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3. 12. 9. 00:49

 

 

 

 

 

 

이 작품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제목의 '스파르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테르모필레 전투를 연관지어 보는 사람도 없다.

번역 손을 놓았다가......의무감에서. 

 

 

 

 

 


 

 

 

 

 

길손이시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하인리히 뵐 원작

 

 

  차가 정지했을 때 모터는 잠시 더 돌아갔다. 바깥 어딘가에서 문이 와락 열렸다. 깨진 창유리를 통해 빛이 차 안으로 떨어졌다. 이제 보니 천장의 전구가 찢겨나갔다. 전등의 나사선만 나사입구에 붙어있었다. 유리 파편이 붙어있는 가물거리는 철사 줄 몇 올에 불과했다. 그러다 모터가 멈췄다. 바깥에선 누군가 고함 소리가 들린다. “사망자는 이쪽으로, 사망자들 데려온 거요?”

  “빌어먹을, 여긴 등화관제도 이젠 안하나?” 운전수가 되받았다.

  “등화관제가 뭔 소용이여, 온 도시가 횃불처럼 불타고 있는데.” 그 낯선 목소리가 악을 쓴다. “사망자 있냐고? 묻고 있잖아?”

  “모르오.”

  “사망자는 이쪽으로, 듣고 있소? 다른 자들은 층계 위쪽으로 미술실로, 알겠소?”

  “예, 예.”

  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다른 자들에 속했고, 사람들은 나를 층계 위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희미한 불빛의 긴 복도로 갔는데, 벽에는 녹색 칠이 되어 있었다. 구부러진 검은 색의 옷걸이 못들이 벽에 붙어 있었고, 6에이, 6비라고 쓰인 에나멜 팻말이 붙은 문들이 있었고, 이 문들 사이에 검은 테두리의 유리액자 안에 포이어바흐의 메데이아가 걸려있는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5에이, 5비라고 쓰인 문들, 그 사이에는 가시 뽑는 소년의 상이 신비한, 불그스레 빛나는 사진이 갈색 액자에 들어 있었다.

  층계 입구 앞 중앙에 있는 큰 기둥도 거기 있었고 그 뒤에는 길고 좁게, 기이하게 만들어진 석고로 된 파르테논프리즈 모형이 누렇게 빛을 내고 있었다, 진짜로, 고풍스럽게. 그리고 모든 것은 사필귀정, 고대 그리스의 중장병이 나왔다. 화려하고 위험스럽게, 깃털장식으로 수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계단부 까지도, 이젠 노란 칠이 되어있는 벽에 모두가 순서대로 걸려있었다. 대 선제후들부터 히틀러까지…….

  그리고 거기 좁고 작은 발걸음 중에, 내가 마침내 다시 한두 발짝 들것에 그대로 누워있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특히나 아름다운 특히나 위대한 특히나 화려한 노 프리츠의 사진이 있었다. 담청색 제복을 입고, 빛나는 눈과 크고 황금으로 번쩍이는 가슴에 달린 별모양도.

  다시금 나는 비스듬히 들것에 누운 채 인류의 초상들 사이로 실려 지나갔다. 거기에는 북구의 함장이 독수리눈과 멍한 입을 하고 있었고, 모젤 강 서안의, 약간 마르고 예리한 여인, 양파모양 코를 한 동방의 찡그린 얼굴, 키가 크고 목젖이 튀어나온 산골 배경 영화 프로필, 그 다음엔 다시 복도가 나왔고, 나는 몇 걸음을 다시 들것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운반병들이 두 번째 층계로 오르기 전에 큰 황금 철십자훈장을 위에 붙이고 돌로 된 월계관을 쓴 전몰장병기념비가 보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무겁지 않았고, 운반병들은 서둘렀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나는 열이 높았고, 온 군데가 아팠다. 머리도, 두 팔도, 두 다리도, 그리고 심장은 미친 것처럼 뛰었다. 이런 열 속에서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인류의 초상들을 지나쳐갈 때 이번엔 모든 다른 것들이 나왔다.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셋이 얌전하게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신기한 모조품으로, 완전히 노랗고 진짜처럼, 고대 풍에다 위엄을 갖추고 벽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모퉁이를 돌 때에는 헤르메스 기둥도 나왔다. 복도 맨 뒤쪽에는 - 복도는 이 부분에서는 장밋빛 빨강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 아주 맨 뒤쪽에는 제우스의 찌푸린 얼굴이 미술실 입구 위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제우스 상은 아직 멀었다. 오른 쪽으로는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하늘을 온통 붉었다. 검고 두터운 연기구름이 장엄하게 흘러갔다……

  나는 다시 왼쪽을 보아야 했다, 오1에이와 오1비 문들 위쪽의 현판들을 보았고, 갈색의 곰팡내 나는 문들 사이에서는 황금색 액자에 담긴 니체의 코밑수염과 코끝만을 보았다. 그럴 것이 그림의 나머지 반은 쪽지로 가려져 있었는데, “경상 외과”라고 쓰인 쪽지가……

  만일 지금, 나는 스치듯이 생각했다…… 만일 지금…… 그러나 또 토고의 그림도 있었다. 화려하고 커다란, 오래된 상처처럼 납작한, 화려한 복제품이, 앞쪽으로 식민관사들 앞에 흑인들과 무의미하게 총검을 들고 있는 병사 앞에, 무엇보다도 완전히 자연에 충실하게 그려진 바나나 더미들이 있었다. 왼쪽으로 한 더미가, 오른 쪽으로도 한 더미가, 그리고 오른 쪽 더미의 중간 크기 바나나 위에 거기 뭔가 새겨져 있었는데, 내가 직접 거기에 뭔가를 끄적거려 넣었던 게 틀림없는데……

  그러나 이제 미술실의 문이 확 열리고, 나는 제우스 흉상아래에서 흔들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난 더 이상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술실은 요오드며 오물 냄새에 두더지와 담배 냄새가 났다. 그리고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담배 한 대 입에 물려주세요, 왼쪽 주머니에 있어요.”

나는 어떤 누군가가 내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성냥개비에 불을 붙였고,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렸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증거는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고등학교마다 미술실이 있는 것이고, 초록색과 노란 색으로 칠해진 벽들에 휘어진 낡은 옷걸이 못들이 있는 현관들이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우리 학교에 와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메데이아가 4에이와 4비 사이에 걸려있다고 해도, 니체의 코밑수염이 오1에이와 오1비 사이에 있다고 해도. 틀림없이 어떤 규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그것이 걸려있어야 된다고 지정해 놓은 훈령이. 프로이센 인문계 고등학교를 위한 경영지침이. 즉 메데이아는 4에이와 4비 사이에, 가시 뽑는 소년은 그 자리에,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키케로는 복도에, 니체는 저 위 학생들이 철학을 배우는 그곳에 붙여놓으라고. 파르테논 프리즈, 토고에서 온 현란한 그림도. 가시 뽑는 소년과 파르테논 프리즈는 마침내 훌륭하면서도 낡은, 수 세대를 지나오면서 간직된 학교의 필수소장품이 되었다. 그리고 바나나 그림 위에다 낙서를 하려는 발상을 가졌던 것이 비단 나 하나뿐일 리도 없었다. 토고여 영원하라! 라고.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농담들은 늘 같은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열이 있다는 것, 내가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통증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차 속에서까지는 그게 아직 심했었다. 차가 작게 패인 도로들을 지날 때다마 나는 소리를 질러댔었다. 큰 분화구는 더 나았다. 차는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마치 배가 파도 사이 물고랑을 타듯이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이 깜깜한 곳 어디에선가 내 팔에 들이밀었던 주사가 이제는 듣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바늘이 어떻게 내 피부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지, 저 아래 다리까지 어떻게 뜨겁게 변하는지를 느꼈었다.

  그게 그럴 수는 없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거리를 차가 달려왔을 리가 없다, 거의 30킬로미터를. 무엇보다도 너는 느끼지 못하잖아, 어떤 감정도 네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잖아, 다만 눈이 그럴 뿐, 어떤 감정도 네게 말을 해주지 않잖아, 네가 너희네 학교에 와 있다고, 네가 겨우 석 달 전에 떠났었던 그 학교에 와 있다고. 8년이란 세월은 사소한 게 아니야, 8년을 지내고서 그 모든 것을 겨우 눈으로만 알아보게 되느냐고?

감긴 눈까풀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마치 영화 같았다. 아래 층 복도, 녹색 칠, 층계 올라와서, 노란 칠, 전몰장병기념비, 복도, 층계 올라와서,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 헤르메스, 니체의 코밑수염, 토고, 제우스 흉상……

  나는 담배를 내뱉고 고함을 쳤다. 고함을 지르는 건 늘 좋았다. 그냥 큰 소리로 외치면 되었다. 외침은 장관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누군가가 내 위로 몸을 굽혔을 때도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낯선 숨소리가 느껴졌다, 따뜻하고 그래도 역하게 여송연과 양파 냄새를 풍겼다. 어떤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래, 뭐야?”

  “마실 것을 좀, 그리고 담배 한 대 더, 위에 호주머니에 있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다시 누군가가 호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다시 성냥을 켰다. 누군가가 타들어가는 담배를 내 입 속에 넣어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물었다.

  “벤도르프.”

  “감사합니다.” 내가 말하고는 담배를 빨았다.

  어쨌거나 나는 정말로 벤도르프에 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고향에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전무후무한 고열에 들뜬 것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어떤 인문계 고등학교 건물에 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분명 이곳은 학교였다. 저기 아래 목소리가 소리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른 자들은 미술실로 옮겨!”라고? 나는 다른 자였다. 나는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미술실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라면 내가 왜 잘 못 본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알아보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오직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분들을 다른 종류의 학교 복도에 벽에 세워둘 거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가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다시금 여송연과 양파 냄새가 났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채로 두 눈을 떴다. 거기엔 지치고 늙은,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 소방대원 제복 위로 나와 있었다. 늙은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시게, 전우여!”

  나는 마셨다. 물이었다. 그러나 물이 훌륭하진 못했다. 나는 내 입술 끝에서 냄비의 쇠 냄새를 느꼈다.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들이마시게 될까 느끼는 것은 참 좋았다. 그러나 소방대원은 내 입술에서 냄비를 빼앗더니 가 버렸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친 듯이 어깨만 으쓱하더니 그대로 더 가 버렸다. 내 옆에 누어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소리 질러대 봤자 소용없어. 물이 더는 없거든. 도시가 불타고 있어, 보고 있잖은가.”

  “도시 이름이 뭔데요?” 나는 내 옆에 누어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벤도르프.”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 똑바로 내 앞을 보며 창문들을 응시했고 여러 번 천정을 보았다. 천정은 아직 말짱했다. 하얗고 매끄러운 것이,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채로. 그러나 모든 학교의 미술실에는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천장을 둔다, 적어도 양질의 유서 깊은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다 그렇다. 그건 아무튼 분명하다.

  이제 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벤도르프에 있는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의 미술실 안에 누어있다는 사실을. 벤도르프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셋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 알베르투스-학교 - 그리고 이 말을 꼭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 마지막 것, 세 번째 학교가 아돌프-히틀러-학교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에는 노 프리츠의 상이 특별히 화려하고 특별히 아름답게 특별히 크게 층계참에 걸리지 않았을까? 나는 이 학교에 다녔다, 8년 동안을. 하지만 다른 학교들이라고 해서 이 상이 똑같은 자리에 걸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첫 번째 층계를 오르면 그렇게나 똑똑히 눈에 띠어서 시선을 붙잡으리만치 그렇게?

  밖에서는 무거운 대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말고는 조용했다. 다만 섬광의 침식이 밀려닥칠 뿐이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합각머리벽이 무너져 내렸다. 대포는 조용히 규칙적으로 쏘아댔다. 나는 생각했다, 참 좋은 대포로군!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그런 놈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다. 맙소사, 대포라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것인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지. 어둡고 거칠게, 그러나 부드럽고, 거의 섬세한 오르간 연주였다. 여하튼 품격 있는 연주. 나는 대포라는 것이 뭔가 품격 있는 요소를 지녔다고 느낀다, 쏘아 올라가더라도. 너무도 품위 있는 인상을 준다, 그림책에서는 정확하게 전쟁을 가리키면서…… 그러다가 나는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전몰장병기념비에 등재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더 큰 황금 철십자를 장식하고 더 큰 돌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서 또 다시 기념비 낙성식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갑자기 나는 알게 되었다, 만일 내가 정말로 우리학교에 와 있는 것이라면, 내 이름도 돌 속에 새겨져서 거기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학교 달력에는 내 이름 뒤에 쓰일 것이리라 - “학교에서 전선으로 징집되어 ……를 위하여 전사했노라고……”

  그런데 나는 점선 안에 들어갈 그 무엇을 위해서였나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지금 내가 다녔던 학교에 와 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일을 나는 기필코 알아내고자 했다. 전몰장병기념비에도 특별한 무엇은 없었고,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어디에나 다 있는 그런 것이었다. 마치 기성복 같은 전물장병기념비였다, 그래, 어딘가 중앙에서 받아다 놓은 것일 테니……

  나는 미술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림들은 다 치워버렸고, 구석에 쌓아놓은 의자들만 몇 개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여러 개가 나란히 있는 높고 좁다란 창문들에는 빛이 엄청 쏟아져 들어왔는데, 마치 그런 것이 미술실에 소속된 것 마냥? 내 가슴은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 방에 있었더라면 무엇인가가 내게 말을 해줄 법 아니던가, 팔 년 동안 꽃병을 그렸고 서체를 연습했었던 방이라면? 미술선생님이 앞에 받침대 위에다 세워 놓은 좁장하고 섬세한 신비롭게 모방한 로마식 유리병을 그렸고, 모든 종류의 서체를, 고서체, 로마서체, 이탤릭, 장식체 등을 연습했던 곳이라면? 나는 그 시간을 학교생활을 통틀어 가장 싫어했었다. 시간 내내 지루함을 짓씹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제대로 꽃병을 그리거나 서체를 그려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답답한 칠의 지루한 벽들을 마주하고서 나의 저주 나의 증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속에는 어느 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지웠고, 연필을 깎았고, 지웠고…… 그 뿐 ……

  나는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팔들을 움직일 수 없었고, 오른 쪽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왼쪽 다리만 겨우 움직였다. 나는 사람들이 내 팔들을 몸뚱이에 묶어놓았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꽊 묶어서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두 번째의 담배도 뱉어냈다. 밀짚자루들 사이의 통로에다가. 그리고는 팔들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너무도 아파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속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언제고 좋았다. 팔들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도 났다.

  그러다가 의사가 내 앞에 왔다. 안경을 벗어들고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의사 뒤로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던 소방대원이 서 있었다. 그가 의사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의사는 안경을 다시 썼다. 나는 두꺼운 안경유리 너머로 그의 큰 회색의 눈을, 가볍게 떨리는 동공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너무도 오래 동안이라서 나는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잠시 만요, 곧 당신 차례가 ……”

  그리고서 그들은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를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그들이 가는 쪽을 따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칠판을 떼어서 비스듬히 놓아두었는데, 벽과 칠판 사이에 침대보가 걸려 있었다. 그 뒤에는 밝은 불빛이 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이 다시 옆으로 젖혀지고 아까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가 다시 실려 나왔다. 운반병들은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문으로 끌고나갔다.

  나는 다시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넌 알아내야해, 어떤 부상을 당했는지, 지금 너희네 학교에 와 있는 것인지를.

  모든 것이 참 냉랭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나를 죽음의 도시의 박물관으로 끌어다 놓은 것처럼. 내 눈이 알아보았지만, 오직 내 눈만이 알아보았지만, 무감각하고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던 세상을 지나서. 내가 석 달 전까지 이곳에 앉아있었다는 것, 꽃병을 그리고 서체를 그려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쉬는 시간에 잼과 버터 바른 빵을 들고 내려가, 니체, 헤르메스, 토고,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나서, 메데이아가 걸려있는 아래층 복도를 천천히 지나서, 그리고는 우유를 마시러, 아무리 금지가 되었다 해도 담배를 피우는 모험을 할 수도 있었던 어스름한 작은 방에서 우유를 마시러 관리인에게로, 비르겔러 씨에게로 갔던 것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내 옆에 누어있었던 그를 아래로 데려갔다, 사망자들이 누어있는 곳으로. 아마도 사망자들은 비르겔러의 잿빛 작은 방에 누어있을 것이었다. 따뜻한 우유 냄새가 나는 곳, 먼지 냄새며 비르겔러의 싸구려 여송연 냄새가 나는……

마침내 운반병들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나른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다시 둥둥 떠갔다, 이번에는 문 곁을 지나서. 둥둥 떠 지나가면서 나는 그것마저 일치한다는 것을 보았다. 문 위에는 한 때, 그러니까 아직 학교가 토마스-학교라 불릴 때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떼어냈는데, 거기에는 새로이 어두운 노란색 흠집이 생겨났다. 십자가 모양으로 단단하고 분명하게, 그건 마치 그들이 떼어낸, 낡고 희미한 작은 십자가 자체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십자가의 흔적은 벽의 퇴색한 도료 위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남아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서 벽 전체를 새로이 칠을 했는데,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칠쟁이가 색조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고, 십자가는 갈색조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벽 전체는 장밋빛이었다. 그들은 투덜대었지만 소용없었다. 십자가는 벽의 장밋빛 위에서 갈색으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의 페인트 예산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 십자가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수년 간 회양목 가지들이 걸려있었던 오른 쪽 발코니 위에 분명한 대각선 흔적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직 학교에 십자가를 걸어놓는 것이 허용되었을 때 관리인 비르겔러 씨가 그 뒤에다 걸어놓았던 것인데……

  그 모든 것은 내가 문을 지나서 칠판 뒤로, 눈부신 불빛이 타고 있는 곳으로 들려가는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는 수술대 위에 누어서 내 몸을 아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주 조그맣고, 오그라든 모습으로, 머리 위 조그맣고 하얀 전구의 맑은 유리 안에는 가느다란 두더지 색 꾸러미가 마치 특이하고 섬세한 태아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저 위에 있는 그것이 바로 나였다.

  의사는 나를 등으로 돌려놓더니, 탁자 옆에 서서 거기서 기구들을 헤집어 찾고 있었다. 소방대원은 널찍하고 늙은 모습으로 칠판 앞에 서 있었고 나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는 피곤하고 서글프게 미소를 지었고, 수염 더부룩한 그의 더러운 얼굴은 잠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칠판의 끈적끈적한 이면에서 난 뭔가를 보았다. 내가 이 죽음의 집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내 심장을 느끼게 한 무엇이었다. 내 심장 속 어딘가 비밀스런 방에서 나는 깊이 끔찍하게 놀랐고,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칠판에는 내 글씨가 있었던 것이다. 위쪽 맨 위 줄들이. 나는 내 서체를 안다. 그건 마치 우리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 마냥 더 나빴다, 훨씬 더 분명했다. 그리고 내 서체의 일치성을 의심할만한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모든 다른 것은 증거가 아니었다, 메데이아도 니체도 디나르 시골 배경 영화 프로필도 아니었고, 토고의 바나나 그림도 아니었다. 문 위에 걸린 십자가도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모든 것은 어느 학교에서나 다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학교들에서 내 서체로 칠판에 글을 쓸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거기 그것이, 당시에 우리가 써야만했던 그 명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저주 받은 생에서 겨우 석 달 전으로 되돌아가서 그때.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아, 나는 안다, 칠판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미술선생님은 화를 내셨다. 나더러 제대로 분할을 못했다고, 서체를 너무 크게 잡았다고. 그래놓고서는 선생님 자신도 고개를 갸웃둥거리시며 그 아래에다 똑같은 크기로 따라 적으셨다,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모두 해서 일곱 번 거기 그렇게, 내 서체가 남아있었다. 고서체, 프락투어, 이탤릭체, 로마서체, 이탈리아 서체, 장식체. 그렇게 일곱 번 분명하게 또 가차 없이.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소방대원은 이제 의사의 가벼운 부름에 따라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서 이젠 내가 그때 서체를 너무 큰 것으로, 구두점은 너무 많이 택했기 때문에 약간 훼손된 경구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좌측 상박에 동통을 느꼈을 때 나는 솟구쳐 경련했다. 기대어 억제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내 몸을 온통 감았는데, 내겐 팔들이 더 이상 붙어있지 않았다. 오른 쪽 다리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갑작스레 뒤로 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기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함을 질렀다. 의사와 소방대원은 나를 얼이 빠져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만 주사기의 플라스크를 눌렀다. 플라스크는 천천히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칠판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방대원이 내 곁에 바짝 다가서서 그것을 가렸다. 그는 내 어깨를 꽊 붙잡았다. 나는 헤진 그의 제복의 탄내 나는 더러운 냄새를 맡았고 그의 지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제서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비르겔러였다.

  ‘우유를’이라고 나는 나직이 말했다.

 

주석 ------------------------

1) 메데이아: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그림(1870). 메데이아가 두 아들을 안고서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갈등하고 있는 그림. 원본은 뮌헨의 노이에 피나테크 소장.

2) 가시를 뽑는 소년: 로마에서 발견된 73㎝의 브론즈 상으로, 고대의 유물로 간주됨. 원본은 런던의 영국박물관 소장.

3) 프리즈: 건축물에서 보는 띠 모양의 장식.

4) 선제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 황제 선거는 1198년부터 1806년까지 행해졌다.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국왕의 7인.

5) 노 프리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의 애칭.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로 평가된다.

6) 헤르메스 기둥: 4세기경의 유물로, 86㎝ 석회암 난간모서리 장식. 원본은 파리의 루루브르 박물관 소장.

7) 벤도르프: 라인란트-팔츠 주의 작은 도시, 작품이 발표된 1951년 당시 주민은 13,000명 정도, 현재에도 16,538명이 25㎢ 안에서 거주하는 소도시. (광주 면적의 1/20, 인구는 1/90)

8) 인문계 고등학교 셋: 이것은 허구로, 현재에도 김나지움은 한 곳 뿐.

9) 디나르 족: 유럽 동남부, 발칸 산지 아드리아 해 주변에 거주하는 인종.

10) 제목: 시모니데스의 「테르모필레의 전몰용사의 비」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어가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외친다. “길손이여. 그대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게서 말해주오, 법이 명했던 바대로 우리 여기 쓰러져 있음을 보았노라고. Wanderer, kommst du nach Sparta, erzähle dorten; du habest uns hier liegengesehen, wie das Gesetz es befahl.” 히틀러의 독일이 법의 이름으로 소년들을 징집하고 그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를 외치기 위해 작가 뵐은 레오니다스를 인용했다. 뵐은 그의 작품에서 “전몰, 전사 gafallen : 떨어져 죽다”라는 우회적 표현을 거부하고 기필코 “살해당했다 getötet”는 표현을 고집한다.

11) 프락투어: 옛 독일어 고유의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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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출처: Heinrich Böll: Wanderer, kommst du nach Spa……(195), in: Romane und Erzählungen 1, Hrsg. v. Bernd Balzer. Köln 1977, S. 195~202.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1. 25. 21:23

삼포세대 

 

 

 

 

 

솔직히, 나는 정복한 것보다는 패배한 것이 낫고, 영구적  소유의 독점적 고형성보다는 임시성과 불확정성의 느낌이 좋다. - 에드워드 사이드, 『도전 받는 오리엔탈리즘』 중에서

 

   

  삼포세대라네, 삼포!

  삼천포가 아니고?

  삼천포는 무슨, 삼포라니까. 우리 같은 루저를 삼포세대라요!

  삼포? 어디선가 듣긴 들었는데.

  그래요, 쓰리 포세이큰 제너레이션!

  뭐요, 셋을 포기한 놈들이라고?

   쳇, 영어라야 얼른 소통되는 우린 바로 바나나족이지, 무슨 삼포족. 겉만 누런, 속은 허여니 뼛속은 양놈들이지.

   김박은 삼천포로 빠지는 게 특지지. 뭘 포기해서 삼포냐, 그럴 물어야지요!

   뻔한 것 아뇨.

  이박, 그래도 읊어 봐요!

  입에 담기도, 그게. 그러니까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한 세대란 말이외다.

하나마나 한 소리. 그게 다 직장 문제, 돈 문제 아뇨.

  그래도 그게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청년층’ 그 비슷한 정의가 있어요. 재작년인가, 신문의 취재팀이 만든 신조어이지만 정곡을 찌를 밖에.

 

  우린 그렇게 삼포세대라 낙인찍혔다.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공부 때문에 공부에 심취해서, 그러니까 제법 고상한 삶의 방식 때문에 연애도 안하고 사는 줄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나도 그들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꼼짝없는 삼포세대.

 

 

  평균인 - 평균인은 누굴까.

  그날 저녁도 외주둥이 굶는다고 소보로빵 한 개로 끼니를 때웠다. 소주와 냉수를 1:3으로 타서 음료수 대신 마셨다. 왜소한 저녁상을 물리고 - 상에서 먹은 것도 아니었지만 - 하릴없이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헤아릴 수 없는 아메바들의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나 아메바는 갑자기 이 시대 평균 아메바 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평균치는 수많은 통계에서 찾아보아 골라내면 될 것 아닌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 중에서 평균적 수입을 갖고, 평균적 자녀 수, 평균적 기대 수명, 평균적 학력, 평균적 직업, 평균적 취미활동 …… 등을 고려하여 대표적 가정의 대표적 사람을 꼽는 일이다. 무엇부터 찾을까. 잠시 통계의 무시무시한 망망대해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사는가가 우선일 것이었다. 우선 가족의 평균 수입, 그런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수치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므로 통계를 찾기도 쉽고 평균이나 적절한 대표를 찾기도 분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중소기업을 가정하자! - 사장을 포함한 직원 전체는 70명이고 이들의 총 급여의 합은 2억 1000만원이다. 그러면 이 회사 직원들의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이 통계는 산술평균에 의거한 것으로 결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자. 대부분의 직원들은 월 300만원은 평생 가도 못 만져 볼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한다. 직원 50명이 1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10명의 작업반장들도 겨우 150만원씩 받을 뿐이다. 이들에게 300은 비현실적인 수치이다. 왜 그런 300만원 평균치가 나오는가. 그것은 과장들 3명이 500만원씩을, 부장 5명이 1000만원씩을, 부사장은 2000만원, 사장은 50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70명 중 50명이나 되는 최빈수가 받는 월급은 고작 100만원, 그러므로 대부분의 직원들이 통감하는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70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중앙에 있는 35 또는 36번째 높은 월급을 받는 사람을 대표라고 한다면, 대푯값 역시 100만원에 불과하다. 이 회사의 최빈수와 대푯값은 100만원 월급인데,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나는 초장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열이 났다. 좀처럼 찬물 샤워를 못 하는 내가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왔다. 컴퓨터는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지나쳐서 창 쪽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웠다.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아스팔트의 미세 먼지가 날아오른다. 작은 도로라서 저 아래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도 보인다. 저들이 평균인일까. 운전자가 평균인일까.

 

  다음 순간, 대한민국 평균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을 예감이 들었다. 일을 원론적으로 생각해보려니 한참을 물러서고 만다. 처음 자리가 아니라 마이너스 어딘가로. 도대체 누가 ‘우리’인가. 우리 국민이라 함은 대한민국 국민을 말한다. 그러나 간단하지가 않다.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에서 비롯되어 그 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현 우리나라의 건국은 참 오래 걸렸다. 1945년 광복을 맞았어도 다시 미군정의 주둔시기를 거쳐서 1948년 8월 15일에야 정부 수립이 선포된 나라다. 독립 선포 후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 수립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100,210㎢ 땅에서만. 그러니까 함께 독립선언을 했던 반쪽 123,138㎢를 북에 두고, 이제와 그들의 일인당 국내총생산 1,900달러를 살짝 조롱하면서. 우리는 그들보다 10배 이상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우리를 우리에 한정한다.

  그 한정된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회원국 중에서 수출입 선 순위권에 진입했다고 희희낙락이다. 1961년 우리가 여전히 전후의 비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생한 기구에 30년도 넘게 뒤늦게 합류한 우리가. 하지만 동시에 평균 자살률도 거의 3배나 더 이룩해(?) 냈다. 인구 10만 명 당 11명이 평균인데 우리나라는 서른 명이 넘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경제 위기로 유럽공동체에서 퇴출 위기에 내몰렸다는 그리스는 세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그러니 경제가 행복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국민총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된 것과 자살자의 숫자는 비례하여 증가 일로에 있다.  

  왜?

 

  정말이지 평균 수입을 알아보고자 했던 내 의도는 한 순간에 좌절했다. 대신 여러 경제 지표를 조금 알게 되었다. 국민총생산이란 개념은 어느새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다. 보다 합리적으로 바뀐 것이란다. 국민총생산은 한 국가의 거주자 - 국민 - 가 일정 기간 동안에 생산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마손된 고정자산의 소모분을 포함한 개념이고, 또 예컨대 우리나라 국민이 외국에 진출해서 생산한 것도 모두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의 대외수취소득을 제때에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어,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총생산만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으로 바뀌었단다. 그것이 또 1995년에는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는데,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생산 활동에 참여해서 벌어들인 소득의 합계란다. 실질 국민총소득은 실제 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실제 구매력을 측정하기 위해서 산출한다. 이 지표는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를 보다 잘 반영하기 위해 실질 국내총생산에다 교역조건 변화를 반영한 실질 무역손익을 차감하고 여기에 국외순수취요소소득을 더해서 산출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국민총생산이냐 국민총소득이냐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다. 국민총소득이 2만 달러가 넘어도 왜 이렇게 허한가. 2012년 국민총소득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34위, 오매불망 우리가 모델로 삼는 미국은 5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12위로, 여전히 우리를 훨씬 앞지른다.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는 뒤지지만, 34위라면 대단하다. 물론 2007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21,632달러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3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다고 호들갑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1만 달러대로 떨어졌다가 2010년 2만 달러대에 재진입할 수 있었고, 3년째 2만 달러대 초반에 머물고 있지만 후퇴는 아니라는 것.

 

  문제는 불평등 성장이다. 한은에 따르면 1991에서 2011년까지 20년간 국민총소득이 연평균 9.3% 늘어났는데, 그동안 기업소득의 증가율은 11.4%인데 비해서 가계소득의 증가율은 8.5%에 불과했다고 한다. 개개인의 실질적인 주머니 사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성장의 후퇴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역설해주는 증거가 아닌가.

  또 1인당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에서 기업과 정부 몫을 빼고 개인이 실제로 쓸 수 있는 소득은 얼마일까. 개인의 근로소득과 재산소득을 합쳐서 거기에서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을 뺀 것을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이고 하는데,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가장 밀접한 지표다. 그런데 지난해 1인당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인당 국민총소득의 57.9%에 그쳤다. 한 나라의 소득은 크게 자본에 대한 보수 - 영업 잉여라고도 한다 - 와 노동에 대한 보수 - 피용자 보수라고도 한다 - 로 나뉘는데, 전체 소득 중에서 피용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율, 즉 노동소득분배율이 57.9%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미국은 75.3%로 세계 1위, 왜 그 많은 모순을 안고서도 미국이 제일가는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스페인이나 일본 등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의 평균인 62.3%에도 못 미친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총소득이 별로 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정부와 기업이 가져가는 몫이 전체에서 40%를 넘다 보니, 우리 개개인의 주머니는 허할 수밖에 없는 일. 그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의 61.1%에 비해서도 낮아졌다. 그만큼 근로자 몫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3,148달러 - 그러니까 지난해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실제로 소비에 쓸 수 있는 돈은 (발표 당시 환율 1,126원으로 환산해서) 연간 14,80,457원으로, 대략 월 123만원에 불과했다.

 

  평균급여 - 월 123만원.

이 통계는 나를 울렸다. 마치 경제를 조금은 아는 사람모양, 나라 전체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관한 상심 때문에? 그랬다면 그것은 조금은 사치였다. 수치는 통계 속에서 존재했고, 나는 양심적으로 사고하면서 양심적으로 사고한다는 자존감을 지닐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개인적인 모멸감이었다. 나는 평균 123만원 세대에도 끼이지 못했다. 교양학부의 한국어 강의까지를 내려놓은 지금은 부정기적인 수입이 내 생활을 지탱해 주는 수입의 전부였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세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감히 들춰 읽지 못하는 것도 자격지심이다. 그 책이 처음 나온 2007년까지도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순위 강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인문학에 파묻혀 살았다. 승자독식 게임의 법칙도 예감하지 못한 채. 그러다 곧 닥쳐온 나의 추락은 부끄러움에 무조건 움츠러들게 했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 119만을 20대의 평균 소득비율 74%로 곱한 값이 88만원이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40을 바라보며 88만원 수입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 자리를 비집고 든다 해도 - 아직 가능성은 있다. 국립대학은 매 학기 공채가 있기 때문에. - 동료들 사정을 보면 비정규직 평균임금 수준에 불과하다. 일이 있고, 책상이 있고, 동료가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을, 어쩜 나도 그 속에 다시 끼인다면 나를 지탱해 주는 끈이다. 가족들로부터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소원해지는 세월이다.

  지금까지는 전통적으로 가족이 가족의 복지를 떠맡았다. 대학생들은 FM(아버지 어머니)장학금에 기대고, 결혼까지를 부모에게 의존한다. 부모 세대는 어렵게 마련한 집을 자녀들 대학 뒷바라지와 결혼자금으로 다시 팔아야 한다. 그러고도 둘째나 셋째에겐 더 이상 뒷받침할 여력이 없다. 중산층에서 이미 밀려나 내려앉았다. 이제는 가족의 부담이 한계점을 넘어섰다. 가족은 소리 없는 신음 소리를 낸다. 가족의 구조와 성질이 이 시대 한국의 특별한 온도와 압력에 이르러 다른 상태로 바뀌는 임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일류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면 루저가 되는 세상, 연애는 사치의 극이요, 결혼 또한 비즈니스이다. 딩크족(더블인컴노키즈)은 삼포세대의 로망이다. 너 자신을 알라, 삼포족.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루저인 나 자신을 향해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엉뚱한 곳으로, 정말로 삼천포로 빠졌다. 잠깐, 삼천포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변명이 필요하다. 옛날에 한 장사꾼이 진주장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한산한, 혹은 장날이 아닌 삼천포로 가게 되어 낭패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시발일 뿐, 나는 삼천포에 아무런 유감이 없다. 발길 가본 적도 없으니 좋고 나쁠 수도 없다. 그래도 그 이름 때문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 목록에 든다. 진주이건 삼천포이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종류를 가늠할 수 없는 화가 치민다.

 

 

  화 - 화가 나는 일을 당하여 우리는 주로 화를 참는 것이 인자의 길이요, 인자의 도리를 모르면 화로써 망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주입되었다. 하지만 화를 끓이고만 있으면 병이 된다고도 하질 않는가.

 

  분노는 많은 경우에 백해무익이지만, 사람이 분노해야 하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를 모른다면 더 큰 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도 있다. 2차 세계계대전의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을 대변하는 노익장이 남긴 짧은 글, 바로 『분노하라!』는 글이다. 스테판 에셀. 1917년생이니 90을 넘어서 쓴 글이다. 유명한 1917년생들이 다 떠나고 없는 세상에서. 정치라면 러시아혁명도, 케네디도, 박정희도. 문화라면 윤동주도, 윤이상도, 하인리히 뵐도. 에셀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일찍 파리에 정착해서 거의 한 세기를 살다간 지성인. 그냥이라도 90 노인의 발언은 경청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이고 그림이고 저작자가 죽으면 값이 올라가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노익장의 분노 예찬 발언은 애늙은이들이 대접받는 동양적인 관점에서는 다소 색다를 수 있다. 아니 온 세계가 난공불락의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된 글로벌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분명코 내민 돌에 정 박힐 일이다.

  프랑스의 현실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모양이다. 알제리를 비롯하여 비 코케시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갈수록 산이다. 이건 엊그제의 일이지만 명색 프랑스 하원의원 질 부르둘레라는 인물이 히틀러가 로마족, 그러니까 쉬운 말로 집시족을 충분히 못 죽였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일에는 장-마르크 애로 총리조차 법에 따른 처벌을 운운할 지경에 이르렀다지만. 세상은 금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권력들이 세포분열을 하는 장에 불과하다. 성실한 근로세 납세자는 없다. 바보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갑과 을만 존재한다.

 

  을순이 - 내 이름은 한금실이 아니고 통상 을순이가 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을식이와 을순이들의 하나. 그러므로 거의 무명 씨. 나에게 분노의 여력이 있을까.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첫 발걸음은 관심이다. 반세기 전에, 1960년대 유럽의 사회주의대학생연맹의 여대생들은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외쳤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의 여학생들은, 여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들의 관심은 외모와 이력을 통한 개인적인 성공에 있을 뿐이다. 여자 특유의 외모로서 남성 세계를 공략하거나 남성들과 똑같은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 권력에 이르는 길이다. 그 이외는 무관심하다.

스물 세 명인가 네 명인가, 미스코리아 본선 진출자의 외모 사진들이 똑같다고 세계 여론에서 비웃는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미의 비용」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유수 저널이 한국의 성형수술 풍토를 대서특필했다. 얼굴에 독을 주입하는 것은 일상이고, 가정주부가 심지어 종아리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라고.

 

  그뿐인가. 얼마 전 폴라 비라운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화장품 경찰관(?)이란 별명의 전문가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바로 화장품 종류였단다. 스킨, 로션, 에센스, 아이크림, 영양크림이라는 필수(?) 코스도 모자라서 앰풀, 트리트먼트, 마사지 제품, 기능성 제품의 홍수들을 보고서 하는 말이, 수많은 종류의 기초 스킨케어 제품들이라야 파격적으로 말하자면 보습제 한 종류란다. 수많은 과정의 덧바름은 오히려 모공을 막아 트러블을 일으킬 수도 있고, 과한 영양분은 타고난 피부 루틴을 방해해서 자연스러운 재생력과 유수분 유지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데……. 나처람 단순 무식한 사람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피부도 인체의 일부이라면, ‘소식하면 장수한다!’라는 말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피부나 외모가 아니지만, 나만의 이력에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나 또한 사회적 무관심자에 속했다. 죽어라, 아니 충분히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러고도 갑의 근처는커녕 을의 세상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벌이라면 벌이다. 지식을 생보다 우위에 놓는 죄를 범한 일, 지식에 종사함에 우월감을 가졌던 일에 대한 벌. 이 창살 없는 수감생활 중에 나는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서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 무엇을 분노해야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시작, 모든 새로운 시작은 반성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반성 시작 -

  나는 공부만 했다. 학문이 생을 의미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공부만 했다. 목표를 초월한 학문. 유용성을 생각하는 것은 저열하리라고 믿었다. 쓸모없음 때문에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어쭙잖게 노자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집의 쓰임은 벽이 아닌 빈 공간 때문이라고, 내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은 발바닥 크기의 땅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땅, 내가 밟지 않고 있는 너른 땅 때문이라고.

  나는 사치스러웠다. 욕심을, 특히 물욕을 초월한 삶. 그 무슨 사치였는가. 착각 아니면 거짓말. 세 끼 굶으면 군자 없고,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 없다는데. 취직을 하든지 시집을 가든지 - ‘취집’을 향하여 전진을 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취직을 향한 노력은 적잖이 해왔다. 결과가 없을 뿐이다. 일단 안정된 직장이, 돈이 없으니. 그러면 곧 삼포세대에 속한다. 연애는 무슨. 혹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쳐도 - 그 정도는 생물학적 짝짓기 본능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렷다, 희망하건대. 하지만 결혼에 이르는 것은 사투에 가깝다. 생물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할 것이므로, 남녀 관계라는 것도 다분히 계산적이 될밖에. 생물체의 상호작용에는 다소간 이해의 충돌이 내재한다고, 어디선가 읽었고, 또 동의한다. 자기 복제를 시도하려는 충동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미화되어…….

 

  틀렸다. 나는 반성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정작 중요한 반성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있다. 죽어라 공부하고도 일자리가 없는 것을 내 못난 탓으로만 돌리는 반성은 무의미하다. 부족하다.

  무엇을 더 분노해야 할 것인가. 내 탓은 제 앞가림 못한 데 대한 분노, 제 욕심에서 나온 분노에 불과하다. 애초에 나를, 우리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이 사회. 대학정원을 너무 부풀렸던 이 사회에 분노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이 에셀이 말하는 분노, 진정한 사회참여에서 오는 분노이다.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이름의 한 줄서기를 주입시킨 교육. 살벌한 경쟁심을 자유라는 당의정을 우리에게 먹였던 교육. 제 앞가림에만 매진하라고, 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평생을 달리라고 가르쳤던 교육 말이다. 그것도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 바로잡을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가 독문학을, 프랑스문학을 선택했던 대입에서 어른들 - 그런 곳을 진학하게 권했던 담임선생님이나 그런 학과의 대문을 너무 홀짝 열어놓고 우리를 습인했던 대학들 모두 - 그때 어른들은 우리가 바나나족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

 

  바나나 - 바나나를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바나나는 병문안과 관련된 이미지였다. 아프면 바나나를 사주셨다. 조금 더 자라서는 해괴한 모양이 눈에 들어온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바나나를 먹기는 뭔가 민망한 노릇이었다. 금방 바나나 송이에 꼬이는 하루살이들도 성가셨다. 하필 그 싫은 바나나로 지칭되는 우리들.

가야금과 거문고의 구별도 모르면서 현악기 종류들은 정확히 배워 알았다. 피아노 연습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필수다. 자연 단음계, 화성 단음계, 가락 단음계 구별도 배웠다. 자진머리, 휘머리, 중중머리는 구별할 줄 몰랐다. 조금 알았더라도 엇중머리 라고 하면 멍했다.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한국어교원양성과정 공부하면서야 제대로 알았으니, 지식분야인들 바나나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 분야가 더했다. 개화기에 생산된 신문학은 어땠는가. 신소설, 신체시, 신파극 범주를 통틀어 서구문학과의 관련 양상이 문제가 되었다. 비록 김현과 김윤식의 자생적 근대화론이 정설로 굳었지만, 해방 직후에는 이식문학론도 만만치 않았다. 신문학을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문학의 이식이라고 단언했던 임화의 논의는 그의 정치적 이력으로 묵살되고 만 것이니. 정치는 문학이론 위에 존재한다.

 

  쇼와 시대 이전, 그러니까 1870년대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 개화기의 서양 추종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수입 또는 주입되었다는 견해는 왜 백안시 되었을까. 메이지유신의 이름으로 서구의 자유주의 이론을 통한 근대화는 한 마디로 문명개화의 기치아래 수행되었다지만, 사실 일본의 경우는 무사들의 충성심과 사회적 조화라는 전통적 가치도 여전했거늘. 오히려 수입을 통한 수입에 해당되는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한 동안 망각했었고, 그 기간은 사뭇 길었다.

  예컨대 무당이나 사당패처럼 홀대받던 것이 풍물이었다. 꽹과리, 징, 장구 그리고·북 어느 것도 손데 대면 천하다고 업신여겼다. 그게 사물놀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 난 것이 1978년의 일이었으니, 장구재비 김덕수 패거리가 - 정식명칭 김덕수사물놀이패 -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또 돈을 벌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풍물도 사물도 돈이 되는구나, 성공이 되는구나 하고서 관심을 보였던 셈이다. 우리 고유의 정서라거나 문화의 발흥이어서가 아니라, 돈이, 성공이 되니까. 결국 우리는 우리 가락을 연주는커녕 감상도 할 능력을 잃은 채, 국적불명의 음악에 취해서 산다. 글로벌음악, 글로벌문화.

 

  일찍이 매슈 아널드 같은 고급문화론자들이 세속적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문화’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문화였음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확실히 깨달았다. 벌써 반세기 전에. 그 반세기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되어 왔다. 유럽세계와 아시아세계의 차이에 관한 감각을 더욱 경직화시키는 압력에, 동양이 지닌 (서양과의)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사고에, 학문적으로 동양 위를 억누르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그런 교의에. 그러므로 (서양)문화에 근접할수록 고급문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그뿐인가. 바나나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글로벌문화 창달에 매진하며 산다. 미국 기업과 맞선 우리 기업이 자랑스럽기만 한가. 스마트폰은 주인의 자리를 넘본다. 눈을 뜨면서 스마트폰을 찾고,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든다. 그것도 ‘엘티이’라야 하지, 행여 ‘쓰리지’는 큰일이 난다. 여전히 ‘투지’를 쓰고 있다면 영락없이 비사회적 죄인이 되고 만다. 인간은 가까운 장래에 번호와 기호로 분류된 코드를 팔이거나 뇌 어딘가에 이식받아 글로벌하게 통제되어 살게 될 것이다. 인간로봇, 아니 아예 로봇으로 진보하기 전에 아직은 바보 같아도 사람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세상을 음미해야할 것 같다.

 

 

  음미 - 또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의 몫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도 굶어 죽는다 하질 않는가. 돈을, 성공을 향한 허기는 끝을 모른다. 산비탈을 한번 돌면 사람들 절반이 사라진다는 무서운 동화가 현실이 되어 있다. 한 단계를 지나면 절반이, 다음 단계에선 또 절반이 탈락하고 우량종만 남는다. 우량종들도 피터지게 경쟁하여 궁극에는 일인자만 남는다. 그 한 사람은 무엇을 향해 살리.

  차라리 삼포세대 바닥 헌장으로 삶아 읊어도 좋을 시가 있다. 스물일곱에 요절했다는 천 년 전 당나라의 문인 이하의 작품이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

    서리 맞으면 잡목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비루먹은 개. 이삼십 대 젊은 사람들 거의 절반이 이 무기력에 굴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었다. 어느 온라인 취업포털의 설문에. 이제 사람들을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적응인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자기암시로서 통제하는 적응력. 어찌어찌 결혼에 이른다 해도 출산은 망설인다. 출산율은 2012년 기준으로 1.23명, 사람을 세는 정수로 말하자면 한 명이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란다.

 

  난 그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객관적인 눈으로 삼포세대 일원이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으련다. 쓸 돈, 쓸 수 있는 돈을, 주머니 사정을 잠시 잠깐 망각하는 바보이고 싶다. 미래를 계획하느라 미리 겁에 질리고 싶지 않다. 겁에 질리지 않으면 포기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삶. 신자본주의 이론으로 평가받지 않을 삶도 삶일 것이다. 자본주의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자식이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던 한참 낙천적인 시절에도.

  낙천적이고자? 설마. ‘모든 것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는 인간’에게 어차피 실존은 이유도 종극적인 목적도 없을 것이니. 그냥 살 수밖에, 그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리라, 그래야 한다. 둘이 모여서 여섯을 포기하더라도. 셋이 모여 아홉을 포기하더라도. 허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봄버들이 되는 꿈을 꾸기 위해서라도. (끝)

 

 

 

 

..........................................................................................

 

 부산펜문학 2013  Vol.9., 2013.11.20. 29-42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11. 17. 13:01

 

 

우빈과 성빈이 예인피아노학원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우빈이 곡명 : <하차투리안 소나티나 No. 3, 3악장>

http://youtu.be/mVk0fun8oIo

 

 

성빈이 곡명 : <눈송이 래그타임>
 http://www.youtube.com/watch?v=WynJiwZTMVw

 

 

우빈은 사정을 다 이해하지만,  

성빈은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올 수 없느냐고 '따지듯이" 졸라댔다.

하지만 11월 8일이면 서울 다녀온 일주이로 안되는데다가 9일에 일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세 가지 일이 한꺼번에 -

그중 마지막이 이동원과 장사익 음악회에 초대받은 일이었다. 

 

                  ▼

                             

                         

 

 

가을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살아있는 자매들 넷, 나부터 민, 진, 희 - 배려가 넘쳐 병(?)이라는 민이 남편이 기사와 기사를 담당했다.(카발리에와 드라이버) 

 

넷의 공통점 - '용'자를 이름에 지니고 있고,

                  박수를 치지 않았고,

                  2G를 쓰며 활영도 하지 않은 것.

 

진이의 후회 : "심장에 남은 사람"을 녹음하지 못한 것!

                             

 

 

 

 

 

긴 어디에서 그런 노래를 들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가슴에 남을' 사람을 병원에서나 쓰는 '심장'이라 하니까.

사람이 '귀중하다'?

우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쓰지 않고 물건을 귀중해 하니까. 

 

 

나는 <또 기다리는 마음>을 서럽게 서럽게 들었다.

정호승의 시에서 과거형을 현재로 바꾼 의미도 아프게 다가왔다. 

 

 

<찔레꽃> - 장사익은 이 노래를 위해 태어난 것일까?

               육신이 없는듯 가볍고 비장하기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래도 그 사이 나는 다른 찔레꽃 가사를 떠올렸다.     

 

 

<봄날은 간다> - 이동원, 장사익 두 소리로 들었다.

                     이 노래는 이동원이 불러야 하는가?

 

이동원 - 속 없이 말하자면 그가 또 무대에 설까?

그의 흔들거리는 건강이 염려되어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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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