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날 저녁, 제자의 글 스승인 나OO 시인이 지방 행사에 내려온다고 듣고도 꿈쩍도 안했다. 그의 시들을 외우던 때를 잊었나. 맘 가는 곳에 몸이 가지 않은지 오래다. 시집을 펴본지 언제더라? 이리저리 시집을 검색하다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시가 뭐고?』는 뭐고? 다 살고 나서야 한글을 깨우친 할머니들의 시란다. 시? 그 정도가 시가 될 수 있어? 비슷하게 『시집살이 時집살이』란 시집도 나온다.
이 희한한 성과물은 《시인 할매》(감독 이종은)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문화계의 틈새로 들어왔다. 스스로는 오래 전에 성장을 멈춘 그들을 누군가가 폭풍 성장시킨 것이다. 칠곡의 마을학당을 연 이들이나 곡성 시골마을 ‘길 작은 도서관’의 김 관장이 한 일이다. 책을 거꾸로 꽂아두는 할머니들을 보고 한글을 깨우쳐주리라 마음을 먹었을 뿐이라는데, 그 때 이런 결과를 상상이나 했겠는가.
내일을 상상하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다. 지나가버린 과거만치나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 내일이다. 그런데 오늘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내일 큰일을 냈다. 내일을 두려워 할 것도 무시할 것도 없다. 누군가가 뜻을 가지면 생각지도 못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린다.
광주에도 시청자미디어센터라는 곳이 있어서 자잘한 행사에 가본 적이 있었다. 강당을 대여해주는 곳이구나, 그 정도로 알았다. 그런데 그 곳에서 주관한 노인대상 미디어교육이 엄청난 가지를 뻗고 있음에 놀란다. 1기 졸업생들 몇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미디어봉사단은 평균연령 60~80대 회원들 40명 정도가 “배워서 남주자!”라는 구호로 활동한다고 하니, 맥 빠진 노년의 외로운 삶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 가운데 자전적 이야기 《딸》이라는 7분 10초 영화를 만든 이가 당시 70대 할머니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또 그 영화제작 과정을 담은 《28청춘》(감독 박근하)을 낳았으니, 문화의 연쇄 꽃불놀이다.
젊거나 늙었거나 삶은 살기를 요구하고 있다. 사는 일은 하인도 한다! 프랑스 어느 시인이 했던 말이다. 고고한 침묵 속의 비니(Alfred de Vigny)였을 것이다. 하인이라고 쓰고 누구나라고 읽는다. 사는 일은 누구나 한다! 누구나 하는 ‘그냥 살기’ 그것을 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귓속을 맴돈다.
명성은 자존심, 돈은 성공의 지름길! - 그 마약에 내둘려 청춘시절을 외길로 내닫느니.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 - 그 말에 현혹되어 온갖 운동과 좋다는 음식들에 목을 매느니. 그냥 오늘을 진정으로, 마음 가는 것을 배우며 성장하는 삶이 아름답다. 누군가의 배움을 위해서 작은 의지를 가지고 그 장을 여는 사람들은 더 아름답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몰라!’ 라는 글귀를 마음에 담고 사는 일이리라.
이율배반, 나를 돌아본다. 소설 나부랭이 쓴다는 핑계로 습득에 게을러터진 지 오래다. 다른 소설들은 물론 아예 책 읽기에 시간을 내지 않는다. 먼 과거 가까운 과거를 읽지 않으며 오늘을 살려 하다니. 북극해의 결빙 이상이며 지소미아 종결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거늘. 그냥 사는 삶, 공부하기를 멈춘 삶은 육신의 연명에 불과할 터. 시집을, 역사책을 읽는 노인들 곁에서라야 젊은이들이 산더미처럼 무거운 오늘을 견디면서도 보다 괜찮은 내일을 예감하지 않을까.
평생을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에 파묻혀 살다보면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두려울 때가 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