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1999. 5. 15. 23:00

그 이야기 둘 : 스스로 격리된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中에서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치유할 수 없는 병?

 ♠  인용

아니면 사랑은 어느 날 우리 몸에 저항력이 떨어지고 발작 증세가 나타나면서 갑자기 피할 수 없는
병에 걸릴 때 까지 우리 몸 속에 둥지를 틀고 조용히 머물러 있는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포로처럼 우리 몸 속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끔 씩이긴 하지만 사랑은 스스로를 해방시켜서 바로 자기가 갇혀있는 감옥인 우리를 부수고 나올 수도 있다.
사랑이 평생 갇혀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온 죄수라고 생각할 때, 왜 사랑이 자유를 맛보는 아주 드문 순간에
그렇게 날뛰고, 그렇게 은총과는 거리가 멀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희망의 나라로 이끌었다가 뒤이어 곧
불행으로 떨어뜨리는지, 나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이런 특성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허용하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랑이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용

사랑의 첫 단계, 모든 사랑의 첫 단계는 진정한 감사의 시간일 것이다.  한 인간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여러 특성들이 우리 내부에 파묻혀 있거나 아직 계발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특성들은
우리가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익숙해져 있던 특성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는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러워지며, 현명해진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그에게
헌신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베푼 그 기적을 위해 우리 삶을 바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그가 바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묻지 않는다. 바로 그가 우리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우리 삶의 윤곽을 분명히
그린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의 만남의 순간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은밀히 조물주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감지하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용

프란츠와의 관계된 문제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스스로 결정한 기억은 없다.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결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빠져있었던
사랑의 그 완벽함으로 인해 나의 자존심이 상했을지라도 나는 오랫동안 사랑의 요구에 저항할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을 제지시키고자 한 몇 번의 나의 시도는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으며, 나는 또 다시 완전히 기가 꺾였다.
그럴 때마다 사랑에게서 배운 교훈은 오로지 사랑의 계획에 따르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었다.              
                      

 인용

살아있는 동안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랑뿐........사랑은 현실의 삶 외부에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트리스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장애물을 설치해
나갔으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진정으로 구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을 때 까지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  우리의 의문 :

   ♤ 주인공은 "슬픈 동물"인가? 왜 "슬픈 동물"인가?

       사랑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저주를 사랑하는 - 떠나 버린 - 사람에게
       걸고  있는 일이 가능한가? 혹은 사랑에?

    ♤ 보편적인 질문: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한가?                                                                                                                                                                        

 소설의 개관

동베를린 태생의 주인공은 고생물학 전공자로, 결혼하여 남편과 성장한 딸이 있고, 1990년 당시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 중이다. 서독출신 개미연구가 프란츠가 박물관의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왔을 때, 둘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떠났고, 그는 어김없이 부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이다. 그에 대한 격렬한 사랑의 요구는 심한 질투로
변하고, 그의 부재 중에는 상상 속에서 그 부부의 흔적을 추적한다. 넘쳐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현실세계를 넘어서
주인공의 의지와 상상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영원히 그녀를 떠났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몇 십년을 회상하는 그녀에게
이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회상하는 몇 십년의 시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몇 십년은 곧 현재요
미래이다.    "뭉툭한 코와 몸을 휘감는 긴 팔을 가진 갈색 털의 원숭이" 처럼 그렇게 그녀는 꼼짝 않고 누워서 그를 회상한다.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0) 1999.09.15
초대 - 개강모임  (0) 1999.08.01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0) 1999.05.15
그 이야기 하나 : 아웃사이더 『검은 양들』  (0) 1999.05.15
부적응의 미학  (0) 1999.05.15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2:30

그 이야기 하나 : 아웃사이더 『 검은 양들 』

한 사회의 "검은 양"에 관한 이야기

   Heinrich Böll의 풍자적 단편 「검은 양들 Die schwarzen Schafe」은
   가족 중에 실 인생에 실패한 삼촌과 일인칭 서술자 "나"의 이야기이다.
   삼촌은 박식하고 즐거워 보이는 위인이지만 제대로 된 직업이 없이 빚만
   늘려간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검은 양"이라 하는데, "나"는
   그의 뒤를 잇는다.
   
    "나"의 길은 삼촌과는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 잠깐동안 어느 가구공장
    에서 일하기도 하는데, 그 곳에서는 화폐개혁 직후인 그 시기에 알맞은
    전형적인 싸구려 감상적 물건들을 생산해 낸다. (실제로 쓸모있는 물건
    들은 사장의 부재시에 노동자들이 필요에 의해 몰래 만드는 물건이다.)
    "나"는 삼촌의 사고사로 인해  - 우연히 삼촌의 장례식 날 성년이 되어 -
    그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원래 무산자였던 삼촌의 유일한 유산은
    그가 복권에 당첨되어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겨우 몇 분간 소유
    했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당장에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계획들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확실한 검은 양으로 간주하고, 그가 검은 양이기
    이전에 대부가 되었었던 어린아이와의 접촉을 경원한다. 하지만 "나"는
    가문다운 가문이기 위해서는  검은 양이 보존되어 가리라고 믿는다.


"검은 양":

전적으로는 "그의 사상, 성격, 또는 직업 등으로 인해서 다른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구성원"을 지칭한다.
사회적으로는 유능성Tüchtigkeit을 최고의 귀감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전통에 따르는 대다수의 독일인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을  지칭한다.

뵐은 평소 이단적인 것, 배척된 것을 문학의 주제로 해야 한다는 전제를 말함으로써,문학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척도를 제시했다.

통상적 척도에 의해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강하게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왜곡된 긍정성이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검은 양들 」의 표면상 주제는 적나라한 유용성에 대한 항의?

검은 양은 실제의 세계에서 우스꽝스러운 실패자를 가리키는 메타퍼인데,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이상형으로
그려져 있다.삼촌이 유용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이상형인 이유는 그의 자질에 있다. "나"가 보기에 "오토삼촌은
통달했다. 삼촌이 실로 능통하지 못한 분야가 없었다. 사회학, 문학,음악, 건축, 모든 것을."  그러나 가진 지식을 "환전
versilbern"할 수 없었고 대신 거의 15000마르크의 빚에 700명 이상의 채권자를 남기고 죽었다.작게는 차장에게
30페니히에서부터 많게는 "나"의 아버지에게 2000마르크까지 진 빚.

빚만 지고 죽은 삼촌이 어떻게 이상형인가?

여기에 소중한 의미는 바로 그 700명의 사람들에 있다. 평균 100마르크도 훨씬 못되는 돈은 재화로서의 자산이
아닌, 다만 구체적 삶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의 절대 빈곤기를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조금 슬쩍하기'를
경험했고 또 용인되었던 삼촌 세대에게는 '작은 돈' 빌리기는 다만 이웃 정과 인간애를 의미할 뿐이다. 삼촌은
700명으로부터 최소한의 사랑을 받았다는 시각이다.

"나"에게 이러한 시각을 부여하는 작가의 논리는 단순하다.
1) 누군가에게 빵이 없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빵을 주어야 하고,
2) 빵을 벌었으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것!

논리 1)
공평한 분배의 문제는 전후의 절대 빈곤기를 겨냥한다.
작가는 생각한다: "모든 새들보다 더 소중한"(마태 26: 6) 인간들은 마땅히 빵을
걱정하지 않을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작은 돈" 즉 빵은 나누어야 한다.
빵을 나눌 때 사람들은 인간이 된다. 괴테의 "눈물 젖은 빵"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인리히 뵐의 인간 역시 빵 냄새에 울 수 있는 인간이다.

논리 2)
억압된 노동에서의 해방 문제는 경제 재건기의 광적인 생산성을 겨냥한다.
"검은 양"은 바로 이 경제도약 단계에서의 소외자들을 이상화한다.

 Outsider!
      " 원래 사회학적으로 내집단 밖의 외집단에 속하는 이 국외자들은 집단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객관적 거리를 특징으로 하는 특수한 관여를 한다."

           [참조] Colin H. Wilson의 『아웃사이더』(1956)
                     아웃사이더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깔려있는 속물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윤리적 존재로 승화된다.    

다른 정상적인 동시대인의 유형, 예컨대 「Es wird etwas geschehen」의 사장에게는 "잠이란 죄악이다!".
그는 오직 "행동"을 해야 한다.이런 능력만이 중시되는 이 세상에서, 다른 계획이 있어 학문을 "당장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곧 검은 양이다. 물론 이것은 강단의 학문이나 교양보다는 실인생을 높이 사는 작가의 입장이다.
[하인리히 뵐은 반 부르주아적 동시에 반 인텔리적 성향을 지닌다.]

학문을 버린 "나"는 재능도 없이 작곡가가 되기로 했다가, 관상학, 정원사, 기계공, 선원, 교사, 세관원 등에 차례로
매료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직업적인 교육의 이수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것 하나 외부적 강요에서
시도된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은 매번 즐거울 수가 있다.  "진정한 능력들을 환전 또는 직업적으로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에게는 선악의 피안에 존재한다. 돈 버는 능력은 인간의 조건에 속하지도 않는다. 현대 산업
사회의 필요일 뿐이다. 따라서 이 산업사회에의 적응은 검은 양의 시각에서는  "투항"이다:

      "[...] 나는 투항했다 - 나는 일자리를 청했다. [...]
      
나는 결코 희생해서는 아니될 것, 나의 자유를 희생했다!"

그러나 "나"의 공장 체험은 인간을 보는 인식을 확실하게 해준다. 많은 것에 정통하고  지적이지만 그 지식을 써먹을
줄 모르는 삼촌과, 실제로는 수다밖에 모르면서 "스스로를 진지하고 또 예술가라 간주하는, 전혀 지적이지 못한"
사장과의 대비이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장이 극도로 무의미한 실존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능력없는 삼촌의 삶은
의미있는 실존이란 논리가 성립된다.
이 유용성에 관한 논쟁은 실로 엉뚱하게도『老子』11장을 상기시킨다:

              "진흙을 비져서 그릇을 맨든데 /
            그릇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창을 내고 문을 뚜러서 집을 짓는데 /
            집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므로 있는 것이 좋음 되는건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

사회는 바로 이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할 때 비로소 쓸 만한 사회, 하인리히 뵐의 용어로는 "살 만한
bewohnbar"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부적응의 주인공들은 인습에 의한 습관적 반응이 아닌 진정한 행동을 꾀한다,
비록 현실적 성공에서 더디거나 그것을 포기하더라도. 투항을 거부하거나 투항을 후회하는 부적응자들, 이들은 뵐의
후속 작품들에서 소위 검은 양의 토포스를 실현한다. 그들은 사회통념상 기인으로,공공연히 나태를 보이며 이 사회를
무시하고 내면의 자유로 만족하는 수준을 유지한다. 그들은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 예로서, 오토삼촌의 건강한
젖먹이 같은 잠은 더없이 행복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극단적 성격으로 비정상적, 병적, 노이로제적인 인상을 주며,
결국 절망적인 아웃사이더일 뿐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절망적이 아니라,상식적 인간의
눈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들 부적응자들에 의해서 이 사회는 시험되고 미리 불합격 처리된다.

그러므로 오히려 동시대인들의 행동은 그저 환경에의 수동적 반응, 즉 순응의 생을 살아간다. 인간의 적자생존을
장려하는  경제적 정글에서 정상궤도 진입자들은  이 정글의 법칙을 받아들인 것이며, 그러므로 결국은 투항자들이다.

[참조] 하인리히 뵐의 「검은 양들」과 47동인의 정신. 『독일문학』, 서울: 한국독어독문학회 1997, 제 64집(38-3호), 230-250면.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0) 1999.09.15
초대 - 개강모임  (0) 1999.08.01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0) 1999.05.15
그 이야기 둘 : 스스로 격리된 『슬픈 짐승』  (0) 1999.05.15
부적응의 미학  (0) 1999.05.15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2:00

부적응의 미학   
이 페이지는 어느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을 보태려는 곳입니다. 진선미가 아니면 촌분도 할애할 시간이 없다고
확신하는 분은 서둘러 이 곳을 벗어나십시오.

   ◈  
어느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   -  하나!
 

       인문학도여, 젊은이들이여, 지금 하늘 만한 간덩이를 자랑해도   
       세월 따라 그 간이 콩알만 해지거늘, 지금 콩알 만한 간으로 적응에   
       급급한다면 나중에는 좁쌀만 한 간으로 움츠러들려는가!  

 

    ◈     그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  -- 둘!!

          Franz Kafka를 빌어서: "일찍이 많이 빈둥거려 보거라!"

    Leute, die nicht bis zum 25ten Jahr wenigstens zeitweise    

    gefaulenzt haben, sind sehr zu bedauern, denn davon bin ich

    berzeugt, das verdiente Geld nimmt man nicht ins Grab mit,

    aber die verfaulenzte Zeit ja.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참 안되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ㅡ 1907년 Hedwig Weiler 에게 편지 중에서  ㅡ

※ faullenzen 빈둥거리다" :  "faul 굼뜬, 게으른"을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가

      여기에서 칭송되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미리 (행여나 단견으로) 사회에 편입되기에 바빠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외면치레의 인생에 대한 경각심이 아닌가 한다. 빈둥거려 보이는 가운데, 정말 게을러서가 아니라, 천천히 깊이 사색하는
      단계를 거치는 인생의 값진 미래에 대한 염원이 아닐까?
            동양의 지혜 중의 하나인 대기만성 ----- 큰 그릇은 더디 완성된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