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09. 3. 28. 23:30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소설시대 15호


개성을 방문하기 위한 10월 그믐께, 가을 내내 기다렸던 비가 하필이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지만 불평을 못한다. 해갈을 기다리는 푸른 잎채소들, 그 걱정에 사로잡힌 농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마음이 되어서. 들었다 놓았다 가벼운 우산을 꿍쳐 넣고 여차하면 요량으로 반 자락 비옷도 밀어 넣다보니 1박2일 봇짐이 커진다.


전날을 ‘통일’이라는 글자와 관련된 행사를 빌미로 서울에서 보낸 우리 일행은 이튿날 개성나들이를 위해 일찍 잠을 청하게 되었다. 덜렁 텔레비전 밖에는 없는 방에서 종이 한 장 글자 써진 것을 챙겨 넣지 않은 터라 심심하다. 불온한 문서라 분류되는 것, 수상쩍은 것은 집어넣지 않기로 작정했다. 언젠가 요상한 꿈에서도 분명 북한 땅을 떠나오기로 작정은 했었지만 그 끝이 불분명했고, 그 꿈을 꾸고 일년도 넘은 시점에서 느닷없는 개성행이라니 조금 켕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일을 누가 알랴! 돌아온 직후에 있을 사무(의무적인 일이자 나에게 보다 수십 명에게 중요한 것)를 미리 컴에 저장해 놓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뒤척이다 생각해보니 컴에 저장되어 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남겨놓고 오지 않았으니 무슨 소용이랴 싶어 허망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꼭 돌아가야 한다. 또 정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알람을 켜두고 잠을 청하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낭패다. 다른 날은 몰라도 단 하루의 개성방문인데 잠을 못자두면 어쩌나. 그러저러 두어 시까지 시계를 본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지,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깬다. 5시 정각이다. 그로부터 10분 간격으로 깨우는 벨소리에 버스출발 50분 정각에는 승차할 수 있었다. 어제의 그 버스이기 때문에 자리는 남아있다. 우등고속으로 말해서 4번 좌석. 둘째 줄 복도 쪽 자리다. 어제는 종일 멀미약 탓으로 졸기만 하느라, 대한민국 명 정치가의 달변 중에도 고개를 쳐 박곤 했다. 오늘은 양을 반으로 줄인다. 평생처음 분단의 선을 넘는 나들이 길에 졸아서야…….


임진각 - 서울에서 임진각까지는 채 50㎞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며칠 전 어느 신문사 주최로 ‘꿈나무통일레이스’가 펼쳐지기도 한 거리이다. 버스 이동은 못다 잔 잠을 청하려다마니 금방이다. 우리 일행은 28인승 버스 둘로 움직이는데, 50명이 채 못 된다 했다. 이제부터 비상이다. 다른 짐들과 함께 우선 핸드폰들을 놓아두고 가야한다. 갈아탄 셔틀버스는 남북출입사무소까지 우리를 실어간다. 누구나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출경과 입경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대한민국 국적이건 아니건, 방문자나 현대 아산측 안내원이나, 심지어 개성근로자이거나 입출입 때 마다 입출경 수속을 해야 한단다. 출경이란 출국의 다른 말로서, 어쨌거나 남북한이 각각을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 데에서 온 해결책이란다. 수속은 일반 외국여행 때의 수속과 같은 2단계를 거친다. 짐을 X레이로 통과시켜놓고 신체만 통과한다. 배율을 확인받은 디카만 허용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보이기 위해서 따로 들고 섰으랴, 다소 얼떨떨한 가운데 ‘녀자출구’에 줄을 섰는데 남자들도 섞이어 있다. 주황색 현대직원복을 찾아 물으니 괜찮단다. 여권에 해당하는 관광증에 사증을 찍는 절차는 배당된 차량번호와 일치하는 창구로 가야한단다. 그렇게 사증을 받아 통과했으니 북측인가? 아직 아니다. 정말 번호표가 붙은 차량이 즐비하다. 우리가 10호라 했는데 모두 ‘10-’으로 시작해 이상했다. 그게 총 10대 중 몇 호차라는 신호인가 보다. 그러니까 10호란 10-10호다. 서둘러 승차하고 나니 우리 차 담당 안내원이 오른다. 8시 정각을 조금 넘긴 시간이다.


이제 출발이로구나. 그게 아니었다. 8시 정각 군사분계선 통과 예정과는 다르게 군사분계선 통과 승인을 위한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안내의 말로는 통상 서쪽의 통신장비가 동쪽만 못해서 일어나는 지연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한 차량과 방문객들이 북측 입경을 못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으니 안심하고 다시 내려서 자유로이 기다리라는 안내다. 차량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서울-개성 표지판이며 남북출입사무소 입간판이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름에 다른 용도로 구입했다가 겨우 몇 장 찍어본 솜씨로 거리조절이니 뭐니 그냥 자동에 놓고 눌러보았다. 이제부터 증명사진을 찍을 양인데 눈에 들어오는 우리 일행은 없다. 어디선가 서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서 첫 증명사진을 찍었다. 입간판들을 증거로 하고서.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최소한 남북출입소까지는 다녀온 증명이 되어 줄 것이다.


정말 다들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을까? 서둘러 “온리 설렁탕” - 젊은 사장, 우리일행을 인솔하는 여행사 사장의 말대로 - 설렁탕을 먹고 내려왔던 그 곳으로? 하긴 해가 돋기 시작하니까 껴입은 옷이 불편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순간의 선택이 필요했다. 배낭의 짐이 부풀더라도 위아래 한 겹씩을 벗어 넣기로 작정하니 사무소 건물로 들어갈밖에. 화장실을 나서는 배낭은 정말 불룩 이가 되었다. 저만치 삼삼오오 모여선 일행들이 보였지만 끼이고 싶은 자린 없었다. 골라서가 아니라 전체로 무조건 없었다. 그것이 나이다. 어제저녁 공들였을 뷔페식 저녁 식사 후 색소폰 연주자까지 끼인 여흥시간, 그때에도 나이가 문제였다. 섞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섞이지 말아야 하는 세대의 의무다. 노래를 청하는 사회자의 마이크를 받아 대꾸한 내용이 그랬다. 듣기만 해야 하는 세대의 의무가 있노라고! 내심의 논리가 이랬다. 사람이 열 살까지는 벗을 할 수 있다 했다. 그런데 열 살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싶은 상황에서는 벗을 하지 말아야 미덕이다. 고조된 분위기를 깨느니 그냥 한 곡 부르다 말아도 될 일이지만 그것이 안 되었다. 약간의 취기에 실은 뭔가 노래 부르고 싶은 기분이 왜 아니었으랴.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이 아침도 딱 그런 이치였다. 어디에 끼어든단 말인가. 먼데 벽 쪽으로 의자가 연이어 있었다. 마침 고생하고 있는 다리를 위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천천히 세상이 사려져 갔다. 혼자 있는 느낌이 되니 그 꿈이 되살아났다. 고층 아파트 위에 또 그만큼 높이의 아파트를 지어서 분배해주겠다는 북한상황의 꿈이. 고개를 흔들다보니 나도 모르게 목운동이 되고, 이어서 어깨운동도 되고 있었다.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쳤다. 꿈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회랑을 울리는 안내목소리와 더불어 서둘러 다시 버스 쪽으로 움직이는 발자국소리들에 천천히 눈을 떴다. 시계가 8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을 향해서, 곧 북쪽으로 선회하겠지. 10여분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했지만, 다시 북측 입경 수속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주의사항과 일정에 관한 안내가 꼼꼼하다. 그러기도 하겠지. 마침내 9시 7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다시 움직였고 널찍한 돌에 “평화를 다지는 길……”이라고 새겨진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무장지대. 1953년 7월에 확정된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에 따라 남북으로 각각 2㎞씩을 포함한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출입할 수 없다던 그곳에 들어서는 것이다. 248㎞ 중 훼손하는 넓이는 버스의 넓이다. 군사분계선이 옛 베를린장벽 같은 담장이나 철조망이 아니라 200m 간격으로 황색 표지의 블록이 있을 뿐이라는 안내의 말이 생소했다. 그런 그것이 그런 위력을 지녔다니. 9시 10분, 그러니까 경계를 지나자마자 곧 ‘개성’이라는 간판이 초록색 바탕에 흰 글씨로 나타난다. 순간 등장한 인민군 초소와 마침 지나던 초병은 표정도 읽을 사이 없이 스쳐가고 만다.


그렇게 한 이십분 달리고 버스가 서자 북측 안내원 세 사람이 승차한다. 버스엔 처음부터 북측안내원 자리가 노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고, 셋이 타게 되면 맨 뒷좌석 가운데에 앉는단다. 이제 드디어 북측의 안내를 받게 된 것이다. 달변의 안내원은 하루 일정 등에 관한 ‘안내사업’을 시작한다. 처음 보이는 철길 경의선 봉동 역에서부터 봉동리 일대 개성공단에 관한 소개가 길다. 총 200만평 개발계획 중 1단계 사업으로 100만평이 개발되어 피복, 시계 등 70개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고. 놀라운 수치다. 설마 부풀릴 리는 없는데, 그동안 나의 무식함이라니. 패밀리마트 등 편의시설도 들어와 있고, 기술교육센터가 보였고, 그곳에서는 기술적인 용어들의 상이한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파트형 생산업체며 35000명 개성시 근무자들을 위한 푸른 버스도 출퇴근 보장용으로 운영되고 있단다.


약 40분쯤을 달려서 우리 버스가 개성시로 들어서자 정말 자그마한 몸집의 버스에 56번 번호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정지해 있는. 개성은 우리에게도 흔히 개성상인이란 말로 익숙하다. 북에선 개성깍쟁이라는데 남에선 서울깍쟁이라고! 깍쟁이의 유래를 북에선 ‘가게 방을 가진 사람, 가게 쟁이’에서 ‘각쟁이’로 줄다가 다시 된소리화한 것이 깍쟁이라 한다. 글쎄, 우린 그런 해설은 처음이다. 아무튼 개성 소개는 일품이다. 천년 전 고려 때 벌써 인구 10만이었다니, 유서 깊은 도시임엔 틀림없다. 주민들이 사는 마을들이 시작되고, 그 이름은 ‘해선동’. 38선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으로 그렇단다. 그런데 해방은 되었을지 모르나 푸르른 파주 땅을 지나 개성에 들어선 순간 차창의 푸르름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산들은 거의 민둥산이었다.


시내 쪽으로 오면서 이제 곧 심었을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보였다. 안내의 말로는 역병이 들어 완전 벌채를 하고 다시 심고 있는 중이란다. 개성시민은 적어도 산의 나무들을 몰래 베어다 불을 때는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다. 두문동 72인을 낳은 고장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차창 밖의 주민지구, 그러니까 주택지의 집들은 이삼층 공동주책이거나 5층 정도의 아파트이거나 파르르 얇은 종이 같은 인상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창문으로 미루어 보이는 벽의 두께는 마분지 정도. 그것은 스쳐가는 사물에 대한 편견이었을까? 편견이었기를 기도한다, 기도할 데가 있다면. 내가 본 것은 큰 오해이고, 집은 훨씬 더 두꺼운 벽을 하고 훨씬 더 따뜻한 방을 품고 있었어야 한다. 창문 안으로 움직임을 알아보기는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가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을 받기엔 스쳐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방에는 분명 학교에 가기 이른 대여섯 살 꼬마가 통탕거리고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창문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주 난방은 구들난방이고 고층아파트는 온수난방이라는데 설마 사람들이 살지 않으려고? 그러나 거리엔 속도감을 주는 운동이 없었다. 그러니까 차가 없었다. 온 종일 가늘 길에 검은 승용차 한 대, 오는 길에 흰 색 승용차 한대를 보았을 분이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정차해 있을 때만. 질리도록 매연 속의 차량들과 불과 한 두 시간 이별한 후에 이 적막강산이라니. 가치평가의 뇌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시가지에서 60리, 박연포가 있는 박연지구로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이제는 명물 송악산도 잘 보인다. ‘만삭의 여인이 바다 쪽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을 가슴위에 가지런히 얹고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어머니산’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산은 지금은 바위산처럼 보인다. 이 도로로 계속 달리면 평양까지 2시간이면 간단다. 박연폭포에 대하 소상한 설명을 하던 안내원은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고는 잠시 마이크를 놓는다.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이라고 불린다는 박연폭포는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북한 땅을 처음 밟은 지점이 그곳이기 때문이리라.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란다. 10여 미터 왼쪽으로 시작된 건물이 위생실(화장실)이다. 거기까지 그렇다 쳐도 사람들은 방문객들뿐인가? 10대의 버스에서 내린 울긋불긋한 사람들 말고는 짙은 감청색 차림의 북측 안내원 아니면 주황색 배색의 현대아산 안내원뿐이다. 평일이라 그렇다 쳐도 북한 사람들은 정말 관광지보다는 일터에서 열심인 듯 했다. 아까 시가지를 지나면서 보이던 사람들도 그리 열심히도 아닌 보통 걸음걸이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고, 더러 자전거를 가지고서도 타기보다는 짐을 실어 나르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무슨 색 복장의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걷는다는 인상이었다. 물론 멀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겠지만, 걷는 속도로 보아 아예 소리가 없을 걸음걸이였다. 그러니 언제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겠나?


올라가는 돌계단은 작은 돌들을 일정하게 사각형 블록으로 찍어내어 계단길로 만들어 둔 것이다. 은행나무와 참나무 낙엽 사이로 돌멩이 하나 구르지 않는 완벽한 청소에 감탄한다. 어디든 가면 돌 한 조각을 탐내는 남편의 선물을 위해 유심히 들여다보아도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없다. 그렇다고 정해진 길 밖의 흙길로 나설 수는 없는 일. 물이 넘치면 폭포의 폭이 7,8m라 했는데, 지금은 갈수기라서 한자나 되는 폭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 폭포는 천마산 기슭에서 37m의 낙차로 그 아래 투명한 고모담(姑母潭)이라는 연못으로 떨어져 내린다. 박진사란 사람이 폭포에 놀러왔다가 못 속의 용녀에 홀려 결혼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자 진사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못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박연폭포와 고모담의 이름이 유래한다 했다.


폭포 곁을 돌아 오르니 주변에는 험준한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10㎞ 정도 길이로 고려시대에 쌓은 대흥산성이 있고 그 안에 조선시대 규모를 확장하고 17세기에 개축했다는, 조형미가 뛰어난 관음사가 있다고 하는데, 지난 홍수 이후 도로가 유실되어 관광이 불가능하단다. 대신 폭포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아슬아슬 올라가 볼 수 있었다. 박진사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더 위대한 어머니가 계시다는 가르침으로(?) 큰 바위벽에 새겨둔 강반석 조선의 어머니 예찬시보다 신기한 것은 범사정이란 얇은 바위가 있는 지점이다. 고모담에 떠있는 바위들을 그 곳에서 내려다보면 말 그대로 ‘뗏목이 떠있는(범사)’ 광경이 맞다. 개성 모약과 여남 개 담은 비닐 도시락에 두 달러, 인삼차 안 잔에 한 달러, 생수는 두 병에 한 달러란다. 그렇게 네 달러를 쓰고 차오른 숨을 달래고 내려와 보니 위에선 보이지 않던 고모담 안의 널찍한 바위 위에 황진이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거기까지 다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디카에 증명사진만 부탁하고서 들여다보니 알 수가 없다. 황진이가 폭포자락에 반해 머리를 풀어헤쳐 먹물을 묻혀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시구를 나중에 석공들이 파놓을 것이란다. 대충 ‘삼천 척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밤하늘 은하수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하누나.’ 정도의 뜻이란다. 버스들이 주차된 곳에 다시 모인 시간은 11시 40분. 올라갈 때 무심코 지나쳤는지 그 사이에 형성된 것인지 간이 판매소들이 보인다. 유난히 용머리를 조각한 나무지팡이들이 보여서 구경하고 있는데, 설명이 재미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용대가리’란다. 북쪽에서는 사람은 머리라 하지만 동물은 대가리라고 하고 그것이 비속어가 아니란다. 열 달러. 이제 관광 시작인데 짐이 될까 싶어 그냥 물러난다. 그보다도 단체사진 찍는다는 부름 때문에 서둘러 어딘가에 끼워 앉을 곳으로 행했다.


그렇게 조금은 싱겁게 오전관광이 끝나고 11첩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점심상을 들러 가는 길이다. 정오를 지나며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들어오고, 그새 친근해진 안내원에게 이것저것 묻는 일행 덕에 들은풍월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산들이 바위산인 것은 10년 전 소나무 역병 때문에 그리 되었고 지금은 식목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며, 박연지구 쪽으로는 잣나무들이 그 나름대로 싱싱하다. 학교제도는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이 의무무료교육이고, 전문학교 2년과 대학 4~5년은 전체 학생이 국가장학생이란다. 결혼은 부모들의 중매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녀자는 24~6세, 남자는 26~8세에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문화어(표준어)에서 얼음보송이가 빠져 있는데 (우리 일행 중 국어학자의 말),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얼음보송이라 쓰고 있고, 아까 용대가리에서 대가리가 비속어가 아닌 것처럼 늙은이도 비속어가 아니라 한다. 오히려 아가씨, 아줌마가 비속어라 느껴진단다. 처녀는 처녀라 하고 결혼한 여자는 아주머니라 부른단다. 한편 남측 여행객들, 특히 처녀들의 옷차림새는 가끔 ‘나체화’라 싶어 눈살이 찌푸려진단다.


점심시간일 이 시간에도 도로근로사업에 부역 나온 사람들이 도로가에 쪼그리고 앉은 동작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멀리라서, 또 특별히 녀자라고 색깔 옷이나 짧은 치마를 입을 것도 아니니까 남녀의 구별이 안 된다. 소년학생궁전이 보이는데, 그것에선 방과 후 다과목 소조로 나뉘어 악기나 체육 등 소질을 연마하고 발표하곤 한단다. 그러는 동안 11첩(?)반상이 기다리고 있는 ‘통일관’에 도착한다. 화려한, 너무 화려해서 억지 같은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 안내원들의 안내를 바고 들어선 대 연회장. 둥근 식탁마다 10인조 11첩반상이 차려져 있다. 반짝이면서도 은근한 빛을 발하는 놋그릇에 뚜껑이 얌전히 덮여있는 10인의 11첩반상 차림을 보라! 버스에서 간단히 내려오면서 카메라를 놓쳤다. 서둘러 뛰어 갔지만 버스 문이 잠겼다니! 이런 곳에 누가 범한다고? 터덜거리며 돌아서는데 현대아산 안내원이 보인다. 그는 손쉽게 꽃혀 있는 열쇄를 돌려 버스 문을 열어준다. 배낭에서 카메라 찾는 시간이 미안하니 그냥 배낭 채 들고 내려온다. 다른 일행들은 벌써 놋그릇 뚜껑을 열고 시작하고 있었다. 열린 곳은? 일단 내 밥상을 뚜껑 덮여있는 모양으로 한 컷, 반찬그릇 열한 개와 밥그릇 국그릇 그리고 덤으로 나온 약식뚜껑까지 열자니 14개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펼쳐진 그림은 처음만 못했다. 대충 배운 대로 하더라도 김치류 셋, 장류 셋, 찌개 둘, 찜 하나, 전골 하나를 기본으로 두고서 비로소 생채, 숙채, 구이, 조림, 전, 마른반찬, 장과, 젓갈 회 또는 편육을 세어야 양반상 9첩이 될 터인데, 통일관의 점심상에서는 밥과 국을 제외한 모두를 세어서 11첩반상이란 것이 우선 셈이 달랐다. 왼쪽 줄은 숙주나물과 가지나물과 오이나물 등 숙채 일색이고, 앞줄의 묵무침과 가운데 어딘가의 계란찜 조각 그리고 감자와 고기의 조림, 다 마른 생선구이 조각 등으로는 7첩에도 미치지 못했고, 더구나 김치류라고는 향초를 담가서 다들 익숙해하지 않는 물김치 하나에 불과했다. 김치류가 11첩반상에 통틀어 물김치 하나라니! 오래 가물었다 하더니 김치감도 부족한가? 장난감 크기의 술잔에 부어주는 맑은 술이 아니었담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점심상이었다. 최고의 점심상을 이렇게 차려 내놓는다면……


점심으로 한 시간이 할당되었는지 1시 20분까지 승차하면 되고, 그 사이 길 아래로 남대문과 약간 언덕길 위 저만치에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주석의 금빛 동상이 서있다. 의례가 강요되거나 사진촬영이 금지되거나 하는 극단적 제약은 없었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동상이 일부분 가려지거나 잘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가 따랐다. (누군가는 사진 속의 동상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이유만으로 북측 출입소에서 그 사진을 삭제 당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이번 일핸 10대의 버스에서 내란 사람들은 그 동상께로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있는 것을 찍는 것이 뭐가 문제될까 싶어서, 북측안내원에게 나쁘지 않게 찍어달라고 할까 보다라고 혼잣말처럼 하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듣고 말렸다. 긁어 부스럼을 말라고! 그런데 북측안내원에게 사진 부탁할 생각은 왜 하게 되었냐면, 이미 남대문을 그가 찍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남대문이 멀리 보이는 길 아래엔 드문드문 양쪽 안내원이 서있었고, 그 내부에선 앞의 나무에까지 가려서 남대문이 보이질 않았고, 우리 측 안내원의 발끝에 내 발끝을 대고서 길이를 벌어서 애써 그걸 찍으려던 내 모습을 본 북측안내원이 자진해서 자신이 찍어다 준다고 여남 걸음 나가서 찍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아산 직원은 넘을 수 없는 그 ‘경계’를 북측안내원은 넘어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은 그곳 소속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구한 남대문은 북안동에 있는 개성성 내성의 남문으로 국보급 유산이라 한다. 내성을 쌓았던 1391~1393년경에 함께 지은 것으로, 축대 위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고려사』에 보면 개성성을 쌓는데 목공 35만 명, 장정 24만 명, 기술자 8천 5백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정말 유명한 것은 한석봉의 친필로 쓰인 현판이라는데,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오후의 관광은 첫 코스가 선죽교이다.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 거리 선죽동에 있는 국보유적 159호라나. 이 돌다리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랑물 같은 노계천에 걸쳐있는 이 돌다리는 그 명만큼은 우선 크기에서 사뭇 작다. 길이 6.67m 정도는 홀딱 건너뛸 수 있는 느낌이고, 다리 난간의 너비 2.54m는 양팔을 벌려 품을 만하다. 원래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다는데,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 알려지지 않은 다리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1392년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해 「단심가」로 대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보낸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야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름이 선죽교가 된 것은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것인데, 물론 대나무가 이 개성의 기후에서 지금 자라고 있을 리는 없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하여가」와 「단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쨌거나 지금의 다리는 사람이 건널 수 없이 난간으로 둘러있는데, 이것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를 세워 보호한 때문이란다. 돌다리 동쪽에는 한석봉의 글씨로 ‘선죽교’라는 세 글자가 뚜렷한 비석이 있고, 돌다리 서쪽에는 비각 안에 1740년 영조의 어제어필의 포충비(褒忠碑)와 1872년 고종의 어제어필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그 안에 암수 돌거북을 두고 (아들 얻기를 비는) 소원을 빌었다는 그 너머까지는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들어갈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늘에서 올려다본 은행나무는 유수한 세월을 증거하고 있었다. 매년 가을이면 노랗게 물이 들면서, 선죽교의 불그스레한 핏자국과 조화를 이루며.


다음에 들린 곳은 4차선 시멘트 길가 주차장에서 빙 돌아 올라간 숭양서원은 조선 중기 1573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함께 정몽주의 충절과 서경덕의 학덕을 흠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곧 이어 ‘숭양(崧陽)’이라는 칭호를 내려받았고,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 되었다 한다. 후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견디어 낸 마흔 몇 개의 서원 중에 속한다 한다. 그런데 그 입구에는 개인지 원숭이인지가 부각된 1m 정육면체는 안내가 없었다. 일행들의 추측으로는 말에서 내리기위한 발판으로 쓰인 것일 거란다. 글쎄.


두시 반. 숭양서원을 떠나서 버스는 마지막 코스로 고려박물관으로 향한다. 고려박물관 터의 성균관은 부산동에 자리 잡아 고려 초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고쳐지은 교육기관으로, 1089년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1304년 국자감에 대성전과 기타 건물들을 세우며 국자감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1310년 이름을 성균관으로 고쳤다. 지금의 건물은 1602~1610년경에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란다. 1호관부터 번호를 따라 박물관을 관람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할 듯 하다. 여러 가지 놀라운 자료들 가운데도 적나라한 도표가 하나 있었다. 고려시대 「노비를 팔고 사는 값」이다. 어른 녀자종 (15세~50세)은 120필, 남자종은 100필에, 노령이나 어린 녀자종은 60필 50필이다. 녀자종이 값이 더 나가는 이유를 두고 양단으로 한복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은 안내원은 녀자가 더 많은 노비를 생산할 수 있어서란다. 우리 일행은 아니나 군집한 사람들 중 누군가 남자 목소리가 킥킥거린다, 녀자는 밤낮으로 부리니까 그렇다고! 정말 웃을 일은 그게 아니었다. 그에 나란히 올라간 막대그라프에서 가장 높은 막대는 400필 값의 소 한 마리였다. 소만도 못한 노비의 인생이여. 누군가에게 어떤 형태로는 자유를 잠식당하고 산다면 인간은 소만 못한 존재이리라!


이어지는 토기와 자기의 전시실도 볼 만 했다. 처녀청자나 총각청자 등의 자태는 물론 일반적으로 고려청자야 너무도 유명하지만, 토기의 경우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욱 놀라웠다.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우리 남한 땅에서 출토되어 진열되는 토기들의 모양과 너무 비슷한 때문이었다. 청동거울 등 철제문화도 인상적이었다. 개성은 일찍이 형성된 도시임이 틀림없었다. 간다라 미술의 청동불상이 모셔진 작은 전시실을 뒤로하고 나서니 야외로 통한다.


야외박물관은 문자 그대로 야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여준다. 눈에 먼저 띄는 것은 현화사 7층탑이다. 1020년에 지어졌다는 탑은 높이는 8.64m로 큰 편에 속한다. 탑신마다 불상과 연꽃을 조각했던 모양인데 조금은 훼손되었고, 기단부에 돌을 마치 벽돌처럼 쌓은 것이 특이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흥국사탑도 눈에 들어온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탑은 불일사 5층탑이다. 광종이 그의 모후를 위해 951년에 보봉산 기슭에 지었다는 불일사에 세워진 것이나, 1960년에 야외박물관으로 옮겼나보다. 나중에 붙여 올려 조금 어색한 상륜부를 제외하고도 높이는 7.94m라는데, 올려 바라보자니 참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이다. 역광이 되는 해가 들었다 났다 하는 날씨에 서둘러 정원을 돌아 나오는 곳에 개국사 돌등이 서있다. 개국사는 말 그대로 935년 고려 초에 세운 사찰로 고려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나 조선시대에 몰락했고, 높이 4m의 이 돌등은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아직 우표전시관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시간이 없다. 마지막 남은 관광코스. 북한의 풍물을 조금은 사가지고 가는 일이다. 큰 건물이 두 칸인데, 우선 들어간 곳의 입구에 뽕나무 버섯과 고사리 등 말린 식물을 파는 쪽이 붐빈다. 뽕나무 버섯 한 봉지에 24달러, 고사리는 8달러, 조각호두가 9달러 그리고 잣 한 봉지에 역시 9달러이다. 한국에 비해 싸고 안 싸고는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북한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사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루관광에서 허용된 달러는 200. 박연폭포에서 산 개성 모약과는 그저 양념에 불과하다. 노년의 건강챙기기가 주부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과제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챙기니까 양이 많아진다. 그러나 내심 진짜 표적이 있었다. 청심환 종류 하나. 연전에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북한산 물품판매소가 있었고, 거기서 구입한 청심환이 괜찮은 것 같았다. 양도 적고 다 합쳐 200달러 안에서 쓰기도 마땅하다. 우스운 말이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일 것 같다. 아서라, 남의 사정 봐주려다가 애 들어설라! - 어려서부터 들은 말인데 어려선 그 뜻도 몰랐다. 제 사정을 망각한 현명치 못한 철부지 행동에 대한 경계였으리라, 다소 성적인 버전으로.


아무튼 버스에 돌아와서는 미리 준비해간 편치는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더니 들기에 만만한 크기가 되었다. 오늘의 소비행태를 자아비판하자면 재산 상태에 비해 조금 많이 쓴 것 같지만 어쩌랴. 근년 들어 사적인 용도로 물품사기에 더욱 검소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상쇄가 될 듯 하다. 물론 아직도 멀었다. 슬쩍 스쳐간 텔레비전에서 프랑스라고 기억되는 젊은 여성들의 소비철학에 가슴이 뜨끔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자녀들에게 폐지로 만든 공책만 사주는 데도, 그 아이들이 “우리가 새 공책을 사면 나무들이 죽어서 종이가 되어야 되잖아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 젊은 어머니는 “속옷만 빼고는” 새 옷을 사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있었는데…….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들 시간이 없이 버스는 덜컹거리며 시가지를 지난다. 멀리에서 아이들의 하교시간인지 한 무리가 걸어 나오고 있다. 거무스레한 복장들에 검붉은 스카프들만 눈에 띄게 펄럭인다. 아이들은 목에 나라를 걸고 다닌다. 지나는 사람들도 아침보다 더 늘었다. 운동장으로 보이던 곳에 축구하는 아이들과 곧 이어 다른 운동장엔 네트를 중심으로 갈라서서 배드민턴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조금 더 큰 학생들이 보인다. 자유로운 놀이는 절대로 아닌 것이, 놀이의 낄낄대는 짓궂음이 아닌 훈련의 진지함이 하늘까지 굳게 하는 듯 했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저무는 해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님 내 선입견이 문제였는지.


‘식료품상점’, ‘과실남새상점’, ‘전기기구수리’ 등 상호가 눈에 띄는데, 그것도 독특하다. ‘닭곰집’ 같은 독특한 표현 때문이 아니라 도무지 상호에 고유명사가 없다. 평화식품점이나 개성식품점이 아니라, 그냥 식료품상점인 것이다. 아 하나의 변형이 있었다. ‘결혼식 사진관’과 ‘천연색 예술사진’. 이 두 사진관 간판은 나를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적어도 사진을 잘 찍고 살구나. 추억해야할 일들이 생긴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판자에 쓰인 ‘종합편의’나 ‘아동백화점’ 입구에도 사실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주택 지구에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던 내 눈 탓일까? 작은 글씨가 안보이면 급한 김에 돋보기를 두 개 겹쳐서도 보는 내 눈이 눈이랴! 집들의 하얀 칠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회색의 그림자 인상과 미동도 없어 보이는 정적의 흔적은 내 눈 탓이다. 그래서 렌즈가 중요하다. 특히 미지의 미래의 인생을 분홍빛으로 보는 긍정적인 사람과 불안의 잿빛으로 느끼는 못난이들의 차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이 회색 안경의 개성방문기가 순 거짓이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개성공단 내 지역을 버스를 탄 채 설명과 함께 돌아본 우리는 로만손시계나 GS용인전자 등 우리가 흔히 보던 간판의 공장에 가슴이 찡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양쪽 동포들의 땀방울이 어느 공장에서보다 의미있게 다가오면서. 수박 겉핥기라도 개성공단을 돌아보는 것은 좋았다. 어쨌거나 버스는 다시 군사분계선으로 향하고, 그 동안 친숙해진 북쪽 안내원과 우리 측 순수한 한 일행 사이에 주체사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게 되자 깜짝 놀랐다. 문제가 되어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하나다!」라는 대형 플래카드에 대해서인지 - 그건 올 때나 갈 때나 아주 크게 보이는 길목에 걸어두고 있었다 - 동포로서 뭐 좋다! 라는 응수 한 마디를 빌미로, 안내원은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이라고 늦게나마 자신의 할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평소에 명민한 분이라 곧 다른 화두로 빠져나왔지만, 아무튼 우리 일행이 어떤 계급(?)인줄 알면서도 기어코 주체사상을 입에 담은 안내원. 아마 그의 하루 자아비판은 조금 가벼워 졌으리라!


북측 안내원들이 처음 승차 때와 같이 예의를 갖춰 하차하고 나자 곧 버스 기사가 한 마디 했다. 오늘의 안내원은 거짓말 별로 안 했다고. 버스의 일행 구성을 보아서 “거짓말로” 막 해댈 때도 있단다. 그것만 보아도 그렇다. 안내원은 안내원대로 보조임무가 있을 것이다. 체제선전은 모든 체제의 주요사업 중 하나이니까.


우스운 에피소드. 북측 안내원들을 따라 버스기사가 내리지 않았을 때, 그 주체사상 단어에 노출된 일행은 왜 기사님은 왜 안 내리는 거냐고 되물어서 우리 모두를 까르르 웃겼다. 다시 한번 순수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런 날 북측 남측 구별에 대해 무방비? 그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심오한 학문을 하는 분인데.


마이크를 다시 잡은 현대아산 측 안내로는 문상-개성간 철도 운항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었다. 수송해야할 물자가 있건 없건 날마다 정한 시간에 열차를 운행한단다, 철길이 끊기지 말라고, 조금 씩 조금 씩 더 길게 이어질 꿈을 담아서.


비무장지대 안의 풍경은 교과서처럼 판에 박힌 그대로였다. 다만 이번에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하얗게 반짝이는 바라크 판문점과 그 판문점을 두고 대치한 높은 깃대들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얼핏 보아도 더 높은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쪽이 북이다. 귀성동, 일명 평화의 마을에 자리한 붉은 인공기의 높이는 자그마치 165m에 달한다고 한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에 위치한 태극기의 높이는 100m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 측은 그럼 그렇게 높은 깃발을 달 능력이 안 되는가? 설명에 따르면 첨엔 며칠 자고나면 북쪽에서 또 며칠 자고나면 남쪽에서 깃발 높이 올리기 경주가 벌어지곤 했더란다. 그것을 어느 날 우리 측에서 멈춘 것이 이 상황이란다. 웃지 못 할 사실 하나 더. 그렇게 높은 인공기를 게양하고 내리는 작업에 북측 인원은 얼마나 동원이 되어야 할까? 태극기 게양에 필요한 인원이 2명이면…… 그러나 아무도 맞추지 못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그 열배인 스무 명도 아닌 사십 명이 아침 조석으로 인공기 게양에 동원된단다. 하늘의 압력이 그런 것인가? 믿지 못할 숫자이지만 가장 믿음직한 소식통이 아닌가.


마지막 북측과의 접촉은 왼쪽으로 보이는 언덕의 인민군 초소이다. 초소로 들어가려는 걸음걸이의 군인을 만나 버스 속 사람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었지만 허무한 짝사랑. 노무현 대통령이 도보로 건너갔던 샛노란 횡단선. 그것은 페인트가 태워진 채 거무스름한 선으로 변해있다. 곧 이어 반가운 파주시 이정표가 다가온다. 5시 정각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시간이다. 실제로는 북측 용어로 통행검사소 - 우리 측 용어로 남북한출입소를 통과하면서 개성방문은 끝이 나는가 보다.


입경장에서는 카메라를 소지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줄을 구분한다. 짐들을 X레이로 투사하는 과정을 똑 같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카메라들을 북측 요원이 받아들고서 하나하나 촬영된 화면을 검사했다. 내 디카도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 걸린 것은 없었다. 귀 달린 도기병 등 몇 가지 박물관 내부를 찍은 사진이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첨엔 모르고 몇 장을 찍었는데, 실내는 촬영금지라 해서 그만두었었다. 그 보다는 아무렇게나 잡동사니 속에 밀어 넣어둔 박연폭포의 돌멩이 하나가 X레이에 걸리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개성모약과보다도 우황청심환보다도 내심 기다릴 개성돌멩이. 은행잎과 다른 낙엽들 집으면서 하나 겨우 집어든 못난 돌멩이. 일행 중에는 분명 반입금지 품목에 적힌 기준에 맞는데도 아무튼 반입불가 품목으로 분류되어 압류되었던 소니SR12 카메라도, 종교 관련 물품이라 해서 자진해서 맡긴 묵주도 당연히 돌려받는다. 종교도 정치만큼 위력을 갖는다? 사실 우연히 선물 받은 물건에라도 십자가 등이 새겨져 있음 곤란하다는 처음 안내에 많이 마음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서울 쪽으로의 검역은 마른 고사리 등 식물과 관련된 물품들이 해당된다고 한다. 물론 거의 형식적이다. 한 두 시간 전에 산 물건을 한 두 시간 후에 압류하고서야 개성관광이 유지되겠는가. 어둑한 사무소를 빠져나온 우리들은 다시 임진각행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 걸터앉을 데도 없이 서성거리는 몇 분, 몇 사람과 말을 섞게 되니 조금 후회스럽게 된다. 주거니 받거니, 농담조의 언사들이 다만 상대가 아니라는 자괴감 때문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물론 얼굴은 사회적 표정을 띠고 있었기를 희망한다. 부질없더라도.


정말 해괴한 그 꿈은 다만 일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북한을 다녀온다는 예고에 불과했을까? 형제들을 다 모아 월북을 해서는 난민촌의 덜 지은 창고 같은 시멘트 반쪽 건물에 배당되었데…… 방도 아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샘가와도 같은 축축한 바닥에 어정어정 안고 선 우리 형제들. 하이힐로 종종거리며 뒤따라오던 한 녀석이 반짝이는 지갑을 팔에 낀 채 산들거리는 원피스 치마 자락을 날리며 뒷걸음질을 한다. “언니. 난 안 되겠어. 난 이런 덴 못 살아…….” 나는 어쩜 그리 냉정하고 단호했을까? 그래, 이런 문제는 형제라 해도 강요 못하지, 각자가 결정 하는 거다. 그래 할 수 없다. 뭐 그런 짧음 랄로서 우리는 이별을 했다. (사실 우리는 연초에 오래 누워있던 그 아이와 영영 이별을 한 터였다.) 문제는 꿈이 거기서 중단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난민촌 같은 숙소 저 앞에 검붉은 벽돌로 육중하면서도 높은 아파트 건물이 여러 동 있다. 그런데 책임자인지 담당자인지가 와서 하는 말이, 저 고층 아파트 위에 꼭 저만한 높이의 고층아파트를 또 올릴 계획인데, 그것이 완공되면 우리가 그리고 배치되는 것이라고. 물론 무엇인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도 없이 정지된 그림인데. 성냥갑 위에 또 하나 이런 성냥갑을 얹어서? 그러한 공법을 물론 아는 바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시멘트바닥의 냉기는 그때 계정이 무엇이었던 간에 황량함 그 자체이고 비전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월북을 감행했는가? 전후 사정은 모르나, 순간 나에게 깊은 후회가 일었다. 평상시에 스스로 기회주의적인 면이 없다 믿었던 내가 - 꿈에서도 그랬다 - 다른 형제들에 대한 책임의식까지 발동하여 넌지시 생각을 바꿨다. 사실 이 엄청난 행보를 학교에서 아직 모른다. 그러니 우리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어때? 어떻게 결정할까? 너희들 결정하는 대로……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 꿈이라지만 너무했다. 형제들이 온통 함께 월북을 했는데 재직 학교에서 그걸 여태 모른다? 다시 돌아 올 수가 있다?


참 꿈은 꿈이다. 그리고 꿈처럼 나는 다시 돌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버스 내부는 활기에 넘쳤다 서태지가 어떻게 데려왔는지 로열필하모니와 협연하는 온 시간 내내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한 소설의 노래도 따라 부를 수도 없었던 내 목이 잠긴 건 버스 안의 열기와 실제 에어컨의 냉기가 범벅되어 내 신경을 자극한 탓이리라. 나는 어떤 온도에 반응해야 하는가를 몰라서 저항력을 잃고 무너진다. 나는 목소리를 잃고 그 대신 지금 글을 쓴다. 꿈만 같은 개성 방문기를. 그림자의 도시 개성을 떠올리며.

 


소설시대 15호, 2009. 3월 186-2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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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8. 11. 20. 23:30

 

이 있었던 것

                                                     맛, 멋, 그리고 향기』2008 (이화에세이)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 파니는 “눈이 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눈 말이다. 눈이 있었던 것은 살아있었던 것이고, 그러니까 파니는 살아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 살아 있었던 것(과거완료)은 지금은 죽은 것(현재완료)을 의미한다. 파니는 살아있었다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을 먹지 않는다.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파니 뿐이 아니다. 가녀린 체구로 강인한 여러 일들을 해내는 동료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젊긴 하지만 그 무궁한 에너지가 순 식물성에서 나온다.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엄마노릇을 잘 해내면서도, 고기를 멀리 하기 몇 년, 꾀나 공격적이었을 더 젊은 날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 지금의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마르고 부드럽고. 얼핏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지만, 바람처럼 가볍게 걷고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할 일은 누구보다도 야무지다. 어디에서 힘이 나올까. 아니 잡식성 동료들의 저녁자리에 끼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디에서 인내가 나올까.


*


2008년, 운하와 쇠고기로 들끓는 여름을 보낸다. 운하반대모임에 서명을 하고보니 그 동료가 적극적이었다. 원래 환경론자인 것은 알았다. “인간은 자연을 너무나 학대하고 있어요. 《불편한 진실》 보셨나요? 지구온난화 때문에 근년 들어 빙하며 킬리만자로나 알프스 만년설이 엄청 녹아내리죠. 온난화란 게 말뿐 아니라 그 진행속도가 심각해요. 인간의 소비행태가 CO₂를 증가시켜 북극 빙하를 1년에 1% 정도 녹여내는데, 반세기 안에 플로리다, 상하이 등 해변도시들 40% 이상이 물에 잠기고, 네덜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우린 사실 날마다 샤워도 해선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우린 이 지구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그런 판에 우리나라에선 잘 있는 물길 놔두고 인공운하라니. 그렇게 확실히 발언하는 그녀는 순 식물성 체력만으로도 어렵고 무거운 일들에 거뜬하다. 운하문제와 쇠고기수입문제의 경중은 나름대로 판단한 것 같았다. 자신이 쇠고기와 관련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총론과 각론의 관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운하문제에 지론을 폈다. 우리의 4대강을 인위적으로 손질한다는 한반도 운하계획은 잘 될 이유보다도 안 될 이유가 너무나 많다고. 청계천 공사도 말이 “복원”이었지 자연하천이 아닌 인위적 이벤트 하천으로 개조됨으로써 원래의 목적이던 청계천 복원이 영원히 무산된 것 아니냐고. 지금의 청계천이 잠시 위락시설이 될지는 모르지만 낙동강이나 섬진강이 갖는 자연에 비교가 되느냐고. 혹여 대운하의 경제적 효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자락이 살아있는 한반도를 지켜온 우리 삶과의 의미관계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수 억 년의 지형형성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4대강과 샛강들이 운하로 인해서 수리체계가 단절된다면 강유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형교란과 배수기능의 교란 그리고 생태교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고.


나는 사실 운하반대 서명을 하면서도 이론적 배경은 없었다. 놀이시설처럼 도구로 추락한 청계천과, 그것도 모범이라고 본을 따서 우리 고향에서도 유치찬란한 하천 외부정비에 혈세를 퍼붓는 행정에 놀라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 가녀린 동료의 실팍한 이론과 행동을 보고서야 날이 선 지식인의 비판의식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특별한 음식습관에 관심이 갔다. 주지육림에 빠져서는 명철한 사고를 정립하지 못하듯이, 이렇듯 명료한 사고방식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녀가 섭취하는 음식물과 생활습관이 큰 몫을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차 채식의 장점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자칫 가난한 농민들이 밥과 김치를 주식으로 채식에 의존하고 부자양반들은 산해진미를 향유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류의 음식사를 보자면 채식은 유목문화에 이어 농경문화가 발달된 후에야 가능했던, 다시 말해서 한층 진화된 섭생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진화의 초기단계부터 정글의 법칙 속에서 육식을 했고, 구석기시대에는 채집수렵에 의존해야 했으니까, 채식 습관은 인류사에서 진화로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인간이 먹는다! 피가 살아 끓고 있는 생명체를 도살하는 잔혹행위, 그러한 잔혹행위를 일상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단말마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동물은 잔혹성을 심어놓는다. 잔혹성은 동물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동종인 인간 사이에 작용하여 작게는 드잡이와 싸움질, 크게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게 한다. 만물이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사고 또한 친자연적이 아닌 친인간적 사고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고의 틀에서 바라볼 때 친인간적이라는 것은 배타적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 주는 만큼만 자연에서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서 얻은 결론이다. 완전한 채식주의 - 그것이 비밀이었다. 그녀에게서 채식주의는 완벽한 수위다. 유제품마저 섭취대상에서 제외하는 것. 물론 그것은 심각한 불편을 야기한다. 하얀 밥을 지어놓고 그녀와 한 끼 밥을 먹으려던 계획도 무산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숟가락에 얹어 먹을 김치랑, 매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여린 고추무름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김치에는 젓갈류가 무름에는 멸치 몇 마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샐러드에 드레싱을 해놓았다가는 망한다. 계란 일부가 드레싱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마르고 왜소해지면서 정신이 강해지는 경우를 보통은 고행에서 본다. 그래서 속으로 그 작은 동료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내부에서 자연스러웠던 것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유년시절 샘가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죽은 “새”의 털을 뽑고 있던 것을 보았던 기억과, 별식으로 상에 오른 영계백숙을 그 기억 때문에 토해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유년시절의 고민은 무엇인가 뭉클한 그런 것을 씹어야하는 일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었던가.


어린이는 보다 더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그렇게 생각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을 고려한다고 해서 제 살과 비슷한 동물성 음식을 일부러 길들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원래 채식성 엄마를 두고도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잘한 일일까? 내 아이를 기를 즈음 나는 발언권이 별로 없는 엄마였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세뇌된 자신 없는 엄마였다. 다시 아이를 갖는다면 내가 어려웠던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호박 하나만 해도, 애호박과 농익은 호박 그리고 말린 호박…… 자연 속에 널려 있는 열매들과 푸성귀들에서 자연친화적 섭생의 보고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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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평2008. 9. 15. 23:30
  그 여자의 글쓰기
                 

                                     //소설 「네 번째의 죽음」을 읽고 //


이 소 림 (전남대학 독문과 박사과정 2학기)

2008년 9월 30일


단편 「네 번째의 죽음」은 마리루이제 플라이서 Marieluise Fleiβer(1901~1974)의 『심해의 물고기 Der Tiefseefisch』(1930)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남자주인공 라우렌츠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 생각, 말, 남자에 대한 태도를 순종적으로 할 것을 여성에게 종용한다. 대등하지 않은 이성간의 관계에서 억압받던 여자는 결국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난다는 것이 플라이서의 소설 내용이다. 이러한 서두는 「네 번째의 죽음」의 큰 틀이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벌어질 것을 시사한다. 더불어 인용된 소설의 남녀주인공들이 작가라는 것과 「네 번째의 죽음」속 일인칭 화자 '나'와 친구인지 누구인지 아무튼 가까운 '그'라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설정도 공통적이어서, 독자는 「네 번째의 죽음」에서 남녀의 지배관계와 글쓰기의 문제가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인칭 화자 '나'와 '그'를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소설의 주체로서 그녀의 시각에서 남과 여 각각의 세계가 그려진다. 이들 두 세계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세계의 양극단으로 분리 되어있다. 그들은 비슷한 날에 (사실은 한 날에) 태어나고 지적인 교육을 함께 받으며 자라났음에도, 그의 지성은 명철함과 합리성으로 그녀의 지성은 표현하지 않고 적당히 감추어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이다. 여성 고유의 생물학적 특질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는 모범과 질서와 선행의 세계 속에 있어, 그녀가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무질서함과 산발성과 초보성은 늘 그의 비난대상이 된다. 남과 여 이원의 세계는 그녀에 대한 그의 힐책으로 소통될 뿐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더욱 자세하게 들려주기 위해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소설 속에 삽입해 넣은 액자소설이다. '독서-글쓰기-싸움-병-죽음'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진행된다. 다섯 단계의 내부이야기는 (독서-글쓰기를 '생'으로 묶어) 자연의 법칙인 '생-노-병-사'에 병렬 할 수 있다. 각각의 주제 속에서 그녀와 그의 인물성향이 나타나고, 에피소드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적 세계 안에서 여성의 글쓰기 문제와 작가로서의 창작의 문제는 '실존(삶)'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음은 액자소설 속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독서>

그는 친구와 관념의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한다. 그와 친구가 서로를 반박할 때, 그는 혁명적, 반항적, 이방인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친구들과 멀어져 갈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한다.

독서의 문제로 그녀와 그가 티격태격 할 때, 그는 평생 주워 읽은 모든 것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236)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녀는 너무 많이 읽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글쓰기>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다. 독서를 한 후 그와 친구와의 토론에서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드러난 것처럼, 그의 글쓰기도 그 시대의 문단에서 요구되는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담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글에 타인의 글이 섞이는 것,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 고민한다.


<싸움>

그는 자기 스스로 창안한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그녀를 힐난한다.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게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 중독.(241) 결국 사랑에 빠질 듯한 그녀에 대한 힐난이기도 하다.


<병>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신의 일산화탄소중독은 그녀의 신체적 병으로도 나타난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 후반부에 그녀가 바흐만 Ingeborg Bachmann(1926~1973)의 작품 『말리나 Malina』의 여주인공이 벽 속으로 사라지며 자살하는 것을 패러디 함의 전조이다. 그녀 삶이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되는 것이 문제라는 소설창작의 문제는, 역으로 그녀 삶(논픽션)과 소설(픽션)이 혼합되는 문제와 교차된다.


<죽음>

그와 그녀는 남성(작가)의 문학작품 속에서 '대상화된 여자'(245)에 대해 토론한다. 대상화된 여자를 두둔하는 그녀를 그는 '골통나부랭이들'(246)이라고 비난한다.

그녀가 작품을 처음 썼을 때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것에서부터 그는 그녀를 비난해왔다. 그는 그녀에게 규칙적이고 표준적인 글쓰기 과정과 내용의 논리 정연함과 개연성, 그리고 그 안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완벽한 픽션을 창작하기를 요구해왔다. 그는 그녀 앞에서 곧 질서이자 상징이자 규칙으로 군림한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는 그가 제시한 지배적 글쓰기 체계가 그녀의 창작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

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 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244)

 

이 단계에서 그녀가 창작하는 이유도 드러난다. 그녀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246)으로 창작을 한다. 창작의 문제가 실제 삶의 문제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면서 군림해온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자신이 사라지는 수 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말리나의 죽음을 패러디 한다.


삽입된 다섯 개의 에피소드에서 남성의 규칙을 여성에게 내면화시키려는 '그'의 모습과 그와의 상호관계에서 억압받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글쓰기라는 모티브를 통해 심화되었다. 주지할 것은 그녀가 빛나는 상상력과 창작에의 열정과 상상력을 필력으로 옮길 수 있는 지성을 갖추었음에도 상징적으로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상황과, 일인칭 화자인 그녀가 내레이터로서 고백적 에세이의 '글을 쓰고 있다'는 모순적 상황이다. '픽션'과 '팩션'의 문제를 창작의 고뇌로 안고 있는 그녀의 글쓰기 문제는 글을 쓰면서도 쓰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소설을 써내려 가는 그녀 삶 자체다. '생-노-병-사' 삶의 법칙을 글쓰기에 대위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233)를 부렸다. 세계문학사의 남겨진 고전명작들의 작가들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과 정통을 그의 전유물로 만들어 글을 쓰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소설에 팩션 형태로 용해시키며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소설에서의 개연성(233)이란 남성 본위의 가치 판단 하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총체성에 다름 아니다. 한편, 그녀는 무작정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237)하고 자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조적 정신을 발현시키기 이전에 기계적으로 가부장적 사유체계로 점철된 대가들의 글을 읽었고, 남성의 전유물로 구성된 외부세계의 틀에 맞추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그녀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작업을 규정화된 조건에 맞출 수 없는 데 기인한 자기비하이다.

그녀는 기존의 전통과 정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한 후에 생겨나는 자의식을 비정통적이고 불분명한 척도라 생각해 부유하고 있다.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가늠 지어진 사회적 성 차별의 이데올로기  성 역할의 내면화  여성의 자의식의 발현을 향한 욕구- 욕구발현의 실패- 주체로서의 자아 정립 실패'의 과정이 그녀의 글쓰기 문제에서 나타난다. 상식적 '글쓰기', '언어'라는 것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며, 이러한 가부장적 사유체계의 지배 속에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언어, 여성의 자아는 억압되어 왔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 <죽음>에서, 그녀가 이와 같은 상황을 깨닫고 자살을 연출하는 것은 큰 전환점이다. 그런데 뒷방 서랍 속에 자살의 형태로 가두어 버린 '나'는 남성의 규범에 얽매인 '외부적 자아'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고픈 원래의 나'이다. 그녀는 '자신의 방'의 종이쪽지들, 물건들을 가리키며 "택배 방"(251)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녀이지만, 그 곳에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기만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은 여성에게 주인이자 절대자로서 행하는 남성들의 물건들(택배)로 오염되어, 그 방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 수 없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나'를 버리고 '그'가 되기로 한다. '그'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면서 다만 내면화 되어 일인칭 화자였던 '나'는 '그'에게 투항한 것이다. '그'가 기실은 남성적 질서 속에서 능란하게 적응하고 있는 건강한 여자임이 마지막에 언니와 남편의 등장에서 확인된다.

 

「네 번째의 죽음」은 바흐만의 『죽음의 방식들』 연작 3부작에 이은 네 번째 죽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부작 중『말리나』와 외부액자 속 '나'의 이야기, 액자 속 내부 이야기는 삼중의 메타픽션 구도를 이룬다. 『말리나』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남녀관계와 문학세계의 불평등성, 늘 훈계하거나 야단치는 남성의 모습, 여성의 정신세계와 실존을 무시하는 남성상 등이 차용되고 있다. 말리나의 정신이 남과 여로 분열된 모습은 남성적 세계 안에서 원래의 자신이기를 바라는 여성성의 발현으로 이해되는데, 결국 말리나의 여성성이 살해(강요에 의한 자살)된 것처럼,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도 같은 형식의 죽음을 취한다.

여성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결말은, 이 소설의 자서전적 성격과 더불어 남성들의 발전교양소설의 내용과는 대치되는 것들이다. 기존의 문예학은 여성들의 자기산출적인 텍스트들을 폄하해왔다. 자기고백적 성격, 줄거리의 부재, 주인공의 비 발전성 등은 여성의 자기고백적 텍스트에서 보는 일부 특징이다.


자서전적인 것의 혼합, '삶'에의 천착 그리고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출

판의 소망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한에 있어서 문학사 서술에 의해 통속성이라는 낙인이 찍히

게 된 문학표지들인 것이다.1)


페미니즘 문예학자 뷔르거 Christa Brger는 여성의 글쓰기를 삼 단계로 설필한다.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의 요한나 폰 쇼펜하우어나 샬로테 폰 칼프 등을 예로 들어, 여성들이 기존의 제도 문학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소피 메로 등이, 완전히 비고전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일기 책과 편지 글을 통해 소위 '고급'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는 요구를 따르지 않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카롤리네 슐레겔-쉘링, 베티나 폰 아르님 등이 글쓰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들에 의해 산출되는 자아에 대해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단계라 한다.2) 페미니즘 문학사에서, 세 번째 단계는 여성의 글쓰기가 삶과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미학적 실천3)으로 실행되어 온 시기이다.

뷔르거의 견해에 따르면,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는 위의 세 번째 단계에 있다. 글을 쓰지 못한다고 자기를 비하하는 그녀의 생각은 기존 문예학적 입장에 기인한 것일 뿐,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한다. 그와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알력다툼은 기존 문예학의 전통에 반하는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문제로 확대되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가 글을 쓸 수 없다며 상징적인 자살을 감행하고 체념하는 것을 비극적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 여성고유의 것을 표현하기 위한 규범이 부재한 현실을 비관하고 그 상황을 기술하는 것이 부지 중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전통을 따르는 '그 여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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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나 린트호프, 이란표 역: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110쪽 재인용.

2) 참조 : 앞의 책, 113~114쪽.

3) 참조 : 앞의 책, 110쪽.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