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1. 5. 15. 23:30

도서출판 이유, 2001. 272면.




의사소통이 어려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말하기를 주저한다. 하나 씩 따로 존재하는 열 하나 조각그림 그 틈새에서 서툴게 존재하는 주인공은 ― 작가의 의도 때문에 주인공다운 주인공은 아니지만 ― 자신을 말하기에서 주저하는 우리를 대신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거의 이름이 없다. 시간과 장소 또한 의도적으로 거명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있을 법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래 잊고 있었던, 그러나 무의식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그리하며 현재의 나를 이루는 '사랑의 기억'들이 열 한 개의 퍼즐로 짜맞춰져있는 소설이다. 두렵지만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상처받지만 그 상처로 해서 또 '죽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여기 있다. 해체되어 있는 열 한 개의 퍼즐들을 짜맞추어 가보면, 굳이 사랑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의 인생들이 돋을새김 되는 기쁨을 얻게된다. 열 한 개의 퍼즐을 맞춰 가다보면, 사랑에의 사투는 결국 생존에의 사투와 다른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그리하여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임을. 

                                         ― 소설가·공선옥



 

이 글을 쓰면서: 



기억으로서의 꿈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내 엉성한 학문적 글읽기와 글쓰기의 시발점이 된 하인리히 뵐의 소설작품에서 나오는 말이다. 번역 투이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개체로서의 인간, 다른 누구도 대체해줄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의 숙명으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한다고 해석했다. 도덕적인 공동체에서도, 사랑의 환영 속에서마저도 사람은 혼자다.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고 말하니까 좀 쓸쓸해진다. 진실은 항상 좀 쓸쓸한 것이다.


거창하게 철학자 이름을 대지 않아도 그저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목적은 허상, 가상이요, 잘해야 꿈이다. 꿈은 이루지 못할 전제의 목적이다. 이룰 수 있는 전제라면 목적일 것이니까. 그러므로 꿈을 꾼다는 것은 조금은 도피라 할 것이다. 도피가 아니더라도 삶의 유보, 그래서 꿈이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무지개와도 비견되지만, 실제로는 “다른 상황”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이 생을 좀먹은 도구이다.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 꿈에 매달리는 인간일수록, 예컨대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고통에 갇힌다. 꿈을 접으면 사라질 고통을 꿈 때문에 끌고 다니는 것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그러므로 꿈을 버렸을 때 어엿한 인격의 인간이 된다는 가정이 설립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이 옳은 것이다.


이 비관적 결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꾼다. 그것은 기억으로서의 꿈이다. 기억이 있는 한 꿈을 생산해 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을 가지지 못하면 꿈을 꾸지 않는다. 갓 태어난 아이가 꾸는 꿈이라 해도 그의 유전자 안에 남은 유산들의 기억이리라. 태초에 처음 태어난 인간은 꿈을 꿀 수 없었으리라. 젊은이들은 믿기 어렵겠지만, 살아갈 수록 꿈이 많아지는 것이 그런 까닭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 전체도 오랜 문화를 간직할 수록 원대한 꿈을 꾼다. 우리들의 꿈을 위하여는 기억을 들추어 낼 일이다. 삼가 들추어냄의 변명이다.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꿈을 꾼다. 꿈을 꾸기 위해서 기억을 버리지 못한다. 기억 속의 파편들은 항간의 목소리들에  필적하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게도 무미하다. 그들은 생동한 에너지와 화려한 외모와 불가항력적인 성증으로 전혀 치장되어 있지 않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음으로써 사람을 사로잡는, 아니 사람은 사람에게 여간해선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저 다가가다 만다. 대개는 자신 속에 갇혀 있고, 그래서 안될 까닭도 없다. 소위 실패라고 불리는 것들이 가장 자연스럽다. 


내 부실한 언어는 이런 내 부실한 기억 탓이다. 언어라는 체계라기 보다는 조각그림에 불과할 기억들의 들추어냄. 이 조각들을 활자화해보겠다는 옛 제자들 숙미와 찬종들의 막무가내 신뢰에 떠밀려서. 신중해라~ 하셨을 은사님의 침묵을 마음대로 오해하여. 옛적에 시작했던 그이에 앞서, 언젠가는 소설을 쓸 것이라는 아들에 앞서, 서두는 사람은 그저 그렇다는 진리를 남기며. 또한 앞으로 어안이 벙벙할 독자들 ― 혹시 있다면 ― 앞에서, 내 부실한 자의식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마지막 말마저 타인에 기댄다. 그는 너무도 오랜 옛날부터 나를 부추겼던 죄목 뿐으로 이렇게 자꾸 불려 나온다.



                           무의식적 기억만이 시간을 초월하여 진실성을 갖는다.

                                                              ― 플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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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1. 1. 1. 23:30

 내가 쓴 것
 What I have written

<내가 쓴 것>이란 병적 집착의 남자를 다룬 영화가 있었다. 흔들리는 남편과
그의 아내를 마음속에 둔 그의 친구, 남편의 회의와 "정신적" 편지왕래에 의한
소위 바람을 적나라한 추한 관계로 변형시켜서 그 일로 상심할 아내를 얻으려던
비열한 집착증 환자의 이야기다.

인상적인 것은 친구를 믿고 친구에게 자신의 방황을 얘기하곤 하던 남편의 이야기 -
"내가 찾고 있던 것은 이상의 여자였나 봐, 실제 사람이 아니라........"
실제 사람, real person 이란 단어가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와 화해한다. 죽음을 맞는 것은 우연일 뿐이다.

현실에서도 그런 방황의 인물들을 볼 수가 있다.
자신의 이상 속의 어떤 사람을 누군가에게서 찾다가 , 찾았다고 착각했다가,
죄없이(?) 그 착각 속에 덩달아 빠져버린 상대방을 어느 날 갑자기 놓아 버리는.......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의식하는지 못하는지, 이성적으로야 상대가 그 혼란에
빠져 버린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므로 그렇게 중단하고 마는.
그런 사람은 현상에서 100% 행복을 찾기로 하는 것일까?
여전히 이상적인 다른 어떤 사람을 찾아 헤맬까?

What I have written     
[열 준비가 아직 안되어서....]     

나는 그 동안 프랑스여인 역할을 했다고 느낀다.
영화 속의 프랑스여인은 단 7통의 고차원적 편지를 쓴 데 비해서 난 저질의 500페이지를 썼다.
그러니까 그 병적 친구가 한 권의 소설로 불려낸 것보다 더 많은, 게다가 소설로 출판할 정도의
미려한 문체도 아닌 - 노골적이지만 일단 출판할 만한 질을 갖춘 -  아무 것도 아닌 독백에 불과한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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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12. 20. 14:02

 ~~~~~~~~~~~~~~~~~~~~~                             


11.16.
"OOO" wrote:


   안녕하세요. 법학계열 OOO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교수님께서
   물어보셨던 위반과 위법에 대해 알려 드리려고요. 먼저 위반은 어떠한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말하는데 그 기준이 법, 도덕, 관습등 인간이
   만든 규범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법은 좀 복잡해요. 법이
   들어가면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을 위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5가지로
   구별이 되는데 악법,불법,비법,위법,탈법 등이 그것입니다. 악법은 법
   자체가 잘못되어서 법적인 성격과 권위를 가지지 못하여 그 법이 존재
   하는 자체가 불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불법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법이 아니지만 법적이지 못하는 행위와 결과를 뜻합니다.
   즉 불법은 단순히 법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법은
   이것도 문자그대로는 법이 아닌 것이지만 불법과 차이점은 비법은 법이
   존재해서 그 법에 거슬리는 잘못된 행위와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궁금해 하시던 위법은 어떤 법이 존재를 하는 것을 전제로
   그 법에 위반되는 행위와 결과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탈법은 위법과
   거의 같지만 위법은 단순히 어떠한 법인데 비해 탈법은 정당한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묘히 빠져
   나가 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 내용은 서울대학교 최종고
   교수가 정의를 한 것을 제가 해석을 한 것입니다. 혹시 제가 해석을
   해서 제대로 된 것인가 의심을 하시겠지만 이 수업에서 제가 에이
   플러스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어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12.20.
"OOO" wrote:


    
안녕하세요. 저 법학계열 OOO입니다. 날씨도 추운데 건강하시지요. 한 학기
   동안 잘 가르쳐 주신데 감사 편지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드릴려고요. 교수님께서 지난번 독일 문화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는데 이번에
   독일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전공수업시간에 배워서 전해 드릴려고요.
   독일에서는  1층을 땅층이라고 하고 2층부터 1층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배하던 시절에 땅과 건물에
   대한 소유의개념이 발생을 했습니다. 즉 땅은 왕의 것이고 건물은 일반 시민의
   것으로 땅과 건물의 소유자가 다르기 때문에 건물의 층 수를 셀 때 맨 아래부터
   1, 2 층으로 세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제시대 때 들어와서 우리나라도 맨
   아래부터 1층, 2층 이렇게 하는데 독일이나 우리나라나 전통적으로 땅과 건물이
   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현대까지 내려오게 되었고
   현대에 기술이 발달하게 되어 고층건물이 만들어 지니까 땅에 접해있는 맨
   아랫층은 땅과 같아서 땅층이라고 하고 그 윗층부터 1층, 2층이라고 하게
   되었습니 다.  교수님 독일어 수업 한 학기동안 재미있게 들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교수님 수업을 듣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이 메일을 보면 알겠지만, 내용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간단하지만 지식을
    공유하려는 정신이다. 기초독일어를 수강하는 법학계열 학생으로서,
    자신의 전공 지식을 을 나눈다는 정신은 유익함을 넘어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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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밖에도 진솔한 생각들을 전해준 편지들이 많았지만, Best-mail 을 소개하려면
    한 사람을 선정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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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