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4. 6. 9. 23:52

장편소설 『표현형』 

 

푸른사상사, 2014. 5. 31. 발행

변형국판 352쪽, 값 15,000원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 등장인물이면서 써나가는  느슨한 연결의 장편.

    한 꼭지 씩 따로 읽어도 되는......

   

- 차례 -

배달민족

한국어

일기

은실

파도소리

초혼장

포이동 266번지

쥐도 인간이다

삼포세대

표현형

 

 

  추신: 내용보다 멋진, 표지 전체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넘쳐나는 표지는

          아들 조윤기의 작품. 매달린 박쥐가 일품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51

「청출어람」

배우는 것은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 순자 『권학』에서

 

 

강의가 달랑 하나로 줄어든 지난 해 봄이었다.

3월 한 달을 애매한 마음으로 보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에 대한 구상이 일렁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순간. 그냥 집으로 기어들었다. 마침 시향제를 앞두고 부산하여 아버지랑은 정색으로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내가 풀이 죽어 온 것을 알아차리신 눈치였다. 이런 저런 준비로 대청소에 음식 장만에 신경을 쏟는 중에도 곁을 살피셨다.

그렇게 일요일 늦은 오후가 되었다. 산에서 함께 왔던 친척들도 다들 떠나고, 집엔 산에서 묻혀 나른 마른 잔디 부스러기들이 뒹군다. 보이지 않게는 얼마나 먼지들이 일고 있을지. 크지도 않은 대청마루와 부엌 바닥을 훔치는데도 숨이 찬다. 시계를 또 쳐다본다. 그날 저녁 꼭 보고 싶은 8시 다큐프로그램 생각을 한다.

금실이 피곤하지. 네가 와서 난 좋았다만. 우리 찜질방 다녀와서 저녁 먹자. 아버지 시장타 안 하실 거다. 은실이랑 애들이랑 다 함께 가자.

어머니가 평소에 안 하시던 말씀을 하신다. 모처럼의 말씀이라 아니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애들은 말고요……, 하려다가 그것도 만다. 조카들까지 함께 갈 생각은 없지만, 속 좁은 노처녀 이모 소리 들을 건 없다 싶어 삼킨다.

그렇게 저녁이 늦어지고, 아무래도 부엌 정리도 평소와 같지 않고 늘어지기만 한다. 아버지는 벌써 9시뉴스를 보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9시뉴스를 본다. 한국인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약 3시간이란 통계를 본 적이 있었다. 일 년이면 1,095시간, 그러니까 45일 이상을 텔레비전 앞에서 산다. 평균수명 80세를 생각하면 10년을 그렇게 산다. 물론 나도 그렇다. 뉴스 아닌 픽션, 드라마를 본다. 중간부터 봐도 괜찮고, 중간만 봐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은 단편이다. 어제는 지나가버렸고 내일은 미지수다. 요즘엔 머리가 멍할 때면 아무거나 어수선한 드라마 조각들을 보며 앉아 있곤 한다.

그래도 그날은 머리를 깨우는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었다. <KBS 스페셜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 카프카의 말로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들’ 비슷한 것 말이다. 그런데 시간을 놓쳤다. 다시보기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에 ‘의궤’라는 것에 대해 조금 공부해둘 시간을 벌기도 한다.

 

의궤 - 발음도 어려운 ‘의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예전에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왜 학교에서 들어보지 못 했나 의아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내가 다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궤는 조선 건국 당시 태조 때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는데,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 1601년(선조 31년) 의인왕후의 장례 기록인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라고 한다. 보통 필사하여 소량을 제작했고, 특별히 제작된 한 권은 어람용이고 나머지는 관련기관과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고.

이 스페셜 프로그램에서 다룬 의궤는 조선왕실의 귀한 기록문서라는 뜻 그 이상이다. 그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도서 300여 권을 꼬집어서 일컫는다. 사실 프랑스 뿐 아니라 일본 궁내청도 조선왕조 의궤를 81종 167책이나 소장하고 있고, 그밖에 『진봉황귀비의궤』, 『책봉의궤』 2종,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 『화성성역의궤』 등 5종이 새로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만하면 의궤에 관한 기초자료는 공부했다.

프로그램에는 결정적인 인물 박병선이 등장한단다. 박병선 - 인물검색을 한다.

사학자. 1929~2011. 서울대학교 학사, 파리 제7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박사과정 수료. 논문은 「버림받은 공주와 민속 신앙에 대한 고찰」로, ‘트레비엔’ 평점을 받았다.

무엇보다 1955년 스물일곱에 (어딘가 자료에는 서른셋이라고 했지만 그건 계산이 틀리다.) 유학길에 올랐다. 동란 후 아직 어수선한 세상에서 최고의 지성과 자유의 상징인 프랑스로 향했다. 스승 이병도 교수는 게 가거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들이 어딘가에 있을 테니 꼭 찾아 보거라, 라는 당부를 하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합리적이었지만, 어디쯤에 있는지,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오리무중 상태의 도서에 관한 당부를 평생 간직했던 제자가 기특할 따름이다. 그는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있으며, 틈틈이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과 고서점 등을 기웃거렸다. 1890년대에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이 펴낸 『한국서지』 - 고려시대의 『상정고금예문』에서 한말의 『한성순보』까지 3800종 이상의 책을 소개한 목록해설서 - 는 프랑스 내 어딘가에 의궤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에 사실성을 더해주었다.

 

청출어람 - 스승 두계(斗溪) 이병도에게서 ‘더 푸른’ 박병선이 나왔다. 이병도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이건, 식민사관의 대부이건 그게 여기서 중요하진 않다. 진단학회, 분명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지만, 한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한국근대사학 성립에 기여한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것이 친 체제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실제로 같은 강점기에도 신채호와 박은식 등의 민족주의 계열의 사학이나 백남운 등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강한 정치적 의지와 현실 참여를 바탕으로 반식민주의 사학의 성격을 지녔지 않은가. 시대가 학자에게 변명의 빌미가 되어줄 리 없다. 그렇다고 이병도를 예서 평가해서 뭘 하겠나. 나는 사학자도 아니다.

그 이병도 교수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한 제자에게 일렀다. 프랑스인들이 ‘훔쳐간’ 우리 것들을 꼭 찾아보라고. 푸른 대나무 조각을 쪼개어 묶어 역사를 기록한 데에서 온 청사라는 말, ‘푸른 역사’의 스승과 제자다웠다.

나도 모르게 이병도를 변호하는 글들을 찾아 읽어본다. 결정적으로 그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군사적 기구가 아니라, 다만 가야와 왜 간의 무역 담당기구였다고 주장했다. 또 식민사관에서는 고조선의 준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된 위만을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여 위만조선에서 한국사의 단절을 강조했지만, 이병도는 『사서』에 기록된 위만의 상투 튼 머리 모양과 복식으로 보아 그가 원래 고조선 유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순간 이병도는 ‘더 푸른’ 제자 때문에 긍정적 평가 쪽으로 저울이 기운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른들, 쪽이 있어 근원이 되었음 아닌가. 어쨌거나 학불가이이(學不可以已), 학문은 그쳐서는 아니 된다는 순자의 권학 말씀이 옳거니.

 

 

다시보기 - 월요일 아침 일찌감치 컴퓨터를 켰다. KBS를 찾아 아이디를 넣고 비밀번호를 넣는다. 서둘다가 한두 번 틀린다.

부욱 하고 휴대전화가 미끄러진다. 속세를 떠나 절로 들어가련다는 선배의 문자메시지에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그 절 이름은 만우절이라고 할 때서야 쿡쿡 웃었다. 이젠 어제의 프로그램은 다시보기가 안 된다는 메시지가 뜨더라도 만우절이라 놀라지 않으리다. 뜬다. <스페셜 프로그램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광고방송이 가볍게 두 번 지나가고 어스름 화면이 시작된다.

1975년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바깥의 화려한 세상과 대조되는 장면 - 적막한 밤을 밝히는 작은 손전등을 든 손이 먼지가 수북이 쌓여 날리는 책을 쓰다듬는다. 효과도 멋지다. 프랑스국립도서관 베르사유분관의 파손 도서 보관실에서였다.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초월한 듯, 그저 진지한 인간의 얼굴, 그 입에서 유창한 프랑스어가 흘러나온다. 박병선 박사 만년의 모습이다. ‘처음 의궤를 발견했을 때 너무 감동해서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어요.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20년 동안을 한 우물을 파다가 마침내 그 대상을 만났다는 것이 믿어졌겠는가. 중국도서 번호를 지니고 있던 우리 것. 한 사람 사학자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보물을 알아본 것이니.

그러나 그것은 시작의 순간에 불과했다. 1978년 10월에는 한국에서 의궤 발견 기사가 떴다. ‘강화도사고문서 파리서 발견’이라는 제하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약탈해간 필사본 등 130종 345권이 112년 만에 발견되었다는 뉴스였다. 더구나 한국에 없는 책들도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보도되었다. 이런 보도에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은 곤란해 했고, 냉대는 극에 달했다. 그쪽 입장에서야 내부인인 사서가 ‘여기 우리’ 도서관 분관 창고에 약탈된 도서가 있노라고 그 해당국에 알린 정황으로 해석될 밖에. 결국 권고사직의 형식으로 도서관을 그만 두고, 우리 대사관 한 구석에 마련해준 연구실에서 홀로 의궤 연구에 들어갔지만, 정작 도서관에서는 열람자 신분의 출입마저 제한했다고 한다. 굴하지 않고 매일 도서관을 찾은 그에게 계절이 바뀌고서야 출입이 허락되었지만, 하루 단 한 권의 열람이 조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곧 바로 책을 반환하라고 할까봐서 점심 거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고 했다.

날마다 점심을 거르고? 먹으려고 사는 세상에서? 이건 아이러니가 아니라 결과적인 철학이다. 결국 오늘 하루 잘 살아서 무엇을 위함인가, 다시 내일 잘 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게 종일 먹지도 못하고 의궤에 매달리기 10년여 세월이 흘렀다. 『조선조의 의궤 - 파리 소장본과 국내 소장본의 서지학적 비교검토』라는 책을 써냈다. 제목과 주요내용은 말할 것 없고, 제작 년도를 분류하여 정리했고, 특히 외규장각 의궤와 한국에 남아있는 의궤 사이의 특징을 비교 설명해 놓은 역작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동영상의 목소리. 그 세월 동안 그는 한국에 의궤를 알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금실아, 아버지 나가신다.

어머니가 부르시는 소리에 화면정지를 눌러 놓고 내다본다.

아버지, 어디 가셔요?

글쎄다. 그런데 넌 오늘 안 내려 가냐?

가야죠. 이따 오후에. 저 화‧목 수업이에요.

화요일 목요일 이틀만 해?

예.

그럼 나랑 산책할까?

산책을요? 어제 피곤하실 텐데요.

산책이야 늘 다니시지. 언제는 피어선학교, 아니 지금은 평택대학교지, 게까지도 가셨더란다. 이십 리 길이니 가시는 데만 두 시간도 넘는데.

어머니가 거드신다.

거길 왜요?

그냥 걷다 보니 거기까지 갔더라. 올 땐 버스 탔지. 헌데 그 대학이 성경학원 때부터면 백년 넘은 역사니까 대단할까 싶었는데, 왜 거긴 미국, 중국, 일본학과만 있는지 모르겠더라.

…….

거긴 원래 신학대학이잖아요.

내가 암말 않고 있자 또 어머니가 거드신다.

아버진 별 공부도 안한 성 싶은데 교수도 되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실 것이 뻔하다. 아버지 기준으로는 확실한 선진국에 유학해서 박사가 되어온 딸 정도라야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런 딸이 시간도 제대로 못하는 거의 백수 신세니.

아버지, 오늘 좀 추운데 나가시게요?

춥나? 젊은 애가?

하늘이 비도 올 것 같네요.

핑계는. 너랑 코앞의 평택호에 가본지도 오래다. 여기 서해대교에도 안 가보았지?

거긴 개통된 지 얼마 안 되니까요.

얼마 안 된다고? 십년도 넘은 게 얼마 안 된 세월이냐. 7,000미터가 넘으니 장관이지. 나들이 좋아하지 않는 네 어머니도 다녀왔지 벌써. 그러고 보니 평택이 징검다리네. 아산과 이어 평택호 만들었지, 당진과 연결해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었지. 넌 이곳 팽성을 땅끝이라 여기는 사람 같아. 바다 쪽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으니.

바다요? 바다라는 게 제겐 좀 상징적일 뿐, 바다라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바다…… 뭣보다 여기 바다는 뭐랄까, 막힌 느낌이죠.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남쪽 섬을 생각했다. 섬이라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일 텐데. 그런 느낌은 뭐랄까 신천지에 대한 발상처럼 다가왔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고서도 바다를 바라본 적이 없이 내륙으로 내륙으로 향해서 살아왔다. 이제 난데없이 다른 사람의 섬을 생각하다니. 이건 무슨 억하심정은 아닐 테고. 방향 상실일까.

놔둬라. 혼자 다녀오마.

그렇게 아버지가 나가시고 난 뒤에도 어머니는 눈으로 나를 붙들고 계셨다.

어머니, 왜요?

아버지 말이다.

아버지가 왜요?

아버진 이럴 때 며칠은 정말 우울해 하신다.

거야, 어차피 늘.

잘나가는 청주 한 씨들이 좀 많으냐. 왜 우리 집안만 손들이 귀해가지고. 하긴 아들들 있어도 시제에 소용 없더라만.

설마요.

이 어미가 없는 소릴 하냐. 너희 어려서랑은 시제 음식 도맡아서 장만하던 정문리 당숙모 알지? 당장 그 집 며느리들 둘 다 교회 다니면서는 손 거들어 주기는커녕 참석도 안 해. 조상 숭배하고 하느님 숭배가 상충이라는데, 어디 같은 거라야 상충이 되고 말고 하지.

꼭 그래서가 아니고, 하는 집들도 요즘 간소화 추세라서 그렇죠. 어머니도 좀 간소…….

간소하게 하고 말 게 뭐 있냐. 사람들 모이면 밥은 먹게 해야지.

음복이라는 것도 참석자만 하면 안 될까, 엄마? 다 챙겨서 싸주고 하려니까 엄마가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미래, 그래. 내가 딸만 낳아놓고 무슨 입을 뗀다고.

어머닌 또!

안다 알아. 요즘엔 아들들도 집안 대소사도 나 몰라라 한다는 판국에. 한국도 미국이다 요샌.

어머니, 너무 괘념 마세요. 세상이 바뀐 걸 어떡해요. 미래만 보고 달려도 살아남을까 말까, 과거로 눈 돌릴 틈이 있어야 말이죠. 변명이 아니라 당장 내일 일도.

그도 그렇다. 잘 배우면 잘 배운 대로, 덜 배우면 덜 배운 대로.

어머니, 전 아무래도 너무 배운 것 같아요.

이 말은 내뱉지는 않았다. 내뱉지 못했다. 힘들여 공부 뒷바라지 해 놓으니 너무 배워서 불통이라는 뻔뻔한 말을 어찌 풀어낸단 말인가. 그렇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 루소가 뭐냔 말이다. 아니 애당초 그런 공부를 하겠다고 작정하기까지 난 도대체 무엇에 씌었을까.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동서양의 진리들을 동등하게 모두 공부해야한다는 원칙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너무 적게 배웠다. 한국과 프랑스가 우리에게 대등할 리 없는데 대등한 것으로, 심지어 석학들이 더 많은 - 더 많이 소개된 - 서양 나라들이 더 위대한 것으로 주입되었다.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

어머니, 저 컴퓨터 보고 있던 게 있어서.

그래라.

 

나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박병선 박사를 떠올렸다. 같은 파리의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 평생을 바쳐온 그와 남의 것을 겉돌다가 중도하차한 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어떤 갈림길에서 인생이 달라진 것일까. 힘이 빠진 채 까만 화면을 다시 불러낸다.

재생 화면을 누른다는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다. 어스름 화면. 1975년 - 어머나, 내가 태어난 해였네! -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막대를 옮겨 아까 멈췄던 곳을 찾아간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프랑스의 한국 보물들 - 그 종류와 가치>란 제목으로 의궤 사본 297권, 인쇄본 45권, 두루마리 8권의 목록을 밝혔고, 책 15권과 두루마리 1권은 분실된 상태임을 알렸다. 그렇지만 반환은 꿈도 못 꾸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서울대학교 규장각 팀에서 콜레주드프랑스와 공동발행으로 의궤 관련 책을 출판했다. 프랑스어 판으로, 저자는 박병선 박사.

콜레주드프랑스는 16세기 이래 유서 깊은 개방대학이다. 파리에 머물던 4년 동안 라틴구에서 만날 바라보던 그곳이 떠오른다. 아련히, 아픔처럼. 롤랑 바르트도 미셀 푸코도, 움베르토 에코까지도 강의를 했던 곳. 콜레주드프랑스의 관심은 당연히 프랑스 석학들에게 의궤의 중요성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의궤 발견으로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뜻하지 않게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1993년 9월, 고속철 테제베의 한국도입과 관련해서 프랑스 측이 한국에 공을 들이는 시기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선물로 들고 왔다. 분명히 반환의 제스처였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코 흘러만 갔다.

한국 내에서 반환운동이 일자 프랑스도서관 측은 의궤 전체를 폐물창고에서 본관으로 이전하고 수선과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에는 반환 반대여론이 정점에 이르렀다. 예술분야 전문 일간지 <라 트리뷰드 아트>는 리크네 편집장을 앞세워 아주 강경했다. 프랑스법에 국외문화재 반환 의무가 없으므로, 비록 국제법에서 반환을 요구하더라도 반환할 의무가 없다는, 자구적인 고집이었다.

그런 명석함은 명석함이 아니라 천착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여론몰이에는 그런 말들이 효력이 있다. 다른 곳을 검색해보니 미테랑 대통령이 의궤 한 권을 우리 측에 선물했을 때 파리국립도서관의 어떤 사서는 자리를 내던지며 맞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작 의궤반환 합의 때에는 사서들 272명이 연대해서 반대성명을 냈다고.

이렇게 의궤 반환에 대한 반발성 기사와 탄원서가 넘치며 반대시위가 일고 있던 상황에서도 참 지식인들은 진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우선 문화부장관 자크 랑이었다. 그는 법적으로는 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재산임이 맞지만, 정신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의궤의 주인은 한국이라고 했다. 파리 제7대학, 제13대학의 교수들도 합세했다. 13대학의 살즈만 총장은 국외 문화재란 거의 군사적 침입이거나 정부 간 협상 없이 가져온 것들이며, 그렇다면 현재의 소유국에서 원래의 소유국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소유국에서 대중에게 전시도 하지 않으면서 타국의 문화재를 계속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참으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인류의 문화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런 뜻에서 당시 문화부장관은 박병선을 가리켜 아름다운 한국국민이자 세계국민이라고, 그의 투지와 용기, 그리고 집념을 온 나라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 - 그것은 결국 드러난다. 세상에는 늘 공평무사한 지식인들이 있어온 때문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아버지가 한번은 어느 노령의 일본인 교사가 공개한 일본 고지도들 이야기를 하셨다. 1880년엔가 발간된 <대일본국전도>와 일본문부성이 발행한 1900년쯤의 <수정 소학일본지도>에는 일본영토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아예 들어있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분명히 알았다는 증거가 되는데, 그럼 지도들을 공개한 그가 매국노인가.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진실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이익과 불이익을 초월하여 진실을 인정하는 자질로서만 평가된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말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진실임을 믿어야 한다. 그런 글을 최근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화면을 멈춰놓고 그 책을 찾는다. 어느 독문학 연구서다. 프랑스문학 관련 독서도 현대문학 쪽을 살필 여력이 없던 내가 독문학 서적이라니. 희망 찬 모교 강사시절 유럽문화연구소에서 독문과 강사들과 교류하던 덕이다. 아니, 지금의 지방대학에서 만난 배 아무개 교수 탓일지. 지방대학이라지만 나와 엇비슷한, 어쩌면 더 젊은 나이에 전임이 된, 정말 부러운 위치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가족사에 관련된 흔적을 찾아 독일로 잠적하다시피 날아갔는데, 그 뒤로 뭔가 얽혀들게 된 것이다. 얽혀들었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그가 나에게 간헐적으로 개인적인(?) 자료를 보내왔는데, 거기에 나치시대의 유명작가가 깊이 관련되어 있던 것이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때문이었다.

찾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의 후예인 서독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에 관한 연구서였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질보다도 살인보다도 더 가공할 죄를 짓는다. 강도나 살인에 대해서는 명시된 법조항이 있고, 일단 언도받은 죄수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터준다. […] 그러나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 불문율 앞에 내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이 법은 불문율이며, 그 점이 그의 예술, 그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다. 그에게는 어느 하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 그가 그 순간 제공할 수 있는 전체를 주거나 - 아니면 무 - 그러니까 침묵이다. 그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 16쪽의 글이다.

언젠가 같은 작가의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이라는 소설에서도 전범국 독일의 청소년의 심리를 가슴 아프게 따라가며 조금 놀랐던 기억도 있다. 이 연구서에는 제목을 ‘고백’이 아닌 ‘견해’라고 했는데 직역인가 보다. 유년시절에 나치를 경험한 어릿광대는 새 인생에 적응하고자 ‘견해’를 바꾼 어른들의 처사에 울분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경악의 비밀이 상세한 작은 일에 있음을 모른다고. 모른 척 한다고. 큰일을 후회하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다. 정치적 과오, 간음, 살인, 반유대주의 등을. 그러나 상세한 -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사실들을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그가 공연을 위해 ‘모으는’ 순간들은 순간적 작은 진실의 총체이며, 이것이 위대한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고. 순간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 그래.

나는 또 옆길로 샌다. 책을 덮자. 유럽 지향으로 굳어버린 내 머리를 다시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돌린다.

 

직지 - 그런 이름의 책은 경이 그 자체다. 존경해 마땅할 스승과 제자의 집념은 전대미문의 성과를 낳았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의 주인공이 한국이라는 증표라니. 오매불망 고서적들을 뒤지던 박병선 박사에게 프랑스인 동료사서가 ‘아주 오래된 동양책’이 있다고 알려준 덕이었다. 『직지』라고 한자로 쓰인 먼지투성이의 책은 선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정식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주제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그 비슷한 뜻이란다.

발견된 책자는 전 2권 중 하권뿐이었고, 하권은 39장이지만 그나마 제1장은 유실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1377년(우왕 3년)에 흥덕사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과, 주자인시(鑄字印施)라는, 쇠를 부어 만든 글자를 찍어서 배포했다는 기록까지 완벽한 물증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떨렸을까. 조선도 아닌 고려 말기에 금속활자본이라니.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1455년을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이는 그보다 근 한 세기를 앞섰다. 확산도 면에서 구텐베르크의 『성서』 배포에 밀렸다지만, 그게 대순가. 1972년 파리의 <유네스코 세계도서의 해 기념도서전>에 『직지』를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노력 끝에 2001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까지, 박병선의 꿈의 한쪽 날개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직지』라는 이름의 책을, 아니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학문이란 것이 얼마나 뾰족한 것인지, 옆의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파리의 하늘에서 그런 위대한 발견이 있었던 사실도 모른 채. 여전히 유일한 그 금속활자본이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음도, 왜 프랑스에 영구 보관될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 채.

내용인 즉, 한말 주한프랑스대리공사였던 플랑시라는 인물이 구입해서(?) 귀국 때 가져간 것을 나중에 골동품수집가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했고, 그가 1950년에 사망한 뒤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기 때문에 소유주가 분명한 셈이란다.

또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된 『직지』는 목판본이라는 것도 모른 채. ‘흥덕사자’라고 명명된 그 금속활자 자체의 흔적은 아직 오리무중이라는 사실도 알 리 없이. 나는 21세기를 맞는 파리에서 오직 남의 정신만을 파먹고 살았다.

언제라도 흥덕사지엘 가보고 싶어진다. 고인쇄박물관이 있다는 그곳에. 네이버 길찾기에서는 평택과 청주 사이라면 버스로 한 시간이라는 정보가 뜬다. 각각 터미널까지 오가는 길을 더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리라. 성남으로 향할까 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있다는 곳. 자동차라면 청주가기보다 더 가까울 것이나 대중교통으로는 세 시간 반이 걸린다고 뜬다. 아서라, 뒷북이다. 아니, 뒷북이라도 무관심보단 나으려나. 방학 때 집에 오면 들러볼 마음을 묻어둔다.

오디세이 - 다시 <의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끄기 위해서다. 어젯밤 찾아본 기록들로는 1975년의 『의궤』 발견도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반환과정도 오디세이의 귀향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직지』의 사정보단 나았지만, 약탈의 증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의궤』의 오디세이는 그 시작이 병인양요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린 양요들, 병인양요 - 기록들을 찾아본다.

1866년 초 병인박해로 천주교신자 수천이 학살되었고, 프랑스인 선교사 9명도 처형되었다. 화를 면한 3인 중 리델이라는 신부가 청나라로 탈출해서 프랑스극동함대 로즈 사령관에게 응징을 요청했다. 함대는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노라.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우리는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10월 16일의 일이었다.

1,000배로 갚아주겠다고? 대단한 복수심이었구나.

강화도엔 왕실의 전적을 보관하는 두 개의 사고가 있었는데, 강화성 내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과 강화읍 남쪽 정족산성 내 전등사 근처의 장사각이었다. 서양인들의 눈으로는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화려한 장정의 신비한 서책에 뜻도 모르고 반할만도 했겠다.

로즈 사령관은 장교들에게 목록까지 만들게 해서 완전한 노략질을 자행했는데, 11월 9일 조선의 정족산성 승첩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를 철수하면서 이들 서책들을 가져갔다.

어쩌면 전쟁기념물 쯤으로 주장될 수 있었을 도서의 약탈 사실은 사령관이 해군성장관에게 보낸 서찰 때문에 폭로되었다. 필요한 책들은 배에 싣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태웠다는 보고내용이 자충수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 계셨던 최석우 신부님이 밝혀냈다. 그분으로서는 병인양요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프랑스인 선교사들 처형 등에 관한 교난 연구가 주목적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의궤 반환의 꼬투리를 찾아주었다.

다시 화면을 본다. 2011년 5월 마침내 의궤 297권 모두가 돌아왔다. 비록 영구임대 형식을 빌려서라지만 어떠랴. 외규장각을 떠난 지 145년이 지나서야 참으로 긴 오디세이를 마쳤다. 그러니까 처음 먼지투성이 의궤를 발견하고 박병선 박사가 마비증상을 느꼈던 그 감동의 순간에서 36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흔적을 찾아 헤맸던 56년만의 일이었다. 56년. 더러는 그 세월을 통틀어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80대 노령에 암 투병으로 휠체어에 앉은 박병선 박사 - 과제의 완벽한 수행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 가을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사람. 그 모습이 처절하리만치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자크 랑, 『의궤』 반환 당시의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말문을 연다. 박병선 박사의 집념,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의궤 환수라는 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다큐멘터리 편을 보았을 뿐으로 나는 멍한 채로 깊은 상념에 든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이 살아있는 사회, 프랑스이므로 반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세계대전 직후에는 나치에 협력했던 비씨 정부의 잔재를 매섭게 단죄했던 그들이다, 평화 시에는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에 혼외자가 참석해도 소동이 일지 않는다. 대통령이 이혼을 반복하거나 미혼의 여성장관이 혼외자를 출산해도 사생활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그런 나라.

하지만 나의 지난 시절은 나에게 무엇인가. 그런 프랑스에 매료되어, 프랑스의 지성에 매료되어, 루소에 심취하여, 프랑스의 혁명적 철학에 몰입했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이 정말 있었던가. 있었던들 무슨 소용인가.

가지를 늘려 그늘을 크게 키우라 시던 나의 어느 날의 스승님은 뿌리를 단속하라는 말씀을 잊으셨다. 이 바보 같은 제자는 뿌리가 마르면 가지도 그늘도 없다는 단순한 지식을 몰랐다. 스승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생득적으로 간직해야 할 보편 진리를 몰랐다. 괜찮은 제자도 못된 나는 스승이 된 적도 제자를 둔 적도 없다. 십여 년의 계약직 강사 이력이 전부일 뿐이다. 내 지식의 계보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나려나 보다.

점심 - 점심 먹자, 아버지도 진작 들어오셨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고 곧 바로 오셨구나. 넌 뭘 들여다보느라 그렇게…….

어머니는 고개만 내밀고 다시 나가신다.

밖엔 제법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빗물에 적신 초록이 봄을 피워낼 것이다.

얌전히 점심을 먹고 얌전히 인사를 하고 기차를 탈 것이다. 내리면 저녁 때. 아직은 남아있는 강의 준비로 밤을 새울 것이다. 해도 해도 모자라는 공부는 해도 해도 별 들여오는 것이 없지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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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그늘』, 제2호, 시더나무문학회, 85-106쪽.

 

 


 

 

이 감점이라니. 환경정리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우리 반 점수가 이게 뭐예요.

생기신 덩치와는 다르게 평소 수줍게 말씀하시는 담임선생님이 그날은 분통을 터뜨리셨다. 중2 때였고, 그때는 환경점리 심사표에 교탁에 꽃을 꽂아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꽃병을 뺀 것은 학급비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급우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이 당연했다.

저, 그것이…… 선생님, 왜 살아있는 꽃을 죽여서 갖다 놓으라고 하는데요?

뭐시여? 꽃을 죽여? 그니까 까먹은 거이 아니고 일부러 꽃병을 안 갖다 놓았다고? 지시사항을 학생 맘대로 어겨요?

선생님은 급하니까 사투리를 해가며 나무라시다가 가죽 표지의 긴 출석부를 탁 덮으셨다. 다들 숨을 죽였다. 더 대들다가는 출석부로 탁 때려분질랑께, 라고 하실 차례였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갑자기 혼이 나면 간경 뒤집힐지 모른다고 염려하셔서, 출석부로 머리를 탁 치시기 전에 꼭 경고를 주시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가셨다.

을, 꽃다발을 볼 때마다 나는 중2 때 담임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은 담당이 농업이셨다. 실습장에서 감자를 ― 고구마였는데 그땐 고구마도 감자라고 했다. ― 캐는 날이면 굵은 알들은 골라서 근로장학금에 내놓는다 했고, 못생기고 작은 놈들은 가사실습실 가마솥에 쪄서 나누어 먹게 하셨다.

주번, 감자 익었는가 가서 보고 와요.

(다녀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솥뚜껑을 열어 봤는데 연기만 났어요.

연기가 뭐예요, 김이지. 또 김만 보고 오면 어쩐데요. 요렇게 꼬챙이를 만들어 갖고 가서 쿡 쑤셔보고 와야제.

그렇게 무심한 듯 유심한 선생님은 꽃을 죽이기 싫었던 어린 제자의 마음을 받아주셨다. 꽃병에 담긴 꽃은 사람들이 죽인 것이라는 발상은 무심코 불교적 배경에서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착함이 지나치게 강조된 동화책들 속의 착한아이 신드롬 때문이었는지.

생명에 대한 외경심 ― 그런 거창한 개념을 알기에는 어렸던 중학생 시절의 건방진 선택도 찰나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꽃다발을 좋아할 수 없다.

결혼식의 신부가 드는 작은 부케도 사랑의 정점을 상징하지만 한편 곧 사라져버릴 최고의 순간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곧 시들 것이니까. 강남 특급호텔들에서는 식장 장식용 꽃값이 천만 원을 웃돈다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

묘소에 가져가는 꽃들은 우습기까지 하다. 조상님들은 이미 풀꽃들과 함께 사신다. 부족하다고 느끼면 꽃나무를 더 심어드리면 될 일 아닌가.

그래도 외할머니 묘소에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상여를, 그러니까 장례차를 생화로 장식해 달라시던 외할머니의 평상시의 유언을 꺽은 것이 그랬다. 할머니, 꽃 몇 백송이 목숨을 꺾어서 함께 데려가시게요? 사치스러운 할머니도 그 말에 꺾이셨다, 차 전체는 말고야…….

하물며 관행처럼 되어버린 (별 볼일 없는) 문학상 수상 같은 자리에서 느닷없이 받게 되는 꽃다발들은 더 없이 곤혹스럽다. 꽃다발을 받으면 미소를 짓는다, 지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말해야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이고, 되갚을 기회를 놓쳐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또 정말로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은 그렇게 내 삶의 환경정리에서 마지막 순위로 밀려난다. 내게는 명사가 아닌 형용사 같은 것, 내용이 아닌 포장 같은 것이다. 꽃을 생업으로 또는 예술적 작업으로 꺾으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 최고의 것일지언정 좋아하지 않을 자유는 있지 않겠는가. 마침 나는 무명이고 이 글이 실릴 책도 동문들마저 심하면 공해라고 여기고 챙겨가지도 않을 것이니 누가 읽으랴. 꽃 사랑이나 문학 사랑이나 다 제 눈에 안경일 뿐이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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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42

 

 

 

「슬픈 족속」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하얀 세상이 비친다. 하얀 세상, 어딜까? 아니, 낮은 지평선 위, 하늘이어야 할 곳은 검회색 천지다. 검회색, 어디에서 보았던 색깔인가.

첨엔 시원한 물속이었다. 따가운 한 낮의 햇볕 속에서 노란 경계석을 넘나들던 여자아이가 사라진 순간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벌써 발은 물에 젖었다. 허리로 가슴께로 물이 올라오는 것은 순간이었다. 꼬마아이의 옷자락을 잡았다고 느낀 순간 뒤뚱거렸을 뿐인데……. 물속은 상상처럼 푸르지 않고 곧 어두워졌다. 어딘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색은 검다 못해 붉어지고 있었다. 이 깊은 물속, 어쩌면 지구 속 마그마가 흐른다는 중심으로 빠져드는 느낌……. 어디였더라?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호수,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서있다. 비몽사몽간이다. 가볍게, 불과 몇 십 미터를 올라갔던 경사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는 느낌에 뭉클해진다. 깊이는 지구의 중심에까지 뻗히는 인상이다. 얼마나 깊은지 표면은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다시 물속에 빠져든다. 흑수 속으로 깊이.

중국에서 이 영산을 헐어 관광길을 내었다 싶으니 허전하군요.

누군가가 옆에서 불쑥 말을 던졌다.

조약에 따르면 천지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나머지 45.5%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느만요.

저기 저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곳이 북한 땅 백두산 아뇨!

예, 진정한 백두의 임자는 말이 없네요.

진정한 백두의 임자 ― 나는 내 말에 정신이 든다. 지금 무슨 말인가. 몇 년 전 이런 말을 했던 기억과 함께 백두산 천지의 검은 물이 덮쳐왔다. 그랬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지만 난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땐 모교에서 희망적인 상황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보름달 시기에 슬픔은 저만치, 방학은 방학대로 즐겁기만 했었다. 영어학 전공의 동료가 연길에 학술행사에 참석하는 길인데, 이어 백두산 관광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 좌석에 여유가 있다고. 백두산을 내 발로 밟고 천지의 물을 내 눈으로 본다는 상상은 학회가 있는 이틀을 묵힐 것을 감안해도 해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공항에서 만나죠!

동료의 말을 떠올리며 우선 공항 내 은행에서 133.90으로 환전을 하고 시계를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동료가 불러냈다. 서른은 넘고 마흔 명은 안 되는, 소년에서 노년의 집합이었다. 부모 따라, 남편 혹은 아내를 따라 나선 경우가 몇 있어 보였다.

그렇게 탑승수속을 함께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금방 중국이었다. 인천에서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하여 대련에 도착한 것이다. 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에어포트호텔로 향했다. 비행시간은 인천에서 대련까지, 대련에서 연길까지 각각 한 시간 정도라지만, 중간에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사이 시간이었다.

닌 하오, 젠따오 닌 헌 까오싱!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습해 간 한두 마디 중국어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말을 하면 되었고, 인천에서 함께 출발한 가이드가 테이블마다 맥주를 한 두병 가져다 놓았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연예인 같은 젊은 아내를 동반한 남자가 혼자서 맥주를 독차지했다. 꽤 예쁜 얼굴을 하고서 다소곳이 계속 술을 따르는 아내가 신기했다. 술을 따르도록 설계된 안드로이드 같았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광장이나 노상에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걸춤이라고, 조선족 현지 가이드 말로는 이곳에서는 춤이 일상이라 했다.

길거리에서 춤이 추어질까요, 한샘?

즐거움에 겨워 춤을 추는 것이겠죠!

즐거워 보이지도 않은데요. 춤을 추다보면 즐거워지는지. 하긴, 리듬을 타면 누구라도 즐겁지 않겠어요?

정샘, 아예 즐겁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즐겁고 싶어서라면, 그 말은, 즐겁지 않아서 춤을 춘다고요? 왜 꼭 즐거워야 하는지, 삶이란 게 보통 지치고 서럽고 아닌가?

흰소리를 해 가며 돌아온 공항 로비에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쾌찬’이라고 쓰인 곳에 가면 앉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레이프주스를 달라했던 누군가는 파파야주스를 받고 투덜댔다. 대규모 항구도시라지만 중앙과는 다른지, 종업원들의 영어가 시원치 않았다. 셰셰 닌! 우리와 똑같은 얼굴에다 대고 그렇게 말하기도 어색했다. 다음 말도 모르고.

비행기는 놀랍게도 예정시간을 앞질러 출발했다. 목적지 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거리엔 한글과 중국어로 위 아래로 쓰인 간판들이 즐비했다. 비행장에서 곧 바로 향한 곳은 보기에는 중국 식당인데 음식은 퓨전이었다. 맛없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더니, 요리접시는 크고 무겁고 개인용 접시는 콩알만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숙소 ‘바이샨따샤’ ― 백산호텔은 싱글과 트윈 룸을 가리지 않고 하룻밤 100불이 넘는, 중앙당에서 지도공작을 나오는 고위급도 게서 묵는다는 대형 호텔이었다. 마음으론 여전히 불편했다. 외국인지 아닌지 도통 애매했기 때문이었을까. 영락없는 닮은 꼴 얼굴들에서 중국말이 튀어나올지 한국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학술 행사장 ― 행사와 관련 없는 몇몇은 하릴없이 시내관광을 나가자고 부추겼지만, 나는 건물 로비에서 책을 읽기로 했었지. 여행길에 바보같이 무거운 양장본을 챙겼으니 읽기라도 해야 덜 억울할 일이었으니까.

[…]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 […]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은 지식인들의 복수라? 지식인에겐 감성이 없다고? 내 직업이란 것도 해석학 아닌가? 고로 나에게도 감성이 없다? 간단히 며칠 놀자고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어. ‘해석에 반대한다’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지성과 감성의 이분론이 부당했고, 감성 우위론도 근거가 없다. 태어날 때 감성의 풍요 속에서 태어난다지만, 천천히 계발된 지성 또한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이자 특권이다. 원초적인 것이 우월하다니, 그것도 편견이다. 인간에게서 따로 우월한 특성은 없다. 제 알아서 신체가, 신체의 주인이 쏠리는 쪽으로 개성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켕기는 것들을 메모하다가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갔지. 「내용 없는 신앙심」 등 다른 글들도 저자 손태크의 삶의 방식만큼이나 흡습성 독서를 요구했어. 여행지의 독서로는 많이 무거워, 영락없이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기 꼴이었지 뭐.

그렇게 이틀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댄 내게 저녁의 연회는 과분했었지. 처음 보는 버섯단자나 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린 38%의 알코올도 맛이 아련히 떠오른다. 알코올 탓인지 연길 현지의 참석자들도 입을 열었던 것 같아. 1950년대에 태어났다는 어떤 교수는 문화혁명 당시 3년 반 동안을 하방으로 시골로 밀려갔지만, 공장 행을 원치 않고 기어코 공부를 더 하겠다고 고집하던 중, 마침 영어교육에 투입되어 영어가 직업이 되었다고. 기어코 원하는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구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어. 적어도 그때까진 나도 내 인생을, 미래를,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두통 때문에라도 눈을 뜨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마가 긴장되지 않아서 편안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비추이던 세상이 실은 겨우 내 속눈썹 사이로 비친 공간임을 깨닫는다. 눈을 감으니 다시 검회색 세상이 되고, 기억은 검은 호수를 향한다.

마침내 백두산과 천지를 향했지. 8월 초 일요일, 입추라지만 볕은 따가웠다는 기억이야. ‘도로수금소’를 지나니, ‘차굴’이 나왔어. 산삼과 꽃사슴뿐으로, 담비가죽 등을 생업으로 하는 동네를 지나자 어김없이 휴식시간이었어. 40여 분 쉬는 시간에 휴게소는 장사가 짭짤한 모양. 관광버스가 서너 대가 한꺼번에 서있었지 아마.

이어지는 버스 내의 분위기가 뜰밖에. ‘뀀’이라는 꼬치구이에 약술을 한 잔씩을 걸쳤거나, 잘 씻지도 않은 장뇌삼을 질겅질겅 씹은 탓이었나? 현지 안내원은 ‘만경대는 꽃동산, 우리들의 봄동산’이라는 북한 노래는 맛만 보여주고, 순 국산 노래방 수준의 ‘아빠의 청춘’을 감칠 맛나게 뽑았어. 참, 노래 잘하는 사람들…….

반딧불이 억수로 많아요!

안내원의 반딧불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낭만과는 멀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쪽 산에는 ‘피복’이 없단다. 그 민둥산 화전에 웬 반딧불만 유난히 많은데, 알고 보니 파종을 한 뒤 그것을 지키는 주민들의 한숨 섞인 담뱃불이더란다. 파종해 놓은 씨앗, 덜 익은 곡식도 마구 훔쳐가는 인심이라니.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일 년에 달포 정도, 그것도 아침과 낮에만. 파종이나 가을걷이 등, 일을 심하게 해야 할 때나.

마음 가득 애절한 동포애가 스멀거릴 쯤 ‘만경 관광 상품 유한공사’라는 곳에 도착했어. 중국에서 건물을 지어주었지만 운영 주체는 북한이라고. 한 더위에도 긴 통치마에 저고리를 받쳐 입은 접대원동무의 자태가 고왔어. 말씨도 조용하고 고왔지. 텔레비전에서 가끔 듣는 조선중앙방송의 아나운서들처럼 가열찬 목소리가 아니어서 신기했지.

상품은 크게 두 종류, 건강 상품과 자수 작품들. 어느 것 하나 가짜일 것 같은 냄새가 없는, 진지하다 못해 약간은 촌스러운 작품들이었어.

한샘, 여기 봄 와 봐요. ‘지저스 래핑’이라뇨! 웬 예수님에 웬 영어죠? 그러고 보니 상품 모두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것이군요. 봐요, 건강 상품들도 한국에서 열을 내는 것들로, 우황청심환, 상황버섯, 뭐죠 이건?

글쎄요, 아예 값이 한화로 표시되어 있군요.

한국 사람들 물건 사기는 좋아하나 봐요.

남의 나라 사람 말하듯?

누가 유럽관광 다녀와서 구찌 백을 샀다고 자랑삼아 얘기합디다.

그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요?

꼭 샤넬을 사려고 했는데 그 매장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 누가 묻습디다. 어디, 파리에서요? 하니까 그 여자 대답이 가관이어요. 파린가, 어디였지? 도시 이름도 몰라요, 이삼백 짜리 물건을 사고도 그 도시 이름도 모른다니까요.

여긴 그런 명품과는…….

우리 둘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지. 건물 주변으로는 장백산정원이 시작되고, 길가 코스모스와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것이 옛날 어릴 적의 정이 묻어났어. 어머니가 우리들 하얀 러닝셔츠에 물감을 들여 주시던 귀여운 패랭이꽃까지도. 그곳이 정말 중국 땅인가 싶었으니까.

버스에 오르니 연변의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어. 1870년대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족은 초가집과 벼농사를 특징으로 정착했단다. 두만강 아래쪽으로는 조선족이 많고 백두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중국인이 많은데, 지붕 모양을 보고도 구별이 된다고. 사방 기와가 조선족의 집이란다.

기와집 ― 그랬다. 우리 민족은 기와집에서 쌀밥에 고깃국을 탐했었다. 기와집 짓고, 아들 딸 낳아서 쌀밥에 고깃국 먹여 키우는 것, 그것이면 되었었다. 땅 따먹기 놀이처럼 재화를 불리려고 혈안이 되지는 않았었다. 옛날에 우린.

버스는 민송이라는 특별한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계속 달렸어. 소찬에 ― 상마다 삶아져 나온 토종닭도 있긴 했지만 ― 점심을 먹고 나서 막상 백두산 천지를 향할 때는 염려와 달리 하늘이 점점 밝아졌어. 미리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어 녹이는 것을 잊진 않았지. 차편으로 게까지 오른다지만, 고산의 환경을 견딜까 염려스러웠으니까. 어느 만큼에 이르니 모두 하차하여 친환경버스로 바꿔 타야 했지. 거기서부터는 사람 당 두 장의 입장권을 받았을 뿐, 일행의 개념이 없이 숫자대로 태워져서 난감했었지. 번호 붙은 짐짝처럼. 친환경버스로 달리는 시간은 25~30분, 다시 6인승 짚 차로 곡예등정이 20분 정도 소요되었나. 묘기행진에 참가하는 기분으로 흔들거리며 덜컹거렸지. 차창 밖 풍경은 점점 달라졌어. 여러 마리 나란히 서있는 소들의 허리나 엉덩이를 닮은 지형을 지나면서, 구름은 더 걷혀서 안심이었어.

백두산 한 귀퉁이가 갑작스럽게 드러난다. 너무나도 가까이에 솟아 있다. 그 너머가 천지란다. 해는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서, 서너 번의 관광에도 천지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사람들로 빼곡한, 저 불모의 언덕 조각이 백두산이라고?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너무 높게 차로 올라온 탓에 뒷동산보다 미약해 보이는 언덕. 모래와 자갈뿐인 산에서 신성은커녕 생명감마저 느끼려야 느낄 수 없다. 백두산 까마귀도 심지 맛에 산다는 말은 비유일 뿐, 까마귀 한 마리 없다.

아, 천지,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 못해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슴이 아프다. 삼사백 미터 깊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표면이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이 끝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확신이 든다. 마그마가 끓고 있다는 그곳. 천지, 그래 그곳이었구나. 그 높은 곳에서 지구의 핵을 실감했던 자리.

여기 사진 열두 장 4만원. 여기 사진 카메라, 여기 번호 잘 봐두세요 ―

유창하지는 않지만 한국말을 하는 왜소한 청년의 옷에는 006이라는 번호가 크게 붙어있었지. 어딜 가나 신흥 자본주의가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었어. 관광객들이 가진 카메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표면을 찍는다는 전제로, 아예 4만원 한국 돈으로 12장짜리 필름에 사진을 찍어주는 직업, 알바, 장사, 그런 것.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니 더는 볼 것도 없었지. 한 발짝 더 올라가면 좀 더 잘 보이겠으나, 장님 코끼리 보기는 매한가지일 터.

일행들보다 미리 내려와 보니, 간이건물 한편에선 커피 등을 팔고, 한편에선 기념품을 팔고 있었지. 기념품이라야 백두산 관련 사진들과 그 사진을 담은 열쇄 고리 정도. 늑장부리는 팀은 늘 있기 마련, 안내원이 흔들던 노랑 깃발이 그들을 불렀지만 소용없었지. 다시 짚 차, 친환경버스를 거치니까 입구였지. 왠지 허망했어. 멀리 돌아 돌아 백두산 한 조각 밟아보고 돌아서는 일이 마치 중간에 깬 꿈만 같았지. 처량하기까지.

장백폭포조선족 안내원은 기어코 백두폭포라고 하는데 ― 폭포관광은 도보였지. 비껴 옆 입구를 통해 처음엔 느슨한 기울기로 시작되고. 사람들은 벌써 멀리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계곡을 보고 놀라 탄성을 올렸어. ‘백두산에 걸린 두 필의 비단’을 일 년 내내 볼 수 있다지만, 그렇게 은색으로 빛날 줄은 몰랐으니까.

나있는 평길은 가파르지 않지만, 멀리 바라보이는 폭포를 보면 중간에는 가파른 곳이 있어 보였지. 아니나 다를까, 입장료를 낸 다음부턴 길은 갑작스레 가파라졌고, 더 가파른 층계를 오르자 곧 물이 나타났지.

한 여름인데도 발을 담글 수 없이 차가운 물에 살짝 씻어보는 것이 고작이었어.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은 오를 수 없다 ― 라고 그리스인들이 그랬다던가. 나 또한 분명코 이 쏟아져 내려 흘러가는 물에 다시 발을 적시는 일은 없을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어 노천지수영지가 있었지. ‘노’는 ‘이슬 로’자를 썼더군. 더 큰 간판은 한글로 ‘세계 제일의 성산 백두산 자연유황온천수탕’, 그 아래 한자로 ‘세계 제일적 성산 장백산 천연유황온천욕’이라 쓰여 있었지. 83℃. ― 게서 의견이 갈릴밖에. 온천욕을 하자는 그룹과 아니라는 그룹. 아닌 쪽 사람들이 한 시간을 기다려주기로 했는데, 바깥바람이 좀 셌나. 길가에는 조선족 풍미의 냉면 등이 20, 30, 40위완, 쾌찬은 20위안이라는 선전이 즐비했고. 길 건너엔 ‘순 한국식 음식’, ‘원두커피’라는 팻말도 보였어, 한국 어디 시골처럼. 낡은 집과 어울리지 않는 새 문구들.

현지 안내원이 불러서 안으로 들어갔었지. 센 바람은 피한다지만, 로비의 커피숍 자리에는 앉기만 해도 10위완이었어. 피곤이 차츰 내려앉을 무렵, 옆방에서 우리 곡조의 단소 소리가 애처롭게 건너왔었지. 그리운 옛 임이여, 언제나 오려나~. 애처롭다 못해 찔찔 짰어. 영락없는 몇 십 년 전의 한국 풍경. 입욕한 사람들은 약속된 6시가 지나도록 감감했고, 결국 15분 이상 지나서야 슬슬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버스 안이 갑자기 술렁거렸지. ‘저녁에 소를 잡는다’는 행사 때문. 송아지 값이 한국의 1/10, ‘겨우’ 50만원이라나. 버스 한 대 사람 모두가 먹고도 남을 값이라면 합리적이라고.

식사 후 이어지는 파티는 지난밤의 연속이라는데, 우리는 그때 빠졌기 때문에 실력들을 잘 몰랐지. 그때 벌써 마이클 잭슨이니 뭐니 별명을 갖게 된 인사가 있었지, 첫날 아내가 따라주는 낮 맥주를 한 없이 마시던 사내. 이번엔 가곡을 부르겠다더니, 일행들의 선택으로 「명태」를 부르는 품이 대단하긴 했어. 깡마른 작은 체구에서…….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 지라도~.

그 사람 뿐 아니라 다들, 정말 다들, 길고 긴 노래, 어렵고도 어려운 노래들을 잘도 불렀어. 배를 움켜쥐어가면서도 불렀으니까. 어디에 살던 가무에 심취하는 민족이 틀림없는 게지. 즐거움이 많은 민족? 삶의 무게, 삶의 슬픔을 즐거움으로 뱉어내는? 속내를 토하는 말은 접고 가무로 상대하니 더 외로울 것 아닌가? 외로움과 슬픔을 음주 가무로 포장해서, 나는 내 노래를, 너는 네 노래를……. 그렇게 함께 외롭게 밤은 깊어 가는 거다.

식중독 뉴스가 다음날 아침 모두를 놀라게 했었지. 그때 묵은 호텔은 장백산대하. 그곳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라 했는데. 5시에 모닝콜 ― 아침 ‘찬청’에 들어가자 그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밤중에 일행 중 한 부인이 병원에 실려 갔다니 놀랄밖에. 우려했던 식중독이었어. 여럿이 배탈을 호소했고, 아예 아침을 굶거나 버스 안에서 운신을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누구는 간밤의 송아지를 의심했고, 또 누구는 생간을 세 접시나 비웠어도 멀쩡하므로 송아지는 아니라 했지. 갑론을박. 대개 생각이 모아지기로는 점심부터의 식당 물이 주범이라고. 한국인들은 현지인들과 달리 물에 오염에 약하지. 무슨 대가를 치렀든 단 기간에 몸이 위생에 민감한 문명인으로 대단한 발전(?)을 했으니까. 동료와 나는 내가 ‘향수에 젖어’ 잔뜩 사 들고 간 에비앙 덕분에 탈을 면한 듯 했어. 향수 ― 사오년 파리 생활의 향수가 고작 생수에 머물다니 초라하지만, 그래도 좋은 일 한 번 한 셈 아닌가.

한국에서 간 가이드는 환자일행과 미리 연길로 향했으니까, 그제서부터는 현지인이 안내를 독점했지. 안내원 자신은 친정 쪽 고향은 합천이지만 시댁이 부안 뿌리이다 보니 전라도식 조선시대를 사는 편이라고 우겼어. 남편이 밖에서는 한턱 쏘기가 일품이며, 집안에서는 짠돌이라 어떤 도움도 안 주더란다. 전라도 남자들이 다 그런가? 일행 중에 전라도 부부가 있었는지 다들 그쪽을 바라보는데, 나이 들어 보이는 남편은 웃고만 있었지. 그런데 안내원은 이삼년 전 한국에서 경험한 사건이 있어 ― 한 여성국회의원이 공개석상에서 남성의원의 머리통을 ‘쥐알리는’ 것을 보고 ― 이젠 집에서 남편에게 엇서기도 한다며 깔깔댔지. 한국 여성의 위상이라니!

어쨌거나 56개 민족의 다민족 국가 중국에서 여자는 조선족 여자를 제일로 친다고. 가무에 능하지, 성격 깨끗하지, 남자들 시중 잘 들지…… 자화자찬이지만 귀여운 여자였어. 조선족 여자는 조선족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제일로 쳤었지만, 그건 과거사다. 이젠 돈과 권력과 학력을 지닌 중국남자와 결혼하는 예도 생긴단다. 고등 졸업 후 대도시의 한국기업에 취업했다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빈자리를 탈북녀들이 들어와서 메운다는데. 다시금 졸다가…….

두통은 여전하지만 배고픔이 눈을 뜨고 싶게 한다. 성긴 속눈썹으로 무거운 눈 뚜껑을 열기가 힘들다.

눈동자가 움직이네요, 잠에서 깬 거 맞지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긴장을 불러온다. 아, 나는 아직 이쪽이구나. 그러니까 그쪽, 내가 있었던 쪽. 배고픔도 그렇고 그 목소리 또한 증거가 된다. 안도감에 오히려 넋이 나갈 것 같다. 눈을 뜰까 말까……. 깬 줄 알면 질문을 해댈 것이고, 난 적어도 변명이라도……. 아직 자신이 없다. 배고픔을 참고 눈을 감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살그머니 멀미가 인다.

용정을 향한다. 기다려지던 마지막 일정이었지. 처음에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어. 한국에서처럼 호화분묘는 아니어서 대리석이나 화강암 묘석은 아닌 듯 했어. 어쨌거나 나무 말뚝에 페인트로 이름을 남겼더라도 이만 명이 조금 못 되는 조선족은 자신의 문화에 따라 매장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니, 좀 놀라운 일 아닌가. ‘작은 거인’ 등소평이 첫째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해주었고, 둘째, 매장문화를 변혁하는 데 성공했지만 조선족은 예외라고. 그러니까 어떤 중국인도 토장을 금하며, 물론 비석도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데, 그런데도 조선족은 생일제 외에 추석과 청명에 제사를 드려도 된단다. 조선족 차별을 선입견으로 지녔던 우리로선 차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한 점에 감동하며…….

용정 길거리엔 대하극 『토지』에서 보던 인력거가 눈에 띄었는데, 이것은 3등 택시로서 도문과 용정에서만 볼 수 있는 열악한 생존조건이랬다. 시내에서는 거리에 관계없이 ‘일인 일위완’인데, 당시 우리 돈으로는 1400원 정도. 하루에 서른 번을 운행하더라도 점심 값 등을 제하고 나면 20위완 정도의 수입이라고. 난 왜 하필 화폐단위에 민감했었지? 한국에는, 고향에는 절대빈곤이 없다는 인식인가. 위안인가. 외면인가.

용두레 우물이 있던 땅에 ― 그래서 용정이라고 했다 ― 1860년대 함북에서 살길을 찾아 이주한 조선인들이 집을 앉히고 밭을 일구었더란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 오른쪽 산 위에 비암산의 천년수가 있었단다. 이 소나무 아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 의지를 불태우곤 했으니, 독립군의 보금자리를 그냥 둘 일본이 아니었는지라, 산 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시켰다 했다. 그렇게 일송정은 죽어 넘어지고 없고, 용주사마저 문화혁명 때 사찰 탄압 가운데서 사라졌다. 멀리 바라보이는 일송정 터는 왜소하기 그지없고, 「선구자」에 일송정과 함께 나오는 해란강 또한 실망스러웠지.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했어. 건너가는 용문교 또한 한없이 초라한 그냥 다리일 뿐. 이 허탈함이 또 어디였더라?

미라보 다리 ― 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미라보 다리는 그러나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퐁뇌프 다리에 비할 수 없이 초라했었지. 그때의 가슴이 멎은 듯 아렸던 기억이 왜소한 용문교를 건너면서 되살아난 거야. 그래, 전설은 전설이어야 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미라보 다리엘 가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진실은 초라할수록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 아파오네. 배가 고프면 아프다고 느끼는 착각은 나이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설마 소리를 질러 누굴 부를 수도 없겠고. 이 이율배반을 어쩌나, 배는 고프고 눈은 뜨고 싶지 않고.

윤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대성중학 ― 「서시」를 새긴 시비는 ‘사립대성중학교’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구관 건물 앞에 있었지. 1921년에 건립되었고 다 무너졌다가 1994년 금성출판사 김낙준회장이 복원했다는 학교는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있었지. 잔디에는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우릴 반겼어. 웃음이 나게 촌스러운 문구가 정답다 느낄밖에.

바로 구관건물 2층이 기념전시관이었어. 사진, 화보,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지. 용정 출신의 다른 인사들의 역사 또한 전시되어 있고,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물론 철혈광복단의 15만원탈취사건 등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을 들었어. 현재 2,200명 남녀 조선족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설명을 끝으로, 마지막 방은 방문록을 작성하는 곳이었지. 이름 칸 옆에는 장학금 기부 의사를 표명해도 좋다는데, 어느 화폐이건 어느 액수이건 환영이라고. 초라한 봉투를 내민 손이 부끄러운 김에 서둘러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 쪽에서 문득 조그만 입구를 발견했어. 층계참을 이용해서 책을 전시하는 곳 같았지. 대개가 스치고 지나갈 위치에다, 실제로 그곳을 들르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어. 하지만 한적하기 때문에 들러보고 싶은 그런 곳. 아니나 다를까 고작 여남은 권의 책들 중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발견하곤 얼마나 기뻤던지. 손바닥 보다 조금 더 넓은, 두께 또한 왜소한 20위완짜리 소책자. 책장을 확 펼치는데 짧은 시가 눈에 들어왔어. 72쪽, 제목은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것이구나, 우리는. 슬픈 몸을 감추고 떨쳐 일어나는, 이것이 우리의 뿌리였구나! 정신이 버쩍 들었지. 난 이 시집을 찾으려고 여기에 왔음을 직감했어.

버스를 타자마자 책을 폈지. 「서시」는 졸업 직전인 41년 11월에 쓴 것이고, 졸업 기념으로 원래 『병원』이라는 시집을 출판하려던 계획은 「서시」를 쓴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로 제목이 바뀌었지만 출판은 좌절되었다는 것. 도쿄입교대학 영문과에 유학했다가 첫 여름방학에 용정을 방문한 것이 마지막 길이 되었다는 것. 아, 동생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던 당부는 혜안이었어. 1943년 징병영장 발부 와중에 체포되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2002년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발행. 용정의 조선족은 용정 땅에 유골로 돌아와서 묻혀있는 윤동주를 잊었고, 1985년에 연변대학 조문학과 교수와 와세다 대학 교수가 함께 윤동주의 묘를 찾았을 때까지도 그와 그의 문학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지. 다행히 용정중학교의 역사과 교사가 ― 언제나 어떤 한 사람이 중요하다 ― 그를 기억하여, 용정 그리스도교인 묘지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니. 지금은 묘소 뿐 아니라 생가도 복원되어 있고…… 그런데 우리 여행 일정에는 거기까진 포함이 되어있지 않았으니 서운할 뿐.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곰들을 보게 되었지. 반달곰의 수명은 25년쯤인데, 동방곰 사육기지에서 집단으로 사육되고 있었다. 총 1,600마리 규모를 자랑하는데, 태어나서 3~5년 사이에는 백두산에 자연 생육했다가 이곳으로 잡아들인다고. 게서 1년간 주 1회의 쓸개즙을 빼는 의무를 다하면 자연수를 누리며 살게 된단다. 죽을 때까지 쓸개즙을 뽑지 않고 자연수를 누리게 해준다니, 퍽도 인도주의적 발상이겠다!

코앞에서 바라본 거대한 곰들은 몸집이 큰 만큼 눈이 작았어. 하지만 말없이 우릴 바라보는 흐릿한 검은 눈알은 영겁의 물, 천지의 표면과 같은 물기에 젖어있었어. 마치 슬픔이 번져난 눈물처럼. 곰들도 울 거라 생각했어, 포유동물이잖아. 사람처럼 발바닥으로 걷는 모습이라니, 갇혀있는 그들이 지능이 낮은 식민지 인종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다 싶었어.

그렇게 해서 연길로 돌아와서 다시 대련으로, 이번에는 그곳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었지. ‘완다구어지판디엔’ ― 대련만달국제호텔은 23층의 최신식 건물로 객실은 383개나 된다는 대형호텔이었지. 숙박료는 60불 정도. 호텔에 투숙한 시간은 거의 11시였는데, 그 시간에도 밤나들이를 가는 일행들 때문에 복도가 떠들썩했지. 아침에 어쩌려고 그러는지, 세상엔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많음에 놀랐어.

어김없이 5시 반,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동료는 부스럭거리고 짐을 챙기고 있었지. 눈도 잘 떠지지 않은 채 집어 삼킨 아침 식사, 단체가 무섭긴 무섭다 싶었어. 늦잠꾸러기인 내가 단 한 번도 늦질 않았으니.

그래도 한 고비가 더 남았었지. 비행장으로 향하던 버스가 어떤 네거리에서 오랫동안 막혀 서 있게 되자 일행들은 조금 술렁였어. 빨리도 이륙할 수 있는 것이 중국항공 아니던가? 그런 불신도 없진 않았지. 무엇보다 우린, 한민족은 늘 조급해. 오랫동안 없었기에, 없음을 체감했었기에 핏속의 허기가 조급증을 일으키는 것 아닐까. 얼핏 풍요의 외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같을까, 곧 사라질 신기루일까 봐 두려운 것일까.

탑승수속을 마쳤을 땐 8시가 지나있었지. 8시 20분 발 비행기에 빠듯했어. 백두산 한 귀퉁이, 망연히 만져보았던 마른 흙의 느낌을, 검은 물 표면의 뭉클한 기억을 함께 할 작은 시집이 손 안에 있었지. 언젠가 고서점에서 1958년 발행된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을 건졌던 때의 뿌듯함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아픔 같은 느낌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쥐고 있었지. 흰 고무신이……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내 운동화는 나이키.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꿰입은 다리가 조금 민망했어.

이 헐렁하다 못해 벗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힘들게 떠본다. 속눈썹이 성기길 다행이다. 반쯤만 뜨고도 세상이 내어다 보이니까. 창 쪽에 걸린 커튼이 여린 연두색 햇살을 통과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시원한 공기는 초봄이라고 말하지 않고 뭔가 인공의 냄새를 풍긴다. 아래를 보니 넓은 흰 천이 내 슬픈 몸집을 가리고 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노란 경계석이 떠오른다. 나는 그것들을 넘어 물속으로 발을 내딛었던 것 같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거꾸로 곤두박질쳤고……. 나는 아직 기억이 살아있다. 느낌도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나 보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짙푸른 물기가 번진다. 천지에서 퍼 올린 검은 물이 범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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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학』 2014 봄호(통권 70)호, 49~66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