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4. 3. 1. 21:43

 서정인 선생님 서재 탐방기 
                                      영어로 글읽기와 한글로 글쓰기 

                                                                  
소설시대 7호

심부름


전주시 덕진동, 사람들이 호반촌이라 하는 곳, 전화로 길 안내해주신 호반2길을 찾다보니 아담하고 질서정연한 주택가가 나온다. 오가는 사람 드문데, 길까지 마중 나오신 분이 『달궁』의 서정인 선생님이시리라.


이미 누렇게 찌들은, 87년 초판 열흘 뒤에 나온 2판『달궁』을 들고 선생님을 뵈러온 터다. 실로 십수 년이 지나 작가와 마주앉은 곳, 전기스토브가 막 켜진, 차라리 서늘한 거실이다. 누렁이와 흰둥이가 힘차게 짖던 햇빛 밝은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현학의 무게가 내린다. 서재에 쌓여있는 고서들의 무게일 것이다. 난생 처음 하는 숙제를 위해, 마음 다잡고 준비한 말문을 연다. 일천한 역사의 한국작가교수회에서 그나마 새내기인 제가, 평소 말을 안 듣는 사람이지만 이건 기꺼이 하고 싶은 심부름이라서… 더듬더듬. 선생님은 작가와 교직을 겸하는 같은 종의 운명에 일단 우호적이시다. 되었구나!



우선 가장 진부한 수순으로 여쭙는다. 사상계에 발표된「후송」으로 등단하실 때, 이미 대학원에 진학하셨고 또 교직에 계셨다 했는데, 어떻게, 왜, 글 쓰는 일에 투척하셨나요? 보통 말하는 60년대 당시 특유의 미학적 자의식에 관해서는 제 개인적으로는 경외감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문학이라는 것에 기꺼이 자기 삶을 던지고 싶은 욕망, 그 근원적인 생의 충동”을 무한히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왜 썼냐? 그냥 썼다. 그렇게 말씀하실 차례다. 정성들인다고 치장해서 내놓은 우문에 현답으로. 말씀 대신 『달궁가는 길』을 가리키신다. 정년을 기념하여 문단과 학교의 동료와 후배들이 출판한 책이다. “서정인의 문학세계”라는 부제답게, 선생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편집이다. 머리글에도 나와 있다.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보려던 기획 의도를 방해하고 간섭한 큰 훼방꾼이 바로 선생님이셨다고. 그런데 “술친구 서정인”만 예외로 삶을 들려준다. 글쓴이의 기우와는 달리, 절대로 옥에 티가 아니라 청자연적의 여유다. 여기 부록에 읽어 보세요.


예, 읽어 보았습니다, 한국일보에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리즈로 볼 때보다는, 여기 이 책에 “왜 써?”라는 제목으로 나오니 더욱 선생님 말씀답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평생의 업이 된 글쓰기에 뛰어들었어요. 중학교 때 몰래 읽었던 연애소설이나 삼국지가 재미있어서,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의 칭찬에 고무되어서. 어쩌면 내가 잘났다는 것을 과시할 방법이,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타낼 방법이 달리 없어서, 또는 어떤 갈증 때문에, 어쨌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판이 벌어졌다” 그 비슷하게 말씀하셨지요. 왜 쓰냐? 그동안 그저 글을 써왔다고.


누구는 노름 빛을 깊기 위해, 누구는 혁명가와 그 혁명가가 처형한 왕의 아들 둘 다를 위해서 시를 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며, 심지어 가슴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썼다는 바이런, 목이 잘리는 것같이 느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썼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다들 이름 없이) 예로 들면서도, 자신은 “그냥” 썼다고 하셨다.


그렇습니다. 말을 하래서 하지만, 문학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 쓰는, 쓰려는 사람들은 이유가 없습니다. 좋아하니까. 갑자기 다소 고조된 어조이시다. 최근에 어떤 상업학교 교장선생님이 말하기를, 자기 학생들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생산성이 높으니까. 문학이 뭐 필요하냐. 시, 소설 그런 것은 뭘 생산해 내는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필요 없다, 그러는 겁니다. 이래서야 되겠어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합니다. 하긴 또 어떤 학생이 그럽디다, 아무개작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쓴다고, 써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정도라야 작가의식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만 합니다. 하지만 주먹을 쥐고 혁명에 나서는 것과, 주먹을 쥐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의식의 변화를, 행동가는 행동을 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작가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볼 눈을 가지게 하면 됩니다. 문학이 왜 필요한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선생님께선 무엇을 쓸 것인가를 보기 위해서 눈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눈이 있으되 못 본다. 마음을 비우면 물건의 덧없음이 보인다.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럼 마음이 욕심입니까?


세상 많은 일들이 별들의 운행처럼 틀림없이 필연일 것이오. 허나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로 여겨져요. 그러니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지요.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 이 세상은 그것의 의미를 그것을 볼 눈을 갖춘 사람에게, 그 갖춘 정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볼 눈”을 우연히 제가 공부하는 독일 작가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겐 사물이 뚜렷해진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물을 통찰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며, 그러면 언어를 수단으로 통찰하고 그 안으로 꿰뚫어보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전후 독일 작가로는 처음으로 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뵐인데, 그는 인간적인 “촉촉한” 눈을 권했습니다. 라틴어의 “유머”가 독일어로는 “습기, 촉촉함”을 의미한다고.


열두시, 아니 『아홉시 반의 당구』, 그 작가 말이군요? 영역된 것을 읽었지요. 누구라도 작가는 우선 자신이 잘 보아야 합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것, 독자에게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것이 쓰는 이유와 또 목적이 되겠지요, 만일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쓰냐? 이것은 나의 평생 문제입니다. 쓰기는 항상 새로운 실험이다, 이 말은 나로서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형식? “형식과 신념”이란 제목으로 선생님의 한국문학창작상 수상소감이 있다. “형식과의 싸움은 끊임없는 실험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실험이라는 말은 처음 해 본다는 뜻이고, 그 처음이 마지막입니다.” (“처음의 낙하산도 반드시 펴져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작동한다고 믿는 신념” 아 그런 것을 가질 날은 멀구나. 큰일이네.) “달을 그리되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리는 것은 구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고 인용하신 것이 얼마나 어렵고 오묘한 주문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한 구름을 그려 달을 그린다?


형식미라면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강」은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단편소설 중의 하나”로 정평이 났지 않습니까? 절제된 문장, 단일한 인상과 효과, 통일된 구성, 인생의 한 단면을 통찰하는 능력 등으로, 교과서적 단편소설 미학의 최고봉으로 격찬되고 있는데, 그것을 대표작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누구든 떠올릴 『달궁』입니까? 혹은 시기별로 등단작「후송」이나 「강」을 거쳐, 『달궁』의 고지,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등을 통해 어떤 특징과 차이 또는 변화를 의식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미한테 어떤 자식이 제일 예쁘냐는 식이지만.


속으로는 내가 처음 빠져든 『달궁』이라 하시길 기대한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신다. 그게 굳이 말한다면 「뒷개」, 그리고 「벌판」… 그 언제 목포엘 간 적 있었어요. 종점 분위기, 싸한 비릿내가 늘 코끝에 머무는… 그런 것 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뒷개지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읽고 해설해 놓은 것만 따라 읽어요, 다른 것들 좋은 것 많은데….


‘뒷개’는 선생님의 회상에 잠긴 듯한 설명으로 어디 부둣가로 상상이 되지만, ‘벌판’은 어디 멜까. 선생님 작품들도 다 모르면서 여기 선 것이 부끄럽다. 「뒷개」는 『달궁』의 “바다 횟집”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아닙니까? 그런데 (저부터도) 사람들은 한번 명이 나면 몰리는 경향입니다. 「강」은 아예 학교 숙제의 표적이 되었고, 예컨대 「후송」만 해도 이명증 같은 병리현상이 개인적인 불행의 수준을 넘어서 어떤 사회적, 정치적 성격을 수반하는 고통의 표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사람들은 병약함이나 정신이상을 더 이상 낭만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병의 도덕적, 정치적 알레고리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달궁』의 사설조는 아예 서정인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창성은 문체만이 아닌 어휘들에서도, 예컨대「무자년 가을 삼일」의 “무자년”, 또는 “움직이는 계단”을 “도롱태”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 “얼음과자”를 빨고, “영상띄”를 감상하는 군상들,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시고.


이번에도 대답 대신 『문화예술』(문예진흥원, 2003년 10월호)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보여주신다. “한글로 글쓰기: 한국말은 한국인의 운명”이라는 글의 시작부분은 이렇다.


“나는 우연히 한국말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나는 한국 땅에 태어나서 한국말과 만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과 만났다. 그것이 준 것 말고는 나에게 세계가 없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결정했다. 나중 커서 외국어를 배우고, 제이, 제삼 외국어들과 접하자, 그것들은 나의 첫 말이 만든 세상을  넓혔다. 외국어 하나를 알면, 세계를 하나 더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운명으로서의 한국말을 쓰는 사람과 그냥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다르겠다 싶다. 부끄럽게도 나는 후자에 속한다. 



글읽기 - 글쓰기


그러기에 영문학 공부와 한국말로 글쓰기를 병행하시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혹시 상충이 될 것인지, 실로 그것이 궁금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영문학 공부한 것을 나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대학 진학 할 때, 그래요 영문학을 택한 것은 아마 고등학생의 눈으로 읽던 우리 소설에서 뭔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야겠지요. 손창섭의 「비오는 날」같으면 참 좋았는데 (나는 「잉여인간」을 읽었는데), 별로 많지가 않았어요. 지금은 달라요, 연전에 순천대학에 문예창작과에 교환 교수로 갔을 때 박지원의 「호질(虎叱)」 같은 것도 잘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함께 공부했어요. 그러나 50년대 당시엔 국문학은 별로다 그리 생각했었지요. 하여간 노문학과가 있었으면 좋을 걸 그랬어요. 그래 영문과 밖에 없었어요. 독문학, 불문학은 고등학교 때 안 배워서 어렵고. 여담이지만, 참 독일어 그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독일어가 어렵다 하셨습니까? 아주 우연입니다만, 어제 한 밤중도 넘어서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독일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클레멘스 브렌타노라고, 낭만주의 시인입니다, 영화는 물론 불행한 결혼생활을 다룬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시를 쓰다가 일어서서 읊어 내려가는 독일어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환상적인 한편 내면의 황홀과 고통을 함께 노래하는 시라서 그랬겠지만,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이제 제가 독문학에 대한 평생의 짝사랑을 접고 나의 언어로 나의 글을 쓰겠노라 작정한 이 시점에서. 저의 배신에 대한 시위였을까요? 하필이면 존경하는 소설가를 만나 뵙기 꼭 열두 시간 전에 들려오는 아름다운 독일어.


톨스토이 또한 제대로 원 텍스트로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았겠어요? 어쨌거나 영어로 제정러시아의 소설들, 프랑스 소설들을 읽었지요. 텐느의 불어저서 『영문학사』도 영어로 읽었지요. 제 자신은 전공하는 영시들 이외에도 많은 책들을 영어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외국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무엇이건 우선 많이 읽어야지요, 그런데 많이 읽는다는 것은 주체성을 그르칠 우려가 있지요. 그래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지요. 학이불사 즉망 (學而不思 則罔)이라….


허나 요새는 내용 없이 떠들기만 하니, 사이불학 즉태 (思而不學 則殆)라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의 경우, 많이 읽을수록 상아탑에 들지 않고 평범한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고, 외국문학을 읽을수록 한국적이 되셨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영어로 영문학 작품을 넘어 다른 책들까지 읽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은 톨스토이를 노문학하는 분들이 제대로 번역해 놓았더군요.


톨스토이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는 작가는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의 두 사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고골이고, 좋아하지 않는 작가는 헤밍웨이입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보면, 미국 신문 파리 특파원과 함께 피레네 산맥 계곡에서 낚시를 하다가, 국경 너머 스페인에서 투우 구경을 하는 여자가 나오지요. 가만히 세어보니 여러 남자, 마지막에는 아마 투우사와 놀아났습니다. 그게 원 소설인지. (우와, 내가 중학교 때 『해』를 소화 못한 것이 그냥 무식이 아니었구나.) 요즘 잘 팔리는 젊은 여자 작가들, 다들 재치 있고, 너무 멋있고, 세부에 대한 풍부한 자료도 돋보이고, 감각도 세련되어 훌륭합니다만, 집요함, 깊이, 객관성, 자기 아닌 딴 사람 이야기, 폭, 능청떨기나 시침 떼기, 뭐 그런 것이 조금 아쉬운 것 같습니다. (나는 젊지도 않고 잘 팔리기는커녕 이름도 없으니 다행이다. 내게 나무라심은 아니니까.)


그런데 선생님, 저희 미술대학에 오래 전에 화가교수가 역시 화가인 아버지의 훈계로 교수직을 그만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화가는 오로지 제 그림만 그려야지 무슨 남 가르칠 시간 있느냐는 호통에 고개를 숙였다는 후문이.


화가가 미대에 있었는데 그랬나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교수, 혹은 교수작가를 ‘주말작가’라 그러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시간 없어 못쓴다? 글쎄요, 이점은 확실합니다. 부지런만 하면 가르치면서도 쓰고, 게으르면 시간 많아도 못쓴다. 간결하고 단호하시다.


하긴 다시 독문학 얘기라서 죄송하지만 조금 안다는 게 그거라서, 에.테.아 호프만이란 역시 낭만주의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평일에는 판사요 기껏 약간의 음악가, 일요일 낮에는 그림을 그리며, 저녁이면 깊은 밤까지 매우 위트 있는 작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불안한 사회상황이나 혹은 필화사건으로 법관직을 잃으면 시립극장의 악장을 많았을 수준이었고, 모차르트를 존경해서 세례명을 아마데우스라 개칭까지 했답니다. 아무래도 옛사람들이 전인적인 경우가 더…….



어리석은 질문


선생님 작품을 읽다가 갑자기 느낀 점입니다만,「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에서 미로와 마이욜을 왜 혼동된다 하셨을까 의아했습니다. 마이욜 하면 우선 ‘누드의 조각가’를 떠올리지만, 중요한 것은, 로마 시대 이후 종교적 테마를 일체 사용하지 않은 첫 번째 조각가라는 점 아닙니까? 그가 표현하는 여성은 더 이상 신화 혹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 여성은 그 자체로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는 “우리들의 시대는 이미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했습니다. 같은 작품에 이런 구절, “믿음심판은 물론, 기독교가 시들해지고, 종교 자체가 희미해지자, 이상하게도 평화가 왔어요. 종교가 가르친 것이 종교가 없어지자 실현된 셈이지요. 종교가 사랑과 평화를 가르친 것은 그것이 가는 데마다 미움과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종교가 살신성인했어요.”라는 대목도 함께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특히 시대적 초미의 관심사와 관련하여 종교관을 살짝 여쭤 보고 싶어집니다. “대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라 규정하는 이슬람의 관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실지? 지금 종교가 성해서 싸움이라고 보십니까?


사실은 선생님께서 최근에 한 신문에 연재하시는 칼럼을 본 기억이 있다. 그 기억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다. 선생님은 이 비극을 “크게는 문명의 부딪힘이고, 작게는 종교의 다툼일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의 9.11 때 정해진 것이 아니고, 아주 먼 옛날, 어쩌면 예수와 마호멧이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쓰셨다. 가슴이 아프게 공감되는 부분이다.


기독교인인가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신다. 기독교를 우선 우리 정신의 말살 때문에 좋아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영문학교수로서 기독교문화를 열강하곤 했지요. 기독교문화 없이 영문학이 없으니까. 또 기독교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내가 말할 수 없이 존경하는 것, 그것은 겸손과 굴종(사실은 단 한번 영어를 쓰셨는데 ‘휴밀리에이션’이라고, 정확한 번역인지 모르겠다)입니다. 하나는, 온갖 바라는 것 해주십사 기도 후에,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둘은, 무조건적 신 앞에의 굴종.


그러나 이 본질적 기독교는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만 가능했다고 보신다. 현대의 타락한 기독교를 배제한 톨스토이의 원시기독교, 혹은 함석헌씨의 무교회주의를 말씀하신다. 현대에는 ‘기독교적’이란 말이 침략적, 자본주의적, 미국적 변주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양심적인 기독교 사회는 존재한다고. 예를 들면 에즈라 파운드, 미국 시인이면서 『사서』를 탐독하고 이탈리아에 살고, 미국 군인들을 일컬어 “루즈벨트와 그의 유태인들," “유태인들과 그들의 루즈벨트"한테 속아서 전장에 나왔다고 반전방송을 했던 노익장에 대해. 역사적으로는 미국 건설 초기의 중농주의에 대한 중상주의의 승리와 그 이후의 주류를 형성한 세력들에 대한 심도 높은 강의가 펼쳐질 기운이 넘치신다.


양심적인 서양인이 하필 매우 동양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파운드 비슷한 연배였던 극작가 브레히트도 노신을, 그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아큐정전』을 개작하기도 하고.  


그건 중국의 고전을 뒤집는 방향이잖아요. 오히려 헤세 같은 반전주의자도 동양사상에.


예 물론, 다른 이데올로기에서도 ‘양심적'이라 할 서양 작가들의 경우 동양을 또는 소위 제3세계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일 뿐입니다. 독일 시인 에리히 프리트는 유태인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이여!」라는 시를 발표했지요. 팔레스타인인들을 불시에 사막으로 내몬 이스라엘에게 경고였어요. “우리가 박해받을 때/ 나는 너희 중 하나였다./ 너희가 박해자가 되면/ 내 어찌 그대로 있을 수 있나?// [중략] 패배자들에게 너흰 명령했다/ “신발을 벗어라!”/ 속죄양들처럼/ 그들을 황야로 내몰았다.// 황야의 모래 위/ 그 맨발의 기억은/ 너희들 폭탄과 장갑차의 흔적 보다/ 더 오래 가리라.” 양심적인 서양인들은 사해동포주의로 돌아갈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호전적인 조국에 무조건적 순응하지는 못하는 것이 시인들의 생리입니까? 그렇게 조국에게서 곤욕을 치른 파운드 외에도, 선생님 작품 속에 “현대 영어시인 천오백 명을 상대로 조사해봤더니, 스물일곱인가가 신경파탄을 일으켰고, 열다섯이 자살했고, 열다섯이 술중독됐고, 열넷인가 전사했고, 감옥에 간 사람도 근 스물이…”라는 대목에서도 멍해졌습니다만.


꼭 시인보다도, 의식이 강하다 보면 충돌하는 경우가 흔하지요. 대중매체의 언어와 싸우는 것도 그렇고. 거기 보면….


다시 가리키시는 “한글로 글쓰기”에는, 말을 잘 못하면 방송이나 텔레비전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피해’는 ‘해를 입다’이니 ‘피해 입다’는 잘 못이다. “이런 글 백 번 써 봤자, 방송매체에서 태풍 매미가 입힌 피해라고 한 번 말하는 것을 당할 수 없다.”


축구 못하면 운동장 안나오는 것이 기본이지요. 그것을 지키니까, 인맥이고 학연이고 다 무시하고, 축구 잘하는 선수만 뛰게 하니까 월드컵 때 일이 되었지요. 그러니 한국말 못하면 방송 안나와야지요. 예상보다 단호한 어조로 한글의 오용을 나무라신다.


그 글에는 ‘미국 들어간다’는 틀렸고, ‘미국 나간다’가 맞다고 쓰여 있다. 맞다. 미국 나가계실 때, 하버드와 털사 대학에 몇 년 씩 계실 때, 영시 공부와 한글로 소설쓰기 두 가지를 다 하실 수 있었나요? 속으로만 물었다. ‘미국 나간다’라는 표현을 써보기 위해서.


그 밖에도 속으로만 물은 것이 많았다. 선생님이 애지중지하시는 오래된 책들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고 싶은 마음도 속으로 접었다. 출입문과 창문을 빼고는 모두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 소장서 중에는 영어권 책은 차치하고라도, 고전의 영역본들이 모두 19세기 책이다. 『오위디우스의 변신과 헤로이데스 선집 축자 행간 번역』(필라델피아 1861년), 『‘에픽테투스 전집』(보스턴 1865년), 『유리피데스의 비극들』(뉴욕 1875년, 1863년),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텐느의 불어 저서 『영문학사』(뉴욕, 1879년)와 『실러의 생애』(런던 1883년)를 영역본으로 가지고 계신다니. 하지만 무엇을 더 욕심내랴! 『용병대장』의 후속이자 결미부라고 하신 『말뚝』을 선물로 받았지 않은가.


겨울 해는 일찍 진다. 강아지들이 새삼스레 짖는다. 선생님의 배웅으로 문간을 나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니까. 솜씨 소문난 전주의 저녁밥, 곁들일 소주 한잔을 아쉽게 사양한다. 이름모를 한국 차의 향기가 옷에 베어있으니 되었다. 『달궁』의 산실 그 서재를 혹시 모를 두 번째 방문을 위해 다 헤집지 않고 아껴두길 잘했다. 사람들이 하이델베르크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은 그곳에 심장을 떼어놓고 오기 때문이라고 하질 않는가. 믿거나 말거나.          


                                        2003년 12월 30일 화요일


 소설시대 7호 , 한국작가교수회, 평민사 2004. 9-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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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3. 11. 20. 21:57

와의 만남

『꿈꾸던 것들은 아직도 꿈인가』2003 (이화에세이)

1.

해방의 떠들썩한 열기가 식어버린 새해 혹독한 겨울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바다 구경 한 번 못한 우물 안 개구리로 상경하여, 이화여자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르는 겨울 또한 혹독한 추위를 실감했다. 합격 통지에 한껏 누그러진 봄이라 해도 서울은 여전히 추웠다. 돌 벽으로 된 기숙사 건물만큼이나 이질감으로 추운 방은 마찬가지로 썰렁한 교회당과 더불어 냉랭한 서울 시대를 열었다.


손이 시린 봄은 마음도 시리게 한다. 왜 그래야 되는지도 모르게 대의원이 되어서, 칸막이 교수실로 학생-교수간 심부름을 다니던 걸음걸음이 얼마나 가시밭이었을지……. 유창한 독일어로 일년생 기를 죽이는 교수님 ― 나중에야 그 유명한 천재이자 당시 신분은 강사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 서슬에, 그녀는 아예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사투리건 표준말이건 우리말을 아예 더듬는, 독일어는 주눅 든 꺽다리 신세. 큰 키는 당시 그리 탄성의 대상도 아니었고, 쥐구멍을 찾고 싶을 땐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그때 주눅 든 버릇으로 지금도 등이 남달리 일찍 구부정한 것이리라.


천재 교수님은 검은 스카프를 즐기셨다. 첫 봄의 기억은 그것뿐이었다. 그분이 그녀들에게 친칭을 썼는지 경칭을 썼는지도 들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문법은 충분히 마스터했노라’ 자부했던 독일어 실력(?)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과외로 학원에서 단편소설까지도 읽었던 독해력이 적어도 대화하기에는 제로였다.


문제는 그녀가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으로 키워진 시골학생이라는 데 있었다. 남자 교수님들 보다는 친근해야할 대상으로서 여성만을 찾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여자는 드물고, 서양 선생님도 영화에서처럼 낭만적이 아니라, 새의 부리 같은 날카로운 느낌만을 받았다. 자연히 천재 선생님이 오시는 요일에만 교수실에 갈 핑계를 찾았다. 그러나 말로는, 그 천재 선생님이 왠지 싫어서 그 분 오시는 날엔 교수실 들르는 일을 피한다고 광고했다. 이율배반의 감정으로 못난 시골티를 감추며 그 선생님만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실은 너무도 훗날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럴 것이 곧 이어 ‘진짜 독일어 목소리’를 가진 여교수가 부임하셨고, 너나 할 것 없이 이성적인 교수의 표상인 독일어 목소리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들 몇몇은 그 시냇물 구르듯이 읽는 독일어 목소리에 반해서 독일어로 “시냇물”이란 이름의 스터디 그룹으로 성장했다. 스터디 그룹은 생존의 방법이기도 했다. 상당한 분량의 원서를 한 학기에 읽어야 했지만, 그녀들은 터무니없이 실력이 부족했고, 교수님들은 더러 나머지 부분을 숙제로 내주시기 때문이었다. 번역본?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공부만 하느라 세월 보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일단 나머지 분량을 몇 등분해도, 불안한 소심증의 그녀는 소설작품이건 드라마건 전체를 보아야했고, 밤샘이 습관이 되었다. 천재 선생님은 어느 새 다른 대학으로 옮겨 가셨고, 그녀들은, 적어도 그녀는 그분을 잊었다. 무수한 밤샘의 나날에서 잊었다고 생각했다.


검은 스카프는 사실 첫 학기가 끝나가는 여름까지도 여전했다.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검은 스카프는 앞쪽으로 당겨져서 턱 끝에서 묶여 있었고, 그러면 삼각형 얼굴이 드러났다. 오월 말 메이데이 행사 때면 성급한 민소매 원피스도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서 학기말까지 검은 스카프라면 조금은 섬뜩했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동기생이 있었는데, 그애 또한 놀랍게도 선생님 따라서인지 시커먼 눈매를 하고 검은 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 아인 사업가인가 장차관인가 아무튼 엄청 (돈)귀족에 미스 코리아 같은 몸매를 지닌 부족할 것 없는 친구였지만, 대개는, 그리고 그녀도, 일부러 못 본채 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혹은 신포도의 경우였다. 그리고 천재를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겐 보다 지적이며 시냇물 구르듯이 독일어를 읽어주는 새로운 우상이 나타났으니까.

 

2.

인연은 길고 길어서 그녀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한 가지 공부를 위해 이화 터전에서 살았다. 이제와 본업은 지방대학 독문학과 교수, 현대독일소설을 중심으로 강의한다. 그녀들의 ‘독일어 목소리’ 우상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여성문학 강의도 시작했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을 새삼 경탄하며, 바흐만의 환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심지어 작품만이 아닌, 막스 프리쉬와의 좌절된 사랑에, 좌절된 공동생활에, 의미부여를 하기도 안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깊은 밤중이면 그녀는 글을 썼다. 여중 시절 교지에 「무제」라는 시 한편을 발표한 것 이외에는 불모로, 여태 남의 글 읽는데 비겁함을 소진하고 있는 자신이 안쓰러워서였다. 마침내 어느 날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으로 소설계의 문턱을 넘보았을 때, 그때 그녀는 옛 사랑을 다 들켜 버리고 말았다. 인용된 시는 물론, 많은 지면이 오직 그 천재 선생님을 위해 바쳐졌기 때문이다. 물론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변신되어 나타났지만, 누군들 이화에서 함께한 사람이라면 천재 선생님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시 중에서 「배반」은 이름조차 거명하며 인용했고,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라는 구절도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인용했으니. 그녀는 첫 애증의 대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화의 첫 학기 천재와의 만남은 쟝 아제바도를 나누어 품게 했으며, 오늘 밤새워 글을 쓰게 한다. 그녀에게는 습작이란 없다. 글쓰기가 의식적인 작업이라기보다는 그냥 살아있는 표식이니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게 도와 줘…… 나를 살게 해 줘…….”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천재의 목소리가 환영으로 다가온다. 목소리는 어스름 글씨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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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3. 4. 19. 22:20
 

어머니가 되세요!


 

<Friends> 2003년 5월호


 

고생 많았소, 아이들 이렇게 자라도록 보살펴 기르고.

그리고 저 ……, 나 또한 불편 없이 살아온 세월이었소.


큰 아이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남편의 어색한 감사 표시다. 함께 부모이면서 감사라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과묵한 남편의 그만한 말은 큰 의미이리라.


‘아이들 이렇게 자라도록’ 살아온 세월이 믿기지 않았다. 이 많은 날들, 사랑이 지속되고 결혼해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결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한 청사진의 미래를 꿈꾸며 결혼한다. 그러나 더러는 크게 미래를 설계하지 않고서도 결혼을 한다. 절실한 현재 때문일지……. 사람은 생각보다 근시안적이다.


그녀는 후자에 속했다. 아직 통금이 있던 시절, 통금 때문에 헤어지는 연인들은 차라리 결혼을 했다. 상대적 빈곤감이 덜한 시절이라 결혼에 조건은 그리 없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얼떨결에 아기 엄마가 되는 일이다.


그녀는 엄청난 사태 앞에 세워졌다. 만삭에도 걱정은 설마였고 여전히 책방이나 영화관을 쏘다니며 맹렬한 기세를 부렸었건만, 새로 태어난 아기는 경이 그 자체이자 어쩌면 공포였다. 손가락을 차마 만져보기도 두려운 존재, 온전할까 깨어질까 두렵기만한 존재였다. 아기는 어미보다 훨씬 용감했다. 어미와 눈을 맞추기도 전에 가슴을 파고들며 양식을 찾았고, 눈을 맞추게 된 이래로는 모든 것을 어미에게 의탁하고 물어왔다. 20대 어머니가 되는 여자들은 미숙하기 그지없다. 학교를 오래 다닐수록 상대적으로 생을 몰라서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아도 불완전한 인간에게 더 불안한 작은 생명이 의심 없이 다가올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을 움츠렸다. 긴 겨울밤의 몽상도,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잊혀져가고, 봄가을 들판을 헤맬, 혹은 여름 바다의 일렁이는 황혼을 그리겠다는 치기도 사라졌다. ‘네가 찾을 때’ 그 자리에 있자,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겠다는 다짐으로.


아기는 목욕시킬 때면 앙앙 울다가도 곧 젖을 물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만으로도 어미를 행복하게 했다. 쏘옥 삐져나오는 앞니만으로도, 뒤집는 엉덩이만으로도 기쁨을 주었다. 그녀는 아기를 따라서 말을 배웠다, 아기처럼 좋은 말들만 골라서 배웠다. 세상에는 좋은 말들만 있었다. 아장아장 아기 따라 걸음을 배웠다, 위험한 행보가 아닌 가장 안전한 길을 익혔다. 아기가 둘이 되자 둘을 똑같이 사랑하기를 배웠다. 두 아기를 보면서 서로 사랑하기를 배웠다. 세상에서 여럿을 똑같이 사랑하기를 배웠다. 아이들은 날로 새롭게 모든 사물을 향해 호기심에 넘쳤고, 그녀 또한 생에 호기심을 더해갔다. 아이들의 눈을 따라 세상을 보면서 순수한 긍정을 배우고, 아이들의 필요로 살아있는 의미를 느꼈다.


의미가 생기자 그녀는 새삼 생기가 돌고 진정한 의욕이 생겼다. 세상엔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이 많았다. 그것을 왜 몰랐을까, 알 수 없는 불안과 허망과 좌절로 애태우던 날들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토론을 하면 할수록 아득한 안개 속 미궁을 헤맸던 시절이 정말 있었던가?


그녀는 아이들 따라서 사람이 해서 즐겁고 좋을 일들을 골라서 하는 법을 배웠다. 온통 세상을 다시 배웠다. 마치 처음 배우듯이 조심조심 배워 나갔다. 이번엔 훨씬 신중하고 안전한 선택들이었다. 그 모든 일은 아이들이 그녀를 인도하는 그대로였다. 아이들이 고개 들어 쳐다보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의 능력으로나마 그저 어머니이고자 했다.


고생이라구요? 아니지요. 어미가 아이들을 키운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어미를 살게 했지요. 아이들이 있어 진정 웃음을, 행복을 알았고, 아이들이 있어 건강한 나날을 꿈꾸어 왔지요. 아이들 아니었음, 무엇이 생에 이만큼 나를 매어놓을 가치가 있었겠어요?


그렇게 대답하려던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 말 없이 미소만 보낸다. 남편은 어쩌다 술이 거나해진 날이면 차갑고 참을성 없어 보인다는 그녀가 살아온 방식을 슬쩍 건드려보곤 했었다. 예상보다 나았다는 의미인지,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는 투를 감추지 않았다. 오늘 같은 표현을 하리라고는 조금 의외다.


정체성? 그녀는 순간 생각한다. 정체성은 불변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 그 본질은 변치 않더라도, 누구이어야 하는가를 포함시키면 조금 변화가 생긴다. 어머니인 사람은 ‘어머니’가 큰 비중이 된다. ‘비중’이라고 하는 말에서 나이 따라 점점 무거워진다는 여자들의 희화적 상이 생각나서 혼자 피식 웃었다. 남편은 감사 표시에 웃음기를 흘리는 그녀가 의아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모처럼의 덕담이 쑥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한다, 그냥 다른 말인데, 웃으세요. 아내 칭찬일랑 마시구려, 여자들은 나이 들어가면서 너무 무거워진다는군요. 늘어나는 체중에다, 머리는 석두요, 얼굴은 철판이 아줌마 상이랍디다. 그러게 올려주려 해도 무거워서 절로 가라앉는답니다.


사람 참. 그렇게 자조적이라면 여자들이 상당히 지적 유머에 능하구려.


되려 적나라한 말이지요 뭐. 아무튼 우리 애들은 당신을 더 닮아 참을성도 어미보다 낫고, 내차기도 덜하니 다행 아닌가요.


그렇게 대꾸하면서 오늘따라 어색한 표정의 남편 곁을 슬쩍 일어난다. 그녀는 속으로 되뇐다, 다음 생에서는 그럼 당신도 어머니가 되어 보세요!                                        (2003. 4. 19.)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