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1991. 5. 15. 23:30

Der Mauerspringer 
<장벽을 넘는 사람> -
페터 슈나이더Peter Schneider(1940~  ) 원작,
들불 1991


                        

는 문학의 사망이 공공연히 고지되었던 1968년, 베를린 대학 연좌데모에서 유창한

    연설로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다. 슈나이더는 문학사에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저

    유명한 연설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 한 토막:
 
 

 
 
우리는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우리는 순응했지요. 적응력이 있었구말구요.
 그리고 우리는 과격하지를  못했습니다. […] 우리는 대학인이라는 특권을 누려왔습
 니다.  […]  학업을 시작했고, 필수과목 강좌에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 ]  



   이 연설에서 그가 속죄하는 것은 대학인이라는 현존 자체였다. 시간소모에 불과했던 세미나, 복종을

  강요당했던 시험 공부들이 비판되었다. 그의 눈에는 거리에는 사람간의 진정한 왕래도, 의견교환도

  없고, 집에는 사람들 대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가구들이 버티고 산다. TV는 이 가구들이 진실하다고

  외쳐대기 위해서 존재한다. 기존의 예술은 무용지물이다. 상상력의 천재들이 그들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기존의 예술, 또는 작가의 상상력과 꿈들이 자존에 의해 잠식 당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 참상을 그리는 데 그친 사실주의자들, 그 어느 것도 "인간적 소망을 자본주의로부터 보호하려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보쉬공장의 보조노동자로 일했다.


  이 경험은 세계적 대기업의 작업환경의 의외적인 열악성, 콘베이어 벨트의 리듬에 종속되는 인간의

  문제, 도급수당제의 살인적 노동력 착취의 관행 등에 대한 폭로적 글들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체류가 준 경험 --- 독일 운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대한 인식 등이 반영된 작품

 
『렌츠 Lenz』(1973)로서 문단에 복귀했다. 이어서 『자칫하면 빨갱이』로 번역된 .....

   schon bist du 
ein Verfassungsfeind (1975)등의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
『장벽을 넘는 사람 』에서는 "머리 속의 장벽"을 경고했다.

 

          장벽을 넘는 사람  Der Mauerspringer             

   이 작품은 그가 문학으로 복귀한지 10년이 흐른 1983년 작이다.
 
   베를린 장벽을 적법하게 통과하면서 동쪽의 친구를 가진 주인공 과 그 동쪽  친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장벽에 얽힌" 이야기들을 뼈대로 하고 있다.  "샴의 쌍둥이" 도시

   베를린에서는, 우리에게는 놀랍게도 적법한 절차의 통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1970년대 브란트수상의 동방정책에 의한

   <독독기본
협정> 이후  다시 적법한 통행의 길이 열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상적인

   통로를 두고서도 "장벽을 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질문은 남겨두는 것이

  쫗을 것이다.  소설 읽기의 재미를 미리 빼앗지 않고  싶지는 않으니까.

  족:                                                                                                                     
         필자가 1992년 베를린 도착 이튿날 방문한 곳은 바로 이미 무너진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훼였다. 장벽에 남아있는 그림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물론 
『장벽을 넘는 사람 』의 표지를 그린 그림이었다. ( 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물론 그 일부는 사진으로 구할
수 있었다.

        
우리 독문과 과실에 걸어둔 그 중 하나의
        사진은 담장을 헐어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담고 있다:

          
    ~~ 아직도 허물어내야 할 벽들이 많이 있다.
                     Es gibt noch viele Mauern, abzubauen. ~~


▲ 1992년 가을 필자 촬영. 베를린 장벽 잔훼에 남아있는그림들은 분단 당시의 염원들을 보여주고 있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9. 5. 20. 14:54


한신문화사 1989. 5.20.


전후 독일문학 세계문단에 끌어올린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자 전후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1917-1985)의 방대한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섭렵한 입문서. 아직은 학문의 깊이보다는 넓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생들에게  안내서가 되기를 바라며, 그 차례를 소개합니다
.

  1. 개괄 및 연구방향
 
  2. 앙가즈망
 
     1) 시간적 현재성           2) 공간적 연대감

  3. 인도주의 미학  
     1) 언어의 도덕성           2) 인간의 존엄성           3) 문학의 자유와 한계

  4. 전쟁과 개인
     1) 전쟁의 무의미    
                  전후 단편들/ 『기차는 정확했다』/ 『아담아, 네 어디 있었더냐?』
     2) 평등의 허위
                  50년대 풍자적 단편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빵』
     3) 과거의 부담  
                 『돌보는 이 없는 집』/ 『아홉시 반의 당구』

  5. 현실과 이상사회
     1) 사회로부터의 탈영    
                 『어릿광대의 견해』/『부대 이탈』/ 『마지막 군복무』
     2) 이상사회의 싹  
                 『문둥병』 /『여인과 군상』
    
     3) 어떤 사회주의  
                 『카타리나 블룸의 실추된 명예』/ 『국민의 성향 보고』/
                『보호라는 이름의 포위』/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6. 요약과 정리       
       각주
       참고 문헌  
       연보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9. 5. 23:30

              문 둥 병 ................

    


   
이 작품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매우 예외적 장르인 극본 <Aussatz>로서,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던 독문과의  축제인 독문학제(1996)에 번역극으로서
   공연하기 위해서 급히 번역되었다.  1986.9.5. 전남대학교출판부

   
                        
 얼마나 급했던지 등장인물의  이름 중 Gerta를 Greta로 보고서
                         잘못 번역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그 이름이 시사적 이름(telling name)
                         으로서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암시하지만, 다행이도 이 경우는 그것을
                         면했기에, 부끄러운 가운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위안한다.)  


  
 하인리히 뵐은 방송극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지만, 첫 극본
 
  『 한 줌의 흙  Ein Stueck Erde 』(1961)은 초연에 실패했고, 이 두 번째

   극본인 이 작품은 그러나 아헨의  무대에서는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문둥병은 누구나 알 듯이 천형의 벌이라 간주되는 격리치료의 질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문둥병에 감염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인물을 위해서  사회가 빙자한 질병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

  이라서 격리가 필요한가? 성직자의 독신 계율을 구체적 소재로 다루는 이 작품은 사실

  평신도에게도 의무로 되어있는 정절의 덕행마저 이미 기만적인 현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혼인에 관한 "추상적 질서원칙"( 63년 작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참조!)에 대한 기만적 복종은 대기업주 부르의 <민주적> 작태에서 드러난다.

  아내에게 아내의 자유를 준 남편!  매우 민주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선행(?)은 그러나

  그의 성공적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 그는 자산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도 필요한 것이고, 또 가톨릭 신자로서의 평판을 위해서sms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임을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나 APO의 동조자인

  젊은 쿰페르트신부가 외치는 장면이다:
 
 
 
              
저는 다만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성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내연의 관계나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순결의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또한 이미 결혼 한
              사람들까지도  […] 순결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은 우리가 정말이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너그럽고, 죄악 자체에만 혹독하지요
  
  심지어 "신앙을 버리거나 여자를 보더라도 눈감아 줄" 여생의 성직 대신 "특권을 부여

  받고서 특권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일, 그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젊은 신부, 그리고 "포도주를 즐기고, 신학서보다는 소설 읽기를 즐기는, 그것도 최근의

  초현대적 소설을, 또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고 고백하면서도,  감히 "부랑자 신세"를 택하지 못하고 조금 타협하고 신학 안에 남아있

  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의  노 신부.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검역소에 억류된다. 젊은 신부의 자살이 '신원미상의

  문둥병자 사망'으로 둔갑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낌새>를 알아챈 형사 -- 그는

  시체에 접근했었으므로 잠정적 감염자로  분리된다 --, 죽은 신부의 <동쪽> 친구 --

  그는 신부의 동구행 잠적이라는 시나리오에 어울리도록 함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이자 대 부호의 아내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여자,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뛰쳐나온 주인공 쿰페르트신부 등이다. 이 특이한  문둥병

  아닌 문둥병의 치료 또는 해결은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둔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