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04. 3. 1. 22:15
부나비

   

 

소설시대 2003 

부나비 한 마리가 겨울밤을 마주하고 있다. 9월에야 성충이 된 이놈은 늦둥이에 속한다. 날개를 길이대로 다 늘여 보아야 3, 4 센티미터. 그것으로는 추위에 얼어붙는 몸을 가릴 만큼 넉넉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일정한 길이도 넓이도 아닌데, 그로서는 안의 사람들이 커튼이라는 아름답고 따뜻한 장치로 여러 겹 추위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그래도 새어나오는 빛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나아간다. 미끄러운 유리창은 얼음처럼 차갑고 아린다. 유리가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이제서 알게 되다니, 이러한 지식이 별 소용없음에, 그것으로 슬퍼할 시간도 모자란다.  

 

                                                    *

넌 그 집착 때문에 망할 거야… 꼭 그렇게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는 말한다. 내가 사모하는 그는 통상적인 부류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가 들은 야단이다. 그것은 통상적인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라고 내지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모하는 그에 대한 어떤 것도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의 견해를 의식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가 없다. 나는 그러니까 내가 사모하는 그와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 사이에서 몸 둘 바를 모른 채 살고 있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에서이건 몸둘 바를 모른다고 하면 요새 세상에서는 엄살이라고 할 것이다. 모두가 당차게 살아간다. 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만 해도 확실히 매사에 단호하며, 말도 엄살도 적다. 사람이 말이 적으면 분명 손해가 적을 것이다. 말이 많으면 써먹을 말이 적다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웠는데도, 나는 말을 많이 한다. 결코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아요… 라는 표시로서 이런저런 말을 한다. 사실은 신문에 났거나 TV에서 떠도는 말을 또 되풀이하고 있는 얼간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난 그냥 얼간이 편을 택한다. 내가 사모하는 그의 말없음에 상처받아, 보상심리로 말의 홍수 속에서 안정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나와 그 ― '내가 사모하는 그'라는 말을 그냥 '그'로 단축하기 위해서 상용구를 써야 된다고 믿을 사람이 있을까. 상용구란 한 글자를 여러 글자로 나타내기 위한 수단인 것을, 나는 어떻게 된 게 입만 열면 '내가 사모하는 그'가 튀어 나와서 그것을 '그'로 줄이느라 상용구를 써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런데 나와 그는(바로 이곳에서 상용구 단축이 필요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다. 친구('내게 충고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친구'도 '친구'로 단축한다), 친구는 다만 내가 행여 이번에도 마법에라도 걸린 듯 빠져버릴까 걱정하는 눈치다. 아니 노골적으로 경계한다. 사람이 행여 사람에 빠진다는 것은 친구에겐 실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열아홉 금값일 때 혼이 나갔던 그일 이후 내내 혹독하다. 게다가 이번에도 눈과 입술이 가느다란 남자라면 무정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라고. 우린 이제 서른 하고도 넷을 넘겼으니 ― 그녀는 절대로 다섯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 우리 또래 남자들도 이미 다 혼자는 아닐텐데, 잘못하다간 임자까지 있는 덧에 걸리게 되어있단다.

너 이런 병 처음 아니야, 옛날 그 일을 생각해 봐. 완전히 넋빠진 애, 무슨 핑계로 어떻게든 전화라도 하려고 리포트도 안냈고, 너 정말 기말시험도 안쳤잖아? 지금 돌이켜봐도 그는 널 염두에나 두었어? 이것저것 함량미달, 큰 인심으로 변명 기회를 주어도 아무 말 못하고 지나친 어떤 여학생. 그것말고 너를 알기나 해? 그때가 언제야, 그 봄학기, 넌 왜 봄에 약한 거냐?  

그 후 언제였을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영화관에 가서 보던 날, 친구는 갑자기 "너 혜완아" 라고 나를 불러 세웠다. 너 또한 혼자서 가라. 우리, 책을 직접 사서 읽자. 우리가 돈을 주고 소설책을 산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대학을 그만 두고서도 일이년은 몰래 책에 대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했었지만, 그 뒤로는 이런저런 여유가 없어 책을 사 본 적이 희미했다. 그런데 우린 책을 샀고, 친구는 아예 어디에선가 원래의 경전까지를 찾아냈다. 하긴 내가 지쳐 잠든 밤사이 그 애는 컴퓨터에서 밤을 샌다, 뭔가를 쓰거나 찾거나.

숫타니파아타… 한참 열을 올려서 외웠던 옛 구절을 친구는 새삼 다시 꺼낸다. 비밀스럽기도 하고 또 정말 그냥 염불이라 생각해라. 어쩌자고 넌 또 시작이냐구. 날 따라 해 봐, 물속의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 (침묵) ― 어서 ― 물속의 물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 또한 이미 불이 탄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아니 다시 하자, 좀 더 네가 좋아했던 구절로. 또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넌 그런데 번뇌를 끊는 가르침 중에서도 바람이니 연꽃이니 나오는 구절은 좀 외우고, 냉철한 단어는 다 잊었구나. 넌 아주 물고기 수준이야.

새대가리는 몰라도 물고긴 아냐. 또 물고기가 왜? 물고기가 자전거도 타는데 뭐. 여자는 물고기가 자전거가 필요한 만큼만 남자를 필요로 한다고 큰 소리하던 여자도 어쨌든 결혼했잖아.  

너, 스타이넘이 이제와 결혼을 했다고 그 인생철학이 바뀐 거라 속단하지는 마. 결코 결혼이 필수가 된 건 아니니까. 남편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고 파트너랬어.

파트너? 무슨 다이 하드 시리즈 경찰이냐?. 남편 아닌 파트너랑 결혼하면 물고기보다 나아?

적어도 체로키족 식으로 했다는 거지. 진정 남녀를 평등하게 대접한다는…

그럼 아무나 체로키가 되냐구? 보호구역 오클라호마에 아니 미 전역을 통틀어 만 명 남짓, 그들의 언어가 살아있기나 해? 200년전 다트머스 대학 설립해준 백인들 교육 덕에 그 문화는 끝장났다며? 그런걸 어떻게 아느냐구? 거야 간단하지, 언젠가 컴퓨터 화면 살리니까 떠있던 걸 뭐. 넌 찾고, 난 심심하면 읽고. 너 맨날 PC 켜놓을 땐 나더러 읽으라고 그렇게 두는 것 아니었어?

그랬다 치자, 그게 결코 노선수정이 아냐. 저번 제주에 왔을 때 인터뷰기사도 못봤어? "자궁이 있는 모든 여성이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명제는 성대를 가진 모든 사람이 오페라 가수가 돼야 한다는 말과 같다"해서 좌중이 웃음바다였다구!

웃음? 대중은 명사에겐 관대해, 논리적 비약에도 웃어주고. 성대가 정말 오페라 하라고 있는 거냐, 말하라고 있는 거지. 성대로는 말하고, 자궁으론 애 낳고, 그러는 거야. 늦기 전에.

뭐야, 네 자궁으로 애를 낳겠다? 그저 그 남자 바라만 보면 자궁에 애가 들어오니? 자궁이 원초적 충동으로 애를 낳고 싶다고 쳐, 그게 그리 쉬운 일이야? 이 시대에 어떤 남자가 애나 낳고 싶어하는 바보에게 애를 낳으라 하냐. 거기까지 상상이나 되는 거야? 어떻게 그의 눈에 띄는가… 어떻게 그 눈길을 받을까… 언제 어떻게 해서 마침내 그가 말을 걸고, 데이트를 신청하고, 고백을, 청혼을 하고. 아니 그런 것 생략하는 신세기 인간들이라고 쳐, 어떻게 그에게 다가가며, 어떻게 그 손을 잡으며, 아니 어떻게 그가 손을 잡게, 입맞추게, 그 생명을 네게 주게 만드는데? 네 입 몇 마디 말로서 되는 일이, 언제 어느 세월에 일어나느냔 말야. 그거 그 옛날에 한번 졸업하지 않았어?

하긴 옛 일이지. 올림픽 전의 한국은 옛날이 맞아. 네 말대로 난 마음을 다 퍼주어 버려서 남아있는 조각도 없는 줄 알았지. 알 수 없는 원망도 슬며시 잦아들 지경이었으니. 이상해,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쿵쾅거리지? 넌 뭐 항상 정답을 가지고 있고, 난 항상 틀렸으니 얘기 해 봐.

뭐 그렇게 빗나갈 일이 아냐. 그때 그 일을 잊진 못하지, 자꾸 거치적거리는 네게 상대는 째진 눈 한번 바로 떠보지 않더라고? 참 희한도 해, 그 연보라빛 편지지에 봉투 묶음 사서 또 쓰고 또 쓴 편지들. 그거 한번 봉투에 넣고 이름이나 적어 봤어? 꼬박 일년은 그렇게 썼을 것이야, 날이나 날마다. 하긴 일년은 안되는 구나, 다음 봄학기 휴학하고는 그냥 접었으니까. 그래도 그 아까운 글들, 지금 같았으면 하드에라도 들어 있겠지. 알다가도 모를 애야, 쳐다보면 피하고, 말을 걸면 아예 대꾸도 없거나 엉뚱한 대답만 하니.

그랬었다. 열아홉 첫 자유의 봄에, 우린 정말 그것이 자유의 봄이라고 믿었다, 우선은 멋있어 보이는 과목만 수강신청을 마쳤다. 영어도 《대학영어》는 얼마나 다른가. 모옴의 수필도 들어있을 지경이니 "달과 육펜스"를 영어로 읽는 느낌에, 거기다 갑자기 승격됨을 만끽하는 《인간과 가치》, 막연한 동경의 《글쓰기 기초》… 얼마나 떨리는 시간이었나. 제목부터 수상쩍은 "악의 꽃"의 시인은 우리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신에게의 상승과 악마에게로의 하강의 기원을 함께 품고있는 인간존재의 영원한 모순, 모순 속의 우울, 파리의 우울… 시인은, 나의 그가 말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고 배운 우리에게 "유용한 인간이란 언제나 무척 야비한 것으로만 보였다"고 말합니다. 유용한 인간, 야비한 인간…

그 시간이면 나도 모르게 쿵쿵거리던 가슴을, 친구는 죄다 안다. 무슨 단어도 그의 목소리로 들으면 아우라에 쌓여 숭고해졌다. 바로 그 아우라 같은 고귀한 단어를 내 가슴에 심어준 그는 그러나 강의가 끝나면 교실 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일자로 째진 입에 자물쇠가 잠긴다. 액자유리 뒤에서 입을 꼭 다무신 아버지나 똑 같다. 일부러 지각을 해서 출석부 고쳐달라며 이름을 각인시키기를 되풀이하고 ― 각인이라는 단어도 그로부터였다 ― 리포트는 기일을 넘겨서 교수실로 간다. 교수실이라야 젊은 강사들이 함께 쓰는 곳, 여고 때 교무실에 비하면 널부러져  쌓인 책들하며 꾀죄죄하기도 했지만, 뭔가 개성적인 바로 이것이 고차원이구나 믿었다. 강인하게 일자로 다물어진 입은 그러나 3cm 정도의 가벼운 고개끄덕임으로 대신했다. 한 페이지가 빠졌노라고 다시 가져간다, 그럼 아무 말 없이 받아 아무 책 위에나 놓는다. 저기요 지난 시간에 01반 리포트… 이번엔 2cm 끄덕임. 한번도, 왜라거나 자꾸 늦으면 안되어요, 그런 핀잔도 없는, 강의실 밖에서는 도통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는 표정으로 빗장을 내걸고 있었다. 바로 그 빗장에 매료되어… 아니 속이 상해서, 나는 달아올랐다. 부글부글 끓었다.

한번은 바싹 지나치는 시도를 감행했다. 검푸른 잉크냄새와 함께 검푸른 바닷물처럼 냉기가 건너왔다. 오싹했다. 차가운 유리 속 아버지 냄새도 그랬다. 어버이날 다음은 스승의 날이었다. 꽃을 보내고 싶었다. 이름을 쓰지 않는다면 상관이 없을 것이다. 5월의 저녁은 알맞게 부드럽다. 카네이션은 무슨, 내 마음은 순 장미였다. 장미 열송이는 큰 모험이었다. 빨강색은 부끄러워서 참았다. 바깥에서 보이는 창문에는 불빛이 별로 없었다. 4, 5층엔 몇 개 켜져 있었지만, 그것이 다 꺼지도록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악 어두워진 복도를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 불빛이 새어나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 문 앞에 다발을 가만히 놓았다. 아차, 내일 아침 출근길에는 조금 시들겠지. 하지만 지금 직접 부딪친다면 고개를 3cm 끄덕일까, 아님, 장미라니 이게 뭡니까 하고 모처럼의 변형을?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이게 뭡니까? 이게 뭐임?

도망치려던 나는 곧 다시 돌아가 다발을 집어들고는 뛰었다. 크게 흔들리는 통에 꽃잎은 벌써 시들했다. 움켜쥔 왼손바닥에선 풀 냄새가 났다. 오른 손으로 꽃잎을 흩뜨렸다. 부드럽고 촉촉한 온기가 달라붙었다. 열송이 꽃잎을 그렇게 뜯었다. 향기가 서러운 아우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아우라의 독에 빠져들었다. 그때 내가 몇 시간을 밖에서 서성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갔던 날, 친구는 현관 문지방에서 갑자기 튀어 나왔다. 어찌나 갑자기 들이대는지 둘의 코가 맞닿는 줄 알았다. 그녀의 냉기가 아리도록 내 볼을 때렸다.

친구는 꼬박 일년을 나를 힐난했었다, 마침내 내가 제풀에 꺾일 때까지. 나는 그를 폄하하기 시작했다. 그는 언젠가 노교수가 된다… 책 속에 묻히면 좀벌레들과 함께 살리라. 아버지의 누런 콘사이스와 몇 권 남은 동아세계문학전집에도 그런 하얀 벌레가 기어다녔다. 0.3mm 샤프로 찍은 점보다도 더 작은 하얀 벌레들이. 축축한 벌레들과 살아가는 그의 이미지에 내 발등이 다 스물거리며 시려왔다. 나는 그를 지웠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그 뒤로도 나를 홀대했고, 그 냉기는 지금도 줄지 않고 나를 채근하며 따라다닌다.

가장 심했을 때는 몇 년 전 유치원에서 한 아이에 빠졌을 때이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아이들 천지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 당연히 제일 안움직이는 녀석이다. 반일반 아이들이 더 심하게 딩구는 데 비해, 아이들 절반 이상이 떠나고 난 종일반의 오후는 시무룩해지는 표정이 번지는 게 보통이긴 하다. 그 아인 그런데 아침부터 혼자만 논다. 종이찢기, 마음대로 그리기 시간에는 괜찮다가, 인사하기, 이야기하기, 동시화 외우기 시간에는 입을 다문다. 활발하고 예쁜 달님반 선생님이 달래도 끄덕없다. 달래면 달랠 수록 입만 다무는 게 아니라 아예 긴 눈을 질끈 감는다. 이마가 유난히 넓어서 눈은 얼굴중심 저 아래로 내려간다. 입술과 평행선을 이루며 완강한 수평선 두 개가 그려진다. 눈물이라도 날까 무섭게 질끈 감은 눈에선 정말 파도가 일렁이는 느낌이 온다. 소리내어 울지 않는 아이가 정말 두렵다. 가끔 들르는 외할머니는 손자를 떼놓고 갈 때도 참 교양있지만, 특히 화려한 미소와 알파로 원장을 격려한다. 그땐 내가 아직 보육교사 양성과정에 다니기 전이었고, 그냥 원장의 햇님반 보조였다. 오전 에어로빅에 사우나를 거친 원장이 출근하는 것은 12시 점심식사 시간 직전, 종일반 아이들 식사를 챙기려 온다. 그러나 잦은 점심약속으로 그 또한 내 몫이었다. 그리고 나서 반일반 아이들 물품 정리하는 등 일을 마치면 결국 4시나 되었고, 그때서야 다른 아르바이트를 향하곤 했다. 뒤돌아보면 유리창은 마침 반사되는 빛으로 내부를 비추지 않고 그저 반짝인다. 남겨두고 오는 아이얼굴 아래쪽의 두개의 완강한 직선은 괜히 내 가슴을 두 번 갈라놓는다. 누구의 애일까? 전혀 닮지 않은 외할머니, 그렇담 아빠의 얼굴일까? 혹시 유창한 수사학의 세계에서 갑자기 입을 꼭 다물던 그 선생님?

친구는 그때 내 미친 상상을 어찌나 혹독하게 비난했는지, 난 그만 친구와 이별을 시도했었다.  넌 어떻게 일자 눈만 보면 무조건이야? 조금도 나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친구와 더불어 사는 것은 고문이었다. 이 진드기를 떼어 내려면 내가 죽는 수밖에 없지 싶었다. 아르바이트 카페에서 퇴근 시간을 넘기고 술에 잔뜩 취하기도 했다. 카페가 다 끝나고 주인 언니네가 퇴근할 때서야 나를 데려다 주면 새벽이 다 된다. 놀랍게도 그 시간에 이미 새 날을 시작한 사람들이 거리를 깨우고 있다. 그런 날 초인종을 누르면 어머니는 기겁을 하시는데, 친구는 내색도 없다. 술에 취하면 친구가 나를 상대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취하는 날이 잦아졌다. 난 낮의 일자리를 잃었고, 밤의 카페주방이 전업이 되었다.

순한 영어교사의 딸은 분명 계급하강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나를 달래셨고, 답은 보육교사 양성과정이었다. 어머니의 꿈처럼 멋있는 국어선생도 초등교사도 못된 딸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이었다. 일년 과정을 졸업하고는 겨우 낮생활로 돌아왔다. 그러나 식당보조와 정식교사 사이, 그것이 실제 내 직업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소규모 유치원을 운영할 자격이 되었는데, 그만한 돈이 어디 있는가. 아무리 저녁시간 아르바이트를 해서 보태도 어림없었다. 게다가 2월 말이면 이동이 잦았다. 폼으로 대학을 다녔던 정식 유아교육과 출신들도 직업 얻기에 관심이 커지자, 양성과정 출신은 밀려나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이런 변화가 왔다. "대우도 못받는" 남의 유치원 보육교사 자리 알아볼 수고말고, 여기 동생네 치과병원 우선 돌보라는… 이모는 원하는 것이면 다 하신다. 동생, 그러니까 이종동생은 모교에 남으려고 "시간만 버렸고", 이제와 개업하는데  진료밖에 모르니 병원 살림을 좀 맡으라고, 이모는 반 강제셨다. 나더러 아예 간호조무사 자격을 따라시며, 후일 산후조리원과 영아원 유치원을 연결하는 비젼 속에 나를 집어 넣으셨다.

아직은 낯선 오피스텔의 아침, 눈을 떴을 때 친구를 발견하지 않은 잠시 순간을 느긋이 즐기고자 난 이불 속으로 더욱 기어 들어간다. 출근이 바빴던 보조 때나 보육교사 시절에도 그랬다. 깨어나지 않아야 친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이 되는 안도감을 느낀다.

우유 한잔 마시자! 친구는 곧 목소리를 높혀 우리의 하루를 시작한다. 제발 흰쌀밥에 조선간장 찍어 김을 덮어먹고 싶어하는 내 기분은 뒷전이다. 요즈음엔 사시사철 구운 김이 있는데도 말이다. 아침부터 간장 된장 김치 같은 무식한 냄새를 풍기면 직장 나가는 여자의 하루는 끝난다는 것이다. 옷에만 베니? 그렇담 갈아입고 나가지. 하지만 머리카락 켜켜에 깊숙이 스며든 냄새는 어쩔 도리가 없어 응?

그렇게 시작하는 잘난 채는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어 식탁에 놓는 2, 3분 동안에 두서너 가지 뒤따른다. 저런, 그 긴 컵은 안되지, 넌 또 우유처럼 기름진 게 없다고, 아니 우유도 꼭 된장국그릇만큼 씻어야 한다고, 한 나절 컵 씻느라 싱크대 손 담그고 있을 것 아냐! 나는 유리컵이 길고 좁을 수록 예쁘기도 해서 집어 들지만, 좁은 컵에 따라야 우유를 덜 먹을 수 있는 계산이다. 그것을 이젠 잊었나? 엄마 젖꼭지가 우유꼭지로 바뀐 것을 참지 못해 울어대던 그 옛날을?

우유 알레르기에도 내 유년시절은 따뜻한 보호 아래 있었다. 다만 그 시절은 꿈처럼 빨리 지나가 버렸다. 우유를 치즈를 좋아하고 싫어할 계제가 못되는 웅크린 사춘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사진으로만 남은 아버지는 속수무책이셨다. 천장쯤 높이에, 그것도 유리액자 안에 갇혀있는 아버지 얼굴로는 방바닥의 우리를, 길거리의 우리를, 교실의 우리를 어쩌시지 못했다. 해마다 봄빛을 받아도 후줄근한 살은 여전히 피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친어머니 슬하에서도 질펀한 흙덩이 사이를 바지 가랑이 젖지 않게 조심조심 걸어야하는 계모의 아이들처럼 구부정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우리의 등이 미리 굽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 하셨다. 말끝마다, 아가, 등 좀 펴어라 하셨으니까. 한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에 가난과 수치라는 이상한 쌍둥이가 들어왔다. 이제 가난에 조금씩 적응되는가 싶으니, 수치심이 빠져나간 자리에 상대적 박탈감이 들어왔다. 박탈감보다 무서운 것은 무력감이었다.

하얀 눈 내리는 아름다운 날도 행복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손이 시려 털장갑을 사러 상점을 기웃거리더라도 속없이 백화점까지 가면 안된다. 그 날은 어쩌다 스포츠센터가 있는 백화점 까지 걸어가게 되었고, 장갑 쪽을 기웃거리다보니 매장은 밝기도 했다. 은은한 눈처럼 하얀 목도리 위에 다소곳이 얹힌 하얀 털모자… 장갑까지 있을까? 가까이 들여다보는 내게 점원이 다가왔다, 뭘 찾으세요? 비싸서 안 사는구나 들킬 새라 실눈으로 안보는 척 들여다본 값은 8천원 남짓, 그까짓 나도 살 수 있겠다. 예상보다는 싼 느낌이었다. 용기를 내어서 이거 좀… 하면서 거의 다 살 뻔했을 때였다. 세트 상품이지만 따로도 되거든요, 처음보다 훨씬 친절해진 목소리가 말했다, 목도리만은 5만… 다음 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동그라미를 잘 못 본 나는 부끄러움에 달아 그렇게 도망쳤다. 그 뒤로는 하얀 목도리가 아닌 아이보리도 베이지도 무턱대고 밝고 깨끗한 옷가지는 무서워졌다.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무섭다. 연한 빛깔  깨끗한  빛깔은 부이고 선이며, 후줄근한 내 살은 어두운 빛깔 속에서야 겨우 안심이 되었다.

병원을 처음 둘러보던 날부터 내벽 전체가 하얗게 칠해진 공간은 사람을 불안하게 했다. 여기저기 낙서도 있는 알록달록한 유치원들과는 사뭇 달랐다. 드디어 건물 사회 내에 우리병원을 소개하는 날이 왔다. 그런 일은 정서적으로 가까운 피부과 쪽에서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빗나갔다. 여기에도 동창이라야 통하는지, 동생은 피부과와는 누가 봐도 경쟁관계인 대학 출신이었고, 하긴 같은 대학이라도 치의대와 의대는 그렇고 그렇다나? 동생은 이과에 문외한인 내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무조건 위아래 층 할 것 없이 문마다 노크했다. 문이 열리면 매번 주춤하는 나. 속으로는 안열리기를 기대하는 나. 그는 바로 그날 청소년연구소인지 심리개발연구소인지 그 쪽 사무실이 줄줄이 붙어 있는 어느 방 하나에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른 나무껍질 같은 어두운 얼굴색에 셔츠도 검게 입은 우울한 어깨너머로 잠깐. 우리를 보고 잠시 일어서는가 했지만, 문까지 인사차 따라 나서지도 않았다. 대개는 그랬다. 졸업하고도 대학병원에 남아서 온갖 경쟁을 겪은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월하게 해 넘기고 있었지만, 거절에 쉽게 상처입는 나는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애써 참았다. 내가 의사동생을 축하해 줄 수 있는 건 접수창구 유리창 앞에 레이스로 뜬 작은 커튼을 만들어 꾸며준 것이 전부였고, 이제부터 나는 무조건 동생의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울고 웃기도 주인 따라 해야 한다. 몇 층을 그렇게 다니던 동생은 OO여자고등학교 동창회 간판을 보더니, 훗훗, 우리도 여기에 동창회사무실 낼까 언니, 하고 웃었다. 언제적 같은 학교? 속으로 의아해도 겉으로는 얼른 따라 웃었다, 그때 내 앞에는, 들어선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술을 열지도 않고서 냉랭하게, 뭡니까, 네, 알았슴… 정도를 말하던 굳은 얼굴이 다가왔다. 동생을 따라 웃는 내 웃음은 펼친 채 멎어서 한 동안 미키마우스 인상이었을 것이다.

왜, 정말 그러자니까, 여기 치과간판과 나란히. ―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날, 생글거리며 명함집을 들고 서있는 의사동생과 기정떡 쟁반을 들고 서있는 아무 것도 아닌 나말고는 아무도 없는 어스름 복도에서 나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알 수 없는 사람의 알 수 없는 싸늘함 때문에 마음 한 구석이 덩달아 싸늘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 적 기억 끝간데 묻어둔 얼음덩이가 순간 되살아 난 때문일까? 그리고 추우면 사람은 뜨거움을 찾아 갈망한다. 차가움과 뜨거움의 혼란 가운데 나는 먼 데 기억 속의 차가움과 그때의 혼란을 함께 찾아 헤매며 달아올랐다. 그는 누군가 이기도하고 아니기도 했다. 나는 부지런히 복도들을 기웃거리며, 그의 사무실을 확인했다. 사람들이 뜸한 시간대에 가면 간판은 잘 볼 수 있으나, 대신 안 풍경이 보이지 않아서 긴가민가했다. 처음엔  그의 직업은 출판과 관련되는 무엇이었을 것이다라는 선입견으로 출판사 간판 쪽을 기웃거렸다가, 코너에서의 발걸음 수 등을 생각해서 그 옆의 연구소 쪽이 더 맞다고 생각되었다. 결국 그가 있었던 곳은 무슨 연구소이긴 하지만, 특히 그가 책임자가 아님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는 이 건물 상근은 아니라 했다. 방통대 나간다던가, 어디 겸임이라던가? 나는 미아동캠퍼스와 성수동캠퍼스 싸이트에 들어가 그럴싸한 과목들 교수명을 다 찾아 기웃거렸다. 몇날 밤을 새어도 과목명도 교수명도 모르는 어떤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언젠가부터는 눈을 들면 사방으로 거기에 있는 마른 나무가지 같은 그의 모습이 색유리처럼 내 시야를 가렸다. 병원 접수실 1평방미터 하얀 벽 사방에 그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겨우내 마른 나무 가지는 이제 조금만 껍질을 벗겨내면 아직 살아 물이 흐르는 연녹색으로 드러날 것이다.

초근목피를 이야기해주시던 아버지는 초근과 목피를 직접 보여주시기도 했었다. 칡넝쿨은 지금은 아카시아만큼이나 아니면 더 심한 숲의 원수가 되어 있지만, "그땐 이게 밥이었단다, 이 보아라, 밥칡을." 추석성묘 다녀오는 길의 칡넝쿨은 그냥 너울너울 푸른 잎일 뿐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꼭 "그땐 이게 밥이었단다" 하셨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사오신 밥칡은 밥이 아니라 칡이었고, 그 자체로서도 그리 깨끗치도 못한 것이 뭔지 상급은 아니었다. 칼로는 잘 안되어 작은 톱으로 살금살금 썰어 놓으면 금새 누렇다 못해 시커멓게 되고, 치마 자락에라도 묻으면 영 버리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단 하나, 흥부의 호박도 이런 톱으로, 물론 대톱으로 켰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어서였다. 칡은 톱으로 아무리 썰어도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여기 저기 밥은 빨아먹고 칡만 뱉어놓은 몰골은 흉하기만 했다. 나중에 아버지는 안계셨지만, 하얀 천에 품어놓은 비밀스런 핏자국이 마르면 칡색깔이 떠올라 더 이상 칡을 씹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럴 때면 친구는 유난스럽다고 눈을 흘기고는 칡그릇을 제 앞으로 당긴다. 밥이야, 밥. 밥.

밥칡은 밥이라 하는 사람과 칡이라 하는 사람으로 사람을 갈라놓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아버지 딸이면서 아버지의 밥 대신 칡을 택했다. 밥칡을 칡이라고 하는 세계는 엉뚱하게도 이모의 세계였다. 어머니는 이모의 손 위 언니이므로 어머니의 세계 또한 그럴 것이나, 어머니는 부실임을 지켰다. 부실? 말장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부실이라 부르시면 웃음이 나곤 했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제주 부을나의 자손이었다.

아버진 4월 10월 삼성전 앞의 춘추제를 한번 다녀오시고 싶어하셨단다… 나중에 어머닌 왜 그 말을 하셨을까. 잔디로 덮혀 무슨 구멍인지 모를 띄엄띄엄 세 구멍에서 사람 선조가 나오셨다니. 그땐 아버지의 여름방학이었지만 날은 서늘했고, 오른 쪽 구멍 언저리에선 정말 안개 같은 속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손짓한다는 섬뜩한 기운도 느껴졌다. 나는 하필 원숭이띠인데, 저기 풀 밑에서 신인이 아닌 원숭이가 손을 내미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아빠, 나 저어기 원숭이 안할래, 그거 대신 나비하면 안돼?

아가야, 그래 나비야, 누가 널더러 원숭이 하래? 나는 그 풀 밭에서 유일하게 사랑스런 작은 노랑나비에 빠졌다. 별명이라도 나비가 되어 기뻤다. 실제로는 움직이기를 너무 싫어하는 나는 어떤 양란에 피어난 노오란 꽃잎처럼 줄기 끝에 붙어 흔들거려도 떠오르지 않는 붙박이 나비였다. 그러다 중학교에 가서 난데없이 사전찾기 병에 빠졌을 땐 실망이 너무 컸다. 나비목 불나방과의 곤충. 날개를 편 길이 약 40mm. 온몸에 암갈색 털이 촘촘히 덮여 있으며, 앞날개는 흑갈색, 뒷날개는 오렌지색 바탕에 무늬가 있음. 콩·뽕나무·머위 등의 해충임. 그러니까 부나비는 기분 나쁜 불나방과 똑같이 엄청 나쁜 의미였기 때문이다. 성씨 때문에 나는 화려한 나비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감수성 따라 내 운명에 대한 예감에 무서워 떨었다. 별명을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러다 고 2때 인구조사 통계가 발표되었다. 우리 성씨는 인구 8,565명으로, 순위는 274성씨 중에 108위였다. 이런 기억은 순전히 오기로 일기장에 적어둔 덕이다. 나중에 명부의 강 저편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 ― 그게 가능할까 ― 뭔가 중요한 보고라도 될 듯이 난 그렇게 적어 두고 외웠다. 성씨가 운명이면 하는 수 없다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발음만 같을 뿐 아무 상관없이 간쑤성 지방에 살았다는 티베트계 부씨마저도 남 같지 않다.

하긴 부씨말고도 사람은 어디에나 넘쳤다. 막상 아주 대도시로 나온 뒤, 사람들은 어디에고 꽉꽉 들어찼음을 알게 되었다. 어디를 가도 앞쪽은 높은 건물의 연속이고, 삼겹살 냉면집 실내포장마차와 카페들이 가끔 노래방과 섞여 자리한 도시. 거기에 크고 작은 병원 머리방 드물게 목욕탕도 끼어있으니 아무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밤에 조금 어두운 공간이 있으면 그곳은 은행이거나 관청이거나 그랬다.

그런 어느 한 구석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건물은 평범한 현대식 건물답게 고층에 장방형 구조로, 독특한 점은 돌아가는 층계가 한 귀퉁이에 있다는 것 정도이다. 뉴욕 같은 곳을 영화로 볼 때 밖에 나 있는 비상층계를 건물 안에다 넣어서 지은, 그렇게 해서 지그재그가 아닌 계속 타원형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느낌을 준다. 그의 사무실은 몇 개월이 지나서야 우리 치과 층에서 두 층 위 다른 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내가 들어있는 주거용보다는 한참 아래층인데, 5층까지와 6층 이상은 서로 다른 엘리베이터를 쓰기 때문에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 내가 우연히 사무실로 올라가는 그의 뒤를 따라 치과에 가는 척 그 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고 해서, 미리 내리면서 그가 어디에서 내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려야할 치과 층을 지나쳐 더 올라갈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내 주변머리이다. 누구라도 믿지 못해 할지 모르지만, 이론상으로 위층 사람의 정보를 얻기는 어렵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아니면 다른 엘리베이터로 사는 형편이니 말이다.

그런데 어디서 그를 다시 만날까? 사무실 건물의 좁은 복도란 최소한의 이동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층 입주자들이 스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오히려 꼭두새벽에 집을 나선 사람들이  영어학원이나 헬스클럽을 거쳐 황급히 아침을 먹으러 몰리는 지하 음식백화점에서 붐비기 마련이다. 아니면 다시 점심을 먹으러 흩어지는 근처 식당가에서나. 나는 그러나 이런저런 출근행렬과 마주치지 않는다. 건물 중간층 이상은 작은 평수의 오피스텔이라서 나처럼 거주하는 사람도 있지만,  X기획 또는 Y출판사 또는 Z칼라인쇄가 사주 철학원과 함께 섞인, 시체말로 주상복합 퓨전이다보니, 드나드는 사람 또한 각양각색이다. 나이로 어림 잡아도 20대에서 60대가 드나든다. 하기야 조금 낮은 층에 들어선 치과와 피부과에 중국한의원까지를 생각하면 한 현대판 면소재지의 축약과도 흡사하다.

결혼을 할 수 있기까지 얌전히 동생네 병원 살림 맡아서 하다 보면… 그것이 내 노처녀시절에 대한 이모의 현명한 처방이었다. 어머니는 속수 무책으로 이모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심약하신 아버지가 살아계셨다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심약'은 그저 정서적으로 쓸 때는 미덕이 될 수도 있는 형태소다. 형태소 같은 단어는 내가 일년간 국문과를 전공한 이래 넓어진 내 어휘에 속한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심약은 신체적 심장의 약함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심장판막증인 채 가정을 가지셨지만, 남들 보다 성큼 큰 키로 미국사람이나 되는 듯이 멋진 영어선생님을 하셨다는 아버지. 아버지의 영어는 기억할 수 없지만, 긴 그림자는 기억의 끝에서 아물거린다. 겨우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설까 말까, 그렇게 일찍부터 어머닌 미망인답게 겸손했다. 겸손은 외할아버지의 미덕이었고, 어머닌 다른 방도를 모르는 분이다.

어머니 손아래 이모는 당차고 밝아서, 의대생과 연애라는 어려운 관문을 뚫고 결혼에 돌입하시고, 그래도 처음엔 너무도 조촐한 시댁 살림 탓에 고생도 많으셨다 했다. 그러나 이재에도 훤해서 대처에 자리잡자마자 적당한 크기의 종합병원을 내셨단다. 누군가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다 했다. 지금은 시댁과 친정 온통을 좌지우지하는 실세다. 자녀 또한 계획표대로 잘 되었다. 의대생 아버지에게서 생산된 딸답게 소꼽놀이에서도 의사 역만 했다는 큰언니도 의사다. 내리 딸만 셋을 낳아 슬그머니 겁도 났었지만… 이라고 가끔 입버릇처럼 말하시는 이모는 기필코 아들을 보셨고, 그 모두가 의과대학 아니면 최소한 치과다. 나더러도 약대나 간호과를 가는 한에서 등록금 전액을 제의하셨지만, 어머니는 딸이 의사같은 것 못할 줄 미리 알고 계셨는지 욕심내지 않으셨다. 거기서 약사나 간호사는 이모네 의사자녀들과 너무도 확실한 일직선상의 비교이고 보니, 제하고 싶은 데로 나 둬라 좀, 하는 무덤덤한 반대로 딸 손을 들어 주셨다. 그러니까 학교 신문에 시 한편이 뽑혔던 나는 속없이 국문과에 진학했다. 국어교육과 아니면 교육대학을 갔어야 어머니 체면이 서는 선생님이 되었을 것을, 아니 그보단 대학 자체를 마칠 수나 있었을 것을. 인문대학은 등록금이 사범대학과 비교가 되지 않게 비쌌다. 그런 차이를 알 수 없었던 우리모녀는 이모의 눈총을 받았고, 그 대신 눈총과 함께 오는 돈은 받지 않았다. 첫사랑을 앓던 나는 1학년 성적이 시들했고, 10% 교직 이수자 신청에서 탈락하자 2학년을 포기했다. 물론 처음엔 휴학이었다. 봄날을 을씨년스럽다고 표현하는 작가를 이해하게 되었던 그런 봄날이었다. 을씨년스럼은 계절을 타지 않으리라는 것도 함께 배운 봄, 그 봄에 꿈은 접혔다. 그리고 여름이 가을이 지났다. 겨울에는 아예 두문불출, 이듬해 봄의 재생을 믿기 어려운 긴긴 잠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역시 심약해진 ― 이번에는 통상적인 의미에서 심약한 ― 어머니랑 조촐하게 사는 데 진력을 다했다. 우리에게는 결정적으로 에너지가 부족했고, 그래서 늘 돈이 부족했다. 돈 없이 돈 가진 자 무시하기, 그것 또한 우리의 놀이요 자존심이었다. 가까이는 이모네… 멀리는… 하지만 꿈도 없는 십여년의 세월은 아무 것도 가져다 주지 않았다. 내가 치과에 따라 들어온 것은 어머니가 더 이상 내 밤낮의 일을 참지 못해서 이모의 돈에 굴한 셈이었다. 너도 좀 쉬면서 결혼문제는 이모에게 맡기자, 자신이 없어진 어머니가 안쓰러워 더는 고집을 못했다. 그리고 병원 이삿날… 나는 그를 그렇게 만났다.

누군가의 조금 찡그린 닫힌 얼굴이 왜 그리 떠나지 않는지 모르는 동안, 처량한 신세도 잊은 채 나는 행복했다. 밤중에도 깜깜한 천장에 퍼지는 얼굴에 몰두했다. 천장이 뚫리면 더그매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건물에서 24시간을 산다. 그런데 그를 마주칠 확률이 그리 없다니.

그를 가까이 오래 보게 될 때까지는 몇 달이 걸렸다. 갑작스런 가을 바람에 어깨가 움츠리던 아침, 난데없이 함께 아침 못 먹었다고 지하로 불러낸 동생을 보러 들어갔을 때였다. 해장국과 설렁탕만을 파는 저쪽 코너에 그가 숟가락을 쥔 모습이었다. 유난히 각도를 안으로 구부려 쥔 숟가락은 몸과 평행이었고, 그러자니 고개를 숙인 자세였다. 고개를 숙이고 아침 해장국인지 설렁탕을 먹는 남자. 아 센 머리가 보이던 그가 아직 미혼의 그러니까 확실히 독신이었어?

커피자판기 쪽으로 움직이는 그를 따라, 동생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내 고갯짓은 영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따뜻한 아침을 주는 어머니나 아내가 없는, 그러니까 소유자가 없는 자유인으로 다가온다. 그는 자유인이다. 내 또래 약간 위로 보일까 말까, 그 옆얼굴엔 분명 나이테가 없다. 나 또한 자유인으로서, 조건에 관계없이 적어도 한 남자를 사랑해도 되는 처녀다. 처녀의 자유, 이 자유는 오직 그를 향한 집념이 되어갔다.

이제 그가 내 주문에 걸려 내 코트에 들어오면 된다. 그는 우선 치통을 알아야 한다. 그의 치아가 그 얼굴 생긴 만큼이나 강단있고 영 상하지 않는다면, 그렇담 식당에서 뼈다귀를 잘 못 깨물든, 뭔가 사금파리 조각이라도 들어간 음식을 잘 못 먹다가 이가 부러지든, 아니면 누군가랑 층계에서 냅다 부딪쳐 앞니라도 어긋나야 한다. 살아가노라면 별별 일에 부딪치게 마련 아닌가. 가장 좋기는 퇴근 길 나서다말고 바로 이 근처에서 날깡패에게라도 걸려 쥐어 박히고서 이가 부러지든지. 그는 어쨌거나 치과에 나타나면 되었다. 그 다음 속수무책으로 누워있는 그를 관찰하는 것은 내 일이다. 그가 치과에 나타날 확률이라면 악담도 서슴치 않았다. 속으로 하는 악담이야 누군들 못해.  

어느 날 난 그의 아침 식탁 곁으로 다가간다. 호주머니에 넣고 있는 손바닥 안에는 스태플러 침 하나가 구겨진 채 숨어 있다. 그는 너무 가까이 지나가는 사람에 놀라서 고개를 든다. 그 사이 슬쩍 그의 시래기 해장국그릇 속에 쇳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나는 그냥 죄송하다는 투의 우물우물 말을 더듬고 만다. 계속 숟갈질을 하는 그의 입안에서 딸그락 소리와 함께 송곳니가 망가진다. 송곳니가 아니래도 좋다, 어딘가 스태플러 침은 그의 치아를 손상한다. 그는 치과에 올라온다. 그가 올라오기 전에 난 부지런히 접수부를 닦고, 작은 커튼에 살짝 향수를 뿌린다. 짜증난 그가 더욱 찡그린 얼굴로 유리창문을 밀기도 전에 내가 안쪽에서 열어준다. 많이 아프셔요?

아니 어떻게 제가 아픈 걸? ― 아프시니까 오셨겠지요. 우선 등록 하셔야지요. 원장선생님은 아직 커피 마시는 중이네요.

그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나는 조신하게 말한다. 성함은요? 아니 보험 카드를 주셔요. 안가지고 오셨다구요? 그럼 다음에 가져다 주셔도 되어요. 성함이?

그의 이름을 나는 여기 말할 수 없다. 물론 그렇게 병원을 찾아온 적도, 이름을 기록한 적도 없으니까. 하긴 알더라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 단 하나  '그'는 그냥 ㄱ이어도 좋다. 더구나  내 별명의 ㄴ자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ㄱ자와 ㄴ자가 얼마나 오묘하게 어울리는가 너 알고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친구에게 묻는다. ― 그거야 ㄱ과 ㄴ이지, 뭐 위 아래로 쓰면 ㅁ자가 되어서 얼마나 안정감있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지, 그런 걸 너만 섬세하게 안다고 생각하진 마. 그 위에 ㅅ자를 놓아서 아예 집을 짓지 그러니?

친구는 모르고 있다. ㄱ자와 ㄴ자를 그냥 위아래로 두지 않고 가까이 밀어 놓으면 어떤 형상이 되는지를. 동서남북 어느 편에서 보아서도 완벽하게 끼이는 그 적나라한 포개진 자세를 그녀는 알 리가 없다. 콜비츠의 《사랑하는 사람들》어때? 심오한 의식의 작가에게서 하필 가장 식상한 포즈의 작품을 인용하면 그녀의 표정이 어떨까? 그녀에게 내가 침묵하는 건 내숭이 아니다. 자존심이다. 나의 그를 지키는 자존심. 만에 하나 나의 외설스런 생각을 눈치챘다가는 그녀는 당장에 그를 형이하학적 존재로 단정지을 것이 뻔하다. 그녀는 어떤 경우에는 단견에 가깝게 철저히 속단하고 확고하다. 그는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의 사무실, 그가 있던 사무실 문 위에는 A4 평으로 크기 정도의 작고 위엄있는 간판으로  XX심리문제연구소 라는 간판이 있다. 수 십번 바라본 간판이지만, 그것도 다들 퇴근하고 난 밤중 시간에 올려다보고 가곤 했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로 사람들이 돈을 버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가 하는 일이 그밖에도 무슨 대학의 무슨 강의를 한다는 것, 그 정도면 내숭을 가장한 채 알아낸 정보치고는 적은 것은 아니었다. 그곳은 심리학연구소가 아니라 심리문제연구소니까, 간판으로 미루어 대학의 학문보다는 조금 낮은 연구소라 다행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친구는 정말 깔깔 웃어버렸다. "무슨 학"자가 붙어야 높은 학문이라구? 그래 뭐, 학문연구소가 아니고 문제연구소니까 조금 더 낮다고 치자, 그럼 너하고 되는 수준이라고 상상하니? 방통댄가 어디 겸임교수라 안했어? 꿈도 야물다! 우리가 요샌 소설이라도 읽느냔 말이야. 영화나 뜨면 그런 책 사볼까, 하긴 그 짓도 이젠 안하잖아?

사실은 내 젊은 시절 전부를 테트리스 화면과 살아왔다. 아무 것도 투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시간만 죽는 절대가 마음 편했다. 업보처럼 쌓이는 색색의 조각들, 전사처럼 수평선을 평정하는 내 오기, 다른 게임은 유희요, 다른 취미는 사치였다. 살아 숨쉬는 상대가 없어 비교가 안되는, 비교가 안되어 상처가 없는 화면. 그 추상세계에 매달려 살아온 밤들, 밤들.

하긴 저녁 아르바이트 땐 그것도 어려웠지. 기계적인 시간 배분, 6시 50분쯤 집을 나서서 유치원 7시 반에서 40분 도착 - 5시 반 출발, 레스토카페 6시 반 도착 - 1시 출발, 집에 도착하면 1시 20분. 퇴근은 주인언니 남자가 시켜주니까 빠르다. 하루에 접하는 두 세계는 너무 달라서 처음엔 상쾌했다. 유년에서 성년으로, 천사에서 속물로.

이건 나만이 아는 비밀이라고 생각하는데, 낮에 만나는 눈동자들은 얼굴 절반쯤에 있는데, 저녁에 마주치는 눈들은 이마 쪽으로 훌쩍 올라가 버린다. 하루에 한번씩 그렇게 자주 인간의 눈의 위치가 변하면 어지럼증을 타게 된다, 그래서 야위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 일욕심과 돈욕심 때문으로 생각하시고 '살 안 빠질' 제안을 받아들이셨을 것이다. 출퇴근도 안하는 조건, 하지만 이 치과병원에서 덩달아 가운만 입고 있는 직원신분은 애매하다. 내 나이 때문에 위생사도 보조사도 나를 그냥 언니라 한다, 기공사도 누나 대신 언니라 한다. 또 원장의 손위라는 부가가치가 있으니까 다들 친절한 것 같다. 하지만 유치원 보육교사 자격 외엔 운전면허증도 없는 순 무자격자가 치과접수에 앉아 있기 힘든 실상이 곧 드러났다. 첫 환자와 상담을 잘해야하는 간판인데, 내 하얀 이의 유혹만으로는 부족하다. 난 다시 궁지에 몰리고 있다.

이런 내게 무슨 꿈이 소용될까. ― 넌 꿈을 꿀 가치에 미달 아니냐? 나는 훽 친구를 겨냥하고 고개를 돌린다. 친구는 내 반박을 아예 무시할 양으로 그새 어디로 물러났는지 조용하다. 그럼 참 오랜만에 나 혼자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꿈이라면 나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인생에 꿈 같은 것을 믿기에는 너무도 생의 왜소함에 길들어 왔다. 누군가를 그리는 것? 그런 것은 꿈 축에 들지 않는다. 그건 정말 테트리스나 같다. 테트리스 화면도 나를 인식한 적이 없다. 그냥 내 삶 죽이기 상대로 적당할 뿐이다. 그 무미에 돌아버릴 것 같을 즈음, 어쩌다 살아있는 대상이 의식되었고, 그것에 추상적으로 목숨을 건다. 친구는 집착이라고, 나는 사랑이라고 우긴다.

아니, 사랑은 알 수 없는 말이다. 그의 그림자 그의 뒷모습 혹은 옆모습이 오피스텔 건물의 좁은 복도를 돌아 지나칠 때면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아려온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그의 앞모습은 기억할 수도 없는 것이, 단 한번도 그를 바로 쳐다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 그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그의 앞모습을 모르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모르는 앞모습에 꿈을 담아서 전혀 다른 얼굴을 숭배하는 것, 혹은 옛날 한번 박혀버린 얼굴을 대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좁은 엘리베이터 속에서 단 한번 가까이 섰던 날, 후다닥 자세를 옆으로 틀어서 그의 헐렁한 양복 옆구리만을, 더 헐렁한 주머니만을, 주머니에 반쯤 들어간 손등만을 바라보았음,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내려야할 층에서 내리지도 않고 계속 그러고 있다가 손등과 양복주머니와 양복이 함께 멀어지는 동작을 덜덜 떨며 바라본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문이 다시 닫히자 후우 긴 한숨을 쉬어, 아직 안데 남아있던 한 두 사람을 놀래키고도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함, 그것이 사랑이라면 또 모른다.

어쨌거나 열심히 바라는 건 순간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그 대신 무엇을 잃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된다.

그런 기겁할 일이 갑자기 닥쳤다. 불사우나라는 이름의 섬뜩한 목욕탕이 옆 건물의 꼭대기 바로 아래층에 새로 생겼는데, 겨울 시즌에 맞춰 개장한 전략에도 불구하고 겨울 초입은 따뜻하기만 했다. 그러자 공짜표들이 이웃에 돌았다. 그러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입시철이 된 것이다. 병원식구들은 퇴근을 서둘러 구경을 나섰다. 불기운은 이상한 돌무더기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옷을 반쯤 입은 채라고는 하지만 남녀가 한 동아리가 되어 멋대로 퍼져있는 공간들이 쉽게 편해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풍덩 함께 들어가는 수영장만 못한 것이, 몸뚱이들은 엉기적 드러나고, 이글거리는 불 때문에 기분 나쁜 배음이 살덩어리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우리 병원 식구들이라야, 위생사는 조무사보다 더 젊고 더 날씬하지만 미용체조인지 몸을 잘 움직여가며 불 곁에도 잘 견뎠고, 조무사는 몸매랄 수도 없는 퍼진 꼴로도 적극적으로 살을 빼려한다거나 땀을 내려는 동작을 하지 않았다. 우리 둘이서는 그저 무기력하게 앉아있는 자리조차 밀리고 있었다. 그 인간이 글쎄… 라는 난데없는 타령들도 정말 들어야할 옆 사람에게서만 멈추지 않고, 몇 사람씩을 건너서 뭉근 김 속에 섞여 들어가 멀리까지 떠다닌다. 좋으면 무릉도원이지만 나삐 보자면 연옥의 풍경만 같았다. 뜨거운 불기운에도 뼈마디가 늘어나기는커녕 잔뜩 긴장한 옹색해진 어깨는 앞으로 쏠리기만 했다. 핸드폰이 없는 나는 좋은 핑계가 되어 전화 올 데가 있다고 먼저 샤워실로 물러났다. 겨우 서서 뜨거운 몸을 식히기도 어려운 공간이었지만 찬물이 상쾌했다. 좁은 엘리베이터 공간도 구원이었다. 젖은 머리를 손으로 대강 쓸고 유리문을 나서 두어 개 층계를 내려 밟던 나는 그만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여자와 함께 바로 코앞에 나타난 것이다, 풋풋한 지성적인 여자와.

젊다 못해 어린아이 인상의 여자는 설마 애인일까? 그새 깜깜해진 사방 속에 뾰얀 얼굴은 창백한 달처럼 빛났고, 몇 발짝 앞이었지만 검은 머리와 어울리는 분홍빛 입술이 도톰했다. 그의 일자 입술과는 전혀 닮지 않은, 그러니까 사람은 자신과 닮지 않은 형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스쳐 지나지 않고 머뭇거릴 수도 없는 터라 아까운 걸음을 떼었다. 뒤돌아 보니 운동화스타일로 젊음을 과시한 여자는 풋풋함이 넘실대는 아예 아이였다. 연구소와 관련될까? 아님 방통대 학생인가?

나도 모르게 나는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도심이 아닌 외곽으로 빠져나가려는지 전철을 이용해서 나로선 다행이었다. 1미터쯤 거리로 가까이에 가 섰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대화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재잘거리며 흔들어대는 머리카락이 그의 코트앞자락에서 뭉개지고 있었다. 그를 올려보는 코는 그의 턱수염 자리에 닿을 듯 했다. 수염이 있었다면 닿을 거리였다. 아니 그냥도 닿았다. 외설스런 감동으로 소름이 끼쳤다. 얼마를 가다 내린 역은 완전히 주택가 가운데였다. 불빛 어두운 한적한 빌라들의 숲 속에 이르자 두 사람의 발소리는 더욱 활기를 띈다. 손을 잡고 거의 뛴다. 사방이 조용하니, 크로스로 맨 가방에서 절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학생이구나, 틀림없이 방통대. 그럼 제자인데 어쩌면? 더 빨리 달려간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소리가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누나, 추카추카, 얘야 어서 온, 여보오…

누나 축하해, 내가 만들었다, "축"자 여기 ㄱ자는 엄마가 쬐끔 고쳤다. "하"자는 완전 내가 했어, 엄마 그치? 추카추카! 아빠, 재수하면 두 번씩 말해줘야지? 누나야, 추카추카!

자 우리 딸, 고생했다. 그렇다고 아빠 오늘 차도 안가져 가셨는데 아빠한테 들른 거야? 자 어서 손만 닦아, 저녁부터 먹자, 요 돼지녀석도 배고픈지 귤을 몇 개나 집어다 먹으면서도 누나 기다리자는 구나, 기특하게.

엄마, 아빠, 우리 돼지야… 모두모두 감사해요, 이번에도 수능 모자라 떨어지면 어쩌나 너무 겁났어. 엄마 아빠 때는…

내 사랑은 환상이었다. 대상의 허상. 그가 내 소중했던 대학 초년 때 보들레르를 읽어준 풋나기 강사였을지, 나는 모르고 떠날 것이다. 그 뒤로도 십 수년씩 대학을 몇곱 다닌 엄청난 지식의 소위 해외파에게도 뿌리내리기 어려운 슬픈 현실이 있는지, 나는 모르고 떠날 것이다. 남자에게 아내의 돈은 살 속에 가시인지, 나는 모르고 떠날 것이다. 대도시 현대인의 사랑은 평균 3년하고 167일 두시간 지속된다는 어느 소설책에서 읽은 신빙성 있는 통계도 무색하다. 내 사랑의 봄은 겨울 초입에 산산조각이 났다. 시작도 없던 일, 끝이라는 단어도 우습다. 무엇인가를 쳐다보기만 한 내 젊은 날, 열아홉에서 오늘까지 육천 밤이다.

사랑이 아무리 부실해도, 아무리 속절없어도, 한번 쏜 화살은 그곳을 향해 날아간다, 일직선으로. 그곳에 아무도 없으면 그냥 지나칠 것이다. 지구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둥글다면 내 등뒤에 와서 다시 꽂힐 때까지. 그 살촉에 내가 쓰러지더라도 한 가닥 희망은 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늘 쏘아보면서 밀어냈던, 나를 위해 충고만으로 살아가던 내 친구 차례다. 그녀는 아예 내 삶을 ― 원래 그녀의 삶이기도 했던 ― 혼자 통틀어 살기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코멘트만 이 아니라 생으로 뛰어들어, 이성적인 그녀의 방식으로, 이제는 안쪽을 향하여.  

 

                                              *

채찍 모양으로 끝쪽이 가늘어지는 나의 더듬이는 우선 아름다움에서 확실히 나비만 못하다. 끝을 여왕의 가늘게 떠는 황금관 장식처럼 부풀린 호랑나비의 더듬이를 가졌다면 행여 그가 나를 바라보았을까? 굵은 몸은 아니나 몸에 비해 날개가 작다 보니, 화려한 색깔을 뽐내려도 나비에 댈 수 없는 운명이다. 앞 뒷날개 사이의 날개가시도 얼음짱에서 미끌어지는 나를 더는 지켜주지 못한다.

내일 아침해가 떠오르면 늦잠을 자지 않는 그가 커튼을 열어젖히고 하늘을 우러른다. 바닥에 떨어진 나방 하나가 썩은 잎 모양처럼 얼어붙어 있다. 그는 행여 글감 하나를 발견하여 나방의 생태를 생각할까? 어젠 달밤이 아니었던가, 첫눈이 내리기 십상인 음력 시월보름밤? 밤에 나방이 등불에 모이는 것은 온도나 습도 등 조건 따라 빛에 반응하여 날아드는 것이라지만, 이상하군, 달밤에?

그는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에 대해서는 정리가 필요한 학자다운 사람이다. 짚신벌레가 열자극에서 물러나며, 물고기가 물을 거슬러 올라 가려하는 것 따위, 그래, 외적인 자극으로 촉발되어 생기는 수동적인 반응이긴 하지만, 아니 그건 반사보다는 전신적 반응으로서 주성적 행동이라 했지. 그는 자신의 간단명료한 코멘트에 만족하며 메모를 위해 책상으로 향한다. 그가 PC를 켜기도 전에 나는 벌써 유령이 되어 〈새 글〉에 '부나비'를 올린다. 날개를 편 길이 약 40mm. 온몸에 암갈색 털이 촘촘히 덮여 있으며, 앞날개는 흑갈색…

커튼을 열고 밖으로 나온 사람은 그의 우아한 아내일 수도 있다. 어머나 깜짝이야, 이 겨울에 무슨 벌레지? 난 또, 썩은 껍질이잖아.

그는 오늘 따라 늦잠이다. 밤새 꿈이 뒤숭숭했고, 이상하게도 가슴이 결린다. 가슴을 오므릴대로 오므리다가 갑작스런 후회가 온다. 요사이 담밸 너무 피웠나, 이건 아닌데… 아내를 부르려해도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만지려해도 곁에서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빈 침상은 나무숲 공터의 밤공기처럼 축축하다. 엉뚱하게도 언젠가처럼 그 낯선 여자가 먼데서 손을 내밀고 있는 것 같다. 찢겨진 젖은 은행잎들 사이에서 연기처럼 솟은 듯, 멀리 펼친 망토 자락은 그물날개의 아늑한 유혹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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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4. 3. 1. 21:43

 서정인 선생님 서재 탐방기 
                                      영어로 글읽기와 한글로 글쓰기 

                                                                  
소설시대 7호

심부름


전주시 덕진동, 사람들이 호반촌이라 하는 곳, 전화로 길 안내해주신 호반2길을 찾다보니 아담하고 질서정연한 주택가가 나온다. 오가는 사람 드문데, 길까지 마중 나오신 분이 『달궁』의 서정인 선생님이시리라.


이미 누렇게 찌들은, 87년 초판 열흘 뒤에 나온 2판『달궁』을 들고 선생님을 뵈러온 터다. 실로 십수 년이 지나 작가와 마주앉은 곳, 전기스토브가 막 켜진, 차라리 서늘한 거실이다. 누렁이와 흰둥이가 힘차게 짖던 햇빛 밝은 바깥 풍경과는 다르게 현학의 무게가 내린다. 서재에 쌓여있는 고서들의 무게일 것이다. 난생 처음 하는 숙제를 위해, 마음 다잡고 준비한 말문을 연다. 일천한 역사의 한국작가교수회에서 그나마 새내기인 제가, 평소 말을 안 듣는 사람이지만 이건 기꺼이 하고 싶은 심부름이라서… 더듬더듬. 선생님은 작가와 교직을 겸하는 같은 종의 운명에 일단 우호적이시다. 되었구나!



우선 가장 진부한 수순으로 여쭙는다. 사상계에 발표된「후송」으로 등단하실 때, 이미 대학원에 진학하셨고 또 교직에 계셨다 했는데, 어떻게, 왜, 글 쓰는 일에 투척하셨나요? 보통 말하는 60년대 당시 특유의 미학적 자의식에 관해서는 제 개인적으로는 경외감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문학이라는 것에 기꺼이 자기 삶을 던지고 싶은 욕망, 그 근원적인 생의 충동”을 무한히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왜 썼냐? 그냥 썼다. 그렇게 말씀하실 차례다. 정성들인다고 치장해서 내놓은 우문에 현답으로. 말씀 대신 『달궁가는 길』을 가리키신다. 정년을 기념하여 문단과 학교의 동료와 후배들이 출판한 책이다. “서정인의 문학세계”라는 부제답게, 선생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편집이다. 머리글에도 나와 있다.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보려던 기획 의도를 방해하고 간섭한 큰 훼방꾼이 바로 선생님이셨다고. 그런데 “술친구 서정인”만 예외로 삶을 들려준다. 글쓴이의 기우와는 달리, 절대로 옥에 티가 아니라 청자연적의 여유다. 여기 부록에 읽어 보세요.


예, 읽어 보았습니다, 한국일보에서.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시리즈로 볼 때보다는, 여기 이 책에 “왜 써?”라는 제목으로 나오니 더욱 선생님 말씀답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평생의 업이 된 글쓰기에 뛰어들었어요. 중학교 때 몰래 읽었던 연애소설이나 삼국지가 재미있어서,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의 칭찬에 고무되어서. 어쩌면 내가 잘났다는 것을 과시할 방법이,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타낼 방법이 달리 없어서, 또는 어떤 갈증 때문에, 어쨌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판이 벌어졌다” 그 비슷하게 말씀하셨지요. 왜 쓰냐? 그동안 그저 글을 써왔다고.


누구는 노름 빛을 깊기 위해, 누구는 혁명가와 그 혁명가가 처형한 왕의 아들 둘 다를 위해서 시를 쓰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며, 심지어 가슴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썼다는 바이런, 목이 잘리는 것같이 느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썼다는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다들 이름 없이) 예로 들면서도, 자신은 “그냥” 썼다고 하셨다.


그렇습니다. 말을 하래서 하지만, 문학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글 쓰는, 쓰려는 사람들은 이유가 없습니다. 좋아하니까. 갑자기 다소 고조된 어조이시다. 최근에 어떤 상업학교 교장선생님이 말하기를, 자기 학생들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것입니다. 생산성이 높으니까. 문학이 뭐 필요하냐. 시, 소설 그런 것은 뭘 생산해 내는가.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필요 없다, 그러는 겁니다. 이래서야 되겠어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합니다. 하긴 또 어떤 학생이 그럽디다, 아무개작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쓴다고, 써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정도라야 작가의식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만 합니다. 하지만 주먹을 쥐고 혁명에 나서는 것과, 주먹을 쥐어야 한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 그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의식의 변화를, 행동가는 행동을 꾀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기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작가라면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만드는, 볼 눈을 가지게 하면 됩니다. 문학이 왜 필요한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선생님께선 무엇을 쓸 것인가를 보기 위해서 눈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눈이 있으되 못 본다. 마음을 비우면 물건의 덧없음이 보인다.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럼 마음이 욕심입니까?


세상 많은 일들이 별들의 운행처럼 틀림없이 필연일 것이오. 허나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로 여겨져요. 그러니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지요.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 이 세상은 그것의 의미를 그것을 볼 눈을 갖춘 사람에게, 그 갖춘 정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볼 눈”을 우연히 제가 공부하는 독일 작가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겐 사물이 뚜렷해진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물을 통찰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며, 그러면 언어를 수단으로 통찰하고 그 안으로 꿰뚫어보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전후 독일 작가로는 처음으로 7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하인리히 뵐인데, 그는 인간적인 “촉촉한” 눈을 권했습니다. 라틴어의 “유머”가 독일어로는 “습기, 촉촉함”을 의미한다고.


열두시, 아니 『아홉시 반의 당구』, 그 작가 말이군요? 영역된 것을 읽었지요. 누구라도 작가는 우선 자신이 잘 보아야 합니다. 사물을 볼 수 있는 것, 독자에게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그런 것이 쓰는 이유와 또 목적이 되겠지요, 만일 목적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데 어떻게 쓰냐? 이것은 나의 평생 문제입니다. 쓰기는 항상 새로운 실험이다, 이 말은 나로서는 형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형식? “형식과 신념”이란 제목으로 선생님의 한국문학창작상 수상소감이 있다. “형식과의 싸움은 끊임없는 실험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실험이라는 말은 처음 해 본다는 뜻이고, 그 처음이 마지막입니다.” (“처음의 낙하산도 반드시 펴져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작동한다고 믿는 신념” 아 그런 것을 가질 날은 멀구나. 큰일이네.) “달을 그리되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리는 것은 구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고 인용하신 것이 얼마나 어렵고 오묘한 주문인가.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한 구름을 그려 달을 그린다?


형식미라면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강」은 “현대소설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단편소설 중의 하나”로 정평이 났지 않습니까? 절제된 문장, 단일한 인상과 효과, 통일된 구성, 인생의 한 단면을 통찰하는 능력 등으로, 교과서적 단편소설 미학의 최고봉으로 격찬되고 있는데, 그것을 대표작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누구든 떠올릴 『달궁』입니까? 혹은 시기별로 등단작「후송」이나 「강」을 거쳐, 『달궁』의 고지,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등을 통해 어떤 특징과 차이 또는 변화를 의식하십니까? 아니면 그저 가장 좋아하시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미한테 어떤 자식이 제일 예쁘냐는 식이지만.


속으로는 내가 처음 빠져든 『달궁』이라 하시길 기대한다. 그런데 잠시 머뭇거리신다. 그게 굳이 말한다면 「뒷개」, 그리고 「벌판」… 그 언제 목포엘 간 적 있었어요. 종점 분위기, 싸한 비릿내가 늘 코끝에 머무는… 그런 것 잊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뒷개지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읽고 해설해 놓은 것만 따라 읽어요, 다른 것들 좋은 것 많은데….


‘뒷개’는 선생님의 회상에 잠긴 듯한 설명으로 어디 부둣가로 상상이 되지만, ‘벌판’은 어디 멜까. 선생님 작품들도 다 모르면서 여기 선 것이 부끄럽다. 「뒷개」는 『달궁』의 “바다 횟집” 분위기를 떠올립니다, 아닙니까? 그런데 (저부터도) 사람들은 한번 명이 나면 몰리는 경향입니다. 「강」은 아예 학교 숙제의 표적이 되었고, 예컨대 「후송」만 해도 이명증 같은 병리현상이 개인적인 불행의 수준을 넘어서 어떤 사회적, 정치적 성격을 수반하는 고통의 표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사람들은 병약함이나 정신이상을 더 이상 낭만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병의 도덕적, 정치적 알레고리에 대해 관심 갖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달궁』의 사설조는 아예 서정인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창성은 문체만이 아닌 어휘들에서도, 예컨대「무자년 가을 삼일」의 “무자년”, 또는 “움직이는 계단”을 “도롱태”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이야기, “얼음과자”를 빨고, “영상띄”를 감상하는 군상들, 어찌 보면 구태의연한 말들을 자연스럽게 쓰시고.


이번에도 대답 대신 『문화예술』(문예진흥원, 2003년 10월호)에 실린 선생님의 글을 보여주신다. “한글로 글쓰기: 한국말은 한국인의 운명”이라는 글의 시작부분은 이렇다.


“나는 우연히 한국말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운명이 되었다. 나는 한국 땅에 태어나서 한국말과 만났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과 만났다. 그것이 준 것 말고는 나에게 세계가 없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나의 삶을 결정했다. 나중 커서 외국어를 배우고, 제이, 제삼 외국어들과 접하자, 그것들은 나의 첫 말이 만든 세상을  넓혔다. 외국어 하나를 알면, 세계를 하나 더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운명으로서의 한국말을 쓰는 사람과 그냥 한국말을 쓰는 사람은 다르겠다 싶다. 부끄럽게도 나는 후자에 속한다. 



글읽기 - 글쓰기


그러기에 영문학 공부와 한국말로 글쓰기를 병행하시는 것이 득인지 실인지, 혹시 상충이 될 것인지, 실로 그것이 궁금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영문학 공부한 것을 나는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대학 진학 할 때, 그래요 영문학을 택한 것은 아마 고등학생의 눈으로 읽던 우리 소설에서 뭔가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야겠지요. 손창섭의 「비오는 날」같으면 참 좋았는데 (나는 「잉여인간」을 읽었는데), 별로 많지가 않았어요. 지금은 달라요, 연전에 순천대학에 문예창작과에 교환 교수로 갔을 때 박지원의 「호질(虎叱)」 같은 것도 잘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함께 공부했어요. 그러나 50년대 당시엔 국문학은 별로다 그리 생각했었지요. 하여간 노문학과가 있었으면 좋을 걸 그랬어요. 그래 영문과 밖에 없었어요. 독문학, 불문학은 고등학교 때 안 배워서 어렵고. 여담이지만, 참 독일어 그렇게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독일어가 어렵다 하셨습니까? 아주 우연입니다만, 어제 한 밤중도 넘어서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독일어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클레멘스 브렌타노라고, 낭만주의 시인입니다, 영화는 물론 불행한 결혼생활을 다룬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그가 시를 쓰다가 일어서서 읊어 내려가는 독일어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환상적인 한편 내면의 황홀과 고통을 함께 노래하는 시라서 그랬겠지만,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하필이면 이제 제가 독문학에 대한 평생의 짝사랑을 접고 나의 언어로 나의 글을 쓰겠노라 작정한 이 시점에서. 저의 배신에 대한 시위였을까요? 하필이면 존경하는 소설가를 만나 뵙기 꼭 열두 시간 전에 들려오는 아름다운 독일어.


톨스토이 또한 제대로 원 텍스트로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았겠어요? 어쨌거나 영어로 제정러시아의 소설들, 프랑스 소설들을 읽었지요. 텐느의 불어저서 『영문학사』도 영어로 읽었지요. 제 자신은 전공하는 영시들 이외에도 많은 책들을 영어로 읽을 수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외국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무엇이건 우선 많이 읽어야지요, 그런데 많이 읽는다는 것은 주체성을 그르칠 우려가 있지요. 그래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라 하지 않습니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해야지요. 학이불사 즉망 (學而不思 則罔)이라….


허나 요새는 내용 없이 떠들기만 하니, 사이불학 즉태 (思而不學 則殆)라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의 경우, 많이 읽을수록 상아탑에 들지 않고 평범한 인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고, 외국문학을 읽을수록 한국적이 되셨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내가 영어로 영문학 작품을 넘어 다른 책들까지 읽으니 얼마나 좋아요? 지금은 톨스토이를 노문학하는 분들이 제대로 번역해 놓았더군요.


톨스토이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는 작가는 말할 것도 없이 러시아의 두 사람,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고골이고, 좋아하지 않는 작가는 헤밍웨이입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에서 보면, 미국 신문 파리 특파원과 함께 피레네 산맥 계곡에서 낚시를 하다가, 국경 너머 스페인에서 투우 구경을 하는 여자가 나오지요. 가만히 세어보니 여러 남자, 마지막에는 아마 투우사와 놀아났습니다. 그게 원 소설인지. (우와, 내가 중학교 때 『해』를 소화 못한 것이 그냥 무식이 아니었구나.) 요즘 잘 팔리는 젊은 여자 작가들, 다들 재치 있고, 너무 멋있고, 세부에 대한 풍부한 자료도 돋보이고, 감각도 세련되어 훌륭합니다만, 집요함, 깊이, 객관성, 자기 아닌 딴 사람 이야기, 폭, 능청떨기나 시침 떼기, 뭐 그런 것이 조금 아쉬운 것 같습니다. (나는 젊지도 않고 잘 팔리기는커녕 이름도 없으니 다행이다. 내게 나무라심은 아니니까.)


그런데 선생님, 저희 미술대학에 오래 전에 화가교수가 역시 화가인 아버지의 훈계로 교수직을 그만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화가는 오로지 제 그림만 그려야지 무슨 남 가르칠 시간 있느냐는 호통에 고개를 숙였다는 후문이.


화가가 미대에 있었는데 그랬나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교수, 혹은 교수작가를 ‘주말작가’라 그러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시간 없어 못쓴다? 글쎄요, 이점은 확실합니다. 부지런만 하면 가르치면서도 쓰고, 게으르면 시간 많아도 못쓴다. 간결하고 단호하시다.


하긴 다시 독문학 얘기라서 죄송하지만 조금 안다는 게 그거라서, 에.테.아 호프만이란 역시 낭만주의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평일에는 판사요 기껏 약간의 음악가, 일요일 낮에는 그림을 그리며, 저녁이면 깊은 밤까지 매우 위트 있는 작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불안한 사회상황이나 혹은 필화사건으로 법관직을 잃으면 시립극장의 악장을 많았을 수준이었고, 모차르트를 존경해서 세례명을 아마데우스라 개칭까지 했답니다. 아무래도 옛사람들이 전인적인 경우가 더…….



어리석은 질문


선생님 작품을 읽다가 갑자기 느낀 점입니다만,「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에서 미로와 마이욜을 왜 혼동된다 하셨을까 의아했습니다. 마이욜 하면 우선 ‘누드의 조각가’를 떠올리지만, 중요한 것은, 로마 시대 이후 종교적 테마를 일체 사용하지 않은 첫 번째 조각가라는 점 아닙니까? 그가 표현하는 여성은 더 이상 신화 혹은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 여성은 그 자체로 여성이었으니까요. 그는 “우리들의 시대는 이미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했습니다. 같은 작품에 이런 구절, “믿음심판은 물론, 기독교가 시들해지고, 종교 자체가 희미해지자, 이상하게도 평화가 왔어요. 종교가 가르친 것이 종교가 없어지자 실현된 셈이지요. 종교가 사랑과 평화를 가르친 것은 그것이 가는 데마다 미움과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종교가 살신성인했어요.”라는 대목도 함께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특히 시대적 초미의 관심사와 관련하여 종교관을 살짝 여쭤 보고 싶어집니다. “대 이라크 전쟁은 이슬람교도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 전쟁”이라 규정하는 이슬람의 관점 등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실지? 지금 종교가 성해서 싸움이라고 보십니까?


사실은 선생님께서 최근에 한 신문에 연재하시는 칼럼을 본 기억이 있다. 그 기억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다. 선생님은 이 비극을 “크게는 문명의 부딪힘이고, 작게는 종교의 다툼일 것이다. 이 전쟁은 미국의 9.11 때 정해진 것이 아니고, 아주 먼 옛날, 어쩌면 예수와 마호멧이 태어날 때부터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쓰셨다. 가슴이 아프게 공감되는 부분이다.


기독교인인가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신다. 기독교를 우선 우리 정신의 말살 때문에 좋아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영문학교수로서 기독교문화를 열강하곤 했지요. 기독교문화 없이 영문학이 없으니까. 또 기독교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내가 말할 수 없이 존경하는 것, 그것은 겸손과 굴종(사실은 단 한번 영어를 쓰셨는데 ‘휴밀리에이션’이라고, 정확한 번역인지 모르겠다)입니다. 하나는, 온갖 바라는 것 해주십사 기도 후에,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둘은, 무조건적 신 앞에의 굴종.


그러나 이 본질적 기독교는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만 가능했다고 보신다. 현대의 타락한 기독교를 배제한 톨스토이의 원시기독교, 혹은 함석헌씨의 무교회주의를 말씀하신다. 현대에는 ‘기독교적’이란 말이 침략적, 자본주의적, 미국적 변주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양심적인 기독교 사회는 존재한다고. 예를 들면 에즈라 파운드, 미국 시인이면서 『사서』를 탐독하고 이탈리아에 살고, 미국 군인들을 일컬어 “루즈벨트와 그의 유태인들," “유태인들과 그들의 루즈벨트"한테 속아서 전장에 나왔다고 반전방송을 했던 노익장에 대해. 역사적으로는 미국 건설 초기의 중농주의에 대한 중상주의의 승리와 그 이후의 주류를 형성한 세력들에 대한 심도 높은 강의가 펼쳐질 기운이 넘치신다.


양심적인 서양인이 하필 매우 동양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파운드 비슷한 연배였던 극작가 브레히트도 노신을, 그의 제자들의 경우에는 『아큐정전』을 개작하기도 하고.  


그건 중국의 고전을 뒤집는 방향이잖아요. 오히려 헤세 같은 반전주의자도 동양사상에.


예 물론, 다른 이데올로기에서도 ‘양심적'이라 할 서양 작가들의 경우 동양을 또는 소위 제3세계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생각일 뿐입니다. 독일 시인 에리히 프리트는 유태인으로 「들어라, 이스라엘이여!」라는 시를 발표했지요. 팔레스타인인들을 불시에 사막으로 내몬 이스라엘에게 경고였어요. “우리가 박해받을 때/ 나는 너희 중 하나였다./ 너희가 박해자가 되면/ 내 어찌 그대로 있을 수 있나?// [중략] 패배자들에게 너흰 명령했다/ “신발을 벗어라!”/ 속죄양들처럼/ 그들을 황야로 내몰았다.// 황야의 모래 위/ 그 맨발의 기억은/ 너희들 폭탄과 장갑차의 흔적 보다/ 더 오래 가리라.” 양심적인 서양인들은 사해동포주의로 돌아갈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호전적인 조국에 무조건적 순응하지는 못하는 것이 시인들의 생리입니까? 그렇게 조국에게서 곤욕을 치른 파운드 외에도, 선생님 작품 속에 “현대 영어시인 천오백 명을 상대로 조사해봤더니, 스물일곱인가가 신경파탄을 일으켰고, 열다섯이 자살했고, 열다섯이 술중독됐고, 열넷인가 전사했고, 감옥에 간 사람도 근 스물이…”라는 대목에서도 멍해졌습니다만.


꼭 시인보다도, 의식이 강하다 보면 충돌하는 경우가 흔하지요. 대중매체의 언어와 싸우는 것도 그렇고. 거기 보면….


다시 가리키시는 “한글로 글쓰기”에는, 말을 잘 못하면 방송이나 텔레비전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지론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피해’는 ‘해를 입다’이니 ‘피해 입다’는 잘 못이다. “이런 글 백 번 써 봤자, 방송매체에서 태풍 매미가 입힌 피해라고 한 번 말하는 것을 당할 수 없다.”


축구 못하면 운동장 안나오는 것이 기본이지요. 그것을 지키니까, 인맥이고 학연이고 다 무시하고, 축구 잘하는 선수만 뛰게 하니까 월드컵 때 일이 되었지요. 그러니 한국말 못하면 방송 안나와야지요. 예상보다 단호한 어조로 한글의 오용을 나무라신다.


그 글에는 ‘미국 들어간다’는 틀렸고, ‘미국 나간다’가 맞다고 쓰여 있다. 맞다. 미국 나가계실 때, 하버드와 털사 대학에 몇 년 씩 계실 때, 영시 공부와 한글로 소설쓰기 두 가지를 다 하실 수 있었나요? 속으로만 물었다. ‘미국 나간다’라는 표현을 써보기 위해서.


그 밖에도 속으로만 물은 것이 많았다. 선생님이 애지중지하시는 오래된 책들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고 싶은 마음도 속으로 접었다. 출입문과 창문을 빼고는 모두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 소장서 중에는 영어권 책은 차치하고라도, 고전의 영역본들이 모두 19세기 책이다. 『오위디우스의 변신과 헤로이데스 선집 축자 행간 번역』(필라델피아 1861년), 『‘에픽테투스 전집』(보스턴 1865년), 『유리피데스의 비극들』(뉴욕 1875년, 1863년),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텐느의 불어 저서 『영문학사』(뉴욕, 1879년)와 『실러의 생애』(런던 1883년)를 영역본으로 가지고 계신다니. 하지만 무엇을 더 욕심내랴! 『용병대장』의 후속이자 결미부라고 하신 『말뚝』을 선물로 받았지 않은가.


겨울 해는 일찍 진다. 강아지들이 새삼스레 짖는다. 선생님의 배웅으로 문간을 나서도 여전히 이방인이니까. 솜씨 소문난 전주의 저녁밥, 곁들일 소주 한잔을 아쉽게 사양한다. 이름모를 한국 차의 향기가 옷에 베어있으니 되었다. 『달궁』의 산실 그 서재를 혹시 모를 두 번째 방문을 위해 다 헤집지 않고 아껴두길 잘했다. 사람들이 하이델베르크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은 그곳에 심장을 떼어놓고 오기 때문이라고 하질 않는가. 믿거나 말거나.          


                                        2003년 12월 30일 화요일


 소설시대 7호 , 한국작가교수회, 평민사 2004. 9-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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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3. 11. 20. 21:57

와의 만남

『꿈꾸던 것들은 아직도 꿈인가』2003 (이화에세이)

1.

해방의 떠들썩한 열기가 식어버린 새해 혹독한 겨울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바다 구경 한 번 못한 우물 안 개구리로 상경하여, 이화여자대학에 입학시험을 치르는 겨울 또한 혹독한 추위를 실감했다. 합격 통지에 한껏 누그러진 봄이라 해도 서울은 여전히 추웠다. 돌 벽으로 된 기숙사 건물만큼이나 이질감으로 추운 방은 마찬가지로 썰렁한 교회당과 더불어 냉랭한 서울 시대를 열었다.


손이 시린 봄은 마음도 시리게 한다. 왜 그래야 되는지도 모르게 대의원이 되어서, 칸막이 교수실로 학생-교수간 심부름을 다니던 걸음걸음이 얼마나 가시밭이었을지……. 유창한 독일어로 일년생 기를 죽이는 교수님 ― 나중에야 그 유명한 천재이자 당시 신분은 강사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 서슬에, 그녀는 아예 아무 말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다. 사투리건 표준말이건 우리말을 아예 더듬는, 독일어는 주눅 든 꺽다리 신세. 큰 키는 당시 그리 탄성의 대상도 아니었고, 쥐구멍을 찾고 싶을 땐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그때 주눅 든 버릇으로 지금도 등이 남달리 일찍 구부정한 것이리라.


천재 교수님은 검은 스카프를 즐기셨다. 첫 봄의 기억은 그것뿐이었다. 그분이 그녀들에게 친칭을 썼는지 경칭을 썼는지도 들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문법은 충분히 마스터했노라’ 자부했던 독일어 실력(?)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과외로 학원에서 단편소설까지도 읽었던 독해력이 적어도 대화하기에는 제로였다.


문제는 그녀가 ‘남녀칠세부동석’의 원칙으로 키워진 시골학생이라는 데 있었다. 남자 교수님들 보다는 친근해야할 대상으로서 여성만을 찾고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여자는 드물고, 서양 선생님도 영화에서처럼 낭만적이 아니라, 새의 부리 같은 날카로운 느낌만을 받았다. 자연히 천재 선생님이 오시는 요일에만 교수실에 갈 핑계를 찾았다. 그러나 말로는, 그 천재 선생님이 왠지 싫어서 그 분 오시는 날엔 교수실 들르는 일을 피한다고 광고했다. 이율배반의 감정으로 못난 시골티를 감추며 그 선생님만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실은 너무도 훗날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럴 것이 곧 이어 ‘진짜 독일어 목소리’를 가진 여교수가 부임하셨고, 너나 할 것 없이 이성적인 교수의 표상인 독일어 목소리에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들 몇몇은 그 시냇물 구르듯이 읽는 독일어 목소리에 반해서 독일어로 “시냇물”이란 이름의 스터디 그룹으로 성장했다. 스터디 그룹은 생존의 방법이기도 했다. 상당한 분량의 원서를 한 학기에 읽어야 했지만, 그녀들은 터무니없이 실력이 부족했고, 교수님들은 더러 나머지 부분을 숙제로 내주시기 때문이었다. 번역본?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공부만 하느라 세월 보내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일단 나머지 분량을 몇 등분해도, 불안한 소심증의 그녀는 소설작품이건 드라마건 전체를 보아야했고, 밤샘이 습관이 되었다. 천재 선생님은 어느 새 다른 대학으로 옮겨 가셨고, 그녀들은, 적어도 그녀는 그분을 잊었다. 무수한 밤샘의 나날에서 잊었다고 생각했다.


검은 스카프는 사실 첫 학기가 끝나가는 여름까지도 여전했다. 자세히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검은 스카프는 앞쪽으로 당겨져서 턱 끝에서 묶여 있었고, 그러면 삼각형 얼굴이 드러났다. 오월 말 메이데이 행사 때면 성급한 민소매 원피스도 등장하고 있었는데, 그에 비해서 학기말까지 검은 스카프라면 조금은 섬뜩했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동기생이 있었는데, 그애 또한 놀랍게도 선생님 따라서인지 시커먼 눈매를 하고 검은 색 옷을 즐겨 입었다. 그 아인 사업가인가 장차관인가 아무튼 엄청 (돈)귀족에 미스 코리아 같은 몸매를 지닌 부족할 것 없는 친구였지만, 대개는, 그리고 그녀도, 일부러 못 본채 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 혹은 신포도의 경우였다. 그리고 천재를 잊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에겐 보다 지적이며 시냇물 구르듯이 독일어를 읽어주는 새로운 우상이 나타났으니까.

 

2.

인연은 길고 길어서 그녀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를 한 가지 공부를 위해 이화 터전에서 살았다. 이제와 본업은 지방대학 독문학과 교수, 현대독일소설을 중심으로 강의한다. 그녀들의 ‘독일어 목소리’ 우상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여성문학 강의도 시작했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을 새삼 경탄하며, 바흐만의 환상에 젖어들기도 한다. 심지어 작품만이 아닌, 막스 프리쉬와의 좌절된 사랑에, 좌절된 공동생활에, 의미부여를 하기도 안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깊은 밤중이면 그녀는 글을 썼다. 여중 시절 교지에 「무제」라는 시 한편을 발표한 것 이외에는 불모로, 여태 남의 글 읽는데 비겁함을 소진하고 있는 자신이 안쓰러워서였다. 마침내 어느 날 장편소설 『열하나 조각그림』으로 소설계의 문턱을 넘보았을 때, 그때 그녀는 옛 사랑을 다 들켜 버리고 말았다. 인용된 시는 물론, 많은 지면이 오직 그 천재 선생님을 위해 바쳐졌기 때문이다. 물론 숨겨진 사랑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변신되어 나타났지만, 누군들 이화에서 함께한 사람이라면 천재 선생님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시 중에서 「배반」은 이름조차 거명하며 인용했고,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도 죽음을 택하겠어.”라는 구절도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인용했으니. 그녀는 첫 애증의 대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화의 첫 학기 천재와의 만남은 쟝 아제바도를 나누어 품게 했으며, 오늘 밤새워 글을 쓰게 한다. 그녀에게는 습작이란 없다. 글쓰기가 의식적인 작업이라기보다는 그냥 살아있는 표식이니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게 도와 줘…… 나를 살게 해 줘…….” 적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천재의 목소리가 환영으로 다가온다. 목소리는 어스름 글씨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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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3. 4. 19. 22:20
 

어머니가 되세요!


 

<Friends> 2003년 5월호


 

고생 많았소, 아이들 이렇게 자라도록 보살펴 기르고.

그리고 저 ……, 나 또한 불편 없이 살아온 세월이었소.


큰 아이가 결혼을 앞둔 어느 날 남편의 어색한 감사 표시다. 함께 부모이면서 감사라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과묵한 남편의 그만한 말은 큰 의미이리라.


‘아이들 이렇게 자라도록’ 살아온 세월이 믿기지 않았다. 이 많은 날들, 사랑이 지속되고 결혼해 있으리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결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한 청사진의 미래를 꿈꾸며 결혼한다. 그러나 더러는 크게 미래를 설계하지 않고서도 결혼을 한다. 절실한 현재 때문일지……. 사람은 생각보다 근시안적이다.


그녀는 후자에 속했다. 아직 통금이 있던 시절, 통금 때문에 헤어지는 연인들은 차라리 결혼을 했다. 상대적 빈곤감이 덜한 시절이라 결혼에 조건은 그리 없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얼떨결에 아기 엄마가 되는 일이다.


그녀는 엄청난 사태 앞에 세워졌다. 만삭에도 걱정은 설마였고 여전히 책방이나 영화관을 쏘다니며 맹렬한 기세를 부렸었건만, 새로 태어난 아기는 경이 그 자체이자 어쩌면 공포였다. 손가락을 차마 만져보기도 두려운 존재, 온전할까 깨어질까 두렵기만한 존재였다. 아기는 어미보다 훨씬 용감했다. 어미와 눈을 맞추기도 전에 가슴을 파고들며 양식을 찾았고, 눈을 맞추게 된 이래로는 모든 것을 어미에게 의탁하고 물어왔다. 20대 어머니가 되는 여자들은 미숙하기 그지없다. 학교를 오래 다닐수록 상대적으로 생을 몰라서 더욱 그렇다. 그렇지 않아도 불완전한 인간에게 더 불안한 작은 생명이 의심 없이 다가올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을 움츠렸다. 긴 겨울밤의 몽상도,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잊혀져가고, 봄가을 들판을 헤맬, 혹은 여름 바다의 일렁이는 황혼을 그리겠다는 치기도 사라졌다. ‘네가 찾을 때’ 그 자리에 있자,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겠다는 다짐으로.


아기는 목욕시킬 때면 앙앙 울다가도 곧 젖을 물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만으로도 어미를 행복하게 했다. 쏘옥 삐져나오는 앞니만으로도, 뒤집는 엉덩이만으로도 기쁨을 주었다. 그녀는 아기를 따라서 말을 배웠다, 아기처럼 좋은 말들만 골라서 배웠다. 세상에는 좋은 말들만 있었다. 아장아장 아기 따라 걸음을 배웠다, 위험한 행보가 아닌 가장 안전한 길을 익혔다. 아기가 둘이 되자 둘을 똑같이 사랑하기를 배웠다. 두 아기를 보면서 서로 사랑하기를 배웠다. 세상에서 여럿을 똑같이 사랑하기를 배웠다. 아이들은 날로 새롭게 모든 사물을 향해 호기심에 넘쳤고, 그녀 또한 생에 호기심을 더해갔다. 아이들의 눈을 따라 세상을 보면서 순수한 긍정을 배우고, 아이들의 필요로 살아있는 의미를 느꼈다.


의미가 생기자 그녀는 새삼 생기가 돌고 진정한 의욕이 생겼다. 세상엔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이 많았다. 그것을 왜 몰랐을까, 알 수 없는 불안과 허망과 좌절로 애태우던 날들이 아득히 멀어져갔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토론을 하면 할수록 아득한 안개 속 미궁을 헤맸던 시절이 정말 있었던가?


그녀는 아이들 따라서 사람이 해서 즐겁고 좋을 일들을 골라서 하는 법을 배웠다. 온통 세상을 다시 배웠다. 마치 처음 배우듯이 조심조심 배워 나갔다. 이번엔 훨씬 신중하고 안전한 선택들이었다. 그 모든 일은 아이들이 그녀를 인도하는 그대로였다. 아이들이 고개 들어 쳐다보면 건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의 능력으로나마 그저 어머니이고자 했다.


고생이라구요? 아니지요. 어미가 아이들을 키운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어미를 살게 했지요. 아이들이 있어 진정 웃음을, 행복을 알았고, 아이들이 있어 건강한 나날을 꿈꾸어 왔지요. 아이들 아니었음, 무엇이 생에 이만큼 나를 매어놓을 가치가 있었겠어요?


그렇게 대답하려던 그녀는 남편에게 아무 말 없이 미소만 보낸다. 남편은 어쩌다 술이 거나해진 날이면 차갑고 참을성 없어 보인다는 그녀가 살아온 방식을 슬쩍 건드려보곤 했었다. 예상보다 나았다는 의미인지,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는 투를 감추지 않았다. 오늘 같은 표현을 하리라고는 조금 의외다.


정체성? 그녀는 순간 생각한다. 정체성은 불변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 그 본질은 변치 않더라도, 누구이어야 하는가를 포함시키면 조금 변화가 생긴다. 어머니인 사람은 ‘어머니’가 큰 비중이 된다. ‘비중’이라고 하는 말에서 나이 따라 점점 무거워진다는 여자들의 희화적 상이 생각나서 혼자 피식 웃었다. 남편은 감사 표시에 웃음기를 흘리는 그녀가 의아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뜬다. 모처럼의 덕담이 쑥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한다, 그냥 다른 말인데, 웃으세요. 아내 칭찬일랑 마시구려, 여자들은 나이 들어가면서 너무 무거워진다는군요. 늘어나는 체중에다, 머리는 석두요, 얼굴은 철판이 아줌마 상이랍디다. 그러게 올려주려 해도 무거워서 절로 가라앉는답니다.


사람 참. 그렇게 자조적이라면 여자들이 상당히 지적 유머에 능하구려.


되려 적나라한 말이지요 뭐. 아무튼 우리 애들은 당신을 더 닮아 참을성도 어미보다 낫고, 내차기도 덜하니 다행 아닌가요.


그렇게 대꾸하면서 오늘따라 어색한 표정의 남편 곁을 슬쩍 일어난다. 그녀는 속으로 되뇐다, 다음 생에서는 그럼 당신도 어머니가 되어 보세요!                                        (2003. 4. 19.)

Posted by 서용좌
낙서2002. 12. 5. 23:30

bestmail 2002, 아니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쁨!
                        


Subject: 예비 03이 인사드립니다.
     Date: Thu, 05 Dec 2002 21:33:31 +0900 (KST)
     From:
                 

  안녕 하십니까.
  저는 수시모집에 합격한 예비 03학번이된 000 입니다.
  예전부터 교수님 홈피에 자주 들러서 독문학도의 꿈을 키워 왔는데,
  이제 저도 당당히 교수님 밑에서 공부할 수 있다니 몹시 기쁩니다.

  이렇게 저같은 새내기가 교수님께 메일을 보낸다는 것이 조금은
  건방지게 비쳐질것이 두렵지만서도 하루라도 빨리 독문학을 배워 보겠다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실은 제가 독문학을 하겠다고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에게 선언했을 때
  다들 힘들고 외로운길이라고 걱정했습니다.
  이런말을 꺼내서 송구스럽습니다만 인문학, 특히 독문학은 위기의 과목이고
  사양과목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수님 홈피에
  자주 들러 자칫 흔들릴 뻔한 저의 결심을 굳혀나갔습니다. 결국 저는
  수시 면접에 참가를 했고 이렇게 당당히 독문학도가 되었습니다.
  물론 수능 성적상 흔히 서울에 괜찮다는 학교의 학과를 지원하고픈 욕망이
  끓었던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교수님 홈피에 독문학강의란을 읽어보면서 느꼈던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런말이 떠오르더군요. '위기는 곧 좋은 기회가 될수 있다'
  분명 한국 사회는 미국, 일본 문화의 영향이 주류를 이룹니다.
  하지만 이 주류의 문화는 결국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 문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야흐로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서 유럽문화, 특히 독일 문화가 우리 사회에 많이 소개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펼쳐질 유럽과의 육로 직교역시대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다시말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제가 두서가 없는 말은 너무 많이 늘어 놓은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p.s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겨울방학기간 교수님께서 권장하고
        싶으신 독일문학 도서를 추천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또 제가 정말 부족하지만 허락해 주신다면 앞으로 교수님과 자주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하고 싶습니다.
                           

      음악이 없다면 인생이란 하나의 착오일 것이다 -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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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11. 20. 22:21


입시지각생의 운동화 끈

                                                         『우리 어디에 서 있어도』2002 (이화에세이)          


해마다 겨울이 오고 수능이든 입학시험이든 결정적인 시험이 있는 날은 대개 날씨가 혹독한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한지 모두들 마음이 얼어붙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기억들이다.


오전의 논술과 오후의 면접, 그만하면 교수에게나 입시생에게나 긴장된 하루가 틀림없다. 차가 밀렸다가는 큰 일이므로 학생들이 움직이기 아예 전에 서둘러야 마음놓고 학교에 이른다. 신체리듬에 따라 참새형과 올빼미형이 있다지만, 나는 새벽같이 출근할 날이면 아무리 마음을 풀어도 짜증을 이기지 못한다. 입실 시간이 지나고도 빈자리가 꽤 있었다. 입시가 여러번의 지원기회가 있어서, 첫 시간에 지각하는 학생은 예상대로 대개 결시로 이어질 것이다. 시험시작 종이 울리고, 우리는 서서히 원서대조에 들어갔다. 삐그덕 교실 문이 열리고, 놀라서 고개를 든 학생들 앞에 울상으로 지각생이 나타났다. 시계를 보니 1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규정대로 라면 입실이 거부될 상황이었다. 새벽부터의 짜증까지 겹치면 지각생이 불리하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상념은 불현듯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수십년 전 어느 이른 봄, 선배도 없는 외로운 대학시절은 신설독문과 신입생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자라서 처음 외지로 나간 지방도시 출신에게는 대도시의 낯설음까지 더했다. 낯설기야 어디 그 봄부터였었나? 입학시험을 치르던 꽁꽁 언 겨울, 백설공주가 숨어사는 산만큼이나 오르락내리락 미로를 거쳐가는 캠퍼스는 주눅들게 하기 알맞았다. 오늘날에 보아서는 그저 아기자기한 정도라 해도, 당시의 시골소녀의 눈에는 그랜드 캐년 다름없었다. 약간 비뚜름히 오른쪽으로 산을 오르다가 어디에선가 왼쪽으로 굽어 내려가다 보면 오른 쪽 아래로 펼쳐지는 거대한 건축물, 보기는 무맛이었고 우중충한 색조마저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데... 거기서도 어렵게 몇 고개를 올라 드디어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김치 다름없었다. 종일 7과목을 필기과목으로 치르는 입시에 겁도 났고, 하루 종일은 그 자체로서 부담이었다. 어떻게든 숨을 돌릴 수 있는 점심시간은 축복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어머니답게 따뜻한 맛있는 점심을 자꾸 더 뜨게 했고, 가물거리는 눈...


다시 시험장을 향하는 발걸음은 아침보다 더 무겁기만 했다. 시간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잡았지만, 들어갈 때는 오르막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처음 오르막길에서 운동화 끈 한쪽이 풀렸다. 끈은 걸기적거리며 안팎으로 덜렁거렸다. 당연히 몸을 굽혀서 끈을 매어야 했겠지만, 미욱한 성정에 몸을 굽힐 시간이 없기도 했고, 몸을 굽혀서 버릴 1,2분과 끈이 풀려서 방해받을 1,2분 사이를 계산하는 머리는 실타래같이 얽히기만 했다. 누구도 실험을 해 보지 않은 두 가지 경우를 두고서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한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생각은 그 둘 사이를 헤맸고, 걸기적거리는 발은 자동적으로 옮겨 떼고 있었다. 시험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흘끗 바라본 시계로 이미 시작 시간이 지나있었다. 이 길로 시험에 응시하지 못한다면 어머니의 소원으로 지원대학을 바꾼 분풀이로서 도중하차했다는 누명을 쓸 게 뻔했다. 이제는 지각을 해도 일단 고사장에 갈 것인가 아닌가의 투쟁이었다. 계단에 이르러 넘어진 것은 꼭 풀린 끈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르막만 나타나도 피를 품어내기에 지쳐버리는 심장이 진짜 범인이었을 것이다. 고사장 문 앞에 이르렀을 때에는 5분도 더 지난 상태... 아 이렇게 두 학교를 다 놓지는 구나. 층계를 올라온 가슴은 콩콩 뛰다 못해 겨울 두터운 옷 위까지 벌렁거리고 있었고, 시계는 째각거렸다. 이 벽 너머, 바로 벽에 밀착된 책상 하나에 응시학생이 없구나...


우연이었을까?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아니 다시 쓰자. 나는 문을 붙잡았다. 숨을 몰아쉬고, 시간이 흘렀다. 눈을 떴다. 문을 조금 열었다. 시커먼 문이 열리고 하얀 단정한 얼굴이 나타났다. “봐요, 학생, 여언가요?”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빈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와서 문이 안에서 열렸는지, 밖에서 열렸는지는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많은 세월 동안 그 순간을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버전으로 쓰이던 그 장면이 원본을 잊어버린 것이다. 분명한 것은 손수 그 빈 책상을 가리키시며, 나를 앉게 하신 교수님의 엉거주춤한 행동이었다. 덮혀있던 시험지를 뒤집어 글자를 올려놓으시기까지 했다. 까만 것은 글자고 흰 것은 종이구나... 나는 까막눈 비슷했다. 놀람의 눈물인지 감동의 눈물인지, 시험지는 뿌옇게 변해갔다. 그렇게 치른 5교시 과목은 공교롭게도 전공이었다, 독문과 학생들을 위한 <독일어>.


그렇게 해서 나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 덕으로 이화식구가 되었다. 60년대 학부, 70년대 대학원, 80년대 박사과정을 이화에서 공부하면서, 그 시발점에는 지각생을 내치시지 않은 교수님이 계신 것을 상기하곤 했다. 오늘 이렇게 입시에 늦는 학생이 있으면 더욱 그렇다. 꼭 선생님을 본받으려는 생각에서는 아니겠지만, 지각생에겐 언제나 기회가 주어진다. 사실은 내가 교단에 선 이래 결석생을 결코 홀대하지 않는 숨은 이유 또한 선생님께서는 짐작도 못하실 비밀로 남아 있다.


지난 학기에는 모교의 학위논문 심사에 합류해서 감시회로까지 갖춘 현대식 교수실을 드나들며, 그 옛날 칸막이 교수실의 사랑 반만이라도 나의 제자들에게 돌려주고 있는지 새삼 코끝이 찡했다. 아슬아슬한 입학 후 여전히 지각 결석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믿어주시던 강희영교수님, 김영호교수님도 이화 역사에 많은 기여를 하시고 정년하신지 오래이다. 너무 오랜 동안 배워서 다 베껴먹은(?) 이병애교수님마저 이제 곧 교정을 떠나시게 된다니, 내년 이맘때의 모교가 얼마나 썰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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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9. 16. 22:25
[전일시론 2002년]          
 

한가위 유감 - 우리를 스산하게 하는 가을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를 지나면 처서와 백로는 금새 다가온다. “어정칠월 건들팔월”이라는 옛말처럼, 음력 칠팔월은 어정어정 건들건들하는 사이에 지나는 것이다. 그것은 추수만 남아 한가해진 농촌을 이르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농촌을 보라.

입추는 물론 처서절기에마저 비가 내리면,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않아 일년 농사 마무리는 튼 일이 된다. 오죽하면 “처서에 비 오면 독에 든 곡식도 준다”는 속담이 있었을까. 그래서 입추 절기엔 맑은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기구하고 비의 재앙을 피하고자 기청제(祈晴祭)가 있었다 했다. 달과 태양이 일직선상에 놓여 밀물과 썰물의 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는 사리 현상이 발생하면, 서남해안 지역의 저지대는 침수하게 마련이었으니까.

자연재해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도 속수무책임이 드러나고 있다. 올해의 세계적인 기상악화로 인한 피해는 21세기 인류문명의 발전을 무색하게 한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인재의 요소가 더 짙게 드러나기도 한다. 산사태의 상당 정도가 인공적인 자연훼손 - 축지법을 위한 도로개설 - 탓이라는 보도였다. 그러고서 오늘의 농촌을 보라. 태풍에 쓰러진 벼포기에 매달린 경우는 그래도 상이다, 아예 논의 형태도 없는 우리의 훼손된 땅들... 잃어버린 꿈들.

우리는 기청제를 지내는 마음가짐으로 가을을 맞아야 한다. 우리는 정말 도로 하나도 다리 하나도 “돌다리 두드리듯이” 생각에 생각을 또 하고 놓아야 한다. 내년이면 사라질 장흥군 유치면 덕산마을의 운명에도 가슴 조인다. 수몰지구로 고시되어 모두 이사를 해야 했겠지만, 여전히 아직 이사가지 못한 집들은 이번 집중폭우에 물에 잠겼다. 애초 댐공사로 인해 면 사람들이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대를 위한 소의 희생쯤으로 묵인하는 우리들. 댐이 파괴하는 것은 환경만이 아닌 우리들의 연대감이다. 댐의 혜택을 받을 대다수는 댐공사가 묵살한 소수의 인생에는 외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기주의와 무관심 ― 그것은 어찌보면 하나의 끈이다. 풍성하고 한가로워야 할 가을의 문턱에서 스산하기만 한 기운은 도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철길을 뜯어 놓아 방치되던 것이 드디어 “푸른 길” 조성이 시작된다니 우선은 반가울 밖에. 철길이란 단순한 선이기보다는 어딘가로의 연결이었듯이, 이제 주변 공간과의 연계 속 풍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철도부지로 묶여 재산권 행사에 저자세이던 인근 주민들의 입장에선 다른 견해가 나올 법하다. 그들의 소수의견을 소수의견이라고 무시해서는 진정한 민주적 사업이 아닐 것이다. 푸른 공원으로 변할 네 곳 광장에 대한 기대나 푸른 길을 산책할 수 있을 혜택과 더불어, 우리에게 푸른 길을 제공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소수의 권리를 잊어도 되는가.

그러는 사이에 “광주현대미술관” 계획도 설왕설래가 재현되고 있다. 애초에 현대미술관 건립 계획이 도청 이전 이후의 도청부지와 예술의 거리를 하나로 묶는 문화벨트 프로젝트로서 구상되었다지만, 그러나 예술의 거리 끝 중앙초등학교의 문제는 여전히 혼미한 상태로 이제 본격적인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도심공동화로 중앙교는 20년전 5천 규모의 학생이 십분의 일로 줄고 교실은 아무리 특별실을 늘린다 해도 폐실되고 있는 현상이라니 축소 또는 이전이 바람직하겠지만, 이를 전체의 논리로서 소수를 핍박하는 형태로 추진되어야 할까.

행여 일이 잘 마무리되어 우리 도시가 예향답게 또 하나의 미술관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문턱 높은 예술의 성곽을 지어 놓을 양이면, 기존의 광주시립미술관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100주년 기념전을 가진 베니스 비엔날레의 귀감을 보자. 2년에 걸쳐 자르디니 공원에 중앙 전시장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 베지 못하게 했기에 우회 공사를 해야 했다는 일화는 냄비방 가슴으로 쉬 뜨겁기만 한 우리들 행정에 경종이 될 것이다. 냄비방 말고도 우리에겐 또 하나 흠이 있으니, 흉내 좋아하는 습성이다. 어디 좋은 데 미술관 따라가야 직성이 풀린다고, 웅장한 규모의 위용을 자랑할 생각이라면, 아예 역사 깊은 초등학교를 절단내지나 말자. 낡은 교실은 허물어 푸른 나무들을 가꾸면 우리들에게 산소를 선사해 줄 것이니까.

이제 곧 한가위, 그러나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노래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언제냐 싶게 이제 곧 밤 동안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대기 중 수증기는 엉겨서 풀잎에 이슬을 내릴 것이다. 밤이슬같은 썰렁한 가을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매사에 어딘지 따뜻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2002년 9월 16일)


Posted by 서용좌
소설2002. 9. 1. 23:30

<완료추천사>


실험 정신과 사색적 언어가 돋보인 작품



홍  성  암


   서용좌의 단편소설 <태양은>을 완료추천 작품으로 선정했다. 서용좌는 이미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도서출판 이유, 2001)으로 그의 작품적 역량을 들어낸 바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문단 데뷔 관행상, 단행본 출간도 문단 등단의 절차로 인정 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본인의 겸손으로 다시 한번 등단의 절차를 거친 것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장편 단행본 출간을 1차 추천 작품으로 인정하고 이번에 응모된 단편 <태양은>을 완료추천 작품으로 선정하게 된 것이다.


   서용좌는 이미 출간된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에서 인칭의 문제나 시점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실험적인 태도를 보인 바가 있다. 이 작품은 등장 인물에 일정한 이름이 주어지기보다는 ‘남1’, ‘남2’, ‘여1’, ‘여2’ 하는 식으로 기호화한다. 그리고 상호관계도 ‘선배’, ‘후배’, ‘친구’ 등으로 관계화시키고 또 더러는 상징체계로 ‘청바지’, ‘솜털’, ‘나팔꽃’, ‘달님’식으로 익명화한다. 그리고 매 장이 바뀔 때마다, 또는 같은 장에서도 시점이 바뀌면서 3인칭, 또는 1인칭으로 넘나들며 사건의 어느 측면을 조명한다.


   이렇게 서술시점을 옮기면서 서술자는 등장인물의 시점에 한정되어 사건과 심리를 인지할 뿐 텍스트 전체를 조망하지는 않는다. 이는 화자가 서술하는 세계는 텍스트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으로서 인생과 세계에 대한 작가의 현실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며, 화자를 통해서 부분밖에 인지할 수 없다. 그리고 총체적인 사건의 종합과 의미화는 독자의 몫이 된다.


   단편 <태양>에서도 그런 실험성의 맥락이 이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앞의 장편에서처럼 사건을 이끄는 몇 개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고난과 슬픔의 상징인 ‘눈물방울’, 불구성을 의미하는 ‘맨발’과 ‘발가락’ 그리고 과거 단절의 의미로 ‘잘린 머리칼’, 그녀의 불행을 키운 ‘삼색 가위’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등장인물에 동정적인 유일한 시집식구인 숙모를 화자로 해서 질부, 남편, 계모, 아버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딸과의 관계양상을 때로는 1인칭, 때로는 3인칭의 시점으로 여자와의 관계를 조명한다. 그들의 조명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서술되는 것이어서 매우 단편적이지만 독자는 그것의 종합화를 통해서(화자의 도움을 받지만) 주인공 여자의 공고한 생애의 실체와 접맥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서술구조를 보면 주인공인 여자는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슬하에서 살게되는데 자신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를 의식하게 되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와 미장원의 미용사가 된다. 그러던 차에 아직 대학생이던 남편을 만나게 되고,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로 시집에서 냉대를 받는다. 딸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해서 기죽어서 시집살이를 하게된다. 그렇게 낳은 딸도 할머니와 시누의 손에서 자라며 무식한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입장이다. 그러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딸이 가출을 하게되고, 여자는 무시된 자신의 생애를 극복하고자 술을 마시게 되어 마침내는 알콜 중독자가 된다. 그리고 끝내는 밀폐된 방안에 감금된 상태에서 죽게된다.


   이런 서술구조는 자신의 성격적인 결함으로 역경 속에 살아야 하는 운명적 플롯의 전형으로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등장인물의 익명화와 시점 이동의 다양성, 그리고 사건을 이끄는 몇 개의 상징체계가 남기는 강한 인상 등으로 하여 작가의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런 실험성이 하나의 시도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화자의 관찰을 통해서 드러나는 사색의 깊이와 접맥되어서 상당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역할 유희에 서툰 그녀는 확실히 조금 맹해 보였다” 라든지 “컴퓨터 자판 모양으로 일정하게 배열된 묘표” 같은 서술 표현은 매우 신선하고 또 깊이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의 기법은 단순한 기법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등장 인물의 삶의 본질로 접근하는 지름길이 된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기존적인 작품의 통속, 또는 통념화에서 벗어나 새로움의 시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특히 시의 적절한 삽입은 작품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여기서 기법이 곧 내용이 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작가의 강한 실험정신에 토대를 둔 만큼 사건 전개나 사색적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신인들이 항용 빠지기 쉬운 몇 가지의 단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째가 친절하지 못한 서술이다. 작가의 관념에 의해 대충 넘어가는 식의 서술은 그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독자로 하여금 작품 이해에 큰 장애가 된다. 둘째는 자주 발견되는 비문(非文)이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서술하지만 독자는 제각기 자기식의 어법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객관화된 문법체계를 따라야 한다. 셋째, 어휘의 정확하고 적절한 선택이다. 뛰어난 사색적 언어가 때로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적절치 못한 어휘선택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단점의 지적은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지엽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문학작품은 언어의 예술이고, 언어로 사색하고, 언어로 사물을 존재케 한다는 면에서 파악한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서용좌의 추천 완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특히 우리 문학의 세계화가 절실히 필요한 현실에 비추어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분들의 소설창작 참여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외국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우리 소설의 소재적, 주제적 영역 확장에 기여하고 동시에 문학적 수준을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매우 크다. 그런 점에서 서용좌의 신인 등단은 더욱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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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료추천 소감


소나기 금방 들어 닥치는 무더운 한여름의 오후,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감히 하늘이라면 신성모독일까, 은총처럼 어디에선가 내려온 부름이라면 변명이 될까. 서당개 3년 풍월이라고, 하세월 하이에나처럼 남의 글 파먹고 산 나머지이리라. 기껏 교실 크기의 낡은 중학교 도서실에서 시작된 긴 긴 유혹에 굴해버린 지금, 제 5막에서야 등장한 한 조역의 역할처럼, 기대되지 않고 슬그머니 나선 밤길 걷기에 거창한 욕심은 없다.

예컨대 「태양은」이란 제목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인생에 주제가 없거늘 글쓰기에 무슨 주제냐 싶은데, 이름은 있어야 해서 첫 단어가 내걸렸을 뿐이니까. 이런 초라한 글을 빌미로 멍석을 깔아준 《소설시대》에 다만 고개 숙인다.

있어도 없는 엄마-아내-딸, 나를 참아주는 가족이 내 글의 온상이다. 까다롭다는, 괴팍하다는 나와 더불어 이웃해 사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모두를 사랑하나 보다.

                                                        2002년 여름
                                                          서용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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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02. 9. 1. 23:00

    태양은   

 소설시대 4호

 

 태양은 바람을 타고 둥실 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따가운 등뒤로 그것을 느낀다. 나보다 한참 젊어서 떠난 여자가 매장되고 있다. 말하자면 토장(土葬) 절차가 냉랭하게 진행되고 있다. 여자들이 장지까지 따라나서는 일은 좀 뭣해도, 나 어린 질부의 장례에 발인만 보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꽃상여 대신 장의차와 혼백이 도착했을 때는 멀리에서 보아도 천광(穿壙)은 끝나 있었다. 광상(壙上)에 차일을 친 흔적도 없이 쨍쨍 햇빛이 광내에 내려꽂히고 있었다. 구덩이는 붉은 흙이 드러나 보일 뿐, 선입관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차가운 느낌을 발한다. 벌써 윗통을 벗다 시피 번들거리는 신체를 드러낸 건장한 체격 서넛이 노동 후의 쾌감을 즐기는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쉬고 있다가 상주들을 맞는다. 산역을 업으로 하다보면 그것 또한 일상이 되는 것인지, 건강 이온 음료수 선전 같은 데에 나오는 땀과 성취의 희열에 젖은 운동 선수 폼은 화덕처럼 이글거리는 열기로 인해 내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했다. 다행으로 나는 일찌감치 정지했으므로, 공동에서 멀리 서있게 되었다. 혼백이 도착하자마자 제물 진설이 부산하다. 특별히 오열하는 사람도, 숨어서 훌쩍거리는 사람도 그저 그렇다. 그저 숨을 죽이고 절차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숨을 거두면 이렇게 버려지는구나… 


삼일장이라지만 저녁 늦게 숨을 거둔 경우에는 만 이틀이 채 못된다. 이번 경우는 저녁 늦게 죽음이 확인되었다고나 할까. 응급실은 거쳤지만, DOA, 데드 온 어라이벌, 그러니까 도착 시 이미 사망이라는 진단으로 곧바로 영안실 행이었다니. 죽은 시각도 서로들 모른 채 그렇게 엉거주춤 장례절차가 있었고, 이제 그 마지막 과정이 냉랭하게 진행되고 있다. 매장 풍습은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던가, 세상 어딘가는 몰라도 우리 나라에선 고인돌로 미루어 선사시대에도 벌써…


이런 냉철함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어른 축에 끼이는 내 역할이었다. 늘상 그랬다. 시댁이란 공간에서 여자들은 대개 그랬다. 지금 정중하게 버려지고 있는 자는 새장의 새, 집 속의 여자였다. 나는 새장의 새, 집 속의 여자… 누구라도 들을세라, 그녀는 그런 구절을 외곤 했다. 라디오 프로에서 딱 한번 들었는데 외어졌다고 했다. 그 시의 제목이 「새에 대한 생각」 인지도 모르면서. 숙모님댁에는 시집들이 많은가요,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숙부님 외국출장 가셨을 때나…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엔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이 생일이라도 처음엔 큰집에서 챙겨주었고, 나중엔 괜찮은 식당에서 기분을 내는 편이었다. 내가 직장나가는 핑계로 음식장만을 못해서 그렇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그편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집안 행사는 항상 큰집에서였다. 어떤 며느리도 그런 큰집 시집살이는 어렵다. 단촐하게 살다 시집온 사람이면 더하다. 단촐하다 못해 외로움밖에 모르던 그녀는 어리둥절도 했으리라. 어리기도 헤서 더욱 안쓰러웠다.

바깥생활 하시니까 "새장의 새" 그런 시는 모르시지요. 엄청 가슴이 찡한 걸요, 날개는 부러지고 주둥이만 뾰쪽한 새… 

왜 몰라, 꾀 유명한 시인걸. 날개는 퇴화되고 부리만 뾰족하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아니 어떻게?

그래 여기 어디 시집이 있을 것이야.


저 어려운 책도 좀 주세요… 그녀는 책들을 그리워했다. 처음엔 그렇게나 짧은 학력인지 몰랐다. 학력에 대한 보상으로 어려운 책을 탐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소설도 수필도 건성으로 가지고만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세상 많고 많은 책들 중에서 한 두 권 골라주기가 쉽진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는 거의 모든 책이 어렵다. 다행히 그녀는 시집이라야 가장 어려운 책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 마음으로는 시집 몇 권 골라주기는 부담이 없었다. 내용이라는 것이 무게가 모두 달라서 권해준 부담이 날아가 버리니까. 시집을 좋아해도, 사람들은 그녀를 조금 맹한 것으로 치부할 뿐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는 그녀가 시 몇 편에 탐닉한다고 아무도 그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상황에 맞는 모습을 주문했지만, 역할 유희에 서툰 그녀는 확실히 조금 맹해 보였다. 적대적이지는 않은, 그러나 확실한 계급사회를 의식하지 못한 그녀는 당연히 벽에 부딪곤 했다. 더러는 사람에, 어깨에, 아주 더러는 가슴에 부딪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장 험준한 벽은 예상대로 시댁 식구들이었다. 걱정 말라던 기사 같았던 남편은 결혼과 더불어 차츰 적진으로 넘어갔다. 남편은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굴릴 뿐이었고, 마루 바닥과 그녀를 제외하곤 남편의 그런 내색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폄이 시작되었나 보다. 여자의 남편이 조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옆의 딸은 고개를 더 깊게 떨구기만 한다. 어른들이 일러준 대로 하관을 잘 지켜보아야 한다. 곡을 그치거라…  누군가 누군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말해도 곡을 그칠 사람이 누구인가. 목놓아 울던 사람이 없다. 말은 떠다니고만 있다. 굄목 위에 관이 가볍게 부딪는 소리가 들린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어딘가에 부딪고 가는구나… 붉은 명정을 덮는 동작이 보인다. 곡이 잠깐 시작되다 만다. 형식적인 곡이다. 그게 아니다. 사람들은 곧 차렷 자세로 합창단들처럼 노래를 부른다. 곡을 하려는 사람, 그것을 말리고 예배의식을 질서 있게 도입하려는 사람이 잠시 엇갈린 것이다. 외가로는 일찍 깬 기독교 집안이지만 친가는 구식이고, 자식들은 점차 인텔리화하면서 기독교도가 되어가는 과정이라서, 그러니까 골수 정통 기독교인 가정이 아니어서 생긴 일화였을 것이다. 나는 노래를 알지도 못하고 입만 따라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또한 꼭 가까이 다가갈 계제도 아니라서 어딘가 엉거주춤 머문다. 한 자리에 그냥 서 있으려니 근처의 묘표들만 키가 자라오듯 눈 속으로 파고들어 온다. 어딘가에 이 여자를 위한 묘표도 준비되어 있겠지…


컴퓨터 자판 모양으로 일정하게 배열된 묘표에는 대충 궁서로 여러 자손들의 이름이 보조되어 음각의 성명자가 적혀있다. 동네의 환경정리는 자유민주주의로 각양각색 서로가 서로를 흠집내는 것이 우리의 주택문화이지만, 묘표는 이웃 눈치를 보는 셈인지 하나 같이 일정한 크기이다. 망자는 묘표에 적힌 글씨가 아무리 달라도 계급이 없어진다. 이삼일 장례 기간 중에는 망자가 무슨 회장님이나 지방 유지라 해도 누구도 그의 그녀의 묘표 따위에는 별다른 신경을 쓸 리 없고, 관리소 측에서 그냥 주는 대로 묘표를 받아오기 때문이다. 이 바쁜 세상에 죽은 자를 위해 취향을 고려해줄 산 자는 아마 없는가 보다. 물론 선산이라는 제 2매장지로 승격될 때는 문중의 장식품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녀의 묘석에는 무엇이라 적힐 것인가. 무엇이라 적어야 할까. 아니 너는 무엇이라 적고 싶어 그러느냐? 서로 시댁에서 만난 사이인 나는 그녀의 처녀 적을 전혀 모른다. 어린 나이에 학생남편 따라 시집에 들어와 오늘에 이른 여자, 그것이 외형의 전부다. 돌이켜 생각하자면, 멋모르고 대졸 인텔리 혹은 기독교인, 혹은 대졸 인텔리 기독교인 등으로 둘러싸인 환경에 표류하여, 크지도 않은 눈을 높이 치켜들고 저 하나의 공간을 움켜쥐느라 소진해 버린 세월이 그녀의 인생의 총계였다. 서양이라면, 대졸 인텔리 기독교인들의 섬에 표류하여 애써 살다간 아무개여, 저 세상에선 아무도 아닌 섬에 이르러 숲 속의 새가 되거라… 라고 위로의 문구를 새겨 넣을 지도 모른다.


     날개는 퇴화되고 부리만 뾰죽하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몰래 중얼거렸다…


원래 시의 "중얼거린다"만 과거형으로 바꿔 묘비명으로 써도 족하리라. 그녀의 입에서와 다르게 무심코 과거형으로 내뱉은 내 마음은 벌써 그녀를 지우려 하는 것일까? 이 따가운 태양에 머리를 어지럽히면서 여기 왜 서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 여자를 매장하는 것인가? 어떻든 저승이 있다면 지하에 있을 것이기에 묻으려 하는가? 이들 가족이 기독교인들이라면 망자를 왜 하늘에 묻지 않는가? 하느님 가까이, 저 하늘 속에. 하긴 그래서 요즈음엔 망자를 연기로 만들기도 한다지… 아니면 사자를 겁내어서 이승에서의 관계를 끊기 위하여 매장하려는 것일까? 일종의 확인사살로서? 옛날 어디선가의 풍습으로는 시체 위에 무거운 돌을 눌러 놓는 매장법도 있었다고 했다. 시신을 염할 때 튼튼한 삼베로 12마디씩이나 묶는 것으로 보아도, 확인사살을 아니라 해도 확인이별 쪽은 확실하다. 목관에는 못을 박아, 석관은 말할 것도 없이 무거운 중량으로, 산 자들은 죽은 자들을 갈라놓는다.


그래요, 그랬어요. 전 사실 이만큼만 살다가 떠나게 될 줄 예감했어요. 딸아이가 영 등돌린 다음부턴 마음이 먼 데 하늘 보듯이 내 지나온 삶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혹시 제 이름을 알기나 하세요? 어차피 객식구처럼 가끔 만난 처지에. 게다가 숙모님이야 무슨 걱정이 있었나요? 눈물나게 고마운 것은 저에게 한 두권 시집을 선물해주신 일이었지요. 제게, 누구도 시집 같은 것을 선물해준 적이 없는 제게. 딸아이도 마찬가지였지요. 무식한 엄마, 거칠은 엄마라고 부끄러워했으니까. 무식하기야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딘가로 사라진 저는 뭐 유식쟁이에 끼이게 되었나요? 머리 나쁜 엄마 탓에 딸아이 성적이 그 모양이라고… 말로는 차마 안하면서 바라보는 눈길 눈길들… 그런 것이 독이 되어 들어갔지요. 그런 것은 독이 아니고 내가 삼켜온 술이 독이라구요? 녹아버린 것이 내장부터인지 마음부터인지 누가 안답니까? 차가운 땅속에 아주 단단히 갇히기 전에 내뱉는 소리가 으스스 귓가에 어린다.


그녀가 속앓이를 시작한 것은 아직 어린 나이로 아이를 가졌던 그때부터였다. 그녀의 인생관으로는 아이는 제 아버지를 가져야 했고, 그 일을 위해 그녀는 다른 많은 것을 버렸다. 아이는 태어날 때 제 아버지를 가졌다. 대신 제 어머니는 세상의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딸아이의 잇몸에 싹트는 하얀 이빨 조각만으로 행복했다. 달리 행복을 구할 데가 없었고, 그냥 그것이면 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조금 부끄러워했다. 그것이었다. 시댁에선 시어머니도 어렵고, 공부하느라 미혼인 손위 시누이도 어렵기만 했다.


어찌 저렇게 아무 것도 못하고 애 하나에 매어서도 쩔쩔 맨다니. 어쩌다 그리 순해 빠져서는. 순한 건지 모자라는 건지 원.

시어머니의 혼자 말에 시누이는 짜증이다. 엄마, 그러게 왜 양보할 걸 양보해야지. 엄마 이제 어떡할 건데?

얘야, 너도. 이제 뭘 어떻게 해. 네 동생이 책임진다는 걸 누가 말리며, 또 사람이 책임은 져야지. 여자가 집에서 뭐 별 자본가지고 산 대니, 인물 어지간하고 조용하면 되었지. 다음에 아들만 낳으면 되었지 뭘 그러니. 너도 곧 시집갈 것이면 그러는 것 아니다. 아 누나가 어서 가야지. 어서 어서 잘 들 골라 봐. 네 형부들 오죽 잘났냐? 


그 시어머니는 내게는 큰형님이었다. 큰형님네 가족은 평범 무탈했다. 시아주버님은 농협에 잠시 있었던 경험으로 작지만 탄탄한 사업을 지니고 있었다. 군수 살았던 개화된 장인 덕에 지방 유지들과의 교제 범위도 넓었다. 지방일수록 기독교는 개화된 특권 비슷했다.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러움을 샀다. 위로 세 딸을 낳았지만 늦게 본 막둥이 아들 하나로 기쁨을 더했다. 아들 딸 모두 대학을 보냈으니, 그 시절로서는 성공한 어머니였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큰딸은 부부교사로 부족한 듯 건실하게 살고 있고, 피아노를 전공한 둘째는 졸업 전부터 졸라대는 고교동창생을 따돌리고 중매자리를 놓아서 일찍 시집 보냈다. 어찌어찌 지방분교로 내려가 의과대학을 나온 사윗감에 걸맞게, 집안에 의사 하나는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무리를 했다. 셋째는 대학원까지 진학했으니, 자식들이 점차로 성공하는 기미에 내심 즐겁기만 했다. 그 아이 공부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에 온갖 정성을 들이지만, 노상 막둥이만 걱정이었다. 썩 양에 차지 않은 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랬지만, 우직하게 남들 따라 일찌감치 군대에 들어간 후는 걱정이 더했다. 그러나 딸들 덕분에 시간은 빨리 흘렀다. 명절 때에도 어떻게 휴가를 맞췄다. 참 좋은 세상이었다. 제대만 남았다.


아들 문제는 뜻밖에 시작되고 있었다. 학교 앞 미장원에서 얽히기 시작한 인연, 물론 처음에는 그냥 아무 일도 아니었다. 대학 입학 후엔 머리를 짧게 자를 필요는 없었고, 스타일도 자유로워서 이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이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들이랑 어울려 미장원에 들어갔다. 남학생들도 이발소 대신 미장원엘 가는 모양이었다. 이발소들이 이상하게 변질되고 있었고, 고등학교의 구내이발소를 찾아가는 것은 좀스런 짓이었다. 그날 서너 명 남학생이 몰려들어간 미장원에는 겉보다는 안이 사뭇 작아서 주인 아주머니 외에는 어려 보이는 잔심부름꾼 하나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용사 한 사람이 머리를 깎자면 시간이 너무 걸릴 수밖에, 그런데 그들은 젊은이답게 마음이 급했다. 처음엔 그냥 천장을 향하고 기다렸지만, 다음에 여자 손님도 들어오니까 더 급했다. 조금 있으려니 머리에 보자기를 쓴 아주머니/할머니도 들어왔다. 할머니는 대뜸 애송이 처녀 쪽으로 가서 앉았다. 보자기가 풀리자 분홍색 뼈들이 나타났다. 동글동글한 뼈는 플라스틱 기구였다. 플라스틱이 풀리자 곱슬머리가 나타났고, 그 속으로는 허연 머리통이 비췄다. 처녀가 머리를 감기고 나니 아까 보단 나은 머리가 되었다. 손질을 하자 점점 더 나아졌다. 아하?


저 우리 다 한 줄로 기다려야 하나요?

아 저기도 미용사예요. 오래 되진 않았지만 분명 미용사니까 일하지요.

야 우리, 가위바위보 하자.  


그렇게 해서 초보미용사에게 걸린 그는 어색해 고개를 비뚜름히 그쪽 의자에로 엉거주춤 앉았다. 보자기 할머니가 앉던 모습을 흉내내었다. 그런데 미용사는 눈을 들지도 않았다. 거울 속에서도 눈을 주지 않은 채, 어떻게요? 하고 묻는 말이 입도 벌린둥 만둥 했다. 대충 약간만 짧게 라고 말하며 괜히 주눅든 그는 거울 대신 무릎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은 천으로 덮혔으니까 무릎이 있는 근처였다. 어딘지 스물거렸다. 머리카락이라도 등으로 들어간 것일까? 무심코 오른손을 움직여 가려운 쪽으로 뻗으려 했다. 그때 손목쪽 팔에 물방울이 살짝 스쳤다. 그때 그는 그것을 지나쳐야 했을 것이다. 물방울 일까말까 하는 작은 습기, 그것을 지나치지 못한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 그 작은 물방울의 출처를 올려다 본 그는 무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누가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처녀의 눈에 소리 없는 눈물이 한 방울 넘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십분의 일초, 그 다음 계속된 것은 영겁의 시간 같았다. 그는 처녀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본 죄인이 되어서 괜스레 고개만 쳐 박았다. 머리 깎이는 소리도 의식되지 않았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 있었고, 무심한 발걸음으로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밥 먹으러 가자는 친구들의 말에 어째 목이 마르다며 맥주집을 고집한 것은 그였다. 여자의 얼굴이 생각나지는 않았다. 올려다보았는데도 그랬다. 잔을 든 오른 손 팔목에 아니 조금 위쪽에 그 눈물방울이 말라있었다. 혀끝으로 가만히 대어보니 조금 짭짤한 느낌이었다.


야, 눈물의 농도는? 내 소나기 퀴즈 낼께.

이 자식이, 갑자기 맥주 타령이더니 웬 눈물?

아 또 눈물이라 하면, 육상에 사는 척추동물의 누선에서 나오는 분비액으로, 사람의 경우는 외안각 윗눈꺼풀 근처의 눈물샘에서 분비하는 투명한 액체로서…

야 집어 쳐, 너 그 암기법 고시공부나 시작해라 뭐.

어 그런데 육상에 사는 척추동물이라니, 그럼 육상에 살지 않는 척추동물도 있냐.

나 참,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는 척추동물 아니냐? 포유류의 눈물이야 그렇다지만, 악어의 눈물이란 말이 왜 있게!


여자는 남자보다 눈물이 많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순간에 울고 있었을까? 여자는 그의 생각 속에 들어가 버렸다. 그는 소가 되새김하듯이 그 일을 되생각했다.


머리카락 무더기가 구르는 차가운 바닥, 비질을 하면 머리카락은 솜사탕뭉치처럼 그녀의 슬리퍼 위로 기어오른다. 그리 깨끗치 않은 흰 양말 위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은 더러 그녀의 발등을 간지른다. 머리를 깎는 내내 그냥 그곳만 보고 있으려니 더러운 흰 양말 앞 엄지 쪽엔 구멍이 날듯 헤진 부분이 더욱 시커멓게 드러났다. 좁디좁은 볼에 유난히 엄지 쪽만 튀어나와 망가뜨렸으리라. 그러고 보니 슬리퍼가 너무 넓어서 발 앞쪽이 자꾸 앞으로 쏠렸다. 민망해서 눈을 감자니 그것 또한 어색했다. 자는 줄 알면 좀 그렇다. 실눈을 뜨면 다시 헐렁한 슬리퍼 속의 메마른 발, 더러운 양말. 가늘게 구멍난 엄지발가락. 설마 하고 정신을 가다듬자니 그는 그녀의 발을 발가락을 그리고 있었다. 제 주인 아닌 것 같은 헐렁한 슬리퍼도 지저분한 양말도 벗긴 채. 발등은 파르스름 핏줄이 돋고 발등에는 가녀린 뼈 줄기가 드러났다. 더러운 희색 양말이 가렸던 발은 대조적으로 깨끗했다. 그럴 것이다. 하얗고 긴 발가락을 가진 외로운 발, 다 커서 홍역을 치르는가 뭔가 말라비틀어진 발을 움찍거리던 막내고모의 맨발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 속 막내 고모는 큰누나보다도 작은 체구로 방안과 마루 끝만을 오갔다. 왜 누나처럼 학교에 안 가는지, 왜 같은 밥상에도 오지 않는지, 고모니까 그러리라, 그것이 전부였다. 햇볕이 드는 오후에도 막내 고모는 조각 누비이불을 덮고 마루 끝에 눕다시피 앉아 있곤 했다. 고모가 움찔거리면 놀랍게도 맨발이 드러났다. 누어있는 특권이 맨발인가? 나중에 고모는 하늘 나라에 갔다고 했다. 하늘나라에는 맨발로 가는가?


남아있는 사람들은 정말 아무도 맨발이 아니었다. 어려서 본 할머니와 어머니의 것은 찌그러진 양말, 알고 보니 버선이었다. 고모들의 하얀 양말은 사시사철 남성여성 공용이었다. 누이들의 것은 색도 있었고 줄무늬도 있었다. 뒤뜰 빨래 줄에 걸린 양말들은 많은 식구 수를 고려해도 많고 많았다. 그것들은 바람에 날려 철봉대에 걸리거나 나뭇가지에도 걸렸다. 장작더미까지 날아가 있기도 했다. 둥그런 전구 알에서 여러 바늘땀으로 새로 고쳐지는 것들 중 단연 양말이 으뜸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일 말고도 여러 일을 모여 앉아 하기 좋아했다. 여자들은 많아도 대개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대평원의 동물들이 뭔가에 대한 보호 본능으로 뭉쳐 이동하는 것과 비슷했다. 혼자 사색에 잠겨있는 것은 남자였다. 그는 남자아이였으므로 아이 때부터 혼자 사색에 잠겼다. 사색에 잠겼다는 것은 순전히 그의 착상인데, 예컨대 응접실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 모습이었다. 응접실은 ― 그것이 왜 응접실로 불렸는지는 이상하다, 별로 손님대접을 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 아버지 전용이라기 보다는 남자가 혼자 있고 싶으면 들어가는 방이거니 했다. 큰고모가 고모부이랑 오는 날이면 고모는 어머니에게로 고모부는 응접실로 갔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도 혼자서 그리로 갔다. 그는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 가만히 가서 앉아보곤 했다. 자연히 그곳은 사색하는 곳이라 생각되었다. 혼자 있으면 무엇인가 모를 가상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사색이었다. 실생활에서 잠시 떠나기, 그렇게 구원을 주는 것이 따로 없었다. 학생이 되어 할 일의 짐이 많거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머리가 아프면 그곳에 들었다. 그는 응접실 단골이 되었다. 아버지는 대개 늦으셔서 빈 응접실을 차지할 수 있는 시간은 넉넉했다. 어떤 때에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대로 해가 저물고 불을 켜지 않고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는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 천천히 날이 저물고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자신의 존재 이외에는 아무런 초점이 사라지는 순간. 그가 어둠을 좋


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절대적인 고독감은 근사했다. 아버지 또한 그러신다는 생각에, 기이하면서도 동질감을 느꼈다. 아버지는 아마도 새벽녘의 날이 밝는 순간 홀로 이곳에서 유아독존의 느낌을 가지실 수 있을 것이라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혼자 쓰는 방에서 누군가가 깨우러 와야 일어나던 버릇으로 아침의 여유는 그림의 떡이었으니까. 대신 그 혼자만의 세계는 그에게 나머지 시간을 잘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어머니랑 여자들이 집에서 그러하듯, 공동으로 이끌려 다니는 것이 아이들의 학교생활이라면, 그 정도야 참을 수 있었다. 어느 때고 혼자 만의 시공간 속에서 혼자 만의 세계를 가질 수 있으니까. 그곳은 완벽히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말하는 법을 터득해 나아갔고, 가만히 앉아서 허공에 수없는 문장들을 써나갔다. 만일 종이에 옮겨졌더라면 고교졸업반 문예지에라도 실려 다른 친구들의 세상 속으로 날아갔겠지만, 머리 속에서 쓰는 글은 한없이 쌓여만 갔다. 그는 풍요로웠고, 더는 욕심이 없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그는 얌전한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결혼으로 신식 문물에 빨리 적응한 경우셨다. 외할아버지는 을미사변 이듬해 태어나서 어려서 동학을 기억한다 하셨고, 이상한 반작용으로 서학을 받아들이셨다 했다. 외할아버지의 서학은 기독교였고, 있는 땅 바쳐서 교회하나쯤 개척해서 목사님을 모시는 일은 선진 가문의 영광일 터였다. 아버지는 그런 집안의 사위가 되는 행운이자 의무로서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친가에서는 외톨이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다음 차츰 아버지가 가족들을 다 돌보신 이후 가정은 기독교 쪽으로 쏠렸다지만, 아이들은 예전 일은 모르니 그런 아버지만을 알고 자라났다. 아버지는 대범한 큰아들을 원했을 것이나 아들은 늦게 서야 태어났다. 누이들 밑의 아들은 대가 세지 못하다는 공식이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를 위시한 여자들의 세계에서 과잉보호 받는 때문이라 했다. 그도 과잉보호를 받았다. 여자들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여자들은 남자들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막둥이를 챙긴 것은 느린 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를 목사관과 같은 가까운 좋은 환경으로 이끄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슈바이처같은 의사가 되어 의료선교에 몸바치는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소년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뭔가 남자는 대들보 같아야 한다고 하시며, 의사같은 것은 은근히 얕잡아 보셨다. 그러나 그가 겨우 서울소재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상담 결과가 나온 뒤에, 아버지는 법관쯤의 기대를 접었다. 한 집안에는 그저 가업을 이을 아들로 족했으니까. 딸만 셋이었을 상황에 비하면 무척 다행스런 일이었다. 키는 다 자란 아들이 군대에 시달려서인지 힘들어하는 그 즈음 아버지는 더욱 사색에 잠겼다. 얼굴이 점점 길어졌다. 근심들이 슬며시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을까?     


그런데 맨발이 문제였다. 오직 뼈가 드러난 병든 고모에게서 흘끗 보았던 맨발의 기억. 그는 그것을 더러운 흰 양말 속 맨발에 대한 상상으로 엄청난 환상에 빠져버렸다. 무엇엔가 쫓기듯 곧 군대에 입대했지만, 군막사에는 그에게 안정감을 주던 아버지의 응접실을 대신해서 그의 사색을 담을 공간이 없었다. 일찍 눈을 감고 누워서 소등 시간이 지나 칠흑같이 어두워진 넓은 막사 내에서나 사색의 자리를 찾았다. 4차원의 공간, 앉아있는 대신 드러누워서요, 점점 어두워지는 대신 아주 어두워진 다음에 시작하는 변화만 빼고는 괜찮았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잠이 들기 전에 생각을 하면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맨발이 문제였다.


어떤 다른 여자의 맨발들을 문득 보게 된 것은 면회소에서였다. 젊은 남자들에게는 젊은 여자들이 심심찮게 면회를 왔다. 처음에는 젊은 남자들의 우악스런 군화와 대비되는 젊은 여자들의 작은 신발이 신기했다. 전엔 집안 여자들의 작은 신발들을 왜 의식하지 않았었는지, 생각해 보니 참 의아했다. 캠퍼스 여학생들의 신발이 기억나지 않은 것 또한 의아했다. 여자들의 신발이 왜 하필 면회소에서만 돋보이는가. 당연히 그 대비로서 군화 때문이었으니, 그냥 그렇게 지나갈 일이었다. 매형과 함께 그를 면회 온 누이는 펑퍼짐한 단화였다. 하긴 설악산 여행중이라 했으니 그럴 밖에. 하지만 맨발 아닌 발이 이상했다. 그는 아무튼 그 다음에는 면회소 여자들의 작은 신발만이 바깥 세상의 상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얇아지는 옷차림을 주시했을지 모르나, 그는 맨발이었다. 발뒤꿈치가 드러나는가 싶더니 점차 앞은 물론 끈만 남는 아슬아슬한 노출에 몸이 뒤틀리곤 했다. 어쨌거나 쌀 반가마는 넘을 몸무게를 저 가느다란 굽에 끈만을 달고서 싣고 다니는 것이 신기하다못해 신기(神氣)라 느껴졌다. 여자들은 신선이었다. 구름 위도 떠놀 수 있을. 그 1cm도 못될 끈을 벗기면 맨발이 드러날 것이고, 그러면 어쩐다? 바닥만을 붙여서 구두가 되는 일은 없나? 발바닥에 본드풀을 붙인다 해도 불가능할 일이었다. 아하, 맨발로는 보도를 걸을 수 없구나. 다른 말로, 보도를 걷는 맨발을 볼 수는 없구나. 여자의 맨발은 그럼 영 볼 수 없는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 버려 이젠 사라진 막내고모의 맨발처럼?


그는 여전히 맨발의 기억을 찾고 있었다. 어디선가 보았던, 고모의 그것보다 더 뾰쪽하고 앙상한. 기억의 끝에 얻어낸 답은 잘려나간 머리카락들 보송이 사이에 드러난 살색이다 못해 허옇게 바랜 맨발이었다. 희검은 솜사탕 사이로 내비친 때묻은 발가락. 더러워진 흰 양말을 투과해 비추던 앙상한 맨발의 주인은 그가 눈물 맛까지 기억하는 그녀였다. 불이 켜져있어도 어두운 쓸쓸한 작은 미장원 차가운 바닥 위의 초라한 맨발. 뜨겁지도 않은 눈물 한 방울을 선사한 그녀. 그러다 현란해진 맨발들이 차츰 줄기 시작해서 조바심은 더했다. 여름이 끝나가기 전에 그는 마침내 휴가를 받았고, 곧장 그의 맨발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의 그녀를 향했다.


대학가는 빠르게 변한다. 딱 한번 갔었던 미장원은 위치만 기억날 뿐이었다. 그 사이 늘어난 큰 건물들은 우선 치장부터가 달랐다. 원색의 강렬한 구호와 시커먼 간판의 대조가 그랬다. 못 보던 없는 검은 궁서체의 서점 간판과 스테인드 글래스의 소주집과 분식집이 그랬다. 뭔가 억눌린 분위기는 애써 찾아낸 미장원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했다. 주인 여자는 여전히 은회색 비닐 앞치마였다. 뒷머리를 더 올려 빗었어도 한 번은 보았던 얼굴일 터였다.


저 여기 미스 아가씨 미용사…

아가씨 미용사요? 아니 이게, 아니 어떻게 걔를 찾아온 사람도 있나으? 

"있나요"라고 하기 싫어서 그러는지 이상하게 말꼬리를 흘렸다. 저 그러니까 작년 이맘때인가 저쪽에서 이발하고…

아니 그러니까, 걔하고 무슨 일있어으?

아니 그건 아니구요, 뭔가 하면 저…

참 우습네으, 알기는 아는 사람이으?


어렵게 더듬거려서 핑계를 대고 물은 끝이었다. 그래도 미용학원선생이 미용실 지점을 내면서 "걔를 스카웃 해갔다니까으" 라는 푸념을 드러냈다. 대학가는 아무 것도 안된다고, 사람들이 소주집에 모여 뭘하는지, 그런 덴 장사가 된다고, 바로 옆집 안 보았냐고.


학원선생이 낸 미장원 지점이라는 곳은 시내 쪽에 있었고, 그는 무작정 시내를 향해 걸었다. 시내에 이르러서도 어쩔 줄 몰라서, 다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곳은 모르는 곳이니 일단 손님처럼 들어가 본다? 그 다음은… 시간이 어중간해서 중간에 함께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럼 넌 그 여자를 만나서 데이트라도 하려는 것이더냐? 그냥 이 여름의 맨발만 보려는 것 아니었어?


그는 아직 한낮인데 그 곳 간판을 찾았다. 대학가와는 전혀 다른 따뜻한 기운이 넘치는 거리 한 복판 4층 건물 2, 3층이 미장원이라 쓰여있었다. 그는 무턱대고 2층부터 투시해본다. 사람들은 똑같은 멋진 앞치마를 입고 이상한 소음 속에서 똑같은 동작으로 팔을 치껴든 채 사각사각 머리를 자르고 있을 것이다. 평균보다 작은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3층은 더욱 뿌연 공기 가운데 또 다시 똑같은 동작의 무엇인가에 열중한 사람들 뿐이다. 급히 눈을 거두어 다른 간판들을 읽어보았다. OO호프, 레스토카페OOO? 그는 아직 계단은커녕 입구에도 들어가지 않고 서 있었구나 싶었다. 다방은 없나? 그는 어슬렁거렸다. 가슴을 추스리고 정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그래서요? 어디 손님이 한 두분…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은 그녀를 말해준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글쎄요. 전 그런 곳에서 일한 적이 없는데요. 손님이 뭔가 착각…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은 그녀를 말해준다. 그녀의 눈물 한 방울은 나만이 아는 비밀이거늘. 그래도 나를 부정한다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그런데 그게 제가 처음이라고…


아니다, 그 말은 과장이거나 내 상상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다. 나는 그때 내가 그녀의 첫 손님이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저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저쪽 대학정문 앞에서 이발을… 그런데 사실 제가 놀랐던 것이 있었는데 묻지 못했습니다. 그 궁금증 때문에… 


아니다, 이건 그녀를 놀라게 할 것이다. 나는 그녀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맨발을 아니 나의 그녀의 맨발을 보는 것만을 원했지 않은가.


계단을 올랐다. 기대했던 향수가 아닌 독한 약냄새가 풍겨왔다. 각도를 달리한 수많은 거울들 틈에서 희멀건 까운 대신 늘씬한 제복의 여자들이 겹쳤다. 기억 속의 그런 왜소한 처녀의 모습은 없었다. 3층 그곳에도 더 활발한 움직임뿐이었다. 엉거주춤 느린 동작의 동그란 그녀는 없었다. 화려한 얼굴들을 주시할 수는 없는 일, 그 얼굴들에 대고 건넬 말도 없었다. 그는 돌아섰다. 문간은 한 발짝 앞이었다.


무슨 일이셔요?


아, 누군가 "무슨 일로 오셨죠?" 라고 야무지게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손님, 뭐하시게요?" 라고 하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무슨 일인가 하면 그것이, 저기 O대 앞 미장원에서…


사각사각 연기 냄새 속에서 가만히 움직여 오는 여자. 이제도 소녀만큼한 몸으로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머리를 하고 고개를 내민다. 숙인 채 내민다. 입은 열지도 않는다. 그는 서둘러 제가 좀 전할 말이 있어서 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고는 돌아서 나온다. 그는 그렇게 기다릴 양이다. 그가 머뭇거리기만 하고 실제로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음을 그는 알지 못한다.


아직 거리는 환하다. 길 건너편으로 도망치듯 달린다. 전봇대에 살짝 부딪힌다. 군복이 전봇대에 부딪히다니, 민간의 눈으로 보면 한심한 놈이다. 문, 아니 문이 있어야 할 열린 공간은 일미터 넓이도 안되어 보인다. 그 속에서 그녀가 고개를 내밀면 그에게 들키지 않고 나갈 수는 없다. 쳐다보는 눈에 힘을 싣자 그녀가 나올 구멍이 점점 커진다. 시커멓게 뚫려서인지 막혀 보였던 그곳이 뿌연 안개처럼 넓어만 간다. 이제나저제나, 숫기 없어 보이는 그녀가 근무시간을 쪼개어 나올 리는 없다. 그러나 퇴근시간은 있기 마련이고, 그녀는 날이 어두워지면 나올 것이다. 어색해지면 그럴 수록 쳐다보는 눈에 그리고 이마에 힘을 실었다. 그녀가 나올 구멍이 점점 커진다. 점점 밝아진다. 제법 크고 따뜻해 보이는 저 건물 안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희미하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눈여겨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가 그나마 앞모습으로 나올 것이 다행이다. 적어도 인상만은 지니고 있으니까.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 희한했다. 뒷모습은 아예 셈에 넣지 않았나? 아무튼 앞모습으로 드디어는 그녀가 걸어 나올 것이었다. 밖이 어두워지면서 구멍이 상대적으로 점점 밝아졌음은 그가 알 리 없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시간이 흘렀을 때 요란한 머리복색의 여자 둘이 나타났다. 미장원 여자답게 부풀린 컬이 멀리에서도 돋보였다. 이번에도 역시 부푼 머리에 유난히 어깨가 강조된 의상의 여자 실루엣이었다. 조금 간격으로 그런 여러 사람들이 나갔다. 그녀는 아직 아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청소담당인가? 그리고도 한참 동안 더 이상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그의 눈을 비껴 그 문을 나갔을 리는 없다. 그러고도 한참만에 마침내 까운을 입지 않은 그녀가 나타났다. 고개를 숙이고서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숙인 고개만 아니었다면 작업복을 벗은 그녀의 차림은 오히려 생소했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적당한 치마의 실루엣은 참 생소했다. 일터를 벗


어나는 차림은 청바지 정도의 발랄한 모습이거나 날리는 짧은 치마여야 했다. 나름대로 시내 쪽의 훤칠한 미장원이 아니던가? 수더분한 아줌마 모양새는 다시 그 처음의 기억을 강하게 확인시켰다. 발을 보았다. 하루 종일 더러워진 흰 양말이 아닌 지금, 이번에 그녀의 발은 구두에 덮혀 있었다. 아직 여름이었으나 여름 같지 않은 구두 속에. 고등학생 같거나 아님 할머니 같은 구두 속에. 낭패였다. 정말 낭패였다. 그는 맨발을 원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무가내로 졸랐다. 우선 배가 고팠고, 뭔가 먹을 것이 절실했다. 아무 데고 김밥이 보이는 집으로 끌었더니 고개를 저었다. 김밥을 싫어하는 여자아이, 참 드문 일이었다. 다음 보이는 국밥 집, 국밥을 시켜 놓고도, 어중간한 국물을 떠먹으면서도 그리 할 말은 없었다. 그는 그저 한번 꼭 보고 싶었다, 그냥 꼭 보고 싶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런 정도의 말을 중얼거렸고, 어색할수록 맥주 좀 마셔도 되겠냐 그래놓고서 한 두잔 맥주를 마셨다. 여자가 국밥을 다 먹도록 아무 말도 못하던 그는 불어터진 국밥을 밀어 놓았다. 저 보시다시피 휴가 나왔는데요… 그 다음은 다시 막혔다. 저 소주 한 잔 해도 되겠습니까… 알코올은 안된다, 다짐하는 마음과 마시는 행동은 반대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튿날 새벽이 무섭도록 늦게 찾아오는 데 놀랐다. 그렇게 여자의 방에서 새벽을 맞고, 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나섰다. 더는 중얼거릴 말도 없이 고개만 떨구고 발을 옮겼다. 하루 종일 걸려서 생각해 낸 것은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뿐이었다. 하루 온종일 길에 있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뭔가 말은 해야 하지 않는가. 늦은 시각 그렇게 여자의 집을 다시 찾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려주는 밥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고, 그렇게 다시 긴 긴 새벽이 오는 것을 지새고 새벽길을 나섰다. 여전히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머니는 다행히 아무 것도 모르셨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막내 누이가 그를 살필 쯤에는 3박4일 짧은 휴가가 지난 뒤였다. 그는 그렇게 돌아왔다.


뚜벅뚜벅… 무거운 걸음걸이로 시작되는 남자들만의 공동체 생활은 차라리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휴가의 기억이 꿈인가 싶었다. 그것도 며칠, 맨발들이 완전히 사라진 만추가 되어도 그는 여전히 맨발 하나를 찾고 있었다. 맨발이 그를 쫓고 있었다. 눈길이 막혀 아예 면회소가 앙상해지자 온 천지가 맨발자국이었다. 이상하리 만치 맨발은 반쪽의 모양으로 박히었고, 그가 찾는 맨발은 온 천지에 널린 맨발들과 구별되었다. 그는 한 겨울에 열병을 앓았다. 그는 사색으로 밤을 지샜다. 그는 다른 막사 입구 안쪽에서 발견되어 두개의 막사 뿐 아니라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막사의 동지는 상관으로부터 그 상관은 그 상관으로부터 심한 조사를 받았다. 어떻게 막사를 걸어 나갔는지 어떻게 다른 막사를 찾아들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부끄러움이 그를 단속했다. 그는 조용해졌다. 미소도 더 잘 지었다.     


남겨진 여자는 놀라움 반 행복감 반으로 그리 춥지 않은 겨울을 지내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주 가까이, 아예 체내에서 숨을 쉬고 있는 느낌은 훈훈하기까지 했다. 겁은 나지 않았다. 말없이 찾아온 그는 말없이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그는 다시 올 것이고, 아이는 몸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제 그녀로서는 거의 가족을 다 갖춘 셈이었다.

그녀가 여중을 졸업하는둥 마는둥 여고진학을 포기한 것은 꼭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는 숨막히는 아버지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불쌍한 아버지는 그녀가 보지 않으면 덜 불쌍할 것이었다. 새 어머니와 네 동생들… 그것으로도 벅찬 아버지는 그녀를 돌볼 기력도 없이 미안해하고만 있었다. 생모를 잃은 아이답게 그녀는 일찍 철이 들었고, 아버지의 고통을 보았다. 예, 또는 아니오, 그 중에서도 보통 예 라고 말하는 딸이 미안한 아버지는, 그러나 아버지라서 딸에게 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긴 머리를 빗겨주는 일도, 리본을 매주는 일도 하지 못했다. 머리를 빗다가 지각을 하곤 하는 그녀를 보다 못해 새어머니가 머리를 싹둑 잘라버린 날, 딸은 처음으로 드러내고 울었다. 겨우 훌쩍거리는 것이었지만 그랬다. 눈물을 덜 닦은 채 잠든 딸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버지가 울었다는 것을 그녀는 꿈에서 기억한다. 꿈에서 아버지가 흘린 눈물도 느낀다. 팔뚝에 스친 눈물, 눈물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눈을 감고 있었으니, 아니 어쩌면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 색깔을 보지는 못했다. 눈물에 색깔은 없는 것으로 기억되었다. 눈물은 따뜻하다. 아버지가 불을 껐는지 방이 어두워지고 아직도 팔에 남은 눈물자국을 볼에 대어 보았다. 깜깜하다보니 볼 대신 입술에 스쳤다. 눈물에서 바다 냄새가 났다. 소금에서 나는 냄새였다. 더 이상 외갓집에 가지 않는 동안 가끔은 밥상의 소금을 가만히 손가락에 묻혀가지고 나왔던 생각이 났다. 어머니냄새는 외갓집 냄새랑 다 이 비릿 찝찝한 소금 맛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눈물도 그런 맛


이다. 그러니까 엄마와 아빠는 소금 맛이다… 그녀에게 부모는 소금이었다. 더운 여름날, 키 높이 자란 학교 뜰에서 늑장부리고 놀다가 뛰어 돌아오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걷어올리다 가만히 그 팔뚝을 핥아보면 여전히 엄마 냄새가 나는 것이 신기했다. 아빠의 눈물 자국이 엄마 냄새라니… 팔뚝에서는 항상 아빠의 눈물 맛과 엄마 냄새가 함께 났다. 아버지는 더는 울지 않으셨다. 그녀도 더는 울지 않았다.


몇 해후 아버지의 얼굴에서 눈물 대신 마른 잎 소리가 나는듯 하던 겨울을 나면서, 그녀는 상급학교에 진학할 마음을 접었다. 대신 머리카락이 잘라 버려지고 다듬어지는 미용실을 마음으로 택했다. 그건 나름대로 신기한 경험이 될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못보낼 상황은 아닌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 불만이 뭐라서 그러느냐… 고향에서는 아무 것도 안될 것이었다. 책꽂이에서 사회과 부도를 꺼내 지도를 폈다. 날마다 지도를 뒤졌다. 집에서 대각선으로 가장 먼 곳으로 강원도지방을 생각했고, 고성, 속초, 양양, 강릉을 찾아보았다. 일단 어머니 냄새가 날지도 모르는 바다 가까운 곳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강릉도 너무 멀었다. 무슨 능 같아서 싫기도 했다. 아버지를 설득하기도 어려웠다. 고향이 아니지만 살아갈 수 있는 곳, 또 친이모가 서울 근교에 있으니, 서울에는 아버지도 조금은 안심하셨다. 이모도 서울을 권했다. 그렇게 대학생들 넘치는 신촌 마포 가까운 곳에서 중졸 인생이 시작되었다. 졸업도 하기 전 겨울부터였다. 눈물은 첫날부터 그녀의 친구였다. 눈물 한 방울에다 대고, 그래 난 바보다…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모는 실기와 이론을 병행하는 1대 1 교육코스를 추천하셨지만, 그것 또한 숨통 막히는 일이었다. 심부름할 미장원은 널려 있었다. 야간반 코스라야 집에서 용돈을 갖다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때 처음 미용실 바닥을 쓸고 또 쓸면서, 잘려나간 머리카락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땀을 많이 흘리고 잘 감지 않는다고 새어머니가 긴 머리를 싹둑 잘랐을 때, 그때는 조금 울었지만 시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머리는 또 자랐다. 그렇지만 그 때 잘려나간 머리와 함께 엄마의 손길이 묻었던 과거가 잘려나갔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난 미용실 머리카락들 사이에서 깨달았다. 과거는 머리카락 잘려나가듯 사라지는구나. 과거를 잃지 않으려면 머리카락처럼 세심하게 간수해야 하는구나… 그녀에게서 어머니는 그렇게 잘려 나갔다. 머리카락 청소만 하며 짬짬이 학원을 다니다보니 반년 훨씬 더 걸려서야


 자격증이 나왔다. 뒷머리를 길게 세칭 거지컷이 유행이었고, 커트 오는 손님은 죄다 퍼머를 시켰고, 드라이 손님을 위해서 앞머리는 드라이해야 예쁜 것으로 고정된 그런 때였다. 학원에서 졸면서 열심히 배운 업스타일이나 아이롱은 벌써 퇴물이었다. 그 전에 있던 미용사언니는 그녀가 일을 거드는 중에 벌써 독립해 나갔고, 주인은 다른 미용사를 고용하지도 않았다. 자격증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녀를 시다 취급했다. 그런 어느 날 늦은 시간이었다, 여럿이서 그가 들어온 것이…  


만일 다음해 여름, 난데없는 그의 출현이 없었더라면 그는 기억에 없을 수많은 손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는 정말 난데없이 찾아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어두워진 거리에서 그는 그녀를 졸랐다. 너무 진지해서 그녀가 차마 거부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그로서는 어느 어두운 길을 따라 그녀를 안내할 뿐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진 밤의 통제와 제한 앞에서 그들은 무력했다. 그 해 따라 3,40년간의 통금이 해제된 자유의 밤이었지만 밤 새 걸을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4각의 공간을 찾아들어야 했다. 군복 그대로의 군인이 여자와 더불어 한밤을 어슬렁거리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신의 맨발을…  맨발을 보지 않고서는 부대에 돌아가지 않겠어.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유행가가 폐부에 와 닿았다.


알 수 없는 건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어요. 그이는 다시 군대로 돌아가는 연인의 심리로 전이될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전 떠나는 연인으로부터 미래를 약속받는 소녀의 심정이 아니었어요. 전 그를 알지도 못했어요. 그는 우선 어렵게 말을 했어요. 장미나무인가를 주고 떠나면서 그 나무의 성장에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는 서양 단편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첫 학기 교양과목 시간에 어떤 교수님이 들려준 이야기였더래요. 꼭 시인 같은 표정으로  사랑은 그런 것이라고… 그렇지만 저는 그 주인공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어요, 영어도 어려운데, 영어도 아니고 어려운 단어라서… 참, 그는 나무를 주지도 않았구요. 그가 말하는 대부분이 생소했을 뿐이었죠. 약속을 해본 적이 없었다고, 이 처음 약속은 지킨다고 했던 그 말만 이해했어요. 그는 약속했어요, 다시 한번 온다고. 여름 이전에 오겠다고. 늦어도 여름엔 오겠다고.


그리고 그녀는 이른 봄 딸을 낳았다. 겨울 들어 눈길에 움직임이 어려워진 때, 그 보다도 날씬한 몸매가 유난히 강조되는 직장은 눈총 때문이라도 그만 두어야 했었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영양과 온기로 겨울을 나면서 그녀는 행복했을까? 애 아버지는 여름에는 올 것이므로 겁은 없었다. 그는 여름에는 올 것이었다. 저축금은 씀씀이가 적은 그녀로서는 몇 달은 버틸만했다. 최소실존비용도 개인차가 심하다. 오랜만에 군고구마가 익어가는 양철통 곁에 서서 불 속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군고구마도 먹었다. 어려서 먹었던 기억으로 포장마차에서 쌈지를 찾았으나 어딜 가나 오뎅뿐이었다. 여자 혼자서 포장마차에 다니는 경우도 흔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아이와 더불어서가 아니면 부끄러워했을 판이었다. 아이는 그녀에게 둘이라는 안도를 나중에는 셋이 될 것이라는 행복감을 심어주었다. 시간이 남은 그녀는 쌈지를 직접 만들어볼 생각도 했지만, 유부는 생선 덴뿌라에 밀려서 시장에서도 귀했다. 무우와 섞여 있을 때 골라 먹고자 동생들과 다투었던 덴뿌라는 이상하게 메스꺼웠다. 그런 정도를 제외하면 그녀는 아기를 위해서 아낌없이 잘 먹었다. 동생들과 어머니가 떠올랐지만, 동생들을 감싸던 어머니가 갑자기 이해되었다. 자신을 홀대하던 어머니 아닌 어머니. 그녀가 용서되는 것은 어머니의 아기가 아니었던 자신의 운명을 이해한 탓이었다. 자신의 친어머니, 그녀는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둘째 아이를 낳자마자 함께 죽은 어머니. 어머니는 그녀가 엄마를 불러보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녀는 이 아이를 두고 죽는다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아이를 보지 못하고 산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아이는 봄이면 태어날 것이고, 아버지는 어쩌면 여름이면 올 것이었다. 그녀는 나 여기 있어요, 그곳은 많이 춥나요? 하는 식의 편지를 쓰는 데에도 무척 힘이 들었지만, 아버지와의 끈은 필요했기 때문에 참았다. 그의 편지는 길기도 했지만, 많이 어려웠다. 어려운 것은 세상의 말들이 다 그러했다. 신년 벽두에 라디오에서 들려온 어려운


 말.


보람도 많고 아쉬움도 많았던 임술년 한 해를 보내고, 이제 우리는 희망찬 계해년의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난 한해 동안 여러분들은 나라와 사회, 그리고 가정과 스스로의 발전을 위하여 모두가 무척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나라 바깥의 여러 가지 사정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으나, 우리는 조금도 좌초하거나 머뭇거림이 없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진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디뎠습니다…

당초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던 한자리수 물가를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달성하였으며, 또한 세계적인 불황과 경기침체 속에서도 우리는 6%성장이라는 매우 값진 성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82년은 그를 만난 역사적 사건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를 만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으며 불안에서 벗어나 행복했던 한해였다. 세상이 불확실했거나 불안했거나 그건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점점 더 어려운 말.


우리의 의지는 단단했고 슬기는 빛났으며 단합은 튼튼했습니다… 오늘의 굳은 의지를 믿고 내일의 빛나는 결실을 믿으며, 또한 스스로가 하는 일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밝은 미래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위해 1983년이 우리 모두 자신을 가지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해가 될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또 기대하면서,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금년에도 행운이 언제나 함께 할 것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행운이 언제나 함께 하기를… 바로 그것이었다. 나에게도 가정이 있다. 가정이 바야흐로 탄생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의지가 내게서 작용하는 듯한 신비, 언제였을까? 아득하기만 하다. 꿈처럼 지나갔던 며칠이었기에 현실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다만 태동을 주는 생명체만이 내 가정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다. 아득한 그날, 어디선가 배워 온 대로 처음의 완강한 거부,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슬그머니 끌려갔던 그의 세계? 그리고 또 언제 그가 찾아올 것인가? 이상하게도 그는 여름이 오면 오겠다는 말만 했었다. 방을 옮긴 건 몸매가 이상해지면서 일을 쉬게 될 때였다. 시내 나갈 일이 없으니 좀 더 넓은 방, 좀 더 환한 공기가 필요했다. 고향 같은 집, 그런 집을 원했다. 왜 가을은 아닌가? 겨울엔 왜 아닌가? 가을 겨울의 휴가에는 왜 올 수 없는지 말하지 않았다. 물을 상황도 아니었었다. 그렇지만 그의 아이가 자라기 시작하자 그를 향한 궁금증은 아메바처럼 번식했다. 겨울에 불쑥 찾으면 어쩌나? 달라진 모습에서 놀라면 어쩌나? 주소만으로 찾아올 수 있을지… 미리 편지로 아이를 알려야 할까?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건 그녀로서는 당연한 긍정이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의 두려움 같은 것을 아는 어머니는 없다. 여자는 남자가 아니다. 다만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알리지 못한 것은 어떤 글로서 시작할 것인가, 그 첫 말을 찾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은 갔다. 아이의 존재를 어떻게 알릴까? 정말 오는 것이지요? 제대하기 전이라도 여름이면 오는 것이지요? 왜 겨울엔 오지 않는 건가요? 그렇게 편지를 쓸까 말까 하면서 보낸 이백 날 낮과 밤은 길었다. 이제서야 모든 것을 편지로 알릴 수는 없을 것 같았고, 막상 닥쳐올 만남의 자리가 불안해졌다. 그녀가 잠을 설치는 것은 아이와의 씨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대통령의 신년사가 저리 거창한 것에 놀라서, 진짜 거창한 '우리의 미래'를 그에게 들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을 만난 것이 82년의 가장 큰 행복이었어요… 그렇게 시작하자 생각보다 알림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이 봄에 꼭 만나야 해요. 여름이 오기 전에 말이예요. 


그리고 봄이 뾰쪽 움트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빨리 그녀의 첫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급히 병원에서 연락받은 이모는 울먹이기만 했다. 아이 아버지를 물을 계제가 아니었다. 이모 모르게 시집갔을 조카딸이 아니었으니까. 어찌 된게냐? 그렇게도 묻지 않았다. 언니 일찍 떠나 보낸 뒤 마음 고생 뻔한 조카딸을 챙겨줄 수 없었던 자책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필 서울로 부른 것도 후회되었다. 오랜 온갖 일로 퉁퉁 불어터진, 그러나 온기가 남은 손으로 어깨를 만져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머리카락이 유난히도 헤실헤실한 아이를 보더니만 다시 눈물기. 이모 왜? 저기 지금 군대에 있어서… 다 알고 있어, 출산 때 연락하라고 했는데, 여름이면 오니까 뭐. 이모는 나흘을 있다 가시면서 연신 울먹거렸다. 닷새 째부터는 문간방 색씨가 들락거렸다. 골목 수퍼 아줌마를 꼬셔서 제 밥까지 짓게 했다. 사람 좋은 수퍼 아줌마는 자기 가게의 부식 등을 확실히 계산하면서 밥은 넉넉히 따뜻하게 지어 주었다. 문간방 색씨는 갈거시랑이 같은 손으로 놀랍게도 기저귀 빨래도 한번씩 해주었다. 이런 아기 갖는 것이 소원이었드랬는데… 하면서 찔끔거리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남편 군대가고 아이 낳는 여자는 행복한 여자였다. 그것도 아직 이렇게 어린 여자가 복도 많지. 세상에 많은 남자들을 보면서 남편을 꿈도 못꾸는 처지가 되고 보니, 새삼스레 그 나이가 그리웠다. 그때 처음 이웃집 동갑나기와 서울 행 밤차를 탔던 봄. 그만한 나이로서 아이를 낳은 이 여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친구랑 둘이서 걸어온 웃음 팔기 십년 세월, 친구년은 이 생활 접는다고 운전자격 따서 택시를 모는 억척이었다. 억척을 가로막는 것도 있다. 개인택시 갖기가 소원이었던 친구가 흔하디 흔한 사고로 병신되어 상하방 전세값도 다 잃고 시골로 내려간 뒤, 여전히 문간방 신세인 그녀로서는 이 어린 애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었다. 이제 남편만 제대하면… 


아이는 낮밤을 몰랐고, 엄마도 따라서 낮밤 없이 힘들었다. 날이 풀리고 담벼락이나 마당 가 잡풀에서 여름 기색이 돌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다시 오지 않으면? 주소가 바뀌고 일을 쉰다는 편지에서도 그는 별반 의심은 하지 않았는데.


문간방 여자의 희망대로 우리는 결혼을 해야 했다. 결혼을 하기까지는 한참 망설임과 기다림이 있었다. 그리고 정말 여름이 왔다. 아이는 막 고개를 들거나 이빨 없는 잇몸을 드러내며 키득거릴 수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어서 제 자식을 보러 와야 한다. 그에게는 주소를 다시 한번 꼼꼼히 알렸고, 다방 같은 데 나가는 것을 피했다. 그녀에게 다방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만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 자식과 제 아내를 집에서 보아야 한다. 그렇게 그가 멈칫거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마당의 기저귀를 피해 그녀의 반쯤 닫힌 방문 앞마루에 앉을 때까지 그는 아이 소리를 분간못했다. 혹시 들었더라도 여러 세대가 모여 사는 이런 ㅁ자형 서민 주택의 어딘가에서 항상 들려올 법한 소리였다. 주인인 듯한 아낙이 가리켜주는 방문 앞에서 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모양으로 헝클어진 듯 변해있는 여자는 마루에 고개를 내밀었고, 나오지도 않았다. 방안은 어두웠다. 일부러 조명을 낮추었을까? 아이는 제 아버지를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여자를 위로할 생각도 안아 줄 생각도 못했다. 봄 사월에 우리 아기가… 우리 아기? 그는 처음엔 놀라움을 미처 표현할 길도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 엘리엇의 탄식처럼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었나. 잠든 뿌리를 깨우듯이 봄비 내리는 날 여자는 아이를 낳았다지. 아버지는 아이를 여자의 초라한 방에서 만났다. 이상한 일은 아이 울음소리와 더불어 방이 깨어났고, 방은 갑자기 아늑했고, 따뜻한 만큼 밝아졌으며, 여기 저기 박힌 하얀 기저귀며 아기 용품이 방을 환하게 만들고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윗목에 앉아만 있던 그는 밤이 되자 일어섰다. 놀람은 들키지 않았고, 문간방 색씨나 수퍼집 아줌마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전했다. 집으로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집에서 기다리는 어머니가 우선 핑계였고, 실은 아기 아버지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던 그는 어머니의 곁을 택했을 것이다. 집에 들린 그를 어머니와 누나들은 의아해 했다. 좀처럼 얼굴을 펼 수 없는 아들과 그 곤한 아들을 달래려는 어머니. 어머니… 세상 아무 것도 모르시고, 갑작스런 휴가를 어슬렁거리는 아들을 도닥거려주시는. 그 사이에서 아버지는 괜스레 한 번 큰기침도 하시고, 자 이제 우리 아들이… 어쩌고 빈 말도 하셨다. 휴가란 말도 안 하더니만… 그는 그렇게 이틀을 더 버티다가 귀대에 대서 들어갔다. 어떻게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 아니 아내 그리고 아이, 아이는 정말 내게 태어난 것일까?


그렇게 그는 다시 군대에 돌아갔고, 제대 날은 아직도 멀었다. 전혀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가 군대 3년에 얻은 것은 놀랍게도 여자와 딸아이였다. 그 하나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여자와 딸. 잔인한 사월의 황무지에서 얻은 딸, 그런 이미지였다. 딸아이는 놀랍게도 시뻘겋기만 하고 눈은 실눈이다 못해 뜨지도 못했다. 이 아이와 에미는 핏줄의 인연을 구하고 있었다. 제발 부모 다 있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 그것만이 소원인 여자, 그는 낭패감을 느꼈지만, 성실했다. 



여름은 쉬 가고 아들은 가을 들어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아들은 멍에를 벗을 날이 가까운,  날아갈 기분이 아니라서 집에서는 이상히 여겼다. 처음 며칠을 아무 말 없이 멍하게 보냈다. 저녁때만 슬쩍 나갔다가 다들 잠이 든 후에야 들어오곤 했다. 복학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그리 할 일은 없을 것이고… 친구들 만나느라 그러겠지… 그러다 아들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잠깐 더 중요한 일을 처리하구요… 꼭 그렇게 말했다. 중요한 일을 처리한다? 그의 성실성으로는 자신의 아이를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도 며칠이 갔다. 그는 난데없이 부모님께, 먼저 결혼을 하겠다고 터놓았다.


그것이 그럴 일이 좀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 뭐 너 혹 군대있을 때 사고라도 친 거냐?

사고요?

그래 사고 말이다.

사고는 아니었어요. 그냥 꼭 그렇게 될 일이었나 봐요. 착한 여자이고, 들어와 살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또… 

그리도 또 뭐냐, 임신이라도?

사실은 딸아이를… 

뭐야, 딸까지 있는 여자라고?

그게 제 아이라서…


그보다 더 수선스러운 일은 세상에선 없을 것이다. 비슷한 중매결혼이라도 제 자식만 푸르러 뵌다. 이런 경우는 아예 전쟁이다. 처음엔 아이를 떼어놓고 인사를 갔다. 노발대발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더한 아연실색의 무표정을 좀 더 일찍 무서워했어야 했다. 온갖 수선스러운 과정을 겪은 뒤, 이빨도 제법 나고 이제는 하얘진 얼굴로 잘 웃기도 하는 딸아이와 애 엄마가 집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그렇게 남편이 가져온 가방 두 개에 아이 옷가지, 제 옷가지와 묻어서 시집에 들어왔다. 처음 며칠 동안 숨도 못 죽인 다음, 처음 나들이는 사진관이었다. 돌사진 보다는 먼저 결혼사진이 있어야 했다. 사진은 정식 같았지만 가짜였다. 딸아이도 자라면서 이 사진의 을씨년스러운 교과서적 분위기를 간파했다. 제 고모들의 축제 사진들과 다른 분위기를 사춘기 되면서까지 이해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의 불행은 그런 데에서 싹텄을까?


아무래도 그이가 결혼을 해준 건 미지수였어요. 그인 바로 그런 말을 했어요. 어떤 때였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이는 내가 아이를 낳은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했어요. 나중에 가서는 그이가 결혼 한 것이 이해할 수 없더라구요. 설명이 안되지요, 너무 쉽게 나를 데려간 것 말이어요… 사는 게 별것 아니다, 그런 생각이었을까요? 우리 사진에다 "1983년 겨울" 이라고 쓰는 대신, 년도만 쓴 스티커를 붙여서 접이 사진첩에 꽂았지요. 액자에도 똑같은 사진을 넣었구요. 하긴 사진첩이나 액자나 둘 다 상자 속으로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아래채에는 그가 책상을 옮기지 않아서 서랍 같은 것이 없었어요. 나중에 어머님이 장롱과 문갑을 물려주셔서 그 서랍에다 넣어 두었어요. 신랑 신부만 달랑 둘이 서있는 결혼식 사진, 꽃은 두고두고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미용실의 신부화장 때 본 사랑스런 부케들 대신 사진관 꽃이라서요. 부케는 아무래도 흰장미가 최고라는데, 숙모님, 전 분홍장미를 더 좋아했어요. 그럴 수 있기를 바랬는데… 아무튼 사진은 훌륭한 삶의 시작이었어요. 결혼하여 아이 낳고, 아니 아이 낳고 결혼하고, 약간 바뀐 순서는 밝히지만 않는다면 그리 큰 흠은 아니잖아요… 아버지도 이해하셨구요, 어머니는 좋은 사람 만나서 얼마나 잘 된 것이냐며, 글쎄 어머니도 쪼끔은 울어주시데요…


그래 그게 뭐 그리 흠이더냐. 그렇게 아쉬워하던 분홍 장미 대신 들고 찍은 카네이션에 섞인 그 황국 두 송이 때문에 미리 철 이른 죽음이 준비되었을까. 자네 살아온 내력이 왜 이리 내 가슴을 짓누르는지 몰라…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라고.


남편은 봄학기에 짝학기 복학을 했다. 그는 여전히 안채에 있는 공부방에서 밤늦기 마련이었고, 아래채의 초저녁 잠 없는 그녀는 아이가 잠들어버린 뒤 머리는 잠들지 않고 몸은 파김치가 되어 알 수 없는 혼돈을 헤맸다. 어렴풋이 잠들며 가위눌리는 일이 반복되자, 몇 달 걸려서 어렵게 시골장터에서나 있을 법한 삼색가위를 구했다. 실은 알록달록한 가위, 그것이면 가위눌리는 병을 잡는다 했었다. 이불 밑에서 가위가 발견된 것은 그러나 그녀에게는 큰 빌미 잡히기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정신상태를 의심받았다. 아이가 자라는 방 이불 밑에 소름끼치게 큰 가위라니, 그 색깔하며 여기가 무당집도 아니고… 가장 가슴아픈 단어, 비수같은 단어가 시작되었다. 수준은 별 수 없네 뭐. 대학원생 시누이의 야멸찬 비난이었다. 대학원에 다니는 여자는 그녀 주변에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단어였다. 대학도 가뭄에 콩 나듯이, 그것도 고향집에선 동네 복판 이태리식 양옥집 둘째딸만 다니지 않았던가. 그렇게나 높고 이질적인 것이 대학인데, 대학원생이라니. 그래도 너무했다. 어디 병 아니냐, 정녕 큰 병이다 하시는 시어머니의 더 무서운 말보다도, 수준이란 핀잔이 더 아팠다. 그런데 병은 병이었다. 가위 사건 이후로 안채로 옮겨간 아이는 다행히 잘 지냈다. 젖을 뗄 때가 훨씬 지났으니 자연스레 젖을 떼었고, 우유도 잘 받아먹었다. 다시금 혼자가 되어 이내 잠들지 못하는 병으로 수척해가던 여자는 낮에도 한참 바쁜 살림 중에 멍하니 앉아있었고, 그런 일은 제 방이고 시어머니 안방이고  대청이고 구분치 않게 되었다. 그냥 차라리 네 방에서 쉬거라… 제발 네 방안에서… 그렇게 그녀는 아래채 방안으로 방안으로 밀려들어갔다. 함께 먹지도 않고 집안 일을 잘 거들지도 못하면, 그러면 뭣 하러 함께 볼 일이 있겠는가.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는 온통 분위기가 삼엄했다. 에미 저러는데, 에미는 병원에든지, 혹은 심하면 이혼해야지. 한창 때 멀쩡한 대학생이 저게 뭐야. 애는 처음부터 입양이나 했어야지… 그런 소리도 들렸다.


직접 들은 것인지 확신은 없으나 맨날 그런 눈치라 느꼈다. TV에서도 툭하면 입양아 통계가 들먹거려졌고, 마치 국력을 다른 데 모으기 위해서라도 키우기 어려운 아이를 수출하는 것은 계산에 맞는다는 분위기였으니까. 그러는 사이엔 어디 뉴스 소리가 날까 봐서, 아이가 알아들을까 봐서 아이를 데리고 방안에만 더욱 틀어박혔다. 그러나 저녁엔 시어머니가 아이를 데려갔다. 긴 긴 저녁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딸아이는 어느 새 통통통 발걸음을 했고, 헤헤거리며 종일 안채에서 놀았다. 할머니 방문턱이 무서운 줄 모르는 아이로서는 아무 걱정도 아니었다. 하미야 하미야… 느닷없이 미소에 녹은 할머니가 슬쩍 누그러졌다. 오오냐 요놈아에서 오오냐 내 새끼로 변해갔다. 자아 이쁜 짓 할려면 니 에미에게 동생 하나 낳아 달래라, 너같은 놈 말고 네 아빠 닮은.


그렇게 딸은 할머니 방으로 아주 옮겨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작 막내시누이가 시집을 가자 그 방은 아이 방이 되었고, 마침 할머니 방 이웃이었다. 점차 할머니 세계로 가까이 가는 딸에게 엄마는 낯선 사람이었다. 낮에도 잠이 들락말락, 앉아서도 잠이 들락말락, 서서도 잠이 들락말락… 엄마는 나를 미워 해! 아이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차례대로 들락거리면서, 저를 끔찍히 반겨주길 깜박 잊는 엄마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모두 엄마랑 모여 머리에 종이왕관을 쓰고 찍은 사진에도 그녀 대신 애 고모가 올랐다. 가까운 데 사는 둘째 고모가 제 아이와 함께 엄마 노릇을 다 했고, 덕분에 그녀는 집에서 쉴 수 있었다. 그래 너처럼 에미 노릇 편하게 하는 에미가 어디 있다드냐. 너처럼 시에미 시누가 애 다 키워주는 경우가 어데 있는 줄 아냐.


    삶이 덜컥, 새장을 열어 젖히는 것 같아

    솔직히 겁이 난다 

    시작이란 그래,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지


딸아이는 갸름하고 수려한 제 아버지를 닮았다. 많이 닮았다. 함께 9개월을 산 것도 아닌데, 군대에 가 있는 제 아비를 닮는 아기라니. 그 닮은 모습은 할머니를 얻을 수 있게 했지만, 어머니를 잃게 했다. 할머니는 연신 이왕 그럴 바엔 아들로 낳지… 하는 푸념을 대놓고 했다. "이왕 그럴 바엔", 그러니까 이왕 사고를 쳤다 해도 아들이 귀한 집이니 아들이라도 낳았으면 에미는 대순가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며느리로 들어와 사는 동안 곧 바로 아들을 낳았으면, 혹은 딸이라도 더 낳았으면 가능성을 보았을 터인데, 어떻게 더는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다. 집안에서 위축될 대로 위축된 그녀는 몸도 마음도 열리지 않았고, 모든 것이 움츠렸을 것이다. 새벽녘에 살짝 잠들어도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버릇이 되었고, 하루 종일 졸리다 말다 하면서도 동작은 되고 있었다. 아침 준비, 설거지, 오전엔 빨래와 청소, 하루는 안채, 하루는 아래채, 바깥 욕탕과 장독대, 부엌 대청소, 마당청소… 끝이 없었다. 점심 준비 설거지, 다림이질, 장보기, 저녁준비, 설거지, 꼬마 TV… 기계적인 일상에서 특이한 것은 딸아이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방 출입이 기특했더니만, 밥을 먹을 때에도 할머니, 숙제를 할 때에도 할머니였다. 여전 가사과 졸업의 유식한 할머니는 초등학교 숙제까지 다 거들어 주셨다. 받아쓰기라도 시킬 때에는 목소리가 우렁찼다. 혹시 처녀 적에 선생님을 하셨나 싶을 정도였다. 어딘지 사람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풍채도 그랬다. 그러니까 남편은 어머니를 닮은 점이 없었다. 아버지 모습은 조금 남았다. 길쭉하고 뾰쪽한 이마랑 푸르스름한 눈동자랑. 딱 그 푸르스름한 눈동자 때문에 가끔 들여다보는 제 아이의 평범한 둥근 눈은 생소하기만 했다. 그늘로 드러나는 눈동자. 예민해져 가는 눈동자. 게다가 남편은 아직 학생이었다. 아이가 제 아빠를 찾을 동안에도 여전히 학생이었다.

 

딸아이와의 문제는 건망증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잘 챙겨주지 못하는 에미에 대한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제 할머니가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어도 가슴에 못을 밖을 때, 그러니까 갑자기, "이왕이면"으로 시작하는 한탄에서 제가 딸인 것이 불만일 때, 딸은 꼭 할머니처럼 에미를 원망했다. 몇대 독자 집안에서 아들이 없는 것, 그것이 제가 딸아이로 태어난 잘못인 것처럼 여겨질 때, 아니 그 에미가 괜스레 미울 때, 딸은 혹독했다. 사실 딸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삶보다 TV를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온갖 사람들이 온갖 관계로 얽혀있는 TV 속의 삶은 정말 사람 사는 삶 같았다. 집이라야 남편은 공부방 혹은 응접실에, 시부모는 안채에, 딸아이는 제 방에, 그렇게 각자 숨어지내는 절간인지라, 그녀의 작은 TV는 온갖 정보와 교감을 다 뿜어내고 있었다. 남편은 처음 예정과는 다르게 계속 진학을 했다. 세상이 달라져서 미래를 보려면 대학원은 다녀야 중간이라 했다. 점점 멀어지는 학력 격차는 별 문제가 안되었다. 약간의 경우가 차별이 나는 법이지, 아예 다른 차원에서는 비교도 안되는가 보다. 아이는 학교에 들어갔고, 신입생 등하교에는 물론 젊은 할머니가 따라 다녔다. 그 해에는 KBS에서 방영된 《울밑에 선 봉선화》서러움 보면서 그럭저럭 제 시름은 잊고 지냈다. 시에미 노릇은 저쯤 해야지 뭐. 끔직한 말들이 안채에서 오갈세라 그녀는 제 방 속 퇴물 TV앞에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이야기 속 그 옛날 순천지방 이야기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생생하게만 느껴졌고, 배역을 따라서 찔끔거렸다. 철물점이름, 서점 이름도 진짜만 같았고, 하긴 작가가 고향의 일가족 주변 이야기라고 하니 진짜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시간은 희한하게도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딸아이는 할머니랑 넓은 화면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심지어 어린이용 《까치》씨리즈를 볼 때도 아이는 옆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엄지도 서럽고 까치는 까치대로 불쌍하고, 왜 사람들이 마음을 닫아거는지, 아이들 이야기라는 생각도 없이, 《캔디》며 다른 순정 만화들도 혼자서 보고 있었다. 방에 갇히어 조금씩 기운나는 약을 마셨다. 처음에는 상에서 남아 나오는 노름한 음료수, 그것은 알코올 성분이었고, 일시적인 효험이 있었다. 부족하면 수퍼로 달렸다. 마알간 알코올병이 있었다. 아직 어렸다할 나이에 사이다 남은 것인 줄 알고 마셨다 죽을 뻔했던 그런 병이었다. 어딘가 아버지 냄새도 났다. 그리운 약은 성인인 그녀에게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여자는, 지금 땅 속에 뉘인, 여자였던 시신은, 그런 몸으로 나를 만났다. 나는 뒤늦게 그 집안에 들어간 더 잘 배운 어른. 결혼이 늦은 삼촌의 아내였으니, 숙모라 불렸다. 명절에나 가족 행사에나 만나는 터이지만, 어쩌다 보면 아이는 제 에미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가 작은 할머니께 인사해야지… 하면, 함무니 아니야! 라고 쏘아붙였다. 제 할머니가 색씨 할머니 그래라… 하시면, 그래 색찌 함무니이… 했다. 똘똘한 딸 아이 앞에서 주눅든 에미는 대강 음식 만지는 일로 물러서며, 아니면 찬장 청소, 부엌 바닥 청소, 어디 담벼락 청소, 청소에만 매달렸다. 식구들 눈에는 그것 또한 병적으로 보였다. 뭘 저렇게 닦고만 다니는지, 옛적에 온통 굴뚝까지 닦고 다녀서 굴뚝이란 아낙이 있었다잖나. 요새도 굴뚝이 있었음 닦고 말았겄제… 그 말이 옳았다. 할 일 없으면 시름달래는 여자들이 자개농 닦으며 세월 보낸다는 이야긴 들어보았지만, 변변한 농도 없이 시어머니가 거한 자개농 새로 들일 때 물려받은 농짝에는 애정이 가지 않는 것인지, 아무튼 어딘가 담벼락을 잘 문지르고 있었다. 당연히 먼지가 앉게 된 외벽까지를 닦고 다니니 이상한 결벽증에 온갖 병명을 들이대었다. 딸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담벼락 닦고 있는 엄마를 마주치면 질겁이었다. 친구들하고 어울려 돌아오는 길에는 더욱 그랬다. 너네 엄마야? 너네 엄마 뭘 하시니? 이상스레 온갖 담벼락을 닦고 다니던 모습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젠 마지못해 부엌에 나올 때도 술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우리야 어쩌다 보는 모습이지만 들킬 정도였다. 물그릇도 출렁거리고, 고르지 못한 부엌 바닥에선 근들거리고… 아차 큰일이다 싶게 어두운 것은 그녀의 눈빛이었다. 이 아이가 왜 그럴까? 그런 생각은 명절의 번잡한 분위기 속에서 곧 흘러가 버리고, 쉬이 잊혀졌다. 다시 만나면 다시 놀라고, 흐트러진 눈빛으로 차라리 포악이나 했으면 덜 가슴아팠으리라. 할말이 그렇게 없는지, 냄새 들킬세라 아예 입을 닫아거는지, 무표정하게 다문 입, 그것이 그녀의 굳은


인상이었다. 어디에 서 있어도 어울리지 않는, 온 식구들이 치부까진 아니라 해도 조금은 군더더기로 느낄 만도 했다.


그렇게 버틴 세월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것은 딸아이의 가출 소동 직전이었다. 아이가 적당한 입시에 실패하자 집안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때 그녀는 울부짖지도 못했다. 그냥 우연히 그 집에 들린 나를 따라 나섰을 때의 놀라움. 저 잠깐 저하고… 십여년 넘게 한 집안 여자로 살았다지만, 핏줄은 무관한, 아니 어느 것도 무관한 우리가 무슨 말은 나누었겠는가. 그날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죽어버린 오늘까지 두 여자가 나눈 말이 몇 분이나 될까? 평생 한 집안 사람으로서 살았다지만, 나눈 말을 녹음했다가 편집한다면, 그게 몇 분이나 될까? 끔찍한 느낌이었다.


숙모님, 그게 제 탓이라는데요. 제 탓이었다구요. 그냥 그런 아무 말도 없이 애를 낳고 그런 것이요. 군대가서 사고친걸루 애를 낳는 여자가 어디있냐구요. 앞길 창창한 남자 발목 잡아 앉혔으면 되었지, 왜 애는 또 망쳐 놓았느냐구요. 애를 제가 망쳐요? 제 딸을요? 전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었어요, 도망도 안치고, 죽지도 않고, 밉건 곱건 제 에미 자리에요. 그 자리요, 그것 때문에요. 세상 모든 엄마는 살아야지요, 안그러나요. 우리 엄마는, 울 엄마는 못 버텼으니까요. 동생 낳다 죽을라믄 왜 날 낳다 죽지 그랬을까요. 그럼 깨끗했는데. 전 엄마라구요, 엄마니까 살구요. 엄마니까 살았지요. 너무 어려웠어요, 도통 알 수가 없었어요. 애 아버지는 참 심지가 있어요, 나 버리지 않고, 나 받아주고, 이렇게 살았지요. 속마음 그런 것이 뭐 중하대요. 저 이렇게 여기서 살고 우리 딸 잘 크고, 속마음 같은 것은 욕심이지요. 속마음까지 다 바란다면 정말 욕심이구요. 기가 막힌 때도 많았지요, 아니 내내 어지러웠나.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도 모르고 세월만 흘렀네요. 애 자라는 보람으루요. 그런데 이젠 그게, 이 애가 날 버리다니. 이 애가 날 못 참는다 막 나간단 말이지요. 집에선 숨이 막혀 죽는다고 대드네요, 그게 바로 대학을 갔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을. 재수 시작하자 시간이 좀 들쭉날쭉, 집에 있는 시간이 갑자기 많아진 거지요. 아니 시험 봐 놓고, 웬만한데 붙었다 하고 쉴 때 그랬어요. 이게 어느 날 소리를 꽥 질렀어요. 아무 일도 아닌데. 엄마, 왜 이래. 엄마 정신 차려. 제발 엄마, 이게 뭐야! 난 그냥 힘이 없어서, 저 좋아하는 삼색말이 해서 점심 줄려는 참에, 힘도 부치고, 또 뭔가 기름 냄새가 메스껍고 그래서 살짝 한 모금 먹고, 계란말이를 접시에 옮겨 담는데 이 애가 부엌으로 온 거예요. 대낮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날뛰는데, 겉잡을 수가 없더라니까요. 할머니 나오셔서, 이게 무슨 짓이냐, 할아버지도 계신데 이 무슨 해괴한 짓들이냐, 참 불쌍한 모녀들 거뒀더


니 이젠… 


참 불쌍한 모녀, 그 말에 그 애가 그렇게 상처받았을까요? 그랬나 봐요. 그 뒤론 애가 웃지도 않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더니, 제 아버지가 돌아오니 물었드래요. 왜 엄마랑 제가 불쌍한 거냐고? 불쌍한 자식, 그렇지요. 불쌍하지요. 제 엄마가 조금 못나고, 그러니까 기껏 시집살이 순종형이라 발언권 없고 착해빠진데 몸까지 망가진… 그 정도로 가족 내에서 랭킹 꼴찌다, 그런 건 싫어도 참을 밖에요. 하지만 불쌍한 엄마는 정말 싫었나 봐요, 덩달아서 불쌍한 제 자신도. 고종사촌들, 남자아이들에 비해서 크게 차별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래도 좀 차별은 으레 할아버지 다르고 할머니 다른 정도로 생각했었겠지요. 그러니까 아버지 다르고 엄마 다른 정도가 심해도 그럴 수 있나 보다. 시집살이는 그 애도 어려서부터 연속극에서 다 보며 컸을 걸요, 왜 《울밑에 선 봉선화》 뭐 《갈대》, 별의 별 것 다 보며 자랐으니까요. 그땐 그만큼 모질지 않은 시어머니는 다 천사쯤 되는 줄 알았잖아요. 그런걸 할머니 무릎에서 보며 자란 애니까. 딸애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난 슬며시 겁이 났어요. 애한테 걱정을 끼쳐줄까 봐 겁이 났고, 바로 부딪히면 말문이 다 막혔으니 말이예요. 왜 어머님 앞보다 더 그랬을까요. 난 그냥 죽고 싶었어요. 그래도 엄마는 살아야지요. 그렇다고 술이냐구요? 효력이 적을 걸요. 술병 들여오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우리 시댁 참 양반들이지요, 아니 참 우리 시댁 양반 맞지요, 살아 보시니까 그런가요. 장바구니 같은 건 아무도 안챙겨요. 너그러운 집안이지요… 나같은 것을 애초에… 


아니 숙모님, 좋은 이야기. 제가 마음을 달래면서 읽은 시여요. 일어나 멀리 날 때… 너는 너… 기어코 너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너… 이 애가 너른 세상에 나가야 하겠지요. 시는 가르침이 많더라구요. 저는〈풀이 눕는다〉그런 걸 외이며 살았는데. 우리 애한텐 〈새〉가 좋겠지요?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아니 다시요,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먼저 일어난다… 그런데 바람이 정말 눕나요? 풀 그런 것 말구요, 새, 새가 좋지요… 태양까지도 날아가게… 귀싸대기 새파란 참새가 안돼 안돼 바람 속에 날개를 털어야 해…


난 새삼스레 놀랐었다. 질부가 이렇게 속말을 하다니. 아니 언제 이렇게 술에 절었나, 그것 또한 무서웠다. 얼마큼 속이 타면 술로 속을 더 태웠을까. 나도 남편 따라 외식할 때면 한 두잔 마셔본 와인이 새콤달콤 맛이 있구나… 하던 참에, 알코올중독이란 무서움과 추함으로 다가왔다. 하긴 여자가 늙어가면서 두 가지 악습에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고 누가 그랬더라? TV 중독, 알코올 중독, 가장 심한 건 그 두 가지를 겸하는 것, TV 앞에 앉아서 줄창 술잔 입에 대는 것.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들 이야기는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가장 심한 것은 군대에서 축구하는 것, 그런 식으로 웃어 넘겼던 이야기가 이젠 끔찍했다. 이 여자는 완전히 두 가지 다로구나, 아직은 젊은 나이에. 아직은 젊다… 아직은 TV 앞에 앉아서 술잔 입에 대기에도 너무 젊지만, 죽기엔 말해 무엇하랴. 아직은 너무 젊다, 아직은. 물론 그 때도 젊은 나이에 술에 절은 여자가 안쓰럽기는 했지만 한편으론 이상했고, 이해가 되었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눈물방울로 시작된 두 젊은이의 만남이 이렇게 술로 마감될 줄은 몰랐다. 짠 눈물에는 미미한 온기가 남아 있지만, 술은 화끈해도 냉랭한 물일뿐이다. 얼굴을 달게 하는 만큼 심장을 얼리는. 그날 제 시어머님께 집에서 재워 보낸다고 허락받고서 하룻밤 말동무를 해준 것이 전부인데, 이렇게 가슴이 아플 줄은 몰랐다. 혹은 그렇게라도 말을 들어준 것이 덜 후회될까?


숙모님, 그때 왜 제가 눈물을 흘렸게요. 저도 몰라요. 긴 얼굴에 어른스러워 보여서 언뜻 어려서 본 아버지 모습의 대학생이 들어와서요… 제게서 머리를 깎겠다지 뭐예요. 물론 여럿이 들어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었지요. 전 한 번도 손님 같은 건 의식해 본적이 없어서 그냥 아무렇게나 하고 있는데, 바닥이나 쓸고. 그때 그이가 내 앞 의자에 와서 앉은 거예요. 웬일인지 가슴은 뛰는데 내 모습은 꾀죄죄하기만, 그의 뒤통수는 다행히 눈도 코도 없어서 날 보지 못하겠지만, 그 머리카락은 자르기도 아까운, 손도 대기 아까운 찰랑거리는 건강함… 제가 그때 눈물을 떨구었나 봐요. 어려서 갑자기 긴 머리를 통째로 자른 날, 잠든 베개 밑으로 가만히 뒤통수를 쓸어주던 아버지 손도 느껴지고, 왜 그의 뒤통수에서 내 뒤통수 생각을 했겠어요. 그러느라 어물거리고 있는데… 제 자신이 머리카락 무더기 속에 서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제 자신이 초라하기만 하고… 도망치고 싶어도 손님이고… 아무튼 그날 이후 저는 정신을 차려서 커트도 하고 본격적으로 머리를 했지요. 열심히 해서 단골도 늘고. 이듬해 봄에는 더 시내 쪽으로 옮겼고. 2, 3층을 다 쓰는, 꽤 되는 가게였어요. 점장님도 잘해주고… 그러던 여름 그이가 갑자기 가게로 찾아와서는…  


그게 그랬었구나.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아니예요. 전 어차피 아무 것도 못해요. 시댁 들어와서는 단란하게 꿈을 꾸었죠. 일단 시부모님 마음에 드는 며느리가 되자… 그러려니 뭐든 어머님 시키시는 대로… 어머님은 그런데 아무 것도 안 시키셨어요. 세상에 김치찌개 하나 된장국하나 못 끓이는 여자도 시집을 온다시며… 사실 제가 중학 졸업 못하고 집 떠나서 언제 반찬 만드는 걸 보았겠어요. 세상엔 라면과 햄버거가 전부였는데, 기껏 가게에서 배달시켜 먹는 짜장면 아니면 김밥. 전요 김밥 먹다가 일어서고 하다보면 어찌 목이 메이든지 절대 김밥을 싫어해요. 김밥말이를 할 줄이나 알겠어요? 그래요, 결국 고깃국이 있어도 생선토막구이나 닭찜이 있어야 되는 시댁 밥상을 무슨 수로 잘 차려요… 맨날 파나 양파 다듬고 마늘 까고… 애 김밥 한 번 못 싸준 엄마, 그런게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애를 낳으면 다더냐. 저의 어머님 늘상 두고 쓰시는 말씀이지요. 몇 살이면 무슨 그림책으로 무슨 공부를 시작하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저 뿐 아니라, 우리 집에선 어머니가 낳은 동생들도 그렇게 뭐 갖춰 가며 컸나요. 시댁은 엄청 달라요. 뭐 잘산다 그런게 아니라요. 뭣이 그렇게 법이 많은지, 법이라기 보다는 암튼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렇고… 나중엔 남편이 저를 문화센터에 보내더군요. 상차리기. 궁중요리 코스. 그런 사이에 꽃꽂이 교실이라니… 저는 꽃이 아깝기만 했어요. 불쌍하기도 했고. 아이가 중학교 가니까, 엄마가 영어 좀 더 해라… 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일찌감치 시장으로 길을 돌려서 순대에 소주 한 잔 하고, 그 온통 소금에 고춧가루 넣은 고소한 소금 맛에 기막혔지요. 집에서는 그런 소금은 구경도 못해요. 그런 흰 소금은 건강비상 일호지요, 미원이랑 흰 설탕도. 여름이면 시원한 물에 설탕 타서 먹으면 얼마나 개운한지… 그런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예요. 노랑 설탕을 그냥 타서 먹어 봤지요, 어찌나 찝찌름해서 집에선 설탕물도 못타 먹지요. 밖에 나와선 고춧가루 소금에 비닐 순대도 맛만 있는데. 왜 비닐 순대


냐구요? 집에선 그런 순대는 비닐로 만들었다고 구경도 못하게 하지요. 진짜 순대라는 걸 역겨워서 못 먹으면, 못 먹는 저만 병신이구요. 시장서 소주 마시고 다니다 들켜서 이젠 시장도 안 내보내세요. 담벽 안에 꽉 갇힌 거지요. 새장 속의 새, 집 속의 여자. 숙모님, 저 그거 몰라서 참았나요. 까짓 것 넘으려면 넘을 담벼락, 왜 참았겠어요, 애엄마니까. 내가 딸을 낳았으니까, 엄마다 하고. 못나도 엄마, 잘나도 엄마. 그런 것 아니어요? 난 사실 앉은뱅이 엄마라도 있었으면 했으니까. 사실이예요. 그런데 정말 앉은뱅이 엄마면 챙피해서 차라리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했을까요? 설마, 제 엄마를 죽어버렸으면 했을까요?


나중에 듣고 보니, 그때 상황이 매우 나빴다. 딸아이가 명문입시에 실패하자, 모두가 애 엄마를 흘끗거렸고, 대체 엄마가 저러니 교육이… 하는 눈으로, 이젠 외가의 내력까지 들먹였더란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에미가 보배운데 없으니 애를 무슨 수로 제대로 교육을 시키냐, 아들도 없이 저것 딸 하나를 대체 어디다 쓰느냐. 아들 타령은 새삼스러운 것으로, 그렇게 원하던 아들을 더 이상 조르지 않더니만, 일이 그렇게 꼬였더란다. 딸아이는 그 "아들" 소리에 히스테리가 되어가고, 아무 것도 못할 바엔 남동생이라도 낳아서 저 편하게 해줄 것이지, 아무 것도 못해주는 엄마가 야속했을 것이고, 또 무엇보다 어려서 이래 챙피한 껍질처럼 느껴졌던 엄마에 대한 미움이 봇물처럼 터졌겠지. 대개들 자신이 미우면 누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혹독하게 미워하게 되는 법이니.

그 날도 저녁에 추도식 모임을 위해 일찍부터 집안 여자들이 모였다. 그녀는 두엇이서 전을 부치다 말고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막상 상을 차릴 때까지 여전히 모습이 없었다.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고, 딸아이는 속이 상해 아래채로 달려가더니, 멍하니 술에 취해 있는 제 엄마더러 그냥 죽어버려라 그랬다는 것이다. 엄마는 챙피해, 챙피해서 내가 죽겠단 말이야…  


그런 에피소드는 쉬쉬하면서도 다반사였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렇게 떠나갈 줄은 정말 몰랐다. 딸아이는 할머니 품에서 할머니 사람답게 자랐던 모양이다. 그러나 속내는 에미였을까? 셈에서 약한가 싶었지만 아이는 학교에서 나름대로 최고를 해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가끔, 이 애가 제 애빌 닮아서 공부는 잘 한다오… 하면서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그랬다. 우리가 가끔 큰집에 들렸을 때면, 어려서도 방안에 박혀 있고 잘 나서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오랜 시간 한 곳에서 견디기를 잘하는 것 같았고, 그런 아이들은 대개 학교를 잘 견딘다. 그러나 어쩌다 만나면 표정은 시무룩했다. 자라면서는 더했다. 할머니 약은 효력이 떨어져 갔던가 보다. 엄마가 그리운데 엄마는 없었겠지. 이상하게 겁먹은 바보같은 여자만 있었겠지. 여전히 훤한 모습의 할머니, 화려한 고모들에 비해 어처구니없는 엄마. 왜 하필 엄마가 엄마인가 하는 눈빛, 그런 건 여자들이, 또 우리처럼 가끔 들리는 여자들이 더 날쌔게 느낀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면 몸을 떨었다. 어딘가 구석으로 그림자처럼 밀려버린 엄마를 견디지 못했다. 엄마 딸인 것을 부끄러워했다면, 엄마를 더욱 더 방안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딸이 돌아올 시간이면 겁이 나기도 했겠다. 첨엔 잘 듣던 약도 효력이 떨어졌겠지. 술을 늘리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시장에도 가끔 나갔고, 동네엔 수퍼가 흔하다. 살림살이에 너그러운 집안 탓도 있었다. 그러나 독은 쉬이 퍼진다. 놀란 식구들이 감시를 시작할 때쯤엔 속수무책이 되어 있었다 했다. 그렇게 그녀는 중독이 되었다. 입원 치료가 불가피했다. 입원한 그녀를, 돌아온 그녀를, 아무도 반기지 않았다. 두어번 반복되는 입원 퇴원을 거치다 보니, 명색 어른들이 문병이나 가느냐고, 우리들 오는 것도 금하셨다. 무슨 자랑이라고 그런 문병을 다닌다냐고. 딸은 치를 떨었겠지. 위 아래로 피를 쏟는 엄마를, 그것도 제 스스로 중독이 되어간 엄마를 이해할 딸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행여 엄마를 닮아서 인생에 낙오


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겹칠 때면…


그 다음엔가 시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리 노환도 아니고 그저 조금 신장 문제로 부기 때문에 잠시 입원했을 때, 그 때 나타난 며느리 몰골을 보고 다시 한번 끔찍히 놀랐을 때에도, 설마 이렇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쾌적하다 못해 호흡기 등 부착되어 있는 기기들만 아니라면 작은 호텔같은 병실에, 깔끔한 딸들은 스타킹까지 갖춘 화사한 정장 풍으로 남의 집 병문안 오듯이 와 있었다. 중환이 아니고 보니, 잘 정리된 병실은 아늑했다. 그 틈새에 추한 며느리 꼴이라니, 대충 신은 신발에, 치마는 따로 돌고… 차림새는 그렇다 해도, 해골처럼 굳은 얼굴로, 희한하게 미소는 띄우고 ― 그것이 그저 취한의 홍조였을까? ― 이리 저리 발걸음을 놀리며 병수발을 자청하던 모습이 그냥 오싹하기만 했다. 정말 안쓰러워서, 그냥 우리 모두의 치부를 드러내주는 모양새 같아서.

 

딸은 그러니까 엄마를 치를 떨다가, 스스로가 두려웠던 모양이다. 스스로 알코올중독인 엄마를 이해할 힘도 없었겠지만, 아버지 또한 모녀를 도와줄 수 없을 때, 딸은 폭발했다.


딸이 가출했다고 알려진 이래 그녀는 완전히 술에 절었다. 술 속에서 흐느적거렸다. 공급을 끊으려고 낮에는 사람들이 지켰지만, 밤이면 방문이 밖에서 잠겼다. 그러면 그녀는 창살 칸막이가 있는 길가 쪽 봉창을 열고 아는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건너편 집 아이들이 드나드는가 살폈고, 지나는 수퍼집 아줌마가 보이면 사정을 했다. 나중에는 아저씨에게도 사정을 했다. 나 죽어요… 이애 아빠만 오면 해결 나요… 지금 이애 아빠가 없으니 날 이렇게 못 나가게 하네요… 우선 숨 넘어가기 전에 한 병만…  


가게 아저씨와 아줌마는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나자 서로를 욕했다. 그러게 왜 술을 가져다 주었느냐고… 서로 아니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이것은 비겁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젊은 여자의 죽음에 조금이라고 끼이고 싶을까. 아무 소리 없이, 신음소리도 절망소리도 들리지 않은 하루 낮 하루 밤이 지나고 방문이 열렸다. 무심코 며늘아기가 안보인 며칠을 이상하다 하다가, 늦게 귀가면서 흘끔 잠긴 방문을 본 시아버지는 안채에다 친정에라도 보냈냐 물었다. 사실을 알고는 안사람더러 야멸차다며 호통을 쳤다.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살려야지… 불쌍한 여자는 합리적인 아버님 덕분에 아직 미미한 온기가 남아 있을 때 발견되었다. 아니 누구라도 사람 사는 집에 그렇게 아무 소리 안나는 잠긴 방문을 오래 방치했을 리는 없다.


딸을 잉태시킨, 딸과 그녀를 보호해주었던 하늘같은 남자도 형체뿐이었겠지. 긴 세월동안 중간자리의 남편 또한 분열 직전이었을지 모른다. 참을성이 덜한 그녀가 먼저 무너져 내렸다. 부모형제 누구라도 뒷받침이 덜한 그녀가 먼저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 뿐이다. 가출했던 딸이 실제로는 곧 고모집으로 돌아와서 잘 견디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남편도 며칠 딸에게로 퇴근하며 아이와 소통을 시도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여자는 슬슬 치사량의 술을 마셨다. 술 속에 익사한 것이다.


저만치 새삼 조카의 단정하지만 어딘지 너무 부드러운 긴 모습이 어른거렸다. 검은 양복에 오뉴월 뜨거운 태양도 잘 참는 무던한 남자. 내 친정동생이라면 나무랄 바 없을, 내 동료라 해도 나무랄 바 없을, 참을성 있고 과묵한 남자. 아직 한창 나이의 저 남자는 그러나 40 초입에 상처를 했구나. 얼마큼 참기 힘들면 죽도록 술에 절기도 하는가. 남편이 출근하는 지 돌아오는지, 딸아이가 가출한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어디 딴 세상을 헤매는 아내를 참기에는 너무 단정한 남자, 저 남자도 불행했구나. 이제 곧 여름이 오면 세상은 맨발 천지가 될 것이고, 제 맨발을 찾아 어디로 헤매려나. 참 불행했구나. 아니 불행이구나, 어디 "화근이었던" 아내가 죽었다고 불행한 과거의 시간이 함께 사라지는가. 저 남자의 새장 안에서 죽어간 여자를 누가 쉬이 잊을 수 있겠는가. 누구라도 다 잊는다 한들 새장이야 새를 잊겠는가, 날지 못해 그 안에서 죽어간 새를. 죽어서 날아간 새를. 날지는 못했지만, 죽은 것은 하늘로 간다 하지 않는가. 그럼 날아간 것이지. 태양까지라도.     


     새 중에서 제일 작은 벌새들도

     이름없는 잡새들도

     하늘 속으로 몸을 들이미는데

     귀싸대기 새파란 참새가

     아, 안된다. 바람 속에 날개를 털어야 한다


     일어나 멀리 날 때 너는 너인 것이다

     기어코 너 자신이 되는 것

     그것이 너인 것이다.


살랑거리는 잎새들이 마침내 숨을 쉬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입에서 무엇인가 안도의 느낌, 할 일을 무사히 다 했다는 큰 숨이 나오는 것과 시간을 맞춘다. 바람이 한 번 더 크게 불어와 등어리 검은 옷 속에 꽂혀있던 태양의 살촉을 걷어간다. 그제서야 조금 움직여서 하늘을 본다. 예상처럼 밝아 터진 태양은 간 데 없고 흐린 잿빛의 하늘, 그녀는 순간 놀란다. 자신이 남의 눈에 설게도 어느 새 썬글라스를 걸쳐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탓이다. 사실 태양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어리는 눈물에 눈화장 지워졌을까 들키기 싫어서였다.


"작은 어머니이, 외수욱모오니임… 가세요. 저기 벤치 아래 점심이 준비되어 있어요오." 상냥하게 팔을 잡아 흔드는 질녀, 질부. 이렇게 삶이 세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검노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어느 봉분 사이에선가 날아올라 그들의 옆을 스쳐 태양을 향하려는 듯 높이 사라진다. 벌써 다음 세상에 나비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원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 꼭 새가 되란 법도 없지. 꼭 한번 말을 나누고 떠난 여자, 나보다 훨씬 젊어서 땅에 묻힌 여자, 이제 그 여자와 나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도대체 하늘이 어디까지 갔기에

     가도 가도 따라갈 수 없다 하는지


반혼(反魂)의 절차가 있는지 없는지, 우선 아침을 거른 상제들이며 손들에 대한 음식제공이 으뜸이다. 산 사람은 살어야제… 젊디젊은 남편을 위로하는 말들이 당연하고 또 매정하기 그지없다. 젊기야 젊지… 삼촌처럼이면 이제 장가들 나이네 뭐… 세상에 박한 것이 인심이라고, 산사람 걱정에는 서로 앞을 다툰다. 하긴 일가친척 모여 앉아 하는 말들이다 보니, 젊은 놈 하나 여자 잘못 만나 족쇄 채워졌다가 해방이라는 느낌도 무리는 아닐 게다. 미리 떠난 아내는 저 속에서 버선발로 영원할 것이었다.


초췌해진 당사자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깝다. 그를 힘들게 한 그녀의 반생동안, 그 맨발의 상념을 이젠 떨구는가? 고개를 들어 따가운 태양을 맞는 시선이 물기로 반짝인다. 태양은 아랑곳없다.



소설시대  4호, 한국작가교수회, 평민사 2002, 240-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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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2. 8. 19. 22:30

전일시론 2002년            

우리의 골목대장들

 

어느 시기나 어느 동네나 골목대장은 있기 마련이다. “동네 골목에서 아이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아이”, 국어 사전도 마지막 설명을 “아이”라고 규정한다. 아이들은 동네 골목대장을 두려워하고, 커서도 지금처럼 힘이 세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한다. 두려움과 불안은 부지중에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다. 그것이 문제이다.


옛날엔 어린 시절의 골목대장은 어미의 걱정이었다 ― 하긴 요즈음엔 그것도 대장이라고 대장하기를 바라는 어미도 있다 하지만. 골목대장에도 두 가지 형이 있다. 좋은 의미에서는 다른 아이들의 선두에서 놀이의 지도자가 되거나 통솔하는 역할을 하는, 좋은 성격과 능력의 소유자임을 엿보게 하는 경우이다. 문제는 아무 데서나 폭력성을 드러내고 약한 친구들을 못살게 굴며, 혼자서 대장이 된 기분을 독차지하려는 경향이다. 골목대장을 자처하는 아이들은 대개 지적으로 미숙한데 완력이 강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약한 아이들도 마음속으로는 완력에 대한 저항심을 갖게 된다. 더구나 골목 밖으로부터 위협이 닥쳐올 때는 놀랍게도 이러한 골목대장형이 제일 먼저 몸을 사린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비겁성이 그 속성인 것이다. 그나마 어린 시절의 골목대장을 귀엽게 봐 주며 그 긍정적인 면을 살리고자 함은, 그들이 아직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골목대장이 자라서 한 가락한 경우가 적지 않다. 동학의 전봉준이 고창 당촌 마을에서 훈장의 외아들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적에, 아이들의 골목대장으로 패싸움에선 늘 앞장을 섰다는 일화도 있다. 더 거슬러 가면 오성 이항복의 어린 시절 악동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동네 골목대장을 하던 그가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학문에 힘쓴 일이며, 16세에 어머니가 타계하자 제복하고 아예 학궁(學宮)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에서 선조왕을 호위하여 임진강을 건너는 충신이 되었음이며, 장인 권율장군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난세의 귀감이 된 일을 두고 말함이다. 요즈음 베스트셀러에 이른 김훈의 『소설 이순신』에도 어김없이 “골목대장으로 범상치 않았던” 어린 시절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당파싸움이 심했던 사실을 두고도, 우리에겐 골목대장을 선호하는 기질이 대대손손 있어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골목대장을 졸업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예컨대 어른들의 정치세계에서는 미숙함이 면죄부도 아니고, 더더구나 골목대장의 행태가 칭송될 수는 없다.


요즈음 정치계 인사들을 둘러싼 거짓말 공방은 골목대장의 목소리 다툼과 꼭 같아 우울하다. 아웃이야 ― 아니야, 싸움은 공이 아웃인가 아닌가에 따라 결판나지 않고, 골목대장이 아웃이라고 외치면 아웃이 된다. 정치인 도덕성 문제로 초미의 관심사가 되어있는 “병역 비리” 운운 테이프의 진위, 테이프의 목소리의 진위, 물론 그 내용의 진위, 그런 판단이 꼭 골목대장의 큰 목소리 따라 결판이 날까 걱정이다. 완전 조작이다 ― 천만에 진실이다, 공이 아웃인지 아닌지, 다음엔 또 어느 쪽으로 튀어나갈지, 보통 사람은 골목대장들 등쌀에 어지럽기만 하다. 국회위원 재보선 때에도, 거물급 인사가 겨우 동네 골목에서 재기했다고 큰 소리였다. 거물급이면 누구라도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마빡 터지는” 싸움을 붙어보기라도 했어야 한다. 동네 골목은 전장에 차마 내보내기 여린 동지에게 맡겨두고, 쉬운 산술로 좌석 하나라도 바깥 전장에 나가서 챙겨야 했지 않은가. 동네 골목에서는 소인배에게도 너그러운 것이 인심이다. 그러다 보니 골목대장들은 골목만을 맴돌며 큰 소리다.

90년대 후반 한국의 개혁실패 이유를 진단하는 어느 책에서, 개혁세력이 군사독재의 그림자에 몸을 적신 나머지 국민대중을 개혁의 길로 동참시키지 못한 채 골목대장의 오만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라는 논지를 폈던 생각이 난다. 골목대장들의 큰 목소리 정치로는 우리에게 개혁은 요원할 것이다. (2002년 8월 19일)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