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기고2010. 12. 1. 23:30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입니다.

작가가, 소설가가 작품을 쓰는 일은 일종의 도마뱀 꼬리자르기라고, 한 덜떨어진 소설가가 내게 말했다.

뭡니까?

절체절명의 순간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그 피투성이 기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입니다. 몸통을 살려낸 도마뱀은 꼬리만을 물고 허탈해하는 독사에 대해 승리감을 가질 것이고. 꼬리를 자른 선택에 관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도마뱀에게라면 위기 탈출이 절대적 선택이겠지만.

겠지만? 그 이상입니다. 천적을 만났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건 분명 비장의 무기이고, 예컨대 살모사가 아직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틈을 타 도마뱀은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되었지요. 이제 거기에 그 경험을 잘 다듬어서.

다듬어요? 죽다가 살아온 경험을 쓰면 문학작품이라는 말씀이오?

일단 꼬리 잘린 도마뱀은 특별한 경험을 했고, 그런 처절한 경험이 없는 다른 도마뱀들에 비해. 더구나 잘라진 꼬리는 나중에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까요.

그건 좀 다른 문젭니다, 제 생각엔.

다른?

도마뱀을 노리는 적이 주변에 많을수록 꼬리를 재빨리 자르고 도망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그럼 되었지 뭐 또. 게다가 그것을 가공하여.

그래도 꼬리를 자르는 건 도마뱀에게 큰 부담입니다. 꼬리가 없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그 험한 경험을 작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해도 일단 잡아먹힐 위험이 커집니다. 새 꼬리를 만드는 동안에는 몸통 자체도 자라지 못합니다. 동작도 굼떠지고,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도 떨어집니다. 어차피 소설가의 지위야 꼬리 잘린 도마뱀 수준이지만요. 더구나 이제 그 새 꼬리라는 놈은 더 이상 자를 수가 없답니다.

뭐요? 도마뱀 박사가 따로 없으시군요.

게다가 새로 돋아나는 꼬리는 척추가 아닌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다시는 자르지 못한답니다. 소설 한 권 떴다가도 평생 타작만 내놓는 소설가와 다름없지요. 도마뱀으로서도 평생 꼬리 잘라먹은 놈이라는 꼬리표를 함께 달고 사는 것이겠지요. 새 꼬리는 원래 것보다 색깔도 안 예쁘답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 하겠습니까? 소설작품은 취소하고라도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저는 꼬리 자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꼬리를 조금만 물려도 그게 독사라면 금방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잘라야겠지요, 싹둑.

아니 작가님, 뭐 싹둑 잘라낼 원망 같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따라서 해보는 소립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그 독으로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일부를, 이를테면 마음, 심장, 가슴 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을 잘라내고도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가공하여 작품화하는 강심장을 가질 수 있을지, 그건 꽤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니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입니다.

그냥 죽거나 그것을 쓰거나?

예, 실존과 방법의 갈림길입니다. 삶의 내용인가 글쓰기인가 하는 갈림길.

도마뱀과 갈림길이라. 우린 오늘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군요.

그와 내가 구동성으로 말했다. 그와 나는 늘 하나이면서 둘인, 둘이면서 하나인 도마뱀이다. 왜 쓰지도 안 쓰지도 못하는지 언제나 답을 모른다. (문학공간 2010.12월호 통권 253호 4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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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이2010. 11.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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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2010. 11. 15. 23:30

[소설시대 18호 권두언]


불모지에서 더 성한 나무, 문학

 

유난히 무덥고 지루했던 장맛비 속의 여름이 갔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벌써 여름을 잊습니다. 잊은 체합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맞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잊은 체하는 어제가 오늘을 결정하기에 우리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디디거나 아예 가슴을 부여안고 주저앉습니다. 밖으로는 씩씩하게 걷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미소까지도 지으며.

이 숙명적인 굴레 - 선택의 오류와 그 결과의 회환에서 오는 결핍의 감정은 그러나 우리들 작가에게는 유일무이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마 신(들)처럼 무오류성의 성질에 인간이 근접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애당초 문학이고 예술이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한 우리의 내면의 충동 뒤에는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한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습니다. 이 동경은 우리들 대부분에 내재해 있는 것이, 인간은 일반적으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감정은 지속적인 상황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하며, 이 결핍은 배고픔과 아픔 같은 육체적 유형일 수도 있지만, 고독이나 권태라는 정신적 ․ 영적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필수적 소여가 아닌,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향한 달랠 길 없는 동경은 아마도 오늘날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위 문화산업의 동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을 생의 단조로움으로부터 기분 전환시키는 일이 수요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로부터의 도주에 있어 그 강도가 격심한 경우는 아마도 작가가 되고야 말 숙명적 요인일까 싶습니다. 때로는 그가 중심에서 너무나 떨어진 곳에 서 있음으로 해서 정상인과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라 해도, 바로 그 비정상적인 격렬한 사고가 이 사회를 자극해서 정신이 들게 하기도 하는, 그 이상한 숙명 말입니다. 그러기에 문학은 오히려 불모지에서 성장합니다. 작가 스스로 어느 중심에 안주하기보다는 경계인이라고 느끼는 동안 더욱 무서운 기세로 중후한 작품들을 내놓는 증거가 세계문학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가까운 예로는 우리의 신문학 운동만 해도 국권피탈의 역경 속에서 폭발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학, 특히 내용적으로 응집력이 있다고 느껴지는 모든 소설은 다음의 세 요소로 약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와 둘의 기본 대립, 예컨대 개인/사회, 시민/예술가, 덕/악덕, 선/악, 자유/부자유, 빈/부, 현세/내세 등을 일컬을 수 있는 대립,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제 3의 요소. 한 소설에서 기본 대립은 적어도 한 사람의 등장인물로부터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으로서 받아들여진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 결핍은 줄거리를 전개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종결 상황에까지 밀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소설은 유일한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으니, 결핍의 지양입니다. 이러한 결핍의 지양을 위한 투쟁이 드라마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해설자/서술자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설의 장르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간접적’ 접근은 이 적극적 시대에 매우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이 소설쓰기가 점점 난항에 부딪힘을 우리 모두 실감합니다. 김현 선생은 언젠가 사물을 해석하는 힘의 뿌리가 욕망이라고 전제하고,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생생해지고 활기 있게 되며, 특히 소설은 그 욕망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적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우선 소설가의 소설 쓰는 욕망마저 그가 구하는 다른 욕망들에 눌려 변질된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 소설가의 욕망, 소설 속의 인물들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실어 참여하는 독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세상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은 고도로 발전하여 독자란 그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인문학 일반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위한 지도적인 힘을 상실해 간다는 염려가 식상할 만큼의 언어로 아우성이면 그럴수록, 그래도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문학이 무엇인가를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정보오락의 시대는 우리가 본래적 의미의 인간성을 기억하며 그저 인간답게 사는 일조차 실로 어렵게 하고 있음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인류가 거대 우주를 품기 위해서라면 우선 그 작은 파편인 이 지구와 먼저 화해하고 섞이는 일부터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쉬이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첨단과학기술을 자연정복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게 하는 데 써야함은 우리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처럼 화석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인류는 몸을 낮추고 키를 줄이며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를 모색해야 합니다. 다만 그 첩경은 무엇보다 우리 몸뚱이[재산]를 부풀리고 무한정 먹어대는[소유] 공룡이 되라고 부추기는 파괴적 세력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힘을 꿈꾸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고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이 불발을 성찰하고 이 결핍을 생채기 나도록 파헤집는 문학, 문학 활동이 인류의 꿈을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자각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어딘가를 향합니다. 어딘가를 향해서인가 용케 우리가 방향키를 잡았다 하더라도 바다는 비웃듯이 늘 풍랑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행여 편한 대양이더라도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잠시, 한시적 삶에 갇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 애써 소용돌이를 만들거나 다시 폭풍우를 호려내고 맙니다. 잔잔함은 뱃사람을 늘보로 만들 것이고, 정지해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한국작가교수회>는 소설 창작과 그 교육에 관한 연구와 정보를 교환하며 후진을 양성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2000년 2월 25일 창립총회를 가지며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온이로 열 살을 먹었습니다. 집필과 강단의 활동으로 온 힘을 소진하는 것, 한 방울의 에너지라도 남아 있다면 잠을 청할 수 없을 정열에 떠는 것 - 우리 한국작가교수회에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 온갖 소여의 현란한 폭풍적인 기세에 맞서는 증거로서 또 한 권의 『소설시대』를 내놓습니다. 늘 그렇듯이 편집을 맡아 무진 애를 쓴 편집위원들께, 그리고 원고청탁에 마다않고 좋은 글들 보내주신 여러분께 진정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미미하게나마 사람들의 가슴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이 책을 펴든 여러분과 함께 꿈꾸렵니다.

 

 

 2010년 때마침 한글날을 기리며,

다시는 ‘언문, 암클, 아햇글’ 등으로 폄하되는 일 없기를,

 ‘그랜드 바겐’을 내놓는 지도층부터 한글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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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