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7. 6. 30. 23:30


조 사

 

                                  소설시대 2007

 


오늘 길 떠나시는 시인을 찾아 서둘러 날아온 ‘쑥국새 울음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봄날, 우리가 영영 이별을 고해야 하는, 존경해 마지않았던 OO OOO 선생님, 제자들에게 한없는 사랑과 가르침을 주신 스승을 잃은 마당에 감히 조사를 읊어 바치고자 하니, 서러운 마음 그지없어 눈앞이 깜깜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단발머리 소녀들로 스승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솔방울만 굴러도 깔깔 웃고, 낙엽이 떨어지면 눈물 떨군다는 소녀시절. 바로 이런 봄날, 뻣뻣한 검은 말총머리를 휘날리시며, 휘날리는 머리카락 따라 고개를 끄덕이시며 들어서신 국어 선생님. “아야!” 그렇게 정겨운 목소리로, 그러나 완벽하게 우리말 우리글 공부를 가르쳐 주셨던 스승님! 


우리가 이 영어 세상에서 우리말을 사랑하며, 이 글로벌 세상에서 우리 것을 사랑하며 살 수 있음은 스승님께서 우리들 때 묻지 않은 영혼에 심어주신 ‘우선은 국어 사랑의 정신’과 나아가서는 ‘자중자애의 숭고한 가치’ 덕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친구들을 서로 사랑하고,  심지어 사투리까지도 사랑하고, 그 중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타인이 나보다는 자신을 사랑함을 이해하고, 행여 자신을 사랑하는 타인을 못해도 자신만큼은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신에 걸맞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 외에는 세상살이에 달리 첩경이 없다고 깨우쳤습니다.


스승님은 우리의 꿈을 높게 이끄셨고, 많은 제자들이 보다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자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보람이 적다.” ― 세상을 아시기에 미리 한탄하셨던 스승님. 우리 “보람이 적은” 여자제자들의 삶 속에도 스승님의 가르침은 면면히 흐릅니다. 서울에 가서 살건 미국에 가서 살건 전라도 아낙인 것 부끄러워한 적 없고, “툭시발 갓의 된장 맛”이라고, 구수한 인생살이에서 가정과 자녀의 인생에 알뜰한 간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빛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소금은 될 양으로 ―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 조사는 그런데 읽히지 않았다. 가까운 친지들의 조사 틈에 여자제자들의 차례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우리 쪽 차례가 오면!” 준비는 해두자고, 공인으로 활동하는 동창이 하룻밤을 조르는 데 못 이겨 난생 처음으로 써 본 조사였다. 그럴 일이 생긴다면 읽기는 목청도 담도 좋은 동창이 잘 읽을 터였다.


허옇게 서있는 키다리 조화들은 즐비했다. 막상 발인은 예상보다 조촐했고, 선생님 살아생전에 모이던 제자들 수만큼은 어림없는 인파였다. 


*


문학 월간지에서 무명의 나에게 청탁이 왔다. 청탁이다, 적어도. 등단 몇 년이라고는 하지만 고료를 받고 쓴 작품이 몇이던가. 그 동안 썼다가 구겨둔 원고들을 서둘러 훑어 볼 일이다. 그때마다 중단된 글들도 처음엔 절실한 심정으로 시작했었던 것들이니까. 그 옛날, 윗목의 낮은 교자상 앞에 구부려 앉아 쓰고 또 쓰다가 구겨둔 원고지들은 다 사라졌다. 버리고 또 버려도 쌓이는 파지들을 자꾸 치운 까닭이다. 그런데 컴퓨터 속은 도둑놈 계집 치마폭이다. 켜켜로 쌓아두면 버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미지 작업이나 사진 작업이 거의 없는 ‘우리의’ 노트북은 죄 한글문서들뿐이어서, 용량에선 넘칠 염려가 없다. 이런 무궁무진한 창고 덕에……


아니 그런 모든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미진한 몸이 청탁을 받으면 목욕재계를 하고 선을 하고 앉아서 명상에 잠겨도 모자랄 일인데, 대뜸 창고 속을 후비기 때문이다. 제목과 내용이 따로 도는 문서들도 없지 않다. 적게는 8KB짜리에서 많게는 1,126KB까지 분량 또한 제멋대로이다. 드물게는 ‘열려라 참깨!’를 잃어버려서 바윗돌처럼 닫혀버린 파일도 있다. 노트북을 공유한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파일들이 있고, 암호를 걸어두었다가 그리된 다.


또 하나의 문제는 노트북에 대한 권리에서 함께 쓰는 그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는 밥을 벌고 나는 밥을 벌지 않는다. 그는 아무 시간이나 일을 하고, 나는 그가 자리를 비우거나 잠이 들어서야 노트북을 연다. 그러니 항상 서두르는 버릇이 있다. 집히는 대로 작업을 하다말다 그러는 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다. 한심한 노릇이다.


바로 어젯밤에 쓴 「조사」가 들어있는 파일에 쓰기 시작하는 것도 나쁠 것 없다 싶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니 너무도 잘 갖추어지지 않은 글이다. 격식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데 글쟁이라니 한심하다. 상투적인 감상의 찌꺼기는 또 뭔가. 그러면서 엉뚱하게 사투리 배운 것을 감지덕지하다니, 듣는 이들이 황당하다 했을 것 같다. 읽혀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문자화 되어 마음만 여기에 남으면 되니까. 이렇게 잘 표현되지 못했더라도 속에 담긴 의미는 진심이었으니까.


그보다도 크게 봐서 인생은 어느 구석을 돌아도 비슷한 쳇바퀴란 건방진 생각이 들 때면,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은 어차피 누군가가 살다가 죽는 이야기의 한 단면일 것 같다. 어떤 위대한 작가도 그 이상의 범위를 넘지 못할 것이고, 어떤 초라한 글쟁이도 그저 그 지평 안에서 몸살을 앓을 것이다.


파일들은 생각보다 분류가 되어 있질 않다. 어쩌다 눈에 띄는 파일 중에 마찬가지로 ‘옛 스승’과 관련된 짧은 글 토막이 있다. 모교 동창회에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추억담을 올려달라는 성화에 적어두었던 모양이다.


모교의 OOO 선생님은 가정과 선생님에서 교감, 교장 선생님을 두루 다 거치셔서 동문 모두에게 잘 알려진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동기의 ‘홈커밍’ 행사에 불참하실 때 노환이 깊으시다는 소식에 마음들이 무거웠지만, 그것도 벌써 옛일, 이젠 이승을 떠나신지 오랩니다.


선생님은 떠나셔도 의미 있는 한 순간의 기억은 영원 속에 박힙니다. 저는 아직도 아주 적나라하게 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비누에 엉키는 머리카락을 쉽게 떼어내는 방법은 그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속옷 서랍을 정리하는 일 하나도 참 숙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여 너절하게 두고 떠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사소한 것에 감동하느냐고요? 인생은 사소한 것의 총계라고, 그렇게 배웠고 그렇다고 깨달았습니다. 엄청난 목표 달성을 위해 사소한 행복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배웠고 그렇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때 홈커밍 행사 날 한 친구가 유난히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친구는 모교에 부임한 초년 교사로 스승님은 교감선생님으로 잠시 함께 재직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젊은 ‘애 엄마’ 여교사들에게 교감선생님은 감시 대신 시원스레 말미를 주셨다고요. 가능하다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재빨리 집에 가서 ‘아이를 잠깐이라도 꼬옥 껴안아주고 오라’는 충고. 당신께서 여덟 자녀를 기르시며 후줄근한 숙직실에서 젖을 물렸던 기억에 아파하시며, 젊은 여교사들에겐 가능하면 아이에게 밀착된 시간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던


거기에서 중단된 이 글은 홈페이지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제 새삼스레 추억에 잠기면서 운명의 불공평한 대우에 분노가 인다. 그분이, 마지막 몇 년을 지독한 치매상태에서 고통 받아야 했다는 뒷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평생을 교직에 종사하고 - 그저 단순한 가사노동이나 혹은 유한마담의 삶을 살아간 비슷한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무엇을 그리 잘못 했다는 말인가? 치매를 행여 젊은 시절의 방만에 대한 벌이라고 하는 단순논리를 반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 삶을 살고서 그 마지막 몇 년이 치매라면, 이것은 뭔가 아니다 싶다.


“고매하신 창조자의 섭리 따위는 없다는 증거야.” 내가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잘라 말했다.

“그런 말은 심하다. 그 선생님 시절엔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양쪽에서 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그리 되셨겠어. 게서 창조주 이야기는 왜.”

“창조주란 말 안 썼다 나는.”

“또 시작하는구나, 그게 그거다 원.”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내겐 항상 편이 적다. 그래도 우긴다.

“양심 없는 쪽이 양심 있는 쪽보다 훨씬 더 잘 산다면, 그게 이 세상에 고귀한 섭리 따윈 없고 우연이 지배한다는 것 아니냐고.”


다 말하지는 못했다. 실은 안팎으로 죽어라 일만 하시다가 치매로 고생 끝에 돌아가신 우리 선생님과 대비해서, 아파트 우리 라인에서 제일 멋있게 늙어가는 노부부 이야기를 할까 했었지만.


이런 이야기다. 남편은 겉은 영국신사에 속으로는 향교에서도 알아주는 식자에, 아내는 젊어 이래 폐백음식에 불려 다녔다는 솜씨를 자랑한다는 부인이다. 산보길이며 외출하는 양이며, 최고로 여유 있고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는 모습이다. 할머니는 아예 노인 축에도 안가는 팽팽한 얼굴이다. 근심 걱정이라고는 평생 없었다고 말하는 피부. 고운 자태. 고운 옷.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내막은 주말 연속극 감이었다. 남자는 고향에 처자가 있는 유부남, 여자는 처녀 때 만났던 사이라는데, 내가 그것으로 놀랐다면 호들갑이다. 속내는 더 기가 막혔다. 처녀 쪽에서 마음 고쳐먹고 시집을 갔으니, 일은 제자리로 돌아간 듯 했더란다. 그런데 여자가 한두 해만에 딸을 하나 낳고서는 그걸 버리고 다시 이 남자에게로 왔다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는 제 아들을, 어머니는 제 딸을 버리고서, 그렇게 다시 시작해서 ‘우리 자식’ 몇을 더 낳아 온갖 정성 다 쏟고 호의호식으로 키우면서 살아왔다니.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는 큰아들 선 자리를 말 그대로 백번도 더 보았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버린 자식들 ‘내 자식, 네 자식’이 잊혔을까? 요새 말로 그보다 더한 스트레스가 있었을까? 마음속이 그러고서도 저리 화평한 노년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까지 모두 이야기 했더라면 친구들은 내 말을 믿었을까? 스트레스가 치매의 원인은 아니다. 양심의 고통으로 늙는 것도 아니다…… 라고 우기는 말을.


생․로․병․사는 정말 오로지 유전자 탓인가. 아니 유전자 더하기 우연이라는 장치의 역할일까. 그렇게 우연히 찾아든 치매 바이러스. 우연히 비껴간 혹은 우연히 침투한 박테리아. 우연히 고꾸라진 버스. 우연히 날아든 바윗돌. 우연히 심장을 뚫은 파편.


*


유난히 문상이 겹친 주간이었다. 아스라이 먼 시간에 끊어졌던 추억들을 불러오는 초상 자리. 대형화된 장례식장은 문상객들을 서로 부딪지 않게 할 만큼 넓어서, 사람 사이에 가면 노련치 못한 나 같은 부류에게는 다행스럽다.


검은 저고리 치마의 여자들은 조금 생소했고, 그런데 처량함을 덜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평상복 위에 대충 걸친 허연 상복의 구겨지고 초라한 몰골을 조금 더 단정하게 보여준다. 향년 OO세가 주는 이상한 안도감에 문상객들은 덜 미안해하며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바로 앞선 문상객이 ‘호상’이란 말을 써서 언짢은 일이 있었나 보다. ‘호’자와 ‘상’자는 이를테면 모순형용법에 속한다. 모든 상은 상이다. 상은 잃어버리는 것, 끝이고, 영영 이별이다. 그것이 어찌 좋을 것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주들이 영영 고아가 되는 것인데.


친구는 일찍이 반쪽 고아가 되었고, 집에는 단출하게 어머니만 계셨다. 어머니만 계시는 것이 특별나지 않기 때문에, 그때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어차피 아버지들은 낮 시간 동안에는 집에 계시지 않았으니까. 친구네가 특별히 더 조용한 것은 아마 적산가옥의 구조였을 것이다. 한 줄로 나란히 펼쳐진 한옥과는 다르게, 좁은 복도를 낀 여러 겹의 방들은 작은 네모들의 미로였다. 한옥에서처럼 줄줄이 햇빛 받는 툇마루가 없으니 더 침침하고, 어둑한 공기 따라 분위기도 더 가라앉았을까. 고즈넉한 집과 친구어머니의 단아한 자태는 서로 어울렸다. 우리 배달민족은 또한 백의민족이라고 책에는 쓰였지만, 우리 집에선 백의를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인상은 하이얀 무명이었다. 우리들 교복의 풀기 선 칼라와 표백한 흰색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흰색. 함초롬히 옷감이 안기는 자태. 작고 고운, 무엇보다도 드문 말씨. 나는 어쩌면 그런 절간 같은 고요함에 이끌리어 친구 집엘 드나들었나 보다.


오늘 어머니를 여읜 친구는 그러니까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형제가 참전했다고 했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 중 많은 아버지들이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에서 두 번씩이나 엄청난 손실의 수치로 변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서 말하기로는 강제동원 피해자로 정부 당국에 신고한 사람은 22만 명 정도라 한다. 한국전쟁의 국군 피해자는 사망만 13만을 넘고, 부상과 실종 그리고 포로를 합쳐 62만 명을 상회한다는 통계를 보았다. 그런데 수학적 통계나 확률은 큰 의미가 없다. 두 형제가 참전하기로 똑같았던 우리 아버지와 친구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남고 살아남지 못했다. 체감 확률은 해당자에겐 언제나 1/2이다.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형제가 참전한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살아남았다. 당시에 젊은 장교로 사단 참모장쯤 되었던 아버지는 군사혁명 때엔 별을 달고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30명 명단에 들어갈 수 있었거나, 어느 부처의 장관이 되어 프랑스 혹은 서독을 방문, 한국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을 맺어 1억 마르크도 넘는 장기차관을 약속받는 성과를 올릴 수도 있었다. 실미도 사건 같은 때에 하필 책임 있는 위치에서 우왕좌왕 발표를 하다가 그날로 사임을 한다거나,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은 물론 나아가 의장이 될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총알이 하필 심장에 박히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아직까지 건강하다면……. 케네디가의 맏형 조셉 패트릭이 2차대전에서 실종된 것과 비슷하게, 형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동생은 그러니까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누구나 다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하긴 대통령이 뭐 그리 좋은가. 케네디 대통령은 너무 높이 태양 가까이 날다가 짙푸른 에게해에 빠져버린 이카로스처럼 추락했다. 그러니까 살아남은 동생이 대통령이 아니라 장관이나 국회의원 정도로만 올라갔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일찍 최고에 이르러 죽느니보다는 최고 비슷한 데까지만 가고 사는 것이 좋다, 그렇게 마음대로만 된다면. 조금 아쉽지만, 대통령 처조카사위의 동생의 장인의 매제의 모함(?)으로 비리에 연루되어 퇴직을 해도 괜찮다. 넉넉히 평균수명을 넘기고 혹시 ‘대한민국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대회’ 같은 묘한 계제가 있다면, 대한민국이 이미 공산화 되었다고 걱정하는 원로들에 가담할 수도 있다.


아니다, 이런 예상은 너무도 픽션이다. 어쩌면 그 아버지는 휴전과 함께 그대로 군복을 벗어던지고, 상과대학 출신답게 경영으로 입신했을 것이다. 재벌총수에게 휘둘리지 않는 전문경영인의 길을 갔다. 코트라 초창기를 살려내고 본부장을 역임하면서 온 가족이 외국에 나가서 살았고…… 아니다, 내 친구로 미루어 학구적이었을 아버지는 군복을 벗자마자 계속 학문에 전념하여 경제학박사가 되어 경제학교수가 되어……


이것도 정말 아니다. 내가 지금 쓸데없이 젊은 채로 남은 많은 아버지들의 가상의 전기를 쓸 일이 아니다. 다만 인생은 냇물을 따라 사는 것인지 냇물을 건너는 것인지는 몰라도, 인생에 징검다리가 있는 것은 확실하고, 그 하나의 돌이 나에게는 그 어머니가 있는 집이었다. 다다미방 저 쪽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하건 별 간섭이 없으셨던 어머니. 사실 조용한 어머니가 먼저였는지, 다 반듯해 보인 언니 오빠들이 먼저였는지 모를 일이다. 동창들 가운데에서 지금도 최고로 요조숙녀가 바로 이 친구다. 해야 할 일과 하면 좋을 일을 구별하고, 그 구별에 따라 행동하는 일. 그 어려운 일에 친구는 어려운 티를 모른다. 말도 조신하고 행동도 조신하다. 그렇다고 막힌 것도 아니다. 운동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고, 모르겠다, 살사나 벨리댄스를 배우지나 않는지.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친구는 합창단에 들고 배드민턴인가 탁구인가를 선수만큼 잘 할 수 있어도, 춤 같은 건 외면할 수도 있다. 학창시절 모범생의 연속일 텐데, 우리의 학창시절엔 지덕체라고 말은 하면서도 지와 덕에만 치중했고, 체육까지는 몰라도 무용은 조금 색안경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끼가 발동하는 것이라고. 저급할 것까진 아니나 조금 위험한 어떤 끼가. 체육이나 무용을 못하는 것은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으니, 웰빙 세대가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내 글은 이렇게 「조사」에서 빗나가고 있다.


*


글쓰기는 무진장 어렵다. 사투리까지 사랑하게 가르쳐 주셨던 국어 선생님은 내 첫 작품을 받아 읽어보신 뒤 내게 단 한마디를 하셨다. “소설은 박완서처럼 쓰거라!” 그리고 선생님이 타계하시고 겨우 보름이 지났을까, 우연히도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5미터 거리에서 보게 되었다. 음악과 문학이 어우러진, 꽤 유명한 분의 성대한 문학인생 기념회 비슷한 자리였다. 난생 처음 그런 자리에 끼게 되어 얼핏 주눅 든 내가 저 건너 테이블에 살며시 들어와 앉는 그 얼굴을 첫눈에 알아본 것도 용했다. 소설책에 나와 있는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던 덕일까? 작은 얼굴에 작은 체격 ― 거미줄 나오듯 누에가 털실 뽑듯 끊임없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짜내는 물레. 피란길 허기 속에서 동생 오목이의 손을 놓아버린 수지의 줄기찬 저항을, 함께 사랑하고도 혼자서 나락에 떨어진 문경과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한 혁주의 상을…… 내 기억 속에 박힌 작품만 해도 부지기수다. 행사가 끝나고 저녁을 먹으며 담소를 나눌 즈음에는 헤쳐 모이는 얼굴 얼굴들.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스쳤다. 박완서처럼 글쓰기.


글쓰기, 글 쓴다고 나서기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국문과 졸업도 더더구나 문창과 출신도 아닌 내가, 글쓰기공부를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대학의 평생교육원에도 가 본적 없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경한 길에 서 있었다. 무지가 용맹이라는 증거 하나가 내 첫 장편이다. 수필집 원고를 청탁받은 그가 정색을 하고 대신에 나를 들이밀며, ‘서랍을 위해 쓴’ 내 원고들을 가리켰다. 처녀림에서 무작정 베어낸 나무들은 그러나 품종에서나 영양에서나 밀렸다. 인생의 맛을 모르는 내 척박한 토양 때문이었으리라. 그나마 이름만 걸어 놓고 개점휴업 상태. 내놓은 물건들도 별 볼일 없는 태작들이지만, 팔릴 일은 없는 것이, 누가 이만한 원고를 사겠다고 덤비겠는가. 심지어 거간꾼도 없는 것이 이 바닥이다. 하긴 내가 발이 미치지 않아서이지, 거간꾼 없는 세계나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


왜 그리 스산한가. 기업의 냄새가 풍기는 장례식장은. 능률적으로 ‘치르는’ 영결의 장은 그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다. 평생에 한두 번 겪는 일일 것인데, 어느 초상에 가보아도 사람들은 놀랍도록 역할을 잘 수행한다. 슬퍼할 때 슬퍼하고, 곡을 할 때 곡을 하고, 대개는 밥을 먹을 때 밥을 먹는다. 밤샘을 위해 화투판도 벌인다, 아주 요절한 마당이 아니라면.


한 분 떠나시고 나니까 다시 한 사람 만나게 되네요…….


문상객들 틈으로 만난 그 사람의 말이었다. 한 열흘 후 쯤 전화가 왔다. 월요일이었다. 저 시간이 좀 나는지? 왜 아니라고 잘라 말하지 않았나? 해가 기울자 겁이 났다.


저녁엔 안 되겠어요. 저녁 외출이 일상적이 아니라서요. 연결된 것만 기뻐하지요.


그렇게 문자메시지 보내놓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마음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앓았다. 흔한 감기 몸살에 흔한 소화불량이지만 정도가 심했다. 머리 속에 맴도는 말. 미리 도망친 벌(?)로 24시간 앓고 있어요……


수요일, 다시 온 전화는 옛날을 생각나게 한 단어 때문에 길어졌다. 누가 먼저였을까, 아무 것도 아닌 옛 일을 끄집어 낸 것이? 아직도 손톱을 물어뜯는지? 지금도 노래를 잘 하는지? 그런 질문들은 애초에 어리석다. 어른이 되어 여전히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노래는 한번 잘하는 사람은 계속 잘한다. 


“들어봐요, 어머니가 남기신 메모예요. 머물을래야 머물 수 없고 붓잡을래야 붓잡을 수 없는 세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 시간 천금보다 귀하도다. ” 평생 간직할 소중한 글은 또 있다고 했다. 누군가가 읽은 간단한 조사:


노인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어머님,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엿함을 보여주신 어머님, 첫 만남에서 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어머님, 참으로 아름답고 귀하신 분이십니다.


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글을 내가 들어도 되는가? 그리고는 전화 받기가 망설여졌다. 벌써 금요일이었다. 아니다, 이 사람은 상중이다. 상중이 아니면? 그것도 아니리라. 한참 시간이 흐른 듯 했지만 겨우 일주일이었다.


거짓말 실토하는 게 낫겠어요. 다음날 전화 알고서 선뜻 못 받은 건 빚이 늘 것만 같아서요.


메시지가 원래 더 편하다. 상대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서. 다시 금요일, 비슷한 번호라서 잘못 알고 받은 전화. 그 사람은 정말로 봄나들이 권유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까? 어떻게 그런? 전화를 받고나서 곧 바로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열을 동반한 몸살감기로 변했다. 그것은 바이러스성이었다. 바이러스의 이름은?

 

*


현대는 뒤를 돌아보는 것이 미덕이 아닌 풍조다. 이를테면, 독서 중에 ‘웃기는’ 숫자를 보았다. 현대 사회에서 부부가 혹은 남녀가 사랑에 빠져있는 기간은 평균 3년하고 167일 2시간이란다. 그것도 도시 중심부 3,40대 남녀는 이 수치를 낮추지만, 다행스레 나이든 시골 사람들이 평균치를 높이는 데 기여해주고 있단다. 물론 전문서적이 아닌 ‘소설책’에서 읽은 소리이니 신빙성 있는 자료는 아니다. 소설은 신빙성을 담보하고도 남을 위인 ― 예컨대 미국의 무시무시한 대학의 교수이자 무시무시한 학력의 소유자 ― 이 쓰더라도 신빙성과는 상관이 없다. 이름 하여 픽션이니까. 그래서 소설책에서는 융의 할아버지가 괴테의 손자라나 뭐라나 하는 대목이 나오더라도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괴테는 손자 대에서 확실하게 후손이 단절되었으니까. (그가 그렇다고 확인해주었다.)


한 주인공은 “소설이란 인생처럼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작가의 자만심을 죄는 말의 반죽”일 뿐이라고, “요설”뿐이거나.


내 주인공은 소설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우선 내 주인공은 박완서의 주인공들처럼 자연스러운 이름도 갖지 못한다. 아직 ‘ㅂ’자 첫 획에도 못 미친다. 내 소설은 며칠째 방치된다. 그가 노트북을 점령한 것이 변명으로 통할까?


*


뷔리당의 당나귀, 귄터 드 브로윈, 동베를린 1968년.

자서전적 분위기로 도서관장을 주인공으로 하여, 사랑, 여성, 결혼, 도덕, 풍속, 현대, 동베를린이 결부된 소설로, 통상적인 삼각관계의 구도 속에서 실제로는 순응 메커니즘, 허위, 모순들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을 시도한다. ‘뷔리당의 당나귀’를 원용하여, 두 여자 사이에서 동일하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설명해보려는 시도 가운데, 60년대에 이혼율이 세계 최고였던 사생활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개인적 불행과 소외적 상황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왜 개인들은 사적인 행복을 방해받고 있는가? 이러한 주제는 상당히 정치적일 수 있다. 어쨌거나 인간은 당나귀보다는 조금 윗수이다.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필연에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뷔리당이 말한 당나귀는 극심한 기아와 갈증에 허덕이다가 굶어죽는다. 귀리와 물통을 곁에 두고서도 말이다. 그 철학자의 설명은 하필 귀리와 물통 사이 한가운데에 당나귀가 위치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먹고 싶은 욕망과 마시고 싶은 욕망이 똑같은 크기일 경우, 당나귀는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나귀가 필연에 의해 지배된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자유의지의 덕으로 제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여 물부터 먹든지 귀리부터 먹든지 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원인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필연’에서의 해방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는 원인도 동기도 없는 성격에서 발원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어떤 행위를 수행하겠다고 결심만 하면, 동기도 없고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행위를 수행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노트북에 그가 쓰고 있던 파일이 떠있다. 갑자기 그를 방해하고 싶다. 나는 그럴 때 문자메시지 프로그램을 주로 사용한다. 한달에 100건까지는 무료이고, 무엇보다 저장이 된다. 


SOS: “인간과 동물을 구분지어 주는 건 다름 아닌 동기 없는 행위”라고 말한 게 지드?


맞아, 『잘못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인들 해석에서 자유롭겠나? 신들에게서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준 공적이 기독교 세상 중세엔 철저히 잊혀졌다가, 차츰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라거나 일체의 권위에 맞서 항거하는 양심의 상징으로 부활되더니, 루소쯤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인류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 선구자로 해석된 것이지. 그러나 진보가 또 하나의 미망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여기 지드처럼. 진보가 필연이라면, 필연에서 해방된 자유의지는 인간으로 하여금 여전히 동기도 없고 불합리한 행동을 자행할 일 아닌가. 자유의지의 이름으로. ― 그는 글 숨이 길어서 E메일을 택한다.


한 세월 지나서 카뮈가 “동기 없는 행위”로서의 살인을 제시한 건 처음이 아니었네?


처음이라니. (가)설엔 처음도 끝도 없어. 언어를 소유한 태초의 인간들이 다 말해버렸거든. 누군가 그랬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캄파넬라? 태양 아래 완전히 새로운 형식은 없다고, 보르헤스? 아니 이미 벌써 전도서에 있었던 말이야. 1장 9절:  이미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있을 것이며 이미 된 것이 앞으로도 될 것이니, 해 아래 새 것이 없도다……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지. 그러니까 지드와 달리 카뮈는 자유의지보다는 부조리 개념으로 설명한 것. 부조리 극복의 유일한 길은 간단없는 반항이라고. 오늘은 끝.

추신: ‘뷔리당의 당나귀’도 뷔리당이 처음이 아냐. 벌써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도 언급했던 개념.


그가 바쁘구나. 아님 피곤했을까? 그런데 간단없는 반항? 반응이 아니고 반항? 넌 매사에 행동이 아닌 반응뿐이라고 비난당하지. 반응에서 단 한 걸음 더 나가 행동하기에도 저어하는 주제에 반항이 가당키나 하겠느냐? 그런데 반항하는 인간이 우수하다 그건 맞는 말인가? 반응에 그치는 것이 저열한 인격이라면, 그러니까 나는 당나귀 수준인가?


참, 당나귀는 노새와 버새 사이에서 어떤 반응일까? 나중에 말해줘.


웬일로 계속 당나귀 타령! 헌데 너, 필요 없는 걱정이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 암말이 당나귀 새끼를 낳긴 쉬운지 노새는 번성했지만, 암탕나귀가 말 새끼를 낳자면 난산이어서인지 버새는 드물거든. 그러니까 그건 이론적으로 기 싸움이다. 물이냐 귀리냐? 노새냐 버새냐? 아니, 노새․버새 틀은 순 네 상상이구나. 아내냐 연인이냐,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지? 당나귀보다 월등히 지능이 높은 인간은 ― 도이치 말에서는 답답한 바보 멍청이를 당나귀라 그러는 것만 봐도 당나귀가 멍청한 것은 사실일 것이야. ―  ‘자유의지의 이름으로’ 두 유혹 사이에서 굶어죽는 대신 교묘히 둘 다를 누리려 들지.


연인과 아내 사이에서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죽는 인간은 더 이상 없다. 3년은커녕 일년도 못가서 거덜나는 경우가 희귀한 일도 아니다. 습관을 가치와 혼동하여 어정쩡 결혼에 이른, 그 나름대로 지적인 남녀가 있다고 치자! 누군들 결혼이 가치에 속한다고 확신하기까지 섣불리 자신을 결혼에 내놓겠는가. 결혼이라는 형식을 갖춘 두 단독자의 삶. 그것도 영위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라는 친절. 남편이나 아내는 아내나 남편의 결점 때문에 연인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장 에르프처럼 한 남편이 아름답고 경제적으로 배경을 지닌, 게다가 합당한 일에 충실한, 개성은 없지만 그냥 좋은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고 치자! 부족함이 없는 것도 부족함이다. 그에겐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지적으로 단호하고 개성 있고 확고한 견해를 지닌 연인이면 족하다. 뭔가 정신적 에너지를 북돋우는 자극이면 그만이다. 브로더 양은 젊고 지적이다. 단호한 개성의 매력에 불안도 괴팍함도 멋스럽다, 잠시 동안. 그리고 자극성 향취의 단물은 쉽게 고갈난다. 무맛이라도 풍성한 온수에 푹 담기고 싶을 때 남편은 슬그머니 아내를 찾는 것이다.


그의 말투가 내게 향하는 2인칭이 아니고 3인칭을 향하기 시작하면 나는 침묵해야 한다. 이제 그의 장광설 논리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를 직업으로 산다. 30쪽 되는 작품에서 뭔가를 풀어내어 300쪽 가까운 책을 쓰기도 한다.


나는 다른 생각에 골몰한다.


4월이 산 너머로 지고 있네요. 실제였나? 꿈결 같이 짧았던 시간이 함께 지네요.


이 메시지를 그 사람에게 보내는가 아닌가, 문제는 그 자유의지이다. 휴대전화 멜로디와 함께 번호가 뜬다. 아아~ 여전히 조용한 시각 다시 소리가 부른다. 그 번호. 폴더를 열어본다. 부재중 전화, [화]10:39A, [화]12:05P.


전화 - 집어 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5월에도 6월에도 아름다운 꽃들과 즐겁게!


부재중 전화, [수]12:26P, [수]6:44P.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려면 문자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나? 


*


그 사이 가벼운 지인과 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생겼다.


죄송. 4월의 초대장을 건너뛰었었죠. 죽어라 일해야 했거든요.


‘죽어라 일’하는 일이 죽어라 사랑하는 일이었기를 바랍니다. 아니고 정말 죽어라 싫은 일이라면 미련 없이 때려치워야겠지요.


그런데 시만 쓰시는 게 아니고 노래를 잘하신다는 것을 몰랐네요. 저는 무반주로 노래하는 사람에게 무지 약한데, 해서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노래 잘하는 사람에게 쬐끔 휘둘리고 있는데…….


*


휘둘린다고? 너 요새 휘둘린다는 단어를 쓰는 거냐?


그가 당장에 태클을 걸어왔다. 놀랐나 보다, 토막 글로 나무라는 것이. 나는 모처럼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무엇이건 죽어라 사랑하는 일을 북돋아 주는 메일 탓이었는지 용기가 났다. 나는 내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어쩌다가 완강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도 도리가 없음을 안다. 내 위에 있건 내 옆에 있건, 내 안에 있건, 나 보다 우선하는 건 없으리라.  


미안해요. 전화 받기가 뭘까 조금 부끄러운 느낌? 암튼 어려워요. 그냥 잘 지내요!


그냥 잘 지내요! 그냥! ― 그것이 내 심정이다. 감정이다. 감성이 크게 발동할 때면 이성은 숨죽인다. 때를 아는 것도 이성이다. 그는 이성이다. 그는 나를 내버려 두어야 할 순간을 안다. 나는 그에게 노트북을 내어주지 않고 내 젊은 날에 대한 「조사」를 쓴다.


잘 가라, 아무 것도 아니었던 청춘아! 인생은 비록  만나는 지점이 없다는 점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먼데나마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 땅에서 땅으로. 반환점을 훨씬 넘기고서야 네 청춘에 때늦은 조사를 쓰는구나. 머리는 허접 쓰레기 지식욕으로 천만근 무거웠고, 가슴은 송곳 자존심으로 외로웠던 너! 생각으로 들끓는 네 머리는 생각한 것과 말한 것을, 생각한 것과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을 구별 못했구나. 반응은 행동이 아니라서 삼갔고, 행동은 행동이라서 삼갔다. 실 인생에 뛰어들어 본 적이 없었던 너. 못 이룰 꿈을 꾸지도 않았고, 아니, 아예 꿈을 몰랐구나. 못 이룰 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시작도 하지 않는 비겁함의 덕으로. 두 개의 가치를 좆아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말라죽을 일도 없었다.


잘 가라, 달지도 쓰지도 않았던, 맹물처럼 무맛의 청춘이여! 시리거나 뜨겁지도 않았던, 치열하지도 아리지도 않았던 청춘이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청춘아! 청춘도 아니었던 청춘……


*


봄비 내리는 아침입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오늘이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말처럼 행복한 주말되시길……


산인데요. 만산의 꽃들이 절규하듯 모양을 뽐내고 싱그런 연초록이 색상을 자랑하는 기를 보냅니다.


고맙게도 위로는 며칠 사이로 예상치 않았던 방향에서 왔다. 내 친구가 아니라 그의 친구에게서. “오늘은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 그렇게 산뜻한 오늘이면 되나보다. 열린 창으로 어디선가 초록빛 기운이 밀려든다. 청춘에 대한 「조사」라니, 우선 관습에도 어긋나고 뒤돌아보는 관점 이란 비생산적이다. 어쩌나, 그런데 오늘의 나는 기억의 총계다. 망각은 나를 부인함이다. 하지만 생산이 최고의 가치인 이 세상을 살자면, 이번에는 픽션에 들리어 막무가내인 내가 숨을 죽이고 사라질 차례다. 이성적인 그에게 온 생을 양보하면 된다. 인간이라면, 감성과 이성 한가운데서 당나귀처럼 말라죽을 일이 없다. 숨 쉬고 밥 먹고 태양 아래로 나가자. 태양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이 없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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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07. 5. 30. 23:30

마리아 막달레나

2007 월간문학 5월호


 

아직 이른 아침이다. 목소리가 행복으로 구르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딸 둘을 공주처럼 키워낸 친구는 인생에 단 하나 부족한 아들을 기어이 낳아, 할 일을 다 한 사람의 만족감으로 늦둥이의 돌잔치를 준비한다. 이런 저런 일에 나를 부르는데, 내가 솜씨나 안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겐 중학생이 된 아들아이 뿐, 다른 식구가 없어 종일 시간이 남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애처럼 생에 충일감으로 사는 사람들은 나처럼 뭔가 공연히 엇박자를 세느라 여가라곤 없이 들끓는 나날을 꿈에도 알지 못한다.


*


친구와 나는 기숙사에서 만났다. 알고 보니 같은 고향이라서 내내 단짝으로 지냈다. 그래 그녀는 내 비밀을 조금은 눈치 챘을 것이다. 비밀이라야 그저 통속적이지만. 여자대학 기숙사는 그 시절 많은 남학생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방문을 뭔가 진지한 감정이라 치부하고 깔깔대곤 했다. 모두의 관심인 오월 축제도 실은 싱거웠다. 메이퀸행사는 성의 상품화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없어진지 몇 해이고, 같은 방 3학년 언니 말로는 지난해엔 법대생들이 ‘OO민국 모의국회’를 열어 ‘여성부’의 탄생논의를 벌였단다. 그러면 4학년 언닌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들은 틈새에서 어리둥절했다.


그러던 시월의 마지막 날, 향우회 소풍이었다. 동향인이라는 공통점으로 모인 우리들은 행색만큼이나 초라한 교외선 열차를 타고 그만그만한 이름 모를 작은 역에서 내려서 푸르름이 사라져가는 산야를 어슬렁거렸다. 처음 머쓱하던 대화들도 서둘러 점심 보따리들을 풀어놓았을 쯤엔 제법 풀려 있었다. 누군가의 제의로 빙 돌아 소속과 이름 석 자를 대기 시작했고, 더러는 순간의 장기를 부리기도 했다. 유난히 소리가 흩어져서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하는 사람, 그가 그였다. 법학과 아무갭니다, 그렇게만 소개한 사람이. 옆의 친구가 “이 놈은 꼭 학교는 뺀답니다, 자명하다나 뭐라나….” 그 말에 그는 “아니, 학교는 무슨.”이라고 잘랐다. 굳이 명문을 감추려는 모양새에서, 내 첫인상은 그가 겸손하다 못해 조금 꼬였나 싶은 정도였다.


“잠깐만,” 부산히 나무젓가락들을 부러뜨리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 기도를 자청했다. 서울 생활 반년 남짓에 배운 예절은, 물론 우리가 기독교학교를 다니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기도를 시작하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덩달아서 기도를 하랄 법은 없었고, 그냥 남의 기도를 막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니, 그게 기도라는 것이…” 하고 나섰다. 기도란 강요할 것이 아니라는 논리였는데, 모두가 어색하게 느낄 만큼 딱딱한 투였다. 그쯤은 대충 넘어가줘도 좋을 듯한 향우회 점심자리에서. 그 법대생은 법은 몰라도 상식에선 외려 부족한 부류인가 싶었다. 식사는 첫 순간에 흥을 잃었지만,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호기들을 번뜩이며 대화들은 씩씩했다. 내 귀에는 심심찮게 그가 “아니”라고 말하는 소리가 박혀왔다. 그럴 때면 모두가 썰렁하게 서로를 보곤 했다.


“자아, 그럼 일단 십팔번 노래를 한 곡조 씨익…” 누군가 노래라는 물꼬를 트자, 가무에 능한 민족성이 발휘되었다. “말없이 건네주고~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에 이어, “남기고 간 뒹구는 낙엽에 난 그만 울어버렸네”라고 울음을 울더니만, “나 어떡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절규도 했다. 입만 열면 사랑타령들이다. “말 한번 붙여봤으면 손 한번 잡아봤으면~ ”하는 애교도 부렸다. 여학생들은 꽁무니를 빼다가 누군가 물색없이 “세모시 옥색치마~”를 불러서 좌중의 열기를 식혔다. ‘아니 씨’의 차례가 왔는데, 그건 노래도 뭣도 아닌 중얼거림이었다.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이번엔 다들 숨을 죽였다.


얼렁뚱땅 오페라 『순교자』 이야기가 나왔다. 초여름, 국립오페라단 창단 20주년에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공연이라고 떠들썩했던 터라 다들 아는 척 했다. 그러자 다시 ‘아니’가 끼어들었다. “아니, 그 작가가 오페라에 동의했단 말여? 그 양반 마침 영문과에 들어와서 강의한다더라고. 노벨상 후보지명이면 사건은 사건이제. 아니, 그 작품이 오페라에 가당해? 아니, 그 심오한 주제를 연극도 아니고 노래로 불러댄다고? 그것 희화아녀?”


밑도 끝도 없이 그가 사용하는 접속어는 모두 “아니”였고, 그는 그것 없이는 말을 시작하지도 이어가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오페라라는 그 어려운 것을 아는 체 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허영이고, ‘아니 씨’가 정직한지도 몰랐다.


“녀석, 기독교라면 왜 흥분을 하냐? 너 불교야 뭐야 무신론자?”

“아니, 기독교를 진지한 주제라 하믄 무신론자냐? 난 분명 무신론자도 아니고, 교회 반대자도 아니야. 아니, 우리 동네 보면, 제사 안 지내려면 교회가면 되니 편리하고 좋제. 아니, 우리 집은 제사가 많진 않아도 우리 어무니도 은근히 교회에 솔깃하셨제, 할무니가 막으셨고. 할무니 이론이 재밌어. 당신은 천당 갈 날 얼마 안 남았으니 교회를 나가시겄대. 대신 젊은 사람들은 제사를 받들고 교회엔 얼씬 말라.”

“신소리들 집어치웁시다. 여그가 종교 논쟁자리도 아니고, 여그 기독교학교 학생분들도 계시고….”

“신소리, 그렇네요.” 엉뚱한 소리들을 듣자니, 기독교학교 학생으로서 한 마디는 해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나섰다. “기독교학교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은 아니죠. 반대로….”


소용없었다. 나는 지금도 생각해 본다. 예컨대 야구원년의 스타들 이야기 도중에도 무슨 이유로 그 많은 “아니”가 쏟아져 나와야 했는가를. 그리고 바로 그 주술에 내가 걸려버렸다는 것을. 나는 그날 오후 내내, 아니 돌아오는 길에 태능역까지 갈 사람들도 함께 신촌역에 내려 근처에서 어중간히 마셔댄 알코올과 잡담들 사이에서도 그의 “아니” 소리를 변별해서 듣고 있었다. 어떤 질문 어떤 말을 해서 그에게서 “아니”가 나오지 않게 할까를 골몰하느라 다른 대화들은 건성으로 들었다. 점호시간이 가까워 오자 기숙사에 들어가야 할 친구들이 일어섰다. 한 친구는 조금 취기도 있고 해서 사감선생님 꾸지람이 겁난다고, 이모집에 가기로 눌러 앉았다. 아무튼 밤길을 동행해줄 남학생이 필요했고, 누군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하자, 그가 선뜻 나섰다. 어차피 술을 잘 안하는 그가 먼저 일어나는 것이 낫겠다고, 그러더니 다른 사람들을 말렸다. “아니, 지금 짝짓기도 아닌데 두 사람씩 뭣하러.”


우리는 이미 반쯤 나서고 있었기 때문에 잘은 몰랐지만, 귓결에 들려오는 대로 ‘짝짓기’라는 단어는 너무도 격에 맞는 말이 아니었다. 아마 그는 그 단어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기껏 ‘짝을 맞추어 나갈 계제가 아니다’ 그런 뜻이었겠지만, 순간 불쾌감이 일었다. “무슨 그런 흉측한 말을 하세요?” - “예, 무슨?”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종일 기다렸던 반응을 하필 이제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옆의 친구도 까닭을 몰라 했는데, 내가 너무나 웃었나 보다. 그가 화를 버럭 내면서 내 웃음을 조롱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이건.’ 나는 속으로 답답했다. 친구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교문 쪽을 바라보고 종종걸음을 시작했고, 나는 그만 눈짓 손짓으로 먼저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씩씩거리고 있는 사람을 떨치고 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간단히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친구는 걱정보다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자꾸 뒤돌아보며, 그러나 이내 교문 쪽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 우리 맥주 한잔 더 할까요?” - “저, 맥주…” 이번에도 그가 나를 웃겼다. 그렇지만 웃지 않았다. ‘아니’코드가 잠시 빗나간 모양이다. “제가 웃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잖아요.”


“아니, 좀 걸읍시다.” 그는 앞장섰다. 인적이 드문 거리를 휘돌아 따라 걸으니 곧 큰 나무들 사이로 오솔길이 나왔다. 이어 인근 대학의 캠퍼스에 들어가게 된 것 같았다. 어둠이 아니라 그의 침묵이 무서웠다. 나는 할 수없이 ‘아니’ 이야기를 꺼냈다. 하루 종일 ‘아니’가 아닌 다른 말머리가 나올까 귀를 쫑긋하고 들었노라고. 듣고나 있는지 그는 여전히 침묵이었다. 내가 그만 벤치에 앉아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슬그머니 무서워지기 시작했을 때 그가 돌아와 앉았다. 먼데 하늘을 보며 그가 말했다.


“우리 누난 YH 김OO의 친구였습니다. 야당당사에서 사흘을 농성하다가 죽은 김OO 말입니다. 누이들은 그때 칠팔월 더위에 200명이나 모여 있었답니다. 요구조건이 무엇이었냐, 그저 공장문만 닫지 말라. <배고파 못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그렇게 써 붙여 놓고. 가발사업 - 끔찍하지요. 어무니들 누나들이 눈물을 머금고 내다판 긴 머리채, 가발을 만들었으면 수출로 부자가 되고 좀 좋은 일이요. 헌데 결과는 뭡니까, 죽은 누나 친군 말할 것도 없고, 병신되어 돌아온 우리 누난 또 뭐고. 죽은 친구가 한 살 더 어렸다던가, 꽃다워야 할 열아홉, 아부지는 일찍 돌아가, 어무니는 행상, 배곯아가며 일만 하다가 죽었대요. 국민학교 졸업도 못한 어린 나이부터 일판에 나섰더라요. 그러다간 죽어서도 순식간에 화장되어버렸다니, 불길과는 무슨 원한이라요? 어려서 화상으로 치마 한 번도 못 입어봤답니다. 우리누나도 그때 다친 허리를 제대로 치료만 받았어도 저 지경은 아닐 것을, 입원하면 체포될까 걱정,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돈이라서, 칼잠 자는 셋방서 견디다 못해 병신 되고서야 내려왔지 뭡니까. 집에 돌아온 누난 기독교 물이 들었다고 혼만 났지요.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어서지도 못하는 누나가 교회에 갈 일은 없지만요. 아무튼 누난 교회 쪽 인사들에게서 깨달음을 얻고 또 용기를 내어 노조를 만들고 하는 힘을 얻었다고 하대요. 나한테 이번 방학 내내도 설교를 해요. 그런데 난 누나의 신 같은 건 믿지 않아요. 그런 절대자가 있다면 이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을 리가 없지요, 또 실수로 그랬다면 곧 바로 잡았을 것 아니요? 희생자와 희생자를 내는 세상을 이리 버려두는 것이 누나가 말하는 신의 섭리라면 난 수긍할 수 없고요.”


그가 뜸을 들이며 힘들게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일종의 마비를 경험했다. 안개 속에 들어선 망망한 느낌. 누군가의 손을, 누군가의 아픔을, 분노를 보듬어 안고 싶은.


“내가 『순교자』이야기 때 정말 분노한 것은, 내겐 왜 두루마기 걸친 목사님들의 신앙과 배신의 정체는커녕 그 상도 떠오르지 않느냐는 겁니다. 나는 왜 예술에 대해선 그 이미지도 그리지 못하냐, 아니 진짜 분노하는 것은 바로 오늘의 나 자신이요. 인생관에도 생활원칙에도 어긋나고, 나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 점은, 단지 죄짐 모르고 순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그쪽의 인상에 흔들리어….”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어색해진 나는 얼결에 찬송가 구절을 읊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갖는 채플의 습관이었다.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예수의 품이라? 아니요, 그건 아니요. 지구상의 인간들을 죄다 품어주련다는 예수에게 무슨 품? 성육신이고 뭐고, 육신이란 원래 단 한 사람을 품을 품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


*


그것이 신호였다. ‘품’에 대한 언급은 그들의 서로 다른 머리의 아픔을 오직 몸으로 품고자하는 갈망의 폭발로 이어졌다. 연초에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서 뜻도 모르고 대한민국의 통금해제를 환영했던 두 사람은 이번엔 그 실질적인 자유를 누렸다. 12시 바늘이 넘어가는 순간, 목양신 팬의 시간, 패닉의 시간이었다. 휘영청 둥근 달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은 밖에선 상당히 쌀쌀했다. 어색한 몸짓으로 서로의 얼굴을 비껴 안고서 오들오들 날 밝기를 기다린 그들은 엉뚱하게도 다음 일요일에 대학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약속으로 헤어졌다.


그 일요일, 며칠 전 소풍날의 벌판보다 더 싱싱해 보이는 교정의 나무들은 더러는 상록수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색을 내고 있었다. 일요일마다 교회로 쓰이는 중강당 건물은 보기에도 육중한, 그래서 심오한 종교성을 풍기고 있었다. 파이프 오르간의 음악은 천장이 아닌 천상에서 내려앉는 아늑함이었다. 그는 누이가 말했던 신앙의 힘이 공기방울 속에 녹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누난 내가 여기에 와 앉은 것을 상상이나 할까?’ 갑자기 그리움이 복받쳤다.


무오성 - 그날은 성경의 무오성에 관한 말씀이 있었다. ‘성경’과 ‘성서’의 차이도 모르는 그에게는 심오하면서도 난해한 말씀이었다. 목사님이 읽으신 요한복음은 정확히는 몰라도 이런 뜻이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 하심이요, 또 너희가 그 믿음에 힘을 입어서 생명을 얻게 함이다.’ 영혼을 구하려는 중차대한 목적이므로, 불확실하거나 오류투성일 수 없는 것!


‘아, 아니다.’ 그는 속으로 외쳤다. 목적이 숭고한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아직 논리학입문에도 가보지 못한 그의 논리로도 이건 아니었다. 세상에 숭고한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수많은 오류투성이의 일들을 이 한 마디로 덮을 수 있다고? YH의, 수많은 공장의 숭고한 목적도 우선 제 굶주리는 가솔들을 먹이고 노동자를 고용해 그들의 굶주리는 가솔들을 먹이는 일 아니었나?


그러는 사이에 아름다운 선율의 찬송이 울려 퍼졌다. “아침 해가 돋을 때 모든 만물 신선해, 주여 나를 도우사 세월 허송 않고서, 어둔 세상 지날 때 햇빛 되게….” 그는 소리 없이 울었다. ‘어둔 세상 지날 때… 아, 나는 여기에서 뭣하고 있는가? 못 배운 누나들이 여전히 어두운 세상을 헤맬 때.’ 그것은 부끄러움의 눈물이었다. 그는 영생을 갈구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무엇인가 지금 이승의 어두운 삶을 위해 살아야 할 각오가 틀어 올랐다. 그는 이 사람들과는 한참 격이 다른, 그저 척박한 땅, 열악한 현세의 사람이었다. 그의 예의는 예배가 끝날 때까지 조용히 앉아서 그녀를 기다려주고, 그리고 기숙사 앞까지 동행해주는 일이었다. 걷다보니 지난 소풍 때와는 달리 깨끗하게 잘 차려 입은 옷매무새가 눈에 들어왔다. 참 어여쁜 여자구나. 그러나 그는 그 성장을 교회를 위한 의식으로 간주했다. 짧은 오솔길을 돌아 기숙사 앞 잔디밭에 이르렀을 때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가 고개가 떨어졌다. 두 번째 약속은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조금 과장된 당당한 발걸음으로 바로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식탁에선 기도시간이 막 끝난 참이었다. 그녀는 교회나들이 차림으로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 점심을 먹었다. 어느 때 보다 열중하여.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리라. 숟가락으로 밥알을 모아서 퍼 올리고 얌전히 입으로. 국물은 숟가락의 2/3쯤 뜬다, 곱상하게. 반찬을 집어 들 땐 턱이 반찬을 향하지 않도록 시간적 여유를 둔다, 가능하면 미소와 함께. 주말 나들이로 여기저기 빈자리들 때문에 그녀의 꼿꼿한 자세가 더욱 돋보였다.


바로 그런 반듯한 얼굴로 그녀는 나머지 대학생활을 마쳤다. 절박한 조율이, 치유의 힘이 본능적으로 솟는 것에 자신도 놀랐다. 맑고 깨끗한, 누구에게라도 그렇게 보였고 스스로도 그리 믿을 만큼 단아한 젊은 나날이었다. 노력 끝에 성공한다는 말이 사실인 듯, 그녀는 졸업하면서 공립중학교에 부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 아리게 많은 것을 배웠다. 열서너 살 소녀시절엔 몰랐던 것들을. 그렇게나 철부지 얼굴 아래 가려진 그늘을 짐 지고 살아가는 아이들. 종일 깔깔 웃다가 지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누구는 왜 월요일이면 결석이나 지각을 해야 하는가, 누구는 왜 졸린 눈으로 멍하니 옆 사람을 지나쳐 보고 있는가.


*


그렇게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바로 손아래 여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문제가 거론되자, 집에서는 서둘러 언니인 내가 먼저 선을 보아야 한다는 성화가 일었다. 괜찮은 학교를 졸업하고 괜찮은 직업을 가진 남녀가 어색한 자리에서 만났다. 처음엔 매개에 대한 거부감으로 어색해했지만, 곧 교양 있는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온통 의사집안의 막둥이라는 그 사람은 집안의 반대를 뚫고 신방과에 진학한 자유주의자였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호와 연극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직업적인 전문분야 탓도 있겠지만, 단 한 번도 지루할 수 없는 알찬 시간들을 만들어주었다.


곧 남부러울 것 없는 약혼식이 있었다. 그러나 순탄치 않은 행로는 어정쩡한 파혼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내 몸의 불발에서 비롯되었다. 약혼식 이후 서너 번째 데이트에서 약혼자가 약혼녀에게 할 수 있을 입맞춤을 해왔을 때 난 너무나도 놀랐고, 놀람은 심각했다. 왜 그리 혼쭐나게 놀랐는지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갑작스러워서였을까? 상황이 나빴을까? 그대로 굳어버린 내 몸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약혼 행세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각각 집에다 “결혼 후의 계획에 의견이 맞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대기로 했다. 집에선 동생이 먼저 결혼하기로 결정 났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우선한다고, 비교적 유연한 사고를 지닌 어머니가 우기셨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일 년이 훨씬 넘었을 때, 옛 약혼자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번엔 잘 될 것이, 그의 집안에서는 “의사공부만 하겠다면 어떤 여자라도” 된다 했다는 것. ‘파혼했더라도?’ - 이 말은 모욕적으로 들리기도 했는데, 아무튼 참 엉뚱한 발상이었다.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으로 리처드 버튼과 두 번 결혼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떠올렸던 것 같다. 한 여자와 두 번의 약혼을 두 번의 파혼으로 끝낸 카프카 생각은 접어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더구나 나이 들어 의사공부가 한국보다는 미국에서가 더 용이하다고 했을 때, 집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아버지의 반대는 “미국”보다도 “한 번 깨진 그릇”이라는 원칙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머니는 대찬성이셨다. ‘아이들 하나쯤 미국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식의 유행 따라서. 결국 파혼을 되돌린다는 의미에서 다시 약혼식을 하고 이번엔 곧 이어 결혼식을 치렀다. 시댁에 걸맞은 격을 갖춘 서울에서의 결혼식을 어머니는 정말로 만족해하셨다. “둘째 먼저 시집보내믄 큰 딸은 어렵다더니 웬걸….” 그런데 그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누구나 결혼한 여자는 결혼 당일의 피로를 잊지 못하리라. 떠들썩하고 벅찬 긴 하루가 지나고, 다소 과장된 한 껍질의 미모를 지우고 제 얼굴로 돌아올 때, 그것은 몸도 마음도 나신을 의미한다. 비행시간을 멀미기운으로 보낸 나는 숙소에 들어서면서야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곳이 신혼여행지로구나. 우리는 밤이 되면 신혼부부가 하는 일을 해야 하는구나. 저녁 시간 내내 나는 우리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와 똑같이 서로 각각 샤워를 해야 하는 순간에 이를 것을 걱정했다. 누가 먼저? 나는 가장 덜 어색한 쪽으로, 그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기까지 가만히 내 차례를 기다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자아, 신부님, 취침 시간이오. 레이디 퍼스트!” 하고 그가 가리키는 것은 욕실이었다. 순간 그 문제가 정해져버렸다. ‘신랑님 먼저…’라는 말은 목에 걸려버렸고, 나는 머뭇거리다 말고 욕실로 들어갔다. ‘밖에 있는 그는 그냥 의자에 앉아있을까? 설마 벌써 침대에 누었을까? 반쯤 벗고 와인을 마시고 있을까?’ 비누 거품을 내면서 별별 생각을 다했다. 갑자기 나는 나의 나신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는 불현듯 제대로 샤워도 하지 않은 알몸을 누구에게 온통 주어버렸다는 생각에 경기가 났다. 그런 기억이 왜 송두리째 사라졌었던 것일까? 신입생 때의 먼 기억. 어쩌면 불의의 사고와도 같았던 한 날 한 밤의 기억. 그것이 아리게 되살아났다. 욕실 문을 사이에 두고 내가 ‘신랑’과 함께 신혼의 첫날밤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


신랑은 나에게 “침대에 누워서” 기다려주기를 청하고 욕실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는 그러나 더 이상 없었다. 그 대신 첫 남자를 배반하고 이제 간음을 행하려는 창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락한 미래의 결혼생활을 위해서 제 몸을 팔 준비를 갖춘 창녀. 누가 하루하루 몸을 팔아 살아가는 창녀만을 나무랄까? 이렇듯 마땅한 조건을 따라 결혼하는 여자는 모두가 창녀다. 그렇다 해도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자신을 팔 생각을 하는 것이라면 가상키나 하다. 이날 밤, 과거의 첫 남자를 떠올리고 있는 것 자체가 참 악랄한 창녀성이다. 나는 그렇게 꼬옥 눈을 감고 있었다.


신랑이 점점 밀착되어 왔다. 그는 내 무감각을 그리 탓하지 않았다. 우리는 약혼-파혼-약혼-결혼의 대단원을 존중해야 했다. 나는 더 꼬옥 눈을 감았다. 내 몸을 잊고 먼 데 시간과 공간으로 날았다. 갑자기 그 옛날의 ‘그’가 내 몸 속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특별한 경험이었다. 오랜 망각 속의 그가 뜨겁게 내 몸 속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었고,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밤새 나는 옛날로 돌아가 있었다. 나는 서투른 허영에 들뜬 철부지 여대생, “아니”를 연발하는 그의 무서운 실존의 고백을 듣고 당황한 어린 영혼이었다. 나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이상한 공존으로 시작되었다.


신혼의 우리는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시댁에서 마련해준 아파트는 의외로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가까웠다. LA 같진 않아도 사는 일엔 우리말만으로도 불편이 없지만, 공부를 하자면 영어를 수준급으로 습득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둘이서 같이 하면 잘 안된다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내가 운전을 못해서 그냥 같은 대학의 어학코스에 등록했다. 그러다 내가 결석하는 일이 많아지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어공부를 포기한 나는 집안의 일상으로 돌아와 무료함에 던져졌다.


신혼 기간을 사람들은 임신 전까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기는 천천히 갖는 추세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에겐 적당한 몇 달이 흐른 뒤 아기가 생겼다. 어느 밤 ‘그’의 아스라이 그러나 불같이 뜨겁고 엄청난 압력이 온 몸을 꿰뚫는 희한한 느낌에 숨이 막히도록 떤 다음이었다. 남편이 학교에 가고 난 나른한 봄날 나는 가만히 욕실로 들어가 배를 안았다. 나신은 차마 부끄러워 아랫배만을 드러내고 만져보았다.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엇이 일렁였다. 나는 그가 내 몸 속에 영원히 들어왔음을 느꼈다. 그날로 나는 남편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임신이라고, 핑계는 그것이었다. 아기를 보호하고 싶다고. 남편은 기쁨과 혼란이 뒤범벅된 얼굴이었다. “어마 거참 잘 되었네. 병원 가서 확인해야지!” 친근하게 말하던 남편은 잠자리에서는 펄쩍 뛰었다. “아기를 보호해? 누구로부터? 제 아비가 누군데 보호 하느냐고!” 그러나 나는 창녀가 되는 느낌을 갖지 않고서는 남편을 더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임신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그 동안 남편은 완전히 토라져 있었다. 처음엔 임신 히스테리치곤 별나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개를 저었다. “어떤 별난 자식을 가졌기에”라는 으름장에서 “어느 놈의 자식인지 두고 보겠다, 검둥이가 나올지 흰둥일지 두고 보고야 말겠다!”는 악담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는 회복할 수 없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역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뱃속의 아기가 부모를 함께 원하지 않는 경우라 했을지. 배는 불러왔고, 만삭이 되었다. 고향 떠난 이역만리에서 참으로 외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나, 시간은 정지한 느낌으로 해가 지고 또 해가 떴다. 눈이 흩날리는 날, 아기가 태어나려고 했다. 한국에서와 달리 남편들을 산실에 들여보내는 관습인 나라에서, 나는 펄펄뛰며 남편의 입실을 거부했다. 하얀 강보의 아기는 눈밭에 파묻힌 듯 쌕쌕거렸다.


남편은 내 “병”이 심하기는 해도 해산과 더불어 끝날 것이라 기대했었다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해산을 통해 아기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할 저력을 잃었다. 이 새로운 꼬마신사와의 관계만으로도 버거웠다. 칠칠을 집는 관습대로라면 아직 큰 대문에 금줄이 걸릴 기간이었다. 결혼에 이른 “히스토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라도” 이혼만은 보류하자는 남편의 논리에 특별히 반박할 이유도 나는 갖지 못했다. 남편은 여전히 약간 자유의 냄새를 풍기는, 있는 집의 조금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무엇도 아주 오래는 참지 못해했다. 남편은 내가 진자리에서 일어날 즈음에 말없이 아기의 여권을 만들어왔다. 떠날 수 있다는 신호였다.


아기와 함께 상당한 무게의 짐 가방을 찾아 들고 비행장을 나서는 기분은 이상하게도 안도감이었다. 늦은 봄, 하늘하늘 봄바람을 타고 소문이 빨리 흩어질까 걱정이었다. 우선은 친정나들이처럼 고향에 내려갔지만, 아기 주변의 부산함 속에서도 얼마큼 시간이 흐르자 이실직고를 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따로 나와서 직장을 갖고 아기를 기르는 삶을 생각하자면 고향에 머무를 고려도 해보았지만, 우선 어머니가 당신의 삶을 포기하고 딸네 집에서 아기젖병과 씨름하실 분이 아니었다. 나는 부지중에 어머니의 자존심을 좀먹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우선은 고향 멀리 서울 근교로 살 집을 찾았다. 언젠가 직장에 복귀할 궁리도 한 이유였다. 사표를 내고서 결혼했으니 새로 임용고사를 보아야 할 것이고,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 겁도 났다.


마침 남편이 여름방학이 되어 잠시 들어왔을 때, 함께 시댁에 불려갔다. 말없는 내게 시아버지는 아이이름의 통장을 건네주셨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끈이라는 것이구나. 시댁 근처로 이사하라는 ‘명령’에는 불복했지만, 대신 아이를 잠시 잠시 시댁에 데려다 주어야했다. 그것뿐이라면 내게는 과다한 행운이었다. 생활전선을 위해 내 아이를 다른 어머니에게 맡겨야하는 불행을 면했으니 말이다. 출입이 없는 생활, 종일 종알대는 아이와 보내는 많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길었다. 밤은 깊어지지를 않았다.


그러는 사이 추상적으로는 세기가 바뀌고, 구체적으로는 강산이 변하는 십년이 흘렀다. 나는 고운 태를 훌렁 벗은 사십 세가 되었다. 그러고서 후다닥 놀랐다. 나는 내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낭비해버렸다. 내 시간은 정지한 채로 세상이 휙휙 지나가버렸으니까.


아이는 4학년. 이른 봄날 펼친 책에서 ‘억’이라는 수의 개념을 보고 나도 함께 놀랐다. 혼합연산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니 3학년 때 세 자릿수 곱셈 때부터인가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아이는 대체로 시무룩했었다. 그제야 아이에게 아빠의 존재가 절실함을 깨달았다. 수학과 과학은 아빠가 챙긴다는 주변의 말들에도 신경이 쓰였다. 결국 아이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적지답사도 그렇다. 경복궁이야 데려 간다지만, 공주의 공산성이나 부여의 낙화암 등을 어찌 데려갈지. 『교과서를 만화로 공부해요』시리즈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아빠의 역할과, 아빠의 사랑과는 다르다.


아들아이를 이대로 어쩐다? 최소한 수학과 컴퓨터를 지도할 필요가 생겼다. 한참 큰 대학생선생님을 어려워하던 아이가 차츰 자연스럽게 ‘형’과 어울렸다. 아이가 배우는 틈에 나도 까마득한 기억을 되살려 컴퓨터 사용을 익혔다. 내 기호는 단연 ‘검색’이었다. 단순한 작동으로 이 무궁무진한 보물 길을 열면서, 가라앉았던 삶이 솜털처럼 부풀려 날았다. 하긴 내 관심이라야 기껏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보는 정도였다. 하지만 폐부에 와 닿는 김현식도 임희숙도, 애절한 오현란도 몇 달을 넘기기 못했다. 영원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 옛 친구들의 이름을 검색 창에 쳐보았다. 동명이인이 줄줄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지만, 더러는 그 사이 시인이, 치과의사가, 그리고 또 무엇이 되어 있었다. 마흔 나이가 그런 것이었다. 가만히 그 이름이 떠올랐다. 무서운 유혹이었다. 그러기를 수십 번, 마침내 유혹에 굴했다. 서너 사이트가 떴다. 유전공학 전문, 혹은 근대영미소설 전공의 교수, 외국에서 활동하는 목사… 어느 누구도 그와의 관련성이 희미했다. 내과병원은 더더욱 아니리라. 뭘하고 살까, 그는?


그해 화창한 오월이었다. 컴선생이 약속을 미루었다가 왔다. 무슨 일인지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하고 있었다. “늦게서야 신부님이 되셨는데, 우리 신부님이 그만 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셨는데요, 그래갖고 일주기 추모미사 끝나고 몸이 성찮은 누님을 고향에다 모셔다 드리느라고요. 저희 한 동네 분이셨어요.”


나는 순간 고향말투를 듣고 있었다. 평소엔 무심히 들었는데, 지금 이 학생은 내 고향 말을 했다. ‘몸이 성찮은 누님?’ 갑자기 떨리기 시작하여 그 이름을 물을 수가 없었다. “향년 몇이나?” “향년이랄 게, 40대 초반요. 성당에서 어버이날 행사로 함께 운동하시다가 쓰러졌고요, 알고 보니까 지병이 있으셨답니다. 운동권으로 잡혀가 고생….”


‘그만, 그만 해라.’ 나는 그가 분명 법대생이었다는 확실한 기억 쪽에 매달렸다. 혹시라도 세상과 화해할 수가 없어 미리 피안을 살고자 성직자가 되었다 쳐도, 꼭 그 사람이 그 사람일까? 아니다. 김대건 신부님 이래 사제서품 받은 신부의 숫자가 4000을 넘는다는 구절을 어디서 본 생각이 났다. 그럼 확률은 1/4000이다. ‘미쳤구나, 과거의 모든 신부님들과 함께 확률을 셈해?’ 마음속은 점점 지옥이었다.


그날 밤 늦게까지 자리에 들지 못한 나는 무심코 ‘마리아 막달레나’를 자판으로 치고 있었다. 결혼과 동시에 창녀가 되었던 여자의 내면은 암흑이었다. 내 속의 일곱 마귀는 누가 있어 쫓아내줄까? 나는 누구의 발에 향유를 부어야 할까?


화면에 티치아노의 <막달레나> 초상화가 떴다. 광야에서 참회하는 막달레나라는데, 모습은 죄인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풍염의 상징이다. 순 알몸에 늘어뜨린 긴 머리타래는 육욕을 증거할 뿐, 종교적 감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 <막달레나 시스터즈>라는 영화도 있다. 1960년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녀원의 일상. 거기 수용되는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위험한’ 여자들. 강간을 당한 뒤 아버지의 고발로, 얼굴이 예뻐서 남자들을 유혹할 위험이 크다는 이유로, 혹은 아기를 뺏기고 쫓겨난 미혼모 등이다. 수녀원부설 세탁소에서의 노동착취와 성희롱 - 왜 이런 것은 인종차별이 아닌가. 러시아의 수용소군도를,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애석해하고 비판하는 세력들은 뭘 했나?


막달레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찾는 강박관념은 어떤 욕망보다도 강했다. 나는 아메바의 세포분열과도 같이 거기서 파생된 단어들까지를 한없이 쫒아가는 중병에 걸렸다. 그것이 몇 년 째, 우연히 그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킨 적이 있다. 들켰다기보다는 의아심을 샀다. “너 갑자기 교회 다니기로 한 거야?” 그 다음해인가 『다빈치 코드』가 번역되었을 때는 일도 없이 『다빈치 코드의 진실』까지 사전편과 해설편 모두를 통독했다. 이상한 안도감으로 정신이 없던 몇 달, 친구는 또 걱정했다. “너 이제 반교회파야 뭐야?”


그 뒤로는 내가 말을 더 아낀다. 아직 누구도 모르는 자료들도 많다. 최근엔 프리드리히 헤벨이란 극작가의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작품을 찾아냈다. 표면적 도덕률 앞에서 파멸하는 인간들. 신부의 지참금에 대한 탐욕과 부도덕하다는 평가를 염려하여 약혼관계를 지속시키고 있는 약혼자, 그의 아이를 잉태하고서 유년시절의 연인을 사랑하는 클라라 - 옛 연인은 그녀에게 청혼하지만, 임신사실을 알고는 뒷걸음친다. “그것에 관한한 어떤 남자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남자의 변명이 당시에 유행어였다니, 남자들의 고전임에랴!


의문점들이 꼬리를 물었다. 제목은 막달레나라 하고서 왜 막달레나가 나오지도 않는가? 작가의 전기라도 훔쳐보아야 했다. 1818년 생 작가는 스물두 살에 함부르크에 나와서 곧 8년 연상의 후원자이자 연인이 된 엘리제 렌징을 만났지만, 빈에 머무는 동안 연극배우 크리스티아네 엥하우스와 결혼했다. 아내가 데리고 온 아들은 엘리제가 양육했다. 게서 18년을 자란 아들은 엘리제가 죽자 칠레로 이민 갔고, 28년 뒤 친모를 만나고자 귀국 길에 빈의 중앙역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니, 진정 친모자간의 연은 없었던 것! - 아니 이런 것을 찾고자 한 건 아니다. 기막힌 인생들에 매료되어 헛것에 심취할 뿐이다.


물론 이런 특별한 자료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폴더에 모아두었다. 서툰 영어와 더 서툰 독일어 사이트에서 뒤져내서 몇날 며칠에 한 단락 씩 읽어 모은 정보다. 엉뚱한 제목의 유래는 겨우 찾았다. 원래는 주인공을 따라 “클라라”라고 명명될 예정이었는데, 독자들의 관심을 끌려는 출판사의 희망에 따라 성서의 문제적 인물을 가리키게 되었단다. 출판사들의 상업성, 그것은 서적출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로구나. 글쟁이도 아니면서 괜히 허탈하다.


*


“부우부우 부우우우.” 휴대폰이 돌다 돌면서 이쪽으로 흐른다. 폰을 집어 들며 고개를 드니 느릿한 햇살이 밀려든다. “아직도 집이냐고? 그래, 간다니까. 아니, 뭘 좀 하던걸 마저. 그래 알았어.”


일단 컴퓨터를 닫고 미궁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언젠가는 이 폴더를 아예 벗어나야 하리라. 서둘러 머리를 빗으며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왜소한, 마른 장작개비 어깨가 눈에 들어온다. 교인도 아니다. 정염과 신성을 공유한 막달레나 증후군? 말도 아니다. 나는 그냥 죄인이다. 비뚠 결벽증으로 아들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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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6. 12. 3. 20:43

 

내적 자유

                                                                                    『 만남』2006 (이화에세이)

 

 

 

“자유로” -

 이것이 올해의 에세이 주제로 추천된 단어이다. 그 동안의 특정 주제 “모교” 또는 “어머니” 등에 비해, 자유로운 주제에 대해서 첫 순간 자유를 느낀다. 자유는 사전적인 의미로,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떤 상태를 말한다. 그것이 피상적으로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나 자유인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권을 누리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자유선거도 하고, 자유언론을 누린다. 자유교육을 받았고, 자유연애를 통한 자유결혼에 이르렀으니 사적으로도 자유로워 마땅하다. 나는 내적 자유에 따라 글을 시작하면 된다.


 

그럼 나의 내적인 자유 지수는 어떠한가. ‘정신이나 마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말하자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다. 예컨대 국공립학교의 교원은 학문연구와 강의에서 원칙적으로 자유롭다. 정치범 혹은 파렴치범이 아닌 다음에야 퇴출될 일이 없으니까. 사적으로도 느긋한 가족 구성원들 덕택에 자유를 제한당할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무엇인가가 나를 옥죈다. 조금 더 많이 연구하고, 조금 더 잘 가르치고, 조금 더 신망을 얻고, 조금 더 사랑받기 위해서 부단히 내 자유를 감춘다. 쉬고 싶은, 잠자리에 들고 싶은 유혹마저 뿌리치면서 책상에 앉아 있게 되지만, 그것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누가 꼭 그만큼을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탈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일탈을 꿈꾸지만, 꿈은 늘 추상적인 안개에 다름 아니다. 인간관계의 역할강제에서 거의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것 또한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다. 자유의 대단한 능력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 목욕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의 목욕 준비에 빠진 것이 많기도 하고, 또 이메일만 보고 가려다가 혹시나 학내문서까지 체크를 하려니 여러 번 들락날락 하다가 정말 집을 나선다. 모퉁이를 돌면 큰길이다. 벌써 골목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친다. 그때 손 안에 진동이 온다. 마지막 순간에 집어 들고 나오느라 전화기가 아직 손 안에 있었나 보다. 아차, 어제 이맘때 출근길에 받았던, 같은 이의 전화다. 두어 번 만난 소설가로, 누군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물었는데,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저장된 때문에 말해주기가 불가능했었다. 저녁에 전화해 주기로 했었는데…….

“아 네에, 안녕하세요. 저 오늘은 마침 집입니다.”

거짓말이 술술 나오다니 스스로 놀란다. 순전히 답전화를 하지 못했던 미안함 때문이다.

“저 지금 컴퓨터를 켜놓지 않아서요, 제가 지금 열어 보고 곧 전화 드릴게요.”

이 말은 참말이다. 거짓말에 근거한 참말.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은 어미의 발걸음으로 집안으로 쫒아 들어가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는다. 최근 들어 작동이 늦어진 컴퓨터가 안타깝다. 저쪽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으레 전화 담당은 나지만, 마음이 급한 김에 그냥 있어 본다. 남편의 목소리가 받는다. 이쪽에서는 누님에게 느린 위로의 변이다. 누님에게 단 하나 혈육이 미국에서 다니러 왔다가 다시 떠난 하루 이틀째 시간이었다. 이야기 끝에 나를 찾으시나 보다.

“집사람? 목욕을 가는가 싶던데요…….”

나로서는 그냥 숨죽이고 이 급한 일을 해결해야 하는 순간이다. 거실 전화에 신경을 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 바보는 손을 번쩍 들고 거실로 나간다.

“저 여기 있어요, 아직 안 갔어요.”

무슨 자랑인가.

“아니 여태 안 나갔소?”

그러고서 달려가 전화를 받으니, 딸이 미국 제자리에 도착할 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났는데 소식이 없으니, 그쪽에 전화를 해보라는 당부이시다.

“제 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으니, 본원에다 전화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꼬부랑말을 알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자네가 좀…….”

“예, 예, 그런데 제가 지금 급히 하던 일이 있으니 잠시 후 다시 전화 드릴게요.”

사실 본원의 전화번호를 내가 알고 있을 리 없으니까. 여차여차해서 도착시간이 정확하게 언제쯤인가도 미리 알고서 전화를 해야 하니.

그러고서 서재로 달려와 컴퓨터에서 전화와 이메일주소를 찾아서 답전화를 한다. 내 급한 사정과 팔순 노인네의 더 급한 사정을 알 리 없는 그녀에게, 가능하면 바쁜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 축하 말까지를 잊지 않는다. 작가가 책을 내는 일을 산고에 비하면 산모에게 모독이 될까? 어쨌거나 축하를 받아 마땅한 그녀였으니까.

그러고서 다시 누님에게서 미국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뇌의 코드를 얼른 바꾸고 혀를 꼬부려서 여전히 부자연스런 통화를 시도한다. “프롬 코리어”라는 키워드에 금방 느리고 똑똑해지는 친절한 상대 덕에, 누님의 외동딸이 “아직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지금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상황을 듣고 전해드릴 수 있게 되기까지. 숨을 적게 쉬면서 서둘렀지만, 목욕바구니를 들고 회항을 한 시점에서부터 쉬이 2,30분이 지나갔다.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맞던 이마에 어느새 미세한 땀이 배어나 있다. 이 땀만 아니라면, 그냥 바구니를 풀고 싶다. 다시 일어서서 대문을 나가거나 아니면 주저앉거나, 이 작은 망설임에 갑자기 자유의지가 멍해진다. 어느 쪽을 내가 원하는가.


살아간다는 것은 크고 작은 갈림길의 순간순간의 합계이다. 가도 안 가도 좋을 목욕이었으니 가도 안 가도 괜찮지만, 가다가 핸드폰에 돌아온 일, 와서도 그냥 있으면 없는 줄 알 것을 있다고 설쳐서 기어코 집 전화를 받은 일, 그런 순간의 선택이 하루아침을 숨차게 만들었다. 길에 서서 집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집으로 내달려야 했고, 그 3,4분의 속도를 낸 것만으로 내 심장은 한참을 쉬기를 주장한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은 것 ― 그 이후로는 선택의 연속이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에 자유의지가 작용한다고 믿는다. 필요한 일도 하지만 괜스런 일도 하고, 잘한 선택도 있지만 후회스런 경우도 많다.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면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더구나 후회스런 경우들은 꼭 기억에 남아서 다음의 선택들을 무겁게 하고, 그 때문에 또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정적인 선택을 하게 한다. 하지 않아야 했던, 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하지 않았던, 했어야 했던 어떤 일들이 가슴을 조인다.

그날 아침의 혼란스럽지만 나름대로 친절한 일들은 어쩌면 과잉이었다. 가던 길을 돌아와서까지 전화번호를 그 시간에 꼭 알려주어야 할 만큼 급박한 이유는 없었고, 시누의의 전화를 꼭 그 순간 자청해서 받을 일도 아니었다. 누님의 외동딸은 한 시간 남짓 지나 도착했다는 전화가 온 모양이다. 그럴 걸,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며, 꼭 해야 할 일을 하는 줄로 알고 산다. 그러니까 그 과잉은 옛날에 했어야 했던, 그러나 하지 않았던 어떤 일에 대한 평생의 보상 심리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리라.


과거의 시간들이 기억으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현재의 시간에 자유의 공간이 줄어든다. 미래의 시간이 기대로서 현재에 존재하는 한, 그 또한 자유의 공간을 줄인다. 과거 때문에도 미래 때문에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 존재가 여기에 있다. 나의 내적 자유여 ― 자판 위를 열에 들떠 떠도는 열 손가락들은 한 조각 자유를 토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이름 석자의 피복 속에서 자유를 꾸며대고 있을까?

그렇다고 자유의지대로 되는 일도 썩 없다. 특히 창작의 경우, 그 노력과 고통만큼의 결과는 미지수다. 사람이 예술과 학문에서 완전한 독창적인 자유로 창작을 할 수는 없다던 에.테.아. 호프만이 느닷없이 떠오른다. “영감이란, 그 영감 속에서만이 창작이 가능한 법인데,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보다 높은 원칙의 영향”이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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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