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1999. 8. 31. 23:00
 

한국문화사 1999.8.31.


 

길고도 생소한 제목이 어리둥절한가요? 이 책은 DAAD(독일학술교류처) 파견으로  우리대학에서 88-93년 동안 객원교수로 계셨던 로스바흐 Rossbach 선생님과의 공동 저작이랍니다. "낭만주의" 에 대한 안이한 인상을 불식하고, 어떠한 문학작품도 언어학적인 접근을  일차적으로 시도해야 하는  필요성을 직접 체험하게 할  목적으로 구상 되었지요. 
하필 선정된 작품이 독문학사에서 "유령의  호프만" 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에.테.아. 호프만이냐구요? 왜 하필 모래귀신 Der Sandmann  이냐구요? 글쎄, 여기에서는 서론과 개요만을 소개합니다.  대답은 직접 책에서.......
 


서론: 서술 텍스트 이론 


이 책은 새로운 시도이다. 텍스트 해설이자 교과서인 것이다. 텍스트 해설로서는 특히 한국인 독자들을 겨냥한다.  교과서로서는 텍스트 언어학적 근간에서의 화술적 텍스트의 분석에 대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분석 대상인 소설에  대한 이상의 것을 다룰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독문학의 가장 어둡고 환상적인 텍스트 중 하나라 할  이  작품의 구조에 대한 통찰 뿐만 아니라, 서술 텍스트의 구조법칙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는 하나의 텍스트에 관한 지식 만이 아 닌, 다른 텍스트들과 관련해서 전용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되리라.  

해설의 특이점은 무엇보다 그 물샐틈없는 완벽함과 조직성이다. 완벽함이란 문장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설에서 드러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난점들을, 즉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독자가 정복해야 할 모든 난점들을   다룬다. 그러나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의 중급수준의 독일어 지식을 전제로 한다.

 

해설의 체계는 항시 반복되는 순서에 의하되, 다음의 정보를 제공한다:  사전적 - 문장론적   - 서술적 (문장들을 포괄 하는)  각 문장마다 우선 특이한 단어들과 관용어법들을 찾는다.  단어의 설명은 때때로 일반적인 의미와 텍스트 내의  특정 의미를 포함하며, 독일어와 한국어로 의역한다. 실망스런 사전적 설명작업은 배제한다. 사전적 설명에 이어  문장론적 언급이 이어진다. 이 경우 길고 복잡한 문장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단어 하나 하나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항상  경고된다. 그 대신 문장들은 우선 그 핵으로 단축된다. 그 다음 한 걸음 한 걸음씩 구축되어 가며 독창적 복잡성을 넘어간다. 도표 제시는 문장들의 거시적 구조(대강의 구조)를 통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들의 문장론적 설명을 위해서 우리는 전통 문법의 이론과 용어들을 사용한다. 전통문법의 이점은 이것이 모든  분석의 길로 통하는 것이다. 즉 ― 단계적으로 ―- 복잡한 전체에서 전체의 성분으로 가는 길 말이다. 다음에는 발화의 논리라는 전통문법이 따른다:  주어 내지 주어부는 발화의 대상을 지칭하고, 술어는 이 대상에 진술을 부가한다.  오늘날 성행하는  전통적 주어-술어-문법(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 사이의 대립은 두 문법모델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충한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 N. Chomsky 또한 그의 다른 면에서  전통적 분석체계에 이 의존의 개념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의 장점들을 통합하고 있는 아주  손쉬운 문법모델은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문장론적 해설의 목적, 즉 복잡한 문학텍스트의 문장들의 거시구조를 통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또한 도표로서도),  전통적 용어들의 도움으로 가장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시 구조적 설명(예를 들어 원자가 제시)은  포기한다. 이것은 매우 유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해설 분량은 이미 문제가 될 정도이므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작업에서 문장문법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은 기대할 것이 없다. 이 영역에서는 이해력의 도움을  제시하는 것이지,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은 화술적 텍스트구조를 위한 정보들을 포함한 세 번째 분석  범주에 들어있다.


이 분석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은 마부르크 Marburg 대학 일반 언어학 및 독일 언어학 전공학과에서 십여년 이상 수행되어 온 "화술적 텍스트 분석"에 관한 연구들이다. 우선 서술(Erza"hlen) 또는 더  상세하게 서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서술은 일어난 사건의 재생이자, 수신자를 고려한 시점적 재생이다. 이 정의는 세 요소를 지니고 있다:  

            - 서술자 (= 화자) 

            - 사건

            - 수신자

  
 마부르크 팀의 서술적 텍스트 분석(Narrativik = 서술텍스트의 분석)연구의 관심은 모든 서술텍스트의 중심을  형성하는 서술자에 둔다. 서술자의 포괄적 활동 ( 사건의 언어화) 은 다음과 같은 부분 활동들로 분류될 수 있다:

            - 선택 (무엇을 서술하고 무엇을 서술하지 않을 것인가?)

            - 배열 (무엇을 먼저 서술하고, 무엇을 그 다음에, 무엇을 마지막에 서 술할 것인가?)

            - 시점 선택 ( 복합적 시점 대 단일 시점

            - 해설,주석 및 평가 여부


서술자는 이야기하는 "목소리"이다 (프랑스인 Narrativik학자 Ge'rard Genette 의 "La voix" 범주에 든다).그러나 그는 텍스트-의미의 원천이다. 서술자를 기술하는 것, 서술자를 그 특성에서 확정짓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이 서술자에 대하여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관념은 이 책에서 설명되고 사용될 것이다.  물론 한정 없이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제한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전면에는 서술이론이 아닌 서술분석이 자리한다. 이 중점은 이 다음에 계획하고 있는 책에서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론이 전면에  놓이고 구체적 분석은 예로서 배경에 놓이게 된다. 이 책의 모든 텍스트 기술의 출발점은 텍스트 내재적 화자이다. 이 화자(Narrator)는 작가(Autor)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작가는 실재의 신분을 지니며, 외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화자는 허구의 신분을 지니며, 내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도표로 보자면 : 


 작가의 입장에서 보아 모든 (또는 대부분의) 서술된 사실들은 '창안된' 것이다.


이것은 이 경우 결코 작가인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닌, 오직 텍스트 내재 적 (= 허구적) 서술자만이 나타나엘을 그의   "친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결말에 가서 클라라가 어찌 되었는지를 들었노라고 주장하는 것은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니라, 그만큼 애매하게 정보를 받은 서술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요약하면:


 허구적 서술자는 허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작가에 의해 창안된 것이다. 허구의 내적 세계와  사실의 외적 세계 사이를 통제없이 넘나드는 일은 이 해설에서 방지할 것이다.


물론 텍스트 내적 현상을 텍스트 외적사건들과 상관시키는 것도 적법하다. 예를 들어 전기적, 역사적 또는 사회학적 사실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그러한 정보들을 취급하게 될 네 번째 분석 범주 ― [I] 해설: 그런 종류의 정보들을 수용하게 될 ― 를 예견했었다. 그렇지만 해설들을 네 개의 다른 분석 범주 ― [L] 사전적, [S] 문장론적, [N] 서술 구조적, [I] 해설적 정보들 ―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너무 일목요연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네 번째 분석 범주의 정보들은 세 번째 범주에 수용하였다: [N]은 이제 우선 문장들을 통괄하는 성향의 텍스트 내재적 정보들, 예를들어 모티브의 회귀 (주도모티브) 같은 것을 포함하며, 다음으로는 문화사적 성향의 텍스트 외적 정보들을 포함한다. 이 외부의 포착은 원천적인 텍스트접근적 분석에 논리적 모순을 낳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외관상 그러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맥락(Kontext: 어원적으로는 "통합적 텍스트"라는뜻)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한 텍스트가 적확하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Cagliostro" 또는 "Chodowiecki"라는 이름이 기지의 것으로 전제되거나, 또는 연금술 실험자에 대한 암시를 포함할 때를 이른다. 그러나 문화사적 지식은 텍스트가 이것을 분명히 전제로 할 때에 한해서 전달된다. (문학적) 텍스트를 (문학 외적) 맥락과 연결함에 있어서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난제들은 당장 여기에서 논의될 수는 없고, 그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사안에만, 즉 텍스트 안에 머물기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래귀신」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를 수단으로 해서 해석하려는 유혹도 거부한다. 특히 대중적인 것은 소설 주인공의 행동을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첫째 프로이트 자신이 이 소설에 대해 언급했고, 둘째 소설 주인공 나타나엘의 이상한 행동은 심리분석적 소설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2차문헌의 제목을 보자:


 Ingrid Eichinger: E.T.A. Hoffmanns Novelle "Der Sandmann" und die Interpretation Freuds.  In: Zeitschrift fu"r  deutsche Philologie 95 (Sonderheft E.T.A. Hoffmann 1976), S. 113-132

   

이것은 그와 관련된 인식의 소득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함을 예견케 해준다: 왜냐하면우리는 하나의 해석 대상  텍스트 대신에 두 개의 텍스트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가아니라,  프로이트를 끌어대고 있는 모든 텍스트들과 프로이트에게 비판적인 모든 글들 또한 동시에 접근되 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끝없는 해석논쟁이 열리게   될  것 이다. ― 그 대신 이 소설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고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충실하게 따를 것이다.


텍스트는 구조의 원칙에 따라 통찰되어야 한다 어떠한 수법으로 그렇게 하는가는 이 서문에서 설명될 수도 또는  설명해야 할필요도 없다. 앞으로의 분석이 이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줄 것이다. 문장 하나 하나에 관련된 상세한  텍스트의 설명이 곧 이 책이 학습자들에게 제공하려는 유일한 이해에의 도움이 아니다. 그 밖의 도움으로는: 소설  제목의 충분한 설명, 개관 및 중점적 내용 설명을 부가한 텍스트의 상세한 분류, 전체 소설의 보조번역, 일련의 도표  및 그래픽 등이 있다. 우리는 이 책이 한 복잡한 텍스트의 미로에서 독자에게 신뢰할 만한 안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독서의 <대상으로서는 외국어로서의 독일어(외국에서의 독어독문학) 중급과정의 학생들을고려하고 있으며,  이 분석은 그러나 그 방대한 외연으로 인하여 교육자 및 호프만 전공자들에게도 여기 저기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독자를 기다리는 것은 모험이다. 모험 중에는 때로 고생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으리라. 



 0.1 개요


독일의 어린이들에게는 "모래아저씨(Sandmann)"의 모습이 대체로 "모래아찌(Sand- ma"nnchen)"라는 축소형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아찌는 밤이면 어린이들에게 눈에 모래를 뿌려 줌으로써 아이들이 피곤을 느끼고 잠이 들 수 있게  해주는 동화의 인물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침이면 눈에서 "모래"를 부벼낸다.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밤새 그가   왔었다는 증거가 된다. 작은 키에 빨간 뾰쪽 모자를 쓰고 등에는 모래 자루를 지고 있는 모습의 모래아찌는 정말 귀엽다. 그렇지만 나타나엘(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그는 마성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한 노파가 그에게 얘기해 주기를,  모래아찌는 착하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밤새 눈을 훔쳐 가는 무서운 귀신같은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타나엘을 숙명적 공포로 내몰고, 마침내는 대 재난을 초래한다. 

눈-모티브는 "Sandmann"이라는 인물 내지는 소설의 제목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사랑스러운 동화에서는 아이의 눈이  감기기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늙은 유모의 변종 이야기에서는 영원한 실명이 위협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눈-모티브를 상세히 취급한다.  왜냐하면 전체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눈의 상실에 대한  나타나엘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줄거리: 


나타나엘의 유년 시절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유모의 말에 따르면 모래귀신은 잠을 자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시력을 앗아간다. 부모님은 어떤 날 저녁이면 변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화급히 아이들을 잠자리로 보내면서  말한다: "모래귀신이 온단다". 그런 다음 실제로 나타나엘은 불길한 형상이 층계를 쿵쿵거리며 올라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아버지의 방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타나엘은 호기심에 못 이겨 숨을 곳을 찾아 들어서, 모래귀신이란  다름 아닌 음침한 변호사 코펠리우스임을 알게 된다. 나타나엘은 발각되고, 모래귀신/코펠리우스는 그를 붙잡아 눈알을  뽑으려 한다. 아버지는 간청해서 그 자를 만류한다. ―코펠리우스는 잠적했다가 일년쯤  지나서 다시 그 도시로 돌아온다.  다시금 그자의 발자국 소리가 층계를 쿵쿵거린다. 한밤 중 폭발 소리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아버지는 바닥에 숨져 있다. 코펠리우스는 사라졌다. 아이는 그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년이 흘러 나타나엘은 그 사이 약혼도 하고 G.시에서 대학에 다닌다. 어느 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한 행상이   ― 그는 코폴라라는 이름이다 ― 그에게 물건들을 권한다.   나타나엘은 그가 코펠리우스 (= 모래     귀신 )라고 믿게  된다. 그는 놀라고 혼란에 빠진다. 뭔가 도움을 구하는 심정에서 그는 고향에 편지를 쓴다. 그의 약혼자 클라라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그 숙명적인 코폴라는 그에게 아무런 힘이 없으며, 모든 경악은 다만 그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클라라의 논리는 완전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타나엘은 실제로 안심하지 못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귀향한다. 모두가 포옹한다. 그러나 이견들이 고조되면서 그들의 행복을 흐려 놓는다.  환상가 나타나엘과 냉정한 인간 클라라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극심한 갈등이 초래된다. 나타나엘은 클라라를   "생명 없는 저주받을 자동인형"이라고 욕한다. 클라라의 오빠는 분통해 하고,  결투가 예고되지만, 결국에는 화해가  이루어진다.  


나타나엘은 대학 도시로 돌아온다. 그 동안 그의 숙소에 화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물리학 교수인 스팔란짜니 댁   건너편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 창문 너머로 그는 올림피아를 바라본다. 그때 다시 코폴라가 찾아와 그에게 망원경을  판다. 망원경을 통해서 바라보는 동안 그는 올림피아의 미에 굴복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무도회에서 그녀와 춤추게  된다. 스팔란짜니는 그들의 약혼까지를 승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팔란짜니와 코폴라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의 놀라움이 그토록 큰 것이다. 증류기, 병, 플라스크들 사이에서 그들은 텅 빈 검은 동공을 지닌 생명없는 인형  올림피아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스팔란짜니는 올림피아의 눈을 집어 나타나엘에게 뿌렸고, 그는 곧 광증에 빠진다.   (올림피아가 자동인형이었음이 밝혀진 뒤 소위 지성인들로 구성된 차 모임의 실태는 가관이다. 본문 355의 차 모임  에피소드 참조)


나타나엘이 깨어났을 때 과거의 공포는 극복되었다. 두 약혼자, 처남이 될 로타르, 그리고 어머니는 행복하게 화합한다.  그 무렵 두 사람은 정오쯤에 탑에 오른다. 먼 곳을 바라보다가, 클라라는 작은 회색의 수풀이 그들을 향해 움직여 오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 말에 나타나엘은 망원경을 꺼내  드는데, 시야를 클라라가 가리고 있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광증에 빠져, 소리치고 날뛰며 클라라를 아래로 내던지려 한다. 로타르가 급히 달려가 그녀를 구한다. 아래 군상들  사이에 코펠리우스가 서있고, 그는 나타나엘을 유혹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타나엘은 뛰어내린다. 


이제 상당히 긴 본론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8. 1. 23:30
  R    E     N     내     E     조   N

     N     알     E      N       지     N    고    L    E    기    K
 


   서
를 전혀 모르고서 한 학기를 한 교실에서 보낸다는 것은 조금 모독입니다.
    겉보기엔 좌판을 들고 앉아서 지식을 파는 지식산업 행태로 전락되는 한이 있더라도,
    짧은 상호간의 영향이 남아 있는 한, 교수-학습 간, 학습자 상호간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얼굴과 이름은 기억해야 <없는>의미도 살아 날 수
    있으리니, 여러분 졸업 후에 <영2> 혹은<수2>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끔찍해서라도
    이름을 개강모임이라 하여 간단히 초대합니다.

   대상: 현대 독일소설, 독일여성문학 수강학생 따로.
   시간은 가까운 목요일, 단 미리 이야기 하기.
   장소는 상의해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우연히 두 과목 다 수강하며 열쇠담당으로
   수고하는 류oo(94학번)와 의논하세요.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30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욕망과 망집 없는 삶 - 그것의 허위?

 

죽음과 결부시켜서는 매우 생경한 나이에, 서른 해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젊다 못해 시퍼런
시인/글쟁이가 남긴 시들을 읽게 되었었다, 실로 우연히 지난 겨울에.그것도 시집을 선물받아서,
선물에 참 맞지 않은 시집이었는데....
섬뜩한 몇 구절은 곧 가슴에 박혔다. 입술이나 뇌리가 아니라 바로 가슴 속에.    
 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고 또 쓰는 구나!

이 봄에 책방을 기웃거리다가 그 사람의 산문집을 발견했다. 10년 가까운 세월 지나서 28쇄 째의 책을 이제서야.생각보다 -- 시구절에서 얻은 표상에 비해 -- 훨씬 훤한 젊은 얼굴, 그리고 퍼뜩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

 

     ■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도서출판 살림, 2000년 28쇄, 26면에서

이 글귀는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무망을 목표로......."라고 하는 입버릇과는 어긋나게, 빈 들 햇살에 녹아들면서도
안에서는 냉큼 녹지 못하는, 그래서 속이 굳어지는 잔설처럼 짓눌린 욕망에 평안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 시인은 시로써 말하였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것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겨울을 났고, 이제 미련없이 나며 우두둑 꺽어지는 나뭇가지들은 서럽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으려는 "
남루한" 나뭇가지는 추악하단다.

그는 그 "매달려있음"을 욕망이라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이제 산문에서 욕망없음을 위선 쯤으로 규정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한다?
시인의 글을 시가 우선하지 않을까? 산문은 지나가는 느낌일 뿐이며.
 

 또 다른 시 한편: {우연히 시집의 좌우 페이지에 해당한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두 시의 공통점은 "봄"이라는 시간이다.
봄의 이미지가 시작이 전혀 아닌 무엇인가의 끝을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봄이 무서우리만치 생경한 것은 이 시인으로서는 너무 오만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나의, 것이다.
그는 완성되기에는 너무 젊은 인격으로 마쳤다. 그러니 불균형이 당연하다고?
그렇지만 사람이 나이와 더불어 별 되는 것도 없다. 불균형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라도 헤메는 것인가?

 누군가와 끝까지 이야기하고 싶다. 논쟁이 되어도 좋고, 마침내 서로의 몰이해에 화를 버럭내며
 나가 떨어져도 좋을 것이다.     벌써 그  "....하고 싶다"가 욕망이라고 힐난하려는 사람이어도 좋다.
 누구라도 허튼 이야기를 나눌 마음만 있으면 족하리라.
 이 세상 그러나 어디에 그 소용없는 일에 밤을 지샐 위인이남아 있을 것인가!
 혹은 속으로 왼다: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