쳤다.

두 손들은 너른 그 집에 짐을 풀었다. 당일로 다녀가기엔 힘든 거리였으니까.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머니는 이종언니의 옛날이야기를 흘렸다.

소문이 나자마자 난리가 났었다 하더라고. 오죽하면 단김에 시집을 보내버렸을까. 학교 다니던 중에 그냥, 것도 산 너머 순창으로 보내버렸다더라고. 저 김 사장 어른이 그땐 볼품없는 집안에서, 아버지가 없음 다 그렇지 뭐, 무지 고생하고 살았다지 아마. 나이도 더 어리고.

첫사랑이 뼈아픈 이별로 끝났다고 해서 한 세월 다 살고서도 그게 유효할까요?

보고도 그러냐, 금실아. 정이 뭔지, 한번 진짜를 줘버리면 그 구멍이 평생 가는가 보다. 아버지가 불쑥 말하셨다.

상대가 잘 몰라도요? 치매든 아니든 어쨌든 잘 기억도 못하고……. 설마 죽어버린 뒤에도요?

거기까지야 알겠냐. 한박사가 연구해 보렴.

 

 

나머지 이야기는 연구가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서 얻어들은 파편들이다. 오후에 두 분이 나눈 이야기들의 조각을 맞춰 본다.

그렇지만 맘이 두 갭디다. 향연이 아프단 이야기 듣고는 내가 홀애비 된 게 천만다행이다 했으니 몹쓸 놈 아뇨?

그렇게까지야.

옛날에 금잔디는 잊을 수 없는 가락이요, 나한테는. 그 옛날, 단 한번 용소까지 함께 산길을 걸었던 날. 바위 위에 앉은 향연이 이상한 노래를 부릅디다. 북망산 수풀은 고요타 매기, 영웅호걸이 묻힌 곳, 흰 비석 두러서 적힌다 매기, 아 우리가 놀던 곳, 고운 새들은 집을 짓고 어쩌고. 나중에 알게 된 그 노래는 다른 가사던데. 한선생도 아시다시피.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아 내 희미한 옛 생각 지금 우리는 늙어지고 매기, 머린 백발이 다 되었네, 그렇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향연은 북망산 어쩌고 라고 불렀으니.

그건…….

예. 윤심덕이 그리 불렀답디다. 윤심덕도 매기도 죽고 없지만, 어쨌거나 향연은 살아 있잖았소. 고향 갈 때마다 바람결에 듣는, 들어 모아지는 향연의 소식, 소식들. 이른 나이에 시집갔지만 넉넉한 집안에서 아들 딸 잘 낳고 잘 길러서 성공들 하고……. 멀리서 부는 훈풍이거니 하다가도 아린 솔잎처럼 쑤셔댔다가. 그러다가 연전에 혼자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덜커덩했지요. 그래도 차마…….

차마.

내 가정을 되돌아보았지요. 속절없이 새로이 시작했던 인생. 아니 ‘새로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되지. 원래의 인생을 시작한 적도 없었으니까. 더 말이 안 되는 건, 원래의 인생이란 게 대체 뭐겠소? 수수하고 단단한 아내. 깐깐하게 키워낸 자녀들이 눈앞에 얼씬거렸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길다면 길고 단출하다면 단출한 인생이었소.

 

 

아니, 안되겠다. 정리를 삼인칭으로 해서 이야기에 객관성을 주자.

김 할아버지, 김덕숭의 고향 금월마을은 금강수란 이름의 못을 두고 뒷산이 반월형으로 되어 있어서 금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은 농가마을이었다. 인근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흘러 흘러 황해로 입수될 영산강이 제법 물길을 갖추기 시작한 평지에 있어 농사는 잘 되는 편이었다. 지금은 바로 담양 군청 옆에서 시작된 옛 24번 국도를 따라서 금월교까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조성되어 제법 알려진 마을이었다.

그는 그 길에 메타세쿼이아가 심어진 것이 70년대였다고 기억한다. 그가 사십을 바라볼 때였으니까. 자라면서 나무 몸통은 회색빛에 모양새 또한 부자연스러운 삼각형 모습을 보면서는 왜 하필 이런 수종을 심었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해 가을 불그레한 갈색 단풍을 멀리서 보는 순간 숱 많은 붉은 머리카락의 그녀가 떠오르면서 메타세쿼이아는 어느덧 추억의 시발점이 되곤 했다. 이제 사람 열 길, 아니 스무 길도 넘어 보이는 나무 꼭대기를 보면서 푸른 봄에도 가을의 붉은 단풍 머리카락을 생각하곤 했다. 그의 나이 일흔도 훌쩍 넘어 대머리가 된 걸 아랑곳 않고. 아니, 그녀의 붉은 숱 많은 머리카락도 성긴 백발이 되었을 틀림없을 사실 따위는 그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다 이른 봄 잎겨드랑이 가지 끝에 달려 밑으로 늘어진 꽃에서 스무 남은 개의 수술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벌써 가을의 붉은 단풍을,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을 떠올리는 형국이었다.

그날도 한식날을 맞아 고향을 찾은 김 옹은 바람결에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이른 봄이지만 팔각정 경로당에 나앉은 어중간한 늙은이들의 잡담이었다.

금과 마나님이 치매기가 있다네.

여그 참봉 댁 손녀 말여?

엉, 부잣집 며느리되어 갔다가 인자는 판사님모친에 뭣이 부족혀서 참.

설마 그 고운네도 치매라던가.

일흔 넘어 고운네가 어딧당가. 옛 말이겄제.

무슨 소리. 한번 해병대믄 죽을 때꺼정 해병대고, 한번 미녀믄…….

죽을 때꺼정 미녀라 그건가.

그렁께 그것이…….

덕숭을 힐끗 거리며 분위기를 띄우는 양이 소싯적 동티를 나이 들어도 잊는 법이 없는 동네가 맞다. 한마디로 어떤 홀어미 자식과 풋사랑에 빠진 마을 부잣집 고녀생이 억지 혼인으로 산 너머 순창으로 시집을 가게 된 사연 말이다.

덕숭은 가슴을 쥐어 잡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향연이 혼자가 된 것도 모자라 치매에 걸렸다고?

그가 부르르 떨자 중늙은이 하나가 놀린다.

케미. 이건 케미다. 야, 케미에는 나이가 없소 그랴.

케미? 그거이 뭔 소리?

케미도 몰르요, 이 양반들. 나이 묵는다고 테레비도 헛것으로 보남.

긍께 거이 뭐냐고!

그거이 우리말로 하믄 화학이라고, 우들도 농업학교에서 화학이 뭔가는 배웠제. 아니 화학비료다 그라믄 알지 않남.

화학비료 말이 여그서 왜 나와?

화학이라는 것이, 가만있자, 학교에서 말하는 것 말고, 여그 있네, 우리 김 사장 형님 사업해온 것 있잖은가, 화학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을 죄다 화학물질이라고 하잖던가.

화학물질 그런 것이 여그서 왜 나오냐고.

참도 급한 사람.

긍께 들어 보자고.

그 화학물질이 서로 붙으거나 떨어지는 - 아니 다시. 한 개 물질이란 놈이 다른 물질하고 작용을 혀서 생판 다른 물질로 변허는 것을 화학반응이라고 허는디.

허는디?

물질이 두 개가 만나믄 서로 파괴허거나 서로 결합혀서 어떤 다른 물질로 변허는디.

파괴허고 결합허고.

조용, 좀 들어 보장께.

요즘 애덜 말로 화학반응이라고 허면 남녀가 죽고 못 살게 붙어서 반응을 일으킨다 뭐 그런 것 말이라네. 케미는 화학이란 영어를 줄인 말인디, 어디 요새 애덜이 제대로 말들 허남.

자네랑 나랑 케미다 그라믄 동티났다 그 말이라고?

왜 자네를 거 갖다 붙이나. 좋게 내 첫사랑 찍어 말하제.

첫사랑 - 그 말에서 모두는 움찔거렸다.

덕숭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첫사랑이 요새 녀석들 말로 그 케미일 걸세. 화학적인 변화는 물리적 변화랑은 다르제.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이 물리적 셈법이라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도로 하나 되는 것이 화학적 셈법이네. 나 그거 케미 할라네. 두고 보소들.

그러고서 덕숭은 서둘러 자녀들을 불렀다. 아들 셋에 고명딸. 큰놈은 화학물질 사업 마다않고 이어 받았고, 둘째는 명문대 나와서 행시 준비하다가 안 되긴 했어도 썩 괜찮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셋째는 지방 의과대학 나와서 의사다. 막내이자 고명딸은 사대를 나와서 선생을 작파했으니 아깝지만 오빠 친구랑 결혼해 잘 살고 있다. 이 아이들을 불러 모아서 선언을 했다.

아부지가 새로 첫사랑이랑 살고 싶구나.

첫사랑이라뇨?

느그 어무니 삼년상 지난 지도 한참 아니냐. 나 첫사랑이랑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구나. 아프단다. 아파도 좋다. 얼마가 될 지 몰라도 그렇게 할란다. 그리 알아라.

이구동성으로 놀라는 아이들 앞에서 흔들림 없이 말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래, 케미였다.

아이들은, 이제 아이들이 아니라 중년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지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원래 자녀에게 부모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냥 부모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 늙으신 아버지에게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도 믿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시 그 비슷한 것이 옛날 옛날에 있었다 하더라도 세월이 언제인가. 자녀들이란 그렇게만 생각한다.

그랬다, 덕숭은. 그 옛날 배밭 일 도우며 야간중학에 다니던 시절에 한번 내동댕이쳐진 이래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살아왔다.

단기 4287년 - 1954년이겠으나 그때는 아직 서기를 쓰지 않았다 - 의 일이었다. 그의 나이 열여섯. 아버지는 사오 년 전 전쟁이 날 무렵 벌써 집에서 떠나갔다. 아버지가 떠나신 정확한 날도 알 수 없었다. 여름이 들어 부쩍 바빠지셨던 아버지를 볼 수 없는 날이 많더니, 그해 가을부터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느낌으로 덕숭은 아버지가 오시지 않으리라 알았다. 언제부턴가 어머니가 아버지 진지를 담아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한 아버지가 집에서 금기의 대상이라니.

크게 달라진 일은 농사를 짓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 할머니 묘가 있는 밭 뙤기에서 짓는 밭곡식으로는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국민학교를 마치기 전이었으니 중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도 이 년을 늦게 야간중학교에 라도 가게 된 것은 마을의 대부이자 향연의 조부 참봉님 덕이었다. 참봉의 눈에 든 몇몇 아이들은 그렇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향연은 참봉의 후대라서 그냥 참봉 댁이라 불리는 그곳, 동네에선 대궐집에 살고 있었다. 별표나 거북선표 검은 고무신 하나로 일이 년을 버티던 당시, 그것도 닳아서 맨발로 뛰던 동네 소년들의 눈에는 하얀 동그란 코 구두를 신은 향연은 나무꾼과 선녀에 나오는 선녀만 같았다. 어쨌거나 액자 속의 그림이라거나 아무튼 근처에도 갈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었다.

그러다가 성적표를 받아들고 참봉 댁을 찾아가 인사를 하는 날, 덕숭은 향연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마침 여학교 교복 치마를 날리며 하얀 구두 뒤꿈치를 저으며 안채로 들어가던 뒷모습이었다.

조금만 빨랐더라면 옆모습을 지나쳐 볼 수 있었을 것을…….

덕숭의 걸음걸이가 마을 최고로 빨라진 것이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그날, 참봉 댁으로 향하던 길은 덕숭으로서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고, 향연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는 보았어야 맞는데, 어쩌자고 한 발짝 놓쳐서 지나칠 수 없었을꼬. 덕숭은 작은 키와 더 짧은 다리를 원망했다. 아니 범인은 해찰이었을 것이다.

덕숭의 해찰은 유명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속을 썩인 것들이 모두 그 해찰 탓이었다. 심부름을 보내면 갈 때는 곧잘 간다. 하지만 일이 끝나면 천방지축이 되곤 했다. 질퍽한 땅에서 튀는 개구리 한 마리를 따라가다가 물 반 땅 반에 고꾸라져 오거나, 구름 따라 간다고 야산 등성을 넘어가 길을 잃곤 했다. 중학교에 가자 상황은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학교에 지각하는 일은 농사일 때 말고는 없었다. 공부는 하고 싶어 하는 게 맞았다. 그것만이 돌파구요 희망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다가 향연을 만났다. 그녀가 돌아오는 길, 그가 나가는 길. 그 짧은 시간의 불꽃은 타오른 순간마다 전율로 요동쳤다. 다른 표현은 없다. 그런 것이 불꽃 아니라면. 스치기만 하고서, 다만 스치기만 하고서도 가슴은 터졌다.

수요일 하루는 조금 더 늦는 그녀를 길에서 만나고자 그제부터 덕숭은 야간학교 시간을 제 마음대로 맞춰서 나가곤 했었다. 빠르게 빠르게 늦게, 빠르게 빠르게 낮에. 스치고 마는 건 너무 아쉬워서 이내 뒤돌아 멀찌감치 따라가서 그녀가 대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학교로 향했다.

그랬다. 그러다가 그랬다.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고 떨었다. 눈이 마주치고 떨었고 알았다, 첫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헤어지고 눈에서 멀어졌어도 그 무엇은 타고난 재가 되어서도 불씨가 남아. 덕숭은 쪽지를 준비했다.

- 우리 산책 같이 해요, 누이.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 누이, 우리 용소에 가요.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저 덕숭이가.

- 향연 누이, 우리 용소에 가요. 일요일 2시, 용소정류장에서 봐요. 저 덕숭이가.

또 쓰고, 또 쓰고……. 네모로 접을까, 연애편지라는 일곱 칠 자 모양으로 접을까.

멀리에서 향연의 모습이 보이면 쪽지를 오른 손에 감출까 왼 손에 감출까 가슴은 두 근 반 세 근 반. 향연이 그의 왼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는 쪽지는 오른손 안에 들어 있곤 했다. 반대로 향연이 그의 오른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는 쪽지는 왼손 안에 들어 있곤 했다. 차마 내밀 수 없어 그가 그리 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쪽지가 왼손에 들어있고 향연이 왼쪽으로 지나치는 날에도 손을 더욱 꼬옥 쥐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너무 쥔 탓에 한참 후에도 펴지지도 않았다.

 

 

을 좀 돌리자. 하늘은 인간에게 아주 가끔 마약을 허한다.

아무튼 그들도 꿈의 순간을 누렸다. 그가 쪽지를 건네지 않고서도 둘은 용소 나들이를 갈 수 있었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폭포 입구에 이르니 오른쪽으로 출렁다리에 이르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이 너무 가파르기도 하고 길기도 했지만 용소를 내려다본다는 욕심으로, 아니 둘이서 함께 한다는 감동으로 둘을 그 많은 계단을 달렸다. 계단이라야 그때는 지금처럼 완벽한 철계단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산길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출렁다리 왼쪽으로 무서 무서워하며 한숨을 내려가자 앞에 못이 있었다. 안개 같은 물방울이 퍼져 오르는 연못 주변은 춥기까지 했다. 추위에 질린 향연 때문에 용연폭포는 포기했었다. 아니 향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떨린 가슴에, 그저 불안에 행복감에 알 수 없는 떨림에 시간가는 줄 몰랐을 뿐이다. 어느 순간 어스름에 햇기가 떨어져 서둘러 내려와야 했었지. 다음 날, 다음 기회에는 용연폭포까지 함께 가리라는 믿음으로. 소리 없는 믿음으로.

믿음이란 소리가 있었건 없었건 깨어진다.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념, 신앙, 그런 믿음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다. 지금 말은, 그냥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것, 그런 것은 깨어진다고.

그럼 그것이 사랑? 사랑이 무엇인가 누가 알기라도 하는가? 애틋하게 그리운 것? 그냥 아픈 것?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것,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 남을 이해하고 돕는 것 - 사랑을 말하는 공식적인 풀이는 소용없다. 향연은 사라져버렸고. 대상이 없어졌는데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어디로 향한다는 말인가. 생각 속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이 사랑은 아닐 터였다. 그런 설명도 없었다. 지우지 못하는 것은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이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채 알기도 전에 이별이 찾아왔다. 향연이 사라졌다. 동네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향연은 시집을 갔다. 가버릴 줄이야. 산 너머로.

덕숭으로서는 닭 쫓던 개꼴이었다. 애초에 덕숭에게는 꼴이 없었다. 꼴도 끈도 꾀도 끼도 깡도 없던 그에게 꿈처럼 나타난 연이, 향연이. 향연은 꿈처럼 왔다가 꿈처럼 사라졌다.

4288년 이월 말. 그땐 여전히 태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말했다. 하루 내내 감자를 심고 어스름에야 서둘러 돌아오던 길에도 아무런 눈치를 못 챘었다. 참봉 댁에 신랑이 장가들어 잔치가 벌어졌던 그 일을.

금성산에 꼭대기에 올라 그 너머 순창이라는 곳을 눈이 째지라고 쳐다보며 울부짖던 이튿날. 그 다음날, 그 다음날. 이산 저산을 헤매느라고 어려서는 빨치산 항거지 - 그에게는 아버지의 그림자로서 금기였던 그곳 - 라서 눈길도 돌리지 못했던 용추계곡 너머까지를 돌아다녔다. 아무도 없는 산 속에서 얼마나 울부짖었던가.

나중에 돌이켜 생각하면 원통하고 원통했다. 원통하다고 할 이유는 아무래도 없었지만, 얼마나 급하면 영동달에 시집 장가를 가는가. 얼마나 급했으면, 얼마나 급히 떼어놓고 싶었으면……. 마음은 더욱 처량해졌다.

좋다. 내가 박사라도 되어 금의환향하면…….

환향하면? 이미 산 너머 시집간 향연을 어쩔 것이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아직 열여섯 일곱이던 그가 사랑에 눈을 떴다면 말이 아니다. 이팔청춘, 나이로만 따지면 그 스스로는 성춘향과 이몽룡의 나이를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언감생심 이몽룡이라고? 부사의 아들도 아닌 것이, 중학교 진학도 제 힘으로는 어려운 홀어미 자식이 어사가 될 몽룡에 빗대다니, 어불성설 아니었나. 향연은 절름발이 양반이기는커녕 올려다보다가 목이 빠질 마을 최고 양반 부잣집의 막내딸 아니던가. 애초에 ‘쑥대머리 구신형용’이라 노래할 향연이 아니었다. 차라리 나무꾼과 선녀 버전이 맞다. 아니다, 그것도 틀렸다. 손 한번 잡아 본 주제에 자식 낳고 살다가도 날아 가버린 선녀에 비교하다니. 용소에 한번 가본 것으로 상팔담에 내려앉았던 선녀라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그랬다. 용소에 이르는 길은, 단 한번 향연과 용소까지 손을 잡고 사라졌던 날은 그에게는 정지해 있다. 누가 순간을 사라진다고 했는가. 순간은 영원으로 변한다, 가슴 속에서는.

덕숭은 산중의 호수라면 평생 늘 설렜다. 실제로 선녀 이야기의 상팔담에도 가보았다. 회갑도 한참 넘은 2005년, 언제부턴가 우리는 서기를 산다, 해가 바뀌자마자 육로 금상산관광에 나섰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서 등록했다. 비무장지대를 버스로 통과한다는 스릴도 의미도 있었지만, 일정 중에 비로봉 동쪽 구룡대 아래 상팔담이 끼어 있다는 것을 보고 몸이 달았다. 안개구름이 있는 날이면 절벽을 휘감으며 피어오르는 실안개 같은 구름들로 신선들이 사는 선경을 보이겠지.

그러나 금강산에 도착하자마자 그 기대는 멀어졌다. 온통 옷을 벗은 벌거숭이 산, 때는 겨울이었으니까. 다섯 길은 되어 보이는 구룡폭포를 지났지만 물이 아닌 얼음만을 보았다. 하류엔 얼음이 얇아서 그 아래 물기를 느끼기는 했다. 더 꼭대기로 향했다가 상팔담을 만났지만, 선녀의 날개옷은 상상이 가지 않는 얼음뿐이었다.

바위와 물의 어울림을 보려했다면 여름에 올 걸, 옥빛 여덟 개 물웅덩이 물이 얼마나 투명했을까. 향연은 선녀처럼 이곳에서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오르고, 나는 하늘에서 물 길러 온 금 물동이 속에 타고서 하늘로 가면 되었을 것을.

 

 

다시 그의 목소리로 쓰자. 그쪽이 더 실감 날 것 같다.

첫 타격은 나를 쓰러뜨렸지만 이를 악물었소. 참봉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면 박사가 될 각오로 공부를 하고자 했소. 사정은 어림없었지. 그 댁 지원도 끊긴 것이, 더는 성적표를 들고 그 댁 문전을 넘을 수 없었으니까. 검정고시로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도 그렇게 마쳤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바빠서 공부나 하고 있을 여력이 없었소. 박사는 무슨. 요새는 박사 위에 밥사라고 합니다그려, 그때도 밥이 하늘이었소. 대학은 뒷전으로 우선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제대가 임박했을 때는 군에 못 박을까 하는 고심도 했더랬소. 따로 궁리해 둔 미래도 없었고, 뭣보다 군대 3년 동안 촛불만큼도 희망이 자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선임 중에 박 병장이라고 고무신공장 사장 아들이 있었는데……. 함께 일하게 제대하면 들어오라고.

그렇게 찾아간 고무신공장은 아버지 같은 아버지를 만나게 했어요. 아버지를 몰랐으니 이런 게 아버지를 갖는 것이구나, 그랬어요. 박 병장 자신은 공장 체질이 아니라고 밖으로 돌고, 느닷없이 영화 쪽으로 정신을 빼앗기더니 조연출입네 하고 다닙디다. 사장님은 나한테 화학공학과를 다녀서 제대로 해보라셨으니, 공장을 위한 공부였지만 고마울 뿐이었소.

공장은 때마침 수출이라는 것이 시작되어 그쪽 대형공장들의 주문으로 호기를 맞으며 승승장구했고. 난 공부 와중에 화학산업에 눈을 떴어요. 독일이 후발주자로서 영국의 산업혁명을 따라잡은 것도 과학자들을 앞세운 화학산업인 걸 알았제. 마취제 클로로포름, 수면제 클로랄, 무기질 비료 등 리비히그 한 사람이 기여한 것만 해도 엄청났으니. 한국에서도 화학물질이 미래다 싶었고, 사장님도 새로운 구상을 적극 지원했고요. 본격적으로 화학산업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덜컥 사장님이 쓰러졌으니, 그 일은 참 충격이었소. 요즈음 말로 하면 급성 장출혈인데, 그땐 그냥 하루 이틀 새 손을 써볼 시간도 없이 그리 되어갖고는. 결국 곁에서 운명을 지켜본 내가 공장 둘을 다 맡았는데, 고무신공장은 70년대 수출이 괘도에 올랐을 때 좋은 조건으로 큰 회사에 넘겼어요. 사실 그건 박 병장님 몫이었으니까. 아버지 것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요. 일을 했건 말았건, 아들은 아들이니까.

나머지만으로도 나는 충분했소. 화학물질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보물이었으니까. 이미 몇 화학공업사에서 플라스틱 가공제품을 생산하던 때였는데, 플라스틱시대가 열리고 있었으니 틈은 많았어요. 바닥재다 뭐다 건축자재들이나 자동차 공장 등 온통 화학물질 아니고는 어림없었죠. 파라크실렌과 스티렌, 아크릴로니트릴 등 이름을 헤아릴 수 없이…… 아차, 선생은 화학과목이 아니라했지요.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었지요. 지금이라면 환경부 화학물질안전원 감시가 세지만, 그땐 그런 기관도 없었고 막말로 때만 안 묻히면 된다, 그러고들 했어요. 지금에야 화평법이다 화관법 등 엄격한 잣대가 있지만 그때 시절은 이현령비현령이 법이었으니까. 어느 업종이나 다 그랬다고 봐도 좋을 거요. 눈 먼 돈이 눈덩이처럼 굴렀고.

염화비닐부터 시작해서 건축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의 종류를 안다면 아마 누구도 대형 주택업자가 지은 집에서 살 생각을 못할 거요. 이들 화학물질에는 발암성, 중추신경 독성 등이 있다는 것을 그땐 누구도 몰랐지요. 집은 더 견고해졌고, 무엇보다 플라스틱 표준화된 자재라서 짓기가 편해졌고. 일하기 편하고 돈이 들어오는데 누가 토를 달았겠소. 석유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화학공업은 승승장구였지. 새 집에 들어가서 두드러기나 비염 증상을 느끼면, 실은 못 느끼더라도 건망증이 심해지거나 불안감이 조성된다는 건데, 그것들 연구는 요즈음 말이지 그땐 아무도 몰랐소. 우리 같은 업자들은 면죄부를 받아 마땅해요, 그런 위험성을 말해주는 전문가도 행정 지도도 없었으니까. 성장은 좋은 것이었소. 나도, 나라도.

아내, 아내와는 백년해로를 다하지 못했어요. 조강지처 불하당을 어긴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죄책감은 마찬가지요. 마흔이 다 되어 결혼을 하다 보니 아내는 나이 얼마 아니었어요. 순하고 단단하고. 아들 셋에 고명딸을 끼워 4남매를 낳아 기르며 홀시어머니까지 잘 챙기던 사람이었소. 가슴을 내주었던가? 맘이 아프요. 한참 젊었으니 수를 못할 줄 누가 알았나요. 어머니는 무슨 미련이셨을지, 왜 고향을 못 떠나셨는지. 아내도 참 힘들었어요. 버스깨나 타고 시골 내려다니던 아내는 어머니가 세상 뜨고 나서 조금 수월한 삶을 사는가 싶었는데 그만 갑작스레. 입에 올리기도 싫소. 살만하면 긴장이 풀린다던가?

하지만 그랬소, 두 마음입디다. 향연이 혼자되었다는 소식 때에도 뭉클 흔들렸던 마음이었지만. 헌데 아프다니. 요것이 사악한 마음이건 어리석은 마음이건 어떠랴 싶었소. 늘그막에 하늘에서 내려온 마법인데. 향연의 옆에, 곁에 갈 수 있는 기회라. 가슴이 덜컹거려서는…….

 

 

그렇게 오늘의 장면이 연출된 것이란다. 조금 고쳐 써야겠다.

널따란 침대 이쪽저쪽으로 링거 줄이 걸려있다. 훤한 낮 시간에 침대에 누워서 링거액을 맞고 있었을 연인들은 평범하고 유복한 노년의 일상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다르다면, 노인들의 안방이라고 하기에는 꽤 너른 공간에 가구 또한 세월을 묵힌 때가 없이 성글고. 가만, 어디선가 화학반응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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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대 : 바다에 꽃지다, 예원 2014.11.25. 193-222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4. 9. 17. 16:37

아이들이 다녀갔다.

아들들만 5월에.

아들들과 아이들이 8월에.

미국에서 일년에 두번 다녀가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서울에서는 더 바쁘다, 일정 조절하기며 .... 

 

 

 

 

 

 

 

 

 

 

아들들이 제 아이들을 데리고 8월에.

 

큰애가 무지 바쁜 일정도 있었다고 하지만, '아빠랑 아이들만' 난생 처음 여행하기로 맘 먹었다는 사정........... 오후에 인천에 내려서 새벽 기차를 놓치고 ......

기차여행부터 신이 났었나 보다.

 

이상하게도 서울 작은애도 유치원 선생님 근무 첫주가 되어서 거기도 광주 행은 '아빠랑 아이들만'의 여행이 되었다. 물론 서울에 가서 주말엔 합류했다. 모두 열명이 되어야 하지만 아홉명 일행이었다.

 

아래 연잎 무성한 곳이 몽강 - 밥상 위 간장게장에서 살아나온 농게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다. 농게는 아직도 서울에서 자라고 있다. 추석에 내려오는 동안 서울 아이들이 창문을 열어두고 왔다는데 돌아갔을 때도 여전히 살아 있었단다.

 

 

 

 

 

이곳이 몽강 - 2009년에 찍었던 '도레미파'를 재연출.

 

 

 

 

 

 

 

 

에버랜드 - 아직은 볼거리가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다. 줄서는 데 30분?

 

 

 

 

리조트 라비도르 - 바로 실내 풀로 향한다.

 

 

 

하얏트의 야외 풀에서도. 어느 곳엘 가도 물놀이를 즐긴다.

 

 

 

 

 

 

 

 

 

 

공항에 배웅 나갈 수 있었던 동생과 떠나는 형

수빈이가 찍은 듯, 아빠와 작은아빠를. 형빈은 조연으로 깜짝 쇼.

 

가끔 그림을 바라보는 느낌도 있었지만 즐거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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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4. 7. 6. 16:19

 

 

상품이 된 인간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를 보다가

나도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

변기통의 물을 내리고

씩씩하게 지퍼를 올리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으로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화장실 벽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제일 싼 血 팝니다,

자본주의 만세!

 

화장실이 아니라 미안하게도 쾌적한 책상에 앉아서 시를 읽었다. 1970년생 시인의 절규였다. 그들은 젊은 날 왜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지 않는가, 쓸 수 없는가, 가슴 아파하면서 읽었다.

*

단기 4278년 여름 - 서기 1945년이겠지만 그때는 아직 단기였다 - 세상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세계사에서도 현대의 시작을 제2차세계대전의 종말로 보기도 하니 말이다. 엄청난 심적 물적 혼란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날 하늘에서 해방이 떨어지고, 배달민족은 자유로운 대한민국(임정)의 국민이 되었다.

정말 새 세상이 열렸다. 원수의 왜놈 쪽발이가 가더니 기독교 천사 날개에 실려 서양 문물이 밀려왔다. 아, 그리웠던 자유. 신체의, 사상의, 표현의, 언론의, 양심의, 결사의,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 자유연애, 자유부인, 자유당, 자유주의……. ‘자유’자가 붙으면 무엇이든지 최선의 가치였다. 그렇게 자유를 마시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젊은이들에게 자유를 제대로 넘겨주었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우리는 미국에서 배웠다. 케케묵은 삼강오륜이 낙하하는 속도에 신바람이 났다. 소위 아메리카정신은 청교도정신과 실용주의 그리고 개척정신을 말한다.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신교 신앙과 신의 소명이라는 직업에 따라 성실과 엄격함으로 임하는 경제관은 자본주의를 지원한다. 실용주의는 현실주의, 합리주의, 능력중심을 토대로 해서, 대중적인 것, 편한 것, 실속 있는 것으로 문화코드화 되어 현대 대중사회에 실용적인 ‘글로벌’ 문화로서 전 세계로 확산일로에 있다. 그 둘을 합한 화합물이 개척정신이다. 종교적 열정의 현실체인 미국중심 사고는 영광의 미국과 신의 소명을 받은 미국인으로서의 투지로 연결되어 서부를 개척하고 인디언을 몰아냈으며, 그 후로도 세계 도처로 무한정 진출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 온 세상 저열한 국가들은 미국을 배워나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실용주의 철학, 특히 실용주의 교육이 우리나라 ‘새 교육’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울대 총장 장이욱,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교육계 원로 오천석 등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사상을 들여왔고,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교육의 가치는 작용의 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 나타나는 유효성으로 매김 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결과로서 판단된다고, 오늘날 결과중심주의의 비극이 잉태된 순간이었다. 도덕 교과서에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은 ‘모로 가도 서울(대)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왔다. 사람들은 서울에 서울대에 최소한 그 비슷한 무게의 대학에 가서 성공했다, 돈과 권력의 합작 세상에서. 신화적으로 성공한 모두를 보라, 게으름부리지 않고 노력하면 다 그렇게 성공한다, 라고 믿고 살라고 가르치고 배웠다.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다. 끝나지 않은, 않을, 가난과 엄청난 자살률은 누구의 말대로 ‘민족적 게으름’ 때문만도, 열악한 환경 때문만도 아니라는 것을. 최고의 대학 카이스트에서 줄 이은 학생들과 교수의 자살이라는 비극은 시스템의 죄였다고. 인간을 자원으로만 간주한 결과중심주의의 경쟁시스템이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라는 단어를 ‘팔꿈치사회’라고 쓴다. 팔꿈치로 양 옆 사람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인 사회에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수많은 ‘루저’들이 제 못나서(?) 누리지 못한 몫이 이동된 것들이다.

최근의 통계들은 믿을 수 없는 수치를 믿으라고 한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고 있다.(크레디트스위스) 우리나라도 상위 1%인 50만 명이 전체 토지의 55.2%를 소유하고 있다.(국토교통부) 세계 최상위 부자 85명이 소유한 부가 소득 하위 절반에 달하는 35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다. 세계 부자 상위 1%의 재산은 전 세계 최빈층 절반의 재산을 더한 것보다 무려 65배나 많은 규모다.(옥스팸)

이 수치들은 우리를 슬프다 못해 절망케 한다. 절망타 못해 돌게 만든다. 이 탐욕이라는 이름의 바윗돌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윗돌은 무거운 채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머피의 법칙은 절대적이다. 멈출 수 있는 도를 넘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탐욕의 결과는 행복이 아닌 그 정반대의 참사임을. 진도 앞바다의 비극은 무대극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어느 대학교 교수들은 이번 참사의 근본 원인을 ‘물질적 탐욕에 젖은 나머지 생명의 가치를 내팽개친 황금만능주의, 편법과 탈법의 관행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온 결과중심주의에 있음’이라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를 ‘삶과 생명에 대한 철학 및 성찰이 빈곤한 반인간적 사회’라고 규정했다. 왜? 경쟁적으로 한 줄 서기만을 가르쳐왔으니까. 우리가 가르쳐 낸 것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자원’, 나아가서 품질 좋은 ‘상품’이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설마 ‘상품 인간’이 성장하고 있었다니! 사실이었다.

자유는 처음 황홀하게 맞이하던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단면에 걸쳐 자유와 윤리, 개인과 국가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밀은 『자유론』(1859)에서 ‘다수의 횡포’에 의한 ‘비주류 소수’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경고했다. 다수가 소수에게 여론과 관습을 내세워 ‘대세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1%의 득표율로 오불관 100% 전횡을 휘두를 수 있는 양당 구도에서의 대통령 권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와 연대감이란 소수에 대한 이해’(하인리히 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하는 개인 또는 단체의 자유라 하더라도,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수 있어야 한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사회와 국가의 간섭이, 규제가 있어야 한다.

화두는 어쩔 수 없이 - 아니 당연히 - 다시 참사로 돌아간다. 1,000명이 넘는 재외학자들도 참담한 성명을 발표했고, 제목은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에 울리는 경종’이고, 부제는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와 민주적 책임 결여가 근본적 문제’라고 적시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정철학의 전환이 없이 새로운 대한민국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국가 -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다른 생명을 소모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부여 받았고, 자급자족보다는 공동체 속에서 그 수고로움이나 위험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국가사회를 만들어냈다. 국가는 부여받은 권능으로 욕구의 조정이라는 어려운 역할을 해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어렵사리 끼어든 세계경제 속에서 세계적인 불황이 닥쳤고, 때맞춰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세계 경제가 자본주의로 통합되면서 국제적 경쟁이 가열되자 복지국가들도 흔들렸다. 이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비대해진 재정적자를 비판하면서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에 반대했다. 시장의 기능과 민간(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세력을 얻은 것이다.

곧 그 역기능이 들어났다.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그리고 재산권을 중시하다보니, 개인과 기업의 무한대의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가운데, 빈부 격차는 날로 커갔다.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이라는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미명의 예컨대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이란 곧 시장개방의 압력이었고,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개인 또한 무한대의 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에 내던져진 상태에선 적나라한 투쟁만이 살 길이 되었다. 사람 가치는 땅으로 땅으로 떨어져가더니, 아예 상품이 되고 말았다.

‘일단 내가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다 보니 평소 과잉보호가 있어서…….’ 1990년쯤에 태어났을 한 스타급 젊은이가 공항에서 팬에 대한 불손한 매너로 비난을 받자 반성문과 함께 내놓은 변명이 그랬다. 쭉정이들이야 공손하겠지만 주력 상품이다 보니…… 그런 뜻은 제발 아닐 것이다. 인간이 상품이라는 인식에는 애어른 구별이 없다. 지난 지자체선거에서 중후한 정치인 한 사람도 자당의 후보를 가리켜 ‘그 이상 더 좋은 상품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웠다.(데일리언 5.27.) ‘상품 인간’은 명품이 되어야만 대접을 받는다. 시장만능주의자들에게 노동과 노동자는 상품생산에 과정으로 참여해있는 부품에 불과하다. 온전한 상품이 못된 불량품 인간은 장기라도 부품으로 내다 팔아야 산다.

이 살인적 경쟁사회에서 인류에게 미래가 있을까? 경쟁은 이익과 승리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호배타적이고, 결과 지향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것은 물질과 대상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필요와 욕망의 경계를 망각한 인식의 오류 때문이다. 가치의 혼돈 때문이다. 이제도 우리는 젊은이들을 비싼 상품이 되기 위해서 공부만하라고 내몰아야 하는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한글로 풀어쓴 노자 『늙은이』 20장 첫 말이 떠오른다. ‘써먹기 부터하려는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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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프리즘>에 기고

 

 


 

다른 그러나 같은 PEN 문인들

                                                  2014.6.28.~29.

                               제16회 영호남문학인교류에 다녀와서

 

 

열여섯 번 째 영호남문학인교류 한마당 -

어언 대여섯 번 참가하는 행사이지만, 이번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스멀거리는 것은 기대감이 아니라 아랫입술이었다. 출발 전날부터 흉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이 부산 나들이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처음 이 교류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 1999년이라는데, 그때 무슨 심정에서 이런 행사를 시작한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대가 열렸다고는 하나 신한국당과 민주당 합당으로 태어난 한나라당의 견제 속에 편치 않는 세월 아니었던가. 어쩌면 금강산 관광의 시작으로 남북문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 그때, 요원한 남북통일에 앞서 가능한 동서화합이 더욱 그리웠을까? 아무튼 최소한의 이해의 숨통을 트는 일을 문학이 문학인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이 밑뿌리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PEN부산의 회원들과 문인들이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었다. 6월 28일 토요일 정오가 지나 모인 참가자들을 확인하고 출발 신호를 날렸다. 귀찮을 것을 알고서도 주민등록번호며 주소를 수합하여 여행자보험에도 들었고, 걱정할 일은 없었다. 열성 회원들의 열과 성으로 녹두시루떡도 찰밥도 노랗게 익은 참외도 실렸다. 수육에 머리고기에 결정적으로 알싸한 홍어무침까지 실은 버스는 주암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대충하고 나왔을 참가자들의 기운을 돋우었다. 마침 곡성에서 나오는 소설가 한 분도 함께 합류하여 간식을 즐기고 버스에 오르니 서른다섯 명 예정인원이 꽉 찼다. 늘 그러면서도 외지에 가면 길은 서툴러 해운대 학생수련원을 학생수련관으로 찍은 내비게이션 때문에 엉뚱한 곳에 도착하여 PEN부산 회원들을 오래 지치게 했다.

 

늦었지만 서둘러 상견례를 치른다. 밥보다 금강산이 먼저다. 환영사, 답사, 축사, 축사……. 기념품 교환. 무엇보다 부산의 ‘거리 詩’ 축제에 참여했던 PEN광주 회원들의 시화작품을 전달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동질성 그 이상의 정을 느꼈다. 부산의 시 축제엔 늘 광주의 시인들을 초청하고 있고, 매년 발행되는 『부산펜문학』과 『국제펜광주』에는 상호 문학작품들을 싣는다. 영어로 쓰는 영미문학도 하나로 이해하고 강의하는데, 하물며 같은 한글로 쓰는 영남문학과 호남문학이 얼마나 다를 것인가 말이다. 오늘 <희곡의 이해>를 강의한 김영관 교수(PEN광주 명예회장)도, <김수영 시인과의 추억>을 들려 준 PEN부산의 시인 김철 교수도 한 올만큼도 동과 서를 나누어 말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올해의 행사는 무엇을 막론하고 편히 즐길 수 없는 마음이다. 너도 나도 아픈 가슴으로 그것을 느낀다. 외람된 말이지만 답사에서 오늘을 사는, 살아야 할 인연을 논했다.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유순’ 그 40리 평방의 바위를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물방울이 뚫어내는 시간이 ‘겁’이라는데, 법륜 스님 말씀 가운데, 지구 안의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태어나려면 1,000겁의 인연이, 하루 정도 같은 일을 하려면 2,000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 하더이다. 그런 우리가 만났으니, 통한의 4월, 달력을 넘겨 찢고 또 찢어도 찢어도 아픈 봄을 두고도, 한숨을 내쉬다가 깜빡 들숨을 들이쉼으로써 살기로 결정해버렸으니 살기로 합시다. 그 비슷한 너스레는 편한 시간들을 갖자는 부탁의 다른 변형이었다.

우리는 함께 식판을 들고 섞이어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니 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술이 빠지랴. 술술 넘어가는 술에 술 못하는 모범생들은 분위기를 마신다. 이어지는 멋진 자작시 낭송들, 아름다운 노래도, 다른 장끼자랑도 빠질 수 없다. 전문 음악인을 능가하는 기타리스트를 내놓는 부산, 뒤질세라 전문 성악가를 놀라게 할 가수를 내세우는 광주……. 그렇게 따뜻한 저녁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송정, 밤이 내려앉은 검은 바닷가에선 바다가 없어 늘 바다를 그리는 광주사람도, 바다에 물린 부산사람도 구별이 없었다. 젖은 모래 위에 저녁상에서 남겨온 비닐봉지 속의 안주도, 이름 할 것 없이 섞인, 모래까지 섞여 마시는 술도 달콤하기만 했다. 남자가 부르는 이미자도 명가수의 소프라노도 바리톤도 환영이었다. 기계음에서 해방되어, 파도 소리 반주더러도 ‘시끄러봐’라고 우쭐대면서.

 

날이 밝자 짙은 바다내음의 미역국에 도시락반찬이 울컥 생각나는 계란말이에 아침을 먹고 ‘공부’를 떠났다. 친히, 만기침람의 의미가 아니라 그저 넘치는 친절함으로 광주 버스에 오른 부산 회장은 아뿔싸 안내원이 된다.

 

욜로 가입시더, 욜로 욜로.

부산 회장님이 아저씨, 기사님 하다가 기사 선생님까지를 들먹이며 안내해 간 곳은 수많은 멋진 다리들을 지나 감천문화마을과 부산민주공원이었다.

 

 

감천문화마을 -

얼마나 대단한 문화가 숨 쉬고 있는 곳일까. 부러움 반 호기심 반 찾아간 곳에는 문화가 아니라 아픔이 있었다. 그곳이 간직한 역사는 아픔이었다. 관광 상품으로 알록달록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베어나는 것은 슬픔이었다.

 

옥녀봉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산자락에 빼곡히 늘어선 계단식 집단거주지. 산비탈을 이용하여 절대로 뒷집에 해가 가리지 않도록 지어진 주택들에는 굳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벌써 한 세기 전 1918년 조철제 선생이 증산사상을 기반으로 시작한 태극도 신자들 수천 명이 고개 주변에 집단촌을 이루었던 것이 시발이라고 하니 특수한 종교심에서 서로의 해님을 배려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살아 있는 마을이 전시장이 되었다는 생각은 마음 한편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특이한 모습들이 외지인을 반긴다. 전영진 작가가 올려놓은 <사람 그리고 새>라는 작품은 추녀 끝에 새들인지 사람들인지 고개를 내밀고 앉아있다. 그래, 사람도 때론 날고 싶어……. 주민들은 개성 있는 색채감각으로 집단장을 했고, 멀리서 보면 색종이로 접었거나 고무지우개를 알록달록 맞춰서 가지런히 세워둔 집에서 산다. 가까이에서 보면 빨래 줄에 널린 빨래들 하며 배시시 살아있는 화분들이 삶을 말해준다. 용두산과 도심이며 항구가 다 내려다보이는 <하늘머리> 전망대에 오르니, 아, 따가운 햇살에도 상쾌한 바람이 맞아준다. <한지의 집>에서는 수공예품을 사느라 한눈을 팔고. <평화의 집> 등의 이름을 가진 골목길 프로젝트를 따라 가노라면 몸을 틀어야 통과할 수 있는 길이, 누군가는 정말 통과할 수 없을 길이 나온다. 전체가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때문에 PEN부산 사무국장은 아예 혼자서는 다니지 마라, 끝까지 가보려고 하지마라, 미리 경고를 준다.

 

이어진 부산민주공원 -

공원 입구 비스듬한 잔디광장에는 ‘민족통일대장부’와 ‘민족평화여장부’라는 이름의 장승들이 서있다. 이 장승은 진도군민들이 부산시민의 민주정신을 기리며 만들어 보낸 것이라 하니, 영호남 교류는 여기에도 있구나……. 흐뭇한 마음으로 <추모조형물>을 보러간다. 50미터가 넘는 대형 조형물로, 민주항쟁의 연속성과 현재성을 부각하는 상징물이자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들을 기리며 분향하는 곳이란다. 한참을 더 올라 <민주횃불>이 있는 곳, 그곳엔 수많은 반사 재질의 작디작은 조각들을 내부에 넣어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이름 없는 별들을 형상화 해냈다고 한다.

 

거짓말. 거기엔 가지 못했다. 설명만 들었을 뿐으로, 몇몇은 ‘분수’를 지키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배웠으면 ‘분수’를 아는 것이 사람 도리라고 쿡쿡 핑계대면서. 게까지 올라갈 여력이 없는 몇 회원들을 벗 삼아 힘들다고 아우성인 심장을 쉬게 했다. 일행은 한참 만에 내려왔고, 살며시 음과 식이 그리워질 즈음 버스는 밥집으로 향했다.

 

헤어지는 마당, 건배사 - 초청 측 PEN부산 회장의 건배사에 이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긴장을 풀자고 우스개를 했다. 열여섯 해면 남자 여자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다가도 못살고 헤어지기도 하는 세월인데, 우리는 부디 이혼 생각 말고 끝까지 가봅시다. 갈 데까지 가입시더. 양 도시 문인들의 우정을, 행복을, 무엇보다 문운을…… 여러 건배사가 이어지면서 <초원의 집> 점심이 무르익어 갔다. 실제로 오리고기가 익고 있었다. 그곳은 텔레비전에 ‘대통령들이 다녀간 집’ 소개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다녀갔다고 소개되었다고 한다. 몇몇은 깡소주를 노무현식 건배를 하자고 확 비우고 잔을 머리 위로 털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했는지는 아무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낮술에 취하면 어쩌려고?

 

어이없는 사족 하나.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어떤 휴게소에서 회원들을 놓쳤다. 휴식 후 5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고, 가벼운 식곤증으로 눈을 감던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잠시 후 버스를 따라잡은 검은 차에서 내린 둘은 별 계면쩍음도 없이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금의환향하는 월드컵 선수라도 되는 양 박수로 환영을 하면서 갑작스레 하나가 되어 깔깔댔다. 사고는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는 느닷없는 판소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기가 막히게, 임방울보다도 더 임방울 같은 목청으로 내놓는 ‘김싸부’ 덕택이었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 적막 옥방으 찬 자리어 /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거기까지만. 헤어질 시간이 다 되도록 우리는 배웠다, 불렀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내년에 우리가 부산 문인들을 초청하는 자리에서 이 구절을 합창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우리가 영호남 화합에 눈곱만치라도 기여했을까? 의로운 질문은 접어두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아련히 머릿속에서 도돌이표마냥 되풀이되는 가락은 우리가 정녕 남도사람임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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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에 기고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23. 04:01

유전 때문인가 ... 환경 탓인가

 

소설가 서용좌 '표현형' 펴내

- 광주일보 2014.6.19. 에서 펌

 

 

유전자형인가? 표현형인가?

 

현대사회는 변화무쌍한 시대다. 교유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삶을 사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처한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질을 발현하며 산다.

 

소설가 서용좌(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 교수가 신작 장편 '표현형'(푸른 사상)을 펴냈다. 생물학 용어에서 차용한 제목 '표현형'은 인간의 개인적 발현에 초점을 둔다.

 

2010년 '반대밀.비슷한말' 출간 이후 4년 만에 펴낸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소설은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임교수가 되지 못하고 점차 내리막 인생을 사는 지식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의 지식을 빨아먹는다는 점에서 피를 빠는 박쥐와 다음이 없지요. 그는 날고자 하는 꿈 대신, 이야기를 퍼나르는 데 날개를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주인공이자 글을 쓰는 가공의 저자 한금싱늠'샆포세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인물로,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를 전전한다. 그를 둘러싼 현실은 녹록치 않다.

 

강의 여건은 날로 악화되고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에도 그가 버릴 수 ㅇ벗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소설쓰기다.

 

그는 동류항 인간들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유전자형과 표현형 인간에 데한 관심을 늦추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유전자형과 표현형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모습을 추적하기도 한다.

 

작품은 '배달민족' '한국어' '표현형' '은실' '사포세대' 등 모두 11편의 이야기로 구성되 있다. 각각의 제모깅 붙은 잉기는 따로 존재라는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책 제목인 '표ㅕ현형'으로 수럼되기도 한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해주는 주 인물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다.

 

"주인공을 통해 들여다본 삼포세대의 내면은 표류와 공허로 집약이 가능합니다. 한가으이 기적을 일군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특질이요. 성장이라는 화려한 외피 이면에, 심리적 고통을 앓고 있는 이들이 발현하는 양상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서 작가는 '소설시대'로 등단, 장편 '열하나 조각그림', 연작 '희미한 인(생)'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등을 펴냈고, 이화문학상, 국제펜 광주문학상,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11. 11:48

 

가공의 저자 '한금실' 현대인 방황 들춰내다

소설가 서용좌 교수 장편 '표현형' 출간

 

 

2014. 06.08(일) 16:20 확대축소

소설가 서용좌 명예교수

 

   소설가 서용좌 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가 화려한 외관아래 앓고 있는 심층부의 심리적

고통과 정신적 방황을 그린 장편 '표현형'을 푸른사상사에서 펴냈다.

 생물학 용어에서 제목을 차용한 이 소설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을 내세워 머리글에서

부터 스토리 전개, 마무리까지 하게 한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

 등장인물이자 글을 쓰고 있는 '한금실'은 프랑스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아 금의환향

인 줄 알고 귀국한 이래 내리막을 걷고 있는 소위 삼포세대이다. 비정규직 강사의 신분

으로 직업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해야하는 세대. 그러나 인간에 관한 관심은 버릴 수

 없다.

 처음 꼭지 '배달민족'에서부터 디아스포라의 방향으로 세계 도처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유전자의 표현형을 추구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인의 한국으로의 엑서더스를 통해 유입된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도 들어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돼 인간

 관계의 기본 갈등은 가중된다.

 '배달민족'에서는 서독으로 돈 벌러 떠났던 광부와 간호원 세대, 그에 따른 혼혈자의

정체성 혼돈과 뿌리 찾기를, '한국어'에서는 한국을 꿈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현장을,

 '표현형'에서는 미국으로 입양된 막내의 삶을 다룬다. '은실'에서는 성수대교 사고를

 계기로 공부를 접고 성공의 대열에서 밀려나간 동생의 문제를, '삼포세대'에서는 너무

 많이 배우고도 '루저'인 한금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부모 세대를 다룬

 '초혼장'과 '포이동 266번지'에서는 끝나지 않은 최근 역사의 짐과 무게를 드러내

 보인다.

 마지막 이야기 '물'은 물에 빠지는 아이를 쫓아 무작정 물속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서용좌 교수는 2001년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을 시작으로, 2004년 연작소설

 '희미한 인(생)', 2010년 소설집 '반대말 비슷한 말'을 펴낸 바 있다. 현재 국제펜한국

 본부 광주시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고선주 rainidea@hanmail.net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52

장편소설 『표현형』 

 

푸른사상사, 2014. 5. 31. 발행

변형국판 352쪽, 값 15,000원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 등장인물이면서 써나가는  느슨한 연결의 장편.

    한 꼭지 씩 따로 읽어도 되는......

   

- 차례 -

배달민족

한국어

일기

은실

파도소리

초혼장

포이동 266번지

쥐도 인간이다

삼포세대

표현형

 

 

  추신: 내용보다 멋진, 표지 전체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넘쳐나는 표지는

          아들 조윤기의 작품. 매달린 박쥐가 일품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3. 25. 23:54

 

「목소리」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졌구나, 라고 느껴졌다. 오늘 아버지와 나누시는 가벼운 대화에서 그랬다.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한다니까요.

빈 밥그릇 국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생소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집으로 가자고 작정한 것은 명절엔 더욱 허전해하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들 없이 딸 셋을 둔 부모님의 얼굴엔 딱히 썰렁함은 아니라 해도 뭔가 어색함이 어른거린다. 애써 괜찮다는 과장으로 포장되어 표피가 평상시의 부드러움을 잃는다. 부드러움을 잃은 주름은 갈라질까 말까 바스락거린다.

 

이번 설에도 막내 옥실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 사는, 미국인이 된, 미국인과 결혼한 옥실인 만일 한국에 온다더라도 설이 아닌 추석에나 올 뿐이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미국의 큰아버지에게로 입양되어 간 옥실을 어머니는 가슴에 두고 사실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지막 미토콘드리아의 전수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머니에게서 딸들로만 유전된다는 미토콘드리아 ― 막내는 정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름도 제이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둘째 은실은 늘 가까이 있다. 바리데기 ― 일곱 번째 얻은 딸은 아니나 부모님 곁을 유일하게 지키는 은실이 바리데기가 맞다. 언니와 막내에 끼어 치인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도 시쳇말로 다 못해서 그렇다. 은실은 고 1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너무 가까이서 겪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대학진학을 접었다. 하지만 일찍 결혼해서, 지금까진 우리들 중 유일하게 손자 손녀를 안겨 드린 효녀다.

 

나 ― 어쩌다 막내서부터 거꾸로 설명이 되었는데 ― 맏이인 나 한금실은 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그러하듯 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일직선으로 나갔다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땐 벌써 은실이 김실이 된 후였으므로, 나는 원래의 금실 대신에 한박사로 불렸다. 더구나 한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엔 어딘가 자랑 비슷한 여운이 깔렸다. 지금도, 그 한박사가 명예도 돈도 별로 들여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건 여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1944년생으로, 요즈음에 말하는 신중년 세대이시다. 일제 강점기 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그들은 일제 때 강제징집당한 146만 한국인의 숫자가 말해주듯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던 세대다. 또한 형제들을 사상의 갈등으로 잃기도 한 세대가 그들이다. 국제평화기금이 들어오던 때에는 갑작스레 경제무대에서 은퇴 당한 신중년 세대의 운명 ― 거기에서 아버진 자유로우시다. 교사는 강제 은퇴는 없었다. 대학 공부는 겨우 열에 하나나 했을 이들 세대에서, 아버지도 사범학교 졸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가 야간대학 과정을 밟아서 대졸에 합류하신 전설적인 분들의 하나이다. 다만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다. 2008년 은퇴하시기 전에는 딸자식이긴 해도 자식인 내가 좋은 자리를 잡을 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박사가 모교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은퇴 후 오륙년의 시간을 우울한 적응기로서 사시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묻지 마라 네 살 터울이시다. 6.25 때 기억은 없다 하시는데, 큰 이모는 엄마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담벼락에 붙어 선 채로 오줌을 줄줄 싸는 세 살짜리 겁쟁이였다고 놀리신다. 물론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겁쟁이란 느낌은 없었다.

 

엄마, 정말이세요?

뭘?

엄마 어려선 무지 겁쟁이셨다고?

느이 엄마 지금도 겁쟁이다.

엄마가 겁쟁이?

그래. 엄마가 뭐 딱히 하는 것 봤냐?

하루 종일 평생 하시는 건 뭐고요?

이런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지. 엄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하고 살다가 죽는 게지.

엄마는.

정말이다, 엄마는 한 것이 없다. 딸 셋 낳은 것 말고는.

우리 키우신 건 다 어떻고요.

키우다니, 그냥 너희가 절로 자란 것이지. 내가 뭘 했냐. 품을 팔아 과외를 시켰냐, 차를 태워 나르기를 했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달라졌다. 무심한 듯 말 속에 심지가 생겼다. 뭘까. 설 명절의 부담 때문일까? 설은 아무래도 세배 문화 때문에 공휴일 상관없이 길어지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떡국상이다. 그러려면 음식 수급도 절묘한 솜씨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어머니가 시장보따리를 여럿 챙기셨다. 내가 유럽에서 가져다드린 낡은 무명 홑겹 가방을 여태도 쓰시며, 그 안에 다른 보자기 가방들을 넣으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추운 체 하면서 어머니의 팔을 꼈다.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외사촌의 전화번호가 떴다. 팔을 풀고, 양손 손가락에 여러 개 시장보따리를 걸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실아, 오빠야.

아이쿠, 웬 일?

너랑 의논할 것이 좀 있어서.

나랑 의논을? 의논을? 어디 있는데?

그렇게 만난 외사촌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따끈한 아메리카노 잔에 손을 굽던 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커피 취향이 바뀌었네! 참, 곤충 연구는 겨울엔 좀 쉬는가?

명색이 학문에 여름 겨울이 있겠어? 금실아, 넌 그런데 왜 결혼 안 하냐?

그러는 오빤 왜 안 하는데?

거야, 나는 남자고.

뭐야, 여름 캠핑장에서랑 똑같은 레퍼토리네. 다른 이유를 대 봐!

외사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환상이 깨진 지 오래였나 봐.

환상이 깨져?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래.

외숙모를? 외숙모가 왜?

그때 왜, 우리 아버지 갑상선 수술 하실 때.

언제 적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술을 앞 둔 날 밤, 어머니는 병원 침상 곁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 주무셨어. 물론 나도 보호자 노릇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수술이……. 기분이 묘했어, 어머니가 고생 덜 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머닌 만일의 사태가 걱정도 안 되셨는지.

그거야, 아버지들이 씩씩하시잖아. 울 아버지 돌발성난청 치료하실 때도 열흘 넘게 아버지 혼자서 병원에 계셨는걸.

그건 좀 다르지, 난청하고 암이 비교나 되나? 또 그 뿐이 아니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하실 때도 좀 거북했어. 아버진 동위원소 캡슐 치료하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 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랬거든. 식구들이 다 같이 동위원소에 노출되느니, 아버지 혼자 계시다 오시는 것이 맞다고. 생수병 둘을 챙겨 호텔로 따라나서는 날 아버지는 말리셨고, 어머닌 화까지 내셨다니까, 나더러 속이 없다고! 그 세월 지나고서도 부부라는 것이 영원한 평행선이고 남남일까, 난 혼란스러웠어.

그만 둬. 외숙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이고. 다 지난 일을 왜 그래. 외삼촌도 건강하시면 되었지. 오늘은 뭔가 다른,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아니었어?

 

외사촌은 더욱 뜸을 들였다.

그게 글쎄.

오빠 뭐? 누구 사귀는 거야? 집에선 반대하고? 아님 선 자리 나온 거야?

그게 글쎄.

글쎄 라니, 어떤 여자인데? 같이 살기라도 해?

살기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신경이 쓰인다는 대상은 …… 외사촌은 아예 더듬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알고 보니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이웃 학과의 연구전임이 된 친구인데, 겨우 한 학기를 멀리서 보고 지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상쾌함과 긴장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단다. 그가 먼저 앉아 있다가 외사촌을 보며 갸웃하고 인사하는 동작, 함께 온 사람이 있더라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앞을 보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사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란다. 해서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판기 커피를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여러 번이었단다. 종이컵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다가 눈을 치뜰 때면 왼쪽 눈썹이 더 올라가고, 미소 또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더 밀려 올라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같은 이공계면 철저히 다름의 매력 그런 것도 아니고.

취민 달라. 나는 사진을 찍으러 숲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그 친구는 사진엔 관심이 없더라고. 대신 영화광이야, 안 보는 영화가 없어.

오빠도 영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난 근년 들어선 뜨악한 편이었어. 그 친구랑 몇이 어울려 꼭 한번 함께 갔었지. <러시: 더 라이벌> ― 에프 원 그랑프리 실화라고, 뜨거운 가슴이 있는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영화라고 부추겨서. 헌데 스크린 속의 무서운 질주나 크리스 헴스워스의 매력 대신 그 친구 옆얼굴만 훔쳐보게 되어 못할 짓이다 싶었어.

병이 깊네.

병이라고? 넌 유럽형 인간 아냐?

유럽이 왜 나와, 여기서?

네가 공부하던 파리는 자유의 심장 아냐?

웬 자유? 평등, 박애까지를 다 말하려면 또 몰라.

그게 아니라, 파리에선 동성애자 시장에, 또 대통령들도 사생활은…….

사르코지나 올랑드? 우리 눈으론 좀 고약하지. 난 성적으로 그렇게 자유분방한 쪽이 못 됩니다요, 오라버니!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석 달 만에 젊은 연예인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 것 쯤 아무도 상관 않았었지, 프랑스 사람들은.

오빠,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어? 20년간 살았던 부부였어, 것도 이미 재혼으로. 그 사이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또 새 여자도 애 엄마고! 아이들 어지럽게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금실이 너 고리타분 맹추구나. 그럼 지금 대통령한텐 더 욕을 해대겠네!

남의 인생에 무슨 욕까지야.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심해. 결혼이 아니고 동거관계라서 그러는 말이 아냐. 애를 넷이나 두고서도 첫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 여잔 사회당 당수였어. 차라리 그 여자나 대통령이 될 일이지. 암튼 따로 애가 셋 있는 두 번째 여잔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있었지, 잠깐. 그러다 또 여배우야? 뇌에서 분비되는 짝짓기 신경물질의 유효기간만 지나면 상대를 갈아치워? 정치적 역량은 역량이고, 난 그런 사람들 너절하다고 생각해. 섹스가 뭔데? 인간사 필수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갈아치우는 게 능사는 아냐. 몸도 맘도 그렇게 둔갑을 한다면 그게 철새지 뭐야.

새는 또 왜!

 

내가 잠깐 실수를 했다. 동물학 전공의 외사촌에게 새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전문가적 지식이 쏟아질 판이 되었다. 나는 커피 잔을 얼른 들어서 식어버린 나머지를 홀짝거렸다.

 

 

갈매기도…….

뭐야, 곤충박사님께선 새를 능멸하는 것에도 분개하시나? 갈매긴 또 뭔데?

분개까진 아니지만, 갈매기도 동성애를 인정받는 세상에…….

동성애? 갈매기가 동성애를?

그래, 갈매기의 동성애.

너무 멀리 간다, 오빠.

아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들 심심찮게 있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둥지를 틀어서는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

알을 낳는다고? 암컷끼리?

아니, 미수정란이나 단위생식 그런 게 아냐.

그럼, 알은?

살림은 암컷 두 마리가 차리지만 짝짓기는 각각 주변의 수컷들을 만나는 방식이지. 어쨌거나 번식에 성공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암컷들의 공동생활이지 무슨 동성애란 이름을 붙여?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오빠, 동성까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 동성애야? 그건 아니지. 암수 간에 사랑해서 살림을 차리고 자식 낳자고 성애와 교접이 따르는 것 아냐? 모르긴 몰라도.

로이와 사일로 이야기도 몰라?

누군데?

맨해튼 동물원의 펭귄들, 만화도 나왔는걸. 그 둘은 암컷 펭귄들일랑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뭐냐, 절정행위도 한대, 목을 감고 그러는 성관계를.

설마 아기도 낳았대?

또 아기 이야기냐! 돌멩이를 알처럼 품으려고 해서 유정란을 넣어주었더니 서른 날 넘게 품어서 알을 깨우고 또 길러냈대. 완전한 입양가족 아냐?

글쎄. 입양가족 쪽은 맞지만 부부도 부모도 아냐, 분명.

부모는 아니지만 동성애 양친!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천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녹청색 계열의 체크 패턴의 무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오빠, 난 이런 무늬가…….

소용없었다. 외사촌은 이야기를 접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다.

 

 

동성애 ― 외사촌의 생각으로 자신은 동성애 성향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데……. 대체 뭐냐, 이건?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외사촌은 아마도 긴 싱글 기간을 보내는 나 또한 그러한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지 탐색하는 눈치였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리에서 한 때 젊음을 보낸 내가 상당히 진보적일 것이라 믿었기에 이해받기를, 뭐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맹꽁이 답답이다. 엄격했다, 그 부분은.

 

외사촌은 알리바이 모양 역사 속 유명인들의 동성애 취향을 꿰고 있었다. 다빈치의 젊은 시절의 ‘불경한’ 행위들, 미켈란젤로가 미소년에 보냈던 소네트며 젊은 귀족에게 헌신했던 만년의 애정, 차이코프스키의 조카에 대한 비뚠 열정. 랭보는 어땠는데? 그건 부정 못할 것이라고 외사촌은 들이댔다. 푸코는 어떻고! 심지어 여자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사포의 레스보스 섬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팅게일도 사촌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거절당해서 전장으로 떠나버렸다는 둥. 외사촌은 마치 공부라도 해 둔 양,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신화며, 소위 그리스 사랑 ― 성인과 소년 간의 사랑 ― 또는 고대 아시리아의 보편적 동성애 문화까지 증거로 들이댔다.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때의 사랑은 분명 우정이 심화된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을 사랑하듯 동료의 철학을, 철학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두고도 갑론을박이었다. 외사촌은 플라톤의 동성애 증거라 했고, 나는 바로 그 말이 동성애가 아닌 정신적 우정에 관한 증거라고 했다. 한 문장이 두 상반된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와 가능한 번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행위는, 그러니까 의사 성행위는 암컷과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결코 성애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몇 명의 잘난, 똑똑한, 개성 있는 유명인들이 동성애를 표방하고 경우에 따라서 결혼예식을 한다고 치자. 사실 파리 시장 들라노에만 해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자임을 표방하고도 당선된 게 맞다. 2,3년 전 파리에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50만 명 시위에 들라노에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며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력한 인사들의 성정체성이니까 특별히 존중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 주장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중에 점점 더 완고해져갔다.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 이게 결혼의 사전적 정의다. 헌법에도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한다고 된 것 같다. 불문율에서도 남녀 양성이 전제다. 남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을 하든, 동거생활을 하든, 흔치는 않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도. 그러나 남녀의 결혼 또는 동거와 동성의 동거를 동일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외사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치 않은 독설에 찔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고?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를 위한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가 이루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의미에서 동성결합을 원하는 생물체는 특이종이다. 어쩌면 불완전하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또는 양성애는 ― 난 그런 이분적인 용어 자체의 도식이 틀렸다고 보는 쪽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것이, 둥근 거울과 네모난 거울 중 어느 것을 살까 하는 소녀의 망설임이라거나, 점심에 설렁탕을 먹을지 순두부를 먹을지 망설이는 직장인의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울은 거울이고 밥은 밥이고, 그런 건 늘 둘 다 똑같은 가치이니까. 하지만 동성애란 ― 성애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암수의 결합이 껄끄럽고 내키지 않은 대신, 동성을 그리워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동성애라고 할 뿐이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 동성애. 뭐라든지 단어는 가능하겠지만, 원래의 성애와는 성격이, 질이 다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생산적 짝짓기를 변호했다. 생물학자 외사촌 앞에서 점점 더 생물학 이야기로 빠졌다. 적진으로.

동성결합은 유전자 복제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복제라는 원초적 욕구를 모르는, 회피한, 버린 생물체들이 벌이는 사랑은 뭔가 자연의 범위를 벗어난다. 키가 병적으로 너무 작아도 커도, 정상 범위를 벗어나도 똑같이, 돈이나 생산성이 많건 적건 똑같이 그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이더라도 인격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최근 교황님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말하는 성 소수자 동등권 운운도 사회적 인격적인 차별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성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의 비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 ― 프랑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때 파리의 동성애자들 시위 때. 어떤 종의 모든 생물체가 동성애 성향이라면 결과는 그 종의 도태다.

 

도태? 그 단어에서 외사촌은 완전히 함구했다.

나는 불확실한 전문용어까지를 동원해가며 개똥철학을 읊어댔다.

밈 ― 문화적 유전자라. 복제 과정에서 진을 살찌운다는 밈이라는 인자, 이 밈의 세력이 대단한 건 증명되었지. 우리가, 수백만 인간들이 예컨대 ‘신’이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처럼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공유하게 된 것들이 그런 작용이라지? 그렇다고 동성애의 밈이 인류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 손해가 나는 방향으로 진화할 리가 없으니까.

 

외사촌은 눈도 껌벅거리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녹음기처럼 지껄였다.

알게 모르게 서양 흉내쟁이인 우리들,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글쎄. 물론 동성 간 혼인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아니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것이 법으로 인정받는 서양 어느 곳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양의 결정이니까 법이니까 옳은 것은 아냐. 옳지 않은 법을 몰라서 그래? 단 기간에 만들어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 전쟁도 법의 이름으로, 인종청소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어. 법 이야긴 접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 ― 소중한 말이지. 정치적 소수의견, 생물학적 약자, 모두 강한 다수가 배려해야할 대상이지.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 그가 그 일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것이 자랑은 아냐. 어쨌거나 프랑스에선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벌금형이 없어졌지, 120년 동안 ‘사회적 장애’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과했던 법이 사라진 거야. 곧 이어 정신병 리스트에서도 동성애가 삭제되었어. 그렇다고 육신이, 정서가 완벽한 건강상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젊고 건강한 암수는 원초적 본능으로 짝짓기를 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넌 뭐야, 넌 왜 이렇게 사는데? 짝짓기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라면서?

침묵하던 외사촌이 내 약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평소에 정리가 된 견해도 아닌 말들을 즉흥적으로 외사촌에게 떠들어대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침묵에 외사촌도 머쓱해졌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빈 커피 잔을 들기도 어색해진 나는 테이블보의 녹색과 짙은 청색 사이에 섞여 짜인 버건디 색상의 가느다란 올에 집중해서 비율을 셈하려고 했다.

 

 

아냐. 아니거든!

건너 편 옆 자리에서 제법 큰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다 같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빠. 아녜요. 쟤네들 좀 봐.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남자애 같은 남자애, 여자애 같은 여자애가 드물어. 유니섹스인지 옷도 저렇게 비슷하게 입고 다니지. 우리 둘 다 쟤네들 쳐다보면서 그게 여자애 목소리라고 느꼈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쪽이 여자애라니까.

그게 뭐.

남자들 입장에선 여자들이 버거워졌을 거란 말이지. 요즘 괜찮은 남자가 되려면 돈이 엄청 많은 집안이거나 빵빵한 직업이 있거나, 그러고도 키가 커야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갖춰? 다 갖췄다고 해도 연인에게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다고들 하지. 바꿔 말해도 그래. 괜찮은 여자란 돈 많은 집 딸이거나 최소한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 있다거나, 그러고도 예뻐야 하는데…… 누가 그래. 다 어렵지. 이성에게 들이댈 자신들이 없어진 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지.

 

오빤 대꾸를 않는다.

아님, 저쪽을 봐. 쟤네들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차렸네. 하지만 뭣들 하고 있나 봐. 각자 휴대폰 들여다보며 뭘 하느냔 말이야. 뭘 하러 만나서는.

우리처럼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음 아저씬가?

그래,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지.

그렇게까지 자조적일 필요는.

자조적이 아니라 현실이 우울하게 하지. 요즘 뉴스 안 봤어? 세계 부유층 85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가진 것과 같다는데 뭐. 1%의 부유층이 50% 빈곤층의 65배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거야. 인구 절반이 버러지야. 절반만 그런가. 아래 절반 보다 나아보았자 상대적 박탈감으로 꼬여있어, 마음들이. 뭔가 자연스러워야 생명력이 넘치고 짝짓기도 하고 싶고 그러지, 후손 번식에 대한 의욕이 솟구칠 것 아냐.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로 위로받고, 가능하다면 유사 성애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부의 불평등 문제까지 가냐! 넌 문학연구가 아니라 사회학 했어?

부의 불평등은 ― 전공과 무슨 상관? ―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부패를 조장한다는 말이 맞아. 부의 완강한 대물림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살 맛 나지 않는 세상이지.

살 맛 나지 않아서, 이성에게 구혼하지도 후손을 구하지 않고 동성 사이에서 안주한다?

뭐,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엔 교육 자체를 포기하고 등 돌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잖아.

그래, 니트라 그러더라. 낫 인 에듀케이션, 엠플로이먼트 오어 트레이닝.

우리나라에선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니트족 통계가 70만 명도 웃돈다고 본 것 같아. 한줄 서기에 아이들이 죽어 가. 옆자리 짝꿍도 경쟁상대로 보라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를 도망치는 거야. 대학에서도 희망이 없어 자퇴하기도 하고. 자괴감이나 대인기피증은 당연, 사회구조 전체에서 비껴서있는 것이지. 가부장제로 받침 되는 건전한 사회조직? 어림없어. 반사회적, 아니, 비사회적인 건 틀림없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거야. 또 교육을 많이 받음 뭐해? 정규직이 안 되는, 못 되는 점에서 우리라고 다른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체제에 들어가? 결혼이 말이나 되냐고. 분업시대 이후론 싫든 좋든 어떤 톱니든 톱니가 되어야 겨우 사는데 말이야.

톱니 인생. 그래 정상적인 톱니만 되어도 다행인 것을.

틈새에도 끼이지 못하니까 다른 돌파구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우린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불어났는데. 밖에 어둠이 내려앉자 커피숍 공간이 살짝 위로 솟은 느낌에 어디선가 스쳐 오는 바람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린 ― 뭔가 위안이 그리운 시대를 사는 것 같아.

그래. 위안이 그리운 세대, 누가 누굴 위로할 줄 모르는 세대.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세대. 간혹 경쟁을 피하게 되면 우정도 사랑이라 믿는…….

 

 

사랑과 우정을 혼동한다고?

외사촌은 눈을 흘겼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구별 못한다는 말에 발끈했나 보았다.

넌 감정의 구분이 확실해서 위안은 그립고 누군가는 필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혼자 버티는데?

혼자, 그래 혼자 잘 지내는 편이야. 하지만 글쎄, 난 요즈음 희한하게 아기를 갖고 싶어. 그건 충동이라기보다는 딸을 낳고 싶은 소망, 낳아야 하리라는 의무감에서. 하지만 수컷이 없네! 암컷 갈매기나 같구나. 하긴 무슨 수로 애를 키워? 나 혼자도 버거운 세상에서. 많이 말고, 그냥 먹고 사는 만큼도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이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아버지 감을 낚겠다고?

감으로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해. 사랑? 가슴이 뭉클하게 아프지는 않아서 사랑은 아니려나? 또 짝짓기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겠지만.

뭐야, 넌 그럼 여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처음 남자가 나빴어. 하필이면 극장 안에서 손을 잡았지 뭐야. 난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손을 잡히긴 싫었어. 그 무렵 어떤 소설을 읽었었는데, 자연 속에서, 이를테면 풀밭에서 햇볕 아래 누워서 혼자 오르가즘을 느낀 소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 그런데 극장은 어둠의 충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어. 사랑은 어둠이어선 안 되는 것 아냐? 암튼 어둠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소름 돋았어.

밝은 사랑?

그래, 밝은 이미지의 남자. 난 분명 남자가 필요해, 내 딸을 위해서.

딸은 무슨. 딸을 낳으라는 보장은 있고?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원한다니 세상 참.

그래, 바로 임신이야.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적 충동은 뭔가 빗나간 것일 게야. 그러니 동성애도……. 맞아, 임신이 좋은 비유야. 임신이란 100%이거나 아니거나 그거야, 누군가 절반만 임신일 수는 없어. 성교도 그래,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교란 반쯤만, 그러니까 성교가 아냐.

생물학자 밥 벌어 먹겠느냐, 어디!

미안해, 공자님 앞에서 문자네 정말. 하지만 사랑은 임신과 같아, 100%이거나 아니거나. 절반만 사랑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야. 사랑에 어떻게 양이 있어. 양이 있는 것이라면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길 가질 거라며!

아길 가지려고 사랑하겠다니까, 온이 사랑할 거야. 만일 누군가를…….

누군가를 만나면? 누군가를? 누구를?

그게 글쎄.

넌 말 다르고…….

아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오빠, 오늘 이야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해 두자. 오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야, 어쩜 나도. 부부가 되려면 팔천 겁의 인연이 필요하댔잖아.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진.

겁?

그래, 겁.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사방 1유순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

유순?

소달구지가 하루 가는 거리라니까 최소 40리라고 하지.

평방 40리?

오빠, 내버려 두자, 단위는 잊고 그냥 시간에 맡겨 두자고. 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설에 또 오기 어려울 텐데 울 아버지 뵙고 가야지.

오늘은…….

가, 가자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쪽은 내내 나였다. 왜 목소리를 높였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소리 뿐, 말에 전혀 자신은 없는 채로.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 자체가 말의 알맹이에 자신이 없다는 신호다. 아니면 진실을 감추려거나.

 

어머니는 요즘 왜 목소리를 높이실까. 혹시 감춰둔 심지가 뭘까? 집을 향하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설을 앞둔 일시적 상황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 만드시면서 짜증스러운 내색을 보이신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늘 그러셨다. 설이래야 수십 명 씩 손님이 오는 대단한 집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북적대고 수선스럽고, 그래도 떠들썩하고 화기 넘치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받쳐주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있는 존재라고 믿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명절이면 딸들과도 다 함께 하지 못하는 허전함에 더해 아들의 부재를 서러워하실까? 민망해 하실까? 아버지에게 미안함 대신, 그 미안함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아들 없이 지내야 할 차례가 다가오면 우리들 몰래 한숨을 쉬시지는 않을까? 그 한숨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극할까? 유전자 복제에 실패하시고서도 한숨도 마음대로 못 내쉬는 울 아버지.

 

 

아버지이, 선준 오빠 왔어요.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 아버진?

내가 느이 아버지 어디 가신 줄 일일이 다 안다니?

어찌할꼬. 어머니의 목소리엔 여전히 싸한 여운이 감돌았다. 울 어머니의 목소리에 심지를 심어 넘은 범인의 정체는 뭘까. 그냥 세월일까. 내 눈으로는 오리무중이다.

........................................

 

『PEN문학』 2014. 3,4월호(vol. 119), 국제펜한국본부, 125~14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2. 28. 22:58

2014년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  > 전문예술창작지원

  

광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사업으로

공적으로는 <펜광주> 12호, 개인적으로는 장편소설 발간에 지원했다.

2월초에서 기다리던 2월 말이 되었다.

<펜광주>는 해마다 지원 받아오던 사업이었으므로 걱정이 없었지만.

개인적인 지원은 불안했었는데............. 펜 사무국장의 전화를 받고 뛸듯이 기뻤다.

28일 밤, 늦은 시간의 전화였지만 더없이 기뻤다.

기쁜 마음에 여기 차례를 올려 본다. 원고지 1200 매, 글자수는 20만 자를 넘는다.

 

 

『표현형』

 

  • 배달민족
  • 한국어
  • 일기
  • 은실
  • 파도소리 
  • 초혼장
  • 포이동 266번지
  • 쥐도 인간이다
  • 삼포세대
  • 표현형

 

 

 

글자, 글자들이, 내가 만들어낸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여기저기 폴더에 파일에 숨어서 죽은 듯 쑤셔 박혀 있다. 1975년생인 나는 남들 따라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공부했고, 소위 해외파 박사가 되어 강단에 섰다. 보름달 인생이었다. 하지만 기회의 가능성이 줄자 점점 절망했고, 어차피 컴퓨터에 앉아 옆길로 새며 숨길을 텄다. 하릴없이 동류항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유전자형과 표현형 사이를 의아해하며 감탄하곤 했다.

갑작스레 나는 서둘기로 한다. 죽어 널브러진 글자들을 퍼 내버리자. 이 이상한 대리 역할 -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관해서 어설픈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을 살기를 시작해야 한다. 나의 미토콘드리아가 나에게서 이대로 끝장나리라는 상상이 조금 괴로웠을까.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에게 뭔가 빚을 진 느낌이랄까. 무엇인가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딸을 낳아야 한다. 낳고 싶다. 글을 버리고, 너무 늦기 전에.

- 한금실, 가공의 저자

           

             이것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의 변이다. 주인공이자 글쓴이.

             출판사는 푸른사상사 - 작가교수회 회장 우한용 교수님 덕분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17. 09:03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 - 2013년도 총회

 


 

2013년 12월 14일 빛고을국악전수관 공연장,

총회와 국제펜광주문학상 시상에 이어 펜 한가족의 밤 행사가 있었다.

해마다 비슷한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신임 회장에 선출된 것!

 

 

 

 수락 인사말씀 - 오른 쪽에는 2부 펜문학수장자들 오소후 , 전숙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 회장 수락 인사말씀

 

  오늘 2013년 12월

  광주전남 문단사에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백배나 많은 제가 감히 이 자리에 선출되어 수락인사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국제펜광주광역시위원회는 오늘 『펜광주 11호』 발행이라는 역사를 지니고 있고, 오늘까지 10회에 걸쳐 14분의 국제펜광주문학상 수상자를 내었고, 또 무엇보다 15회의 영호남문학인교류활동을 추진해오고 있는 등, 명실공히 한국 문단에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단체를 문단 경력도 짧고 사회성도 부족한 제가 한 동안 노를 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만 앞섭니다.

  돌이켜 보건대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는 저에게 글쟁이로서의 글을 안내해주고 격려해준 유일무이의 단체였습니다. 서생으로 살던 제가 제 글쓰기에 홀렸을 때 저는 처음 무작정 국제펜에 가입하고 싶었습니다. 글쓰는 사람이면 당연히 국제펜에 가입해야한다고, 연대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서 어떻게든 사회에 작용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소원대로 국제펜한국본부와 국제펜광주광역시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발표는 물론 2012년 가을에는 경주에서 열렸던 국제펜인터내셔널 대회에 일주일간 참석할 수 있었으니, 첫 꿈은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거운 짐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걱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당백으로 애정을 쏟아내어 국제펜광주를 지켜오신 우리 회원 문우 여러분들, 온갖 정열을 다 바쳐 그 기틀을 잡아 올려놓으신 김종 명예회장님과, 전 작품 한영대역이라는 전무후무한 회지를 발간해 오신 김영관 회장님의 혁혁한 활동들을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장담은커녕. 마치 다음 훌륭한 집행부가 성장 중에 있기 때문에 임시로 수렴청정이나 맡아야하는 기분으로, 어제와 내일을 잇는 딱풀의 기능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심정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미래의 집행부가 성숙하면 곧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비겁함을 이겼기에 감히 이 짐보따리를 맡게 될 모양입니다.

  존경하는 회원님들, 문우 여러분들, 부디 여러분의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에 지니신 애정을 속에만 담아두지 마시고 적극 발휘하시어 이 딱풀 집행부가 굳어버리지 않게 감시도 하시고 도와주시면서 내일을 기약하시게요,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잊지 마셔요, 오늘의 집행부와 함께 하셔야 여러분의 내일이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12월 서용좌

 

 

펜문학 수상자 전숙 -

전남여고 42회 후배이자 중학교 시절 내가 잠깐 영어 선생님이었으니 제자이기도.

윤숙희, 김미석, 허만진, 황인미, 전숙..... 김상현, 조숙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