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1. 11. 17. 21:27

그들의 고통과 우리들의 당혹감 - 서용좌, <배달민족> 
                               
                                                                                     장두영
        

 

서용좌의 중편 <배달민족>은 개인사적 고통이 민족사적 혹은 세계사적 고통과 맟닿아 있도록 조직되어 있어 고통의 무게가 육중하다. ‘아비 찾기’라는 전통적인 모티브를 활용하여 과거에서 현재에 걸쳐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굵직한 과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독일 남자와 한국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배요한의 아비 찾기와 배요한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의 아비 찾기라는 두 개의 임무를 겹쳐 놓는 자리에서 이 소설은 출발한다. 배요한과 요하네스의 아비 찾기는 고스란히 배요한의 동생 배승한이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남긴 메모에 담기고, 형식상으로 서술자의 역할을 떠맡은 지방대 불문과 강사는 배승한의 메모를 받아 적은 필사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작가의 권위를 단순히 메모를 옮겨 적는 역할에만 충실한 필사자에게로 넘긴 마당에서 작품은 저자의 죽음을 외치던 롤랑 바르트를 연상하게 한다. 더욱이 배승한이 수집한 여러 인물의 회고와 기억의 파편들은 통해 20세기 독일 역사를 재구성하고, 산업화 이후의 한국 역사를 기록한다는 기획 역시 기억을 통한 역사의 구성이라는 포스트모던적인 발상을 따라가고 있다. 이것이 진리의 총체라는 권위적 언설 대신 개인적 기억의 단편들의 얽어놓은 과정에서 진실을 복원시키기 위해 한 발짝 다가서려는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얼핏 ‘배달민족’이라는 고릿적 냄새가 나는 표제와는 달리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것을 관통하면서 흐르는 혈통에 대한 관념에 대한 통찰이 빛나고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요하네스의 경우 자신의 아버지가 유대인의 핏줄과 아리안 핏줄 사이의 흔적을 지우려던 모습에서 유럽 문명의 저변에 존재하던 인종적 편견을 건드리고 있다. 나치스 협력, 친미, 사회주의의 선택 등 요하네스의 아버지가 보여준 복잡한 행적을 통해서 독일 역사에 대한 지식이 펼쳐진다. 한편 배요한의 경우 배오한의 아버지 요하네스에 대한 추적을 통해서 독일 역사 속에 내재되어 있던 고통을 한국의 역사와 결부시키고 있다. 배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설정된 파독 노동자의 외화벌이는 곧 다문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한국 사회를 향한 일종의 거울로 작용한다.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배요한의 부모들은 이제 이주노동자들을 수용하여 부리는 지위가 되었고, 과거의 유대인이나 한국인과 같은 디아스포라의 처지를 망각하게 되었다. 요하네스의 아버지, 요하네스, 배요한 세 사람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여전히 유럽을 떠도는 인물들이며, 그들의 행적은 고스란히 아직까지 크게 흔들리지 않은 ‘배달민족’의 신화에 대해 의미심장한 문제 제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작품은 당혹감에서 시작하여 당혹감으로 끝난다. 문득 배승한이 보낸 메모들을 받게 된 ‘나’가 “그것을 머릿속에서 정렬해야 하는 숙제를 안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배승한은 어떠한 의도에서 메모 뭉치를 보냈을까. 당혹감에도 불구하도 ‘나’는 숙제를 시작한다. 메모가 하나씩 정리되는 동안 계속해서 당혹감은 밀려온다. 입양아로 여겨지던 배요한이 사실은 배승한의 친형이었다는 것을 예감한 배승한의 당혹감, 독일 혈통으로 알려졌던 요하네스의 아비가 유대혈통을 버리고 숨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요하네스의 당혹감, 그리고 배달민족이라는 정체성의 신회가 나치의 정통성으로의 강조와 닮아있다는 사실은 알게 된 독자들의 당혹감, 나아가 그러한 ‘상상된 공동체’를 향한 신화에 침윤되어 있던 우리들이 앞으로 받아들이게 될 이방인들에 대한 태도의 준비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 우리 스스로를 향한 당혹감 등이다. 근대적 분류 체계에 너무나도 익숙한 우리들의 관념에서 혈통 문제에 관한 그들의 고통이 너무나도 소홀히 취급되어왔음을,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고통으로만 남겨둘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알게 된 순간 느끼는 당혹감은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공백은 너무 길었다.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갑자기 전기가 나간 것처럼 내 손가락의 작동이 멈췄다. 애초에 이 기록은 뿌리 없는 나무에 물 주기였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구상도, 가닥도 없이. 흩어진 메모조각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리기. 나는 무슨 알갱이를 향해서 이 종이부스러기를 헤집고 있었을까. 벌써 스산한 계절의 축축함이 벤다.(252면)

작품의 서술을 마무리하는 대목에 삽입된 ‘나’의 고백은 작품을 다 읽은 독자가 느끼는 당혹감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의 치열한 삶의 흔적을 읽은 듯하면서도 한 편의 묵직한 역사서를 완독한 느낌이 곧 둔중한 무게로 머리 한 부분을 짓누른다. 기억의 파편을 모으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당혹감을 통해 목직한 여운을 감기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우리가 쉽게 해결하기 힘든 거대한 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이 던진 화두에 대해 명쾌한 답안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바람에 불과하다. 개인사적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민족사적, 세계사적 고통에 대한 이해로 발전될 수 있다는 ‘당혹감’을 선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였음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한 당혹감은 곧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개인사적 고통을 집단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작가의 능숙한 필치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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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11월호 (통권 148호), 292~295,
                    장두영, 월평 : '고통의 상상력', 285~295 중에서.

* 장두영 : 2009년 <문학사상> 평론 부문 신인상 당선 등단.

           현재 서울대 기초교육원 전임대우 강의교수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0. 24. 22:56

        배달민족          
 


한 선생님!

…….

아홉 명입니다, 아홉.


가볍게 젖은 어깨를 털며 들어선 나에게 언어교육원 직원이 걱정부터 터뜨린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쪽 책상에 앉아있던 그 남자는 괜스레 조금 허둥대고 있어 보였다. 그가 미안해 할 일은 처음부터 없었다. 미안해 할 일이 전혀 없다. 영어 세상에서 소외된 같은 제2외국어 권이라 해도, 일단 언어가 다르면 전공이 다른 것이다. 전공이 다르면 다른 쪽의 불행(?)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수 없다. 전공이 같아도 마찬가지다. 학계에서 살아남고 아니고는 도통 운수소관이었다. 그는 다만 소문만으로도 나를 안 되었다 싶어 하는 것이리라.


나에 관한 소문은 좀 초라하게 났을 것이다. 모교에서 버림받은, 한 때의 유망주면 뭣하나. 서울의 적당한 모 여자대학의 1회 졸업생. 외국 유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모교 강단으로 강사가 되어 돌아왔다. 8년 전 일이다. 그 당시 한참 돌아오던 해외파 박사들 틈에서 혜성처럼은 아니라 해도 충분히 빛나는 별들 중의 하나인 줄로 알았다. 더구나 어느 대학이건 1회 졸업생은 유리한 고지를 반쯤은 점령한다는 통념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우수 대학들의 우수죽순격인 잘난 박사들보다, 사람들은 오히려 나의 밝은 미래를 점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은사님들이 연이어 정년이 다가왔다. 기회가 온 것이다. 그 동안 저 아래 후배 하나가 역시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그 세대는 지성과 미모를 한 데 갖추는 세대였는지, 나의 비위로는 너무 여자 같아 보였다. 필시 학자적으로 부족할거라 단정하고 미리 얕잡아 생각했었나 보다. 선거는 마지막 한 표까지 개표가 끝나봐야 알고,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고 했다. 경력으로나 학자적 줏대로나 앞섰다고 자만했던 내가 후배에게 패했다. 이태 전 일이었다. 그제야 모교를 떠나고자 다른 대학의 문을 두드릴 생각을 해보니 학력에서 밀렸다, 유수한 대학들의 이름에 눌려서. 일단 서울을 떠날 요량으로 지방대학을 기웃거렸다. 안쓰러워하는 눈길들을 도망쳐 나오는 데는 성공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오늘 이렇게 참담하다. 봄비에 살짝 젖은 머리카락에서 쉰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실내조차 축축해진다.


한 선생님, 아홉 명입니다. 벌써 네 시가 넘었는데요.


직원은 다시 말했고, 나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홉 명이면 폐강인 것을 누가 몰라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인문학 중에서도 그래도 외국어 강의는 도구과목으로 조금 쓰이고 있다 했지만, 그것도 나라 나름이다. 그러니 전국의 대학에 OO정보통신영어대학교 라는 간판을 갈아붙여야 할 지경 아닌가. 영어 일변도에다 최근에는 협력 수완으로 중국어와 근동의 언어들이 외려 주목을 받는다. 나는 점점 굳어지려는 입을 여는 대신에 눈을 들어 시계 쪽을 향한다. 무정한 시계는 멈추지 않고, 더 이상 사람은 올 것 같지 않다.


방법이 있어요, 궁여지책이지만. 우물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그가 등록을 했다, 엉뚱한 과목에 아주 엉뚱한 방식으로.


사무직원과의 대화에 불쑥 끼어든 그가 제2외국어 팀장 배 교수였다. 오해하지 말라거나, 무안해 하지 말라거나, 그런 언급도 없었다. 이 엉뚱한 일을 호의로 해석한다? 강의 담당자가 속수무책이므로, 팀장이 책임진다? 규칙에 따르자면 폐강일 것을 면하는 일, 제2외국어 팀장이 그 일을 했다. 그것을 호의라 보면 호의다. 그러나 당사자에겐 치명적인 모욕감을 주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왔다. 밴댕이 소갈머리가 뒤틀렸다. 이튿날 아침에 사무실에 나가서 폐강신청 절차를 밟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밤사이 구세주가 생겼나 보다.


한 선생님, 괜찮게 되었어요. 다 저녁에 등록을 하신 분이…… 컴퓨터로요. 바로 입금까지도 끝냈고요.

…….

열 한 명이 되었다니까요. 괜찮아요, 제2외국어 쪽은 보통 늘 그래왔어요. 이만한 수로 설강하는 대학도 드물 거예요.

그래도 이건.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마음 쓰지 마셔요, 배 교수님이 좀 고지식하세요. 아직 경험도 적으시고. 일단 폐강을 막는 것을 책임으로 아셔서 그러시는 거죠.

그럼 다시 명단에서 빼셔요. 당분간 얼굴 마주칠 일은…….

얼굴 마주치지 않으면?


그렇게 시작된 그와의 만남은, 어찌 보면 호의요 다른 한편 모욕이라는 이율배반으로 시작되었다. 애초 큰 규모의 조직체 안에서 데면데면 지낼 인연이었다. 도무지 인간과는 관계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부만을 한답시고 살아버린 청춘이 이제와 안쓰럽게 돌아올 리도 없고.


나는 겨우 일 년을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 드디어 겨울 강의가 펑크가 났다. 여름이면 저녁 시간이 겨울 들어서는 오밤중이 된다. 무슨 억척으로 늦은 시간 제2외국어 강의에 나방이가 꼬인단 말인가. 매번 폐강이 될까 말까를 애태우며, 불안정한 수입에 매달려 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도 불쌍했다. 나는 아예 그만 둘 생각으로 담당인 그에게 문자를 남겼다. - 송구영신. 이렇게 옛날사람이 되어갑니다. 다른 곳을 향해서 걷는 느낌이면서…….

받은 문자함에 메시지가 떴다. - 지상의 삶은 또 다른 별에서 만날 인연… 추위에 건강…

받은 문자함의 답은 반쪽짜리 줄임표까지 합쳐도 겨우 54자. 간단한 말로는, 이제 다른 별에서나 봅시다. 옳은 말이다. 이승에서 더는 볼 일은 없다! 지나간 인연은 지나간 인연이다, 악연이든 아니든. 악연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 일도 없지만, 좋은 인연이라고 해서 늘이려고 하면 그 성격이 변하고 만다. 짧을수록 좋은 것은 미니스커트와 연설이라더니, 거기에 인연을 더해야 할 것 같다.


그렇습니다. 옛사람은 지나가는 겁니다.

눈으로만 문자를 쓴다.

다른 별에서나 만날, 이승에선 다시는 볼 일 없을 사람에게 건강은 무슨.

건강은 무슨. 그런데 이렇게 예의바른 민족이 우리민족이다. 배달민족.

그리고 갑자기 화두가 떠올랐다. 내가 만일 소설을 쓴다면 첫 소설의 화두는 바로 배달민족일수도 있겠다. 결국 우리의 이야기일 테니까.

웬 소설? 혼자 쓸쓸히 웃는다.

소설을 아무나 쓰나.

하지만 평생 소설에 관해서 매달리어 온 것이 전부인데, 달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옮겨가고 싶은 고장도, 눌러 있고 싶은 생각도 정리가 안 된 채.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책장이 붙은 책상 하나가 전부인 원룸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다. 불 하나를 끄면 암흑이다.


그렇게 세월이 가던 봄날이었다. 6년간의 모교 강단이 아리게 어른거렸다. 분홍 빛 미래를 꿈꾸던 시절이었구나. 지방대학의 시간은 부질없었다. 아예 강의를 잃은 봄은 말 그래도 나른했다. 잔인한 사월? 사실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습관처럼 이메일 박스를 열다 눈에 띈 그의 이름. 그에게 무슨 일이? 결혼 소식? ‘배승한’이라는 제목의 이메일에서 상상되는 것은 그에 관한 어떤 소식일까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설마? 다행스럽게도 - 다행스럽게도? - 그것은 그에 관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의 결혼 소식도, 사고 소식도. 실망스럽게도 또한 - 물론 내가 그로부터 편지를 기다린 적은 없다 - 그것은 그의 편지도 아니었다. 편지글이라면 있어야 할 서두조차 없는 글. 어떤 의미에선 그것들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 확증도 없었다. 우편물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전부였다. 어느 문자 메시지가 이렇게 짧을까? 메시지보다도 짧은 이메일.

그리고 우편물이 도착했다. 가끔은 수첩에, 가끔은 작은 노트에. 다만 메모조각들. 담화표지를 완전히 무시한 글. 글이라고 할 수도 없는 메모. 메모의 연속. 혼란된 메모 조각들. 왜 이것들을 나에게? 그러나 나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정렬해야 하는 숙제를 안은 느낌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정리한 것은 그의 메모 순서가 아니다. 메모에 날짜가 불분명했다. 날짜는 대개 있는 편인데, 가끔 연도가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순서를 덜 헷갈리게 하려고 애를 쓴다. 가능하면 시대 순으로. 그의 아버지의 과거에서부터 그의 현재를.


*


아버지, 파독광부


그는 독일 태생이었다. 그가 독일에서 태어나게 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1970년대 한국판 엑서더스, 노동 엑서더스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해외파견노동자 일세대로 독일에 나갔다가, 아내와 아들(?) 둘 사이에서 줄타기 삶을 살았다.


그의 메모에는 객관적인 자료들로 넘쳐났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자료들과 아버지의 삶 사이에서 무엇을 찾으라는지. 해외파견노동자라면 대개 사우디에 파견된 건설노동자들을 생각하지만, 최초의 해외건설사업은 1965년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에 진출한 것이 시초였다. 그보다 앞서 1963년 12월 20일에 이름 하여 서독광부 파견을 위한 결단식을 치른 250명의 대한민국 국적의 남자들이 선발대였다. 수십 대 1의 경쟁을 뚫고 뽑힌 젊은 광부들은 서독의 채탄기술을 배워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이튿날 1진 120여 명이 서독으로 출발했다. 그러니까 1963년 12월 21일, 중학교 책에서 들어봤던 루르탄광지대를 향해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에어프랑스 기내에는 123명의 광부들이 타고 있었다. 월급이 162달러 50센트로 계약이 되어 있으니 두려움은 설렘에 녹았다. 지엔피가 80달러 이쪽저쪽일 때였으니 기가 막히는 수입이었다. 그때 1달러가 한국 돈 250원인가 260원 정도였으니 어땠겠는가. 한국은 여전히 열에 세 명은 실업이었고, 통계가 그렇지 사방에 널린 것이 실업자였다.

이를 시작으로 1960년대에 수천 명의 우리나라 광부들이 서독으로 진출했다. 1967년 이른바 서독 간첩사건으로 서독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광부파견이 중단됐지만, 이후 70년대에도 우리나라 광부 수천 명이 서독으로 갔다.


그의 아버지 배 아무개 씨는 1971년에 스물 네 살의 나이로 독일의 탄광으로 흘러 들어갔다. 첫 지망을 망설이고 소위로 못 박았던 형이 5000원도 못 받는 월급을 한탄했던 일을 그는 분명히 기억했다. 그때 군 동기 중에 서독광부로 간 친구는 근 열 배의 월급을 받는다던 형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었다. 그뿐이 아니다. 1965년 10월 그 이름도 용맹한 육군 맹호부대 파병에 자원했던 형은 그곳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긴 긴 일 년이 지나고 어느 날 106 후송병원의 수술대 위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고 전갈이 왔다. 그러니까 1967년 4월 중순 경 치탄의 308고지에서 의식을 잃고 후송된 것이 마지막 행적이었다. 행불자가 된 것보다는 낫다고…… 보고된 것이 전부였다. 행불자라면 시신을 수습하거나 확인하지 못한 미 귀대병을 말한다고 했다. 더욱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을 수도 있었으니. 그러나 얼마 뒤 두코전투의 주역이었던 같은 맹호부대 기갑연대 x중대 y소대장은 복부 관통상과 머리, 팔 등 엄청난 총상을 입고 전장에서 의식을 잃었지만 몇 주 후에 의무중대로 살아 돌아왔다는 기적 같은 소식도 있었다. 목숨만 붙어 들어오면 반드시 살려낸다는 미군 이동외과 병원 덕택이었다고. 운명의 여신의 심사를 누가 알랴. 그때는 형이 미군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했던 것이 한이었다. 미군은, 형의 편지에 보면, 적의 시체들도 한 데 모아 덮어서 장사를 지내준다고도 했었다. 다른 증언들에 따르면 더러운 짓도 했다지만.

어쨌거나 집은 형의 죽음만 빼면 다른 것은 더 나아졌다. 미국은 한국군을 차출하기는 2차 대전의 일본과 마찬가지였지만, 대우에서는 크게 다른 나라라고 여겨졌다. 일제 때의 초근목피 대신 미국과 관련해서는 곁에 가면 떡고물이 있었다. 형은 죽고 떡고물이 남았다. 그가 대학 문턱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형의 떡고물, 형의 죽음이 가져온 떡고물 덕이었다. 문제는 형의 죽음을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순식간에 폐인처럼 몰골이 변해갔다. 형의 죽음 값으로 산 논밭을 어찌 벌어먹느냐고, 건사를 못하시더니, 결국 아무렇게나 다 넘겨버렸다. 가세는 다시 기울었다. 그래서 그가 떠났다. 1971년 독일로 떠났던 그가 1976년 말 돌아올 때만 해도 환율이 500원쯤이었으니 일단 그 돈은 대단한 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


이역만리에서 한국 남녀들은 그나마 동포끼리 서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교회의 선교활동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렇게 독일교회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보는 곳에서 나는 아내를 만났다. 저녁이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조촐한 한식식사가 우리들 마음을 녹여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유난히 영이 순이의 얼굴이라서 눈에 띄었다. 내 눈에 띄었다. 아내 옆의 여자가 고급공무원 중에서도 지원해서 서독간호원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강조했다. 첫 파견자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아내도 그 대단한 분 이야기를 지금도 심심찮게 한다.


5개 국어를 구사하는 그 양반은 지금도 한의약박물관에 자원봉사를 나가 안내를 한대요. 자원봉사 경력은 무려 20년도 넘고, 봉사시간만 따져도 3만 시간이 넘어서 ‘서울을 빛낸 인물 600명’인가 그런 어마어마한 기록에 들어 있다더라고요. 기네스북보다 나은 것이, 남산 서울타워 아래 타임캡슐로 보존된다나요. 텔레비전에도 나왔고요. 암튼 첨에 간호고등 나와서 동두천의 외국사람, 미국은 아니고 어디 외국사람 야전병원에 취직해서 서양말을 배웠다느만요.

누가 뭐래요, 능력이야 타고 나는 것이제.

아니, 의사들이 영어를 쓰니까 저절로 배웠기도 허겄지요.

암튼 공부를 더 해가지고 나라에서 필리핀인가 어딘가로 유학을 보내주어 또 공부를 하고 그러다보니 보건부라던가 그런 데서 공무원이 되었대요. 그런데 여보 들어요?

그래 내 가만 들을 테니 마저 해봐요.

그런데도 서독에 젤로 먼저 갔더래요. 일단 돈을 더 받으니까. 그 양반 참 대단한 것이, 결혼도 했는데 갔더래요. 아무리 서양말이라도 다 같은 건 아닐 테니 고생했겠지만, 어디 아예 외국말 깜깜한 우리하고야 같았겄어요.

당신은 어쩌다가 ……, 그래 나 같은 사람 만나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나는 지쳐서 떠났다니까요. 어디에서도 지쳤더랬어요. 워낙 시골이다 보니까 곰수리에서 대처로 나와 고등학교 공부했으니, 것도 대단 했죠. 그래도 중고등 6년을 자취하면서 다녀 봐요, 늘 지쳐있었다니까. 빨래와 밥해 먹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된장까지 직접 담가 먹어봤나요?


첨에는 아내의 이야기 중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 더러 있었다. 어린 나이에 살림을……. 나중에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라는 것을 알고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나는 진짜로 날 낳아준 엄니가 다른 식구들 눈치봐가며 꾹꾹 눌러주는 밥을 먹고 자랐으니까.


난 일찍부터 독립한 거요, 쌀만 가져다 묵었제. 자취할 때 한 방 쓴 친구도 일가는 일가였어요, 같은 고향. 부락은 달라도 같은 성씨에 같은 고향이었죠. 그런데 제 외사촌언니 자랑이 시끌벅적했어요. 그 언니가 외국에서 돈을 번다고요. 서독이라는 나라에 간호사로 취직했다니. 그 얘기를 들었을 땐 정말 귀가 번쩍 했다니까요. 서독이 뭐예요. 독일, 독일, 라인 강의 기적 독일. 아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외국 아녀요? 일본도 중국도 아닌 진짜 외국? 정말 아무나 무엇이 되는구나. 당시는 신문에 서독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와 간호보조사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매일 실렸어요. 그때는 큰 병원의 정식 간호사들도 대우가 좋다는 소식에 독일 취업을 신청하는 분위기였고, 막 고등학교 교련교사 발령을 받았는데 우리가 탄 비행기에 함께 타고 간 선생도 있었다니까 그래요.

그래 누가 뭐라요.

아내는 허리를 세우는 척 하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는 것이리라.



어머니 


유순한 사람이 되라고 붙여준 이름을 가진 유순은 유순했다. 그 또래의 고향 여자아이들은 다 유순했다. 사촌들이 일찍 대처로 나가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유순 또한 일찍 중학교 시절부터 대처로 나와서 공부를 할 수 있던 것은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만, 이번에는 사촌들처럼 서울까지는 따라 진학할 수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다. 유순을 다시 고향으로 유혹하는 것은 없었다. 졸업하자마자 찾은 돌파구는 바로 서독 행이었다. 간호원양성소를 수료한 후 서울에 있는 해외개발공사를 통해 서독병원 취업을 지원했다. 그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병원 측에서 취업허가가 나오면 독일취업비자를 신청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석 달이나 독일어를 배워야했다. 지방의 여고에서 독일어를 2년이나 배웠다는 사실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물론 독어공부는 뒷전이었었다. 1, 2학년 때에는 서독 간호원 생각을 미처 하지 않은 때였고, 영어 다음에 또 배우는 외국어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때 열심히 따라하지 않았던 것이 조금 후회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단어나 문장들이 언젠가 들어본 기억이라도 있었다. 생판 독일어를 모르는 다른 이들을 보면서 조금 우쭐하기도 했다. 구텐 타크, 이히 코메 아우스 코레아. 이히 프로이에…….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만나서……. 다른 사람들은 ‘코레아’란 발음도 틀렸다.



어머니의 이야기


1972년 11월 30일이었다. 그때는 김포공항에 가보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나 같았다. 우리 마을에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떠나 본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전세비행기라 했다. 비행기에도 전세가 있나? 어쨌거나 전셋집이 그냥 집만 못한 것처럼, 전세비행기는 그냥 비행기만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만 비행기가 어쩌면 좋은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전세라면 온통 우리만 탄다는 것이란다. 그런데 우리나라 비행기가 아니고 일본 비행기였다. 일본비행기라면 더 나은가? 그땐 분명 뭐든 한제보다는 일제가 더 나았다. 비행장은 북새통이었다. 우리 같은 간호보조사와 진짜 간호사를 합쳐서 250명이 타고 갈 비행기를 보려고, 모여든 사람이 두 배는 넘었다. 우리 식구들은 없었다. 3년 뒤에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나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할 사람이 마땅히 없었다. 큰집에 계시는 할머니께는 인사를 갔지만, 3년 그런 소리는 잘 못 알아들으실 만큼 귀가 먹었으니까. 어머니, 동생들의 어머니한테는 3년 뒤에 오겠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3년 뒤에 오는 것은 나도 잘 몰랐다.

버스 보다 몇 배나 커 보이는 비행기에 질렸다. 지레 겁이 났다고 해야 맞다. 가벼운 연도 가끔은 곧장 가라앉는데, 이 무거운 것이 어떻게 뜰까? 그런 염려를 뒤로하고 비행기는 구름 속으로 둥실 떠올라 들어갔다. 비행기는 정말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물리시간에 배운 무엇인가를 실제로 경험하기 위해서 용을 쓰고 느낌을 갖느라 피곤한 줄도 몰랐다. 북극이다. 알래스카. 어쩌면 내가 북극에 오다니. 밖으로만 내다 본 북극이 아쉬웠다. 그 매서운 공기를, 북극의 겨울 공기를 꼭 만져보고 싶었는데. 그냥 쉬기만 한 비행기는 다시 이륙하여 마침내 12월 1일 드디어 독일 땅에 착륙했다. 그곳은 이름이 프랑크푸르트, 지금도 유업의 돈이 넘실대는 곳이지만, 그 때는 세상의 중심인 듯 했다.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어딘가로 흩어질 모양이었다. 또 한 번 어수선한 수속을 마치고 모두 쌕쌕한 짐 가방을 들고 공항 밖으로 나오자, 온 데 서독 지역 병원에서 온 버스며 승합차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들 몇은 당나귀 음악대로 유명한 곳 브레멘으로 갈 것이었다. 버림받은 당나귀, 개, 고양이 그리고 수탉의 처량했던 출발을 상상하며, 또 멋진 결말을 우리 것인 양 상상하며, 의기양양하게 승합차에 올랐다. 정확히는 우리가 브레멘까지 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를 태운 승합차는 브레멘까지 가기 전에 남서쪽으로 40킬로미터 못 미친 빌데스하우젠이라는 도시에서 멈췄다. 한 번 멈췄던 시간을 빼고도 다섯 시간 이상을 달린 뒤였다. 산간과 숲에 둘러싸인 곳으로, 가보지도 않은 강원도 어디 쯤 같은 곳이리라 느껴졌다. 그러나 초가집이나 판잣집 대신 어딜 가나 빨간 지붕들이 초록빛 나무들 사이에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모여 있었다. 누군가의 집이 불쑥 커서 뒷집의 햇빛을 몽땅 빼앗아버리거나 그러는 일이 없어보였다. 희한했다. 일곱 난장이들처럼 똑 같이 작달만한 키의 집들이 일곱 여덟 씩 있었다. 바깥 창틀도 약속이나 한 듯이 동네마다 밤색이면 밤색 흰색이면 흰색이었다. 그건 참 신기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보름 전쯤 시간당 200킬로미터가 넘는 태풍이 몰려와 건물이며 차량이며 완전히 망가진 일들이 널렸더란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태들을 알지 못했다. 기숙사에 갇혀서? 그랬다. 기숙사에서 단 하루를 쉬고 월요일부터 근무에 들어갔다. 1972년 12월 4일 월요일이었다. 우리나라보다 시간이 늦게 간다고. 이상한 체험이었다. 물리 시간에 배운 그대로, 고향의 할머니는 벌써 오후 곁두리 걱정을 하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서둘러 일어났다. 사실을 거의 밤을 새웠는데, 그게 시차랬다. 그리고는 새로운 시간에 새로운 공간에 갇혔다. 그냥 부품나사처럼 시계추처럼 건물 안에서 건물 안으로만 이동했다. 뉴스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컬러텔레비전이라는 것이 나온 지 몇 년이 안 되었고 참 신기한 것을 틀림없었지만,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구텐 타크’, 그건 별 소용이 안 되는 독일어였다. ‘구은 타, 타’ - 그렇게 여기에 와서 배운 독일어가 더 유용했다. 아니, 아예 어색한 웃음기가 더 잘 통했다. 검은 머리의 우리는 백의의 천사였다. 미소는 사람을 천사로 만들어주니까. 사람들, 독일 사람들은 천사에겐 슬픔도 고통도 없는 것이라 느끼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슬픔이나 고통 같은 무거운 감정들은 없는 인형 취급을 받았다. 말 잘 듣고 일 잘하는 부지런한 인형.

때로는 인형이 복도 터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일가친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독일할머니가 죽었는데, 침대 머리맡에 넣어둔 종이돈 다발을 몽땅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그냥 슬쩍 갖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병상의 할머니가 숨을 몰아쉬며 뭐라고 하던 말 중에, 우린 몰랐지만, 미리 옆자리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더란다. 자기가 죽으면 아무개 간호원 주라고, 평생 처음 손톱발톱 깎아주는 젊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고. 실제로 서양 노인들은 너무나 뚱뚱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러면 자신의 발을 만질 수가 없었다. 영락 그림책에 나오는 마귀할머니 몰골이 되어있는 손톱 발톱을 깎아 주는 일은 우리들에겐 어렵지 않았다. 나도 할머니한테 가면 늘 손톱발톱을 깎아드렸었다. 그만 한 일에도 이 할머니들은 ‘당크 당크 힙시 힙시’ 그렇게 우물거렸는데, 고맙고 예쁘다 그런 말인 것은 나중에야 알아들었다.

물론 그런 일들은 한 참 뒤에 병실에 배속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처음에 우리들 간호사도 아닌 간호보조사에게 돌아온 일은 응급실과 영안실 사이 심부름이었다. 일이 별로 없는 날에는 응급실과 영안실의 깨끗한 의료집기들을 다시 닦는, 해도 안 해도 되는 일을 할 때도 있었다. 다 씻은 식기의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제거하는 일 같은 것은 너무 쉬웠다. 이런 일 시키려고 비행기 태워서 사람을 사오는지, 그 부자 나라가 한심하기도 했다. 물론 알코올 솜으로 시체 닦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쉽고 편했으니 오지기만 했다. 나중에 병실에 배속되었을 때에도 간호보조사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간호사를 보조하는 일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병실을 찾아가 장갑을 끼고 환자에게 연고를 발라주는 일은 그 중 일다운 일이었다. 양국에서 병실로 약을 가져다주는 일, 변기를 대주는 일, 변기를 빼내는 일, 환자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일, 식사를 거두어들이는 일. 아, 나중에 들으니 전설적인 아줌마 간호사들도 독일에서 일했다고들 말하지만, 우리는 여섯 모두 처녀들이었다. 어쨌거나 꿈 많은 처녀들. 우리는 말썽 없이, 사랑까지는 아니라도 귀여움을 받을 만큼은 열심히 일했다.


정말 어색했던 일은 우리가 그 나라 이름으로 불리게 된 일이었다. 열흘 쯤 되었을까, 아무튼 얼마 만에 우리 여섯을 한 곳으로 부른 병원관계자는 우리에게 서양식 이름을 하나씩 지으라고 했다. 환자들은 물론 병원 사람들이 우리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제대로 부를 수도 없다고 불평을 하기 때문이라 했다. 성을 갈라는 말은 다행히 아니었지만, 우리는 저마다 아는 독일이름을 생각해내야 했다. 나는 생각나는 이름이 성모 마리아밖에 없어서 마리아로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리아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할 수 없이 언니뻘에게 양보를 하고서 메리라고 하려다가 사람들을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그게 그것이랬다. 아무튼 독일소설 어딘가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떠올라서 그냥 루이제가 되기로 했다. 마리아, 루이제, 사라, 엘리, 주잔, 로테. 이 무슨 이름들인가, 누런 얼굴에 물고기 눈을 한 검은머리의 처녀들이. 하긴, 여기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어차피 서양식 이름으로 따라야 했다. 그건 그랬다. 고향 친구 중 언니 하나가 한국에서도 유난히 그런 서양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보았다. 어쨌거나 나는 그곳에서 루이제였다.


최근 들어서는 그 독일에서 외국인 거주자들을 아주 색안경으로 보는 풍조가 생겼다 해서 놀랐다. 참 웃긴다 싶다. 그때는 아쉬워서 데려가 놓고, 이름까지 저희들 식으로 고쳐 불러놓고서, 거기 뿌리 내리면 미워하다니. 우리들 중에는 그곳에 남아서 출세한 사람도 있다. 또 가끔은, 아주 가끔은 늦은 나이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열성파들이 있고, 그렇게 해도 성공하기도 했다. 아무튼 성공한 경우라면 꽤 유명한 화가가 된 사람도 있으니까, 물론 독일이름으로. 독일이름이란 독일남자와 결혼해서 생긴 이름이다. 연애가 상당히 인생을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똑같이 독일남자와 연애를 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연애 - 우리는 물론 사랑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싶지만, 사람들은 그냥 연애라 그랬다. 마리아, 루이제, 사라, 엘리, 주잔, 로테가 모두 연애를 했다면 그 말은 틀렸다. 누가 연애를 하는지는 금세 드러났지만,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내밀하게 알지도 못하니까 말할 수도 없다. 독일남자 조심해라, 연애로 끝나고 마니까! 그것이 우리들에게 내려진 금기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용돈이 많이 들고, 용돈을 아껴서 고향에 보내려고 타국에 온 그 목적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우리 집만 해도 그랬다. 독일병원에 취업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 들어간 돈부터 갚아야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오랜 병으로 돌아가신 집안은 누군가가 일으켜야 했다. 그때 돈 400마르크씩은 누구나 집으로 보내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용돈으로 50마르크 정도를 남겨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아껴서 현금이 불어났다. 돈을 쓸 일이 없었다. 고사리를 뜯어 말리다 냄새 때문에 혼이 나기도 했지만, 우리는 억척스레 먹을 것도 아꼈다. 병원식당에서 먹을 때 많이 먹어둠으로서. 그렇게 1년 쯤 지나자 고향집에 텔레비전을 사드릴 수 있었다. 누구나 대개 그랬다. 딸을 독일 간호원으로 보낸 고향집은 활발해진다는 것이었다. 정신을 다잡고, 연애 같은 것은 말아야 했다.


그래도 3년 째 되던 해 여름, 우리도 독일 간호원들처럼 난생 처음 휴가라는 것을 떠나보기로 했다. 말하자면 유럽여행이었다. 하필이면 우리는 독일의 북쪽에 쳐 박혔으므로, 독일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남쪽을 향하기에는 돈이 빠듯했다. 그래도 여행에는 흐름이 있었다. 다들 남쪽으로 떠나는 것이 휴가인 줄 알았다. 우리도 그런 때도 있었다는 말이다. 돈이 중했지만 한번쯤은 숨통을 터야 살았다.



다시, 어머니


정작 3년간의 계약이 끝났을 때 유순은 브레멘의 다른 병원에 계약을 했다. 왜 꼭 브레멘에 가고 싶었을까? 여전히 그림동화에서의 브레멘 음악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낭만적이기는 틀린 나이였는데도. 게다가 취업할 수 있는 병원은 많지 않았고, 정신병원에 일을 얻었다.

인구 50만이나 될까, 유순이 중고등학교를 다닌 한국의 지방도시의 인구정도였지만, 면적은 엄청났다. 사실 브레멘의 면적 따위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6년간 학창시절을 보낸 중소도시에는 고작 시내를 가르는 하천이 있었을 뿐이나, 브레멘은 가도 가도 끝없는 강을 끼고 양쪽으로 도시가 뻗어 있었다. 강을 몸으로 치면 정강이 까지는 작은 배들이 올라 다니는 항구였다. 환자들을 보며 차츰 알게 된 일이었지만 사실 순 백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철강산업 등 노동자들이 많아 다른 인종들도 섞이어 있었다. 그곳의 외지인이라 해도 물론 우리 같은 동양인이 아니라 얼굴선이 날카로운 중동인들, 그러니까 중간쯤 되는 사람들이었다. 저절로 숙연해지는 역사를 자랑하는 시청건물은 우리나라로 치면 세종대왕 때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다고 들었다. 복음교회라나, 우리나라 말로는 개신교들이 대부분이라는데도 성당 같은 건물들은 여전히 많이 보였다. 유순은 기독교신자가 된다면 성당 때문만으로도 가톨릭이 되고 싶을 것 같았다.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할 때 쯤 그러니까 76년 봄, 브레멘에서 남쪽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한인 천주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렸다. 계속 독일에 남아있었더라면 혹시 모를 일이었다. 다만 성당 속에 들어가 앉아있기 위해서라도 그곳에 가게 되었을지. 그때 유순은 무엇인가를 약속하기 위해서라도 신앙심이 절실한 때이기도 했다. 무엇인가를.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


네 어머닌 우리가 독일에 도착할 무렵 벌써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미국으로 떠난 한국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더구나. 미국에서는 그때 한국의 간호원자격등을 그대로 사용하여 취업할 수 있었다 했고, 한 번 서독에서 살아본 사람들이라 미국이라고 별 다르겠냐고 그런 생각들이라 했다. 똑똑한 누군가는 미국에 가서 대학에서 장학금 받고 공부를 하기도 했는데, 그때 미국에는 간호원이면서 암에 관련된 공부를 하면 장학금을 주는 대학도 있었다고 하더라. 실행은 못해도 그런 꿈들을 꾸었더래.

물론 네 어머닌 그런 꿈을 꿀 위인은 아니었지. 네 어머니가 맡게 된, 결국 내가 맡아야 할 네 형 요한의 문제도 컸다면 컸다. 형은 네 어머니의 죽은 언니가 남긴 아들이었다. 친언니는 아니지만 여기 와서 외로운 생활들 견디면서 동기간 같아진 사람. 그 언니가 벌써 오래 전부터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라.

그 언니는 내나 네 어머니랑 비슷한 운명으로 외국에 돈벌이 나간 신세. 그 언니의 이야기라 해서 네 어머니 이야기와 다를 바 있겠느냐. 독일에서 일했던 한국인 간호사에게 그 사회에서 개성이라거나 감정이 무슨 작용을 했겠냐 말이다. 문제는 그 연애였제.


아버지가 들려준 어머니의 언니뻘 간호사의 연애는 처음부터 암담하게 시작되었다. 병원에서 환자로 맞닥뜨린 남자, 그 백인 남자의 모습은 예수 같았더란다. 영화에서 본 예수. 독일에 처음 만나본, 주위에 흔한 아주 희멀건 뚱보들 사이에서, 그는 오히려 눈에 띄었다. 조금 짙은 머리카락에 다소 가라앉은 얼굴색을 한,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


그럼, 첨엔 다 똑 같더라, 독일이나 스위스나 오스트리아나. 다 어려운 독일말 멋들어지게 하고. 한국처녀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나라 오스트리아라면 무조건 감탄의 대상이었겠지. 네 어머니라도 그랬을 것이야. 그럼, 그 사람이 조금은 덜 서양 사람처럼 생겼다 했제, 그러면서 키는 훤칠하고. 아무튼 그런 인상을 다들 다정함으로, 고향의 느낌으로 느꼈더래. 거기까진 아름답지. 다음은 비극적인 연애의 시작이었지, 다른 한쪽은 일탈의 시작이었고.


연애? 시작은 허망했다더라. 아버지는 말을 쉬이 잇지 못하셨다.

요하네스라는 이름의 독일남자는 오른쪽 팔다리가 다 부러져 들어온 환자였더래. 난생 처음 만난 제 누이와 더불어 여행 중이었더래. 누이랑 어떻게 난생 처음으로 만났냐고? 그거야 거기 서양 사람들한테는 흔한 일이기도 하지. 아, 동서독도 우리 남북처럼 갈려 사니까 더더욱. 암튼 둘은 시인이었다는 저들의 아버지가 태어난 도시까지 가려다가. 운전은 누이가 했고. 이 독일이란 나라가 제한속도가 없는 나라지 않냐. 둘 다 초행길이었고. 그렇게 해서 병원에 실려 온 것이었지. 누인 곧 떠나고. 어디로? 제 자리겠지.


연애? 결과는 참담했지 뭐. 그 남자는 일단 빈으로 돌아갔고.

그럼 빈 사람?

그가 빈 사람은 아니고, 동독에서 빈으로 유학 나온 사람이었더래. 제 아버지 고향 빈에 가서 누이를 찾아 나선 것인데, 처음 만난 것이었대. 아무튼 언니는 독일을 떠나 빈으로 직장을 옮길 수가 없었다더구나. 당연하지, 계약은 독일 계약이고. 오스트리아가 좀 복잡한 나라냐. 그때도 파리에도 그냥 가는데 오스트리아는 통과만 하려해도 비자 받아야 하고 어쩌고, 중립국 아니냐. 물론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일은 계속하는데, 뱃속에 아기의 생명을 의식하자 어쩔 줄 몰라 했겠지. 곧 배가 불러왔고, 그것이 직장에서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람인 언니는 미혼모가 될 예정이었기에 수치심이 어쨌겠어? 아기를 낳고 이름을 지어주어야 했을 때 요하네스는 어느 새 베를린에 있었다던가. 그러다가 더 멀리 동독으로 돌아갔겠지. 원래 왔던 곳으로. 그것 까지여.


동독 - 동독이 어디냐. 그곳이라면 그 언니가 직장을 그만둔다고 해도 죽어도 갈 수 없는 땅, 공산주의 나라로 돌아간 것 아니냐. 그때 언니는 삶을 포기했다는구나. 자살? 그런 건 아니지. 나는 어쨌거나 잘은 모른다. 산후에 그냥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앓아누웠는데, 병원에 함께 있던 한국 간호원들이 아기 요한을 돌보았지. 아기 이름은 따로 지었다기보다는 아기 아버지 요하네스를 줄여서 부른 이름 그대로였대. 아기와 아버지가 무슨 차이가 있었겠어, 애 엄마에게는. 아이 엄마가 막상 그렇게 죽어가는 중에 네 어머니가 계속 내 얼굴만 보더구나. 네 어머니랑 내가 미래를 기약할 만큼 가까이 의지하고 지내던 때였으니. 요한은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남게 되었지. 절차가 간단하지만은 않았지만, 어쨌거나 한국 여자가 낳은 아이를 한국 부부가 키우겠다니 일이 쉬었지. 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따라갔는지 모를 일이야. 암튼 그 덕택에 결혼이 급물살을 탔지. 결혼 하나는 독일이 간단하더구나. 나중에 한국 돌아가서 제대로 하자고 하고, 그냥 한국교회 목사님에게 갔어. 결혼이 성립되니까 입양은 아주 쉬웠고. 어쨌거나 우린 곧 귀국을 서둘렀지. 최소한 한 달을 남겨두고는 그만둔다고 말해야 하더구나.



형을 찾아서


그러니까 내가 독일유학을 가게 된 계기는 결국 형을 뒤따라간 여정이었다. 형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군대에 들어갔다. 한국인 남자에게 군필은 유학의 필수 조건이었으니까. 그리고는 제대하자마자 서둘러 독일로 떠났다. 한국에서 자란 청년답게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서. 여권에도 분명한 한국인 배요한이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나 오래 동안.


형 요한은 자신의 처지와 친부의 존재를 일찍 알게 되었다. 서양 남자였던 친부보다도 더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한 눈에 동생인 나의 비릿한 모습과는 대조되었다.


큰 아는 참 다르게 생겼네여.

글쎄, 어메 아배가 서양밥 묵다가 낳아서 그렇겄제.

아니, 영판 달라.

둘짼 여기 와서 낳았으니까 다른 거지, 뭘 그래.

그래도.

조용 혀, 한 날 한 시에 난 손가락도 길고 짧은디 뭘 그러나.


두 살 가까운 터울의 두 아들을 흔적 없이 키우려던 부모님의 소망은 일찍 깨졌다. 독일에서 낳았으니까, 독일에서 독일 소시지 먹고 낳았으니까,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배달민족에 다른 피가 섞이면 사뭇 다르게 나왔다. 그렇다고 형이 크게 말썽부리는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형이 형이라고 큰 소리 한번 치지 않은 것이 가장 마음 아픈 부분이었다.

형은 초등학교 졸업 쯤 해서 독일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국인 어머니의 이야기도 함께였을지? 그때 어머니는 요하네스라는 본명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단 한 번도 요하네스라고 부르는 일은 없었다. 요한과 승한 사이에서 이름이 변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우리를 차별하지 않았다. 크게 배운 것 없는 어머니지만 참 너그러웠다. 직업이 백의의 천사였으니까 뭐. 어머니는 젊은 시절 그렇게 고생해서 모은 경험과 돈을 가지고도 그대로 시골에 살았다. 아버지의 고향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왜 어머니의 고향이었을까, 진짜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도  안 계신 고장인데? 그 생각엔 곧 답이 나왔다. 아버지의 고향에서라면 형과 나와 다른 얼굴로 살아가기가 더 수월하지 않았을 것임을. 물론 아버지의 고향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농부이자 목수이며 모든 것을, 어머니는 온 동네 의사와 간호사를 겸하면서 부지런히 사셨다. 키위라는 이상한 종의 식물재배에도 성공했고, 오리농사로 질 좋은 쌀 생산을 들여와 동네는 전체로 넉넉해졌다. 그래서 형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입대를 서둘렀을 때 많이 서운해 하셨다. 그렇지만 어서 군대를 마치고 독일로 유학 가겠다는 설명에 걱정 반 희망 반으로 그런 승낙을 하신 것이다.


형은, 요하네스 베르너는 배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뮌헨의 괴테어학원에 등록을 하고 떠났다. 그러니까 처음 기착지가 뮌헨이었다. 자신의 출생지 브레멘이 아니라 뮌헨을 선택했을 때, 괴테어학원 본부가 있는 곳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는 형이 일부러 뮌헨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을 알았다. 형의 아버지가 당신의 누님을 만나서 지진과도 같은 충격에 쌓였다던 곳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집에 남은 우리 모두는 형이 브레멘이고 어디고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을 것임을 안다. 내가 형이라도 그랬을 것이니까. 내가 대학 일학년 때의 일이었다.

형으로부터 소식은 점점 느려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드물었다. 그러다가 뚝 끊겼다. 나도 곧 군대에 입대했으므로 어머니는 두 아들의 편지를 바라느라 야위어 갔을 것이다. 휴가 때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놀랍게 초췌해 갔다. 한번은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란 군대 동기생들 누구라도 어색하게 생각하는 일이었다. 시대가 그랬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는 일도 창피한 일에 속했다. 그래도 가끔 씩 어머니는 편지를 보내셨다. 형 때도 그랬고, 군대에 면화를 오시거나 그런 부모님은 아니셨다. 우리고향에선 아들 군대 면회 다니고 그런 집은 없었다. 그러니 궁금한 마음에 편지를 쓰셨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지금 어머니가 쓰시는 편지는 형을 향한 것이라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어머니는 형의 소식이 더 궁금한 것이다. 그런데 형으로부터는 소식이 거의 없었으니까 내게 편지를 쓰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형하고는 주소조차 끊긴지 한참이 지나있었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의 일상은 전방에서 보낸 군대 때보다 더 전투 같았다. 나는 어쨌거나 형의 흔적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장학금을 받아서 독일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독일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지역 통틀어서 한두 명 뽑는 선발시험에 어찌 붙는단 말인가. 그래도 전력투구를 감행했다. 졸업 전에 시도한 시험에서 한 번 떨어졌다.


한 번의 실패는…….

아서라, 우선 떠나거라.


아버지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네 어머니가 많이 아프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다고요? 어디가 특별히 안 좋으세요?

보면 모르겠냐. 어디가 한참 안 좋다. 통 밥을 못 드신다. 네 형이 시작했던 어학원부터 가서……. 요하네스 베르너, 거기서부터 살펴라. 그 사람 아버지는 시인인가 그랬다더라.


그 정도의 말씀에 일 년을 더 시험 준비로 보낼 수는 없었다. 형과 같은 코스로 뮌헨의 괴테어학원을 목적지로 일단 떠나기로 했다. 어머니는 앙상해진 손으로 봉투를 쥐어 주셨다. 아버지 모르게. 정 막히거던, 정 어렵거던 그때 펴 보거라.


그런 부탁을 정 어려울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나는 그래도 여정을 꾸려 출발할 때까지 봉투를 열지 않았다. 네덜란드항공사 비행기가 암스테르담으로 도착해서 거기서 독일로 들어가는 것을 알고서, 나는 가장 싼 요금의 그 노선을 탔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쾰른 행 비행기는 오싹했다. 자동차로 말하면, 참 미안한 말이지만, 장갑 끼고 모퉁이 돈다는 프라이드 같은 것. 여남은 명이 타자 이륙한 비행기엔 좌석이 스물이 될까 말까 싶었다. 그 요동치는 몇 십 분을 참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그 정신에도 어머니의 편지를 찾았다. 손에 드는 가방 안에 여권 가까이 두었으니까. 어머니의 편지를 보지 못하고 비행기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봉투를 손에 쥔 순간 다시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게 겁이 났다. 찢는 손이 떨렸다.


형은 바로 네 형이…….

무슨 말인가. 형이 나의 형이라니. 형이 형이지 그러면?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하시려는 것인가? 설마……. 그것은 설마여야 했다. 아니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설마는 설마다.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며 깨어났다. 다음을 읽으려고.


그 순간 도착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다시 비행기가 떨어질 것이라는 환상 때문에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서둘러 몸을 사렸다. 비행기는 쾰른 땅에 무사히 내렸다.


쾰른에서 처음 계획은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가서 짐을 푸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남쪽으로 갔다가 브레멘까지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브레멘은 코앞이다. 비행기로 그 창공을 건너 왔을 것이다. 물론 어학코스 시작 날이 빠듯하기는 했다. 그래도 역의 보관소에 큰 짐을 맡겨놓고 형의 출생지로 먼저 향하기로 했다. 출생지에서 무엇을 건질 것인가, 생각에 미치자 멍해졌다. 서독파견 동양인노무자의 아들이 형이 태어난 병원에 가서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아는 것이라고는 형의 출생연도와 이름 뿐. 찾으면 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형의 출생기록을 찾아서 무엇을 하려고? 형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는 그 이름으로 기록에 남았을까? 혼외자에게도 생부의 이름이 적히는가? 독일의 출생신고 제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의문만 떠돌았다. 기록에 있다고 치자. 그러면 기껏 생년월일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주소라면 늘 바뀌는 것이니까. 경찰 신분도 아닌, 더구나 외국인이 독일인 누군가의 행방을 합법적으로 문의할 수나 있는 것일까? 또 기차 속에서 발견한 일인데, 어머니의 편지가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손에 들고 있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이를 어쩐다?


어쨌거나 형의 흔적을 찾는 것이 한강에서 바늘 찾기였다. 형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결국 그의 아버지 요하네스 베르너의 그림자를 쫒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편이 더 수월했다. 실마리라도 있으니까.



독일남자, 요하네스 베르너


예상대로 나는 독일남자의 입원 기록 같은 것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 독일남자를 찾을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에. 독일남자 요하네스 베르너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거기에 없었다. 다행히 오래 전에 간호사 일을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간 한국인 간호사에 대해 이름만 겨우 얻어 들었다. 한국식당을 한다고 들었으니 찾기 쉬울 것이라고. 어머니 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말 그래도 뚱뚱한 직원이었다. 간호사이신지요?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경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옛날 한국 간호사들을 기억하시나요?

아, 베를린으로 가 볼 것이면, 그 사람은 어쩌면 그 이야기를 알지도 모르겠어요.

왜 그렇게?

몇 년 전에도 똑 같은 사람을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으니까 생각이 더욱 또렷하네요. 


베를린. 나는 뮌헨을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향할 수가 없었다. 개강 날짜에 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었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된 목적을 잊지 말자. 어머니는 한시 바삐 형의 소식을 기다린다. 개강에 늦으면 대순가.

베를린 행 기차는 급행이었다. 베를린에서 한국식당 찾기는 쉬울까? 염려보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에 한국식당이 있었다. 우리 같으면 서울 명동 비슷한 거리에서 발견한 한국식당에서는 그동안 벌써 그리워진 김치찌개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인이 브레멘에서 온 분들이 아니었다.


브레멘에서 온 이 아무개라는 분을 혹시 아십니까?

주인아주머니는 아예 내 앞 걸상에 앉았다. 또 박 아무개 씨? 아니, 이 아무개 씨를! 아, 그게 그거라 혼란스럽죠? 여긴 아예 남편 성 하나로 통하니까, 헤어 리, 프라우 리, 헤어 박, 프라우 박. 우리 여자들은 독일 와서 결혼하면 성은 아예 잃어버린다니까요. 참 그건 그렇고. 그런데 이상타. 몇 해 전에도 꼭 당신만한 젊은이가 그 사람을 찾더니만.


그러니까 이곳 한국인들이 남편 성을 써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웠던 것이다. 이 아무개라는 분은 박 아무개가 되어 있었고, 형도 그 사람까지를 찾아냈다. 나는 형의 뒤를 잘 따라가고 있었다.

박 아무개 아줌마는 식당을 하는 것이 아니라 - 첨엔 그럴 생각이었다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다 했다 - 한 나절 한국식품점을 보고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조금 더 알고 있었다.


그 나쁜 사람은 꼭 봉함엽서를 보냈는데, 발신자 주소는 없었어요. 첨엔 빈, 다음엔 베를린. 우편소인으로 보아서 빈인지 베를린인지 알 뿐이었어요. 모르지요, 속에다는 썼겠지요. 우리들이 겉봉만 보고 속닥거린 말들이죠. 우리 모두 다 가슴 졸이며 편지를 기다렸어요. 아기 엄마 운명이 우리 운명이었으니까. 그 나쁜 사람이 나중에는, 그러니까 그 아기 데리고 부부가 한국에 돌아가 버린 다음에, 그땐 동독 소인이 찍힌 봉함엽서가 왔는데, 참 우린 그것을 한국에 보낼 수 도 안 보낼 수도 없었어요. 한국 가서 아들을 또 낳았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그래도 소식을 전해…….

그래 말이에요. 다들 어쩔 줄 몰라서. 그런데 바로 형이라고요, 그러니까? 접 때 먼저 날 찾은 젊은이가? 참 잘생기기는 했다만. 똑 같이 이레 이야기 해 줬어요. 나도 그 때 결혼 직전에 깨져가지고 상심했던 때이고. 또 학생, 학생이라고 불러도 되죠? 난 그때 학생 엄마가 차라리 부러웠을 때라서. 어찌되었건 아들 데리고, 뭣 보다 탄탄히 벌어 귀국했는데, 잘 살라고 두지 뭣 하러……. 다 소용 없어, 친부모 핏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따 같은 사람들끼리, 아따 한민족 공동체, 아따 배달민족 안 있나, 그런 것이 중요하니까는. 형은 참 섞어져서 잘 생기긴 했더니만. 그러니까 형이 제 아버지를 찾더구먼, 그것이…… 암튼 학생 아버지 같은 분은 세상에 없을걸. 다른 남자 아이를, 것도 서양사람 아이를. 한국남자 치고 누가 그런 것을…….


한국남자 치고? - 말끝이 이상하긴 했지만, 조선식 사고방식의 한국 사람들은 입양 자체를 꺼리는 편이었고, 더구나 서양사람 핏줄의 아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선뜻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는 백퍼센트 동감한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없어 뮌헨으로 어학원 시작에 대어 가야했다.



베를린


괴테문화원 어학코스는 2개월 단위였다. 그 2개월 단위의 코스 사이, 외국학생들은 우선 프랑스나 이탈리아 여행을 선호한다. 물론 나는 베를린이 급 선무였다. 그 일주일 동안에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지만, 나는 베를린엘 다녀왔다. 당연히 대학 등록 준비도 베를린을 향했다. 물론 원래의 베를린대학, 그러니까 동쪽의 훔볼트대학이었다. 어딘가 그쪽이 더 가까울 것 같은 이유로.

어학코스에서는 중급에 합격해야 대학진학이 가능한데, 말하기가 마음에 걸렸다. 좋지 않은 점수를 걱정했지만, 평점에서는 중급에 겨우 우를 받아서 대학진학이 가능했다.


21세기의 베를린, 더 이상 분단이라는 단어가 없는 곳. 그러나 사실 여전히 무엇인가가 들끓고 있는 베를린이 좀 불편한 도시인가. 몇 년 전에 시장이 되었다는 이 도시의 수장은 사회민주당의 진보인사인줄로만 알았더니, 웬걸, 게이를 표방하고도 당선된 사람이었다. 꼭 100년 전에도 베를린은 게이의 수도라고 했다. 그러니 한편 또 얼마나 편한 도시인가. 1977년 생 한국 남자는 이곳에서 그리 눈에 띄는 인종은 아니었다. 통일 후에 두 배로 불어났다는 4만 명 정도의 재학생 중 나는 4500명이 조금 넘는 외국인 학생 중에 하나. 열 명에 한 명 이상은 외국인 학생이다. 다른 쪽 자유대학엔 외국인이 더 많다고 했다. 밖에 나가도 외국인이 많았다. 꽤나 열린 도시다.

내가 전공하려는 과목은 무심코 문학이었다. 철학이나 문학은 보통 그저 수리에 약하고 실리에도 덜떨어진 경우에 선택하게 되는 과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었다. 독일을, 독일 사람을, 독일남자를, 독일남자시인을 찾는, 그를 이해하는 방편이었다. 어찌 보면 선택이라기보다는 그리로 밀렸다. 그러는 몇 년 동안에도 형은 감감 소식이었다. 대신에 나는 현대문학의 황금기 언저리에서 놀라운 인물을 발견했다. 카스파 에스 베르너 -


카스파 살로모 베르너의 이름에서 멈춰버린 이상한 경험에서 나는 1920년대 표현주의 작가들 연구를 논문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 공부를 하면서 느낀 의문점들로 보아도 독일문화의 황금시대를 이루어 냈다고 하는 그들에 대한 연구는 나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 마디로 같은 출발점에서 국수주의 문학과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극단적 결과가 나온 뿌리이니까. 식물로 말하면 전혀 다른 꽃을 피우는 하나의 줄기라고나 할까. 여기서 내 연구와 관련된 이야기는 접어두어야 한다. 카스파 에스 베르너가 직접 연구대상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가 내가 찾는 요하네스 베르너의 아버지인 것은 확실했다. 그가 시인이 아니라 극작가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독일어에서 ‘디히터’는 시인이요, 작가요, 뭐 그런 것을 다 포함하니까. 그것보다는 베르너라는 이름이면 충분했다. 또 1902년이라는 출생연도가 아버지이기에는 딱 떨어지게 맞지는 않지만, 아들을 낳는 나이가 어디 딱 떨어지는가. 그가 그의 아버지인 것은 거의 확실했다. 다음이 내가 조사한 것이다.



요하네스의 아버지


요하네스는 분단독일의 냉전 분위기 속에서도 압박 없이 자란 세대에 속했다. 아버지 카스파 베르너가 어쨌거나 전후 서구사회를 버리고 동독 사회주의공동체를 선택한 이상 아들은 우수한 출신성분을 가진 셈이었으므로. 또한 부계 혈통이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상대적인 특권을 누리며 동독의 철조망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성장했다. 특히 1971년 울브리히트에 이어 호네커가 권력을 승계했을 때는 동서독 관계 전체가 푸른 신호등을 만났다. 교조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시대가 간 것이었으니까. 울브리히터는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벌써 공산당 베를린지구 서기였고, 나치스 집권 후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전쟁 중에는 소련군으로 복무했다가 전후 귀국하여 도이칠란트 통일사회당을 설립한 골수 공산주의자로, 집권 이래 독재자적 면모를 의심받았다. 새로운 주역 호네커는 나치스 12년 지배 동안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확고한 반 나치주의자로,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권좌에 오르자 무언가 젊은이들은 무언가 봄바람이 느껴진다고 믿었다. 그곳에서 보기에 저쪽 - 서독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전설 브란트가 집권해 있었다. 70년대 벽두엔 동독의 문단에서도 상당히 정치적일 수 있는 주제들이 나왔다고 한다. 김나지움 독서목록에 주인공 젊은이의 “새로운 슬픔”의 원인을 권위적 교육자와 그 비슷한 어른들에 돌리는 등, 규범에 대한 적대감, 모범적 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한 작품들이 들어있었다. 더러는 통상적인 삼각관계의 구도 속에서 실제로는 순응메커니즘, 허위, 모순들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들. 사회주의 사회에서 왜 개인들은 사적인 행복을 방해받고 있는가 의심하는 책들마저 나오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빈을 향한 것은 순전히 뿌리가 그리운 회귀본능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늦둥이인 그에게 아버지는 이름으로만 남았다. 청소년기를 반 나치스 사회주의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랐던 그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서쪽으로 향했다. 온전한 사회주의의 아들로서, 그는 빈 대학으로 유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흔적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은 그를 오스트리아 깊숙이 아버지의 고향을 찾게 했다. 이복누이가 있단다, 거기까지가 어머니가 일러준 아버지의 흔적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을 향했던 요하네스는 이복누이가 빈 근교에 있지 않고 벌써 뮌헨 대학에 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뮌헨의 이복누이와 연락을 시도했다. 뮌헨에서 누이를 만났다.

클라라 브레너, 나이 차이가 한참 되는 누이였다. 우리나라 말로 띠동갑도 넘는. 그러니까 남매는 전혀 다른 아버지 이미지를 가진 채 서구와 동구에서 살아왔다. 딸은 진작 오스트리아를 떠나 뮌헨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출판사에서 원고감사원으로 일하며 제 글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의 재능이 딸에게서도 확인될 법 했다. 다만 이번 세대에는 드라마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소설은 주목할 만한 영웅 대신 설명이 필요한 시대를 담기에 더 적합한지도 몰랐다. 그 자신은 손위 누이와 달리, 또 자라난 동독사회의 영향이었을지, 글쟁이의 유업을 이어갈 하등의 관심이 없었다. 화학을 전공하는 그는 염료라거나 페인트 등 응용화학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잘 나가던 작가였던 시절에 대한 관심은 당연했다. 누이가 그 길을 보여줄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진짜 고향에 가 보자.

진짜 고향?

할아버지들이 살았던 곳.

할아버지들?

넌 그걸 몰랐던 거야? 우리에겐 할아버지가 둘이야.


이른 문명, 출생 서류 정정, 결혼, ‘이상한’ 관계 - 아내 자살, 아카데미 퇴출 - 재혼 - 친자관계 소송 - 아카데미 재 입회 - 재 퇴출 - 레지스탕스 - 이혼 - 동베를린 행.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이와 더불어 아버지의 원래의 고향 슐레지엔을 향하는 중이었다. 느닷없는 비밀이 그를 강타했다. 요하네스는 까무러쳤다. 누이의 이야기는 까무러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뿌리 이야기. 그에게는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둘 있었다고. 정확히는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두 명의 아버지가? 그가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히틀러 집권 이전에 이미 성공한 극작가였다는 사실 뿐이었다. 비밀은 엄청났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비밀. 혈통의 문제, 아버지가 1/2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유대인이 아닐 수 있었는가?



카스파 베르너 - 베른슈타인


문학사전? 여기에서 나는 인물사전이나 문학사전 등을 찾아보았다. 일단 카스파 베르너 - 재미있는, 아니 슬픈 일이다. 보통 카스파 에스 베르너라고 불리는 카스파 살로모 베르너의 출신 란에는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입양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항목에서는 카스파 베르너의 ‘아버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입양자?


카스파 베르너(카스파 살로모 베른슈타인의 예명)는 유대인인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과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1920년대의 벽두에 표현주의에서 출발한 극작가였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집권 이전에 이미 문명을 날렸던 것. 무슨 예감이었을까. 정확히 1929년에 그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출생에 관한 ‘이상한’ 증명을 받아두었다. 예명으로 썼던 베르너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나, 그가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의 친자가 아니라는 증명서였다. 나치스 이전에도 유대인은 개종만이 유럽문화에의 입장권을 받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 세기를 풍미했던 시인이자 독설가 하이네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니까 카스파 베르너는 히틀러 집권 전에 벌써 1/2 유대인의 피를 부인하는 서류를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순 독일인이었던 어머니는 아들의 희망에 따라 아들을 유대인 핏줄에서 보호해야 했다. 아들의 생부를 순 독일인 누군가로 지목했으니, 자신이 혼외자를 데리고 유대인과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미 나치스 집권 직후에 프로이센 아카데미에서 축출 당했어야 할 위인이었지만 ‘이상한’ 친분이 그를 구하고 있었다는데. 카스파 베르너의 특별한 아내는 소문에 의하면 나치스 복판의 권력자와 3각 관계였었다고.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라도 아내는 너무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곧 이어 그가 재혼했을 때가 1937년. 곧 이은 오스트리아 합병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에게는 위험 그 자체의 환경이 되었다. 그는 유대혈통의 교사이자 작가였던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에게 친자포기 소송을 내었다. 결국 이삼년을 끈 소송 끝에 아버지는 아들이 완전한 아리안임을 서류상으로 확인해 주었다. 곧, 아버지 요나스 베른슈타인은 아들에게 패소하여 부권을 영원히 상실했고, 입양자 아들은 예명 베르너로 개명이 확정되었다. 물론 독일인 신교목사의 친자확인 증언 하에서다. 한 젊은이의 목숨이 달려있다 하더라도 그 신교목사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여태 독일여자와 유대남자의 아들이던 젊은이가 새삼스럽게 독일인 신교목사의 혼외자라는 설에 고개를 흔들면서도, 그런 일이 조작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것이 성공했기에 아들이, 요하네스의 아버지가, 나치스 시대를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때로는 짐승이고, 벌레고, 벌레만도 못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증명서가 있었으니까.

다시금 프로이센 아카데미에 받아들여진 것도 잠시 후 출판금지와 재 퇴출을 경험해야했던 카스파 베르너. 그토록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졌던 그는 두 번째 아내, 전형적인 합스부르크 백성이던 아내와 더불어 전쟁을 살아남았다. 물론 마지막을 향하던 1944년의 어느 날엔 레지스탕스에 관련하여 반 군사적 행동으로 체포되는 운명을 겪었다. 감옥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이 그를 구해냈고, 그것이 전후에 그를 구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아카데미 퇴출이나 출판금지 보다는 이 레지스탕스 관련 행동이 부각되었다. 더구나 그의 영어 실력은 나치스 초기의 협력이라는 문제점을 넘어서 그를 구해내었다. 과거의 나치스 시절의 경력보다도 영어 실력이 중요시 된 것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정치적 과거를 정당화 하는 노력이 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요약해서 오른 쪽 왼쪽을 구분해 보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그의 이력이었다.

결국 아내는 그를 떠났다. 현실적으로는 그가 아내를 떠난 것일까. 순 독일 혈통의 어머니도, 순 독일 혈통의 아내들도 더 이상은 그의 곁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아내는 세상 자체를 버리더니, 다른 아내는 그를 버렸다. 그는 모색했다. 새로운 삶은, 새로운 다른 곳에서! 옛날의 동지들, 표현주의 시절의 동지들, 나치의 집권으로 흩어지기 전의 동지들이 아직 다른 곳에 건재했다. 소련군 점령지였다. 미국 점령지에서 앞장섰던 정치경력을 가지고서도 그는 대담하게 그쪽으로 건너갔다. 물론 옛 동지들, 바이마르 시대의 동지들과 접촉한 다음이었다. 그곳에 다른 국가가 생겨난 다음이었다. 그때 벌써 독일은 반쪽으로 나뉜 둘이었다. 그길로 오스트리아에 남은 아내와 두 딸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중립국으로 남아서만은 아니었다. 동 베를린에 정착했을 때는 이미 오십을 넘긴 나이였지만, 새 출발은 새 출발이었다. 옛 동지들 덕에 사회주의국가건설 이데올로기에 동참하는 지식인 계열로 분류되었다. 나치스 시절에 다소 핍박을 받은 극작가 이미지가 한몫을 했다. 정작 작품 활동을 하기에는 그의 공산주의 사상은 분명하지가 않았다. 역시 다행히도(?) 문화연맹은 함께 표현주의에서 출발했던 작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또 무슨 매력이 남았을까? 그는 문화연맹의 사무직으로 있던 젊은 작가지망생과 다시 한 번 결혼했다. 아들 요하네스를 보았다. 그러다가 아들이 세 살이 지났을 무렵 맹장염으로 사망했다. 1956년 말.


여기까지다. 서양에서 맹장염?


또 다른 사이트다. 다시 카스파 베르너의 이야기. 그는 순 독일인 증명 덕택에 나치스시절을 살아남았다. 그러나 출판은 여전히 난관에 부딪쳤고, 제국작가연맹에서는 그를 재차 탈퇴시켰다. 여기까지는 일치한다.


요하네스가 들어 알게 된 또 다른 충격적 이야기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어머니 이전에 두 명의 아내가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는 당연히 아버지의 오스트리아인 아내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복누이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한창 나치시절에 짧았던 결혼이 더 있었던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떻게, 순 독일혈통과 결혼했었구나, 매번.

누이는 상당히 정확하게 첫 번째 결혼의 화려함과 수치를 함께 이야기 해주었다. 일찍 성공한 극작가와 극단배우 지망생. 오스트리아 문학은 독일문학과 경계를 나눈 적이 없었지만, 국경은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일찍 성공한 오스트리아 출신 극작가와 순 독일 태생 극단배우 지망생의 관계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모의 아내와 나치 실력자와의 공생관계는 …….


그만, 그만. 그는 갑작스러운 정보들에 눌렸다. 아버지 상이 일시에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문화연맹에 전설적으로 남은 일 세대 작가들과의 동일선 상에서 아버지를 이해했던 그에겐 날벼락이었다. 아버지가 사상적으로 다소 의심을 받았던 부분, 나치와의 일시적 공생관계, 그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일신의 안위를 위해 유대인 아버지를 부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청천병력이었다. 결혼마저도 안전을 위한 것 이상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았다. 아니면 어떻게 아내를 나눈다는 말인가, 비록 그것이 수군대는 말에 불과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 미모의 젊은 아내가 자살을 택하는가? 누이의 어머니는 또? 전쟁을 살아남은 뒤에는 순 독일 혈통이 의미가 없었는가? 아니지. 자신의 어머니도 순 독일 혈통이다. 그럼 아버지의 순 독일 혈통에 대한 파격적인 선호는?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유대혈통에 대한 반작용 아닌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유대혈통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믿어졌다.

그리고선 여행목적지가 바뀌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첫 번째 아내를 만났다는 함부르크, ‘독일극장’을 향해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브레멘 못 미쳤을 때.



백인 남자, 백인으로 보였던 남자


그러니까 그는 나중에 알고 보니 혈통으로는 반의반쯤 유대인이었어.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이 서양인들의 눈에 그것이 그것이듯, 우리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것이었지.

앵글로 색슨인지 아리안인지 유대인인지는 참 알아 보기 힘든 구별?


서유럽 유대인 남자와 동양 여자가 낳은 아이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그에 앞서 그는, 승한은 형 요한의 아버지였다는 서유럽 태생의 1/4 유대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용없었다. 알다 가도 모를 일, 아니 아예 모를 일이었으니까. 유대인보다 저열하다고 간주되는 동양인, 그것이 편해서였을까. 강자 앞에서 굴하는 사람이 약자에게 더 세다고 하는 법칙의. 저열한 법칙의 소산?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알 수 없었던 사실은 요양 중이던 요하네스의 혼돈이었을 것이다. 그는 으스러졌던 어깨뼈가 다 낳고도 요양병동 신세를 져야 했다. 뇌 손상은 전혀 없었지만 불안초조에 몽유병 증상까지 남아서 몇 달을 그렇게 허송해야 했다. 그에게는 실존적 의미의 공황상태에서 하필 사고를 당한 것이었으니 이해도 된다. 사랑 같은 감정이 호사일 만큼 정신이 나갔을 때. 그러니까 사고는 누이를 만난 뒤의 충격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정치적 변절은 아주 가끔은 용서될만한 변명거리를 발견한다. 다른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에 관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친부를 부인했던 아버지 상은 ‘도덕적인’ 현실사회주의 사회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후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동독의 청소년들이 반파쇼 교육의 효과로서 나치스를 악으로 규정지으며 성장했을지라도, 그것이 곧 유대인에 대한 연민과 미화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런 것쯤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유대혈통을 간단히 받아들일 유럽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아니,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타민족 착취를 정당화하는 식민주의 등에 완강하게 저항하여 당대에 시대적 대표자로 불렸던 지드 같은 사람도 프랑스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프랑스 어로 작품을 쓰는 것을 통탄했었다. 프랑스 인에게 충분한 실력이 없어지는 날, 누군가가 특질적인 인간이 프랑스인의 이름으로, 프랑스 인 대신에 그 역할을 하도록 허용하기 보다는, 프랑스 인이 사라져버리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라고. 유대인으로 하여 프랑스 문학이 발전하느니 차라리 사라지는 편이 좋다니! 유대인은 유럽의 군중 속으로 섞이어 들어갈 수 없었으니 말이다. 단순히 피로 인한, 이 민족적인 거절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핏줄


무서운 핏줄의 비밀이 드러난 후. 요하네스 베르너의 절망을 상상해 본다.

나의 아버지가 절반 유대인? 유대인? 어불성설. 아버지는 반유대적, 아니, 아리안 예찬, 초인적 인간의지에 대한 소신으로 문명을 얻은 분 아니었던가. 프로이센 아카데미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분.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였지만, 남겨두고 간 족보는 확실했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엄연한 신교목사였다. 작가들 중 상당수가 목사의 아들들이었다. 그의 어머니, 동독에서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설명으로는 아버지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흐를 수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교사요 극작가였다는 유대인 할아버지? 그렇담 절반의 유대 피를 가진 아버지?

아버지의 청년기 문제작이었다는 『살의』의 내용에 치가 떨렸다. 그러면 그것이 픽션이 아니었단 말인가? 상징적 의미로,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껍질 벗기로서의 아버지 살해가 아니라, 실제 아버지를 살해하고픈 충동이었다? 물론 극에서도 아버지 살해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들의 확고부동한 살의에 질식한 아버지가 저절로 쓰러져버리기 때문이다. 아버지 스스로 아버지임을 포기하라고 종용한 극이었나? 몸서리 쳤을 것이다.

그리고 무너졌다. 이번에는 작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들이 무너졌다. 그 아버지의 ‘살의’에 질려서. 살의는 다름 아닌 핏줄의 거부였다. 핏줄을 거부하는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태어난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그 아버지를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


나는 갑자기 그의 메모들의 무더기를 배열하거나 발췌하는 작업을 덮었다. 이게 뭘까? 민족의 문제가 보통 예민한 것이 아니구나. 가해자 그룹 아리안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서 피해자 유대인 피를 확인하는 일. 이상한 것은 그때의 가해자가 그 한 때의 과오를 덮고서 여전히 우월한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때의 피해자는 지금도 무언지 모르게 배척당하는 느낌에 서늘해진다는 사실이다.


피. 핏줄? 최근의 유전자 표지 조사다 뭐다 해서 밝혀진 이야기들을 따라가 보면, 인류의 모든 디엔에이가 아프리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모든 남자에게서 발견되는 와이 염색체, 모든 여자에게서 발견되는 미토콘드리아 - 그렇게 해서 15만 년 전 모두 하나의 뿌리였던 호모 사피엔스가 이렇게나 원수처럼 갈리어서. 세렝게티의 호모 사피엔스. 이제는 원수처럼 갈라선 민족, 민족들.


그 중 유대인은? 신의 부름에 답한 아브라함은 누구이며, 무엇이 유대인들의 운명을 전 세계로 흩뜨려 놓았나. 디아스포라 - 그 끝없는 이산의 시작. 그 피가 그의 형에게? 형에게는 1/2 유대인 할아버지와 순 독일인 할머니가 있다. 그러니까 형의 아버지는 1/4 유대인, 3/4 독일인. 형은 어떤가. 분명한 1/2 한국인, 나머지 1/2 중에 유대 핏줄로 말하면 1/8. 다시 해 보자, 1/2 한국인, 3/8 독일인, 1/8 유대인. 그의 형은 나치스 시절이라면 수용소 행인가? 그렇다. 나치스 시절에는 1/8까지 유대인으로 분류되었다. 나치스 시절이 지나서 천만다행이다.

지금은 어떤가? 일반적으로 부계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다. 그 보다는 시너고그에 참석하는 정도가 유대인을 결정한다. 유명하기로는 마릴린 먼로가 아서 밀러와 결혼하기 위해서 유대인으로 개종했을 때도 그랬고, 바렌보임과 결혼하면서 개종한 첼리스트도, 이름이 뭐였더라,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면 혈통이 그리 대순가?

다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서 이스라엘민족과 아랍민족으로 나뉘어 적대하기를 수 천 년. 왜 유독 이스라엘민족만이 국가를 잃고 흩어지는 운명을 겪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을 운명, 동화를 통해서, 아니면 그 나름대로의 시너고그 공동체를 통해서 배타적으로. 중부유럽의 유대인 - 그들은 최근 이론에 의하면 혈통으로는 7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동남부 러시아지역에 있었던 카자르왕국의 후예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중부유럽 유대인들의 혈통은 그러니까 터키계 백인의 혼합 유목민족이다. 그래야 그들 아슈케나짐 계통의 유대인들의 애매한 모습들이 설명되기도 한다. 그들은 원래의 셈족에서 유래한 지중해 계의 유대인 세파라딤의 외모가 아랍 족과 비슷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유대인은 인종 분류에서 코카소이드가 아니던가.

게다가 오늘날엔 세계의 경제권을 장악한 그들을 오히려 배우려 한다. 물론 경원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유대인들의 지혜의 서 탈무드는 스테디셀러에 속한다. 우리는 - 한국인들만 말고 어쩌면 온 세상 사람들이 - 지금 눈부시게 잘 나가는 유대인들을 흠모한다. 그들이 성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로망이니까. 성공하는 법, 부자 되는 법! 그 첫 번째 롤모델들이 모두 유대인이다. 법칙 하나, 날아오른 새에게는 국경이 없다 - 그들의 국가 초월적 적응을 일컫는 말이다. 법칙 둘, 영감을 무한 리필하기 - 쉬운 말인가. 아무도 믿지 않는 카산드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 인텔인가 무슨 회장 아무개는 그 말로서 유명하다. 프랑스의 대통령은? 그 콧대 높다는 프랑스인들이 선출한 대통령도 유대계다. 그가 비록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전후 프랑스로 이민 온 헝가리 귀족 출신 부친과 그리스계 유대인 - 세파라딤 - 모친 사이의 자녀이므로 절반은 유대인이다. 어머니가 유대인일 뿐 아니라, 이른 부모의 이혼으로 외할아버지에게서 성장했으니 유대인 아니고 뭔가.

성공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수 백 개의 논문이 필요할 것이다. 수백 사례를 분석해야 하니까. 내 말은, 어찌하여 유대혈통을 받아들이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하는 부분에 대한 나의 이해 부족이다.



배달민족


잠깐, 유대인 타령이 지금 무슨 이야기인가? 유대인 핏줄이 섞인 형을 찾아 잠적한 배 교수는 누군가? 그 길을 따라 적고 있는 나는? 그럼 우리 민족은? 나의 처음이자 궁극적 관심인 배달민족은? 나는 갑작스레 인터넷을 뒤적였다.


오늘날 지구상의 인종은 피부 색깔, 머리의 모양, 머리카락의 색깔과 조직 등 형질적 특징에 따라 몽골로이드, 코카소이드 그리고 니그로이드 등 세 인종으로 분류된다. 흔히 유럽에서 건너간 미국의 백인들이 코카소이드이다. 그래서 유대인도 백인이구나. 그리고 같은 조상 아브라함을 가진 아랍인들도 당연히 그들에 속한다. 여기에 이르면 혼란스럽다. 노아의 아들 셈은 아브라함에 이르러 아랍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을 갈라놓더니, 다시 다윗왕의 후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독교인 갈래를 만들어 냈다. 유전자인지 계보인지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하나의 핏줄이다. 노아가 누구인가. 그의 직계조상 셋은 카인과 아벨과 함께 아담의 아들이고 보면,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전체가 아담의 자손들이 갈라서 숭상하는 종교이다. 많은 순서로 말하자면 10억이 넘는 가톨릭과 그 절반이 안 되는 개신교 그리고 정교회와 성공회 등을 다 합친 기독교가 20억 인구에 못 미치며, 이슬람이 14억 정도로 다음을 따른다. 다음이 힌두교도로 10억, 불교신자는 4천만 정도라고 하는데, 크게 보면 힌두교 권이 아니던가. 유대교인은 실상은 단 1500만 정도라고 하니, 그 목소리에 비하면 수는 적다. 그 또한 기독교로 변화 확장 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이렇게 기독교(유대교) 20억, 이슬람 14억, 힌두교(불교) 10억에, 물론 공공연히 종교를 부정하는 10억 인구를 제하고 나면 무엇이 얼마나 남는가? 당연히 그들 모두 인종 분류로는 대부분 코카소이드. 아리안에 속하는 게르만인들이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일은 형제의 난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는?

세상에 그 나머지는 많지 않다. 아니, 지금 종교가 문제가 아니다. 인종의 갈래가 궁금한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라. 종교의 자유를 만끽하는 나라에서 기독교인과 불교도의 구별은 인종과 무관하다. 우린 기본적으로 한 핏줄이다. 어쨌거나 우리민족은 몽골로이드, 몽골 인종에 속한다. 몽골 인종은 가장 최후에 인류의 계통수에서 지분되었다고 하니 언제쯤이었나. 아무튼 그 이름이 유래하는 몽골인 외에 이뉴잇, 아메리카 인디언, 말레이인도 모두 몽골 인종이다. 몽골 인종 중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배달민족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상 최초 나라, 또는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란다.


함께 강사실을 사용하던 이박 생각이 난다. 역사철학 전공인데, 전공과는 달리 한국통이었다. 자신의 말로는 자의식을 가진 한국인으로, 그 부분에서는 늘 열을 낸다.


『환단고기』에 보면 고조선보다도 더 일찍 배달이라는 나라가 있었다니까요.

거야, 현재 사학계에선 실증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잖아요.

그게 바로 식민사관이죠. 백산과 흑수 사이 위치까지 나왔는데, 지금의 백두산과 흑룡강 중간 지역이죠.

흑룡강이라면, 그러니까 아무르 강까지? 설마, 그렇게 추정하는 거겠지요.

추정이라니. 수도로 알려진 신시의 역사를 쓴 「신시역대기」에 보면 18대를 내려가면서 환웅이 통치한 기간이 1500년이 넘어요. 어찌 이것이 픽션이겠어요? 14대쯤엔 철제무기로 중원까지 정복했다고 하면? 또 조선시대에 황해도 구월산에 환인, 환웅, 단군의 신주를 모신 삼성사의 존재가 허구라고요? 27대 500년의 조선은 믿으면서?

환웅이 그럼 왕의 개념?

그런 셈이지요. 18대를 이어간 왕의 계보가 분명한 국가였다니까요.


저는 그 이름 ‘배달’이 궁금한데요. 왜 배달이죠?

거야 국조 단군과 관계있는 박달나무의 어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곧 박달나무는 다른 말로 배달나무이자, 단군 및 단군족의 나무라는 사실을 말하죠.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입니다.

우와, 그걸 외우세요?

외울 것이 뭐. 어쨌거나, 아니, 그러므로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민족, 곧 백두산 민족이라는 것이죠. ‘밝달’민족이라고 하는 경우에는 빛의 산을 말하기도 하지만.

아, 된 것 같아요. 됐습니다. 정말 입력이 안 되는데요.

그게, 객관적으로 우리는 이웃 중국에서 동이족으로 불립니다. 말 타고 활잘 쏘는 동이족은 단군 통치이래로 동방 조선의 구이를 모두 한 겨레로 일컫는 말이죠. 말갈 여진도, 일본 왜이족도 다 포함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지금은 만주족과 일본족을 뺀 한민족이 배달민족의 원형으로 남아있는 것이고요.

일본족도 동이족이라고요? 처음 듣는…….

거참, 중앙아시아 지방으로부터 구석기시대를 전후하여 몽골과 만주지방에까지 이동해왔다가, 후에 일부가 일본으로 옮겨가서 일본족의……. 거참, 일본에 한국인 디엔에이를 가진 분포가 주민의 25% 정도는 된다는 보고가…….

그만 하시죠, 정말.

아니, 잠깐만. 신라의 엉거주춤한 통일이 배달민족을 갈라놓았지요. 통일국가에 소속될 수 없는 나머지 배달민족이 고구려의 땅을 포함해서 만주 등까지 정착했으니. 어찌 보면 북쪽 경계는 무너졌다기보다는 확장되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싶다. 배달민족은 만주 벌판에도 뿌리내렸다. 오늘날 한민족은 한반도 밖으로도 중국 조선족 약 270만 명, 러시아 지역의 고려인 약 50만여 명을 포함하여 미국 등 전 세계에 7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단다. 8000만 명이 넘는다. 가만, 그의 형은 1/8만 한민족이므로 이 숫자에 포함이 안 되나? 아니, 그는 포함된다. 법적으로 한국인 배요한으로 등록된 한민족의 일원이다. 그러면 남쪽 인구에 포함된 외국인 100만 명은 여기서 빼내야 하나? 아, 그만두자. 인구통계를 뭐하는데 쓸 것인가.


나는 아직 시각이 없다. 나를,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설프게 외국문학 전공을 하고보니 서양문화 중심으로 문화를 판별한다. 개인주의냐 집단주의냐 - 그러면 나는 우리 민족의 집단주의적 사고가 저열하다고 느낀다. 내부집단에 충성을 보이는 이 나라가 싫다. 이런 마음 때문에 안정된 직업을 못 가졌는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이 들켜서. 이런 마을을 들키면 누가, 어느 조직이 좋아하겠는가. 불확실성에 대한 회피성이 지독하게 강한 결과 나타나는 초조와 불안 - 이것이 바로 우리 고맥락 사회의 특징이다. 조바심에서 오는 우리의 부지런은 발악이다. 이것이 도태된 자의 변명일까. 선악의 구별은 또 얼마나 혹독한지. 성공이 선이다. 그런대도 정직하게 말하자면 난 몸살 나게 초조하다. 이렇게 불안하게 사는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글은 쓸 수나 있을까? 누군가가 인쇄하겠다고, 읽겠다고 할 글을? 


나는 다시 슬며시 그의 메모 쪽지로 눈을 돌린다. 지금은 그의 메모에 따른 습작일 뿐이다. 내가 쓰고 싶은 배달민족 이야기는 아직 멀다. 준비도 되지 않았다. 눈앞의 메모쪽지들이나 잘 정리할 일이다.


*


병원 생활


메모는 요하네스의 의혹 부분에 오래 멈춰 있다. 한없이 편해 보이는 천사들 사이에서, 그러나 병상의 그는 혼돈 속을 헤매고 있는 양으로 적혀있다.


그 때 아버지는 자신의 유대성분을 알고 있었을까? 나치집권 이전에도, 집권초기에도 분명히 나치 찬양적 작품을 썼다. 왜 유대성분의 부정을 시도했을까? 그것 자체가 너무도 확실한 유대인의 피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긴 빈은 특별한 곳이다. 다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유명한 독설가 카를 크라우스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유대인 프로이트에 대한 폄하의 의미에서 정신분석이야 말로 새로운 유대인의 질병이다 라고까지 했으니까.

친 나치적인 작품으로 성공한 아버지가 어쩌다 나치의 금서목록에 올라갔을까? 아버지의 의심스러운 혈통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내용 때문이었다고 했다. 어쨌거나 이 금서 이력 때문에 나중에 반 나치의 공적이 부각되었다니. 인생은 아이러니다. 더구나 문단 일선에서 후퇴하자, 오스트리아 쪽의 저항단체와도 은밀한 작업을 시도했었던 정의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동독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마침 옛 동지들 덕택으로 그 유명한 ‘베를린 앙상블’에서 일할 수 있었으니까. 그만하면 당당한 이력을 가진 아버지인데, 아버지의 생부가 ……. 아니, 아버지를 배반한 아버지라니.

용서하자 그를, 아버지를. 아니, 사람이라면 못할 짓이다. 무슨 소리,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 파시즘 시기에 그 진영에 휩쓸려 들어가면서 아버지를 배신한 아버지. 생부이면서 양부라는 증명을 내준 할아버지 또한 극작가였다는 사실은 뭔가. 글쟁이 디엔에이까지 물려받고도 제 아비를 팔아치운 아버지의 상은 나치스만도 못한 것 같았을 것이다. 나치스는 적어도 아리안의 피를 지키련다는 명목으로 방계 유대 피를 말살하려는 범죄를 저지른 것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아버지의 존재 자체에 대한 말살은?


그런 어두운 상황의 환자와 무심한 간호원의 관계는 한시적이고 잠정적일 운명 아니었던가. 요하네스는 학생 때 참여했던 연극이야기를 자주 되뇌었다 했다. 연극 같은 것은 알 수도 없었던 한국의 간호원들. 교대시간이 끝나고 그의 병상을 찾으면 정원으로 나가서 들려주던 이야기라 했다. 주인공 이름도 극의 제목과 비슷한데, 극이 안도라면 주인공은 안드리, 아니면 그 반대이던가 하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마을의 덕망 있는 교사였는데, 그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아들을 부정했더란 말이오. 이웃해 있는 적국의 여자와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니 혼외자였던 것.

혼외자? 밖에서 낳은 아들?

응, 바람을 피워서 밖에서 낳은 아들. 그 아들을 마치 선심에서 주워온 아이인 양, 유대아이로 키웠더래요. 멀쩡한 독일 핏줄을 유대인이라 하여 ‘다름’을 차별해서 기른 것.

불쌍하게도. 

그 아이는 정말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선입견에서 그렇게 자라나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지. 마침내, 마침내 숱한 유대인의 운명처럼 죄인이라는 숙명을 안고 죄 없이 죽어갈 때까지.

죽어갈 때까지?

마지막 순간에도 친아버지는 진실을 밝힐 용기가 없었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죠. 모두의 죽음을 대가로 한 종말.

…….

명예를 지키려고 혼외자를 부정하는 아버지들은 이 연극 말고도 더러 있겠지.

그래도.

뭐가 그래도?

우리나라에선 밖에서 아이 낳아서 데려오는 일이 더러 있는데…….

제 아이라 하고서?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입양이 드물고.

희한한 나라네. 밖에서 낳아온 아들을 받아주는 아내들?

예. 

그렇다 쳐. 여기 아들을 부정한 아비는 아비를 부정한 아들보다 나은 걸까 아닐까?

누가 아버지를 부정해? 아버지를 어떻게 부정해?

아, 모르는 소리.

요하네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한국 간호원 유순은 눈만 크게 떴을 것이다.


누이의 변명이자 이론은 아버지라는 권위가 나치스의 권위로 대체되어 그 권위에 속박당한 것이 아버지 세대들이라는 것이었다. 나치스가 희망이었을 때. 세계대공황 직후에는 나치스가 유일한 희망으로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치스가 다수당이 되었고 - 나치스의 프로젝트에 동참하고자 했던 야심찬 작가라면 유대인 아버지를 버려야만 했을 것이라는 해석. 용서인가 동정인가? 누이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가? 더구나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아버지를?


아, 모르는 소리. 세상에는 아버지를 부정한 아들도 있지.

설마.

있다니까.

아들이 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면, 그럼 누구의 아들?

그러게, 유순.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오, 아버지. 그럼 나는 누구의 아들일까?

요하네스, 오늘은 너무 엉뚱한 말만 하네. 그만 들어가 누워야겠어. 잠을 잘 못잔 것 아냐?


요하네스는 몸과 마음이 겉돌았다. 그는 직감했다, 누나가 잘 못 생각했다고. 아니면 미화한다고. 아버지는 그 이전에 벌써 친부확인 서류를 어머니로부터 받아낸 뒤였으니까. 이 말을 누이에게 하지는 않았다. 할 겨를도 없었다, 곧 사고 속으로 내던져졌으니까. 말을 했더라도 소용없는 일이다. 말이 어떤 사실도 바꾸어 주지 않으니까.

나치스란 동독에서는 죄악 그 자체로 배웠다. 서방세계에 나와 보니까 - 한참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 나치스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이런 식. 나치스는 물론 나쁜 것이었지만,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주도적이었다.

또 다른 버전도 가능하다. 나치스에 동조한 것을 살아남기 위한 행위로서 용서한다고 치자. 남은 하나, 혈통 말이다. 유대혈통이 용서되는가. 나에게 물려준 유대의 피. 유럽에서 유대인으로 살기. 이 피는 어느 세월에 희석이 되어 사라지는가. 동화유대인. 기독교인이 되어도 조금도 묽어지지 않는 피의 성분. 그는 숙명의 피에 발광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종적


이제는 베를린이었다. 동서가 합쳐져서 정말 대도시가 된 곳. 어느 곳에서 형의 종적을 볼 수 있을까. 베를린 대학에 재학 내내 형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그가, 승한이 60년대 말, 70년대의 주거공동체에 눈을 돌린 것은 우연이었다. 절필한 68세대 대학생들의 온상에서 형의 아버지 세대를 갑자기 느낀 때문이었다. 약물과용으로 요절한 한 젊은 작가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미완성 작품이 눈에 들어왔을 때였다. 아버지가 나치 어용작가였다는 짐으로 받은 고통 - 그 대목에서 형의 아버지 요하네스를 괴롭혔을 비슷한 과거의 부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공동체는 특히 스스로를 코뮌이라고 부르던 일단의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그 곳을 거쳐 간 사람들에게서 그에 관한 실마리가 나올까? 일단 어디에서부터 수소문할지도 문제였다. 지금은 더러는 이른 죽음으로 더러는 독일을 떠나버린 사연들 때문에 그들의 종적이 묘연할 것 같았다. 그러나 헨젤의 조약돌처럼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시대를 격동 속으로 몰아넣은 사건들과도 접촉이 되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서 감옥에 수감되었던 한 오프셋기술자가 그랬다. 분명 이름이 같은 사람의 소설이 출판되어 있었다, 『우리들』. 오프셋기술자가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오프셋인쇄의 수요가 감소하며 디지털인쇄가 선호되는 세상에서야. 또한 7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번성한 자전적 성장소설 작가들 반열에 이 오프셋기술자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를 찾아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가 이제는 또 느닷없이 사진작가가 되어 늘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일정을 따라 만나보기가 수월찮았다.


이번에는 또 누구요?

저는 ……. 그럼 또 누가? 그럼 혹시?


여전히 깡말라서 다른 독일인들과 쉽게 구별되는 그 오프셋기술자-소설가는 대뜸 ‘또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형도 이 작가를 찾아냈구나.


아, 예. 형이었군요. 제가 궁금한 것은 형의 행적이지만, 일단 형에게 들려주셨을 형의 아버지에 대해서 좀…….

형? 형의 아버지라?

예, 제 형입니다. 형은 아버지를…….

그런데 당신이 형제라면? 그럼 당신은?

예, 형의 동생이지요, 얼굴은 좀 달라도. 형을 기억하시나요? 제가 찾는 건 물론 형입니다.

아, 그러니까 형.

예, 제 형이 아버지를 찾아서.

형, 그 아버지의 아들이 찾아온 건 몇 년 전 초여름이었지요, 아마. 아버지에 관해서는 그에게 이미 들려준 이야기인 걸, 또…….

형의 아버지가 제게는 힌트입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오프셋기술자-소설가-사진가의 이야기


요하네스를 어떻게 만났느냐고요? 당신이 알고 왔다시피, 이곳 서베를린의 코민, 주거공동체에서 만났지요. 1970년대에는 주거공동체가 이곳 서베를린의 의식 있는 젊은이들의 생활방식 속에 그 나름대로 퍼져 있었지요. 우리는 대개 어디선가 모여들었어요. 서독 본토에선 진작부터 군복무를 피하는 손쉬운 길이기도 했고, 동독 출신의 요하네스라고 특히 이상할 것도 없었어요. 처음엔 출신도 밝히지 않았지만요. 우린 출신도 배경도 서로 따지지 않았어요. 부르주아 도덕에서 볼 때 무질서, 무분별은 오히려 우리의 정체성이었죠. 시민사회의 가족 개념이 송두리째 깨진 이곳 공동체에선 인간애면 그만이었죠, 누구이건 무엇을 하건. 마약이라는 부작용도, 예 뭐, 인정할 건 해야죠, 어쨌거나 우리의 폭풍 같았던 혁명의 대상은 우리의 무작정 건강한 몸도 포함되었으니까요. 건강해서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노동을 착복하여 얻은 건강이라면?

무엇보다 요하네스는 정말 앤리헤 베그리페 - 동류항이란 말 어려운 말이라서 나중에야 알았다 - 딱 제 친구를 만났지요, 역시 유명 나치작가의 아들을. 그러니까 요하네스는 어떻게 이 작가 친구를 뒤따라 우리에게 온 것인데, 어떻게 만난 것인지는 몰랐어요. 과거에 관심을 안두는 것이 우리들의 방식이기도 했다니까요.

그 친구는 나치시절의 막강한 실력의 소설가를 아버지로 두었지요. 엄청 힘든 과거의 덫을 쓰고 있었던 거죠. 아니 물론 어떤 아버지의 아들들도 어느 점에선 비슷하겠지만요. 예컨대 내 아버지는 출전 3일 만에, 그러니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전사해서 부도덕할 틈도 없었지만, 과거의 짐은 마찬가지였죠. 나중에야 알았지만, 요하네스도 작가를 아버지로 두었더군요. 해서 그가 그에게 집착을 보였던 것이죠. 그것도 나중에야 알았지만, 요하네스에게 절반의 유대인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도 쉬운 건 아니었죠. 암튼 작가의 아들들 - 우리 독일의 경우 작가의 아들들은 무서운 심적 부담에 시달리죠. 특히 이 친구는 …… 우선 그 자신이 벌써 글을 발표하는 수준의 작가였고, 굳이 비교하자면 요하네스는 글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또 아버지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던 것도 요하네스완 달랐지요. 확신에 찬 나치였던 그 아버지는 벌써 나치의 정권창출 이전에 『용맹스러운 민족』이던가 그 비슷한 종류의 인종주의적 작품들로 유명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은 건전하고 밝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외다. 그렇지만 나치는 곧 패망했고, 시골로 은퇴한, 그러나 여전히 강한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아버지 밑에서 그 나름 힘들었답니다. 또 상상해 봐요, 공부를 하다가 이율배반적으로 깨달았을 아버지의 상을. 신들린 듯 분서갱유의 앞잡이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소화해 내기는 힘들었을 것 아니요. 다 같이 무엇인가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세대라고 분노했던 우리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훨씬 불행했던 거죠. 그러한 분열은 젊은이를 정말로 피폐하게 만드는 거죠, 나락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길은 약물이었을까요? 아니, 우리들 모두 알 수 없는 분노와 절망에 많이들 그 유혹에 들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해방은 새로운 감옥의 문턱이었다 싶기도 해요.

자, 요하네스의 이야기. 우리 코뮌에는 요하네스와 그 유명 작가의 아들 이외에 그의 여자 친구인 목사의 딸, 절필한 시인 그리고 필하모니에서 나와서 전자회사에 다니던 친구랑 나, 그렇게 함께 살았어요. 우리들과 함께 살면서 그는 많은 것을 의아해 했어요. 우선 내가 혼자서 미니출판사를 차려 잡지를 발간하는 일에 제일 의아해 하더라고요, 불법이었으니까요. 동독 젊은이들이 원하는 온갖 자유를 여기서는 이미 누리면서도, 심지어 군복무면제의 자유까지를 누리면서 이런 불법 인쇄물들을 통해서 구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카뮈의 부조리성의 문제』 비슷한 학위를 하고서도 사회주의대학생연맹에서 맹활약을 하는 친구도 이상하다는 거죠. 뭔가 이율베ㅐ반적이라고. 또 어떻게 카라얀의 필하모니를 자발적으로 떠날 수 있는지, 그가 클라리넷을 버리고 하는 일은 지멘스의 수위라니. 게다가 사회주의대학생연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 할수록 사회민주당을 저주하게 되었다는 시인이자 가수가 우리 집엘 자주 왔었는데, 그 모든 것을 요하네스는 첨엔 정말 이해 못하더라고요.

그는 너무 깊이 서독의 폐해 속으로 들어와 버린 셈이었죠. 처녀림과도 같은 동독사회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오염에 노출되었다고나 할까. 그런대도 그는 서베를린에서의 느낌을, 그 적응과정을 기록하는 대신, 동독에서의 체험을 회고적으로 메모해두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고 하더군요. 동독의 청소년답게 자유도이칠란트청년단에서 길러졌으니. 그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6살에서 10살까지는 푸른 목수건을, 그 다음에는 붉은 목수건을 두르고 자라났겠지요. 히틀러 청소년단과 다른 것이 있다면 목수건의 색깔이 갈색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인사말이 ‘히틀러 만세!’에서 ‘우정!’으로 바뀐 것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고. 기관지《젊은 세계》는 물론, 아예 독서의 나라 동독을 경험하면서, 그는 홀어머니의 아주 모범적 아들은 아니었다고 했어요. 어머니의 소원은 아들이 아버지처럼 작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자신은 지치도록 의무독서를 하다 보니 직업으로 글을 읽거나 쓰고 싶지 않았었다고. 반파시즘 망명문학들이 그곳 고전이었지만, 『제7의 십자가』나 『벌거벗은 채 늑대들 사이에서』같은 소설들이나 영화는 정답이 있는 수식처럼 재미가 없었더래요. 인간은 파시스트 늑대보다 더 강하다! 이렇게 뻔한 답을 위해 우회가 심했을 뿐이라고.

독서는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면서 재미있어 했어요. 동독에서 권장되었던 작가들 보다는 듣도 보지도 못했던 조이스나 프루스트, 아참, 카프카도 물론, 또한 베케트나 지드 등, 동독에서 시민사회의 퇴폐주의라고 혹독하게 비판되었던 작가들의 호기심 가는 읽을거리가 여긴 넘쳤으니까요. 물론 우린 그 반대로 그런 작가들을 부정하고 있었는걸요, 그런 무기력한 퇴폐성을 왜 읽는답니까. 보니까, 청소년기가 상당히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더라고요. 문제는 그가 책 읽는 일에 경직되어 있었던 점인데. 동독에서 독서나 글쓰기는 그에게는 공식외우기 같았다고 그러더군요. 작가가 되는 것도 라이프치히에 가서 문학원에 들어가면 쉽게 될 수 있었다나. 그라면, 나치에게 박해받은, 혈통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을망정, 일단 나치의 박해를 받은 작가의 아들로서, 그라면 우선순위로 발탁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거기 문학원에 간 그의 친구는 문학사, 문학이론,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창작의 실제를 배운다고 했다던가. 그가 빈 대학으로 나오기 전까지 못해도 백 명 정도는 새로운 공화국에서 작가들이 생산(?)되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생산이란 그에게는 특별한 염료나 그에 따른 새로운 기술들이었고. 그래서 우선 고향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나왔을 때도, 어차피 베를린대학으로 옮길 심산이었대요. 프러시안블루 - 300년 전 그 전설의 감청색의 산실이 이곳 베를린 아니던가요.


저, 그분이 그 다음에…….

아, 우선 들어봐요. 일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요. 우리 중에 작가가 있었다고 했지요, 그 친구의 깡마른 여자 친구가 아들을 낳게 되었어요. 그러자 아이는 공동의 아이였지요. 저쪽에서는 일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유아기 아동들을 위한 킨더가르텐이 완벽하게 운영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고작 집에서 공동육아라니. 요하네스가 그렇게 섣불리 내뱉는 말에 다들 웃었지요. 전통적으로 현모양처인 여성이 육아를 담당한다는 식의 시민사회의 방식은 우리들이 가장 혐오했던 것이었으니. 어떻든 우리 중 요하네스가 유난히 아기를 잘 돌보았어요.


아기를 잘 돋보아요?

예, 아기 돌보는 데 남녀노소 구별은 없었다니까요, 이곳에선. 우린 그가 시간이 많아서 아기에 열중한다고 생각했었지요. 직업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라서. 그는 대학에 등록은 했었는데, 공부에 열을 올리지는 않았으니까요. 아무튼 그러니까 그때 요하네스에게서 서독 어딘가에 아이가 태어나 있었을 것이라고요? 댁의 형이란 사람은 그런 이야긴 없었는데. 참 듣도 보도 못한 말이군요. 그가 알기나 했을까요? 아이의 존재를요, 미안합니다. 하긴 그렇게 유난히도 아기를 돌보는 이유가…… 뭐 이유까진 아니라 해도 켕기는 뭔가가 있었을까요?


그냥, 그 분 이야기를 마저…….

우리들이, 일은 점점 더 꼬였어요. 우리 코뮌의 유일한 여성이자 아이의 어머니가 정작 집을 떠났거든요. 아기를 놔 둔 채로요. 그것도 다른 남자친구에게로. 아이를 떠나는 엄마의 부도덕성을 상상도 할 수 없어하던 요하네스는 촌놈이라는 눈총을 받았어요. 애 아버지조차도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애 아버지가 점 점 더 약물에 의존해 갔어요. 떠난 여자친구는 더 큰 이상을 위해서 사생활을, 아이까지를 버렸다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었어요, 요하네스만 몰랐죠. 그는 도대체 우리들의 대안모색을…….

대안이라면 이 사회가 썩어문드러졌다는 말인가요? 단 한 번도 독일이, 그때의 서독이 썩어문드러진 사회였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걸요.

부패하지 않은 사회라면 이상향이었게요? 아닙니다, 결코 아니었죠. 독재자의 독재는 아니었지만, 자본과 정치, 게다가 교회까지 합세한 삼위일체의 교묘한 군림이었죠. 민중은 언제나 어리석죠, 빵과 서커스만 주면 만사형통이라던 히틀러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요. 배부르면 진실 따윈 눈감으니까. 아이 엄마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사건들의 주인공이 되어갔어요. 새로운 남자친구와 함께 테러사건들에 휩쓸린 뉴스가 나오고, 그들은 온 나라를 문자 그대로 충격의 도가니로 내몰았죠, 체포와 구금과…… 말로는 다 못하죠, 왜 학생도 뭐 다 알겠지요, 이 나라 70년대의 소용돌이들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수면제를 너무 많이 먹고 깨어나지 못했어요. 그는 응급실로 이송되고 요양병원에 보내졌지요. 이어서 사회복지센터 사람들이 아직 우유에 의존한 아기를 아동보호소에 위탁해버린 사단이 났어요. 그 즈음에 요하네스는 더욱 넋을 놓았던 것 같아요. 아기의 운명이 그에게 그렇게 충격인 것은 그땐 몰랐어요. 다만 그 후로…….


그 후로?

아무튼 나도 잡지사건 뿐 아니라 격한 데모현장에서의 불법선전물 문제로 경찰과 마찰이 있었죠.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총격사건까지 발생했으니, 결국 오랜 시간 감옥에 있었지요. 처음 몇 달 동안 감옥으로 몇 번 면회를 온 것이 내가 그를 만난 마지막이었어요. 그가 코뮌을 나갔다고 다른 친구가 말해주었어요, 서베를린을 떠나려 한다고. 그리고는 연락이 끊겼죠. 난 6년 동안 그렇게 들어앉아 있었으니. 그 동안 우리의 체험을, 우리의 좌절을 반성 겸 쓴 것이 소설로 팔려 나갔어요, 채 출감도 하기 전이었죠. 얼떨결에 작가가 된 거죠. 우리들 중에 진짜 잘 쓸 수 있었던 친구는 영 떠나버렸는데. 그 친구는 요양병원에서 수면제에 또 뭐에 잔득 삼키고서는 깨어나지 못했다지요. 내 서툰 책은 단기간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지요. 오래 감옥에 있는 상황이 선동적이었을지. 어떤 의미로든 좌절한 젊은이들이 우리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읽었기 때문이겠죠.

자신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

예. 나 스스로는 소설가라는 느낌이 없어요. 나는 그저 전무후무한 경험의 내용만으로 소설가라고 떠밀린 것이죠. 심상도, 의지도,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한 뼈를 깎는 고민도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후속 작품들에선 실패했고요.


그럼 지금은?

사실 우린 뭔가 뿌리를 잃은 거죠. 우리의 투쟁이 - 사실 우린 삶이 투쟁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세대니까요. 이 나라가 생경해져서 밖으로 떠돌기도 했어요. 그래도 댁의 형이 - 요하네스의 아들이라고요? - 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출판사를 거쳐서라면 누구라도 나와는 연락이 닿을 수 있었던 때문이었지요. 학생도 마찬가지고.


그럼 지금은 그분은 혹시…….

하지만 이젠 내 책들은 거의 팔리지 않아요. 책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던 시대는 끝난 거죠. 언어는 소통의 기능을 잃었어요, 그래서 사진을 찍지요.

소통 부재라고요?

예. 동서의 대치도, 좌우의 대립도 무너져버린 유럽이 답이오. 여전히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외치는 교육자적 작가는 시대착오. 독서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보다는, 그 분은 오스트리아로 가셨을까요? 바로 동베를린으로 가셨을까요?

모를 일. 어디로 향했던 지금 그의 아들이 한 가닥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어디든 찾지 않을까요?

도이치의 울림?

보르헤스를 아는가요?

…….

독서는 다른 낯선 두뇌를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예찬했던 작가지요.

아, 예.

독서에 관해서라면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그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겠소?

…….

앞을 거의 못 보았으니. 80만권의 책과 어둠을 동시에 가져다 준 신의 절묘한 아이러니라고 그랬다던가. 그래서 더 울림이 중요했던 것인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울림이 그득한 언어는 도이치라고 하지 않았나요.

왜 하필?

그냥 해보는 말이오. 지금은 동서남북 자유로이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그가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갈 수 있지 않겠나 그 말이오.


자유로이 도이치의 울림을 따라.


*


여기까지, 그의 뒤죽박죽 메모는 베를린에서 멈춰 있었다. 그가 아직 공부하고 있었던 시절에서 멈춘 것. 그가 보낸 것은 현재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공백은 너무 길었다. 그 다음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갑자기 전기가 나간 것처럼 내 손가락의 작동이 멈췄다. 애초에 이 기록은 뿌리 없는 나무에 물주기였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구상도, 가닥도 없이. 흩어진 메모조각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리기. 나는 무슨 알갱이를 향해서 이 종이부스러기를 헤집고 있었을까. 벌써 스산한 계절의 축축함이 벤다.

그해 겨울도 점점 깊어만 갔다. 그에게서 더는 소식이 없이. 정적 속에서 자판도 쉬고 있었다.



다시 봄이 꿈틀거린다. 언어교육원에서 연락이 왔다. 프랑스어 강의도 다시 강화해보련다는 전갈이었다. 제2외국어 담당은 그가 아니었다. 사무직원은 그대로였다.


한 선생님! 이번에도 고생 좀 하시겠어요.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수준을 세분해서 나누지 않아서요.

…….

배 교수님은 다시 독일에 가셨답니다.

예.

안 놀라시네! 다들 놀라시던데요. 벌써 지난봄에요, 갑자기.


묻지도 않았는데 직원은 그의 이야기를 흘렸다.

개인적인 일이라고. 사람들 말이, 모르죠, 독일에 두고 온 애인이 있었다든가, 암튼 누군가를 찾으러 갔다고, 추측들만 성하죠. 정말 그랬을까요?


그랬구나. 

나는 확신한다. 그가 다시 한 번 형을 찾아 나섰다고.

왜 그는 100% 핏줄도 아닌 형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동포의 끈? 배달민족의 품도 아니질 않는가? 생물체를 조직하는 미세한 원형질이 같음? 최소한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 그가 암스테르담에서 쾰른 사이 비행 중에 놓쳐버린 어머니의 편지에는 네 형은 네 형이다, 라고 쓰여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상상이 맞을 것임을 느낀다. 무엇인가 흔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가 편할 수 없음을 느낀다. 베를린 다음은 어디메 일까.

어느 날 그가 수첩이든 노트든 몇 쪽의 깨알 같은 메모들을 내게 보낼 것임을 믿는다. 한번 흘린 비밀은 쏟아진 물이나 같으니까. 움켜쥔 손이 아프면 그는 또 놓을 것이다. 나는 가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가 흘려놓은 물에 덩달아 적시어진 채로.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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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 2011년 10월호 (147호) 196~253쪽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1. 8. 26. 23:12

<그리운 친구여. 카프카의 편지 100선> 번역이 출판되었다. 
                                                          - 아인북스 411쪽.( 2011. 8. 15.)

얼마나 공을 들였나, 100편을 선정하는 데에도 한참 걸렸다.
번역은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만큼 점점 더 공을 드리게 되었다, 원고지 1400장.
출판사가 믿음직스러웠다, 꼼꼼한 교정과정에서 참으로 신뢰감이 무르익었다.

표지를 여기에 올리고 싶지 않다. 사실은 울고 싶었다. 조금 울었다. 억울하다.
표지보다 무거운 알찬 내용을 자부심으로 느끼기에는 표지가 너무 가볍다.
나는 중 2 때도 무거운 책들만 읽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다.
이렇게 가벼운 표지에 내 이름이, 그것보다 카프카의 이름이 들어있다.
아이러니다. 아니, 수치다.
젊은 출판인에게 울고싶었다고 말했다. 그 다음은 할 말을 잃었다.
젊은이는 젊은이다. 늙은이는 늙은이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1. 4. 9. 23:20

이곳이 원래의 홈페이지  ▷  http://altair.chonnam.ac.kr/~yjsuh/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3. 31. 22:00


 

도마뱀


‘나는 도마뱀이다.’ 또는 ‘나는 자장면이다.’ 하고 글의 제목을 쓰거나 글을 시작하면 우선 독자의 첫 반응은 거들떠도 안보는 것일 게다. ‘나’처럼 흔한 단어도 식상하지만, 거기다 ‘도마뱀’이나 ‘자장면’같은 엉뚱한 개념을 끌어다 대어 무슨 이야기를 엮어 가겠는가. 식자층이라면 이런 글에 대한 비호감은 말할 나위가 없어진다. 우선 비문으로 보일 테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러니까 안 선생이 우연히 털어 놓은 말로 인해서다. 문단 어디 겨우 끼어 들어온 새내기들이 듣게 되는 비평가운데 비문이라는 지적이 가장 수치스럽다고 한다. 게다가 작가가 자신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서술하게 되면 독자는 제각기 자기 식의 어법을 지니고 있어서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길수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단다. 친절한 작가라면 객관화된 문법체계를 따르며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서 친절한 서술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참 친절한 지적이다. 장래 지망생은 물론 어찌 비집고 들어간 이라 해도 가슴 깊이 새겨둘 말이다. 뭘 모르는 나도 동감이다.

그런데 늘 그 도가 문제이다. 비문을 피하고자 문장마다 멈칫거리기 시작하면 한발도 못나가고 마는데, 그것은 어쩌면 오보만도 못할지도 모른다. 잘못 내딛은 걸음은 뒷걸음이나 선회를 통해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고, 움직이고 있다면 살아있고, 살아있다면 무엇인가는 끼적거려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한발도 못 내딛는 졸렬한 그가 문제였다.


                                        *


그가 처음 우리 교무실로 걸어 들어왔을 때가 지금도 역력하다. 보통 때와 다름없이 그 삼월에도 두어 명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는 처음 어딘가에 들어오는 사람의 일상적인 파르스름한 긴장감을 모르는 사람모양 스스럼없음에 외려 눈에 띄게 교무실로 들어섰다. 벌써 조회가 시작되었고, 마침 교감선생이 새로 온 다른 두 사람을 소개하는 순간이었다. 그 둘은 벌써 교무실을 들렸다가 교장실에서 인사를 마쳤고, 이제 다시 공식적인 인사를 하는 참이었다. 신참은 아직 아주 늦지는 않은 것이 다행인 듯 비교적 태연한 걸음으로 교감을 향했다. 인사에 합류 하겠다는 몸짓이었을까? 당황한 것은 오히려 교감으로, 어어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무례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그렇게 중간 쯤 오다만 자리에 서서 인사를 시작했다. 동서남북으로 네댓 번 45°는 굽혀서 절을 하더니, 안 진숩니다 그랬다. 말을 할 때 눈을 천정 쪽으로 향한 것은 마땅한 방향을 찾지 못해서였을 것이나, 다른 시선들과 키를 맞추는 효과도 있어 보였다.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하자 내 눈과 부딪쳤는데, 내 옆자리 책상이 비어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냥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다행이 조회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이상한 짧은 정적을 마침 주번교사가 깼다. 그는 하필 첫날부터 지각생들 문제에 열변을 토했고, 이어 새 학년부장들이 자신이 학년부장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각각 한 말씀들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 어눌해 보이는 새 등장인물에 조금 쿡쿡거리며.

부임 첫날 지각하는 양으로 보아 이 신참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괜찮았다. 더는 지각하는 일도 없었고, 도드라지지 않으니 잘 하는 것이다. 첫 순간부터 이마를 찡그렸던 교감 눈에는 영 벗어났다고 해도, 그는 그런 것을 별로 모르는 듯 했다. 그가 개의치 않으니까 교감도 신경을 껐다고나 할까. 전체적으로 - 이 말은 참 미안하지만 -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게 보통이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부서가 문제였다. 수업계라니, 우선 나이에 걸맞지 않았으니 보기에도 그랬고, 보기보다도 더 꼼꼼하질 못했다. 곁눈으로 그 고생을 보는 내가 마음이 약해질 때, 그는 극구 사양하지 않고 슬며시 내 도움을 받았다. 아무튼 고개를 쳐들고 다녀서 강해보이는 인상하고는 많이 달랐다.


그러다 한번 일이 났다.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해야 합니다.

이 무슨 망발인가. 2학년 담임 한 사람이 병가를 냈고, 담임이 없던 그가 그 자리에 투입되는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첫날 하루는 자율학습 시간까지 남아있더니 이틀 째 되는 날 그가 대놓고 불평을 하며 이른 퇴근을 감행한 것이다.

다들 피식 웃었다. 일정한 시간, 그러니까 비담임이 퇴근하는 그런 시간에 퇴근하는 것은 주류에서 밀린 현상에 불과하니까. 그가 보통만 되는 사람이라 해도 이런 기회를 이용해야 맞다. 때는 이때다 싶게, 어쩌면 담임보다도 더 나은 인상을 학생들에게나 주위 동료들에게 심어두었다가 이듬 해 담임을 맡는 일에 신경을 써야할 판이다. 그런데 퇴근해야 한다고? 이유도 밝히지 않는 그의 말을 교감이 들어줄 리도 없다. 여전히 영․수․국이 아니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곳이 학교다. 그런데 사회과 중에서도 정치․경제도 아닌, 하다못해 국사도 아닌 세계사, 그러니까 선택과목 결정에서 아예 저만치 밀리는 과목이면서 큰소리를 치다니. 너무 예상 밖이라 다들 멍했을 것이다.

그렇게 대체교사 없이 넘긴 다음날엔 교감이 드디어 역정을 냈다.

안 선생이 잡다한 과목이라 다행이오. 영․수․국이라 한들 담임 맡기겠소, 어디.

그런데 교감이 단어를 잘 못쓴 건 맞았다, 내 생각으로도. 그 순간 그가 폭발했다.

잡다한 과목이라 하셨소? 잡다한?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신 거 맞습니까? 친절한 말씀까진 아니라 해도 객관적인 말씀을 하셔야죠. 이건 또 바로 비문입니다. 안 선생이 잡다한 과목이다, 나는 도마뱀이다…… 뭐 그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화를 낼 계제가 아닌데 화를 내는 일이라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일로 어처구니 없어하는 것은 다른 동료들의 몫이었다.

아니, 저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교감이 한 말에 대해서, 중요과목 아니라고 사람 무시하지 마시오, 뭐 그런 식의 대응이야 그럴 수 있다고 기대되었지만, 비문이란 말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교감의 말이 그냥 말이지 무슨 문서가 아니질 않는가. 그러더니 더욱 가관이었다.

잡다한 과목, 잡다한. 잡스러운 것이 한데 섞이어 너저분하다는 말씀이죠. 세계사에 잡스러운 것이 섞였다. 세계사가 너저분하다. 인간의 역사, 그렇지요, 인간의 역사란 것이 너저분한 것이죠. 여러분의 역사가 너저분하다 그 말입니다. 누구 나와 보세요, 너저분하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여기 자신 있게 나설 분……, 교감 선생님 당신……

사태가 심각하게 번질까 두려운 순간 내가 나섰다.

아니, 고깝게 듣지 마쇼, 안 선생님. 영․수․국 아니면 나머지 통틀어서 잡다한 과목들이라고 하지 않소. 뭐 저 또한 그런 잡다한 과목이니 맘 놓고 말합니다만. 그러니 침소봉대할 것 까진 없소, 자 자아.

이렇게 중재랍시고 그를 끌고나오다 보니, 우리는 슬리퍼를 신은 채로 운동장 쪽 담벼락으로 나가 있었다. 해는 벌써 건물 뒤쪽으로 향해서 하늘은 뿌옇게 떠 있었다. 다행히도 기대어 선 붉은 벽돌은 아침나절 햇볕을 받아 아직 따스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고, 나도 따라 그렇게 했다. 우리들 양복바지의 일그러진 모습이 우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잡다한 과목을 맡아 자존심 구겨진 교사들. 보도블록 사이로 돋아난 풀들도 우리 같은 신세로 보였다. 나는 특별히 그를 달랠 생각도,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냥 풀이 짓이겨져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식의 감상은 - 이건 욕된 말이지만 진실이다. 나는 가끔 누군가를 감상하면서 내 생에서 순간이나마 도피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있을 때면 나는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과 더불어 내 삶이 아닌 다른 어떤 곳 먼 데로 떠나가 있는 나를 발견하며 도리어 편안함을 느낀다. 아니, 내가 아예 없는 느낌으로, 뭐랄까, 희뿌연 공간의 편안함이다. 물기도 없어 보이는 풀을 쥐어뜯기를 몇 분간, 그러다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한국어과정에 다닙니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는 공부고, 또 출결이 엄격해서 결석을 하면 수료를 할 수가 없어요.

나는 아직 뿌연 공간에서 떠나오고 싶지 않은 채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단 말입니다. 국어과 교사가 부러워서가 아니라, 국어과 교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한국어를 공부한다고요.

한국어? 국어면 국어지 무슨 느닷없이 한국어요! 이렇게라도 대꾸를 했어야 하는데 아직 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첨엔 어디에서 국어공부를 할까 고민도 했습니다. 방송대? 그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졸업장 같은 것이 제게 필요할까 싶더라고요. 물론 제가 국문과 출신도 아니라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겠지만, 결국 국문과 졸업장도 별 것 아닌 것 같더라고요. 문창과 사람들에 비하면 국문과 사람들도 외도라면 외도인거라. 문제는 제 문장인거죠.

외도라니 누가, 뭐가요?

내 질문에 이번에는 그가 침묵으로 답했다. 다시 아래로 떨어뜨리는 눈빛에 아차 하는 표정이 섞였다.

어라, 안 선생님 글 쓰시나요? 교과서는 아닐 것이고…… 거야 유명 출판사를 업어야 시작이라도 한다는 것이니까.

이번에도 조용했다. 아까 교무실에서 트집하듯 한다면 교과서는 왜 아니냐고 라도 덤빌 판인데. 오히려 내가 뭔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내 특기는 아닌데.

아니, 교과서는 은근히 좀 태들을 내고 하는 일이라서. 건 그렇고 선생님 혹시 진짜 글 쓰세요? 시인이세요? 단어에 민감하신 걸로 보아……

단어에 민감하면 안 됩니까, 소설가는.

소설가? 아니, 안 선생님, 소설가세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옆 자리 벌써 몇 달짼데 깜깜했소, 미안하게.

이런 참. 예, 맞습니다. 어디 내놓고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이 나라에서는 일단 관문을 통과하면 그렇게 부르더군요. 천 일을 넘게 단편 하나 발표하지 못하고 있어도 소설가.

대단하시네요, 세계사 선생님에 소설가라면. 그럼 역사소설 쪽을? 건 그렇고 사학과는 안 선생이 선택……

바로 그거요. 사학과는 내가 정했지요.

말꼬리를 싹둑 자르면서 내게 덤비다시피 그가 계속한 말은 대충 세계사 교사가 된 내력이었다. 국사에서 세계사로, 세계사에서 세계문학사 쪽으로,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까 문학이 더 매력적이더란다. 역사와 문학, 두 갈림길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완전히 흔들리는 몇 년을 보냈다. 연애와는 담 쌓으니 (내가 설명을 했었던가? 그의 아쉬운 키꼴을?) 유난히 밤 시간은 길었고, 최근세사를 그 나름대로 정리하기도 하고, 습작을, 습작이라기보다는 뭔가를 끼적거리는 습관이 생기더라고. 언젠가 쓸 단 한편의 역사서의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을 때는 자신의 도덕성을 이마에 새기면서, 언젠가는 단 한편이라도 발표할 수 있을 소설작품의 일부분을 쓴다는 생각일 때는 가슴에 진실성을 물으면서.

헌데 통킹 만 사건이 뇌리에서 계속 맴도는 겁니다.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두어 척이 미해군 구축함 매독슨가 머독스 호를 공격했다는 사건 말입니다. 전상자 한 명 없었던 사건이 미국한테는 베트남 참전의 구실이 되었잖습니까. 그러다 나중에 뉴욕 타임슨가 암튼 유력 신문에서 그건 베트남 전쟁도발을 정당화하려고 미국 측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밝혀냈잖습니까. 결국 인간세상에서는 그래서 언제나 최소한 두 개의 정의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두 개의 정의?

그러니 역사 기술은 불가능하다, 이거죠. 역사는 거짓인 것이, 왜냐, 그럴듯한 진실을 내놓으려고 의도하니까 그렇지요. 차라리 소설이 진실인 것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결핍과 고통과 긴장을 드러내려고 의도하니까요.

나는 그의 말이 어디서 들었던가 읽었던가 그런 느낌에 빠져들었다. 눈만 껌벅거렸다.

의도에 있어서 진실한 쪽이 더 진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역사는 쉽게 버려지더군요. 소설을 쓰기로 덤볐다 해도 쉽지는 않은 것이 소설작법 한 강좌도 듣지 않았으니까요. 암튼 때늦게 엉겁결에 내었던 소설이…… 그런데 문제는 소설가이구나 싶으니까는 이젠 쓰려는 문장 하나하나가 다 맘에 걸리는 겁니다. 비문, 문법에 맞지 않은 문장을 피하려면? 먼저 주술관계, 주어는 반드시 서술어의 의미적 논항이 실현된 것으로 표현하기. 영어에서처럼 주어와 서술어 간에 단수 복수만 맞추라 해도 별 문제가 아닙니다. 영어보다 더 어려운 것이 한국업니다. 최대한으로 비문을 피했다 칩시다. 그 다음 정확하고 적절한 단어선택은 뭡니까. 어떤 문장에서 어떤 단어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지, 그것을 누가 압니까. 더더구나 친절한 서술은 뭡니까. 숨이 막혀서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등장시켜놓고 어찌 친절한 달변을 하라 합니까. 그가 말을 우물거리면 작가라면 오히려 그를 따라 우물거려야 정직한 것 아닙니까? 친절과 정직 중에서 작가가 선택해야하는 덕목이 하나뿐이라고 가정합시다. 선생님 같으면 어느 쪽이십니까?

거야 작가가 아닌 나로서는……

관두시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건 또 뭡니까. 제가 이참에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말이 원래 어렵더군요. 중주어나 중목적어가 우리말의 특징이라고요. ‘이 책들을 반을 선생님을 드릴까요?’ - 내가 그렇게 목적어를 셋 씩 그냥 쓴다고 비문인가요? 아까 말대로, ‘사학과는 내가 정했다.’ 그렇게 말하면 주어가 둘인가요? 무엇이 주어인가요. 도식으로만 되지는 않는다 말입니다. ‘나는 자장면임다. - 난 짬뽕이오.’ 두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비문인가요 아닌가요, 예? 주어와 서술어의 의미적 논항이…….

그가 나를 정색으로 쳐다보며 말을 할수록 나로서는 해줄 말이 더 없었다. 이 친구는 그러니까 여차여차 등단 과정에서의 호의적 충고를 보약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좀생이였다. 보약은커녕 그것이 맹독이 되었나 보다. 한 작품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한 채 다듬고만 있다니 원.


그날 밤 나는 가만히 컴퓨터 세계에서 그의 이름 석 자를 쳐볼까 하는 유혹에 빠졌다. 간단히 쳐보면 될 일을 왜 망설이는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나는 가끔 다른 찾기를 하다가 실수로(?) 걸려 올라오는 시나 산문들에서 재미보다는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청산유수처럼 심지어 화려한 또는 서글픈 배경음악과 함께 드러나는 글들은 공포 그 자체다. 거기에 널브러진 수많은 글들을 위해서는 ‘수많은’ 보다 더한 수가 있어야 한다, 그 수많은 글들의 수를 안 선생의 말대로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찾아 표현해야한다면. 나는 언제부턴가 원고지에다 직접 손으로 쓰기까지는 않더라도 일단 컴퓨터에서 한글작업으로 쓴 원고를 프린트해서 출판사에 보내는 그런 작가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물론 독자를 만나며 살아가는 것은 완성되어 떠나간 문학작품의 제 운명이라지만, 발행부수가 너무 많다거나 인터넷에 친절하게도 온 몸을 드러내버린 작품들을 대하면 겁이 난다. 이런 표현은 신성모독일지 모르지만, 그럴 땐 손님이 많은 창녀를 떠올리게 된다. 창녀가 직업이면 벗어 보일 손님이 많아야 하듯이, 작가가 직업이면 당연히 읽어줄 독자가 많아야하는 철칙도 외면한 채.

사실 남의 말해서 안됐지만, 작가들의 수입이 원고료에 의존되어 있는 구조는 벌써 살인적이다. 많은 직종이 일을 하면 일의 결과에 관련 없이 보수를 받지 않는가 말이다. 어느 식당의 보조라고 치자,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설거지를 한 하루나 우연히 파리 날린 하루나 같은 보수를 받는다. 우리 교사들의 수업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월급은 하나의 호봉에 준한다. 어제는 잘 했다고 더 받고, 오늘은 덜 잘했다고 덜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소설을 쓰며 하루를 보낸 소설가에게는 아무런 보수도 없다. (‘소설’을 ‘시나리오’로 바꾸어도 같은 구조다.) 다만 그것이 팔려야 돈 비슷한 것을 만져볼 수 있다. 이렇게 매섭게 결과주의를 강조하는 구조는 소설가들을 죽인다, 그 본성에서. 소설가는 돈벌이를 따로 해야 한다, 본성을 반쯤, 아니 더 많이 내어다 팔아가며. 소설가는 몸이 살기 위해서 본성을 죽여 간다. 물론 천재적인 몇 예외는 논외로 하고. 뒤집어 말하면 그런 천재들 몇 사람만 소설가가 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존경해야 마땅할 다작과 출세작에 대해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누구라도 하필 손님 많은 창녀와 비교했다고 화를 낸다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진 그가 문제일 것이다. 상당수의 저열한 포르노 작가들도 버젓이 예술가 행세를 해도 되는 세상이다. 안 선생이 들으면, ‘저열한’이 ‘포르노’에 걸리는가 ‘포르노 작가들’에 걸리는가 따질 것이다. 포르노가 특별히 저열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우기는 포르노 작가들의 태도는 확실히 저열한 짓이다. 그들이 위선이라고 밀어붙이는 클래식 애호가가 소수이듯이 포르노 취미도 일정한 독자에 한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포르노가 특별히 저열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나도 실은 비겁하다. 정말은 그것은 저열하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결정적으로 죽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독서도 영화도 점점 멀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 적나라한 그것들에게 내 겨우 남아있는 상상력을 노략질당하고 무시당하기 싫어서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안 선생이 소설가라는 말에서 감탄보다는 걱정이 먼저 일었다. 그래도 그가 무슨 소설을 썼는가 하는 궁금증이 걱정을 이긴다. 흔치 않은 성에 이름도 썩 편한 발음이 아니어서인지 인터넷 세상에 곧 그가 모습을 드러났다.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있었다. 갑자기 온 세상의 무게가 엄습했다. 나는 그를 찾지 못했어야 했다. 그러면 나는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엔 인터넷이 나를 중도에 배신한다. 단 한 편 제목뿐이다. 「도마뱀」. 그가 「도마뱀」으로 입상한 신인공모에서 당연히 기관지가 발행되고 있었는데, 호수별로 제목만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을 읽을 수는 없었다. 도마뱀과 관련해서 다른 데 하나 둘 사이트를 보다가 그냥 말았다.


몸길이는 47mm 정도, 꼬리길이는 44mm 정도이다. 몸통 중앙부에는 28줄의 넓은 비늘이 덮여 있다. 꼬리는 원통모양이며 끝이 뾰족하다. 산간 초원이나 묵은 밭에서 살면서 주로 개구리, 거미, 물고기, 곤충, 지렁이, 노래기 따위를 잡아먹는다. 천적으로는 때까치 등이 있다. 위험에 부딪치면 꼬리를 흔들어 적을 유인한 다음, 꼬리를 잘라 적이 당황하는 동안에 도망쳐 숨는다. 꼬리는 바로 다시 생기지만 꼬리뼈는 생기지 않고 대신 연골 비슷한 흰색 힘줄이 생긴다. - 도마뱀은 적이 나타나면 꼬리를 잘라 버리고 도망을 친다. 도마뱀의 꼬리는 다시 자라고, 도마뱀은 자기의 꼬리를 원할 때 다시 자를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자른 후에 나는 꼬리는 원래 있던 뼈와는 달리 물렁뼈로 이루어진다. - 두 백과사전들에 보니까 서로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갑자기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잠을 청했다. 자른 꼬리를 또 자를 수 있는지, 그 부분이 문제였다. 그것이 꼭 알고 싶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나의 은근한 기대와는 달리 그는 조용했다. 한발 가까이 다가갔다고 느낀 것은 나 혼자였다 싶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그냥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다만 그는 부담임 노릇을 확실히 사양하고 제 시간에 교무실을 나섰다. 할 수 없이 교감이 그 시간을 지키는 모양이었고, 실제로 그런 것이 교감의 임무 중에 포함 될 것이었다. 은행에도 가보면 맨 첫줄의 행원이 자리를 비우거나 손님이 많거나 하면 중간에 있는 상관이 빈자리를 메우지 않던가. 우리는 실제로 인해전술이라는 작전도 들어본 민족이다.

며칠 후 나는 교감에게 그의 이야기를 귀띔했다. 사실은 등단한 소설가이고, 꼭 필요해서 국어 관련 강의를 듣는 모양이더라고. 한국어라는 말은 피했다. 복잡해지기만 할 것이 뻔했으니까. 소설가? 하며 놀라던 교감은 이내 승복이랄까 포기랄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설가를 포함해서 미술이다 뭐다 뭔가 예술 쪽으로 관계된 사람들은 조금은 규범을 모르고 방자한 경향이 있으려니 하고 치부하려는 듯한. 그것이 교감으로도 편할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분류하고 해석해서 감정에 마감을 지어야 했을 것이니까. 진짜 예술가라면 승진이다 점수다 하는 것에 관심을 덜 치대니까 경쟁대열에서 빠져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근평을 손에 쥔 상관으로서 편해지는 점도 있을 테니까.

시간은 생각보다 잘 흘러간다. 벌써 여름방학이 왔다. 다른 직종의 사람들이 늘 부럽다고 말한 방학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상당수 교사들에게는 그렇게 쉬는 방학이 아니다. 승진을 위한 연수나, 그에 따른 교육대학원 공부들도 심심찮지만, 무엇보다 보충수업이다. 영․수․국 이외에도 여러 과목들이 보충수업에 편성되지만, 세계사가 거기에서 빠진 것은 순전히 안 선생 때문이었다. 그는 완강히 방학동안의 수업을 거부했다. 방학동안의 수업을 희망한 교사들은 방학동안의 수업을 거부한 안 선생을 오해했다. 안 선생이 수업을 하지 않음으로서 아무런 손해를 볼 이유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런 심리에 대해서 무어라 말해야 될까, 괜스레 옆자리의 내가, 작가도 예술애호가도 아닌 내가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그가 잠적했다.



그해 가을학기였다. 그동안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을 만끽했을 시점에서 그는 오히려 보릿고개에 누렇게 뜬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침부터 졸고 있는 태에 순간 겁이 나기도 했다. 어디가 몹시 아픈가? 그는 시간만 나면 의자를 뒤로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해를 등지고 앉았으니 해를 보려는 것인가 했다. 초추의 양광이라, 누구든 따스함이 그리운 것 아닌가. 이 햇볕이 가고나면 몇 달 동안 파르스름한 해로 만족해야 하는 계절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자세히 보았더니 그는 해가 아니라 길게 난 창문들 사이 회칠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면을 바라보며 가늘게 입술을 딸싹거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갑자기 헛소리를 준비하는 것일까? 정말 무서워지기 시작할 때, 그를 방해해보기로 했다.

안 선생, 거 1학기 총 수업일수가 몇이라 했소? 어디 적혀있을 것인데 어느 파일인지 원……

그는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수업일수 파일이 어떤 거요? 요즘엔 좀 깜빡깜빡하는 게……

그는 영 딴 세상에 가 있었다. 더 이상 방해할 명분도 안서기에 그냥 입을 닫고 마는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뭐라 하신 것 같았는데요, 제가 좀.

아니, 되었소.

되었소가 아니라,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 제가 지금 고시준비를 해야 한단 말씀입니다. 이 나이에, 웃으시겠지만, 자격검정시험을 보려고요. 그래서 지금 책을 꼭 열한 권을 사놓고 이것들을 읽어가며 외워야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말문이 막혔다.

선생님, 느닷없이 이런 황금 같은 시간에 그동안 그렇게 터덕거리던 글이 쓰인다 말입니다. 책의 중요도와 두께에 따라 10월 초 시험 일자에 맞춰 계획표를 짜두었죠. 시험은 연 1회 뿐이라요. 해서 저녁이면 동학들이 함께 공부방을 빌리는데, 공부방 아시요, 노래방, 피시방만 있는 게 아녀요, 요즘 대학가엔 공부방이 있어요. 저녁시간은 한 시간에 각자 2000원이니까, 서너 시간 하다보면 김밥 한 줄까지 한 사람당 만원은 써야 해요. 아, 그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맡은 범위를 공부해가서 발표를 해야 하고, 꼭 대학 때 그룹스터디 하는 식이죠.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지, 책상에만 앉으면 공부해야할 책으로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자판이 유혹을 해대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에서 배운 한두 가지 사실에 그만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새 글> 폴더를 열고 글을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벌벌 떨고 쓰지 못했던 무수한 문장들, 또 비문이나 아닐까 해서 겁냈던 산더미 같은 문장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겁니다. 어째야 되는 겁니까? 그 샘솟는 글들을 시험 공부한다고 막아놓아요? 그렇다고 스터디에 가서 발표해야 할 분량은 따로 있는데 그걸 소홀히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나이 더 드신 분도 섞여 있고, 젊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명색이 저는 교사 아닙니까. 국어과는 아니라 해도 암튼 교사라고 해서, 암튼 스터디 사람들이 저를 상당한 실력가로 오인한단 말입니다. 말이 됩니까? 수학선생이나 사회과선생이나 한국어문법과 무관한 건 마찬가지 아녀요? 더구나 한국문화 과목에선 훨씬 잘 아는 줄 알고요. 비보이가 한국에서 특출한 이유는 사람들 다리가 짧아서 어쩌고 하는 문제가 나오는 판인데, 그게 역사하고 무슨 관계라고! 암튼 놀랍게도 일반인들 생각에 교사는 어느 정도 전지전능한 거예요. 하긴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예쁜 여선생님은 화장실도 안가는 존재일거라고 생각했잖아요. 암튼 이 유능해야할 교사인 내가 맡은 분량의 공부도 해가지 못하면 큰일인데, 몇 년을 터덕거리던 글이 왜 하필 지금 줄줄 나오느냐고요. 겁이 달아나서일까요? 그러니까 비문을 쓰게 된다거나 하는 겁이. 바로 이 공부, 이상하시겠지만, 한국어 공부를 하다보니까 비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비문이 아닌 거예요. 보세요,

그해 영어말하기 대회는 우리 학교에서 이겼다. 일등공신은 아무개, 고장 난 형광등이었다. 수업시간이면 늘 고개를 처박고 앉았던 녀석이 영어이야기를 그 긴 문장들을 그리 술술 외울 줄이야.


잠깐, 그게 단편소설 중에……

아니고요. 그냥, 예컨대. 전 같으면 이런 문장 하나하나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죠. 주어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우선 주격조사 ‘이, 가’ 있는지 점검하고, 주어와 서술어는 제대로 의미 논항이 되어있는지 검토하고. 선생님, 저는 그동안 거의 한 문장도 영구저장을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영구저장?

그 말은 좀 이상합니다만, 예, 이제 더는 고치지 않겠다고 저장해서 <영구저장> 폴더로 보내는 일말입니다. 저는 <영구저장> 폴더에 들어있지 않은 문장은 시집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철직을 만들어 두었지요, 신인상을 받은 그날 밤 결심이었죠. 이제부터 엉성한 글들을 남발해서는 늦깎이 신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으니까요. 그래서 책상에……

후훗.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를 감추며 얼른 안 선생이 내 웃음에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둘러대었다. 하지만 이 친구가 좀 꼴통이다 싶었다. 좋은 말로 편집병. 신인작가가 뭐라고 완벽한 문장생산에 목을 매나?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심각했다.

예, 뭐. 카프카의 책상입니다. 이 시대 누구라도 카프카에서 자유롭진 못하죠.

난 아닌데. 사실 이런 장난말은 내뱉지는 못했다. 그가 너무 진지했고 또 실은 비집을 틈도 주지 않았다.

그가 일찍 병든 것은 아시죠. 그가 여행을 포기할 때 병 때문이라고들 생각했겠죠. 그는, 제가 정확한 말은 외우지 못하지만, 암튼 이렇게 변명했어요. ‘여행에 대한 내 공포심에는 심지어 내가 적어도 며칠간을 책상에서 떨어져 있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한 역할을 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생각이야말로 실제로는 유일한 바른 생각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현존재는 실제로 책상에 의존해 있으니까. 작가는 본래 정신착란에서 벗어나려면 절대로 책상을 멀리해서는 안 되고, 이빨로 꽉 물고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1)

줄줄 외우시네요! 그 말도 나는 못 건넸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무명은 당연히 책상에 붙어 앉아야죠. 하지만 죽어라 책상에 붙어있어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썼다가는 고치고, 고치고는 다시 쓰는 소모성 질병의 연속, 그것이 글쓰기였습니다. 습작 때가 아니라 오히려 등단 후에. 그러니까 ‘강한 실험정신에 토대를 둔만큼 사건 전개나 사색적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거기까지는 인심 좋은 서두였겠지요, ‘신인들이 항용 빠지기 쉬운 몇 가지의 단점’ 거기서부터……

정말 외우시네요! 이제 그를 방해하고 싶어 끼어들었다. 소용없었다.

거기서부터 저를 옥죄는 시금석이 된 겁니다. 첫째가 친절하지 못한 서술로, 작가의 관념에 의해 대충 넘어가는 식의 서술은 그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독자로 하여금 작품 이해에 큰 장애가 된다는 점. 둘째는 자주 발견되는 비문으로, 작가는 자신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서술하지만 독자는 제각기 자기식의 어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객관화된 문법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것. 셋째, 이것도 무척 자괴감이 들게 된 동기인데, 어휘의 정확하고 적절한 선택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심사평을 줄줄이 외우고 있느라……

당연하죠. 그러고는 글쓰기가 아예 어렵게 되었죠. 보세요, 한 문장을 채 다 쓰기도 전에 내가 쓴 단어가 정확하고 적절한가, 한 문장을 마치면 이것은 비문이나 아닐까, 이런 글은 친절한가 아닌가…… 더하고 빼고 앞으로 보내고 뒤로 보내고…… 그러니 어떻게 진전이 됩니까. 나중에는 컴퓨터 자판에서 편집질 하는 것을 피해보고자 옛날처럼 원고지에, 그러니까 이제는 대신 공책에 써보려고 했지요. 그건 기가 막히는 고통이었습니다. 우선 제목보터 쓰고 시작을 한다고 칩시다. 제목의 폰트는 당연히 다른 거죠, 그렇게 컴퓨터에서 써왔으니까요. 그런데 크기는 그렇다 치고, 볼드체가 손으로 써집니까? 그건 또 제목 몇 글자니까 시커멓게 덧칠하며 썼다고 치죠. 이 서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제게 글씨가 남아있지 않더란 말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공책에 소설을 쓴다?

예, 그런데 공책에 써보니 맞춤법이 더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컴퓨터에서는 붉은 줄이 나오거나 뭐 너무 이상한 오자는 저절로 잡아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다 쓰고 나서 <도구>에 들어가서 맞춤법 잡으니까 그때 고쳐도 되고. 하긴 그래도 어휘 자체의 적절성 여부는 컴퓨터가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오자에는 큰 신경을 안 쓰고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공책에 쓰려니 매번 맞춤법이 의심스러워 지는 겁니다. 아니오. 또는 아니요. 그걸 써 놓고도 구분이 안 가면, 선생님 같으면 글을 쓰시겠어요?

내가 왜?

암튼 제2외국어과목이라고 한글 안 쓰시오? 여기서는 ‘쓰시요’ - 하면 틀리지요. 틀리지요는 틀리지요가 맞고. 일단 정확한 맞춤법에 하나하나 고민을 하다보니까, 비문이 되는지 여부는 그 다음이더라고요. 결국에……

결국에 가서는 글을 못 쓰신 이유가……

예, 컴퓨터에서 안 되니 공책에다가, 거기선 더 막히고. 암튼 일단은 국어공부를 제대로 하자 그런 거였지요. 이름이 한국어공부가 되었는데, 조금 빗나간다고나 엇나간다고나 그런 점이 있긴 해도. 암튼 어문규범이다 음운론이다 제대로 한국어공부를 하는데 그걸 제가 빠지고 담임 대타로 바우처 같은 것을 담당해야 하느냔 말입니다. 방학 내내도 시험 준비를. 참 열에 한 맛도 없는 변명이겠지만.

열에 한 맛도? 안 선생, 역시 말이 감칠맛이……

감칠 맛 가지고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사생결단이오, 사생결단. 무어랄까 위기의 순간에서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살아나는 도마뱀 같은.

앗, 드디어 도마뱀이 튀어 나왔구나. 나는 그 제목을 모르는 척 내숭을 떨어보았다.

난 또. 세상 피해 글 쓰러 들어간다는 말도 아니고, 도마뱀 몸통 자르듯이 글을 써요? 거 도마뱀이 잘라낸 것이 몸통 아니요? 몸통을 자르고 뭣이 더 남아서?

그러기에 사생결단이라 하지 않았소. 꼬리든 몸통이든 자르고 도망쳐야지요.

진짜로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그 피투성이 기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입니다. 몸통을 살려낸 도마뱀은 꼬리만 물고 허탈해하는 독사에 대해 승리감을 가질 것이고. 꼬리를 자른 선택에 관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도마뱀에게라면 위기 탈출이 절대적 선택이겠지만.

겠지만? 아뇨, 그 이상입니다. 천적을 만났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건 분명 비장의 무기이고, 예컨대 살모사가 아직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틈을 타서 도마뱀은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되었지요. 이제 거기에 그 경험을 잘 다듬어서.

다듬어요? 죽다가 살아온 경험을 쓰면 된다는 말씀이군요. 아하, 일단 꼬리 잘린 도마뱀은 그런 처절한 경험이 없는 다른 도마뱀들에 비해 아픈 만큼 성숙한다, 뭐 그런? 더구나 잘라진 꼬리는 나중에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까요.

나도 조금 아는 척을 해보았다. 그의 눈이 샐쭉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좀 다른 문젭니다, 제 생각엔.

다른?

도마뱀을 노리는 적이 주변에 많을수록 꼬리를 재빨리 자르고 도망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그럼 되었지 뭐 또요. 게다가 그것을 가공하여…….

그래도 꼬리를 자르는 건 도마뱀에게 큰 부담입니다. 꼬리가 없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그 험한 경험을 작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해도 일단 잡아먹힐 위험이 커집니다. 새 꼬리를 만드는 동안에는 몸통 자체도 자라지 못합니다. 동작도 굼떠지고,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도 떨어집니다. 어차피 소설가의 지위야 꼬리 잘린 도마뱀 수준이지만요. 더구나 이제 그 새 꼬리라는 놈은 더 이상 자를 수가 없답니다.

뭐요? 도마뱀 박사가 따로 없네요.

새로 돋아나는 꼬리는 척추가 아닌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더는 못 자르죠. 소설 한 편 떴다가도 평생 태작만 내놓다 마는 소설가와 다름없지요. 도마뱀으로서도 평생 꼬리 잘라먹은 놈이라는 꼬리표를 함께 달고 사는 것이겠지요. 새 꼬리는 원래 것보다 색깔도 안 예쁘답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 하겠습니까? 소설작품은 어찌되건 일단은 살아남아야 쓰는 것이니까 저라면 꼬리든 몸통이든 자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꼬리를 조금만 물려도 그게 독사라면 금방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잘라야겠지요, 싹둑.

아니 안 선생, 정말 뭐 싹둑 잘라낼 원망 같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쇼? 그저 따라서 해보는 소립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그 독으로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제 일부를, 이를테면 마음, 심장, 가슴 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을 잘라내고도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가공하여 작품화하는 강심장을 가질 수 있을지, 그건 꽤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니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입니다.

그냥 죽거나 그것을 쓰거나?

예, 실존과 방법의 갈림길입니다. 삶인가 글쓰기인가 하는.

도마뱀과 갈림길이라. 안 선생은 지금 우리가 오늘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고 말하려는 군요.


                                        *


이렇게 안 선생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새삼 혼란스러워진다. 그에게서 뭔가 전염이라도 된 느낌이다. 나의 위상이라는 것도 내가 담당한 과목의 세력과 같이 바닥이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 중 택일의 운명에다가 수능에서는 한문까지 합쳐져서 8대 1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학생들의 선택 이전에 학교장의, 사립학교라면 설립자님의 인생관에 따라 정해지는 운명을 살아갈 뿐이다.

다음 학년도에는……

교장 교감은 누구라도 염려다. 들으라는 듯이 곁눈질을 해가며 영어가 아닌 외국어 문제를 고민한다.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어쩌자고 무턱대고 서양문학에 정신을 팔았을꼬. 더구나 아무도 그때는 너의 뿌리를 기억해라 그런 식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서양이 희망이었다. 우리 것은 천년 묵은 신앙까지도 타파해야할 미신이었다. 그럴 때 영어와 불어로 자유자재로 아리송한 작품들을 발표한 괴팍한(?) 작가는 충분히 우상이었다. 상상 만으로도 드높은 무엇인가에 이르는 듯 착각이었다. 『내가 아니다』에서 독백하는 여배우의 커다란 입…… 신에게서 벌을 받으면서도 이유도 모르고, 기쁨을 몰랐듯이 그 벌에서 고통도 모르는, 혼란과 매력, 아, 그만두자.

이제 와서는 대놓고 맞장을 뜨자는 여자애들의 입이 더 두려운 나. 기껏 딸보다도 어린 애들이 버겁다니. 내 수업 시간에 다른 참고서를 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덤빈다. 학원에 숙제 해가야 되거든요.

와, 죽을 일이다. 교실은 난장판, 선생은 죽을 판 뭐라 뭐라 하더니만. 내가 학생 때 수업시간에 몰래 소설책이나 읽었던 벌을 그대로 받는다. 물론 그땐 선생님에게 대들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쥐어 박히면 죽는 시늉이 전부였는데.


또 슬리퍼만 신은 채 빠져나온 교정의 담벼락 아래에서 나는 그의 말대로 무명작가 안 진수의 넋두리를 안주삼아 빈손으로 빈 술잔을 들이킨다. 너는 도마뱀, 나는 그러면 빈대다. 네 글에 빌붙어 쓰는 빈대. 진짜 쌉쓰름한 한잔이 그립다, 아니 쌉싸래한. 방언을 썼다간 꼼꼼한 성격의 등장인물인 도마뱀이 화를 낼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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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대> 19호, 한국작가교수회,  2011.3.31. 136-155쪽.

 

         
Posted by 서용좌
영어2011. 1. 28. 23:30

국제펜광주 문학상이 있은 뒤 GFN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과잉인가 싶었고, 무엇보다 영어인터뷰로 국제펜에 흠집이나 내는가 싶었지만.....
국제펜을 소개하는 기회도 될 듯 했다.
결과물은 1월 28일 오후 시간에 나갔다. GFN 98.7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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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 20. 23:30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글을……

                                                                      
제7회 국제펜클럽광주문학상 수상소감

 

감사합니다.

소설가 경력도 일천한 저에게 이렇게 큰 상을   안겨주신 국제펜클럽광주광역시위원회 선후배 동료 문인들께서는 제가 연구실 떠나서 완전히 손 놓고 게으름 피울까봐서 글 더욱 열심히 쓰라는 격려로 이 상을 주신 것으로 압니다.

 

이 자리에 서게 되니까 두 개의 질문을 받은 느낌이 듭니다.

첫째는 왜 소설을 쓰느냐? 둘째는 어떤 소설을 쓰려느냐?

옛날부터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소설책이나 읽고 상상의 시계에 빠져 생산성이 떨어질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지요. 21세기 한국사회에서는 아예 언어예술인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낮습니다. 뭣 하러, 왜 글을 쓰냐고? 저는 말과 글의 생명은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선 우리 인간은 진실로 소통을 하지 못합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자아들은 반드시 충돌하게 마련이니까요. 말에서 충돌은 더욱 심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감동을 전하는 시문학이나, 지혜를 전하는 수필문학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저로서는 어려워서 쓸 수도 없으니까요. (여담이지만, 시를 못 쓰는 사람이 소설 쓴다고 하고, 소설도 못 쓰는 사람이 비평한다 하고, 비평도 못하는 사람이 교수한다고 - 조정래 선생이 저희 대학에 언제 강연 오셔서 그러시더군요.)

그래도 소설 쓰는 변명을 하자면, 소설가는 소설 속에 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소통할 수 있는 소설이라는 장치는 삶의 현장에서 비겁한 저에게 안성맞춤입니다. 소설가가 쓰는 모든 것은 픽션이요 이미지이니까요.

인생은 이미지입니다. 이미지가 아니고서는 숨이 막혀 살아갈 수가 없지요.

그동안 “지식산업의 대열에서 살아남느라 정신에 대한 죄악이라고 홀대했던 이미지에 들려 외치고 싶었습니다. 나는 상상한다, 고로 존재한다! - 어딘지 산만한듯하면서도 응집력을 지닌 소설쓰기에 몰입하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차례입니다. 어떤 소설을 쓰려느냐? 제가 배운 것이, 아는 것이라고는 독문학 한 조각이니 거기서 인용하겠습니다. 카프카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책들을 읽어야 할 것이야.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친구 오스카 폴라크에게)

 

인생은 어찌 보면 깁니다. 무려 7년/10년에 달하는 유충기를 보내고 태어나서 열흘 남짓 살다가 가는 매미들과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평균연령 80은 29220, 근 3만 번의 낮과 밤을 사는 일이니 참 긴 세월입니다. 그 수많은 낮과 밤을 살아내는 일에서, 우리의 내면을 외면하고 산다면 그것이 가장 불행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진솔한 내면을 위하여, 내면에게만 토로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설가는 그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을 즐거운 상상의 유희로 데려가건, 뼈저리는 고통의 면모를 들이밀건, 소설가의 선택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단 하나, 소설이, 문학이, 예술이 세상을 쥐고 흔드는 권력의 시녀가 되는 일은 거부합니다. 

세기의 독재자 히틀러가 말했습니다. 대중에게는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된다고. 풍부한 물질과 매력적인 볼거리만 있으면 된다는 말입니다. 현대의 권력자들도 이것을 이용하고, 대중을 즐겁게 해줄 볼거리는 돈의 위력을 앞세운 연예와 스포츠를 망라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한 채 즐거움에 빠진 대중은 비판의식이 없어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지도 무관심합니다. 행여 문학이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일만은 삼가야 된다고 믿습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입니다. 저는 시인이건 소설가건 작가가 특별히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문학의 본성이 죽지 않기 위해서 저항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문학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독자를 위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결국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자신의 내면을 일깨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문학의 본성입니다. 내면을 일깨운다는 것은 바로 타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타성은 우리로 하여금 다수가 정의라고 믿게 하고 강자가 옳다고 고개 숙이게 하는 무서운 복병입니다. 이 타성의 벽을 깨고 진정 자신과 소통할 때, 문학은 희망하건대 타인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특히 국제펜클럽에서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상호 교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외국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 그 반대 방향의 일 모두가 매우 보람된 일 중의 하나입니다. 누군가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류보편의 문화가치를 매개하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니까요. 하지만 매개보다는 창작이 생명입니다.

“저는 그동안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면서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쳤습니다.”

그런 순간이면 서툴더라도 제 글을 쓰면서 다시 살아나고자 했습니다. 그저 존재하지 않는 연인, 내 나라 말, 내 글로 쓰는 소설이라는 이름의 추상적인 연인을 향해서 썼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하이에나가 표범이 되기는커녕, 이도 저도 아닌 박쥐신세임을 통감했을 때 “저는 저로서 살기를 망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장 정직한 일이 독문과 교수직을 그만 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수 말고 온이 소설가로서의 첫 해, 이 뜻 깊은 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자유인으로서의 첫해 농사는 외면상으로는 더할 수 없는 풍작입니다. 내면에서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너는 아직 너의 내면을 일깨워내지도 못했노라고!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글”을 쓰기엔 아직 멀었다고!
   이제 저에게 (겉으로는) 영광이자
(실제로는) 채찍인 이 상을 주신 국제펜클럽광주광역시위원회 선후배 동료 문인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글 더욱 열심히 쓰며 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1년 1월 20일

서용좌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 20. 22:00
국제펜 광주문학상에 서용좌씨
2011년 01월 19일(수) 00:00

국제펜클럽 광주시위원회(회장 김영관)가 주관하는 ‘제7회 국제펜 광주문학상’ 수상자로 서용좌(66·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씨가 선정됐다. 수상작은 12편의 중·단편을 엮은 소설집 ‘반대말 비슷한 말’.

광주 출신인 서씨는 전남여중고와 이화여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과 연작소설 ‘희미한 인(생)’등을 발표했고 2004년 ‘이화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대성기자 bigkim@kwangju.co.kr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 20. 22:00
[폄] 제7회 광주펜문학상 시상식
http://blog.naver.com/ohdl/150101707866

오덕렬입니다. 우선 광주문인협회 560여 회원과 함께 제7회 광주펜문학상을 수상 하시는 경랑 서용좌 소설가님께 축하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 이하 위 블로그를 따라가 보십시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1. 1. 19. 22:30
2011년 01월 18일
‘반대말 비슷한 말’영예 20일 광주 시청자미디어센터서 시상식

제7회 ‘국제펜 광주문학상’에 서용좌씨(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사진)가 ‘반대말 비슷한 말’ 단편소설집으로 영예의 수상을 안았다.
국제펜클럽 광주광역시위원회(회장 김영관)는 제7회 국제펜광주문학상 수상자로 소설가 서용좌씨를 선정 발표했다. 시상식은 오는 20일 광주 서구 금호동 시청자 미디어센터에서 열리는 ‘2011년 펜 한가족의 밤’ 행사와 함께 열린다.
서용좌씨는 “평생을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소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소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칠 때마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 내 글을 쓴다” 고 밝혔다.
이번 국제펜광주 문학상 수상 작품집 ‘반대말 비슷한말’은 같은 이름의 표제작을 비롯해 12편의 단편 모음집으로 수록돼 있다.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김종 시인은 “지역 문인 5~6명이 물망에 올랐으나 전년도 수상자들의 문학 장르를 제외하고 가장 적합한 소설의 서용좌씨를 선정했으며 잘 빚어진 찻잔 같던 19세기 식 단편들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 속에 그의 소설이 놓인다는 것은 한국 문단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고 선정 이유를 들었다.
서용좌씨는 광주 출신으로 이화여대 독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난 2001년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 그림’을 발표와 함께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