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문학2010. 7. 16. 02:56

헤르타 뮐러가 노벨문학상 탄 일로 걱정? - 말도 안되는 말이렸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었다. 다음호 <소설시대> 편집회의 결과 헤르타 뮐러에 관한 글을 누군가가 집필했으면 한다는 계획때문이었다. 주초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주말이 오기 전에 결정이 났다, 평소에 각인되었던 젊은 독문학자 중에서 퍼뜩 떠오른 얼굴. 조심스럽게 연락을 했다. 밀린 글들로 힘들 것이나 흔쾌히 맡아주겠다고 했다. 난 언제나 행운을 느낀다.
K (곽정연교수), 독특한 열정을 느끼게 하는 그가 마침 헤르타 뮐러 낭독회에 참모 격으로 전체를 꿰뚫게 되어 있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를 조금 아무렇게나 하고서 맨 앞줄에 앉아 경청하며 골몰하겠지...... 좋은 글은 따놓은 당상이다.
아 정말 너무나도 행운인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0. 5. 25. 12:21
정체성


 

벌써 이태전인가. 그해 겨울에는 제법 매서운 날씨 덕이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찾아든 손님들이 괜찮았다. 코앞에 닥친 선거도 뭔가 흥분과 기대와 어순선함으로 발길들을 부산하게 했을 것이다. 선거 담엔 다음대로.


그날도 점심이 약간 겨워서 대처에서 왔음직한 여자들 일행이 들었다. 다섯이서 도착하는 모양새가 차 한 대를 꽉 채워서 나들이 나온 상이었다. 홀에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내실로 안내하고 나오려니 신발들에 눈이 갔다. 점심에 몰려다니는 여자들이 어디 한 둘이 오는가만, 여자들 신발을 보면 대개 부류를 안다. 여자들은 크게 두 부류다. 오자마자 사이다 한 병 안 시키고 냅다 삶은 꼬막부터 시켜내다 까먹는 여자들이 있는가 하면, 제법 맥주부터 시끌벅적하게 시키는 여자들이다. 처음 여자들이 벗어 놓고 들어간 신발들은 보통 구두인데 비해, 나중 여자들은 여름 겨울 없이 발목까지 올라온 구두들을 신고 다닌다. 보통 신발의 여자들은 입성도 수수한 편이고, 발목구두를 신고 다니는 여자들은 줄줄이 화려한 안경테에 렌즈에도 색을 깐 안경들을 쓰고 다닌다.

물론 꼬막밥장사로 살아가는 나로선 어느 쪽 할 것 없이 반가운 돈줄들이다. 술을 시킨대야 그저 그런 정도, 반찬만 더 주문해대는 여자들 손님이 뭐 그리 중요할까마는, 내겐 여자들 손님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근동에서 나는 유자다 모과다 하는 것들을 설탕에 재워서 파는 부수입으로도 한 몫 하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 한 잔씩 돌리면, 잘 나가는 날엔 한 상 손님 중에서 두어 명은 뭔가를 사들고 간다. 근년에는 집에서 손가는 일들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식당에 왔다가 사가는 여자들이 늘어 그 수입이 짭짤한 편이다. 봄에 재워둔 매실로는 진짜 한 몫 건진다. 또 음식에 단맛을 내기 위해 매실엑기스를 당분 대신 사용한다는 입소문 때문에 텔레비전 방송에 두 번이나 뽑혔고, 방송 한 번 나갔다 하면 뜨는 것이 우리 밥장사들 세계다.

그날 팀은 보통 구두와 발목구두가 셋과 둘로 섞이어 있었다. 얼핏 보아도 둘은 입성이 화려하고 나머진 수수한 모양새였다. 그렇게 되면 사이다 한 병 안 시키고 냅다 꼬막부터 까먹을 부류일지 아닐지 순간 점이 안 찍힌다. 그런데 꼬막부터다. 그렇게 삶은 꼬막을 통째로 까먹는 여자들에게 그다음 정해진 전채로 매생이전에 곁들여 꼬막전을 내가면 풍경이 우스워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사실 내가 밥장사를 하긴 하지만 삶아 까먹는 꼬막하고 꼬막전하고는 맞지가 않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해야 좋아하고, 또 그만그만한 식당들에서 거기까지는 정해진 메뉴인걸. 우리 세계에서 승부수라면 첫째가 꼬막 맛이다. 그 다음이 밥반찬인데, 놀라운 말이겠지만 내가 김치를 담그지 않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저 맛있게들 먹는 입이 어떻게 찌그러들지. 하지만 뭔 수로 중국김치 써대는 식당하고 경쟁해서 밥을 벌어먹는단 말인가.


아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할 판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게 보통과 멋쟁이가 섞여 내실에 든 여자들이 중국김치도 속 모르고 맛있다며 밥을 다 먹었다. 거기까진 남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식후엔 뜨거운 맹물을 달라고 했다. 유자차나 모과차 대신에 그냥 물만 달라는 것이 특이했다. 시간이 좀 되었는지 홀에나 다른 방에는 밥상들이 다 끝난 참이었다. 그래서 물주전자를 들고 간 김에 나도 내실 한쪽에 주저앉았다. 가져온 보자기를 푸는 걸 보니 찻그릇에 찻주전자까지 꺼내놓고 호사를 하는데, 그때부턴 사람들이 좀 달라 보였다. 공짜로 주는 좋은 유자차를 마다는 것이 우선 그랬고, 아무튼 주전자에 끓는 맹물을 붓더니 헹궈서 다시 버리고 하는 품이 일 없는 여자들인가 싶기도 했다. 호사를 하려거든 어디 호텔 비싼 식사나 먹으러 갈 것이지, 밥은 이런 데 와서 겨우 꼬막정식 시켜먹고는 뭔 호산가. 한 여자가 물을 보물모양 여기다 저기다 부었다 덜었다 하는 통에 다른 여자들은 다 그 모양새를 따라 보느라 조용하다. 찻잔이래야 술잔만 한 크기다. 그 잔에 보약처럼 물을 조심조심 따르더니, 한적한 시간인줄 알았는지 나더러도 앉아 함께 차를 마시잔다. 잔이 모자라는 듯, 또 모양이 별 것도 아닌 성 싶어서 복분자회사에서 선전용으로 가져다 놓은 술잔을 가지고 가니까 비슷한 찻잔이 되었다. 하긴 여자들이 칭찬해 마지않던 원래의 찻잔들과 그 찻주전자까지도 여자들 중 하나가 직접 구웠다니 보통내기들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장롱 옆 한쪽으로 벗어둔, 그저 그렇게 보였던 반코트가 실은 털을 깍은 밍크쯤으로 보였다. 비싼 밍크의 털을 왜 깎아서 버리는지는 몰라도 깎은 밍크털이 더 비싸다는 정도는 나도 안다. 그러나 또 어떤 여자의 코트는 너무나도 평범한 모직으로, 고등학교 다니는 내 딸애 거나 비슷해 보일 지경. 그러니까 돈들이 달라 보였다. 또 돈들이 같은 여자들끼리만 다니라는 법도 없으니까.


더는 궁리할 것도 없이 차나 한 잔 얻어 마시려니 심심해졌다. 손님들이야 점심장사로는 벌써 파장이고 주방아짐이 있으니 나 볼 일로는 없을 것이라. 가만히 텔레비전을 틀어보니 마침 증권뉴스가 나온다.

오메 쬐끔 다시 올랐네.

무심코 한 말에서 꼬투리를 잡혔다. 한 여자가 따라 붙었다. 아주머니 증권 하시는가 보네요. 잘 하세요?

잘 한다기 보담. 아따, 저 OO카드가 OOO카드 아니요. 그래서 샀던 것인디.

뭔 말씀이오? 거 당……. 

쉿, 입 밖에 낼 말이 있지. 암튼, 그걸 어찌 알며. 아니 그거 참말이래요?

우린 모르지요. 그렇다고들 허니께. 아니 내가 뭐 어디서 들은 풍월이지라.

큰일 날 소리요. 이 세상은 동영상에 나온 것도 아니라면 아닌데. 아줌마, 그런 소리 썸뻑썸뻑 하지 마세요.

갑자기 다른 여자가 나를 향했다. 주식이요? 돈 놓고 돈 먹기를 하신단 말요? 주식에서 아주머니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는 손해를 볼 것 아니요. 거기다 중간 구전 챙기는 증권회사들이 저리들 잘 먹고살고 있으니, 결국 주식하는 사람들이 증권회사 먹이죠. 어떻게 주식해서 돈을 벌어요? 번 것은 순간, 잃을 때가 더 많은 것이 답이요.

나는 머쓱한데, 그러자 갑자기 여러 소리들이 섞였다. 차만 점잖게들 마셔서 조금 다른 줄 알았지만, 말들도 달랐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처음 여자, 그러니까 둥근 머리가 말했다. 지금 주식시장 자체를 원론적으로 말하긴 무리다, 참아라. 두 번째 여자, 물고기 눈이 나무라듯 계속한다. 저 아주머니 같은 경우 그러니까 거기다 찍는 거야. 그쪽 주식 샀으니 함께 부자라도 될 것이다 싶어서.

또 다른 여자, 안경이다. 그러게. 어찌 거의 다 들여다보이는 진실을 못 본 척 은폐하고 거기다 투표를 몰아주는 국민이라니 대운하도 뭔가 신선한 것처럼 사람을 홀린 것이야.

찾잔 가져온 여자가 말린다. 그건 좀 심한 말이…….

안경이 고집한다. 심하대도 사실이야. 인간은 자연을 너무나 학대하고 있어. 유용성이라고 해도 그래. 전국이 일일생활권인데 물류 운운하는 운하는 낡아도 한참 낡은 꿈같은 이야기지. 지금 옛날 뱃길 복원해서 풍류 즐길 때냐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에서. 우리나라 땅 어디에서도 시간 남짓 운전하면 바다 아냐?

다시 찻잔주인이다. 참아, 정치는 좀. 바다……. 그래 이 바다를 어쩐다니? 그때 안면도 우리 함께 갔었지? 거기서 거긴데.

이제 화제는 그 무서운 태안사고 쪽으로 옮겼다. 사실 태안 기름이 여기 남녘까지 내려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서안으로는 벌써 어디까지 내려왔다지 않은가. 우리 꼬막장사도 문제가 있긴 있을 것이다. 귀가 더 쫑긋 해졌다.

둥글이 여자다. 그래, 그 긴 해안들이 그렇게 몰살했으니, 어떻게 말로 다 해.

순한 눈에 조용하던 마지막 여자까지 거든다. 결국 자원봉사 팀에 못 끼어본 우리가 뭔 말을 해.

둥글이다. 사실, 집 팽개쳐놓고 나설 상황들은 안 되지.

물고기 눈이다. 1박 2일쯤은 문제없던 것 아냐? 안면도 여행엔 다들 갈 수 있었잖아.

찻잔이다. 그때도 다 쉽진 않았지. 예정된 것이라서, 또 안면도란 새로운 고장에 대한 관심에 무진 애들을 써서 시간들을 맞춘 것 뿐.

둥글이다. 뭐야, 넌 그럼 안면도 여행갈 땐 잘 가고 태안 방제작업 안 따라나섰다고 우릴 나무라는 거야?

물고기다. 나무라기는. 그냥 사람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나부터 이 겨울바람에 게 가서 뭔가 하련단 말이 안 나오지. 우리가 젊기를 하냐! 그래 결국 거기 현지까지 어떤 경로로든 자원봉사 떠난 사람들은 존경 받아야 된다는 거지.

안경인가. 아니 글쎄, 이런다고 뭔 수가 있어. 누가 들을까 말인데, 난 딴 걱정이더라. 그 기름 묻은 부직포들은 어디로 간대냐?


말들을 하는 것이 남편이다 시댁식구들이다 흉보고 까부는 여자들은 아닌데, 어쨌거나 무슨 말들이 좀 무겁다 싶었다. 돈벌이에도 관심이 없는지 원. 주식투자다 부동산투자다 안하는 여자들이 어디 있다고. 아니면 통 크게 다들 해놓고 딴소리들인지 원. 어쨌거나 차 얻어 마시며 뭔 말이라도 들어볼 말이긴 했다.


안경: 너희 《불편한 진실》 혹시들 봤지? 나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물고기: 진실이야 원래 불편한 게 더…….

안경: 그런 게 아니라, 환경 이야기야. 거기 앨 고어 있잖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족 정치인이 아니더라고. 원래 학생 때부터 환경론자였고, 그러니 그런 영화에 나섰겠지. 아무튼 근년에 킬리만자로나 알프스 어딘가 빙하와 만년설이 엄청 녹아내린 이유가 지구온난화 때문이라는 거야 만날 들은 소리지. 그런데 온난화란 게 말뿐 아니라 그 진행 속도가 심각하다는 거야. 인간의 소비행태가 CO₂를 증가시켜 북극의 빙하를 1년에 1%씩 인가 녹여내는데, 20년 내에 플로리다, 상하이, 인도의 대도시 등 해변도시들 40% 이상이 물에 잠기고, 어쩜 네덜란드는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거야.

찻잔: 설마…….

안경: 설마가 사람 잡지. 오늘 이렇게 모처럼 잘 먹고 여유를 즐긴다만, 우린 사실 날마다 샤워도 해선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어. 운동해서 죽어라 땀 빼고 씻고. 개인적으로는 무병장수하겠다는 것이지만, 하긴 계산상으로 하루 죽어라 운동해서 수명 하루 늘리면 그 하루는 다 써버린 것 아냐, 운동하느라. 그럼 피장파장이지. 그래 장수한다고 쳐, 장수도 말하자면 공해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어. 인구과잉은 곧 재앙의 시작이니 말이야.

둥글이: 심각한 주제로 가네. 오늘 너 머리 좀 쉬라고 데려오니까.

안경: 아니, 그 사람 말이 우린 이 지구에 용서를 빌어야 한대. 그런 판에 이 좁은 나라에서 잘 있는 물길 놔두고 인공운하라니. 자연은 남용될 대로 남용되어서, 현재 미개발지역이라고 우리가 깔보는 그런 지방에서나 미래가 남아있을 것이래. 운하사업의 일자리 창출 홍당무에 넘어가면 안 되지. 세계경제공황 이후 히틀러가 일자리 창출한 방식이 뭐였게. 성한 사람은 군대나 군속으로 징집하고, 열등하거나 불온하면 수용소로 이송시켰지. 넝마주이나 우범자들이라고 어디 교육대에 쓸어다 넣고 나서 도시 정화했다고 떠들었던 독재도 다 같은 오류를 범한 것 아니냐고.

물고기: 글쎄 공청회 어쩌고 하던 말들도 쏘옥 들어가 버리네.

안경: 하면, 어느 편에 가담해서 진지하게 지원할 수 있어 우리가?

둥글이: 뭐 우리 중에도 운하 지지하는 사람 있단 말이야?

물고기: 모르지, 아니 당연하지. 친구들이라 해서 매사 같은 의견일 순 없으니까.

안경: 이치로는 무슨 일에건 찬반이 있고, 운하계획이 다수당 의견이면 찬성이 많다는 논리가 맞아.

순이: 하긴, 나도 사실 맨손으로 사업가로 성공한 일꾼이 나을 거라 생각했었어. 그건 지금 좀 흔들리지만.

물고기: 누가 인신공격하자는 거 아니잖아. 우리 같은 한물 간 여자들이 무슨 공격의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경: 그러니까 어려운 것 빼고 줄여서 대운하 말야, 그건 안 된다 그런 거지.

물고기: 아니 그보다도 진짜 문제는 우리 인간이 이 우주의, 자연의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야. 그 주인이란 말이 큰 문제지. 누가 어디의 주인이냐고. 결국 우리는 지극이 미미한 객으로서 이 자연 속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뿐인데. 주인이 아니라 객이라고. 내가 객인 것을 확실히 인정하면 내 것 못 찾아먹어 안달할 것이 하나도 없지. 권리가 하나도 없거든. 그냥 내게 오는 모든 것이 고마울 뿐. 오늘 이 맛있는 꼬막을 포식까지 하고, 거기다 이 멋스런 차를 마시고. 이 찻잔이며 주전자를 내 친구가 손수 구워서, 그 손으로 차를 끓이고 그 손으로 잔에 부어서……, 이런 호사 평생에 한 번 하는 것이 이 무슨 복이냐.

둥글이: 어쩌냐, 이 아줌마가 또 철학 한다!

찻잔: 냅둬라, 글쟁이 말쟁이 본업을 어쩐다냐. 생긴 대로 살게 둬라.

물고기: 왜 껄끄럽냐? 나 오늘 속말 좀 하고픈데. 진짜 복에 겨워서 하는 소리야. 우린 세상으로부터 큰 선물을 누리며 살고 있다구. 생명으로 태어난 것…….

순이: 그래, 몸과 맘을 섞은 남자도 선물이요, 게서 나온 새끼들은 얼마나 더 큰 선물! 그 말 하려고?

안경: 아, 새끼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즈음 젊은 애들 어쩌면 좋으냐. 저번 선거 말이야, 청년들에게 결혼하면 현금으로 얼마 주고 애 낳으면 얼마 준다니까, 그런 후보에게 찍었다고,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텔레비전에 나와서 하는 거야.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걸 올바른 정신으로 한 말이라 믿어? 이익을 준다면 찍는 거냐 말이야? 후안무치. 우리들이 아이들 그리 가르친 것이지만, 해도 너무하지. 결국 눈빛만으로 에이즈도 치료한다는 허풍을 잘 해야 교회가 넘치고…… 종교건 뭐건 광신이상 뭐라 받아들여?

물고기: 그러게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이라니까.

순이: 무슨?

물고기: 내가 무엇인가. 동물 - 인간 - 남자/여자 - 이어서 신분…… 그렇게 좁혀 들어가서 나를, 내가 어디에 속하는 생명인지는 알아야지. 그래야 ‘내가 누구인가?’에 가까운 답을 알 것.

순이: 알면?

물고기: 그다음엔 ‘나는 누구이니까 어떻게 사느냐?’ 그런 질문이 오겠지. 물론 거기까진 다 살고 죽어도 모르겠지만 말야.

둥글이: 그럼 해보자, 우린 뭐냐. 동물 - 인간 - 여자 - 거기까진 같다.

찻잔: 또 있네. 아내요, 어머니요, 이제 곧 장모요, 시어머니요…….

물고기: 아니 그건 역할이고.

순이: 역할이 아님, 뭐가 정체성인데?

물고기: 아니 우리가 각자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출발이지.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이지. 여성이다 하면, 여성이 정당한 취급과 대우를 받는지, 여성의 정체성이 억압되고 있는지를 인식하자는 것이지. 지금 정체성 정치에선 비단 여성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를테면 우리가 속한 경제적 집단, 서민층, 중산층 하는 구별 말이지. 최근 우리나라 정치는 확실히 최빈층에 초점을 두었거든. 최저 기초생활을 사회가 책임 나눈다는 것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웠지 왜 무능정치야.

순이: 것도 문제가 없진 않아. 독거노인이라 해도 멀쩡한 사지육신으로, 의료비면제니까 요양병원에서 아예 눌러 살다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더라. 기초생활비 한 푼도 들 일 없이 병원에서 먹고 자는 거야. 혼자가 아니라서 외롭지 않고, 가끔 영양제도 맞고. 병원 측에서도 침대 놀리느니 이문이고.

찻잔: 것도 그래. 나 지난 번 장항아리 옮기다 허리가 끔뻑해서 물리치료를 다녀야 했는데, 병원 다니기가 더 피곤해 죽을 일이었어. 우리도 곧 할머니다만, 웬 할머니들이 병원 하나 가득인 거야. 아예 누워서 뒹굴다가 자다가, 치료 끝나고 쉬어가는 방이라던데. 그러니까 할머니들이 전철로 다니면 차비도 안 드니까, 그 폭 대고 차비 정도만 내면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물리치료해주고 말 걸어주니까 날마다 출근인 거야. 노인들 날궂이 한다고 어떤 자식들이 집에서 다리 주물러주느냔 말야, 함께 살지도 않는데. 날궂이 아니더라도 우리도 저녁때면 다리 붓잖아, 좀 많이 쓴 날은 밤에도 뒤척거리고.

안경: 사실 어떤 제도에도 구멍은 있지 뭐. 그보다 그런 부담을 월급쟁이들이 다 한다는 게 더 문제지. 재벌들 부자들이야 세금을 월급에서 안 떼니 이리 저리 감출 수 있지. 그러니 중산층이 끌려서 내려갔다고 불평하게 될밖에. 내 의료보험료 생각하면 너무 화나. 나야 죽을 때나 병들 때나 일인분 아냐? 그런데 기혼맞벌이면 의료보험 상으로는 독신으로 되어 남편이랑 이중으로 내는 거야.

순이: 뭔가 이상하다 좀.

안경: 그뿐이야? 그럼 우리 애들 가족수당이나 교육비도 이중으로 준다면 말이나 못하지. 그건 아버지한테서만, 그러니까 한쪽에서만 해당된다니까. 주는 것은 중복으로 안 해주고, 떼어가는 건 당연히 이중이지. 그래서 일 없이 요양병원에서 놀며 축내는 비용을 다 부담해주고 말이야. 외로운 노인들이 덕 좀 보는 것이라면 또 참아야겠지. 그런데 부자 병원들이 왜 내가 고생하면서 이중으로 내는 의료보험에서 이득을 챙기느냐 그 말이지.

물고기: 불평은 우리보단 최상위 1%에서 5% 사람들이 더하지, 아예 빼앗긴 10년이라잖아.

둥글이: 그래 누구나 그 나름대로 찬반에 이유가 있나봐. 좀 들어봐, 우리 외당숙이야, 직접. 웬만한 공직에서 은퇴하고서 서울교외로 이사를 가셨는데, 결혼해서 사는 애들도 드나들 것이니 집을 못 줄이시겠더래. 그래서 산 집이 집값이 저절로 오르다보니 종부세가 터진 거야. 기삼백이 아니라 기천이 나오는데 연금생활자가 그런 목돈이 어디 있어. 집을 팔아서 세금을 내야한단 말이야?

안경: 글쎄 여기 무슨 경제학자가 끼인 것도 아니고. 난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 해. 종부세다 양도세다 그런 부자세금 좀 많이 내고 살아봤음 좋겠네. 가진 부동산들에 세금이 많이 부과된다는 것, 그것 대단한 것 아니냐고. 인구 몇 명 이하 섬에는 완전히 온갖 세금이 면제라 그러던걸. 그럼 그런 세금 안내는 섬생활이 세금 많이 낼 것 고민인 사람보다 질적으로 나은 삶이란 거야 뭐야?

찻잔: 딴은 그러네. 세금 많이 내고 사는 팔자가 훨 낫제.

물고기: 괜히 무능정부다 뭐다 그게 언론정치야. ‘무능정치 10년에 대한 반감’ 운운하는 설문은 그 자체로서 선동적이지. 단순히 ‘정부에 대한 불신’ 정도이면 될 문항을 싸잡아서 10년 무능정치 그렇게 몰아가는 거야. 불만 층이 그쪽에 응답을 하면 이제 10년 무능정치는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그러니 언론이라는 것이 긴가민가 하는 설에 입각해서 뭔가를 주장하면, 설문을 통해서라도 말야, 그럼 그것이 정설이 되어 버리는 것이라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기준삼아 또 적당한 가설을 만들어낼 반석이 되어버리는 것이지. 그 구조를 제대로 공부한다면 신문방송에 귀기우릴 필요가 없어질 거야. 알게 모르게 노출되어 교양당하는 것이 인간이지. 코미디 한 줄에서도 교양당하고 말고.

안경: 그래서 펜은 칼보다 무섭다고 했던 거지.

물고기: 그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도 죽이지. 개인이면 또 피해가 작지만, 체제도 펜이 죽이는 거야. 인간의 비판적 정신의 뇌관빼기는 식은 죽 먹기야. 쇠귀에 경 읽기라고? 아니야. 이 매체시대엔 사람들 유도하기가 개 끈에 매인 개 끌기보다 쉽지.


그 다음 이야기들은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분명 이 여자들은 그냥 놀고먹고 몰려다니는 여자들은 아닌 성 싶었다. 하긴 화투짝 달란 말도, 노래방기계 찾는 말도 없고 보면 싱겁디  싱거운 것이 다르긴 달랐다. 나는 양심에 한 가지 찔리는 일이 있어 그 자리를 슬그머니 피했다. 내가 바로 주식 투자해놓고 거기다 표 찍은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난 그래도 표 찍으러 갈 때 까지는 사람이 일단 부자로 살아봐야 되지 않겠냐던 통장 박씨의 말에 수긍이 갔었다. 정말 부자 세상이 한 발짝 다가온 느낌이었다.

박씨는 꼭 그렇게 말했었다. 대통령이 뭐라요, 우리 같은 사람 잘 살게 해주면 그만 아니요. 후보가 워낙 부자니까 더 이상 부정을 안 해먹을 것 아니요.

나는 의아했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 속 알기나 한다요.

박씨는 뭔가 확신했다. 아따, 가진 재산이 몇 백억도 넘는다는데, 뭘 더 꿍쳐 묵겄소. 가진 재산 다 내놓겄다 하지 않았소!

쬐금 수긍이 갔다. 그런 양반들이야 뭣 누러갈 때 올 때 맘 다르고, 그러든 않겄지라.


그런데 상을 좀 치울까 들어가서 다시 듣게 된 이야기는 더욱 불안한 내용이었다. 여자들이 여자들 알기를 매서웠다. 아니 남녀 간에 사람들 알기를 알알했다. 누가누가 한 말인지 이젠 분간이 안 섰다. 대충 이런 말이었다.

짝을 두고도 정분이 나는 일이 왜 생기느냐. 그래서 짐승만도 못한 것이란 욕이 있지.

아니 짝짓기 본능이 뭐 나빠. 본능인데. 본능이 단혼제가 아닌 것을 유독 기독교도덕이 신도 하나요, 남편도 아내도 하나라고 가르쳐서 그렇게 못 밖아 두니까 본성이 발동하는 것이지.

게서 기독교가 왜 나오냐? 그럼 일부다처를 은근히 인정해온 유교가 나았단 말이냐?

종교는 빼, 제발. 문제는 본능보다 더한 데에 있어. 거기에 권력과 지배가 들어가니 문제지.

웬 권력?

권력이지. 여자가 왜 약자이게, 권력이 없어서 그렇지. 가정에서 권한이 적으니 항상 눌렸지만, 지금 세상이 바뀌어 가고 있잖아. 고개 숙인 남자, 그 정도는 곰팡스런 말이지. 요샌 여자들이 집장사다 주식이다 큰돈을 만지잖아. 그래 남편들이 죽 쑤고 살기도 하나봐.


이 대목에서 난 움찔했다. 밥장사는 아무래도 내 주관이다. 남편이야 가게 문열어주고 문단속하는 일 말고는 모른다. 기껏 셔터맨 신세다. 장부 간섭도 못하게 내주장이 되었고, 주식이다 은행관리도 내주장이다. 돈 얻어다 쓰는 셔터맨. 남편도 그래서 점점 무력해지는 걸까. 밤이고 낮이고 남편더러 느림보 다름 아닌 꼴이라고 나도 제법 잔소리 큰소리 아닌가.


가만 보니 물고기 눈이 말이 젤로 많았다. 돈과 권력은 한 칼의 두 날일뿐이야. 어느 경우나 돈 많은 집에서 며느리 들이면 아들이 처갓집 종 되는 것 시간문제지. 아내의 부정? 그런 것 챙기는 것도 권력이 있을 때 말이라니까. 전에 우리 어머니들 세대에 행주치마에 눈물 찍어 바르며 밖으로 도는 남편 돌아오기 학수고대하던 것? 영화에서나 볼 걸. 지금 어떤 아내가 그래? 아내가 하다못해 남편월급통장이라도 돈줄을 쥐고 있으니, 여자들 세상이지. 남편이 아내의 남자친구를 봐줘야 하는 세상이라고.

설마.

있는 층에서야 제각기 사생활 존중한다는 미명으로 서로의 행복추구권을 위해 서로 모르는 척 살고.

그럼 없는 층은?

없는 사람들은 서로 참지. 그나마 날품이라도 들여오는 서방이 안 들어오면 뭘 먹고 살까 해서 참고, 또 그나마 각시 나가버리면 어떤 여자가 와서 밥이라도 해주랴 싶어서 참고.

설마.

그래 설마야, 설마 아내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호스트바가 번연이 성업이고, 그곳에 꼭 남편 없는 여자들만 드나든다는 법 있어? 왜 그 유명한 한 때의 황태자, 돈 많은 권력층 남자야 그렇다 치고, 그 귀부인 여자가 따로 호스트바 단골이라 소문났었지. 물론 뜬소문일 수도 있고. 하긴 지난 세대 여자들이 당했던 설움을 복수라도 하는 행태인가 봐. 아직 물론 그런 독기가 다 퍼진 건 아니고. 여전히 선량하고 가족밖에 모르는 바보 현모양처들이 많지만. 또 맞벌이여잔 더하지, 바람날 시간이나 있어?

시간 있다고 바람이야? 그만들 해. 왜 그리 희망 없는 소리들을.

여전히 여성에게만 윤리적 잣대가 까다롭다는 거지.

하긴 사시나 붙고 공무원이나 교사가 되어야 동등한 대우지, 일반 급여는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제라니 어림없지. 불평등고용에서 시작하니까 야침 찬 젊은 여자애들이 묘한 수들을 쓸 밖에. 그 쩡아사건도 남자들 일각에선 전혀 다르게 말한대잖냐.

전혀 다르게?

그래, 전혀 다르게. 그 사건에선 박사학위만 고장이었다는구나. 그것만 가짜가 아니었으면 아무 일도 아닌 거래. 그래서 심지어 억울하겠다고 동정한다는 게야, 세상 남자들이. 그만한 일, 권력층 중년과 미모의 젊은 여자 이야기는 밥 먹고 차 마시고 운동하는 일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그렇고 그런, 아예 이야기 거리도 안 되는 일상인데 그랬다는 거야. 그 높은 양반의 불운은 하필이면 교수자리 탐낸 여자와 엮인 것뿐이라는 거지. 그걸 빼면 어떤 범죄적 요건이 아니라, 그저 좀 쏠쏠한 일상이라는 거야.

뭔 말이 좀 이상하네. 남자들 입장에선 전혀 흥분도 분노도 할 일이 못된다고?

그러니까 결국 들어맞네. 여자가 두뇌가 크면 가슴이 없다고 했던 말. 남자에겐 가슴이 큰 여자면 된다, 두뇌가 큰 여자는 재앙을 가져 온다 뭐 그런 말. 젊은 여자가 보석이나 명품만 탐했으면 실컷 사 줄 수 있었는데, 사회적 지위까지 탐해서 골치 아파진 것이로군.

아니 뭐, 그리 의기소침해 할 것 있어? 대다수의 선량한 우리 남편들은 그렇지 않지. 그건 특권층 이야기야. 특권이 많아지면 반대로 단점도 많아지게 돼있어. 평범한 우리들이야 무슨 억하심정으로 세상 남자 여자를 다 욕해?


정리하자면 이랬다. 우리네가 좀 심하다. 우리나라가 너무 좁아서 냄비방이다. 정치인이면 정치인, 연예인이면 연예인, 하고 사는 것들이 다를 텐데. 그런 사람들은 특별히 행복해야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삶이 모양새는 달라야 마땅하다. 그런 사람들의 행태가 여과 없이 일사천리로 평범한 가정에 전달이 된다. 돈과 권력이 되면 되는 만큼, 부치면 부친대로, 똑같은 모양새로 다 하려든다. 각각의 정체성을 지닌 고유의 문화가 없다. 청소년이 즐길만한 문화, 중년이나 노년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따로 없다. 20대 처녀들에게 반팔 반바지가 유행이면 중년도 똑같이 한다. 딸들이 사다준다는 핑계로 다 따라한다. 딸들이야 부모보다 훨씬 크게 날씬하게 자라서 부풀린 칠부소매를 입어도 나실나실 예쁘다. 그걸 어머니가 따라 하면, 세월 따라 툭 벌어진 어깨에 짜리몽땅한 팔에 짧은 소매기장이 통장수 칼만 같다. 또 요즈음 아이들은 얼굴이 길다보니 꾸냥처럼 앞머릴 잘라도 귀엽다. 하지만 원래 보름달 얼굴에 주름 없앤다고 바람 넣어 볼 살 미어지게 부푼 아줌마들이 앞머릴 똑 잘라 놓으면 얼굴이 그만 반 토막이다. 키까지 더 작아 보인다. 젊은 연예인들이 새까만 머리염색들을 하고 나타나면, 흰머리 염색도 다 새까맣게 따라 해서 가짜인 것만 더 들통난다.


머리를 쓰다듬다 보니 정말 내가 그랬다. 미장원 가니 앞머리 몽땅 잘라서 펴고 뒷머리만 파머하래서 그랬다. 그래서 내 키가 전보다 더 작아 보일까? 반코트도 팔을 두 동강 내어 주름잡은 게 멋있어 보여서 장만했는데. 난 딸 아이 흉내가 아니라 증권회사에서 만난 여자가 멋있어 보여서 그만. 헌데 이 여자들은 먹은 밥알보다 쏟은 말들이 더 많겠네.


외양만 그런 게 아냐. 그렇게 해서 젊은 멋도 노숙한 맛도 구별이 없이 섞인 세상이야. 가치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니까.

뭐 그래도 유행 무시할 수 있어?

‘할 수 있어?’가 아니라 무시 ‘해야 해!’ 아님 내가 누군지 모르게 되지, 점점. 우린 종일 교양당해서 문제야. 정말 너절한 것들 그만 배워야 해. 텔레비전에선 배우얼굴도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서 여기서 저기서 태어난 악연들이 얽히고설키어 부정한 일가친척으로 드러나는 꽈배기 연속극에 정신 팔지. 억지 코미디를 들여다보며 교양당하지. 어디 어디가면 뭐뭐 맛있는 것이 있다는 호들갑에 그런 음식 못 먹는 내 밥상만 초라하고, 고장마다 명소마다 찾아다니며 맛있는 외식을 하지 못해서 불행하게 느끼게 만들고…….

하긴, 휴대전화 없음 사람 축에도 못 끼지,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런 것 없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삶을 깡그리 잊어버렸나 봐 우린 지금.

방송이라고 다 나쁘냐, 진짜 교양프로도 있잖아.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나 좋은 책에 대한 토론도.

그래도 진짜 교양프로는 한 밤중에나 하더라.

것도 만날 재탕이야. 내가 정말 존경하는 여자, 화가 김점…….

그래, 너 화가되려던 때도 있었지?

무슨 딴 소리!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또 보고 또 보면 식상한데, 하긴 아마 그만한 극적인 인물들이 없다보니 재탕이겠지.

누군데? 

그만 두자. 말이 길어, 김치도 못 담가 먹으면서 그림만 그렸다는, 거지꼴에 좀 미친……. 그냥 내가 많이 좋아해서. 그런데 너희들, 선거전이고 뭐고 대강 말하는 사람 이야기 들어보면 무슨 신문을 구독하는지 냄새 안 나던?

냄새? 하긴, 만날 같은 논조를 읽다보면 그대로 동화된다니까. 정체성이 길들여진다고 말하려는 거지 너?

그래, 때가 때이니만큼. 민주주의체제에선 적어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있어야 하지 않아? 대의정치가 뭔데? 내 뜻을 대신해줄 정당이 필요하잖아? 아무튼 그때, 그래도 대의를 따른다고, 지역당을 탈출하련다는 그 대의를 믿기로 하고, 그쪽을 따라 정체성을 옮겼거든. 그러더니 이번에 봐. 또 그 변신의 주역들 중에서 날랜 기수를 앞세우고 무리지어 그 정당을 또 떠나는 거야. 그럼 이번에 또 어쩌라는 것이냐고. 난 분명 두 번의 배신은 참지 않았지. 선거 끝나고 헤쳐모이고, 또 선거 앞두고 헤쳐모이면, 어디에 정체성을 기대느냐고. 그래서 아깝지만 버렸어. 그렇게 탈바꿈을 하는 정당은 버리려고. 누에도 아니고 계속 탈을 벗어야해? 그런다고 나방이 호랑나비가 되나? 난 나방이 나방대로 살 제 길을 보지 못했어. 방황하는 나방이 신세? 그것이 선거를 치르는 심정이었어.

뭐야 그럼 넌 우리 쪽에서 보면 이탈표였네. 그럴 수 있어?

그래 이탈이지. 맹목과 맹신으로부터의 이탈이지. 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 해. 정체성 정치의 의미에선 늦어도 총선 전까진.

너 말투가 이미 대선에서 그 싹을 보았다는 말 같이 들린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지금의 선택으로서는 환경에 기댈 밖에.

환경? 바로 그거야. 환경을 보듬는 정책에 최우선 점수를 줘야 해. 《불편한 진실》 찾아서들 봐, 꼭. 뭔가 영화다 뭐다 예술이 영향력을 가진다면 그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을 존경해. 그 한편을 진정으로 본다면 사람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 이 바닷가 마을들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미래를 경고해주니 말이야.

여기도?

이 바다라고 예외겠어, 완급이 있을 뿐. 공룡들도 그랬을까 싶어. 최강자로서 자연을 장악해서 유용하게 수탈하고 보니, 더 수탈할 자연이 남지 않았을 때 공룡 또한 함께 멸망했을까?

그럼 인간도 외톨이가 되어․…….


멀건 차를 한나절씩 마시며 알쏭달쏭 이야기만 늘어놓던 여자들이 드디어 자리를 떴다. 꼬막들은 시장에 가서 살 양인지, 유자절인 것만 두 통 나갔다. 매실절임은 권해도 다들 담갔단다. 그 나름 부지런한 여자들인가 보다.


*

꼬막식당집 주인여자는 숨을 돌린다. 시간이 점심장사와 저녁장사 정 중간이다. 아까 여자들은 행색도 괜찮고 제법 유식한 것 같은데 주식소문을 모르는 것이 주인여자의 마음에 걸렸다. 여자는 OO카드가 OOO카드라는 소문도 미심쩍어진다. 혹시 허튼 주식을 샀단 말인가? 갈팡질팡. 사실 그 주식이 곤두박질치면 큰일이 난다. 그렇더라도 만일 OOO카드가 사실이라면 뭔가 죄를 짓는 것 까지는 아니라도 좀 껄끄러울 것은 마음이 되기도 한다. 선한 데는 못난 정이 섞여있다.

여자는 안방에서 잠시 뭔가를 추스르더니 슬그머니 가게를 빠져나온다. 가방끈을 어깨에 걸메고서도 가방을 꽉 껴안은 품이 매상 입금하러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가까운 신용금고로 향하지 않는다. 조금 두리번거리면서 네거리를 둘 지나 왼쪽으로 꺾어들자 이상한 열기가 돈다. 증권사 안은 늘 그렇게 덥다. 스팀을 팍팍 때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줄타기라는 속성 때문에 사람들이 더운 숨을 내쉬는 때문이겠다.

어라? 남대리, 실눈에 이마가 반질거리는 젊은 남대리가 자리에 없다. 그러고 보니 문을 열고 들어설 때 받은 분홍빛 엷은 공기가 착각이었는지, 뭔가 서늘하다. 사람 하나 자리에 없다고 이러나…… 그런데 왜 과장인지 저 구닥다리가 그 자리에 있나? 아니, 자세히 살피니 잠시 비운 자리가 아닌 듯한 인상을 받는다. 결근이란다. 결근. 이상타. 그냥 오늘은 수선스런 날인가 보다, 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괜히 이상한 여자손님들 잡담에 가슴이 쿵쾅거리더니만, 잘 좀 알아보려고 오니 하필 남대리가 결근이라니. 내일은 나오겠지,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 나온다.


여자는 갑자기 바닷가가 그리웠다. 꼬막으로 밥장사하면서도 실제로 갯벌을 본 것이 언젠가. 밥장사하다보니 계 몇 개도 나가기보다는 계군들이 꼬막식당으로 모이는 편이다. 해외여행간다고 붓는 곗돈은 밥들도 안 먹고 갑장인 일수쟁이여자가 와서 돈만 걷어간다. 만기도 아직 멀었고, 해외가 다 뭔가, 이 수선한 심정으로. 여자는 우선 바다가 그리워지는 모양이다. 꼬막은 많이 나도 이 고장엔 해수욕하는 바다는 없다. 그냥 갯벌이다. 털털대는 버스로 시간 반 쯤 떨어진 여자의 친정 쪽은 툼벙댈만한 바다가 있었다. 원피스만 벗어 깨끗한 돌로 눌러놓고 텀벙대던 시절을 아스라하게 그려본다.

그런데 아까 여자들 이야기 중 바닷가가 가라앉는다는 건 또 뭔가. 친정부모가 묻힌 바닷가가 가라앉으면 어찌될 건가? 여자는 괜스레 불안하다. 지금 바다 끼고 사는 사람들조차 이 터전을 떠나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가만있어도 그런 날이 닥치리라던데, 무슨 말이 씨 된다고 그런 소리들을 해 대는가 기분이 나빠진다. 난방도 줄이고 물도 아껴 쓰라면, 그런 정도야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겠다 싶다. 우선 세금 덜 물고. 식구들 단속 좀 해야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가끔 유식한 손님들이 오면 그 나름대로 이문이 있다 싶어 오히려 안도감이 생긴다. 여자는 버스를 타려다말고 돌아온다. 저녁 장사시간이 닥치는데 무슨 내일 모레 타령이냐 싶어서다. 여자는 고개를 턴다, 나 죽은 뒤에 바다가 가라앉으면 알게 뭐냐. 새끼들이 안타깝지만, 그 여자들 말이 신선님 말도 아닌 것이고. 그냥 잊기로 한다.


여자는 그 다음날 벌써 유난히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 어제의 일은 흘려버렸다. 점심이 워낙 붐벼서 증권회사에 나가볼 짬을 못 냈다. 그리고 저녁 늦게야 뉴스를 들었다. 큰 손 여자들이 사람을 시켜 한 증권사 펀드매니저를 납치해서 감금했는데, 돈을 날려버린 분풀이였다는 것이다. 가만, 분풀이라면, 돈은 영 못 받는다는 거네! 가만, 그건 그렇고, 그 여파로 그 쪽 줄에 선 여기저기 자잘한 직원들이 숨어버리거나 했다는데……. 가만, 남대리도 결근한 것이, 설마, 월차가 겹쳤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만, 설마…….


새해라 해도 아직 꽁꽁 언 겨울밤은 길기만 하다. 언제 날이 밝아올 것인지. 적금이자가 이리 꽝인데, 뽄든가 폰든가 안할 여자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이고나, 겨울밤은 길기도 하다. 시집와 첫 겨울 뜨뜻미지근한 아랫목, 한 번 돌아 누어버리면 뻣뻣한 옆 사람 파고들며 날 밝기를 한탄하던 그 시절은 멀리도 사라졌는데……. 어서 날이나 밝아라.


전 날 휘파람 남대리 대신에 누런 과장이 앉아있던 자리에 오늘은 허연 수염의 신령님이 서있다.

네 돈은 은보따리냐? 금보따리냐?

누가 요 세상에 보따리에다 돈을 싼다요? 제 돈은 짜가라도 구찌가방에 넣었지라.

어허, 구자가방은 첨부터 없었니라. 아까 누가 팔자가방을 찾기에 하나 돌려주었고. 지금 남은 건 요 은보따리와 금보따리 뭉칫돈뿐인데, 어허…….

놀리지 마세요. 사과상자나 케이크상자라면 모를까 요즘에 누가 보따리에 돈뭉치를 싼다고 그러실까.

아따, 사과상자를 금전으로 채웠냐 은전으로 채웠냐 그 말인데, 말귀도 참 못 알아듣는구나. 헌데 보아하니 어쩐 형국이냐, 네가 여기 올 팔자가 되기나 하냐, 꽝!


꽈당 하는 지팡이 소리에 놀라 눈을 드니 시계 바늘은 여전히 칠흑 속에 잠겨있다. 다시 눈을 감으니 신령님 긴 수염이 갑자기 딱 중간에서 여덟팔자로 갈라져 양쪽으로 날린다. 털어버리려고 눈을 크게 떴는데 귓가에서는 여전히 신령님 말소리가 왕모기처럼 따갑게 앙앙댄다. 팔자라, 팔자…….

여자는 이번엔 정말 눈을 뜨고 검은 천장을 바라본다. 내가 잘 못 했을까? 돌아가신 울 아부지, 돈 놓고 돈 묵는 일만은 하지 말라고, 땅 파묵고 살든지 고기 잡아묵고 살라고 하셨는디. 박서방이 밥은 먹일게다, 허니 나서도 말고 살라셨는디. 밥장사 나서서 모은 뭉칫돈, 그 돈은 지금 잃었거나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이미 정해져버렸다. 불안해도 소용없다. 지난 일이다. 돈 따라 찾아나서 마음을 보챌 것이 아니라, 이대로 원래대로 하면서 잘 살자고 참고 나가는 것이 마땅할까. 내 본 모습, 내 본 삶을 보듬는 것이.

정치성, 아니 정체성이라고? 꼬막밥장사나 하다가 그런 희한한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은 실로 우연이었다. 그 점심 손님들,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말이 또 있었을까. 여자는 그래도 그 문제를 파고들기로 했다. 뭉텅이 돈 잃고 미치지 않으려면 거기에라도 매달려야 했다. 나는 본시 돈 놓고 돈 묵을라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저 묵묵히……. 하지만 분통이 터진다. 그럼 언제나 사람 같이 살거나. 언제 이 비린내 짠 냄시 다 털고 사람같이 살거나.

내 이름은 숙이, 정숙이, 박실이, 그러다가 은행에 가서는 김정숙이 되었다. 내 이름은 김정숙. 이름 석 자에 돈도 들어 있고, 도장도 서너 개는 된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만일의 경우가 이런 걸까? 아무튼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도장을 은행마다 다른 것으로 팠다. 김정숙, 김정숙, 김정숙……. 정체성이라면 나 자신인 것. 내 돈이 날아가면 나도 날아가는 걸까? 내 돈이 날아가도 내가 날아가지 않으려면 나는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 걸까? 여자는 어둠이 스멀거리며 날이 뿌옇게 새도록 제 이름 석 자를 중얼거린다. 김정숙, 김정수욱…….

 

 

소설시대 17호 80-102쪽, 2010.05. {한국작가교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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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작가교수회2010. 4. 8. 21:00

<한국작가교수회> 라는 곳이 있다.

문자 그대로 작가이면서 교수인, 소설을 쓰며 소설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학교를 떠났지만 소설가를 멈출 수 없기에 이곳의 일을 맡게 되었다, 대 선배님들의 강권에 떠밀려서.

물론 문창과는커녕, 국문과도 국교과도 아닌 교수경력에, 소설가 경력도 일천하여 심산하다. 우습지 않은가, "장"을 절대로 못하는 사람이 인생 다 저녁에 느닷없이 무슨 책임을 맡아서. 결국 이런 인사말도 써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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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교수회>는 소설 창작과 그 교육에 관한 연구와 정보를 교환하며 후진을 양성 지원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서 2000년 2월 25일 창립총회를 가지며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온이로 열 살을 먹었습니다. 인문학 일반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위한 지도적인 힘을 상실해 가는 동안,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더욱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정보오락의 시대’’(닐 포스트먼)는 우리가 인간성을 기억하며 그저 인간답게 사는 일조차 어렵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거대 우주를 품기 위해서 라면 우선 그 작은 파편인 이 지구와 먼저 화해하고 섞이는 일부터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쉬이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첨단과학기술을 자연정복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게 하는 데 써야함은 우리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처럼 화석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몸을 낮추고 키를 줄이며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를 모색해야 합니다. 다만 그 첩경은 무엇 보다 우리를 공룡이 되라고 부추기는 파괴적 세력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정열을 키워가려는 꿈을 꾸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고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이 불발을 성찰하고 이 결핍을 생채기 나도록 파헤집는 문학, 문학 활동이 인류의 꿈을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자각합니다.

 

그 동안 이 회를 이끌어 가신 선배님들의 열정이 이제와 물거품이 되는 일이 없도록, 부디 동참을 바랍니다.

우리는 늘 부족한 흔들리는 인간이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러분의 좋은 생각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기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2010 봄,

회장 서용좌 올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