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2. 12. 7. 22:56

 

마지막 책

 

 

  오래 살았다, 라고 말해야 옳다. 그러면서도 지난 세월의 무게가 두께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시간은 늘 지나가기 때문일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일이 무엇일까. 과거를 반추하는 일을 시작해보려 해도 화면은 현재에 멈추어 있다. 너무 아득해서일까.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한 기억이라해도 너무 멀리 와서는 희미하다. 내 머리는 아마 현재밖에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녹슬었는지도 모른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라고 누가 그랬던가.

  헤르만 헤세가 중년의 대작들인 『데미안』과 『싯다르타』 그리고 『황야의 이리』를 쓰기에 앞서 쓴, 어찌 보면 가벼운 단편 제목이 그것이다. 「청춘은 아름다워라」를 내었을 때가 40을 바라보는 나이. 이미 청년이 아니었다. 부친의 사망, 갓 세 살 난 막내아들의 뇌수막염, 아내와의 파경이 드러나던 무렵이다. 아내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했고, 그 자신도 청소년기에 정신요양원 신세를 진 경험이 있었다. 기숙신학교를 탈출해 짝사랑의 절망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결과였다. 일반 김나지움으로 옮겨서도 학교는 망쳤다. 그의 청춘은 일상에서의 탈출로 점철된 ‘찢긴’ 상처투성이였다. 자전적인 『황야의 이리』에서도 주인공의 우울과 분열의 원인은 청소년의 ‘의지의 분쇄’를 기본으로 하는 교육 탓이다. 작품마다 아팠던 청춘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청춘에 대한 그리움은 원초적 인간본능의 하나일까.

 

  현대문명은, 물론 교육을 포함하여, 자연과 유리될수록 성공적이라 간주되고 있다. 개인은 거대 문명의 주변인으로 밀려나서 소외는 점정에 이르렀다. 어찌 제정신으로 살랴. 멘붕의 시대 - 우울과 정신적 불안 속에서 청춘은 아름답다고 외치면서도 헤세는 놀랍게도 노년에 이르는 삶을 누렸다. 생애 후반에 더욱 빛나는 책들을 썼고, 충분히 인식되고.

 

  왼손에 책을 펼쳐든 채로 고꾸라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경이롭다 못해 섬뜩하다. 그래서 잊지 못하는 것 목록에 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수많은 책 가운데에서도 하필 『고백록』이라니. ‘이는, 우리가 당신을 향하여 살도록,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까닭이오니, 우리 심령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평안할 수 없나이다.’ - 이 구절 때문에? 평생 달아나고자 했던 신앙으로? 아이러니다.

 

  책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들. 우연히 마지막 밤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할애했을까. 헤세에게 가장 잊지 못할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였다고 가정한다면, 나에게는 누구일까, 어떤 책이 될까, 마지막으로 읽게 될 것이. 혹은 쓰게 될 것이.

...................................................................................

 

 

『그곳에 그가 있다』, 한국여성문학인회, 2012, 책만드는집, 196-197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12. 4. 01:55

 

편지

 

 

                                     베케트의 <행복한 나날들> 중에서 :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 말해버리지요. 할 수 있는 전부를.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죠.”

가을은 은행잎으로 가을입니다.

비가 오거나 아니 오거나.

연구실은 춥지 않으신가요.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을에. 이런 편지를 엿보게 된 나는 궁금증에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대 밖에서 진부하게라도 이야기를 꾸며봅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자신의 말 대신 명작의 인용 뒤로 숨습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춥지 않은지 가벼운 안부가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신은 연구실이 있는 사람이며, 연구실이 추울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사람이며, 그래서 당신을 잃었고,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또 한 가지 사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편지는 아니며 흔히 지금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메일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과 그 사람은 이메일주소를 아직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두 사람에게 남아있을 뭔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구실이 있는 사람의 이메일주소라면 그것은 감추고자 하더라도 감춰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의 이메일주소 노출 정도가 관계의 정도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면 정정하렵니다. 그러나 얼마나 먼 관계인가, 얼마나 사무적인 관계인가, 그런 말을 하고자 할 때도 써야 하는 단어가 ‘관계’인 점을 강조하렵니다. 그러면 오해는 풀릴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편지에 답을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봅시다. 당신은 이런 편지를 곧 바로 지워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답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시작하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런 편지를 아예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보낸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난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는 진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편지의 성격 상 열려버리기도 합니다, 사소한 잘못으로. 여러 개의 편지들 중에서 하필 하나만 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방심한 순간에 마우스의 작동으로 열려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이 편지는 그래서 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열고 보니 당신의 가슴이 조금 찡합니다. 평상시의 당신의 태도로 보아서 당신이 답을 쓸 리 없음을 아는 사람이 이런 편지를 쓰다니.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묻어나는 편지를 쓰다니. 한 순간, 아주 짧은 한 순간 마음이 닿았더라도, 스쳤더라도, 만남은 만남인 것을. 당신은 그것마저 부인할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만남은 순간이며, 특히 괘도가 다른 직선의 만남은 순간 중의 순간일 뿐임을 누군들 부정합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순간이 정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동서고금 남녀노소의 일입니다. 만일 아름다운 순간이 허락된다면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당신과 같이 이성적이고, 많이 이성적이고, 최고로 이성적인 사람으로서는.

 

   그러므로 당신은 회신이라는 간단한 장치를 뚫어지게 봅니다. 절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답을 쓸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읽지도 않고 지우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음에 스스로 뿌듯해할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동안에도 매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이 편지를 더 이상 거기 아이티 세상에 살려두지 않을 만큼 이성적입니다. 간단합니다.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서 편지는 휴지통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전에 어쩌다가 우연히 나의 편지함으로 ‘전달’되어버린 것을. 방해꾼은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휴지통에 쌓인 수많은 쓰레기들 중에 섞여 얼마를 더 연명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당신의 눈앞에 다시 존재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꿈을 꾸는 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편지는 게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꿀 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고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러나 아무 소용없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끝나지 않아도 희망은 끝납니다. 어느 날엔가는 당신이 휴지통을 말끔히 청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편지를 쓴 사람과는 참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잊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비이성적인 순간이 있었음을. 하늘과 바다가 맞닿고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절해의 고도. 상상의 자리에서는 당신도 마그마처럼 끓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당신이 이성적인 것은 지나간 순간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서입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훌륭하게도 이성적입니다.

   만일, 만일에 훌륭하게도 이성적인 당신이 조금 흐트러질,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시간이 올까요? 아무리 이성적인 당신도 사람이고, 사람이면 조금 흐트러지는 때가 왜 없을까요? 그래서 당신도 아주 드물게라도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해 봅시다. 물론 이 편지와 관련해서는 이미 편지는 죽어버렸을 때입니다. 그저 전혀 다른 계기로 당신의 몸속에 알코올 성분이 많아졌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인위적으로 이성의 자리를 감성이 꿰찬 겁니다. 아니, 감성이 당신을 송두리째 꿰찼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지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조금 상스럽게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고쳐봅시다, 감성이 우위를 점한 때.

   당신에게서 감성이 우위를 점할 때는 드문 일입니다. 그래도 가능한 일입니다. 당신도 사람이니까요. 원래도 감성을 이성으로 누른, 실은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사람이고 보니, 어느 날엔가는 감성이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니까요.

 

   그럼 이제 한번 편지를 쓴 사람을 떠올려 보시지요.

   그(녀)는 - 이렇게 굳이 괄호 속에 (녀)를 쓰는 이유는 누구의 성별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소심 때문이니, 당신도 또는 독자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로 왔습니까? 이 표현은 다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왔다는 말은 옳지 않겠지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오게 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의지가 없었을 때 그(녀)가 당신에게로 왔을 리가 없는 이유는 압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오는 것을 그냥 허용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혹은 그 순간, 당신이 찰나에 감상적이 된 때문이었겠지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무래도 어떤 외부적인 힘이 작용했겠지요? 말하자면 있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야 마는 자연 법칙 같은 것. 우리가 잊거나 잊으려 한다고 해도 한번 태어난 것은 사라지지 않지요. 우리가, 생명체가 한번 태어나면 그것이 죽어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성분은 어떤 형태든 모양이든 찌그러들 대로 찌그러들어도 썩어서도 어딘가에 남아있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예컨대 한 겨울 바닷가의 눈물 같은 것도 볼의 열기 때문에, 닦아준 손수건에 적셔져서, 또는 덮어버린 입술에 묻혀서, 아무튼 어떻게든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 녹아들어 남게 되지요.

 

   나는 이제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녀)가 갔습니다. 떠났다는 말입니다. 겨울은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하더니, 그때 정말 겨울에 떠났습니다. 유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겠죠. 물론 지병으로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들이 아닌 바에야 누가 얼마나 유언을 남기나요? 어쨌거나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자에 <미리 쓰는 묘비명> 비슷한 코너에 보낸 글이 남았습니다. 물론 보낸 것 보다 더 길게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답니다. 연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여기에 마저 그 편지의 계속이라고 치부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마그마를 향하여

 

   은행잎 우수수 지는 어느 늦은 오후.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라는 문자를 보내 왔다. 선배 문우께서.

   아, 그런 오후이면 잠들기 좋은 시간 아닌가.

   비가 내린다면 빗물에 젖은 은행잎 따라 흘러가기 좋을 것이다.

   발길에 찢기어도 여전히 노란 은행잎 부스러기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들기 좋을 것이다.

   그들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아래로 아래로 어디까지 가는가.

   우리는 지표를 뚫고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 것이다.

   몸과 맘 모든 속성들을 끌고 아래로 아래로 간다.

   속성들은 원자와 분자가 되어 밀고 당기고 마그마에 섞일 것이다.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마그마 속에 한데 섞이어

   몸도 맘도 초월한 마그마가 되어 흐를 것이다.

 

 

   마그마 - 얼마나 뜨거우면 돌덩이가 녹을까.

   얼마나 녹아서 ‘돌물’이 되어 흐를까.

   지각 바로 아래 외핵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암석층 맨틀에 이르기는 할까.

   아니, 맨틀 최상부의 섭씨 100도를 견디기나 할까.

   맨틀의 대류는 혼돈 과정. 내핵은 고체이고, 외핵은 액체이며, 맨틀은 가소성 고체라.

   지구 표면에서는 낮은 온도로 고체이던 광물질들이 마그마에 이르면 소용없다.

   암석 농축액 마그마, 그 속에 섞인 은행잎 부스러기들은 설마 불순물일까.

   마그마에 섞여 녹으면 지표면의 일들을 기억이나 할까.

   몸을 기억하지 못해도 맘도 잊을까.

   몸은 형체가 사라진다.

   맘은 무엇이 사라질까.

 

 

   몸은 실존의 현장이었다, 인간이면 예외 없이.

   겨울의 나무 - 길고 부실한 몸은 용적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첫아이라서 아이는 버리고 태만 주어다 길렀나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났다.

   좋아하는 움직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것들…… 있었을까?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탐한 적이 있었을까?

 

 

   단연 아니었다.

   손을 뻗치면 무엇이건 다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바보같이.

   준비성 만점의 (외)할머니는 욕구의 싹이 자랄 틈을 내주시지 않았나 보다.

   할머니가 엄마였다. 어머니는 우리랑 함께 할머니의 딸이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일찍 학교에 보냈다.

   네 살 때 벌써 문전옥답 값으로 가죽 란도셀 가방과 호랑이(?) 모피코트를 준비해놓으셨다 했다.

   그것들을 맸거나 입었던 기억은 없어도 작은 모피코트가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천리 길 먼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가 부모자리가 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할머니의 아기였다.

 

 

   맘은 늘 아기는 아니었다.

   물병자리 B형. 천성적으로 집단과 강요에 약한 고립적 고집적 마음의 소유자.

   체육시간 내내 벤치에 머물며, 소외되어, 마음은 오히려 일찍 성장했다.

   성장? 한껏 조숙하여 개똥철학에 기울었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시를 썼다. 첫 발표는 「무제」.

   가소롭게도 인생은 주제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표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건방짐이 오래 갔다.

  

 

   농축된 시를 쓸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유트릴로의 하늘을 따라 그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절대음감으로 피아노를 두드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책 속에 정신이 있다고 믿었다. 재능과 달리 읽으면 되는 것이 책이라고.

   책이 유일무이한 벗이었다.

   책들은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거기에 존재했고, 나는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그들과 노닐었다.

   단조로움 속에 단정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희로애락은 장신구일 터였다.

   장신구는 있어 좋기도 하고 있으면 불편하기도 한 존재가 아닌가.

 

 

   정신에 집중하기를 소망했다.

   육신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그 둘이 똑같은 비율로 섞이지 않을 것이므로.

   더 정신으로 뭉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까.

   정신은 날개 없이도 한없이 날 수 있을 것이니까.

   어디로? 목적은 없었다.

   목적을 초월할 수 있음을 우수한 자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구체적 목적에 들린 삶을 조금은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목표지향적 삶을, 욕망이 많은 삶을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조금 안쓰러워했다. 건방지게.

 

 

   내 맘은 내 정신은 강했다고 믿었다.

   내 맘은 내 정신은 상처입지 않았다고 믿었다.

   내 상처를 두려워하여 행여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겁을 먹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구나.

 

 

   예 - 참 어려운 단어였다.

   함께 가자 하면, 예 하고 서두르지 못했다.

   확신이 안 선다는 생각에 더듬거리기만 했다.

   효, 우애, 우정과 사랑의 이름으로도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니, 애국애족은 언감생심.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엉터리 산수를 믿지 않았다.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둘이 정직한 답이다.

   아니 넷일 수 있다는 상상을 더 신뢰했다.

   왜? 원래 하나의 마음도 늘 하나가 아니니까, 적어도 둘씩이니까.

  

   마음은 늘 갈래였다. 누구의 마음인들 그러지 않았을까. 동시에 둘을 원하기는 오히려 어려웠다. 직장을 쉬이 갈아 치운 것만 보아도 드러난다.

   한번은 다 놓고 소설만을 쓰겠다고 작정하기도 했다.

   그랬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문학작품들을 파먹고 산 세월 동안, 손가락이 하이에나의 그것들처럼 넷으로 변하고 꼬리가 돋는 기분에 소스라쳐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여러 주제를 섞어 담은 장편 출판을 계기로 어정쩡 소설가가 되었다. 시를 쓰는 젊은 선배는 소설 다섯 편을 쓸 이야기를 한 데 엮어 넣었다고 ‘비경제성’을 탓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적어도 한참 동안 무엇인가로 쏠렸다. 다른 것들을 다 잊었다. 그러다 식었다. 다른 무엇인가로 한참동안 쏠렸다. 그러다 식었다. 오래 식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식을 것이다. 아니, 이제는 시간이 없다.

 

 

   아니오 - 참 어려운 단어였다.

   비가 내리면, 아니오 하고 우산을 쓰거나 집안으로 뛰어들 만큼 신속하지 못했다. 비는 내리면 맞는 법. 사람의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오는 색으로 맞는 법. 비도,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자연을 신앙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아래로 아래로 간다.

   마그마를 향하여 간다.

   뜨거운 돌물은 나의 레테의 강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남아 있던 글입니다.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그(녀)에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으니,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묘비명이란 단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터, 무명 소설가에게는 사치스러운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인간적으로 문학적으로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문자를 받았더랍니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답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그(녀)는 왠지 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막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진다고. 그(녀)는 ‘너절한 연습’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는, 만나고 싶은 마음들이라면, 대기 속 보다는 땅속을 꿈꾸는 것이 소박할 것이라고.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하늘보다는 땅의 그런 이미지가 우리의 미래(?)에 어울린다.

 

 

   마지막 인터뷰

 

   어떻습니까? 이 묘비명의 어딘가에 편지처럼 당신에게로 뻗는 촉수가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조금은 부담이 되시려는지요? 아니, 그거야 모를 일입니다. 책임이 없다면 누구는 어떤 일에서든 자유로울 수 있는 법입니다. 꿈을 꾸는 건 꿈꾸는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꿈의 대상은 억울할까요? 예,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억울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아는 한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언뜻 무뚝뚝했습니다.

   - 어떤 때에는 타협이 어려웠고요.

   - 많이 정직한 편이었어요.

   - 보기보다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수식어를 줄이고 말해봅시다.

   - 무뚝뚝했습니다.

   - 타협이 어려웠고요.

   - 정직한 편이었어요.

   -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덧붙일 말이 떠오르겠지요?

   - 괴팍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 타고난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정말 그뿐입니까?

   - 순수? 바보처럼 늘 뭔가에 골몰했던 것 같아요. 그만 하시죠.

 

   아니, 하나만 더. 미안합니다. 제가 좀이 쑤셔서 그만. 골몰했다 하시면 집착 같은 것입니까?

   - 표현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굳이 말하면 긍정적인 집착, 적어도 타인에게는 긍정적인 집착으로 나타났지요. 그게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편이었지요. 자신의 잘못, 부족함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매달렸으니까요. 상대가 무슨 말을 못했지요.

 

   마지막으로, 당신과 그(녀)의 벤다이어그램을 상정한다면 어떤 형식이었나요?

   - 벤다이어그램? 참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집합이라, 합집합의 크기가 커지려면 교집합은 작을수록, 아니, 합집합을 생각할 게제는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교집합을 키웠나? 그것은 더욱 어불성설, 두 개의 자아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인 것을.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 아니, 나는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을 잘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희망했습니다. 그(녀)가 상대적으로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왜들 가벼움을 탓하나요? 이 지상의 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존재가 왜 무거워야 합니까? 가벼울수록, 깃털처럼 가벼울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부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당신의 위트와 유머와 센스와 아이러니와 패러디와 리듬과 심지어 즐겨 쓰시는 모순어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느꼈습니다. 지금도 느낍니다. 수사학에서 탁월한 당신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여 ‘달콤한 이별’이라 하시렵니까? 아예 오비디우스를 빗대어 ‘이 충만이 나를 가난케 하였도다!’라고 응수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인가 감정이 충만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은 이성의 가난이었나요?

 

   당신 : 바람 불면 은행잎 우수수 져서

   그(녀) : 당신이 스틱스 강을 말할 때에도

   당신 : 어딘 가로 씻겨 내려갈 것 아니오?

   그(녀) : 나는 그것을 암호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 내려가다 썩든가

   그(녀) : 나는 차라리 레테의 강을 믿습니다.

   당신 : 썩은 물이 어딘 가로 흘러 들어가

   그(녀) : 많은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당신 : 스며들어가

   그(녀) :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들이

   당신 : 지구 복판의 마그마가 끓고 있는 곳에서

   그(녀) : 무엇인가가 지나면

   당신 : 한 조각 성분이 되어서라도

   그(녀) : 그 끝이 좋았던 고통스러웠던

   당신 : 그렇게라도 만날 것 아니오?

   그(녀) : 언젠가는 거의 잊혀진다고.

 

 

   벌써 끝나가는 이야기이군요.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했습니다그려. 늘 그랬습니까?

   -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제 말만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당신은 추억에 잠깁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밤을 지새우던 때를 불러봅니다.

   어느 바닷가. 둥지 틀고 사는 곳에서 260km 또는 450km 쯤 움직인 곳.

   싸구려 불빛에 드러난 군상. 따닥따닥 붙어있는 횟집과 손님을 불러대는 아주머니의 앞치마. 부엌의 행주치마가 아닌 돈주머니. 돈주머니들은 제법 불룩하다. 임신하기에는 늙은 여자들의 부풀어 오른 배 위에서 더 부풀러 보이는 돈주머니 앞치마. 앞서 지나간 손님들의 때 묻는 돈, 그 때 묻은 돈에서 옮겨간 인생의 때로 뒤범벅되어 갑옷처럼 무장된 돈 통.

   일행은 예닐곱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한다. 중요하지도 않은 말들만.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 중요하다. 적당한 간격의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시간을 죽이려고 할 때.

   왜 시간을 죽여야 하는가. 공적인 일들이 끝나면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 푹푹 씻고 건강한 잠을 자면 그만인 것을. 그 편이 다음날의 진행에도 합당하다. 그런데 왜 바닷가를 서성이며 시간을 죽이려드는가. 할 말도 없으니 말을 못하고, 할 말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누구도 누구에게서라도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바닷가 부둣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내가 이전에 여기 유명한 어시장을 갔더랬어요. 어부인이 워낙 생선을 좋아하니까 사가지고 갈까 했었지요. 아니, 아예 돌아오는 길에 어시장엘 다녀오라는 엄명이 떨어졌지요. 해서 시장을 갔었죠. 그런데 아짐씨들이 앉아서 영락없이 붓칠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아예 노란 페인트칠을, 생선에다가. 멍하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아짐씨 말이 뭐랬는지 참.

   뭘 보냐고 퉁이나 맞으셨지요?

   퉁만 맞은 게 아니라 혼이 났지요. 아자씨, 집에 아지메는 화장 안하나? 야들도 화장을 곱게 해야 시집을 잘 가는 기지, 이러는 겁니다. 노오란 물색으로 맛있어 보이는 조기가 화장발이라니. 그 다음부터는 조기매운탕 맛이 확 가버리더군요.

   참 섬세하시기는. 그게 어디 오늘 하루 이틀 일이던가요.

   조기 장사는 조기를 속이고, 고춧가루 장사는 고춧가루를 속이지요. 일가 형님이 시골서 그대로 터 잡고 사는데, 글쎄 고추 다듬고 밭두둑에 아무렇게나 버려둔 고추꼭지를 밤 새 실어 가버린다고 합디다. 그걸 어디에다 쓸 것이요, 참. 그러니 누가 고춧가루를 믿고 사 먹을 수 있나요. 그러다 중국물건이 싸고 이문이 난다 싶으니까, 깨 있지요? 야무진 주부들이 시골에 가서 깨를 사가지고 와서 의기양양 하는 것도 다 헛것이라.

   직접 시골에 가서 사도?

   그러니까 깨를 털기 전에, 깨를 터는 것이 무엇인지나 아시오? 깨를 털기 전에 아예 덕석 에다 중국산을 쫘악 깔아놓고 그 위에서 깻대를 턴다는데 말 다했지요. 온 동네가, 다시 말하면 온 나라가 그러는데, 혼자서 순수히 자기 밭에서 난 깨만 팔고 있으면 바보 되는 느낌이라서 별 수 없다지 않소. 불 보듯 뻔한 손해인데다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농촌 사람 야단 못하지요.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인데. 요즈음엔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흔치 않다가 가을걷이할 때나 더러 드나든다는군요, 쌀도 실어가고 뭐 그런 정도. 헌데 시골 노인들이 다른 집 자식들을 알고 지내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긴다더라고요. 옛날엔 뉘 집 자식 할 것 없이 누가 하나라도 오면 온 동네가 다 나서서 반겼고, 또 젊은이들도 으레 동네 인사 할 줄 알고 그랬는데. 아무튼 형님네 시골에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가을걷이해서 쌓아둔 나락가마니를 통째로 실어 가버렸다지 뭐요. 저쪽에 젊은이가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 싣는 것을 노인정에 앉아서 먼발치로 본 노인이 있었다지만, 그 노인 생각으로 저리 천연스럽게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를 실어내니까 그 집 자식이나 되나보다 그랬다지 뭡니까.

   아무리 그런다고 참 노인네도! 어르신이라요, 할머니라요?

물어보나 마나지요. 할머니들이 혼자 노인정에 앉아있기를 하나요? 잔손가는 일이든 어디로든 몰려다니지. 칠십 줄 안 넘은 할아버지가 그랬답니다. 아파서, 병중이라 시들시들하기도 했더래요. 요즘 시골에도 암환자들이 많은 걸 보면 공기 좋은 시골이 별 노릇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시골도 음식들이 개화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아니,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요. 한번은 사라질.

 

 

   그렇게 당신은 그 밤의 대화에 끼었습니다.

   한번은 사라질.

   마치 생사의 암투에서 해방된 초연한 느낌을 주며 좌중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좌중이라야 어느새 대여섯으로 줄었습니다만. 이제 모두들 당신의 입만 쳐다봅니다. 당신의 개입으로 진부한 어시장 놀음이나 가을걷이 도둑 이야기에서 삶과 죽음으로 이야기의 차원이 바뀌었으니까요. 당신은 처음엔 모르는 척 입을 다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실은 언제나 철학을 시작하곤 하는 당신을 알아보고 있었으니까요. 해서 당신은 그날 밤의 강연(?)을 하게 됩니다.

 

 

   오늘 그것을 되풀이하실 의향은 없으신 거지요? 간략하게라도?

   - 그럼요. 기억도 못합니다. 강연이라니, 그저 알코올 기운에 떠들어댄 개똥철학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날 밤의 강연(?)에서 당신의 영혼과 그(녀) 그것이 불꽃 튀는 접속을…….

   - 그만, 그만 하시죠. 순간은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때는 순간은 영원이 되어버린다고도 했고. 늘 말이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매 순간의 영원성 운운하면, 헤세가 쓴 『싯달타』에서도 나왔던 말 같습니다만. 삶마다의 불멸성과 더불어.

   - 예,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전히 새 말을 합니까? 세상 어디에 새로운 주제가 있답니까? 쪽지 한 장에 매달리시는 댁은…….

   죄송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제가 하는 쪽이라서. 제 역할이 질문 쪽이라서…….

   - 예, 뭐. 그렇다고 제가 답변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죄송하지만 처음 주제에 한해서만큼은.

   - 주제가 있었나요? 도대체 인생에 주제가…….

   자 그럼, 그(녀)는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서 떠났습니까? 이 표현은 정말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떠났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버렸습니다.

   - (침묵)

   그럼 당신은 왜 그(녀)를 단호하게 자르셨습니까?

   - (침묵)

   당신이 침묵하더라도, 몇 백 년을 침묵하더라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녀)가 이 편지에 쓴 대로,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는데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물론 당신의 침묵이 그(녀)를 질식시켜서 스스로 단념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 (침묵)

   하긴 다시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그 단념이라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군요.

   - (침묵)

   예, 이 편지의 답이 침묵인 것을 알았습니다. 진즉에 알고서도 궁금했습니다. 가펑클의 노래를 들어 ‘침묵의 소리’를 실현하시는 군요.

 

 

 

   여기까지입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이 편지와 관련해서 뭔가 의미심장한 주제를 끌어내볼까 혹했던 나는 여기서 단념했습니다. 그러면서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 무기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빼앗겼거나, 아니 조금이라도 설레었거나 하는 정도만으로도 마음 졸이는 상대였다면 그런 무기가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았으리라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편지의 수인인은 참으로 말을 아끼는 수준 높은 인격자였습니다. 그것이 내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고백하건대, 이야기를 창작하는 대신 누군가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 애초에 틀렸습니다. 편지 한 마디를 실마리로 하여 쉽게 정신적 투쟁의 흔적 같은 것을 꺼내보려고 했으니. 본격적인 글쟁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음을 느낍니다.

   대신에 조금이나마 배운 것도 있습니다. 물론 사전적으로야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더이다. 거기까진 통상 알고 있는 것이지만, 유독 그것을 가리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할 때 늘 고개가 기웃거려졌지요. 그 의심을 이제 확신해도 될 듯합니다. ‘감성’이 ‘이성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고 정의되면, 처음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감성과 이성의 대응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립개념이 아니라 충돌개념이라는 것. 두 단어를 함께 쓰는 일에는 뭐랄까 물리적 이항이 아니라 화학적인 얽힘으로 폭발성이 내재되어 있으리라는 것. 비슷하게 감성과 이성을 나누어 가졌을 두 사람의 경우에도 어떤 쏠림 현상 때문에 한 사람은 폭발해 버릴 수도, 다른 한 사람은 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 미션이 가득한 영화에서, 폭발 직전 몇 초를 남기고 뇌관이 제거되는 폭약처럼. 그러니까 폭발 여부는 순전히 에이전트의 활약 덕택입니다. 이 때 에이전트의 이름은 언제나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최후의 보루는 이성이다? 그러한가 봅니다. 그런 것을 배웠습니다.

 

   아차, 덧붙일 말이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도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을 강조한 책을 공유합니다. 아까 당신이라고 지칭된 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서가를 슬쩍 훔쳐보았거든요. 그리고 편지를 쓴 그(녀)의 다른 노트에서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이란 지적 정체성과 변화의 요구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메모를 본 적이 있었답니다. 그 책이 출간되었던 1996년에 - 아니, 훨씬 이후라야 되겠지요, 여태껏 그런 마음이 지속될 리는 없을 테니까요 - 누군가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했음직하다. 어쩌면 ‘당신’ 쪽이. 간접적 이별의 통고로서. 감성 따위를 극복하련다는 통고 같은 것. 그런 경우 이성은 잔인성의 비슷한말이 되겠습니다그려. 호모 사피엔스의 독재. 물론, ‘당신’ 쪽의 철학에 얼마만큼 동조할 것인지는 좀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편지가 영영 사라져버린 데 대한 쓸쓸함을 반추할 길은 없으면서 여전히 자꾸 그쪽으로 내 마음이 적시어지니 말입니다.

......................................................................................................

 

* 『문학세계』 통권 221호, 도서출판 천우, 2012.12.1. 211-226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1. 19. 00:04

 

 

등돌림의 문학

 

 

문학이란 무엇일까 - 늘 있어 왔고 여전히 의심쩍은 이 질문과 더불어 살아가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어른들이 말리는 말씀에 속으로 토를 달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른이 되어 정말 옛 어른들 말씀대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

 

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축제가 있어, 세상 각처에서 모여들어 함께 하는 콩그레스가 9월 우리나라 경주에서 열린다. 이름 하여 ‘제78차 국제 PEN 경주대회’ - 세계 최대 문학축제인 이번 대회는 전 세계 102개국 회원국에서 해외 문인들만 해도 30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이다.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 터키의 오르한 파묵 등 혁혁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도 참가하여 대회의 위상을 높인다. 더러는 펜은 칼보다 강함을 역설해 낸 사람들이다. 강함에는 부와 명예가 따르고. 이 대회는 이들에게 경주라는 역사적 도시를 배경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기회도 될 것이다.

 

경주대회 참가를 앞두고, 개인적으로는 소잉카를 직접 만나는 일에 조금 설렌다. 다는 몰라도 우리는 비아프라의 내전을 기억한다. 한때 누군가가 영양실조에 걸리다시피 마르면 비아프라 사람 같다고들 놀렸다. 그 비아프라 독립전쟁을 막고 싶었던 젊은이, 그 일로 오히려 투옥되고 감시받고……. 그는 늘 급진적인 글들로 나이지리아 정부와 빈번히 충돌하고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자의적인 사실상 망명 중에 궐석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독재자가 사망하고서야 귀국이 가능했던 소잉카.

 

그의 경우 흥미로운 것은 종교적 혼재와 상이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서 서양문학에 정통한 그가 아프리카의 전통과 가치를 어떻게 조화 속에서 지켜내고자 했는가 하는 과정과 답에 있다. 세네갈의 시인 대통령 셍고르로 대표되는 네그리튀드 - 공통의 흑인 전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한 네그리튀드 운동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만이 프랑스의 정치적이며 지능적인 패권과 지배에 반대하는 싸움에 있어 최고의 도구라고 믿었던 문화운동이었다. 그러나 소잉카는 네그리튀드에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흑인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이자 무분별한 찬미일 뿐으로, 근대화의 잠재적 혜택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한민족은 한민족이어야 하되, 가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민족주의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잉카가 “인간의 첫째 조건은 문화이고, 메아리 없는 예술은 독백일 뿐”이라고 말할 때, 문화는 대결이 아니라 그저 인간다움의 본태다. 문화를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을 모독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문화 예술의 본질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 타협보다는 저항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고.

 

예술은 곧 자유다. - 이런 생각은 70년대 국제 PEN 회장이었던 하인리히 뵐의 주장에서도 분명했다. 예술은 자유로움 이전으로, 자유 그 자체이다. “예술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유이니까.” 그러므로 문학을 예술로서 이해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곧 표현의 자유이다. 어떤 가치를 표현하는가?

 

그러나 세상의 가치들은 부유하는 구름 같기 마련이다. 세상이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늘 변화무쌍해서 종잡을 수 없다.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 오늘의 가치들 속에 분명 가난은 퇴물이다. 가난한 아빠는 아빠도 아니기에 『부자 아빠 되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부자에게도 인생은 공평하게 덧없다. 아무리 뜨거운 해라도 곧 있어 지평선 너머로 지듯이, 아무리 빛나는 왕후장상의 인생이라도 저물기 마련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히포크라테스의 이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유한한 인간은 의식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해 내는 예술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한다. 빛과 모양과 소리와 글 등으로 인생을 재창조하는 일에 심취한다. 문학은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 말과 글, 곧 언어로서 나타내는 예술이다. 문학을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이 예술은 분명 언어 안에서 시작되고 언어 안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언어는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음성적 기호의 체계를 넘어선다.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기호체계인 언어를 조직하여 만든 문학은 ‘기호의 기호’라는 특성을 지닌다. 메타언어일 수밖에 없는 이 추상적인 속성은 문학의 이념적ㆍ실천적 기능을 증대시켜 준다. 인류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넘어서 문학이라는 상징의 언어로서 공간과 시대를 넘어 교감하며, 총체적인 문화유산을 집적하는 것이다.

 

예술은 학문과 달리 세계를 탐구하고 수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주관적 감수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 특징이다. 이성이, 계산적 머리가 각광받는 이 시대가 살만한가, 우리는 고개를 젓게 된다. 감수성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줄 마지막 보루를 염원할 일이다. 초인간적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적 부족함이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최강 인공지능의 로봇은 나노 수준의 오차로도 작동을 멈춰 버리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집을 향해 걸을 수 있는 내가 인간이다. 인간인 나는 해야 할 일을 못하기도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을 안 할 줄도 안다.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우수한 결심 아닌가.

 

지능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문학 - 문학에서는 픽션일수록 진실하며 진실할수록 픽션이라는 모순이 가능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인간을 현실적 존재에서 초월적 존재로 승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문학의 변용된 세계가 현실의 파괴를 전제로 하지 않고 비판과 개선을 지향하는 한에서 그것은 유희가 아닌 자유정신이다. 반어와 풍자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이다.

 

더구나 문학텍스트는 혼자말로서 존재하지 않고 ‘누구에겐가 말하려는’ 의지를 갖기 때문에, 형상화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인하며 심리적 공감을 소망한다. 그러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가치로의 이입을 꿈꾼다. 유의미한 문학은 독자의 인생에 역시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독자는 예술미의 형태로서의 문학 감상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유추를 지닌 간접적이고 상상 가능한 경험을 얻음으로써 문학의 기능을 완성한다. 이 간접경험이 인생에 대한 성숙된 평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한 청소년의 문학 독서가 그의 인식의 틀을 형성하며 지적인 발달을 돕고, 개인의 정신세계는 사회의 정신세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시대사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인류의 정신사에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혁명적 전향에 문학의 힘이 절대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이상한 힘이 인류의 역사에 작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밥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밥만으로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만찬장에서 음식을 토해내는 도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계속 먹는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누군가 그렇게 밥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생을 산다고 해서 그에게 조화의 감정까지 지속적이지는 않다. 어떤 행복한 인간도, 어떤 조건에 있는 인간도, 완벽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E. 블로흐가 말했던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특질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을 느끼며, 여기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육체적 유형의 결핍보다는 정신적-영적 유형의 결핍에 예민한 것이 인간이다. 상대적 박탈감이 그 뚜렷한 증거이다. 이 결핍은 문학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힘으로 줄거리를 전개시키는 힘이다. 이 힘은 문학을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나 모사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잠재적 비판으로 존재하게 한다. 현실에 개입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매체로서, 나아가서는 현실에서 이탈하는 경험의 매체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문학은 현실에 등을 돌리는 경우에조차 여전히 현실과의 관계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등돌림은 강한 반발이며 부정으로서, 가장 강력한 현실비판 중의 하나로 작용할 수 있다. R. 무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문학은 “다른 상황”에 대한 꿈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존재이유도 존재할 공간도 없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렇게 썼다, 친구에게.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언감생심,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쓰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렷다. 누구에게나 허용된 시간도 유한하다.

 

 

등돌림의 문학 - 오늘 그 일을 시작하고프다, 글을 쓰는 것이 숙명이라면. 빛과 그림자가 어울림을 넘어 대결하면 그림자를 향할 일. ‘앞으로 나란히!’ 하고 외치는 경쟁문화가 살인적이라면 뒤돌아서서 살인에 동참하지 않을 일. 또는 강물의 물줄기가 인위적으로 왜곡되면 아무리 더워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을 일을.

 

................................................................................................

 

 

『컬처 프리즘』 2012 Vol.2,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52-55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