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4. 12. 3. 14:00

                                    제 8 회 이화문학상 심사를 마치고


9편의 후보 작품을 놓고 정연희 선생, 민병삼 선생 그리고 필자가 작품 내용을 검토하며 토의한 끝에 송숙영님의 창작집 『농담』과 서용좌님의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 카프카의 편지 1900-1924』을 공동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카프카의 서신을 번역한 서용좌님의 번역서는 1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역자가 얼마나 오랜 세월 이 서간집 번역에 매달려 왔는가를 능히 숙고케 하는 노작이다.

20세기 문학에 불안과 고독의 현대인상을 깊이 해부한, 난해한 실존작가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카프카의 서간들은 20세기 지성사의 증언으로 값진 유산이며, 이를 한국에 소개한 서교수의 노고는 이 정도의 상으로 보답되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작가 송숙영님은 문단에 등단한지 올해로 44년에 이르며, 그동안 문학 일선에서 꾸준히 작품을 생산해왔다. 이번에 출간된 .... [이하 생략]                            

                                                                                      2004년 12월

                                                                              김원일, 민병삼, 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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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소감] 이화문학상 / 감사의 말씀

저의 변명이라면,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글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고, 어느 창작노트에 쓴 일이 있습니다. 컴퓨터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내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겁 없이 장편 <열하나 조각그림>을 들고 이대동창문인회에 참가한 몇 년 세월은 짧지만 가슴 뿌듯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는 순간 하늘은 저의 미련한 열심에 상을 내리십니다. 위대한 카프카가 받아야 할 상을, 그러나 카프카의 독일어에게가 아니라 저의 서툰 한글에 대해서. 이 상은 1296그램이나 되는 책의 무게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받겠습니다. 마음으로는, 위대한 작가들 짝사랑 그쯤 멈추고 같은 열심으로 서툰 ‘내 글’을 쓰라는 이정표로 여기고자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4년 12월 3일 서용좌


 

 

 

이 사진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가장 어린(!) 참석자가 우빈, 둘째 손녀다. 그옆에는 영원한 스승 이병애교수님, 그리고 미뇽, 스터디그룹의 친구, 왼쪽앞은 동기이자 소설가대선배 이재연(춘자),미뇽 살짝 뒤로 윤현자후배, 함께 이병애교수님의 제자이다. 뒤로는 동창회 조행자부회장, 남재은회장. 아기와 스승님 사이는 최민숙교수, 모두 고마운 후배들.   

얼굴이 조금 가린 친구는..... 아! 중고등학교시절 단짝친구. 수원에서 병원문도 일찍 닫아걸고 참석해주었다. 이재연뒤로는 아기의 엄마와 아빠, 둘째아들 내외다.

다른 가족은? 미국에 있는 큰아들 내외와 손녀는 그렇다치고? 나의 동반자는 이 정도의 행사에 호들갑 떨고 상경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조선의 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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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4. 12. 1. 21:49

하인리히 뵐: 1967년 뷔히너문학상 수상자로서, 수상연설집
문학은 아직도 고혹한  피의 작업(뷔히너학회편 2004)에 실린 것.

 

                        뷔히너의 현재성


저의 감사하는 마음은 진심입니다만, 저의 연설은 고언을 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럴 것이 이 상이 “게오르크 뷔히너 상”이라는 명칭을 지녔기에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언에서 생겨날 것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즉 앞서 간 선배의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래에서 위로 나오는 것도 아니며, 스스로 쉴 수 있을 중심부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가장자리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저 소란스런 동시대인으로서의 감정이 주는 가장자리요, 바로 그 점이 그의 시대의 동지 게오르크 뷔히너를 이렇게 현존하게 해줍니다.

뷔히너의 생과 작품을 파악하기는 간단해 보입니다. 그의 생은 너무도 짧았고, 그의 작품은 단편적이자 독창적이며, 매끄럽게 주머니 속에 들어갈 만 한, 단 한권 분량입니다. 그런 사실은 숭배적인 단순화를 낳는데, 시적 통절함을 실은 비문에 어울릴 이상적인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일찍이 완성되고, 일찍이 사망한, 이별, 결말, 영면. 그렇지만 뷔히너의 생과 작품은 이 영면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땅 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아름답고 궁극적인 광고문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뷔히너가 불러일으키는 소란은 놀라우리만큼 현재성을 지녔고, 여기 이 강당에 현존합니다. 다섯 세대를 건너뛰어서 그 소란은 우리에게 다가들며 우리를 덮칩니다. 죽음의 예감으로 명명된, 이 거친 아름다움과, 우리 문학사에 정말 드물었던 어둠의 열정을 간직한 채 말입니다. 이러한 움켜 쥠, 소재의 선택에 있어서의 확신, 그가 붙잡은 모든 대상에서 보는 이 인간적인 물질의 정의감,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술을 비로소 예술로 만드는, 그렇지만 인위적이어서는 아니 되는, 저 미숙함의 숨결, 또한 조바심의 숨결 말입니다. 바로 그러한 모순 속에 그 정의가 있지요, 그러니까 결코 인위적 조바심, 인위적 미숙함이 아니라, 그냥 현존합니다. 마치 『레옹세와 레나』에서 레나가 설명하는 그런 사람들 같습니다. “나는 단지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하고 구제불능인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예술을 살아있다고 하는 말은 너무 생물학적이며, 아마추어리즘의 나락으로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뷔히너는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저는 그가 두개골 신경에 대한 강의에서 생명체에 대한 생물학도로서가 아니라 표본화된 물질에 대한 해부학자로서 발언한 그 부분에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 개인의 육체적 현존재 전체는 철학적 방식으로 보자면 (그는 목적론적 방식과는 반대로 이 방식을 제시했습니다만), 고유 개체의 보존을 위해 내세워진 게 아니라, 태초의 법, 그러니까 아주 단순한 균열과 선들에 의해 최고의 아주 순수한 형태들이 야기되는 그런 아름다움의 법을 고지하는 것이다. 모든 것, 형식과 소재는, 그 방식으로 보자면 이 법에 메어있다.” 뷔히너의 작품에 대한 모토로 내세울 수 있을 이 발언에서 그는 자연과학자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현재합니다. 제가 또 하나 다만 구전되어 온 사회적 성격의 발언을 덧붙이자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날마다 스프와 야채와 고기 먹을 게 있다면, 훌륭한 사람 되기는 누어서 식은 죽 먹기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적 사실주의의 조야한 유형을 독일 드라마 상 최초이자 거의 동시에 마지막 노동자라 할 보이첵의 입으로 들어 봅시다. “우리는 천당에 가게 되면 천둥치는 일을 도와야 할 거라” ― 그러면 저는 한 사람에게서, 한 입에서, 두 사람의 시인을, 두 독일인을 보게 됩니다, 한 세기 후에 나타나 서로를 배제하는 것으로 보였던 벤과 브레히트, 두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뷔히너 안에서 현재합니다.

뷔히너의 정치적 미학적 현재성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뷔히너의 친구이자 대학생이었던 미니게로데가 겪은 지하 감옥에서의 고문을1) 공공 거리에서 공직자들에 의해 자행된 두 건의 살인, 저 베를린 대학생 오네조르크와2) 연방군 병사 코르스텐의 사살과 관련짓자면 말입니다. 둘 다 국가 권력으로 인한 공개 살인이라는 몸서리치는 경우입니다. 또는 「헤센 급전」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거나, 아예 독일어로 팸플릿으로 만들어서 새로이 주석을 붙여서 보급하는 일 말입니다. 물론 박지 인쇄의 고전판 포장을 해선 안 되지요, 그랬다간 게르만 학술원 취급 같은 조짐이 일어나, 거기서 정치적 가시바늘을 뽑아버릴 테니까요. 귀족과 오두막에 대한 풍자는 이 신판에서 변경할 필요가 없겠고, 다만 해석을 달면 될 것입니다. 대연정은 충분히 독재적이요, 더는 작은 투표함을 두려워할 게 없지요.3) 그것으로 우리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면 그래도 우리의 정치적 문맹을 표현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보는 눈을 가진 이에게는 히죽거리는 합의와 정말 히죽거리는 독재성이 충분히 보이지요, 두 개의 권력에 익숙해진 왜소한 남자의 새로운 봉건주의가 보입니다. 그는 거의 전권적인 대 정당의 거대한 관료 기구에서 안전을 느끼고 있는데, 그 안전이란 게 어느 여자 가신이 어떤 궁정에서 느낄 수 있을 그런 것보다 더한 정도겠지요. 자신의 양심을 정당에 바친 자들에게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에서 강력한 일절을 인용해 드립니다. “양심이란 원숭이가 그 앞에 놓고 고민하는 거울이다. 각자는 할 수 있을 만큼 씻고 닦으며, 제 고유의 방식으로 제 재미를 찾아 나서는 것. 그건 서로 드잡이해서 쟁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팸플릿에도 어떤 장례식의4) 묘사가 빠져서는 아니 될 겁니다. 저 마비적인 행사 말인데요, 그것은 반년 전 일로서, 지난 한 시대를 종결하고 새 시대를 위한 표식이 되었고, 거의 일주일 내내 TV 우산을 장악했었지 않습니까. 국내외, 유럽, 그리고 해외 입법자들이며 정부의 수반들의 입성 행진, 제국시대의 십자훈장 수상자들이며 추기경들 사이에 유행에 걸맞게 차려입은 입법자들이 부대 부대를 이루어 입성했습니다. 그것은 현대적이었지요, 그런데 그것은 ― 어떻든 저에게는 ― 몸서리치게도 전혀 현재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장례의식을 이론의 여지없이 치러내는 이런 마비적인 당연시에 더해, 표정들, 의상들, 자동차들 하며. 현대적 정치가들, 현대적 주교님들, 현대적 정치인들, 그리고 현대적 군대, 그들은 쾰른 대성당을 장악했습니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스스로 민주주의라 하는 이 사회에서도 두 계급은 의상의 강요에 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민주주의를 창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해서 입증할 수 있을 만큼 비우호적이었던 두 계급, 곧 성직자와 군대 말입니다. 이 두 계급은 항상 현대적으로, 항상 사회적으로 유능하게 의상을 갖춥니다.

이제 뷔히너를 인용할 때인데요, 「공산당 선언」보다 13년 전에 씌어진 「헤센 급전」에서 입니다. “법은 자신들의 졸렬한 작품으로 지배를 보장하려는 고상한 자들과  학자들이라는 하찮은 계급의 소유물이다. 이 정의란 여러분을 규칙 속에 잡아두어 더 편안히 착취하려는 수단에 불과하다. 저들은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법,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원칙, 여러분들이 아무 것도 파악할 수 없는 판결들에 따라서 말한다.”

우리를 심사숙고하게 할 것은 그 뿐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와 또 독일인들에게 타격을 입은 여타 유럽 국가의 대표자들도, 유행적 변형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제국 십자훈장을 두르다니, 비록 현대화한, 꾸며 장식한, 민주화한, 게서 갈고리를 빼낸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십자는 어쨌거나 십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는 ― 예술에서나 사회에서나 ― 현대적입니다. 어쩌면 보다 나을 유행적 변형은, ‘사람들이 여전히 십자가를 하고 다닌다.’라고 할런지요. 제 민족들의 고행을 위해 십자가는 표창으로서 수여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 부조리성에서 현대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이 몇날 며칠을 천연하며 공포심마저 자아내는 행사를 현대적으로 만들겠으며, 또 그리 해낼 수 있겠습니까만, 그러면서도 몸서리치게도 현존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로소 영상매체의 우산위에서 엄청난 제곱을 함으로써 그 행사는 능란한 방식의 서양식 픽션, 곧 연극과 편집에서, 현실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의 해설이 아니라, 다만 다시금 그의 신부에게 편지를 쓴 스무 살 뷔히너에게 말을 돌리고 싶습니다. “나는 역사의 소름끼치는 숙명론에 절망감을 느낀다오. 인간본성에서 경악스러운 유사성을, 인간의 제 관계에는 피할 수 없는 폭력을, 그것도 모두에게 부여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개인은 파도 위의 물거품이요, 위대한 자는 다만 우연일 뿐, 천재의 지배권은 인형극이요, 철칙에 거슬리는 우스꽝스런 고투라, 그것을 인식함이 최선의 것이요, 그것을 극복하기는 불가능입니다. 역사의 사열식용 폐마들과 모퉁이에 선 자들 앞에 굽혀서 절을 한다는 건, 저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저는 이 새로운 ‘헤센 급전’에 다음 사실의 면밀한 분석을 넣고자 합니다. 곧 이 나라에서 한 요상한 외교문서에 근거하여 국가를 방문하는 민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번거롭고 관을 쓴 우두머리들과 압도적인 매력을 지닌 영주 같은 사람들과 더불어 영접 받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만일 새로운 의식이 자라는 대학생들이 이 외교문서에 대항해서 소란을 통해, 그리고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 거역한다면, 누가 게서 놀라겠습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가능한 방식인걸요. 이 요상한 외교문서가 경찰의 폭력을 통해 그들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그런 예절에 그들이 어떻게 의무감을 갖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지만 이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일들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문서 문제들로 좌절당하고 맙니다. 초대장에 쓰인 간단한 기재, 예컨대 “짙은 색 양복” 또는 “외출용 정장”이란 기재만으로도 꽤나 육중한 압력이 들어 있습니다. 무엇이 짙은 색인지 누가 저에게 말해줍니까? 외출 시에는 제가 무엇을 입나요? “흡연” 같은 육중한 경고문들은 아마 아이러니의 가치도 없겠지요. 누가 우리 위에서 규정하며, 누가 우리를 처리합니까, 누가 우리에게 불문율을 부여합니까? 청년의 항변이 복장과 두발에도 표현되는 것을 누가 이상하게 여긴답니까? 책임이 위임되어야 하고 다른 선택을 허용하지 않을 투표함으로 충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소란과 명백히 표명된 거부를 통해서와 또 다르게, 복장과 두발로 표현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자 스무 살의 뷔히너가 가족에게 쓴 편지 구절에서 인용하겠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만일 우리 시대에 뭔가 도움이 되어야한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주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승인했던 모든 것은 필연을 통해 강요된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폭력 사용이 비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원한 폭력의 상태에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뷔히너의 미학적 현재성을 그의 정치적 현재성과 분리할 결심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역사에 의해서 놓치게 된 두 독일인의 만남을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뷔히너와 그보다 불과 몇 년 젊은 마르크스의 만남 말입니다. 「헤센 급전」의 힘에 넘치고 그렇게나 민속적이며 물질의 정의에 넘치는 언어는 의심할 여지없이 “공산당선언”만큼이나 영향력 넘치는 정치적 문서입니다.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뷔히너의 꿈같은 확신은 「급전」에서부터 중단 없이 바로 그의 극작품들, 산문, 편지들에 이입됩니다. 시인이자 자연과학자요 동시에 정치적 작가였던 뷔히너가 사회적 현실의 인식과 묘사에서 보여준 꿈같은 확신에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많은 오류와 우회를 문학에 관한 한 면할 수 있을 기회, 그리고 미래의 마르크스주의적 작가들의 고뇌를 탕감할 기회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실제 역사에서는 놓쳐버린 이 두 사람의 만남을 사후에 성사시키게 될 수 있을지, 그러니까 오늘 날 실행되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주의적 미학을, 어쨌거나 마르크스의 동시대인이었고 결코 그의 나쁜 동지가 아니었을 뷔히너의 물질의 정의와 대질시키는 것 말입니다. 뷔히너의 작품과 또한 그가 작품에 대하 언급한 모든 글에는 몰인정도 그 반대도 들어있지 않고, 오직 물질의 정의에 대한 소망만 있을 뿐입니다. 『당통의 죽음』에 대해서 그는 사실 경악했던 가족들에게 이렇게 씁니다. “……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맙소사 젊은 여자들의 독서를 위해 창작된 것이 아니어요, 그리고 만일 저의 드라마가 그런 데에 적합하지 않다 해도 불쾌히 여길 것도 없답니다. 저는 당통이란 사람과 그 혁명의 도당들에게서 덕행의 영웅들을 만들 수는 없어요……. 그가 그러한 소재를 선택한 것을 두고 날 비난하려면 하래지요. 그런 항변은 벌써 반박되었어요. 그 항변이 타당하다 하려면, 문학작품 중 정말 위대한 대작들이 비난되어야 하겠지요. 작가는 도덕교사가 아닙니다. 작가는 인물들을 창안하고 창조하지요. 작가는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역사를 학습해야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 속에는 너무도 많은 부도덕한 일들이 서술되고 있으니까요. 또 눈을 아예 동여매고 골목길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랬다가는 추잡한 짓거리들을 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신에게 비명을 질러야 할 것이에요, 세상엔 너무도 많은 방탕한 짓거리들이 일어나니까요. 그런데요, 만일 누가 저에게 작가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서는 안 되고 어떠해야 마땅한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려 한다면, 전 이렇게 대답하겠어요, 나는 세상을 신보다 더 좋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신은 이 세상을 틀림없이 어떠해야 마땅한가 그대로 만드셨을 것이라고.”

신사 숙녀 여러분, 게오르크 뷔히너의 이름은 제게 저의 감사말씀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의무를 지워줍니다. 동시대 동지의 소란한 변두리에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확신은 부서지기 쉽고, 자기 확신이란 불가능한 그런 입장, 비판적인 것이 격분으로 오해되어 울릴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말하라고 합니다. 마치 비판도 자신을 거기에 함께 관련시키는 제안을 포함하지 않은 듯이 말입니다. 뷔히너의 생애와 작품에는 몇몇 현재성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과의 편지 왕래 특히 구츠코와의 편지 왕래에서 묘사되었던 망명의 문제, 그리고 「보이첵」에서 표현되듯이 그의 다른 작품 어느 것만 못하지 않은 뷔히너의 의사로서의 현재성 말입니다.

제가 다만 암시적으로나마 뷔히너 또는 당통이라면, 이러한 연설을 생략해도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라끄르와는 당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게으름 그 자체로다. 그는 나서서 연설을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단두대에 서려는구먼.” 그리고 빌헬름 뷔히너5)에게 쓴 편지에서 뷔히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난 내 자신 매우 만족하고 있다, 장마 비나 북서풍이 불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럴 때면 난 사실 저녁에 잠자리 들기에 앞서 발에 양말 한 쪽이 걸려있으면 그 순간 방문에 목을 매달고 싶어 하는 그런 부류에 속하게 되는구나, 다른 한 쪽마저 벗을 일이 너무 너무 피곤하니까 말이다.” 그로써 뷔히너가 공공연히 그렇게 지냈던 게으름의 장을 넘어서 그의 유머라는 거대한 장으로 발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머는 그토록 난폭하고 또 그토록 부드러울 수 있으며, 그가 그것을 잃었을 때조차 틀림없이 여전히 현존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취리히에서 엘사스의 친구 뵈켈에게서 편지를 받았던 경우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 편지 중 일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독일에서 나는 매우 잘 지낸다네, 자네가 생각하는 절반만큼도 나쁘지는 않다는 말일세…….”

(하인리히 뵐: 번역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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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두막에 평화를! 궁정에는 전쟁을!”이라는 유명한 대목은 1834년 7월자 『헤센 급전. 최초의 전령』에 인쇄되었다. 이를 배포하다가 붙잡힌 대학생 미니게로데에 관한 기록이 1834년 10월 15일자 카셀의 내무부 문서에 나온다. http://www.digitales-archiv.net 2004-4-15

2) 베노 오네조르크는 이란의 팔레비국왕 방문 반대 시위 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1967.6.2.)

3) 비상사태법 추진 반대투쟁에서 서독 국민들에게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을 선동하고 나선 것은 예컨대 마르틴 니묄러목사를 들 수 있다. 투표용지 무효화 운동의 이유는 당시 현실화된 기민·기사연과 사민당 간의 대연정(大聯政)은 “히틀러가 무색할 정도”의 독재체제로 변질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4) 1967년 4월에 있었던 아데나워 수상의 장례를 말한다.

5) 뷔히너의 아우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11. 15.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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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안의 풍경』2004 (이화에세이)        

 

 

아직도 내겐 아파트 입구 편지함을 둘러보는 버릇이 남아있다. 그러나 건져오는 것은 고지서나 광고성 안내장이기가 쉽다. 하긴 편지가 기이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주고받는 명함에도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로만 표기된 것이 흔하다. 세상은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추월한 지 오래다.


이메일의 편리함은 말해 무엇 하리. 우선 글을 쓰다가 지우거나 구겨버리곤 하던 편지지와 달리, 매번 글자를 고쳐놓는 일이 쉽다. 마음이 변하면 강도도 조절하고 뉘앙스 다른 어휘를 고르면 된다. 상대가 읽었을까 마음 조릴 필요도 없는 것이, “읽음 확인 메일”을 요청하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로, 빠르고 정확한 모든 장점 위에, 가장 중요한 배달사고가 없다. 간직하고 싶다면 보관함에, 그것도 안심이 안 된다면, <내문서>에 옮겨서 다시 <A 플라피>로 옮겨놓으면 거의 영구하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엽서 하나 손수 써 보내는 일도 드물다. 하물며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드물다. 손으로 줄은 친 듯한 편지지에 쓴 편지 하나와 그보다 앞서 그냥 종이에 세로로 쓴 편지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나는 기념사진 한 장과 예스런 학자의 고결함이 베인, 하나는 인간미가 뚝뚝 묻어나는 선배의 글이었다. 두 분의 편지글에 답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면 틀렸다. 실은 두 분께 전화로 답을 해야 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화의 편리성을 든다. 그런데 나는 정말로 전화가 어렵다.


“안녕하셔요, 저 아무갭니다. 선생님, 사진까지 일부러 보내주시고. 그런데 지난 번 뵈었을 때…….”


그러면 저쪽에서 말씀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그 먼 데를 일부러 올라와서 고마워요. 거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잘 내려갔는지 걱정되었고, 그리고 부군도 잘 계시는지…….”


그러면 또 언제 무슨 말로 대답을 이어나가야 할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팥으로 메주를 쑵니다…… 라고 했더라도, 아 그래! 하고 믿어주셨던 은사님을 고향으로 내려온 이래 몇 번이나 뵈었던가. 겨우 산수(傘壽)연에 다녀온 것을 칭찬하시니 송구스러울 따름이고, 대학생활 전체가 테트리스 조각처럼 한 순간에 내려와 쌓이는 바람에 꼭 드려야 할 말을 놓치고 만다.


선배님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초록빛 바다색 아니면 비취색 하늘거리는 가운데 단아한 얼굴모습에 압도당하던 느낌을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혹시 모를 내 작은 잘못에, 음색만으로는 조금 노여워하시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주시려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순간 어떤 반응도 멈춰 버리는 것이 순발력 없는 내 본바닥이다.


전화보다는 이메일을, 이메일보다는 편지를 선호하는 내 마음 바닥에는 서툰 대인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 내가 어느 결에 교사가 되었을 때, 학생 때의 내 자신이 문제학생 사례연구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것인데, 중 2때 나는 어떤 선생님께 집중적으로 불려가곤 했던 일이 그것이었다. 결석이 좀 잦은 것을 제외하고는, 공부도 어지간히 하고 공납금도 아무 문제없던 내가 왜 문제학생이었을까? 편모, 편부도 아닌, 계모, 의부도 아닌, 정상적인 대가족의 맏이가 무슨 문제를 가졌다고 비쳤을까?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지배성, 도덕성, 사회성 등 무슨 인성들을 수치로 조사하면서, 모든 성질에서 25~75% 안에 들어가기를 중용의 인간이라고 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회성 불량으로, 뭔가 15% 미만임을 추궁 당했던 기억이 늦게 서야 떠올랐다. 그래, 나는 사회성 문제아였구나!


그러니까 우선 부모님과의 관계였을 것이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활달한 어머니를 이해하기엔 어렸고, 나는 소설 속의 전통적 어머니상을 그렸다. 어머니에겐 모든 어머니들의 착각처럼 자식들은 최고가 될 소질이 보였을 것이고, 피아노와 미술은 기본으로, 남자애들은 웅변술까지 과외를 시켰으니, 그때 원조 치맛바람은 우리를 수소풍선처럼 띄워 올렸다. 아마 중학교의 자유는 어머니로부터의 해방이었을까? 금지된 장난을 골라서, 부러 내리막길을 달렸던 시절이다. 실습지 토끼장의 토끼를 풀밭에 놓아주긴 쉬웠지만, 오디를 따먹으려면 날쌘 친구가 나섰다. 선생님들 눈밖에 난 친구들 사이로 스며들기는 쉬었다. 토끼들이 토끼장에서 사라지면 범인(?)들은 토끼를 다 몰아넣기 전까지는 수업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렸다. 허리까지 자란 풀밭에서 털썩 누워버리면 하늘은 풀밭과 맞닿게 내려앉고, 우리는 하늘 속에 누었다. 주머니를 함께 털어서 싸구려 꽈배기를 사먹었다. 그 순간에는 네 것 내 것 없는 완전한 공동체가 실현되었다. 불량꽈배기의 밀가루와 기름은 양분인 것이 틀림없으니, 나는 자꾸 쓰러지는 약골로 자랐지만 키가 클 대로 컸다. 가끔은 상표도 없는 아이스케이크도, 어머니가 양잿물이라고 했던 삼각 비닐주머니 속의 색소와 사카린으로 만든 물도 먹었다. 어머니의 금기는 그리 무서운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래도 어머니는 한없이 금기를 내놓으셨다. 금기에 대항하느라고, 책가위를 누구보다 가장 예쁘고 깔끔하게 싸주신, 연필 다섯 자루를 저녁마다 깎아서 키대로 나란히 필통에 넣어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책과 필통은 사랑스러웠지만, 학교에는 어머니를 대신할 여선생님들이 많았다. 요구와 간섭은 어머니를 능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담을 쌓았고, 사회성이 전현 없는 문제아라고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니 그건 변명이다. 지금도 함께 생활하는 직장동아리에 80가까운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연구생활을 하는데, 그중 얼굴과 이름을 다 알 수 있는 경우는 반이 될까 말까다. 그들은 내게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는데, 간섭 때문에 사람을 기피한다는 변명이 틀리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대답을 하는 것 - 그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고. 공부를 해도 해도 그것은 어렵고,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그것은 어렵다고. 마주쳐서는 말이 안 떨어지면 목례라도 무슨 몸짓이라도 하는데,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은 전화라고. 수화기 저쪽에서 대답하는 목소리에다 대고, 처음 무슨 단어로 말문을 열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것이라고.


그래서 편지가 덜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메일이건 종이편지이건. 그 중에서도 쉽게 PC에 저장되어 무생물 같아지는 이메일보다는, 여간 간직하지 않고서는 곧 사라지는 종이편지가 부담이 없어 좋다. 문제는 여전히 덜떨어진 사회성이다. 더구나 이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아본 후에는, 아마 누구도 쉽게 편지지를 펼치지 못하리라. 아니 어떤 단어로도 그 시작을 찾지 못하리라. 나는 그저 저물어가는 오프라인 시대의 추억에 잠긴다.

 

 

튼튼한 몸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튼튼한 정신이 좋습니다.

아직도 새파랗게 날이 선

당신의 젊은 정신이 좋습니다.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정신의 튼튼함이 당신의 육체를 병들게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몸 생각해서 정신을 쉬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항상 웃는 부드러운 입매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엄격한 입매가 좋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굳은 입매가 싫다고,

당신을 멀리한다면

나는 참 기뻐할 겁니다.

그만큼 당신은 제 것이 될 테니까요.


                                                                       200x년 1월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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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