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2000. 12. 20.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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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OOO" wrote:


   안녕하세요. 법학계열 OOO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교수님께서
   물어보셨던 위반과 위법에 대해 알려 드리려고요. 먼저 위반은 어떠한
   기준에 어긋난 행위를 말하는데 그 기준이 법, 도덕, 관습등 인간이
   만든 규범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법은 좀 복잡해요. 법이
   들어가면 단순히 법을 어기는 것을 위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5가지로
   구별이 되는데 악법,불법,비법,위법,탈법 등이 그것입니다. 악법은 법
   자체가 잘못되어서 법적인 성격과 권위를 가지지 못하여 그 법이 존재
   하는 자체가 불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불법은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법이 아니지만 법적이지 못하는 행위와 결과를 뜻합니다.
   즉 불법은 단순히 법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법은
   이것도 문자그대로는 법이 아닌 것이지만 불법과 차이점은 비법은 법이
   존재해서 그 법에 거슬리는 잘못된 행위와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궁금해 하시던 위법은 어떤 법이 존재를 하는 것을 전제로
   그 법에 위반되는 행위와 결과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탈법은 위법과
   거의 같지만 위법은 단순히 어떠한 법인데 비해 탈법은 정당한 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묘히 빠져
   나가 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설명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위 내용은 서울대학교 최종고
   교수가 정의를 한 것을 제가 해석을 한 것입니다. 혹시 제가 해석을
   해서 제대로 된 것인가 의심을 하시겠지만 이 수업에서 제가 에이
   플러스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할 수 있어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12.20.
"OOO" wrote:


    
안녕하세요. 저 법학계열 OOO입니다. 날씨도 추운데 건강하시지요. 한 학기
   동안 잘 가르쳐 주신데 감사 편지를 드립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드릴려고요. 교수님께서 지난번 독일 문화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는데 이번에
   독일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전공수업시간에 배워서 전해 드릴려고요.
   독일에서는  1층을 땅층이라고 하고 2층부터 1층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 일본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배하던 시절에 땅과 건물에
   대한 소유의개념이 발생을 했습니다. 즉 땅은 왕의 것이고 건물은 일반 시민의
   것으로 땅과 건물의 소유자가 다르기 때문에 건물의 층 수를 셀 때 맨 아래부터
   1, 2 층으로 세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제시대 때 들어와서 우리나라도 맨
   아래부터 1층, 2층 이렇게 하는데 독일이나 우리나라나 전통적으로 땅과 건물이
   하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현대까지 내려오게 되었고
   현대에 기술이 발달하게 되어 고층건물이 만들어 지니까 땅에 접해있는 맨
   아랫층은 땅과 같아서 땅층이라고 하고 그 윗층부터 1층, 2층이라고 하게
   되었습니 다.  교수님 독일어 수업 한 학기동안 재미있게 들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교수님 수업을 듣고 싶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 이 메일을 보면 알겠지만, 내용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간단하지만 지식을
    공유하려는 정신이다. 기초독일어를 수강하는 법학계열 학생으로서,
    자신의 전공 지식을 을 나눈다는 정신은 유익함을 넘어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됩니다.
==========================================================

    그 밖에도 진솔한 생각들을 전해준 편지들이 많았지만, Best-mail 을 소개하려면
    한 사람을 선정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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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9. 21. 23:30
2000년 9월 21일 목요일, 흐림.
 


 
 부산한 일과:

 
 알람을 해 놓았지만, 7시 일어나기는 무리였든지 다시 잠들어 허둥지둥.
  강의 시간 10분 전에야 연구실에 도착했는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항상 있어야 하는 그곳에 열쇠가 없었다. 큰 작은 가방을 털어 보아도 없었다.
  과실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고 - 3170 무응답 - 다시 아래 층 수위실에 가서
  열쇠를 얻어오기는 숨이 이미 막힌 상태. 다행히 대학원실에 올라오던 윤재를
  만나서 절그렁 거리는 열쇠꾸러미가 올라왔다. 그건 곧 반환해야 하는 비상 키.
  
  1교시 끝나고 과실에 들러서 과실용 전체 키에서 326방 열쇠를 빌렸다. 하루 쓰기.
  불안한 마음에 집에 전화를 해서 열쇠의 행방을 탐지하려다 발견 한 일!
  어제 우체국과 외환은행에 갔어야 했는데, 그만 외환은행에서 독일에 보낼 책값
  수표를 만들었는데 오리무중, 기억이 안나는 것. 집에다는 열쇠와 봉투? 찾는
  숙제를 남겨 놓고. 문제는 문제였다. 사실 어제도 우체국에 핸드폰 두고 왔던 것을
  외환은행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다시 우체국으로 지하도를 건너야 했지 않았는가.
  우체국에는 핸드폰 두고 오고, 외환은행 수표는 오리무중. 또 열쇠.......
  이 심란한 일상을 어찌 견디나. 그래도 3교시 수업, 그리고 5교시 수업.
 
  말썽났던 컴퓨터를 하나 새로 조립해서 집에 두고, 집의 컴퓨터를 몸체만 가져왔는데,
  수업 후 성호가 연구실로 옮겼고 - 3교시 때 옮기자고 차에 갔을 때는 차열쇠를 연구실
  책상에 놓고 온 상태였었다 -, 뭔가를 확인하다가 시간은 7시를 지나고 있었다.
  모처럼 찾은 00학번 홍모도 길게 이야기할 틈이 없어서 그냥 보낸 것이 참 서운했다.
  행운목을 들고 함께 온 경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끝나고 집에 다시 갔다가 온
  모양이었는데...
  아차! 빌린 열쇠를 돌려줄 시간이 지나버렸구나! 3170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임시로 열쇠 두 개를 묶은 까만 철끈은 내 손가락에서 빙빙 돌고 있었다. 어쩐다지?
  방법은 일단 가방을 챙겨서 집에 갈 차비를 하고 나간 뒤, 복도 어딘가 불켜진 방을
  찾아서 맡기면 되겠구나!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난데 없는 노크소리는
  반갑지 않겠지만 다른 방법이...

  문제는 다시 생겼다. 가방을 들고 나서려는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 열쇠. 방문을 열고,
  그렇다고 더 밝아질 것도 아닌데, 아무리 해도 열쇠는 없고, 집에는 이미 곧 출발한다는
  전화를 해버렸으니 차 걱정할 사람은 또 어쩌고... 혼란한 머리로는 어쩔 수가 없어서
  일단 복도로 나가는데 000교수의 등이 보였다. 방문 앞을 지나가던 참. SOS에 들어온
  그도 열쇠를 찾지 못했다. 다시 한번 가방을 쏟아보고... 사실 내게 필요한 것은 알리비.
  누군가와 함께 생각하고 그냥 문을 닫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무슨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 요새 뭐 생각에 빠진 일이라도... 뭐 그런 말로 의아해하며, 아무튼
  열쇠 문제 해결을 살짝 미루어 버리고 내려올 수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친절한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이 허둥지둥한 환경에서 어서 도망치고 싶었다. 가능하면
  누구에게라도 작은 일이라도 의존하고 싶지 않은데...

  실수는 오늘만해도 또 있었다. 수업시간 중 핸드폰이 울리면 벌금내기로 한 것이 지난
  시간. 오늘 들어가면서 핸드폰을 책상에 놓아두고 가려다가, 예컨대 또 과실에라도
  전화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싶어서 꾹꾹 눌러서 전원을 껐다. 자꾸 무슨 글자가 나오길래
  아차 <통화>를 눌렀구나 싶어서 재차 꾹꾹 눌러서 껐었다. 그런데 그만 커다랗고 우렁차게
  폰이 울린 것이다. 기운차게 꾹꾹 눌렀어도 계속 <통화>를 눌러서 켜둔 것이라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희안한 것은 이런 머리로도 수업 시간 중에는 나름대로 살아나는 것 -
  오늘은 수퍼우먼 코드가 나오자 조금 흥분하여 무심코 앞 책상 위로 올라가 앉기도 하는
  정열은 어디에서 나왔을지. 교실을 나오면 <tot müde> -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 가라
  앉을만큼 피곤하다. 다음 순간을 예상하기 어렵다. 건물을 빠져 나오기 전에 벌써 어딘가
  벽 속으로 스며들고 말 것 같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큰 소리다.

  요즈음 빠져있는 노래 - <헤어진 다음 날>을 들으면서 차를 조심조심 운전했다. 더 이상
  실수는 말아야지. 돌아온 시간은 8시가 다 되었다. 아침 8시가 조금 넘어서 나선 하루이니
  열 두 시간이 거의 되었다. 그 열 두 시간 내내 쉰 것은 몇 분인가. 일 아니고서는 얼굴 본
  사람도 전화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하나 없다. 열 두 시간을 일로서 보낸 것이다.
  8시면 이미 저녁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손발만 씻고서 저녁 상을 차렸다.
  아무리 다 준비해 둔 것이라지만, 상 차리기 만으로도 지쳤다. 샤워를 했어야 하는데,
  함께 식탁에 앉기를 원하는 아빠 - 우리 집에서는 "아빠"와 "엄마"가 고유명사이다 - 의
  속을 알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세수만 하고 와서 앉았다. 아무래도 목이 열리지 않으니
  와인을 한잔 물 컵으로 따랐다. 항상 그런다. 물 컵이 내 와인 잔이다.
  둘째한테서 벨이 울렸다. 아침에 눈 떠서 하는 전화라 했다. 형은 그 동안 나일 강 위에
  있었기 때문에 통화가 되지 않았었다고. 이제 카이로에 도착해서 친구의 약혼식인가
  결혼식을 사흘 낮 사흘 밤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세 끼 챙겨 먹는 일상이 성가시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놀랍고 선선히 "아뇨"라고 대답하는 아이. 원래 걱정을 끼치지 않는
  아이다. 그러는 사이 남편은 먼저 식사를 끝냈고, 막 먹기 시작했던 난 숟가락을 놓았다.
  이것이라도 말자. 해야 할 일들이 넘친다. 생략할 수 있는 것, 하다 말 수 있는 일은
  이것 뿐이다 싶은 생각이었다. 다시 샤워를  하러 갔다. 그렇게라도 해야 일상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온 식탁에서는 먹으려던 음식을 모아서 < 버렸다>.  하느님은
  아셔도 어쩌시지 못하지만,  아침에 와서 알게 될 아주머니가 부끄러워서 음식물 쓰레기
  바구니 안쪽에 몰래 버렸다. 와인을 한 잔 더 따라서 마시고 - 서서 - 설거지를 끝냈다.
  벌써 서재로 돌아가 소리 없이 일하고 있는 남편을 부러워하며, 그러나 바로 책상에 앉을
  기운이 없어서 소파에 파묻혔다.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곧 다시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차! 꼭 읽어야 할 책이, 또 가져와야지 하고 생각했었던 책이 빠졌다. 주말 안에 다시
  연구실에 가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목록: 아침에 열쇠와 송금수표 부칠 것 안가져 갔고, 둘 다 어디 두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강의실에 휴대폰 그냥 가지고 들어갔고, 차에 열쇠없이 컴퓨터 가지러 갔고, 과실용 열쇠
  마저 잃어 버렸고, 필요한 책 안들고 왔다.

  이게 무엇인가! 이렇게 실수를 연발하면서 일상이 계속 될까. 새로 쓰기 시작한 컴퓨터는
  새 기능을 한다. 자판도 좋아졌고, 속도 또한 엄청 좋다. 홈페이지에 어느 한정 공간이
  있음을 처음 알았다. Upload가 절대로 되지 않아서 살펴보니 공간부족이라는 것이다.
  옛 문서들을 지워서 공간을 만들었는데, 옛 이미지들도 지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들을 지워야 충분한 공간이 생길 것이다. 메일박스도 지우다 보니 답장해야 할
  안부해야 할 곳도 있었다.

  은사님께:
  
잘 돌아 오셨겠지요. 어찌 해서 ... 통화 시도해 보았는데...잘 안되었어요.
  ... 그냥 잘 다녀 오셨겠지 하면서  인사가 늦었어요. 전 생각보다 일상이 짐스러워요.
  ... 왜 이렇게 <일>이 많아요, 사는 데.  너무 귀찮아서, 조금 전에는 밥을 먹다가 말았
  어요. 그것이라도 생략하고 싶어서요. 마음대로 생략할 수 있는 것, 거의 유일한 것!
  그렇다고 식욕부진의 히스테리 증후라고는 여기지는 마셔요.....
  요즈음에는 어떠셔요?  사방이 살벌해서.... 너무 재미가 없어요. 사방에 모임이지요,
  단 한군데도 가기 싫은. 그러나 정말 나를, 나만을 위한 자리는 아무 데도 없어요. 해서
  사람들하고 점심도 같이 안하는지가 오래 되었어요.  <끈>이 성가셔지니 어떡해요.
  안부 메일한다는게 넋두리가 되었네요. 말할 사람이 없었나 봐요.  의사소통은 시렁에
  얹힌, 그런 나날을 언제 다 사나요?
  여기까지를 지우느니 그냥 보내겠어요. 선생님, 그저 안부가 진하다 보니 그러는 것이라고
  이해하셔요. 두어 번 연락 시도하다가 이렇게 앉으니 그리 되는걸요.  아무 뜻 없는 안부
  이니 그냥 인사만 받으셔요.
  안녕히 계셔요, 어디선가 곧 뵙게 되겠지요
.

  안부가 너무 무례했을까? 심했을까? <최근파일>에서 단골 글마당에 들렸다.  편하지
  않은 안으로의 여행.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책상을 일어설 것이다.

  따뜻한 아빠. 따뜻한 손. 손의 힘찬 감각은 뼛 속까지는 아니라 해도 피부 깊숙이 들어
  올 것이다.  따뜻함 속에서 잠을 청하리라. 아직 꿈도 아닌데 꿈 같은 영상들이 밀려올
  것이며, 그 속에는 어김없이 그 회색 빛 형체가 북해의 저녁 비바람처럼 서성일 것이다.
  차갑고 암울하게. 어깨는 따스하고 꿈 속은 차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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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6. 8. 23:30
참으로 고마운 편지
 

   Subject:  꽃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Date:  Thu, 27 Apr 2000 17:28:27 +0900
    From:
    Organization:
    To:

    "꽃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망향을 듣다가
    문득 선생님 생각이나서...
 
    해저물어가는 봄날
    연두색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어
    그림자가 창가에 부서지고
    왠지 모를 서글픔 때문인지
    그리움이 강물처럼
    가슴에 출렁이고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애닯은 노랫말이
    마음을 사로잡는
    어느 봄,봄,봄날에.
 
    사춘기 소녀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웃으시기를...

   

 

이런 사랑스런 아이도 있네...........
 


사랑합니다..
==================================================
진정,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러한 생각들이 전혀 낯설지 않은...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

      

                                                     2000.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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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5. 15. 23:30
萬行: 어느 수도자의 이야기
       

폴 뮌젠이라는 속세의 이름을 버리고 현각이 된 어느 수도자의 이야기.

독일계 아버지와 아일랜드계 어머니의 9형제 중 7번 째 명석한 소년이
예일과 하바드를 거쳐 한국의 숭산 큰스님 Zen Master Seungsahn을
스승으로 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33면: 예수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 무엇이 옳은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나를 경험주의자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

      
   문명화된 국가에서 이 세상 존재의 증거를 찾는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존재
   의  증거를 안에서 찾는 것이고 도 다른 하나는 밖에서 찾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논리 그 자체에서
  존재의 증거를 찾는 체계는 문화와 전통을 성찰함으로써 수립되며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접근
  가능하다. 그 소수의 사람들은 선진화된 문명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고 성숙시켜 나간다.
  한편 두 번 째 종류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사고능력이 부족한 대다수 사람들이 수용하여 유지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원인과 논리를 자신이 직접 생각해보려 하지 않고 단지바깥에 어떤 것에 대한
  권위에 의존하여 믿는다. 이것은 흔히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며 많은 국가와 원시부족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신념의 근거는 자신의 성찰 속에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외부에서 주어지고 있다. 기적이나 어떤 상징 같은 권위있는 것들, 계시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 형이상학에는 주로 외부의 위협이 존재하게 되고 그 형이상학 체계를 따르지 않는
  불신자들과 단순한 회의주의자들마저도 적대적인 존재가 된다.
 


    종교는 필요한 것이고 유익하다. 그러나 만일 인류가 진리를 발견해 역사를 발전시키는 데
    장애물이 된다면 종교 자체를 파기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인간사회에서 종교라는
    것은 해당 종교가 지니고 있는 직접적인 진리에 의해 평가된다기보다 간접적으로 인간을 이해
    시키는 능력과 관련해, 즉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지 '믿고 있느냐' 하는 데 따라서 평가된다.

                                                                                     

 에머슨: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철학의 주창자
        
           
  신학대학원 축사 Divinity School Address

예수님은 신이 아니다. 단지 우리 인간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자신 각자가 갖고 있는 본성, 진리, 지혜다. 인간들이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 즉 우리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대상으로 만들어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실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지만, 그는 단지 인간이다. 나와 여러분들처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다.

                                                                                     

『도덕경』, 오강남편역, 현암사 1995

무위란 '행위가 없음 non-action'이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이에서 발견되는 인위적 행위,
과장된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 자기
중심적인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억지로 행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 부자연스런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도,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無爲之爲' 즉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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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4. 16. 23:30
유쾌한 편지 하나:

    

 
    Subject: Wie eine Schoene Frau sind Sie.
    Date: Sun, 16 Apr 2000 13:37:50 +0900 (KST)
    From:
    To:

    선생님 초면에 실례를 용서하십시요......... 저는 ..........ooo
    입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어 왔으므로 선생님
    께서 나이가 좀 드신 평범한 인상의 그러나 도수 높은 안경을
    쓰신 분으로 상상하였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 작은
    편지 한 장을 써놓고는 학교주소를 알까 하고 여기에 들어왔다가
    선생님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참으로 아름다움을 풍기는 분이십니다.
    내내 아름다우십시요.
    다름이 아니고 부족하지만 저도 ........
    
    끝으로 한가지 선생님의 인터넷실력 대단하시므로 존경합니다.
    오늘 멋진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나니 참 유쾌하네요.
    2000년 4월 16일  ooo 드립니다.
 


           가슴 깊고 깊은 곳에 묻어 둘 추억 하나를
                     수소풍선 잡았던 끈을 놓아 버리듯 날려 보낸 듯
                     요란한 바람이 참 서럽기만 하던 봄 날
                     움트는 싹들이 생경하기만 하던 봄 날
                     애써 "위스키~~~"하고 미소짓던 봄 날
                    "쏠"음으로 말하려고 입을 깨물던 봄 날
                     참으로 유쾌한 편지 하나가 위로가 되었소.
                                

    답장은 차마 이리 하지 못했다.
    그랬더라면 너무 놀랐을 터이니 당연히 못했고. 
    우선 그/그녀는 미지의 사람이니까.
    이 메일 이전에는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던 그런 아무도 아닌 사이.
    사실 이러한 불특정 누군가에게서 오는 여러 메일에
    그들 중의 이 하나에 이만한 의미를 두는 것도 호들갑이다.
      

    그러나  편지가 어떠하면 사람에게 위로가 되는지
    아이들도 아니지만 따뜻한 말에 감탄하게 되는 것을
    아이들도 아니지만 따뜻한 말을 그리워했기에 그러는지
    누군가에게라도 말하고 싶어서 여기 쓰려나 보다.....
    그리고 그/그녀가 원하던 내 변변찮은 책 한 권을 보냈다.

                                      
  

 그래서 일까?
         며칠 뒤 정말 위로가 되는
메일이 왔다,

                               "꽃피는 봄사월 돌아오면..."
                                     망향을 듣다가
                                     문득 ... 생각이나서....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곳을 스쳐갔을 리 없는 누군가에게서.
         어느 날 오후 해는 저물어 가고
         그런 시간에 보낸 짧은 터치.
         사람이 위로받는 것은 순간이다.
         절망도 그처럼 순간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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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4. 7. 23:30
  2000년 봄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도 거의 끝나는데........
       그 동안 가장 인상 깊었던 메일을 공개합니다.
       이름만은 저작권 허락을 받지 않았으므로 생략, 나머지는 전문 그대로입니다.

 

  
   Subject: 따뜻한 봄날에...
   Date: Fri, 07 Apr 2000 21:08:48 KST
   From: ??
   To: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은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내가 삶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고 지구가 나비 한 마리를
    감추고 있듯이 세상이 내게서 그대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가 바다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그 속에서 장난치는 어린 물고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것은 모래에 고개를 묻고
    한 치 앞의 생을 꿈꾸는 늙은 해오라기 때문이다. 아침에 그대는 나비 한
    마리로 내게 날아온다."  ......

    교수님, 학교를 휴학한 상태이지만 그래도 졸업 한 동기들 보다는 가까이
    있으면서 교수님의 제자 노릇 제대로 하지 못 한 것 같네요.
    저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밖으로 튕겨나지 않음은
    같이 커났던 동기들과 저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 가고자 합니다.
    천상병 시인은 신문사에 있는 친구가 막걸리 사 먹으라며
    쥐어 준 돈 몇천원을 받아 쥐고 따뜻한 봄볕 아래 서서
    한 없이 즐거워 웃었답니다.
    교수님 밝게 한번 웃어 보는게 어떻습니까?
    봄이니까! 믿음직한 제자들이 있으니까!!
    이상 00학번 000 였습니다.......꾸벅!

 

 

     이 얼마나 다정한 글인가!
      같이 커난 친구들에 대한 애착으로 살아가리라는 다짐.
      이런 말 한 마디면 혹여 서러웠던 기억도 사라지리라.
      이런 말 한 마디면 다가올 재난(?)도 두렵지 않으리라.
      <신 지식인> 개념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인문대 사람들아!
      어디 어떻게 숨어들어 옴짝도 하지 않을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이 오아시스같은 글을 삼키자. 아까워 단숨에 들이키지 말고,
      생명수처럼
       - 아니다 이 말은 취소한다. 아주 사적인 이유로 -
[아래 주석]
          아니 새벽 이슬처럼 신선하게 간직하자.

  [주석] 우스운 주석: 난 개인적으로 "생명수"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쓸 수 없다.
            특정한 날의 특정한 물을 생명수라 했던 까닭이다.
            그 특정한 순간에 대해서는 그러나 세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 특정한 순간을 함께 한 누군가도 이미 잊어 버린 물!
            그 물 때문에 더는 생명수란 말을 쓸 수가 없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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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2000. 3. 15. 23:30
  ■  도구적 학문 vs 목적적 학문

    이야기의 발단은 대화 상대자들의 신분에 맞는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 관한 관심이었다. 대화 상대자는 인문대학

    소속의 교수님, 주로 실용노선을 지지하는 소위 "신지식인" 개념에 동참하시는 분. 편의상 "가"와 "나"로 쓴다.
 

가: 요즈음에는 인문대 자연대 등에서 도전적인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 대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경향입니다.
      학문할 수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으니 당연하다고 봅니다.

나: 당연하달 수는 없지요. 확실한 직업적인 미래를 선택했다면 나무랄 수 없는 현명한 판단이겠지만, 문제는
     그 선택의 시금석이 주로 사회적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사회적 동물이 사회적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사회적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내적 필요를 무시한 데서
     처음부터 문제를 내포합니다. 개인의 내적 욕구가 고려되지 않은, 외부요인에 의한 선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혹은 사회적 성취가 이루어진 이후에라도 - 본질적 회의를 수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에 의한 선택으로 살아가는 삶은 결국은 타인의 삶이 아닐까요?

가: 그러나 졸업 후의 진로가 우선시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나: 그러니까 졸업 직후냐 훨씬 더 멀리를 보느냐 차이 아닐까요?

가: 우선 사회에 좋은 조건으로 편입된 이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요. 여건이 성숙된 이후에 자신의 필요를
     고려하자는 현실적 사고가 현명한 선택을 낳는다고 보는데요.

나: 섣불리 결정을 하고 나서 갈등하거나 다시 진로를 바꾼다면 더욱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닐지요....
      아무리 사회의
구에 의한 삶에서 라도 자신의 내적 욕구가 어느 정도는 합치되어야만 진정 의미있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대화는 끝이 없다. 마치 종교에 관한 설왕설래와 마찬가지가 된다.  

하여, 나의 주장보다는 존경할만한 분의 권위적 견해를 예로 들고자 한다.

多夕 유영모 선생님은『老子』20장 시작의 "絶學無愚"를 한글로 풀어 쓰시기를

"써먹기부터  하련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라고 하셨다.

[물론 "하련"은 아래 아를 사용하셨고, 그 한글의 매력은 또 다른 차원의 감동이다.]

아주 젊지는 않았을 때, 그래도 젊었을 때, 『늙은이』로 풀어쓰신 그 글을 공부했다. 실용적 필요는 아예 없던 터였다.

소위 좋은 환경에서 - 평범하므로 좋은 - 자라나서, 괜찮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적당한 직장경험, 그러다 우연히

사랑에 빠진 듯 결혼했고 이른 어머니가 되어있었던 시절, 그래도 한 가지, 필요에 의하지 않고 오직 즐거움 때문에

공부하는 버릇만은 지녔었지만, 그때는 그 취미마저도 부르주아적인 것이라 스스로 경멸하여 대학원 진학을

완강히 거부했었던 반항기를 잊지는 못하고 있던 터였다.

해서, 그 서늘한 충격 - 공부가 죄는 아니구나, 써먹을 생각에서가 아니라면....- 그것이 나를 다소 해방시켰었다.

해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실용적 학문이 못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실용적 필요에 굴하는(?) - 참으로

미안한 표현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이 고집을 지켜갈 방책이 없기 때문임을 용서 바란다 -

다른 동시대인들을 다만 다르게, 존경하지도 멸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서로 존중하기로 했다.

오늘은 물론 상황이 매우 다르다. 이제도 "도구적 이성" 운운하면 유행 한물간 이론에 매인 현학이라 오해된다.

오해뿐이 아니라 이제는 시대착오라고 멸시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다. 대다수의 유능한 사람들이 실용적-도구적 학문에 경도하여 이루어낸 문명문화의 혜택 속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소수의 다른 사람들- 즉 우리는, 인문학 따위에 매어있는 우리는 - 은 그래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마찬가지로 사회에 기여하여 잉여인간이 되지는 말지어다. 그러나 그 기여는 바로 성취사회가 가져다 주는 그림자,

그 그늘과 그림자를 찾아 최소한의 광명을 선사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이런 상념에 잠시 눌어붙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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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9. 15. 23:30

◐◑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 <친구>라는 개념과 관련된 변명 하나 -


 
근거 1)            "이 세상 누구나 다른 사람의 밖에 있다  
                    Jeder auf dieser Welt steht außerhalb jedes anderen."
                                          - 하인리히 뵐 - 전집 13권 37쪽

                                   

   
    사람은
밖에 있다 사람의

         사람은 있다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의 밖에 사람은 있다

                           있다 사람은 사람의 밖에

                      밖에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람은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확실하게 사람의 밖에 있다

    사람은 있다 모든 것의  밖에

    사람은 그냥 홀로 있다

    사람은 그냥 있다

    사람은 있다.   

렵게 쇼펜하우어 등을 대입하지 않아도 그저 맹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다.
목적은 허상, 가상이요, 잘해야 꿈이다. 꿈은 이루지 못할 전제의 목적이다. 이룰
수 있는 전제라면 목적일 것이니까. 그러므로 꿈을 꾼다는 것은 조금은 도피라 할
것이다. 도피가 아니더라도 삶의 유보, 그래서 꿈이란 생을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무지개와도 비견되지만, 실제로는 "다른 상황"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생을
좀먹은 도구이다.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 꿈에 매달리는 인간일수록, 예컨대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즐긴다(?). - 꿈을 접으면 사라질
고통을 꿈 때문에 끌고 다니는 것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 그러므로
꿈을 버렸을 때 어엿한 인격의 인간이 된다는 가정이 설립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야기가 될 법한 이와 최근에 나눈 짧은 대화의 결론]

 bar_l_1.gif

[반론을 준비해 본다, 마음 속으로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친구는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인간에 대한 관심 --- 어떤 와 같은 종속인,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슬퍼 울고 기뻐하는 종속인 인간. 따뜻한 음식과
  따뜻한 옷과 따뜻한 눈길에 따뜻해지는 인간.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상태는 아니다.
  인간적인 이해라 부르거나 차라리 인간적 존엄을 전제로 한,의례적인,
  온건한, 중립적인, 다행히 바람직한 이웃관계일 뿐이다. 보편적인 인류애.
  그것은 차라리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도 매번 한계에 부딪치곤 한다. 가족은 상당히 예외가
  되지만,바깥 생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완전한 이해란 Liebe auf dem ersten Blick 또는
     
완전한 사랑이라는 개념만큼이나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반론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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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결론에 승복하는 이유들]

말하기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는 것, 그 으뜸은 아무도 자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언어학자 또는 직업적
   글쟁이들이 말하는 언어 자체의 소통 문제, 즉 텍스트 생산의
   문제만이 아니라, 진짜 이유는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내 말을 하고
            바다는 제 말을 하고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바다가 취한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성산포에서> 라는 유행가 가사이다.
   노래를 그 속삭임을 들으면 서정에 눈물나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도시의 밤 술자리에서는 술에 취하기전에 외로움에 취한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혼자서 술을 마신다. 혼자서 외로움을 마신다.
   여럿이 둘러 앉아 뼈저린 외로움을 마신다.


 편지 : 요즈음 세상에 가능하지 않은 것 또 하나, 편지쓰기가 있다.

     편지는....

  생각에 이르기가 어렵다.

   생각이 간절해도 쓰기가 어렵다.

  썼더라도 부치기가 어렵다. 우편도 몰래도...

   
                               더구나 그런 편지 자체에 발끈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편지란 좀 쑥스럽다거나 유치하다는 논리만으로 그리한다.              
                               차마 말로 할 수 없어서 바라보고는 말을 할 수 없어서
                               편지로 말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므로....

  Kafka의 편지 빌려오기:

         "아시겠소, 나는 웃기는 인간이오. 만일 그대가 나를 약간 좋아한다면,
         그것은 연민이며, 내 몫은 두려움이오. 서신으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무용지물인지. 서신이란 바다를 두고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해변가에
         철렁거리는 바닷물과 같은 것이오. 펜은 모든 문자들의 그 많은 언덕위로
         미끌어지고 그리고 이제 그것은 끝에 이르렀소. 날씨가 서늘하니
         나는 나의 텅 빈 침상에 가야겠소."
                                                                                  (1907년)

      "Ich kann mit ihr nicht leben
          und ich kann ohne sie nicht leben."
                
                                                                      (1913년)

            그녀와 함께도 그녀 없이도 살 수 없다는 그의 고백은
            인간의 원론적인 위치 "타자의 밖"을 확인해준다?
            아니면 그 무수한 편지들에 수신인이 있었음에 그를

     
     부러워해야 할까?


 차라리  꿈꾸기:
                         
기이하게도 꿈에 등장하는 인물은 꿈의 존재를 모른다.
                             꿈은 열린 창으로 남아서 현실을 방해한다.
                             
열어 보여도 좋을 지 .......

  혹은 은행잎:
                       
예컨대 여기에 쓰이는 한낱 표시가 왜 은행잎인지
                            그냥 우연히 은행잎인가를 아는 사람도 없다.
                            있어야 했겠지만 없다.

 그러니 사람은 사람의 밖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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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1999. 8. 31. 23:00
 

한국문화사 1999.8.31.


 

길고도 생소한 제목이 어리둥절한가요? 이 책은 DAAD(독일학술교류처) 파견으로  우리대학에서 88-93년 동안 객원교수로 계셨던 로스바흐 Rossbach 선생님과의 공동 저작이랍니다. "낭만주의" 에 대한 안이한 인상을 불식하고, 어떠한 문학작품도 언어학적인 접근을  일차적으로 시도해야 하는  필요성을 직접 체험하게 할  목적으로 구상 되었지요. 
하필 선정된 작품이 독문학사에서 "유령의  호프만" 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에.테.아. 호프만이냐구요? 왜 하필 모래귀신 Der Sandmann  이냐구요? 글쎄, 여기에서는 서론과 개요만을 소개합니다.  대답은 직접 책에서.......
 


서론: 서술 텍스트 이론 


이 책은 새로운 시도이다. 텍스트 해설이자 교과서인 것이다. 텍스트 해설로서는 특히 한국인 독자들을 겨냥한다.  교과서로서는 텍스트 언어학적 근간에서의 화술적 텍스트의 분석에 대한 입문서가 될 것이며, 분석 대상인 소설에  대한 이상의 것을 다룰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독문학의 가장 어둡고 환상적인 텍스트 중 하나라 할  이  작품의 구조에 대한 통찰 뿐만 아니라, 서술 텍스트의 구조법칙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는 하나의 텍스트에 관한 지식 만이 아 닌, 다른 텍스트들과 관련해서 전용할 수 있는 지식을 얻게 되리라.  

해설의 특이점은 무엇보다 그 물샐틈없는 완벽함과 조직성이다. 완벽함이란 문장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설에서 드러난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등장하는 모든 난점들을, 즉 독일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독자가 정복해야 할 모든 난점들을   다룬다. 그러나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의 중급수준의 독일어 지식을 전제로 한다.

 

해설의 체계는 항시 반복되는 순서에 의하되, 다음의 정보를 제공한다:  사전적 - 문장론적   - 서술적 (문장들을 포괄 하는)  각 문장마다 우선 특이한 단어들과 관용어법들을 찾는다.  단어의 설명은 때때로 일반적인 의미와 텍스트 내의  특정 의미를 포함하며, 독일어와 한국어로 의역한다. 실망스런 사전적 설명작업은 배제한다. 사전적 설명에 이어  문장론적 언급이 이어진다. 이 경우 길고 복잡한 문장들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단어 하나 하나 이해하려고 하는  시도는 항상  경고된다. 그 대신 문장들은 우선 그 핵으로 단축된다. 그 다음 한 걸음 한 걸음씩 구축되어 가며 독창적 복잡성을 넘어간다. 도표 제시는 문장들의 거시적 구조(대강의 구조)를 통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장들의 문장론적 설명을 위해서 우리는 전통 문법의 이론과 용어들을 사용한다. 전통문법의 이점은 이것이 모든  분석의 길로 통하는 것이다. 즉 ― 단계적으로 ―- 복잡한 전체에서 전체의 성분으로 가는 길 말이다. 다음에는 발화의 논리라는 전통문법이 따른다:  주어 내지 주어부는 발화의 대상을 지칭하고, 술어는 이 대상에 진술을 부가한다.  오늘날 성행하는  전통적 주어-술어-문법(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 사이의 대립은 두 문법모델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충한다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 N. Chomsky 또한 그의 다른 면에서  전통적 분석체계에 이 의존의 개념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구성구조문법과 의존문법의 장점들을 통합하고 있는 아주  손쉬운 문법모델은 아직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문장론적 해설의 목적, 즉 복잡한 문학텍스트의 문장들의 거시구조를 통찰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또한 도표로서도),  전통적 용어들의 도움으로 가장 용이하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미시 구조적 설명(예를 들어 원자가 제시)은  포기한다. 이것은 매우 유감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해설 분량은 이미 문제가 될 정도이므로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 작업에서 문장문법의 영역에서 새로운 것은 기대할 것이 없다. 이 영역에서는 이해력의 도움을  제시하는 것이지,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은 화술적 텍스트구조를 위한 정보들을 포함한 세 번째 분석  범주에 들어있다.


이 분석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것은 마부르크 Marburg 대학 일반 언어학 및 독일 언어학 전공학과에서 십여년 이상 수행되어 온 "화술적 텍스트 분석"에 관한 연구들이다. 우선 서술(Erza"hlen) 또는 더  상세하게 서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서술은 일어난 사건의 재생이자, 수신자를 고려한 시점적 재생이다. 이 정의는 세 요소를 지니고 있다:  

            - 서술자 (= 화자) 

            - 사건

            - 수신자

  
 마부르크 팀의 서술적 텍스트 분석(Narrativik = 서술텍스트의 분석)연구의 관심은 모든 서술텍스트의 중심을  형성하는 서술자에 둔다. 서술자의 포괄적 활동 ( 사건의 언어화) 은 다음과 같은 부분 활동들로 분류될 수 있다:

            - 선택 (무엇을 서술하고 무엇을 서술하지 않을 것인가?)

            - 배열 (무엇을 먼저 서술하고, 무엇을 그 다음에, 무엇을 마지막에 서 술할 것인가?)

            - 시점 선택 ( 복합적 시점 대 단일 시점

            - 해설,주석 및 평가 여부


서술자는 이야기하는 "목소리"이다 (프랑스인 Narrativik학자 Ge'rard Genette 의 "La voix" 범주에 든다).그러나 그는 텍스트-의미의 원천이다. 서술자를 기술하는 것, 서술자를 그 특성에서 확정짓는 것은 도대체 우리가 이 서술자에 대하여 하나의 관념을 가지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관념은 이 책에서 설명되고 사용될 것이다.  물론 한정 없이가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제한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전면에는 서술이론이 아닌 서술분석이 자리한다. 이 중점은 이 다음에 계획하고 있는 책에서는 그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이론이 전면에  놓이고 구체적 분석은 예로서 배경에 놓이게 된다. 이 책의 모든 텍스트 기술의 출발점은 텍스트 내재적 화자이다. 이 화자(Narrator)는 작가(Autor)와는 엄격히 구분된다.


작가는 실재의 신분을 지니며, 외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화자는 허구의 신분을 지니며, 내적  의사소통 상황에 소속한다. 도표로 보자면 : 


 작가의 입장에서 보아 모든 (또는 대부분의) 서술된 사실들은 '창안된' 것이다.


이것은 이 경우 결코 작가인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닌, 오직 텍스트 내재 적 (= 허구적) 서술자만이 나타나엘을 그의   "친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결말에 가서 클라라가 어찌 되었는지를 들었노라고 주장하는 것은   에. 테. 아. 호프만이 아니라, 그만큼 애매하게 정보를 받은 서술자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요약하면:


 허구적 서술자는 허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작가에 의해 창안된 것이다. 허구의 내적 세계와  사실의 외적 세계 사이를 통제없이 넘나드는 일은 이 해설에서 방지할 것이다.


물론 텍스트 내적 현상을 텍스트 외적사건들과 상관시키는 것도 적법하다. 예를 들어 전기적, 역사적 또는 사회학적 사실들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그러한 정보들을 취급하게 될 네 번째 분석 범주 ― [I] 해설: 그런 종류의 정보들을 수용하게 될 ― 를 예견했었다. 그렇지만 해설들을 네 개의 다른 분석 범주 ― [L] 사전적, [S] 문장론적, [N] 서술 구조적, [I] 해설적 정보들 ―로 분류하는 과정에서 너무 일목요연하지 않음이 드러났다. 그렇기 때문에 네 번째 분석 범주의 정보들은 세 번째 범주에 수용하였다: [N]은 이제 우선 문장들을 통괄하는 성향의 텍스트 내재적 정보들, 예를들어 모티브의 회귀 (주도모티브) 같은 것을 포함하며, 다음으로는 문화사적 성향의 텍스트 외적 정보들을 포함한다. 이 외부의 포착은 원천적인 텍스트접근적 분석에 논리적 모순을 낳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외관상 그러하다.


왜냐하면 역사적 맥락(Kontext: 어원적으로는 "통합적 텍스트"라는뜻)에 관한 지식이 없이는 한 텍스트가 적확하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Cagliostro" 또는 "Chodowiecki"라는 이름이 기지의 것으로 전제되거나, 또는 연금술 실험자에 대한 암시를 포함할 때를 이른다. 그러나 문화사적 지식은 텍스트가 이것을 분명히 전제로 할 때에 한해서 전달된다. (문학적) 텍스트를 (문학 외적) 맥락과 연결함에 있어서 이론적이고 방법론적인 난제들은 당장 여기에서 논의될 수는 없고, 그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사안에만, 즉 텍스트 안에 머물기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모래귀신」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를 수단으로 해서 해석하려는 유혹도 거부한다. 특히 대중적인 것은 소설 주인공의 행동을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첫째 프로이트 자신이 이 소설에 대해 언급했고, 둘째 소설 주인공 나타나엘의 이상한 행동은 심리분석적 소설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2차문헌의 제목을 보자:


 Ingrid Eichinger: E.T.A. Hoffmanns Novelle "Der Sandmann" und die Interpretation Freuds.  In: Zeitschrift fu"r  deutsche Philologie 95 (Sonderheft E.T.A. Hoffmann 1976), S. 113-132

   

이것은 그와 관련된 인식의 소득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함을 예견케 해준다: 왜냐하면우리는 하나의 해석 대상  텍스트 대신에 두 개의 텍스트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가아니라,  프로이트를 끌어대고 있는 모든 텍스트들과 프로이트에게 비판적인 모든 글들 또한 동시에 접근되 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끝없는 해석논쟁이 열리게   될  것 이다. ― 그 대신 이 소설의 복잡한 구조를 설명하고 그것을 투명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충실하게 따를 것이다.


텍스트는 구조의 원칙에 따라 통찰되어야 한다 어떠한 수법으로 그렇게 하는가는 이 서문에서 설명될 수도 또는  설명해야 할필요도 없다. 앞으로의 분석이 이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줄 것이다. 문장 하나 하나에 관련된 상세한  텍스트의 설명이 곧 이 책이 학습자들에게 제공하려는 유일한 이해에의 도움이 아니다. 그 밖의 도움으로는: 소설  제목의 충분한 설명, 개관 및 중점적 내용 설명을 부가한 텍스트의 상세한 분류, 전체 소설의 보조번역, 일련의 도표  및 그래픽 등이 있다. 우리는 이 책이 한 복잡한 텍스트의 미로에서 독자에게 신뢰할 만한 안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독서의 <대상으로서는 외국어로서의 독일어(외국에서의 독어독문학) 중급과정의 학생들을고려하고 있으며,  이 분석은 그러나 그 방대한 외연으로 인하여 교육자 및 호프만 전공자들에게도 여기 저기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독자를 기다리는 것은 모험이다. 모험 중에는 때로 고생을 완전히 면할 수는 없으리라. 



 0.1 개요


독일의 어린이들에게는 "모래아저씨(Sandmann)"의 모습이 대체로 "모래아찌(Sand- ma"nnchen)"라는 축소형으로  알려져 있다. 모래아찌는 밤이면 어린이들에게 눈에 모래를 뿌려 줌으로써 아이들이 피곤을 느끼고 잠이 들 수 있게  해주는 동화의 인물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아침이면 눈에서 "모래"를 부벼낸다. 그것이 아이들에게는 밤새 그가   왔었다는 증거가 된다. 작은 키에 빨간 뾰쪽 모자를 쓰고 등에는 모래 자루를 지고 있는 모습의 모래아찌는 정말 귀엽다. 그렇지만 나타나엘(이 소설의 주인공)에게서 그는 마성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한 노파가 그에게 얘기해 주기를,  모래아찌는 착하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밤새 눈을 훔쳐 가는 무서운 귀신같은 존재라고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타나엘을 숙명적 공포로 내몰고, 마침내는 대 재난을 초래한다. 

눈-모티브는 "Sandmann"이라는 인물 내지는 소설의 제목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사랑스러운 동화에서는 아이의 눈이  감기기 때문에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늙은 유모의 변종 이야기에서는 영원한 실명이 위협하고  있다. 다음에서는 눈-모티브를 상세히 취급한다.  왜냐하면 전체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중심이 눈의 상실에 대한  나타나엘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줄거리: 


나타나엘의 유년 시절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유모의 말에 따르면 모래귀신은 잠을 자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시력을 앗아간다. 부모님은 어떤 날 저녁이면 변하는 것 같다. 어머니는 화급히 아이들을 잠자리로 보내면서  말한다: "모래귀신이 온단다". 그런 다음 실제로 나타나엘은 불길한 형상이 층계를 쿵쿵거리며 올라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아버지의 방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나타나엘은 호기심에 못 이겨 숨을 곳을 찾아 들어서, 모래귀신이란  다름 아닌 음침한 변호사 코펠리우스임을 알게 된다. 나타나엘은 발각되고, 모래귀신/코펠리우스는 그를 붙잡아 눈알을  뽑으려 한다. 아버지는 간청해서 그 자를 만류한다. ―코펠리우스는 잠적했다가 일년쯤  지나서 다시 그 도시로 돌아온다.  다시금 그자의 발자국 소리가 층계를 쿵쿵거린다. 한밤 중 폭발 소리가 온 집안에 진동한다.  아버지는 바닥에 숨져 있다. 코펠리우스는 사라졌다. 아이는 그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년이 흘러 나타나엘은 그 사이 약혼도 하고 G.시에서 대학에 다닌다. 어느 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한 행상이   ― 그는 코폴라라는 이름이다 ― 그에게 물건들을 권한다.   나타나엘은 그가 코펠리우스 (= 모래     귀신 )라고 믿게  된다. 그는 놀라고 혼란에 빠진다. 뭔가 도움을 구하는 심정에서 그는 고향에 편지를 쓴다. 그의 약혼자 클라라는 그를 안심시키고자,  그 숙명적인 코폴라는 그에게 아무런 힘이 없으며, 모든 경악은 다만 그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 클라라의 논리는 완전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타나엘은 실제로 안심하지 못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귀향한다. 모두가 포옹한다. 그러나 이견들이 고조되면서 그들의 행복을 흐려 놓는다.  환상가 나타나엘과 냉정한 인간 클라라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극심한 갈등이 초래된다. 나타나엘은 클라라를   "생명 없는 저주받을 자동인형"이라고 욕한다. 클라라의 오빠는 분통해 하고,  결투가 예고되지만, 결국에는 화해가  이루어진다.  


나타나엘은 대학 도시로 돌아온다. 그 동안 그의 숙소에 화재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물리학 교수인 스팔란짜니 댁   건너편으로  이사하게 된다. 그 창문 너머로 그는 올림피아를 바라본다. 그때 다시 코폴라가 찾아와 그에게 망원경을  판다. 망원경을 통해서 바라보는 동안 그는 올림피아의 미에 굴복하고 만다. 마침내 그는 무도회에서 그녀와 춤추게  된다. 스팔란짜니는 그들의 약혼까지를 승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팔란짜니와 코폴라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의 그의 놀라움이 그토록 큰 것이다. 증류기, 병, 플라스크들 사이에서 그들은 텅 빈 검은 동공을 지닌 생명없는 인형  올림피아를 두고 싸우는 것이다. 스팔란짜니는 올림피아의 눈을 집어 나타나엘에게 뿌렸고, 그는 곧 광증에 빠진다.   (올림피아가 자동인형이었음이 밝혀진 뒤 소위 지성인들로 구성된 차 모임의 실태는 가관이다. 본문 355의 차 모임  에피소드 참조)


나타나엘이 깨어났을 때 과거의 공포는 극복되었다. 두 약혼자, 처남이 될 로타르, 그리고 어머니는 행복하게 화합한다.  그 무렵 두 사람은 정오쯤에 탑에 오른다. 먼 곳을 바라보다가, 클라라는 작은 회색의 수풀이 그들을 향해 움직여 오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 말에 나타나엘은 망원경을 꺼내  드는데, 시야를 클라라가 가리고 있다. 그러자 그는 다시금  광증에 빠져, 소리치고 날뛰며 클라라를 아래로 내던지려 한다. 로타르가 급히 달려가 그녀를 구한다. 아래 군상들  사이에 코펠리우스가 서있고, 그는 나타나엘을 유혹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나타나엘은 뛰어내린다. 


이제 상당히 긴 본론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


 

Posted by 서용좌
낙서1999. 8. 1. 23:30
  R    E     N     내     E     조   N

     N     알     E      N       지     N    고    L    E    기    K
 


   서
를 전혀 모르고서 한 학기를 한 교실에서 보낸다는 것은 조금 모독입니다.
    겉보기엔 좌판을 들고 앉아서 지식을 파는 지식산업 행태로 전락되는 한이 있더라도,
    짧은 상호간의 영향이 남아 있는 한, 교수-학습 간, 학습자 상호간은 우연 이상의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소한 얼굴과 이름은 기억해야 <없는>의미도 살아 날 수
    있으리니, 여러분 졸업 후에 <영2> 혹은<수2> 선생님으로 불리는 것이 끔찍해서라도
    이름을 개강모임이라 하여 간단히 초대합니다.

   대상: 현대 독일소설, 독일여성문학 수강학생 따로.
   시간은 가까운 목요일, 단 미리 이야기 하기.
   장소는 상의해서.......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우연히 두 과목 다 수강하며 열쇠담당으로
   수고하는 류oo(94학번)와 의논하세요.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