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9. 5. 9. 09:52

 

시베리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

 

오늘도 꼭 밖에 나갔다 오고 그래요! 날씨도…….

대문이 닫히면서 남편의 녹음기 소리가 함께 잘린다.

 

피플 토킹 위드아웃 스피킹, 피플 히어링 위드아웃 리스닝.

우리의 대화다. 침묵의 소리. 노랫말이 인생을 대변할 때가 있다. 많다. 말하고 있지만 말이 아니다. 듣고 있지만 듣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에도 세월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동안 많은 대화들이 저절로 녹음되었다. 녹음되었다가 적당한 장소 적당한 시간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녹음 대목을 찾느라 고심할 필요도 없다. 그 일에 관한 한 로봇의 정교함을 넘는다.

걱정 말아요.

아주 적당한 말을 내뱉고 돌아서는 나의 역할놀이도 만점이다.

 

맨날 어딜 가래! 맨날 혼자서 어딜 가?

혼자 중얼거리면서 식탁으로 돌아오려다 말고 거실에 앉아서 광주극장 상영작을 네이버에 쳐본다. 정말 영화관에라도 가볼까. 오늘처럼 혼자 가려면 광주극장이 낫다. 평소에 영화관 가려면 백화점 가면 될 일이다. 몇 개씩 되는 상영관이 있으니 골라 보면 될 일이고, 친구도 만나고. 그런데 친구들이 발칸반도에 가 있다. 미순은 평일에는 시간이 없을 것이고.

사실 미순과 내가 여행에 동참하지 못한다 했을 때, 친구들은 시큰둥했다. 대부분 그러려니 했고, 누가 나서서 가자고 채근하는 이도 없었다. 미순은 일찍 못 간다고 말했었다. 벌써 지난해 여행계획이 나올 때부터였다. 친구들 전체가 비싼 성수기 요금으로 여행을 하게 되는 것에 부담을 느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말로는 여름방학에도 잠시 중한 일정이 있다고 했다. 나는 늘 빠지는 축이다. 그게 실은 나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 때문이라고 해야 옳다. 단체여행을 가는데 누구랑 함께 자게 되면 한숨도 안자고 있다가 다음날 비실대면서 일정에 영향을 주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누가 나랑 함께 자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니 무슨 무슨 핑계거리를 만들어 빠지는 것이 상책이다.

 

오래전부터 해외여행 운운 하다 보니 며칠 전에는 이야기가 그이 귀에도 들렸나보다. 결국 참견을 했다.

크슬보라고? 발칸을 말하는 거죠? 그런데 꽤 멀리들 가네.

그래요, 가까운 데는 다들 갔다 와서요. 어디는 누가 갔다 오고, 또 어디는 누가. 그러니 많이들 안 가 본 곳으로 낙착된 거죠. 동유럽 돌 때 슬쩍 크로아티아에 갔던 애들은 거긴 또 가보고 싶은 곳이라고 오히려 반겼다고도 하고.

그렇게들 다니나?

자그레브 같은 데는 팬도 있어요. 가톨릭도 아닌데 거기 고딕식 높은 성당에 저절로 들어가게 되었다나, 암튼 거긴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라 그랬대요.

아, 크로아티아란 곳이 그런 매력이 있나? 그럼 발칸에 지금 여섯 나라, 일곱이라던가? 우리가 유고슬라비아라고 그렇게 배울 때는 요상한 나라였지. 민족은 다섯, 언어는 넷, 문자마저 둘로 갈라졌다고 하더니만 결국 따로 살게 된 거네.

언어가 다르다는 건 좀 문제겠지요. 같은 언어를 써도…….

그건 그러네, 소통이라는 것이. 그러니까 말이 통해야 소통이. 헌데 당신도 참, 무슨 핑계를 대고라도 여행을 가려고 할 일이지, 왜 단체여행마저 빠지려고 해요? 사람이 바람을 쐬러 나다녀야 한다니까 그러네. 난 혼자서 일주일은 끄떡없어요. 어려서 못 해본 보이 스카우트 하지 뭐.

보이 스카우트라고? 저녁마다 어머니한테 갈 거면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눈에 선하다. 스치는 생각과는 다르게 말은 평이하게 나간다.

발칸이면 일주일 더 걸려요. 혹시 중간에 멀미라도 나면 친구들 보기 난감하죠.

왜 멀미가 날 거라고 생각해요? 요샌 멀미 잘 안하더니만. 하긴 어딜 가야 멀미를 하거나 하지.

이건 일주일도 넘게 9일이래요. 그냥 힘들어요.

당신 참 특이해. 다들 기회가 없어서 야단인 것을. 참, 우리 여행은, 그건 내가 알아서 추진합니다. 올해가…….

뭣 하러요.

저번에 약속 했잖아요. 이번엔 간다고. 이제와 안 간다는 핑계 찾기 어려울 거요.

그이가 쐐기를 박았다.

 

카톡 카톡.

그냥 마저 밥을 먹는다. 황태국이 오늘은 당기지 않는다. 콩나물이 늘 고소하고 깔끔하다. 조금 꺼내서 무침으로만 했다. 나머지는 국물 째로 아껴 두었으니 저녁에는 찰밥을 해도 좋겠다. 가만, 오늘 금요일인데 그인 늦으려나? 하긴 찰밥이야 해 놓았다 내일 먹어도 뭐.

카톡 카톡.

웬일들일까. 그러고 보니 오늘이 출발일이다.

나남이, 우리 지금 비행기 탔다. 30분 뒤 출발. 이제 핸폰 끌 거야. 정인이다.

남아, 남겨두고 가서 미안, 잘 다녀올게. 쏘리(이모티콘). 유향이, 지금 회장이다.

다들 잘 다녀와. 여행가방+선글라스(이모티콘). 나도 답을 보낸다.

젓가락을 들려고 하는데 또 울린다. 이번엔 단톡 방이 아니라 그냥 카톡이다.

남아, 오늘 시간 있지? 나올래, 흰밥 먹자.

성주다. 아차, 성주도 못 간댔지.

성주는 가끔 흰밥 먹자는 소리를 한다. 남편이 당뇨라서 꽁보리밥만 씹는다고 너스레다. 꽁보리밥은 아니지만, 검은콩에 수수다 귀리다 이상한 잡곡들 죄다 섞는다고. 귀리 좀 씹어 봐! 밥도 아니야. 우리들은 모두 웃는다, 요즘 흰밥 먹는 사람들 어디 있다고! 그럴 땐 미순의 말이 제일 웃긴다. 나 혼자라도 스스로 발아현미밥 해먹거든요! 현미밥을 하기는. 햇반 종류가 그렇다. 발아현미밥 작은컵은 나도 좋아하는 편이다. 그냥 데울지 유리그릇에 옮겨서 데울지 그게 늘 고민이다. 참, 성주에게 답 해야지.

오늘 말고 내일, 낼 봐.

왜? 알써. 낼 봐. 굴비 먹자.

또 굴비 타령이다. 이밥에 소고기 대신, 이밥에 굴비. 성주가 좋아하는 밥이다. 오늘은 사실 일감이 좀 있다. 숙제를 두고 나가는 건 편치 않다.

 

 

굴비 먹자 응? 집에서 굽는 것 징글징글하다. 구어 주는 것 좀 얻어먹자. 우리 둘 다 고긴 별로잖아.

성주는 만나자마자 또 굴비 타령이다.

그래 그러자, 난 집에서 굴비를 잘 안 먹게 돼. 그인 삐쩍 마른 것 말고 탕을 좋아하거든. 그런데 넌 또 왜 여행을 안 갔어? 첨엔 가는 것 아녔어? 지한 씨 때문에?

아냐, 응.

아냐는 뭐고 응은 뭐야?

그래, 우선 먹자니까.

 

그랬다. 성주는 지한 씨랑 동갑내기라서 함께 회갑이 되니까 둘이 여행을 가게 되었단다. 딸이 벌써 어른스럽게도 ‘엄마아빠 해외여행’을 선물로 내놓았단다. 그런 차에 두 번의 해외여행은 무리라고.

그래, 어디로 가려고?

그게 말이야, 지한 씨는 무조건 시베리아래.

왜 지금 시베리아를 가? 분위기들은 곧 철도가 뚫릴 거라니까 기다렸다가 가겠다는 것 아닌가.

글쎄, 지한 씨가 자신 없는 소리를 하면서 고집을 부리네.

고집을?

지병 때문이지 뭐.

당뇨가 무슨 큰 병이라고 그래. 혈당 좀 있는 걸 가지고. 고혈압이다 고지혈증이다 하나씩은 다 있잖아, 우리 나이면.

언제 기다려! 철조망 뚫렸을 때, 그러니까 몇 년 후면 내가 여행을 갈 수나 있을지 알아? 갑자기 성주에게 말하는 지한 씨 목소리가 또렷하게 귓가에 들려온다. 너무 놀라서 고개를 흔든다. 성주네 둘의 대화를 훔쳐 들을 마음은 없는데, 왜 들려올까. 아, 나남이 살려줘! 온 힘을 다 해서 앞이마 중심에 두 눈을 고정시키니까 소리가 사라진다. 성주가 빤히 쳐다보고 있다. 들킨 것 같지는 않다.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간다.

해서 시베리아에 간다고? 올해 안에?

으응, 그럴 셈이야. 가까운 무안공항에서 직행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패키지들도 나와 있나 봐. 춥기 전에 가면 될 거라고.

그렇담.

그렇담 뭐?

나는 우리도 거기 따라갈까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이는 분명히 여행을 가자고 하고 있지만, 아직 무슨 계획이 확정된 것도 아니다. 생각만 해도 성가시다. 뭣 보다 이런 순간에는 내 귀가 무섭다. 들은 것은 못 듣고, 듣지도 않은 것을 듣는 불안한 청각에 이젠 좀 떨린다. 춥다, 늦은 봄날에.

건 그렇고 다다음 월요일 저녁, 나올 수 있지?

저녁이지 참.

응, 밥 좀 일찍 먹고 시민회관이야. 그땐 발칸 간 애들도 돌아왔을 거고, 여럿이 거기 갈 거라고. 정인이 당부 안했어?

했지 벌써. 나 저녁에 잘 안 나가는 줄 알면서도, 웬 일로 졸라 대더라고.

 

 

정말 시베리아가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그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시베리아가 오고 있다. 뉴스에서만이 아니다. 정인을 따라 간 음악공연에서도 시베리아, 시베리아, 시베리아가 울려 퍼졌다. 정인은 통기타로 배우는 발라드 교실에 노래를 배우러 다니는데, 어느새 강사의 팬이 되었단다. 나름 이름 있는 가수의 통기타를 듣는 것도 남다른 즐거움이고, 공감되는 것이 많다고. 그가 달마다 음악공연을 하는데 이번엔 특별 이벤트가 있으니 꼭 함께 가보자고 모두를 졸랐고, 정인이가 대놓고 조르면 그냥 따르게 된다.

월요일, 음악공연과는 어울리지 않는 월요일 저녁이었다. 입장료는 없고, 공연을 위해서이거나 북녘어린이를 위한 빵공장에 후원금을 내는 시스템이란다. 알아서 형편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런 방식도 그런 빵공장의 존재도 신선한 느낌이었다. 강당 안에는 온통 시베리아가 공기방울처럼 날고 있었다. 붉고 푸른 조명에 밀려 천정으로 날고,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눈동자 속으로도 날았다.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 나타샤와 함께 춤을 추고……

노래 가사마저 웬 시베리아? 우리말 노래 속 시베리아는 가까운 곳처럼 느껴졌다. 나타샤는 또 왜? 하긴 백석이 불러온 나타샤겠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 때문에 미순에게서 핀잔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 그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던 때였으니 꽤 오래 전 일이다. 내 말이 멍청하긴 했다. 사랑과 눈이 무슨 상관이래? 누군 사랑하면 눈이 오고, 누군 사랑하면 새가 운다냐? 그랬더니 미순이 한참 한심해 했다.

시에서 무슨 논리며 합리야! ‘내 마음은 호수요’하면, 마음이 어떻게 호수야, 그래도 호수지. ‘동해 쪽빛 바람에……’ 바람이 어떻게 쪽빛이냐고 따질 테냐? 바람이라는 촉각이 쪽빛 시각으로 전이되는 것, 그런 것이 시어야. 시의 심상이라고. 하물며 누군가 사랑을 하면 눈도 푹푹 내리라지.

그때 미순은 우리에게 아예 강의를 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백석은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의 영어사범과에 다니면서도 러시아어를 죽자 사자 공부했다고. 고향인가 함흥에선가 영어교사를 할 때도 시내 양복점이건 서점이건 러시아 사람이 있는 곳이면 늘 쫓아다니며 러시아말을 배웠다고. 『테스』 말고 러시아 작품 번역도 있었다고!

알았어. 너 요새 전공 바꿔 러시아어냐? 나타샤,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톨스토이의 손끝에서 태어난, 아니 그의 영혼 속에서 태어난 나타샤에게 러시아어 광팬이 매료되었다는 강의, 잘 알아들었네요!

더 있어. 나타샤 말고 안드레이 볼콘스키를 봐.

아, 그 그윽한 눈빛의 멜 화라!

누군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대개는 전집 빌려다 놓고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해버리고는 영화만 봤던 것이 들통 나는 순간이었다. 미순도 따라 웃어버렸다.

햅번을 버린 그 바람둥이 배우는 냅두고. 볼콘스키 그 이름이 우연이 아니거든. 톨스토이의 외가 쪽 실존인물이었던 세르게이 볼콘스키 공작이 작품에서 되살아난 거야. 러시아의 미래를 농민에게서 본 그의 사상도 ‘농민공작’ 볼콘스키의 영향이라지.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참여했다가 30년도 넘게 시베리아 유형생활을 하고서 풀려난 그를 만나보고는 그 고결함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그랬대.

뭐, 데카브리스트?

데카브리가 디셈버니까, ‘12월 혁명당원’을 그리 불러. 나폴레옹전쟁 때 유럽의 자유주의 공기를 흠씬 맛보고 돌아온 청년장교들이 조국의 반동정치에 회의를 품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 일단 입헌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비밀결사를 만들었어. 제정러시아 최초의 반란이지만 허망하게 불발로 끝났지. 처형에 시베리아 유형에. 볼콘스키 공작은 주동자급이었지만, 젊은 새 황제 니콜라이 1세랑 어려서 친구처럼 지냈던 배경으로 교수형은 면했던 거래. 어떤 지식인도 시인도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는 거야.

그렇구나. 백석만 해도 해방 후 고향에 남은 건 자연스런 일인데 월북 작가네.

월북은 아니지. 해방된 땅에서 러시아어 통역하면서 신 났겠지. 그래보았자 부르주아라고 크게 쓰이지도 못하고. 그러니 평등이란 뭘까.

그냥 북에 남은 것, 납북도 월북도 아닌 그것은 뭐라 한다냐.

모릅니다요. 월북 납북 작가들의 해금조치도 88올림픽이라는 배경 덕택이었지.

 

그랬다. 문화는 역사의 바람을 탄다. 해금되어서 불쑥 나타난 김기림, 정지용, 백석…… 들. 목마른 데 해갈처럼 많이들 좋아했었다. 그러고도 벌써 한 세대가 흘렀구나.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 나타샤는 영원한 여인이고, 연인들은 시베리아 유형지 같은 산골로 들어간다.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숲 속의 짐승들 시퍼렇게 불을 켜고 나를 노리네 하여 나는……

노래는 바뀌어 시베리아의 바이크가 나온다. 실제로 청년 탐험가가 시베리아를 자전거로 여행했고, 그것을 기념하여 노래한 것이라고 가수가 설명한다. 자전거로 시베리아를? 환상특급에 들어온 것 같다.

정인아, 저거 사실이야?

사실이지 그럼. 작년엔가 그 탐험가가 저 무대에 나왔어, 다부진 젊은이던데. 96년이었다던가, 암튼 12,000km를 모터바이크로 달렸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다섯 달을.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나왔을지. 특별한 사람이네.

대학 때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을 읽고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던가.

책을 읽고 탐험을?

소설이 아니라, 유형지 현실을 실증적으로 기록한 데서 크게 감동했더래.

 

내게 시베리아는 뭘까. 에너지도 용기도 없는 내게는 정복의 대상이기는커녕 꿈의 관광지도 아니다. 그냥 한 죄인이 ‘점차로 소생되어가는’ 유형지 시베리아이다. 오래 오래 전에 읽었지만 각인된 구절,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의 삶이란 무엇일까. 그때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지금의 대도시들이나 ‘아무데도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여전하다. 물질적인 상황이 정신적인 상황을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단순하지만 솔직하다. 멀쩡해야할 법학도가 출구 없는 상황에서 병적인 사색에 빠져들고, 나폴레옹적인 선택된 강자라고 스스로 세뇌된다. 자만심이 오죽하면 인류전체를 위하여 사회의 도덕률 쯤 넘어 설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될까. 노파의 죽음으로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건 산술적 계산인가 감상인가.

바보같이! 이나 벼룩 같은 인생이라고 하여 네가 죽여도 된다? 이나 벼룩을 죽인 대가로 결과적으로 네 인생을 박살내? 박살났는가? 적어도 사회적 의미에서는 그렇다. 라스코리니코프의 깨달음, 절대적 고립의 체험은 오직 죄의 결과다. 죄인은 그렇게 점차로 소생되어 간다. 그렇다면 죄는 그에게 성숙의 과정을 위한 필요악이었나? 이 무슨 망발. 이런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난 아직 아무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기억은 어쩐다?

살인에 관한한 카라마조프 아들들은 더 하다. 살부의 죄. 아들마다 트라우마가 있고 아들마다 살부의 이유가 있다. 아들마다 죄인이다. 누가 더, 누가 덜 죄인인가? 어머니의 유산을 두고, 아버지의 정부를 두고,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고, 죽여 버리겠노라 떠들었던 너절한 아들이 죄인인가. 이 호색한 아버지를 벌레처럼 혐오하는 유럽 유학파 냉혈한이 죄인인가. 살인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가능하다니, 신만 없다면 그렇다고 했지. 그래서 니힐리즘으로…….

 

저 있잖아, 5월 영령들을 위해서 어느 해 가을엔가 49일간 노래를 불렀단다, 저녁마다 망월동에 가서.

으응, 누구?

노래를 듣다말고 멍하니 시베리아 유형지에 가 있던 나는 정인의 말에 놀란다.

저 가수지 누구야.

뭔가 대단하다아.

 

155마일 철조망이 꽃나무였으면 좋겠어/ 꽃 한 송이 들고 경계를 넘어 가는 거야/

앞으로 앞으로 가는 거야 ~~

휴전선에 꽃나무를 심자고? 언감생심, 지뢰나 없애라지. 목함지뢰 사건으로 상이군인이 된 젊은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래, 나무를 심는 날이 오겠지. 와야 하겠지.

가만, 꽃나무 철조망이라. 모순형용도 형용이고, 불협화음도 화음이다. 격정적인 흑조의 춤은 사악하지만 아름답다. 〈세례 요한의 목을 들고 있는 헤로디아스〉. 머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서서, 꽃다발을 안듯이, 한 손으로는 목에서 흐른 피를 닦고 있는 얼굴 표정은 담담한 미녀. 이런, 목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핏방울들을 왜 감상하는가. 예술의 권능은 무한대인가. 소설 속 미친놈들, 죄인들은 또 왜 이리 오래도록 살아있는가. 그들이 어찌해서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가. 아무 ‘쓰잘 데기’ 없는 소설인데, 겨우 소설인데, 신의 권능을 감히 넘본 자들, 죄인들이 넘쳐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가 왜 불멸인가. 불가사의한 일이다. 불가사의 한 일들, 그 중에서도 가장 경악할 일들이 오래 살아남아서 우리의 정신을 영혼을 지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는 일에 애당초 의미가 있을까만.

 

얼결에 음악회는 끝나고 있었다. 시베리아밖에 들은 게 없다. 마지막에는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왔던 메시지를 그대로 노래했는데, 상당 수 청중들이 따라 불렀다. 우리는 결코 뒤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가사도 멜로디도 단순하고 반복적이라서 쉽게 따라하는가 보다. 광주 서울 평양 시베리아 모스크바 베를린…… 그러다가 독특하게 암스테르담으로 끝나는 가사였다. 정인이 말했던 그 특별 이벤트, 시베리아대륙횡단공연이라는 프로젝트가 이 노래로

서 시작된단다. 코리아-유라이사 프로젝트, 그 정식 발표회인가 발족회인가는 따로 금요일 밤에 열린다고 했다. 취지에 박수를 친다 해도 거기까지 따라나설 일은 아니다. 연속해서 밤 외출도 싫고.

 

 

음악회 어땠어요?

다음 날 느지막이 저녁을 먹을 때였다.

음악회라기보다는, 예, 음악회죠. 문예회관 음악회하곤 다른, 무지 다른.

대중음악이라서?

그것보다는 무슨 문화행사 같았나. 모래그림인가 음악회하곤 아무 상관없는 것도 있고, 시작하자마자 남북 두 정상 얼굴을 그렸어요. 그려 왔던가, 복사처럼.

음악회에 샌드 애니메이션?

전형적인 음악회는 아니더군요. 암튼 모래는 난 원래 별로예요. 좀 만화 같고, 여자는 여자 남자는 남자, 늘 같은 선에, 표현이 한정되어 있어서인가 어디서 봐도 판박이죠.

만화 맞지요. 헌데 음악회 얘기 하다가.

그래요, 거기서도 시베리아입디다. 노래마다 시베리아라, 계속 계속 시베리아가 튀어나오드만. 게다가 코리아-유라시아, 코리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쳐서 유럽까지 땅으로 땅으로 공연여행을 떠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멈춰 서면 공연무대가 되도록 제작된 초대형 버스가 있대요. 그 버스를 몰고 대장정에 오를 거라고. 우선은 국내를 한 바퀴 돌고, 철조망 터지면 떠난다나요. 청중들도 함께 출발해서, 평양까지 가서 돌아올 사람 돌아오고, 블라디보스토크 가서 멈출 사람 멈추고. 힘 닿고 마음 닿으면 암스테르담까지래요.

웬 암스테르담?

모르죠. 모스크바, 베를린까진 그러려니 했다가, 왜 하필 암스테르담일까, 혹시 동화 때문인가 했어요. 풍차가 연상되기도 하고!

아하, 잔세스칸스 풍차마을! 풍차 하면 암스테르담이지. 그럼 에펠탑의 파리는 어쩐다?

우리가 뭘 걱정해요! 파리보다는 여기선 베를린이 더 어울리죠. 베를린장벽에서 죽어간……

에이, 베를린장벽 이야기가 왜 나와요. 그건 확실한 과거이고, 독일 사람들이야 이제 덮을 만하지요. 거기 몇 십 년 동안의 희생이 5.18 일주일 때와 맞먹는 정도 아녔나. 아차, 숫자 이야긴 하는 게 아닌데. 어쨌든 그쪽 일은 잊어요. 그럼 우리도 그럼 그 공연을 따라서 갈까?

우리가 모래사막 대상들 따라가는 상인들도 아니고 어떻게 그 일행을 따라가요? 당신 병원은 어떻게 하고요?

어, 병원 걱정이에요? 일 년쯤 쉬지 뭐. 나도 늘 꿈꾸는 여행이 있어요. 두어 달 계획으로 떠나는 여행. 동쪽이냐 서쪽이냐 그것부터 늘 왔다갔다지만.

우리에게 동쪽이 어디 있다고. 우리가 극동 아닌가.

에이, 지도를 봐요. 우리 동쪽에 드넓은 태평양 아냐. 그 건너 미국, 캐나다. 일단 상식적으로 미국을 끝까지 가서 나이아가라폭포를 생각하지. 그러고는 알라스카까지 올라가는 거요. 아니면 아래로 헤밍웨이의 쿠바, 잉카 유적들. 하지만 또 서쪽으로 쏠리면,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시베리아, 그 다음 유럽들, 어딘지 음산한 북구, 햄릿의 덴마크도.

그렇구나. 난 어쩐지 우주의 배꼽…….

우주? 배꼽이라고?

아니, 세계의 배꼽 델포이가 궁금해요. 신의 뜻이 전달되는 산꼭대기의 신전, 파르나소스는 무등산의 두 배쯤은 높을 걸요. 내가 등반하는 건 아닐 테고, 안개 낀 작은 숙소의 창가…….

뭐야, 벌써 다 다녀왔네. 왜 숙소가 작은데?

높은 산중이잖아요. 산길이 넓겠어요? 좁은 산길에 서있을 숙소가 작을밖에.

상상도 참.

제우스가 독수리 두 마리를 날려요. 세계의 중심으로 날거라! 그랬더니 이 두 마리가 바로 델포이에서 만났죠. 제우스가 직접 옴파로스를 그 자리에 놓아요. 옴파로스, 배꼽을. 100년 전 쯤 그 돌이 실제로 발굴되었다니, 신화란 신화가 아녜요. 나중에 도난 사건이 있었다던가, 지금 산에 놓인 건 평범한 바위, 모조품이래요. 모조품이라 해도 배꼽자리는 배꼽자리, 한번 가만히 만져 보고 싶은.

당신 신화 좋아하는 것 여전하네.

실제로 발굴되는 것들이 신화예요? 역사지!

그렇다 치고, 우리 여행지는 투표해야겠네요, 민주적으로.

민주적으로?

우리나라도 민주적 체제에 산다고 분류되었던데. 내과 우 원장 알죠, 〈타임〉지 팬이잖아요. 엊그제 떡 하니 펴놓고 설명하더라고요. 세계지도에 푸른 색 짙은 곳이 민주적 체제라고. 우리나라도 푸른 쪽은 분명하더구만. 서양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그런대로 명색이 민주주의가 실행되고 있는 곳이란 설명이 붙어있긴 해도.

그럼 정말 북한은 하얀 색이던가요?

그러게. 가까운 라오스, 아프리카 몇 나라, 차드, 콩고랑 심각한 독재라고 되었더라고.

콩고민주공화국 아닌가?

이름은 북한도 민주공화국이지. 아, 재밌는 건 미국이 캐나다나 북구 나라들에 비해 푸른색이 살짝 엷더라고.

설마요.

이 눈으로 봤어요.

하긴 요즘 미국 꼴이. 참, 멜라니아 부모가 시민권 얻었다면 특별대우죠. 자유만 가지고는 안 돼. 평등해야 민주주의죠.

그러게. 트럼프도 참. 자기가 기필코 없애겠다고 떠드는 연쇄이민제도를 장인장모에겐 대놓고 이용하다니. 장인이란 사람, 유고슬라비아 살 때 공산당원 전력도 있었다지만 멀쩡하게 통과되고. 세상이 그래요.

맞아, 미국도 말도 안 되게 불공평한 나라야. 군인신분인데도 쫓겨날 뻔했던 한국계 여자애 이야기 들었죠? 기도 안 막히던데요 뭐. 어떻게 아홉 살부터 거기 살고 학교 다닌 애를, 그러니까 20년을 미국말로 미국서 산 사람을 미국시민이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미국시민인가.

뭐 잘 되었다면서. 그리 어렵다는 시민권 받았으니까요.

암튼 여행은 둘이서 투표해서 50대 50이면 영원히 결론은 글렀네요. 답이 안 나오면 안 가는 것으로!

나중에 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날 때. 그때 가서 이 설득의 천재가 나서지요 뭐.

 

 

설득의 천재.

그는 설득의 천재다, 맞다. 우물쭈물 청혼이 결혼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내가 남이랑……, 그만큼 오빠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더니, 제가 남이 씨랑…… 그런 정도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말씀드린 것이 전부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왜 내 귓속에 박힌 청혼의 말을 모른 채 하고 다른 소리를 들었을까. 다른 소리에 나는 설득 당했고, 결혼을 했다.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그렇게 가까운 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나무 위 새 소리를 듣고 있었다. 괜찮겠지? 너 나랑 결혼하자고! 난 정말 못 들었다. 나무 아래 함께 서 있었던 선배의 목소리는 잘 못 들었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던 새 소리만을 기억한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그날로 나는 아예 그 장면을 도망쳤다. 생물교육과가 있는 사범대학 쪽은 얼씬도 하지 않았고, 선배가 인문대 쪽에 가만히 나타나는 화요일 오후나 금요일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미리 도망쳤다. 아예 수업시간을 빼먹었다. 과 친구들 사이에선 그리 단짝이 없어서 누가 날 찾지도 않았고, 그렇게 잘도 피해 다녔다. 다른 친구들도 내 속마음을 잘 몰랐으니까 괜찮았다. 그 즈음부터였을까. 들은 것 안 들은 것들이 혼재하는 상태에 어리둥절한 것만 문제였다.

무서웠을까. 결혼, 결혼이라는 것 자체, 그 개념이 안 생겼을 때였다…… 라고 하면 변명이 될까. 스물이 넘은 애, 대학생, 선배랑 함께 걸어 다니면 기분 좋았고. 더 무엇이 필요했을까. 확신? 둘이서 일생을 함께 한다는 상상? 아니 상상을 하기 이전이었다. 선배는 군필 대학생이었으니까 결혼을 생각하는, 생각해도 되는 나이였겠다. 청력장애를 가지고 돌아왔으므로, 대학생활이, 생활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을 터다. 나는 곧잘 그의 청력장애에 적응했다. 적응이라기보다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미 장애였다. 어쩌면 나는 그 장애를 즐기기조차 했다. 혼자 중얼거리기 좋아하는 내게 편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기도,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한 이야기들. 나 혼자서 하는 둥 마는 둥 지껄여도 선배는 크게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용은 잘 몰라도 뭔가 조잘거린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어도 묻지는 않았다. 나는 어쩌면 선배를 살짝 이용했다. 혼자서 지껄인다는 것은 혼자서 답을 찾게 되는 과정이었다. 선배는 내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나는 이 모두를 과거형으로 말한다. 그것은 먼 과거에 속했다. 나의 미래를 장애를 가진 선배랑? 그런 일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난 그런 애였다. 밴댕이 속아지에, 겁이 많기로는 토끼나 사슴 저리 가라다. 일단 움츠리기, 그건 정말 못난 짓이다. 지금도 별 나아진 것은 없지만, 젊어서는 정말 심했다. 그 어떤 용기도 없었다. 용기 없음을 느끼지도 못했다.

막상 결혼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에도 의사라는 직종이 살짝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이는 의사라기보다는 내게 오빠 친구로 여겨졌고, 오빠 친구라서 겁이 덜 났다. 사실 의사들은 환자와 죽음과 가까이 사는 한에서 내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신과 타인의 죽음을 관장하는 군인도, 범죄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판검사도, 예술에 빠져서 실 인생을 모를 예술가도, 돈과 성공을 목표로 가정도 경영하고야 말 사업가도, 이들 모두는 결혼과 관련해서 기피 인물들이었다. 못났다. 그럼 누구, 어떤 부류와 결혼을 해야 할지. 생물과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던 선배가 제격이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아니, 선배는 좀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장애를 지닌 사람과 평생 소통해야 한다는 사실은 극한의 두려움이었다. 나는 따뜻한 물을 좋아하고 단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맹꽁이다. 맹꽁 맹꽁 울어서가 아니라, 흐리멍덩해서 맹하고, 꽁한 성격이니 꽁하다. 흐리멍덩하려거는 꽁하지나 말지. 드디어 꽁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난 아녜요. 시베리아 안 갈 거예요.

빈 그릇들을 들고 일어나면서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아무래도 난 얼음공화국에 가고 싶은 맘은 없어요.

왜 또오! 무작정 반대는 안돼요. 어디든 가기는 갈 테니까, 배꼽이든 어디든 꼭 가고 싶은 곳이 있거든 날 설득해요!

난 설득과가 아닌데……. 다시 중얼거리지만 입은 꼭 다물고 있다. 이 소리는 어디에 녹음이 되려나.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않고 녹음해둔 말들과 이렇게 저렇게 들어서 저장해둔 말들로 내 해마는 언젠가는 터질 것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가 언제까지 견딜까. 해마에 실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릇 딸그락 소리, 물소리가 새소리들만큼 시끄럽다. 소리를 뚫고 온기를 만끽한다. 따뜻한 물이 이렇게 좋은데……. 물이 따뜻하지 않다면, 세제를 아무리 퍼부어도 이렇게 말갛게 그릇이 씻길 리가 없다. 온도의 법, 온도의 마법이다. 스물 네 시간 따뜻하고 찬 물이 흐르는 이 부엌이 그이 덕분이다. 그이는 내게 그 나름대로 아늑한 가정을 주고 있다. 답답하지 않은 집, 넉넉한 밥을 위해서 그이는 감기환자들의 콧물을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 수입이 괜찮은 편에 속하는 직업군이라 해도, 공중에 흩어져 떠도는 돈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대단한 일이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돈을 번다는 일은 성스러운, 존경스러운 일이다. 남편을 존경할 일이다.

물론 우리 집만이 아니라 온 나라가 업그레이드 된 것은 맞다. 여름에도 발 시리면서도 땀을 못 견디는 건 어쩔 수 없다. 씻어야 잠을 청할 때 따뜻한 물이 얼마나 좋은가. 옛날에야 여름 철 따뜻한 물이 어디 흔했나. 젊어서도 찬 물은 힘들었었다. 주전자 물이라도 데우지 못하면, 허겁지겁 물 끼얹으며 얼마나 시렸던가. 어유, 저 오리새끼, 여름감기나 안 들면서 저러지 원. 핀잔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던 여름밤들. 좁은 가슴팍이 얼음물에 담근 풍선처럼 오므라들던 때를 생각한다.

시베리아라고? 씻기도 힘들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사흘 밤낮을 덜컹거리면서 무얼 구할 것인가. 바이칼 호수가 여러 날의 덜커덩 소리와 추위와 더러움을 상쇄할 마력이 있나. 데카브리스트박물관에 가면 유형지에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고 살았던 옛 사람들의 발자취가 잘 간직되어 있단다. 하지만 그걸 꼭 눈으로 보아야 감동하는가. 난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으스스 떨릴 만큼 감동해 있다. 귀족의 몸으로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또는 친정의 보살핌 속에서 유형지로 따라나선 몇몇 아내들의 사랑과 헌신, 그 이야기도 내겐 이야기로 충분하다. 오지의 은광산에서 중노동을 감수해야했던 그들의 12kg짜리 족쇄를 두 눈으로 보는 기분은 어떨까. 나라면 오히려 그런 적나라한 물증들을 눈으로 보면서 아파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눈으로 보아서 기억하고 싶은 것이라면 푸른 들판, 설마 설마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넓게 펼쳐지는 평원들이다. 수수만년 특별할 리 없는 무수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대지들이 경이롭다. 그래, 내게는 광활한 시베리아 설원도 자작나무 숲들도 상상만으로 충분히 되었다. 신비를 품은 우주의 배꼽이 아닌 그냥 평범한 땅을 보듬자. 풀이며 지렁이며, 미생물부터 온갖 생물들이 살고 죽어가는 땅, 버드나무 늘어진 천변의 풀 무성한 보잘 것 없는 땅이면 되었다. 봄까치꽃을 피워내는 땅이면.

나를 설득해 보라니까요. 멋진 곳! 내가 유혹 당할만한 그런 곳!

그이는 여태 내 대꾸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약한 구석 있잖아!

당신 약한 구석이라고? 뭘까, 그런 게 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보니 입이 열리지 않는다.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을 해 놓고서 답을 하라면 어떻게 해.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하느냐고. 내 입은 더욱 닫힌다.

남이씨, 조옴, 나남이씨!

그이가 내 이름 석 자를 불러 댈 때는 상기된 채 속으로 혼잣말을 내뱉고 있을 때다. 내 귀는 마이크로 증폭된 소리를 듣는다.

나남이 넌 뭣이 그렇게 복잡해! 여행 한번 가자는데, 병원을 잠시 쉬고라도 내가 가겠다는데. 무슨 말에 쉽게 한번 따라오면 큰일이라도 나느냐고. 뭘 생각할 게 그리 많으냐고! 망쳐버린 신혼여행부터 꼭 다시 말로 해야 해?

짐작만으로도 미안해진 나는 우물쭈물 말을 시작한다.

왜 이름은 부르고. 알았어요.

일단 시베리아횡단열차가 싫은 이유부터 말해 봐요, 내가 설득 당할지. 아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도 아예 비행기를 이용하든가.

하지만 당신 정말 가고 싶은 것은 전체잖아요. 9,000km가 넘는다는 시베리아횡단철도 전체를 가보고 싶은 것.

거야 그렇지만 그렇게는 스무날은 걸릴 것이고, 아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 끝가지 바로 달리기만 한다면, 로시야호라든가, 그 열차로는 일주일이면 직통으로 간다더라고. 하지만 여행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니요. 어째도 바이칼은 이르쿠츠크는 보고 싶고. 그러니 우선 거기까지 만이라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일단 가서, 거기서 러시아 맛을 보고 그 다음에 결정을 해도.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무슨 자유여행을, 유럽도 아니고 낯선 땅을 자유여행이라니. 뭐 당장 낼모레 가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얘기해요.

아무튼 간다고 약속 했어요!

그래요, 천천히요.

속으로는 나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보세요! 자유여행이라면 우리 자유로 여행하기, 어때요? 자유로! 시베리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냥 당신 혼자서 가면 안 되나요. 친구들하고든지. 여행을, 해외여행을 왜 부부가 함께 해야 하나요. 집에서 보다 더 서로에게 갇혀있게 될 여러 날들을. 여행지에서 단둘이란 통째로 교집합이 되어버리니 숨이 막히잖아요. 헤쳐모여 해서, 자유롭게,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가는 것이 왜 안 되냐고요. 아예 방콕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혼자서 일주일 이주일. 대문을 걸어 잠그고! 그것도 꽤 좋은 여행일 텐데, 내면으로 내면으로. 최소한만 먹고 최소한만 자고. 무엇을 할까. 무엇이 하고 싶은가.[86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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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시베리아 아님 블라디보스토크」, 『블랙 시베리아』, 광주전남소설가협회 76~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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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9. 5. 9. 09:49

발자국

 

발자국이 발단이었다. 그는 도처에 발자국을 남긴다. 거실은 그의 발자국으로 덮인다. 순식간이다. 밀걸레는 그 속도를 그 시간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어쩌다 집에 있는 주말이면 더 했다.

아침밥은 해 맥여 내보내야사제! 귓속에 박힌 암호에 따라 평일 아침은 부산하다. 불려놓은 쌀과 잡곡을 반반으로 섞어서 불에 올리면 17분이면 두 그릇 밥이 된다. 밥이 어렵지는 않다. 어려울 리가 없다. 반찬이 늘 문제다. 김치가 문제다. 맛있게 익었다고 생각되는 김치는 그에게는 시어 빠진 것이다. 신 김치에 유산균이 얼마나 많은……. 알아요, 안다고요. 설이 지나면 김장김치는 들다 나다를 반복한다. 국물도 쉽지 않다. 아침상엔 필수다. 17분에 되는 국은 드물다. 저녁에 미리 끓여 놓을 때가 많다. 토장국과 맑은 장국을 가리는 편은 아니다. 어우, 국물 좋네요! 입맛이 좋거나 국물 맛이 괜찮으면 늘 같은 감탄사를 낸다. 그 왜, 내 친구 있다고 했지, 대학에 있는 친구, 절대로 국을 안 먹는. 그 집엔 아예 국이라는 게 없대요. 뭔 맛으로 밥을 먹을까.

그래요? 그렇담 그 집 아내는 얼마나 편할까, 하려다가 꿀꺽 말을 삼킨다. 애들도 국을 못 먹어보고 자랐을까. 웬 남 걱정! 우리 집 밥상도 엉망인데. 야채를 더 챙기기 시작한 뒤로는 국적도 없는 밥상이다. 우선 양배추를 채 썬 것, 껍질 벗긴 토마토를 한 개 먹는다. 오이나 사과를 먹기도 한다. 그러고서 밥을 먹는다. 수선스럽다. 나는 반대 순서로 먹는다. 어차피 함께 먹기는 어렵다. 누룽지와 숭늉까지를 가져와서 앉으면 그의 식사는 끝난 참이 된다. 숭늉은 본채 만 채 냉장고의 찬물을 들이키고는 친절한 녹음기를 튼다.

오늘도 집에만 있지 말고요, 당신 아무튼 나가서 사람들 만나고 그래요. 에너지를 밖으로 내뿜는 게 중요해요, 우리 나이엔 특히. 날씨도 좋은데, 날씨가 나쁘더라도. 그건 날씨 따라 변형이다. 그가 그렇게 집을 나서면 시계는 다시 느리게 가기 시작한다.

일요일 아침엔 밥이 없다. 국도 해방이다. 선식이나 떡을 챙겨 쟁반에 차려 거실로 들고 나간다. 채소와 과일은 듬뿍 가져간다. 나도 따로 쟁반을 챙겨 거실로 나간다. 그러다가 눈에 띠는 것이 발자국이었다. 그의 발자국이다. 더 일찍 일어난 그는 발코니 쪽 문을 열어놓았다. 통풍이 중요해! 지론대로 창문 열기를 좋아하지만 요새는 약간의 변형이 있다. 미세먼지가 요인이다. 나는 미세먼지 주의보를 흘려듣지만 곧 알게 된다. 그가 창문을 열어놓은 날이면 미세먼지가 양호하다. 문제는 발자국이다. 그이 생각으로는 발코니는 집안이고 충분히 깨끗하다. 조금 덜 깨끗하다고 쳐도 잠깐 밟고나가서 창문을 여는 정도로 슬리퍼 바닥이 더러워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먼지며 물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러면 거실에는 발자국이 난다. 발코니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화장실로, 심지어는 안방에까지도. 그날도 마찬가지. 쟁반과 팔 사이로 힐끗 거실의 발자국들을 보고야 말았다. 쟁반을 서둘러 내려놓고는 바로 밀걸레를 들고 나선다. 그이는 살짝 찡그린다. 음식을 두고 걸레질이라니, 병이다, 병. 아니면, 발자국 따라다니는 것 징허네. 속으로 그럴 것이다. 내 눈에는 발자국들이 줄을 잇는다.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다문 입으로.

아침이 그렇게 끝나고 부엌을 나선다. 아차! 다시 보이는 발자국! 이번엔 여러 갈래는 아니다. 그래도 또 나 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왔을 것이다. 내가 결혼식에 갈 일이 있어서 느긋한 호사를 부릴 수도 없던 차였다. 시계를 쳐다보면서도 걸레질을 지나칠 수가 없다. 다시 거실바닥을 줄줄이 닦는다. 나도 모르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닦는다. 참지 못하고 그이의 슬리퍼를 잡아 벗기는 상상을 한다. 이렇게는 안 돼욧! 그 일이 실제로 임박했음을 느낀다.

머리에서 클립을 풀고 대충 옷을 챙겨 입는다. 결혼식장에 입고 가는 옷이야 뻔하다. 적당한 길이의 치마에 적당한 크기의 재킷을 입는다. 검정색을 피해서 적당한 색깔을 입는다. 적당, 적당, 적당.

나도 나갈 거라 했죠. 밥 잘 먹고 천천히 와요.

벌써 뉴스 채널에 빨려 들어간 남편이 손만 쳐들고 흔든다.

살짝 늦었다. 어머니들이 카펫을 밟고 있었다. 신랑신부에 앞서 누군가가 새하얀 카펫을 밟는 장면은 늘 보아도 적응이 안 된다. 주례도 없는 것이 요즘 유행인지, 서로 사랑고백을 하고 선서를 한다. 냉택없이 감상에 젖은 꼴이라니, 내가 외려 부끄럽다. 예능프로 같은 사회도 머리를 아프게 한다. 뒷줄에 끼어 앉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우르르 뷔페음식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람들도 그편을 선호하고, 취사선택이란 어찌 보면 합리적이겠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 닿지 않게 하려 해도 섞이는 음식들이 문제다. 1라운드로 찬 것, 다음엔 따뜻한 것, 그리고 후식. 못해도 세 번은 들락거리게 된다. 수만 가지가 차려져 있으니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기 위한 탐색전은 필수다. 둘러보다가 벌써 지친다. 막상 가져올 때는 가짓수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한꺼번에 너무 여러 가지를 삼키면 맛을 알 수가 없다.

맞아, 『소박한 밥상』은 레시피가 있는 요리책이 아니라, 간단하게 먹자는 설교집이야.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빨리, 더 빨리,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곱게 바느질하는 데 쓰자고요.’ 숲속에서 손수 지은 집에서 살아가는 중년노년 부부의 이미지가 올곧이 떠오른다. 헬렌 니어링은 바느질도 스스로 했겠지. 손으로 여러 겹 덧대어 꿰맨 재킷을 입고 있는 남편의 사진이 남아있다. 필요한 만큼 자급자족하면 더 많이 일하지 않고 그냥 삶을 즐긴다. 축적하기 위한 노동을 하는 대신 그냥 사는 일에 충실한 삶,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21세기에도 가능할까. 옆 자리 사람들이 일어나는 데 맞춰서 덩달아 일어선다. 급히 마신 커피가 너무 뜨거웠는지 입안이 얼얼하다.

그이는 집에 없었다. 어머님 댁에 갔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도 가끔 어머니한테 들리는 효자다. 평소처럼 다시 혼자인 오후다. 대충 씻고 나니 개운하다. 아직 햇살이 좋다. 발코니에 무슨 바쁜 볼 일이 있어서 그리 슬리퍼도 못 갈아 신고 드나들며 발자국을 남겨놓는지 살펴보기로 했다. 하나도 아니고 둘, 발가락이 터진 놈과 막힌 놈, 두 개의 바깥 슬리퍼가 있는데 왜 갈아 신지 않을까. 나는 앞이 막힌 놈을 신고 나가서 이리저리 살핀다. 어라, 풀꽃이 내팽겨져 있다. 푸르스름한 풀꽃. 어디서 뽑힌 걸까. 진달래 분에 덜 뽑힌 나머지가 있다.

작년에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달랑 혼자서 핀 진달래를 보았다. 분홍빛이 파리하기까지 했다. 무리와는 멀리 떨어진 채 흔들리는 참꽃이 애처로워서 파오기로 했다. 마침 과일칼이 있었다. 뿌리가 그리 깊지도 않았다. 그땐 풀꽃은 없었는데, 풀씨가 묻어온 것일까. 올해 피어나서 흙이 덮이다 말다한 모양새로, 뽑힌 놈들은 뽑히고 남은 놈들이다. 아이쿠, 봄까치꽃이다. 이른 봄 진달래랑 함께 피는 풀꽃.

진달래는 뭐고 철쭉은 뭐야? 둘 다 분홍색에…….

내 색시 하렸는데 안 되겠네. 참꽃 개꽃 모르면 어떻게 해. 이거 봐, 이렇게 홑꽃이면 참꽃이야, 진달래. 수채화 같지, 화전도 해 먹고. 하지만 개꽃 따먹고 죽지 말아.

피이, 누가 색시 한댔나!

여기 요 파르스름한 게 봄까치꽃이야. 요걸 큰개ㅇㅇ꽃이라고 했다니, 이름 한번 험하지? 열매가 댑다 커서 그랬다지만 너무했지. 심한 이름들은 여럿 순화됐어. 문제는 사전엔 아직 안 바뀐 것 같아. 영어로도 되게 이쁘다. 버즈 아이, 어때, 새의 눈 같아? 학명도 이뻐, 이쁜 여자이름이야, 베로니카 페르시카. 이 납작한 거꿀심장꼴에 푸르스름 그림자를 띤 하얀 색. 듣고 있어? 남이야, 남아!

거꿀심장? 하트 모양 거꾸로?

말은 대충, 나는 풀밭에서 푸른 기운이 도는 그 네잎클로버모양 꽃들을 한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네잎클로버잖아. 어떻게 꽃잎이 네 개일까.

아니, 꽃잎이 네 장인 걸 첨 봐? 개나리도 몰라?

개나리 꽃잎이?

그럼, 완전 네 장이지. 설마 개나리 그리면서 꽃잎 다섯 개씩 그렸어? 통꽃 중간부터 넷으로 짝 갈라져서 정확하게 십자모양인걸. 녹색 꽃받침도 4개로 갈라져 있고. 십자화과 식물들이 다 그래.

난 무심코. 누가 개나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나?

응, 실은 네 닢짜리 십자화도 많고 많은데 그냥 지나쳐서 모르는 거야. 노란 색 꽃다지 알지? 냉이랑 아주 비슷한 노란 풀꽃, 다 먹는 풀들이야. 그러고 보면 냉이는 실은 이름이 없어, 나물이라는 뜻이거든. 먹을 수 있는 풀들, 우리가 즐겨먹는 채소들 대부분 십자화 종류야. 배추꽃, 갓꽃, 유채꽃 다 비슷비슷해. 뭐가 섞여있어도 잘 몰라.

우와, 그런가. 배추는 배추 무는 무만 알았지, 꽃 필 때를 봤나.

그때 나는 좀 부끄러웠을까. 화단에 피어있는 분꽃이나 맨드라미는 알았지만, 과꽃도 초롱꽃도 이름들을 알았지만, 풀꽃들은 이름을 상상도 안 해 보았다. 봄까치꽃이라고! 배추꽃, 무꽃도 있구나. 그래, 뿌리가 중요해도 꽃들이 먼저다. 연근을 먹지만 연꽃이 훨씬 더 아름답지 않던가.

선배는 내가 바보 같았을까. 시야가 좁아터진 맹꽁이, 젊다 못해 어린 시절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지금이라고 그리 나아진 건 없겠으나, 적어도 배추꽃 무꽃은 구별한다. 오묘한 무꽃들이라니. 그리고 하나 더. 봄까치꽃이라는 단어만으로 깊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흉측한 이름 대신 봄까치꽃이라고 부르라 당부하던 선배는 어디만큼 가 있는 것일까.

나는 진달래며 봄까치꽃을 보면 살그머니 가슴이 아프다. 나랑 결혼해, 괜찮겠지? 나중에 선배가 정작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나뭇가지 꼭대기, 먼 데 새소리만 들었다. 새소리를 따라 하늘만 쳐다보았다. 놀라서, 부끄러워서, 대답을 몰라서 그냥 못 들었다. 남아, 나랑 결혼하자고! 선배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말하지 않았다. 새의 모습도 기억하지만 무슨 소용인가. 모양은 참새지만 훨씬 큰 새. 그땐 몰랐지만 이젠 이름도 안다, 직박구리. 울음소리가 너무 큰 새. 울음이 아니라 말소리였겠지. 무슨 말이었을까? 청혼이었을까? 그놈들은 지금도 그런 찌익 찌익 소리를 내며 아파트 하늘을 누빈다. 직박구리가 먼저인지 진달래가 먼저인지 봄이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발자국 원인을 탐색하다가 웬 꽃 타령인가. 진달래에 묻어왔다가 뿌리 뽑힌 봄까치꽃을 어쩌나. 바깥 풀밭으로 보내야할까. 주먹 안에 가만히 쥐고 아파트 화단으로 나간다. 반 토막이 난 동백나무 앞을 서둘러 지나친다. 겨우내 몰랐었는데 일전에 꽃봉오리가 맺혀서야 주저앉은 동백을 보고서 놀랐다. 관리소 아저씨 말이, 새로 이사 온 1층 사람들이 그늘진다고 가지들을 다 쳐내라고 했단다. 아무런들 우아하게 자란 굵은 동백을 그렇게 잘라버리다니 너무 허망했다. 안쓰러운 동백나무를 안 보려면 풀꽃을 멀리에 심어야 한다. 꽃잔디 무리도 지나친다. 눈부시다 못해 눈이 상할 것 같은 현란한 색깔에 이 여린 놈들은 묻히고 말 것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공간, 살짝 그늘이 지는 쪽 흙을 파고 묻듯이 심는다. 선배는 봄까치꽃을 두해살이식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올해 핀 이것들이 살아 견딘다 해도 내년엔 꽃피지 않을 것이다. 푸르스름한 꽃망울이 피어나는 것을, 내후년 봄을 기다릴 일이 하나 생겼다.

그늘이 생긴다. 그이가 서 있었다. 아파트 출입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화단에 쪼그린 나를 보았나 보다.

뭐하고 있어요?

아, 풀꽃.

풀꽃을 뭐하는데?

당신이 버린 것들 여기서 크라고요.

내가 뭘 버려요? 풀꽃을 크라고? 풀꽃이 크기는 크는 건가?

그냥 살아 있으라고요. 대대로.

실없기는. 들어가요!

설마 그이가 부러 버린 건 아닐 게다, 그럴 이유를 알 턱이 없으니까. 내 눈은 뒤를 향한다.

그렇게 봄까치꽃은 해마다 이사를 했다. 오늘도 직박구리 녀석들이 울어댔다. 나도 올려다보았다. 이 동네 나무위에서 태어난 녀석들의 후손이 틀림없다. 해마다 돌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다. 놀랍게도 경칩 다음 날이던가,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우리 왔어요, 라고 떠드는 것 같았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나를 따라 온다고 느낄 정도였다. 내 앞을, 내가 가는 길을 앞서서 날며 나무를 옮겨 다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더니 며칠을 잠잠했다. 내가 헛들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이제 직박구리들이 봄까치꽃을 보았으니 이태 후에도 알아봐 줄는지 모른다. 불쌍한 봄까치꽃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알아볼 것이다. 내가 그들 직바구리를 못 알아본다고 해서 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거나 봄까치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설마 새들인데, 저들이 반가움 또는 기쁨이나 슬픔을 모를 리 없다.

하늘을 올려보면서 발은 그를 따라 들어온다. 그이가 번호키를 누른 다음에 나를 앞세운다. 나는 다시 현관을 살핀다. 흩어진 신발들을 가다듬고, 현관문을 확인한다. 오늘은 마감이다.

그런데 당신 일찍 들어왔네. 시간이 아직 되니까, 옷 입은 김에 영화나 보러갈까요?

영화 안 좋아하면서요. 나도 나갔다 와서 피곤하고요.

꼭 좋아하는 것만 하나?

일이라면 몰라도 여가생활인데 좋아하는 걸 해야죠! 일도 좋아하는 걸 해야…….

아차, 말을 내뱉고 보니 걱정이다. 그이가 이비인후과 의사 일을 좋아할까. 겁이 난다. 내 이상한 청력 때문에 이비인후과를 택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늘 미안하다. 내가 전원이 끊겼다 말았다 하는 것처럼 말소리를 들었다 못 들었다 하는 병을 앓기 시작할 무렵 오빠와 그이는 의과대학생이었다. 아니, 오빤 벌써 그만두었을 때였나. 아무튼 모두들 나를 걱정했다. 내가 회복이 됐더라면 덜 미안할 수도 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 실력으로도 내 청력을 회복시키지 못하니까 후회할까. 나를 위해서였다면 정신신경과를 택했어야 했다고 고개를 갸웃거릴까. 뭐야, 이건! 하고서, 나를, 내 상태를 진작 실망했을까. 오빠가 의과대학을 집어치운 것과 함께 묶어서 이상한 집안과 엮였다고 땅을 칠까? 아버지로 유지되던 집안은 기울었고, 오빠로 기대되던 집안은 서지 못했다. 게다가 이비인후과는 잘 나가는 과가 아니다. 정신신경과를 했더라도 인기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차라리 근년 들어 이비인후과에는 성급한 감기환자들이 몰려서 조금은 나을 거라 위안해 본다. 감기가 들면 낫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참지 못한다. 감기라고 그러면 시원찮고, 비염에 걸렸다고 믿고 싶어 한다. 기관지염 같은 것은 위험한 병인데도, 목감기보다는 기관지에 염증이 있다는 말을 더 듣고 싶어 한다. 질병친화적인 민족? 병에 관해서 잘 알고 여러 종류 많은 약을 먹고 있어야 안심인 사람들이다. 덕택에 의사와 가족들이 굶는 일은 드물다.

가볍게 산책이든. 일요일 오후인데. 그러니까 나가요, 안 나가요? 난 그럼 씻을 테요.

그는 내가 대꾸를 않자 욕실로 향한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떠올린다. 센강 주변의 전원 속, 잔뜩 멋 부린 파리지앵들의 휴식처인가. 애 손 잡고 산책하는 아줌마, 풀밭에 누운 아저씨, 뛰어다니는 아이들, 강아지들. 수십 명 사람들을 수만 개의 점으로 그렸다는 게 신기하다. 만일 쉬라가 지금 살아있어서 ‘지구 섬의 일요일 오후’ 같은 걸 그린다면 우릴 겨우 하나의 점으로 그릴까. 혼잣말은 어차피 발화되지 않는다. 나는 듣기만 잘 못하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말도 잘 못한다, 안 한다. 그게 뭐 문제인가.

야아, 오랜만에 달걀을 했네요. 우리 이제 달걀을 먹는 거네.

저녁 밥상에 앉은 그 기분이 좋다.

뭐, 아예 안 먹는 것도 아니잖아요.

맘 편하게 먹자고요. 어차피. 어, 명란도 넣었어요? 왜 맘이 바뀌었는데요?

뭘 바뀌었다 그래요. 그때그때 그냥저냥 뭐.

아아니, 나는. 나는 당신이 편안해지면 내가 두 배로 편안해져서 말이요. 뭘 해놓고 안 먹으면 불편해서. 무엇이든 함께 먹는 쪽으로 갑시다. 어차피 인명은…….

인명은 재천이라고! 알았어요. 누구 또 비명횡사라도?

늘 그렇지 뭐. 아는 사람은 아니고. 병원의 일상인 걸요. 정형외과 환자 하나가 패혈증으로 갔어요. 내과로 트랜스퍼 될 때는 늦기 십상이지. 뭐 새삼스런 일도 아니요. 한 원장이 혼났어요.

의사가 혼났다고요? 환자는 죽었는데, 의사가 혼났다고요? 죽은 사람도 있는데 혼 난 것이 대순가? 속으로만 내뱉는 말이다. 소리가 없으니 말이 아닌가? 말은 다르게 나간다.

벨기에랑 덴마크도 이제 수습 되었겠죠?

청청지역이 있을까마는 문명화된 지역은 다 오염지역이요. 어설픈 문명국이 더 문제고. 우리, 중국…….

중국도 우리랑 비슷할까요?

알 수 없지, 넘 거대한 덩어리라서. 그런데 달걀하면 중국 아뇨. 살충제 문제는 저리 가라지. 가짜 달걀, 아니 인공달걀이라나, 그걸 만드는 학원도 있다잖아요.

중국 가서 달걀 먹을 일은 없고요. 그러니까 우리 달걀은 먹는 거예요, 다시 예전만큼.

당신, 돼지고기는 절대로 안 먹을 거요?

앗, 또 그 이야기. 인터넷에서 너무 끔찍한 사진을 봤다니까요! 돼지가 창살을 물어뜯고 있었어. 입에서 피가 날 지경.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그런 독기가 어디로 가. 잡아먹는 인간들에게 들어가서 독이 퍼질밖에. 그래서 돼지플루가…….

걱정도 참.

걱정도 팔자라고, 못 말린다고! 그래요, 내가 심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참을 수가 없는걸요. 세상에, 한 공장에서 닭오리 100만 마리를, 돼지 2만 마리를, 소 3천 마리를 창살에 가두어 놓고 키운다고 상상해 봐요.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니까요.

본 것은 아니잖아, 그만 눈 감아요.

눈 감으면 더 생생하죠. 보도가 됐으니 사실이죠. 2,000㎡ 헛간마다 4만 마리 넘는 닭을 키우는 농장이랬어요. 농장에서 200m가량 떨어진 곳에서도 하루 종일 코를 찌르는 악취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질 못 한댔어요. 2,000㎡면 600평인데, 600평에 4만 마리면, 가만, 계산해 보자, 150평에 만 마리, 15평에 천 마리. 15평에, 아이쿠, 15평 아파트를 생각해 봐요, 거기에 닭이 천 마리가 우글거린다고! 우리 집이면 2천 마리가 넘게 꼬꼬댁거리겠네! 으악!

무슨 그런 상상을! 병아리 한 마리도 키우자고 안 할 테니 참아요, 참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인간이나 마찬가지로 그 생명이 중하다고 믿기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 있죠.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동물의 죽은 몸을 나를 살리고 강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어요. 내 음식을 위해서 살생은 하지 않겠다, 뭐 그런.

거야 새로운 말도 아니고 불교에서는 옛날부터 그러는걸. 서양 사람들이 말하면 뭐 특별해지는가. 당신 그 『소박한 밥상』에 빠진 이래 내가 피 보는 것 아뇨! 숲에서 살았다는 그 사람들, 가진 돈도 좀 있고, 유식해서 책도 쓰고, 원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서 기본적으로 건강했고. 뭣이 문제였겠소! 스콧 이어링인가 니어링인가, 그 사람 반전이다 친평화다 해봤자, 결국 공산주의자 아녔나! 그러니 대학에서 퇴출당했고, 오죽하면 스파이 혐의를.

어, 내 책들을 봤어요? 언제?

내 책 네 책이 어딨어요. 집에, 탁자에 있으니 봤죠. 좋은 머리로 미래를 내다봤는지는 몰라도. 그래봤자 온 사회가 배척했으니 죄인 취급할 만 해서지, 근거 없이 그랬을까.

무슨 말예요? 혐의라는 것 그게 어때서요, 엮으려다 안돼서 무죄판결이면 무죄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귀도 따라 운다. 맙소사, 이이도 여론재판을 거드는 것이야. 여론재판에 휩쓸리는 것은 지식인이 할 일은 아니지. 하긴 의사가 곧 지식인은 아니다. 또 지식인들이 외려 여론재판에 앞장서기도 한다.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으려고 별짓을 다 하는 게 지식인이다. 의사들이나 지식인들이나 싫어진다. 싫다. 이런 말도 섞기 싫다.

나는 어떡하다가 당신 완전 비건이 될까 걱정이요!

비건, 비건. 헬렌 니어링의 말을 듣고 있다. 들려온다.

‘소박한 밥상, 그래요, 육신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 식사할 뿐, 미식에 빠지지 않은 검소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썼어요!’ - ‘나는 30분 이상 걸리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답니다. 가루를 섞어 반죽하는 대신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10분 15분 끓이면 맛좋은 음식이 되는데, 뭣 하러 두어 시간씩 걸려서 빵을 구울까? 사과 파이보다는 사과 소스나 사과를 날것으로 먹자. 감자를 먹으려 한다면 튀기거나 으깨려고 소란스럽게 쓸 것 없다. 튀기거나 으깨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감자를 씻어서 오븐에 넣고 구우면 끝’.

헬렌은 기막히게 유식했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사실, 그런 것도 안다. 먼저 자연 속 홀로서기를 실행했던 소로우의 글이니까 당연히 읽어 봤겠지. 『우울의 분석』을 쓴 17세기 어떤 사람은 ‘배설물을 만들 것에 뭣 하러 마음을 쓰느냐’고 했다는 것, 그런 에피소드까지도 안다. 아침을 조리한 적 없고, 명절의 번잡함 속에서는 오히려 단식을 하고, 부엌에 오랜 시간 처박혀 있는 대신 음악과 책을 가까이한 덕택일가?

‘난 날 때부터 채식인이었어요. 도축한 고기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고사하고 막대기를 들고 건드리지도 않을 거예요.’ 헬렌의 말은 좀 심하다, 편파적이랄 밖에 없다. 실제로 구운 고기는 만인의 희망사항이라는 글도 있었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브런치였던가, ‘구운 비둘기가 널려 있는 놀고먹는 세상을 꿈꿀 때, 그런 곳에서라면 우선 만인이 동등하며, 유복하며, 수고도 노동도 없을 것’이란 에른스트 블로흐의 구절을 소개해놓은 글을 본 적이 있다. 블로흐의 글은 무척 어렵지만, 또한 늘 인상적이다. 여기선 왜 하필 구운 비둘기일까, 암튼 만인이 원하는 것이 채식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남편, 스콧 니어링은 철학적 채식주의자다. 두 사람의 『조화로운 삶』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숲 속의 자립, 그런 삶을 설계했다는 자체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가 말한 경제공화주의 따위 어려운 개념들은 기어코 인터넷을 찾아서 읽었다. 기회 균등, 시민의 의무, 민주 정치, 인권 - 이런 기본적 민주개념을 말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졌다고? 필화사건은 동서고금 어디서나 같구나. 헨리 조지라는 이름도 찾아보았다. 스콧 니어링이 스승으로 삼았다 해서였다. 이름만으로는 대대로 영국 왕인가 싶었는데, 왕들하고는 완전 딴판이었다. 토지공개념이라니, 책 제목도 찾아보았다. 『진보와 빈곤』, 130년 전에도 대단한 사람이 있었구나. ‘노동생산물은 생산자에게 소유권이 있어 마땅하고, 자연에서 주어진 땅이라거나 숲, 크게 보아서 환경 전체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 분명한 말에 세상은 왜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이 간단한 말을,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나, 나 좀 봅시다. 또 어디에 가 있어요? 책 속? 인터넷 속? 생각하고 있는 것을, 생각나는 것을 그냥 말로 해요. 내 뱉으라고요. 음식은 조금만 많아도 못 삼키면서 머릿속엔 뭘 그리 삼켜두고 있는지.

내가 뭘 또 안 들었다 보다. 헛듣고 있는 것을 또 들켰다.

나남이씨, 뭐 하나고요! 그러니까 돼지고기는 절대로 기대하지 말라고? 오늘 달걀이라도 내놓았으니 감사해야 하나? 해도 달걀찜은 좀 구식인걸, 어머니 하시던 것 고대로요.

‘튀기기보다 끓이기, 끓이기보다 굽기, 그보다 찌는 것이 낫다. 가장 좋은 것은 날것으로 먹기.’ 나는 여전히 헬렌의 소리를 듣는다. 날것으로…… 물론 야채와 과일 말이다. 태생이 채식인이라서 브라만을 만날 수 있었을까? 유럽으로 바이올린 공부를 하러 갔던 젊은 날 헬렌의 처음 상대가 크리슈나무르티였다니!

선배는 그때 저자의 이름을 읽기도 어려운 얄따란 책을 들고 있었다. 바람 불던 날, 캠퍼스 내 작은 호숫가 언덕이었다.

읽어볼래?

뭔데요? 『아는 것으로 부터의 자유』라고? 아니, 뭐든 알려고 대학 다니는 것 아닌가? 알지 말라니. 어지럽네.

자유란 모든 권위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하며, 권위의 부정은 두려움의 해방이라고 했어, 독특해. 읽어봐! 지난번 시집 『고통의 축제』, 그 시인이 번역했다니까. 함께 구원받고 싶어서 번역을 했다네. 혼자만 구원받는 건 구원이 아닐 것 같다고.

구원씩이나.

어두운 연둣빛 책자는 얼핏 시시해 보였다. ‘어제가 죽어야 오늘이 있고, 매순간 죽어야 매순간 살 수 있다.’ 뒷면에 그런 비슷한 말이 쓰여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읽었지만 남은 건 별로 없었다, 너무 어려워서. ‘자유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 그런 구절은 가슴 철렁하니 좋긴 했다.

그나저나 책으로 볼 때는 사람과 신 중간 쯤 되는 존재 같았던 그 사람, 그런 ‘세계의 지도자’, 터무니없이 영적인 사람과 사적인 인연이라니, 헬렌이라는 사람 참. 하긴 현실적으로 그녀가 택한 것은 고향 미국, 스콧 니어링, 숲속의 자연스러운 삶이었다. 실제로 매우 독립적으로 ‘좋은 삶’을 정하고 그대로 ‘살아간’ - 리빙 - 대단한 사람들이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대신에 아는 것을 살아간 사람들, 이 의지의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관습으로 재단된 숙제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의지란 무엇인지 가늠할 길이 없는데.

‘대충 말고 철저하게 살자. 부드럽게 말고 단단하게 먹자. 음식에서도 생활에서도 견고함을 추구하라.’ 헬렌의 이런 구절에 정말 덜컥 걸렸다. 단단함, 견고함, 그게 정확하게 뭘까. 애매하고 궁금하여 내가 어떻게든 영어 원문을 찾아보았다면 누가 믿을까. 누구라도 믿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정말로 그 구절을 찾아보았다. 소프트, 하드, 파이버. 내 멋대로 이해하자면, 그냥 단단함을 표방하는 것이리라. 음식과 생활에서 섬유질을 추구한다. 파이버, 원래 섬유질이란 말이지만 근성이나 정신력 같은 뜻도 있었다. 음식과 생활에서 근성을 추구한다. 정신력을 추구한다. 단단함을 추구한다.

어쩌나, 달걀찜은 단단함과는 완전 거리가 머네.

무슨 말요. 달걀찜이 부드럽지 그게 어때서요. 찜이 찜이지.

그런가. 간이 괜찮나 보세요! 싱겁게 싱겁게 하려니 맛도 없는 것 같아요.

맛있지. 내가 길이 들어서 그런가, 남이씨 밥상 사랑합니다.

사랑씩이나.

왜 이러세요, 맛있다는데. 좋아요, 오늘은 명란이라, 다음엔 알새우일까 기대되네. 사실 우리가 목포갈치, 흑산홍어, 무안낙지, 그런 것 빼버리면 뭔 맛으로 사는가요. 가덕대구 추가요, 고니 한 그릇 쏟아지는 대구 정도는 돼야! 남이씨, 나남이씨, 하늘같은 남편 좀 봐 주세요!

알았어요, 맨날 하잖아요.

우리라니, 혼자서 말하면서. 하늘, 하늘은 또. 하늘이면 모르는 것이 없겠구만, 이이는 내가 『소박한 밥상』을 보기 훨씬 전부터 피하는 식재료들이 많았던 것을 모른다. 느그 신랑, 저실엔 그저 생명태다이. 멋이든 매운탕으로 허면 좋아허고! 생선을 토막 내는 것이 싫어서, 무서워서, 할 수없이 자잘한 생선들을 쓰는 것을 그는 모른다. 십년을 몇 번씩 살고 나서도 모른다. 도마 위에 눈을 뜬 채로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물고기를 토막내야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물고기들은 왜 죽어서도 눈을 뜨고 있을까. 온통 한데 그물에 걸려버려서 눈을 감겨줄 살아있는 이웃이 없어서일까. 눈은 안 보지만 낙지처럼 참수를 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대체 난생 처음으로 문어나 해삼들을 먹어본 용감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누구라도 먹었을까. 하긴 누구라도 배가 정말 고프면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먹을 것이다. 어라, 내가 소로우의 말을 흉내 내고 있네! 그래, 배가 정말 고프면 아무거나 먹는다. 풀들도 이것저적 먹다가 죽기도 하고 미치기도 했다지. 옛날이야기에 미치광이풀 이야기가 있었다. 먹을 것이 동이 난 보릿고개에 친정아버지가 다니러 오셨는지라 담벼락 아래 풀을 뜯어다 삶아 드렸는데, 친정아버지가 눈을 부릅뜨고 어얼쑤, 시아버지가 덩달아 저얼쑤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고 푹 고꾸라졌다고. 실제로 참나물과 비슷한 독초가 있으니 헛이야기가 아니다. 둘 다 쌍떡잎식물이다. 언제부턴가는 식물들을 보면 인터넷을 찾아볼밖에. 선배가 더 이상 말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량의 독은 약이 된다고, 미치광이풀 뿌리는 진통제로도 쓴단다. 그러다 보면 항암효과 최고라는 명이도 선뜻 먹고 싶지 않다. 사약으로 썼다는 박새라는 독초와 어찌 구분하느냐고! 털이 난 곰취는 먹는 것이고, 못 먹는 동의나물 잎에는 털이 없다고 구별하란다. 하지만 어떤 땐 다르다. 털이 많은 게 독초 여로이고, 잎에 털과 주름이 없어야 먹는 원추리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알랴. 선배는 알겠지, 전문가가 되었을 테니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 그런 책이 나왔을 때, 제목을 지나쳐서 흠칫 저자 이름부터 보았다면 이 무슨…….

하늘같은 남편 조옴! 아니, 하늘 빼고, 밥 잘 먹는 남편 좀 봐줘요!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 냉장고로 가더니 물병을 꺼낸다. 찬물이 성이 차지 않으면 얼음을 넣는다. 냉동실엔 제빙기가 필수다. 지난번 설 명절엔 남은 음식들 넣느라 제빙기를 빼냈다가 낭패를 당했다. 봄이 되자마자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서 부랴부랴 제빙기를 제자리에 집어넣었는데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전화 상담만으로 가능할 것 같다며, 일단 전원을 끄랬다. 그러고 한 시간 쯤 후 다시 전류를 흐르게 하면 작동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지시였다. 반신반의, 어쨌거나 냉장고를 통째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아서 퓨즈를 내리기로 했다. 집의 1/4 쯤 전기를 통째로 껐다가 켰다. 그런데 정말 물이 제대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럴 거면 왜 그냥 섰을까. 왜 껐다 켜는 것만으로 다시 작동할 거면서 섰을까. 기계란 놈은 눈곱만치의 조건만 아니 되어도 그냥 선다. 우리가 절뚝거리거나 허리를 못 펴도 걷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선다, 그 말은 죽은 것을 말한다. 사람은 그리 쉽게 죽진 않는다. 몇 퍼센트 이상 상해야 죽는다. 그 몇 퍼센트가 몇 퍼센트일까.

아차, 소식을 모르는 것은 죽은 것과 다를까. 무엇이 다를까. 나는 첫 번째 청혼을 흘려들었고, 두 번째 청혼에 결혼했다. 첫 번째 그 사람을 지금 모른다. 사실 어떤 친구들은 더 여러 번 청혼을 받았는데도 그 사람들 소식은 그런대로 알고서 사는 것 같다. 나는 왜 그 한 사람의 소식을 모를까. 얼마나 멀리 갔을까. 왜 발자국을 남기지 않았을까. 얼마나 깊은 숲으로 산으로 갔을까. 깊고 깊은 숲속에서 산골에서 꽃을 가꿀까, 농부가 되어 있을까. 옛이야기 속 연달산 농부처럼 산속으로 높이 높이 올라가 천사를 만나 사랑하고 천사는 떠나고, 이제는 딸에게 아들에게 참꽃 개꽃을 말해주려나. 새봄에 피는 홑꽃만 따먹어라, 늦게 피는 겹꽃, 점박이 개꽃은 먹으면 큰일 난다아. 아님 주왕산에 숨어 수달래 축제에서 한 역할 하고 살아가려나. 시답잖은 상념이랑 털자. 고개를 흔들어 본다. 오른쪽은 심하게 흔들린다.

뭐해요, 밥 먹다 말고! 난 벌써 참외를 깎았고만. 참외가 일찍도 나왔네. 반은 씨 빼놨어요!

참외 껍질이 든 작은 쟁반을 들고 그가 일어선다. 아차!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으려고 다용도실을 밟을 것이다. 다용도실은 축축할 때가 많아서 슬리퍼는 또 한 번 심각한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되풀이 되는 내 녹음테이프.

그냥 두세요! 거기 그냥, 싱크대 위에 그냥 두세요!

왜, 아무가 버림 어때서요.

아니, 그냥 조옴!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야. 도와주려는 걸 그리 말리니. 무엇이 문젠지 알다가도 몰라!

그는 휭 하니 거실로 나간다. 나는 부엌에서 뱉고 싶었을 그의 성난 목소리를 듣는다. 내 발자국이 문제라고? 까짓 닦으면 되는 흔적이 문제라고? 너 그 귓구멍 속 남아있는 소리들은 뭔데? 그 흔적들은 언제 지울 건데? 지워볼 생각이라도 했냐고! 소리 없는 그의 말이 귓가를 심장을 도려낸다.

맞다. 내 발자국, 그것이 문제다. 그는 내 발자국을 알고 있다. 그저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할 말이 없다. 사람들은 하려던 말 중에서 몇 퍼센트를 말할까. 이번에도 말을 삼키는 나는 엉뚱하게도 먼 데 헬렌 니어링을 듣는다. 인디언의 노랫말을.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네 심장에 여름날의 온기를 간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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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 소설시대 21, 한국작가교수회, 22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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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9. 4. 5. 16:47

오늘의 사자성어, 정확히는 2019년의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 상노인생

결혼해서 50년쯤 살다보면, 부부는 평균나이로 살게되나 보다.

우리는 겨울 끝자락에 있는 금혼식까지 죽어도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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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