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2. 11. 20. 22:21


입시지각생의 운동화 끈

                                                         『우리 어디에 서 있어도』2002 (이화에세이)          


해마다 겨울이 오고 수능이든 입학시험이든 결정적인 시험이 있는 날은 대개 날씨가 혹독한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한지 모두들 마음이 얼어붙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기억들이다.


오전의 논술과 오후의 면접, 그만하면 교수에게나 입시생에게나 긴장된 하루가 틀림없다. 차가 밀렸다가는 큰 일이므로 학생들이 움직이기 아예 전에 서둘러야 마음놓고 학교에 이른다. 신체리듬에 따라 참새형과 올빼미형이 있다지만, 나는 새벽같이 출근할 날이면 아무리 마음을 풀어도 짜증을 이기지 못한다. 입실 시간이 지나고도 빈자리가 꽤 있었다. 입시가 여러번의 지원기회가 있어서, 첫 시간에 지각하는 학생은 예상대로 대개 결시로 이어질 것이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고, 우리는 서서히 원서대조에 들어갔다. 삐그덕 교실 문이 열리고, 놀라서 고개를 든 학생들 앞에 울상으로 지각생이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규정대로 라면 입실이 거부될 상황이었다. 새벽부터의 짜증까지 겹치면 지각생이 불리하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상념은 불현듯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수십년 전 어느 이른 봄, 선배도 없는 외로운 대학시절은 신설독문과 신입생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라서 처음 외지로 나간 지방도시 출신에게는 대도시의 낯설음까지 더했다. 낯설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었나? 입학시험을 치르던 꽁꽁 언 겨울, 백설공주가 숨어사는 산만큼이나 오르락내리락 미로를 거쳐가는 캠퍼스는 주눅들게 하기 알맞았다. 오늘날에 보아서는 그저 아기자기한 정도라 해도, 당시의 시골소녀의 눈에는 그랜드 캐년 다름없었다. 약간 비뚜름히 오른쪽으로 산을 오르다가 어디에선가 왼쪽으로 굽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 쪽 아래로 펼쳐지는 거대한 건축물, 보기는 무맛이었고 우중충한 색조마저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데... 거기서도 어렵게 몇 고개를 올라 드디어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김치 다름없었다. 종일 7과목을 필기과목으로 치르는 입시에 겁도 났고, 하루 종일은 그 자체로서 부담이었다. 어떻게든 숨을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은 축복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어머니답게 따뜻한 맛있는 점심을 자꾸 더 뜨게 했고, 가물거리는 눈...


다시 시험장을 향하는 발걸음은 아침보다 더 무겁기만 했다. 시간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잡았지만, 들어갈 때는 오르막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렸다. 끈은 걸기적거리며 안팎으로 덜렁거렸다. 당연히 몸을 굽혀서 끈을 매어야 했겠지만, 미욱한 성정에 몸을 굽힐 시간이 없기도 했고, 몸을 굽혀서 버릴 1,2분과 끈이 풀려서 방해받을 1,2분 사이를 계산하는 머리는 실타래같이 얽히기만 했다. 누구도 실험을 해 보지 않은 두 가지 경우를 두고서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한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생각은 그 둘 사이를 헤맸고, 걸기적거리는 발은 자동적으로 옮겨 떼고 있었다. 시험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흘끗 바라본 시계로 이미 시작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 길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다면 어머니의 소원으로 지원대학을 바꾼 분풀이로서 도중하차했다는 누명을 쓸 게 뻔했다. 이제는 지각을 해도 일단 고사장에 갈 것인가 아닌가의 투쟁이었다. 계단에 이르러 넘어진 것은 꼭 풀린 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르막만 나타나도 피를 품어내기에 지쳐버리는 심장이 진짜 범인이었을 것이다.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5분도 더 지난 상태... 아 이렇게 두 학교를 다 놓지는 구나. 층계를 올라온 가슴은 콩콩 뛰다 못해 겨울 두터운 옷 위까지 벌렁거리고 있었고, 시계는 째각거렸다. 이 벽 너머, 바로 벽에 밀착된 책상 하나에 응시학생이 없구나...


우연이었을까?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아니 다시 쓰자. 나는 문을 붙잡았다. 숨을 몰아쉬고, 시간이 흘렀다. 눈을 떴다. 문을 조금 열었다.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빈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와서 문이 안에서 열렸는지, 밖에서 열렸는지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많은 세월 동안 그 순간을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버전으로 쓰이던 그 장면이 원본을 잊어버린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손수 그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나를 앉게 하신 교수님의 엉거주춤한 행동이었다. 덮혀있던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를 올려놓으시기까지 했다. 까만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구나... 나는 까막눈 비슷했다. 놀람의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시험지는 뿌옇게 변해갔다. 그렇게 치른 5교시 과목은 공교롭게도 전공이었다, 독문과 학생들을 위한 <독일어>.


그렇게 해서 나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 덕으로 이화식구가 되었다. 60년대 학부, 70년대 대학원, 80년대 박사과정을 이화에서 공부하면서, 그 시발점에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이 계신 것을 상기하곤 했다. 오늘 이렇게 입시에 늦는 학생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꼭 선생님을 본받으려는 생각에서는 아니겠지만, 지각생에겐 언제나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은 내가 교단에 선 이래 결석생을 결코 홀대하지 않는 숨은 이유 또한 선생님께서는 짐작도 못하실 비밀로 남아 있다.


지난 학기에는 모교의 학위논문 심사에 합류해서 감시회로까지 갖춘 현대식 교수실을 드나들며, 그 옛날 칸막이 교수실의 사랑 반만이라도 나의 제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지 새삼 코끝이 찡했다. 아슬아슬한 입학 후 여전히 지각 결석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어주시던 강희영교수님, 김영호교수님도 이화 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시고 정년하신지 오래이다. 너무 오랜 동안 배워서 다 베껴먹은(?) 이병애교수님마저 이제 곧 교정을 떠나시게 된다니, 내년 이맘때의 모교가 얼마나 썰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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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9. 16. 22:25
[전일시론 2002년]          
 

한가위 유감 - 우리를 스산하게 하는 가을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를 지나면 처서와 백로는 금새 다가온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옛말처럼, 음력 칠팔월은 어정어정 건들건들하는 사이에 지나는 것이다. 그것은 추수만 남아 한가해진 농촌을 이르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농촌을 보라.

입추는 물론 처서절기에마저 비가 내리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일년 농사 마무리는 튼 일이 된다. 오죽하면 “처서에 비 오면 독에 든 곡식도 준다”는 속담이 있었을까. 그래서 입추 절기엔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기구하고 비의 재앙을 피하고자 기청제(祈晴祭)가 있었다 했다.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여 밀물과 썰물의 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사리 현상이 발생하면, 서남해안 지역의 저지대는 침수하게 마련이었으니까.

자연재해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속수무책임이 드러나고 있다. 올해의 세계적인 기상악화로 인한 피해는 21세기 인류문명의 발전을 무색하게 한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인재의 요소가 더 짙게 드러나기도 한다. 산사태의 상당 정도가 인공적인 자연훼손 - 축지법을 위한 도로개설 - 탓이라는 보도였다. 그러고서 오늘의 농촌을 보라. 태풍에 쓰러진 벼포기에 매달린 경우는 그래도 상이다, 아예 논의 형태도 없는 우리의 훼손된 땅들... 잃어버린 꿈들.

우리는 기청제를 지내는 마음가짐으로 가을을 맞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도로 하나도 다리 하나도 “돌다리 두드리듯이” 생각에 생각을 또 하고 놓아야 한다. 내년이면 사라질 장흥군 유치면 덕산마을의 운명에도 가슴 조인다. 수몰지구로 고시되어 모두 이사를 해야 했겠지만, 여전히 아직 이사가지 못한 집들은 이번 집중폭우에 물에 잠겼다. 애초 댐공사로 인해 면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쯤으로 묵인하는 우리들. 댐이 파괴하는 것은 환경만이 아닌 우리들의 연대감이다. 댐의 혜택을 받을 대다수는 댐공사가 묵살한 소수의 인생에는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기주의와 무관심 ― 그것은 어찌보면 하나의 끈이다. 풍성하고 한가로워야 할 가을의 문턱에서 스산하기만 한 기운은 도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길을 뜯어 놓아 방치되던 것이 드디어 “푸른 길” 조성이 시작된다니 우선은 반가울 밖에. 철길이란 단순한 선이기보다는 어딘가로의 연결이었듯이, 이제 주변 공간과의 연계 속 풍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철도부지로 묶여 재산권 행사에 저자세이던 인근 주민들의 입장에선 다른 견해가 나올 법하다. 그들의 소수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무시해서는 진정한 민주적 사업이 아닐 것이다. 푸른 공원으로 변할 네 곳 광장에 대한 기대나 푸른 길을 산책할 수 있을 혜택과 더불어, 우리에게 푸른 길을 제공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소수의 권리를 잊어도 되는가.

그러는 사이에 “광주현대미술관” 계획도 설왕설래가 재현되고 있다. 애초에 현대미술관 건립 계획이 도청 이전 이후의 도청부지와 예술의 거리를 하나로 묶는 문화벨트 프로젝트로서 구상되었다지만, 그러나 예술의 거리 끝 중앙초등학교의 문제는 여전히 혼미한 상태로 이제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도심공동화로 중앙교는 20년전 5천 규모의 학생이 십분의 일로 줄고 교실은 아무리 특별실을 늘린다 해도 폐실되고 있는 현상이라니 축소 또는 이전이 바람직하겠지만, 이를 전체의 논리로서 소수를 핍박하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할까.

행여 일이 잘 마무리되어 우리 도시가 예향답게 또 하나의 미술관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문턱 높은 예술의 성곽을 지어 놓을 양이면, 기존의 광주시립미술관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100주년 기념전을 가진 베니스 비엔날레의 귀감을 보자. 2년에 걸쳐 자르디니 공원에 중앙 전시장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기에 우회 공사를 해야 했다는 일화는 냄비방 가슴으로 쉬 뜨겁기만 한 우리들 행정에 경종이 될 것이다. 냄비방 말고도 우리에겐 또 하나 흠이 있으니, 흉내 좋아하는 습성이다. 어디 좋은 데 미술관 따라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웅장한 규모의 위용을 자랑할 생각이라면, 아예 역사 깊은 초등학교를 절단내지나 말자. 낡은 교실은 허물어 푸른 나무들을 가꾸면 우리들에게 산소를 선사해 줄 것이니까.

이제 곧 한가위, 그러나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노래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언제냐 싶게 이제 곧 밤 동안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 수증기는 엉겨서 풀잎에 이슬을 내릴 것이다. 밤이슬같은 썰렁한 가을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사에 어딘지 따뜻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2002년 9월 16일)


Posted by 서용좌
소설2002. 9. 1. 23:30

<완료추천사>


실험 정신과 사색적 언어가 돋보인 작품



홍  성  암


   서용좌의 단편소설 <태양은>을 완료추천 작품으로 선정했다. 서용좌는 이미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도서출판 이유, 2001)으로 그의 작품적 역량을 들어낸 바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문단 데뷔 관행상, 단행본 출간도 문단 등단의 절차로 인정 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본인의 겸손으로 다시 한번 등단의 절차를 거친 것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장편 단행본 출간을 1차 추천 작품으로 인정하고 이번에 응모된 단편 <태양은>을 완료추천 작품으로 선정하게 된 것이다.


   서용좌는 이미 출간된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에서 인칭의 문제나 시점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실험적인 태도를 보인 바가 있다. 이 작품은 등장 인물에 일정한 이름이 주어지기보다는 ‘남1’, ‘남2’, ‘여1’, ‘여2’ 하는 식으로 기호화한다. 그리고 상호관계도 ‘선배’, ‘후배’, ‘친구’ 등으로 관계화시키고 또 더러는 상징체계로 ‘청바지’, ‘솜털’, ‘나팔꽃’, ‘달님’식으로 익명화한다. 그리고 매 장이 바뀔 때마다, 또는 같은 장에서도 시점이 바뀌면서 3인칭, 또는 1인칭으로 넘나들며 사건의 어느 측면을 조명한다.


   이렇게 서술시점을 옮기면서 서술자는 등장인물의 시점에 한정되어 사건과 심리를 인지할 뿐 텍스트 전체를 조망하지는 않는다. 이는 화자가 서술하는 세계는 텍스트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으로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현실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며, 화자를 통해서 부분밖에 인지할 수 없다. 그리고 총체적인 사건의 종합과 의미화는 독자의 몫이 된다.


   단편 <태양>에서도 그런 실험성의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앞의 장편에서처럼 사건을 이끄는 몇 개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고난과 슬픔의 상징인 ‘눈물방울’, 불구성을 의미하는 ‘맨발’과 ‘발가락’ 그리고 과거 단절의 의미로 ‘잘린 머리칼’, 그녀의 불행을 키운 ‘삼색 가위’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에 동정적인 유일한 시집식구인 숙모를 화자로 해서 질부, 남편, 계모, 아버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딸과의 관계양상을 때로는 1인칭, 때로는 3인칭의 시점으로 여자와의 관계를 조명한다. 그들의 조명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서술되는 것이어서 매우 단편적이지만 독자는 그것의 종합화를 통해서(화자의 도움을 받지만) 주인공 여자의 공고한 생애의 실체와 접맥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서술구조를 보면 주인공인 여자는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슬하에서 살게되는데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를 의식하게 되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미장원의 미용사가 된다. 그러던 차에 아직 대학생이던 남편을 만나게 되고,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냉대를 받는다. 딸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해서 기죽어서 시집살이를 하게된다. 그렇게 낳은 딸도 할머니와 시누의 손에서 자라며 무식한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입장이다. 그러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딸이 가출을 하게되고, 여자는 무시된 자신의 생애를 극복하고자 술을 마시게 되어 마침내는 알콜 중독자가 된다. 그리고 끝내는 밀폐된 방안에 감금된 상태에서 죽게된다.


   이런 서술구조는 자신의 성격적인 결함으로 역경 속에 살아야 하는 운명적 플롯의 전형으로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등장인물의 익명화와 시점 이동의 다양성, 그리고 사건을 이끄는 몇 개의 상징체계가 남기는 강한 인상 등으로 하여 작가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런 실험성이 하나의 시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화자의 관찰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색의 깊이와 접맥되어서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역할 유희에 서툰 그녀는 확실히 조금 맹해 보였다” 라든지 “컴퓨터 자판 모양으로 일정하게 배열된 묘표” 같은 서술 표현은 매우 신선하고 또 깊이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의 기법은 단순한 기법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등장 인물의 삶의 본질로 접근하는 지름길이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기존적인 작품의 통속, 또는 통념화에서 벗어나 새로움의 시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특히 시의 적절한 삽입은 작품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여기서 기법이 곧 내용이 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강한 실험정신에 토대를 둔 만큼 사건 전개나 사색적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신인들이 항용 빠지기 쉬운 몇 가지의 단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가 친절하지 못한 서술이다. 작가의 관념에 의해 대충 넘어가는 식의 서술은 그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독자로 하여금 작품 이해에 큰 장애가 된다. 둘째는 자주 발견되는 비문(非文)이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서술하지만 독자는 제각기 자기식의 어법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객관화된 문법체계를 따라야 한다. 셋째, 어휘의 정확하고 적절한 선택이다. 뛰어난 사색적 언어가 때로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적절치 못한 어휘선택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단점의 지적은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엽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문학작품은 언어의 예술이고, 언어로 사색하고, 언어로 사물을 존재케 한다는 면에서 파악한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서용좌의 추천 완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특히 우리 문학의 세계화가 절실히 필요한 현실에 비추어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분들의 소설창작 참여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외국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우리 소설의 소재적, 주제적 영역 확장에 기여하고 동시에 문학적 수준을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서용좌의 신인 등단은 더욱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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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료추천 소감


소나기 금방 들어 닥치는 무더운 한여름의 오후,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감히 하늘이라면 신성모독일까, 은총처럼 어디에선가 내려온 부름이라면 변명이 될까. 서당개 3년 풍월이라고, 하세월 하이에나처럼 남의 글 파먹고 산 나머지이리라. 기껏 교실 크기의 낡은 중학교 도서실에서 시작된 긴 긴 유혹에 굴해버린 지금, 제 5막에서야 등장한 한 조역의 역할처럼, 기대되지 않고 슬그머니 나선 밤길 걷기에 거창한 욕심은 없다.

예컨대 「태양은」이란 제목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인생에 주제가 없거늘 글쓰기에 무슨 주제냐 싶은데, 이름은 있어야 해서 첫 단어가 내걸렸을 뿐이니까. 이런 초라한 글을 빌미로 멍석을 깔아준 《소설시대》에 다만 고개 숙인다.

있어도 없는 엄마-아내-딸, 나를 참아주는 가족이 내 글의 온상이다. 까다롭다는, 괴팍하다는 나와 더불어 이웃해 사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모두를 사랑하나 보다.

                                                        2002년 여름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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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