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23. 6. 18. 06:51

[짧은 소설] 침묵 2  -  4                                                                                             

 

4이다.

4월이다, 4월.

 

그는 4월에는 기지개를 펴야하지 않을까 벼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래도 4월인데, 봄이 한창인데. 애초에 추위 때문에 움츠러들었던 것은 아닌데도, 봄마다 유혹에 빠지곤 한다. 그래 입이라도 떼어 보자.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이 입에서 시작되었지 않은가, 어, 어엄, 엄마.

침묵 속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 언제 적부터였을까. 말하고 싶지 않았을 때, 말을 할 수가 없었을 때, 말을 강요받았을 때, 억지로 입을 열어야 했을 때…… 어느 것이 먼저라고는 기억도 못한다. 전문가들은 선별적 함묵증이라고 덮어씌울까. 아이들도 아닌데. 전문가들을 만나는 일은 늘 조심해야 한다. 아무튼 아예 말을 잃은 느낌은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오랜 병이 아니면 치유가 될 수는 있을 터. 침묵의 치유 – 오늘의 화두이다. 그는 컴을 연다. 글을 써야 한다. 시를.

 

침묵의 말……

이건 아니다. 말이 멈춘 자리 다시, 언어라고 차라리 학술적인 표현을 써 보자 – 침묵의 언어 / 언어가 멈춘 자리……

 

띵똥. 띵똥 소리가 난다. 이제 막 집중하렸는데, 참. 그는 일어서려다가 앉는다. 무슨 상관, 이만 일로 문을 열어 정적을 깰 수는 없다.

 

 

언어에 있어서 침묵은 말의 반대급부이니, 정반합 논리로 가자면 말로부터 시작하는 거다. 아니, 이것은 시에서는 멀어진 화두. 말로써 소통하는 인간들 사이. 말의 본질은 무엇일까. 말이 없다고 가정하면, 인간에게 문화 같은 무엇인가가 없었을까. 눈짓 손짓 발짓으로도 소통은 된다. 요 몇 년 사이 수화 잘하는 능력자들은 텔레비전에서도 한 몫을 한다. 고마운 존재이면서 방송도 탄다. 방송을 탄다고 하고 보니, 방송은 걷는 사람 옆에서 차를 타는 것처럼 대단한 일인가 싶다. 그는 웃는다. 수화도 언어다. 상대적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정착된다.

 

생각이 정착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들은 인간의 본질에 영향을 준다. 가만, 인간에게 본질이 존재할까. 인간이란……

아서라, 내가 무슨. 그는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의 요점은 침묵을 깨고 시를 쓸 것인가, 쓸 수 있을까 이다. 기존 언어의 질서에 적응하는 시에서 벗어나고픈 욕구, 그것에 매달리는 동안 스스로 침묵이 강요되었다. 이제 또 인간의 본질이니 실존 운운으로 생각이 미끄러지면 또 헤맬 것이다. 그런데 또 미끌려 들어간다.

인간의 실존 – 실존이란 말은 본질과 무관하다. ‘그냥 있다’는 말이다. 그 말 ‘실존하다’를 그냥 있는 정도를 넘어서 ‘바깥에 서다’라는 뜻이라고 설명한 아무개의 책을 아무개가 번역했다. 프랑스어를 알면서……

 

띵똥. 아니 무슨 띵똥 소리야. 짜증이 그를 압도한다. 뭡니까? 라고 소리칠 기세로 일어서려다가 멈춘다. 이 시각 대낮에 무위도식자의 모습을 들키지 말자. 글값이 쌀값에 미치지 못함에 부끄럽다. 시인 축에 들기는커녕 강의 시간마저 달랑거린다.

 

 

프랑스어를 알면서 이런 책이 번역되어서야 듣게 되다니! 그러므로 너는 학자가 아니다. 학자도 아니다. 그러니 강의 차례가 오겠는가. 시를 쓰자. 시를 쓰는 데 자격증은 따로 없지 않은가. 하지만 시는 보다 고차원적…… 에라. 손에 들어온 책을 먼저 읽어야지. 책 강박증이다. 책들을 어찌 다 읽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다르다. 들은 듯 아니 들은 듯, 『탈합치』 그것 끌리는 책이다.1*

 

가만. 바깥에 서면, 안을 버리고?

다시 시처럼 시작해 보자. 바깥에 선다. 안을 버린다.

이게 무슨 시인가. 머리만 복잡하다. 사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적응의 과정을 성장이라고 배웠던 문화는 무엇인가. 안에 들어가 적응하며, 사다리 꼭대기로 올라라! 사람이 태어나서…… 아무렴! 그러다가 이제와 팔꿈치 문화를 폄하하면? 옳아, 경쟁에 적응하지 말라, 드디어 성선설이 득세하는가. 어, 것도 아니네.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자기세계의 바깥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47-48쪽) 이 말은 도끼다. 카프카가 말한 의미에서 도끼다.2*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살기 위해 이전 상태에서 단절 없이 탈-합치하는 것이다. 우리를 삶 속에 유지시켜 주는 것은 필연적이고 계속적인 탈-합치다.(42) 무슨 말인가.

나, 내가 나를 이루어가는 적응도 멈추라고? 자기 적응에 균열을 내라, 우선 나를 나로부터의 일치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관성대로 살지 말고 진짜 실존하는 삶을 살라.

 

 

관성 – 아담과 이브의 관성. 지상낙원의 아담과 이브는 합치 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실존하지는 않았다? 비로소 사과를 먹음으로써, 그러니까 완벽한 기존의 질서에 균열의 생산력을 들임으로써 바깥에 서서(27) 실존을 시작했다고? 낙원에서 추방되고 규탄 당함으로써 곧 실존에 진입한 것이다?

관성을 존중하지 않고 어찌 사회에 적응하며 중심에 서냐고?

시는 다시 날아가 버린다. 에라, 공부다. 이것을 예술의 근원을 묻는 사유로서 보자.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순응과 안락함 대신 삐딱함을 택한 예술, 이를테면 피카소의 《시골사람들》은 인간이라면 기네스북의 수명을 다 하고도 넘었다. 모든 면에서 적합성을 불가능하게 하며 더 정확히는 적합성의 무효화를 드러내려는 시도(21), 그것이 어쨌다고! 그것의 융성도 이미 낡은 터. 예술에 관해서 말하는 자 누구냐. 오늘날 예술을 말하자고? 하필 4월에?

 

 

4월이다.

그는 운다, 울음을 터뜨린다. 내 시는 땅부터 말랐구나.

토마스는 성인 아퀴나스만 알았더니, 엘리엇이란 시인도 있었고,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이 정도면 잔인하지도 않다.

깨어나지 않는 영혼들, 영혼이 있는지 그건 알 수 없구나, 라고 그는 쓴다. 절망한다. 시가 아니다.

 

누군가는 4월에 죽음을 그래서 생명을 말하기도 한다. 머리와 팔 그리고 다리가 잘린 몸통만의 생명을. 「4월의 가로수」3*도 그 하나다.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 전기 줄에 닿지 않도록 /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 [……]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 이런 노래다. 아니다, 시를 노래라고 하는 것은 모독이다. 시를? 노래를? 둘 다 모독이다. 시와 노래에 대하여 예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 시인은 훌륭하다. 하지만 나의 4월은 다시 침묵이다, 그는 침묵한다.

 

떠난 이들의 4월. 4월들.

세월이 가도 가도 잊힐 수 없는 그 참사의 대홍수, 방주도 없는 홍수에 묻혀 역사가 되어버린 영혼들. 멀리 타이타닉, 아니 제암리 교회, 제주는 또. 의령의 총 든 미치광이 세계기록 갱신자, 대구 가스 폭발, 다시 또 어두운 바닷물 속으로 끌려들어간 아리따운 영혼들. 뿐인가, 바로 가까이에서 떠난 이들, 만우절 아침에, 그냥 4월에, 또 4월에.

그는 생각한다. 시는 잊었다. 고아가 된 것도 4월이었지. 사람이 고아가 되는 것은 예고 없는 일순간이라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그 49재 안에 은사님도 가셨다. 몸도 맘도 완전히 고아가 되었었다. 그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도 ‘어, 그런가.’ 믿어주셨을 은사님. 너는 누군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하면 믿을까. 어림없다. 그는 의심이 많다. 자신의 말에도 의심이 혹 덩어리처럼 엉겨 붙어서 내뱉지 못하는 존재다. 그것을 안다, 그도. 의심만 많은가. 좁아 터졌다. 좁아터지면 시야도 인생관도 좁다. 아는 것도 좁다. 박학다식해도 글을 쓰기 시작도 못할 터인데, 아는 것이 좁으니 시작도 할 수 없다. 더구나 시를. 많은 것의, 어쩌면 모든 것의 응축인 시 한 구절을 감히.

 

띵똥! 소리는 고집스럽다. 대문 께가 아니라 머릿속인가. 그가 반응이 없자 다른 소리가 되어 들려온다. 인 더 애티튜드 오브 사일런스…… 침묵의 자세에서 영혼은 더욱 밝은 빛 속의 길을 찾으며……4*  어라, 침묵만이 답이다. 그는 침묵한다.

굳이 한 가지, 너는 너 자신의 본성을 표현해 본다. 우올 – 우와 올을 더해서 합친 것, 요즘 유행하는 축자다. 준말이라던가. 우물 안 개구리도 못된, 우물 안 올챙이. 올챙이로 살다가 갈 것 같다. 이것은 몇 안 되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올챙이의 시는 없다.

 

 

1. 프랑수아 줄리앙 저, 이근세 옮김, 탈합치, 교유서가 2021년. - 다음 ( ) 속 인용은 이 책에서다.
2.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 프라하, 1904년 1월 27일 수요일 (서용좌 역, 『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 , 솔출판사, 재출간 2017, 67쪽.)
3. 김광규, 아니다 그렇지 않다, 문학과지성사 1983년.
4. M.K.Gandhi, TRUTH IS GOD, Chapter 18: Value of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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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   전남여고문학 9호, 301-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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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3. 1. 30. 07:30

 

글은 독백이다

 

 

 

    글은 독백이다. 듣는 사람 없이 홀로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 여기 파도 흉용한 육지를 항행 하는 영혼들,* 그 누군가가 홀로 말하기를 선택하는 것은 소통의 균형이 깨어져서다. 들려오는 소리의 범람 속에서 말하기가 어렵다. 생각을 소리로 내는 일, 그것이 어렵다. 아주 어렵다.

 

     누구에게 말하는가, 어디에서 말하는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맘 편하게 말 할 수 있는가. 한국 평균인, 나이는 대강 45세, 그가 남자 또는 여자라고 가정하자. 173센티미터 또는 160센티미터쯤 되는 키를 하고, 직장에 다니기도 안 다니기도, 결혼을 하기도 혼자이기도 한 어떤 사람. 그는 못해도 하루 여남은 시간을 어디에선가 누군가와 부딪고 살아 갈 것이다.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서 말을 하는가. 세상은 말의 대양이고, 그의 뇌는 포만감으로 이미 멍하다. 그는 실패적 순간들에 맞닥뜨린다. 다행히 머리가 좀 좋고 이성적이라면 그는 페르소나를 만들어 낸다. 페르소나는 상대가 희망하는 말을 할 줄도 알고 그만큼 행복하게 하루를 산다. 그의 페르소나가 열심히 말을 하는 동안, 그러나 그, 그의 인격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의 인격은 벽에 갇힌다.

 

     언어에 관해서라면 아직 읽기와 쓰기가 남아있다. 읽기에 몰입할 수도 있다. 동서고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글들을 쏟아내었는지, 인쇄되어 남아있는 서책들을 한꺼번에 모아놓는 일은 상상을 불허한다. 온라인 시대가 되고 보니 손바닥만 한 화면에서 열리는 글들의 세계는 망망대해 아니 블랙홀, 과문한 나는 설명할 표현을 찾지 못한다. 꼭 물병자리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작정 단호하고 확고해서 한번 무엇인가에 빠지면 귀를 베어가도 모른다는 단점투성이 물병자리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기만큼 사람을 훼손하기도 어렵다. 읽기는 시간을 죽이고 몸과 머리를 감염시킨다. 책에 쓰인 것은 진리요, 책이 삶일 것이라는 부실한 맹신으로 자라난 탓이리라.

 

     이제 하나 남은 쓰기, 그것은 우리를 구할까. 심장에서 스멀스멀 또는 쿵쾅쿵쾅 시작된 말이 긴 긴 핏줄을 돌고 돌아, 믿거나말거나 지구를 세 바퀴를 다 돌아 입술 끝에 매달려도 뱉어낼 수 없을 때, 글이다. 그때 비로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쓰기 시작할 수 있다.

 

     누구에게 쓰는가. 그건 말을 못하는 사정과 다르지 않다. 그는, 나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글을 쓸 수 없다. 홀로 쓴다. 그것이 어쩌다 지면에 얹히면 작품 발표가 되고, 그는, 나는, 작가라고 불린다. 독자, 언감생심 독자를 향하여? 진심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아니다. 독자는 허상일 뿐이다.

     안도현이 「땅」 이란 시를 썼다. 내게 땅이 있다면 / 거기에 나팔꽃을 심으리 / [……] 내 아들에게는 한 평도 물려주지 않으리 / 다만 [……] 동그랗게 맺힌 꽃씨를 모아 / 아직 터지지 않은 세계를 주리 - 아들에게 땅 대신 꽃씨를? 누구는 감동해서 눈물 젖은 눈으로 나팔꽃을 심으리라 한다. 누구는 설마 진정일까 반문한다.

 

     보라! 글은 독백, 홀로 쓰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는 외로움에 잠겨서, 마침내 외로움을 벗 삼아 홀로 쓰는 것이다. 바보같이 어떤 사명감으로, 또는 예술의 길이라는 착각으로, 그러다가 다 놓고 그냥 쓴다. 토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그냥 내놓을 뿐이다. 글이라는 이름으로.

     길을 나선 글은 무심코 제 갈 길을 간다. 행여 많은 독자를 만난다 하더라도 글은 그대로일 뿐, 더 중해지지 않는다. 외면당한다 하더라도 헐해지는 것도 아니다. 글은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이다. 잠시 누군가의 기억에, 서가에, 그러다가 잊히고 휴지조각으로 소멸되기까지. 그렇게 글은 독백으로 시작되어 독백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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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광주문학 제 104호 특집 <나의 문학> 46~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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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3. 1. 7. 08:12

 

빙하가 녹았다

 

 

     빙하가 녹았다. 초여름 폭염으로 알프스 산의 빙하가 무너져 내렸다. 산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졌고,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눈과 흙이 쏟아져 내렸다. 얼음 덩어리가 산비탈을 타고 내려가며 눈사태를 일으켰다. 맙소사, 산골 부락은 아니었지만 등산로까지도 덮쳤고, 사람들이 숨졌고 실종되었다.

     등산객 몇 사람이 숨진 일에 지구인들은 꿈쩍도 안한다. 몇 사람의 사망사고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날마다 더 많은 죽음들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우와 토네이도 할 것 없이 변화된 지구 환경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간다. 자연재해라고 치부하는 이 사고들도 엄밀하게 보자면 지구인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역작용이다. 하물며 인재는 어떠한가.

 

     먼 데 말고, 작년 한 해 우리나라의 산재사고 사망을 보자. 3월에 KDI(경제정보센터)가 내놓은 자료다. 산재 사망자가 연간 828명이라고 하니, 하루에 두세 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했다. 이러저러 산재 통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죽음을 더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말을 하다 보니 죽음을 숫자로 말하는 자체가 죄송스럽다. 숫자에 애도를 곱하는 마음으로 용서를 빈다. 다행인지 올해 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에 즈음하여 50인 이상 사업장의 사고사망 사례는 감소했다고 한다. 공동생활에서는 엄격한 법이 필요한가 보다.

     재해 유형으로는 떨어짐과 끼임 등 재래식 사고가 여전히 많다고 한다. 건설업의 기계와 장비에 의한 사고들이다. 밥 벌러 나갔다가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영안실로 조퇴 당하는 사람들이다. 왜소한 몸으로 구릿빛보다 더 붉게 탄 얼굴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죽음도 간간히 보고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사탕수수 농장 등에 홀려서 떠났던 우리들 누런 얼굴들의 수모를 새삼 일깨운다.

 

     순간에 저승으로 떠난 이 사람들은 마지막 그 순간에 힘들었던 삶을 원망했을까. 증오심을 지닌 채 죽었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까. 어느 지옥으로 갈까.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 편을 보면 형벌은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되돌려 받는 형식이다. 콘트라 파소 – 정반대의 고통이란 이 말은 인과응보와 통한다. 지상에서의 악행과 똑같이 대응하는 지옥의 형벌이라면, 떨어짐이나 끼임으로 죽어간 그들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방치한 위인들이 받을 형벌이다. 기도교적 의미에서 신을 몰랐다 하더라도, 예수 탄생 이전의 선인들처럼 천국에는 갈 수 없으되 지옥의 천국이라 할 림보에 평화롭게 머물 것이다. 지옥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림보에서 시작하여 음욕 지옥 - 식탐 지옥 – 탐욕 지옥 – 분노 지옥 - 이단 지옥 - 폭력 지옥 – 사기 지옥 – 배신 지옥으로 깊어지는 층을 보면서 마지막 최악의 지옥에 들어가 있다는 위인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최종지옥인 코키투스 호수의 쥬데카에는 예수를 배반한 유다와 더불어 카이자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롱기누스가 악마 루시퍼의 발아래 눌려있다. 쥬데카라는 이름은 이스카리옷 유다에서 유래했으니, 말 그대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인간들이 가는 지옥이라고 한다. 다만 신성모독죄보다 더한 죄가 배반과 배신이라는 점이 기이하다. 21세기 자본의 시대에 생명을 배신한 죄, 안전에 무감각한 기업과 제도의 담당자들을 단테라면 최종지옥에 보낼 것이 분명하다. 상상으로나마 이처럼 복수 같은 것을 꿈꾸는 글은 ‘시적 정의’라는 이름으로 용서가 될까.

 

     우리나라에도 콘트라파소 같은 것이 있었다. 인과응보라는 개념으로 있어 왔다. 전생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행위의 결과로서 내세에서의 행과 불행이 생긴다고 믿는 태도이다. 인과응보 개념이 불교에서는 윤회사상의 원리가 되며, 덕 또는 업보와 연관된 실천철학에 가깝다. 악한 행위는 업보가 되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참회하고 덕을 쌓아 업을 없애면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선 내세에 대한 믿음이 줄고, 무엇보다도 정의라는 개념조차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라고 하면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이거나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의는 예로부터 왜곡되어 왔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견해는 이미 플라톤의 『국가』에서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했다. 정권이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법을 제정하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피통치자에게 정의로운 것이라고 공포하고, 이것을 어기는 자는 부정의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한다고. 물론 대화의 상대편 소크라테스는 정의를 변호했지만, 글쎄다. 유사 이래 법도 정의도 늘 강자의 편이 아니었던가. 약자는 비겁한 채로 강자의 선의(?)에 기댈 뿐이고.

     강자가 어찌 약자의 설움을 알랴. 가는 말이 고와도 오는 말은 곱잖고, 권선징악도 헛일, 선하면 바보짓이고 악해야 겨우 사는 모양새를 내는 것만 같다. 경쟁과 대결에서 어떻게 선하냐고! 내 팔꿈치는 억수로 강하게 뻗도록만 훈련되었는데!

 

     S대학교는 만일 내가 거기 들어가면 누군가 한 사람은 못 들어가는 것이네여…….

 

     그렇게 중얼거리던 중3 아이, 그의 아이가 중3이 되도록 세상은 여전히 살벌한 경쟁터다. 아니, 더 공포스럽다. 무감각이라는 바이러스가 공기 속 무서운 전파력으로 온 세상을 뒤덮고 있어서, 우리는 다만 유능한 기능인을 흠모하며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커녕 무참히 사라지는 생명조차도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안톤 슈낙의 글에서 끝났다.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도 이제는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는다.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 이런 이미지에 슬퍼했었다니!

     알프스에서 빙하가 녹았고, 눈사태가 등산로를 덮쳤고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거푸집에 노동자가 끼었다. 외국인이었다. 결국 죽었다. 그것들은 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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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빙하가 녹았다」, 『마음이 머문 순간들』, 이대동창문인회, 206~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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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