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2004. 12. 1. 21:49

하인리히 뵐: 1967년 뷔히너문학상 수상자로서, 수상연설집
문학은 아직도 고혹한  피의 작업(뷔히너학회편 2004)에 실린 것.

 

                        뷔히너의 현재성


저의 감사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만, 저의 연설은 고언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이 상이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명칭을 지녔기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언에서 생겨날 것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즉 앞서 간 선배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쉴 수 있을 중심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가장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저 소란스런 동시대인으로서의 감정이 주는 가장자리요, 바로 그 점이 그의 시대의 동지 게오르크 뷔히너를 이렇게 현존하게 해줍니다.

뷔히너의 생과 작품을 파악하기는 간단해 보입니다. 그의 생은 너무도 짧았고, 그의 작품은 단편적이자 독창적이며, 매끄럽게 주머니 속에 들어갈 만 한, 단 한권 분량입니다. 그런 사실은 숭배적인 단순화를 낳는데, 시적 통절함을 실은 비문에 어울릴 이상적인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완성되고, 일찍이 사망한, 이별, 결말, 영면. 그렇지만 뷔히너의 생과 작품은 이 영면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땅 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아름답고 궁극적인 광고문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뷔히너가 불러일으키는 소란은 놀라우리만큼 현재성을 지녔고, 여기 이 강당에 현존합니다. 다섯 세대를 건너뛰어서 그 소란은 우리에게 다가들며 우리를 덮칩니다. 죽음의 예감으로 명명된, 이 거친 아름다움과, 우리 문학사에 정말 드물었던 어둠의 열정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이러한 움켜 쥠,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의 확신, 그가 붙잡은 모든 대상에서 보는 이 인간적인 물질의 정의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을 비로소 예술로 만드는, 그렇지만 인위적이어서는 아니 되는, 저 미숙함의 숨결, 또한 조바심의 숨결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모순 속에 그 정의가 있지요, 그러니까 결코 인위적 조바심, 인위적 미숙함이 아니라, 그냥 현존합니다. 마치 『레옹세와 레나』에서 레나가 설명하는 그런 사람들 같습니다. “나는 단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하고 구제불능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예술을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너무 생물학적이며, 아마추어리즘의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뷔히너는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저는 그가 두개골 신경에 대한 강의에서 생명체에 대한 생물학도로서가 아니라 표본화된 물질에 대한 해부학자로서 발언한 그 부분에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 개인의 육체적 현존재 전체는 철학적 방식으로 보자면 (그는 목적론적 방식과는 반대로 이 방식을 제시했습니다만), 고유 개체의 보존을 위해 내세워진 게 아니라, 태초의 법, 그러니까 아주 단순한 균열과 선들에 의해 최고의 아주 순수한 형태들이 야기되는 그런 아름다움의 법을 고지하는 것이다. 모든 것, 형식과 소재는, 그 방식으로 보자면 이 법에 메어있다.” 뷔히너의 작품에 대한 모토로 내세울 수 있을 이 발언에서 그는 자연과학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현재합니다. 제가 또 하나 다만 구전되어 온 사회적 성격의 발언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날마다 스프와 야채와 고기 먹을 게 있다면, 훌륭한 사람 되기는 누어서 식은 죽 먹기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사실주의의 조야한 유형을 독일 드라마 상 최초이자 거의 동시에 마지막 노동자라 할 보이첵의 입으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천당에 가게 되면 천둥치는 일을 도와야 할 거라” ― 그러면 저는 한 사람에게서, 한 입에서, 두 사람의 시인을, 두 독일인을 보게 됩니다, 한 세기 후에 나타나 서로를 배제하는 것으로 보였던 벤과 브레히트, 두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뷔히너 안에서 현재합니다.

뷔히너의 정치적 미학적 현재성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뷔히너의 친구이자 대학생이었던 미니게로데가 겪은 지하 감옥에서의 고문을1) 공공 거리에서 공직자들에 의해 자행된 두 건의 살인, 저 베를린 대학생 오네조르크와2) 연방군 병사 코르스텐의 사살과 관련짓자면 말입니다. 둘 다 국가 권력으로 인한 공개 살인이라는 몸서리치는 경우입니다. 또는 「헤센 급전」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거나, 아예 독일어로 팸플릿으로 만들어서 새로이 주석을 붙여서 보급하는 일 말입니다. 물론 박지 인쇄의 고전판 포장을 해선 안 되지요, 그랬다간 게르만 학술원 취급 같은 조짐이 일어나, 거기서 정치적 가시바늘을 뽑아버릴 테니까요. 귀족과 오두막에 대한 풍자는 이 신판에서 변경할 필요가 없겠고, 다만 해석을 달면 될 것입니다. 대연정은 충분히 독재적이요, 더는 작은 투표함을 두려워할 게 없지요.3) 그것으로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면 그래도 우리의 정치적 문맹을 표현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보는 눈을 가진 이에게는 히죽거리는 합의와 정말 히죽거리는 독재성이 충분히 보이지요, 두 개의 권력에 익숙해진 왜소한 남자의 새로운 봉건주의가 보입니다. 그는 거의 전권적인 대 정당의 거대한 관료 기구에서 안전을 느끼고 있는데, 그 안전이란 게 어느 여자 가신이 어떤 궁정에서 느낄 수 있을 그런 것보다 더한 정도겠지요. 자신의 양심을 정당에 바친 자들에게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에서 강력한 일절을 인용해 드립니다. “양심이란 원숭이가 그 앞에 놓고 고민하는 거울이다. 각자는 할 수 있을 만큼 씻고 닦으며, 제 고유의 방식으로 제 재미를 찾아 나서는 것. 그건 서로 드잡이해서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팸플릿에도 어떤 장례식의4) 묘사가 빠져서는 아니 될 겁니다. 저 마비적인 행사 말인데요, 그것은 반년 전 일로서, 지난 한 시대를 종결하고 새 시대를 위한 표식이 되었고, 거의 일주일 내내 TV 우산을 장악했었지 않습니까. 국내외, 유럽, 그리고 해외 입법자들이며 정부의 수반들의 입성 행진, 제국시대의 십자훈장 수상자들이며 추기경들 사이에 유행에 걸맞게 차려입은 입법자들이 부대 부대를 이루어 입성했습니다. 그것은 현대적이었지요, 그런데 그것은 ― 어떻든 저에게는 ― 몸서리치게도 전혀 현재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장례의식을 이론의 여지없이 치러내는 이런 마비적인 당연시에 더해, 표정들, 의상들, 자동차들 하며. 현대적 정치가들, 현대적 주교님들, 현대적 정치인들, 그리고 현대적 군대, 그들은 쾰른 대성당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스스로 민주주의라 하는 이 사회에서도 두 계급은 의상의 강요에 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민주주의를 창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해서 입증할 수 있을 만큼 비우호적이었던 두 계급, 곧 성직자와 군대 말입니다. 이 두 계급은 항상 현대적으로, 항상 사회적으로 유능하게 의상을 갖춥니다.

이제 뷔히너를 인용할 때인데요, 「공산당 선언」보다 13년 전에 씌어진 「헤센 급전」에서 입니다. “법은 자신들의 졸렬한 작품으로 지배를 보장하려는 고상한 자들과  학자들이라는 하찮은 계급의 소유물이다. 이 정의란 여러분을 규칙 속에 잡아두어 더 편안히 착취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저들은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법,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원칙,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파악할 수 없는 판결들에 따라서 말한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와 또 독일인들에게 타격을 입은 여타 유럽 국가의 대표자들도, 유행적 변형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제국 십자훈장을 두르다니, 비록 현대화한, 꾸며 장식한, 민주화한, 게서 갈고리를 빼낸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십자는 어쨌거나 십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는 ― 예술에서나 사회에서나 ― 현대적입니다. 어쩌면 보다 나을 유행적 변형은, ‘사람들이 여전히 십자가를 하고 다닌다.’라고 할런지요. 제 민족들의 고행을 위해 십자가는 표창으로서 수여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부조리성에서 현대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이 몇날 며칠을 천연하며 공포심마저 자아내는 행사를 현대적으로 만들겠으며, 또 그리 해낼 수 있겠습니까만, 그러면서도 몸서리치게도 현존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로소 영상매체의 우산위에서 엄청난 제곱을 함으로써 그 행사는 능란한 방식의 서양식 픽션, 곧 연극과 편집에서, 현실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의 해설이 아니라, 다만 다시금 그의 신부에게 편지를 쓴 스무 살 뷔히너에게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나는 역사의 소름끼치는 숙명론에 절망감을 느낀다오. 인간본성에서 경악스러운 유사성을, 인간의 제 관계에는 피할 수 없는 폭력을, 그것도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개인은 파도 위의 물거품이요, 위대한 자는 다만 우연일 뿐, 천재의 지배권은 인형극이요, 철칙에 거슬리는 우스꽝스런 고투라, 그것을 인식함이 최선의 것이요, 그것을 극복하기는 불가능입니다. 역사의 사열식용 폐마들과 모퉁이에 선 자들 앞에 굽혀서 절을 한다는 건, 저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저는 이 새로운 ‘헤센 급전’에 다음 사실의 면밀한 분석을 넣고자 합니다. 곧 이 나라에서 한 요상한 외교문서에 근거하여 국가를 방문하는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번거롭고 관을 쓴 우두머리들과 압도적인 매력을 지닌 영주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영접 받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만일 새로운 의식이 자라는 대학생들이 이 외교문서에 대항해서 소란을 통해, 그리고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 거역한다면, 누가 게서 놀라겠습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식인걸요. 이 요상한 외교문서가 경찰의 폭력을 통해 그들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그런 예절에 그들이 어떻게 의무감을 갖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일들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문서 문제들로 좌절당하고 맙니다. 초대장에 쓰인 간단한 기재, 예컨대 “짙은 색 양복” 또는 “외출용 정장”이란 기재만으로도 꽤나 육중한 압력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짙은 색인지 누가 저에게 말해줍니까? 외출 시에는 제가 무엇을 입나요? “흡연” 같은 육중한 경고문들은 아마 아이러니의 가치도 없겠지요. 누가 우리 위에서 규정하며, 누가 우리를 처리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불문율을 부여합니까? 청년의 항변이 복장과 두발에도 표현되는 것을 누가 이상하게 여긴답니까? 책임이 위임되어야 하고 다른 선택을 허용하지 않을 투표함으로 충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소란과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와 또 다르게, 복장과 두발로 표현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자 스무 살의 뷔히너가 가족에게 쓴 편지 구절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뭔가 도움이 되어야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주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승인했던 모든 것은 필연을 통해 강요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폭력 사용이 비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폭력의 상태에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뷔히너의 미학적 현재성을 그의 정치적 현재성과 분리할 결심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역사에 의해서 놓치게 된 두 독일인의 만남을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뷔히너와 그보다 불과 몇 년 젊은 마르크스의 만남 말입니다. 「헤센 급전」의 힘에 넘치고 그렇게나 민속적이며 물질의 정의에 넘치는 언어는 의심할 여지없이 “공산당선언”만큼이나 영향력 넘치는 정치적 문서입니다.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뷔히너의 꿈같은 확신은 「급전」에서부터 중단 없이 바로 그의 극작품들, 산문, 편지들에 이입됩니다. 시인이자 자연과학자요 동시에 정치적 작가였던 뷔히너가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꿈같은 확신에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많은 오류와 우회를 문학에 관한 한 면할 수 있을 기회, 그리고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작가들의 고뇌를 탕감할 기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실제 역사에서는 놓쳐버린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사후에 성사시키게 될 수 있을지, 그러니까 오늘 날 실행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주의적 미학을, 어쨌거나 마르크스의 동시대인이었고 결코 그의 나쁜 동지가 아니었을 뷔히너의 물질의 정의와 대질시키는 것 말입니다. 뷔히너의 작품과 또한 그가 작품에 대하 언급한 모든 글에는 몰인정도 그 반대도 들어있지 않고, 오직 물질의 정의에 대한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당통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사실 경악했던 가족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맙소사 젊은 여자들의 독서를 위해 창작된 것이 아니어요, 그리고 만일 저의 드라마가 그런 데에 적합하지 않다 해도 불쾌히 여길 것도 없답니다. 저는 당통이란 사람과 그 혁명의 도당들에게서 덕행의 영웅들을 만들 수는 없어요……. 그가 그러한 소재를 선택한 것을 두고 날 비난하려면 하래지요. 그런 항변은 벌써 반박되었어요. 그 항변이 타당하다 하려면, 문학작품 중 정말 위대한 대작들이 비난되어야 하겠지요. 작가는 도덕교사가 아닙니다. 작가는 인물들을 창안하고 창조하지요. 작가는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역사를 학습해야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 속에는 너무도 많은 부도덕한 일들이 서술되고 있으니까요. 또 눈을 아예 동여매고 골목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랬다가는 추잡한 짓거리들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신에게 비명을 질러야 할 것이에요, 세상엔 너무도 많은 방탕한 짓거리들이 일어나니까요. 그런데요, 만일 누가 저에게 작가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서는 안 되고 어떠해야 마땅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면, 전 이렇게 대답하겠어요, 나는 세상을 신보다 더 좋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신은 이 세상을 틀림없이 어떠해야 마땅한가 그대로 만드셨을 것이라고.”

신사 숙녀 여러분, 게오르크 뷔히너의 이름은 제게 저의 감사말씀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의무를 지워줍니다. 동시대 동지의 소란한 변두리에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확신은 부서지기 쉽고, 자기 확신이란 불가능한 그런 입장, 비판적인 것이 격분으로 오해되어 울릴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말하라고 합니다. 마치 비판도 자신을 거기에 함께 관련시키는 제안을 포함하지 않은 듯이 말입니다. 뷔히너의 생애와 작품에는 몇몇 현재성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의 편지 왕래 특히 구츠코와의 편지 왕래에서 묘사되었던 망명의 문제, 그리고 「보이첵」에서 표현되듯이 그의 다른 작품 어느 것만 못하지 않은 뷔히너의 의사로서의 현재성 말입니다.

제가 다만 암시적으로나마 뷔히너 또는 당통이라면, 이러한 연설을 생략해도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라끄르와는 당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름 그 자체로다. 그는 나서서 연설을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단두대에 서려는구먼.” 그리고 빌헬름 뷔히너5)에게 쓴 편지에서 뷔히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내 자신 매우 만족하고 있다, 장마 비나 북서풍이 불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럴 때면 난 사실 저녁에 잠자리 들기에 앞서 발에 양말 한 쪽이 걸려있으면 그 순간 방문에 목을 매달고 싶어 하는 그런 부류에 속하게 되는구나, 다른 한 쪽마저 벗을 일이 너무 너무 피곤하니까 말이다.” 그로써 뷔히너가 공공연히 그렇게 지냈던 게으름의 장을 넘어서 그의 유머라는 거대한 장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머는 그토록 난폭하고 또 그토록 부드러울 수 있으며, 그가 그것을 잃었을 때조차 틀림없이 여전히 현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취리히에서 엘사스의 친구 뵈켈에게서 편지를 받았던 경우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 편지 중 일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에서 나는 매우 잘 지낸다네, 자네가 생각하는 절반만큼도 나쁘지는 않다는 말일세…….”

(하인리히 뵐: 번역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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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두막에 평화를! 궁정에는 전쟁을!”이라는 유명한 대목은 1834년 7월자 『헤센 급전. 최초의 전령』에 인쇄되었다. 이를 배포하다가 붙잡힌 대학생 미니게로데에 관한 기록이 1834년 10월 15일자 카셀의 내무부 문서에 나온다. http://www.digitales-archiv.net 2004-4-15

2) 베노 오네조르크는 이란의 팔레비국왕 방문 반대 시위 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1967.6.2.)

3) 비상사태법 추진 반대투쟁에서 서독 국민들에게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을 선동하고 나선 것은 예컨대 마르틴 니묄러목사를 들 수 있다.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의 이유는 당시 현실화된 기민·기사연과 사민당 간의 대연정(大聯政)은 “히틀러가 무색할 정도”의 독재체제로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4) 1967년 4월에 있었던 아데나워 수상의 장례를 말한다.

5) 뷔히너의 아우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11. 15. 21:34

 

라인


                                                                『그대 안의 풍경』2004 (이화에세이)        

 

 

아직도 내겐 아파트 입구 편지함을 둘러보는 버릇이 남아있다. 그러나 건져오는 것은 고지서나 광고성 안내장이기가 쉽다. 하긴 편지가 기이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주고받는 명함에도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로만 표기된 것이 흔하다. 세상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추월한 지 오래다.


이메일의 편리함은 말해 무엇 하리. 우선 글을 쓰다가 지우거나 구겨버리곤 하던 편지지와 달리, 매번 글자를 고쳐놓는 일이 쉽다. 마음이 변하면 강도도 조절하고 뉘앙스 다른 어휘를 고르면 된다. 상대가 읽었을까 마음 조릴 필요도 없는 것이, “읽음 확인 메일”을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로, 빠르고 정확한 모든 장점 위에, 가장 중요한 배달사고가 없다. 간직하고 싶다면 보관함에, 그것도 안심이 안 된다면, <내문서>에 옮겨서 다시 <A 플라피>로 옮겨놓으면 거의 영구하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엽서 하나 손수 써 보내는 일도 드물다. 하물며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드물다. 손으로 줄은 친 듯한 편지지에 쓴 편지 하나와 그보다 앞서 그냥 종이에 세로로 쓴 편지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나는 기념사진 한 장과 예스런 학자의 고결함이 베인, 하나는 인간미가 뚝뚝 묻어나는 선배의 글이었다. 두 분의 편지글에 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틀렸다. 실은 두 분께 전화로 답을 해야 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화의 편리성을 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전화가 어렵다.


“안녕하셔요, 저 아무갭니다. 선생님, 사진까지 일부러 보내주시고. 그런데 지난 번 뵈었을 때…….”


그러면 저쪽에서 말씀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 먼 데를 일부러 올라와서 고마워요. 거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잘 내려갔는지 걱정되었고, 그리고 부군도 잘 계시는지…….”


그러면 또 언제 무슨 말로 대답을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팥으로 메주를 쑵니다…… 라고 했더라도, 아 그래! 하고 믿어주셨던 은사님을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몇 번이나 뵈었던가. 겨우 산수(傘壽)연에 다녀온 것을 칭찬하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이고, 대학생활 전체가 테트리스 조각처럼 한 순간에 내려와 쌓이는 바람에 꼭 드려야 할 말을 놓치고 만다.


선배님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초록빛 바다색 아니면 비취색 하늘거리는 가운데 단아한 얼굴모습에 압도당하던 느낌을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혹시 모를 내 작은 잘못에, 음색만으로는 조금 노여워하시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주시려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순간 어떤 반응도 멈춰 버리는 것이 순발력 없는 내 본바닥이다.


전화보다는 이메일을, 이메일보다는 편지를 선호하는 내 마음 바닥에는 서툰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내가 어느 결에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 때의 내 자신이 문제학생 사례연구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인데, 중 2때 나는 어떤 선생님께 집중적으로 불려가곤 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결석이 좀 잦은 것을 제외하고는,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공납금도 아무 문제없던 내가 왜 문제학생이었을까? 편모, 편부도 아닌, 계모, 의부도 아닌, 정상적인 대가족의 맏이가 무슨 문제를 가졌다고 비쳤을까?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지배성, 도덕성, 사회성 등 무슨 인성들을 수치로 조사하면서, 모든 성질에서 25~75% 안에 들어가기를 중용의 인간이라고 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회성 불량으로, 뭔가 15% 미만임을 추궁 당했던 기억이 늦게 서야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사회성 문제아였구나!


그러니까 우선 부모님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달한 어머니를 이해하기엔 어렸고, 나는 소설 속의 전통적 어머니상을 그렸다. 어머니에겐 모든 어머니들의 착각처럼 자식들은 최고가 될 소질이 보였을 것이고, 피아노와 미술은 기본으로, 남자애들은 웅변술까지 과외를 시켰으니, 그때 원조 치맛바람은 우리를 수소풍선처럼 띄워 올렸다. 아마 중학교의 자유는 어머니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 금지된 장난을 골라서, 부러 내리막길을 달렸던 시절이다. 실습지 토끼장의 토끼를 풀밭에 놓아주긴 쉬웠지만, 오디를 따먹으려면 날쌘 친구가 나섰다. 선생님들 눈밖에 난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기는 쉬었다. 토끼들이 토끼장에서 사라지면 범인(?)들은 토끼를 다 몰아넣기 전까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렸다. 허리까지 자란 풀밭에서 털썩 누워버리면 하늘은 풀밭과 맞닿게 내려앉고, 우리는 하늘 속에 누었다. 주머니를 함께 털어서 싸구려 꽈배기를 사먹었다. 그 순간에는 네 것 내 것 없는 완전한 공동체가 실현되었다. 불량꽈배기의 밀가루와 기름은 양분인 것이 틀림없으니, 나는 자꾸 쓰러지는 약골로 자랐지만 키가 클 대로 컸다. 가끔은 상표도 없는 아이스케이크도, 어머니가 양잿물이라고 했던 삼각 비닐주머니 속의 색소와 사카린으로 만든 물도 먹었다. 어머니의 금기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없이 금기를 내놓으셨다. 금기에 대항하느라고, 책가위를 누구보다 가장 예쁘고 깔끔하게 싸주신, 연필 다섯 자루를 저녁마다 깎아서 키대로 나란히 필통에 넣어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책과 필통은 사랑스러웠지만, 학교에는 어머니를 대신할 여선생님들이 많았다. 요구와 간섭은 어머니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담을 쌓았고, 사회성이 전현 없는 문제아라고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니 그건 변명이다. 지금도 함께 생활하는 직장동아리에 80가까운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연구생활을 하는데, 그중 얼굴과 이름을 다 알 수 있는 경우는 반이 될까 말까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데, 간섭 때문에 사람을 기피한다는 변명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것 - 그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공부를 해도 해도 그것은 어렵고,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그것은 어렵다고. 마주쳐서는 말이 안 떨어지면 목례라도 무슨 몸짓이라도 하는데,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은 전화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에다 대고, 처음 무슨 단어로 말문을 열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고.


그래서 편지가 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메일이건 종이편지이건. 그 중에서도 쉽게 PC에 저장되어 무생물 같아지는 이메일보다는, 여간 간직하지 않고서는 곧 사라지는 종이편지가 부담이 없어 좋다. 문제는 여전히 덜떨어진 사회성이다. 더구나 이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아본 후에는, 아마 누구도 쉽게 편지지를 펼치지 못하리라. 아니 어떤 단어로도 그 시작을 찾지 못하리라. 나는 그저 저물어가는 오프라인 시대의 추억에 잠긴다.

 

 

튼튼한 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튼튼한 정신이 좋습니다.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선

당신의 젊은 정신이 좋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정신의 튼튼함이 당신의 육체를 병들게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몸 생각해서 정신을 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웃는 부드러운 입매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엄격한 입매가 좋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굳은 입매가 싫다고,

당신을 멀리한다면

나는 참 기뻐할 겁니다.

그만큼 당신은 제 것이 될 테니까요.


                                                                       200x년 1월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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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04. 11. 4. 21:41

, 상상력의 힘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2004. 11.4.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

왜 어른들은 자라는 청소년이 이야기에 빠지는 것을 저어했을까?

아침형 인간이 떠오르는 건전한 세계 속에서

   - 밤새 책을 쓰거나 읽는 비생산적인 인간의 무용성

   - 순수문화 영역의 자생력 상실


궁핍의 시대의 시인들

“어찌하여 시인은 궁핍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 wozu Dichter in dürftiger Zeit? - 횔덜린의 「빵과 포도주」7연

  [직역] 궁핍의 시대에 시인은 무슨 목적/필요가 있는가?

 

화평이 깨어지고 정신이 퇴락하는 시대를 궁핍한 시대라 했고, 그때 시인은 “영웅들이 강심장으로

득세하는 이 세상에서 시인은 차라리 잠을 자고 싶다는, 어떤 행동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시인의 곤혹스러운 입장, 다만 성스러운 밤을 떠돌았던 주신 디오니소스의 성스러운 사제들일 것”

이라고 정의. 횔덜린은 사회 변화와 경제 발전에 따른 전통 가치의 와해를 퇴행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회의 도덕적 가치의 재건이 시급하다고 보았다.[복고적]

횔덜린이 추구한 근원적 의지는 생과 자연의 합일이며 영혼의 순수함을 구하는 데 있고, 기독교의

유일신과 그리스의 다신론을 총괄하는 신의 세계이다. 


“이 끝없이 풍요로울 것 같은 세상에서 시인은 얼마나 더 궁핍해야 하는가?”

삶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바로 궁핍.

인간에게서 조화의 감정은 지속이 아니다. 부단히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1904년 - 100년 전에 비해 우리는 분명 잘 살고 있다.

가히 전무후무한 풍요의 시대, 빈곤으로부터 상대적인 해방, 진정으로 잘 살고 있는가?

얼핏 보아서 개인과 사회의 욕망은 오래 전에 비인문적 방향으로 줄달음치고 있는 것 같다.

무한의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로서의 인간은 한계 앞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하고

-- 범세계적으로 인문주의 정신의 부활을 논하는 것. 인간의 자기치유 능력?


왜 쓰는가?

조정래 - 자본주의의 자기 최면 속, 인생은 무엇인가? 문학적으로 가치있는 삶을 쓴다.

          문학성: 감동, 영혼의 떨림. 민족통일에 문학이 기여할 수 있다.

서정인 -  세상은 혼돈 … 캄캄한 미로 벗어나기 위해 쓴다.

“나는 지금도 욕심이 목에까지 꽉 차서 동서남북 천지현황을 모른다. 이 세상은 나에게 혼돈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결코 그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거기에 분명히 있을 원칙도 질서도

정의도 볼 수 없다. 한 사건과 딴 사건 사이의 관계가 내게는 안 보인다. 틀림없이 별들의

운행처럼 필연일 많은 일들이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이다.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과

같다.”


카프카: 갑충으로 변한 현대인의 자화상.

「단식 광대」(1924): 단식하는 광대에서 예술의 정신성, 비생산성, 인간의 무능력.


괴테 『파우스트』:

인간으로서 모든 한계를 지닌 자, 한계를 의식하지 못하고 “절대적 진리”를 찾아...

“파우스트적 충동” : 다양한 인생을 편력, 체험하면서 자기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 대하려는

 충동. 영원의 여성에 의해 이상의 궁극으로 향상하려는 욕망.
 집필원칙: “모순들을 통합하는 대신 더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겠다.”


독서의 나라 동독

- 괴테에게로 전진 Vorwärts zu Goethe!(J. Becher)

-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에게 진리에 충실하고, 현실의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표현을

  그 혁명적 발전 속에서 하도록 요구, 노동자들의 이념적인 변형을 위한 기여와 이들을

  사회주의의 궤도 속에서 교육해야 하는 과업을 함께.

- 문화연맹 / 국민 Nation 개념, 사회주의적 독일 국민문화 Nationalkultur

- 형식주의 반대운동: Inhalt, Idee, Gedanke 중시

                     데카당스, 세계시민주의, 자연주의, 모더니즘, 형식주의 거부

- SED 인민재판: 모더니즘, 회의주의,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자유주의, 외설 추방


① 패러다임의 변화

- 테마도 아닌 테마 Un-Thema 서방 도주, 자살기도 : Ch. Wolf

- 의미내용, 서술방식에서 무정부주의 요구: F. R. Fries

- 예술의 자율성 요구: G. Kunert

- 시의 실험적 성격을 고집하면서, 신경제체제의 문화정책에서 요구했던 직접적인 사회적

   유용성에 거부하는 자세: V. Braun


*고전주의, 특히 괴테의 상을 반대, 특히 낭만주의자들에게로 방향 선회 →패러다임의 변화

- 신화수용 변화: 아폴론, 아프로디테, 프로메테우스, 헤라클레스

                → 마르시아스와 오르페우스, 다이달로스, 이카루스, 카산드라, 니오베...

- 다른 해석:

『필록테투스』 H. Müller (58년에서 64년 사이에 집필, 77년에야 동독에서 상연됨)

오디세우스를 영웅도 명장도 아닌, 거짓 술수에 능한 마키아벨리 같은 현실정치가로서 그려냄

으로써, 스탈린주의에서 정점을 이룬 공산주의의 실제 역사를 전술과 테러의 역사로, 휴머니즘의

몰락에 대한 암호로

『카산드라 Kassandra』Ch. Wolf (1983)

그리스 문명의 남성적, 전투적, 합목적적 성격 고발.

“카산드라의 운명은 그 후 삼천년간 여성들에게 일어날 것을 미리 마련하고 있다. 즉 여인은

 대상으로 되고 만다는 것... 여성들의 내면적 역사는 자율성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② 상상력/환상을 권좌로!

70년대 문학의 구호: “상상력을 권좌로! Phantasie an die Macht!”

     남성지배, 폭력, 전쟁, 오로지 기술적 합리성에서 나온 공포의 연합에 대항하여,

     생생한 상상력과 비유적 사고의 새로운 결실들이 등장 한 것.


“삶의 무한정 뒤얽힌 평면”(Musil)인 사회의 실제적 조직관계 속으로 들어온 문학 -

유일하게 유용하고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이라고 주장하는 도구적 이성의 독재에 대한 저항.

일차적인, 이미 규정된 현실 →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로 설정

(Adorno)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Bloch): 다른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욕망은 가없다.


가능성감각

“가능성감각이란 마찬가지로 좋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가능성감각, 존재하는 것을 존재

하지 않은 것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하지 않는 것.”  “정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 어떤 결론

에도 도달하지 않는, 샘솟아나고 꽃피어나는 그 무엇으로서 파악하는 것, 그것은 궁극적으로

다른 삶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간다.”(Musil)


전면만을 그린 그림에서 나무 전체를, 아예 푸르름으로만 그려진 화폭에서 숲 전체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을, 무생물이라고 생각하는 바위와 돌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게

하는 것 - 상상력

기록된 숲 - 비문학

 

※ 독일의 (철저)자연주의는 “하나의 막간극 (H. Bahr)

“최초의 현대 modern” 또는 “문학 혁명”

종족, 환경, 계기가 예술작품을 결정한다.(Taine)

3E: 타고난 천성이란 상속된 것, 교육이란 학습된 것, 생활이란 체험된 것(Scherer)

인간 역시 물질적, 육체적인 현상이므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은 생리적으로 이해

      →“신경과민의 낭만주의, 신경의 신비주의에 의해서 자연주의 극복"(Bahr, 1891)

          비일상적인 것, 비밀스러운, 매직, 경이로운 것 등장. 

 

문학이란 실증될 수 없었던 것, 픽션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듯이 구상하는 것. 허구 또는

가구(架構). 픽션은 흔히 산문으로 된 소설·이야기 등. 작가는 대상을 보고 분석하는데, 원칙적

으로는 그 중에서 우연적인 것을 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한다.


한편 문학의 개연성이나 논리성을 강조하는 견해. 철학과 문화 즉 과학과 문학을 구별하여 시의

독자성을 제시했을 때에도, 문학은 진실성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가는 사실을 진실로서 기술

하지만) 시인은 진실처럼 보이게 모방한다. 소설이 사회의 거울이요 시대의 그림이라 하여 대상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이론: 현실과 시대의 반영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말, 소설이 현실의 복사이거나

시대의 기록일 수는 없다.

 

독자 여러분! 소설이란 큰 길을 가면서 주위의 풍경을 비치는 거울이라 볼 수 없을까. 여러분은

거울 속에서 푸른 하늘이라든가 혹은 진흙탕 등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런 거울을 들고

니는 사람들은 여러분으로부터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의 거울은 진흙탕을 비친다.

그래서 여러분은 거울을 비난하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은 차라리 진흙탕이 된 한길을 비난해야,

아니 그보다도 차라리 진흙탕 그래도 내버려둔 도로 감독을 비난해야 마땅하다.  --  스땅달


소설은 진흙탕이라는 사실(fact) 그 자체가 아닌, 인간성의 진실(truth)을 그리는 것이 목적.

리얼리티(실재성)는 실은 논리성이고 논리성으로 하여 전체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작품은 설득

력이 있고, 만들어진 가공의 세계이지만 나름대로 독자적인 실재성을 획득한다.


작품, 상상의 세계

실재성은 작품의 존재가치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그것의 작가가 창조해낸 [그럴싸한, 설득력

있는] 상상의 세계일뿐이다. 상상의 세계, 즉 작가에 의해 해석된 세계에는 그 밑바닥에 욕망(꿈)

이 자리한다. 현실 원칙에 억압받은 내면의 욕망은 창작할 때 작용을 한다. 외부의 현실세계와

내부의 욕망과의 갈등의 폭에 따라서 순응적 혹은 혁명적 세계가 창조된다.

 

소설 속에는 세 개의 욕망이 들끓고 있다. 하나는 소설가의 욕망이다. 소설가의 욕망은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욕망이다. 자기 욕망의 소리에 따라 세계를 자기 식으로 변모시키려고 소설가는

애를 쓴다. 두 번째의 욕망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의 욕망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 역시 소설가의

욕망에 따라, 혹은 그 욕망에 반대하여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하려 한다. 주인공, 아니 인물들의 욕망은 서로 부딪쳐 다채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의 욕망은 소설을 읽는 독자의 욕망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슨 욕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나아가 소설가의 욕망까지를 느낀다.

독자의 무의식적인 욕망은 그 욕망들과 부딪쳐,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을 부인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부인하기도 하고, 때로 소설 속의 인물들에 빠져 그들을 모방하려 하기도

하고, 나아가 소설까지를 모방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던

욕망은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 자기가 세계를 어떻게 변형시키려 하는가를 깨닫게 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그 괴로움은 나도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설 속의 인물들은 왜 즐거워하는가, 그 즐거움에 나도 참여할 수 있는가, 그것들을

따지는 것이 독자가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이다.

그 질문은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이 세계의 현실 원칙은 쾌락 원칙을 어떻게 억누르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도 같다. 그 질문을 통해, 여기 내 욕망이 만든 세계가 있다는 소설가의

존재론(存在論)이, 이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하는 읽는 사람의 윤리학과 겹쳐진다.

소설은 소설가의 욕망의 존재론이 읽는 사람의 욕망의 윤리학과 만나는 자리이다.

모든 예술 중에서, 소설은 가장 재미있게, 내가 사는 세계는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반성케

한다. 일상성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은 채찍과도 같은 역할을 맡아 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

                        - 김현 『분석과 해석.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중에서

                           김현문학전집 제7권, 문학과 지성사, 1993년.

 

 상상력

여기에서 이 가공의 세계, 다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주는 것”.

상상력은 Imagenation 그리스어 Fantasia와 관련. 공상 Fancy에서 유래, 공상이 곧 상상력은

아니다. 예술적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이다.(Coleridge) 일상적인 인식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차원으로 승화된 세계를 창조해 내는 힘. 예술적

독립은 콜리지 등 낭만주의 시인들의 중요한 주장. 이 독립된 세계, 제 2의 세계는 그러니까

상상력이 창조한 세계.


상상력: “의식의 개념과 지각을 매개하는 작용”[사전적]

의식이 대상을 개념적으로 취하는 작용/ 지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 사이 매개 작용(Sartre)

‘비실재물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가까이 끌어당기는 능력 * 가능성감각


칸트: ‘아름다움’,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 아름다운 예술작품은 다양한 표상들을 만들어내도록

상상력을 촉발함으로써 주관으로 하여금 연상법칙들에서 풀려난 자유를 느끼게 한다. 상상력이

자유롭게 만들어낸 표상들, 즉 미적 이념(asthetische Idee)은 특정 개념으로 담아낼 수 없는

풍부함을 지니게 되고, 주관은 그러한 표상들을 통해 “언표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미전개된”

방식으로지만 사유하면서 인식능력의 활기를 얻는다.[판단력비판]


사르트르:- 상상력의 본질은 인간이 세계 속에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려고 함으로써 현실에                           결여되어 있는 부분을 의식에서 보충하려고 하는 노력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 인간이 상상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선험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확장?

“아시아의 별 보아”의 인터뷰:

여가 시간에 “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냉정과 열정 사이』, 『향수』

학교라는 울타리 바깥에도 공부할 것이 정말 많았다고,

소설책과 영화는 학교 이외에서 배우는 것....

학교는 상상력을 죽이는 곳이라고 하는 역설이 가능?


마녀의 이야기

인류가 가진 신화와 모든 문학작품을 통틀어서 최고의 악녀로 각인된 메데이아 이야기 -

Euripides: Medea

Obid: Medea (분실)

Seneca: Medea

Pierre Corneille: Medée  (1634~5)

Franz Grillparzer: Medea (1821)

Hans Henny Jahnn: Medea (1926, 1959)

Jean Anouilh: Médée (1821)

Christa Wolf: Medea: Stimmen (1996)

Heiner Müller: Verkommenes Ufer. Medeamaterial. Landschaft mit Argonauten


메데이아 신화:

가을하늘에 반짝이는 별자리, 양자리가 생긴 신화에서부터 시작. 황금 양피를 가진 숫양은

테살리아의 왕자 프릭소스를 흑해변의 코르키스까지 도피시켰고, 프릭소스는 제우스 신전에

양을 바쳤고, 제우스는 양을 기리고자 양자리를 만들었고, 황금양피는 코르키스의 왕에게

선물로. 왕은 황금양피를 신성한 숲 속에서 잠을 모르는 용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을 만큼의

보물이었는데....

테살리아의 이웃 이올코스의 왕 펠리아스는 적통의 이아손이 왕위의 반환을 요구하게 되자,

황금 양피를 찾아오라는 영광스러운 모험을 권유했고, 이 제안에 따라 유명한 아르고호의

용사들이 신화에 등장. 50여명의 대선단의 무용담은 간담을 서늘하게. 코르키스에 당도하여

황금 양피의 반환을 요구하는 이아손에게는 다시 엄청난 시험이. 그러나 마력을 지닌 공주

메데이아 - 우리의 낙랑공주처럼 - 의 도움으로 이아손은 황금양피를 찾아 고향으로.

이 과정에서 메데아의 동생살해라는 악명이 시작된다.

이올코스에서도 비극: 원정 동안 일가족이 모두 죽은 것을 알게 된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

으로 왕에게 복수. 펠리아스가 죽은 뒤 이아손은 아버지의 왕국에서 왕이 되지 못하고

펠리아스의 아들 아카스토스가 왕위를 계승한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코린토스로 망명의 길: 이아손과 크레온 왕의 딸 글라우케와의 결혼이

결정되었을 때 메데이아의 유명한 복수가 시작된다. 그 결혼을 저지시키고자 크레온과

글라우케 모녀를 불태워 죽이고, 이아손에 대한 복수로(?) 둘 사이 태어난 자식들까지 죽인 후,

날개가 달린 용(뱀)이 끄는 수레를 타고 아테네로 도망쳤다는.


에우리피데스: 흔히 민주적 시민 사회라고 알려진 폴리스에서 행해진 사회적 차별, 즉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구분은 물론 남성과 여성의 사이에서도 존재했던 차별을 드러내

준다. 차별이 원한이 되어 복수의 회신이 된다.(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현실)

세네카: 스토아 철학자로서 세네카가 가졌던 여성 일반에 대한 인식?

당시 로마 사회의 분위기가 여권 옹호의 풍토와는 거리가 있었는지?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으로 그리스 반도의 이올코스에서 군주 살해까지 저지르고 피신한

정치적 곤혹성, 이방인과의 결혼의 합법성,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위치....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자신의 딸을 이아손과 결혼시킴으로써 그리스인 이아손의 목숨을

보전하는 한편, 소아시아 출신의 이방인 메데이아를 추방한다.

꼬르네이유: 1630년대의 파리 무대에서는 잔혹한 장면이 다수 등장, 꼬르네이유는 세네카

류의 잔혹 비극(tragédie de la cruauté) 시도. 여성 옹호적인 메시지가 없고, 이후 발표되는

꼬르네이유 비극의 일반적 경향이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으로, 감정에 대하여 이성을

중시하는 남성적, 극기주의를 강조하는 영웅주의를 옹호.


아버지를 배신, 사랑을 택했던 메데이아는 그 사랑의 배신 때문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제

아들들을 살해하여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 이 이야기는 많은 허구에 의해서 덮여 있다

하더라도 그 근저에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에게 믿게 하는 이유를 가짐.

신화들의 매력은 “전혀 다른 환경 하에서 같은 것들이 되풀이된다는 것. 그럼으로써 역시

같은 것의 되풀이가 아주 다른 것으로 된다는 점.” (H. Müller)

신화의 가공작업에서는 배제되고 청산되지 못한, 단지 미뤄지기만 한 상처의 회귀가 표명

된다.(Hans Blumenberg)

       지상의 행복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그림자!

       지상의 명성은 무엇이련가 - 그것은 꿈!

       그림자를 꿈꾸었던 너 가엾은 자여!

       꿈은 사라졌노라. 밤만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Was ist der Erde Glück? - Schatten!

Was ist der Erde Ruhm? - Ein Traum!

Du Armer! der von Schatten du geträumt!

Der Traum ist aus, allein die Nacht noch nicht. 

                                         -- Grillparzer


비더마이어의 염세주의적 사상, 바로크 시대의 현세거부를 연상하게.

그러나 부단히 꿈을 쫒는 인간족속의 운명은 오늘 날에 그대로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

하인리히 뵐은 현대사회를 “소비가 자유를 주노라”는 현판을 내건 거대한 수용소에 비유.

경쟁적으로 성취업적을 만들어 내야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 창살 없는 감옥?

“인간은, 이 말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인간일 때에만 놀 수 있으며, 놀 때만 완전한

인간이다.”(Schiller)

그리고 통독 이후에도 계속되는 악녀 메데이아 소재의 작품들 - 크리스타 볼프는 아예

메데이아의 혈육살애, 군주살해, 이어지는 자식살해 등을 ‘뼈를 깍는 아픔의’ 정치적 사회적

희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시대에 따라 작가 자신의 시대적 문제점에 따라 같은 신화를 재해석해내는 것 - 여기에,

작가의 욕망은 사회적 산물이며, 그렇다면 상상력의 무궁한 힘이라는 것도 욕망의 사회적

필요요, 토로하고자하는 그 내면에 의존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에 이른다.

무엇이 결핍되었는가?


결핍의 토로

그래서 문학을 보는 표현론적 관점의 출발은, 문학이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창조적으로

표현한다는 입장. 한편의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의 구현. 이것은 문학을, 한편의 시를

거울이라고 보는 모방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시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등불이 된다.

- 시인이란 신령한 힘에 접신된 상태에서 말하는, 시를 토해내는 것이다. (플라톤)

- 우주의 근본적 창조 정신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그 자체를 나타내려고 하는데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예술이다. (Schelling)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가? 그의 내면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창조적 개성, 독창성 등의 자유분방한 낭만주의와 더불어 다른 한편 민족의식, 사회의식이

성장했다. 문학을 한 시대의 정신과 한 민족의 성격을 표현하는 가장 뚜렷하고도 특출한

산물로 생각하여 문학의 사회 표현성이 강조됨. 개인이건 민족이건, 결핍에 반응하는 태도,

그것이 정신의 반영이라는 부분. 최소한 문제적 개인의 자기실현. 인간의 내면이 상상력으로

확장되어 반영된 것. 상상력의 진정한 힘은 인간의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

내면이 깊을수록 상상력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될 것.

-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자기 정립”(Heidegger)

 

한국문학

이광수의 「문학이란 하(何)오」(1917) :

“특정한 형식 하에 인(人)의 사상과 감정을 발표한 자”

“문학은 정(情)의 기초 상에 입(立)하였나니...”


리터래처 - 하면 학문과 문장력을 의미했듯이, 글월文 - 하면 한문을 연상했던 전통.

영어의 novel이나 불어의 roman과 같은, 근대문학의 한 양식으로서의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나 당대의 이야기나 작자가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야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반드시 작자가 전제되며, 작자가 없는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


내면의 교감

특히 우리의 근대문학이란 내면을 근거로 해서 예술적 가치를 주장. 엄정한 시학의 규칙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극복하는 진자운동과도 같은 시간들을 통해서 형성된 서양문학에 비해,

20세기 초 모든 사조를 한꺼번에 경험한 우리의 경우 문학은 정적이고 내적인 인간을 발견

함으로써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문학에서 개인: 고유한 사연과 정신을 간직한 존재,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드러내는 존재

문학에서라면 누군가와 완전한 교감을? 내면을 노출할 수 있지 않을까?


내면의 결핍과 외향적인 현실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는 상상물, 환상들, 허구들로

구성된 2차적인 다른 현실에서는 보도와 평가를 위한 글쓰기에서처럼 이성의 논리가 중요

하지 않다. 이해와 공감을 꾀하는 문학의 글쓰기는 내면의 토로에서 비롯된다. 자신조차도

공감하기 어려운 내면을 있을 수 있는 개연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우연과 혼돈을 필연성으로 대체해서 제공하므로, 작품세계는 진정한 현실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외면세계의 고통은 내면세계를 더욱 깊어지게 할 것이다. 이 내면을 끌어내는 것,

그것은 상상력의 힘으로서만 가능하다. 문학의 현상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인생 또한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확산된 저 너머 유토피아를 꿈꿀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를 읽는가?

언론의 자유, 결사에 관한 법, 선거조사의 문제 대신 “먹고 사는 빵문제”를 거론했던 뷔히너를,

감히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 근로․채식·금주·금연을 표방하고

간소한 생활의 영위와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를 지향했던 톨스토이를, ‘유토피아 사회주의자’

집단에 참가하여 러시아정교회 비판에 동참했다가 총살형을 언도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를,

노골적인 묘사 때문에 풍속문란죄로 기소되었던 플로베르를,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재심파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에밀 졸라를 - 하필 그들을 우리는 읽는다.

예술가의, 글쓰는 이의 열악한 생존조건이 문학을 위태롭게 하지는 않는다. 문학의 진정한 위협은

우리가 현실에 순응하고 꿈을 꾸지 않을 때, 우리의 상상력이 더 이상 우리의 깊은 내면의 샘을

퍼 올리지 못할 때, 그때가 파국이다. 문학의 파국 - 우리를 꿈꾸게 하는, 다른 상황을 상상하는

문학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만의 현실은 우리를 질식하게 하거나 기계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림자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문학을 놓지 마시오. 읽건 쓰건, 그 차이는 그림자를

앞에 두는가 뒤에 두는가 그 차이일 뿐이다. 


무용지용

우리가 문학을 여전히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 중의 하나로 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망이다.

이때 행여 우리는 문학의 효용성 논란에 풀이 죽어서는 안된다. 고띠에 등의 예술지상주의를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쓸데 있고 없는 것이 절대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말을

성현의 말들을 빌어서 하고 싶을 뿐이다. 노자 제 11장의 무용(無用)은 말해준다. “있는 것이

좋은 것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고. 장자는 혜자에게, “땅이라는 것은 턱없이

넓고 크지만 사람이 걸을 때 소용되는 곳이란 기껏해야 발이 닿는 지면뿐이요, 그렇다고

발이 닿는 부분만 재어 가지고 그 둘레를 황천에 이르도록 깎아 버린다면 사람들에게 그래도

쓸모가 있겠소?”라고 했다.


디디고 선 땅을 디디고 설 수 있기 위해 무수한 땅이 필요하듯이, 우리는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가상의 공간이 없이는 현실의 삶을 ‘아마도’ 살아 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밥 먹여 주지 않으므로 쓸모없는 이야기여!

세상에 쓸모있는 것들로 하여금 조금만 부끄럽게 하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