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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2021. 9. 7. 02:17

 

낮꿈

 

 

 

 

인간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때문에’ 산다……

-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중에서

낮꿈이란 기이한 말을 처음 들은 것은 그리 덥지도 않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생소한 이름의 병균으로 뒤덮여버린 봄날 하루하루가 초록 빛 냄새도 없이 어물쩍 지나가더니, 여름이라 해도 따가운 햇살이 주는 순간의 행복감도 없이 웬 장마만 내내 찔끔거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마스크 속에 얼굴을 묻고 사는 이 요상한 일상은 기온 따라 더 답답하기만 할 때였다.

서기 2020년 - 팬데믹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이름은 불신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비단 확진자 관련뿐만 아니라 온갖 뉴스들이 참으로 믿기 어려운 공포이거나 난해함 그 자체였다. 사건들은 누가 작성하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내용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서로 진실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내가 썩 괜찮은 부류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지금처럼 내가 바보일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없었다. 누구는 나 바보에게 이 말을 주입시키고, 다른 누구는 나 바보에게 저 말을 주입시키려는 것 같았다. 환자와, 정확히는 재가요양보호 수급자를 대하는 직업상의 만남 외에는 다른 모임들이 아예 없으니까, 평소처럼 수다 속에서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해 나갈 기회도 줄고 있었다. 아, 그리운 수다! 일 할 때 일하고, 간단히 모여서 먹고 떠들고 다이어트 산책을 즐기고……, 이런 단순무식한 행복감을 송두리째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여름에 들면서 다행히 확진자 수는 줄고 있었다.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어서 그럴까. 전쟁 같았던 분위기는 잠시 주춤, 해외에서 들어오는 환자를 빼면 하루 여남은 명 정도에 그쳐서 조금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때맞춘 듯 돌발사건이 터졌다. 의협이 파업을 선언하며 ‘의료 4대악’ 철폐를 주장하자, 나 같은 사람, 간호보조사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도 조금은 의아했다. 의료계 밖의 보통 사람들은 더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재가요양보호 서비스를 나가는 날이었다. 점심이 끝나고 식탁에서 막 커피 잔을 들 때 보호자가 말을 꺼냈다.

지 선생님, 의대 정원 확대를 4대악의 하나라고 하네요. 의사 정원 늘리려는 것이 악이다! 공공 의대 증설도 악법이라! 믿을 수 없는 표현이요. 이 불안 불안한 나날, 언제 또 환자수가 폭발할지 모르는 판에, 의사 인력이 많아지면 수월해질 거 아니요!

글쎄요. 그게 아주 간단한 문제는 아닐 거예요. 일단 의사 숫자가 갑자기 많이 늘게 되면 희소가치가 떨어지고, 나중엔 수입도 보장할 수 없고. 나는 나도 모르게 의료계 편이 된다.

나중이라뇨? 물론 나야 잘은 모르지요, 병원 근무에 관해서는 꽝이니! 근데 기득권자가 신규 의사면허 막는 것은 횡포로 밖에 안 보이네.

어찌 보면 나중 생각해서 밥그릇 싸움으로 보이긴 하죠. 경쟁사회니까 어쩌겠어요. 꿈을 이루었는데 명예와 혜택을 나누라고 하니까. 의사면허는 꿈의 상징이죠.

꿈…….

병원 세계에서 봐요, 아, 무서운 사다리예요. 저 같은 간호보조사 입장에서 보면 의사란 못 올라갈 나무였죠. 그래봤자 의사 위에 판검사, 판검사 위에 장사라지만요!

예? 천하장사 그런 것?

아아뇨! 세상을 돈이, 장사들이 좌지우지하잖아요. 유전무죄!

어, 그러네, 기업이 결국 장사니까. 사농공상 – 봉건시대 서열 순서가 완전 뒤집혔네요, 서열이란 아예 없어져야할 것이지만.

맞아요, 서열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 생겨나요. 암튼 의사는 큰 꿈 중의 하나죠!

그렇겠네요. 그런데 그런 건 꿈이 아니고, 꿈나라 꿈이 꿈이죠. 의사되기 이런 건 낮꿈이라고요, 낮꿈.

거기에서 낮꿈이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낮꿈? 낮꿈이라니요? 무슨 꿈이…….

 

그때 이 할머니가 소리 없이 자리를 떴다. 말없이 사라지는 것, 특기다. 낮꿈이라는 말, 무슨 말인가?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와있는 동안 외출이 일상인데 나가버리려나? 다행히 이번에는 외출이 아니었다. 어르신이 안방에 그대로 누운 것을 확인하더니 거실로 나가 앉는다. 마른 빨래를 걷어들고 따라갔다. 빨래는 당근 어르신 것만 내가 한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었다.

저 그런데, 낮꿈이 뭔데요? 그런 말 첨 들어봤는데요.

낮에 꾸는 꿈요!

낮잠 자다 꾸는 꿈요? 밤잠이건 낮잠이건 꿈은 꿈이죠!

다르죠. 내가 만든 말 아니고요, 독서죠. 아이 참, 옛날에 읽은 책 이야기를 꼭 하게 만드네. 『희망의 원리』 라는, 많이 어려운 책이요. 다는 못 읽고 시작하다 말았지요, 것도 옛날에.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을 낮꿈이라 했을 때, 그땐 감탄 그 자체였어요. 낮꿈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살아갈 수 없고, 오직 낮꿈을 통해서만 냉정한 시각을 소유하고, 직접 삶에 뛰어들게 한다고. 자아의 보존을 넘어서 우리의 저열한 사회적 환경에 대한 개혁의 희망이 들어있다고.

뭐야, 개혁이라니, 설마 운동권 같은 소릴 하네! 말투도 변한다. 이 할머닌 대체 무슨, 뭘 하던 사람일까. 사적인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아서, 큰애 둘째라고 하는 아들, 그리고 대화 중에 여자애 이름도 있으니까 딸 하나 있는 정도 외에는 아는 건 없다. 사실 이런 한시적인 일자리에서 가족정보가 필요하지도 않다.

젊었을 때니까 감동도 컸죠. 하지만 그건 옛날이야기라니까요, 지금은 완전히 변질되었죠. 사회적 희망 보다는 개인의 욕망만 하늘을 찌르는 세상. 우르르 몰려가서 서열 정하고, 이긴 쪽은 우쭐하고 진 쪽은 주눅 들고……. 이런 세상에서 낮꿈 꿀 필요가 있나요?

그래도 삶의 목표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남들보다 더 잘 사는 꿈요? 글쎄 그건 욕망이라니까요. 내 삶과 세상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겼던 원래의 희망과는 전혀 다른. 암튼 낮꿈 보다는 밤꿈이 꿈이죠. 자연스럽게 꿈을 꾸는 것이니까. 참, 밤중에 꿈 잘 꾸나요? 혹시 돌아가신 분을 꿈에 본다거나.

아주 가끔, 슬쩍요.

 

아버지가 어른거렸다. 내가 그리워하는 꿈이라면 딱 한 가지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데 함께 가던 형제자매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나 혼자서 뎅그러니 서 있고, 아버지가 멀리에 서 계시는데 얼굴이 안개에 쌓인 듯 희미하다. 얼굴이 안 보인다. 그래도 아버지인가. 그래도 아버지이다. 놀라서 깨면 꿈이다. 가끔 그 비슷한 꿈을 꾼다.

큰언니는 내가 임종을 못해서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아버지 돌아가신 것이 언제인데, 그만 잊고 털어버리라 하신다. 어머니도 내 꿈 이야기를 언니한테서 들으셨는지, 은이 니가 아부지 젤로 좋아혀서 그랴, 그러신다. 아니라고 내숭 뵈지 말어야. 자석이 아부지 좋아혀서 나쁘가니.

 

 

밤꿈은 갈망의 표현이라지만 허무맹랑하죠, 때론 놀라운 일도.

내가 다른 생각으로 도망간 뒤에도 보호자는 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말을 시작하니까 엄청 잘 한다.

난데없이 돌아가신 은사님이 꿈속에 나타나셨어요. 넘 이상한 모양으로. 그래서 꿈이죠, 그냥 꿈.

…….

늦가을이면 겉이 단단하게 익은 늙은 호박 알아요? 보통은 껍질이 누런 색깔인데 이건 어두운 진초록색이라. 그런 호박 속을 파내고 그 껍질로 베트남 사람처럼 큰 모자를 쓴 모습이라니. 깨어나서는 웬일일까 싶었지만,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 말았어요.

엥? 호박껍질 모자요? 무슨 동화 속 나라예요?

그러게요. 암튼 다음날 아침에도 눈을 뜨면서 그 꿈이 어른거렸고, 그래, 돌아가신 분 생각하느니 살아계신 분 안부나 묻자 싶었죠. 오랫동안 언니 비슷 친구처럼 지내는 선생님이에요, 톡도 하고. 전화를 거니까 깜짝 반가워하시며, 어머나, 나도 전화를 해볼까 했어, 난데없는 꿈 땜에, 그러시는 거예요.

텔레파시?

아니, 그게 믿기지도 않았어요. 내가 꿈에 본 그 은사님 꿈을 꾸셨다니 말이 되요? 두 분은 남녀에 나이 차이도 있으시고, 그냥 냉랭한 동료였을 뿐인데. 암튼, 전화를 끊고도 넘 이상했어요. 제자에게 동료에게 꿈에 나타나시다니, 웬일일까. 그러고 보니 돌아가신 10주기라, 딱 그 달에. 내가 떠난 지 10년이다, 기억하거라, 그런 메시지잖아요.

그런 꿈이, 말도 안 되는 게 진짜 꿈이라는 거군요.

그러죠. 내 인생의 계획과는 아무 상관없는, 내 의지와도 아무 상관 없는 것. 헌데, 꿈 땜에 돌아가신 날을 기억해 냈으니, 그건 어찌된 건가! 과학적으로는, 뭐 정신의학적으로는 떠나실 때 못 가뵌 것이 마음에 눌려 있다가 10주기에 무의식이 튀어나온 것이라고 하려나.

그렇게 마음에 남은 분이면 장례식엔 왜 못 가셨는데요?

내가 오늘 따라 오지랖이다. 수급자 일이 아닌 보호자의 일에 시시콜콜 뭘 묻고말고. 하긴 어르신이 낮잠을 자면 딱히 할 일도 없어서 이야기나 하는 거다.

그게 울 어머니 49재중이었어요. 죄인이라 다른 초상집엔 못 가죠.

어머나, 그러는 거예요?

종교도 모르면서 부처님 오신 날 지장전에 영가등을 켜드렸어요. 어머니 등 켜러 가서.

뭐예요? 불교신자세요?

아아뇨. 어머닌 맞아, 열심 신자였어요. 등은 그냥 기억하고 있다는 뜻으로. 그러고 보니 내가 고아가 됐을 때 은사님도 떠나셨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했어도, 아, 그래, 하셨을, 무작정 믿어주셨던 분인데. 내가 어떤 안 이쁜 짓을 해도 미워하지 않을 사람, 부모님 안 계시면 그런 사람은 세상에 없는 거요.

아니, 남편이랑 가정이…….

우리 이쁜 지선생님, 순진무구하셔라! 남편이란 내가 잘하는 동안, 이쁜 짓을 하는 동안에만 날 이쁘다고 생각하는 존재랍니다.

……?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시장에라도 나갈 폼이다.

피잇, 30년을 넘게도 지금도 설레는 부부간의 사랑을 몰라도 한참 모르시네!

이런 말은 물론 삼킨다. 하기야 칠팔십 대 부부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모를 일, 우리도 나이 들면 저리 될까?

낮꿈이란 이상한 단어가 신경이 거슬리는 채로 안방에 들어가 보니 어르신은 새록새록 꿈나라였다. 낮에도 꿈나라다. 웬 잠을 저리 주무실까? 간밤에 꿈꾸느라 못 주무셨나? 아이들도 아닌데 무서운 꿈을 왜 꾸실까?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갔다.

 

여름 내내 지독한 태풍에 늘 반복되는 수재, 수재민들 뉴스다. 어딘가는 둑이 터지고 도심까지 잠겼다. 섬진강 쪽으로 집지어 갔던 아는 언니는 울상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한옥 마루가 아슬아슬, 댓돌은 보이지도 않게 물에 잠겼다. 황룡강 변에 선산이 있다는 이 댁도 전화 통화로 난리를 위로하고 있었다. 자연환경까지 반란이 났고, 역병의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 봉쇄가 무엇인지 거리두기가 무엇인지 학습할 사이도 없이 낯선 환경들이 밀려닥쳤고, 격리라는 엄청난 단어도 일상이 되었다. 자고 나면 다시 오늘이 되는 영화에서처럼, 판에 박은 일상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래도 달은 차면 기울고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바스락거리는 나뭇잎들이 날리며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겨울이 성큼 닥친 것이다. 정지되었나 했지만 삶은 계속되었나 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요? 365일 노랑 옷 팬데믹에 절망들만 묻혀있네. 지 선생님은 젊으니 좀 나은가?

어느 날 보호자의 한탄스런 말투에 갑자기 나를 돌아다보았다. 집 관리, 세입자 관리, 수급자 서비스, 주말 농부, 이런 것들이 내가 사는 일일까. 그러고 보니 일 년 내내 노랑 옷들이 티비 화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가능성이 없으니 그게 유일한 대면이었고, 그것도 남편이 들어오면 채널은 뉴스로 한정되었다. 가깝고 먼 곳곳에서 드러나는 더 참혹한 죽음들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학교에서의 수업 내용 때문에 참수를 당하기도, 다만 얼굴색이 달라서 총에 맞기도, 그런 일들이 선진 문명국가라는 곳곳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안전사고 소식에는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일터는 지뢰밭이고, 웃음을 잃지 않고 일터에 가는 것이 어려운 시험 같은 시절이었다.

 

우리 은이는 잘 웃어서 이뻐. 어여, 웃어봐. 이빨도 가조로니 얼마나 이뻐. 노상 그러고 살어.

주문처럼 어머니의 말을 외우며 집을 나서곤 한다. 참 어려운 나날이었다. 내가 필요해서 일하는 지금, 이만하면 안정된 조건이다. 입술을 당기자, 씨익. 그래도 겨울은 정말 싫다. 춥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싫다. 아, 다행! 입구 가까이에 주차 라인이 비어있다. 서두르면 2분 안에 따뜻한 아파트에 들어간다.

 

 

몸 파는 스무 살이라고, 들어 봤어요? 머리가 아파요.

밑도 끝도 없이 내뱉는 주인의 말에 흠칫 놀란다. 알아서 대문을 열고 태그를 찍고 들어온 요양보호사에게 내뱉을 첫 말은 아니다. 보호자라면, 어서 오세요! 주말 잘 지냈어요? 이 이는 별 탈 없었답니다. 그런 말이 먼저 나와야 정상이다. 게다가 나로서는 이 집 출근 만 일 년이 되는 특별한 날인데.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일주년은 일주년 아닌가.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어르신은 좀 어땠나요? 감기 드신 건 아니구요? 오늘 검사 가실 컨디션 되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환자 관련이 아니라면 보호자의 말은 천천히 들어도 된다. 화장실 입구에 가방을 내려놓은 채로 소독젤로 손을 씻고는 어르신에게로 향한다. 거실 소파의 지정석이다.

어르신, 주말 잘 지내셨어요? 오늘 병원 가시는 것 아시지요?

대답 대신 오른 손을 들어올린다. 반가움의 인사다. 그러면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일단, 어서 식사요! 식사 차려 놓아도 지 선샘이 와야 건너오시네. 이제 완전히 습관이 되었나 봐.

부엌에서 보호자가 채근이다.

네에, 갑니다. - 어르신 식사, 식사하시게요. 손 씻으시고!

바쁘다, 바빠. 양쪽으로 답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보호자는 개인적인 요청 사항은 거의 없다. 밥상 앞에서 나는 열심히 어르신을 챙긴다. 잠깐 오전 일을 했을 때는 여기 와서 함께 점심을 먹기도 했다. 즐거운 식사 시간이 된다. 보호자는 누룽지까지 챙겨오고서 자리에 앉으면 늘 그러듯이 가만히 앉아서 허공을 본다. 어서 드세요! 왜 안 드세요! 그렇게 채근하면, 반찬 준비하면서 코로 이미 다 먹어버렸기 때문에 식욕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은 20분이면 포만감을 느낀다고. 다이어트를 하려면 천천히 먹는 것이 해결책이겠네여, 라고 말하려다가 참곤 한다. 이 집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대신 오늘은 병원 함께 가시려면 좀 잘 드셔야죠! 하고 만다.

 

인지검사가 있는 날에는 보호자 2인이 함께 병원에 가야한다. 코로나 방역으로 보호자를 줄이지만, 인지검사를 마치고 보호자도 따로 상담을 해야하니까 그 잠깐이라도 환자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는 검사 시간 동안 속절없이 기다려야 한다. 처음 얼마간은 커피숍에 가 있자고 해서 같이 내려갔다가 놀랐다. 폐쇄된 것이다. 하긴 병원 내에서는 음료수도 마시지 말라고 종이에 써 붙여 놓았다. 검사실 밖 의자에 한 칸을 떼고 앉았다. 그래도 말은 하고 싶었다.

저, 아까 집에서 말씀 하신 몸 파는 스무 살 어쩌고…….

아, 미안해요. 오전에 읽은 기사가 계속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서요.

그러니까 젊은 애들이 일자리는 없고 성매매에…….

아니, 몸 판다고 하니까 그렇게 들렸나 보네. 그런 건 곳곳에 곪아 터져 있으니 이젠 놀라지도 않아요. 오늘 읽은 신문기사에 헤드라인이 ‘몸 파는 스무 살……’ 그러더라고요.

뭔데요?

…….

말을 잇지 않던 보호자는 어르신 이야기로 옮겨가버린다.

어제, 그러니까 그젯밤에는 자리에 누워서 오늘 뭘 하고 지냈나 생각이 잘 안 난다고 그러잖아요. 아들애가 왔다 간 것을 잊다니, 이해가 안 되네, 어쩌면 애들 이름을 잊기도 하고. 검사를 잘 할지 모르겠네. 청력 때문에도 고생일 걸, 검사하는 분도.

한 두 번 해 보셨잖아요. 잘 하시겠지요. 건망증인지 뭔지는 참 이해가 안 가는 일 많아요. 저도 요즘 완전 웃겨요, 핸드폰 안 가지고 나와서 시동 걸다가 다시 들어가고, 그런 건 일상이에요. 마스크도 차 안에 몇 장씩 넣어둬야 하구요.

건망증이 뭔지, 사람들을 위로하려다 보면 나도 이미 심각하다 싶어 오싹해진다. 하지만 오늘 나는 ‘몸 파는 스무 살’ 그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꾸 말을 걸게 된다.

 

그런데 아까 집에서요, 그 스무 살은 무슨 말이세요?

아, 참, 생각하기도 싫은 일들. 무심코 튀어나온 말이네요, 뉴스 땜에. 뉴스니까 거짓은 아닐 테고. 자꾸 걸려서. <8일에 127만원, 하루 18번 바늘꽂는 20대> 그런 기사요. 직장이 폐업하거나 웬만한 알바 자리들 탈락하다보니까, ‘몸 팔러왔다’는 자조로 실험대상이 되는 거 말예요.

아, 마루타 알바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뭣인들 못 참나요? 복제약 만들려면 임상실험이야 늘 있는 거죠. 옛날에도 계속 그랬어요.

나야 그런 일들이 그리 뉴스거리도 아닌데, 이 할머니는 많이 놀랐나 보다.

그 아이 입에서 ‘여긴 자본주의의 끝’이란 단어가 나왔어요. 꿈은 놔두고 우선 생계를 위해서 몸을 파는, 피를 뽑는 20대라니. 삶의 극이야.

극?

예, 극값!

생동성 실험, 그거 안전하게 관리할 텐데요. 죽지는 않아요.

알바하다가 죽는 이야기는 뭣 하러!

말을 꺼냈던 보호자가 외려 외면하고 일어서버린다. 괜히 검사실 문앞으로 가서 안쪽에 귀를 대는 시늉을 한다. 죽는다는 말은 내가 심했나?

 

 

알바 나갔다가 죽는다? 머쓱해진 기분이 되어 생각해 본다. 모처럼 알바 구해서, 아님 늘 하던 대로 아침에 일터에 나갔다가 죽는 이야기가 어제 오늘 일인가. 계산의 시작은 아무래도 본인 몫이다. 감당할만한 일인가. 따져본 다음에 시작해야 한다. ‘아무 기술이 없이 별 고생도 않고’ 라는 조건의 광고라면 다른 보이지 않는 위험을 상상했어야지. 그러니까 수당이 올라도 고민이라던가……. 그러고보니 쿠팡인지 어딘지 등등 택배 노동자가 과로사했다는 뉴스를 올해 들어 열 번도 넘게 들은 것 같다. 그런 뉴스를 들을 때마다 택배아저씨들은 어떤 기분일까. 아니나다를까 엊그제 또 다시 뉴스였다. 올해 들어 열여섯 번째 죽음, 이번에는 34살 젊은이다. 7월부터 일했다고 하니까 택배 반년에 목숨을 잃었다. 새벽 6시 출근해서 밤 9시나 10시에 퇴근했단다.

이 아파트에도 늘 보는 택배 아저씨가 있는데, 실은 최근 2주 3주 보이질 않는다는 생각이 났다. 이 집에서는 띵똥 소리가 나면 가끔 음료도 건네고 추석엔 참기름도 짜주는 걸 보면 임의롭게 지내는 사이 같다. 한번은 더운 여름이었는데, 이모, 이러다 죽으먼 어쩌까요, 돈 다 벌어서 언제 쓰까이! 그러더란다. 올 봄 이후 하루 300개를 주더니 점점 400개로, 어떤 날은 500개 가까이 물건을 싣는단다. 크고 작고 가리지 않고 개당 750원이면 일당이 30만원이 넘는 날도 있단다. 수입이야 짭짤하다. 그런데 그 배달을 다 마치기 위해서는 점심을 거의 못 먹는단다. 굶어가면서 일당 올리는 건 아니라고 일러 줘도 소용없단다.

그 말을 들은 후로는 괜스레 편치 않았다. 아 참, 이 보호자를 택배 아저씨는 ‘이모’라 부르나 보다. 일년을 매일 보는데도 나랑은 덜 친한가? 이렇게 저렇게 부르라는 말이 없다. 직접 부를 일은 없으니까 우물쭈물 지내지만, 가리켜 말하려면 ‘주인, 보호자, 할머니’를 왔다갔다 하게 된다.

암튼 어르신이랑 산책을 하는 시간에 택배 아저씨랑 마주치면 내가 말을 건다. 점심은 드셨어요? 잘 드셔야죠! 먹으려고 사는데요! 내가 그러면 씨익 웃기만 한다. 처음 볼 때보다 더 말랐다.

 

보호자가 다시 의자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내가 택배아저씨 말을 꺼냈다.

저 그런데요. 요즘 아파트 택배 아저씨 안보이던데요. 무슨 일 없겠죠?

왜요, 갑자기?

이삼 주 넘었어요. 전화 한번 해 보실래요, 괜스레 궁금하네요.

어, 그래요? 문 앞에 잘 놓고가니까 그냥 별일 없는가 그러는데. 설마 무슨 일이사…….

물론 설마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괜히 불안했다.

나중에요, 지금 한창 배달할 시간이겠네. 아, 문자나 남겨 놓을까. 사실 요즈음엔 누구라도 밥을 벌기 무지 힘들지. 여자들은 좀 나은가? 노동 강도가 세지 않아서…….

아무래도. 여차하면 취집이면 되니까요. 얼굴 되는 애들은 그게 상책이랬지요.

뭐요? 취집?

예, 취직하거나 시집가거나. 시집을 잘 가면 취직할 필요 없고. 우리들 병원 근무 때 보면요, 간호사들 대부분이 의사한테 시집가는 꿈을 꾸죠. 물론 그때도 이미 의사들은 간호사 차지가 안 되었죠. 아는 언니가요…….

아는 언니도 참 많아! 인정 많게 잘 사나 봐요!

그건 아니구요. 서울서 병원 다닐 때요. 그때도 누구 하나 의사한테 시집가면 로또랬지요. 연애는 해요, 희망적으로다가. 하지만 결혼은 안 되더라고요. 그 남자는, 그 의사는 의과대학도 이름 있는 대학 출신이었는데, 좀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수간호사 언니랑 서로 의지하며 지냈대요. 보드 딸 때 마지막엔 언니가 남자 집에까지도 도움을 주고 그랬대요. 하지만 곧바로 병원집에서 픽업, 집게로 인형 뽑듯 쫘악 집어가 버렸어요. 결혼 시켜서 바로 미국 유학, 크게 배워와서 병원 운영하라, 뭐 그런 식이었대요. 별반 화제 거리도 안 되고, 올 것이 왔다 그 정도였죠. 그러니까 돈 문제가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건 한참 되었어요. 어제오늘 일이 아녀요.

맞아요, 일찍 알았네요. 돈이 지배하는 세상.

누구든 부~자 되고픈 꿈을 꾸죠. 부~자라야…….

그런 꿈은 낮꿈이라 해야 맞다니까요. 자면서 꾸는 그런 꿈이 아니니까.

아, 네, 그 낮꿈! 언제도 꼭 그렇게 말 하시더니……

그래요, 더 잘 살아보자는 낮꿈요. 낮꿈이 뭐라고 매달려요? 부질 없죠. 게다가 욕망이란 끝간 데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이 목표에 꽂히면 내일 땜에 오늘을 망치기도 하고요.

낮꿈이, 희망이, 욕망이, 뭐든 간에 그런 것이 오늘을 망쳐요?

내일만 바라보고 걷다보면 오늘을 사는 건 아니잖아요. 내일이 없을 수도 있고. 그러니 선택의 문제예요. 오늘 사는 쪽으로 또는 내일을 희망하는 쪽으로.

선택…….

그러다가 짓궂게 내가 물었다. 왜 그랬을까.

아니, 어떻게 꿈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어요? 꿈이 좌절된 적 있으세요?

무리한 희망을 갖다가 좌절할 틈이 어딨어요. 피 터지는 경쟁밖에 아닐 텐데, 미리 안 갖는다니까요! 봐요, 내일을 위한 희망을 계획을 가지고 거기 매달린다 칩시다. 그래요, 올인! 그게 자칫 오늘을 좀먹는 거요. 오늘 굶주리면서 죽은 뒤에야 받을 보험을 드는 일, 그게 뭐냐고! 오늘을 충분히 살아야지요. 오늘이라도 찬찬히 충분히.

오늘을 잘 살라고? 내일을 꿈 꿀 나이도 아니구만, 치, 나는 속으로만 틱틱거렸다. 이 할머니의 말은 어느 부분부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꿈을 꾸고 가꾸고 노력하는 일들을 내일에 대한 욕심이라고 하질 않나. 신앙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겠지만, 내일을 믿기는커녕 기대도 하지 않는다니 좀 심했다. 내일이라는 희망으로 계획도 세우고, 계획에 맞춰서 사는 내 삶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저러는가. 이 세상에 재테크는 기본이고, 건물주라는 기본 꿈을 이룬 지금도 그 다음 꿈을 향해서 나가는 내가 나는 자랑스럽다. 서로 그렇게 채근하며 동행하는 남편이 믿음직하다.

우리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남편 친구네 하나는 경매물건 전문으로 꽤 잘 나간다. 여자가 더 잘한다고도 그런다. 내가 그 친구네 이야길 슬며서 했더니, 이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흉년에 논 사는 것 아니다, 그런 말 괜한 말 아녀요! 상대가 안쓰러운 경우에 이득 봐선 안 된다는 가르침이죠. - 경매는 다를 걸요, 직접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또 어차피……. 그쯤에서 말을 끊었다. 말이 잘 안 통한다.

 

 

소통이 잘 될 사이는 아니다. 70대와 50대, 아예 모녀 사이도 아니고. 그러다가 무엇인가 전혀 예상밖의 말을 듣게 되는 재미도 있다. 언젠가 들은 은행계좌 이야기도 그 하나였다. 어르신이 통장이며 카드며 사용 실적이 없다고 은행에서 연락이 왔을 때였다. 주거래은행이 아닌 곳이라나. 그렇다면 그쪽은 그대로 정리를 해도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내가 참견을 했다. 그런 일은 내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느닷없이 - 웃기는 일이었다 - 내가 건물주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통장을 가지고 얼마나 알뜰하게 저축을 했었는가 좀 자랑삼아 이야기를 했다. 빨래 줄이려고 하얀색 티셔츠는 입어보지도 않았다는 그 말도 또 곁들여서. 그랬더니 나더러 참 예쁘게 산다고 하면서, 남녀차별 없는 은행계좌는 한국인의 특권이라는 말을 해서 너무 놀랐다. 친구 큰언닌가 하는 누군가가 서독 간호원 파견 때 독일에 가서 보고 너무 놀랐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내가 더 놀랐다. 그때가 60년대 초였는데, 현지 독일인 간호사들의 사회적 형편이 상상도 안 가는 수준이었다고. 여자가 은행계좌를 만들 수 있던 것이 1958년인가 59년인가. 그 전까지는 여자들은 은행계좌가 없으니, 친정서 결혼 때 가져온 지참금도 남편계좌로 들어가고 당연히 남편이 관리했고. 여자는 직장에 노동계약서 쓸 때도 남편의 승낙이 먼저였다니. 그러고도 서양일까. 우리는 서양은 여성상위쯤으로 알았는데.

시대가 달라졌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보면 숨죽이고 사는 여자들은 별로 없다. 다들 돈도 벌고, 남편보다 더 잘 버는 아내들도 꽤 있다. 돈을 벌지 않으면서도 돈 버는 남편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들 산다. 전에 옆집 살던 아주머니는, 나보다 한참 위였는데, 중학교에선가 아무튼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자마자, 밥은 이제 당신이 해요, 라고 밥솥을 넘겨버렸다는 이야기를 자랑삼아 했다. 평생 밥 해줬으니 이제 당신이 할 차례라고 했단다. 그렇다면 이제 여자가 나가서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인가. 그건 또 아니랬다, 후훗. 우린 그때 놀라면서도 배웠다, 저리 살자!

 

 

멀리 복도 끝 창밖을 보니 눈발이 날린다. 첫눈인가 싶다.

첫눈 오는 날 약속……, 지 선샘, 그런 것 없나요? 올해도 눈이 많이 오려나? 겨울이 더 어렵겠지요? 당장 생활비 걱정으로 머리 아픈 젊은이들 말예요. 몸을 팔다 보면, 이제 곧 영혼을 파는 알바도 나올 것이니.

영혼을 팔아요?

하긴 영혼이 있나, 있어야 팔지.

뭐예요, 영혼을 믿지 않으시나 봐요.

영혼을 믿는다는 일, 그거 쉬운 일인가요, 어디.

영끌이 있잖아요, 영혼까지 끌어다가 집 산다고! 영혼이 있으니까 끌어다가 쓴다는 것인데…….

예, 있다고 해둡시다. 영혼이 있어야 팔 테니까, 있는 쪽으로다가.

우리 맘대로요?

아니 좋은 쪽으로. 무엇이든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영혼을 판 이야기는 엄청 유명한 것 있어요! 이보시오, 살아생전에 하고 싶은 것 다 들어줄 테니, 다시 이팔청춘으로 돌려줄 테니 멋대로 살고, 죽어서는 영혼을 내게 다오 – 뭐 그런 악마의 유혹.

아, 메피스토! 알아요! 남편 친구가 두고 쓰는 말인데요! 너희들 오늘 저녁엔 영혼 내게 팔아, 내 멋지게 살게 해주마! 그냥 재밌게 놀자고 설치는 말인데, 그이 십팔번이예요! 어쨌거나 영혼이 있다는 전제네요!

어, 그런 재미있는 친구가 있어요? 스스로를 악마라고?

그냥 웃자고 그래요!

메피스토펠레스라, 악마이건 뭐건 세계적인 세기적인 인물이네.

네? 메피스토는 그럼 줄인 이름인 거네요. 하긴, 소크라테스 보다 테스형이 완전 유명하잖아요!

그런가. 근데 테스형은 좀 웃겼지. 메피스토펠레스를 메피스토라 줄이지 레스라고 하나? 끝자를 따서 테스라 하다니.

끝자?

봐요, 아킬레우스, 오르페우스, 프로메테우스……, 그런 이름들은 모두 우스라 줄이나? 우스, 테스 그런 건 그냥 끝소리라니까요!

그냥 끝소리라뇨? 우리 순이, 금이, 은이처럼?

지순이, 금이, 은이 – 우리는 자매들은 거의 외자 이름이나 같다. 순아, 금아, 은아 그렇게 부르기도 하고, 어쩔 땐 은! 그러기만 한다. 그러니까 테스는 뜻 없는 ‘이’나 같다니 맥이 풀린다. 가수는 좀 그래도 ‘테스형’ 노래는 꽤 인기였는데! 하긴 인기 트롯 프로그램도 남편이 끔직해하는 채널에서 해서 거의 못 본다. 고향이 여기라서 그런지 확실히 편파적이다. 직접 대놓고는 그런 말은 삼간다. 여기 사람들은 건드리면 안되는 어떤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시간 참 지루하다. 검사가 한 시간 반이라더니 두 시간이 다 되어 간다.

지 선생님, 그런데 결과가 더 나쁘진 않겠죠? 걱정 한 가지, 저이가 요즘엔 잠을 너무 자는 것 같아서. 낮에도 산책은 이런저런 핑계만 대고 잠만 자려고 하잖아요.

보호자 머릿속에는 어르신 뿐인가 보다.

추우니까 그러시겠죠. 그럼 밤에 잘 안주무세요?

밤에도 자는 편이예요. 하루로 치면 너무 많이 자니까 불안하기도 해요. 계속 잠을 자면 언제 사느냐고요.

사는 것 되게 중요시 하세요!

그럼 사람이 사는 것이 사는 것이지. 살아야 살아있는 것 아닌가.

네, 다들 열심히 살 잖아요, 꿈을 가지고 노력하고! 젊은 시절 그렇게 사셨을 거 아녜요.

무지개가 피었습니다~ 하고서 다 같은 무지개를 쫒아 살면 다 같이 도달하남? 다른 곳으로, 더러는 반대로 향하는 것이 사는 거란 말이라.

꿈의 반대로요? 뭐가 되려고요?

반대가 아니라, 뭐가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꼭 그런 힘든 외사다리로 몰려야 하냐고. 성공해서 인정받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가면서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건 내 가치를 깎아내리는 바보짓’이라고. 것도 어디서 읽은 말이요.

하지만 가치라는 게 대부분…….

대부분 말고요. 남들의 꿈을 따라가면서 어차피 뒤쳐지는 사람들은 우수수 얼마나 불행할지.

그래도. 시작이라도.

남들 따라 같이 할 건 없다니까요. 나는 나죠. 누군가 나를 무시해도 나는 나이고, 누군가 나를 칭찬해도 나는 나이고.

넘 냉정하세요!

냉정? 냉냉, 쌀쌀맞아 죄송하요!

그러고는 일어서더니 복도 끝 창쪽으로 걸어간다. 앉아있기도 힘이 들다면 힘들다. 실은 나도 좀이 쑤신지 한참 되었다.

 

그건 그렇고, 왜 이리 불편한가. 이 할머니랑 이야기를 하다보면 무언가 편치 않을 때가 있다. ‘몸 파는 스무 살’ 이야기 때문에 어두운 상념들이 사방팔방에서 밀려왔다. 아까도 알바하다 죽는 이야기를 꺼낸 건 자동적이었다. 맨날 듣는 뉴스가 그러다보니 온갖 사고사들까지 한꺼번에 되살아나서 살이 아파왔다. 전동차 스크린에 끼어서, 들여다 본 기계에 빨려 들어가서, 크레인에서 떨어져서, 비계 위에서 함께 떨어져서 아래에서 깔려서, 크레인 기사라 해도 소용없고, 비계 기능사라 해도 그렇다. 자격증들이 무슨 소용! 어라, 자격증들이 죽음으로 이끄는가. 낼 잘 살려고 오늘 죽는다? 그 비슷한 말, 내일을 위해 오늘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는 저 불편한 말이 맞는 것일까. 어쩌나, 이 동네 말라깽이 택배 아저씨는…… 무사하겠지. 괜한 걱정에 볼에서 열감이 느껴진다.

아니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사는 것이 그런 것이다. 도처에 사건도 있고 사고도 있다. 그런 것에 흔들려서 절망하고 그러면 안 된다. 무심하게, 정직하게만 살면 된다. 명사가 못 될 바에야 오직 재테크만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최소한 살아내기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팔아야 하는 세상, ‘몸 파는 스무 살’ 이야기가 어때서. 가슴이야 좀 아프다. 하지만 나도 남편도 영혼을 끌어냈으므로 가난에서 탈출했다. 누군들 영끌이 필수인 것을 어쩌라고.

그런데 어딘가에 지뢰가 묻혀있다. 허기 말이다. 잘 살아왔다고 믿었었는데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허기란 놈이 으르렁거린다. 오늘을 살았다는 기억이 없이 내일을 위해서 달려왔다는 말이 맞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이 허기의 대가로 노후는 충만할 거야…… 설마. 안락한 노후는 계속 유혹의 손길에 가려져 있는가. 혹시 노후 준비가, 노후 걱정이 낮꿈이란 말인가? 그럼 당연히 낮꿈을 꾸어야 한다. 아니, 노후 준비란 오히려 낮꿈 없애기일까, 손바닥을 펴고…….

 

아, 드디어 검사실 문이 열린다. 어르신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힘드셨을 것이다. 인지검사의 질문이라는 것이 예상되는 말이 아니니까 청력장애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괜찮았어요? 다가온 보호자가 미처 말을 시작도 하기 전에, 안에서 보호자를 부른다. 잠시 또 어르신과 둘이 되어서 진료실 복도에 앉는다. 낮꿈은 잠시 접어 두고.(8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

[2021] 작가교수세계 - 한국작가교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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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1. 9. 7. 02:13

 

[산문] 반석 위의 벽?

 

 

오늘 36도의 바깥 온도는 신기한 숫자이다. 체온이라서다. 이 여름 폭염 속 모든 것은 태양열에 녹아내린다. 인간은 에어컨으로 무장했노라고 자만한다면 큰 오산이다. 오늘 순간전력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다면, 더위와 벽을 쌓고 냉방으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우리를 열기에서 지켜줄 벽은 반석이 아닌 전기 위에 세워져 있다.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 버스는 정차하고 한 겹 비닐포장 뒤에서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의 벽은 버스를 덮친다. 굵은 플라타너스가 서있던 아래는 플라타너스가 살려내지만, 누가 플라타너스 아래 멈출지는 하늘이 정하는가.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 플라타너스 …… /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 플라타너스 / 너를 맞아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 - 더러는 시를 외우고 있음을, 플라타너스, 너는 알더냐.

 

한탄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멀리 플로리다 해변의 풍광 좋은 12층 아파트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다. 인간에게 안전한 벽이란 정말이지 없는가 보다. “건물이 상당 부분이 무너졌어요. 싱크홀로 빨려 들어갔어요.” 911 구조대에 그 순간 걸려온 SOS신호들! 한 순간에 함께 레테의 강을 건넌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갇혔던 벽의 배신에 스러진 것이리라.

 

문명사회 속 인간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줄 벽은 온전하지 못하다. 견고한 반석이라고 믿었던 문명은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지마할의, 가우디의 아름다움이 영원하리라 믿어도 될까. 반석 위에 주춧돌을 놓고 벽을 쌓아야 한다고 배우지만, 인생에서 반석은 대체 무엇일까. 하물며 마음의 피난처가 되어줄 벽은 있기나 한 것일까.

 

____________________
2021 - 한국여성문학인회 대표선집 , , 2021 코드미디어,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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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1. 9. 7. 02:10

사피엔스의 언어

 

 

장편 『숨』이 숨을 내쉬었다. 지난해 늦은 가을이었다. 하루에 한 매를 썼을까. 과작이 아닐 수 없다. 과작이라도 다행이다. 필을 놓고 있는 것 보다는, 그렇게 위안을 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무엇을 썼을까. 무엇하러 썼을까.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아무 쓸모없는 것을 내놓았다. 선배 또는 동료 소설가들이 말한다. 이번엔 더 좋았어요. 이런 친절은 선의의 거짓일 것이다. 누구나 다 그래요, 바닥에 내려가야 올라올 수 있어요. 이런 위로가 더 진실하다.

외도를 저지르기도 했다. 당연히 단편 청탁일줄 알고 예스! 했다가 덤터기를 썼다. 「순수에의 강요」라는 제목으로, 장르문학의 세상에서 순수문학의 일에 관한 고찰이라니! 주문대로 쓰고서도 허탈했다. 논문을 손 놓은 지 십여 년, 그 세월엔 강산도 변한다거늘, 숙제를 맡으면 되돌리지 못하는 바보이다 보니 정말로 바보 같은 글을 내놓게 되었다. 시간을 또 얼마나 죽였는지. 달리 할 대단한 일도 없지만, 죽인 시간과 결과물을 보면 한심해서다. 그런 생각이 엄습하여 오래도록 짙은 우울감에 짓눌려 헤어나지 못한다.

 

눈을 밖으로 돌려 보아도 마찬가지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미래가 있을까. 전염병의 창궐로 우울해진 우리의 일상이 회복될까. 생태환경이 변해가는 지구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라는 양대 혁명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이 인간이기가 가능할까. 일자리는커녕 할 일조차 없어질 무용지물의 인간이 생존의 위협 앞에서 문학을 예술을 탐할까. 탐해서 뭣할까. 다시 한 번 소설이야 말로 무용지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때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책들은 도착한다. 『수메르, 혹은 신들의 고향』을 다 못 읽은 터에 어쩌자고 『고대근동문화』를 주문했고, 느닷없이 『희망의 원리』 여러 권을 서재 깊은 안쪽에서 꺼내다 놓았다. 꼭 읽고 싶은 『도동 사람』 이라는 632쪽짜리 소설도 왔다. 또 시집들 수필집들이 도착한다.

책을 꼭 읽어야 됩니까? -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안과에 갔더니 안과의사가 하는 말이다. 이쯤 나이가 들면 책을 읽지 않고 살아도 되지 않느냐는 말인가 보다. 널려 있는 매체들에서 정보며 오락을 다 누리는 세상인데 굳이 책을 보려 하느냐, 시력을 더는 교정할 안경이 없다. 그런 얘기였다. 정이 책을 읽으려면 수정체를 바꾸는 수술을 하세요! 큰 병원으로 가셔서 상담을 해 보세요, 저는 이제 수술 안 합니다. 이상하다, 작년 이맘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안과의사가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이 사람도 시력이 엉망이 되었다는 말인가. 늙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

 

책을 덮으라고? 눈을 바꾸거나? 책을 보는 대신 다른 곳들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찬장이며 싱크대는 세월의 때가 앉아서 닦아도 닦아도 반짝임을 되살려내지 못한다. 젓가락을 넣어 다닐 왜소한 주머니들을 만들다 둔 바느질 상에는 천 쪼가리며 실밥들이 어수선하다. 책을 읽을 수 없는 시력이라는 안과의사의 말이 맞기나 한 것일까. 보이느니 먼지뿐이다. 글자는 보이지 않고 먼지만 보는 눈이 되다니. 회전근개 어쩌고 수술대에 잡혀갈 뻔했던 어깨가 다시 빠질 판이다.

밖을 바라보자, 창밖을 내다본다. 아, 또 유리창의 얼룩들. 애써 외면하며 베란다 밖으로 향한다. 모기장으로 어두운 서재의 창밖에 나팔꽃 송이들이 피어난다. 심지도 않은 곳에서 피어나는 분홍 나팔꽃. 베란다 천정까지 자라더니 창틀 위까지 뻗어나가던 줄기들을 더 어디로 보낼까 걱정하려던 참에, 줄기 뻗는 것을 멈추고서 꽃을 피운다. 신기하다. 요 며칠을 눈만 뜨면 분홍 나팔꽃 송이를 세러 베란다로 나간다. 한 두 송이가 피었다가 지면서 새로 두어 송이가 피어나는 줄기를 따라 넋을 놓는다. 스물 하나, 스물 둘……. 그래, 꽃들을 보라는 눈이구나. 두 줄기를 따라서 나란히. 초록색 포장노끈으로 만들어둔 길이 호강을 한다. 그런데 줄기가 자라는 것을 멈추고서 꽃송이를 피워내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 아이를 낳는 나이가 되면 더는 키가 크지 않듯이.

아차, 내 안경! 이번에는 안경을 찾아서 쓰고 핸드폰을 가지고 다시 나간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야 창틀 위 꽃송이들을 담을 수 있다. 날짜별로 컴에다 저장을 해둘 까 싶다. 돌아서다 보면 몇 년을 쉬다가 올해 피어난 소철의 새 잎들을 경탄한다. 소철의 나이 40대인데 – 우리가 이 집에 이사 올 때 그러니까 1986년 봄, 이미 상당히 무겁게 자란 화분을 어느 지인이 낑낑거리며 들여놓았으니까 – 그 모양새가 그리 많은 물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물주는 일에 등한했었다. 그것이 올해는 하필 어디서 묻어온 나팔꽃 씨가 소철 분 가장자리에서 잎을 띄웠기 때문에 충분한 물을 만났나 보다. 소철도 놀랄 만치 예쁜 새순을 함께 틔웠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햇빛을 받지만 물이 그리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에게도 물이 생명이라더니, 정신은…….

 

그렇게 글 쓰는 일과 관련해서는 바닥으로 가라앉아서 다른 짓만 하고 지낸다. 병원에 갈 일이 자주 생겨도 시집 한 권 들고 가지 않는다. 진료실 앞 의자에서는 아예 조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서 시간을 때운다. 바닥으로 가라앉는 거야, 바닥으로!

그렇게 바닥에 부딪다 보니 어느 순간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특징이 허구성이라던 문장이 떠오른다.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많지만,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 바로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21세기를 살아갈 상당한 정보를 주는 책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쓴 말이다. 이 자체가 허구일 리는 없다고 믿으면, 허구를 창조하는 언어가 진정 인간의 언어라는 말이 된다. 기대고 싶은 말이다. 함부로 기대지 말라는,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이라던 이바라리 노리코의 단호함에도 불구하고, 픽션을 쓸 수 있는 언어를 지녔으니 픽션을 써야하지 않을까. 흔들리는 이 마음 갈대와 같다.

 

 

_____________________
2021 이대동창문인회 「사피엔스의 언어」 , 『바람의 눈과 문 』, 이대동창문인회, 열린출판, 241~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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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1. 7. 10. 22:35

 

초겨울

 

 

 

초겨울이다. 느낌으로는 초겨울이 제일 춥다. 한낮인데도 쌀쌀함은 누그러지지 않는다. 뺨이 더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은 오늘 시작할 새 일자리로 인해서다. 요양보호사 – 명칭은 길지만 하는 일은 짧다, 시간제 돌봄이다. 첫날은 조건 때문에 밀당도 해야 한다. 흔하디흔한 아파트 대문 앞에서 숨을 고르는 찰나, 첫 번째 시험은 초인종이었다. 하필 초인종이 두 개가 있을 게 뭔가. 첫 동작부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신경이 곤두선다. 염려는 기우였다. 띵 똥 한 번에 재빠른 답이 온다. 예에, 하는 소리와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가 함께 다가온다. 대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얼굴은 - 누굴까? 돌봄 어르신은 80대 남자라던데, 그러니까 보호자인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혼자 오시는 거죠?

아, 네. 오늘 저 혼자 오게 되었어요.

아무려나, 어서 오세요. 아파트 쉽게 찾으셨지요?

네, 뭐.

 

첫 인상은 푸른 나무들로 계절이 겨울인 것을 잊어버리게 하는 집이었다. 넓지도 않은 거실인데 한쪽으로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창 쪽으로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즐비했다.

밖에선 얼겠지, 겨울 추위에. 그런데 환자 있는 집에 무슨 화분들을! 하긴 강아지나 고양이들이 튀어나오는 것 보단 낫겠다 싶었다.

그리고는 흔한 아파트 풍경이었다. 텔레비전, 소파 그리고 탁자. 좁은 거실에 탁자는 크고, 탁자 위에는 신문 잡지들이며 뭔가가 수북하다. 노인들이라니! 소파에 누워있는 사람이 내가 돌 볼 어르신일 게다. 소파에 누운 채, 낮인데, 그래서 아픈 거로구나, 생각을 하는데, 사람이 들락거려도 반응이 없다.

저, 그런데 태그는 어디다가, 출근부 말예요.

일단 집에 들어왔으므로 출근부에 태그를 해야 시간이 기록될 테니까 그것부터 물었다. 여자가 가리키는 곳은 신발장이었다. 뭐야, 날마다 신발장부터 열어야 한다고? 하필 냄새나는 신발장을! 하긴 어떤 집은 환자가 이 낯선 물건을 훼손하곤 해서 싱크대 문짝 안쪽에 붙여놓기도 한다더라. 싱크대고 신발장이고 냄새는 피할 수 없는 자리다. 뭐, 찌든 담배 냄새만 없어도 다행이다.

 

올라오세요. 오늘 이 양반 꿈쩍을 안 하네요. 점심 다 식는데도.

그러고 보니 식탁이 차려진 채다.

집안은 음식 때문이었을지 아늑할 정도로 따뜻하다. 아, 다행이다!

그럼 어르신이 오늘 특별히 아프신 거예요? 치매 5등급, 1939년생, 남자, 그 외엔 별 특이사항 말 없었는데요.

아뇨. 뭐랄까, 반응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지요. 원래도 말이 적은 사람인데, 최근에는 아예 입을 닫고 살지요. 하고 싶은 말은 겨우 눈으로 해요.

눈으로 말을 해요?

예, 그런 셈이에요. 뭔가 필요하면 그 쪽을 쳐다봐요. 그럼 냉큼 집어다 주면 또 말없이 받아들고. 그러니까 탁자 위 신문을 쳐다보면 신문을, 리모컨을 보면 리모컨을 집어달라는 것이고, 저쪽으로 멀리 냉장고를 쳐다보면 물을 달라는 식이지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이 집 보호자는 내가 환자 상태를 체크를 하는데도, 내 이름이 뭐냐, 오기로 확정한 것이냐 등을 묻지도 않고, 내가 온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듯 편안하게 말을 하고 있다.

예상 외로 젊은 분이 오셨네요. 나이 지긋한 분 부탁했었는데요. 헌데 진짜 젊은 분이 오니까 집안이 갑자기 팔팔 살아나는 것 같은데요.

 

이건 또 뭐야. 그러니까 내가 기대한 것보다 한참 많이 젊은데, 그런데도 통과라고? 아무튼 이 할아버지 서비스를 맡으려면 조건은 미리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저, 그런데 여기 서비스 와달라는 시간이…….

아, 시간요. 시간이 왜요?

저랑은 딱 맞지는 않은데, 과장님이 일단 가보라고 해서요. 저는 1시에 오는 것이라야 맞거든요.

1시라야 된다고요? 그럼 1시 반이면 못 오시나요? 그런 거예요?

그게 좀, 오전 끝나고 중간에 시간이 많이 떠서요.

어쩌나. 1시부터면 4시에 끝날 것인데, 내가 가끔 4시 좀 지나서 집에 오게 되니까 4시 반까지는 봐주셔야 하는데. 참, 선생님 이름이 지은이 씨라고? 차 과장님이 전화했어요. 지 선생님은 추가시간은 안 하실 거라고도.

네, 저는 해당 서비스 시간만 봐드리고는 끝이에요. 저는 아무래도 1시부터면 좋겠는데요. 점심시간에 집에 들어갔다가 오기는 너무 멀고, 그냥 오자면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서요.

…….

저쪽에서 말을 쉰다. 생각이 길어지나 보다. 아쉬우면 나한테 맞추겠지 뭐. 난 쉽게 생각했다. 일단 세게 나가자 싶었다. 초면인데 알게 뭐야, 아니면 말고.

시간이 정 맞지 않으시면, 그게. 아무튼 오늘은 제가 일단 왔으니까 세 시간은 해드리고 갈 거고요.

아니, 잠깐만. 뭐, 1시 반부터면 못할 수도 있다고요? 그럼 서로 15분씩 양보하면 어때요? 1시 15분부터, 난 혹시나 늦어도 4시 15분엔 돌아오고.

 

이번에는 내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밀린 것이다. 스스럼없이 시간을 정하고 만다.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인데 15분을 밀렸다니!

그렇다면 나머지라도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한다. 우리 요양보호사가 해드리는 것들 서비스 범위는요, 라고 말을 뺐는데 그것도 쉽게 통과였다. 환자 아닌 가족을 위한 생활지원은 금물이라는 것부터, 책에 써진 것 외우듯이 다 읊어댔다. 내가 놀라는 눈빛을 하자, 센터에서 보낸 파일 안에 다 있어서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다만 부엌에서는 점심 설거지만 부탁한다면서, ‘설거지만’이라고 강조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환자 밥 챙겨 먹이는 것 - 만들고 먹이고 설거지하고 - 그것과 2인분 설거지만 하는 것의 노동량을 따져보려다가 말았다. 음식 만들기가 더 까다로울 테니까. 엉거주춤, 그것도 밀린 사이에 보호자는 말을 이어갔다.

것보다 문제는, 뭐냐면 우리 양반이 말을 잘 안 들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신청도 안한다니까요. 그게 좀 힘드실 거요.

네에, 그거야 우리 일이니까요.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움직이는 반경은 멀리는 안 되는 것 아시지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쐐기를 박았다.

멀리요? 산책은 멀리 안 가시는데, 못 가는데.

심부름 같은 것 말이죠, 혹시라도 무슨 심부름이나.

심부름이요? 심부름 무슨?

심부름을 이해 못하는 것이 이 집에선 심부름은 없나 보다. 잘 되었다. 보통 혼자 사는 어르신들 돌 볼 때에는 이것저것 해달라는 부탁들이 많다. 마트며 반찬가게 들르라는 것은 기본이고, 가끔은 엉뚱한 부탁도 한다. 진짜 엉뚱한 심부름 말이다. 심지어 폐지나 병 같은 것, 모아놓은 고물을 팔아다 달라는 부탁을 해서 고민이라는 동료도 있었다. 고물을 모을 정도인데 재가방문요양 서비스라고? 잠깐 의아했지만, 아서라! 복지사회는 좋은 것, 긁어 부스럼 낼 일은 아니다 싶기도 했다.

아, 물론 병원 가실 때는 함께 모시고 가죠! 병원엔 멀리 가더라도 환자의 진료 기록이 컴퓨터에 뜨니까요. 우리 요양보호사 행동반경과 환자가 함께 있으니까요.

엄격하군요. 그래야 하겠지만요. 암튼 그럼 되었네요. 1시 15분에 오시는 걸로.

우물쭈물 일은 결정이 났다. 이 보호자는 일을 너무 쉽게 결정한다. 내가 그만 그 페이스에 밀렸다. 평상시 내 일은 아니다. 뭐, 정 아니면 한 달만 하고 말지. 아쉬운 건 언제나 노인들, 내가 갑이면 갑이지 을은 아니다. 일 할 데는 널려있다. 뭐, 잠시 안하고 쉬면 쉬는 거다. 나는 결코 생계형 노동자는 아니니까.

 

이쪽으로 와 보세요. 여기 안방이 환자가 쓰는 방. 여기 욕실 쓰고. 그런데 주로 거실에 저러고 있지요. 그런데 지금도 자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선 점심 먹을 수 있게 해야겠어요.

여기요, 일어나 보세요. 오늘 새로 지 선생님이 왔어요. 말동무 해드릴 거요. 손잡고 산책도 하고. 나는 비틀거리잖아요! 어디, 일어나 봐요!

눈치를 보니 내 차례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저는 지은이라고 하는데요. 오늘부터 어르신 돌봐드리러 왔답니다. 어르신, 일어나 보세요. 점심시간이 늦었거든요.

…….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눈매가 촉촉하다. 계속 감고 있어서 물기인가? 아니, 80대라고 했는데 소년 같은 눈망울이네. 백발의 소년이네.

어르신, 저는 지은이고요. 이제 일어나셔요, 식사하시게요. 식사하시고 나서…….

뭐? 지 - 은 - 이? 지은이라? 책을 썼다고? 지은이라면 내가 지은인데, 이게 대체?

입을 연 것은 반가우나, 하필이면 내 이름이 귀에 걸렸나 보다. 인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버렸다. 어르신이 벌떡 일어나더니 탁자에서 신문이며 책들을 주섬주섬 치우면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아니, 내 책이, 책이 어디로 갔나.

무슨 상황인가. 무슨 책을 찾을까. 부엌 쪽에서는 내색이 없다.

엄마아, 준이 엄마, 내 책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아내를 찾는 모양인데, 그런데도 보호자는 무반응이다.

아니, 어르신, 뭘 찾는 건 나중에 하시고요. 우선, 인사드릴게요.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이 지은이라고요. 이름이 지은이.

아하, 지가 은이라고. 지씨라. 어디 지씬가?

충주 지씨예요. 어르신은 이름이,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나, 나는……, 에이, 애들이 어른 함자를 묻나. 내가 내 이름을 모를까 봐?

아유, 어르신, 죄송해요. 어서 일어나셔요. 식사시간이에요.

 

그렇게 해서 점심 식탁에 모여 앉는 데까지 또 십여 분이 흘렀다. 그 상황에 더해서 손을 씻고 오느라고 그런 것이다. 노인들이 화장실에 가면 십분은 기본인 경우도 많은데, 이 어르신도 그런 건가 보다. 대소변 문제는 없나? 화장실 쪽으로 따라가면서 직업적인 걱정이 섞인다. 그 사이 냄비들이 가스레인지 위로 다시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밥과 국이 올라온 뒤에도 한참을 레인지 앞에 서 있던 보호자가 숭늉과 누룽지를 내온다.

뭐야, 숭늉을 먹는 집도 있어? 의외이기도 하고, 이러다가 된통 힘든 집에 걸린 것이나 아닌가 하는 불안도 스멀거렸다.

지 선생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아, 네.

보통은 1시 반까지는 밥상이 끝나요. 오늘은 늑장을 부려서는.

상관없어요. 어떻게 드시나 볼게요. 근데 엄청 골고루 차리셨네요.

뭘 먹을지 몰라서요. 아무튼 이제 말 좀 걸어 보세요! 그것이 문제랍니다. 말을 들어야 뭘 골고루 먹게 하거나 말거나.

맞다, 내 차례다.

어르신, 맛있는 것 많이 차려주셨네요. 여기 동치미, 이 국물부터.

내 목소리는 원래 큰 편이다. 또 여기 사람들과는 다르게 서울말투를 쓴다. 그래서일까? 말을 듣지를 않는다던 어르신이 뜻밖에 반응을 보였다. 비뚤게 앉은 자세도 ‘달래서’바로 잡았다. 그런데 먹는 일에 조금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이것 드셔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그릇째로 다 비우려고 한다. 저것 드셔보세요, 그러면 그것을 또 그릇째로 다 비우려고 한다. 아, 얼핏 보기에는 정상인데 인지문제가 있기는 있구나.

 

 

아주 엉뚱하게, 혼자 단출하다 못해 초라한 밥상 앞에 앉아있을 어머니가 아른거린다. 일하는 중에 다른 쪽으로 빠지는 일은 드문데, 스스로 갑작스럽다. 어머니는 아예 밥상을 차리지도 않는 끼니가 많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밥상을 챙기는 대신에, 돈을 번답시고 생면부지 ‘어르신’의 밥 시중을 들고 있다.

내갈비도 여적이고마 또 도가니탕을 보냈디야. 그리 보내쌓면 뭘햐. 느그덜이나 노나 먹지야. 느그 아부이가 계심사…….

홈쇼핑에서 갈비탕을 사서 보내드렸더니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는 맛있는 것을 앞에 두고서 아버지 생각을 하신 거다. 그러고서 냉장고에 그냥 쌓아둔다. 누가 집에 찾아가서 함께 굽거나 끓이거나 해서 드려야 드신다. ‘내’갈비라고 하시는 것은 LA를 ‘내’라고 읽으시기 때문이다. 에이자 위쪽이 넓게 쓰여서 그리 보이기도 한다. 아무려면. 드시기만 한다면. 그런데 아버지 말씀 꺼내시는 것이 수상타. 아버지가 고기반찬을 좋아하신 것은 맞지만, 돌아가신 것이 대체 언제 적 이야기인가 말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계신다. 장롱 속에서 모자로도 살아있고, 화장대 서랍 속에도 살아있다. 이 참빗이야, 느그……. 여전히 아버지를 집안 어딘가에 숨겨 놓고 사시는 통에, 우리는 어머니 앞에 가면 조심해야 한다. 아버지가 언제 되살아나서 우리랑 섞여 앉아계실지 모르는 일이니까.

점심은 드셨을까. 요즈음 엄마한테는 둘째언니가 챙겨 보내는 뉴케어가 답인가 보다. 연명은 되실 테니까. 아버지부터 우리 형제자매들, 그러니까 온통 거구들인 지씨들에 비하면 어머니는 원래 작은 체격이다. 나이 드시면서는 더더욱 작아져서 아기 같다. 아기 같은 어머니는 유난히 추위를 탄다. 내가 엄마를 닮았다. 이런 겨울 날, 추워서 방문일랑 열지도 않고 방안에서 무얼 하실까. 전화라도 하고 지낼 형제자매도 없으시다. 손위 외삼촌 한 분은 돌아가셨고, 다른 식구들은……. 어머니는 문경 외가 말씀을 극히 삼간다. 문경을 떠난 것이 하도 오래전 일일 뿐 아니라,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잠기신다. 문경의 채씨 세거지의 비극, 아니 참상, 아니 학살은 - 멍해 있는 사이 점심이 대충 끝난다.

 

점심 뒤처리를 하는 동안 - 오늘은 첫날이라고 함께, 주로 주인이 치웠다. - 어르신은 다시 거실로 나가서 소파에 ‘제 자리’하고 있었다.

커피 하죠? 점심 후엔 일단 피곤을 덜기 위해서 한 모금. 잠깐 이리 오세요.

저는 가지고 왔는데요. 두 잔째 커피를 따르던 보호자의 말을 내가 막으며 에코백에서 보온병을 꺼내왔다. 꺼내 입으려했던 오리털 조끼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이집은 정말 따뜻하다.

예? 커피를 가지고 다녀요? 우리 집에 오면서 커피를 들고 왔다고요?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나겠어요.

아니, 서비스 다니다 보면 커피를 전혀 안 드시는 어르신들이 많아서. 또 제가 원래…….

원래고 뭐고, 집에 커피 둘 다 있어요, 아메리카노도 양촌리도.

양촌리요?

아, 밀크설탕커피, 왜 옛날 농촌드라마에서 달달하게 마시던 커피요. 거기가 양촌리였나 뭐 그래요. 아무렇거나, 오늘은 우선 이 양반 병력을 보실래요? 가만, 건강메모 - 여기 맨 앞에는 평생 큰 병 앓은 내력이고, 그 다음으로는 올해 이 요상한 발병부터 간간히 메모 해 둔 것들.

아무렇지도 않게 핸드폰을 내민다. 갤럭시 노트다.

그러니까 지병이 꽤 있었다가, 아, 네, 약간의 인지문제 그거야 보통 그러지만, 루이소체? 이런 종류는 처음인데요. 가만, 환시와 악몽이 문제라고요?

엠알아이며 브레인페트까지 다 검사 했어요. 환시라는 것 첨엔 무섭더라고요. 심한 착각, 착시 그런 거죠. 가끔씩 엉뚱한 질문에 놀라곤 해요.

어떤…….

조용히 앉아 있다가, 우리 지금 둘이만 있는 사는 거 맞아? 이러는 거예요. 누군가랑 셋이서, 어떤 때는 여럿이서 함께 살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의사선생님 말로는 실제로 보여서 그렇다니, 좀 섬뜩할 때가.

그러시겠네요. 그럼 처음보다 더 나빠지신…….

내가 아나요, 병원에서도 검사를 해서 수치가 나와야 알던데요 뭐. 아무튼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지 말을 좀 시켜 보세요. 소뿔은 단 김에 빼랬다고, 1라운드가 중요할 것 같아요. 이리 오세요.

 

등을 떠밀리다 싶게 거실로 나온다. 뒤따라 나오던 보호자는 다시 한 번 우리를 소개한다. 상황을 확실하게 해두려는 것 같다.

저기요, - 남편한테, 저기요? - 조금만 앉아서 쉬다가 누우세요! 오늘 지 선생님, 여기 지 선생님 만나서 반갑지요? 우리 애들 또래 같아요. 먼 데 사는 딸이 왔구나, 그리 생각하세요! 자, 지 선생님!

공이 내게로 넘어 왔다.

어르신, 오늘 저 만나서 기쁘시죠?

대뜸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던 보호자는 자리를 뜬다. 큰일이다. 첫 번째 펀치에서 성공해야할 텐데……. 은아, 힘내자! 할 수 있어!

 

환자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 나에게로 집중시키기 위해 내가 가진 기술을 발휘할 때다. 어르신들을 보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전혀 먹히지 않는다. 빤히 쳐다보기만 할뿐 입은 꽉 다문 상태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유리창 쪽 제법 큰 화분들 앞쪽으로는 자잘한 다육식물들과 선인장들이 있었다. 촘촘한 가시들이 불안하다. 어찌 보면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눈앞에 보이는 화분들로 화제를 옮겨 보기로 한다.

어르신, 아파트에서 어떻게 이렇게 큰 나무를 키우셨을까? 이 키다리, 아니 이렇게 잎들 무성한 것도 있네요. 이 가지는 제 키만 하겠어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어르신, 그런데 이것들 이름 좀 가르쳐 주실래요? 제가 처음 본 것들이라서 궁금하거든요. 요것들은 다육이라죠? 다육이라도 따로 이름이 있다던데. 이 솜털만 많은 꼬맹이 선인장들, 이것들은 또…….

이런 것들 처음 보나? 뭐가 그리 궁금하나?

옳거니. 선인장에서 끌려왔다. 계속 선인장으로 가보자.

이렇게 어찌 보면 못 생긴 것들인데, 죄송해요, 근데 귀하게 귀하게 키우시네요.

갑자기 눈을 들어 이리저리 돌린다. 사람을 찾는가 보다. 보호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아까 방문 소리가 나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 있는지 아무 기척이 없다. 어르신이 턱을 들어 부엌 쪽을 가리킨다. 보호자를 오라는 건지, 보호자를 가리키는 건 맞는 것 같은데 뜻을 모르겠다.

보호자분요? 할머니요? 안 보이시는데요. 왜요?

저 사람 거요.

아니, 여기서 주인이 따로요?

그것만 중하게 보듬는다 말이요.

보듬어요? 선인장을?

아, 보듬어 키우다시피 한단 말이지. 물어봐요. 밖에도 끔찍이 챙기는 것들 있어.

베란다 쪽으로 턱을 들면서 말한다. 옳거니, 화초들에 관해서 이견이 있구나. 호불호가 다르다 이 말이겠다.

밖에 또 화분들 많아요? 그러네요. 밖에도 많네요. 그럼 어르신은 어떤 것들을 좋아하시나요? 밖에 내다보고 올게요. 같이 보실래요?

아이쿠, 성공이다. 화초를 뭐라 가르쳐줄 게 있는지 부스스 일어난다.

이쪽으로, 예. 자, 가시게요.

정말 베란다에는 놀라울 정도로 크게 자란 선인장들이 고개를 꺾고 있었다. 천장에 닿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리고 자란 것들이다. 불쌍타. 이 추위에 너른 창이 반쯤 열려 있는데도 베란다 볕이 좋은 듯 했다. 아예 온실처럼 푸른 잎들이 무성하다. 넝쿨로 자라는 것들도 여럿 걸려있다.

우와, 선인장들, 소철인가, 아예 꽃집 같은데요. 어르신은 어떤 걸 젤 좋아하세요?

해피트리, 요거 해피트리야.

아, 그런 이름도 있었군요. 해피……. 그럼 이 엄청 큰 나무는요? 나무 가지 요거 젤 큰 거는 제 팔 길이만 하네요. 고무나문가요?

맞아, 요거 잎 끊어지면 그 자리에서 하얀 고무액이 흘러요. 눈물같이 뚝뚝.

눈물 같이요? 어머나 시를 쓰시는 분 같아요.

시를?

예, 시인 같으세요.

시만 쓰면 다냐, 살림이 기우는데…….

네?

몰라, 다 잊었어. 나는 다 잊었어.

입을 다시 꼭 다문다.

어르신, 어르신?

다 잊었어, 다.

그것뿐이었다. 눈을 다시 반쯤 감더니 그런 채로 소파로 향한다. 키 큰 등의자에 부딪지 않게 하려면 손을 잡아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정적이 감돌았다. 사뿐 발자국 소리와 함께 보호자가 나타났다. 뭐라고 부르지? 잠깐 고민이 되었다. 울 어머니 또래는 한참 아닌데 어머님이랄 수도 없고. 보호자님이라고 하자니 너무 딱딱하고. 이래서 독거노인 돌봄이 속 편한 것이구나. 이게 뒷북이다,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하다니. 돌봄 대상과 단 둘이가 아니라 보호자와 삼각관계가 되나 보다. 삼각관계라는 것이 연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어. 돌봄 시간 내내 보호자가 함께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불편감이 확 밀려왔다. 지금이라도 말아? 집을 나서면서, 아니 나서기 전 5분 전에 조용히 말하면 된다.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요, 저한테는 시간이 아무래도 맞지 않아서요. 이렇게 말하면 감정 섞이지 않은 허물없는 이유가 되어 줄 것이다. 일단은 호칭 없이 말만 하자.

어르신이 다시 주무시려나 봐요. 정말 말씀 없으시네요. 시만 쓰면 다냐, 어쩌고 그러시던데, 무슨 말씀이셨을까요? 어르신 시인이세요?

…….

아무 대꾸 없는 것이 노부부가 똑 같네, 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사람이 말을 하는데 무슨 반응이 저러나. 보호자는 말은 없이 무슨 주머니 같은 것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잠 잘 것 같다는데 부엌엘? 정적이 괴롭다. 부엌에 따라 들어가 보니 구석에 있는 전자레인지에 그것을 돌리고 있다. 구수한 향기가 피어난다. 꺼내 온 것을 보니 핫백이다.

낮잠 청하니까 발 따뜻하게 해주려고요.

아, 네, 핫백 냄새가 좋으네요. 뭐예요?

현미 자루. 몇 년 쓰면 알게 모르게 점점 타버려서 바꿔줘야 해요. 한 번 바꿔 넣었어요. 이건 안심이죠. 전기방석은 온도조절 잘 못하면 큰일 나겠더라고요.

아, 그래요. 그러네요. 냄새 너무 좋아서 저절로 잠이 올 것 같네요.

정말 그랬다, 잠에 취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따뜻함! 향기!

 

 

서울의 겨울은 정말 추웠다. 벌써 30여 년 전, 서울 살이 첫 해, 봄여름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고 갑자기 겨울이 닥쳤다. 갓 상경한 젊은 애들을 위한 방은 하나같이 딱 한 뼘 마루, 얄따란 방문, 그리고는 방이었다. 반대쪽에 달랑 봉창이 있었지만, 황소바람은 냉돌까지 내려꽂혔다. 시골 고향을, 따뜻한 아랫목을, 더 따뜻한 엄마 품을 떠올리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나면 눈까지 얼굴까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우리가 결혼을 했을 때, 그해 겨울에는 따뜻한 몸이 옆에 있었다. 아, 사람도 따뜻하구나. 엄마가 아니어도 따뜻하구나. 처음에는 나보다 더 따뜻한 몸이 내 차가운 몸을 차갑게 느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을까. 애기 기저귀가 모자라서 자다가 밤 빨래를 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잠들어 있던 그이가 내 손에 깜짝 놀라 움찔했을 때서야 깨달았다. 내 손이 차가울 때마다 얼마나 차가웠을까. 깨달음이란 언제나 늦게 온다. 그 뒤로는 그이가 내 손을 잡아줄 때라도 손이 자꾸 움츠러들었다. 방안을 따뜻하게 해놓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온 것이 맞다. 보일러 더 올릴까? - 뭣 하러, 충분하잖아! 정 추우면 옷을 더 입지! 혹시 이런 대답이 두려워서 추위를 그냥 견뎠다. 지금은 보일러 더 올릴까 물어보지 않고 더 올린다. 춥지 않아도, 춥기 싫어서, 추웠던 날들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디에서나 따뜻해야 몸이 풀리고 마음이 풀린다. 이 집은 일단 따뜻하다. 그것은 합격점이다!

 

지 선생님, 잠이 온다고요?

아아니요!

핫백 같은 것, 이이는 전엔 뜨거운 걸 참 싫어하더니. 나이 들면서 바뀌네요, 사람이. 시만 쓰면 다냐, 그랬다면, 그거 「넋두리」란 시예요. 젊어서 술을 마냥 마시고 다닐 때면 내가 놀렸어요. 시만 쓰면 다냐 / 살림이 기우는데 / 시만 쓰면 다냐 / 공자 말씀에 토나 달고 앉아서 / 술잔에 코를 박고 졸기나 하고, 그런 비슷한 시요. 그땐 못들은 척 하더니만, 그걸 어찌 기억하냐. 소싯적 이야기구만,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그런데 사람이 엄청 변해요. 먹는 것도 완전 달라져서, 게다 새우다 먹는 시늉만 겨우 했던 것들을 지금은 엄청 좋아해요. 평생을 살고도 속마음은커녕 좋아하는 음식도 짐작을 못하네요. 지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사람이 늘 한결같던가요?

 

사람이 한결 같은 존재인가, 나이 들어 또는 어떤 상황에서 성품이 바뀌기 마련인가.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이 할머니, 사람을 통째로 연구할 일 있나.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걸까. 인지문제가 생겨서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일까. 그래도 생뚱맞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철학을 하재? 그래도 대꾸는 해야 했다.

별로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그래도 사람이 변하는 거라서, 애들 두고도 이혼도 하고.

아무리 얼결이라도 그렇지, 갑자기 내 말이 왜 이혼으로 튀는지 나도 모를 일이었다. 내 인생에 이혼은 찾아 볼 수 없는 단어이다. 자라난 곳 청원의 시골 정서에 더해서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한 번 맺어진 인연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고 배웠다. 요란하게 연애하다가 달리 결혼하는 일들도 가까운 주변에는 없었다. 그런 내 입에서 느닷없는 이혼 소리가 튀어 나오다니.

아니 제 말은요, 연애결혼 해놓고도 싸우기도 하고 혹시 이혼도 하고 그러는 걸 보면요.

 

그렇게 말하면서 정순이 생각이 났다. 일하다가 만난 친구인데, 동갑이라서 친구하는 사이다. 세상에나, 시어머니 중풍 간호를 8년씩이나 해냈다는 착한 정순이. 그때는 요양병원이 흔치도 않았고, 입원한다 해도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겠지. 뇌졸중이 중풍으로 끝나도 온전히 가족의 몫이었다. 그랬던 정순이 이혼을 했다. 이혼을 당했다. 일찍 정년을 한 남편이 단란주점 여자한테 빠졌더란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하고 흔한 스토리인데, 그런 일이 드라마가 아니라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양심은 있었던지 당시 1억5천쯤 하는 너른 집을 팔아서 5천인가를 아내에게 위자료로 줬다는 소문이었는데, 쌤통, 지금 시가로는 15억도 더 간다 했다. 정순은 노총각 동창생을 만나서 재혼도 했으니 덜 불쌍하다. 그래도 흠은 흠이다, 이것이 나 꼴통의 생각이다.

우리는, 나는,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이상하게도 그이에 대한 내 감정은 여전히 처음의 설렘에서 퇴색되지 않았다. 불만이 있어도, 내가 싫어하는 일을 그이가 하더라도, 내가 싫은 일을 내게 하게 하더라도, 결국 다 이해해버리고 마는 나는 바보 멍청이다.

그래도 천성이라는 것도 있고, 글쎄요. 얼른 말을 바꾸었다.

나는 아무래도 흑백으로 나누어서 답하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딱 잘라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 하고 정해본 일이 드물다. 정식으로 이유를 대면서 이 일은 해야 하니까 한다 라거나, 하지 말아야 해서 하지 않는다는 판단은 서지 않는다. 물론 손익은 반드시 따진다. 계산이, 예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어딘가로 쏠리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안 한다. 그뿐이다. 이런 대화는 머리 아프다.

 

 

익은 멜로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린다. 내 것이다. 죄송해요, 라고 하면서 얼른 집어 들었다. 속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일단 어색한 대화에서 빠져나왔으니까.

응, 데레사 언니. 나 지금 일하고 있어서. 아니, 괜찮아요. 좀 있다 저녁에 내가 전화할게, 으응.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데레사, 세례명인가 보다. 엿듣게 되네요, 들리니까. 지 선생님 성당 다니요?

아, 네. 집안이 다요. 얼른 알아들으시는 것 보니까, 여기 어르신들도 혹시?

아니요. 우린 아니에요. 사람은 결국 평생 장님이라는데, 신앙도 없고.

장님요? 평생?

예, ‘사람은 평생 장님이다.’ 괴테라던가, 어디서 본 명언이요. 산다는 게 뭘 모르고 그냥 살아가는 것이니까 장님이라는 거죠.

 

괴테고 뭐고, 평생 장님이라니. 이 아줌마, 사람 멍 때리게 하네. 미래를 설계하고 참고 견디면서 준비하면 보람된 내일을 맞을 것이라고, 그렇게 의심 없이 살아온 나로서는 듣기 허망한 말이다. 기도하고 노력하고 주님의 인도에 따르고. 그런데 이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라니 의지할 데가 없겠다 싶었다. 일 없이 나는 신앙을 권면하는 역할놀이에 들어갔다.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 라고 무조건 시작해보시라고, 피라클리토 성령에 관해서도 말하기 시작했다. 들은 척 마는 척이었다. 이 집 사람들은 노부부가 다 내숭이다. 보호자랑 맞을 필요는 없겠지만, 뭔가 영 엉뚱하다.

지 선생님, 면전에서 좀 그렇지만,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 참 좋으요. 거기다가 신앙까지, 복 받은 사람이요.

제가 복을? 복을요? 웬 복?

전복을! 농담! 지 선생님은 전혀 50대로 안 보이요. 해맑고 건강한, 몸과 맘 둘 다 건강한 사람 인상이라서 너무 좋으네. 잘 살아왔다는 증거인가.

무슨 소리야. 언제 봤다고 농담씩이나! 요양보호사나 하고 있는 나더러 잘 살아온 것 같다고? 보통은 내가 이래 뵈도 어엿한 건물주라는 것을 알 리 없으니, 다들 그저 도우미나 알바 취급 아니던가. 물론 나는 잘 살아왔다. 당장 돈 아쉬워서 일 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시내에는 3층 건물을, 시골에는 농가주택을 가지고 안정적인 노후를 기대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맘 추슬러가며 일하고 모으고 일하고 모으면서 살아왔는데. 곁눈 팔지 않고, 곁눈 팔지 않으려고 맘 잡고, 맘 잡고, 맘 잡고! 그러니까 잘 살아왔는데, 잘 살아왔을 거라고 남이 말하니까, 갑자기 잘 살아오지 못한 느낌이 드는 건 또 뭔가. 지금 어쩌자고 두 타임씩이나 일을 하려는 것인지. 이 자체가 잘 살아왔다는 말과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도 정말 이상하다. 인상 좋다는 말, 어색하긴 해도 듣기 좋은 말들이라서 이 집을 거절하고 갈 이유가 적어진다. 당장 도움이 필요해서 나를 붙잡으려는 뻥튀기는 아니겠지, 설마. 그런데 이 할머니, 날 언제 봤다고 의심 없이 믿는 눈치네. 어쩐다?

 

보호자는 순간 어르신 쪽으로 다시 가더니 들여다본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는데 그냥 살핀다. 살짝 건드리면서 깨운다.

보세요! 여기 지 선생님이랑 사귀어 봐야지요. 무슨 말이든 해 봐요. 심심하면 지 선생님이 내일 우리 집에 안 올지도 몰라요.

협박 아닌 협박이다. 그런데 그 말에 움찔 반응을 보인다. 어르신이 몸을 일으킨다.

아, 다행이네. 지 선생님, 이쪽으로, 여기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세요. 우리 둘만 있으면 정말 심심해요. 그동안 할 말을 죄다 해버려서 새로 할 말들이 없거든요.

정말 내 차례다.

어르신, 네, 그렇게 앉아서 기지개도 켜시고, 자리에서 운동도 하고 그러시게요. 자, 우선 두 손을 쥐었다 폈다! 이렇게요. 팔도 흔들어 보시고, 어깨도 들썩! 제가 처음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걸음은 잘 걸으시는지. 자, 일어나서 조금 걸어보실래요?

보호자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어르신이 일어나 앉았다. 어깨도 들썩들썩 해 보인다. 아, 다행이다. 반응이 너무 없었더라면 사실 할 일이 없으니 어색할 노릇이다.

자, 이렇게요! 으샤, 으샤! 그런데 혹시 밖에 나가보실 생각 없으세요? 오늘 쌀쌀해도 바람 별로 없어요, 지금 햇볕이 너무 좋아요. 조금 있음 해가 사라지잖아요.

어르신이 두리번거린다. 아내를 찾는다. 아내는 어느 새 반코트를 가지고 나온다. 체크 머플러도 함께다. 더러 산책을 나가곤 했는지, 어르신 혼자서 천천히 겉옷을 입고, 장갑도 끼고 마스크까지 챙긴다. 아내가 머플러를 고쳐 매준다. 예쁘게 매만져주기를 기대하는 소녀처럼 얌전하게 내맡긴다.

마스크까지 중무장이시네요, 요기 아파트 마당만 갈 거 아녀요?

아, 황사를 싫어해서 마스크를 꼭 끼고 나가신대요. 겨울엔 따뜻해서 좋으니 일석이조죠, 그렇지요?

아내도 겉옷을 챙겨 입고 나선다. 자, 그럼, 오늘은 셋이서 함께 산책을 나가 보죠.

오늘 셋이서 함께.

어르신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갑자기 즐거운 기운이 감돈다.

대문을 열자 찬 기운이 확 밀려든다. 좁은 대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켜서 나서면서 나는 이들과 함께 다시 이 따뜻한 집안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어쩌면 내일도 그 다음 날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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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문예 2021 여름호 통권 64호, 208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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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0. 12. 27. 15:10

날마다 시작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 법정스님

 

 

날마다 시작이야, 은아, 다시 시작이다. 힘 내, 아자!

일곱 번째 시작이다. 대부분 그렇듯이 아파트다. 차에서 내려 12월의 매서운 바람을 느끼며 단지 내를 둘러본다. 전체적으로는 낡은 느낌이지만 바깥 인상이 깨끗한 편이다. 동과 호수를 확인하면서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안온한 기운이 돈다. 계단을 오르면 작은 대문이 기다리리라. 초인종을 누르면 어떤 사람들과 만날까. 오늘도 우리 집 대문을 나서기 전부터 스케줄을 확인했다. 내가 대단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그 반대, 일자리가 자주 바뀌고 또는 여럿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투잡은 아닌 것이, 한 가지 일인데 근무 시간과 일자리가 달라서다. 일자리에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지금처럼 복지관 소속으로 재가방문요양을 맡으면 지 선생님이 되고, 요양병원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 지 여사님이 된다. 직업군의 이름은 요양보호사, 나는 요양보호사이다.

 

나를 설명해야 할까, 입을 열자면 아마도 그렇겠다. 지은이예요, 그렇게 내 이름을 말하면 처음 듣는 사람들은 대개 조금 이상해한다. 어렸을 때는, 특히 학교에서는 꽤 성가셨다. 책가위에다 내 이름 지은이 석자를 쓰고 나서 책을 열어보면, 책마다 진짜 지은이가 있다는 사실에 나도 혼란스러웠다. 지금이야 유투브가 책들을 온통 삼켜버린 세상이라서 지은이가 어떤 뜻인지 아무도 별반 상관하지 않는다. 지은이라는 뜻으로 쓸 곳에도 언제부턴가는 저자나 작가라고 하니까 뭐. 물론 내 이름이 지은이인 것은 내 탓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도 영이와 순이 아래 또 낳은 딸을 은이라 이름 지었을 뿐으로, 내가 태어났을 1966년 당시에 우리 부모님이 지은이가 책이나 노랫말을 짓는 사람을 일컫는다는 것을 의식했을 턱이 없다. 자라면서 여전히 어린 내가 이상하게 여겼던 것은, 왜 농사짓는 사람은 지은이라 하지 않는가, 그런 정도였다. 밥 짓고, 옷 짓고, 약 짓고……, 여기저기 지은이가 더 많은데.

 

다시 오늘이다. 오늘 처음 방문하는 집에는 조금 어색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보통 때라면 우리 복지관의 과장이나 담당 복지사가 함께 방문하여 나를 소개해줄 것이다. 오늘은 이 집에 혼자 오게 되었다. 혼자 들어가서 자기소개를 한다? 오랜 직장생활을 해왔지만 그건 좀 쑥스럽다. 누군가 소개를 해주면 편하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이쪽은 지 아무개 선생님이세요! 어때요, 새 선생님 좋으시지요? 이제 날마다 댁을 방문해서 어르신을 도와드릴 거예요! - 지 선생님, 앞으로 어르신 잘 돌봐드리세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요양보호사를 절대로 아줌마라 부르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는 다짐도 시켜둔다.

그런데 오늘은 일이 꼬였다. 사회복지사 정 대리가 하필 연가를 낸 날이라서 차 과장이 동행키로 했었는데 그것도 틀린 것이다. 나는 벌써 출발해서 가고 있는데 전화가 떴다. 운전 중이라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어쩌나! 아무캐도 지 선생 혼자 가줘야 겠네여! 나 사고났어여. - 엥, 다친 거예요? - 아니, 아녀요. 살짝 인데 시끄럽네여. 미안해여, 그 집 오늘 꼭 가야 해여! 복지관을 나서며 차를 후진해 돌리려다가 화단 턱에 걸렸는데, 급히 뺀다는 것이 들어오던 작은 트럭과 스쳐서 실랑이가 벌어졌단다. 그렇다고 일주일 째 돌봄서비스가 끊긴 집이라서 미루기는 미안한 일이라고, 오늘 복지관에서 새 선생님이랑 방문한다고 알려놓았으니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아무튼 그냥 혼자서 방문하랬다. 나 또한 이만한 일로 마음먹은 스케줄을 바꾸긴 싫었다. 자라서는 거의 꾸준히 직업을 가지고 살아온 나로서, 무엇이든 처음 하는 일이 한두 번이었을까. 이쯤은 약과다, 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대문 앞이다. 아파트는 어디나 역시 작은 문이다. 건물 중에서 가장 초라한 곳이기도 하다. 이 대문에는 교회나 성당 표시 대신, 입춘대길 그리고 또 하나 사자성어가 붙어있다. 입춘이 언제 적인데! 입춘은 보통 2월 4일이다. 한 해가 다 가서 낼모레면 동지고 다시 새해의 입춘이 다가올 시절인데 봄 여름 가을 지나도록 여태껏 입춘대길이란다. 이 새로 만날 어르신이 고리타분한 노인일까, 살짝 걱정이 올라온다. 그런데 아무튼 와버렸다. 초인종을 찾는다.

초인종으로 가르는 세상은 많이 다르다. 내가 일을 망치고 나온 여섯 번째 집이 눈에 선하다. 그 어르신은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재가장기요양급여를 받는, 곧 우리 요양보호사들의 돌봄을 받는 대상은 할아버지들 보다는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남자는 아내가 있을수록 여자는 남편이 없을수록 장수한다더니. 하긴 이 말도 참 우습다. 앞뒤가 이렇게 맞지 않는 말이면 창과 방패라는 모순인가. 신상정보를 요약하자면, 70대로 시영아파트에 거주하는 독거노인 할머니 - 거기까지는 우리 복지관 담당에서는 흔한 조건이었다. 이처럼 보호자가 없는 경우도 흔하고, 어떠한 염려도 없었다. 그것보다 실은 신체적 조건이 문제다. 처음 소개받을 때 다행하게도 치매는 아니라 했다. 거동도 휠체어에 의존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딱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면 전임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장 그만두곤 했다는 점이었다. 할머니인데 뭐 어떠랴, 그렇게 시작했는데 곧 심상치 않은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이 일에 자신이 있는 편이다. 우선 간호사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정확히는 간호조무사다. 간호전문대에 합격을 해 놓고도 사정은 도저히 안 되고, 간호사는 되고 싶고. 나 같은 간호사 지망생은 간호학원을 거쳐서 간호조무사가 된다. 전문대를 마치고 간호사가 된다 해도 간호대학 졸업생과는 병원에서 처우가 다르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무엇보다 승진이 없다. 수술실에 오래 근무를 해봐도 마찬가지, 수간호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간호조무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규모 개인병원에서 자잘한 온갖 일을 하거나, 큰 병원에 가면 평생 3교대 근무다. 그러다 보니 만 나이로 50이 되었을 때, 아니 그 전부터, 남편 말이, 50까지만 일하고 그 다음엔 좀 쉬고 살라 했었다.

남편을 만난 것은 1986년, 내 나이 스물한 살, 난생 처음으로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산부인과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때는 병원의 규모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작은 병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원무과에 새로 직원이 왔는데, 이 조그만 병원에서는 원무과 직원이면 상관이었다. 더구나 임상병리를 겸하는 것을 알고는 살짝 존경스러웠다. 공식명칭으로 임상병리사이니까 그것도 간호조무사보다는 한 단계 위다. 게다가 첫눈에 그 야무진 인상에 믿음이 갔다. 곧 소문에 의하면 출근 전에 새벽에 가락시장에 가서 한 타임 일을 하고 온다고 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표정이나 동작에서는 지치거나 그런 기색도 1도 없었다. 날씬한 몸매도 근사했고, 가뿐한 걸음걸이도 멋있었다. 나이도 적당히 위로 보였다. 오빠라고 부르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괜히 설렜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생활력 때문에 나를 나의 미래를 걸어도 될 것이라는 신뢰감이 생겼다.

내가 생각하는 일등 남편감은 첫째도 생활력, 둘째도 생활력이 탁월해야 했다. 아버지가 느닷없이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을 때, 순하디 순한 어머니는 물론 우리 형제들 모두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멍청한 몰골들이었다. 밥은 그냥 넉넉했었고, 한 말씀 하시던 아버지의 자리도 있었고, 무엇보다 남일면 은행리는 집성촌이었기에 그런대로 도움은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변화된 생활전선에서 강하지 못한 어머니는 농사를 다 내주었고, 당연히 소출은 확 줄었고, 우리에게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 이전에, 어머니가 우울한 얼굴로 어렵게 어렵게 진통제를 놓아드릴 즈음부터는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은 사라지고 없었다.

고향 청원에서도 남일면 쪽은 중등학교가 아예 없었다. 지금은 고향도 청주시가 되었지만, 당시로는 어렵사리 청주의 여고를 졸업한 나는 서울로 향했다. 낮에는 여러 가지 알바를 하면서 야간에는 간호전문대학 진학을 꿈꿨다. 나는 무엇보다 주사를 잘 놓고 싶었다. 아버지가 조금 더 살아계셨다면…… 기꺼이 주사를 놓아 드리고 싶었다. 만일 어머니가 아프시게 된다면 놀라지 않고 겁먹지 않고 주사를 잘 놓아 드리고 싶었다. 간호사는 희망사항이었을 뿐, 나의 현실은 불가능으로 점철되었다. 대학등록금을 마련할 길은 까마득했다. 그렇다면 일단 간호학원에 다니자! 겁 없이 절친을 따라 미리 서울에 살고 있던 친구 언니만을 달랑 믿고 상경한 여자애로서는 일 년짜리 간호학원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교육비만 해도 엄청난데, 실습기간 중에도 학원비를 몽땅 내야 하다니! 무엇보다도 다섯 시 반이면 시작하는 수업시간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빨리 끝나는 알바가 있는가 말이다. 주말은 그래서 쉴 틈이 없이 일과를 짜서 일했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간호보조사란 이름으로 병원에 근무하는 꿈을 이룬 때였다. 그 남자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푸른 신호등인 것 같았다.

그가 내 마음에 쏙 들어온 것은 그 사람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만 보니 그는 여리여리하고 나비같이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말 그대로 여자애 같은 여자애들 취향인 듯 했다. 카운터 김양의 뼈다귀 같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쳐다보면서 슬쩌슬쩍 말을 건네곤 했다. 자꾸 그쪽으로 귀를 쫑긋거리게 되는 내가 불쌍했다. 내 손을 내 몸을 살펴보았다. 나는 살랑거리는 맵시랑은 거리가 멀었다. 우선 나는 손도 크고 키도 컸다. 키가 크다고 해서 다 날씬한 것도 아닐 테고, 나는 아닌 쪽에 속했다. 식구들 대부분 크고 건장한 우리 집에선 누가 그리 몸매에 신경을 쓰고 그러지 않았었다. 이제 와서 어쩐다? 갑자기 다이어트를 시작할 수도 없었다. 어느 세월에?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다. 벙어리 냉가슴인가 하면서 내가 속을 태우고 있을 때 어느 순간 그가 나를 보기 시작했더란다. 내가 무심코 명절에 고향에 다녀오면서 보따리에 날라 온 음식들을 병원에 가져가서 나누어 먹었을 때, 나중에 그의 말로는 그것이 가장 예뻤다고 했다. 아, 어머니 - 울 엄마는 애들이 집에 들르면 말 대신 무엇이든 싸주는 옛날 엄마였다. 하나 둘 집을 떠나 각 살림을 시작할 때도 묵묵히 보시기만 했고, 다니러 가도 특별히 반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손에는 꼭 무언가를 들려주셨다.

내가 예뻤다고? 예뻐? 이 여자 살림 잘 하겠다, 생각했을지. 하지만 그도 점치는 데는 틀렸다. 내가 알뜰주부들처럼 살림 예쁘게 하는 짓은 잘 못하니까. 하지만 크게는 그의 생각이 옳았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도 벌써 노후 준비하자는 그의 말을 신앙처럼 믿고 살 것을 알아챘으니까. 실제로 나는 소비라거나 하는 단어를 아예 몰랐고, 사치라거나 그런 욕구도 텅 비어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시퍼렇게 젊었던 첫 순간부터 노후를 향해서 살아왔다. 곧바로 신혼 때부터였다. 서둘지는 않았지만 곧 아이가 생겼고, 출산을 앞둔 설렘 속에는 걱정이 섞였다. 출산휴가를 석 달이나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넉넉한 원장님 덕택이었다. 하지만 받아놓은 날은 빨리도 닥쳤다. 어떻게 해, 어떻게 나가? - 은이 씨, 오늘보다는 내일이 중하지, 맘 강하게 먹어! - 그래도 6개월은 젖을 먹여야……. - 마찬가지야, 어차피 뗄 건데. 아기를 위해서 무엇이 현명한가 몰라서 그러나? 우린 빈손이야, 잊었어? 이렇게 미래를 기약해야 한다며 다독거리는 남편의 선택을 믿어야 했다. 사실 우리의 상황을 워딩 그대로 써보자면 이렇다.‘우린 양가에서 0원도 도움 받지 않았어요! 0원도!’지금에 와서 나는 거의 자랑스럽게 그리 말한다. 괜스레 떳떳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서러움의 기억을 얼굴에 달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독하게 마음먹은 우리에게 맞벌이라는 단어는 호사 중에 호사였다. 투잡이라는 말도 싱겁디싱거운 보통의 단어였다. 그의 집안에는 아들들이 우리 집에는 딸들이 많은 것 빼고는 한 치도 다르지 않게 양쪽 집안의 형편이 비슷했다. 그의 형제자매들도 각자 알아서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풍토였더란다. 이상한 평등이지만, 평등에는 불평이 따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달려왔다. 지금에 와서는 3층 건물이 있고, 작은 아파트도 있고, 또 가까운 시골에 몇 백 평 밭이 딸린 농갓집이 있다. 나를 거절한 여섯 번째 할머니보다는 내 노후가 더 확실하게 준비되어 있다.

 

아차, 막상 대문 앞에 서니 슬그머니 걱정이 인다. 이 집에 다녔던 요양보호사는 왜 그만두었다 했더라? 이 집의 펑크는 어르신이 낸 것이 아니라 우리 측에서 그만둔 경우라 했다. 그것도 갑자기. 얼핏 듣기로 장애아동돌봄으로 바꾸었다고 했는데, 이곳이 아주 만족스러운 환경이었으면 그만두었을 리가 없지 않았겠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뒷북처럼 이제야.

보통은 새로운 ‘자리’가 생기면 문자가 뜬다. 100명도 넘는, 120쯤이라던가, 우리 복지관 직원들에게 공동으로 단체문자가 뜬다. 간단히 띄운 조건을 보고 관심이 있으면 지원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 앞 근무자는 장애아동돌봄이 뜨자 그쪽으로 옮겼다 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정말 이 집에 문제는 없었을까? 전임자가 자발적으로 그만둔 것이 아무래도 걸린다. 실은 근무시간도 딱 들어맞지는 않아서 좀 그렇다. 이 집은 서비스를 1시 반에 시작해주기 원한다고 떴는데, 반시간 정도가 애매하다. 오전 일을 마치면 12시니까 1시 정도라야 간단한 점심과 이동시간을 따져서 알맞은 시간인 것이다. 거기다가 거리상으로 날마다의 기름 값을 고려해야 할 판에,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면 이것저것 맞지 않는데 왜 덜컥 맡아보겠다고 나섰을까. 독거노인이 아니라 보호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것도 어떨지 모르겠다. 첫 방문에서 100% 성사는 아닐 수 있다. 조건을 따져보고, 정히 아니면 말 수도 있다. 지금처럼 오전만 일해도 월 60시간 조건은 채우니까 직장보험은 유지될 것이고.

초인종 보다 번호 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80대 어르신이라던데 번호 키를? 차 과장이 알려준 전화번호 끝자리로 키를 눌러 볼까? 아니다, 처음 방문인데 조신하게 초인종을 눌러야지. 어라, 초인종이 둘이다. 틀리지 않고 초인종을 누르고 싶다. 아직 일을 맡는다는 확정도 되지 않았으므로, 일이 되려면 초인종부터 제대로 누르고 싶다. 왜 초인종이 둘일까?

 

 

사실 내가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한지 4년이 되어 가는데, 바로 앞 여섯 번째에는 시작부터 터덕거렸었다. 초인종을 누른 순간부터 좋지 않았던 일이 마음에 걸린다. 그때는 정 대리랑 함께 갔었는데,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자 정 선생이 대문을 세게 두드렸다. 사실 정 선생으로서는 우리 요양보호사들이 바뀐다 해도 한 달에 두 번씩 관리 및 점검을 다니는 집이라서 크게 생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오메, 요 사람들, 대문을 아작 낼란가? 벤소도 지대로 못 가게 하네이. 근디 누구다냐, 요참에는? 이렇게 첫 만남의 순간부터 까칠하던 6번 어르신은 - 이렇게 불러도 되려나? 실명 보다는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 매사에 조금 심하긴 했다. 의심 많고 적대적인 것이 세상에서 인생에서 넉넉히 보상받지 못한 노인들의 특성이라 쳐도 유난했다.

요양보호사로서 일하면서 내가 요양병원 근무보다는 재가방문요양을 택한 것은 크게는 전일 근무보다는 파트타임 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속내는 그러나 바닥에 깔리고 싶지 않아서다. 간호보조사로 근무하던 젊은 시절에 내 나름 미소를 유지하던 얼굴을 하고서도 갑을병정 끊임없는 상하관계에 질렸던 터라, 다시 요양병원에 가서 일하면서 여사님이라 불리며 맨 밑바닥에 깔리고 싶지는 않다. 거기 요양병원에서는 여사님이 최하 직급이다. 육*수 여사, 김*숙 여사라 할 때의 여사 하고는 하늘 땅 차원이 다르다. 불리는 이름이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재가방문요양은 일대일 관계이기 때문에, 또 대개는 물심양면으로 어느 쪽으로든 취약한 노인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심리적 어려움이 적다. 자녀들이 없지 않은데도 혼자 그렇게 외로이 살아가며, 정말 우리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말동무도 없이 입술이 말라붙어가는 노인들은 어쩌면 태고 적부터 무표정이었을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내가 큰 소리로 무언가를 떠들썩하게 이야기해주면 가끔은 배시시 미소를 띠기도 한다. 기저귀 실수라도 해놓고는 새색시처럼 고개를 숙이기도 하고. 살면서 보람이랄까, 보람은 대단한 것이 아님을 느끼며 뭉클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일은 그러나 늘 예상을 빗나간다. 갑은 어딘가에서 불쑥 나타난다. 여섯 번째 어르신이 그랬다.

여그를 좀 딲어 조 바, 쩌그 거그는 또, 거그를 딲어주랑께!

워째 멋이던가 뿌옇고만! 노인네라고 도통 안 뵈는 줄 아남여!

나 젊었을 적에는……, 이런 것은 입에 달고 사는 화두다.

어르신, 저, 백내장 검사를 한번 받아보심…….

내가 시방도 바늘귀도 뀌는데 먼 병원이여! 돈도 쎄았는갑다!

남의 말은 아예 듣지를 않는다. 그러기를 반복하더니,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어느 날 드디어 노인이 복지관에다 전화를 걸었다. 나 들으라고 면전에서 걸었다.

거, 복지관이제라. 보쇼이, 나 참 요상해서 못 살 것소.

어르신, 왜 또 그러세요……. 저쪽에서는 그런 소리로 응대를 할 거다.

아니, 긍께, 쓰레기봉토 안 있소, 거, 나오는 거 말요. 아, 긍께 그것이 언 날 봉께 팍 졸아져 부렀당께.

어르신, 왜 또 그러세요……. 저쪽에서는 여전히 그러고 있을 것이다.

아따, 요참 여자가 이상허게 꼭 큰 가방을 가지고 다닝께 글제. 안 의심스럽소이. 어짠다고 가방을 고롷게 큰 놈을 갖고 댕긴다요. 글고 쓰레기봉토는 졸아져 불고. 아, 몇 장 없당께. 다 없어져 부렀는디 워쩔 겨?

알만 하다. 배급으로 나오는 관급 쓰레기봉투도 손도 안 대고 알뜰하게 모은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혼자 사는 내가 그 큰 봉토를 쓸 일이 어디 있간디! 그러면서 나더러, 그러니까 요양보호사더러 자잘한 쓰레기들을 나오는 대로 가지고 나가서 버리고 오란다. 어디에? 기가 찰 노릇이다. 쓰레기장에 가면 이미 쓰레기를 담아 버려놓은 관급봉투들이 수북하게 있으니까, 그것을 살짝 열어서 헤집고 ‘요까짓 것’ 쑤셔 넣으면 된다고 우긴다. 실제로 막무가내다. 그렇게 모은 봉투를 손자인가 손녀에게 주련다고. 애들이 오는 것을 보진 못했다. 겨우 3주째였으니까. 아니, 요양보호사가 없는 주말에 다녀갈 지도 모른다. 그 애들 주려고 모아둔 봉투가 없어졌다고 성화였다.

어르신, 여기다가는요, 제가 추위를 타니까 스웨터 넣어가지고 다니잖아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스웨터요, 아시면서! 저 여기 것 봉투는 쓰라고 해도 못 써요. 우리 동네는 이 동네랑 구가 다르니까 여기 쓰레기봉투를 저 주셔도 쓸 수가 없다구요.

멋이 그래, 봉토면 봉토제. 글먼 내 것 봉토가 어디로 가부렀냐, 그 말이제.

우리 동네랑 같으면 저희 것 가져다 드리고 싶네요.

어먼 소리 말고 내 것 봉토나 내놔 보랑께. 집이 갖고 가도 못 쓴담서.

 

그것이 금요일이었다. 그 다음 주중에도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복지관에 들르면 차 과장이 살살 미소로 나를 달랜다. 그런 식으로 계속 선생님들이 바뀌니까 어쩌겠어용! 속 넓은 지 선생이 들은 둥 만 둥 참아 주세요! 사람들은 내 속내도 모르면서 내게 속이 넓다느니 그런 말들을 한다. 듣기 좋은 말일 게다. 어쨌거나 나는 사람들의 불평에는 신경 무디게 지낼 수 있다. 큰 문제만 없으면 특히 직업과 관련해서는 참는 자가 이기는 자다. 참으면 월급이 꼬박꼬박 모인다. 그렇게 살았다. 아니, 기본적으로 세상의 돈을 내 돈이 되게 하려면서 참을성도 없이 될 일인가. 그 정도가 내가 일할 때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이 일을 하면서는 내 간호조무사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생과 사를 가르는 수술실 근무도 견뎌냈고, 온갖 오물들을 맞닥뜨리는 과정도 찡그리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그래, 이 일이 병원 내에서 가장 깨끗한 작업이다. 이 작업이 없이는 병원이 오물들로 넘쳐날 것이니까. 이 더러운 똥오줌과 피범벅이 병원을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일차적인 일이다. 나는 세상에서 세균과 병 따위를 없애는 정화작업의 최전선에 있는 전사다. 이 작업으로 나는 월급을 받고, 내 노후는 보장될 것이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그렇게 버티어 왔다.

요양보호사 일은 수술실 근무에 비하면 거저먹기다. 시급 10,500원을 채워 정확히 계산해준다. 어쨌거나 최저임금 보다는 많고, 일 하는 시간 그동안만큼은 돈을 쓰지도 않을 것이니 두 배로 절약이 된다. 버는 것과 안 쓰는 것을 더하면 갑절의 가치가 된다. 고무줄 같은 신경 줄을 조금 무딘 쪽으로 단련하며 참으면…….

그래도 통하지 않는 때가 닥쳤다. 노인은 하루도 빼지 않고 복지관에다 전화를 해댔다. 복지관에서는 시영아파트 어르신들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까운 위치 때문에 총체적으로 서비스 비용이 절약되고, 무엇 보다 큰 불만사항들이 없는 편이다. 자신들이나 또 주변 사람들도 장기요양보험이니 하는 공적인 사실들에 관해 원론적으로 아는 사람이 드물어 불평불만이 적다. 일단 혜택을, 문자 그대로 보살핌을 받는다는 느낌들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자질구레한 불평은 오히려 어리광이다. 나 좀 봐주라니까, 심심허다고! 나 죽겄서! 근디 나 요라다 죽는당가? 징허네이, 요라고 못 걸으믄 걍 죽게 놔두제이! 여그, 여그 좀 잡으랑께! 그렇게 저렇게 실랑이를 하면서 세월이 간다. 그런데 쓰레기봉투 민원은 끈질겼다. 나는 시쳇말로 잘렸다. 엊그제 11월 말, 하필이면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직장에서 ‘짤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모처럼 외식을 하는 토요일 - 주말이라서 딸아이도 왔었다. - 해고당한 이야기는 감췄다.

왜, 식욕 떨어지는 일 있어? 식당 잘 못 골랐나? 딸아, 우리 둘이 엄마 것 다 먹자!

속 모르는 남편은 펄펄 날지 않는 나를 의아해 하며 놀렸다. 젓가락 부딪는 소리 사이로 닷새를 계속해서 혼자 내지르던 성난 목소리가 날아다녔다. 즈그 집에서는 안 춥당가. 질가 댕길라먼 얼메나 더 추울겨! 집에서부텀 옷을 입고 댕기제, 멋허러 옷을 들고 다닌다는 거여. 멋한디 울 집에 들어와 갖고사 세타를 입는당가!

사실 복지관에서도 내가 옷을 많이 껴입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른 체격도 아니면서 한심하다는 투다. 요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말라깽이를 이상형으로 삼는데, 교육 있는 날 모두 함께 밥을 먹다 보면 내가 제일 잘 먹는다. 뭐야, 지 선생은 애기들 같이 먹네, 애들 반찬도 좋아하고! - 아니, 저는 그냥 무엇이든지 잘 먹어요. 살 좀 빼야 할까요? - 알긴 아시네. 해도 지 선생 귀여워요, 먹는 것도 애들 같고, 인상도 애들 같고, 하하. - 애들 같아 뭐하게요! 나도 덩달아 웃고 만다. 멋지다 그런 말은 언감생심 기대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른한테 애들 같다니! 뭐,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여리여리한 여자애들 때문에 속앓이를 했던 것도 옛날 옛적 일이다. 예쁘면 뭣해! 나는 제법 하얀 피부에 비뚠 데 없이 좌우대칭은 된다. 열심히 살았고, 아니,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절약했고, 지금은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아직도 계획이 있다. 당근 재테크와 관련된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 아직은 일을 더 계속할 것이다. 해야 한다. 하고 싶다.

착실한 재테크는 세상 살아가는 기본이다. 그렇게 알고 살아왔다. 돈 관리는 따로 하지만 투자 때는 함께 한다. 결혼 초에는 다른 커플들처럼 내가 돈 관리를 맡기 시작했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이의 월급을 챙겨서 적금 부으러 가던 날, 바로 그날 아침 버스에서 가방을 찢기고 돈을 통째로 털렸다. 평생 단 한 번도 찢기지 않던 가방이 월급이 통째로 들어있던 그 순간에 찢기다니. 그 일은 훔쳐간 그들에게는 마법이었고,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재앙이었다. 그는 그것을 용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땀방울로 다져진 돈인가 말이다. 그 순간, 그 이후로 나는 돈 관리자 자리에서 데꺽 잘렸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싶기도 하다. 그이가 나보다 관리에서나 투자에서 월등하니까. 어느 집이고 아내들이 돈 관리를 하는 현실에 비춰보면 자존심이 묵사발 될까 봐 남들에게 테는 안 낸다. 누가 하면 어떤가,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이다. 한 푼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남편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당연히 노담인데, 담배는 바로 돈을 말아서 태우는 것이라 생각해서 손을 대본 적도 없을 것이다. 둘이서 내기를 하면, 글쎄, 누가 더 절약의 천재인가 모를 일이다. 아니, 내가 밀리려나? 그 만큼 신뢰를 하기 때문에 그이의 제안이나 결정을 따르게 된다.

 

성남의 끝자락 미금에 청*마을 주공 42㎡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 1995년, 그 때도 오늘처럼 매섭게 추운 12월이었다. - 우리는 울었다. 대충 정리하고 딸아이 재워놓고 둘이서 입주파티를 하자고 마주앉아서……, 짠! 하고 잔을 부딪는 대신 그만 울음보를 터뜨렸다. 내가 먼저였나? 모르겠다. 둘이 다 울었다. 울다가 웃었다. 반지하 - 반지하에서 갓난아이를 품고 누어있는 순간, 그것을 표현할 단어는 없다. 그런 우리에게 이 공간 전체가 우리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더 작은 36㎡도 아니고 42㎡ 아파트라니. 대출을 끼었다지만 우리 집이다. 요새 와서는 ‘영끌’이란 말이 유행이지만, 그런 말이 생겨나기 전에도 우린 그만큼 다 했다. 그랬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내 집을 샀다. 둘이 벌고 절약을 하며 살 테니까 까짓 대출쯤은 문제없었다. 울다 웃다를 반복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내 집을 마련하다니. 아까워서 발을 크게 떼놓지 못했다. 몸무게가 한쪽으로 잘 못 실려서 바닥이 무너질세라.

꿈결 같은 세월이었다. 어느새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는 말 그대로 똘똘하고 키도 크고 공부도 제법 했다. 부러울 게 없었다. 머리카락은 나를 닮아서 검고 머리숱도 많았다. 머리를 묶어주면서 예쁜 머리핀을 꽂아주면서 생각했다, 나 어린 시절 보다는 더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아니, 이맘 땐 나도 거칠 것 없이 부족함 모르고 자랐었지. 아무튼 뒷받침을 더 잘 해주려면 돈도 모아야 하지만 무엇 보다 부모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된다. 아버지가 일찍 아프시다가 돌아가신 것 말고는 내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는 생각은 없다. 어머니는 책 속에 나오는 어머니처럼 온순하고 또 온순해서 우리들에게 따뜻했다. 내 검은 숱 많은 머리를 감겨주시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젖은 채 안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비눗물 때문에 울고 싶었던 눈이 스르르 감기곤 했다. 내 단정한 단발머리는 언제부턴가 약간 곱슬하게 변했지만 그래도 늘 단정한 머리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곱슬이 더 나타나서, 사람들은 파마 값도 안 들게 생겼다면서 부러워한다. 하지만 난 하늘하늘한 노란 생머리가 예쁘다고 생각한다. 사알짝 흔들어서 뒤로 넘기며……. 하긴 그런 인상은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처녀 적에도 안 어울렸다. 은아, 튼실한 몸과 맘으로 날마다 파이팅!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그이가 뜬금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고향이라고? 그러고 보니까 그의 고향은 남쪽이었다. 얘, 조심 해. 걔 라도표야! 연애, 거기까지만! 서울 여자애들이 라도표라고 시집가기를 기피했던 전라도 남자였다. 나는 특별히 전라도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고향 제천에서나 더구나 서울에서 사는 동안에 전라도가 그리 매력 있는 고장은 아니었다. 오빠가, 그가, 결혼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시댁이 전라도인가 어딘가는 안중에 없었다. 외국인이어도, 어쩌면 외계인이어도 좋았을 것이다. 막상 ‘시집가는 날’ 시댁 동네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놀랐던 가슴은 순간이었기 때문에 곧 잊혀졌다. 신랑은 전라도 출신(!)일 뿐으로, 서울사람이었다. 아들로는 둘째였고 누이들도 있었으므로 집안을 책임질 군번도 사정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고향으로 간다고? 참으로 낯선,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의 고향인 보성 봉*리, 선씨들만 모여 사는 동네, 하나 둘 떠나고 백 가호도 안 되는 마을로 가자고? 내 고향 제천도 우리 마을도 시골이긴 했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시골인 시댁 마을은 그동안 잠깐씩 들르긴 했다. 하지만 아주 살 터전으로 받아들이라니, 날벼락이었다. 그는 공무원이니 걱정 없지만, 내가 취업할 수 있는 병원이 있을까? 설마 차밭 농사를? 무슨 말로, 어떤 말로 반대를 하지? 갑자기 눈앞이 깜깜했다. 내가 이 세월 살면서 남편 의견에 반대 한번 안하고 살았었나? 새삼 그것도 놀라웠다. 며칠을 끙끙 알았다. 언제나처럼 아무 말 않고 생글거리며 따라 나설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병원 핑계가 그나마 통할 것 같았다. 내 직장은 어쩔……

그러다가 걱정은 전쟁 없이 사라졌다. 내 속으로는 반대의견을 들고 나서기가 전쟁준비만큼 힘든 터였다. 그런데 그이가 우선은 이곳 광주로 내려오자고 말했다. 고향까지 차로 한 시간 남짓 거리랬다. 휴, 나는 늘 운이 좋았다. 이곳에는 그이의 동창생이며 선후배들이 이렇게 저렇게 자리 잡고 살고 있었다. 나는 쉬지 못하는 습관에 잠시 알바도 했었지만, 곧 병원에 취직했다. 마침 건강검진을 집중적으로 하는 병원이었고, 광주 전남 여타 지역으로 건강검진 버스를 운영하는 팀에 들어갔다. 조금 늦을 때는 있어도 낮 근무였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그렇게 이곳 대도시 생활은 안정되어 갔다. 전학 온 딸아이도 서울 말씨로 친구들의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신이 나는 듯했다. 그 나름대로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아이가 내 키만큼 자라는 건 정말 시간문제였다. 아슬아슬하게도 아예 고향으로 내려가자는 말은 더는 없었다.

그러자 저녁 쉬는 시간이 뭔가 아까워졌고, 나는 야간대학에 진학을 감행했다. 간호학과는 이과라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벽이 있었고, 차선으로 사회복지과에 ‘등록’을 했다. 간호학전문대학에 간절히 등록하고자 했었던 옛 그 느낌이 살아나면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게다가 4년제 대학이었다. 사실 마음 끝 간 데 깊은 속에는 그만큼 깊은 미련이 남아있기도 했었다.

야간대학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이런저런 이력들을 가지고서 늦게 대학에 오는 경우가 많아서 친구처럼 가까워진 동료학생들도 생겼다. 그때는 2008년부터인가 시작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이슈가 되어서인지 사회복지과 학생 중에는 복지관이나 돌봄센터를 운영할 마음으로 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실제로 소규모 센터를 운영하는 이도 있다고 했다. 비슷하게는 유아교육과를 해서 어린이집을 차린 이도 있었다. 하나 같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복지관에서 일을 하면서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도 만났다. 나이들은 대부분 나보다 많지만 살짝 철이 없다고 할까. 일은 싫고 돈은 벌어야 해서 우울해하는 사람들 말이다.

나 같으면 못 산다 하지, 지 선생! 뭣 하러 그렇게 살어!

뭐가 어떤데요?

아니, 이깟 일 고만 좀 하고 쉴 일이지, 뭐가 아쉬워 그래요. 월세 받아서 쓰니 좀 좋겠어. 그냥 쉬라고 잡아 앉히지, 남편도 참. 짠돌인 게지.

아아니, 남편 탓 아니에요. 젊겠다, 두 손 두 발 성한데 어떻게 놀아요?

남편이 벌어다 주지, 월세 나오지. 그럼 매일 사우나도 가고, 산악회, 거긴 주 1회니 바람 쐴 만한데, 으샤! 그때가 그립다, 나는.

그런 건 취미 없어요!

그럼 일하는 게 취미다요? 세상에 일이 취미인 사람 어딨다고!

힘든 일도 아니고, 살림에 도움도 되고.

못 말려, 바보 같이!

내가 사는 방식이 바보 같은가? 그런 점이 없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남들이 칭찬을 하든 아니든 나는 그냥 그대로 일 테니까. 나이든 동료가 바보 같다고 흉을 보건 말건 무슨 상관인가. 어느 의심 많은 할머니가 나를 잘랐거나 칭찬했거나 나는 나다. 더구나 어제는 어제다. 일곱 번째 어르신님, 어서 나오세요!

 

아차, 초인종이 두 개! 어느 것을 누른다? 폭발물을 몇 초 안에 해체해야 하는 톰 크루즈식 액션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마지막 남은 두 개의 전선 중에서 어느 것을 자를까, 손이 떨린다. 똑딱똑딱 초시계가 흐른다. 잘 못 자르면 자신을 포함해서 사방이 날아갈 것이다. 그런 기분이다. 가만, 바른 초인종을 찾는 데 힌트는 크기가 아니겠다. 위치가 문제다. 처음부터 제 자리에 있었던 초인종은 고장이 났고, 그래서 새로 달아놓은 것은 좀 엉뚱한 자리에 붙어 있겠다. 옳거니, 요 하얀 녀석인 게로구나. 괜스레 옷깃을 한 번 더 만져본다. 새로운 시작이다. 좋은 인상이 필요해! 초인종을 보면 늘 젖꼭지 생각이 나지만, 검지 끝에는 딱딱한 플라스틱 감촉이 느껴진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20.12. 국제PEN광주, 18호, 268-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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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20. 12. 27. 14:37

겨울, 바닷가

 

누가 이곳을 바다라고 하겠는가. 그곳은 바다, 겨울 바다였다.

오늘은 2020년 여름, 하늘에 갇혀 공기에 갇혀 암울한 나날, 길고 긴 장마에 집콕이며 방콕이 새로운 일상이 되자 먼 데 먼 날에 잠기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해 겨울 - 하필 북해라고 하는 바다를 보고 싶었었지.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대로 얼마나 스산한지 확인하고 싶었었나.

 

1997년이 저물어가는 크리스마스 휴가철이었다. 그때 나는 연구년으로 쾰른에 머물고 있었고, 남쪽에서 온 일행을 만나서 북쪽으로 향했다. 가벼운 여행이었기 때문에 실은 정확한 목적지도 없었다. 북해를 보러 가는 데에만 뜻을 맞췄다. 일단 기차로 국경을 넘어 북해로! 유럽의 기차여행은 안전하기 이를 데 없고…… 천만에. 어떤 사고였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채로 바로 국경 앞 에머리히에서 기차가 멈췄다. 택시로 네덜란드의 아른헴까지, 역에서 제공해주는 버스로 다른 역으로 이동하여 다시 기차로 우트레히트까지. 거기서 내려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그러고서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는 운하를 경험하고, 다음 하를렘에서 잔트포르트 바다까지, 헤아려보니 정말 일곱 번의 우회 내지는 유희를 거쳐 도착한 바닷가였다.

 

바다는 많이 광활하고 그 광활한 만큼 엄청난 바람을 몰고 와서 우리를 내몰았다. 적어도 환영은 아니었다. 윌리엄 터너의, 아니 근처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던 로이스달의 그림 <폭풍우>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해는 곧 질 것이었으므로, 아니 이미 지고 있었기에, 그에게 ‘증명사진’을 부탁했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매서운 바람과 어둠의 기억이 박제될 것이다. 바닷가 쪽으로 향하는 뒷걸음이 사뭇 위태로웠다. 바람은 지는 해를 두고서 무섭게 폭우를 동반해 왔다. 십분 전의 풍경이 전혀 다르게 변해 버렸다. 겨우 몸을 가누고 도망치듯 바닷가를 벗어나야 했지만, 체험은 길이가 중요하지 않다 싶었다. 순간이 영원할 수도, 영원이 순간 일수도 있음이여!

 

완전한 장대비를 맞으면서 이리저리 헤매다 들어간 곳이 ‘카페 홀란드’, 나는 뜨거운 글뤼봐인을 그는 차가운 맥주를 한잔했다. 날은 아주 어두워 왔고, 푹 젖은 사람들이 가끔씩 들어왔다. 카페는 피난처였다. 그가 담배를 가지러 자리를 떴다. 고향에서 집에서 얼마를 멀리 떨어져 나와서 이 밤 낯선 바닷가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인가! 쾰른을 출발에서 이곳 바닷가에까지 - 하필 여정에서의 우여곡절은 뒤쫓는 사람을 피해서 도망치는 연인들이라 해도 합당할 코스였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의 15분에서 20분 사이가 영원처럼 길었다. 그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균열이 생겼다. 그것은 어쩌다 둘이 함께 있어도 먼 먼 거리감 때문이었다. 아무렇더라도, 나는 그곳을 떠나 쾰른으로 잘 돌아올 것이었다. 다음날 예정대로 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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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에게 쓰는 편지』, 이대동창문인회, 2020.10.30.,49-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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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0. 11. 25. 22:54

2020.11.16. 장편소설 『숨』, 문학들, 280쪽.

[광주일보]
http://www.kwangju.co.kr/article.php?aid=1606950000709657007&search=장편소설

[무등일보]

http://www.honam.co.kr/detail/K4YzjP/635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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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논단 - 기고2020. 11. 5. 21:39

[논단] * 36개의 각주가 따라오지 않아서 내릴까 고민 중 -

 

순수에의 강요

 

순수에의 강요 - 라는 구절은 표절은 아닐지라도 전염의 산물이다. 누구든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를 떠올릴 것이다. 소묘를 잘 그리는 젊은 여인이 초대전에서 나름 우호적인 평을 받는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흔한(?) 격려성 비평이 비극의 단초가 된다. 자신에게 깊이가 없음을 한탄한 그는 작업을 접고, 미술서적을 섭렵하고 화랑과 박물관을 돌며 미술작품에서의 깊이를 탐구한다. 마침내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깊이를 향해 뛰어내린다.

 

쥐스킨트의 이름은 무엇보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1985)로 기억될 것이다. 발간 직후 49개 언어로 번역되어 곧 2천만 권을 팔았고, 세계판타지문학상(1987)을 받더니, 독일 미국 등 합작 영화(2006)로 폭발적으로 알려졌다. 영화 장르로는 드라마와 스릴러를 표방한다. 스릴러인지 판타지인지 그저 엽기인지, 산문문학에서 장르의 구분선은 녹아버린 지 오래다. 소설의 성공은 백만 천만 ‘관객’을 의미하는 상황이 되었다. 예컨대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1955/ 영화 1960)의 원작자 하이스미스는 서스펜스소설의 가장 성공한 작가답게 발칙하게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 대부분이 만약 오늘 날 발표된다면 서스펜스소설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작가는 예능인’이라고도 단언한다. 쥐스킨트 또한 깊이에의 강요 때문에 몰락한 예술가를 그림으로써, 자신은 깊이에의 강요를, 정통 또는 순수에의 강요를 벗어난다.

 

정통 또는 순수 논란

 

오늘날에는 유서 깊은 가톨릭에서도 새삼스럽게 미사의 정통방식이 논란된다면, 문학에서의 정통이라는 개념이 온전히 존재하는지는 미지수다. ‘예술의 완벽성은 유익함과 즐거움을 결합시키는 것’이라는 호라티우스의 시학적 입장이 정통일까. 이는 거칠게 말해도 프랑스대혁명에서는 뒤집혔다. ‘굶주린 배로는 이상적인 예술작품을 들을 귀도, 볼 눈도 가질 수 없다.’라는 외침이 터져 나왔으니까. 그러나 문학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욕구는 하이네의 ‘책들을 불태우는 그 자리에 결국에는 인간들도 불태운다.’라는 경고로 고조되었고, 그럼에도 100년 뒤 나치는 책도 사람도 불태웠다. 그 어둠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후에 사르트르는 다시 한 번 혁명을 선언했다. ‘문학은 그 본질상 영구 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다.’라고.

 

참여문학, 그렇게 우리가 경험한 일종의 사명감으로서의 문학은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저물고, 다시 문학의 자율성과 미적 근대성 개념이 고개를 드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문학의 위상 또한 하락한 것은 아이러니다. 크게는 문학을 포함한 인문(humanities, liberal arts) 의식이 신에게서 탈취한 권능을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의 기계’에게 내주는 세상이 도래한 탓이며, 작게는 실효 중에 있는 글로벌자본의 통치 때문이다. 하여 우선 살아남기에 전전긍긍하는 현실 속에서 순수에의 ‘강요’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의식은 이미 ‘순수’에서 떠나고 있다.

 

장르소설의 세상?

 

그 살아남는 소설들이 오늘날 소위 장르소설들로, 이미 출판계 및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벌써 2004년 『문학과 사회』에서 「장르문학의 현재와 미래」라는 장르 특집을 내었으니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문화적 환경을 보다 섬세하게 고찰하기 위한다는 기획의도만 보더라도 그것을 하나의 줄기로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은 범주적으로는 대립적이나 실제적으로는 순수문학작품들에서 장르문학적인 설정과 문법들이 활용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원래 장르(genre)는 예술에서 작품을 양식에 따라 구분할 때 사용되며, 문학예술에서는 서정과 서사 그리고 극문학 정도의 갈래를 말한다. 진부하게 헤아려 보자면, 서사문학의 경우 자서전, 전기, 일기, 우화 등과 구별하여 소설이라는 장르가 있고, 소설 장르가 더 세분되어, 모험 소설, 아동문학, 판타지, 공포소설, 역사소설, 추리소설, 로맨스소설/연애소설, 과학소설, 스릴러, 무협소설, 라이트노벨, 게임소설, 사극소설 장르로 분류된다.

 

그런데 ‘장르소설’이라고 하면 ‘소설 장르’ 중 그 어느 하나의 장르에만 깊이 집중한 소설을 일컫는다고 한다. 영미권에서는 장르소설을 문학소설과 대비되는 말로 사용하는데, 문학적 픽션과 상업적 픽션(= 장르픽션 또는 대중픽션)으로 나눈다. 그 특징은 플롯 중심으로 넓은 독자를 매료시키는데, 주로 미스터리나 로맨스물, 과학소설 등의 장르에 깊이 빠진, 장르적 관습을 따르는 소설들을 일컫는다.

그동안 주류 문학에서는 소위 순수소설이 암묵적인 권위를 얻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형이다. 현재는 출판사와 서점의 사업방침이 상업지향적 소설들을 장르문학으로 표방하면서 그 영향력은 날로 커간다. 아예 석박사급 연구자와 장르문학 창작자들로 구성된 텍스트릿이라는 연구모임 등도 활발한 옹호에 나선다. 핑계라면 ‘문장구조적 부검’이라도 동원해야 읽어낼 수 있는 난해하거나 심지어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순수문학에 대한 절연이다. 뿐만 아니라 웹소설의 시장 규모는 3,000억을 넘어 2019년에는 4,300억 원에 이른다고 했다. 당연히 웹소설에 대한 편견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나선다. 여전히 가난하게 살면서 엄청난 규모의 시장을 무시하는 위선(?)을 비난, 아니 비판한다.

 

장르소설의 성공은 세계적 추세이다. 무거운 교양소설이 지배했던 독일에서도 2010년에는 무명작가의 미스터리가 알라딘을 강타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30주 넘게 판매 순위 1위에 올랐고 1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한국에서도 2011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계속 신선한 충격의 미스터리로 독자를 사로잡고 있다지만, 그의 장편소설은 불발이다. 아무튼 더 과격한 장르의 관습을 따라서 더 충격적으로 사랑하고 더 충격적으로 살인하고 더 충격적으로 독서대중을 자극하는 일이 성공의 열쇠가 되는가 보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장르소설에서 말하는 ‘관습에의 강요’이다.

 

관습과 이단

 

관습이 무엇인가. 문학적 관습도 역사적 산물이다. 기술적으로 문학 내적인 요인과 사회적으로 문학 외적인 요인이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관습은 그 자체로서 생성과 소멸을 거치며 변모를 겪는다. 그런데 그 관습에 충실하게 집요하게 매달리라니! 오히려 예술의 본성은 관습과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가 아니었던가.

모든 관습에는 반항이 따른다. 관습과 반항은 원천적으로 상호보완적이다. 틀을 거부하려는 작가는 독창성으로써 이에 저항하며 관습에 도전한다. 문학은 스스로 낡고 자동화된 관습의 틀을 거부하려는 내적 동력을 통해 낡은 관습의 쇄신을 유도해 나감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머리가 심지어 심장이 터질 때까지 무조건적 예술혼을 불태우며 창출해나가는 새로운 문법, 새로운 관습이 기대되고 심지어 요청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 이래 모든 가능한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장르 관습을 철저히 따르는 것을 목표로, 그로 인해서 두각을 나타내련다는 장르문학은 예술로서의 문학의 대열에 합류할 생각이 없는 것일까.

 

장르, 그들은 소위 머리 아픈 글을 쓰지 않는다. 독서대중의 입맛을 취향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다. 결과적으로 자본시장의 상업성에 편승하는 현실적 결정을 한 것이리라. 그렇다고 장르소설이 독서시장의 전권을 장악한 것도 아니다. 2019년 우리나라 베스트셀러 종합은 『여행의 이유』(김영하) 등 에세이 열풍이 지속되고, 실용도서의 판매량은 큰 폭으로 증가했고, 2020년 상반기는 『더 해빙 -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이 세계를 강타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장르소설도 소설인 한에서 베스트셀러 진입은 힘들다.

그러나 분명 소설계에서는 장르가 상업적 우위를 점하고 있고, 최근에는 문학상까지도 장르의 물(?)이 짙게 들었다. 그 한 종류라는 오토픽션 쪽만 보아도 그렇다. 예컨대 일본문단에서 누군가가 스무 살에 『뱀에게 피어싱』같은, 제목부터 무한대로 자극적인 작품으로 무슨 상을 업고 문단을 출렁이게 했다고 치자. 바로 영화도 되었다. 착란과 자해 등, 선을 넘은 가학성과 폭력성으로 독자의 무의식적 가학성에 부응했다고 치자. 그가 『오토픽션』으로 자전과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렸다는데, 그 새 바람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상륙하면, 여기도 오토픽션 아류(?)를 써서 ‘젊은작가상’을 흔든다. 하지만 장르 로봇이 되어 독자의 취향에 부응하고 상도 받는다는 성공 신화는 간혹 혼란의 나락이 되기도 한다. 사실이다.

그러니까 성공이 아쉽다고 해서 글쓰는 사람이 글읽는 사람들 즐거워하라고 봉사하는 일로 살 수는 없다. 그 보다는 무엇인가 예컨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난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을 공유하련다거나 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은 어떠한가, 살 만한가. 어찌 살까. 그러다 보면 ‘관습 지킴이’와는 정반대로 살게 된다. 김수영 시인의 ‘문학의 불온성’이 떠오르지 않는가.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는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모든 전위 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학이 문학이면 무엇을 왜 쓰느냐가 관건이다. 따로 순수소설 또는 장르소설이라는 갈래(장르)는 없다. 다만 ‘문화적 교환가치’라는 포괄적인 문화현상은 소설 영역을 확대하여 영화로 성공을 거두게 하기도 한다. 또는 종이책이 아닌 웹소설의 성황, 또 이제는 읽는 문학에서 듣는 문학으로 소화의 패턴이 급변하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소위 본격문학, 순수문학, 순문학, 그러니까 원래의 문학은 풍전등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아니 인간의 모든 행동은, 타자에 대한 구애로서는 그 존재의 의미를 훼손시킨다. ‘나쁜 소설이란 독자에게 아첨하여 그의 환심을 사려는 소설이며, 좋은 소설이란 독자에 대한 요청이며 신뢰이다.’ 그뿐이 아니다. 유투브가 삼켜버린 문학 - 아니 문화, 아니 인생, 과한 말도 아니다 - 에서 장르라고 영원히 살아남겠는가.

 

살아남기 - 이단 예찬

 

앞서 말한 대로 호모사피엔스의 미래는 어차피 어둡다.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이라는 양대 혁명의 틈바구니에서 문학적 낭만과 순수를 찾는 것은 유아적 사고일 수 있다. 개인의 느낌과 자유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신에게서 우위를 뽐내고자 했던 인간이 미래에는 빅데이터 알고리즘에게 모든 권위를 양보하게 될 것이다. 일자리는커녕 할 일조차 없어질 무용지물의 인간이 문학을 소설을 탐하겠는가.

그 전까지, 아직 문학이라는 이름의 무엇인가가 살아 숨을 쉬고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독자의 취향에 굴하지 않으며 숨이 끊길 듯 살아남은 예술의 흔적들을 살펴보자. ‘예술이란 맛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예술을 맛을 본다면 예술은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조건이 생명이다. 어떤 강요에도 유혹당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독단, 이단. 그것 아닐 수 없는 무엇, 다른 것일 수 없는 무엇이 바탕이라야 한다. 치환불능성의 어떤 것, <살롱전>의 주문도 그 어떤 세속적 유혹에도 구부러질 수 없는 솟대처럼 솟는, 이름할 수 없는 정체성의 무엇이 새로운 유파를 창출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낙선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 문외한이면서도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낙선이 시작이었다.

 

문학도 마찬가지, 기존의 가치에 대한 진지하고도 집요한 이단이 아니고서는 생명력을 지닐 수 없다. ‘도끼로 머리를 깨는 작품을’ 쓰고자했던 카프카가 살아남은 것은 이단성이다. ‘벗이여, 이제 나는 詩를 폐업처분하겠다. 나는 作者未詳이다. 나는 용의자이거나 잉여인간이 될 것이다. […] 아아, 나는 詩의 무정부주의를 겪었고 詩는 더이상 나의 聖所가 아니다.’ 때론 이렇게 폐업을 선언한 시인이 시인으로 남아서, 시집이 많이 팔려서 걱정도 한다. ‘시로서 존재하기 위한 형식화의 조건을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아도’ 세계관으로서 현실을 반영하는 시인이 시인이다.

 

어떻게? ‘선택할 출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출구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자신의 출구를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은 매일 새롭게 만들어지는 존재이다.’라던 사르트르의 말 - 여기에서 ‘출구’를 ‘소설’로 바꾸어 읽자. ‘소설가마다 자신의 소설을 씀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든다.’ 수많은 작가들이 ‘나는 글을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데카르트를 빗대어 존재를 정의한다.

그러므로 소설가가 쓰는 글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다. 작가의 ‘메시지란 결국 대상화된 영혼’이며, 작가는 ‘항의가 아니라 비명, 부패에 반하는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까 결국 막스 프리쉬의 말처럼 ‘모든 예술작품은 인식되기를 원한다.’ 아무리 독백처럼 보일지라도 알아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슈틸러가 아니오.’ - 막상 프리쉬는 『슈틸러』(1953)의 첫 문장을 이렇게 내뱉는다. 그 처음 문장으로 슈틸러는 다른 등장인물들에게, 프리슈는 독자들에게 언어유희의 첫 장을 연다. 독자들은 낚이는가? 낚였는가?

그 말을 거는 방식으로서의 이단은 예로부터 존재해왔다. 이단은 전통이나 권위, 세속적인 상식에 반항하여 자기 개성을 강하게 주장하여 거의 고립되어 있는 경우를 이른다. 현존 질서에 대한 반항, 그것은 가끔은 살아생전의 성공도 보장한다.

 

한 이단아의 경우 - 노벨문학상 수상

 

최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페터 한트케가 누구인가? 1966년 스물넷의 그가 ‘47그룹’ 회동에 초대된 자체가 놀라웠던, 그의 독설은 더욱 놀라웠던 이단아다. 동시대 독문학에 대해 통틀어 서술 불능뿐이라고, 언어와 의식에서의 상투성에 대한 비판으로 출발하여 주체와 세상 간의 소외에 매달린 그는 같은 해 『관객모독』을 내놓았다. 말 그대로 관객을 모독하는, 관객들의 관습적인 관람 형식 자체를 고발하는, 연기는 없고 말만하는, 그것도 험담과 모욕뿐인 극작품이었다. 이어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을 빔 벤더스가 영화로 만들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단아였다.

그런 그에게도 전형이나 표준이 전무하지는 않은 듯, ‘카프카는 나에게 내 글써온 삶 내내 한 문장 한 문장마다 표준이었다.’고 말했다. 적어도 두 작가가 공유하는 점은 개인과 외부세계와의 관계에서 광년만큼 떨어진 거리에 대한 인식이다. 또 하나는 세류와 무관했던 이단아라는 공통점이다. 다만 형식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되, ‘내용에 관해서는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 지껄이라’ 했던 김수영, 그런 불온성을 지닌 이단아들이 살아남는다.

‘허구를 말하기 시작한’ 너 글쟁이는 외면당하고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칭찬을 받든 비난을 받든 너 그리고 너의 작품은 그냥 그만큼이다. 순수에의 강요는 누구로부터 또는 어디에서 오는가? 언감생심 장르 관습에의 강요? 너는 미망으로 이끌린다. 하지만 삶도 글도 ‘안녕보다는 진리를 향하여’ 나아갈 뿐이라. 세상 속에서 그러나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너는 너의 독자에게 말을 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할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할 말을, 그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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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 작가교수세계, 통권 23호, 44-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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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20. 6. 21. 00:07

 

                                                           모순

 

모순, 당신 참, 순수한 모순일까, 라고 말하는 그의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비릿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말을 하자면 길어질 테니까. 말이 아닌 눈빛에 말로 대답을 할 수도 없으니까. 우선 모순에 쓴 순수하다는 덧말은 오류이니까. 내가 알기로는, 예컨대 순수한 물이라고 할 때 쓰는 것이 순수함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모순이라고 했을 때 순수는 모순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나더러, 아내더러, 순수한 것 같다가도 모순적인 사람이란 뜻으로, 둘 다로, 어쩌면 비난으로 들어야 한다. 아니, 말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그리 읽어야 하리라.

그런 생각들도 일상을 크게 방해하지는 않는다. 모르는 것이 새삼스레 그것뿐일까. 저녁이 깊어지면 밤이 오고, 밤이 깊어지면 잠을 청한다. 잠을 청하다 보면 잠이 들게 된다. 잠은 좋은 것.

그렇게 또 날이 밝는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나갈 사람은 나가고 그냥 있을 사람은 그냥 있다. 바깥 하늘은 맑을까. 물론 흐릴 수도 있다. 밝거나 흐리거나 관심이 없으니 바깥을 내다보지 않아도 된다.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 또 다른 작은 창들을,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을 켜지 않으면 세상이 조용하다. 오늘도 세상은 조용하다.

 

모순적이 아닌 인간 - 그런 존재가 가당키나 한가. 무모순적 명제 자체가 없다, 사는 일에서는.

말 한번 거창하게 하시네.

삶에서 크기를 말하는 것도 그래.

이게 크기 이야기야?

그러게, 크기가 아니지. 네가 그 쪽으로 갔지, 거창하다니 뭐니…….

아무도 없다. 내가 말하고 오른쪽 귀로 듣고, 내가 말하고 왼쪽 귀로 듣는다. 어차피 한 입으로 말하니까 너는 너다.

이런 나를 가리켜 모순적이라는 말을 그이가 하고 싶었을까? 한 사람이 다른 두 생각을 하는 일이 이상하단 말인가? 한 사람이 평생 일관적일 수는 없지. 아니, 평생 그렇기는 어렵겠지만 한 순간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이 문제지. 그렇다고 내가 모순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모순적인 사람이 아니다 - 이 말은 참인가? ‘무모순적인 사람임’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모순적인 사람임’이 부정되어야 한다. 어떻게? 수학이라면 귀류법이라도 들이대지.

귀류법? 그런 단어는 어떻게?

그거야 어렵고 모호한 단어들이 오래 남아서지.

매사에 서툰 자가 서툴음을 인지 못하고, 미친 자가 미쳤음을 인지 못하고…….

그런가? 내가 모순적임을 모르므로 모순적이다, 그 말인가? 알면 모순적이지 않다는 말인가? 너는 네가 모순적임을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톡! 작은 창이 부른다. 정말 작은데 실은 한없이 넓은 창이다.

뭐지? 손바닥 창을 열까, 말까. 열면 바깥이고, 오늘 해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하고 있던 생각은 끊길 것이다. 무슨 생각이었더라? 이미 끊겼다. 문은 벌써 열렸다.

친구들, 잊지 않았슴? 10시 반 역 2층 집합! 매표소 근처.

아차, 나는 시커먼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고, 폰은 내 옆에 누워 있다가 나를 불렀다. 고맙다, 톡아. 너 아니었다면 멍하니 그렇게 오늘 나들이를 놓칠 뻔했겠지. 시계를 본다. 서둘러야겠네.

 

 

모순 어쩌고 하던 그날 밤 남편의 걱정을 덜려고 말했던 찔레꽃집 나들이는 자꾸 미루어졌다. 찔레꽃이 다 진다고 어서 다녀가라는 채근을 듣고서야 날이 잡혔다. 오늘이다. 나이가 들면 차츰 삶의 무게가 가벼워질 거라 기대했지만 그건 아닌가 보다. 모두들 이런저런 일들에 발목을 잡힌다. 처음 약속했던 날엔 바람잡이 정인이가 딸애한테 가 있었다. 애는 아니다. 제가 아이를 낳는 자식들을 그 어미는 애라고 한다. 또 딸이라고…… 낳기 전까지는 투덜거리더니, 갓난이를 보고와선 완전 날고뛰고 좋아했다. 다음엔 성주 남편이 컨디션이 나빠져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내가 어머니한테 며칠 다녔다. 어머니들은 아무 때나 넘어진다. 화장실에서 살짝 미끄러진 것만으로도 팔목이 골절되셨다. 임시 깁스를 했고 며칠 뒤 제대로 깁스를 하자 불평이 수그러들었다. 고관절이 아니라서 천만다행이라고들 했다. 고관절이 왜? 듣고 보니 고관절 수술을 하면 자리 잡고 눕게 되고 그 길로 일어나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렇구나. 누구에게나 알 수 없는 가벼운 사고며 병들이 빈발한다. 갑자기, 섬뜩하게 큰일도 날 수 있겠지.

얼마 전엔 또래 선배가 동맥류로 떠난 놀라운 일도 있었다. 병명도 생경했고, 서울에 거뜬하게 애들 보고 왔다는 사람이 며칠 새 저 다른 나라에 가 있다니 그저 놀라웠다. 갑자기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 자연사일까? 남편이 의사이면 극과 극이다. 애처가라서 처와 처가가 호강하거나, 여차하면 사팔뜨기라서 속을 태우며 산다. 지구상의 능력남들은 더러 무서운 능력도 함께 갖추어서……. 도파민인지 뭔지가 분비되는 몇 년이 지나면 예뻤었던 아내를 치울 궁리를 한다는데, 눈빛을 잘 보고, 아니면 재빨리 괜찮은 조건에 도장을 찍어야 한단다. 너절하게 퇴출당하기 전에! 영화를 너무 보았나? 하지만 영화가 하늘에서 떨어진 이야기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시계를 보니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에 대려면 더는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설거지 겨우 끝내놓고 멍하니 앉아있던 참이었다. 점심나들이에 따로 준비랄 것도 없지만, 기차 시간이란 엄중한 것이니까 대충 입고 가방을 챙긴다. 모기 기피제랑 계관은 필수지. 아차, 손수건과 칫솔……. 그러고서 나선다.

어? 친구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오늘이 아닌 거야? 180°를 돌아다 봐도 아무도 없다. 반대쪽으로 돌아도 없다. 늦지 않고 빠른 게 다행이다. 발은 커피숍으로 향한다. 급히 나오느라 커피를 담아오는 걸 잊었더니 그 향에 끌렸나 보다.

톡! 매표소 올라가지 말고 그냥 아래 있어! 기사님 뜬다.

기차로 가자더니 예정이 바뀐 모양이다. 일회용 용기에 받아왔다고 미선이 또 혼내겠지. 그래도 넉 잔을 조심히 들고 역 마당으로 내려오니 성주가 보였다.

짝꿍 괜찮아?

응, 그런 대로. 이제 출근하는데 뭐. 어머니는 어떠셔?

계속 아프다시지, 애기처럼. 마침 왼쪽 손목이라 그런대로. 다음에 나타난 건 차를 가져온 미선이었다. 5시 기차로 돌아옴 내가 넘 늦겠어서, 니들 좀 빨리 와도 괜찮지? 근데 정인이 가시나는. 차보단 먼저 와서 기다려 줘야……. 말을 하다말고 미선인 다시 차에 올랐다. 깜박이만으로 정차 할 수 없는 곳인가 보다. 순간 저쪽에서 정인이 보인다.

뛰어, 뛰어 와! 성주가 두 손을 높이 들어 불러도 정인은 느긋하게 걷는다. 정인을 기다렸다가 밀어넣은 다음에 성주가 올라타자마자 차가 출발한다.

야, 너 차를 길에서 기다리게 할래!

꼭 해야 할 말을 꼭 해야 할 시간에 내뱉는다. 정작 운전수가 아니라 조수석의 성주다.

미안혀요, 떡이 안 오잖어유. 시골에 가면서 빈손으로 가남유. 언니도 떡 좋아하고. 정인은 아예 느실거린다.

무슨 언니? 친구라 안 그랬어?

나이가 좀 있어, 친구하기는 해도.

너스레를 떠는 정인의 보따리가 그러고 보니 두 개나 된다. 무거워서 못 뛰었구나.

 

찔레꽃 향기는 정말 대단했다. 골목길이자 큰 길로 나가는 좁은 길 쪽으로 담장 전체가 찔레꽃으로 덮인 집인데, 일상의 집은 아니었다. 버려진 도자기 공방이라나. 꽤 넓은 잔디밭 어디에도 도자기의 흔적은 별로 없었다. 공방으로 썼다는 동굴 같은 초막에 들어서서야 주인장이 제작했거나 수집했을 소박한, 크기에서 소박한 그릇들이 엉성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진열이라고도 할 수 없으리만치 그냥 자연스럽게 널려 있었다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터.

정인아, 막상 어려운 친구들이랑 오면 내가 좀 부끄러운데 어쩌나. 어쩌나요.

별말씀을. 우리 안 어려운 애들이에요. 정인이가 가끔 이야기할 때면 우리 모두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죠.

찔레 향이 정말 대단하군요.

어떻게 이렇게 가꾸세요?

한 마디씩 감탄에 주인장은 겨우 대답할 틈을 찾는다.

가꾸다니요. 그냥 내버려 두죠. 잔디밭인지 풀밭인지 그냥 파란 대로 살라고 내버려 두네요. 염색물 떨어져도 편하라고.

어머, 염색도 하셔요?

도자기는 몇 년째 방학이지요. 염색도 어쩌다가, 그저 취미 정도죠.

그럼 농사를?

농사라뇨. 뭘 할 수 있겠어요. 시골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다가 뒤늦게 시골 내려와서 뭘 할 줄 아는 게 없죠. 여기 오이, 고추, 미니토마토, 이런 것 한두 개 따먹는 것이 전부인걸요.

그래도 시골인데.

저 아래 논 조금, 중간에 누가 자꾸 사래서요. 저 아랫집 텃밭, 텃밭에 뭐가 있더라. 가지랑 뭐 좀 있죠. 언덕에 호박 몇 구덩이. 감나무, 매실나무들. 그냥 저절로 있는 것들이나.

한 십년 넘은 것 아녀요? 언니, 처음 우리 발라드반들 여기 불렀을 때는 내 기억으로는 언니 의욕이 넘쳐 보였더랬는데. 정인이 보조설명자로 나선다. 저 아랫집 살 때만 해도 조금 손질해서 북카페 그런 것도 가능하댔잖아요.

아, 내가 그런 게 아니라, 팔고 나가는 사람이 꼭 팔고 나가야 하니까 동네사람들이 내게 희망적으로 권하는 말들이었죠. 어떻게든 타지 사람이 또 사들어 오는 것 보담 이왕 발붙인 우리가…….

그럼 여기 이 마을이 배타적인가요?

아아뇨. 그렇진 않아요. 도공들 마을이었으니 자존감 내세울 처지도 아니고. 중간에 문화재다 뭐다 인정받기도 하고, 정통 뭐 그런 것에 대한 우대적인 분위기도 옛날보다야 낫다지만.

암튼 공기가 엄청 다르네요.

정말 살 것 같아.

이 엄살, 어디선 죽을 것 같았냐.

이상한 해방감에 우린 그냥 맘대로 소리 나는 대로 지껄였다.

논밥들 알아요? 우리 오늘 논밥 먹을 거예요.

주인의 말도 신기하기만 하다.

논밥요? 누가 논밥을 내오나요? 왠지 솔깃해서 내가 물었다.

내오다니, 배달이겠지, 배달의 민족! 미선인 늘 정확하고 빠르다.

맞아요. 여기 논일이고 밭일 하면서 식당에 핸폰으로 전화하면 점심 배달 다 된답니다. 놉 얻어서 일하더라도 밥은 절대 안 해주요. 기대도 않고요!

놉? 놉이라뇨?

장소가 바뀌니 단어들이 생경하다.

놉이라는 말, 그게 어째 노비처럼 들리네요.

맞아. 놉이라는 말은 노비라는 말이 반절음화해서 생긴 것이지. 하지만 노비와는 다르지, 시대가 다르니까. 날품, 일꾼, 삯꾼, 품꾼, 품팔이, 여러 말들 모두 하루하루 품삯과 음식을 받고 일을 하는 건 마찬가지야. 요즘 시골에서는 일손이 귀하다보니 놉이 오히려 갑일 수도 있을 걸.

미선 씬 시골 일을 잘도 아네요. 그래서 놉이 아니라 주인네가 죽었나 싶네요. 놉 때문은 아니었지만.

누가 죽어요? 부러 죽었다고요? 정인이 울상이다. 언니, 지난 번 말씀으로는 시골 살기가 괜찮다 하셨잖아요.

괜찮지, 전반적으로는.

전반적으로는?

기본적으로 지원금이 나오죠, 이 동네는 집들이 있어도 전원 다 해당되죠.

언니만 빼고요?

에이. 뭔 그런 소릴. 저쪽 마을회관에요, 거기 가면 한더위에도 완전 시원하죠. 밤 열시까지 에어컨 빵빵, 아예 썰렁하게 틀고 살죠. 오전엔 열한 시나 되면 반찬이 와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럼 진작에 와 있던 쌀로 밥을 짓는 거예요, 나라미라 해도 매일 새 밥을 지어먹는 거예요.

나라미? 정부미 말인가요?

예, 나라미. 한글로 나라 다음에 한자로 쌀미자가 쓰여 있어요. 나라 쌀로 거저먹는데, 공짜에다 해주는 밥을 먹으니 나름 호사죠. 그 중 젤 젊은이가 밥을 짓는데, 물론 수당을 받고 하죠. 이리저리 꽤들 받아요. 누군가 가끔 파스다 뭐다 이런저런 약들도 가져다주고, 또 집으로 노인돌보미 나오죠, 어떤 집엔 목욕도우미도 와요. 이발비까지 나오니 살만한 거죠. 어떤 자녀가 그런 효도를 하냐고요.

주인언니는 우리보다 한참 위라고 들었는데, 말투가 전혀 노인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노인들 세상은 아니죠. 여전히 인간적 존엄성 유지가 안 되잖아요. 난 어쩐지 노인 편으로 말한다.

존엄성이 뭔데요. 월급처럼 수당을 주어 자식들 눈치 덜 보게 해주는데요. 농지만 있으면 건보료 그런 것들도 다 감면 혜택을 주죠. 결과적으로 땅 뙈기 가진 노인들이 더 혜택이라니까요.

농지가 있으면 외려 감면된다고요?

그래요.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니까요. 집도 연금도 수준이 넘어서 상당한 건보료를 내야한다, 그럴 때 농지를 소유해서 농사짓는 농부로 등록되면 감면에 해당되는 거죠.

뭐가 뭔지.

아무튼 농지 소유자가 우대?

여러 가지예요. 장애인 처우도 대단해요. 저 위에 어려서부터 약간 다리를 저는 아줌마가 살아요. 얼핏 보면 모를 정도로 살짝. 한데 무슨 차량이, 복지관 차량이겠죠, 일단 데리러 와서 맨날 나들이죠. 한번은, 언니, 나 볼링 갔다 오네, 그러죠. 한번은 수영 다녀온대요. 세상에 승마도 다녀온다니, 그게 장애인이 할 만한 운동인가 말예요. 한번은, 언니 나 요것 좀 사주쇼, 그러는 거예요. 무슨 복지 상품권인데, 다 사용하기가 많으니 나더러 현금화해 달라는 거죠. 모르긴 몰라도 좀 과한, 좀 치우친 지원인가 싶기도 하고.

수중 운동이다 특수체육이다 그런 걸 하게 돼서 기본적으로는 복지가 향상…….

미선이 끼어들다 말꼬리를 내린다.

 

아름다운 찔레꽃 마을에 오면 찔레꽃에 푹 빠져서 꽃가루 범벅이 된 호박벌 이야기라도 들을 심산이었다가, 무언가 평등 같은 불평등을 체감하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이야. 우리 모두는 조용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래저래 도움을 받고, 죽어라 일하는 한창 아저씨들이 죽어나가는 거라서.

우리가 머쓱해 하자 잠시 말을 끊었던 주인네가 계속했다.

놀고먹는 사람들은 느는데, 일손은 모자란다고 하고. 일당도 그게 적은 건지 많은 건지 알다가도 몰라요.

무슨 말이세요?

일을 가는 입장에서야 말이 하루 8시간 8만원이라 그러고들 가죠. 하지만 새벽부터 해 넘어 가야 일어서니 시간 초과는 기본. 그런 일도 날마다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일당이 많은 게 아니죠. 허나 일을 주는 입장에서는 사람 하나 쓰기가 무섭다고 그러더라고요. 하루 양파작업 하면 산지 값으로는 양파 열 포대 스무 포대 값을 한 사람 노임으로 주는 것이니까, 열 사람 쓰면 100포대 200포대 값이 그 자리에서 나간대요. 올해도 양파 풍년이라 여기선 다들 죽을상이더라고요. 그런 노임 다 주고 출하를 해도 양파값은 바닥이니까.

모순이네요, 모순. 풍년에 죽을상이라니. 양파 따는 사람 좋으면 양파 주인 망하고…….

무슨 모순씩이나! 게다가 누가 양파를 딴다냐, 캐지!

모처럼 끼다가 다시 핀잔소리를 듣는다. 성주는 말 틀리는 꼴은 못 참는다.

다 알아듣고서 왜 그래, 정확한 단어가 입술에 걸려 머뭇거리기도 하지, 우리 나이에.

얘 또 나이 타령이네, 남아, 제발 조옴!

내 말은 보편성이 그리 없는지, 친구들 사이에서 좀 뒤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대놓고 형광등 취급이다.

 

넌 그래 여태 그걸 몰랐어?

알았다니까. 지금 알면 어때서! 그래 나 형광등이다.

얘 좀 봐, 자신을 좀 아시네. 헌데 실은 고장난 형광등이다.

그러기 십상이었다. 언제나 별 일도 아니었다. 다만 다들 아는 이야기를 몰랐다는 것인데, 좀 억울했다. 예컨대, 미남 사회 선생님이 미녀 음악 선생님하고 그렇고 그렇게 비밀연애중이라거나, 좀 자라서는 우리 반에서 제일 얌전한 차옥순이 벌써 대학 다니던 중 살림을 차렸었다는 등,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어서 내가 꼭 알아야 하는가 말이다. 어떤 이야기는 알려고 해도 알 수 없기도 했다. 아무개가 약(?)을 먹었고 죽진 않았고 그래서 입원 중인데, 온갖 이유들이 너풀거렸을 때다. 열아홉 나이에 어떻게 정답을 아는가 말이다. 나중에, 훨씬 나중에, 우리들 마흔 아홉에 그 앤 정말로 떠났다. 비행소녀처럼 날라리처럼 옥상에서 아래로 순간에 죽었다. 누가 그 이유를 아는가. 모르면 형광등인가. 고장난 형광등.

 

멀쩡한 양파밭을 갈아엎는데……. 주인이 얼른 화제를 챈다.

왜 멀쩡한 걸 엎어요, 좀 잘 못 된 걸로 갈아엎는 것 아녜요?

그게, 아주 잘 된 상품이라야 보상금이 나와요. 안 좋은 건 갈아엎어도 소용없고요. 그러게 양파가 폭락이었으니, 이제 고추라도 잘 되어야 할 텐데.

고추가 왜요?

여기 사람들 양파 해내고 고추들 따는데요. 그게, 작년에도 양파 완전 망치고 나서 고추농사나 기대했다가 것도 안 되니까 그 사단이 난 거예요.

사단이?

탄저병 알죠, 타들어가는 병. 거기다가 컬러병이라나 노란 반점들이 생기고 그랬다네요. 양파에 고추에 둘 다를 망친 어떤 집에서 그만, 그만 세상을 떴죠.

어머나, 그렇게까지. 정인인 곧 죽는 소리다.

분통이 터지면 그럴 수도 있나보죠. 의욕이 완전 바닥이 났을 수도 있고.

맞아요, 주인네가 계속한다. 그런데 사람 목숨 모기 목숨이에요. 탁 하고 때려잡은 모기 잊어버리듯, 죽은 사람 금방 잊어요. 완전 잊죠. 바로 그러고 나서 벼농사 목돈 나왔으니까 덩실덩실이죠. 그때 태풍 차바던가, 암튼 벼들이 다 쓰러져 누어버렸잖아요. 그럼 관에서 나와서 피해 정도를 조사해 가죠. 몇 퍼센트 어쩌고, 다 죽었다고 적어가죠. 그런데 실은 다시 일어나는 벼들도 있어요. 꺾이지는 않고 살짝 눕는 경우죠. 그럼 수확이 외려 약간 느는데, 관에선 조사해간대로 보상금이 나와요. 그러니 복불복이죠.

그렇구나. 얘들아, 복중에서 최고의 복은 뭘까, 전화위복이래. 금세 기분이 좋아진 정인의 말에…….

 

글렀네.

뭐가, 나남이, 뭐가 글렀냐고? 전화위복이라니까 글렀다니!

아차, 또 들켰다. 나는 여기 들판을 본 처음 순간에, 만일 다음 생이 가능하다면, 내 죽은 양분이 모여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일이 행여 가능하다면, 땅 넉넉한 곳의 농부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남자로 여자로? 그건 상관없겠다. 남자 여자 차이가 무슨 대수라고. 다만 지금 생에서보다 튼튼한 몸과 맘으로 태어나서, 투박하고 든든한 집을 지어, 지금처럼 단 둘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여럿 낳아 왕창왕창 떠들썩하게 함께 살며, 무심해 보이는 땅과 대화하면서, 뭔가 씨를 심어 넣고 자라는 것을 바라보다가, 다 자란 놈들을 먹기도 하고 내어다 팔아서 다른 소용되는 물건들을 사기도 하고. 운전면허시험에도 합격하고, 튼튼한 차 하나 있음 가끔은 아이들이랑 어쩌면 읍내 문방구에도 서점에도 가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들킨 것이다.

아니, 나는.

너는 뭐? 시골 살 생각을 하려다가 글렀다 이 말이지? 성주는 뭐 넘어가 주는 법이 없다. 제 남편도 칼칼한 아내가 성가셔서 자주 아픈가.

남이가 어떻게 시골 살아. 얘는 벌레라면 질겁하는 걸 몰라. 파리모기도 호들갑인데. 쟤 지금 가방 속에 모기약 잔뜩 있을 걸. 더구나 흙속에 숨어 있다가 꿈틀거리며 나타나는 것들이라면. 얘가 어떻게 시골에서 사냐고! 정인은 모르는 것도 두둔해주는 애다.

누가 시골 산댔냐. 나는 그저.

그저 뭐냐니까.

그저, 땅이란 것도 온난화다 자연재해로 힘들 거다, 뭐. 엉망으로 작물이 안 되고, 또는 트렌드에 밀려 외면당하고. 시골도 이상향은 아니구나, 그런 정도.

그래, 남이 그냥 내버려 두자. 시골에 살고픈데 살고 싶지 않다. 이 애 모순인 것 한 두 번이냐.

누가 모……, 미선에게 대꾸하기도 전에 말은 끊긴다.

시끄럿! 그리고, 이상향이 어딨다고! 너흰 어디 이상향을 알아? 유토피아란 말의 뜻이 어디에도 없는 곳이니까, 이론상으로도 없는 거라고! 없으니까 이상향!

왜 그래, 미선아. 무섭게. 누구라도 가고 싶은 곳, 가서 살고 싶은 곳, 그런 건 있잖아. 성주도 놀랐는지 이번엔 구겨진 나를 돕는다.

그래, 그것까진 아니라 해도 가보고 싶은 곳들은 있지. 왜 버킷리스트라고. 우리 나이쯤이면 그런 것 있잖아. 언니, 안 그래요? 슬쩍 주인을 쳐다보는 정인이는 말도 동글다.

그러게. 다들 어디로 떠나고 싶어하는 건 아닐 거예요. 난 이곳이 이상향은 아니지만 이곳으로 만족하는 편이예요. 사람들 가끔 오고, 것도 나쁘지 않죠, 외톨이란 느낌을 없애주니까. 시골 사람들, 이제 정 들고, 음식에도 따라가고. 건 그렇고, 밥 오기 전에 …….

 

주인은 저쪽 부엌에 가더니 냄비를 들고 나왔다. 처음 내어 놓은 옥수수 쟁반에 이어서 두 번째다.

바지락 먹어볼래요?

바지락이요? 요즘 먹을 생각을 안 했는데요.

가까이 싱싱한 수산시장이 있어요, 버스터미널 근처요.

어머나, 알들 굵다.

국물 엄청 시원하네요.

돌아돌아 도시로 나간 놈들보다는 싱싱하겠죠. 그런데 누구 바지락 알러지는 없겠지요?

설마요.

은근히 음식 알러지들 많더라고요. 여기 가끔 오는 지인 중에 낙지 알러지 있는 사람 봤어요, 목포 살면서.

무안 사람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그게 아나필락시스라고, 알레르기 질환이지만 중증이죠. 원인 물질에 노출되면, 먹거나 뭐 그렇게, 벌에 쏘여서도 그렇지, 그럼 심각한 전신 증상이 나타나는 거예요. 은근히 땅콩 같은 식물에도 큰일 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심하면 혈압이 떨어지고, 호흡곤란, 숨이 막히죠.

봤어?

아니, 쓰여 있어.

얘 미선인 우리 도서관입니다, 언니. 정인이가 또 너스레다.

사람 무안하게시리. 미선인 웃고 만다.

아나필락시스 뭐? 음식물 알레르기 종류이겠지, 좀 심한. 복숭아 만지지도 못하는 애들 많았잖아. 우유 못 먹는 애들도.

다르지, 우유 알레르기라 해도 두드러기나 피부염 정도이지만 아나필락시스는 쇼크까지 오는 경우라니까. 다시 미선이다.

우유 참 희한 해. 우유로만 크는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그래도 우유 못 먹는 사람들 은근 많다. 소화를 못 시켜 종일 더부룩하거나 배 아프고…….

그건 또 좀 다르지. 그건 유당불내증이라고 장내에 유당분해효소가 부족해서 그러는 것이고.

미선인 아는 것도 많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도 탁월해지는가 보다. 아마 공부가 재미있어서 이것저것 다 공부하는 것일 테다. 난 뭐가 재미있을까.

 

내 나이, 나이 탓하며 멈춰 있는 건 나이 탓하기 딱 좋은 나이라서 일까. 58년생들은 아직 법적으로 노인은 아니다. 더하기 65를 하면 2023년이 되어야 노인이다. 노인에 대한 인상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라던가, 그런 옛날 옛날에도 그랬다. 노령자는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불신이 강하고 악의적이며 의심이 많고 편협하다, 그랬다던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고 노인은 노인이다. 너는 거의 노인이다.

우린 거의 노인이야.

남아, 갑자기 노인은? 그리고 거의 노인이 뭔데?

그게, 우리가 거의 노인이 되어있다는 말.

재미있네. 노인이면 노인이고, 아니면 아니지, 무슨 거의 노인?

그, 그게 말이야, 임신은 거의 임신 조금 임신 그런 말이 안 맞지만, 노인은 조금 노인 거의 노인 그런 말 되는 것 아냐?

그래서? 남이 너 거의 노인 하겠다고? 난 안 할래.

하련다고 하고 뭐 그런가…….

시끄러. 바지락 국물이나 좀 마시자.

 

바지락 국물 - 별로다. 싫다. 음식들 중 싫은 음식이 많다거나, 무엇에서도 재미를 느낄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친구들은 차마 비정상이란 말은 하지 않지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것이다. 타고난 음식불감증, 재미불감증, 그런 것도 있을까.

아차, 불감증이란 단어는 금기어인 것을. 왜 불감증이란 단어가 금기일까. 단어 그 자체로는 감각이 둔하거나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는 일에 불과한데. 예컨대 도덕적 해이 비슷한 말로, 도덕적 불감증이 문제다, 뭐 그런 데에도 사용한다. 그러니까 재미불감증이란 말을 좀 쓰면 어때서. 말 하자!

 

미선아, 우유 소화 못하거나, 재미 소화 못하거나 뭐가 달라? 난 재미를 소화하지 못한다, 그 정도. 소화불량증이라 그럴까 보다.

나남이 히트다, 오늘. 유당불내증은 아니고 재미불내증이시다고?

재미있는 말이네. 재미있는 것을 몰라?

이 정도가 무슨 재민데. 재미없어, 하나도. 재미불감증이라지 뭐. 내가 고집했다.

그렇구나, 나남이. 나남이는 오늘 재미가 없으시단다.

아니, 그런 단어들 재미없다고!

그래도 오늘 여기 나들이가 재미없지는 않다고! 그렇게 정리하자고! 정인이는 무엇이든 동글게 끝내려 한다.

미안해도.

이 얘 말꼬리 좀 봐, 기어코 재밌다 그러지는 않으시네.

친구들 참 재밌다. 참 재미있게들 사네요. 자주 와요, 여기. 난 오랜만에 이렇게 편하게 떠들고 하는 것 보면서 신나는데요. 주인 언니가 거든다.

우리, 좋아 보이죠?

그럼, 그러믄요.

 

 

좋아 보이는 얼굴들을 하고서 하루가 간다. 툭 터진 정자에서 시골 옥수수도 먹고, 싱싱한 바지락에다 논밥을 먹으면서 담소한다. 그렇게 좋아 보이는 얼굴들로 헤어진다. 좋아 보인다는 것이 꼭 좋다는 말이 아닌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더 좋아 보이는 얼굴의 미선이 늦을 새라 서둔다. 모태싱글로 똑 부러지게 잘 헤쳐 나가는 미선이 보기 좋다. 보기에 좋다. 속으로는 어떤지 아무도 모른다. 표리부동이 꼭 나쁜 말도 아니다. 속마음 다 내비치고 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살자면 그 나름대로 표리부동일밖에. 그러니까 엉큼한 표리부동은 경계해야겠지만.

 

오늘은 무슨 행사냐? 토론이야, 강연이야?

차에 오르자마자 정인이 캐물어도 미선은 대꾸가 없다. 전문적인 일에 관한한 우리들하고 별반 나누지 않는다. 답답하리라.

내가 화제를 바꾸었다. 난 외려 자꾸 뒤가 켕긴다. 양파 값, 일 값, 시소처럼 오르고 내리고 연결되어 있잖아. 양파 값이 내려도 임금은 올라야 하고, 임금 오를수록 양파 주인은 내려가고…….

미선이 곧장 들어온다. 최저임금 올라가면 영세 고용주를 죽이고, 고용주 살리려면 최저임금 못 올리고. 정책 입안자들의 기본 고민이지. 모순이기도 하고. 도처에 이해 충돌이지!

시소가 바닥을 친들, 그래도 땅속으로까지 들어가는 건 심했어. 뭔가 잘 못이야. 왜 죽어! 일 년 내 농사 지어놓고! 성주가 잽을 넣는다.

잘못인 것 한둘이냐! 어찌 보면 사는 게 다 잘못이지.

남아, 뭔 말을 그렇게 해. 켕긴다며. 그런데 죽은 게 잘 한 거야? 사는 것이 왜 잘 못! 볼에 부드러운 바람 느끼면서 한낮 살았으면 좋은 날 아니냐고! 정인이 속상해 한다.

이게 무슨 좋은 날이야, 그저 그런 날이지. 있어도 없어도 되는 숱한 날들 중 하루.

그렇다고 오늘을 버리냐, 예까지 자알 살고서.

잘 살지 않았다니까, 그냥 살았지. 나도 버틴다.

그렇다고 버리냐고! 오늘을 버리면 어제에서 내일로 어떻게 건너 뛰냐. 내일로 안 갈 거냐고?

내가 안 간다고 내일이 안 오는 것도 아니고, 있으나 마나 한 날들,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시간들이 허무해서 하는 말이지. 쓸모없는 생은 이른 죽음이라고 했어.

누가? 명언이야?

앗, 괴테의 이피게니다! 나남이, 그건 좀 다르지. 미선은 정말 박사다.

뭐가 달라.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숨만 쉬고 있으면, 이미 죽음이 와 있는 거라고. 죽은 거라고. 형용사 빼고 말하면, 생은 죽음이다.

누가 이애 좀 말려라. 또 시작이다. 말 수 적고 얌전하던 애가 이상한 말 터뜨리는 것 가끔 심하더라. 이것도 모순이냐?

너까지 왜 이래. 모순 소린 자꾸 듣다보니 어째 거슬린다. 찔레꽃 향기 듬뿍 묻혀 가면서 웬 철학들이냐고.

힘들어서 그래. 넌 괜찮아? 하루하루가 괜찮아?

어때서?

미선아, 분위기 좀 바꾸자, 음악 큐! 경쾌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하는 우리들……

 

음악 소리가 들려오자 감긴 눈 안쪽에서 정인이 모습이 솟는다. 신발 소리가 사뿐하다. 앞뒤가 함께 닿는 발걸음은 맨발인 듯 가볍다.

박자 말고 선율을! 선율을 타라고요! 예, 그렇게. 아니, 고개는 들고요. 배를 등 쪽으로 민다고 고개를 내밀진 마시라고요! 앞가슴 활짝, 화알짝 펴서 쇄골까지 당기도록! 에이, 뒷가슴은 견각과 함께 앞쪽으로 밀고…….

 

선율이구나, 멜로디…….

남아, 무슨 소리? 무슨 선율?

어디에 가 있냐고! 얘가 점점…….

또 들켰다. 요즘에는 생각이 튀어 나와서 속마음을 들키는 일이 부쩍 늘었다. 싱그러운 정인이가 부러웠나? 허리를 뒤로 젖하고 걷는 모습이 우아하다.

뭐냐니깐!

아니, 갑자기 정인이 신발 소리가 멋져서. 마술이야, 천천히 걷고 싶음 천천히 사뿐히 걷고 싶음 사뿐하게.

발걸음 소리가? 어디서? 네 옆자리에 푹 앉아계신 정인이 발자국 소리가 지금 들린다고?

응. 선생님 목소리를 따라 나긋나긋, 박자가 아니라 선율을 타면서 사뿐사뿐.

박자 말고 선율을 타면서 사뿐사뿐 - 너 우리 댄스교실 와봤어? 정인이 놀란다.

아니, 그냥 생각이 난 거야. 생각하면 안 되냐 그래? 우물쭈물 변명으로 간다.

실은 우리들 다 댄스교실 다녀야 해. 운동 중에 최고라잖아, 음악이며 상대와의 교감이며, 단순운동과는 비교가 안 돼. 미선은 댄스에 관해서도 정답을 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정인아, 그게 그런데 아침 아홉시라고?

아, 그만 둬. 새벽밥 먹고 춤추러 갈 일 있남요? 정인인 취미가 되시니까 쭈욱 하랍시다!

갑자기 음악이 꺼지며 차가 멎는다.

내려, 얘들아, 오늘 여기서 한꺼번에 푼다. 알아서들 흩어지라고! 씨유!

너 여기 미국 아니다. 잘 가라고, 라이드 고마웠어.

오염된 한국어구만. 하긴 단일민족도 아닌데 뭐. 샬롬!

나마스테!

 

 

지하철 타러 내려갑니다. 오고 가는 것을 혼동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여럿이 함께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실은 지난번에 문화전당역에서 금남로 쪽을 탔어야 했는데 남광주 쪽으로 갔다가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 때문보다는 낭패감 때문에 더 속상했었던 기억을 지하철 탈 때마다 하게 됩니다. 방향을 잃는 일이 어디 지하철에서 뿐이겠습니까. 처음 순간 1°만 살짝 틀어져도 엄청 달라져버리는 인생길을 살아가노라면.

그런데 인생이 직선은 아닙니다. 아예 꺾어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슬쩍 각도를 옮길 수는 없는지요. 과제를 수행하는 중에 주위의 사물이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집중력은 우수한 성질이죠. 하지만 도가 넘으면 병입니다. 인생이 과제인 한 그렇지요.

귀를 베어가도 몰라요, 쟤가!

어려선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핀잔 듣기가 일쑤였답니다. 그때는 핀잔 속에 칭찬의 냄새가 끼어 있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니 그게 꼭 칭찬받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길을 바꾸어 갈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는 길이 가고 싶지 않다면, 바꿀 수도 없다면, 어찌합니까?

모순에서 찔레꽃으로 앙파로 춤으로 숨 가쁘게 상념을 옮긴 오늘, 오늘 하루가 갑니다. 들고나는 이 없이 닫혀있기 일쑤인 현관문을 벗어났으니, 조금은 더 사는 것 같은 하루였습니다. 여럿이 섞여서 슬금슬금 앞으로 갔을지요. 앞이란 어디일까요. 목적지를 앞이라고 해야 할지요. 목적지는 어디일까요.

남은 날들 중에서 하루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몇 날이 남아있을지 누가 압니까.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 숨이 막힙니다. 모르는 것은 흔히 어둠이라고 표현합니다. 창밖에 어둠별이 떠오릅니다. 오늘밤이라는 이름의 밤이 올 것입니다. 어쩌면 밤새 숨이 막히겠지요. 아니면 내일 밤에, 어느 밤에. 아득히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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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전남여고문학>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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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2019. 9. 1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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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교수신문>으로부터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30회 걸쳐 가벼운 칼럼을 쓴 일밖에 한 것이 없는 나에게.
2년이 지나서,  <방송통신대학 위클리>에 역시 가벼운 글 하나를 쓰고서 생각이 난다.

장편 <흐릿한 하늘의 해>가 출판되었을 때, 그리고 그 작품으로 "놀랍게도" PEN문학상을 받았을 때......

 

‘글쓰기’ 절실해 떠난 강단 … “오늘 가능한 일에 몰두할 뿐” - 교수신문

때로는 한 국가의 지식인으로서 냉철하고도 날카롭게, 때로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이 나라, 이 사회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교수가 있다. 현재 에 ‘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을 연재하고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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