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영호남문학인 교류한마당
2009년 5월 30일~31일
1. “하나의” 도이칠란트
21세기로의 길목에서 ‘정보오락 Infotainment’의 시대라고 하는 범세계적 문화 패러다임의 교체보다 중요한 문제는 도이칠란트의 경우 통일이라는 변수에 있다. 양 도이칠란트 국가의 정치적 통일이 곧 ‘하나의 도이칠란트’라는 통합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합의가 없는 통일”이고, “장벽은 무너졌지만 분단은 계속”되고 있고, “문화적 식민화” 속에서 “통합이 신속히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환상”이었다는 생각에서 ‘동인-서인 Ossi-Wessi’이 “머리속 장벽”을 두고서 여전히 대치하고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전후문학은 패전과 함께 양심의 가책으로 전쟁포로상태로 귀향한, 또는 히틀러소년• 소녀단 유니폼을 벗어던진 세대에 의한 문학이었다. 그러나 친서방정책으로 경제재건을 우선시한 서쪽과 사회주의 이상 실현을 위해 독서대중의 교양화를 꾀하던 동쪽에서, 도이치문학은 크게 다르게 발전할 운명이었다. 서독의 입장은 보수적 문학비평의 취지에서 도이치문학의 통일성이 존재한다고 간주했다. 서독의 자유문학과 동독의 몇몇 비판적이고 수준높은 문학을 포함하면서, 동독의 문학 일반은 정치적으로 교조적이며, 미학적으로는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전혀 문학이 아니라고 간주해왔다. 반대로 동독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본주의에 문학적 상상력을 저당잡힌 서독의 문학은 작가를 먹여 살리는 상품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동독에서는 문학이 인민대중의 사회주의 정향을 고무시키는 교육적인 사명감에 찬 위대한 그 무엇이었고, 작가 또한 약간의 특권계층으로 대접되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역사의 승리자로서 문학의 황금시대를 맞았던 동독의 경우, 도이칠란트의 통일은 그 자체로서 충격이었다. 통일은 동독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해체라는 의미에서 문화체제의 해체를 포함하기 때문에, 통일 후 소위 청산작업과 변화의 대상은 곧 동독의 문학인 것이다. 서방에서는 ‘이데올로기문학’이라고 격하되는 동안 스스로는 도이칠란트 정신사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믿어온 문학이 청산되어야 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글쓰기 방식의 붕괴와 더불어 문화의 시금석이 사라진 공황기를 초래했다.
1) 통일의 순간 - 폴커 브라운
통일의 순간에 시집 『우리들이지 그들이 아니라 Wir und nicht sie』(1970), 장편 『미완성의 이야기 Unvollendete Geschichte』(1975) 등이 어렵게 출판되어 동• 서독에서 호평 속에 팔리고 있던 중견작가 브라운 Volker Braun(1939~ )은 울먹였다.
「추도사 Nachruf」 (1)
나는 그대로 있는데 내 나라는 서쪽으로 떠나간다.
오두막집에는 전쟁을 왕궁에는 평화를. (2)
내가 내 나라에 발길질을 해댔구나.
내 나라는 몸을 던지고 알량한 장신구마저 던져 버린다.
겨울이 지나면 탐욕의 여름이 오겠지,
그러면 나는 어디론가 먼 곳으로 사라지리라.
내가 쓴 모든 글도 이해될 수 없으리.
나는 여태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것을 빼앗길 것이고,
아직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것을 영원히 아쉬워하리라.
희망은 덫이 되어 내 갈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나의 소유물을 이제 너희가 움켜쥐고 있구나.
언제 다시 내 것이라고 말하며 모두의 것을 의미하게 될까.
강한 자의식의 소유자인 브라운은 동독의 이념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거기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이 소유물은 다름 아닌 “여태 한 번도 지녀보지 못한” 진정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이다. 현실사회주의가 허위라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판명된 뒤에도 진정한 사회주의는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고집스런 우울은 수십 년에 걸쳐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비전이었던, 기회가 균등한 곳, 생산적인 인간들의 연대공동체를 집요하게 그린다. 이 시의 정취는 통일과 더불어 발아래 땅을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과 일치했지만, 브라운은 양쪽 비평계에서 비판을 받았다.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된 마당에 ‘진정한 사회주의’가 도래하리라는 환상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또 새로 얻은 개인주의적 자유를 예찬하지 않았다고 해서.
2) 통일소설 / 전환기소설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더불어 동쪽 도이칠란트 문단의 새로운 변수는 작가들의 세대교체를 들 수 있다. 동독 최고의 극작가 뮐러 Heiner Mueller(1929~1995)나 “비유적 사고”의 모르그너 Irmtraud Morgner(1933~1990)는 유명을 달리했고, 통일을 불안과 불만으로 받아들이는 브라운이나 아예 하임 Stefan Heym(1913~2001)과 볼프 등 기성세대는 좌표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대신 젊은 작가들에게 통일은 새로운 출발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강요받아온 소위 문학에 대한 외세로부터의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통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했다. 그들만이 가진 ‘두 체제’와 ‘두 사회’의 경험은 서독의 작가들에 비해 유리한 관점을 확보하는 것도 사실이다. 통일 후 가장 성공적인 신진이라 할 브루시히 Thomas Brussig(1965~ )는 아예 동독은 이야기하기에 좋을 것이라며, 지루한 자본주의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이야기의 무궁무진한 보고라서 “소설가의 천국”이라 호언했다. 이것은 연령의 의미에서의 세대교체 뿐 아니라,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그의 『우리같은 영웅들 Helden wie wir』(1995)이 대중적인 괄목한만한 성과를 낼 때, 시대소설로서 ‘통일- 또는 전환기소설 Wenderoman’(3)이 화두로 떠올랐다.
소설은 울치트 Klaus Uhltzscht라는 일인칭 서술자의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장벽붕괴 후 2년쯤 되었을 때 그는《뉴욕 타임즈》기자와 인터뷰를 자청하여, 그의 비정상적 ‘물건’이 전적으로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이끌어냈다고 주장한다. 이어서 울치트의 21살 생애가 이야기되는데, 그가 태어난 것은 하필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군이 체코에 진입한 날이다. 그는 유명해지고 싶은 이기적인 관점과 한편 봉사하고자하는 이타적인 관점에서, 사회주의 선전에 기울어 슈타지(4)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지만, 아버지 역시 슈타지였다는 사실에 놀란다.
특히 마지막 장 “분단된 성기 Der geteilte Pimmel”는 동독 최고의 소설가 볼프의
<분단된 하늘 Der geteilte Himmel>(1963)을 그대로 조롱한다. 슈타지요원 울치트는 1989년 11월 4일 베를린 알렉산더광장에서 장벽붕괴가 임박한 순간에도 여전히 사회주의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 연설자를 비웃는다.
연설자는 유명 피겨스케이팅 선수출신의 트레이너 뮐러 Jutta Mueller(1928~ )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음 날 밝혀지기로는 볼프였다. 주인공은 분노하여 외친다. “‘장벽은 없어져야 한다!’라는 한마디 외침이면 되는 것인데 그런 외침은 크리스타 볼프의 입에서가 아니라 로널드 레이건의 입에서 나왔다.” 작가는 이처럼 적당히 소신을 기피해온 볼프가 국민작가로 존경받았던 사실에 분개하며 볼프의 전 작품활동을 ‘얼음 위에서 미끄럼타기’(피겨스케이팅)로 비하한다.
문제는 공격당하고 매도되는 동독의 대들보 작가들이다. 그들은 이처럼 직접 동쪽의 후배 작가들에게서 또는 외곽에서 직격탄을 맞으며, 또한 서쪽으로부터는 “길들여진 반대자들”이었다고 매도당하는 협공에 처해있다. 동독이 “문화보호지역”이었다고 보아도 되는가? 민족의 대변자로서 ‘인간적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를 당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견지했던 지식인 작가유형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의구심은 폭등하고 있다.
2. 분단기의 거장들
1) 도덕성 시비 - 크리스타 볼프
누구보다도 통일과 더불어 논쟁에 휩싸인 볼프 Christa Wolf(1929~ )의 문제의 1989년 11월 28일의 베를린광장 연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동독의 독립을 고수할 것인가? 우리의 재정적 도덕적 가치의 폐업 정리세일을 할 것인가? 조국을 위하여 아직도 우리에겐 기회가 있습니다. 아직도 출발점이었던 반파시즘적 인본주의적 이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파시즘적 인본주의적 이상’을 위해 조금 더 노력하자는 취지의 발언이라면, 중견 지식인 성직자 정치가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해야 하는 발언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남은 것 Was bleibt』(1990)의 출판이 그로서는 악의적인 숙명과도 같았다.
슈타지로부터 공개적으로 추적/감시되는 여성작가의 하루가 이야기되면서 감시와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들, 불안, 변화의 결과가 보고된다. 작가는 내면의 독백, 끊임없는 자문과 자기시험을 통해서 정신분열적인 행동을 보인다. (자아의 분열은 국가에 대한 관계에서 볼프의 분열성을 말한다.)
볼프에게 실제로 ‘남은 것’은 거짓과 자기기만, 굴욕에 속수무책으로 내맡겨지는 일이었다. 이미 볼프에 대한 평가는 서독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1987년 11월 FAZ에서 비평계의 황제 라이히-라니츠키의 Marcel Reich-Ranicki(1920~ )는 볼프를 “동독-국가시인”이라고 폄하하더니,『남은 것』이 출판되어 시중에 깔리기도 전에 Zeit와 FAZ에 악의적 서평이 실렸다. 국가시인이 감시를 받았다니 어이가 없다는 논조에, 국가와 가족처럼 지냈고, 국가로부터 혜택을 누린, 나치스에 복무한 지식인의 후예라고 비판되었다. TV 프로그램 문학 4중주는 “도이칠란트에 혁명이 일어났다. 동독의 작가들은 승리했는가, 불발인가?”라고 비꼬았다. 이는 동독의 작가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이 순간에는 마치 작품의 질이란 글이 쓰인 장소와 동의어인 것 같았다.
논쟁의 제2기는 정치적 참여를 표방하는 지식인들의 상호 공격으로 번졌고, 1993년에 터진 슈타지 서류철 문제는 볼프의 ‘비공식 협조자 IM’ 활동(1956~1962) 고백으로 비롯되었다.(5)볼프 자신은 이 모든 혹독한 비판을 전환기의 청산이라고 받아들였다. 상당 기간을 미국에 체류함으로써 언론을 피했고, 육신의 병으로 반응했다.
이것은 『화신 Leibhaftig』2002)에 기록되어 있다. 『메데이아. 목소리들 Medea: Stimmen』(1996)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번갈은 독백에서 메데이아신화가 재창조된다. 그리스신화, 아니 세상의 모든 신화와 전설 가운데 최고의 악녀로 각인된 메데이아가 이 작품에서는 강한 자의식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에 근거한 사건들은 다른 방향에서 해석되며, 다른 시각으로 조명된다. (『카산드라 Kassandra』1983)를 그리스 아닌 트로이의 시각에서 쓴 것과 상통한다.)
볼프는 12권 전집의 출판과 특별호 등을 출판하고 있고, 에세이, 대담, 서간모음집에서는 그 시대에 증후적이고 감동적인 열정이 확인된다. “문학은 오늘날 평화연구이어야 한다.”(뷔히너문학상, 1980)는 입장은 2002년의 도이칠란트 서적상 수상에까지 변함없이 이어진다.
2) 신념문학. 신념의 변화? - 귄터 그라스
도이치문학 특유의 전통인 ‘신념- 또는 신조위주의 미학’에서 출발한 전후의 작가들은 이제 거의 역사적 위치에 들어갔다. 하인리히 뵐 Heinrich Boell(1917~1985), 렌츠 Siegfried Lenz(1926~ ), 그라스 Guenter Grass(1927~ ), 발저 Martin Walser(1927~ ) 등 대부분 ‘47동인’과 관련된 서독의 전후문학은 끈질기게 책임의 문제를 공개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이 된 세대였지만, 오늘날의 독자들은 대체로 ‘양심으로서의 작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념 자체도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1959년 프랑크푸르트서적박람회에서, 뵐의 『아홉시 반의 당구 Billard um halbzehn>와 더불어 그라스는 『양철북 Die Blechtrommel』으로 세계문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통일의 순간 뵐은 세상을 떠나있었고, 그라스는 콜 수상 주도의 (흡수)통일 방식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통일 후 그는 통일이 작가에게 그 신념에 따라 소재상의 전환기는 될지언정 흥망성쇠의 분기점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무당개구리 울음 Unkenrufe』1992)에서 정년을 앞둔 홀아비 노교수와 예술품복원사인 홀어미의 로맨스그레이를 전경에 배치하고, 통일 후 정치 및 경제적 현실을 형상화하면서 화해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장편을 썼다.
때는 전환기로 도이칠란트 남자와 폴란드 여자의 만남은 민족적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이 둘은 각각 실향민들이고, 각각의 양친들은 언젠가 고향 땅에 묻히기를 소원했었다. 그래서 ‘도이칠란트-폴란드 공동묘지’라는 아이디어가 나온다. 실향민들은 시신으로나마 “화해의 묘지”에 되돌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말은 이들의 사고사로 끝난다.
『넓은 지평 Ein weites Feld』(1995)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기류에 따라 끊임없이 좌우되는 도이칠란트인의 성향을 ‘배신’이라는 낱말로 함축했고, 『나의 세기 Mein Jahrhundert』(1999)에서는 20세기 100년의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이 매번 다른 서술자에 의해 연대기적으로 서술된다. 이 작품 후에 그라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6)
그라스의 사회활동은 나이가 들어서도 엄청나다. 동ㆍ서독 통일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수상의 정책을 반대했을 뿐 아니라, 1997년에도 콜의 5차 연임을 저지하기위해 전 도이칠란트 지식인들의 결집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런 그의 장편 『게걸음으로 Im Krebsgang』(2002)는 2차대전 말에 민간인 9천명 이상이 숨진 선박침몰사건을 다루어, 발표되자마자 독자와 비평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문학적으로 뛰어난 성공작이란 평가 외에도 도이칠란트 사회의 깊은 터부였던 소재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정전 무렵에 발트해에서 발생한 ‘빌헬름 구스틀로프’의 침몰사건은 우선 참사의 규모에서도 1912년의 타이타닉호 침몰사건 때보다 사망자 수가 무려 5~6배나 되는데도 역사적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해왔다. 구스틀로프호는 ‘대도이칠란트제국’이란 오만한 꿈의 상징이었고 ‘히틀러의 타이타닉’이었다. 따라서 그 배의 침몰은 나치스 범죄에 대한 당연한 응징으로 조용히 덮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라고 간주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 등은 곧 잊혔다. 그와 함께 소련과 동유럽에서 추방된 1250만 도이칠란트 민간인이 겪은 고통도 잊혔다. 특히 나치스 파시즘의 청산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한 ‘68세대’는 도이칠란트를 희생자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그런데 이제 소설 속에서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노인의 입을 빌려, 그라스는 “동프로이센 피난민의 참상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세대가 해결할 과제였다.”고 말했다.
이제 게의 옆걸음, 가능한 한 적을 속이려는 걸음이 어제와 오늘을 왔다갔다하는 서술관점을 상징하며, 긴장을 지닌 짜임새로, 예술적이고 유머러스한 대작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팔이란 안으로만 굽을지라도, 한 번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던 그라스가 이 터부를 건드려 도이칠란트인을 감싸려는 속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행동주의 지식인에게서도 노년의 향수란 결국 고향과 동향인이라는 보편감정에 파묻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향은 그라스의 동년배이자 동지적 정서를 지녔던 발저에게서는 더욱 노골적이다.(7) 1960년대와 70년대를 공산당에 동조했던 전력과는 다르게, 그는 80년대 후반부터는 나치스 과거에 대한 논란에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표방했다. 통일 후 베를린에 ‘홀로코스트기념관’을 건립하려는 거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맹공을 펴면서, “축구장 크기의 악몽”이 될 기념관 따위를 건축하는 것은 수치를 “기념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천명했다.
실제로 1980년대 소위 ‘역사가논쟁’(8)을 거치면서 도이칠란트인들의 정서는 바뀌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베를린대학의 법학교수 슐링크 Bernhard Schlink(1944~ ) 또한 나치과거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들세대의 성찰을 담은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1995)로 세계의 문학시장을 휩쓸었다.(9) 슐링크는 문학계에서는 신인이다. 그는 외도(?)로서 이러한 성공을 거두면서 엄청난 걸음을 내딛는다. 나치스의 집중수용소 간수였던 주인공을 모든 괴물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면모를 지닌 가해자로 창작해서만이 아니다. 일인칭 서술자가 세대간의 길항작용을 극복하고 전후세대의 자기정체성을 확보해냈기 때문이다. 제3제국의 범죄적 계책에 얽혔던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를 도이칠란트의 죄과와 관련시키고, 그것을 앞 세대에게 “밀쳐두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 안에 보듬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온 세계를 통틀어 전반적인 문학계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도이칠란트의 도서박람회는 위용을 유지해가고 있다. 또 수많은 문학상들 가운데에서도 최고의 권위를 지닌 뷔히너문학상 수상 면면을 보아도, 시장성과는 다른 치밀한 발굴과 격려 그리고 존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통일 이후 수상자들에는 이미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작가들의 이름과 함께 더러는 생소한 이름들이 들어있다. 헝가리 혈통의 극작가 타보리 George Tabori(1914~2007), 스위스 작가인 무슈크 Adolf Muschg(1934~ ), 동독 출신의 힐비히 Wolfgang Hilbig(1941~2007), 남쪽 튀빙엔 출신의 슈타들러 Arnold Stadler(1954~ ), 루마니아 계로 다다이즘의 음향시 영향을 간직한 파스티오어 Oskar Pastior(1927~2006) 등이 그들이다. 최근 수상자 모제바흐 Martin Mosebach(1951~ )는 『무형식의 이단. 로마 리투르기와 그 적 Haeresie der Formlosigkeit. Die roemische Liturgie und ihr Feind』(2002)에서 가톨릭 신앙의 전사처럼 옛 미사전통의 부활을 외치며 수상했다. 2008년의 오스트리아인 빙클러 Josef Winkler(1953~ )는 죽음과 동성애를 주요 테마로 쓰며, 올해의 수상자 카파허 Walter Kappacher(1938~ ) 역시 오스트리아인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낙관론자는 종종 비관론자이다 Hellseher sind oft Schwarzseher』2007) 등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기층 근무자들의 일상을 써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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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 가져온 지각변동의 일렁임을 살던 젊은 문학도 장년기를 맞은 지금, 여러 의미에서 (도이치)문학의 현재는 한 마디로 무질서한 복수성 또는 무한대의 다양성 속에 있다. 최소한의 공통점이라면 문명비판적인 기본자세, 한때는 그렇게도 익숙했었던 진보의 믿음에 대한 거부, 단순한 의미구성에 대한 회의 등이다. 다양성은 획일성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일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고유한 입장과 방향을 선호하는 가운데, 철저한 미학적 구상, 글쓰기의 실천 방식, 다양한 지역들과 사회적 기능들, 다양한 작가 세대들과 그 정치적 입지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은 유의미하지 않겠는가.
※ 졸저: 『도이칠란트 • 도이치문학』, 전남대학교출판부 (2008), 846~966쪽 발췌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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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중에 「소유물 Das Eigentum」로 개칭되었다.
2) 뷔히너 Georg Büchner의 『헤센 전령』(1834) 중 “오두막에 평화를! 왕궁에 전쟁을!”이란 글의 패러디이다.
3) ‘Wende’는 특히 도이칠란트 통일과 관련해서는 1989년 5월 도이칠란트민주공화국의 부정선거로 인한 동요에서부터 시작되어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변혁기를 총칭하는 넓은 의미의 통일기라고 쓴다.
4) 1950년에 발족한 국가안전부[Stasi]. 자체적으로는 “회사”라 불렀고, 국내외 첩보국과 특정범죄수사국을 겸했다.
5) 영화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2006) 참조.
6) 뵐의 1972년 노벨상수상은 전범국가 도이칠란트에 대한 국제적인 문화적 면죄부라 평가되었다.
7) 이 노벨상 지명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주의자’ 그라스와 도이칠란트의 ‘민족주의자’ 발저가 경합했다는 후문도 있다. Cicero가 선정한 500대 지성인 명단은 교황 베네딕트 16세 - 발저 - 그라스 순이다.
8) 1986년 놀테 Ernst Nolte(1923~ ) 교수는 「사라지지 않을 과거」라는 짧은 글에서 나치스범죄는 볼셰비키 혁명의 “아시아적 야만”에 대한 반응에 불과했다고 주장해서 역사가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9) ‘죄없이 죄의식을 느끼는’ 한 젊은 도이칠란트인의 보고서는 도이칠란트 내에서 50만부, 미국에서는 100만부가 팔렸다. 그라스의 『양철북』이래 처음으로 대영제국 한 해의 베스트셀러목록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뉴욕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슐링크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된 최초의 도이칠란트 작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