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2000. 4. 7. 23:30
  2000년 봄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도 거의 끝나는데........
       그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메일을 공개합니다.
       이름만은 저작권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생략, 나머지는 전문 그대로입니다.

 

  
   Subject: 따뜻한 봄날에...
   Date: Fri, 07 Apr 2000 21:08:48 KST
   From: ??
   To: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고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그대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대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

    교수님, 학교를 휴학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졸업 한 동기들 보다는 가까이
    있으면서 교수님의 제자 노릇 제대로 하지 못 한 것 같네요.
    저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밖으로 튕겨나지 않음은
    같이 커났던 동기들과 저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 가고자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신문사에 있는 친구가 막걸리 사 먹으라며
    쥐어 준 돈 몇천원을 받아 쥐고 따뜻한 봄볕 아래 서서
    한 없이 즐거워 웃었답니다.
    교수님 밝게 한번 웃어 보는게 어떻습니까?
    봄이니까! 믿음직한 제자들이 있으니까!!
    이상 00학번 000 였습니다.......꾸벅!

 

 

     이 얼마나 다정한 글인가!
      같이 커난 친구들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가리라는 다짐.
      이런 말 한 마디면 혹여 서러웠던 기억도 사라지리라.
      이런 말 한 마디면 다가올 재난(?)도 두렵지 않으리라.
      <신 지식인> 개념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인문대 사람들아!
      어디 어떻게 숨어들어 옴짝도 하지 않을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이 오아시스같은 글을 삼키자. 아까워 단숨에 들이키지 말고,
      생명수처럼
       - 아니다 이 말은 취소한다. 아주 사적인 이유로 -
[아래 주석]
          아니 새벽 이슬처럼 신선하게 간직하자.

  [주석] 우스운 주석: 난 개인적으로 "생명수"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쓸 수 없다.
            특정한 날의 특정한 물을 생명수라 했던 까닭이다.
            그 특정한 순간에 대해서는 그러나 세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 특정한 순간을 함께 한 누군가도 이미 잊어 버린 물!
            그 물 때문에 더는 생명수란 말을 쓸 수가 없다. 그 뿐이다.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萬行: 어느 수도자의 이야기  (0) 2000.05.15
참 유쾌한 편지 하나  (0) 2000.04.16
도구적 학문 vs 목적적 학문  (0) 2000.03.15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0) 1999.09.15
초대 - 개강모임  (0) 1999.08.01
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3. 15. 23:30
  ■  도구적 학문 vs 목적적 학문

    이야기의 발단은 대화 상대자들의 신분에 맞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관한 관심이었다. 대화 상대자는 인문대학

    소속의 교수님, 주로 실용노선을 지지하는 소위 "신지식인" 개념에 동참하시는 분. 편의상 "가"와 "나"로 쓴다.
 

가: 요즈음에는 인문대 자연대 등에서 도전적인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경향입니다.
      학문할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당연하다고 봅니다.

나: 당연하달 수는 없지요. 확실한 직업적인 미래를 선택했다면 나무랄 수 없는 현명한 판단이겠지만, 문제는
     그 선택의 시금석이 주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사회적 동물이 사회적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내적 필요를 무시한 데서
     처음부터 문제를 내포합니다. 개인의 내적 욕구가 고려되지 않은, 외부요인에 의한 선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사회적 성취가 이루어진 이후에라도 - 본질적 회의를 수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은 타인의 삶이 아닐까요?

가: 그러나 졸업 후의 진로가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나: 그러니까 졸업 직후냐 훨씬 더 멀리를 보느냐 차이 아닐까요?

가: 우선 사회에 좋은 조건으로 편입된 이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요. 여건이 성숙된 이후에 자신의 필요를
     고려하자는 현실적 사고가 현명한 선택을 낳는다고 보는데요.

나: 섣불리 결정을 하고 나서 갈등하거나 다시 진로를 바꾼다면 더욱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요....
      아무리 사회의
구에 의한 삶에서 라도 자신의 내적 욕구가 어느 정도는 합치되어야만 진정 의미있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대화는 끝이 없다. 마치 종교에 관한 설왕설래와 마찬가지가 된다.  

하여, 나의 주장보다는 존경할만한 분의 권위적 견해를 예로 들고자 한다.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老子』20장 시작의 "絶學無愚"를 한글로 풀어 쓰시기를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라고 하셨다.

[물론 "하련"은 아래 아를 사용하셨고, 그 한글의 매력은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다.]

아주 젊지는 않았을 때, 그래도 젊었을 때, 『늙은이』로 풀어쓰신 그 글을 공부했다. 실용적 필요는 아예 없던 터였다.

소위 좋은 환경에서 - 평범하므로 좋은 - 자라나서, 괜찮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적당한 직장경험, 그러다 우연히

사랑에 빠진 듯 결혼했고 이른 어머니가 되어있었던 시절, 그래도 한 가지, 필요에 의하지 않고 오직 즐거움 때문에

공부하는 버릇만은 지녔었지만, 그때는 그 취미마저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 스스로 경멸하여 대학원 진학을

완강히 거부했었던 반항기를 잊지는 못하고 있던 터였다.

해서, 그 서늘한 충격 - 공부가 죄는 아니구나, 써먹을 생각에서가 아니라면....- 그것이 나를 다소 해방시켰었다.

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실용적 학문이 못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실용적 필요에 굴하는(?) - 참으로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이 고집을 지켜갈 방책이 없기 때문임을 용서 바란다 -

다른 동시대인들을 다만 다르게, 존경하지도 멸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서로 존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물론 상황이 매우 다르다. 이제도 "도구적 이성" 운운하면 유행 한물간 이론에 매인 현학이라 오해된다.

오해뿐이 아니라 이제는 시대착오라고 멸시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다. 대다수의 유능한 사람들이 실용적-도구적 학문에 경도하여 이루어낸 문명문화의 혜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소수의 다른 사람들- 즉 우리는, 인문학 따위에 매어있는 우리는 - 은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마찬가지로 사회에 기여하여 잉여인간이 되지는 말지어다. 그러나 그 기여는 바로 성취사회가 가져다 주는 그림자,

그 그늘과 그림자를 찾아 최소한의 광명을 선사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념에 잠시 눌어붙어 있는데..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 유쾌한 편지 하나  (0) 2000.04.16
Bestmail 2000  (0) 2000.04.07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0) 1999.09.15
초대 - 개강모임  (0) 1999.08.01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0) 1999.05.15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9. 15. 23:30

◐◑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 <친구>라는 개념과 관련된 변명 하나 -


 
근거 1)            "이 세상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Jeder auf dieser Welt steht außerhalb jedes anderen."
                                          - 하인리히 뵐 - 전집 13권 37쪽

                                   

   
    사람은
밖에 있다 사람의

         사람은 있다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의 밖에 사람은 있다

                           있다 사람은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확실하게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있다 모든 것의  밖에

    사람은 그냥 홀로 있다

    사람은 그냥 있다

    사람은 있다.   

렵게 쇼펜하우어 등을 대입하지 않아도 그저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목적은 허상, 가상이요, 잘해야 꿈이다. 꿈은 이루지 못할 전제의 목적이다. 이룰
수 있는 전제라면 목적일 것이니까. 그러므로 꿈을 꾼다는 것은 조금은 도피라 할
것이다. 도피가 아니더라도 삶의 유보, 그래서 꿈이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무지개와도 비견되지만, 실제로는 "다른 상황"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생을
좀먹은 도구이다.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 꿈에 매달리는 인간일수록, 예컨대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즐긴다(?). - 꿈을 접으면 사라질
고통을 꿈 때문에 끌고 다니는 것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 그러므로
꿈을 버렸을 때 어엿한 인격의 인간이 된다는 가정이 설립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될 법한 이와 최근에 나눈 짧은 대화의 결론]

 bar_l_1.gif

[반론을 준비해 본다, 마음 속으로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친구는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인간에 대한 관심 --- 어떤 와 같은 종속인,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슬퍼 울고 기뻐하는 종속인 인간.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옷과 따뜻한 눈길에 따뜻해지는 인간.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상태는 아니다.
  인간적인 이해라 부르거나 차라리 인간적 존엄을 전제로 한,의례적인,
  온건한, 중립적인, 다행히 바람직한 이웃관계일 뿐이다. 보편적인 인류애.
  그것은 차라리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도 매번 한계에 부딪치곤 한다. 가족은 상당히 예외가
  되지만,바깥 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완전한 이해란 Liebe auf dem ersten Blick 또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론 실패]

bar_l_1.gif

[처음 결론에 승복하는 이유들]

말하기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는 것, 그 으뜸은 아무도 자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언어학자 또는 직업적
   글쟁이들이 말하는 언어 자체의 소통 문제, 즉 텍스트 생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진짜 이유는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성산포에서> 라는 유행가 가사이다.
   노래를 그 속삭임을 들으면 서정에 눈물나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도시의 밤 술자리에서는 술에 취하기전에 외로움에 취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혼자서 술을 마신다. 혼자서 외로움을 마신다.
   여럿이 둘러 앉아 뼈저린 외로움을 마신다.


 편지 :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은 것 또 하나, 편지쓰기가 있다.

     편지는....

  생각에 이르기가 어렵다.

   생각이 간절해도 쓰기가 어렵다.

  썼더라도 부치기가 어렵다. 우편도 몰래도...

   
                               더구나 그런 편지 자체에 발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편지란 좀 쑥스럽다거나 유치하다는 논리만으로 그리한다.              
                               차마 말로 할 수 없어서 바라보고는 말을 할 수 없어서
                               편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므로....

  Kafka의 편지 빌려오기:

         "아시겠소, 나는 웃기는 인간이오. 만일 그대가 나를 약간 좋아한다면,
         그것은 연민이며, 내 몫은 두려움이오. 서신으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서신이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해변가에
         철렁거리는 바닷물과 같은 것이오. 펜은 모든 문자들의 그 많은 언덕위로
         미끌어지고 그리고 이제 그것은 끝에 이르렀소. 날씨가 서늘하니
         나는 나의 텅 빈 침상에 가야겠소."
                                                                                  (1907년)

      "Ich kann mit ihr nicht leben
          und ich kann ohne sie nicht leben."
                
                                                                      (1913년)

            그녀와 함께도 그녀 없이도 살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은
            인간의 원론적인 위치 "타자의 밖"을 확인해준다?
            아니면 그 무수한 편지들에 수신인이 있었음에 그를

     
     부러워해야 할까?


 차라리  꿈꾸기:
                         
기이하게도 꿈에 등장하는 인물은 꿈의 존재를 모른다.
                             꿈은 열린 창으로 남아서 현실을 방해한다.
                             
열어 보여도 좋을 지 .......

  혹은 은행잎:
                       
예컨대 여기에 쓰이는 한낱 표시가 왜 은행잎인지
                            그냥 우연히 은행잎인가를 아는 사람도 없다.
                            있어야 했겠지만 없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의 밖에 존재한다.
 
bar_l_1.gif 

'낙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Bestmail 2000  (0) 2000.04.07
도구적 학문 vs 목적적 학문  (0) 2000.03.15
초대 - 개강모임  (0) 1999.08.01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0) 1999.05.15
그 이야기 둘 : 스스로 격리된 『슬픈 짐승』  (0) 1999.05.15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