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5. 3. 25.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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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시대 2005

 

춤꾼을 말해 춤을 업으로 하는 인사렷다, 장사꾼이 장사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듯이. 춤이란 곡조에 맞추거나 흥에 겨워서 팔다리와 온몸을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작을 말한다, 사전적 정의다. 그날 밤 그 사람은 그러니까 춤꾼인가 싶었다.


처음 그 사람이 눈에 띈 것은 한 사람이 통기타를 치고 누군가가 드럼을 했다가 말다가 하면서 노래만 부르는 사람 합해서 서너 명이 음악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맥주가 있는 그런 곳에서였다. 눈에 선 것은 한 손님이 그룹의 멤버이기나 하듯이 딱 달라붙어 앉아서 그들의 연주를 바라보는 모양새였고, 그런데 얼굴은 해맑은 미소로 가득했다. 그렇지만 추운 겨울 밤, 손 한 마디도 안 되는 짧은 머리카락을 하고서 노래패 옆에 달라붙어 앉아있는 모습은 교교했다. 홈쇼핑에서 두어 벌 함께 샀음직한 그저 그런 체크무늬 셔츠는 그냥 몸을 가리는 일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가리개였고, 그것도 엉성한 크기 때문에 형님이거나 좀더 크고 뚱뚱한 사람에게서 얻어 입은 몰골로, 멜로디 하나하나에 그저 감탄을 하고 있는 표정은 혹시 이 사람이 정말로 교도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세상 노래 스타일에 온통 감탄하고 있나 싶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했다.


그날 정식은 오랜만에 동창생 몇 만나서 송년의 술을 했다. 만으로 쳐도 40이 넘어가는 송년의 밤은 숨이 막혔다. 40년 세월, 누가 인생은 40부터란 실소를 하게 하는가. 이런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통기타 음악을 들으며, 앞이 아닌 뒤를 돌아보는 밤, 그것이 사십인 게다. 그들 중 하나는 대학에 있는데, 그 친구가 젊은 선생님들하고 몇 번 와보았던 소위 “7080 문화를 만끽하지” 하면서 이끌었던 곳이다.


처음 그 대충 까까머리를 보면서는 거의 불안한 느낌에 맥주를 마셔도 몸이 풀리기는커녕 오도카니 앉아 그 모양새를 관찰해야 했었다. 그래, 나잇살 들어 보이는 얼굴로 미루어 제대한 군번은 아니었고, 교도소가 아닌 다음에야 다른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감정은 여전히 풍부하다 그건가 참. 쪽지들이 가끔 건네이는 것으로 미루어 신청곡들을 적는 모양이었다. 정식네 팀에서도 뭔가 말하라는데 정식은 여전히 건성이었다. 저 진지한 얼굴, 악사들이 클래식도 또 유별나게 감동적인 그룹사운드도 아니련만, 저 진지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주객이 전도라더니, 정식은 음악보다는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 볼수록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었을까 하는 착각이 드는, 평범하고도 평범한, 어떤 특징도 없는 얼굴이 더욱 기이했다. 적당히 작은 눈, 적당히 낮은 코, 적당히 누런 얼굴 색, 무엇보다 적당히 나이든 얼굴이 오히려 이상했다. 저쯤 행동하는 사람이면 뭔가 좀 눈빛이라도 달라야 하지 않은가.


연주자들이 쉴 시간이 오자 그는 덩달아 가운데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건너편에는 여자 둘이 있었다. 여자들은 화장기도 제법 있고 유행하는 모자도 얹어놓고 있었다. 발을 꼬고서. 이상한 트리오다. 이들을 찾아 나선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고서 마음을 돌린 그들은 제 이야기에 빠졌다. 아따, 그 선생 운도 되게 나쁘네.


이야기의 중심은 이번에도 대학에 있는 동창이 몰고 다녔다. 전공들이 다른 사람들의 느슨한 결합체이다 보니, 흉을 보아도 흉이 되어 돌아갈 리 없는 독특한 환경 때문이었을까? 그날도 한 ‘불운한’ 초임 교수에 대한 성토와 동정이 주제였다. 봄 학기에 발령을 받아서 머슴에서 왕이 된 기분의 전임강사. 그 봄 학기를 마치기도 전에 동티가 나다니.


선생은 그 동안 뒷바라지에 힘든 아내와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둔 가장. 그의 나이 불혹을 넘긴 뒤에서야 시간 딱지를 떼고 전임이 되었다 했다. 거기까지의 고생은 누구나 거치는 통과의례에 불과하다. 막스 베버가 그랬다던가, 교수가 되고 못되고는 만원인 전철 타고 가다가 앞자리 사람이 내리면 앉을 수 있고 아니면 아닌, 바로 그만큼의 확률과 우연이라고, 대학에 있는 동창은 제법 겸손한 멘트를 섞어서 자신을 지키면서, 그 신임교수의 운명을 보고했다. 3학년 여학생과 동티가 났다는 사건. 기숙사에 들어있는 여학생이 기숙사 통금 넘어서 이상한 카페에서 어떤 ‘교수님’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 노출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여학생은 인터넷에 하소연했고, 교수님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는데, 이는 순전히 성적 등을 담보로 뭔가 상납을 요구하는 성폭력이었으니 처벌해달라는 요지였다나. 알고 보니 둘의 이메일 교환에서도 증거가 여실했는데, 교수는 늑대라는 ID를 사용했으므로 노골적으로 한창 물오른 양을 잡아먹었다 등등.


그럼 당시 상황은 살벌했겠네? 세 번째 녀석의 말이다. 종합병원에 근무하며 조신하게 살고 있지만 가끔 속모를 친구였다. X조교 사건보다 더했네, 그렇제?


뭐야, “정 뗄 칼 없고, 임 잊을 약 없다”는 사랑이야긴가? 그래, 사랑 빼고 뭔 이야기가 있겠나?

 

뒷이야기를 풀어내는 교수는 한참 맥 빠진 소리였다. 그야 살벌했지, 한 동료 교수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고 부인은 탄원서를 들고 학장실을 찾아와 눈물로 호소했지만, 실상 대학사회라는 게, 한 동료의 고통과 한 학생의 상처에 무력한 개인들뿐이더군. 사실 스승과 제자라는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우리 중 누가 과연 이런 남녀 문제에 완전 자유로울 수 있겠나? 헌데 어찌되었든 한 지붕 밑에 사는 사람들로서 불행에 빠진 당사자들의 고통을 함께 감내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아니 뭔가. 자넨 그럼 그런 불한당을 가만 둬야 된다는 거야 뭐야. 이 사람 대학교수 되더니, 가재는 게 편이야 뭐야!


아니 내 이런 말의 관점은 그 잘못된 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 고통에 함께 동참하는 동료들의 모습이 아쉬웠다는 것이지. 한 인간의 영혼을 구하면 전 우주를 구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잖나. 교수 만들기 뒷바라지 세월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아내는 어떻겠나. 사실인즉, 매력하나로 사는 여학생들이 교수들에게 성적 협상차 연구실 찾아들었다가, 거절당하면 스스로 옷을 찢고 고함치며 뛰쳐나가서 성폭행 뒤집어씌우기는 미국에선 벌써 60년대 고전이라지 않은가. 도통 미스 뷰티에 미스 스트롱이야 요새 여자들은.


하긴. 역정을 추스른 종합병원 친구가 딴청을 부렸다. 하긴 요새 여자들 말이야, 계모임에서 며칠씩 여행가기는 일도 아니거든. 전에는 뭐 큰 솥에 곰국 끓이면 마누라쟁이 며칠 나갈 까 안다더니만, 요샌 그것도 아니래 글쎄. 냉장고에 “까불지마” 그렇게 써 붙여 놓으면 그만이라나.


까불지마? 그거 만우절 이야기 같네.


아니 영화제목 아냐, 오지명 최불암 나오는? 참 그런 것도 한다네, 누가 볼 거라고.


내가 봤네 왜. 첫 장면부터 찢어진 청바지에 짧은 잠바 날리며, 터프하게 지프차를 몰고 나타나는데, 믿을 수 없으리만큼 원시적인 수컷 본능을 뽐내고 싶어 하지만, 누군들 그들의 카리스마를 알아줄까? 공격에는 도피가, 위협에는 복종이, 게다가 회유와 텃세 등 갖가지 동물적인 행동들이 난무해 보았자, 글쎄, 덜 떨어지고 늙어버린 건달들은 그저 돌아가신 후에야 찾게 될 애절한 그리움의 아버지 생각에 목이 메일 뿐. 코너에 내몰린 중년이 외쳐 봤자 뭐, “까불지마.”


참 그런 영화도 보나. 그런데 아내들은 그들에게 먼저 외친다고, “까불지마!”


그런 말 아닐세. 그냥 우스개야. 까스조심, 불조심 시리즈야. 그런데 정말 우스운 것은 마지막 “마”를 두고서 버전이 두 가지라는군. “마누라만 생각 해!” 그것이 하나고, 다른 것은 “마누라 찾지 마!”라네. 우리 집사람 동창들이 모여서 한다는 이야기가 거기서 두 패로 갈렸다는군. “생각 해!” 쪽을 고집하는 부류는 어쨌거나 아내는 자유를 갖되 남편들은 조심시켜야 한다는 이기적 유형이고, “찾지 마!” 쪽은 개인주의 형인데, 어이, 우리 입장에선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참 별난 선택도 다 있네, 이왕 그리된다면 거야 자유방임주의가 낫지.


무슨 소리야, 그래도 “생각 해!” 쪽은 관심은 있다는 증거 아냐. 요사이 평균 수명 발표를 보면 우리가 살 날도 한참 긴데, 그나마도 무관심이면 어찌 버티나.


이 한심들아, 우린 아직 그런 처지는 아니잖아. 알콩달콩 아이들 귀염 속에서, 아내들 애교도 아직은 괜찮잖아?


이 한심한 가운데 악사들이 돌아왔다. 귀에 익은 〈화〉가 첫 번째 곡이었다. 그들의 팀에서 넣어준 것이 분명했다. 동창 하나가 다른 친구들의 욕구를 언제나 잘 기억하는 장점을 지닌 덕이다. 너와 맹세한 반지 보며 / 반지같이 동그란 너의 얼굴 그리며 / 오늘도 젖은 짚단 태우듯 / 또 하루를 보냈다 / 오늘도 젖은 짚단 태우듯~~


애달픈 노래를 흐느끼는 친구가 바로 대학교수다. 국사전공이라서 특별히 유학 갈 시간 돈 투자하지도 않고 일찍 교수가 되어 선망의 대상인데, 노래는 꼭 사연 있는 것으로만 불렀다. 어느 새 다들 알게 된 노래를 정식도 한껏 따라 불렀다. 오늘도 애 태우며 / 또 너를 생각했다 / 오늘도 애 태우며~~ 홀의 누구라도 함께 부르는 분위기 탓이다. 화 안 된다 떠나지 마 / 이대로 이별일 순 없다 / 화가 이 세상 끝에 있다면~~ “안된다” 할 때는 반쯤 서서 양팔로 허공을 안았다.


젖은 짚단이 타더라도 다시 불꽃이 인다는 말인가? 그런 상념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그날따라. 예의 반 까까머리가 서서 나오더니 묘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공옥진의 병신춤 비슷한 것이 도통 묘했다. 어이어 어이어~ 벌릴 듯 말 듯한 입에서 소리라도 나는 듯 했다. 물론 음악소리에 묻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교도소가 아니라 정신병동 출소인가?


정식은 공옥진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 무슨 행사장이었다. 여흥으로 불려 나오기는 대단한 분인 줄 알았는데 그때가 대단한 행사였는가 싶다. 그때 우리가 본 것은 왠지 ‘부끄러운’ 병신춤이었다. 상당히 노골적인 본능이 꿈틀거리는 것으로 느껴져 거북스럽기도 했다. 덩달아 박수를 치면서도 단 한번에 이해할 수 있기에는 그의 예술적 감각은 평범 이하였다. 과장은 있으나 교만하지 않는, 꾸밈은 있으나 거짓스럽지 않았다고 느낀 것은 비로소 훨씬 뒤 그 장면이 우연히 되새김될 때였다. 소리꾼의 딸로 태어났으니 손잡고 걸음마 뗄 무렵부터도 머리맡에 장고와 북소리가 끊이질 않아 귀 장단을 익혔을 것인데, 살풀이춤을 배우면서도 어쩐지 발 디딤새가 엇나갔다는 것이 잘 한 일이었을까. 장단 역시 신무용을 먼저 배운 뒤끝이라 엇나갔다는 것이 잘 한 일이었을까. 배운 대로 잘하는 사람은 밥벌이는 할지 모르겠으나 아무것도 되지 못한다. 그것을 가르쳐 준 이가 공옥진이다. 배운 대로만 했으면 창무극에서 천재가 나타났을까. 천재는 다름 아닌 진실이다 싶었다. 그런 기억이 왜 그 순간 되살아났는지.


홀은 다시 안개로 자욱해졌다. 들어 올 때 본 “하루만 참아주세요!”라던 금연 표시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굴뚝을 밖으로 세우는 연통 난로 때문인지도 몰랐다. 고구마를 얹지 않아도 이런 저런 땔감 때문에 피어오르는 연기, 아마 그런 때문일 것이다.


연기 사이로 그가 다시 설렁거렸다. 오른쪽 어깨가 들리면 왼쪽은 밖으로 삐지는 기묘한 어긋남. 어긋남과 어긋남 사이 미묘한 조화가 피어올랐다. 괭이가 드러나는 기둥에 원숭이 매달리듯 휘어 감겼다. 그 전에는 그런 기둥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기둥에 감긴 네 발은 각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나 싶더니 하나씩 다시 풀렸다. 감길 때에도 물론 한꺼번에 감긴 것이 아니라 어느 것 할 것 차례 없이 이렇게 저렇게 감겼었다. 요란한 스트리퍼들이 등장하는 컬트 영화장면의 칙칙한 관능이 묶이는 막대와는 달랐다. 엄마 품에 안기는 아기처럼 천연한 얼굴은 나이도 성별도 없었다. 그 짧은 머리모양에도 그는 열 살 소녀 같은 인상으로 고왔다. 기다란 두 팔은 덜 자란 소녀들에게서 보이는 전형적인 부조화였다. 안개는 동양화처럼 피어오르고, <라이언의 딸>에 나오는 사라 마일즈처럼, 린치를 당하고서도 온갖 수치와 고통을 극복한 빛나는 얼굴이 되어 있는 그는 이젠 자긍심 강한 처녀였다. 남자들, 더러는 여자들이 섞이어 앉은 테이블 사이로 진출한 처녀는 조금 유혹적인 표정도 지었다. 아무렇게나 입은 헐렁한 체크무늬 남방은 등산복처럼 뻣뻣해서 상체는 옷밖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렇게나 입은 짙은 색 바지도 그저 옷일 뿐이었다. 육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육신이 아닌 춤? 그것으로 타인들 사이에서 무엇을 유혹하는 것일까. 보통 남자 하나가 일어나서 박자를 맞추려고 시도했다. 동지애를 발휘하려는 인간적 남자인 것은 틀림없었으나 춤은 아니 되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누구라도 그 춤사위에 박자를 섞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남도지방의 곰춤을 아니 설사 용두춤을 추었더라도 그 유일무이한 동작은 그의 것일 뿐이었다. 긴 팔과 막대 같은 다리의 엉성한 조화, 곡이 바뀌면 바뀐 대로 그에게는 세상의 모든 음악이 그의 춤을 위한 것인 양 했다. 그 순간 음악이 멎었다.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보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그때서야 느꼈다. 그의 가슴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때서야 뚫렸다.


막 끝나서 여운을 남긴 가사 말이 그때서야 귓가에서 맴돈다. 묻혀갈 나의 인생아~ / 묻혀갈 나의 인생아 ~/ 묻혀갈 나의 인생아 ~ 춤꾼이 멈추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는 노래를 헛듣고 있었나 보다. 뭐였더라, 그래, 그리운 부모 형제 다정한 옛 친구 / 그러나 갈 수 없는 신세 / 홀로 가슴 태우다 흙 속으로 / 묻혀갈 나의 인생아~ / 묻혀갈 나의 인생아 ~/ 묻혀갈 나의 인생아 ~


홀로 가슴 태우다 죽어간 가수를 두고, 그의 불행에 대한 뒷소문도 많았었지. 정식은 서른 두해를 채우지 못하고 가버린 그 작자 생각이 났다. 비슷한 또래였기에 그 죽음은 충격이 더했었다. 노래꾼이 “노래가 안 된다고” 갔다는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특별히 슬럼프도 아니었다던데? 정식은 갑자기 저 춤꾼의 무엇인가가 의심스러웠다. 저치는 키도 고만하고 몸매도 고만한 것이 꼭 죽은 가수만 했다. 실제로 가수를 보진 못했지만, “반토막”이라던가, 별명만 들어봐도 그럴싸했다. 춤사위가 바람에 날리는 풀 같고 나뭇가지 사이의 새 같은 사람이, 그래도 혹시 “춤이 안 된다고” 죽어버릴까? 누굴까, 무엇 하는 사람일까? 대체 뭘까? 진짜 춤꾼일까? 긴가민가하면서 정식은 혼자처럼 우물거렸다, 나이도 꽤 들어 보이는데 뭘 하는 사람일까.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 또래 같구먼. 아닌데, 다른 누가 말했다.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가 그쪽으로 향했다. 연속 내지르는 그의 다그침 때문인가 싶었다. 놀랍다. 더 짙게 피어오르는 안개는 분명 그 쪽에서 시작되었다. 안개 자욱한 속 잘 보이지 않는 거리였지만 분명 그의 손가락 사이로 담배가 삐죽 보였다. 왼손이었다. 테이블에는 사람들 사이로 세워진 맥주병들이 보였다. 그래 목도 마르겠지. 격렬한 춤은 아니라 해도 온 홀의 시선을 받으며 나중에는 손뼉에 맞추어 몇 곡이나 춤을 추었으니 목이 마를 것이다. 잔을 들었다 곧 놓는다. 정식은 대신 마시려는 듯이 무심코 맥주를 들이킨다. 미지근한 무맛이다. 진작 따라 놓고 넋 나간 듯 춤만 바라보았었나 보다. 저쪽이 친구의 어깨에 가려진다. 정작 입매는 보이지 않는데, 고개를 갸우뚱 끄덕 하는 모양새가 뭔가 말을 하고 있나 보다. 짙은 눈썹과 역시 짙은 눈매가 검정으로 검게 그렸을까 할 정도로 뚜렷했다. 이상하다, 나무토막 같은 얼굴에 화장을 했을 리가.


정식이 기억하는 아내의 처음 얼굴은 분홍빛 그 자체였다. 흔히 도화색 가진 여자를 팔자 사납다고  비하하지만, 첫인상에 도화색 뺨이 예쁜 것은 누구나 안다. 겨울이었지만, 병원이라는 온실에서 쉽지 않은 실습과정을 보내고 있었던 처녀에게서는 홍조가 기본이었을 것이다. 결혼 후 한 지붕 아래서 아내의 얼굴은 누런빛으로 변해갔다. 낮 동안의 화장을 지우는 경대에서 돌아 나오는 얼굴은 쌀뒤주에서 닳은 바가지 색이었다. 고운 가루가 묻어난 바가지를 어머니가 왼손바닥으로 곱게 모셔 닦아 주면 순간 반질반질한 얼굴을 내보였다. 그러면 다시 뒤주에 넣곤 하셨다. 탱탱한 황인종 얼굴이 크림의 여운으로 번득이면 흑인의 표정이 되어 나오는 것이 기이했다. 얼굴색이란 낮밤이 다른 것이구나,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뱃속의 아기를 이기지 못해서 겨우내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는 밤낮으로 누렇게 변해갔었다. 얼굴색이란 시절 따라 다른 것이구나, 그것을 또한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또 다시 복사빛 볼을 하고서 분홍빛 립스틱을 바르겠지....... 그런데 몸을 추스른 아내가 다시 분홍빛 립스틱을 바르는 일은 쉬 오지 않았다.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학교 때 배운 <승무>에서 유일하게 외어 남은 구절. 허나 아내의 복사꽃 고운 뺨은 그 어디멘가.


정식의 아내는 바빴다. 바빠 버렸다. 아이를 들쳐 업고부터 뭔가 ‘벌어들이자’는 맞벌이 작전에 들어간 이래 아내는 시간이 모자랐다. 변하지 않은 것은 화장을 지우는 경대 앞 5분인데, 돌아선 얼굴엔 옛날의 번들거림이었다. 그밖에는 많은 것이 달랐다. 짙은 눈썹과 눈매는 크림으로 지워도 지워지지 않은 것 같았다. 바빠서 덜 지우는 것일까? 또한 번들거림은 같아도, 얼굴은 쌀뒤주 속 작은 바가지처럼 탱탱했었던 기색을 잃어갔다. 쪽박이 점점 빨간 호박석을 닮아 간 것과는 다르게, 얼굴은 해 넘긴 밤 껍질을 닮아갔다. 오뉴월 제사에 쓰려고 밤을 칠 때면 물기 말라버린 밤 껍질은 참 고약하다. 달라진 것은 그것 말고도 많아졌다. 분홍 립스틱은 기억에도 없는지, 으깨진 대추 빛을 선호했다. 아내로서는 분홍빛에 대한 정식의 설레임을 아무래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게 말이야, 도예 하는 분이라는구먼. 우리보다도 한참 위라네. 친구가 자리로 돌아와서 간략하게 보고했다. 그래 그렇겠어. 뭐야, 더 위라고? 도예라니, 도자기? 다도 뭐? 느닷없는 질문까지, 서로 다른 기대치 때문에 조용히 듣는 대신 웅성거렸다. 이 지방 사람이 아니고, 태백산 너머에서 이쪽으로 여행 중이라는데. 그럼 춤은? 전문 춤꾼이 아니라고?


춤꾼이 아니라는 말에 서운한 건 누구보다도 정식이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 박사고깔에 감추오고~~ 첫 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그렇게 내뱉고 보니, 저 짧은 머리는 고깔에 딱 이었다. 그럼 파계승? 그 소리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절제된 승무를 전문적으로 추는 춤꾼일까 상상했는데....... 정식의 말에 다들 끄르르 웃었다. 이 보게 너, 요새도 헛꿈이냐? 너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 그 왜, 시인선생님이 신용 좀 준 것 가지고 한 때 시 쓴다고 매달린 것은 알지만. 뭐 짧은 머리 보면 당장 <승무>가 입에서 튀어나오니, 그런 거야? - 아니 그건. 저 사람 춤이 좀 곱고도 서럽지 않았냐, 빛나는 듯 서글픈 저 얼굴. - 사람 참, 저게 무슨 빛나고 서럽고야, 그냥 무표정이구만. 자자, 우리 사람 저만치 놔두고 그만들 하자. - 춤꾼이 아닌 건 확실한데, 공방인지 작업실인지 아무튼 맘 맞은 사람들 모이면 춤도 추고 그런다 하드만. - 그럼 그렇지, 예사 솜씬 아니지. - 혼자 사는 남잘까? 남자들이랑 어울릴까? - 아니 이사람, 혼잔가 아닌가는 아직 못 물어 보았고, 남자라니, 여자야 여자. 한참 누님뻘이라니까. 저기 여자들 일행 셋이 안보이나?


다를 서로를 두리번거렸다. 춤꾼이 남자가 아니었어? 멀쩡한 중년 남자들의 눈으로 춤추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남자일거라고 느꼈다니. 그것도 춤을 감탄하면서 동작마다를 따라 보아놓고서. 다음엔 서로 비식거렸다. 남자가 남자보는 눈 있다더니만, 남자라서 여자를 잘 못 보았나? 갑자기 홀 안의 안개도 걷히고 테이블들이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었다. 건너 좌석들을 흘끔거리는 짓은 계속하기 무안해졌다. 다른 화제가 급했다.


나사의 한 연구원 주장이, 이번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강진으로 지구가 작아졌다데, 자전 주기도 미세하지만 영구적으로 짧아졌다 하고. 정식은 신문기사를 떠올려 화제를 바꿨다. 그래, 구들장 하나가 다른 구들장 아래로 끼워졌대나 뭐라나.


우연히 이과 출신이 하나 끼었다. 일행은 다들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그건 그저 계산상의 이론이지, 실제 측정결과가 나오기는 시일이 걸리고 또 그것을 증명하기엔....... 아니 그보다는 이번 방학엔 혜성 구경 가자는 딸아이 때문에 그냥 못 넘어갈 것 같아. 그는 말을 바꾸었다. 맥홀츠혜성인가 그놈은 쌍안경으로도 바로 볼 수 있을 만큼이라니, 1월 내내 이삼일짜리 캠프를 여는 곳도 있다네. 아버지들이 이삼일 나가기가 쉬운가. 서울 근교들일 텐데 지방 사람들은 더 힘들지. 아이들만 보내는 곳 알아보았는데, 데려다주기라도 하려고 목금토, 토일월 반을 인터넷에서 찾자마자 마감되었더라. 이 아버지 통도 크시네, 애들만 어찌 보네. 한국서 애들 살기 무서운 것 모르시나. 아니 그럼 사는 것이 다 그렇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나.


화제는 이리 저리 흐르고, 정식은 고개는 일행 속에서 정중심을 향한 채 오른 어깨 너머 비스듬히 춤꾼의 테이블을 흘끔거렸다. 앞머리를 갸우뚱 내리고서 시선의 방향을 숨겼다. 다시 태워 문 담배가 반짝 불빛을 보였다. 그 ‘여자’가 빠끔거리는 것이리라. 벽에 걸린 “오늘 하루만 금연합시다!” 쪽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글씨는 색색으로 분명한 만큼 무안했다. 한글도 못 읽나? 타지사람이라고 안면몰수인가? 다시 아래쪽 시선을 이용해서 바라보니 길게 뻗은 다리가 앙상하다. 상박 하박이 그저 나무젓가락이었던 팔이나 막대 같은 다리나. 우리보다 위라고? 여자도 나이가 들면 성을 초월하나? 어느 나이가 되면 그러나? 하긴 옛날의 어머니들은 그렇다. 아니 그 반대다. 어머니들은 젊어서도 나이 들어서도 한결같은 어머니다, 여성이다. 더 할 수 없이 푸근한, 마르고 작은 체구에도 장작개비 같지 않고 부드러운. 늘상 같은 어머니. 헌데 소녀와 처녀와 심지어 아저씨를 다 아우르는 저 사람은 대체 뭔가. 절대로 어머니는 아닌, 그래도 여자?


그 여자에게서 어머니를 볼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여자라 했으면. 밤톨처럼 단단한 아내에게서도 어머니는 있다. 어머니가 전부다. 아내는 송이를 위해 산다. 송이의 행복을 위해 산다. 송이의 성공을 위해 산다. 아내는 어머니로서 산다. 저 여자는 무엇으로서 살까.


정식은 이시자키 어쩌고 하는 일본인이 내놓은 독특한 서적명이 떠올랐다. 인터넷서점에서 책 검색하다가 튕겨져 나온 특이한 책이라서 제목만 목차만 대강 보았던 기억이 났다. 가히 성의 세기였다고 할 20세기 말에 <똑똑한 여자는 SEX를 하지 않는다> 그 비슷한 책이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똑똑한 여자? 색에 빠져있는 우리사회에 대한 도전으로 아예 성의 특징을 무시한다? 하긴 섹스가 남자와 여자를,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최고의 요소는 아니라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가 분명 존재한다. 이렇게 송년의 밤을 남자들끼리 모여 앉은 그들도 하나의 예다. 그때 그 책제목을 보면서 잘 팔릴까도 의아했었다.


그 뭐더라, <똑똑한 여자는 SEX를 하지 않는다> 그런 책 있더구먼. 또 다시 정식의 돌연한 말에 이야기는 새로 어수선해졌다. 스스로 똑똑함을 알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이면 만족할 책일까? 뭐 그런 책이 다 있어? 남자들 다 죽겠네. 아니지, 여성들이라 해도 똑똑하면 섹시하지 않다고 들려서 화내지 않을까? 정식은 바로 옆 테이블의 남녀 팀이 들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떤 여자가 학문적 관심을 가지면 보통 그녀의 성적인 면은 뭔가 정상이 아니다고 했다던가, 그것으로 니체가 페미니스트들에게 얼마나 욕을 먹는지 아나 이사람. 대학친구의 말에 또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니까 가슴이 크면 머리가 나쁘다, 그 속설이 맞다는 거여 뭐여? 답을 손에 쥐어야만 하는 친구 하나는 갑자기 정색이었다. 내 말은 저 여자, 아니 저 여자 분은 삐쩍 마른 나무토막 같으니까 머리가 좋고 예술가이고 춤도 잘 춘다 그거야 뭐야. 아니 춤추는 것 하고 머리 좋은 것하고 무슨 상관? 야 이부장 목소리 좀 낮춰. 시작은 해놓고 말리는 형국이 된 정식은 도리어 좀이 쑤셨다. 흔한 삼차에 예까지 들른 것인데, 술이 좀 들어갔기로서니 말들이 거칠어진다 싶어 걱정이었다. 엉뚱한 화두를 내놓은 것이 자신이고 보니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허탈한 밤이었다.


하기는, 밤은 대개는 허탈하다. 남보다 이른 결혼으로 딸이 봄이면 벌써 고등학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어디만큼 흘러가버린 세월이 아득하다. 아내는 궁리도 많고 튼실해서 남편에게 의존하는 체질이 아니다. 세상을 따라 살며 크게 불평도 없다. 바가지를 앞세우는 형도 아니다. 그런데 왜 밤은 허탈한가.


아이들 알콩달콩 속에서 - 아까 누가 그랬나? 그것이다. 집에 아이들이 없어서일까? 달랑 혼자 크는 송이가 어릴 적은 괜찮았다 싶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뭔가를 열심히 시키는 엄마를 피해서 아빠한테 응석부리느라 깔깔대곤 했다. 요즈음엔 중학생이면 표정이 어른으로 바뀌고 마는 것 같다. 해야 할 일에 시달려서일까? 송이 뿐 아니다.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더 큰 처녀인지, 길가는 여자아이들이 구별이 안 될 때가 많다. 아내도 할 일이 많다. 집안 일 틈 새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낮엔 사업차, 늦은 저녁에도 컴퓨터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신년을 맞는 그의 계획 속에 근년 들어서 꼭 염두에 두는 것이 있다. <아내와 대화하기>, <송이와 대화하기>, <가족여행>, 그런 것 들이다. 몇 년 째 잘 안되는 재탕이다. 별 탈 없이 돌아가는 가정이 왜 문제란 말인가. 따지고 보면 기실 아무 문제도 없다. 일감이 줄고  당연히 수입이 기울지만, 다른 건설업자들 사정에 비하면 현상유지는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밥벌이 되면서 고민하는 놈 사치라 하겠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겨우 땅 파먹는 두더지 신세인 것이 대순가. 제 식구 잠 잘 지붕 있고 밥 먹고 살면 그만인가. 이 친구들 마음들도 허탈한 구석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순간 파렴치한이 되어 공든 탑을 떠나야했던 동료교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던 친구의 넋두리가 공감이 갔다. 고향을 돌아다보면, 아니 거기까지 아니어도, 힘든 사촌에 재종, 종매........ 아니다. 마음을 내리누르는 것은 내민 손조차 잡아줄 수 없었던 무능 때문이렷다. 형제고 친구고 빚보증은 안 된다. 단출한 가정의 살아남기 작전은 이렇게 야속함에서 출발한다. 반석위에 집짓기. 문제의 씨앗은 싹부터 뽑아버리기. 그래서 누구는 살고 누구는 도태된다. 어쩌다 TV화면에서 걸리는 동물의 세계가 어른거린다. 영양이건 코뿔소건 무리에서 처지는 놈이 천적의 먹이가 된다. 무리는 생의 법칙,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한다. 인간이라는 동물 또한 그러하다. 송년의 밤을 보내며 일년간 다 못한 일들을 쬐끔 후회할지 모르지만, 날이 새면 다 잊고 희망을 운운하며 새해를 맞는다. 닭띠 해가 밝을 것이다. 고향의 수탉은 여전히 아침을 깨우리라.


정식은 갑자기 일어나서 노래를 불렀다. 아니 소리를 쳤다.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 옹기종기 둘러앉아 꽁당보리밥 / 꿀보다도 더 맛좋은 꽁당보리밥~~


저쪽에서 여자가, 그 춤꾼이 맞일어났다. 보오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정식이 질세라 얼른 받았다. 보오리밥 먹는 사람 신체 건강해 -애 - 애


와글와글 박수가 터졌다. 악사들이 다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벌써 무엇인가를 마친 것인가? 아니 ‘꼬꼬댁 꼬꼬 먼동’은 무엇이었나? 내가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니었어? 내가 노래를 불렀어? 알 수 없는 상황에 정식은 고개를 흔들었다. 앉아 있는 모양새가 좀 전과 다를 바 없었고, 들었던 잔이 왼손에 그냥 있었다. 이상하다. 아니 지금 내가 어찌 된 것일까? 예서 가수들이 때 넘어간 캐럴도 아닌 동요를 했을 리가 없다. 그럼 내가 노래를 했단 말인가? 틈이 없었다. 음악은 서글프면서도 중후한 “그곳이 꿈엔들 잊힐 리이야”로 넘어가 있었다. 정식은 두 손을 펴서 머리에 얹었다, 언젠가처럼 왼쪽 뚜껑만 뜨겁게 달아오르고 오른 쪽은 냉랭한 상태를 느껴서였다. 정말 그랬다. 구들장이 따뜻해졌나. 만져 보듯이 오른쪽 왼쪽을 만져보다가 겁이 났었다. 신경과 전문의는 내로라하는 평판이었는데 말은 의외로 간단했다. 검사 결과는 뭐 괜찮습니다. 죽을 병 아니고요. 통풍을 좀 해야 됩니다. 무슨 못하고 살 말 있어요? 여기 와서라도 뭔가 해버리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친구나 직장동료 뭐라 아내 흉을 본다거나 뭐 그런 것. 속내 단속 못해서 발광난 사람 취급하는 데는 오히려 기가 죽었다. 첫 마디에 알 수 없이 눈물이 돌았던 것이 좀 분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반쪽만 뜨거운 머리 뚜껑이 겁나서 몇 번 더 찾아 갔다. 아내 흉보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뭔가 말 해 봐요,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삐딱이 하고 앉아 있는 의사 앞에서 아내 흉보러 오는 환자들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내 흉보러 오는 환자들 더러 있나요?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참는 방법은 그만 가는 것이었다. 생각한 말과 말한 것 구별이 혼란스러울 때 어떻게 하느냐고, 생각한 행동과 행동을 했는지 구분이 안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정작 의사를 보았으면 묻고 싶었던 말들도 다 담고 돌아섰다. 흉보러 오는 대신 막춤을 추러 오라 했으면 계속 갔었을까? 혼자서 추는 춤, 춤을. 


한쪽이 조금 수선스러워 눈을 드니 바로 춤꾼 일행이 일어서고 있었고 친구가 따라 나가고 있었다. 노래 도중이었다. 이상하다. 노래 도중에 일어설 무례한 같지는 않았는데. 문간의 망설임이 한참 걸렸고 친구는 으쓱으쓱 돌아와 앉았다. 명함은 없고, 주인장 하나 줬다는데 나중에 보지 뭐. 내일은 또 더 남쪽으로 갈 거라네, 영 독특했는데 참.


하긴 노총각이야 관심 가져도 되겠지만, 저쪽은 뭐 싱글 이래? 아무래도 도저히 유부녀 같진 않던걸. 우리 모두 첨엔 남자라고 생각했잖아? 하긴 거 누구의 견해대로라면 머리 좋은 여자겠네? 뭐 우리 생각이 다는 아니겠지만. 아니 저쪽이 훨씬 위 같더라며? 앞서가기 잘하는 친구가 나서 떠드는 동안 왠지 다른 사람들은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연주가 끝난 다음 정식네도 다같이 일어섰다. 한 친구는 정말 주인에게서 명함을 받아서 읽어보느라 입구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렸다. 노총각에게 정보라도 주겠다는 몸짓이었다. 정식은 일부러 관심을 끊었다. 춤이 다 뭐라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을, 또 그게 무슨 춤이라고. 춤꾼 생전 안 보았나.


한 시가 넘어 귀가할 때면 아내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은’ 귀가해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내지만, 근년 들어서 더 늦는 남편을 교육하려는 일은 포기한 것 같았다. 그나마 공존의 미덕이다. 초저녁에 집에 있어 둘이서 할 일이 무엇인가. 관심사가 교집합처럼 작은 것을 무시하고 합집합의 크기로 보는 것이 신혼이다. 어긋난 각도는 미미하게 보이는 것이 신혼이다. 어느 날인가는 교집합이 커지는 일보다 어긋난 작은 각도가 벌어지는 일이 꾸준해짐을 알게 된다. 교집합은 불려야 자라는 것이라서 가만있으면 그대로지만, 어긋난 각도는 가만있어도 그냥 벌어진 땅이 불어나기 때문이다. 늘상은 아니지만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조금은 하고 싶어 하는 정식과, 하고 싶은 것 다하려는 사람을 일반화하여 얕잡아 보는 아내는 참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다. 아니, 다른 별을 바라고 살아버린 결과일까?


샤워꼭지의 물소리가 미안하다. 아래 집도 미안하고, 가까이 아내도 미안하다. 스킨로션이 욕실에 없는 것이, 아침에 또 들고 나갔나 보다. 욕실에 있어야 할 것이 안방 어딘가에 있는 것을 아내는 싫어한다. 그 반대도 당연히 싫어한다. 무엇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아내가 정하기 때문에 정식으로서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욕실에서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하나 손에 따르니 향기가 짙게 올라오며 끈적거린다. 하는 수 없이 손에다만 비비고 만다. 깜깜한 방을 거쳐서 거실로 나온다. 커튼 틈새로 비쳐오는 빛, 달빛인가 하지만 하현달인데 이리 밝을 리도 없고, 바깥 방범등인 것을 벌써 알고 있다. 희미하게 비치는 실루엣을 따라 소파에 주저앉는다. 순간 다시 일어난다. 커튼을 조금 젖히자 곧 냉기와 함께 어스름 빛이 따라 들어온다.


달밤에 체조라더니, 어깨를 들먹거려 본다. 팔을 내뻗는다. 무슨 곡조를 떠올려야 하는가? 하나 두울 하나 두울. 아니다. 한 둘 셋 한 둘 셋. 그건 더더욱 아니다. 자다가 봉창 뚫는다? 뚫으려면 뚫으라지. 검게 반사하는 TV 화면을 맞대하고서 자신의 몸을 비춘다. 어깨 팔꿈치 팔목을 차례로 꺾어 본다. 꺾었다 편다. 왼쪽도 똑같이 해보려고 뒤튼다. 춤은 전염성인가. 흥이 없더라도 일단 곡조에 맞춰서 팔다리와 온몸을 움직이면 춤이지. 율동적으로? 그건 알 바 없다. 춤꾼이 따로 있나? 좀 전의 춤꾼 아닌 춤꾼이 생각난다. 안개처럼 피어올랐던 아까의 연기 냄새가 코끝에 남아있다. 영락없이 내 마신 고양이 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아니다, 활짝 웃자. 웃어야 한다. 신경과 전문의가 변죽으로 말한 것이 이런 것 아니겠냐. 통풍이다, 통풍. 더구나 희망의 새해가 아니냐. 꼬꼬댁 꼬꼬 먼동이 튼다 /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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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5. 3. 4. 23:30

   노라 와  도라:  해방과 히스테리의  변증법        
~~~~~~~~~~~~~~~~~~~~~~~~~

 노라: 입센 Henrik Ibsen(1828~1906)
                           『인형의 집 Et Dukkehjem』(1897) 의 노라 :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겠다"
                             남편과의 노예화된 생활에 결별을 고하는  해방된 여성

        70년대 및 80년 대 초기 페미니즘의 상징 인물.
          -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적인 규정으로부터 해방되는 인물로 여겨짐.
            (남성문학 경전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재 독해 방향: 보브와르 Beauvoir)
          - 본래적  여성적 글쓰기 전통을 찾아 나섰던 버지니아 울프의 추구 속에서
            표현된 것처럼, 독자적 여성의 동일성이 구체화된 인물.
             (버지니아 울프: 여성문학사 서술)

도라: 프로이트 Sigmund Freud (1856-1939)
                    『히스테리분석의 단편 Bruchstü ck einer Hysterie-Analyse』(1905)
                      그에 의해 "도라"라고 명명된 18세의 여성환자에 대한 분석

        후기구조주의 진영(라깡, 데리다, 크리스테바, 식쑤, 이리가레이....... )의
        여성성 이론은 히스테리 환자 도라를 상징적인 대표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아래]==>
도라 르네쌍스

도라의 근원≪ 

Freud u. Breuer, Studien über Histerie 1895

정신분석의 시작: 여성환자 Anna O. (본명: Berta Pappenheim)가 의사를 놀래주기 위해서
최면생태에서 자신의 무의식적인 기억, 환상, 갈등 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증상을 사라지게 만들었을 때,  안나 O. 는 자신에 의해 명명된 대화치료라는 치료방식을 발견,
당시 의사는 상담해주는 사람 역할, 브로이어는 그녀의 진술과 토로의 내면적 필요성을 전적으로
따랐으며, 그녀에게 어떠한 자기해석도 강요하지 않았다.
반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의사는 분석가의 역할을 한다. 의사는 정신분석적인 치료를 통해
권력관계를 만들어냈다. 즉 프로이트는 스스로를 " 계몽하는 사람 ... 가르치는 사람, 더 자유로운
세계관을 혹은 탁월한 세계관을 대표하는 사람, ....또는 환자가 고해하면 면죄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간주한다. (F/B, S. 299)
                       

................................................................................................................................
 "상상 속의 창녀 - 인류의 구원자"

                         
 Berta Pappenheim(1859~1936):

      
Martin Buber 의 조사: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나 정열적인 사람은 흔치
                                      않다고들 한다. 그러나 기지가 뛰어나면서도
                                      정열적인 사람은 더욱 드물다. 베르타 파펜하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죽기 3년 전 자신의 추도사를 써 두었던 장난기의 기지.

    <일생> 1899: 사회비판극 『여성의 권리』발표.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여성의 권리 옹호』번역 자비 출판.
               1902: <여성 구제협회> 창설
               1904: <유태 여성협회> 창설
               1907: <위협받는 처녀와 사생아를 위한 집> 자비 설립
                                                                       [38년 나치의 테러로 파괴]

    1912년 친구에게:
    "나는 일 자체나 일하는 방식에서는 물론 인격적으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꼭 필요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무엇에 대해서도 누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 고독하고 금욕적이며 우울한 여자로 만든 것은
             1) 루시 프리만의 추측대로: 이 몽상 체험이 자신의 억압된 성적 욕망
                 때문이었는지
             2) 그루넨베르크의 말대로: 성폭력 경험 때문이었는지......

 ≫ 안나  O: 1880년 21세로 병에 걸렸을 때 ----

                   * 왜  안나  O. 인가?  Kleist의 <후작부인 O.>에서처럼
                      O.가 불러일으키는 외설스런 연상과 관련되었을 것.

     브로이어의 진료 기록 의하면 :
        
 "낮에는 비정상적이며 환각에 쫒기는 환자, 밤에는 명석한 두뇌의 소녀.
          참으로 기이 한 대조를 이룬다."

    브로이어가 더욱 기이하게 여긴 것은 극단적인 <언어 혼돈 > 현상으로,
    처음에는 심한 언어 장애를 보이더니, 나중에는 <모국어>를 완전히 상실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몇 달 동안 영어만 하다가, 가끔씩 불어와
    이태리어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이야기 치료>를 통한 자발적인 치유로 일년 만에 치료가
    완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수년 뒤에야 약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짐.[이야기 치료와 모르핀 등 약물 치료를 병행 한 듯]

    브로이어는 몽유병 증상도 심리적 증상도 완쾌시키지 못했고, 환자는 의사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환자는 <신경질적>이었다고 탄식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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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라 르네쌍스:
              
               
『히스테리분석의 단편 Bruchstü ck einer Hysterie-Analyse』(1905)
                    속칭< 도라 분석>

  
 1900년 18세의 소녀:
                 대 부르조아 집안 출신으로,
                 프로이트는 환자 자신은 원하지 않았는데,
                <우선 아버지가 강제로 그녀를 내게 데려왔다>고 진술.
                3개월간 치료 후 환자에 의해서 중단됨.

       아버지, 아버지 친구인 K.그리고 프로이트에 대한 불신으로, 도라는 프로이트의
       해석에 강하게 반발.
 
       예) 도라가 어머니에게 보석상자의 열쇠를 달라고 한 부탁을 프로이트는 곧바로
            생식기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임.
            그가 <보석상자>는 여성의  성기를 가리킬 때 즐겨 쓰는 표현>이라고 하자,
            도라는 즉각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고 조롱했다 함.

  *도라 분석의 문제점:
        환자는 기가 꺽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빼앗긴다.
        정신분석가 프로이트 + 도라의 아버지 + 아버지의 친구가 이 과정에 참가.
        <소유권 몰수과정>은 정신분석가의 해석에 환자가 굴복하게 되는 과정이다.

       ※ 도라의 고집스런 결정으로 프로이트는 <의사가 얼마나 무력하며 무능한지>
           아프게 깨달아야 했다. 환자의 협조가 없는 한, 그는 무력하며, 그의 해석
          기술도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라 분석>은 "환자 이야기"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학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법"에 구금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여성적인 자아동일성 및 외디푸스 이전 단계의 억압된 엄마와의 관계 등과
연관지어질 수 있는 욕구불만을 호소한다. 라깡과 이리가레에 따르면, "히스테리"여성 환자의
담론이 서구 문화에서의 여성적 담론 일반이라고 본다면, 히스테리 여성환자의 "치료"라는 것은
또 다른 여성 주체성의 [비본질주의적] 구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이러한 치료에서의 여성적인 것은 히스테리 여성환자에 의해 분열된 자아 경험 속에서 재생산
되는 하나의 "타자"
[낯선 것, 이질적인 것의 담지자로서, 남성적인 자아상으로부터 배제된
자로서의 여성]
와 하나의 "또 다른" 여성[겉보기에는 동일적인 개체이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낯설게 된 주체로서, 그리고 남자가 마음대로 다를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여성]
으로 문화적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의학적기고 철학적으로 기초가 다져진, 남성적으로 규정된 동일성 개념 및 주체 개념들은
여성적인 것을 하나의 병으로 취급하여 이것을 배제시킨다. 그런 한에서 히스테리는 여성의
병을 특수하게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전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히스테리에 대한 논의에서 말로 여성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Schuller, S. 24)

도라의 무의식적 병인을 재구성하려는 프로이트의 시도의 기저에는 여성의 소망이
수동적이고 매저키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이 놓여있었다. 그래서 도라에게
가해졌던 성폭력을 중요한 발병요소로 관찰하는 것은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다른 한편 도라와 엄마, 또 다른 여성들에 대한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간과하게 했다.


 육체의 글쓰기와 분열된 자아

프로이트/브로이어에 따르면 히스테리 질병의 근원에는 격렬한 감정적 동요 및 정신병적
증세가 있다고 한다. 히스테리 여성환자들은 "회상들"로 인해 괴로워한다. 즉 이들은
육체적인 신경분포를 발생시키는 고통스러운 회상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바흐만의 프란짜는 자신을 무의식에 빠지게 만드는 "회상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고통스런 기억들은 히스테리 여성환자에게 현존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기억들은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자리에는 경험된 것을 무의식적으로
기록하고 늘 새롭게 상연하는 수집된 증상들이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히스테리는
히스테리 증후 형성과정에서 이용되는 상이한 육체의 기능과 감각의 기능을 거의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나의 체험이 자아가 허용하지 않는,
그리고 또한 자아에 의해 행해질 수 없는 강력한 감정의 자극을 일으키게 될 때, 그것은
히스테리적 증후 형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근거는 바로 자아로 하여금
본래의 감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해주는 내적인 모순 혹은 양심의 갈등이다.
       예)
안나 O.가 치명적인 병에 걸린 아버지를 간호하는 동안 들려오는 춤곡에
            사로잡혀 그곳에 가고 싶다는 소망의 정점에서 자신을 질책하게 되었을 때
            히스테리적 기침이라는 증세가 나타났다.... 안나를 여러달 동안 침대에
            묶여 있게한 심한 마비 증세의 원인은 바로 "잠들어 버린 팔" 이었다고 한다.
                                                                                                (F/B, 58)

브로이어는 안나의 경우 질병의 원인과 히스테리 일반의 원인이 결국 채워질 수 없었던
공명심, 즉 여성에 대한 역할규정과 충돌되었던 지적인 관심들 및 쓰여지지 않고 방치된
능력들에 있었다고 보았다:

          " 나중에 히스테리적 증세를 갖게 되는 사람들의 사춘기를 보면, 이들은 .....대부분
            활기 있고 특별한 자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풍부한 정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F/B, 259)

......자신들의 증후들을 통해서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그러한 증상들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자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히스테리적 증후에는 자기 공격, 즉 자기 증오의
특징이 기입되어 있다. 그러한 특징은 그녀를 상당히 이중적인 존재로 만든다.
히스테리는 육체에 효력을 부여하는 동시에 육체를 파괴하고 손상시키기도 한다.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자아에게 자신을 상상적인 환각생태에 빠지게 하는 육체적 만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안나 O. 는 식욕부진으로 말미암아 아사 상태로 이끌게 될
음식물 혐오증, 심한 시각 장애, 청각 장해, 언어 장해, 팔과 다리의 심한 마비증세, 그리고
공포와 두려움에 이르는 정신분열증적인 환각으로 인해 고통받게 된다.

히스테리는 자아상실의 병이다:
        예)
도라: 유희에 참가한 사람들과 거의 무한한, 무한히 반복되는 동일화 과정에서
                     동일성 형성을 위한 필사적인 시도.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거울도 발견하지 못한다.
                     가정주부 노이로제의 엄마, 방해받지 않고 K부인과의 관계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 K씨에게 그녀를 넘겨버린 아버지, 그녀 또 다른 여성들을 성적으로
                     위협한 K씨, 겉으로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사실은 아버지에게만 관심을
                     두었던 엄마의 대체인물들, 가정교사, K부인....... 자신을 희생시켰다고
                     느껴지는 연인들에 대한 불만족스러움과 이러한 배반에 의해서 야기되는
                     도라의 비실존 감정은 정신분열적인 증후로 나타난다.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생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가 된다." (Freud 1905, 204)

[결어]
서구문화의 기저에 놓여있는 상징적 질서 내에 존재하는 여성의 비실존과 대면한
여성적 주체성의 구성:
버지니아 울프의 신비적 시인의 모습(셰익스피어의 여동생?) ... 한 신비주의적 여성작가가
결국 잉태되기를 원하는 여성들 속에서 타자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
이러한 "자기 이중화"는 거울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즉 주체가 될 수 있기 위해서
여성 자신은 스스로 대상이 되어야 하며, 오직 상호 주관적인 구조 안에서만 여성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 그리하여 여성은 "자기와의 새로운 관계를 오직 다른 여성을 통해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Lenk, 1976, 73)
          예) 도라는 이러한 여성적 거울을 K부인 속에서,
               베티나 폰 아르님은 카롤리네 폰 귄더로데 속에서,
               뒤라쓰의 욕망의 자아인 롤은 안네-마리 스트레터 속에서 찾는다.
                                                                 
                                   [참조]  뒤라스
 

노라는 자신을 부정하는 가부장제적 사회 체계의 상징적 기초들을 반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그러한 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반면,
히스테리 여성환자는 상징적 체계 자체를 문제시했다. 이는 담론적 비판의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또 다른 행동 논리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녀는 남성적 질서에 의해 억압된 것을 재현하는데 자신을 바치며,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자신을 상실하게 된다.

그 둘은 개별적으로는 히스테리와 해방 간의 숙명적인 순환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한 쌍으로서, 즉 하나가 다른 하나의 거울이 됨으로써 그들은 이러한 순환관계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참고]
- 레나 린트호프: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 Freud/ Breuer: Studien über Hysterie, 1991.
- Elisabeth Lenk: Die sich selbst verdoppelne Frau, 1976.
- Marianne Schuller: Im Unterschied, 1990
.

Posted by 서용좌
소설2004. 12. 3. 14:00

                                    제 8 회 이화문학상 심사를 마치고


9편의 후보 작품을 놓고 정연희 선생, 민병삼 선생 그리고 필자가 작품 내용을 검토하며 토의한 끝에 송숙영님의 창작집 『농담』과 서용좌님의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 카프카의 편지 1900-1924』을 공동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카프카의 서신을 번역한 서용좌님의 번역서는 1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역자가 얼마나 오랜 세월 이 서간집 번역에 매달려 왔는가를 능히 숙고케 하는 노작이다.

20세기 문학에 불안과 고독의 현대인상을 깊이 해부한, 난해한 실존작가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카프카의 서간들은 20세기 지성사의 증언으로 값진 유산이며, 이를 한국에 소개한 서교수의 노고는 이 정도의 상으로 보답되기에는 부족함을 느낀다.


작가 송숙영님은 문단에 등단한지 올해로 44년에 이르며, 그동안 문학 일선에서 꾸준히 작품을 생산해왔다. 이번에 출간된 .... [이하 생략]                            

                                                                                      2004년 12월

                                                                              김원일, 민병삼, 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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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소감] 이화문학상 / 감사의 말씀

저의 변명이라면,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글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고, 어느 창작노트에 쓴 일이 있습니다. 컴퓨터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내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겁 없이 장편 <열하나 조각그림>을 들고 이대동창문인회에 참가한 몇 년 세월은 짧지만 가슴 뿌듯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는 순간 하늘은 저의 미련한 열심에 상을 내리십니다. 위대한 카프카가 받아야 할 상을, 그러나 카프카의 독일어에게가 아니라 저의 서툰 한글에 대해서. 이 상은 1296그램이나 되는 책의 무게에 대한 위로의 의미로 받겠습니다. 마음으로는, 위대한 작가들 짝사랑 그쯤 멈추고 같은 열심으로 서툰 ‘내 글’을 쓰라는 이정표로 여기고자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4년 12월 3일 서용좌


 

 

 

이 사진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가장 어린(!) 참석자가 우빈, 둘째 손녀다. 그옆에는 영원한 스승 이병애교수님, 그리고 미뇽, 스터디그룹의 친구, 왼쪽앞은 동기이자 소설가대선배 이재연(춘자),미뇽 살짝 뒤로 윤현자후배, 함께 이병애교수님의 제자이다. 뒤로는 동창회 조행자부회장, 남재은회장. 아기와 스승님 사이는 최민숙교수, 모두 고마운 후배들.   

얼굴이 조금 가린 친구는..... 아! 중고등학교시절 단짝친구. 수원에서 병원문도 일찍 닫아걸고 참석해주었다. 이재연뒤로는 아기의 엄마와 아빠, 둘째아들 내외다.

다른 가족은? 미국에 있는 큰아들 내외와 손녀는 그렇다치고? 나의 동반자는 이 정도의 행사에 호들갑 떨고 상경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조선의 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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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