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3. 6. 16. 08:04

포이동 266번지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중에서

 

 

 

포이동 226번지 - 이 지번은 픽션이어야 한다. 포이동 226번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자면 거기 사람들의 허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달을 허비한 것이 잘 한일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나를 그리로 데려간 것은 아직 이른 나이에 요양병원에 들어있는 당숙모다. 아버지의 사촌동생, 젊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는 당숙의 부인, 그 당숙모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챙기신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 둘째 큰아버지는 벌써 옛날 결혼 전에 미국에 가서 안착하셨으니까 - 아버지가 집안의 연결고리가 되신 것 같았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 뒤에서 늘 분주하시다.

 

 

요양병원 로비는 정작 환자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화려한 셈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간단한 음식을 챙겨 오셨다.

(누구?)

나 금실엄마.

(금실엄마 누구?)

여기 우리 금실이. 나 금실엄마. 우린 동갑내기 한실이들!

한실이란 말이 당숙모를 움찔하게 한다.

한종남 씨 아내!

어머니가 길게 부르는 말에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머니는 아차 하는 작은 소리를 내시더니만 그냥 가져온 음식으로 시선을 돌리신다.

여기, 아지매 좋아하는 파전 있어요. 동래파전! 아이쿠 다 식어버렸네, 꼭꼭 싸 왔는데.

눈동자가 음식 쪽으로 옮겨가지를 않는다.

어머나,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올 걸 그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엄마, 정구지 지짐이라뇨?

아, 부추전을 거기선 그렇게 부르나봐. 하긴 네 숙모 말 듣다보면 웃겼다. 할머니는 얇은 솔전을, 외할머니는 두툼한 정구지 지짐을 만들어주더란 말이지.

잘 드시는 것도 있군요.

응, 조금. 네 고모는 수완이 좋으시잖냐. 헌데 지금은 무릎 땜에 많이 못 다니시더라, 칠순 때까진 펄펄 날더니. 해서 네 당숙모를 이쪽 병원으로 옮긴 것 아니냐. 고모한테 대면 내가 한참 젊지 뭐.

엄마가 뭘 젊다고 그러세요. 엄마도 좀 쉬엄쉬엄 하실 나이신데.

며느리도 없는 사람이 무슨 쉴 복? 하긴 요샌 며느린 소용없다더라. 난 딸이 셋이나 되니 좀 쉬엄쉬엄 살아 볼거나. 아차, 이를 어쩌나. 아지매! 이간호사님! 이선생!

어떻게 불러도 당숙모는 영 모른 체 하시고 만다.

음식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도와주니 조금 받아든다. 규칙적으로 벌리는 입이 아기 같다. 요양병원 생활에도 이력이 붙나 보다.

보세요, 너무 염려 마세요. 제가 먹이면 곧잘 드세요.

어떻게 요령이 좋으시네요, 다행스레.

안 먹으면 혼내준다고 그러시나요?

내가 엉뚱하게 끼어들었다.

예, 정말 그래요. 이걸 안 먹으면 뭘 안주겠다. 뭐 좋아하는 간식 같은 것. 그렇게 어르기도 하고. 차라리 아기 같은 분들이 우린 쉬워요. 말은 안 해도 크게 고집을 부리시지는 않으니까.

그럼 왕고집부리는 환자들도 있어요?

그럼요, 폭력도 있어요. 사정없이 손을 휘저어버리죠. 무작정이니까 얻어맞기도 해요. 지난달엔 신출내기 요양보호사가 울고 그만 두기도 했는걸요.

울어요?

꼭 아파서라기보다. 여기 일 작정하고 나서기 쉬운 건 아녀요. 여기가 처음인데 크게 충격이었나 봐요. 다음 직장에선 잘 하게 될 거예요. 누구나 첨엔 견디기 어려워요.

자, 어르신, 이묘순할머니, 이묘순아줌마, 한번만 더!

몇 입 먹이다가 지친 요양보호사는 소용없다 싶으니 입이 귀에 걸리는 미소를 순간 해보이고는 자리를 뜬다. 당숙모는 멍하니 멈추어 있다. 주섬주섬 그릇을 챙긴 어머니를 따라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네 숙모 몸은 멀쩡해 보이지 않더냐?

저를 잘 모르시던걸요. 실어증뿐 아니라 아무래도 눈도 좀. 아니 기억 자체가.

그럴 것이다. 어떻게 정신을 붙들어 매고 살아갈 것이냐, 식구 모두를 다 잃고. 그런데 어찌어찌 버티다가 하필 포이동에서 장롱에 목매단 사건 이후로 더 저리 되었다고,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 설레야.

장롱이라뇨?

신문도 안보고 사냐. 젊은이들은 인터넷에서 모르는 것 없이 다 뒤져 본다던데.

재작년엔가 포이동 화재사건이야 알죠, 그 다음 더욱 처량해진 사람들. 하긴 당숙모가 저리 되신 건 한참 전이죠? 포이동이면 당숙모 사시는 데도 아니잖아요.

그게 가까운 거리지. 걸어서 15분, 20분도 안 되는 거리야. 네 숙모 사는 데가 물론 포이동 재건마을하고야 같겠냐. 개포 시영은 재건축 기대로 한 때 잘 나갔었다더라. 그럼 또 뭐하겠어, 당사자가 저리 되었는데. 또 성한들 24평 그런 걸 받으려면 들어갈 돈이 얼마고……. 모르겠다. 아무렴 네 숙모 정신이 돌아오려나.

그런데 장롱 사건은 뭔데요?

그게 화재사건 한참 전 일이지, 저 사람 저리 멍해지기 시작한 것이. 그 이야기를 다 하자면 어디서부터 하랴? 아서라. 말죽거리 네 고모가 저 사람들 서울로 불러들일 때만해도 희망은 있었지. 아니, 우리가 볼 때는 어처구니 없더라만.

어머니는 섣불리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그러다 결국 털어놓으신 것은 고모를 통해서 알게 된 당숙모의 얄궂은 포이동 가슴앓이였다.

1979년 마산의 작은 병원의 간호원 이묘순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늦깎이 대학생 한종남과 미래를 설계하는 사이였다. 종남을 처음 만난 것은 전방으로 오빠 면회를 갔을 때, 간호고등을 졸업하고 간호원이 되어있을 때였다. 시를 좋아했지만 언감생심 대학은 꿈도 안 꾸었던 그가 제대 후에 대학에 진학한 것은 순전히 묘순 때문이었다.

한종남은 아버지의 사촌동생이었다지만, 아직 꼬마였던 우리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함흥에서 1.4후퇴를 피해 흥남부두를 떠나온 어머니가 거제도 피난민촌에 도착한 다음날 철 이르게 세상에 나왔다. 북에 남은 아버지 - 우리 아버지의 막내삼촌 - 생사를 모른 채 흥남이라 불리며 부산에서 자라고 있었다. 입학할 때가 되어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정문리 본가로 모자가 찾아온 뒤로 항렬자를 따라 종남이 되었지만 부산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살았다.

그는 많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부마사태의 와중에서 체포되었는데, 며칠 뒤 대통령 사망뉴스가 나갈 즈음 구토를 하며 의식을 잃다시피 병원으로 실려 갔다. 뇌와 관련하여 응급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불행했다. 그렇게 그의 생은 졸업은커녕 그 상태에서 정지해버렸다. 중환자실로 달려온 여자 친구는 - 그이가 당숙모다 - 놀랍게도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고, 그 길로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낳고 해서 4인 가족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한 두 해를 버티다가 치료에 대한 희망으로 서울로 왔다. 아빠는 아기가 재롱을 부리면 함께 친구하며 웃었다. 아기는 겨우 아장거리다가 넘어지다가 점점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지만, 아빠는 점점 움직이는 일을 못하게 되었다.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흔한 감기에도 입원을 반복했다. 생활은 기울고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다시 직장을 구했다. 간호원 자리는 점점 대졸로 채워졌고 지방의 간호고등 출신으로는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야간 담당만을 자원하면서 준 종합병원에 취직했다. 아기는 저녁마다 자장가를 불러주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랐다. 어머니도 아내도 온갖 힘을 쏟았지만 종남삼촌은 감기에서 폐렴으로, 폐렴에서 패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떠났다. 어머니는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어느 날 아이와 함께 시장엘 갔으려니 했다. 그날따라 아일 데리고 어른걸음으로도 10분도 넘는 양재천엘 왜 갔을까. 징검다리 부근에서 빠졌을 리는 없다. 거긴 사람들이 건너다니는 깊이이니까. 혹시 모른다, 먼저 아기를 놓치고 구하려다가……. 멀리서 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아기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다 했다. 할머니는 잠깐 아기를 잃었다가 뭔가를 소리치며 물속으로 정신없이 뛰어든 것 같았다고. 그렇게 할머니와 아기가 갔다. 혼자 남은 아기엄마는 - 우리 당숙모는 - 실신했다 깨어났다. 언제선가부터는 평상심을 찾는가 싶었다. 병원에도 다시 나갔다. 낮이면 양재천엘 자주 나갔다.

당숙모가 포이동 266번지와 연을 맺은 것은 일단 양재천변 코앞의 동네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심코 천변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곤 하다가 이상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두 세 시쯤이면 폐지 부스러기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시선이 박혀버린 때문이었다. 누굴까. 당숙모는 할아버지들의 얼굴과는 친숙치 않았다. 친가 외가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조차 일찍이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란 어떤 얼굴인가를 몰랐다. 그런데 등 위쪽이 마르고 아기처럼 수줍은 얼굴의 할아버지란 당숙모에겐 상상이 안가는 어떤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 할아버지는 꿈에선가 어디에선가 분명 만났던 사람이었다. 누굴까. 몇 번을 그렇게 스치던 어느 날 할아버지를 따라갔다. 그곳이 포이동 266번지였다. 개포 시영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그곳에, 사람살이인가 싶게 살아가는 동네. 아니 동네 느낌이 아니라 쓰레기하치장 같은 곳. 거기가 그 아기 같은 할아버지가 몸을 누이고 사는 데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도통 말이 없었다. 처음 쭈뼛거리는 인사에도 알아듣는 듯 마는 듯. 귀가 안 들릴까. 그렇게 기웃거리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뉘시우? 그 양반 무신 말 잘 안허걸랑.

아유, 죄송해요. 제가 아는 분인가 싶어서 따라왔는데, 언젠가 헤어진 누군가 싶기도 하고.

에고, 잘 되었우, 행여 아는 사람이믄. 이 양반 평생가야 사고무친에 자기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걸랑.

아니, 어떻게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게, 우리 아저씨가 하꼬방 살 때부텀 만난 사람인데 말이우.

하꼬방이요?

아, 그 청계천서 폐지 하다가 이리로들 왔다는 것 아니우. 난 여기 온 뒤로 만났다우.

그럼 아저씨께선 잘 아시겠네요?

알다마다요, 그 사람을 살렸다는데. 뭔 인연인지 여기꺼정 함께 왔으니.

아저씨는 해가 넘어가서야 판자촌으로 들고, 당숙모는 밤 근무를 해야 해서 주말에야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설명도 아리송하기만 했다.

한참 군사정권 때 일인데, 어느 새벽 청계천변 하꼬방 판자문 앞에 모로 누워서 새우잠을 자다가 발견된 사람이란다. 첨엔 자는 줄로 알았는데, 정신을 잘 못 차려서 일단 끄집다시피 하꼬방 안으로 들였다. 그런데 자기 이름도 아는지 모르는지, 도무지 말을 시켜도 못하고 알아듣는지 마는지 그런 사람이었다. 하꼬방에서 한데 살던 둘 중에서 나이든 사람이 삼십 중반의 김 씨였다. 이 노인네를 어쩌나 고민 중이었는데, 그렇게 며칠, 가만 앉은자리에서 폐지를 혼자 정리하고 그러더니 고물 책 하나를 보고 눈이 뒤집히더란다. 그걸 품고 자는 것이 신기해서 구경거리가 났나 싶었단다. 다음날엔 두 사람이 각각 일을 나서는데 엉거주춤 따라나서더란다. 다리 하나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성 싶었는데도. 결국 첨엔 뒷짐을 지고 따라다니더니 오후엔 뭔가 글자가 있는 것이면 슬며시 집어 올리더니, 그제서는 버린 책이며 휴지를 집어오는 일을 곧잘 하더란다. 어수룩한 사람 버리기도 뭣하고. 그러다 하꼬방 사람들이 한꺼번에 재건마을로 쫓겨 올 때 묻어왔는데, 이름이 난감했다. 순간 김 씨가 얼른 생각을 해낸 것이 이 노인이 처음 집어든 책에 적힌 이름이었다. 그것을 비슷하게 따서 김수용이라고 둘러댔다. 일가 아저씨인데 말을 잘 못한다고 하고. 나이도 대충 적어 넣었으니까 실제 나이는 모른다. 일단 서류들을 만들어 재건대원등록증을 나누어 받았으니까 유령에서 사람이 된 것. 어쩜 다행인 것이 호적 없는 사람들도 그땐 주민등록 취득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포이동 200-1번지. 정말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서인가는 이 동넬 완전히 유령 취급을 해서 아예 주민등록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 뭐 그런 정보였다.

김수용이래요, 유령이었다가 사람이 되었다네요. 참 그런 일들도. 그래도 유령처럼 되기 이전엔 분명 사람이었을 거 아녜요? 어디서 뭘 하다가 청계천 하꼬방 문간에 나타났을까요? 그 얼굴이 뭔가 낯이 익은 것이 어디설까, 알 수가 없어 고민 중이예요.

걸 뭘 고민하고말고. 거야 병원에서 그 많은 환자들 보며 살아온 세월 때문이겠지. 자네 살기도 힘 드는데…….

양재동 고모가 그렇게 말하면, 글쎄요, 난 포이동 거길 꼭 들여다봐야 숨이 쉬어지는 걸 어쩌죠, 하면서 웃곤 했단다. 이후로 고모가 당숙모의 입에서 듣는 말은 모두 그 재건마을 이야기뿐이었다.

포이동 266번지 - 장화 없인 살 수 없는 진흙탕 속. 어쨌거나 땅을 개간하고 얼기설기 판잣집을 지어 만든 마을이래요.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을꼬, 했어요. 망태할아버지들 말고도 일가친척이 없는 고아 출신도 느닷없이 이리로 팽개쳐졌다고도 해요. 어쨌거나 양재천 저쪽 사람들은 여길 양아치 소굴이라 한다네요. 무슨 특별단속기간 같은 때는 난데없이 절도범이라고 잡혀가는 사람도 있고. 그게 실적을 세우려는 형사들이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도 하고. 죄 있고 없고를 누가 그리 훤히 안대요? 그래도 이렇게 여자들도 들어왔고 아이들도 생겨난 것이 사람 사는 동네죠.

포이동아재 - 숙모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언제 다리를 다쳤을까요? 보아하니 상이군인은 아닌 것 같고, 뭐 총상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요.

포이동아젠 가족이 없었을까요? 도통 가족 이야기를 입 밖에 내질 않으니. 김 씨 아저씨네가 옆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 집 꼬마 애를 보면서 눈가가 축축해지는 걸 난 봤어요.

포이동아젠 나이도 알 수 없으니. 누런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는 걸 보면 환갑이나 되었을까? 책은 고물에서 골라낸 것들. 신문도 날짜 관계없이 샅샅이 보는 것이 뭘 찾는 사람인지…….

아, 포이동아재가 처음에 꼭 껴안다시피 내놓지 않고 읽었다는 책이 뭔 줄 아셔요? 눈 큰 김수영의 시집이에요, 아마 첫 시집이죠. 『달나라의 장난』. 작은 나무상자 위에 그 책이 있더라고요. 1950년대에 나온 데다 버려진 것이니 너덜너덜했지요. 원래 주황이었을 바닥 몇 센티미터 위로 펜 하나로 그린 고층과 저층의 상징적인 집들, 그 위로 한 가운데 둥글게 뜬 달. 글자들이 종이 속으로 녹아들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보다 온전했어요. 그보다 기가 막힐 일은요, 집엔 애 아빠가, 종남 씨가 남긴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가 있거든요. 함께 샀어요, 900원 주고. 양장본인데 표지 색깔이 독특해요. 처음 그걸 샀을 때 난 무심코 바다색이라고 했더니, 제목의 달을 보고서도 우주보다 바다가 먼저 생각나느냐고 나를 놀렸던 얼굴이 떠올랐어요. 우린 「복중」에 애를 배서 조용해진 계수 이야기에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나도 그럴까? 너무 조용한 것도 병이다, 너무 생각하는 것도 병이다…… 그런 구절들을 외었지요. 그 얼굴이 갑자기 포이동아재 얼굴에 겹쳐지는 거예요. 아이 같던 그 표정에 주름이 깊어지더니……. 아, 세상에 어떻게 똑같이 김수영의 시집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달 어쩌고. 세상엔 닮은 사람들이 더러 있겠지만, 어떻게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같은 취향을 나누죠? 형님도 그 아재 한번 보면 안 될까요? 얼굴만 좀…….

물론 고모가 포이동까지 가서 그 노인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사람이 우연도 있는 것이지 뭘 그러나. 봉산가 뭔가 이젠 좀 그만 하지, 자네도 요새 보면 얼굴이 부숭부숭하고 그러는걸.

고모가 그렇게 말리면 당숙모는 이젠 포이동 들르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말했다. 거기 종남 씨 얼굴이 겹쳤던 주름진 얼굴을 보러 가야만 한다고. 언제 어느 순간 옛날 생각이 나거나 입이 열리거나 그럴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게 실어증이라기보다는 함구증일지…….

그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때서. 병원에서 보는 환자들로 모자라는가. 이젠 자네도 뭔가 앞날 생각을…….

고모는 실어증인지 함구증인지 말을 거의 못하는 답답한 노인을 찾아다니는 당숙모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거긴 여름에도 방역 한번 안 나와요. 사람 사는 동네에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마을 생긴 것이 언젠데 아직 수돗물도 없어요. 어떻게 여기 한 동네만 빼놓고 공사를 해요? 사람들은 땅에 구멍을 파놓고 지하수를 길러다 먹죠. 물을 떠다 붓고 한나절이면 물이 퍼렇게 변해요. 숯을 놓거나 짚 같은 거나 베 쪼가리를 깔고 걸러보기도 하고. 몸도 불편한데 혼자 사는 포이동아재한텐 물이 젤 문젠거라요. 밭은기침도 가끔 하는데. 참 형님, 구룡사 물이 아주 좋다지요? 불공드리러 가서 안 드셔봤어요?

당숙모는 불심과는 상관없이 고모를 따라 약수라고 소문난 구룡토수를 길러 다녔다.

아, 그런데 재활근로대가 해산되었다는 것이 좋은 걸까요, 나쁜 걸까요? 포이동아젠 요즈음엔 마을 출입이 통째로 통제되니까 좀 쉬겠지요?

그건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이 동네 밖으로 출입이 통제될 때 한 말이라 했다. 실제로 나라 안팎이 88올림픽에 대한 기대로 들뜬 때였다. 서럽게도 이들 빈민들의 꼬락서니가 국가의 수치라며 마을 밖 출입을 통제했단다. 고모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당숙모는 더 자주 그를 찾을 밖에.

포이동아젠 큰일 났어라. 포이동 266번지가 개포4동으로 번지수가 바뀌면서 주민등록을 안 해준다는군요. 더 큰일 났어요. 자활근로대 해산이란 게 심상치 않은 거라네요. 원래는 우선으로, 그러니까 재건마을 사람들을 먼저 선착순으로 땅을 불하해준다는 조건이었는데. 그게 글쎄, 이미 살고 있는 땅을 새삼스레 돈을 주고 사가라는 것인데. 아무튼 법이 바뀌어서 266번지 사람들이 불법점유자가 되었다네요. 첨엔 하천 가에다 잡아넣다시피 억지로 데려다 놓고서 조용히 살면 땅을 준다고 했었다는데. 고달픈 삶에서 제 각각 나름대로 꿈같은 것을 품고 왔었을 것 아뇨. 고물상 김 씨 아저씨도 청계천 사과상자보단 나은 집을 가질 줄 알았다네요. 그러다 십년 살고 나니까 불법점유라고.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라지만, 그게 원래 서울시 도서관 부지였다는 것이 말이나 된가요. 십년만 더 살면 일 없을 텐데, 아니, 그리 될까봐 미리 수 쓰는 거래요. 나라가 국민한테 수를 쓰다니. 고르고 골라서 제일 비참한 국민한테.

진짜 큰일 났어요. 한번 불법점유자라 딱지를 붙이니깐 이젠 무단 점유 변상금을 내라고 세금이 날아들었대요. 각 집에 30만원도 넘는데 그게…….

당숙모의 근심은 해가 갈수록 누에고치에서 실 뽑듯 이어졌다고 한다.

포이동아젠 못 해내라. 옆집은 둘이 벌어도 다 못 한대요. 김 씨네 아줌만 청소일 다녀요, 벌써 언제부터. 근데 이자가 20퍼센트나 된다는데 그게 자꾸 불어나면 어쩌냐고요.

포이동아젠 분명 병이 있어라. 몸 움직이는 것이 더 근들근들한데 병원엘 가지 않으니 알 수 없지요. 내가 간호사라고 해도 들은 신청도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 알아들었다는 말인지, 내버려 두란 말인지. 오늘은 피붙이는 없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퀭한 눈을 한번 크게 뜨더니 눈을 딱 감아버리더라고요. 말은 안 해도 분명 알아는 듣는 거예요. 무안해서 혼났는데, 얼결에 잘 계시라는 소리도 못하고 나와 버렸어요. 내가 무슨 권리가 있어서 맘 아픈 걸 물어요…….

당숙모의 근심걱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포이동아재가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진즉에 그를 등졌으므로, 그는 쉽게도 떠났다. 옆집 김 씨 아저씨가 한 이틀 꼴을 보지 못해서 들여다보았다는데 숨소리 없이 천장을 보고 누어있더란다. 그제는 놀라서 뛰어 들어가니 오른 손 검지로 나무상자 하나를 가리키더니만 눈을 스르르 감았다고 한다. 몸을 일으키려하니 손가락을 가늘게 떨며 계속 상자를 가리키고. 해서 상자를 열었더니 거기 몇 소장품이라는 것 중에 처음 발견해서 가슴에 품고 읽었다는 시집과 낡은 회중시계가 하나 있었고.

장례랄 것도 없이 김 씨 아저씨하고 동네 몇 사람이 구룡산 언덕에 뿌려주면서 승천하라고 빌었다. 아홉 형제들 함께 승천을 못하고 남은 막내 용이 승천을 기다린다는 구룡산, 여기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살아서 못 오른 하늘에 죽어서는 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고도 바로 흩어져버리지 못하고 포이동아재의 빈 단칸방에 돌아와 앉은 몇몇 사람들. 임자 없는 세간들, 그것이라도 대충 필요한 사람이 써보자고 챙기는 실팍한 사람들. 실팍하지 않고서야 곤곤한 삶을 어찌 살아남겠는가. 작고 낡은 나무상자는 아무도 관심이 없이 그렇게 남아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상자를 고이 가져갈 사람은 우리 간호사 선생 밖에 누가 또 있겠냐고, 딸도 아니면서 그만큼 극진히 위했으면 당연히 뭐라도 간직하라고. 또 우리들 중 누가 책 같은 걸 보겠냐고 했다. 그렇게 동네 이웃도 아닌 당숙모에게 상자가 돌아왔단다. 『달나라의 장난』과 낡아서 서버린 회중시계가 들어있는.

이게 무슨 조화예요. 이 시집이 나한테 오다니. 또 이 회중시계는 뭘까요. 쇼와 18년 HDK - 이게 이름이면 김 씨는 맞나? 고 씨, 구 씨도 있지만 김 씨일 확률이 높고. 얼결에 붙인 이름이 성이라도 얼추 맞았네요. 참, 쇼와 18년이면 해방 전이잖아요, 사십 몇 년? 이게 포이동아재 것은 아니겠죠, 설마? 그때 벌써 이런 시계를 가진 사람이 누구였을까? 포이동아재 아버지였을까요? 젊어선 부잣집 도련님이었을까요? 아참, 성을 앞에다 썼으면 한 씨? 안 돼. 잠깐, 설마 종남 씨 아버님 항렬은 뭐죠? 규자 맞지요. 하긴 진자 규자라셨으니 그것도 아니고.

고모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다시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이북에 있을, 살았건 죽었건 북에 남았다는 진자 규자 삼촌을 떠올리다니. 아닌 건 확실하겠지만, 너무 그럴싸한 예감에. 하지만 어떻게든 가운데 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으셨단다.

세월은 또 흘렀다. 뭔가 들뜨게 하는 새천년이 되어도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은 더욱 풀이 죽었다. 당숙모의 말로는 원래대로라면 이제 자신의 집이라는 것을 가질 때가 되었는데 현실은 무단점유자로서 빚 방석에 주저 앉아버렸으니 말이다. 1998년에야 서초구와 강남구가 서로 밀던 수도공사가 완성되어 사람들이 순간 환성을 질렀다. 그 기쁨도 잠시, 이것이 내 집 수도가 아니라는 박탈감은 차라리 수도 없는 내 집을 원하게 했다. 마을은 여전히 결함투성이였다.

그 사이 김 씨도 젊지 않은 나이가 되고, 간호사인 당숙모의 지식으로서도 다 알 수 없는 병을 주저리주저리 달고 살았다. 심부전 등 치료가 불가능한 건 아니나 산소공급이 문제라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한 번에 몇 십만 원씩 하는 치료비 감당을 해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그가 덜컥 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의료보험이 세계적 수준이라고 자부하는 나라에서 무슨 일일까. 그들은 국민건강보험도 기초생활수급자 지정도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러냐고! 난 그런 걸 정말 모르고 있었다. 재작년 초여름 심각한 화재사건 보도를 보면서도 몰랐다. 어떻게 초등학교 아이의 불장난이…… 라고 애석해 하면서도 재건마을이 뭔지 몰랐다. 아버지가 70년대 80년대를 가족을 돌보면서 묵묵히 맡은 일만 하시면서 살아온 것을 후회스럽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보다도 더 많은 공부를 하고서도 이렇게 세상을 외면하고 살아왔다, 불발인 내 처지만 통곡하면서. 주민등록이 되지 않은 이 사람들에게 인권이란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구나. 그걸 까맣게 몰랐다. 자유와 평등과 박해의 상징인 파리 복판에 가서 박사학위를 했으면 뭣 하는가.

포이동 이야기는 장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청소일로 병마 속 남편을 돌보던 김 씨의 아내가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되어 따라서 목숨을 끊고 말았다는 것이다. 무슨 그런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가 말이다. 장롱에 목을 맨 참극은 로맨틱 러브스토리로 먼저 간 짝을 따라 죽는 환상이 아니다. 2,3십 년 전 아웅산테러사건 뒤에 극도의 우울증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고관의 아내와도 전혀 다른 결정이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렇게 끼적거린 메모를 남겨 놓고 죽어버린 참담함. 의식주 - 문자 그대로 의식주 해결을 못해서 죽어야 했던 삶. 하필 그들의 아들은 명예와 충성심과 용기로 무장하고 무엇보다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군복무 중이었다니.

이 아들은 실제로 군대에 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는 어머니가 직장이 있다는 이유로, 겨우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다고 한다. 막상 어머니마저 죽었을 때에는 이제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역시 의가사 제대가 안 되었고. 병마와 가난 속의 부모를 지킬 수 없는 젊은이들이 필승의 신념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이 군인에게는 15년째 밀린 토지 변상금 4,5천에 자동차세 천여만 원 등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이 굴러왔다.

뭐 자동차세라고? 그럼 그 동네에도 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네.

그렇지만 차가 다 차인가. 고물 일을 하느라 고물 차 하나를 얻었는데, 명의를 이전하자마자 압류를 당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법을 모르는 그들. 설상가상. 명의만 있지 압류당해서 탈 수도 고물을 실어 나를 수도 없는 차는 그들의 저승사자였다.

하필 장롱에서, 키가 작다고 어떻게 장롱에서.

그 아줌마,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아주머니가 발견된 다음날 당숙모는 혼 빠진 사람 같았다고 한다. 사실 포이동 백 가구 가까운 사람들은 끈끈한 정이 양재천 북쪽 강남과는 사뭇 다르다 했다. 둘, 셋 모이면 비교요 갈등이 인간의 속성이라지만, 워낙 가난의 평준화 속에 가라앉으면 키 재기할 기운이 나지 않는 법인지. 설마 싶으면 전쟁 직후 우리나라를 회고하는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안다.

아들이 너무 보고 싶다고 하더니만.

그것이 숙모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더란다. 그리고는 말을 접었다. 어떻게 실어증이 걸리는가. 가족의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너덜너덜한, 눈 큰 시인의 닮은 꼴 시집 두 권을 가슴에 품고, 호주머니에 쇼와 18년의 회중시계를 감추고 방안에 들어 앉아버린 여자를.

얼음장 같은 냉기에 놀란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족보를 뒤져본다. 우리할아버지 상자 규자, 그 아래 덕자 규자, 진자 규자 할아버지들. DK라면 덕자 규자의 이니셜일 순 있지만 그 분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학도병에 끌려가셨다 했다. 또 확실히 돌아가셨다, 해방에서 동란 사이에. 아니다, 혹여 일본 유학생 인텔리 작은할아버지의 시계를 막내할아버지가 지니고 있었을 확률은? 해방과 동란 사이 두 할아버지들은 뜻이 맞아 늘 함께 했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니다, 절대로 아닐 것이다. 모래알 같은 사람들. 아들을 한 번도 못 만난 채 신산한 삶을 이어가면서 생면부지의 며느리를 마주치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당숙모의 혼돈은 분명 포이동 266번지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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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3.30. 단편 「포이동 266번지」,『광주문학』 2013 봄호(통권 66호), 197-21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6. 16. 07:59

초혼장

 

겨울이었다. 몹시 추운 겨울.

강의보다 몇 배 어렵고 성가신 성적처리가 끝나자 슬그머니 집이 그리웠다. 어머니의 따뜻한 밥상이 그리웠다. 서둘러 기차를 탔다.

엄마, 어머니이!

그래, 다 저녁에 오는구나, 날이 춥구나!

어머니는 이번에도 부엌에서 나오셨다.

뭐 하세요, 또 부엌이세요?

아, 너도 오고.

얼굴에 웃음이 핀다.

뭐 좋은 일 많으세요?

좋은 일은. 하긴 좋은 일이지. 김실이가 숨 줌 돌렸지 않냐. 김 서방이 제 자릴 찾아가는 중이니까. 지금 다시 출근한지 며칠 안 되었다.

엄마, 이제 좀 김실이라 그만 하세요. 외가에서나 엄마한테 한실이 그러지, 누가 요즈음 그렇게 불러요? 엄마니까 은실이라 이름 부르든지 애 따라 승연엄마 하든지. 김실이 때문에 금실, 한금실, 내 이름이 사라지잖아요.

아버지가 그렇게 부르시잖냐. 괜스레 이름 가지고.

그런데 아버진 안 계세요? 또 정문리에 가셨어요?

아니, 이 추운데. 방에 계시는데 너 오는 것도 모르시네, 어째.

아버지는 살짝 잠이 드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와 내가 방문을 열자 부스스 눈을 부비며 일어나 앉으신다.

한박사, 왔구나아. 방이 따뜻해지면서 졸음이 왔나 보다.

말씀마다 또 그 한박사다.

아버지 저 왔어요, 금실이. 더 주무실 걸 그랬네요. 요새 어디 편찮으세요? 엄마 말씀은…….

아니다, 내가 궁리가 많아서 요새 잠을 좀 설쳤드니라.

그러게, 느 아부지가 요샌 개포동 종수씨 땜에 저러신다. 그 집 일이라면 지난 윤삼월에 끝났나 했었지만 여태도…….

소생이 없질 않소. 그러니.

그렇다고 꼭 그렇게 당신이, 당신 혼자서.

아무도 없질 않소.

지난 윤삼월에도…….

그건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었소. 그것이 선친의 뜻이라고 헤아리자고…….

알았어요. 하지만 또 종수씨 일이 마냥.

그게 난들……. 애한테 무슨. 거 너무 긴 긴 이야기가 되놓으니 여기서 그만 둡시다.

평상시와 다르게 불평조의 말을 털어내던 어머니는 거기서 멈추셨다.

곧 있어 이모, 이모~ 하면서 승연이 승주가 들어왔다. 은실도 함께다. 아이들은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종이연필 한 자루 씩에 입이 귀에 걸린다.

이모, 이모~, 이게 종이라고요, 엉?

그래, 나무가 아니고 폐휴지를 재생 한 것이지.

신기하다, 승주야, 그치?

누나, 이게 안 부러질까?

야, 조심 해야지. 걱정되면 나 줘! 난 이 초록이 너무 예쁘다.

아이들 수다로 떠들썩해지자 대번에 집안에 온기가 퍼졌다. 아이들이 온기다. 엄마가 된 은실의 공이다. 둘러앉아서 먹는 저녁밥은 밥맛도 사는 맛도 넘쳐나게 한다.

아직 차가운 방바닥에 요를 펴놓고 책상에 앉아본다. 내가 썼던 이 방은 지금은 누구나의 공부방처럼 쓰인다. 아직 한 쪽으로는 내 책들이 남아있다. 저녁 늦은 시간에 아버지가 건너오셨다.

예, 아버지. 어머닌 일찍 주무시나요?

그래 요사인 좀 일찍 주무신다. 해서 내가 보통…….

아, 책 보시다 주무시고 그러시는군요.

아니 뭐, 오늘은 너라도 알아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 뭐를요?

아, 네 어머니가 좀 성가시게 여기는 그 일 말이다.

아, 정문리…….

그러게. 그게 묘를 썼다고 끝나는 건 아니지 않냐.

묘를 쓰셨다고요? 누구를?

그게…….

아버진 말을 꺼내시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고 계셨다. 그러면 나는 늘 저런 이야기는 아들이 있어 나누고 싶으셨을 종류라는 인상을 받는다. 관습적으로 부자 사이에나 나눌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잘 모른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냥 계셨다. 그러다 결국 작정하고 입을 떼셨다.

윤삼월에 새로 묘를 쓴 분은 내 막내삼촌이셨다. 내가 새삼스레 이야기를 해두려는 것은 언제라도 한번은 너도 정문리엔 가 볼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언제라도 한번은.

아차. 정문리 이야기라면 두말없이 청주 한 씨 우리 집 내력이다. 우리 아버지는 장손의 막내시다. 1910년에 태어나신 할아버지가 장손이셨고, 그 아래로 작은할아버지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삼촌들이다. 진사를 한 증조할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식 교육을 거부하셨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농사꾼이셨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는 조실부모하고 일찍 가장이 되시자 동생들에게 신학문의 길을 적극 열어주셨단다. 그런 동생들이 블랙홀로 빨려들듯이 가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여기까지는 몇 번이고 들어서 알고 있는 내력이다. 어느 집안인들 일제와 동란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만은.

쇼와 18년, 오늘 아버지의 이야기는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다. 알아듣기 어려운 시절로.

그러니까 1943년 본격적으로 징병이 난무할 때 나는 아직 잉태도 되지 않았지. 선친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는 동생 하나를 징병으로 보내야했다더구나. 학도병으로 끌려간 삼촌 이야기는 처음부터 너무도 슬펐단다. 그렇게나 가슴 아픈 것은 하필이면 당신 딸이 당신 동생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부분이야. 일제가 고향 경찰서에서 ‘아버님 위독’이라는 전보를 도쿄 등지로 보내서 유학생을 귀국을 하게 해놓고서는 부산에서 배에 내리자마자 온갖 회유와 강요로 지원서에 도장을 찍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너흰 설마 하겠지. 그뿐이냐. 순진한 소학교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일본 유학 중에 고향으로 숨어든 대학생들을 색출했단다. 아홉 살 난 여자애가 스무 두 살 제 삼촌을 일러바치는 일은 누어서 식은 죽 먹기였겠지.

내겐 누이가 둘 있었는데, 큰 누이가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그런 초여름 날, 학교에서 예쁜 일본 선생님이 최면을 걸었더란다.

일본에 유학 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 형이나 오빠가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 보세요!

누이는 번쩍 손을 들고 말했겠지, 우리 집엔 오빠 말고 삼촌이 왔는데요!

일본은 천진한 아이들도 이용했어. 그렇게 해서 큰삼촌은 일본군이 되었던 거야. 그렇게 해서 병을 얻었고 그리고…….

그래, 또 내 막내삼촌은 이번엔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인민위원회에 붙들려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되었다가 북으로 패주하던 중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돌아오다가 행방불명되었다고 그랬다. 실은 큰삼촌이 학도병으로 편입되었을 때 막내삼촌은 농고를 졸업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만주로 보내셨다고 들었지. 종전 후 두 삼촌들이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학도병 때 쇄약해진 몸으로 큰삼촌은 회생을 못했더란다. 난 너무 어려서 그렇게 들은 데로만 믿었었다. 그러다 나중에 알게 된 비밀은 무섭고도 슬펐다.

선친이,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배운 것 없는 농부의 자격으로 신간회 활동에 참여했었다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구나. 아버지는 당신보다 열 살 이상 어린 삼촌들의 교육에 적극적이셨다고 했는데. 그게, 네 증조할아버지께서 하필 국치의 해에 태어난 할아버지에게 땅만 파고 살라고, 일제의 교육 일체를 거부하신 것과는 대조적이었단다. 아마 당신이 못 배운 것을 후회하셨을지. 어떻든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이상재 선생의 노선을 신봉했고, 신석우 선생의 문자보급운동을 숭앙했으니. 뭐 그건 그렇고.

해방에서 6.25전쟁까지는 어느 가정이나 상당부분이 덮인 채로 기억되곤 하지 않더냐. 우리 집에서도 아깝게도 삼촌 둘이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다만 병사요 납북이라는 통상적인 설명으로 어렴풋이 기억될 뿐이었다. 추억은 아름다워라 - 그런 셈이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아픈 과거를 잊으려 하니까.

해방된 대한제국에서 - 맞는지 모르겠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었다가 해방되었으면 대한제국이 맞겠지? 아니다, 대한민국 임정이 성년이 될 나이를 먹었으니, 이미 대한민국의 땅이었나? 그 사이시간에 삼촌 둘은 매우 적극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거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그것이 비밀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나중에 알게 된 내막은, 그래 무섭고도 슬펐다. 막 일제가 떠난 땅에서 내가 태어났지만, 흩어진 가족들이 다 모이기는 어려웠더란다. 종전이 되고도 한참을 기다렸을 때야 돌아온 큰삼촌은 병을 얻어왔다고 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진출했었으니까 기후인들 견딜 수 있었을까. 병중에도 큰삼촌은 막내삼촌과 더불어 청년답게 새나라 건설에 열정적인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지. 해방되던 해 스물두 살이 된 막내삼촌은 몸도 마음도 건강했고, 징용 갔다 온 형이 또 감옥을 드나들 때도 형을 우상처럼 존경했을 수밖에. 그러다 그 형은, 그러니까 학도병삼촌은 그만 더욱 쇠약해진 몸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대. 겨우 아장아장 걸었을까 말까했던 내게는 물론 손톱만큼의 기억에도 없지만.

그리고 막내삼촌 말이다, 같은 말 또 한다만, 남북이 여전히 대치 상태인 나라에서 남북과 관련된 꼭지는 공개된 비밀 아니더냐. 물론 이제는 그나마 좀 비극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러니까 막내삼촌은 납북당한 것이 아니었단다. 민전 활동 중에 뜻하는 바 있어 벌써 1948년도 봄에 월북하는 인사들을 따라가신 거래. 민전이 뭔 줄 네가 알 리가 있겠냐. 나도 한참 나중에야 알았는걸.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고, 미군정 시기에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계열의 연합단체 이름이 그랬단다. 암튼 해방되던 그해 연말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나오자 우리 한민족이 좌우 이념으로 갈라서는 사단을 겪게 된 것 아니냐. 바로 반탁과 찬탁이 갈등의 시작이었지. 김구 선생 중심의 비상국민회의는 반탁운동을, 그에 맞서 조선공산당이 주도했던 민전이 찬탁론을 편 것이지. 아무튼 오늘 이념논쟁 이야기가 아니고…….

- 1차 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렸지.

- 우리나라하고는 무슨 상관?

- 그 무렵에 파리회담에 참가하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려 노력한 인물들이 있었지. 역사를 봐, 당연히 좌절하였지. 하지만 거기서 바로 이듬해 3.1 만세운동을 기획하게 된 것이야.

- 누가?

- 김규식 선생도 모르냐. 지금은 여운형 선생이랑 좌우합작운동을 준비하시지.

이런 대화들, 아버지는 두 삼촌들의 대화를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둘이가 민전과 관련해 활동하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 동생들이 만일을 위해 큰형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 했지만, 만일, 만일……. 만일 형제가 모두 위험에 빠질 수는 없다는 논리를 무언중에 나누고 있었겠지. 아버지는 동생들의 일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는데, 그러다가 덜컥 큰삼촌이 떠나버린 것이야. 폐병이 사인이었다고 하더라도 옥고의 후유증인 것을 다 알았다더라. 그러나 그것은 사실 약과였던 셈. 생사의 갈림길은 어쩌면 인사가 아닐지도 모르잖느냐. 그런데 막내삼촌은? 막내삼촌의 운명은 외려 사람의 책임이라고 해야지. 큰삼촌과 세 살 터울이었는데, 형을 따라서 여운형 씨를 가장 존경했다고 그러더라. 그게 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여름 여운형 씨도 사망하고 나서 막내삼촌은 충격과 회의 속에서 방황도 했던 모양이더라.

아버진 어려서 도통 모르셨겠죠?

그렇지. 내가 중학생이 된 다음에야 아버지한테, 네 할아버지께, 듣게 되었지. 할아버지는 동생들을 다 잃고서 넋이 나가셨을 거야. 그때가 막내삼촌의 아들이라고, 내게는 유일한 사촌동생이 집에 왔다 간 즈음에야 말씀을 하셨어. 그때도 난 잘 이해를 하면서 들었던 것은 아니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것도 한참 지나서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알아본 것이지.

아무튼 그 시절, 삼촌은 좌우합작운동이란 그 말만으로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고 아버지에게, 네 할아버지께 말했더래. 김규식 선생이 이어 민족의 자주노선을 표방하는 의미의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니까, 47년인가, 겨울이었대. 강령은 독점자본주의도 아닌 무산계급독재사회도 아닌 제3의 길을 선택했었고.

제3의 길이요? 한반도에서? 같이 분단의 운명을 겪은 독일 땅 젊은 지식인들의 노선과 같았네요. 민주주의를 사회화 하는 길, 사회주의를 민주화 하는 길 - 제3의 길. 그것이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독일도 한반도도 분단국의 운명 속으로 끌려들었던 것이군요.

그래, 너도 공부를 했으니 그만큼은 알겠지. 1948년은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더욱 불안한 형국이었단다.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선거가 실시되어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는 생각으로,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고 해야 할지. 결국 그 결과가 우리나라니 그걸 부정해선 안 되겠지만. 2월 초에는 밀양에서 농민들이 아침 일찍 지서를 습격하는 일이 벌어져서 경찰이 발포까지 했고, 물론들 다쳤겠지,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었대. 한 보름간에 이곳저곳에서 200만 명은 참가했을 정도라니. 그때 무슨 일을 해서 그랬는지, 아무튼 막내삼촌은 그 사건이후 북으로 옮겨간 셈이지. 그해 4월에 열렸던 남북협상에 김규식 선생의 일행을 따라 간 것이 삼촌의 마지막이 되어버렸다.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정당·사회단체가 적극적인 참여를 천명했고 평양에서 연석회의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이래. 하지만 늘 깃발에 쓰인 문구와 실상은 다르기 마련.

4월 말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다지만, 협상의 결과는 실천과는 거리가 먼 길이었겠지. 공동성명서라는 것이 조항마다 이견이 없었겠느냐고. 김규식 선생은 김구, 김일성, 또 누구더라, 암튼 4김회담까진 참석했어도 이후 연석회의에 불참했던 모양이야.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논의되지 못하였으며, 북은 백범과 우사가 남한으로 귀환하자마자 약속했던 전기와 농업용수도 다 끊어버렸다는데 뭘.

그럼 막내할아버지는 왜 돌아오지 않으신 거죠?

말 말아라. 그것은 정말 두고두고 의문이었다. 삼촌이 그토록 존경하던 김규식 선생은 분명코 반공적이었는데, 삼촌은 왜 함께 돌아오지 않았을까? 그 시기 일은 종내 의문 투성이었다. 반공주의자 김구 선생은 왜 반공주의 남한에서 암살당했을까? 어쨌거나 남북협상에 참여한 탓으로 빨갱이라 의심되던 김규식 선생은 왜 북으로 끌려갔다가 사망했을까? 난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뭘 알 수가 없었다! 암튼 이듬해 6월인가 평양에서 무슨 회의가 열릴 때부터 민전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간단히 조국전선으로 통합되었다는데, 그때까지는 삼촌에게서 소식이 있었단다. 그러나 곧 함흥으로 갔던 모양이라. 함흥은 벌써 해방 이듬해 초봄에 반공학생의거가 일어난 이후 불안한 곳이었는데.

함흥에서 반공의거요?

그렇다니까. 조직된 인민위원회가 함남중학교를 인민위원회 청사로 차지하자 학생들이 학교를 빼앗기려 했겠느냐. 5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시위를 하자 시민들이 합세해서 만 명도 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보안서원들이, 아니 소련군까지 동원되었다던가, 아무튼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사건 말이다. 사상자가 생겼다는 소문도 있었고. 남북이 다 같았어야. 삼촌이 그런 사건이 터졌던 곳에를 왜 갔을까. 세세한 이야기들은 결국 아무도 모르게 되었지. 함흥까지 간 사실도 전쟁으로 완전히 두절될 뻔했지. 난리는 각각 집안에서도 난리였던 거야, 생이별이 어디 한 두 집이었냐 말이다. 삼촌 소식은 1.4후퇴 전에 피난 내려온 만삭의 아내가 전해준 것이지, 단편적으로. 한참이 지나서야.

거기서 결혼을요?

그래 뭐. 결혼 소식은 몰랐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아무튼 만삭의 아내, 삼촌이 동지이자 아내로 맞았던 여자의 피난길은 유행가에도 나오는 처절한 흥남부두를 그대로 상상하면 된다. 삼촌이 함께 배에 오르지 못한 것인지 안탄 것인지는 이제와 누가 알랴.

아버지는 맥없이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흥남이, 너희가 어렴풋이 부산삼촌으로 들어 알고 있는 분이 그때 그 역사적인 흥남부두 철수작전에서 태어난 아기였다. 막내삼촌이 아이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헤어져버려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태어난 내 종제 말이다.

흥남은 너희 세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명이겠지만, 6.25 세대에겐 9.28 서울 수복 이후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한미연합군이 혼비백산 패주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대표하는 곳이지. 그 당시 중공군 - 그땐 그렇게 불렀어, 요즈음 말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보낸 조선전쟁인민지원군이라 해야겠지 - 40만 명 가까이가 참전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평양-원산 라인은 저들의 손에 넘어갔지. 인해전술에 맥아더라고 철수명령을 안 내릴 재간 있었겠냐.

인해전술을요?

엄청난 병력 투입을 그땐 그렇게 불렀단다. 집중적으로 투입한 전투원의 희생을 상관 않고 계속 공격하여 수적인 압도로 돌파구를 만들고 방어부대나 방어지역을 고립시켜 궤멸하는 작전 말이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수반했겠지만 일시적으론 승리를 거두었지. 퇴로가 막힌 한국군 제1군단과 미국군 제10군단 병력만 해도 10만 명에, 차량에, 보급물자 전부를 흥남항구로 철수시켜야 했으니. 거기에 몰려든 또 10만 명 피난민들을 어쩐다더냐. 그런 건 영화에서도 드물 것이다.

그때 인구로 10만이나요?

그래, 그때 인구로 피난민만 10만. 미10군단장이었다지, 그가 헬기에서 흥남부두를 시찰하다가 살인적인 추위 속에 더러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피난민들을 보고 사람들을 데리고 가리라고 결정을 했더란다. 그런 점은 서양 사람들에게 머리 숙여지는 부분이지. 결정이 내려지자 군함이고 상선이고 차출된 배가 200 척인가 뭐 엄청 동원되었단다. 그 마지막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인 거라. 그 배의 선장이 이미 실었던 모든 무기며 보급품들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은 12월 21일. 아무튼 군인과 민간인 등 무려 14,000명이 승선한 이 배가 소리 없이 마지막으로 흥남 항을 빠져나온 것은 이틀 뒤. 이 기록적인 숫자는 나중에 기네스북에 올랐지. 그렇다고 이 배가 타이타닉 수준이냐! 어림없지, 겨우 60명 정원인데, 벌써 선원들이 40여 명 승선해 있었다니까 탈 수 있는 인원은 열댓 명 수준이었나 봐. 선장이 나중에 회상하는 이야기는 처절하다 못해 공포 그 자체야.

선장이요, 직접?

그래, 선장이 쌍안경으로 본 비참한 광경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드는 피난민들 옆에 닭과 겁에 질린 아이들이었단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떻게 그 작은 배가 그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어떻게 단 한사람도 잃지 않고 끝없는 위험들을 안고 갈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이 배의 조타장치를 잡고 계시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를 느꼈다고 했대. 그거 다 어디 기록에 남아 있어. 암튼 그 모든 것이 독실한 가톨릭 신앙의 힘이었는지, 그는 50년대에 바로 바다를 영영 떠나서 수사가 되었단다. 뉴저지의 베네딕트회 무슨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냈더라고. 선장 라루가 아닌 마리너스라는 이름의 수사로서 십여 년 전 87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아버진 어떻게 그렇게 나중 일까지 소상히…….

그게, 그 양반이 한국과 인연이 깊게 닿아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그 수도원이란 곳이 경북 왜관의 베네딕트 수도회와도 연결이 되었다던가 뭐, 그렇더라. 또 그뿐이냐. 그 배에서 항해사였다던가, 스물두 살 항해사의 회고는 가슴이 찢어지지. 캔 속의 정어리들처럼 쑤셔 박혀서 거의 모두가 서서 어깨를 부딪치며 서서, 그런대도 단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이. 음식도 물도 거의 없이 사실상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아무리 극기심이 많은 한국인들이라 해도 어떻게 꿈쩍 않고 서있을 수 있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단다. 그는, 이름은 생각이 안 나네, 암튼 이 피난민선을 기네스북에 등재하는 데 일조를 했더래.

그래요. 2000년 대 기네스북 기록 등재 직후에 철수 당시의 진정한 영웅은 선원이라기보다 죽음의 극한 공포 속에서 굳건한 용기와 신념을 보여준 피난민이었다고 그 비슷한 말을 했던 것 본 기억이 나네요.

그뿐이냐, 항구에서 피난민들의 승선을 사수하던 미군은 몇 명 전사한 반면 배에서는 사상자는커녕 새 생명이 다섯이나 태어났다는 믿기지 않는 기록도 있단다. 사실 안 그러느냐, 내 사촌도 게서 태어날 뻔 했으니. 아슬아슬하지. 헌데 정작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는 피난민을 내리지도 못하게 했단다, 피난민이 하도 넘쳐서. 그렇게 해서 거제도 장승포항에 내린 이들 피난민들의 자취는 지금은 박물관처럼 되어 있다던 걸.

- 서른 시간도 넘었어요. 살을 에는 바람이 무서웠어요.

- 아기가 잘 버텨주었지만, 그 전에 죽을 것 같았어요.

- 외투 주머니 속에 붉은 지폐가 남아 있었어요. 여기서는 쓸 수 없는 돈.

- 가마니로 비바람을 겨우 막을까말까, 수용소 거적에 눕자마자 아기가 태어났지요. 아비 생사도 모른 채. 나이든 여자들이 도왔죠, 그저 앞날이 캄캄했어요. 어미의 한숨과 눈물로 맞은 아기라니.

아버지의 말씀 사이로 바람이 말하고 바람이 실어다준 속삭임들이 들려오는 듯 했다. 수용소 첫날 아기를 낳은 1927년생 함흥 여자. 애 아버지는 만삭의 아내를 배에 태우고는 그만이었다. 누군가는 양보해야할 흥남부두에서 건장한 애 아버지는 부두에 서서 아내와 작별했다,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가겠노라고. 그 아버지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도록 부산바닥에 나타나지 않았다.

1950년 12월 25일생 흥남이. 흥남에서 온 흥남이. 아기의 이름을 그저 흥남이라 부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서 태어난 아이 다섯 모두 흥남이가 아닌가. 흥남은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호적을 만들어야 했고, 엄마와 아들이 정문리에 나타났다. 그때서야 우리는 막내삼촌이 북에 남은 것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난 사촌이 있는 것을 알았단다. 사촌은 일단 가계를 찾았으니 더 이상 흥남이가 아니었지. 족보의 이름을 따라 한종남으로 불리게 되었으니까, 나에게는 유일한 사촌동생 종남이. 부산에서 피난살이 살림을 혼자 꾸리던 어머니랑 그렇게 단 둘이 부산사람이 되었지. 숙모는 함흥에서는 여고를 다닌 신식 여자였지만 따로 여자가 할 일은 없어서 수선 바느질을 업으로 살아내셨다고 해. 아들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들려주려고 사고무친의 부산을 떠날 수 없었을 그 심정을 누가 알랴. 흥남부두에서 탄 배가 부산으로 향했으니까, 어떻게든 부산으로 찾아올 것이라 믿고. 배가 끊겼으니 육로라도. 차가 없으면 걸어서라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근 삼십년을 흘러가고 있었다.

 

1979년 한종남은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4학년 재학 중이었다. 서른 살이 되어서야 졸업반인 이유는 애초에 초등학교 입학부터 늦어진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아예 대학 진학을 포기했었던 때문이었다. 대학은 종남에게는 사치였다면 사치였으니.

종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좀 늦게 1972년. 처음 초등학교 입학부터 호적 때문에 늦어졌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그만 부산상고로 진학하겠다고 원서를 고집하는 와중에 일 년을 놓쳤단다. 어머니의 힘든 일이 늘 맘에 걸렸던 그는 그 일 년을 놀면서 제법 돈을 벌었대. 깡통시장에서 - 지금은 부평시장이라 부르는 재래시장이지 - 게서 심부름하는 마술 같은 일을. 그러니까 어머니 수선 집에 미군부대에서 빼돌린 군복 같은 것들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서 깡통시장에 낼 물건들을 받아다가 대주는 일. C-레이션 박스를 지붕으로 한 가리개 판잣집에서 시작된 미제물건이 구호물자에서 거래물자로 탈바꿈되는 세상이었지. 물론 어머니 몰래. 꼬리가 길면 들키는 것은 사필귀정, 그런 일을 들킨 뒤 종남은 손을 털고 고등학교에 잘 입학했으나 이번에는 문학에 빠졌더래. 공부보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는 일에 열중했고, 수업시간에 그런 책들을 읽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 것은 다반사였다더라고.

집안에 난데없는 문학 지망생이라? 내 큰삼촌은 선린상고 시절 김수영의 동기생으로, 김수영이 오스카 와일드의 영문을 줄줄 외며 두각을 나타냈을 때나 이어 도쿄상대에 진학했을 때에도 동기였다더라고. 하지만 김수영이 학병 징집을 피할 수 있었을 때 삼촌은 끌려갔고, 김수영이 예술부락에 「묘정의 노래」를 발표하며 등단할 무렵 삼촌은 이미 병사하고 말았지. 그렇다고 막내삼촌이 문학적인 자질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안 해보았지만, 종남은 그런 기질이 돋보였다고 했다.

그 예민함으로 오히려 대학을 포기했겠지. 어차피 연좌제 비슷한 일로 종남이 공무원이나 법조인이 될 길은 요원했을 것이니. 살았건 죽었건 - 그 당시에는 살아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 아비를 북에 둔 사람이라. 뿐만 아니라 대학은 그에게는 돈 지출과 같은 단어였으니까. 그 시절 우리 모두 그랬지. 나도 겨우 2년제 교육대학엘 진학하지 않았더냐. 종남인 어머니의 성화를 피해 달아난 곳이 군대였더래. 그런데 군대를 마치고 온 그가 변했다더군. 사람은 떳떳한 직업을 가져야 하리라고. 젊은이의 변화의 원인은 더러는 여자야. 군부대에 면회 온 선임병의 여동생 - 그 여자를 위해서 반듯한 직업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시인이 되는 길은 막연했으니 국어선생님이 되리라 - 그렇게 해서 국어교육과 진학을 목표로 뒤늦은 대학입시 준비를 했고, 경남대학에. 마산에 애착이 간 건 여자가 마산에서 작은 병원의 간호원이었나봐.

개포동 당숙모가 그럼…….

그래, 그 양반이다. 고향은 섬진강 어디라던데, 순천간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외가 쪽 마산으로 취업을 했었나 봐. 그땐 간호고등만 졸업해도 충분히 간호원 노릇을 했었지. 아차, 지금 말로는 간호사라지. 그것 보다, 그해 1979년 여름을 아비규환의 태풍 쥬디로 마감하며 마산의 인심은 흉흉했더래. 마산-진해 간 도로도 유실되고 사람 몇 천에 차량 몇 백 대가 혼란 속에서 마비되었고, 마진터널에서는 산사태 위험으로 사람들을 철수시키던 해군장병들이 그대로 매몰되는 사고까지 났더란다. 암튼 그해 여름엔 전국적으로 백 명이 넘는 인명 피해가 났던 것 같아. 뭐 가물가물 하지만.

그런데 가을이 되면서 야당의 유력 정치인이 국회위원에서 제명되는 사태가 벌어진 거야. 유신정권은 데드엔드를 향해서 내리막을 달리고 있었지. 택시기사가 택시에서 대통령 욕을 한 승객을 신고하면 그 포상으로 그렇게 어려운 개인택시를 받는다는 루머까지 떠도는 지경이었어. 그 정도면 공포정치나 뭐가 달랐냐. 유신반대데모는 사필귀정이었지.

공포정치요?

그럼 뭐라 말하랴? 실체도 없는 재건윈가 뭔가로 엮은 사람들을 사형판결 해놓고, 판결 열여덟 시간 만에 처형하는 정치를 공포정치 아니고 뭐라 해? 그렇게 몇 년을 엎드려서 지냈으니 폭발할 만도 했지.

그건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죠, 아닌가?

너희 중 둘은 태어났었지, 넌 다섯 살 쯤 되었을 걸. 난 참 평범한 가장에 불과했다. 초등 근무하면서 중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너무 내 앞가림만 했어. 늘 부족하여 공부는 열심히 했다지만 다 나 자신을 위해서였지, 선생을 할 자격은 한참 부족했었다 싶어.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었어야 말이지.

아버지가 아버지죠, 그럼!

들어 봐라, 그때 경남대학에서는 여학생들이 오히려 주도권을 잡았다고 알려졌어. 같은 국어교육과 3학년이던 종남은 뒤늦게야 그들에 합류했다더라고. 여학생들은 이미 9월 말에 대학 방송실 장악 기도에 실패한 뒤에,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더래. 죽음을 불사하는 모습으로 호령을 해대는 여학생들에 혼쭐나기도 부끄럽기도 해서 모두들 거리로 진출했겠지. 마산시청을 거쳐 3․15탑 주변으로까지 나갔지만, 경찰과 대치하던 초반에 모두들 연행되고 말았겠지, 수가 없어. 그 다음은 상상에 맡기자꾸나. 어쨌거나 주모자 급은 아니었던 종남이도 군필에 나이까지 많은 상황이라 위험한 부류로 분류되었을지 모르지. 그때 일 주일인가 구치소 안에서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들었다더라고. 누구라도 귀를 의심했는데, 어떤 간수가 너희 놈들은 기쁘냐고 묻더래. 죽음 때문인지 그 질문 때문인지 바로 그 순간 종남이 구역질을 시작했다는 거야, 같이 있던 학생들 말이 그랬어.

종남이 구토와 어지럼증을 못 이기며 뒹굴자 일단 병원으로 이송되었나 보더라. 의식 소실이 온 것은 여자 친구가 도착한 직후였다고. 생각해 보렴. 그렇게 다시는 의식을 찾지 못할까 걱정되는 상황에서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뜨고 말을 하고……. 얼마간 희망이 자라는 것 같기도 했었대. 하지만 아름다운 환상은 그 다음 장면에서는 그만 깨지고 말았단다. 종남인 그길로 이미 저만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것이야. 뇌수술에 이어 근 반년 간의 사투에도 그냥 그렇게 어린아이의 얼굴로 깨어난 채 퇴원을 했지. 그 후론 그대로 그냥 살았으니 산 것인지 아닌지. 심한 것은 그 사이 여자 친구가 낳은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단 말이지. 결혼식도 하지 않은 사람 병간호에 매달리던 여자가 곧 배가 불러와도 놀라지도 않더니, 아일 낳고는 혼인신고에 호적정리를 다 마쳤고. 종남네는 어정쩡한 그런 상황에서 서울로 옮겨왔어. 부마사태 후 한 2년인가 지난 후였지. 조금이라도 희망을 주는 병원이 있을까 하고. 함흥 숙모님이, 종남 어머니가 결단을 내리신 거야. 북에서 나타나줄 남편을 기다리기보다는 아기처럼 세월을 놓아버린 아들을 구하기로 마음 잡수신 거지. 혼자 사시는 서울고모가 늘 간이역 구실을 하시지. 말죽거리가 이름부터 그런 곳 아니더냐. 나중엔 너희도 데리고 계셨었고. 암튼 종남네가 올라갈 때는 고모가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재천 건너 개포동에 방 두 개짜리 주공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셨지. 변두리라지만 그때 돈 천만 원이 쉬운 건 아니어서 조금씩 십시일반 돕기도 했어, 그렇게라도 해야 집안 우애 아닌가 하고들. 그래도 말도 말아라. 아이는 자라고 애 아빠는 더 아이 같아지고. 그러다가 종남이 결국 떠났지. 어머니의 태중에서 헤어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생사도 모른 채. 그때 깨달았지. 금실아, 난 알았어. 북에 남았다는 막내삼촌은 이미 떠도는 영혼이 되었을 것임을.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러 떠났음을.

 

세월이란 것 참 무심한 물건이다. 그러고 다시 삼십 년이 다 되어가더라. 그 사이 그 집안일을 말로는 다 못하지. 네 당숙모 입장에선 남편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님과 아기를 한 번에 잃었지. 그렇게 넋 놓고 살아오더니 결국엔. 아서라, 작년 윤삼월, 사람들은 윤달이라고 해서 이장들을 하는 데, 일부는 그게 다 좋은 것은 아니라고 나를 말리더라. 나에겐 그런 것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윤달을 기다렸다.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기다려왔다. 마침내 여건이 되었으니 윤삼월을 왜 피한단 말이냐. 큰아버지도 작고하신지 언제냐, 결국 고향에 남은 당숙들 제당숙들과 어찌어찌 상의해서 전체를 손을 보았지. 성가 전에 세상을 버린 큰삼촌도 제대로 자리를 찾아드리려고. 특히 설마 설마 생사를 몰라 엉거주춤했던 막내삼촌을…….

초혼장 - 지령석을 모셔 그걸 통해서 영혼을 불러다 모시는 장사법을 그리 말한다. 양재천에 뿌려진 함흥 숙모도 함께. 그렇게 아내도, 또 어렵게 탈출해 보낸 태중의 아들을 저 세상에서나마 만나보시라고. 어떻게든 피붙이들 속으로 가서 살라고 보낸 그 서러운 아들도 죽어 삼십년이라고. 허니 이제 이승과는 연을 끊고 훨훨.

아버진 ㄹ 받침에서 멈추셨다. 나도 덩달아 입이 얼어붙었다.

아버지, 이젠 그 짐을 벗으셨나요? 대체 왜 그렇게 가슴 무겁게? 먼 먼 가족사의 짐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아버지는 아들이었고 조카였고 종형이었고…… 또 우리 아버지시군요. 아버지는 누구인가요?

묻고 싶은 궁금함을 감추느라 거짓 하품을 참는 체 손으로 입을 막아본다. 꿀꺽 보따리를 삼킨다. 앞으로도 삼십 년 세월이 흘러 아버지를 마주할 수 있다면 그때 가서는 한 자락 귀퉁이를 풀어도 될까? 핏 속으로 핏 속으로 녹아든 이해와 불가해의 접점을 찾아서. 허나 그 전에는 절대로.

......................................................................................................................................................

2013. 3.15. 단편 「초혼장」,『문학춘추』 2013 봄호 (통권 82호), 38-56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6. 10. 17:36

 

 

여름에 겨울 스웨트를 완성했다, 그것도 1977년 털실을 리폼해서.

얼마나 할 일이 없었을꼬!

 

아니, 마음이 불편했다.

소설집, 곧 장편소설 출판 지원을 도모하다가 실패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 기다리는 두 달 동안 불행했다.

미리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소설 따위는 일반 인문학 분야와 경쟁에서 영순위로 탈락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한 달은 더욱 불행했다, 새로운 글 쓰기에 집중하기에는. 

 

 

 

 

 

 

 

 

 

 

 

 

 

 

 

 

 

 

 

 

 

 

 

 

 

 

 

 

원래의

 실이

비슷한

색깔로 섞여

 

 

새해의 소망이랄까 계획 Resolution을 물으면 새 옷 사지 않기라고 말했다. 원래 새해가 되어도 늘 특별한 계획이 없었지만 근년 들어 자꾸 질문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춧구멍이 낡아버린 스웨터를 풀어서 부분을 다시 짜서 완성한 것이 첫 작업이었고, 5월 들어 본격적으로 남은 털실들을 정리하자고 마음먹었다. 그 첫 작품(?)으로 1977년 독일에서 짜 입었던 스웨터를 풀어둔 것이 생각났다. 그때까지는 예쁜 시작이나 예쁜 마무리를 잘 못하면서 그냥 떴던 터에, 실이 무겁고 거칠어서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볼품 따윈 별로 생각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 털실 째 굴러다니는 것이 민망하여 옷으로 만들어 내고자 했다. 하지만 독일의 실은 놀랍게도 거칠고 무겁고, 한 마디로 순모 함량이 낮았다. 여름에 완성한 겨울 스웨터는 아직 한참을 주인이 입어주기를 기다려야 한다.

 

- 나, 나는 이 글을 계기로 글쓰기에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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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