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0. 11. 15. 23:30

[소설시대 18호 권두언]


불모지에서 더 성한 나무, 문학

 

유난히 무덥고 지루했던 장맛비 속의 여름이 갔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벌써 여름을 잊습니다. 잊은 체합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맞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잊은 체하는 어제가 오늘을 결정하기에 우리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디디거나 아예 가슴을 부여안고 주저앉습니다. 밖으로는 씩씩하게 걷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미소까지도 지으며.

이 숙명적인 굴레 - 선택의 오류와 그 결과의 회환에서 오는 결핍의 감정은 그러나 우리들 작가에게는 유일무이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마 신(들)처럼 무오류성의 성질에 인간이 근접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애당초 문학이고 예술이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한 우리의 내면의 충동 뒤에는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한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습니다. 이 동경은 우리들 대부분에 내재해 있는 것이, 인간은 일반적으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감정은 지속적인 상황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하며, 이 결핍은 배고픔과 아픔 같은 육체적 유형일 수도 있지만, 고독이나 권태라는 정신적 ․ 영적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필수적 소여가 아닌,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향한 달랠 길 없는 동경은 아마도 오늘날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위 문화산업의 동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을 생의 단조로움으로부터 기분 전환시키는 일이 수요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로부터의 도주에 있어 그 강도가 격심한 경우는 아마도 작가가 되고야 말 숙명적 요인일까 싶습니다. 때로는 그가 중심에서 너무나 떨어진 곳에 서 있음으로 해서 정상인과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라 해도, 바로 그 비정상적인 격렬한 사고가 이 사회를 자극해서 정신이 들게 하기도 하는, 그 이상한 숙명 말입니다. 그러기에 문학은 오히려 불모지에서 성장합니다. 작가 스스로 어느 중심에 안주하기보다는 경계인이라고 느끼는 동안 더욱 무서운 기세로 중후한 작품들을 내놓는 증거가 세계문학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가까운 예로는 우리의 신문학 운동만 해도 국권피탈의 역경 속에서 폭발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학, 특히 내용적으로 응집력이 있다고 느껴지는 모든 소설은 다음의 세 요소로 약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와 둘의 기본 대립, 예컨대 개인/사회, 시민/예술가, 덕/악덕, 선/악, 자유/부자유, 빈/부, 현세/내세 등을 일컬을 수 있는 대립,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제 3의 요소. 한 소설에서 기본 대립은 적어도 한 사람의 등장인물로부터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으로서 받아들여진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 결핍은 줄거리를 전개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종결 상황에까지 밀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소설은 유일한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으니, 결핍의 지양입니다. 이러한 결핍의 지양을 위한 투쟁이 드라마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해설자/서술자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설의 장르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간접적’ 접근은 이 적극적 시대에 매우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이 소설쓰기가 점점 난항에 부딪힘을 우리 모두 실감합니다. 김현 선생은 언젠가 사물을 해석하는 힘의 뿌리가 욕망이라고 전제하고,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생생해지고 활기 있게 되며, 특히 소설은 그 욕망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적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우선 소설가의 소설 쓰는 욕망마저 그가 구하는 다른 욕망들에 눌려 변질된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 소설가의 욕망, 소설 속의 인물들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실어 참여하는 독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세상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은 고도로 발전하여 독자란 그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인문학 일반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위한 지도적인 힘을 상실해 간다는 염려가 식상할 만큼의 언어로 아우성이면 그럴수록, 그래도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문학이 무엇인가를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정보오락의 시대는 우리가 본래적 의미의 인간성을 기억하며 그저 인간답게 사는 일조차 실로 어렵게 하고 있음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인류가 거대 우주를 품기 위해서라면 우선 그 작은 파편인 이 지구와 먼저 화해하고 섞이는 일부터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쉬이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첨단과학기술을 자연정복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게 하는 데 써야함은 우리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처럼 화석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인류는 몸을 낮추고 키를 줄이며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를 모색해야 합니다. 다만 그 첩경은 무엇보다 우리 몸뚱이[재산]를 부풀리고 무한정 먹어대는[소유] 공룡이 되라고 부추기는 파괴적 세력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힘을 꿈꾸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고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이 불발을 성찰하고 이 결핍을 생채기 나도록 파헤집는 문학, 문학 활동이 인류의 꿈을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자각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어딘가를 향합니다. 어딘가를 향해서인가 용케 우리가 방향키를 잡았다 하더라도 바다는 비웃듯이 늘 풍랑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행여 편한 대양이더라도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잠시, 한시적 삶에 갇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 애써 소용돌이를 만들거나 다시 폭풍우를 호려내고 맙니다. 잔잔함은 뱃사람을 늘보로 만들 것이고, 정지해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한국작가교수회>는 소설 창작과 그 교육에 관한 연구와 정보를 교환하며 후진을 양성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2000년 2월 25일 창립총회를 가지며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온이로 열 살을 먹었습니다. 집필과 강단의 활동으로 온 힘을 소진하는 것, 한 방울의 에너지라도 남아 있다면 잠을 청할 수 없을 정열에 떠는 것 - 우리 한국작가교수회에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 온갖 소여의 현란한 폭풍적인 기세에 맞서는 증거로서 또 한 권의 『소설시대』를 내놓습니다. 늘 그렇듯이 편집을 맡아 무진 애를 쓴 편집위원들께, 그리고 원고청탁에 마다않고 좋은 글들 보내주신 여러분께 진정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미미하게나마 사람들의 가슴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이 책을 펴든 여러분과 함께 꿈꾸렵니다.

 

 

 2010년 때마침 한글날을 기리며,

다시는 ‘언문, 암클, 아햇글’ 등으로 폄하되는 일 없기를,

 ‘그랜드 바겐’을 내놓는 지도층부터 한글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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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0. 11. 11. 23:00

프랑스어를 몰라서 후회스러운 거의 유일한 노래 <고엽>듣고 싶어서  
 ▼                                                                           
               

http://www.youtube.com/watch?v=kLlBOmDpn1s&feature=player_embedded

 


Yves Montand - Les Feuilles Mortes 

                                                                      (Poeme de Jacques Prevert)

 

Oh ! je voudrais tant que tu te souviennes

오! 나는 그대가 기억하기를 간절히 원해요

Des jours heureux ou nousetions amis

우리가 정다웠었던 행복한 날들을

En ce temps-la la vieetait plus belle

그 때 그시절 인생은그렇게도 아름다웠고

태양은 오늘보다 더 작열했었지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a la pelle

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Tu vois, je n'ai pas oublie...

제가 잊지못했다는 것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a la pelle

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추억과 후회도 마찬가지로

Et le vent du nord les emporte

그리고 북풍은 낙엽들을 실어나르는군요

Dans la nuit froide de l'oubli.

망각의 싸늘한 밤에

Tu vois, je n'ai pas oublie

당신이 알고 있듯이 , 난잊지 못하고 있어요.

La chanson que tu me chantais.

그대가 내게 들려주었던 그 노래를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그건 한 곡조의 노래예요, 우리와 닮은

Toi, tu m'aimais et je t'aimais

그대는 나를 사랑했고, 난 그대를 사랑했어요

Et nous vivions tous deux ensemble

그리고 우리 둘은 함께 살았지요

Toi qui m'aimais, moi qui t'aimais.

나를 사랑했던 그대, 그대를 사랑했던 나

Mais la vie separe ceux qui s'aiment,

그러나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아요

Tout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아주 슬그머니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에 새겨진

Les pas des amants desunis.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들을 지워버려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a la pelle

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추억과 후회도 마찬가지로

Mais mon amour silencieux et fidele

하지만 은밀하고 변함없는 내 사랑은

Sourit toujours et remercie la vie.

항상 미소 짓고 삶에 감사드린답니다

Je t'aimais tant, tuetais si jolie.

너무나 그대를 사랑했었고 그대는 너무도 예뻤었지요

Comment veux-tu que je t'oublie ?

어떻게 그대를 잊을 수 있어요?

 

En ce temps-la, la vieetait plus belle

그때 그시절인생은 그렇게도 아름다웠고

Et le soleil plus brulant qu'aujourd'hui

태양은 오늘보다 더 작열했었지요

Tuetais ma plus douce amie

그대는 나의 가장 감미로운 친구였어요

Mais je n'ai que faire des regrets

하지만 나는 후회 없이 지내고 있어요

Et la chanson que tu chantais

그리고 그대가 불렀던 노래를

Toujours, toujours je l'entendrai !

언제나 언제나 듣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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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10. 10. 9. 00:00

말과 글, 그리고 경계인


“프로메테우스 - 그 의미는 선각자이다 - 는 하늘에서 불을 가져오기를, 그것으로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 그는 그것을 땅이 불타도록 가져온 것이었다. […] 만일 이 금기위반이 […] 부르주아들이 점점 좋아하고 점점 더 돈을 버는 데나 쓰인다면 - 문학은 되돌아가야 한다. 아니, 불을 하늘로 다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 모든 선각자들처럼 지략을 써서 문학은 어떤 길을 찾아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이런, 평생 하이에나가 되어 남의 나라 남의 글 뜯어먹고 사는데 진력이 나서 도망쳤는데, 기어코 마침표를 찍으라 하니 또 그 짓을 되풀이하며 하인리히 뵐의 말과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군요.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이 말은 자본주의에 완전히 강점된 이 세상, 이 지구를 향해 통탄의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 말을 저는 마침 한글날에 즈음하여 이렇게 변형해보고 싶습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시면서, 훗날 남북으로 갈려 살면서 남쪽 대통령이 대북제안을 내놓을 때 하필이면 외국말로 ‘그랜드 바겐’이라고 하고, 우리 땅 멀쩡한 이름 놓아두고 새 이름 짓겠다고 총리실에서 ‘새만금 글로벌 네이밍 공모’를 하라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우리가 기적 같은 문자를 누린 600년도 채 못 되는 세월을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글자가 그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해서 한문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에게 경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갑오개혁에서야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지만, 곧 닥쳐온 국권피탈은 다시 극한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가, 말과 글이 푸대접 받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한글’은 그 이름을 얻고 ‘맞춤법통일안’이 나왔습니다. 세계문학에서의 근대적 사조들인 낭만 · 자연 · 상징주의 등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면서 신문학운동이 폭발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죠. 그런가 하면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의 문학장르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는 ‘이식문학론’은  ‘조선문학’의 정체성을 화두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증거입니다.

말과 글의 예술, 문학의 속성은 바로 그러한 불모지에서 더욱 꿈틀거리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배고픈 천사”의 친구 레오를 주인공으로 한 『숨그네』의 헤르타 뮐러에게 노벨문학상이 결정되었을 때 독일문단에서도 예상작은 아니었던 것이, 바로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경계인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변인, 경계인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 그런 이야기를 쬐끔 해보겠습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강연(?)을 상상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여기 까지가 팸플릿을 위한 글이었다.

  강연은 2010년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03호실에서.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