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1999. 5. 15. 23:30

그 이야기 셋 : 시인  기형도


 

 욕망과 망집 없는 삶 - 그것의 허위?

 

죽음과 결부시켜서는 매우 생경한 나이에, 서른 해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젊다 못해 시퍼런
시인/글쟁이가 남긴 시들을 읽게 되었었다, 실로 우연히 지난 겨울에.그것도 시집을 선물받아서,
선물에 참 맞지 않은 시집이었는데....
섬뜩한 몇 구절은 곧 가슴에 박혔다. 입술이나 뇌리가 아니라 바로 가슴 속에.    
 아아, 그래서 사람들이 시를 읽고 또 쓰는 구나!

이 봄에 책방을 기웃거리다가 그 사람의 산문집을 발견했다. 10년 가까운 세월 지나서 28쇄 째의 책을 이제서야.생각보다 -- 시구절에서 얻은 표상에 비해 -- 훨씬 훤한 젊은 얼굴, 그리고 퍼뜩 눈에 띄는 글귀가 있었다.
 

  "욕망과 망집이 없는 평정된 삶은 어쩌면 불행한 삶일 것"

 

     ■   기형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도서출판 살림, 2000년 28쇄, 26면에서

이 글귀는 사람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무망을 목표로......."라고 하는 입버릇과는 어긋나게, 빈 들 햇살에 녹아들면서도
안에서는 냉큼 녹지 못하는, 그래서 속이 굳어지는 잔설처럼 짓눌린 욕망에 평안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러나 그 시인은 시로써 말하였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것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겨울을 났고, 이제 미련없이 나며 우두둑 꺽어지는 나뭇가지들은 서럽다.  그러나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으려는 "
남루한" 나뭇가지는 추악하단다.

그는 그 "매달려있음"을 욕망이라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다.  이제 산문에서 욕망없음을 위선 쯤으로 규정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한다?
시인의 글을 시가 우선하지 않을까? 산문은 지나가는 느낌일 뿐이며.
 

 또 다른 시 한편: {우연히 시집의 좌우 페이지에 해당한다}                    


         빈 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두 시의 공통점은 "봄"이라는 시간이다.
봄의 이미지가 시작이 전혀 아닌 무엇인가의 끝을 말하는 것이 특징이다.
봄이 무서우리만치 생경한 것은 이 시인으로서는 너무 오만하다. 그것은 우리들의, 나의, 것이다.
그는 완성되기에는 너무 젊은 인격으로 마쳤다. 그러니 불균형이 당연하다고?
그렇지만 사람이 나이와 더불어 별 되는 것도 없다. 불균형은 다른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라도 헤메는 것인가?

 누군가와 끝까지 이야기하고 싶다. 논쟁이 되어도 좋고, 마침내 서로의 몰이해에 화를 버럭내며
 나가 떨어져도 좋을 것이다.     벌써 그  "....하고 싶다"가 욕망이라고 힐난하려는 사람이어도 좋다.
 누구라도 허튼 이야기를 나눌 마음만 있으면 족하리라.
 이 세상 그러나 어디에 그 소용없는 일에 밤을 지샐 위인이남아 있을 것인가!
 혹은 속으로 왼다: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3:00

그 이야기 둘 : 스스로 격리된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中에서


                             사랑은 피할 수 없는, 치유할 수 없는 병?

 ♠  인용

아니면 사랑은 어느 날 우리 몸에 저항력이 떨어지고 발작 증세가 나타나면서 갑자기 피할 수 없는
병에 걸릴 때 까지 우리 몸 속에 둥지를 틀고 조용히 머물러 있는 바이러스처럼 침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포로처럼 우리 몸 속에 갇혀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가끔 씩이긴 하지만 사랑은 스스로를 해방시켜서 바로 자기가 갇혀있는 감옥인 우리를 부수고 나올 수도 있다.
사랑이 평생 갇혀있다가 갑자기 뛰쳐나온 죄수라고 생각할 때, 왜 사랑이 자유를 맛보는 아주 드문 순간에
그렇게 날뛰고, 그렇게 은총과는 거리가 멀게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희망의 나라로 이끌었다가 뒤이어 곧
불행으로 떨어뜨리는지, 나는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의 이런 특성을 통해 우리는 사랑을 허용하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사랑이란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용

사랑의 첫 단계, 모든 사랑의 첫 단계는 진정한 감사의 시간일 것이다.  한 인간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여러 특성들이 우리 내부에 파묻혀 있거나 아직 계발되지 않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특성들은
우리가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익숙해져 있던 특성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는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러워지며, 현명해진다.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그에게
헌신하고 싶어진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베푼 그 기적을 위해 우리 삶을 바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그가 바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묻지 않는다. 바로 그가 우리를 변화시켰다. 우리는 우리 삶의 윤곽을 분명히
그린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와의 만남의 순간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은밀히 조물주라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감지하는 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인용

프란츠와의 관계된 문제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내 스스로 결정한 기억은 없다.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결정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빠져있었던
사랑의 그 완벽함으로 인해 나의 자존심이 상했을지라도 나는 오랫동안 사랑의 요구에 저항할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을 제지시키고자 한 몇 번의 나의 시도는 모두 사랑의 승리로 끝났으며, 나는 또 다시 완전히 기가 꺾였다.
그럴 때마다 사랑에게서 배운 교훈은 오로지 사랑의 계획에 따르는 것이 섭리라는 것이었다.              
                      

 인용

살아있는 동안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랑뿐........사랑은 현실의 삶 외부에만 존재할 수 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파멸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트리스탄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장애물을 설치해
나갔으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진정으로 구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뒤를 돌아본 것이라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자신의 불멸의 사랑을 죽을 때 까지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  우리의 의문 :

   ♤ 주인공은 "슬픈 동물"인가? 왜 "슬픈 동물"인가?

       사랑 이외에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복과 불행, 구원과 저주를 사랑하는 - 떠나 버린 - 사람에게
       걸고  있는 일이 가능한가? 혹은 사랑에?

    ♤ 보편적인 질문: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한가?                                                                                                                                                                        

 소설의 개관

동베를린 태생의 주인공은 고생물학 전공자로, 결혼하여 남편과 성장한 딸이 있고, 1990년 당시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에 근무 중이다. 서독출신 개미연구가 프란츠가 박물관의 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왔을 때, 둘은 사랑에 빠진다.
남편은 떠났고, 그는 어김없이 부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이다. 그에 대한 격렬한 사랑의 요구는 심한 질투로
변하고, 그의 부재 중에는 상상 속에서 그 부부의 흔적을 추적한다. 넘쳐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는 현실세계를 넘어서
주인공의 의지와 상상의 세계로 향하게 한다......
그는 어느 날 영원히 그녀를 떠났고, 그 이후에도 이러한 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몇 십년을 회상하는 그녀에게
이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회상하는 몇 십년의 시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몇 십년은 곧 현재요
미래이다.    "뭉툭한 코와 몸을 휘감는 긴 팔을 가진 갈색 털의 원숭이" 처럼 그렇게 그녀는 꼼짝 않고 누워서 그를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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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2:30

그 이야기 하나 : 아웃사이더 『 검은 양들 』

한 사회의 "검은 양"에 관한 이야기

   Heinrich Böll의 풍자적 단편 「검은 양들 Die schwarzen Schafe」은
   가족 중에 실 인생에 실패한 삼촌과 일인칭 서술자 "나"의 이야기이다.
   삼촌은 박식하고 즐거워 보이는 위인이지만 제대로 된 직업이 없이 빚만
   늘려간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검은 양"이라 하는데, "나"는
   그의 뒤를 잇는다.
   
    "나"의 길은 삼촌과는 조금 달랐다. 예를 들어 잠깐동안 어느 가구공장
    에서 일하기도 하는데, 그 곳에서는 화폐개혁 직후인 그 시기에 알맞은
    전형적인 싸구려 감상적 물건들을 생산해 낸다. (실제로 쓸모있는 물건
    들은 사장의 부재시에 노동자들이 필요에 의해 몰래 만드는 물건이다.)
    "나"는 삼촌의 사고사로 인해  - 우연히 삼촌의 장례식 날 성년이 되어 -
    그의 유산을  상속받는다. 원래 무산자였던 삼촌의 유일한 유산은
    그가 복권에 당첨되어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겨우 몇 분간 소유
    했던 것이다. "나"는 그 길로  당장에 대학을 그만두고 다른 계획들에
    종사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확실한 검은 양으로 간주하고, 그가 검은 양이기
    이전에 대부가 되었었던 어린아이와의 접촉을 경원한다. 하지만 "나"는
    가문다운 가문이기 위해서는  검은 양이 보존되어 가리라고 믿는다.


"검은 양":

전적으로는 "그의 사상, 성격, 또는 직업 등으로 인해서 다른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구성원"을 지칭한다.
사회적으로는 유능성Tüchtigkeit을 최고의 귀감으로 하는 시민사회의 전통에 따르는 대다수의 독일인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을  지칭한다.

뵐은 평소 이단적인 것, 배척된 것을 문학의 주제로 해야 한다는 전제를 말함으로써,문학적이라기 보다는 도덕적 척도를 제시했다.

통상적 척도에 의해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강하게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왜곡된 긍정성이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검은 양들 」의 표면상 주제는 적나라한 유용성에 대한 항의?

검은 양은 실제의 세계에서 우스꽝스러운 실패자를 가리키는 메타퍼인데,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이상형으로
그려져 있다.삼촌이 유용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이상형인 이유는 그의 자질에 있다. "나"가 보기에 "오토삼촌은
통달했다. 삼촌이 실로 능통하지 못한 분야가 없었다. 사회학, 문학,음악, 건축, 모든 것을."  그러나 가진 지식을 "환전
versilbern"할 수 없었고 대신 거의 15000마르크의 빚에 700명 이상의 채권자를 남기고 죽었다.작게는 차장에게
30페니히에서부터 많게는 "나"의 아버지에게 2000마르크까지 진 빚.

빚만 지고 죽은 삼촌이 어떻게 이상형인가?

여기에 소중한 의미는 바로 그 700명의 사람들에 있다. 평균 100마르크도 훨씬 못되는 돈은 재화로서의 자산이
아닌, 다만 구체적 삶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패전 직후의 절대 빈곤기를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조금 슬쩍하기'를
경험했고 또 용인되었던 삼촌 세대에게는 '작은 돈' 빌리기는 다만 이웃 정과 인간애를 의미할 뿐이다. 삼촌은
700명으로부터 최소한의 사랑을 받았다는 시각이다.

"나"에게 이러한 시각을 부여하는 작가의 논리는 단순하다.
1) 누군가에게 빵이 없으면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빵을 주어야 하고,
2) 빵을 벌었으면 더 이상 일하지 않을 것!

논리 1)
공평한 분배의 문제는 전후의 절대 빈곤기를 겨냥한다.
작가는 생각한다: "모든 새들보다 더 소중한"(마태 26: 6) 인간들은 마땅히 빵을
걱정하지 않을 상태로 살아야 한다고. 그러므로 "작은 돈" 즉 빵은 나누어야 한다.
빵을 나눌 때 사람들은 인간이 된다. 괴테의 "눈물 젖은 빵"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하인리히 뵐의 인간 역시 빵 냄새에 울 수 있는 인간이다.

논리 2)
억압된 노동에서의 해방 문제는 경제 재건기의 광적인 생산성을 겨냥한다.
"검은 양"은 바로 이 경제도약 단계에서의 소외자들을 이상화한다.

 Outsider!
      " 원래 사회학적으로 내집단 밖의 외집단에 속하는 이 국외자들은 집단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객관적 거리를 특징으로 하는 특수한 관여를 한다."

           [참조] Colin H. Wilson의 『아웃사이더』(1956)
                     아웃사이더는 인간존재의 본질에 깔려있는 속물성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윤리적 존재로 승화된다.    

다른 정상적인 동시대인의 유형, 예컨대 「Es wird etwas geschehen」의 사장에게는 "잠이란 죄악이다!".
그는 오직 "행동"을 해야 한다.이런 능력만이 중시되는 이 세상에서, 다른 계획이 있어 학문을 "당장에"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곧 검은 양이다. 물론 이것은 강단의 학문이나 교양보다는 실인생을 높이 사는 작가의 입장이다.
[하인리히 뵐은 반 부르주아적 동시에 반 인텔리적 성향을 지닌다.]

학문을 버린 "나"는 재능도 없이 작곡가가 되기로 했다가, 관상학, 정원사, 기계공, 선원, 교사, 세관원 등에 차례로
매료된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직업적인 교육의 이수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것 하나 외부적 강요에서
시도된 것이 아니므로, 그 자신은 매번 즐거울 수가 있다.  "진정한 능력들을 환전 또는 직업적으로 사용할 줄
모른다는 것"은 그에게는 선악의 피안에 존재한다. 돈 버는 능력은 인간의 조건에 속하지도 않는다. 현대 산업
사회의 필요일 뿐이다. 따라서 이 산업사회에의 적응은 검은 양의 시각에서는  "투항"이다:

      "[...] 나는 투항했다 - 나는 일자리를 청했다. [...]
      
나는 결코 희생해서는 아니될 것, 나의 자유를 희생했다!"

그러나 "나"의 공장 체험은 인간을 보는 인식을 확실하게 해준다. 많은 것에 정통하고  지적이지만 그 지식을 써먹을
줄 모르는 삼촌과, 실제로는 수다밖에 모르면서 "스스로를 진지하고 또 예술가라 간주하는, 전혀 지적이지 못한"
사장과의 대비이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사장이 극도로 무의미한 실존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능력없는 삼촌의 삶은
의미있는 실존이란 논리가 성립된다.
이 유용성에 관한 논쟁은 실로 엉뚱하게도『老子』11장을 상기시킨다:

              "진흙을 비져서 그릇을 맨든데 /
            그릇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창을 내고 문을 뚜러서 집을 짓는데 /
            집의 쓸 수 있음은 그 없는 구석이 맞아서라. / 
            므로 있는 것이 좋음 되는건 없는 것을 씀으로서라."

사회는 바로 이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포함할 때 비로소 쓸 만한 사회, 하인리히 뵐의 용어로는 "살 만한
bewohnbar"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 부적응의 주인공들은 인습에 의한 습관적 반응이 아닌 진정한 행동을 꾀한다,
비록 현실적 성공에서 더디거나 그것을 포기하더라도. 투항을 거부하거나 투항을 후회하는 부적응자들, 이들은 뵐의
후속 작품들에서 소위 검은 양의 토포스를 실현한다. 그들은 사회통념상 기인으로,공공연히 나태를 보이며 이 사회를
무시하고 내면의 자유로 만족하는 수준을 유지한다. 그들은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 그 예로서, 오토삼촌의 건강한
젖먹이 같은 잠은 더없이 행복함을 보여준다. 이들은 극단적 성격으로 비정상적, 병적, 노이로제적인 인상을 주며,
결국 절망적인 아웃사이더일 뿐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절망적이 아니라,상식적 인간의
눈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들 부적응자들에 의해서 이 사회는 시험되고 미리 불합격 처리된다.

그러므로 오히려 동시대인들의 행동은 그저 환경에의 수동적 반응, 즉 순응의 생을 살아간다. 인간의 적자생존을
장려하는  경제적 정글에서 정상궤도 진입자들은  이 정글의 법칙을 받아들인 것이며, 그러므로 결국은 투항자들이다.

[참조] 하인리히 뵐의 「검은 양들」과 47동인의 정신. 『독일문학』, 서울: 한국독어독문학회 1997, 제 64집(38-3호), 230-25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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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5. 15. 22:00

부적응의 미학   
이 페이지는 어느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을 보태려는 곳입니다. 진선미가 아니면 촌분도 할애할 시간이 없다고
확신하는 분은 서둘러 이 곳을 벗어나십시오.

   ◈  
어느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   -  하나!
 

       인문학도여, 젊은이들이여, 지금 하늘 만한 간덩이를 자랑해도   
       세월 따라 그 간이 콩알만 해지거늘, 지금 콩알 만한 간으로 적응에   
       급급한다면 나중에는 좁쌀만 한 간으로 움츠러들려는가!  

 

    ◈     그  분수없는 자의 부추김  -- 둘!!

          Franz Kafka를 빌어서: "일찍이 많이 빈둥거려 보거라!"

    Leute, die nicht bis zum 25ten Jahr wenigstens zeitweise    

    gefaulenzt haben, sind sehr zu bedauern, denn davon bin ich

    berzeugt, das verdiente Geld nimmt man nicht ins Grab mit,

    aber die verfaulenzte Zeit ja.               

    최소한 25세가 되기까지 잠시라도 빈둥빈둥 보내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참 안되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무덤 속으로 가지고 갈

    것은 벌어놓은 돈이 아니라 빈둥거린 시간,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기 때문이오.

                             ㅡ 1907년 Hedwig Weiler 에게 편지 중에서  ㅡ

※ faullenzen 빈둥거리다" :  "faul 굼뜬, 게으른"을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가

      여기에서 칭송되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미리 (행여나 단견으로) 사회에 편입되기에 바빠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외면치레의 인생에 대한 경각심이 아닌가 한다. 빈둥거려 보이는 가운데, 정말 게을러서가 아니라, 천천히 깊이 사색하는
      단계를 거치는 인생의 값진 미래에 대한 염원이 아닐까?
            동양의 지혜 중의 하나인 대기만성 ----- 큰 그릇은 더디 완성된다는 생각과 상통한다.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1998. 1. 31. 19:30
                                                       

      누구나 아름다운 순간들  못잊을 추억들을  지닌다고 하지만.......  
                                         
어제 그리고 오늘                                                              

                                                                           

 
 

                                          ▲ 전남대학교 시절
  ◀  일고 재직 시절       
      

  

  그리고 가장 먼 나들이..... E. Nolde의 그림 한폭에 끌리어 오래도록 꿈꾸었던...   
   
그러나 비바람 속에서 순간으로 끝나고 만 여행.  순간은 영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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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English1996. 12. 30. 22:57

Why read Sueskind?

 

<전남대학교 영자신문> Winter 1996, pp.26-27

   

   The works of Patrik Sueskind(1949-) have been introduced en messe in this country. What's more, they are off the shelf. In the pundits' eyes, "such a thing as a useless fiction in the world" lords it over. There is, of course, a role played by commercial skills manipulated by -- in sociologists' terms -- the post-capitalistic market economy logic. However, we can't deny it is human property that we all have in common a yearn for and fear of something 'unknown,' and that he/she can take even his/her life in his/her own hands  amid so much bread. "The sun exists not for growing cabbage"(Flaubert). Directing his remark, we know that literature exists not for anything such as an ideal human socialization. As far as keeping the fixed idea that literature should be moralistic, we can not gain anything from Sueskind's works. There is no bit of assertion at all that "literature can afford the esthetic supreme bliss"(V. Nabokov). Literature ought not to be observed from an idée fixe. With reason that the moral value we make it sure can't guarantee the absolute objectivity, arts and letters in general do justify themselves. The genuine function of literary work(arts) is to re-examine and reflect all our assertions including moral values.

   After studying history, Sueskind sets forth writings. In his first successful work Contrabass(1981), we see a contrabass player(35 years old, unmarried) speaks out his meditation about life through the contrabass as his object of affection and hatred. He determines to become an artist because of his hatred against his non-artistic father and chooses the contrabass, the biggest instrument which isn't suitable for a solo performance because of his revenge against his mother who only loves father. For him, an orchestra represents the model of the human society. The cruel class-reigning society resembles an orchestra in that players are classified depending upon their physical skills as well as the horrible class of their abilities. For him, nonetheless, music is something humanistic; a substantial element given inherently to the human soul and spirit. Far beyond the physical, phenomenal existence, beyond the rich and poor, and beyond the life and death, music exists forever. So does he try to play his contrabass perfectly. Falling in ardent love for a soprano, hardly befitting for his contrabass, he daydreams in that he cries "Sarah" in the middle of a performance one day.

   While going to his working bank and coming back to his room "where his life can be safe from the accidents-ridden outside improper for him" for 30 years, Jonathan Noel, a protagonist in The Dove(1987), faces a catastrophe only because of a stray dove. Jean-Baptiste Grenouille, another protagonist in The Perfume(1985), makes "the absolute perfume" for himself to attract others but finally turns out a murderer, as having extracted the fragrance from maidens' dying bodies. The protagonists in Sueskind tend to persue a perfection (i.e., a perfect instrumental performance, or a seducing-absolute perfume manufacture), and an absolute do-nothing state "gained from his utmost effort," when he can not help but recognize the impossibility of loving and being loved. Those protagonists in searching for a perfection come only to realize their existential deficiency in emotion. "Being outcast" means no other than the absence of human relations. Love keeps life even in the form of hallucination. Hatred can manage life, too. A utopia of reason (excluding emotion) will not come to in any future.

   In Sueskind's works, besides the issues with human relations, we can find the author's particular respect of artisanship through his persistence of descriptions in a perfect performance, best perfume manufacture and so forth. This point is much forceful in Mr. Sommer's Story(1991) and Three Stories(1995, translated with the title 'Forcing to the Depth' in Korean version). Mr. Sommer is depicted from a viewpoint of a seven-year-old boy in his autobiographic experiences. The boy wonders about Mr. Sommer, an ever eccentric person, who "constantly" scares other people. Suffering from mere "claustrophobia" in common people's eyes, Mr. Sommer tries to escape from people and death, but in fact, he looks for death and is drowned in a lake at a chilly night. The unheroic hero here is an example of the person born not to socialize properly. The readers can confirm freshly the ever conflict between artists and critics, when they read a story of a young paintress. The beautiful, talented artist finally comes to commit suicide because of her despair caused only by a critic's accidental comment on her work, saying that "shallow depth in spite of talent and emotion." Whereas those faultfinders who can neither draw nor write a line enjoy themselves in cosmetic demonstration of their junk knowledge in criticism, the artists who are exhausted in producing something or anything, are frustrated with their own too serious endeavors, as seen a death choice of the young paintress.

   With these inner manifestations, Sueskind may justify his secluded life somewhere in southern France, refusing any prize and proposal for public mass communications. For common people who surrender to the daily conventions and come back home late evening from all day long work, the author may let them get angry and be aware that a day is being passed away with nothing but fatigue, anger and a bit of wage. Writers like Sueskind touch our heart that is whether still regularly pumping blood or getting hardened like "shell fossilization" (Three Stories) by everyday burden, a Sisyphusean stone. Even if our one-dimensional, standardized heart functions normally today, it anew starts unpredictably tomorrow.


Patrik Sueskind(1949)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대거 소개되었다. 게다가 잘 팔리기도 한다. 사회학이나 그런 거창한 학문을 하는 식자들의 눈에는 “세상에 쓸모없는 소설 류”가 판을 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업적 수완 - 사회학자들의 용어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논리에 조작되어 - 이 큰 몫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낯선 것에 대한 겁과 동경을 공유한, 빵이 넘쳐도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인간의 속성이 맞물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양은 양배추의 생육을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플로베르). 그 형식을 빌어 말하자면, 문학은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를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문학은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어떤 개별적 민족의 애국심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박이문) 문학은 그냥 거기에 있다.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혹은 글을 읽지 않을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의 한 부분으로서.   


만일 ‘문학이 사회를 위해서 혹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고정관념에서  Sueskind 와 그의 작품들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심지어 ‘문학은 미적 지복을 주는 것’(V. Nabokov)이라는 주장도 들어있지 않다. 문학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보아서도 안된다. 우리가 확신하는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예술일반, 여기에서는 문학의 필요성이 생긴다. 문학(예술)의 본래의 기능은 도덕적 가치를 포함한 우리의 온갖 확신들을 재검토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학도의 첫 성공작 <콘트라베이스 Kontrabaß>(1981)는 작품성보다는 정교한 무대효과로 성공한 작품이다. 이 단촐한 일인극은 중년( 이 말은 이미 어중간한 개념이므로 35세를 밝히자)의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애증의 대상으로서의 콘트라베이스를 통한 자신의 생에 대한 묵상을 관객에게 토로하는 극이다. 비예술적 공무원 아버지, 예술에 빠진 허약한 어머니, 그는 어릴적 어머니를 우상처럼 사랑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는 그의 작은 누이들을 사랑하고,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은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예술가가 되기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손으로 다를 수 없고, 독주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악기 콘트라베이르를 선택한다. 그리고 어머니를 병들게 하고 아버지를 무덤에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가게 하려고 공무원( 국립오페라단 주자)이 된다. 그에게 콘트라베이스는 여성적인 악기이자, 죽음처럼 아주 심각한 악기이기도 하다. 그에게 “죽음은 그 숨겨진 잔인성에서 혹은 죽음이 지닌 불가피한 자궁기능에 있어서 여성적이다.”  자신의 악기인 콘트라베이스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열정으로 밤이면 망상에 빠지는 그는 어느 날엔가 공연 도중 “Sarah”를 외치는 백일몽을 꾼다.


오케스트라란 그에게는 인간사회 자체의 모형이다. 잔인한 계급능력이 지배하는 사회(= 오케스트라), 물리적인 계급과 재능이라는 가공할 계급으로 존재하는 오케스트라. 그렇지만 그에게 음악이란 뭔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음악은 순전히 현상적인 물리적인 존재의 피안에, 역사와 빈부의 피안에, 생사의 피안에 존재하므로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콘트라베이스를 완벽에 달하도록 연주하고자 한다.


1738년 시체썩는 냄새에 버금가는 생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생선좌판대 아래, 한 젊은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다. 어머니의 예상외로 버려둔 쓰레기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내아이는 어머니를 영아살인죄로 참수형 당하게 하면서 그의 일생을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향수 Das Parfum>(1985)는 부제처럼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Jean-Baptist-Grenouille는 추한 외모와 강인한 생명력과 독특한 특성으로 자라난다. 수천가지 향기를 멀리에서고 구별할 수 있고, 심지어 기억 속에 저장한다. 그는 자신의 소외적 현실을 보상하기 위해 “절대적 향기”를 민들어내고자 한다, 이 향기를 지닌 그를 사람들이 무조건 사랑하게 될 향수를. 이 마법의 향기의 에센스를 그는 갓 죽은 젊은 여인들이 발산하는 마지막 향기에서 구한다, 즉 그는 엽기적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 향기로서 교수대의 위기를 빠져나오게 됨으로써 그의 발명의 위대함을 만끽하지만, 그것은 카니발의 비밀제(Orgie)에서처럼 아비규환으로 끝난다: “그들은 천사에게로 달려들어 그를 덮쳐 바닥에 쓰러뜨렸다. 누구나 그를 만지고 싶어했고, 그의 일부분이라도 갖고 싶어 했다. 작은 깃털하나, 날개 한 조각, 그의 놀라운 불꽃의 불티 하나라도 가지려고 다투었다. 그들은 그의 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피부를 잡아 떼었으며, 그의 육체를 물어뜯었다. 손톱과 이빨을 세우고 그들은 하이에나처럼 그의 육체에 달려들었다. 삽시간에 천사는 서른 조각으로 찢겨졌으며, 그 패거리들은 모두 그걸 하나씩 움켜쥐고 음탕한 욕망에 이끌려 뒤로 물러앉아 먹기 시작했다. 반 시간 쯤 지나자 Jean-Baptist-Grenouille 는 살점하나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의 옷을 입고 (18세기 프랑스의 문화사적 정신사적 조류들을 파로나마), 사회의 Parabel이자, 시민사회의 발전소설 기법으로(추한 주인공의 천재성과 혐오감 사이의 긴장을 예리하게 묘사), 또한 후반부는 현대의 Krimi-Suspense의 기법으로, 이런 요소들은 문학적 mixtum compositum 으로서 비평계의 관심을 차지했다. 주인공들은 장인정신에 투철하다. 콘트라베이스 주자처럼 향수제조인 또한 직업윤리에 매우 정직하다, 비록 그것이 살인에 이른다 하더라도. 시대의 진정한 향료(Aroma)로서의  분뇨, 땀, 피, 부패의 불협화음은 향수제조인의 화장품 기술과 극단의 대비를 이룬다.


상대적으로 간소한 <비둘기 Die Taube> (1987) 역시 어느 Outsider의 이야기이다. 은행의 수위 Jonathan Noel은 “삶의 마땅치 않은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과 은행만을 오간다. 무서운 어린 시절, 사라진 (사실은 유태인이기에 집에서 잡혀간) 부모들, 도피와 성장, 아내의 불륜 등의 사건들이 Trauma가 되었기에 사건들을 기피했고, 파리에서의 30년간 그에게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질서를 광적으로 고수하는 그의 생은 단 한 마리 길잃은 비둘기로 인해 파국 Katastrophe을 맡는다. 오로지 그가 바라는 “단조로운 안정감의 상태”를 잃은 그는 싸구려 호텔을 찾아가 자살자의 고독한 마지막 성찬을 든다. 밤새 악몽에 시달리며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외친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빗소리라는 응답을 받고 돌연 공포가 사리진다. 그는 자유를 향해 걸어나간다. 다시 돌아간 그의 집에는 비둘기의 흔적도 없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만 어쩌면 그가 때로는 질투와 혐오의 심정으로 바라보던 벤치위의 거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한 번도 골치아픈 표정을 짓지 않고, 무슨 고통을 받고있나거가, 두려워한다든가, 지겨워하는 구석도 전혀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살이의 태평스러움에 대한 노여운 질투심이다. 우리 또한 그런 일종의 부러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주인공들은 사랑을 구하지 못할 때 또 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확신할 때 완벽추구(악기의 완벽한 연주, 유혹적-절대적 향수 제조, “지독히 애써 얻은” 절대적 無爲의 상태)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 주인공의 극단적 완벽추구는 실존적 결손감정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실팍하지 못한 삶, 사랑할 수 없음, 내팽겨쳐진 존재. 내팽겨진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수 없다”는 내면의 표출만으로도 우리의 Noel 씨는 스스로를 구한다. 사랑은 착각의 형태로서일지라도 생을 지켜준다. 미움의 감정 또한 생을 지켜줄 수 있다. 감정를 배제한 이성의 역사는 어느 미래에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 <좀머Sommer씨 이야기>(1991)는 7세 소년의 시작으로 에피소드적인 경험들은 자전적으로 묘사하며,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Starnberger See를 무대로 한다. 소년이 만난 영원한 기인 Sommer씨, 그에게는 인형제조로 살림을 꾸려가는 아내가 있지만, 그는 사람들을 겁내고 “끊임없이” 길을 떠돈다. 어른들은 소년에게 그가 <불안정증 (Klaustrophobie)>을 앓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 명확한 개념제시로 앞서의 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평생을 죽음을 피해 도망다녔지만, 기실은 죽음을 찾아다녔고 실제로 찾는다: 어느 시월 밤, 그는 “마치 커다랗고 환한 거울같은” 차가운 호수속으로 걸어들어가버린다.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소년은 구원 요청 대신 점점 작은 점으로 사라지는 Sommer씨를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그것은 ‘그가 호수를 -  어디나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므로 -  걸어서 건너려는 것이구나’ 하는 어린이다운 인지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가 항상 사람들에게 “제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라고 애원하던 것에 대한 회상때문이었다. 


이어 단편집 <세 이야기>(1995)는 우리나라에는 그중 한 작품인 <깊이에의 강요로> 번역되었다.“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이 숙명적 비평 한마디가 젊고 재능있는 화가를 회의와 절망 그리고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영원한 갈등 관계 -  한 획의 그림도 한 줄의 글도 쓸줄 모르는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비평으로 일갈하는 동안 생산의 고투에 녹초가 된 예술가들은 그 진지성 때문에 좌절하거나 투항한다: 투항은 비평가의 취향에 추파를 던지거나 아예 예술을 포기하고 일 자리 하나를 구하는 짓이다. 좌절은 죽음에 이르는 절망을 의미한다. 쉬스킨트는 이로써 언론대중을 위한 인터뷰나 심지어는 모든 수상을 거부한 채 남불 등지에 은거한 자신의 은둔자적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저녁이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로 하여금 “내 인생에서 또 하루가 그저 사라졌구나, 권태와 분노와 돈, 내일 또 일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져다 준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라고 화를 내도록 부추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 Version

Patrik Sueskind가 읽히는 현상

Patrik Sueskind(1949)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대거 소개되었다. 게다가 잘 팔리기도 한다. 사회학이나 그런 거창한 학문을 하는 식자들의 눈에는 “세상에 쓸모없는 소설 류”가 판을 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상업적 수완이 큰 몫을 할 수도 있지만, 또한 낯선 것에 대한 겁과 동경을 공유한, 빵이 넘쳐도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인간의 속성이 맞물려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양은 양배추의 생육을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플로베르). 그 형식을 빌어 말하자면, 문학은 그 어떤 무엇을 의해서, 예를 들어 인간의 바람직한 사회화를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만일 문학에 사명감을 부여하는 고정관념에서 Sueskind의 작품들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다. 심지어 ‘문학은 미적 지복을 주는 것’(V. Nabokov)이라는 주장도 들어있지 않다. 문학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보아서도 안된다. 우리가 확신하는 도덕적 가치가 절대적 객관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예술일반, 여기에서는 문학의 필요성이 생긴다. 문학(예술)의 본래의 기능은 - 기능이 있다면 -  도덕적 가치를 포함한 우리의 온갖 확신들을 재검토 반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역사학도의 첫 성공작 콘트라베이스 Kontrabaß(1981)는 작품성보다는 정교한 무대효과로 성공한 작품이다. 일인극의 콘트라베이스 주자(35세, 미혼)는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자랐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예술가가 되기로,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에서 가장 거대하고, 독주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선택했다. 오케스트라란 그에게는 잔인한 계급능력이 지배하는 사회, 물리적인 계급과 재능이라는 가공할 계급으로 존재하는 사회 그 자체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음악이란 뭔가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음악은 순전히 현상적인 물리적인 존재의 피안에, 역사와 빈부의 피안에, 생사의 피안에 존재하므로 영원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콘트라베이스를 완벽에 달하도록 연주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악기인 콘트라베이스에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한 소프라노 가수에 대한 열정으로 밤이면 망상에 빠지는 그는 어느 날엔가 공연 도중 “Sarah”를 외치는 백일몽을 꾼다.


30년간  “삶의 마땅치 않은 불상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과 은행만을 오가다 단 한 마리 길잃은 비둘기의 침입으로 인해 파국 Katastrophe을 맡지만, “다른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라는 침묵 속의 외침으로 자신을 구하는 Jonathan Noel(비둘기 Die Taube, 1987), 다른 사람의 사랑을 구하기 위한 “절대적 향수”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엽기적 연쇄살인자가 되는 Jean-Baptist-Grenouille(향수 Das Parfum, 1985). Sueskind의 주인공들은 사랑을 구하지 못할 때 또 이 사랑의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완벽추구(악기의 완벽한 연주, 유혹적-절대적 향수 제조, “지독히 애써 얻은” 절대적 無爲의 상태)의 경향을 나타낸다. 이들 주인공의 극단적 완벽추구는 실존적 결손감정을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내팽겨진 존재’는 다름 아닌 인간관계의 부재를 뜻한다. 사랑은 착각의 형태로서일지라도 생을 지켜준다. 미움의 감정 또한 생을 지켜줄 수 있다. 감정를 배제한 이성의 유토피아는 어느 미래에도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에는 ‘내팽겨진 존재’의 사랑에 대한 거부-집착 등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 이외에도 장인기질에 대한 존중이 엿보인다. 완벽한 연주, 최고의 향수 제조에의 집착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는 7세 소년의 시각으로 자전적 경험들을 묘사한 좀머 Sommer씨 이야기(1991)나 우리나라에 깊이에의 강요로 번역된 단편집 세 이야기들(1995)에서 더욱 강한 목소리를 낸다. 소년이 만난 영원한 기인 Sommer씨, 그는 사람들을 겁내고 “끊임없이” 길을 떠돈다. 보통 어른 들의 눈에는 “불안정증 (Klaustrophobie)”을 앓고 있을 뿐인 그는 평생을 사람들과 죽음을 피해 도망다녔지만 기실은 죽음을 찾아다녔고, 실제로 어느 시월 밤 차가운 호수속으로 걸어들어가 버린다. 그는 사회화를 위해 태어나지 않은 인간의 본보기이다. 또는 ‘재능과 감동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부족하다’는 숙명적 비평 한 마디가 젊고 재능있는 화가를, 예쁜 여자를, 회의와 절망 그리고 마침내 자살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술가와 비평가 사이의 영원한 갈등 관계를 재삼 확인하게 된다. 한 획의 그림도 한 줄의 글도 쓸줄 모르는 비평가들이 오직 지식취향에 따른 비평언어로 목청을 돋구는 동안, 생산의 고투에 녹초가 된 예술가들은 그 진지성 때문에 좌절하거나 - 여주인공 처럼 죽음을 택할 수도 있는 - 또는 투항하리라는 것이다. 투항은 비평가의 취향에 추파를 던지거나 아예 예술을 포기하고 일 자리 하나를 구하는 짓이다.


Sueskind는 이로써 대중매체를 위한 인터뷰나 심지어는 모든 수상을 거부한 채 남불 등지에 은거한 자신의 은둔자적 생활을 정당화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저녁이면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 투항자로 하여금 “내 인생에서 또 하루가 그저 사라졌구나, 권태와 분노와 약간의 돈을 가져다 준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닌 하루가.” 라고 화를 내도록 부추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Sueskind 같은 작가들은 우리들의 심장을 아직 살아있는지 건드려본다, 겨우 규칙적으로 피를 뿜어내거나 일상의 무게(시지프스의 돌)에 짓눌려 점점 “조개들의 화석”처럼 굳어가는 심장을. 그리고 매우 표준화된 일차원적인 우리들의 심장이라해도 일단 다시 뛰기 시작하면 그것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4. 2. 23. 00:00

도서출판 삼문 1994.2.1



어떤 사람들이 마약중독 또는 일중독에 걸리듯이 빵중독에 걸린 소년의 체험에서 비롯된 젊은이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원제는 하인리히 뵐의 1955년 작

 "지난 시절의 빵 (Das Brot  der frühen Jahre)", 


구체적으로는 2차대전  종전 후 기아와 궁핍의 시절의 빵을 가리킨다. 빵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성사적 의미와 더불어, 이 작품에서는 인간성의 척도가  된다. 궁핍의 시절,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 준 빵과 그렇지 않고 부의 축적을 위해서 모아둔 빵의 의미는 그렇지 않아도 흑백논리를 비판 받는 작가의 눈에는 선악의 기준이 된다.


이야기는 어느 월요일 아침, "담요를 머리 위까지 푹 끌어 덮고만 싶었던" 주인공 젊은이가  집에서 속달편지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홀로 도시로 나와 살게 된 일곱 해 동안에" 어머니의 사망통지, 아버지가 다리 부 러진 사고 때나 받던 속달편지에 놀란  주인공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약간은 성가신 부탁을 발견한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마중을 나가거라!"

이렇게 역으로 마중을 나가게 된 그가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자동세탁기의 수선과 정비를 담당하고 있는, 손에 적당한 일 값을 지닌, 나름대로 장래가 순탄한 젊은이. 1955년 현재 수입과 자동차를 가진 기술직 젊은이가 되기까지 ㅡ 그는 배고픈 숱한 기억들을 가지고 자랐다. 가장 끔찍한 기억은 고교 교사인 아버지의 고결성을 담보로 담임인 빵집 아들을 핑계로 빵집 가게에 "우연인 척" 들리자고 졸랐던 일이었다. 아들의 낙제점수에 빵집 주인이 화를 내고서 문을 닫아 버리기 전까지, 아버지는 배고픈 아들을 위해서 그 일을 감수했었다.   그리고는 무작위로 아버지의 책들을 내다가 빵과 바꾸는 아들을 위해서 책들을  "직접" 골라준 아버지 ---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아들의 "빵중독"은 가라 앉지 않았다. 그것은 배고픔 자체보다는 중독성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제 막 다 잡은 행운들을 물리치고, 게다가 그는 사장의 딸과 공공연한 약혼
 사이었다. 겨우 탄 이 "순탄한"  인생이라는 기차---  그러던 그가 갑자기, 어느 월요일, 헤트비히를 만난 순간  하차를 결심한다. 왜? 어디로? 

 "나는 내가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후퇴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느 방향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무튼 후퇴하고자 했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다.


   후퇴: 한 소녀와의 예기치 못했던 사랑의 격정은 지금가지 주인공이 무의식적으로 매어있던

            가치들의 무의미성을 일순간 인식케 한다. 복고적 자본주의와 패덕의 윤리라는 현실로

            부터 하차를 감행한 그의 새로운 인생은 기존문화에 대한 퇴행적 반대기투와 더불어

            제시된다. 그가 어디로 향하는가?

            이것이 작가 하인리히 뵐, 주인공과 함께 우리가 언젠가는 생각해야 할 하나의 명제로

            남는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1. 5. 15. 23:30

Der Mauerspringer 
<장벽을 넘는 사람> -
페터 슈나이더Peter Schneider(1940~  ) 원작,
들불 1991


                        

는 문학의 사망이 공공연히 고지되었던 1968년, 베를린 대학 연좌데모에서 유창한

    연설로 주동자의 한 사람이었다. 슈나이더는 문학사에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저

    유명한 연설로서 등장했던 것이다.  그 한 토막:
 
 

 
 
우리는 잘못을 저질러 왔습니다. […]우리는 순응했지요. 적응력이 있었구말구요.
 그리고 우리는 과격하지를  못했습니다. […] 우리는 대학인이라는 특권을 누려왔습
 니다.  […]  학업을 시작했고, 필수과목 강좌에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 ]  



   이 연설에서 그가 속죄하는 것은 대학인이라는 현존 자체였다. 시간소모에 불과했던 세미나, 복종을

  강요당했던 시험 공부들이 비판되었다. 그의 눈에는 거리에는 사람간의 진정한 왕래도, 의견교환도

  없고, 집에는 사람들 대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가구들이 버티고 산다. TV는 이 가구들이 진실하다고

  외쳐대기 위해서 존재한다. 기존의 예술은 무용지물이다. 상상력의 천재들이 그들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기존의 예술, 또는 작가의 상상력과 꿈들이 자존에 의해 잠식 당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그 참상을 그리는 데 그친 사실주의자들, 그 어느 것도 "인간적 소망을 자본주의로부터 보호하려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보쉬공장의 보조노동자로 일했다.


  이 경험은 세계적 대기업의 작업환경의 의외적인 열악성, 콘베이어 벨트의 리듬에 종속되는 인간의

  문제, 도급수당제의 살인적 노동력 착취의 관행 등에 대한 폭로적 글들을 쓰게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체류가 준 경험 --- 독일 운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 대한 인식 등이 반영된 작품

 
『렌츠 Lenz』(1973)로서 문단에 복귀했다. 이어서 『자칫하면 빨갱이』로 번역된 .....

   schon bist du 
ein Verfassungsfeind (1975)등의 작품을 썼다.

  그리고 이 […]
『장벽을 넘는 사람 』에서는 "머리 속의 장벽"을 경고했다.

 

          장벽을 넘는 사람  Der Mauerspringer             

   이 작품은 그가 문학으로 복귀한지 10년이 흐른 1983년 작이다.
 
   베를린 장벽을 적법하게 통과하면서 동쪽의 친구를 가진 주인공 과 그 동쪽  친구가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장벽에 얽힌" 이야기들을 뼈대로 하고 있다.  "샴의 쌍둥이" 도시

   베를린에서는, 우리에게는 놀랍게도 적법한 절차의 통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1970년대 브란트수상의 동방정책에 의한

   <독독기본
협정> 이후  다시 적법한 통행의 길이 열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상적인

   통로를 두고서도 "장벽을 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질문은 남겨두는 것이

  쫗을 것이다.  소설 읽기의 재미를 미리 빼앗지 않고  싶지는 않으니까.

  족:                                                                                                                     
         필자가 1992년 베를린 도착 이튿날 방문한 곳은 바로 이미 무너진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의 잔훼였다. 장벽에 남아있는 그림들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물론 
『장벽을 넘는 사람 』의 표지를 그린 그림이었다. ( 아래 사진 참조!)
         그리고 물론 그 일부는 사진으로 구할
수 있었다.

        
우리 독문과 과실에 걸어둔 그 중 하나의
        사진은 담장을 헐어내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글귀를 담고 있다:

          
    ~~ 아직도 허물어내야 할 벽들이 많이 있다.
                     Es gibt noch viele Mauern, abzubauen. ~~


▲ 1992년 가을 필자 촬영. 베를린 장벽 잔훼에 남아있는그림들은 분단 당시의 염원들을 보여주고 있다.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9. 5. 20. 14:54


한신문화사 1989. 5.20.


전후 독일문학 세계문단에 끌어올린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자 전후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1917-1985)의 방대한 작품들을 총체적으로  섭렵한 입문서. 아직은 학문의 깊이보다는 넓이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생들에게  안내서가 되기를 바라며, 그 차례를 소개합니다
.

  1. 개괄 및 연구방향
 
  2. 앙가즈망
 
     1) 시간적 현재성           2) 공간적 연대감

  3. 인도주의 미학  
     1) 언어의 도덕성           2) 인간의 존엄성           3) 문학의 자유와 한계

  4. 전쟁과 개인
     1) 전쟁의 무의미    
                  전후 단편들/ 『기차는 정확했다』/ 『아담아, 네 어디 있었더냐?』
     2) 평등의 허위
                  50년대 풍자적 단편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빵』
     3) 과거의 부담  
                 『돌보는 이 없는 집』/ 『아홉시 반의 당구』

  5. 현실과 이상사회
     1) 사회로부터의 탈영    
                 『어릿광대의 견해』/『부대 이탈』/ 『마지막 군복무』
     2) 이상사회의 싹  
                 『문둥병』 /『여인과 군상』
    
     3) 어떤 사회주의  
                 『카타리나 블룸의 실추된 명예』/ 『국민의 성향 보고』/
                『보호라는 이름의 포위』/  『강풍경을 마주한 여인들』

  6. 요약과 정리       
       각주
       참고 문헌  
       연보

 

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86. 9. 5. 23:30

              문 둥 병 ................

    


   
이 작품은 하인리히 뵐에게는 매우 예외적 장르인 극본 <Aussatz>로서,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던 독문과의  축제인 독문학제(1996)에 번역극으로서
   공연하기 위해서 급히 번역되었다.  1986.9.5. 전남대학교출판부

   
                        
 얼마나 급했던지 등장인물의  이름 중 Gerta를 Greta로 보고서
                         잘못 번역하기까지 했다. (가끔은 그 이름이 시사적 이름(telling name)
                         으로서 등장인물의 성격 등을 암시하지만, 다행이도 이 경우는 그것을
                         면했기에, 부끄러운 가운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위안한다.)  


  
 하인리히 뵐은 방송극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나타냈지만, 첫 극본
 
  『 한 줌의 흙  Ein Stueck Erde 』(1961)은 초연에 실패했고, 이 두 번째

   극본인 이 작품은 그러나 아헨의  무대에서는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문둥병은 누구나 알 듯이 천형의 벌이라 간주되는 격리치료의 질병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실제로 문둥병에 감염된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회로부터의

  격리가 필요한 인물을 위해서  사회가 빙자한 질병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어떤 인물

  이라서 격리가 필요한가? 성직자의 독신 계율을 구체적 소재로 다루는 이 작품은 사실

  평신도에게도 의무로 되어있는 정절의 덕행마저 이미 기만적인 현상에 처해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혼인에 관한 "추상적 질서원칙"( 63년 작 『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Ansichten eines

  Clowns 』참조!)에 대한 기만적 복종은 대기업주 부르의 <민주적> 작태에서 드러난다.

  아내에게 아내의 자유를 준 남편!  매우 민주적으로 들리는 이러한 선행(?)은 그러나

  그의 성공적 사회생활을 위한 조건에 불과하다. 사회적 명성을 위해서 그는 자산도 젊고

  아름다운 아내도 필요한 것이고, 또 가톨릭 신자로서의 평판을 위해서sms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임을 과시해야 하는 것이다. 성직자이나 APO의 동조자인

  젊은 쿰페르트신부가 외치는 장면이다:
 
 
 
              
저는 다만 성직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성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내연의 관계나
              동성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성직자들은 독신 생활의 의무뿐만이
              아니라 순결의 의무도 지고 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들 또한 이미 결혼 한
              사람들까지도  […] 순결을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은 우리가 정말이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죄 지은 자에게는
              너그럽고, 죄악 자체에만 혹독하지요
  
  심지어 "신앙을 버리거나 여자를 보더라도 눈감아 줄" 여생의 성직 대신 "특권을 부여

  받고서 특권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는 일, 그것만은 하지 않겠다"고 뛰쳐나가는

  젊은 신부, 그리고 "포도주를 즐기고, 신학서보다는 소설 읽기를 즐기는, 그것도 최근의

  초현대적 소설을, 또 음악을 즐기며, 여전히 아름다운  여인들의 자태에서 기쁨을 느낀다"

  고 고백하면서도,  감히 "부랑자 신세"를 택하지 못하고 조금 타협하고 신학 안에 남아있

  겠다는 매우 인간적인 면모의  노 신부. 작가는 어느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은 검역소에 억류된다. 젊은 신부의 자살이 '신원미상의

  문둥병자 사망'으로 둔갑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낌새>를 알아챈 형사 -- 그는

  시체에 접근했었으므로 잠정적 감염자로  분리된다 --, 죽은 신부의 <동쪽> 친구 --

  그는 신부의 동구행 잠적이라는 시나리오에 어울리도록 함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의 연인이자 대 부호의 아내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그 여자,

  그리고 문제의 핵심을 알고 뛰쳐나온 주인공 쿰페르트신부 등이다. 이 특이한  문둥병

  아닌 문둥병의 치료 또는 해결은 여기서는 비밀로 남겨둔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