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2013. 11. 2. 18:18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창립 50주년 기념

 

 

 

 

 2013.10.31. 늦은 5시

 이화여자대학교 ECC관 이상봉홀

 

 

 

 

 

 

                                                                                            이화뉴스에서 펌

 

  의자 줄: 나(1회), 남재은(2회), 이정화(8회), 이난희 교수, 이병애 교수,

             김선욱 총장, 김영호 교수, 조종남 회장, 이재돈 학장, 차범근 내외.

  왼쪽: 맨 앞 최민숙 교수(5회), 다음 엉거주춤 박종재 아나(40회), 끝 유현자(18회).

 

 

 

 

 

   1회: 나, 김영애, 정수자(대구), 이병애 교수님, 김영호 교수님, 민용자, 김경희

식사 끝이라서 미리 간 친구들도 있어는데...

 

 

       

         답사 - 서용좌(1)

 

          이화뉴스에서 펌

  공로패 증정

 - 이정화 동창회장(8) to 남재은(2), 민용자(1)

 

 

 

답사: 추억의 인사말씀 -

 

  2013년 시월의 마지막 날, 우리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과 창설 50주년을 맞아, 이렇게 여러 귀빈들 와주시고, 김선욱 총장님, 이재돈 학장님, 또 조종남 총동창회장님께서 축하말씀들 해주셨으니, 졸업생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말씀 밖에 더 드릴게 없겠습니다. 특히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이 자리를 준비하신 독문과동창회 임원 여러분, 지켜봐주시고 격려해주신 독문과 교수님들,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리며, 멀리에 산다는 핑계로 힘 되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우리 동창회장님께 듣기로는, 오늘 제 역할은 독문과 초창기 추억이나 풀어놓는 것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중후한 분들의 뒷순서인 것을 몰랐다가 조금 염려스럽습니다.

 

  1963년 새 봄, 우리들 열여덟 아홉 살 소녀들은 고만고만한 꿈들을 안고 이화 교정에 들어섰습니다. 선배도 없는 독문과 신입생들의 낯섦. 낯설고 서툴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겠습니까?

 

  기억은 어쩔 수 없이 개인적으로 저장됩니다.

  입학시험 치르던 꽁꽁 언 겨울, 지금 보아선 아기자기 아름다운 캠퍼스는 당시 초중고 12년을 코앞에서 걸어 다녔던 시골아이의 눈에는 거대한 미로에 다름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점심시간 후 다시 시험장을 향하다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리고 말았으니 낭패였습니다. 미욱한 성정에 끈을 매고 가는 것과 그냥 좀 천천히 걷는 것 사이를 고민하면서 터덕거리며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사방은 쥐 죽은 듯 시험이 한창이었죠. 그때 갑자기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학생, 여긴가요?" 하시면서 열린 문 사이로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들여보내주셨습니다.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들을 올려놓으시며, 어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감동의 눈물이 눈을 가렸고, 시험지는 뿌옇게 변했습니다. 하필 전공과목 독일어였는데, 1번 문제 ‘voll의 반대말’ 고르기부터 틀렸습니다.

 

  그렇게 저는 김영호 교수님의 너그러움 덕택으로 이화독문과 식구가 되었습니다. 선배가 없어도 우리는 잘 자랐습니다. 무감독시험으로 학점을 주셨던 특별한 경험까지, 우리를 무한정 신뢰해주셨던 고 한영기 교수님, 고 강희영 교수님, 저 개인적으로는 석박사과정까지 배우면서 전부를 다 베껴먹어 고맙고 죄송한 이병애 교수님, 대학원 시절 만난 양혜숙 교수님, 또 이난희 교수님…… 다시 50년 전으로 돌아가자면, 여름에도 까만 스카프를 쓰고 신입생 우리들에게 독일어로 말을 걸어서 정신 번쩍 들게 하시던 고 전혜린 선생님, 사상계에 『북간도』를 연재하시면서 교양국어를 가르쳐주신 소설가 고 안수길 선생님, 그리고 구약성서에선 배울 것이 없노라고 버릇없는 리포트를 써내도 괘념치 않으셨던 기독교문학 교수님들…… 그분들 모두는, 병아리도 닭도 아니었던 우리를 성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병애 교수님의 독일어발음이 시냇물소리 같다고 느꼈기에 ‘시냇물 Bächlein’이라는 이름의 스터디그룹도 만들었고, 그 친구들을 50년 동안 만나며 살았고, 오늘 이렇게 여기 모여 뿌듯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서 하던 대로 공부만 하며 살면서, 주변을 돌보지 못하고, 저 자신만 무탈한 삶을 살아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남습니다.

 

  삶을 살기 - 인간의 특성 중 하나가 강한 적응력이라고 합니다. 적응력은 인간을 지구상의 생물체들 가운데 우뚝 서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적응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적응해야할 세상이 그럴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오늘의 문화에 이르지 못하고 한낱 약육강식의 동물계에 파묻혔을 것입니다.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 - 그것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동인이라고, 여기 이화독문과에서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언제 어디에서 또 만나서, 우리의 젊은 날의 고향 이화 캠퍼스와 독어독문학과 시절을 추억하게 될지 기약 없으나, 내빈 여러분, 존경하는 스승님들, 사랑하는 동기들과 후배 여러분들의 앞날에 하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면서, 이쯤해서 어눌한 추억의 말씀을 마치렵니다. 감사합니다.

1회졸업생 서용좌

 

 


[부록]

 

 이병애 교수님께서 찍으셔서 가져오신 사진 -

 2010년 김영호 교수님 팔순 때  

 

 여겨 볼 것 - 3년 전의 내 옷, 자세히

 

 

 

  오늘 50주년에 입은 옷과

  블라우스까지 일치, 어쩌나!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11. 2. 17:57

외할머니 묘소 - 고창군 하고리 왕버들숲 근처

 

  2013.10.26.


 

외할머니(1906~1999)는 슬하에 아들이 없으셨고,
 우리 어머니 무송유씨 석자 순자 분이 유일한 혈손.

  우리랑 함께 사셨지만, 돌아가시자 무송유씨 가문으로 가셨다.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삼태마을 동막상 탑동 -  왕버들숲을 내려다보며 

 무송유씨 제실 <고창 여송제>가 있다. ▼      제향은 매년 음력 3월 20일

 

 중시조 유녹숭의 묘소 ▼

 

 유녹숭: 유금필의 5세손

     추밀원사(樞密院使) 겸 태자빈객(太子賓客),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에 봉해지자 평산에서 분적하여 무송을 본관으로 함.

     80 나이로 1114년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3일 간 조회를 폐하고 고인을 애도,

     '안정(安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동국여지승람>  "강직하여 일찍이 몸을 굽혀 남을 따른 적이 없었고, 비록 귀현  

                       (貴顯)이 되었으나 의복과 사는 집이 선비 때와 한결같았다."

 <여사제강(麗史提綱)>  "성품이 강직하고 유학에 진취하여벼슬을 지낸 40여 년

                             동안 공정한 충성을 근본으로 하는 자기 마음을 가졌다."

 

 

 무송유씨(茂松庾氏): 고려시대 정1품인 태사(太師) 충절공 유금필을 시조로 함.

 유금필: 태조를 도와 삼한통일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통합삼한익찬공신에 봉해지고

           태사에 오른 인물.

                                                                       [참조] 4세 유장신: 평산유씨 중시조.

 

 

 

 

 

 

 

 


 

 

외할머니 묘소는 외할아버지와 합장되어 중시조 묘역의 초입에 있다.

 

어머니(1925~2011)가 돌아가신 뒤 할머니 묘소에 처음 와 보았다.

 

이천서씨 가족 선산, 담양에 계시는 어머니와 고창에 계시는 외할머니 -

 

두 분은 75년을 함께 사셨는데, 돌아가시자 이렇게 멀리 떨어져 계신다니!

 

 

오늘 참석은 바로 손아래 여동생 내외와 우리 내외 - 사진사 제부는 보이지 않는다.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10. 15. 23:31
2013년 10월 12일 토요일, 라붐웨딩홀 -  

 

 

광주제일고등학교 58회 졸업생들이 졸업 30주년 홈커밍 행사를 가졌다.

 

1983년 졸업했던 아이들이 어엿한 어른들이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 할머니가 되었다.

 

 

 

 

 

 

 

 

 

 

 

 

 

아래 왼쪽은 우리집 주치의 전남대학교 순환기내과 실력자 안영근 교수......

                                                   오른 쪽은 수 십장 사진들과 동영상을 보내준 오인식.

 

  

 

 

 

 

 

                                                                                                                           ▼

 

1.서용좌 선생님 10년만에 뵙는데 넘 반가웠고 그간의 세월이 

   가까이는 10, 길게는 33년전 1학년 10반 독일어를 배웠던

   머나먼 과거의 시간들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 지나가며 ,좋은

   추억들이 다시금 삶의 에너지로 재 충전되는 소중한 시간 이었습니다.

 

2. 가끔 문자로 안부 전해드리고 이번엔 10년후 40주년 ~~

    그 이후도   어제 만난 것 처럼  스승과 제자의 애틋한 정을

   늘 함께 공유하길 기원 합니다.

 

3.사진과 동영상을 보내 드리오니 좋은 추억과 제자들을 회상하며

   가끔 소일거리로 보시라고 제가 찍은 선생님 사진과 동영상 보내드립니다.

 

4. 가르쳐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늘 간직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오인식/배상

 

 

 

광주서중‧일고 58회 졸업 30주년 어울림 한마당에 부쳐

- 도망하지 않기 -

 

오늘 서늘한 가을 저녁, 여기 모인 옛 제자들에게, 한 마디 인사는 해야 할 것이기에, 몇 자 적어 왔습니다. 제목은 도망하지 않기 - 이제도 스승과 제자라는 자리가 뒤바뀌지 않는 한 당부 말이라고 여겨주십시오.

 

여러분의 애송이 청춘 시절, 독일어 단어 걸음마를 가르치기보다 훨씬 어려웠던 과제, 진실하게 살기를 가르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살기를 지향하였기에 여기 감히 ‘그리웠던 제자들’이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많이 잊고 살았으니까요. 여러분들보다 한 해 먼저 일고 교정에 들어섰고, 여러분들보다 한 해 먼저 일고 교정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이 치열한 고3 수험생일 때 나는 벌써 일고를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 나를 여기에 초대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사실 도망치기는 제 특기입니다. 대학졸업 후 외무부 말단으로 잠시 일하다가 그 무의미성에 질려 도망쳐 귀향한 이래, 수많은 도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초짜 교직은 결혼으로, 다시 교직으로, 그러다 일고 3년 재직 후 박사과정 진학이라는 미명으로 또 그렇게 도망친 것은 늘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도망쳤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51%의 제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49%의 제자들에게 무의미한 스승이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간단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마지막 퇴임이 된 전남대학교에서도 다른 곳에서보다는 잘 참았지만 역시 도망쳤습니다. 실용주의 사회에서 별 소용되지 않는 독문학을 강의하면서 시험지 채점을 해서 A, B, 또는 C 학점으로 제자들을 편가름하는 것은 참 못할 일이다.…… 그런 생각에 주눅이 들어 결국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망 나왔습니다. 핑계는 그 사이 발을 내딛은 소설 쓰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변명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그러니, 오늘의 작은 가르침으로 내놓고 싶은 화두가 ‘도망치지 않기’랍니다.

여러분은 벌써 어른이 되었지만 긴 인생에서 보면 아직 한껏 젊고 기회가 많으니, 부디 생에서 사람에게서 도망치지 말고 다가가세요.

 

그러나 조심하세요. 가끔은 정말로 동참을 거부해야 할 일도 있음을 잊지 마세요. 혹시라도 ‘앞으로 나란히!’만을 외치는 경쟁문화가 살인적이라면 뒤돌아서서 살인에 동참하지 않을 일. 아니라고 말해야 할 순간이 있음을 명심하세요.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 - 그건 도망이 아니라 등돌림입니다. 도망은 뒷걸음질이지만 등돌림은 당당하게 뒤로 돌아서서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무명 소설가로서 내가 지향하는 것은 그래서 ‘등돌림의 문학’이랍니다. 다들 너무 앞으로만 내달리니까 멀미가 날 지경이라서요. 어떤 모양으로 살든지 두 발을 땅에 확실하게 디디고 섰을 때의 안정감은 행복감을 두 배로 불행감을 절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적 힘을 갖는답니다. 그리고 행복은 모양새 아닌 마음가짐에도 깃들어 있답니다.

언제 어디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제자들에게, 아직 길게 남은 코스도 잘 달릴 것을 믿으며,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볼 줄도 알 것을 믿으며,

2013년 10월 12일, 서용좌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