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이2009. 7. 15. 11:31
 

아이들 - 아이들이 오면 천국이 된다! (2009년 여름)


* 연잎이 신기해! 수빈 - 우빈

* 도레미파 - 2003년생 수빈/ 2004년생 우빈/ 2006년생 형빈/ 2007년생 성빈/

* 연구실에서 - 성빈은 잠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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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9. 3. 28. 23:30

그림자 도시 - 개성 방문기 
                                                                  
소설시대 15호


개성을 방문하기 위한 10월 그믐께, 가을 내내 기다렸던 비가 하필이면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지만 불평을 못한다. 해갈을 기다리는 푸른 잎채소들, 그 걱정에 사로잡힌 농부들의 심정을 이해하는 마음이 되어서. 들었다 놓았다 가벼운 우산을 꿍쳐 넣고 여차하면 요량으로 반 자락 비옷도 밀어 넣다보니 1박2일 봇짐이 커진다.


전날을 ‘통일’이라는 글자와 관련된 행사를 빌미로 서울에서 보낸 우리 일행은 이튿날 개성나들이를 위해 일찍 잠을 청하게 되었다. 덜렁 텔레비전 밖에는 없는 방에서 종이 한 장 글자 써진 것을 챙겨 넣지 않은 터라 심심하다. 불온한 문서라 분류되는 것, 수상쩍은 것은 집어넣지 않기로 작정했다. 언젠가 요상한 꿈에서도 분명 북한 땅을 떠나오기로 작정은 했었지만 그 끝이 불분명했고, 그 꿈을 꾸고 일년도 넘은 시점에서 느닷없는 개성행이라니 조금 켕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일을 누가 알랴! 돌아온 직후에 있을 사무(의무적인 일이자 나에게 보다 수십 명에게 중요한 것)를 미리 컴에 저장해 놓았다. 그러나 이리저리 뒤척이다 생각해보니 컴에 저장되어 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남겨놓고 오지 않았으니 무슨 소용이랴 싶어 허망했다. 그것 때문에라도 꼭 돌아가야 한다. 또 정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알람을 켜두고 잠을 청하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낭패다. 다른 날은 몰라도 단 하루의 개성방문인데 잠을 못자두면 어쩌나. 그러저러 두어 시까지 시계를 본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지,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깬다. 5시 정각이다. 그로부터 10분 간격으로 깨우는 벨소리에 버스출발 50분 정각에는 승차할 수 있었다. 어제의 그 버스이기 때문에 자리는 남아있다. 우등고속으로 말해서 4번 좌석. 둘째 줄 복도 쪽 자리다. 어제는 종일 멀미약 탓으로 졸기만 하느라, 대한민국 명 정치가의 달변 중에도 고개를 쳐 박곤 했다. 오늘은 양을 반으로 줄인다. 평생처음 분단의 선을 넘는 나들이 길에 졸아서야…….


임진각 - 서울에서 임진각까지는 채 50㎞도 되지 않는다. 그러니 며칠 전 어느 신문사 주최로 ‘꿈나무통일레이스’가 펼쳐지기도 한 거리이다. 버스 이동은 못다 잔 잠을 청하려다마니 금방이다. 우리 일행은 28인승 버스 둘로 움직이는데, 50명이 채 못 된다 했다. 이제부터 비상이다. 다른 짐들과 함께 우선 핸드폰들을 놓아두고 가야한다. 갈아탄 셔틀버스는 남북출입사무소까지 우리를 실어간다. 누구나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출경과 입경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대한민국 국적이건 아니건, 방문자나 현대 아산측 안내원이나, 심지어 개성근로자이거나 입출입 때 마다 입출경 수속을 해야 한단다. 출경이란 출국의 다른 말로서, 어쨌거나 남북한이 각각을 국가로 간주하지 않는 데에서 온 해결책이란다. 수속은 일반 외국여행 때의 수속과 같은 2단계를 거친다. 짐을 X레이로 통과시켜놓고 신체만 통과한다. 배율을 확인받은 디카만 허용하기 때문에 카메라를 보이기 위해서 따로 들고 섰으랴, 다소 얼떨떨한 가운데 ‘녀자출구’에 줄을 섰는데 남자들도 섞이어 있다. 주황색 현대직원복을 찾아 물으니 괜찮단다. 여권에 해당하는 관광증에 사증을 찍는 절차는 배당된 차량번호와 일치하는 창구로 가야한단다. 그렇게 사증을 받아 통과했으니 북측인가? 아직 아니다. 정말 번호표가 붙은 차량이 즐비하다. 우리가 10호라 했는데 모두 ‘10-’으로 시작해 이상했다. 그게 총 10대 중 몇 호차라는 신호인가 보다. 그러니까 10호란 10-10호다. 서둘러 승차하고 나니 우리 차 담당 안내원이 오른다. 8시 정각을 조금 넘긴 시간이다.


이제 출발이로구나. 그게 아니었다. 8시 정각 군사분계선 통과 예정과는 다르게 군사분계선 통과 승인을 위한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안내의 말로는 통상 서쪽의 통신장비가 동쪽만 못해서 일어나는 지연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출입사무소를 통과한 차량과 방문객들이 북측 입경을 못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으니 안심하고 다시 내려서 자유로이 기다리라는 안내다. 차량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다가 서울-개성 표지판이며 남북출입사무소 입간판이 보이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여름에 다른 용도로 구입했다가 겨우 몇 장 찍어본 솜씨로 거리조절이니 뭐니 그냥 자동에 놓고 눌러보았다. 이제부터 증명사진을 찍을 양인데 눈에 들어오는 우리 일행은 없다. 어디선가 서양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서 첫 증명사진을 찍었다. 입간판들을 증거로 하고서.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다 해도 최소한 남북출입소까지는 다녀온 증명이 되어 줄 것이다.


정말 다들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을까? 서둘러 “온리 설렁탕” - 젊은 사장, 우리일행을 인솔하는 여행사 사장의 말대로 - 설렁탕을 먹고 내려왔던 그 곳으로? 하긴 해가 돋기 시작하니까 껴입은 옷이 불편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순간의 선택이 필요했다. 배낭의 짐이 부풀더라도 위아래 한 겹씩을 벗어 넣기로 작정하니 사무소 건물로 들어갈밖에. 화장실을 나서는 배낭은 정말 불룩 이가 되었다. 저만치 삼삼오오 모여선 일행들이 보였지만 끼이고 싶은 자린 없었다. 골라서가 아니라 전체로 무조건 없었다. 그것이 나이다. 어제저녁 공들였을 뷔페식 저녁 식사 후 색소폰 연주자까지 끼인 여흥시간, 그때에도 나이가 문제였다. 섞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섞이지 말아야 하는 세대의 의무다. 노래를 청하는 사회자의 마이크를 받아 대꾸한 내용이 그랬다. 듣기만 해야 하는 세대의 의무가 있노라고! 내심의 논리가 이랬다. 사람이 열 살까지는 벗을 할 수 있다 했다. 그런데 열 살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 싶은 상황에서는 벗을 하지 말아야 미덕이다. 고조된 분위기를 깨느니 그냥 한 곡 부르다 말아도 될 일이지만 그것이 안 되었다. 약간의 취기에 실은 뭔가 노래 부르고 싶은 기분이 왜 아니었으랴. 그래도 아닌 건 아니다. 이 아침도 딱 그런 이치였다. 어디에 끼어든단 말인가. 먼데 벽 쪽으로 의자가 연이어 있었다. 마침 고생하고 있는 다리를 위해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천천히 세상이 사려져 갔다. 혼자 있는 느낌이 되니 그 꿈이 되살아났다. 고층 아파트 위에 또 그만큼 높이의 아파트를 지어서 분배해주겠다는 북한상황의 꿈이. 고개를 흔들다보니 나도 모르게 목운동이 되고, 이어서 어깨운동도 되고 있었다.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쳤다. 꿈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회랑을 울리는 안내목소리와 더불어 서둘러 다시 버스 쪽으로 움직이는 발자국소리들에 천천히 눈을 떴다. 시계가 8시 43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쪽을 향해서, 곧 북쪽으로 선회하겠지. 10여분에 군사분계선에 도착했지만, 다시 북측 입경 수속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주의사항과 일정에 관한 안내가 꼼꼼하다. 그러기도 하겠지. 마침내 9시 7분을 가리킬 때 버스는 다시 움직였고 널찍한 돌에 “평화를 다지는 길……”이라고 새겨진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비무장지대. 1953년 7월에 확정된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에 따라 남북으로 각각 2㎞씩을 포함한다.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출입할 수 없다던 그곳에 들어서는 것이다. 248㎞ 중 훼손하는 넓이는 버스의 넓이다. 군사분계선이 옛 베를린장벽 같은 담장이나 철조망이 아니라 200m 간격으로 황색 표지의 블록이 있을 뿐이라는 안내의 말이 생소했다. 그런 그것이 그런 위력을 지녔다니. 9시 10분, 그러니까 경계를 지나자마자 곧 ‘개성’이라는 간판이 초록색 바탕에 흰 글씨로 나타난다. 순간 등장한 인민군 초소와 마침 지나던 초병은 표정도 읽을 사이 없이 스쳐가고 만다.


그렇게 한 이십분 달리고 버스가 서자 북측 안내원 세 사람이 승차한다. 버스엔 처음부터 북측안내원 자리가 노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고, 셋이 타게 되면 맨 뒷좌석 가운데에 앉는단다. 이제 드디어 북측의 안내를 받게 된 것이다. 달변의 안내원은 하루 일정 등에 관한 ‘안내사업’을 시작한다. 처음 보이는 철길 경의선 봉동 역에서부터 봉동리 일대 개성공단에 관한 소개가 길다. 총 200만평 개발계획 중 1단계 사업으로 100만평이 개발되어 피복, 시계 등 70개 공장이 운영되고 있다고. 놀라운 수치다. 설마 부풀릴 리는 없는데, 그동안 나의 무식함이라니. 패밀리마트 등 편의시설도 들어와 있고, 기술교육센터가 보였고, 그곳에서는 기술적인 용어들의 상이한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파트형 생산업체며 35000명 개성시 근무자들을 위한 푸른 버스도 출퇴근 보장용으로 운영되고 있단다.


약 40분쯤을 달려서 우리 버스가 개성시로 들어서자 정말 자그마한 몸집의 버스에 56번 번호가 붙어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정지해 있는. 개성은 우리에게도 흔히 개성상인이란 말로 익숙하다. 북에선 개성깍쟁이라는데 남에선 서울깍쟁이라고! 깍쟁이의 유래를 북에선 ‘가게 방을 가진 사람, 가게 쟁이’에서 ‘각쟁이’로 줄다가 다시 된소리화한 것이 깍쟁이라 한다. 글쎄, 우린 그런 해설은 처음이다. 아무튼 개성 소개는 일품이다. 천년 전 고려 때 벌써 인구 10만이었다니, 유서 깊은 도시임엔 틀림없다. 주민들이 사는 마을들이 시작되고, 그 이름은 ‘해선동’. 38선에서 해방되었다는 뜻으로 그렇단다. 그런데 해방은 되었을지 모르나 푸르른 파주 땅을 지나 개성에 들어선 순간 차창의 푸르름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산들은 거의 민둥산이었다.


시내 쪽으로 오면서 이제 곧 심었을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보였다. 안내의 말로는 역병이 들어 완전 벌채를 하고 다시 심고 있는 중이란다. 개성시민은 적어도 산의 나무들을 몰래 베어다 불을 때는 사람들은 아닌 모양이다. 두문동 72인을 낳은 고장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차창 밖의 주민지구, 그러니까 주택지의 집들은 이삼층 공동주책이거나 5층 정도의 아파트이거나 파르르 얇은 종이 같은 인상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창문으로 미루어 보이는 벽의 두께는 마분지 정도. 그것은 스쳐가는 사물에 대한 편견이었을까? 편견이었기를 기도한다, 기도할 데가 있다면. 내가 본 것은 큰 오해이고, 집은 훨씬 더 두꺼운 벽을 하고 훨씬 더 따뜻한 방을 품고 있었어야 한다. 창문 안으로 움직임을 알아보기는 당연히 어려웠을 것이다. 누군가가 살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을 받기엔 스쳐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방에는 분명 학교에 가기 이른 대여섯 살 꼬마가 통탕거리고 있었지만, 키가 작아서 창문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주 난방은 구들난방이고 고층아파트는 온수난방이라는데 설마 사람들이 살지 않으려고? 그러나 거리엔 속도감을 주는 운동이 없었다. 그러니까 차가 없었다. 온 종일 가늘 길에 검은 승용차 한 대, 오는 길에 흰 색 승용차 한대를 보았을 분이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정차해 있을 때만. 질리도록 매연 속의 차량들과 불과 한 두 시간 이별한 후에 이 적막강산이라니. 가치평가의 뇌가 정지된 느낌이었다.


시가지에서 60리, 박연포가 있는 박연지구로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데, 이제는 명물 송악산도 잘 보인다. ‘만삭의 여인이 바다 쪽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손을 가슴위에 가지런히 얹고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어머니산’이라고도 불린다는 이 산은 지금은 바위산처럼 보인다. 이 도로로 계속 달리면 평양까지 2시간이면 간단다. 박연폭포에 대하 소상한 설명을 하던 안내원은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고는 잠시 마이크를 놓는다.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와 함께 송도 3절이라고 불린다는 박연폭포는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북한 땅을 처음 밟은 지점이 그곳이기 때문이리라. 주차장에서 폭포까지 500m 정도란다. 10여 미터 왼쪽으로 시작된 건물이 위생실(화장실)이다. 거기까지 그렇다 쳐도 사람들은 방문객들뿐인가? 10대의 버스에서 내린 울긋불긋한 사람들 말고는 짙은 감청색 차림의 북측 안내원 아니면 주황색 배색의 현대아산 안내원뿐이다. 평일이라 그렇다 쳐도 북한 사람들은 정말 관광지보다는 일터에서 열심인 듯 했다. 아까 시가지를 지나면서 보이던 사람들도 그리 열심히도 아닌 보통 걸음걸이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고, 더러 자전거를 가지고서도 타기보다는 짐을 실어 나르며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가로의 드문 나무들의 색깔처럼 짙은 밤색 아니면 짙은 무슨 색 복장의 사람들은 소리도 없이 걷는다는 인상이었다. 물론 멀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겠지만, 걷는 속도로 보아 아예 소리가 없을 걸음걸이였다. 그러니 언제 여기까지 걸어 올라오겠나?


올라가는 돌계단은 작은 돌들을 일정하게 사각형 블록으로 찍어내어 계단길로 만들어 둔 것이다. 은행나무와 참나무 낙엽 사이로 돌멩이 하나 구르지 않는 완벽한 청소에 감탄한다. 어디든 가면 돌 한 조각을 탐내는 남편의 선물을 위해 유심히 들여다보아도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없다. 그렇다고 정해진 길 밖의 흙길로 나설 수는 없는 일. 물이 넘치면 폭포의 폭이 7,8m라 했는데, 지금은 갈수기라서 한자나 되는 폭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 폭포는 천마산 기슭에서 37m의 낙차로 그 아래 투명한 고모담(姑母潭)이라는 연못으로 떨어져 내린다. 박진사란 사람이 폭포에 놀러왔다가 못 속의 용녀에 홀려 결혼하고 집에 돌아오지 않자 진사의 어머니가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못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박연폭포와 고모담의 이름이 유래한다 했다.


폭포 곁을 돌아 오르니 주변에는 험준한 봉우리들이 이어진다. 10㎞ 정도 길이로 고려시대에 쌓은 대흥산성이 있고 그 안에 조선시대 규모를 확장하고 17세기에 개축했다는, 조형미가 뛰어난 관음사가 있다고 하는데, 지난 홍수 이후 도로가 유실되어 관광이 불가능하단다. 대신 폭포를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까지 아슬아슬 올라가 볼 수 있었다. 박진사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더 위대한 어머니가 계시다는 가르침으로(?) 큰 바위벽에 새겨둔 강반석 조선의 어머니 예찬시보다 신기한 것은 범사정이란 얇은 바위가 있는 지점이다. 고모담에 떠있는 바위들을 그 곳에서 내려다보면 말 그대로 ‘뗏목이 떠있는(범사)’ 광경이 맞다. 개성 모약과 여남 개 담은 비닐 도시락에 두 달러, 인삼차 안 잔에 한 달러, 생수는 두 병에 한 달러란다. 그렇게 네 달러를 쓰고 차오른 숨을 달래고 내려와 보니 위에선 보이지 않던 고모담 안의 널찍한 바위 위에 황진이의 시구가 새겨져 있다. 거기까지 다시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디카에 증명사진만 부탁하고서 들여다보니 알 수가 없다. 황진이가 폭포자락에 반해 머리를 풀어헤쳐 먹물을 묻혀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시구를 나중에 석공들이 파놓을 것이란다. 대충 ‘삼천 척 높이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밤하늘 은하수가 흐르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게 하누나.’ 정도의 뜻이란다. 버스들이 주차된 곳에 다시 모인 시간은 11시 40분. 올라갈 때 무심코 지나쳤는지 그 사이에 형성된 것인지 간이 판매소들이 보인다. 유난히 용머리를 조각한 나무지팡이들이 보여서 구경하고 있는데, 설명이 재미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용대가리’란다. 북쪽에서는 사람은 머리라 하지만 동물은 대가리라고 하고 그것이 비속어가 아니란다. 열 달러. 이제 관광 시작인데 짐이 될까 싶어 그냥 물러난다. 그보다도 단체사진 찍는다는 부름 때문에 서둘러 어딘가에 끼워 앉을 곳으로 행했다.


그렇게 조금은 싱겁게 오전관광이 끝나고 11첩반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점심상을 들러 가는 길이다. 정오를 지나며 버스는 다시 시내 쪽으로 들어오고, 그새 친근해진 안내원에게 이것저것 묻는 일행 덕에 들은풍월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산들이 바위산인 것은 10년 전 소나무 역병 때문에 그리 되었고 지금은 식목을 해 나가고 있는 중이며, 박연지구 쪽으로는 잣나무들이 그 나름대로 싱싱하다. 학교제도는 소학교 4년, 중학교 6년이 의무무료교육이고, 전문학교 2년과 대학 4~5년은 전체 학생이 국가장학생이란다. 결혼은 부모들의 중매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녀자는 24~6세, 남자는 26~8세에 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문화어(표준어)에서 얼음보송이가 빠져 있는데 (우리 일행 중 국어학자의 말),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얼음보송이라 쓰고 있고, 아까 용대가리에서 대가리가 비속어가 아닌 것처럼 늙은이도 비속어가 아니라 한다. 오히려 아가씨, 아줌마가 비속어라 느껴진단다. 처녀는 처녀라 하고 결혼한 여자는 아주머니라 부른단다. 한편 남측 여행객들, 특히 처녀들의 옷차림새는 가끔 ‘나체화’라 싶어 눈살이 찌푸려진단다.


점심시간일 이 시간에도 도로근로사업에 부역 나온 사람들이 도로가에 쪼그리고 앉은 동작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멀리라서, 또 특별히 녀자라고 색깔 옷이나 짧은 치마를 입을 것도 아니니까 남녀의 구별이 안 된다. 소년학생궁전이 보이는데, 그것에선 방과 후 다과목 소조로 나뉘어 악기나 체육 등 소질을 연마하고 발표하곤 한단다. 그러는 동안 11첩(?)반상이 기다리고 있는 ‘통일관’에 도착한다. 화려한, 너무 화려해서 억지 같은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 안내원들의 안내를 바고 들어선 대 연회장. 둥근 식탁마다 10인조 11첩반상이 차려져 있다. 반짝이면서도 은근한 빛을 발하는 놋그릇에 뚜껑이 얌전히 덮여있는 10인의 11첩반상 차림을 보라! 버스에서 간단히 내려오면서 카메라를 놓쳤다. 서둘러 뛰어 갔지만 버스 문이 잠겼다니! 이런 곳에 누가 범한다고? 터덜거리며 돌아서는데 현대아산 안내원이 보인다. 그는 손쉽게 꽃혀 있는 열쇄를 돌려 버스 문을 열어준다. 배낭에서 카메라 찾는 시간이 미안하니 그냥 배낭 채 들고 내려온다. 다른 일행들은 벌써 놋그릇 뚜껑을 열고 시작하고 있었다. 열린 곳은? 일단 내 밥상을 뚜껑 덮여있는 모양으로 한 컷, 반찬그릇 열한 개와 밥그릇 국그릇 그리고 덤으로 나온 약식뚜껑까지 열자니 14개의 뚜껑을 열어놓았다. 펼쳐진 그림은 처음만 못했다. 대충 배운 대로 하더라도 김치류 셋, 장류 셋, 찌개 둘, 찜 하나, 전골 하나를 기본으로 두고서 비로소 생채, 숙채, 구이, 조림, 전, 마른반찬, 장과, 젓갈 회 또는 편육을 세어야 양반상 9첩이 될 터인데, 통일관의 점심상에서는 밥과 국을 제외한 모두를 세어서 11첩반상이란 것이 우선 셈이 달랐다. 왼쪽 줄은 숙주나물과 가지나물과 오이나물 등 숙채 일색이고, 앞줄의 묵무침과 가운데 어딘가의 계란찜 조각 그리고 감자와 고기의 조림, 다 마른 생선구이 조각 등으로는 7첩에도 미치지 못했고, 더구나 김치류라고는 향초를 담가서 다들 익숙해하지 않는 물김치 하나에 불과했다. 김치류가 11첩반상에 통틀어 물김치 하나라니! 오래 가물었다 하더니 김치감도 부족한가? 장난감 크기의 술잔에 부어주는 맑은 술이 아니었담 목에 넘어가지 않을 점심상이었다. 최고의 점심상을 이렇게 차려 내놓는다면……


점심으로 한 시간이 할당되었는지 1시 20분까지 승차하면 되고, 그 사이 길 아래로 남대문과 약간 언덕길 위 저만치에 경애하는 아버지 김일성주석의 금빛 동상이 서있다. 의례가 강요되거나 사진촬영이 금지되거나 하는 극단적 제약은 없었다. 그러나 사진 속에서 동상이 일부분 가려지거나 잘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당부가 따랐다. (누군가는 사진 속의 동상의 크기가 너무 작다는 이유만으로 북측 출입소에서 그 사진을 삭제 당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이번 일핸 10대의 버스에서 내란 사람들은 그 동상께로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있는 것을 찍는 것이 뭐가 문제될까 싶어서, 북측안내원에게 나쁘지 않게 찍어달라고 할까 보다라고 혼잣말처럼 하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듣고 말렸다. 긁어 부스럼을 말라고! 그런데 북측안내원에게 사진 부탁할 생각은 왜 하게 되었냐면, 이미 남대문을 그가 찍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남대문이 멀리 보이는 길 아래엔 드문드문 양쪽 안내원이 서있었고, 그 내부에선 앞의 나무에까지 가려서 남대문이 보이질 않았고, 우리 측 안내원의 발끝에 내 발끝을 대고서 길이를 벌어서 애써 그걸 찍으려던 내 모습을 본 북측안내원이 자진해서 자신이 찍어다 준다고 여남 걸음 나가서 찍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아산 직원은 넘을 수 없는 그 ‘경계’를 북측안내원은 넘어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들은 그곳 소속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구한 남대문은 북안동에 있는 개성성 내성의 남문으로 국보급 유산이라 한다. 내성을 쌓았던 1391~1393년경에 함께 지은 것으로, 축대 위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고려사』에 보면 개성성을 쌓는데 목공 35만 명, 장정 24만 명, 기술자 8천 5백여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정말 유명한 것은 한석봉의 친필로 쓰인 현판이라는데, 그것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오후의 관광은 첫 코스가 선죽교이다.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 거리 선죽동에 있는 국보유적 159호라나. 이 돌다리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역사적 장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도랑물 같은 노계천에 걸쳐있는 이 돌다리는 그 명만큼은 우선 크기에서 사뭇 작다. 길이 6.67m 정도는 홀딱 건너뛸 수 있는 느낌이고, 다리 난간의 너비 2.54m는 양팔을 벌려 품을 만하다. 원래 옛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다는데, 고려 태조가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하천정비의 일환으로 축조한 것이 알려지지 않은 다리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1392년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해 「단심가」로 대답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보낸 조영규 등의 철퇴에 맞아 숨진 사건 이후에야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름이 선죽교가 된 것은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났다는 것인데, 물론 대나무가 이 개성의 기후에서 지금 자라고 있을 리는 없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하여가」와 「단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어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어쨌거나 지금의 다리는 사람이 건널 수 없이 난간으로 둘러있는데, 이것은 1780년 정몽주의 후손인 유수 정호인이 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고 별교를 세워 보호한 때문이란다. 돌다리 동쪽에는 한석봉의 글씨로 ‘선죽교’라는 세 글자가 뚜렷한 비석이 있고, 돌다리 서쪽에는 비각 안에 1740년 영조의 어제어필의 포충비(褒忠碑)와 1872년 고종의 어제어필의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그 안에 암수 돌거북을 두고 (아들 얻기를 비는) 소원을 빌었다는 그 너머까지는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들어갈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늘에서 올려다본 은행나무는 유수한 세월을 증거하고 있었다. 매년 가을이면 노랗게 물이 들면서, 선죽교의 불그스레한 핏자국과 조화를 이루며.


다음에 들린 곳은 4차선 시멘트 길가 주차장에서 빙 돌아 올라간 숭양서원은 조선 중기 1573년 개성유수 남응운이 유림들과 함께 정몽주의 충절과 서경덕의 학덕을 흠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곧 이어 ‘숭양(崧陽)’이라는 칭호를 내려받았고, 개성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이 되었다 한다. 후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견디어 낸 마흔 몇 개의 서원 중에 속한다 한다. 그런데 그 입구에는 개인지 원숭이인지가 부각된 1m 정육면체는 안내가 없었다. 일행들의 추측으로는 말에서 내리기위한 발판으로 쓰인 것일 거란다. 글쎄.


두시 반. 숭양서원을 떠나서 버스는 마지막 코스로 고려박물관으로 향한다. 고려박물관 터의 성균관은 부산동에 자리 잡아 고려 초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고쳐지은 교육기관으로, 1089년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겨 왔으며 1304년 국자감에 대성전과 기타 건물들을 세우며 국자감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1310년 이름을 성균관으로 고쳤다. 지금의 건물은 1602~1610년경에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란다. 1호관부터 번호를 따라 박물관을 관람하는 데는 시간이 부족할 듯 하다. 여러 가지 놀라운 자료들 가운데도 적나라한 도표가 하나 있었다. 고려시대 「노비를 팔고 사는 값」이다. 어른 녀자종 (15세~50세)은 120필, 남자종은 100필에, 노령이나 어린 녀자종은 60필 50필이다. 녀자종이 값이 더 나가는 이유를 두고 양단으로 한복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은 안내원은 녀자가 더 많은 노비를 생산할 수 있어서란다. 우리 일행은 아니나 군집한 사람들 중 누군가 남자 목소리가 킥킥거린다, 녀자는 밤낮으로 부리니까 그렇다고! 정말 웃을 일은 그게 아니었다. 그에 나란히 올라간 막대그라프에서 가장 높은 막대는 400필 값의 소 한 마리였다. 소만도 못한 노비의 인생이여. 누군가에게 어떤 형태로는 자유를 잠식당하고 산다면 인간은 소만 못한 존재이리라!


이어지는 토기와 자기의 전시실도 볼 만 했다. 처녀청자나 총각청자 등의 자태는 물론 일반적으로 고려청자야 너무도 유명하지만, 토기의 경우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더욱 놀라웠다. 예술품으로서의 가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 우리 남한 땅에서 출토되어 진열되는 토기들의 모양과 너무 비슷한 때문이었다. 청동거울 등 철제문화도 인상적이었다. 개성은 일찍이 형성된 도시임이 틀림없었다. 간다라 미술의 청동불상이 모셔진 작은 전시실을 뒤로하고 나서니 야외로 통한다.


야외박물관은 문자 그대로 야외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여준다. 눈에 먼저 띄는 것은 현화사 7층탑이다. 1020년에 지어졌다는 탑은 높이는 8.64m로 큰 편에 속한다. 탑신마다 불상과 연꽃을 조각했던 모양인데 조금은 훼손되었고, 기단부에 돌을 마치 벽돌처럼 쌓은 것이 특이하다. 상대적으로 낮은 흥국사탑도 눈에 들어온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탑은 불일사 5층탑이다. 광종이 그의 모후를 위해 951년에 보봉산 기슭에 지었다는 불일사에 세워진 것이나, 1960년에 야외박물관으로 옮겼나보다. 나중에 붙여 올려 조금 어색한 상륜부를 제외하고도 높이는 7.94m라는데, 올려 바라보자니 참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이다. 역광이 되는 해가 들었다 났다 하는 날씨에 서둘러 정원을 돌아 나오는 곳에 개국사 돌등이 서있다. 개국사는 말 그대로 935년 고려 초에 세운 사찰로 고려조에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나 조선시대에 몰락했고, 높이 4m의 이 돌등은 193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아직 우표전시관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시간이 없다. 마지막 남은 관광코스. 북한의 풍물을 조금은 사가지고 가는 일이다. 큰 건물이 두 칸인데, 우선 들어간 곳의 입구에 뽕나무 버섯과 고사리 등 말린 식물을 파는 쪽이 붐빈다. 뽕나무 버섯 한 봉지에 24달러, 고사리는 8달러, 조각호두가 9달러 그리고 잣 한 봉지에 역시 9달러이다. 한국에 비해 싸고 안 싸고는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북한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사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루관광에서 허용된 달러는 200. 박연폭포에서 산 개성 모약과는 그저 양념에 불과하다. 노년의 건강챙기기가 주부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과제 아닌가. 그러니 이렇게 저렇게 챙기니까 양이 많아진다. 그러나 내심 진짜 표적이 있었다. 청심환 종류 하나. 연전에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북한산 물품판매소가 있었고, 거기서 구입한 청심환이 괜찮은 것 같았다. 양도 적고 다 합쳐 200달러 안에서 쓰기도 마땅하다. 우스운 말이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고 돌아오는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일 것 같다. 아서라, 남의 사정 봐주려다가 애 들어설라! - 어려서부터 들은 말인데 어려선 그 뜻도 몰랐다. 제 사정을 망각한 현명치 못한 철부지 행동에 대한 경계였으리라, 다소 성적인 버전으로.


아무튼 버스에 돌아와서는 미리 준비해간 편치는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더니 들기에 만만한 크기가 되었다. 오늘의 소비행태를 자아비판하자면 재산 상태에 비해 조금 많이 쓴 것 같지만 어쩌랴. 근년 들어 사적인 용도로 물품사기에 더욱 검소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상쇄가 될 듯 하다. 물론 아직도 멀었다. 슬쩍 스쳐간 텔레비전에서 프랑스라고 기억되는 젊은 여성들의 소비철학에 가슴이 뜨끔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자녀들에게 폐지로 만든 공책만 사주는 데도, 그 아이들이 “우리가 새 공책을 사면 나무들이 죽어서 종이가 되어야 되잖아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그 젊은 어머니는 “속옷만 빼고는” 새 옷을 사지 않는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있었는데…….


이런 저런 생각에 젖어들 시간이 없이 버스는 덜컹거리며 시가지를 지난다. 멀리에서 아이들의 하교시간인지 한 무리가 걸어 나오고 있다. 거무스레한 복장들에 검붉은 스카프들만 눈에 띄게 펄럭인다. 아이들은 목에 나라를 걸고 다닌다. 지나는 사람들도 아침보다 더 늘었다. 운동장으로 보이던 곳에 축구하는 아이들과 곧 이어 다른 운동장엔 네트를 중심으로 갈라서서 배드민턴 연습에 집중하고 있는 조금 더 큰 학생들이 보인다. 자유로운 놀이는 절대로 아닌 것이, 놀이의 낄낄대는 짓궂음이 아닌 훈련의 진지함이 하늘까지 굳게 하는 듯 했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저무는 해 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님 내 선입견이 문제였는지.


‘식료품상점’, ‘과실남새상점’, ‘전기기구수리’ 등 상호가 눈에 띄는데, 그것도 독특하다. ‘닭곰집’ 같은 독특한 표현 때문이 아니라 도무지 상호에 고유명사가 없다. 평화식품점이나 개성식품점이 아니라, 그냥 식료품상점인 것이다. 아 하나의 변형이 있었다. ‘결혼식 사진관’과 ‘천연색 예술사진’. 이 두 사진관 간판은 나를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적어도 사진을 잘 찍고 살구나. 추억해야할 일들이 생긴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판자에 쓰인 ‘종합편의’나 ‘아동백화점’ 입구에도 사실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주택 지구에 창문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던 내 눈 탓일까? 작은 글씨가 안보이면 급한 김에 돋보기를 두 개 겹쳐서도 보는 내 눈이 눈이랴! 집들의 하얀 칠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회색의 그림자 인상과 미동도 없어 보이는 정적의 흔적은 내 눈 탓이다. 그래서 렌즈가 중요하다. 특히 미지의 미래의 인생을 분홍빛으로 보는 긍정적인 사람과 불안의 잿빛으로 느끼는 못난이들의 차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이 회색 안경의 개성방문기가 순 거짓이라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개성공단 내 지역을 버스를 탄 채 설명과 함께 돌아본 우리는 로만손시계나 GS용인전자 등 우리가 흔히 보던 간판의 공장에 가슴이 찡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양쪽 동포들의 땀방울이 어느 공장에서보다 의미있게 다가오면서. 수박 겉핥기라도 개성공단을 돌아보는 것은 좋았다. 어쨌거나 버스는 다시 군사분계선으로 향하고, 그 동안 친숙해진 북쪽 안내원과 우리 측 순수한 한 일행 사이에 주체사상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게 되자 깜짝 놀랐다. 문제가 되어 서울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 겁이 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하나다!」라는 대형 플래카드에 대해서인지 - 그건 올 때나 갈 때나 아주 크게 보이는 길목에 걸어두고 있었다 - 동포로서 뭐 좋다! 라는 응수 한 마디를 빌미로, 안내원은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이라고 늦게나마 자신의 할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었을 게다. 평소에 명민한 분이라 곧 다른 화두로 빠져나왔지만, 아무튼 우리 일행이 어떤 계급(?)인줄 알면서도 기어코 주체사상을 입에 담은 안내원. 아마 그의 하루 자아비판은 조금 가벼워 졌으리라!


북측 안내원들이 처음 승차 때와 같이 예의를 갖춰 하차하고 나자 곧 버스 기사가 한 마디 했다. 오늘의 안내원은 거짓말 별로 안 했다고. 버스의 일행 구성을 보아서 “거짓말로” 막 해댈 때도 있단다. 그것만 보아도 그렇다. 안내원은 안내원대로 보조임무가 있을 것이다. 체제선전은 모든 체제의 주요사업 중 하나이니까.


우스운 에피소드. 북측 안내원들을 따라 버스기사가 내리지 않았을 때, 그 주체사상 단어에 노출된 일행은 왜 기사님은 왜 안 내리는 거냐고 되물어서 우리 모두를 까르르 웃겼다. 다시 한번 순수성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런 날 북측 남측 구별에 대해 무방비? 그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심오한 학문을 하는 분인데.


마이크를 다시 잡은 현대아산 측 안내로는 문상-개성간 철도 운항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었다. 수송해야할 물자가 있건 없건 날마다 정한 시간에 열차를 운행한단다, 철길이 끊기지 말라고, 조금 씩 조금 씩 더 길게 이어질 꿈을 담아서.


비무장지대 안의 풍경은 교과서처럼 판에 박힌 그대로였다. 다만 이번에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하얗게 반짝이는 바라크 판문점과 그 판문점을 두고 대치한 높은 깃대들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얼핏 보아도 더 높은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쪽이 북이다. 귀성동, 일명 평화의 마을에 자리한 붉은 인공기의 높이는 자그마치 165m에 달한다고 한다. 자유의 마을 대성동에 위치한 태극기의 높이는 100m에 불과하다고 하니, 우리 측은 그럼 그렇게 높은 깃발을 달 능력이 안 되는가? 설명에 따르면 첨엔 며칠 자고나면 북쪽에서 또 며칠 자고나면 남쪽에서 깃발 높이 올리기 경주가 벌어지곤 했더란다. 그것을 어느 날 우리 측에서 멈춘 것이 이 상황이란다. 웃지 못 할 사실 하나 더. 그렇게 높은 인공기를 게양하고 내리는 작업에 북측 인원은 얼마나 동원이 되어야 할까? 태극기 게양에 필요한 인원이 2명이면…… 그러나 아무도 맞추지 못하였다. 믿거나 말거나, 그 열배인 스무 명도 아닌 사십 명이 아침 조석으로 인공기 게양에 동원된단다. 하늘의 압력이 그런 것인가? 믿지 못할 숫자이지만 가장 믿음직한 소식통이 아닌가.


마지막 북측과의 접촉은 왼쪽으로 보이는 언덕의 인민군 초소이다. 초소로 들어가려는 걸음걸이의 군인을 만나 버스 속 사람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었지만 허무한 짝사랑. 노무현 대통령이 도보로 건너갔던 샛노란 횡단선. 그것은 페인트가 태워진 채 거무스름한 선으로 변해있다. 곧 이어 반가운 파주시 이정표가 다가온다. 5시 정각이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시간이다. 실제로는 북측 용어로 통행검사소 - 우리 측 용어로 남북한출입소를 통과하면서 개성방문은 끝이 나는가 보다.


입경장에서는 카메라를 소지한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의 줄을 구분한다. 짐들을 X레이로 투사하는 과정을 똑 같았지만, 이번엔 정말로 카메라들을 북측 요원이 받아들고서 하나하나 촬영된 화면을 검사했다. 내 디카도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 걸린 것은 없었다. 귀 달린 도기병 등 몇 가지 박물관 내부를 찍은 사진이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실 첨엔 모르고 몇 장을 찍었는데, 실내는 촬영금지라 해서 그만두었었다. 그 보다는 아무렇게나 잡동사니 속에 밀어 넣어둔 박연폭포의 돌멩이 하나가 X레이에 걸리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개성모약과보다도 우황청심환보다도 내심 기다릴 개성돌멩이. 은행잎과 다른 낙엽들 집으면서 하나 겨우 집어든 못난 돌멩이. 일행 중에는 분명 반입금지 품목에 적힌 기준에 맞는데도 아무튼 반입불가 품목으로 분류되어 압류되었던 소니SR12 카메라도, 종교 관련 물품이라 해서 자진해서 맡긴 묵주도 당연히 돌려받는다. 종교도 정치만큼 위력을 갖는다? 사실 우연히 선물 받은 물건에라도 십자가 등이 새겨져 있음 곤란하다는 처음 안내에 많이 마음 졸였던 것도 사실이다.


서울 쪽으로의 검역은 마른 고사리 등 식물과 관련된 물품들이 해당된다고 한다. 물론 거의 형식적이다. 한 두 시간 전에 산 물건을 한 두 시간 후에 압류하고서야 개성관광이 유지되겠는가. 어둑한 사무소를 빠져나온 우리들은 다시 임진각행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어디 걸터앉을 데도 없이 서성거리는 몇 분, 몇 사람과 말을 섞게 되니 조금 후회스럽게 된다. 주거니 받거니, 농담조의 언사들이 다만 상대가 아니라는 자괴감 때문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물론 얼굴은 사회적 표정을 띠고 있었기를 희망한다. 부질없더라도.


정말 해괴한 그 꿈은 다만 일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북한을 다녀온다는 예고에 불과했을까? 형제들을 다 모아 월북을 해서는 난민촌의 덜 지은 창고 같은 시멘트 반쪽 건물에 배당되었데…… 방도 아닌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샘가와도 같은 축축한 바닥에 어정어정 안고 선 우리 형제들. 하이힐로 종종거리며 뒤따라오던 한 녀석이 반짝이는 지갑을 팔에 낀 채 산들거리는 원피스 치마 자락을 날리며 뒷걸음질을 한다. “언니. 난 안 되겠어. 난 이런 덴 못 살아…….” 나는 어쩜 그리 냉정하고 단호했을까? 그래, 이런 문제는 형제라 해도 강요 못하지, 각자가 결정 하는 거다. 그래 할 수 없다. 뭐 그런 짧음 랄로서 우리는 이별을 했다. (사실 우리는 연초에 오래 누워있던 그 아이와 영영 이별을 한 터였다.) 문제는 꿈이 거기서 중단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앉아있는 난민촌 같은 숙소 저 앞에 검붉은 벽돌로 육중하면서도 높은 아파트 건물이 여러 동 있다. 그런데 책임자인지 담당자인지가 와서 하는 말이, 저 고층 아파트 위에 꼭 저만한 높이의 고층아파트를 또 올릴 계획인데, 그것이 완공되면 우리가 그리고 배치되는 것이라고. 물론 무엇인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느낌도 없이 정지된 그림인데. 성냥갑 위에 또 하나 이런 성냥갑을 얹어서? 그러한 공법을 물론 아는 바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시멘트바닥의 냉기는 그때 계정이 무엇이었던 간에 황량함 그 자체이고 비전이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엄청난 월북을 감행했는가? 전후 사정은 모르나, 순간 나에게 깊은 후회가 일었다. 평상시에 스스로 기회주의적인 면이 없다 믿었던 내가 - 꿈에서도 그랬다 - 다른 형제들에 대한 책임의식까지 발동하여 넌지시 생각을 바꿨다. 사실 이 엄청난 행보를 학교에서 아직 모른다. 그러니 우리 이대로 돌아가 버릴까? 어때? 어떻게 결정할까? 너희들 결정하는 대로……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 꿈이라지만 너무했다. 형제들이 온통 함께 월북을 했는데 재직 학교에서 그걸 여태 모른다? 다시 돌아 올 수가 있다?


참 꿈은 꿈이다. 그리고 꿈처럼 나는 다시 돌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버스 내부는 활기에 넘쳤다 서태지가 어떻게 데려왔는지 로열필하모니와 협연하는 온 시간 내내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한 소설의 노래도 따라 부를 수도 없었던 내 목이 잠긴 건 버스 안의 열기와 실제 에어컨의 냉기가 범벅되어 내 신경을 자극한 탓이리라. 나는 어떤 온도에 반응해야 하는가를 몰라서 저항력을 잃고 무너진다. 나는 목소리를 잃고 그 대신 지금 글을 쓴다. 꿈만 같은 개성 방문기를. 그림자의 도시 개성을 떠올리며.

 


소설시대 15호, 2009. 3월 186-2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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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8. 11. 20. 23:30

 

이 있었던 것

                                                     맛, 멋, 그리고 향기』2008 (이화에세이)

 

 

영화 《파니 핑크》의 주인공 파니는 “눈이 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눈 말이다. 눈이 있었던 것은 살아있었던 것이고, 그러니까 파니는 살아있었던 것을 먹지 않는다. 살아 있었던 것(과거완료)은 지금은 죽은 것(현재완료)을 의미한다. 파니는 살아있었다가 죽은 것을 먹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동물을 먹지 않는다.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파니 뿐이 아니다. 가녀린 체구로 강인한 여러 일들을 해내는 동료가 있는데, 상대적으로 젊긴 하지만 그 무궁한 에너지가 순 식물성에서 나온다. 결혼하고 자녀를 기르는 엄마노릇을 잘 해내면서도, 고기를 멀리 하기 몇 년, 꾀나 공격적이었을 더 젊은 날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 지금의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마르고 부드럽고. 얼핏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지만, 바람처럼 가볍게 걷고 소리 없이 움직이면서 할 일은 누구보다도 야무지다. 어디에서 힘이 나올까. 아니 잡식성 동료들의 저녁자리에 끼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디에서 인내가 나올까.


*


2008년, 운하와 쇠고기로 들끓는 여름을 보낸다. 운하반대모임에 서명을 하고보니 그 동료가 적극적이었다. 원래 환경론자인 것은 알았다. “인간은 자연을 너무나 학대하고 있어요. 《불편한 진실》 보셨나요? 지구온난화 때문에 근년 들어 빙하며 킬리만자로나 알프스 만년설이 엄청 녹아내리죠. 온난화란 게 말뿐 아니라 그 진행속도가 심각해요. 인간의 소비행태가 CO₂를 증가시켜 북극 빙하를 1년에 1% 정도 녹여내는데, 반세기 안에 플로리다, 상하이 등 해변도시들 40% 이상이 물에 잠기고, 네덜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우린 사실 날마다 샤워도 해선 안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우린 이 지구에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그런 판에 우리나라에선 잘 있는 물길 놔두고 인공운하라니. 그렇게 확실히 발언하는 그녀는 순 식물성 체력만으로도 어렵고 무거운 일들에 거뜬하다. 운하문제와 쇠고기수입문제의 경중은 나름대로 판단한 것 같았다. 자신이 쇠고기와 관련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총론과 각론의 관계로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운하문제에 지론을 폈다. 우리의 4대강을 인위적으로 손질한다는 한반도 운하계획은 잘 될 이유보다도 안 될 이유가 너무나 많다고. 청계천 공사도 말이 “복원”이었지 자연하천이 아닌 인위적 이벤트 하천으로 개조됨으로써 원래의 목적이던 청계천 복원이 영원히 무산된 것 아니냐고. 지금의 청계천이 잠시 위락시설이 될지는 모르지만 낙동강이나 섬진강이 갖는 자연에 비교가 되느냐고. 혹여 대운하의 경제적 효율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자락이 살아있는 한반도를 지켜온 우리 삶과의 의미관계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없다고. 수 억 년의 지형형성 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4대강과 샛강들이 운하로 인해서 수리체계가 단절된다면 강유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형교란과 배수기능의 교란 그리고 생태교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고.


나는 사실 운하반대 서명을 하면서도 이론적 배경은 없었다. 놀이시설처럼 도구로 추락한 청계천과, 그것도 모범이라고 본을 따서 우리 고향에서도 유치찬란한 하천 외부정비에 혈세를 퍼붓는 행정에 놀라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 가녀린 동료의 실팍한 이론과 행동을 보고서야 날이 선 지식인의 비판의식에 감탄하면서, 그녀의 특별한 음식습관에 관심이 갔다. 주지육림에 빠져서는 명철한 사고를 정립하지 못하듯이, 이렇듯 명료한 사고방식과 행동의 근저에는 그녀가 섭취하는 음식물과 생활습관이 큰 몫을 하는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점차 채식의 장점을 찾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자칫 가난한 농민들이 밥과 김치를 주식으로 채식에 의존하고 부자양반들은 산해진미를 향유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류의 음식사를 보자면 채식은 유목문화에 이어 농경문화가 발달된 후에야 가능했던, 다시 말해서 한층 진화된 섭생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진화의 초기단계부터 정글의 법칙 속에서 육식을 했고, 구석기시대에는 채집수렵에 의존해야 했으니까, 채식 습관은 인류사에서 진화로서 나타난 것이다.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서 인간이 먹는다! 피가 살아 끓고 있는 생명체를 도살하는 잔혹행위, 그러한 잔혹행위를 일상으로 여기는 우리에게 단말마의 고통 속에 죽어가는 동물은 잔혹성을 심어놓는다. 잔혹성은 동물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동종인 인간 사이에 작용하여 작게는 드잡이와 싸움질, 크게는 전쟁이 끊일 날이 없게 한다. 만물이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사고 또한 친자연적이 아닌 친인간적 사고일 뿐이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고의 틀에서 바라볼 때 친인간적이라는 것은 배타적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 주는 만큼만 자연에서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서 얻은 결론이다. 완전한 채식주의 - 그것이 비밀이었다. 그녀에게서 채식주의는 완벽한 수위다. 유제품마저 섭취대상에서 제외하는 것. 물론 그것은 심각한 불편을 야기한다. 하얀 밥을 지어놓고 그녀와 한 끼 밥을 먹으려던 계획도 무산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숟가락에 얹어 먹을 김치랑, 매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여린 고추무름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김치에는 젓갈류가 무름에는 멸치 몇 마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샐러드에 드레싱을 해놓았다가는 망한다. 계란 일부가 드레싱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마르고 왜소해지면서 정신이 강해지는 경우를 보통은 고행에서 본다. 그래서 속으로 그 작은 동료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의 내부에서 자연스러웠던 것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유년시절 샘가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죽은 “새”의 털을 뽑고 있던 것을 보았던 기억과, 별식으로 상에 오른 영계백숙을 그 기억 때문에 토해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실 유년시절의 고민은 무엇인가 뭉클한 그런 것을 씹어야하는 일에 대한 혐오감이 아니었던가.


어린이는 보다 더 자연스럽게 반응한다, 그렇게 생각된다. 어린 아이들에게 영양을 고려한다고 해서 제 살과 비슷한 동물성 음식을 일부러 길들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 아이들은 원래 채식성 엄마를 두고도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잘한 일일까? 내 아이를 기를 즈음 나는 발언권이 별로 없는 엄마였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세뇌된 자신 없는 엄마였다. 다시 아이를 갖는다면 내가 어려웠던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 호박 하나만 해도, 애호박과 농익은 호박 그리고 말린 호박…… 자연 속에 널려 있는 열매들과 푸성귀들에서 자연친화적 섭생의 보고가 기다리고 있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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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서평2008. 9. 15. 23:30
  그 여자의 글쓰기
                 

                                     //소설 「네 번째의 죽음」을 읽고 //


이 소 림 (전남대학 독문과 박사과정 2학기)

2008년 9월 30일


단편 「네 번째의 죽음」은 마리루이제 플라이서 Marieluise Fleiβer(1901~1974)의 『심해의 물고기 Der Tiefseefisch』(1930)의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남자주인공 라우렌츠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 생각, 말, 남자에 대한 태도를 순종적으로 할 것을 여성에게 종용한다. 대등하지 않은 이성간의 관계에서 억압받던 여자는 결국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 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난다는 것이 플라이서의 소설 내용이다. 이러한 서두는 「네 번째의 죽음」의 큰 틀이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벌어질 것을 시사한다. 더불어 인용된 소설의 남녀주인공들이 작가라는 것과 「네 번째의 죽음」속 일인칭 화자 '나'와 친구인지 누구인지 아무튼 가까운 '그'라는 사람이 글을 쓴다는 설정도 공통적이어서, 독자는 「네 번째의 죽음」에서 남녀의 지배관계와 글쓰기의 문제가 주제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인칭 화자 '나'와 '그'를 두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는 소설의 주체로서 그녀의 시각에서 남과 여 각각의 세계가 그려진다. 이들 두 세계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세계의 양극단으로 분리 되어있다. 그들은 비슷한 날에 (사실은 한 날에) 태어나고 지적인 교육을 함께 받으며 자라났음에도, 그의 지성은 명철함과 합리성으로 그녀의 지성은 표현하지 않고 적당히 감추어 두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회적 분위기이다. 여성 고유의 생물학적 특질을 보는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는 모범과 질서와 선행의 세계 속에 있어, 그녀가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무질서함과 산발성과 초보성은 늘 그의 비난대상이 된다. 남과 여 이원의 세계는 그녀에 대한 그의 힐책으로 소통될 뿐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더욱 자세하게 들려주기 위해 다섯 가지 에피소드를 소설 속에 삽입해 넣은 액자소설이다. '독서-글쓰기-싸움-병-죽음'의 에피소드가 차례로 진행된다. 다섯 단계의 내부이야기는 (독서-글쓰기를 '생'으로 묶어) 자연의 법칙인 '생-노-병-사'에 병렬 할 수 있다. 각각의 주제 속에서 그녀와 그의 인물성향이 나타나고, 에피소드가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남성적 세계 안에서 여성의 글쓰기 문제와 작가로서의 창작의 문제는 '실존(삶)'이라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음은 액자소설 속 에피소드의 내용이다.


<독서>

그는 친구와 관념의 차이를 보이며 논쟁을 한다. 그와 친구가 서로를 반박할 때, 그는 혁명적, 반항적, 이방인적 태도를 보인다. 그는 친구들과 멀어져 갈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고수한다.

독서의 문제로 그녀와 그가 티격태격 할 때, 그는 평생 주워 읽은 모든 것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236)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그녀는 너무 많이 읽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가 없다.

 


<글쓰기>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다. 독서를 한 후 그와 친구와의 토론에서 이데올로기의 색깔이 드러난 것처럼, 그의 글쓰기도 그 시대의 문단에서 요구되는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담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글에 타인의 글이 섞이는 것,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에 대해 고민한다.


<싸움>

그는 자기 스스로 창안한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그녀를 힐난한다.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게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 중독.(241) 결국 사랑에 빠질 듯한 그녀에 대한 힐난이기도 하다.


<병>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정신의 일산화탄소중독은 그녀의 신체적 병으로도 나타난다.

이 에피소드는, 소설 후반부에 그녀가 바흐만 Ingeborg Bachmann(1926~1973)의 작품 『말리나 Malina』의 여주인공이 벽 속으로 사라지며 자살하는 것을 패러디 함의 전조이다. 그녀 삶이 소설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든다. 픽션과 논픽션이 혼합되는 것이 문제라는 소설창작의 문제는, 역으로 그녀 삶(논픽션)과 소설(픽션)이 혼합되는 문제와 교차된다.


<죽음>

그와 그녀는 남성(작가)의 문학작품 속에서 '대상화된 여자'(245)에 대해 토론한다. 대상화된 여자를 두둔하는 그녀를 그는 '골통나부랭이들'(246)이라고 비난한다.

그녀가 작품을 처음 썼을 때 작품에 제목을 붙일 수 없는 것에서부터 그는 그녀를 비난해왔다. 그는 그녀에게 규칙적이고 표준적인 글쓰기 과정과 내용의 논리 정연함과 개연성, 그리고 그 안에서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완벽한 픽션을 창작하기를 요구해왔다. 그는 그녀 앞에서 곧 질서이자 상징이자 규칙으로 군림한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녀는 그가 제시한 지배적 글쓰기 체계가 그녀의 창작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

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 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244)

 

이 단계에서 그녀가 창작하는 이유도 드러난다. 그녀는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246)으로 창작을 한다. 창작의 문제가 실제 삶의 문제라는 것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면서 군림해온 그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면, 자신이 사라지는 수 밖에 없다고 다짐하며 말리나의 죽음을 패러디 한다.


삽입된 다섯 개의 에피소드에서 남성의 규칙을 여성에게 내면화시키려는 '그'의 모습과 그와의 상호관계에서 억압받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글쓰기라는 모티브를 통해 심화되었다. 주지할 것은 그녀가 빛나는 상상력과 창작에의 열정과 상상력을 필력으로 옮길 수 있는 지성을 갖추었음에도 상징적으로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상황과, 일인칭 화자인 그녀가 내레이터로서 고백적 에세이의 '글을 쓰고 있다'는 모순적 상황이다. '픽션'과 '팩션'의 문제를 창작의 고뇌로 안고 있는 그녀의 글쓰기 문제는 글을 쓰면서도 쓰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며 소설을 써내려 가는 그녀 삶 자체다. '생-노-병-사' 삶의 법칙을 글쓰기에 대위시켰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233)를 부렸다. 세계문학사의 남겨진 고전명작들의 작가들은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전통과 정통을 그의 전유물로 만들어 글을 쓰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이야기를 소설에 팩션 형태로 용해시키며 '여성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용납 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소설에서의 개연성(233)이란 남성 본위의 가치 판단 하에서의 원인과 결과의 총체성에 다름 아니다. 한편, 그녀는 무작정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237)하고 자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조적 정신을 발현시키기 이전에 기계적으로 가부장적 사유체계로 점철된 대가들의 글을 읽었고, 남성의 전유물로 구성된 외부세계의 틀에 맞추어 글을 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표면적으로 그녀가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정신적인 작업을 규정화된 조건에 맞출 수 없는 데 기인한 자기비하이다.

그녀는 기존의 전통과 정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 한 후에 생겨나는 자의식을 비정통적이고 불분명한 척도라 생각해 부유하고 있다. '생물학적 성별에 의해 가늠 지어진 사회적 성 차별의 이데올로기  성 역할의 내면화  여성의 자의식의 발현을 향한 욕구- 욕구발현의 실패- 주체로서의 자아 정립 실패'의 과정이 그녀의 글쓰기 문제에서 나타난다. 상식적 '글쓰기', '언어'라는 것이 남성들의 전유물이며, 이러한 가부장적 사유체계의 지배 속에서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언어, 여성의 자아는 억압되어 왔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단계 <죽음>에서, 그녀가 이와 같은 상황을 깨닫고 자살을 연출하는 것은 큰 전환점이다. 그런데 뒷방 서랍 속에 자살의 형태로 가두어 버린 '나'는 남성의 규범에 얽매인 '외부적 자아'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이고픈 원래의 나'이다. 그녀는 '자신의 방'의 종이쪽지들, 물건들을 가리키며 "택배 방"(251)이라고 일컫는다.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쓸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녀이지만, 그 곳에서 아무것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자기만의 방'이라고 생각했던 그 공간은 여성에게 주인이자 절대자로서 행하는 남성들의 물건들(택배)로 오염되어, 그 방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 수 없다. 비관적인 상황에서, 그녀는 이제 '나'를 버리고 '그'가 되기로 한다. '그'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면서 다만 내면화 되어 일인칭 화자였던 '나'는 '그'에게 투항한 것이다. '그'가 기실은 남성적 질서 속에서 능란하게 적응하고 있는 건강한 여자임이 마지막에 언니와 남편의 등장에서 확인된다.

 

「네 번째의 죽음」은 바흐만의 『죽음의 방식들』 연작 3부작에 이은 네 번째 죽음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부작 중『말리나』와 외부액자 속 '나'의 이야기, 액자 속 내부 이야기는 삼중의 메타픽션 구도를 이룬다. 『말리나』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남녀관계와 문학세계의 불평등성, 늘 훈계하거나 야단치는 남성의 모습, 여성의 정신세계와 실존을 무시하는 남성상 등이 차용되고 있다. 말리나의 정신이 남과 여로 분열된 모습은 남성적 세계 안에서 원래의 자신이기를 바라는 여성성의 발현으로 이해되는데, 결국 말리나의 여성성이 살해(강요에 의한 자살)된 것처럼,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도 같은 형식의 죽음을 취한다.

여성이 결국 아무런 발전도 이룰 수 없다는 결말은, 이 소설의 자서전적 성격과 더불어 남성들의 발전교양소설의 내용과는 대치되는 것들이다. 기존의 문예학은 여성들의 자기산출적인 텍스트들을 폄하해왔다. 자기고백적 성격, 줄거리의 부재, 주인공의 비 발전성 등은 여성의 자기고백적 텍스트에서 보는 일부 특징이다.


자서전적인 것의 혼합, '삶'에의 천착 그리고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삶에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 출

판의 소망 등은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한에 있어서 문학사 서술에 의해 통속성이라는 낙인이 찍히

게 된 문학표지들인 것이다.1)


페미니즘 문예학자 뷔르거 Christa Brger는 여성의 글쓰기를 삼 단계로 설필한다. 첫 번째 단계는 19세기의 요한나 폰 쇼펜하우어나 샬로테 폰 칼프 등을 예로 들어, 여성들이 기존의 제도 문학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소피 메로 등이, 완전히 비고전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일기 책과 편지 글을 통해 소위 '고급'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는 요구를 따르지 않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카롤리네 슐레겔-쉘링, 베티나 폰 아르님 등이 글쓰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들에 의해 산출되는 자아에 대해 자기 실현을 추구하는 단계라 한다.2) 페미니즘 문학사에서, 세 번째 단계는 여성의 글쓰기가 삶과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은 또 다른 미학적 실천3)으로 실행되어 온 시기이다.

뷔르거의 견해에 따르면, 「네 번째의 죽음」의 그녀는 위의 세 번째 단계에 있다. 글을 쓰지 못한다고 자기를 비하하는 그녀의 생각은 기존 문예학적 입장에 기인한 것일 뿐, 실제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한다. 그와 그녀의 글쓰기에 대한 알력다툼은 기존 문예학의 전통에 반하는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문제로 확대되어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그녀가 글을 쓸 수 없다며 상징적인 자살을 감행하고 체념하는 것을 비극적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 여성고유의 것을 표현하기 위한 규범이 부재한 현실을 비관하고 그 상황을 기술하는 것이 부지 중 페미니즘적 글쓰기의 전통을 따르는 '그 여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
1) 레나 린트호프, 이란표 역: 페미니즘 문학이론, 인간사랑, 1998, 110쪽 재인용.

2) 참조 : 앞의 책, 113~114쪽.

3) 참조 : 앞의 책, 110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08. 9. 1. 23:30

[한국소설 2008년 9월호]

번째의 죽음


                     

라우렌츠: 앉아서 써 봐. […]

여자는 질문을 받으면, 질문으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질문을 받으면, 즉시 대답해야 한다.

여자는 라우렌츠의 생각을 생각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는 심한 말로 라우렌츠의 문장을 끊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적당한 장소에서 말할 줄 알고 또 침묵할 수 있어야 하고 라우렌츠를 사랑하고 착하게 대해야 한다, 그가 비록 거칠더라도 말이다.

이걸 자주 읽는 거야, 알았지.

 


이 글의 마지막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극중의 라우렌츠(남자)와 여자는 작가죠. 집에 들어앉은 여자는 혼란과 무기력에 빠져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결국 여자는 “이젠 결코 다시는 잡아먹히지 않겠어요.”라고 말하며 남자를 떠납니다. 글을 쓸 수 있었냐고요? 우여곡절 끝에 겨우 썼죠. 적어도 남자의 글보다는 훨씬 의미 있게 언급이 되는 작품들이었죠. 그러니 근 한 세기 전 서양의 이 작품이 여기에서 인용되겠죠. 


제 이야기를 할 차례군요. 나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얼핏 골빈 여자들에 속합니다. “적당한 장소에서 말할 줄 알고 또 침묵할 수 있어야 하는” 틀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죠. 더구나 순간의 감정에 잘 휩쓸려서 조급하다는 핀잔을 듣곤 하죠. 조급하다 - 그 말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그것을 하필 나와 가장 가까운 그가 모릅니다. 그는 나랑 생일이 비슷합니다. 그럼에도 남성들의 전유물인 이성과 합리성과 또 모든 명철함을 가졌기 때문에 늘 잘난 체를 합니다. 우리의 관계는 일찍 서로를 발견한 셈이지만, 마찰은 자라면서였죠. 중학교 때, 여전히 잘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거즈와 반창고를 대고 다니던 어느 날이었죠. 난생 처음으로 팔꿈치나 무릎이 아닌 속옷 깊은 곳에서도 피가 흐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란 어느 날, 그는 퍼렇게 날 선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소 비웃음을 머금은 채, 휑하니 돌아서 나가는 그는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빠져나가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분명 여름날이었는데도 그가 떠난 자리로 창문을 통해 전해오는 공기는 얼음장 같았으니까요.


나: 이 첫 작품에 난 제목을 붙일 수가 없었어.

그: 제목이 없음 무슨 시. 제목이 없이 주제가 나오며, 주제가 없이 시를 쓸 수 있다고!

나: 처음이라서.

그: 넌 그냥 시를 쓴다는 폼을 사랑해서지! 생각부터 가다듬어야 했어. 생각이 있어야 글이 나오지. 글쓰기 과정은 단어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문장구성과 단락 나누기 등에서…….


제목이 있을 자리에 “무제”가 뭐냐 라는 질책에서 시작하여 그는 정말로 내 첫 작품을 난도질했답니다. 그 버릇이 평생가게 된 거죠.


그: 자 시작해보자. 단어들을 준비해. 핵심단어들을.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을 것 아냐. 그것들을 문장으로 연결해 내는 거야. 문장의 유형을 결정해, 서사와 묘사를 구분해야지. 원인과 결과는 소설이라 해도 개연성을 위해 필수적이지.

나: 지금 시를…….

그: 담엔 소설도 쓰겠달 것 아냐! 개연성이라면 우연에서 필연을 볼 수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꼭 단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그러하리라고 생각되는 만큼의 가능성 말이야.

나: 참인 것 같은 거짓말?

그: 뭐 그 정도로 이해하든지. 논리학에서는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를 수량적으로 잴 수 있는 경우만을, 철학적으로는 확실성의 정도를 말하니까. 개연성은 어떤 논증의 전제와 결론 사이의 특별한 관계라…….


어렵사리 “개연성”의 고개를 넘었지만 아직 멀었죠. 그는 아는 것도 많았거든요. 문장들을 멋대로 자라게 내버려둬선 안 되지. 단락이라는 큰 그림을 구상해 둬. 섣불리 정의를 내는 것은 문학작품에선 금물……. 

그는 세계문학사에 남은 명작들을 독파하며 은근히 여유를 부렸죠. 그래도 난 그가 고시 쪽을 택할 것이라 믿었어요. 사법이건 행정이건 또는 외무이건. 어쩌자고 문과대학엘 진학했는지, 그건 지금도 모를 미궁이랍니다. 허영이었을까요? 뭐 정신적인 일에 탐닉한다는. 일직선의 성공을 얕잡아 보는 허영? 다음 몇 토막글은 우리의 숨 막히는 이야기랍니다.


*


독서


그: 독서로 우정을 깨긴 싫구나.

친구: 독서란 원래 우리 머리통을 깨부숴야 되는 거라며. 네 입으로 안 그랬어? 대단한 작가의 말이라고.

그: 건 지금 상관없고. 넌 그러니까 “반항적 인간”을 비난하는 거잖아.

친구: 그럼 넌 가차 없는 혁명제일주의를 단순무식하다고 내몰겠다?

그: 카뮈작품이 그런 말 아닌 것 너도 알잖아, 왜 억지야? 한 발 물렀다고 혁명 끝내자는 것도 아닌데. 생각해 봐, 볼셰비키혁명의 정당성을 위해서도 그런 반항적 인간이 더욱 요청되는 것 아니었겠냐고.

친구: 언제부터 카뮈로 돌아섰나. 혁명 대신 반항? 부조리? 웃기시네. 극한상황에선 정당한 목적만이 정의로운 것.

그: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믿을 순 없어.


이건 『정의의 사람들』을 두고 벌어진 틈이었다. 이런 대화는 흔했다. 난 사실 대학시절만 해도 그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 경계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충분히 지적이고 게다가 사려 깊었다. 섣불리 연애한다고 마음을 내놓지도 않았고, 이슈에 따라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데모에도 동참하지 않을 만큼 줏대도 있었다. 그가 정과 혈기에 넘치는 친구들을 잃어가는 동안에도 난 걱정도 비난도 하지 않았다. 친구란 원래 남이고, 남이란 다른 존재이고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이 없는 점에서는 우리는 무척 닮았다 싶었다.


독서목록에 스따브로긴이 등장했을 때 친구들과의 상황은 몹시 나빴다. 친구 하나가 그를 사실은 말 뿐인 퇴폐적 스따브로긴에 빗대어 비난했을 때, 독서회의 우정은 송두리째 위기에 처했다. 항상 굿이나 보던 나의 생각으로도 그 부분에선 친구들이 좀 심했다 싶었다. 그가 얼마나 금욕적인가를 친구들이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기름진 맛있는 음식을 죄스러워 하는 것, 그가 검소한 차림을 중시하는 것들을 다들 몰랐다. 스따브로긴은 그에겐 상처였다. 그는 한 동안 정체성 위기에 빠졌다. 그는 누구이어야 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오히려 무신론의 상태,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던 끼릴로프에 가까운 결벽증의 인물이었다. 자아의지의 완성을 위해서라면 회복불능의 행위도 불사하리라 믿은 끼릴로프. 하긴 그것은 그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어떤 인간의 모습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악령』은 우리들의 터부가 되었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는 소설들 모두를 어느 정도는 이해했냐고? 천만의 말이다. 줄리앙 소렐의 터무니없는 성공집착이나 애정행각은 물론, 레날 부인의 진정한 사랑도 도저히 알지 못했다. 에마 보바리의 충동은 차라리 저열하다고, 별 증오심도 없이 남편에게 비소를 먹인 테레즈 데께루의 무감각은 어불성설이라 간주했다. 난 소설들을 그저 읽어치우기에만 급급했다. 사람이 쓴 글을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못 참는 것에 불과했나? 책도 중독이 된다.


독서 때문에 그와 티격태격하는 것은 늘 일상에 속했다. 『죽음의 방식들』 3부작을 놓고는 한참 심각했다. 여자들이 남자들로 “인해서” 죽는다는 내 생각에 그는 화까지 냈다.


그: 뇌진탕과 폐렴이라는 사망진단은 뭔데! 세 번째 죽음은 죽음도 아니야, 승복일 따름이지.

나: “그것은 살인이었다.” - 이 마지막 문장은 뭔데?

그: 여자가 스스로 사라진 장면에서 어떻게 그 자구만을 고집해? 그만 왈가왈부하고 네 것을 써보라니까. 평생 주어 읽은 모든 것들을 버릴 때라야 네 글 한 줄 쓸 수 있을 걸.

나: 악담은.

그: 악담이면 어때서, 바른 말이면 바른 거지.

나: 바르고 바르지 않고, 그게 그리 쉽나?

그: 내 말이 아냐, 그건 정설이지.

나: 정설을 누가 만들었는데? 것도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을 것 아냐?

그: 정설과 사설도 구별 못해? 사설, 사삿사람의 의견이나 중요시하는 버릇이 어쩌자고!

나: 나도 사삿사람이니 그렇겠지.

그: 글을 쓰겠노라 늘 꿈을 꾸는 건 뭔데? 마냥 읽어대기만 하고, 여차하면 이런 저런 글귀나 끄집어내고…….


그렇게 무작정 읽은 것은 사실이다. 세상의 이름 있는 소설들을 섭렵하고서야 내 글을 시작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막연한 준비심에 불과했을까? 부수적인 효과도 짭짤했는데, 그땐 책 좀 읽는 애라면 괜찮은 프리미엄이 따라붙는 시대였었다.


글쓰기


정작 글다운 글쓰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는 신들린 듯이 진력을 다했다. 하지만 학보사에서 거절당했고, 신춘문예도 두어 번 탈락했다. 그러더니 또 후다닥 글쓰기를 중단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카프카도 아니라면 누구도 더는 글을 써서는 아니 된다고. 이 무슨 황당한 궤변인가. 그래서 내가 슬며시 끼어들기 시작했다. 박경리, 박완서는 왜 아냐? 수지와 수인(오목)의 이야기만으로도? 라고 반문하면서. 나는 어쩌면 그의 탈락을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이데올로기에 충실했을 그의 글은 이 시대의 문단에서 한편으론 요청되었을지 모르지만, 그가 두들기는 문은 정반대의 색깔이었으니 말이다.


색깔? 그런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아무런 빛도 아닌 회색이었을까? 그러는 동안에도 세월은 흘렀다. 밥을 해결할 직업도 갖게 되고, 연애(?)랑 결혼도 하고.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오늘 하려는 이야기와 무관하다. 생략법은 특히 그가 좋아한 화두였으니, 그 또한 이런 생략에 찬성일 것이다. 진부함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보고를 생략한다는 것.


어쨌거나 생이 더 이상 진부해질 수 없을 만큼 아스팔트바닥 위를 맴돌고 있을 때, 내가 옛날의 종이들을 헤집어 내기 시작했다. 책상으로 썼던 낡은 교자상아래 밀려들어간 먼지투성이의 원고들은 가장자리가 열 번 백 번의 물걸레질에 밀려 짓이겨 졌지만, 용케도 누렇게 뜬 내용물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나 치기어린 글들인지 쑥스럽다 못해 우습기까지 한 것들. 누구라도 제 글을 읽는 것은 고문이다. 어쩌면 살인이다. 내 경우엔 심했다. 어떤 글에 비해 보아도 내겐 독창성이라곤 없었다. 너무 많이 읽은 탓에(?) 못 쓰는 나. 그가 옳은 것 같다.


처음엔 내가 빛바랜 원고지들을 넘겨보다 지쳐서 일이 그만 시작도 없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세상 따라서 완전히 생경한 원고지, 줄도 없고 마음대로 변하는 백지화면에 글을 “삽입/수정”하게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우선 원고지에 대고 훈수 놓던 일을 못하게 되었다. 내가 <내 글>을 암호로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신나는 세상.


그가 또 모르는 일로서 이 이야기를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 고백할 것이 있답니다. 나는 누군가 내게 보낸 보배 같은 글귀들을 싸구려 감상적 픽션에 섞어 짜 넣고 있었죠. 곧 사라져버릴 듯이 연필로 쓰인 것, 또박또박 예쁜 팝글씨로 쓰인 것, 편지지도 아닌 화면으로 도착한 것, 더 작은 지우개만한 화면에 떠오른 것들까지, 순간 되살아나는 타인의 글들. 타인의 글을 내 글에 섞어 쓰는 짓거리. 그 짓에 대한 가능한 변명은 오직 하나,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그 몇 짧은 순간들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내가 죽은 다음에까지도 세상에 흔적으로 남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나는 악마다. 그 조각글들의 주인에게는 악마다. 나는 소설을 시작한다면서 마음 한 구석으론 기껏 일기를 쓰는 수준에 머물었나 보다. 픽션 또는 팩션에 관련한 괴로움은 여전하다. 나는 물론 내 주인공을 창조하여 실존인물과 섞어 놓는다든지 해서 실존인물을 모욕하는 일 따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실존인물의 한 작은 조각을 잘라내어 창작된 인물의 어느 부분에 끼워 넣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실존인물은 그렇게 됨으로써 생명 한 조각을 도난당하고, 창작된 인물을 독창성을 잃는다. 윈-윈 게임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 세상에서, 둘 다 망하자는 싸움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싸움


너 죽고 나 죽자! - 그렇게 싸우는 사람들도 그건 그냥 하는 말이다. 마음속으론 ‘너 죽고 나 살자!’라고 싸운다. 그와 나는 죽자 사자 싸우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그가 좀 잘난 체를 하는 편이라서, 내 우정이나 사랑의 장면에까지도 끼어들곤 한다. 그의 충고가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의문이다. 이렇다 할 우정도 사랑도 쌓아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 남편을 또는 아내를 버려두면서 까지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달려갈 인사가 있는가? 세상 친구들의 우정을 다 버리고라도 아내 또는 남편의 사랑에 매달릴 것인가? 어느 쪽도 경우의 수에 해당하지 않으니 모순이다.


쪽지의 글자들이 춤을 추듯이 살아난다. 퍼즐조각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면서 풍선처럼 바람을 먹은듯하다. 그것들이 다시 한꺼번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검은 바늘들이 되어 내 가슴으로 향한다. 그렇게 무수히 쏘아져 내게 꽂혀버린 바늘 끝에는 독이 묻었을까? 헤집어 뒤집어 보아도 보이지는 않으나 녹아버린 내 가슴 한 자락.


그가 읽을 수 있었다면 당장에 태클을 걸 것이다. 네 이야기를 쓰라는 게 아니잖아. 네가 창안한 이야기라야 한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암호 때문에 읽지 못한다.


헤어지기 30초 전, 어두운 밤길. 차에 타려는 동작으로 몸을 구부리려는 찰나, 그 손이 내 팔을 잡는다. 가볍게도 아니고 너무 무겁게도 아니게. 알맞은 무게로 알맞은 온기로 팔을 잡는 손. 5초, 10초…… 나는 그대로 좌석으로 몸을 내린다. 아 아까운 10초. 또는, 그 오른 손 바닥 2/3쯤이 내 왼쪽 손등에 머문 3초, 언젠가의 3분을 30분을 불러내는 마술……


걱정할 일은 아닌 것이 손의 주인과 팔의 주인, 또는 오른손의 주인과 왼손의 주인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15%쯤 실존인물이고 누가 30%쯤 창작인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그는 내 글을 보지 않고서도 내가 뭘 쓰고 있었는지 아는 게 참 희한하다.


그: 그 순간의 그 마음의 활자화를 당사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잊지 마. 넌 차라리 화석화될지라도 기념물을 원했으나, 마음이란 것이 살아서는 화석이 되는 게 아니지.

나: 알고 있어, 주어 담을 수 없는 물인 줄.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채로 누군가가 누군가의 산소가 된다면, 그게 그리 나쁜 일이겠어?

그: 아니지, 네가 산소라고 들여 마시는 그것이 네겐 일산화탄소야. 일산화탄소중독.

나: 연탄가스 중독?

그: 그래, 일산화탄소.


일산화탄소중독.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두통에서 시작하여 현기증과 이명.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누군가를 생각하면 두통이 일고 현기증이 인다. 희미한 한 두 마디가 귓속에서 웅얼거림이 되어 이명 현상이 생긴다. 무슨 말인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 그 사람의 면전에서 홍조가 생기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할 뿐. 일산화탄소중독 증세 중엔 홍조에 이어 발적도 따른다고 했다. 마음처럼 축축한 날, 이 두드러기가 발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호흡은 가늘고 불규칙해진다.


누군가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부정맥이신가요?

(속으로만) 부정맥이라고요? 그래요, 가슴이 제 템포에 맞춰 뛸 수 있을 리 없죠.


코를 골게 되는 증상을 제외하곤 영락없는 일산화탄소중독 그대로다. 저체온도 그렇다. 누군가 앞에서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피어난 홍조도 아무 소용없다. 누군가의 냉기는 상상을 절한다. 몇 미터 밖까지도 유효하다. 평소의 체온을 유지할 수도 없을 만큼 그 냉기는 사람을 얼리고 만다. 그러다가 호흡곤란이 오는 줄도 모르는 사이 호흡이 멈춘다. 일산화탄소중독에서처럼, 정지된 감정은 호흡곤란을 일으키다가…….



정신과 육신은 하나라고 한다. 평소에 의사는 연령에 비해 많이 촘촘한 젖이 오히려 약간 불안한 형국이라 그랬다. 의례적인 정기검진에서 젖이 아닌 갑상선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1㎝에 못 미친다지만 기분 나쁜 이상한 물체임엔 틀림없다.


의사: 조직검사 소견은 괜찮습니다. 콜로이드갑상샘종이라고.

나: 괜찮다면, 수술 그런 것…….

의사: 아 그 염려는 안하셔도 되겠습니다.


이듬해 봄엔 간헐적이지만 참을 수 없는 두통이 계속되었다. 고개를 숙여 밥상을 내려다볼 수도 없었다. 검사는 아프고 길어만 갔다. 접형골이상정체낭종. 두통은 간헐적이지만 멈추지 않는다. 또 한 해가 가도 통증은 여전하다. 서울로 검사를 옮겼다. 똑 같다. 곧 죽는 건 아니란다.


다시 이태만의 초봄, 무서운 꿈에 놀라 종합검진을 받기로 했다. 갑상선기능저하. 위가 가진 대여섯 가지 병적 증상. 담낭의 용종 두세 개. 간의 물혹. 왠지 불안했던 췌장은 아니었지만, 우와! PET 검사를 했다. 죽고 싶지 않구나. 두 해 봄이 지났지만 그 상태를 유지한다. 매번 검사 갈 때마다 알 수 없는 냉대를 받는다. 예약용지를 가져가지 않았거나 무턱대고 이름을 대려다가 그런다. 종합병원에선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몰라서다. 병원의 나는 여섯 자리인가 일곱 자리의 숫자다. 숫자가 인격적인 감정을 가지면 곧 불쾌한 일을 당한다. 서라면 서고 가라면 가고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한다.


가장 금기는 왜? 라는 질문이다. 그 답은 미리 나 있다. 아프니까. 아픈 죄인이니까.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린 죄인. 무엇보다 자신의 주인공들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하는 죄인. 그는 병이란 건강을 해치는 생활습관 탓이라고 나를 나무라는 눈빛을 한다.


죽음


병의 다음 단계는 죽음이다. 물론 병과 관련 없는 죽음도 더러 있다. 대량죽음들이 그렇다. 예기치 못하기로는 교통사고가 가장 흔한 죽음이고, 아니 자연재해도 있다. 쓰나미와 지진들. 그건 내가 감히 기술할 범위를 넘는다. 그 의미와 무의미를, 그 우연성과 필연성을 기술할 위인들은 따로 있다. 글을 쓴다고 다 같지는 않은 법이다.


규칙들을 자신의 규범으로 삼는 인간은 몰취미하거나 질 나쁜 작품을 내놓지는 않겠지, 법규나 복지를 모델로 삼는 자가 참을 수 없을 이웃이나 특별한 악인이 될 리가 없듯이. 그렇지만 규칙이란 자연의 진실한 감정들과 그 진실한 표현을 망치고만다고 말해도 될 게야. 


그렇게 말한 위대한 작가가 있었다. 벌써 200년도 전에, 그것도 스물 몇 살에 쓴 작품 속에서 그런 말을 했다. 그러니 위대함의 크기는 글쟁이들 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이렇게 말한 주인공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실연과 자살이라는 세기적인 유행의 틀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정말 200년쯤 지나서도 지치지 않고 죽음의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우리가 정말 심하게 싸운 건 앞에 말한 『죽음의 방식들』 때문이었다. 실제로 한 여자는 뇌의 부상으로, 다음 여자는 폐렴으로 죽는다. 처음 여자는 정신과의사인 남편과의 불화와 증오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웃음, 부드러움, 기쁨의 능력들을 박탈당한 채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을 받았다고 느낀다. 여자는 이전의 다른 여자들이 왜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을지 놀라워하면서, 자신이 세 번째 아내로서 자신을 수정해가는 일에 더욱 놀란다. 결혼은 양성간의 투쟁이다. 아랍 어딘가를 거치는 힘든 여행 중에 여자는 뇌를 심하게 다쳐서 죽는다.


나: 그건 단순한 뇌진탕이 아니야. 죽음으로 “밀려간” 것이지.

그: 그러니까 일부러 넘어져서 뇌를 다쳤다고?

나: 생각해봐, 이건 패러디야. 같이 살다 헤어진 유명작가의 유명작품에서도 아리따운 여자애가 그리스여행 중에 뇌를 다쳐서 죽지 아마? 여자는 어린애 같고 그러니 열등하고, 그리고 죽는 거야. 너흰 실제로도 작품에서도 여자를 죽인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

그: 그럼 두 번째 여잔 어때? 폐병을 남편인가 애인이 옮겼어?

나: 그건 아니지만. 애인이란 작자가 여자를 발가벗겨 작품을 썼으니 그게 간접살인 아냐? 그것도 “영원히 고상하고 아름다운 여성”이길 바라는 남자들의 헛칭찬에 노심초사하는 미숙한 여자를. 여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는데 남자들은 여자를 문자화한다면, 대상화된 여자는 연인에 의해 “도살된” 것처럼 느낄 밖에. 자기 고유의 역사를 박탈당한 채 한낱 소재가 되어 대중 앞에서 진열되고 있는 것처럼. 그 기분에 공감이 안 돼?

그: 그럼 처음 여잔 정신분석가인 남편이 정신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것 그것에 가장 상처를 입었단 말이야 참? 작품 이야기 말고 한번 가정해 봐, 여자들은 만일 피부과의사인 남편이 실험적으로 젊어지는 시술을 해줘도 그렇다 할 건가?

나: 난데없이 피부과는? 픽션과 사실을 혼동한다고 나를 나무랄 땐 언제고!

그: 그 부분 취소할게. 이제 넘어 가자.

나: (어라, 양보할 때도 있네!) 좋아, 세 번째 죽음을 “살인”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또 또.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세 번째 여자는 M이라는 이름을 가진 확실한 제 자신 속으로 스며들었잖아. 이름도 없이 “나”라던 여자는 M에서 빠져나왔던, 비정상적으로 감수성이 많은 여성성이었을 뿐이야.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여자.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작가. 그런 여자가 이제 제 정신을 차리고 원래의 제 자신, 이성적인 M으로 되돌아갔을 뿐인 것. 여기서 살인이라? 게다가 네 진짜 문제는 뭔 줄 알아? 이 작가의 죽음마저 세 번째 소설의 죽음 넘어 네 번째 죽음이라 떠드는 것이지. 꼴페 나부랑이들!

나: 꼴페? 꼴통페미니스트는커녕 그냥 페미니스트도 못된다!


다만 내게서 창작이란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보상을 위해 외부에서 유발된 상처들을 속절없이 치유하는 과정이다. 나는 그 네 번째 죽음을 흉내 내기로 했다. 세 죽음의 작가가 그 세 번째 죽음을 실 인생에서 실연했듯이. 그가 끼어든다. 아니지, 그 여잔 골초였어. 침대에 누운 채 담배를 피우다 불을 낸 것이라니까!


나는 흉내보다는 패러디를 준비한다. 그렇담 그가 사라져야 한다. 그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는 나를 무시하면서 군림해 왔고, 나는 그에게 종속되어 그에게 결정권을 유보한 채 공존해왔다. 그를 사라지게 하는 일에 내가 실패한다면 남은 것은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다.


다른 이야기 하나. 교도소에 선행(?)을 하러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교도소에는 일반인의 예상대로 남자수인들이 훨씬 더 많단다. 그 친구가 이야기하기 전에도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 살인 등 중죄인 비율은 예상을 뒤엎는단다. 남자죄수들이 살인자일 비율을 그냥 대충 10%도 안 된다고 한다면, 여자죄수들이 살인자인 경우는 그 몇 배란다. 살인자 수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상과는 너무 다르다.


친구: 걸 여태 몰라? 여자들은 가정에서 대개는 억압을 당하는 관계에 놓여 있잖아. 부당한 일들, 억울한 일들을 참도록 길러졌으니까. 헌데 쥐가 완전한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지 않았어? 극한상황에 내몰리면, 억수 밀리던 여자가 상대를 죽이고 만다는 것이지. 평생 기세등등했던 강한 종족을, 자신의 남편을, 애인을, 아무튼 가까이서 그녀들을 억압해온 강한 남자를. 


나도 여자다. 내가 연출할 죽음의 패러디를 분류하자면 자살보다는 살인의 가능성이 높다. 그는 언제나 옳았고, 언제나 강했다. 멋모르고 피아노연주의 추상적 음체계에 빠져들려는 순간에는 타인의 체계를 답습하는 무의미성을 강조하여 제동을 걸었다. 지하의 미술실에서 바다그림을 연습하면서도 행복했던 순간에는 구경하지도 않은 바다를 모사한답시고 그것도 덕지덕지 물감을 발라서 바닷물을 더럽히는 맹목을 조롱하여 붓을 놓게 만들었다. 소설책을 읽고 또 읽어 외우다시피 하는 밤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긴 긴 남의 나라 이름들을 외우는 바보천치 같은 짓을 책망했다. 이름이 대수냐고. 실존한 적도 없고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태어났을 뿐인 인물들의 이름이 대체 뭐냐고.


그래도 나는 때때로 소설의 인물이 실제 사람들 보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 오래 살아? 오래 산다고 착각하는 너 때문이지. 그건 오래 산다기보다는 그냥 환영이야. 살아본 적이 없는 환영.

나: 환영은 무의미한 거야? 왜 내겐 그 환영이 실제로 살았을 많은 사람들보다 더 실제 같을까? 내가 쓰려는 이야기도 실제 같을까, 환영 같을까? 실제 같을 때 오래 사는 걸까, 환영 같을 때 오래 사는 걸까? 내 말은 이야기가…….

그: 넌 아니야. 넌 안 되겠어. 내가 할게. 네 이야기를 내가 쓸게. 약속해, 꼭 쓰겠다고. 아무리 글을 쓸 시간이 없어도. 글을 쓸 시간이 없을 뿐 아니라 네 이야기를 쓸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네, 내가 쓰겠어.

나: 왜 그렇게 선선히 봐주려는데?

그: 봐주고 싶어서가 아냐. 넌 안 된다니까. 이거 보아. 여기 네가 써 놓은 글들은 기껏 세 죽음의 양상이 무슨 학습과정처럼 기술되어 있을 뿐이야. 여전히 독후감 수준이네, 안 그래?

나: 정리해 본 거야. 그 다음에 이어서 내가 쓰려고, 네 번째 죽음 이야기를.

그: 아니 수십 년을 두고 싸워도 우린 아직 여기야? 남의 글 읽는 건 그만 하라니까. 네 뜻 가는 대로 글 나오는 대로 네 이야기만 창작하는 거야. 그게 안 되면 그만 두든지. 아이, 애초에 너랑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다. 넌 그냥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넌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것이 암호였다. 우린 상대에게 그 암호를 말하는 순간 사라지게 될 운명이었다. 암호를 내뱉은 건 내가 아니었다. 여성성은 늘 도태된다. 네 번째 죽음의 패러디도 픽션에서와 같은 패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살인이었다.”


*


남편은 평상시처럼 늦은 저녁을 마치고 귀가한다. 아내가 저녁시간에 집에 없기는 드문 일이라서 의아했지만, 전혀 없는 일도 아니어서 그냥 씻고 쉬고 그러다가 시계를 본다. 메모도 연락도 없이? 한 밤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희한한 일이로군. 별 일이야.


이튿날은 처형에게 전화를 한다. 꺼져있다. 둘이서 어딜 갔을까? 점심이 기운다. 서둘러 아내의 흔적을 뒤진다. 허나 아내의 뒷방문은 닫힌 채다. 쓰다 둔 메모지들, 원고지들 때문이라며, 아내는 외출하려면 늘 방문을 닫아건다. 연락이 된 처형이 흠칫 놀란다. 처형은 풀냄새와 흙냄새를 풍기며 들이 닥친다. 썬 캡에는 낮에 묻은 햇살이 아직 박혀 있다. 경쾌한 바지에 시원한 셔츠 차림이지만 귓불은 도톰한 풀빛 보석으로 묵직하다. 처형은 생각보다 덜 염려하는 표정이다. 얘가 또 병이 도진 거예요? 제부, 애초에 저런 작업을 말렸어야…….


다 저녁이 되어 방문이 안에서 열린다. 아내가 나타난 것이다. 한 5분 전에 방안에 들어갔다는 듯 당당한 표정이다. 왜들 그렇게 봐? 라고 묻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욕실로 간다. 외출해서 돌아왔을 때처럼 욕실로 직행한다. 그 버릇은 예외가 없다. 나설 땐 오히려 준비 시간이 짧지만, 귀가해선 화장실을 오래 쓴다. 한참 만에 말끔해진 얼굴로 소파를 기웃거리고는 곧 부엌으로 향할 태세다.


아내: 여보, 미안해요. 얼마나 잤는지. 언니, 공치다가 왔구나. 배고픈데 뭘 빨리 만들지?

처형: 나 일어서야 해, 이리 좀 와 앉아. 어쩌자고 제부 걱정하게 만들어?

남편: 어디 걱정 정도인가요? 어떻게 꼬박 하루를 게 박혀있어? 뭘 좀 먹기는?

아내: 그냥. 일은 진척이 안 되고, 주말이 되었나 싶고, 실컷 잠 좀 자려던 게. 사실 비몽사몽으로, 그래도 한결 개운해요.

처형: 그래도 그렇지, 방에 틀어박혀 있더라도 알리긴 해야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말없이 사라진 줄 알았지 모두.


*


내가 가끔 완전히 변덕인 것을 동기간의 정으로 언니가 제일 못 참아 한다. 혼란된 나와 그의 싸움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건 사실 언니뿐이다. 언니는 부엌으로 향하는 내 꽁무니를 따르며 눈을 치켜뜨며 묻는다.


언니: 그런데 너 누구야? 어느 쪽으로 갔느냐구, 그 장난 때문에 내가 다 아슬아슬해 죽겠다. 네 남편 좀 그만 괴롭혀라.

그(나): 남편을 괴롭혀요? 직장 다니고 깔끔하게 의식주 마련하고, 틈틈이 내 일하는 것이 누굴 괴롭히는 건 아니죠.

언니: 아 또 논리 시작이구나. 그럼 그쪽으로 가버린 게야? 너 그럼 제발 그대로 살아. 더는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나도 그쪽이 훨씬 편타. 반듯하고 질서 있고…….

그(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염려마세요.

언니: 왜 염려가 안 돼? 너 보면 뻔해, 네가 어질러 놓은 것. 사람이 방구석에 들어서 그리 지내다니. 종이쪽지들에 벗어던진 옷가지에 슬리퍼는 또 왜 이리 짝으로 굴러. 아무리 너 혼자 쓰는 방이라지만.

그(나): 됐거든요. 그냥 택배 방쯤으로 해 둬. 택배 받은 것, 택배 보낼 것……. 아직 완전히 내 것이 되기 전의 물건들이 쌓여 있는 창고.

언니: 게서 네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노라고 눈물 글썽일 땐 언제고! 택배는 또 무슨 암호야?

그(나): 그게, 물질이란 게 나의 소유라는 것이 좀 애매하죠. 내게 온 선물도 상자를 열어서 내가 나와 관련시킬 때만 내 것이 되죠. 기차가 서울 부산을 아무리 오가도 서울 것도 부산 것도 아니듯이 말이야. 내 밖에 있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택배처럼 왔다가 갔다가 그러는 것이죠.

언니: 뭐야, 그 궤변들 보니 정말 본업에만 충실하기로 작정한 것이구나. 잘 되었네.

그(나): 아니 뭐. 남아있는 저 작업들은 잘 마무리할 거요. 다음 일은 모르겠어, 저 창고를 저리 놔둘 일이 있을지. 회사일로도 벅찬 시간에, 저기 태반은 불필요한 일들이었고.

언니: 회사라고? (아니, 본업을 회사라고 에둘러 말하는 저 말투. 이 애가 이젠 그 애가 되었구나. 내가 걱정할 필요 없는 오달진 애.) 그래, 사람이 온갖 일을 다 할 순 없지. 너 좀 정신이 개운해진 듯하니, 하루 이틀 잠에 빠져도 좋은 구석이 있네.


뒷방 서랍 속에 갇혀버린 원래의 나는 사람들이 있는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언니는 염려와 다르게 당찬 내 현재의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안심을 합니다. 그렇게 우리 집을 나서는 언니는 나의 네 번째의 죽음을 서러워해주지도 않습니다. 나이고 싶은 나는 다만 네 번이 아니라 열네 번을 스물네 번을 죽었지만, 언니는 물론 아무도 더는 알지 못합니다.(끝)

 


...................................


작가의 말 (창작노트)


글을 읽고 또 읽다가 겨우 글쓰기를 시작한 사람은 부지중에 대선배 작가들의 글을 훔칩니다. 동서고금 위대한 작가들의 모범은 남성들이 태반입니다. 새내기가 만일 여자라면 더욱더 모범들에서 탈피하려고 무진장 애를 씁니다. 형편없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것이고 싶어서죠. 그러나 오랜 관습의 눈에 비추어지는 자신이 초라해져서, 번번이 대부분의 남성작가들의 현란한 모범에 휘둘리고 맙니다. 언어의 구조조차도 합리적이거나 분석적인 가치로 해부된 세상에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려는 일은 늘 좌절에 부딪습니다. 작가로 살자면 자칫 여성성을 포기해야할 위기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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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08. 5. 8. 02:10

머니날 -  어버이날!

다 커버린 아이(?)들은 제 아이들에게 어버이날 인사를 시킨다.

덕택에 4살4개월 손녀로부터 아마 그 아이의 첫 편지를 받았다.

천재다! 할머니들을 다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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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08. 2. 28. 11:56

                 ∣ 머리말                     ...............................             005

제1장   ∣ 신성로마제국 도이칠란트  .......................             021

제2장   ∣ 저무는 중세                  ..........................            052

제3장   ∣ 각성의 시대                    ........................            104

제4장   ∣ 이상의 시대                    ........................            161

제5장   ∣ 도이칠란트연방            ...........................            234

제6장   ∣ 도이칠란트제국           ............................            287

제7장   ∣ 바이마르공화국           ............................            414

제8장   ∣ 제3제국-망명의 시대     .........................            468

제9장   ∣ 전후 도이칠란트           ............................           521

제10장 ∣ 도이칠란트민주공화국    ...........................           571

제11장 ∣ 도이칠란트연방공화국    ..........................            663

제12장 ∣ 통일 도이칠란트            ...........................           846

           ∣ 맺 는 말                       ..........................           980

           ∣ 참고문헌                     ...........................           984

           ∣ 주   석                         ..........................          1014

           ∣ 찾아보기                     ............................         1166



 

표지의 글


“세상에서 가장 울림이 그득한 언어는 도이치


“독서는 다른 낯선 두뇌를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이라 했던 보르헤스는 특별히 도이치를 예찬했다. “세상에서 가장 울림이 그득한 언어는 도이치”라고 해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도이치문학은 유럽의 문학이자 세계문학의 흐름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왔다. 르네상스, 각성의 시대, 이상의 시대를 지나 근대성을 획득하는 동안 꿈을 통한 예시로서 “다른 상황”, 즉 상상력에 의해 제안된 세계를 창출해왔다. 그러면 도이치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는가?                                           - 머리말 중에서

.........................................................................................

 

8세기에 있었던 그리스도교화 이전에 도이치권에서 게르만 작가들이 있었던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은 360년 서고트의 불필라주교가 성경을 게르만어로 번역한 일, 9세기경에 풀다의 수도사가 썼을 『메르제부르크 주문』이나 작자 미상의 『니벨룽의 노래』에서부터 천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의 작품들을 가능하면 많이 들여다보려고 한다. 인류의 영원한 미궁이라 할 괴테의 『파우스트』 등 무궁한 걸작들을 거쳐, 2006년 세계를 놀라게 한 “고백”이 들어있는 그라스의 자전적 소설 『양파껍질 벗기기』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이 작품들을 다시 천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누군가가 기억하게 될 것인지는 예감도 못하는 채로.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07. 12. 1. 01:55

 

멍난 옷

                                            내 청춘에게 보내는 편지』2007 (이화에세이)

 

 

구멍이, 저기 이 옷에 구멍이 나버려서……


저물녘에 세탁소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초인종을 누르고서 어물거린다. 예고 없이 오가지 않는 것이 수년 간 이 세탁소와의 자연스런 일상인 터라 의아했다. 손에는 종이 가방을 꼬옥 움켜쥐고 있다. 부뚜막에는 국이 얹어져 있어서 나는 조금 성가셨다. 더듬거리는 말로는 옷에 아예 구멍이 나서 못쓰게 되었다는 말이고, 그 때서야 꺼낸 옷은 내 하얀 블라우스다.


그제야 감이 잡히면서 난감해졌다.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정도는 세탁소에 보내지 않은 내가 하필 처음 보는 천이라서 드라이를 맡겼던 옷이다. 면섬유인줄 알고 샀는데, 그것도 상황 때문에 어쩌다 ‘비싼’ 옷 집에서 구입한 것인데, 잘 보니 순면이 아니라 뭔가가 코팅되어 재킷 대용으로도 될까 싶은, 아무튼 얼른 보아도 복잡한 천이라서 자신이 없어 세탁소에 보낸 것이다.


여자는 계속 중얼거렸다. 다른 집 와이셔츠들 다리고 나서 같은 것인 줄 알고 다리렸는데, 다리미 대자마자 눌어가지고 그만. 보니까 새 옷 같아서…… 대신 사보려고…… 그래서 텍에 붙은 전화번호를 돌렸는데. 그런데 폐업이라니까……


처음 빨아야 했던 블라우스가 어찌하여 폐업이 된 상표인가의 내력은 좀 그렇다. 단벌을 샀기 때문에 적당히 맞춰 입기도 그랬고, 또 일터에 나다니는 경우엔 모양만 갖춘 단출한 옷들을 입기 때문에 구입하고 몇 년이 지나도록 선뜻 입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몇 년 사이 폐업이라니 의아했지만,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올 봄에는 아예 누렇게 헌 옷이 되는가 싶어서 몇 번 살짝 입은 것이다.


눋다 못해 구멍이 뻥 뚫려버린 옷을 받아들고 보니 짜증이 난다. 그러기에 과하게 비싼 옷은 내 것이 아니로구나! 부엌 쪽에서는 국물 냄새가 진동한다. 끓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럼 불이라도 줄여야 하는데……. 가만, 교양 있게 굴자. 이까짓 블라우스 하나가 뭔가. 나에게나 비싼 옷이지, 남편의 와이셔츠들을 줄줄이 세탁소에 보내는 여자들의 옷들에 견주면 이게 대술까. 기껏 블라우스는 블라우스지. 진정하자, 진정 해. 20년 넘게 살아온 아파트에서 이깟 일로 속보이면 되나…….


제가 지금 얼떨떨하네요. 일단 주세요, 주고 가세요. 불에 뭘 얹어 놓았고…… 좀 생각해볼게요.


다른 것으로 사시기라도 하라고……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요. 뭘 어쩌겠어요. 일단 주고 가시라니까요.


빼앗다시피 옷을 들여오고 여자를 내몰았지만 마음은 양편으로 무겁다.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비싼 블라우스를 망친 내가 밉고, 저자세로 굽실거리는 여자가 밉다. 국은 벌써 끓어 넘치고 있다. 넘친다, 넘친다…… 그때 생각이 났다. 내 그릇에 넘치는 복은 됫박을 넘치면 굴러버리는 콩되모양 넘치게 마련이다. 이건 내 옷이 아니다. 저 여자는 하필 나 때문에 저자세가 되었다. 평생 해온 세탁 보조가 느닷없이 엉뚱한 실수를 한 건 보조 탓이 아니라 옷 주인 탓이다. 그러다 짜증이 일면 또 다른 이유를 댄다. 그런 것 때문에 옹졸함을 보인다면 자신이 짜잔해져서 안 된다. 애써 좋은 마음으로 생각하려니 그런대로 별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세탁소여자의 처지가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운명에서 궂은 역할을 내가 아니라 그 여자가 맡아 간 것이다.


*


엄마, 제가 꼭 S.대학을 들어가게 되면 우리나라 누군가 한 사람은 S.대학에 못 가게 되는 거네요! 큰 아이가 중 3 적에 했던 말이다. ― 아니 뭐, 숫자로 따지면 그렇기는 하다만, 그럼 넌 그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S.대학을 갈 수 있어도 포기해야 된다 그 말? ― 아니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 너 그렇게 이타적인 건 좋다만, 매사를 그렇게 살자면 무진장 힘이 들게다. ― 엄마, 그게요, 이 세상에 전적으로 이타적인 사람을 드물걸요. 이타적 행동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이기적인 셈이지요 뭐.


기술시간의 숙제라나? 나무판자로 작은 책꽂이를 완성해 가는 숙제를 하느라 페이퍼 질에 팔려있던 아이는 대충 해가라는 이 어미의 말에 웃음기를 띠고 정색했다. 누가 알아요, 또 목수를 해먹고 살아야 될지도 모르니 미리 잘 배워둬야지요! 그것은 아이의 상투어였다. 누가 알아요, 또 양복장이를 해야 될지도 모르니 가위질도 잘 해야지요! 누가 알아요, 또……


아이들은 대강 물렁하게 자랐다. 남을 때리고 들어오면 나쁜 사람이고, 남에게 얻어맞고 오면 바보다! 나쁜 사람과 바보 중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형제간이라고 다툴 수도 없었겠다. 그래 겉보기엔 별 탈 없이 자랐다. 속으론 그렇게 한 말을 지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그런 걸 꼭 마음에 담아두어서라기 보다는 천성이 좀 무를 것이다. 해서 특별히 똑똑하게 자라진 못했지만, 이기적, 투쟁적으로 자라진 않았다. 어미인 내가 늙어간다고 자제심을 잃고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선 안 된다. 애들 보기 민망할 일이다.


*


세탁소 아주머니의 당황함에 빨리 면죄부를 주지 못하고 덩달아 곤혹스러워했던 몇 분간이 부끄러워진다. 서둘러 싱크대 아래 여닫이문을 열어본다. 거기 과일가게 전화 옆에 세탁소 전화 스티커가 붙어있다. 저 201홉니다. 지금 막……. ― 아 예……. 저쪽은 말을 잇지 못한다. 뭔가 호령을 기다리는 듯 숨마저 죽인다. 저, 그 옷 일 잊어버리시라고요. 생각 말고 편안히 주무세요. 그냥 걱정 마시라고요. ― 그래도 …….


아예 말을 잇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되풀이해서 걱정 말라고 말하고 나니까 내 맘이 비로소 편했다. 그런 일은 십여 분을 애탈 일이 아니다. 집에 처음 왔을 때 선뜻 걱정 말라 말하지 못한 내가 옹졸했다. 배웠다는 여자가 치졸했다. 다음 세상에 세탁소여자로 태어나서 다림질을 잘 못해서 누군가의 문간에서 고개를 숙이는 벌을 받을 일이다.


사실 누구라도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내 경우엔 이제 몇 번 입지 않은 새 옷은 오래 입어 내게 친숙한 그저 그런 옷보다 오히려 덜 아깝다. 작은 장신구 하나라도, 장신구라면 거창하지만, 실오라기로 짠 팔찌가 내게 소중한 만큼 진주귀걸이가 귀하지는 않다. 둘 다 각각 여행 기념으로 샀던 소품이긴 하지만, 특히 실오라기 팔찌는 해변의 포장집에서 산 싸구려 중에 싸구려다. 하지만 그 짙푸른 바닷물을 기억하며, 소금기 젖은 손과 입으로 ‘겨자’가 영어로 생각이 나질 않아서 순간 ‘섬씽 옐로’를 달라고 해서 핫도그를 사먹던 일을 추억한다. 나중에 특급호텔의 비치로비에서 마신 알 수 없는 음료와는 또 다른 맛을. 바가지나 쓰는 관광객이 아니라는 자존심과 굳이 핫도그를 들고 청승을 떠는 합리성의 속내에 대한 한심을.  


멀쩡한 블라우스가 못쓰게 되었지만 미련은 없다. 아무런 추억하나 없는 헝겊의 모임. 내가 좋아하는 연한 청록색의 한 줄 장식이 조금 아깝기는 하다. 소매 부분에 구멍이 났다면 반팔로 자르기라도 하지 싶다. 하지만 등 한 쪽이 아기 손 크기만큼이나 눌어붙고 아예 손바닥만큼은 구멍이니, 이제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좋은 기회가 온 것 같다. 너절한 옷걸이들이나 삼층장 속을 뒤져서 쓰레기들을 분류해 낼 일이다.


고등학교 때 가정과 선생님 한 분이 3년 째 입지 않는 옷은 죄다 버리라고 하셨다. 20년 넘게 같은 곳에서 사는 나는 이사 때면 저절로 살림이 정리되는 기회도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데이트 때 받은 스카프, 청혼 무렵 받은 머플러, 출장 다녀올 때 선물해준 핸드백들…… 30년에 몇 번 썼을까 말까 하는 소품들을 그냥 넣어둔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선물한 것들은 더욱 못 버린다. 유치원 때 만들어준 목걸이, 처음으로 접어준 여러 마리 종이학, 머리핀 세트, 손수건, 향수…… 손수건은 잃어버릴까 쓰지도 않고 보관하고, 향수는 빈 병이 되어도 포장지까지 간직한다. 합리적인 눈으로 보자면 포장지 정도는 이제는 버려도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이들이란 성장하여 갈수록 (정신적으로도) 멀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수록 ― 내가 꼭 그랬으니까 ―, 작은 추억거리는 눈물겹게 귀하다. 이제는 여기저기 쌓이는 사진들까지, 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내게는 그렇게나 소중한 것들로 넘친다. 어떤 우아한 옷을, 훌륭한 장신구를 걸쳐도 더 이상은 멋이 나올 수 없는 몸에게 이제 어떤 물건도 소중치 않다. 몸을 위한 물건들보다는 맘을 위한 추억들이 귀하다. 구멍 난 옷을 버려야 하듯이, 옷가지들 등속은 좀 솎아 내야겠다. 물건들이 비워진 자리에 더 소중한 추억들이 들어올 수 있게시리. 길어 내도 길어 내도 줄지 않는 샘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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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07. 11. 1. 23:30
나물


 문학저널 2007

 

맛있겠다, 정말. 

뿌리도 채 덜 다듬어서 아무렇게나 무쳐낸 콩나물 그릇으로 젓가락을 길게 내뻗으며 은미가 말했었다. 나도 덩달아 콩나물 가닥을 집어 들었다. 친구들이 깔깔대고 웃었을 때야, 나는 은미가 순 장난으로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맛있다는 콩나물무침 쪽으로 몰릴 때, 혼자서 진짜 맛있는 것을 먹는 수법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제일 하찮은 것이 콩나물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정말 그늘에 큰 콩나물이란 별명처럼 콩나물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콩나물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맛을 좋아할 뿐이다. 맛있는 것, 맛없는 것의 차이를 배울 나이에 나는 귀한 것과 귀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다가 가치를 혼동하게 된 것 같다. 많은 식구들이 좋아하지만 아끼는 음식접시가 할머니의 손을 거쳐 내 앞쪽으로 오면, 나는 그만 맛을 잃었다. 다져 구워서 다시 간장에 졸인 소고기처럼 진한 맛이나, 고기완자가 들어있는 버섯볶음 같은 기름진 것들은 왜곡된 애정의 표시이자 내게는 독이 되었다. 나는 비뚤게도 아무 것도 아닌 맛을 좋아할 의무를 느꼈다. 어린 시절의 의무는 습관이 되어 굳어버리나 보다. 사람들이 맛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게는 맛이 없는 것이고, 사람들이 맛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내게는 맛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미가 콩나물을 맛있다고 할 때 나는 동지를 만난 줄 알았다. 물론 그 장난기에 다들 깔깔대며 손을 놓고 주 메뉴를 기다렸다. 모처럼 섬진강변 나들이이다 보니, 둥근 그릇 속에서도 여전히 펄펄 뛰고 있는 은어쌈과 은어튀김이었다. 은미는 유난히도 펄펄 날며 날은어를 삼켰다. 난 정말 콩나물만 먹었다. 튀김은 먹을 것 같았지만 옆에서 퍼덕거리고 있는 날은어의 시체만 같아서 그것도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은미는 동지이기에는 사실 사뭇 달랐다. 우선 우리가 처음 만났던 여고 시절에는 - 아마 중학교 때도 같은 학교를 다녔겠지만 특별한 사건으로 부각되지 않는 한 어찌 동창들을 다 알고 지낸단 말인가 - 그 시절에는 은미가 단연 압권이었다. <토요일 밤의 열기>를 훔쳐보고서 곧 바로 흉을 낸다는 춤 솜씨. 원래부터 존 트라볼타의 엉덩이 같이 튀어나온 톡 튕기는 뒷모습과 그에 어울리는 발걸음은 바람소리를 일으켰다. 가발을 쓰고 디스코텍에 출입한다는 뜬소문에 놀랐던 우리들은 은미가 회장인지 이사장인지의 고명딸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때 아버지들은 잘해야 회사원 아니면 가게나 농업에 종사했으니까.

우리가 정말 놀란 것은 은미가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였다. 웬만큼 아파도 입원 같은 것은 드물던 시절이었다. 자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 땐 지금처럼 무감각한 세상이 아니었기에, 우리들은 감히 앞 음절은 발음도 하지 못하고 “미수래, 미수”라고만 입소문을 옮겼다. 병원에 입원한다는 그것만으로도 대 사건이었던 때였으니. “미수”의 원인을 두고서 (헛)소문은 바오밥나무처럼 부풀어만 갔다.

바오밥?

그래. 실제로 높이는 20미터도 넘고, 가지의 길이가 10미터도 넘는대. 구멍을 뚫으면 사람이 살 수도 있다니까.

지금 생물 시간이야? 어린왕자의 바오밥나무 말이지. 교회만큼 큰 바오밥나무는 별을 다 덮어버리고, 장미나무가 자랄 자리를 안준다고 했어. 그러니까……

그게 암적 존재라는 거지. 거대한 자본 같은 것. 지구의 외면을 깔아뭉개는 자본이 결국 지구의 내부까지도 좀 먹겠지. 환경 파괴로.

저애, 뭐야. 너도 그런 것 학습한거야? 야학에 다녀? 거대한 자본이 어때서. 난 기어코 열대를 구경하고 말거야. 거대한 바오밥나무의 숲, 거대한 풍요……


평소에 바오밥나무를 입에 걸고 다닌 것은 정작 은미였었다. 열대여행이라니, 특별한 집의 특별한 아버지들 말고는 그 당시에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데 감히 여자애 주제에 열대여행이라고? 말을 잘 섞지 못하는 나는 속으로만 은미를 비웃었다. 비웃으면서도,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부러울 것이란 생각도 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부러웠다고 해야 정직하다. 나는 여행은커녕 움직임을 피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움직임 속에는 은미의 걸음걸이며 그에 걸맞은 디스코라고 하는 춤도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몸치의 눈으로 은미를 관찰하는 것은 미움이자 경이였다.

아무튼 나는 병문안 친구들 틈에 끼어 가게 되었다. 우선 예쁜 과일과 통조림이 섞이어 담긴 바구니를 사서, 서로를 앞세우며 들어간 병실. 은미는 ‘슈미즈 차림으로’ 벌떡 일어났다. 지금처럼 환자복이었으면 더 놀랐을지, 그건 모른다. 우리는 학생 티가 아닌 ‘새색시’ 같은 야한 차림에 놀라고, 그것이 부잣집이나 아무튼 앞서 나가는 집의 여름 잠옷이라고 아는 대는 잠시 시간이 걸렸다. 하얀 속옷 위로 드러난 살빛은 얼굴처럼 가무잡잡했다. 그래서 이빨만 허연 얼굴이 더욱 어두워 보였다.

어쩌다 이러니. 왜 병이 난거야.

응 뭐, 유전이지. 울 엄마 일찍 돌아가셨잖냐.

어머니가 무슨 병인지를 오래 앓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초등학교부터 함께 다닌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집은 커도 침침하고, 그 애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 했다.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어머니 이야기를 계속 하거나 울거나 할까봐서. 다행하게도 은미는 침대에 앉은 채 몸을 흔들며 말했다. 난 좀 달라, 시집을 안갈 거니까.

시집을 안 가면 어머니와 다르다? 맞는 말일 성싶기도 했다. 어머니가 결혼과 출산의 과정을 다 거친 뒤에 무슨 병인지 발병했다면. 그렇지만 처녀가 시집 안 가겠다는 말은 3대 거짓말이라던 걸. 그 말도 나는 삼켰다. 애매한 미소만 흘렸다. 말을 내뱉기에 언제나 알맞은 시점을 놓치기 때문이다. 기껏 생각해서 무슨 말을 하려 하면, 어느새 화제는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가 있다. 그러니 뚱딴지 소리를 듣게 되거나 힐난의 눈빛을 받지 않으려면 함구다. 그냥 알지도 모르지도 않는 듯한 미소가 쉽다. 평판도 따라오니까 일석이조다.

넌 한상 열대지방을 여행하고 싶댔잖아, 바오밥나무 무성한. 그 힘으로 가겠어? 어서 나아.

그래. 우선 졸업을 해야지. 외국어대학에 진학할 거야. 여행을 하려면 외국어가 필수지.

은미, 또 너 말을 앞세워!? 다른 친구들이 놀렸다.

꿈은 자유야. 꿈이 있어야 실현이 되고 말고 하지. 난 적어도 서너 개 외국어를 마음대로 구사하며 세계 곳곳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삶을 살 거야. 정 안되면 스튜어디스가 있잖아! 키 되지, 이거 - 두 손을 펴서 얼굴을 가리켰다, 내가 똑똑히 보았다. - 되지! 아아, 날고 싶어.


그런 뒤 곧 우리는 명색 고3이 되었고, 그 나름대로 입시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정작 대학에 진학했던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급우들이 대학을 포기했는지, 그것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서울의’ 대학생활에 젖어들기에 어리둥절했다. 첫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 기차역에 내린 순간에야, 그 특권의 표시가 부끄러워 예컨대 배지나 가방 등에서 무슨 표지물들을 떼어내 감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후로 대학 친구들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아니 대학에 별 마음을 두지 않았다. 상급학교 진학의 꿈을 포기했었던 부모님을 위안해드려야 한다면, 졸업은 잘 할 계획이었다. 그 나머지는 대학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다보니 같은 서울의 대학에 다니는 4년 동안 은미를 만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가끔 통틀어 향우회 등이 있었겠지만, 내가 잘 안 나갔거나, 참석했더라도 구석 참이었던 내게 별 기억이 없던가 그랬다. 은미가 정말로 스와힐리어 - 이름도 외우기 힘든 어느 아프리카 언어를 공부한다는 사실에 우린 차라리 웃었다. 그 실력이면 영어과를 가고도 남았을 앤데, 정말 『어린왕자』를 읽고 바오밥나무를 보러 가겠다는 그건 치기였을까. 대충해도 있는 집 아이들의 사치나 기껏해야 응석이었다. 그래서 더욱 소문이 밀려 다녔는지 모른다. 긴 겨울이 끝난 뒤엔 더했다. 한 번은 은미가 봄날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는데, 그것이 휴학을 하고서 “남자 집에서” 쉰다는 해괴망측한 소리로 되어 떠다녔다.

입소문의 상대는 시골에선 제법 내노라하는 집안이었다. 큰 먹칠의 과거로 실제보다 더 유명했는지도 모른다. 사건사고를 잘 기억하는 사람들은 딸의 비극적 이야기를 잊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없었던” 일이 벌어지긴 했더란다. 반도 남단 하잘 것 없는 해수욕장에 지금 같은 인파도 아닌 한가한 때, 땡볕의 낮 시간. 총성과 함께 쓰러진 남녀. 누구는 쓰러진 사람이 셋이라고도 했다. 누구는 그냥 다같이 바다로 떠내려갔다고도 했다. 신문보도도 간결하고, 말하거나 듣는 사람들도 스스로 쉬쉬한 일. 믿기 어려운. 믿고 싶지 않은. 괜히 부풀려진?

아무튼 그 집안의 외아들은, 죽은 누이도 미인박명이라 했었지만, 정말 미남이었다고 했다. 그는 위 아래로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는데, 당당한 은미에게로 일단락이 되는가 싶었더란다. 그러던 차에 그 민망한 소문이 돌았다.

아서라, 세상에 그런 일이!

아니야, 그 애 엄마가 안 계시잖아.

그 애 엄마 돌아가신 것하고 이게 무슨 상관인데?

뭘 몰라요. 여대생이 갑작스레 휴학하고 몸을 추스르는 것이 뭔데? 누가 들을까 싶은 말이다 뭐.

그럼 왜 떠벌이는데?

떠벌이긴. 그게 정말……

소설 쓰지 마라 느들.

소설은 은미가 스스로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더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런 해괴한 소문의 실제 주인공은 다른 선배인가 후배이고, 은미는 다시 그 “미수”를 저질렀다고도 했다. 실연의 고통 때문이라고도, 떠난 남자를 위협하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아니, 복수의 방법이랬다. 글쎄. 이 모두를 나는 직접은 들은 적이 없어서 어느 것도 다 소설만 같았다. 상상이 잘 안되는 일들을 왜 소설이라 했을까? 지어낸 이야기라는 뜻이었겠지만, 세상에 지어낼 것이 없어서 처녀가 총각 집에서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지어낼까? 요즘 같으면 악플로 사람을 죽음에까지 몰고 간다니 그렇다지만, 그 옛날엔 그리들 심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눈사람 붓듯 불어난 이야기 정도였을 것이다. 구를 때마다 엄청나게 커져버리는데, 처음 알갱이는 아예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어쨌거나 휴학으로 인해 은미는 우리보다 일 년 늦게 졸업을 했다. 그리고 곧 은행에 취직했다는 소식이었다. 은행은 은미완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동색조합으로도, 보색관계로도, 어떤 식으로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얼음 같은 강물에 숭어가 뛰노네…….” 대학 시절 학과별 합창 경연에서 우리가 슈베르트의 <숭어>를 연습하는 동안 갑자기 은미가 떠올랐던 때가 있었다. 숭어는 도약력이 뛰어나 수면 위 매우 높은 곳까지 뛰어오른다. 뛰어오를 때에는 꼬리로 수면을 치면 거의 수직으로 뛰어오르며 내려올 때는 몸을 한 번 돌려 머리를 아래로 하고 떨어진다는 날쌘 물고기다. 공으로 말하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다. 이 곡의 경쾌한 멜로디와는 달리 노랫말은 권력자와 음모에 대한 아린 비판을 담고 있다. “얼음 같은 강물에 뛰노는” 이 날쌘 숭어를 낚시꾼이 영 낚을 길이 없자, 꾀를 내어 물을 흐리게 해서 낚아 올린다는 내용이다. 숭어는 주로 연안에 서식하다가 강물에도 들어간다지만, 이렇게 흙탕물이 된 강물에서 잡힌 숭어가 안쓰럽기만 했다. 우린 합창연습을 했던 4월 5월 내내 이 숭어를 불쌍타 하면서도, 일단 노래를 하게 되면 화음에 고개를 맞추며 즐거워했다. 나도 가끔 은미의 경쾌한 발걸음을 떠올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은미가 제복을 입은 직장인이라는 영상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똑같은 디자인의 제복에 갇혀서, 그 톡톡 튀는 엉덩이를 의자에 죽치고 앉아 돈을 세고 있을 장면이 떠오르자, 퍼뜩 강물에 밀려올라와 파닥이는 숭어 생각이 떠올랐다.

그 펄펄 나는 애가 은행에? 그것도 좁디좁은 고향에서?

왜, 은행이 어때서? 미모도 한 몫 했겠지만, 집안도 한 몫 했겠지.

그래, 직장 내에서도 사람들 다 휘어잡고 웃기고 그럴까? 유머 하나는……

여자애들에겐 대학을 졸업하고도 교사 아니면 별로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던 때라서, 더러는 은미를 부러워했다. 은행원들은 보통 소심하고 단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은미는 이런 저런 내기로 남자직원들을 골탕 먹이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마침 친구의 친구가 같은 은행에 다니게 되어서였다. 그러다가 서로 전근이 되었던지 잠시 소식이 끊겼다. 다들 결혼으로 갑자기 연락이 안 되거나, 심심찮게는 이민으로 소식이 아예 없어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은미의 결혼소식이 뒤늦게 날아왔다. 그냥 결혼을? 미모에 매력덩이 여행원에게 어떤 고객이 반하기라도 했담? 그러나 신랑은 서울의 어느 지점에서 동료 행원으로 만난, 너무도 평범한 상대였다. 뭔가 우리 보통 아이들에게 특별한 연애를, 특별한 인생을 보여줄 듯했던 은미의 수월한 결혼에 우리는 괜히 허탈했다. 평소에 은미의 기발한 행각에 실었던 우리의 일탈의 소망이 함께 사라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워낙 근엄하시니 별 수가 있었겠나, 그 정도로 이해하고자 했을 뿐이다. 하물며 신랑이 얼마나 근검절약형 행원인지, 그것도 뉴스거리였다. 사보에 싣는 토막글도 오직 원고료 때문에 쓴다는 위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비상한 머리에 통이 대통인, 재즈와 디스코의 여왕이자 유머의 고수가 푼돈에 쓰기 싫은 글을 쓰는 자린고비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단하고 미래를 걸 수 있을 남편감일지 모르나, 은미에겐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당시엔 여행원은 결혼과 동시에 퇴직이었다. 이제 은미가 시할머니 층층에서 시집살이를 한다? 해방의 선두주자를 놓친 우리들은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그 신랑을 존경어린 마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인물이면 은미를 들여앉혀서 살림을 하게 하나, 것도 시집살이를?


우리들 중에 시집살이로선 가장 마지막 후보였던 은미가 소도시의 한옥지구에서 시커먼 가마솥에 물을 끓여 시할머니 목욕을 시키고, 밥상은 시할머니 따로 시아버지 따로 시어머니 따로, 그리고 나서야 아이들끼리.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다 한두 번 은미가 고향에 다니러 오면 급조한 동창모임에서, 콩나물무침에 젓가락을 쑤셔대며 우리를 놀리던 그런 자리에서, 드문드문 은미의 생활상이 내뱉어 나왔다. 몇 친구들이 펄펄 뛰는 은어를 어렵게 상추에 몰아넣으며 식당에서의 상추가 위생이 어쩌고 하던 때였다.

상추? 난 집에서도 다 안 씻어. 그걸 언제 다 씻냐고. 어른들 밥상엔 대충 해서 올리고, 아이들 줄 것만 제대로 씻는다니까.

상추를 다 안 씻어? 아니 너……

어때. 너희도 식당에서 그냥 잘들 먹잖아. 한 끼에 밥상이 몇 갠데, 그것 다하고 언제 우리 방에 들어가. 애들하곤 놀아야 하는데.

놀아?

그래. 문 닫아 걸고, 아이들 하고 디스코 추지 뭐. 갓 투비 데어…… 패러독스!

난데없이 패러독스는! 아무튼 너 몸매 하나 잘 가꾼 거구나. 얘 날은어 삼키며 파닥거리는 것 좀 보라니깐. 여전히 애들 똑 같네! 우린 모두 ‘배둘레햄’이야. 봐, 이 뱃살을 어쩌냐. 넌 우리 몇째 동생 같구나. 얘 또 이 옷 입는 것 좀 봐!

옷차림은. 총대처럼 붙은 청바지에 총대같이 붙은 청조끼라니. 그것도 아무리 보아도 작아질 대로 작아진, 아무리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고 또 날씬해 보이려고 꼭 끼게 입는다 해도 그건 아니었다. 이 옷차림은 그나마 골목 어귀의 구멍가게 주인여자에게 보관했다가 살짝 몰래 입는 것이랬다. 집에서나 보통 시장 출입 때에는 ‘월남치마’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회장인가 이사장집 외동딸로, 반장, 부반장 뭐든 다 하고서, 뭐든지 입고, 누가 보든지 엉덩이를 제 마음대로 흔들고 다녔던 은미가. 우수한 인간의 뛰어난 적응력일까?


결국 은미 같은 날렵한 튀는 자태에서 왜소한 처량한 몰골로의 변화란 십년 남짓으로 족했다. 불쑥 나타나서 여전히 기발한 유머를 날릴 법한 은미의 표정이 점점 서늘해갔다. 우리들이 점점 덜 웃게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세상에 코미디 프로가 퍼진 탓이었나? 우리들의 재미가 달라졌을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 살았을까?

어쩌다 나타나도 항상 은미가 중앙무대의 상석을 휘어잡던 분위기가 언제부터인가 차츰 달라져 갔다. 아니 역전되었다. 말에 힘을 싣는 쪽은 새 귀족이었다. 혈통(?)귀족 대신 나타난 새 귀족. 그들은 아무래도 냄새를 풍겼지만 막강한 실세였다. 향수와 돈 냄새의 묘한 뒤범벅이었지만, 누구도 조금 고약한 그 냄새를 그리 탓하지 않았다. 우선 넉넉하고, 또 편했으니까. 가끔 새 귀족이 양반자리까지 넘보고 교양의 고지마저 점거하려들면 조금 마찰이 있긴 했다.

아니 와인 잔을 그렇게 들면 어떻게 하니. 여기 손잡이를 이렇게 들어야지! 다 마시는 법이……

우리가 움찔하면서 손을 고쳐 잡으려고 하면, 한 괴팍한 친구가 태클을 건다.

어디를 잡으면 어떻고. 내 잔 내 맘대로 들지 뭐. 서양 술 얼마나 마신다고 법석이야. 따지자면 와이트는 그래. 하지만 레드는 특별히 차갑게 할 필요가 없으니 아무래도 되는 것 아냐?

이도 저도 모르는 우리들은 머쓱해도 좋지만, 은미가 쥐죽은 듯해서 맘에 걸렸다. 이젠 은미가 확실히 마이크를 뺏겼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그러고는 정말 더 멀어갔다. 그래도 일단 은미네가 다시 서울로 전근을 간 남편을 따라 분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괜히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는 제 삶에 부대끼면서 동창의 삶쯤은 잊어갔다.

일찍 결혼 한 친구들은 벌써 아이들의 입시에 들어갔고, 그러자 우리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대입’이었다. 매일이다 싶게 차 마시며 오가는 같은 아파트 이웃들도 ‘자녀들의’ 학교에 관해서는 서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대화 자체가 멎었다. 잦은 이사들로 이웃이 자꾸 바뀐 때문이기도 했다. 동기 친구들도 신축 아파트 따라 이사하는 속도가 다르다 보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800미터 달리기 할 때 속도가 한참 달라서 누가 세 바퀴째인지 네 바퀴째인지 구별이 되지 않던 때처럼, 누가 어디쯤 서 있는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서로 모르게 되었다. 수준 차가 벌어지는 속도가 급격했다. 점심은 백배, 시계는 천배로 갈라졌다. 누군가의 연봉을 한 번에 통째로 입고 두르고 있는 명품 친구 앞에서, 은미의 여전히 총대 같은 청바지는 날씬한 몸매와 상관없이 초라했다. 이제는 민물고기같이 잽싼 몸놀림보다는 약간의 나른한 굼뜬 동작에 화려한 장신구가 더해지면 그대로 우아미를 발산했다. 어떻게 가꾼 것인지, 충분한 영양 탓인지, 피부들도 엄청 차이가 났다. 볼이 톡톡 튀던 은미의 표피는 앙상한 싸구려 파운데이션으로 뒤범벅되어 있었고, 속까지 비치는 부들부들한 살결들 사이에서 아무래도 이물질 같았다.

은미 너! 몸매 하난 여전히 끝내 준다만 웬 파운데이션을 그리 발랐어! 논바닥처럼 갈라지네, 너무 두껍게 발라놓으니 말야.

아닌데, 나 파운데이션 많이 안 발라, 진짜 아껴. 여기 봐, 이마 쪽은 안 발라, 안 보이잖아. 그리고 볼도……

놀라워라. 단발처럼 눈썹까지 내린 앞머리를 걷어 올리니 정말로 위아래가 다른 이마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깔깔 웃었다. 못 말린다, 못 말려.


여고 때에도 이런저런 기발한 착상과 뉴스들로 우리를 웃기고 놀리던 은미였다. 어디서 그렇게 놀라운 뉴스들을 퍼왔었을까? 아무래도 덩치 크고 잘 나가던 오빠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갓 투비 데어, 갓 투비 데어, 인 더 모닝 웬 쉬 새즈 헬로 투 더 월드 / 갓 투비 데어, 갓 투비 데어, 빙 허 굿 타임즈 앤 쇼우 허 댓 쉬즈 마이 거얼 / 오 왓 어 필링 데얼 비 더 모우먼트 아 노우 쉬 럽스 미 / 코즈 웬 아 루크 인 허 아이즈 아 리얼라이즈 아 니드 ……

잘 들어야 겨우 알아들을 노래와 함께 문워크래나 뭐래나 뒤로 걷는 춤은 일품이었다. 독특한 것은 우리가 “아이”라고 발음해야한다고 믿는 것을 꼭 “아”로만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누구도 미국사람의 발음을 제대로 아는 일이 없었으니, 잘 나가는 은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은미는 학교도 가끔 불신했고, 특히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란 “콩글리쉬”라고 우겼다. 그것도 우리가 덩달아 “콩그리쉬”라고 하면, “콩글리쉬”라고 다잡았다.

페임 / 암 고나 리브 포레버 / 암 고나 런 하우 투 플라이…… 암 고나 메이크 잇 투 헤븐 / 라잇 업 더 스카이 라이크 어……

결혼들을 하고도 한 참 뒤였을까. 큰 동창회 행사에서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신곡’으로 혼자 목청을 뽑을 때에도 우리가 “아이”라고 발음해야한다고 믿는 것을 꼭 “아”로만 발음하는 건 여전했다. 알라뷰! - 요란한 박수소리에 깜짝 응답으로 손을 쳐들고 무대에서 뛰어내려오던 모습은 숭어든 망둥이든 이름 하여간에 펄펄 나는 물고기였다.


천천히 그러나 어느새 세월이 갔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예 잊혀갔다. 이웃에 살아도 서로 다치지 않고서 말하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나는 점점 서로 말 주고받음 없이 제 이야기만 하는 텔레비전에 익숙해갔다.

코미디. 난 코미디 프로를 가장 슬퍼한다. 그래서 싫다. 슬픈 영화는 괜찮지만 코미디가 슬픈 건 참지 못한다. 내가 틀리는 지도 모른다, 코미디가 우습지 않고 슬프다고 말하면.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우습다고 말하는 코미디가 제일 슬프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정말로 웃게 되고, 웃으면 그때마다 젊어진다고 해도 싫다. 나는 코미디를 보면 슬프고, 슬프기 때문에 더 늙을 것이다.

시트콤. 그것도 아니다. 단편집을 읽을 때처럼 지속적인 줄거리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웃는 사람들이 따로 있어 방해가 된다. 무엇보다 웃음은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고, 관객이 따로 있고, 그 다음에 내가 그것들을 함께 보는 상황이 정리가 잘 안되는 것이다.

딱히 일정한 취향은 없었지만, 연속극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었다. 그 다음 장면 그 다음 발전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밉살스럽게 꼭 궁금증을 유발할 때쯤에 끝을 내고 다음 시간으로 넘기는 수작에 성가시지만, 가능하면 다음 시간에 눈을 대게 되었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이야기”에 정신을 판다고, 유익할 것이라곤 조금도 없는 프로나 기다린다는 식의 남편의 시선엔 익숙해졌다. 그가 보는 뉴스는 인생에 도움을 주는가? 하긴 날씨는 하루 일을 조금 편케 해줄지 모른다. 교양강좌 시간? 더 이상의 교양과 지식이라 해도 내 인생을 바꿀 리 없다. 업그레이드? 무엇을 향해서? 나는 그저 드라마라고 하는 남의 인생살이 모형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살아가는가, 살아 갈 가능성이 있는가 따라갈 뿐이다. 이웃이 있는 느낌이고, 적어도 혼자는 아니라는 착각에 든다. 나는 그냥 “어떤 다른” 인생들을 바라보면서, 이웃의 그렇게 서러운 더러는 힘든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분에 빠지려는 것이다. 그러면 서러워지지 않고 진지해진다. 감정이입이라고, 어렵게는 그리 말한다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가, 여자인 내가, 드라마 속의 남자에게도 그런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여자: 어머니가 나를 버렸다. 어머니가 버린 딸 -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어서 죽고 싶다.

남자: 너 살아 있는 것이 내 의미야. 이렇게 고운 네가 자학에 빠지다니. 내가 너를 지켜주겠어. 여자와 남자는 사랑에 빠진다.

다른 남자: 아버지가 실수로 비천한 가운데 뿌린 씨앗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부정하는 아들 -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어서 죽고 싶다. 여자가 위로한다, 오빠 태어난 것이 기뻐요.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여자가 심장에 박힌다. 여자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있다.


어쩌냐. 원래 큐피트의 화살은 한 방향으로만 난다. 여자와 남자의 결속은 다른 남자가 여자를 심장에 박아두고 있는 한 온전치 못할 운명이다. 누군가의 심장 속에 박힌 여자는 언젠가는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가 여자와 남자의 행복을 위해한다. 행복은 깨진다. 여자는 남자를 가슴에 품고도 떠나야 하고, 그런데도 여자 시청자인 내가 극중의 다른 남자를 이해하는 마음이 된다.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향해 연연하듯이 다른 남자가 자신을 향할 수도 있음을 이해한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이해한다. 나도 덩달아 사랑을 이해하는 마음이 된다.

물론 영화가 가장 편할 것이다. 후속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압축된 인생이 거기 있으니까. 그러나 영화관도 아니고 방에 박혀서 여기 저기 채널을 돌리다 보면 그것이 어차피 토막인 채다. 프로그램을 미리 찾아보고 특정 영화를 찾아 볼만큼 광도 못되고, 무엇보다 게으른 탓이다. 뒷부분 절반만 보았던 것을 조금 더 앞서부터 보게 되거나, 계속 그런 뒤쪽만 보다가 오래 지나서야 그 앞쪽을 보는 일도 있으니 뭔가. 시간이 나면 낮밤 할 것 없이 텔레비전이나 보고 사는 내 인생이 어찌 보면 더 한심하다. 사람이 실 인생에 무관심하고서 그리 픽션을 탐하게 될까? 저 거짓 타령에 눈을 떼지 못하고 사는 난 무엇인가. 무용지물. 남편 밥상 차려주고, 함께 먹고, 설거지하고, 손 씻고, 물기 닦고, 로션 바르고. 그것을 세 번 되풀이 한다. 그것을 두 번만 하는 날은 그 변형을 즐긴다. 아무렇게나 한 끼 먹고, 그릇을 조금만 씻고, 손 씻고, 물기 닦고, 로션 바르고. 하긴 그게 그거다. 안 먹고 건너뛰어야 진짜 변형일 텐데. 나는 굶거나 폭식을 싫어한다. 배고픈 것도, 배부른 것도 싫다. 이렇게 오직 적당히 먹기 위해서 사는 날이 부쩍 늘었다.


매형, 뉴스 시간이네요. 동생이 뉴스 쪽으로 채널을 바꾼다. 제 댁이 몸을 풀고 친정집에 가 있는 동안 아예 우리 집으로 - 우리 집은 무엇보다 빈 방과 밥이 있다 - 퇴근하는 막둥이가 말한다.

논픽션의 단골 메뉴, 중동에서의 폭탄 테러, 이미 벌어진 다음 어쩌란 말이냐. 이래서 난 뉴스를 싫어한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되풀이이다. 하긴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도 이미 낡은 이분법이 되었다지. 창조론을 믿는 유전과학자,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줄기세포 논란의 중심에 섰던 특별한 신앙인-과학자 또는 과학자-신앙인이 그에 속하리라. 하지만 검고 흰 것이 따로 없다면? 기름과 물이 구별이 안 된다면? 모든 가치의 종말이리라. 가치, 가치.

지난여름엔 지상 최강대국 수장이 지적설계론 교육문제에 개입했다는 뉴스도 있었다. 미친 놈, 현대판 십자군전쟁의 주범이 실전이 모자라 이론영역까지 침범해? 남편이 난데없이 뉴스에 흥분했다.

뭘 먼 나라 뉴스 가지고 그래요?

힘을 가진 놈들의 맹신은 아주 무서운 거야. 히틀러의 반유대주의하고 한 개인의 반유대주의가 같냐고. 지적설계론이란 우회적이지만 분명 사기적인 표현이오. 신앙의 영역을 들고서 과학을 침범하겠다? 부시의 보수개신교가 문제라, 착한 늙은이가 보수개신교도라면 도덕적이고 선할 뿐이겠지마는.

것도 가부장제도만 빼고요? - 참, 애기아빠야, 너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그림 봤어? 그것으로……. 뇌관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싶어서 얼른 말머리를 돌린다.

건 또 뭐라는 거요? 아니 그보다, 뉴튼도 창조론을 신봉했던 것 몰라요, 누님?

뉴튼이 신앙인이건 아니건 중력은 기적이 아니라 실체로서 살아있는 거지.

누난 참. 과학의 뭘 안다고 진화론 옹호자가 된 거요?

그보다, 넌 어떻게 초음파로 사람 들여다보며 사는 사람이 진화론을 의심해? 그러고도 자연과학자야?

누님, 그러네. 내가 내과라 그런가. 아니 외과 친구들 중에도 가톨릭의사모임에 열성인 경우가 많아. 확실히는 무엇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약을 처방해야 하고, 같은 약물로도 반응이 다르고, 한 알이냐 한 알 반이냐 정해야할 때 내가 무슨 수로 나를 의지한단 말이오. 나는 도구고 하느님이 역사하신다는 생각의 틀이 도움이 돼. 내가 훨씬 덜 힘들어.

자신이 없기는. 그건 네 영혼을 위한 네 신앙이지, 환자를 치료하는 과학적 사고는 아니다.

그래도, 내겐 힘이 되고 있어.

거야 좋은 일이겠다. 믿음이 널 지켜주는 한. 하지만 나 같은 무용지물은 전체 그림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 우연적으로 발생한, 그러나 유일무이한 생명체, 그 자체로서 의미가 담겼다고 해야 겨우 살아가지. 생명 말고는 내가 무슨 가치가 있어 살아.


아니 잠깐, 이번엔 투신자살이다. 자살은 요사이 뉴스다운 뉴스도 아니다. 엽기적 연쇄살인에 밀려 제 죽는 것이 무슨 뉴스랴. 자살사이트가 어쩌고 젊은 연예인들이 어쩌고 하면서, 자살이 놀이처럼 번져가는 낌새도 수상쩍긴 하다. 열악한 환경에, 실연의 고통에…… 진부하다면 진부한 이유들. 보통 사람이라면 열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못 만져볼 재산을 두고서 목을 맨, 보통 사람이라면 올라가보지도 못할 성공에 이르러서 죽은 …… 사치라면 사치스런 이유들.

사람들은 때론 악랄하리만치 잔인하다. 여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목을 매는 것은 약을 삼키는 것과 비교해서 의지가 얼마큼 강한가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약을 삼키려다 말거나, 삼켰다가 토해내거나, 목을 맨 줄을 다시 풀 확률과, 풀려 했는데 못 푼 상태에서 발이 미끄러져버리는 비극적 경우까지 죄다 노닥거렸다. 칼로 베는 방식은 아예 제외였다. 웬만해선 죽게 베지는 못한다고. 가장 강력한 의지는 투신일걸, 누군가 그러면, 이번에는 다리 난간에서 강물에 투신하는 것과 옥상에서 투신하는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였다. 제1의 강자 자리는 고층빌딩 옥상에서 추락하는 방식이 차지했다. 기울기가 잡힌 순간 되돌릴 수가 없다는 점. 누군가 함께 뛰어들어 구해줄 수도 없다는 점. 한 마디로, “쇼가 아닐 다름에야” 고층옥상이 가장 완벽한 선택이라고. 상처만 입고 병신 되어 살아날 가망도 없이. 그러니 얼마나 완벽한가. 하늘을 향해 한 번 비상하는 것. 그것으로 끝이다.

뉴스란 그러나 이래저래 소용이 없다. 이미 떨어져버린 사람에 대한 소식 - 그것으로 어쩌겠다는 말이냐. 떨어진?

그러니까 이번 소식이란 바로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진 여자에 관한 것이다. 한 때, 아이 엠 에프로 몰락한 한 가족이 고층 옥상에서 투신했는데, 다 고스란히 살아났더라는 우스개 뉴스가 있었다. 애비는 제비족, 어미는 날라리, 자식은 비행청소년이었으니까. 저 여잔 날라리가 아니었군! 잘 좀 날아 보시지! 나는 법을 안 배워뒀나? 갑자기 아이린 카라의 불타는 눈매가 떠오른다. 가무잡잡한 피부까지 닮은 은미의 불같은 눈매가 겹친다.

페임 / 아임 고나 리브 포레버 / 암 고나 런 하우 투 플라이……

영원히 살겠다,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겠다? 갑자기 등줄기에 찬물이 인다. 설마.


하긴 은미는 한동안 조용했다. 아예 동창회 네트에서 사라진 것이다. 삼삼오오 필드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늘고, 산악회다, 해외여행이다 몰려다니기 시작할 때, 은미가 사라지고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누군가 오전 10시에 집에 전화했을 때 전화를 받는 여자는 병든 년, 돈 없는 년, 그리고 또 하나 성질 나쁜 년, 세 종류뿐이라는 우스개가 돌았다. 은미는 어느 부류에 속할까? 나는 어디일까? 프랑스 사람들은 휴가에 자존심을 건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 생각이 난다. 여름철 휴가를 못갈 형편이면, 앞문을 잘 잠그고서 휴가 떠난 빈집처럼 해놓고 뒷문으로 드나든다나. 그러다가 빈집털이 좀도둑에게 들키면, 제발 다 가져가도 좋은데, 휴가 못 떠난 사람이 있더라는 소문만 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나. 그러니 나는 10시경에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으면 되겠다. 은미도 그럴까.


따르릉. 아침 정리가 대충 끝나고 막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는 참이다. 이 시간에 집에 있는 나를 사람들은 어떤 부류라 취급할건가. 몹쓸 병이 든 것도 아니고, 돈이 아주 없지도 않고, 그럼 성질이 나쁜? 나쁜 사람이 스스로 나쁜 줄을 알랴마는, 난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럼 그만 두자. 나도 나다니는 척 하자. 전화는 끊겼다가 곧 다시 요란스레 울렸다. 설마 중요한 일이?

나는 작정을 하고 윈덱스 병과 마른걸레를 들고 앞 베란다 쪽 유리창으로 향한다. 해가 비치는 오전 이른 시간이라야 창에 난 손자국들이 선명해서 잘 보이고, 또 자국들은 한낮보다는 아직 공기 중에 습기가 많아야 잘 닦인다. 몇 개의 화분들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풀냄새가 아련히 졸음을 불러온다. 따르릉 따르르릉. 이번에는 예사롭지 않게 끈질기게 울려댄다. 전화 숨이 긴 것이 조금 불안하다. 아서라, 양쪽 집안에 노인들 계시는데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배짱은 또 뭐람. 스스로를 나무라며 문을 젖히고 수화기 쪽으로 내닫는다.


*


서울에 올라갈 수야 있겠냐.

서울 친구들은 그럼 다들 가 봤대냐?

다들은 뭐. 요 근래엔 통 소통이 없었대. 애 유학 보내놓고 마찰이 많았었다네. 은미는 애 따라 나갈 계획이었고, 남편은 결사반대고.

조기유학도 아니었다며 애 따라 나갈 건 왜. 집에서 합의가 안 되면 못가는 거지 안 그래.

남편이 못 가게 한다고 못 떠나? 이 나이에?

이부자리 보고 발 뻗는다잖냐. 아예 손발이 묶이면 꼼짝 못하는 거지.

손발이 묶이다니. 옥상 그거 아니었어?

아니 뭐 손발이 묶였다는 게 그게 아니라.

아님 뭐?

경제권이 아예 없었단 얘기지. 평생 시장비 타 쓰는 형국을 참고 살았다는 거야. 몇 대째 있는 집에서 자라, 남편이 이재에 밝아 한 재산 해 놔두고 말야.

설마. 남편 통장 고스란히 받아 챙겨 관리하는 것이 한국형 경제 아냐? 처녀 때 성 쓰지, 통장 갖지, 선진국보다도 여권이 신장된 나라에서 웬 말!

훨훨 떠난 사람 두고 무슨 뒷말들이야. 결국 날아갔네 훨훨. 아임 고나 리브 포레버 아임 고나 런 하우 투 플라이……

비보를 전해 들으며 어안이 벙벙했던 우리들은 일단 모였다. 어라? 급한 대로 연락이 잘 안된 모양인지 평소의 반도 안 되었다. 더구나 다들 제 형편 따라 문상 갈 처지가 아니고 보니, 대표로 누구에겐가 짐을 씌울 셈으로 모인 것이다.

밥이 벌써 나온다, 어쩌냐. 우리 아직……

어쩌긴, 산 사람은 먹어야지. 먹고 이야기 하자. 인생이 그리 녹녹하다더냐. 아무튼 우리 더 단단히 맘 다져먹고 살자. 아이들 어중간하게 참 어쩌라고. 짝들은 맞춰줘야 부모책임을 다하는 거지.

암 고나 리브 포레버 / 베비 리멤버 마 네임 ……

실팍한 친구의 다독거림 사이로, 어디선가 환청일까 ‘아이’를 ‘아’로 고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말 날고 싶었던 거야? 날아서 바오밥나무를 보러 간 거야?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그 애가 해외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지 않았다. 아프리카는커녕 아무데로도 못 떠났었나, 설마? 나가면 나가고 떠나면 떠나지, 뭣 하러. 논픽션에 등장하면 어떻게 해, 바보같이……. 어디라고 할 데 없는 곳을 향해서 속으로 뇌이고 있다.

뭐해, 어서 먹지 않고.

무심코 한 친구가 콩나물 그릇을 내 가까이로 옮겨준다. 풋마늘무침과 자반무침 사이에서 노란 콩나물이 오늘따라 애처롭다.

그래, 맛있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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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07. 6. 30. 23:30


조 사

 

                                  소설시대 2007

 


오늘 길 떠나시는 시인을 찾아 서둘러 날아온 ‘쑥국새 울음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봄날, 우리가 영영 이별을 고해야 하는, 존경해 마지않았던 OO OOO 선생님, 제자들에게 한없는 사랑과 가르침을 주신 스승을 잃은 마당에 감히 조사를 읊어 바치고자 하니, 서러운 마음 그지없어 눈앞이 깜깜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단발머리 소녀들로 스승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솔방울만 굴러도 깔깔 웃고, 낙엽이 떨어지면 눈물 떨군다는 소녀시절. 바로 이런 봄날, 뻣뻣한 검은 말총머리를 휘날리시며, 휘날리는 머리카락 따라 고개를 끄덕이시며 들어서신 국어 선생님. “아야!” 그렇게 정겨운 목소리로, 그러나 완벽하게 우리말 우리글 공부를 가르쳐 주셨던 스승님! 


우리가 이 영어 세상에서 우리말을 사랑하며, 이 글로벌 세상에서 우리 것을 사랑하며 살 수 있음은 스승님께서 우리들 때 묻지 않은 영혼에 심어주신 ‘우선은 국어 사랑의 정신’과 나아가서는 ‘자중자애의 숭고한 가치’ 덕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친구들을 서로 사랑하고,  심지어 사투리까지도 사랑하고, 그 중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기에 타인이 나보다는 자신을 사랑함을 이해하고, 행여 자신을 사랑하는 타인을 못해도 자신만큼은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자신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신에 걸맞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 외에는 세상살이에 달리 첩경이 없다고 깨우쳤습니다.


스승님은 우리의 꿈을 높게 이끄셨고, 많은 제자들이 보다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자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보람이 적다.” ― 세상을 아시기에 미리 한탄하셨던 스승님. 우리 “보람이 적은” 여자제자들의 삶 속에도 스승님의 가르침은 면면히 흐릅니다. 서울에 가서 살건 미국에 가서 살건 전라도 아낙인 것 부끄러워한 적 없고, “툭시발 갓의 된장 맛”이라고, 구수한 인생살이에서 가정과 자녀의 인생에 알뜰한 간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빛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소금은 될 양으로 ―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 조사는 그런데 읽히지 않았다. 가까운 친지들의 조사 틈에 여자제자들의 차례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우리 쪽 차례가 오면!” 준비는 해두자고, 공인으로 활동하는 동창이 하룻밤을 조르는 데 못 이겨 난생 처음으로 써 본 조사였다. 그럴 일이 생긴다면 읽기는 목청도 담도 좋은 동창이 잘 읽을 터였다.


허옇게 서있는 키다리 조화들은 즐비했다. 막상 발인은 예상보다 조촐했고, 선생님 살아생전에 모이던 제자들 수만큼은 어림없는 인파였다. 


*


문학 월간지에서 무명의 나에게 청탁이 왔다. 청탁이다, 적어도. 등단 몇 년이라고는 하지만 고료를 받고 쓴 작품이 몇이던가. 그 동안 썼다가 구겨둔 원고들을 서둘러 훑어 볼 일이다. 그때마다 중단된 글들도 처음엔 절실한 심정으로 시작했었던 것들이니까. 그 옛날, 윗목의 낮은 교자상 앞에 구부려 앉아 쓰고 또 쓰다가 구겨둔 원고지들은 다 사라졌다. 버리고 또 버려도 쌓이는 파지들을 자꾸 치운 까닭이다. 그런데 컴퓨터 속은 도둑놈 계집 치마폭이다. 켜켜로 쌓아두면 버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미지 작업이나 사진 작업이 거의 없는 ‘우리의’ 노트북은 죄 한글문서들뿐이어서, 용량에선 넘칠 염려가 없다. 이런 무궁무진한 창고 덕에……


아니 그런 모든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미진한 몸이 청탁을 받으면 목욕재계를 하고 선을 하고 앉아서 명상에 잠겨도 모자랄 일인데, 대뜸 창고 속을 후비기 때문이다. 제목과 내용이 따로 도는 문서들도 없지 않다. 적게는 8KB짜리에서 많게는 1,126KB까지 분량 또한 제멋대로이다. 드물게는 ‘열려라 참깨!’를 잃어버려서 바윗돌처럼 닫혀버린 파일도 있다. 노트북을 공유한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파일들이 있고, 암호를 걸어두었다가 그리된 다.


또 하나의 문제는 노트북에 대한 권리에서 함께 쓰는 그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그는 밥을 벌고 나는 밥을 벌지 않는다. 그는 아무 시간이나 일을 하고, 나는 그가 자리를 비우거나 잠이 들어서야 노트북을 연다. 그러니 항상 서두르는 버릇이 있다. 집히는 대로 작업을 하다말다 그러는 것이 버릇이 되고 말았다. 한심한 노릇이다.


바로 어젯밤에 쓴 「조사」가 들어있는 파일에 쓰기 시작하는 것도 나쁠 것 없다 싶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니 너무도 잘 갖추어지지 않은 글이다. 격식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데 글쟁이라니 한심하다. 상투적인 감상의 찌꺼기는 또 뭔가. 그러면서 엉뚱하게 사투리 배운 것을 감지덕지하다니, 듣는 이들이 황당하다 했을 것 같다. 읽혀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문자화 되어 마음만 여기에 남으면 되니까. 이렇게 잘 표현되지 못했더라도 속에 담긴 의미는 진심이었으니까.


그보다도 크게 봐서 인생은 어느 구석을 돌아도 비슷한 쳇바퀴란 건방진 생각이 들 때면, 사람이 쓸 수 있는 글은 어차피 누군가가 살다가 죽는 이야기의 한 단면일 것 같다. 어떤 위대한 작가도 그 이상의 범위를 넘지 못할 것이고, 어떤 초라한 글쟁이도 그저 그 지평 안에서 몸살을 앓을 것이다.


파일들은 생각보다 분류가 되어 있질 않다. 어쩌다 눈에 띄는 파일 중에 마찬가지로 ‘옛 스승’과 관련된 짧은 글 토막이 있다. 모교 동창회에서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추억담을 올려달라는 성화에 적어두었던 모양이다.


모교의 OOO 선생님은 가정과 선생님에서 교감, 교장 선생님을 두루 다 거치셔서 동문 모두에게 잘 알려진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 동기의 ‘홈커밍’ 행사에 불참하실 때 노환이 깊으시다는 소식에 마음들이 무거웠지만, 그것도 벌써 옛일, 이젠 이승을 떠나신지 오랩니다.


선생님은 떠나셔도 의미 있는 한 순간의 기억은 영원 속에 박힙니다. 저는 아직도 아주 적나라하게 목욕탕에서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비누에 엉키는 머리카락을 쉽게 떼어내는 방법은 그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속옷 서랍을 정리하는 일 하나도 참 숙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혹여 너절하게 두고 떠날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사소한 것에 감동하느냐고요? 인생은 사소한 것의 총계라고, 그렇게 배웠고 그렇다고 깨달았습니다. 엄청난 목표 달성을 위해 사소한 행복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그렇게 배웠고 그렇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때 홈커밍 행사 날 한 친구가 유난히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친구는 모교에 부임한 초년 교사로 스승님은 교감선생님으로 잠시 함께 재직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젊은 ‘애 엄마’ 여교사들에게 교감선생님은 감시 대신 시원스레 말미를 주셨다고요. 가능하다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재빨리 집에 가서 ‘아이를 잠깐이라도 꼬옥 껴안아주고 오라’는 충고. 당신께서 여덟 자녀를 기르시며 후줄근한 숙직실에서 젖을 물렸던 기억에 아파하시며, 젊은 여교사들에겐 가능하면 아이에게 밀착된 시간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던


거기에서 중단된 이 글은 홈페이지에 올라가지 못했다. 이제 새삼스레 추억에 잠기면서 운명의 불공평한 대우에 분노가 인다. 그분이, 마지막 몇 년을 지독한 치매상태에서 고통 받아야 했다는 뒷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아 키우고, 평생을 교직에 종사하고 - 그저 단순한 가사노동이나 혹은 유한마담의 삶을 살아간 비슷한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 무엇을 그리 잘못 했다는 말인가? 치매를 행여 젊은 시절의 방만에 대한 벌이라고 하는 단순논리를 반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 삶을 살고서 그 마지막 몇 년이 치매라면, 이것은 뭔가 아니다 싶다.


“고매하신 창조자의 섭리 따위는 없다는 증거야.” 내가 그 소문을 들었을 때 잘라 말했다.

“그런 말은 심하다. 그 선생님 시절엔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양쪽에서 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그리 되셨겠어. 게서 창조주 이야기는 왜.”

“창조주란 말 안 썼다 나는.”

“또 시작하는구나, 그게 그거다 원.” 다른 친구가 거들었다.

내겐 항상 편이 적다. 그래도 우긴다.

“양심 없는 쪽이 양심 있는 쪽보다 훨씬 더 잘 산다면, 그게 이 세상에 고귀한 섭리 따윈 없고 우연이 지배한다는 것 아니냐고.”


다 말하지는 못했다. 실은 안팎으로 죽어라 일만 하시다가 치매로 고생 끝에 돌아가신 우리 선생님과 대비해서, 아파트 우리 라인에서 제일 멋있게 늙어가는 노부부 이야기를 할까 했었지만.


이런 이야기다. 남편은 겉은 영국신사에 속으로는 향교에서도 알아주는 식자에, 아내는 젊어 이래 폐백음식에 불려 다녔다는 솜씨를 자랑한다는 부인이다. 산보길이며 외출하는 양이며, 최고로 여유 있고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는 모습이다. 할머니는 아예 노인 축에도 안가는 팽팽한 얼굴이다. 근심 걱정이라고는 평생 없었다고 말하는 피부. 고운 자태. 고운 옷.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듣게 된 내막은 주말 연속극 감이었다. 남자는 고향에 처자가 있는 유부남, 여자는 처녀 때 만났던 사이라는데, 내가 그것으로 놀랐다면 호들갑이다. 속내는 더 기가 막혔다. 처녀 쪽에서 마음 고쳐먹고 시집을 갔으니, 일은 제자리로 돌아간 듯 했더란다. 그런데 여자가 한두 해만에 딸을 하나 낳고서는 그걸 버리고 다시 이 남자에게로 왔다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는 제 아들을, 어머니는 제 딸을 버리고서, 그렇게 다시 시작해서 ‘우리 자식’ 몇을 더 낳아 온갖 정성 다 쏟고 호의호식으로 키우면서 살아왔다니.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는 큰아들 선 자리를 말 그대로 백번도 더 보았다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버린 자식들 ‘내 자식, 네 자식’이 잊혔을까? 요새 말로 그보다 더한 스트레스가 있었을까? 마음속이 그러고서도 저리 화평한 노년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까지 모두 이야기 했더라면 친구들은 내 말을 믿었을까? 스트레스가 치매의 원인은 아니다. 양심의 고통으로 늙는 것도 아니다…… 라고 우기는 말을.


생․로․병․사는 정말 오로지 유전자 탓인가. 아니 유전자 더하기 우연이라는 장치의 역할일까. 그렇게 우연히 찾아든 치매 바이러스. 우연히 비껴간 혹은 우연히 침투한 박테리아. 우연히 고꾸라진 버스. 우연히 날아든 바윗돌. 우연히 심장을 뚫은 파편.


*


유난히 문상이 겹친 주간이었다. 아스라이 먼 시간에 끊어졌던 추억들을 불러오는 초상 자리. 대형화된 장례식장은 문상객들을 서로 부딪지 않게 할 만큼 넓어서, 사람 사이에 가면 노련치 못한 나 같은 부류에게는 다행스럽다.


검은 저고리 치마의 여자들은 조금 생소했고, 그런데 처량함을 덜해주는 효과도 있었다. 평상복 위에 대충 걸친 허연 상복의 구겨지고 초라한 몰골을 조금 더 단정하게 보여준다. 향년 OO세가 주는 이상한 안도감에 문상객들은 덜 미안해하며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바로 앞선 문상객이 ‘호상’이란 말을 써서 언짢은 일이 있었나 보다. ‘호’자와 ‘상’자는 이를테면 모순형용법에 속한다. 모든 상은 상이다. 상은 잃어버리는 것, 끝이고, 영영 이별이다. 그것이 어찌 좋을 것인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주들이 영영 고아가 되는 것인데.


친구는 일찍이 반쪽 고아가 되었고, 집에는 단출하게 어머니만 계셨다. 어머니만 계시는 것이 특별나지 않기 때문에, 그때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어차피 아버지들은 낮 시간 동안에는 집에 계시지 않았으니까. 친구네가 특별히 더 조용한 것은 아마 적산가옥의 구조였을 것이다. 한 줄로 나란히 펼쳐진 한옥과는 다르게, 좁은 복도를 낀 여러 겹의 방들은 작은 네모들의 미로였다. 한옥에서처럼 줄줄이 햇빛 받는 툇마루가 없으니 더 침침하고, 어둑한 공기 따라 분위기도 더 가라앉았을까. 고즈넉한 집과 친구어머니의 단아한 자태는 서로 어울렸다. 우리 배달민족은 또한 백의민족이라고 책에는 쓰였지만, 우리 집에선 백의를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인상은 하이얀 무명이었다. 우리들 교복의 풀기 선 칼라와 표백한 흰색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흰색. 함초롬히 옷감이 안기는 자태. 작고 고운, 무엇보다도 드문 말씨. 나는 어쩌면 그런 절간 같은 고요함에 이끌리어 친구 집엘 드나들었나 보다.


오늘 어머니를 여읜 친구는 그러니까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형제가 참전했다고 했다. 우리 시대 아버지들 중 많은 아버지들이 태평양전쟁과 6·25전쟁에서 두 번씩이나 엄청난 손실의 수치로 변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서 말하기로는 강제동원 피해자로 정부 당국에 신고한 사람은 22만 명 정도라 한다. 한국전쟁의 국군 피해자는 사망만 13만을 넘고, 부상과 실종 그리고 포로를 합쳐 62만 명을 상회한다는 통계를 보았다. 그런데 수학적 통계나 확률은 큰 의미가 없다. 두 형제가 참전하기로 똑같았던 우리 아버지와 친구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살아남고 살아남지 못했다. 체감 확률은 해당자에겐 언제나 1/2이다.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는 형제가 참전한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살아남았다. 당시에 젊은 장교로 사단 참모장쯤 되었던 아버지는 군사혁명 때엔 별을 달고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30명 명단에 들어갈 수 있었거나, 어느 부처의 장관이 되어 프랑스 혹은 서독을 방문, 한국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을 맺어 1억 마르크도 넘는 장기차관을 약속받는 성과를 올릴 수도 있었다. 실미도 사건 같은 때에 하필 책임 있는 위치에서 우왕좌왕 발표를 하다가 그날로 사임을 한다거나,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은 물론 나아가 의장이 될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총알이 하필 심장에 박히지만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 아직까지 건강하다면……. 케네디가의 맏형 조셉 패트릭이 2차대전에서 실종된 것과 비슷하게, 형이 전사하고 살아남은 동생은 그러니까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누구나 다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하긴 대통령이 뭐 그리 좋은가. 케네디 대통령은 너무 높이 태양 가까이 날다가 짙푸른 에게해에 빠져버린 이카로스처럼 추락했다. 그러니까 살아남은 동생이 대통령이 아니라 장관이나 국회의원 정도로만 올라갔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일찍 최고에 이르러 죽느니보다는 최고 비슷한 데까지만 가고 사는 것이 좋다, 그렇게 마음대로만 된다면. 조금 아쉽지만, 대통령 처조카사위의 동생의 장인의 매제의 모함(?)으로 비리에 연루되어 퇴직을 해도 괜찮다. 넉넉히 평균수명을 넘기고 혹시 ‘대한민국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대회’ 같은 묘한 계제가 있다면, 대한민국이 이미 공산화 되었다고 걱정하는 원로들에 가담할 수도 있다.


아니다, 이런 예상은 너무도 픽션이다. 어쩌면 그 아버지는 휴전과 함께 그대로 군복을 벗어던지고, 상과대학 출신답게 경영으로 입신했을 것이다. 재벌총수에게 휘둘리지 않는 전문경영인의 길을 갔다. 코트라 초창기를 살려내고 본부장을 역임하면서 온 가족이 외국에 나가서 살았고…… 아니다, 내 친구로 미루어 학구적이었을 아버지는 군복을 벗자마자 계속 학문에 전념하여 경제학박사가 되어 경제학교수가 되어……


이것도 정말 아니다. 내가 지금 쓸데없이 젊은 채로 남은 많은 아버지들의 가상의 전기를 쓸 일이 아니다. 다만 인생은 냇물을 따라 사는 것인지 냇물을 건너는 것인지는 몰라도, 인생에 징검다리가 있는 것은 확실하고, 그 하나의 돌이 나에게는 그 어머니가 있는 집이었다. 다다미방 저 쪽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하건 별 간섭이 없으셨던 어머니. 사실 조용한 어머니가 먼저였는지, 다 반듯해 보인 언니 오빠들이 먼저였는지 모를 일이다. 동창들 가운데에서 지금도 최고로 요조숙녀가 바로 이 친구다. 해야 할 일과 하면 좋을 일을 구별하고, 그 구별에 따라 행동하는 일. 그 어려운 일에 친구는 어려운 티를 모른다. 말도 조신하고 행동도 조신하다. 그렇다고 막힌 것도 아니다. 운동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고, 모르겠다, 살사나 벨리댄스를 배우지나 않는지.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친구는 합창단에 들고 배드민턴인가 탁구인가를 선수만큼 잘 할 수 있어도, 춤 같은 건 외면할 수도 있다. 학창시절 모범생의 연속일 텐데, 우리의 학창시절엔 지덕체라고 말은 하면서도 지와 덕에만 치중했고, 체육까지는 몰라도 무용은 조금 색안경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끼가 발동하는 것이라고. 저급할 것까진 아니나 조금 위험한 어떤 끼가. 체육이나 무용을 못하는 것은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으니, 웰빙 세대가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다. 내 글은 이렇게 「조사」에서 빗나가고 있다.


*


글쓰기는 무진장 어렵다. 사투리까지 사랑하게 가르쳐 주셨던 국어 선생님은 내 첫 작품을 받아 읽어보신 뒤 내게 단 한마디를 하셨다. “소설은 박완서처럼 쓰거라!” 그리고 선생님이 타계하시고 겨우 보름이 지났을까, 우연히도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5미터 거리에서 보게 되었다. 음악과 문학이 어우러진, 꽤 유명한 분의 성대한 문학인생 기념회 비슷한 자리였다. 난생 처음 그런 자리에 끼게 되어 얼핏 주눅 든 내가 저 건너 테이블에 살며시 들어와 앉는 그 얼굴을 첫눈에 알아본 것도 용했다. 소설책에 나와 있는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던 덕일까? 작은 얼굴에 작은 체격 ― 거미줄 나오듯 누에가 털실 뽑듯 끊임없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짜내는 물레. 피란길 허기 속에서 동생 오목이의 손을 놓아버린 수지의 줄기찬 저항을, 함께 사랑하고도 혼자서 나락에 떨어진 문경과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한 혁주의 상을…… 내 기억 속에 박힌 작품만 해도 부지기수다. 행사가 끝나고 저녁을 먹으며 담소를 나눌 즈음에는 헤쳐 모이는 얼굴 얼굴들. 가까이 가 보지도 못하고 스쳤다. 박완서처럼 글쓰기.


글쓰기, 글 쓴다고 나서기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을까? 국문과 졸업도 더더구나 문창과 출신도 아닌 내가, 글쓰기공부를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에도 대학의 평생교육원에도 가 본적 없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경한 길에 서 있었다. 무지가 용맹이라는 증거 하나가 내 첫 장편이다. 수필집 원고를 청탁받은 그가 정색을 하고 대신에 나를 들이밀며, ‘서랍을 위해 쓴’ 내 원고들을 가리켰다. 처녀림에서 무작정 베어낸 나무들은 그러나 품종에서나 영양에서나 밀렸다. 인생의 맛을 모르는 내 척박한 토양 때문이었으리라. 그나마 이름만 걸어 놓고 개점휴업 상태. 내놓은 물건들도 별 볼일 없는 태작들이지만, 팔릴 일은 없는 것이, 누가 이만한 원고를 사겠다고 덤비겠는가. 심지어 거간꾼도 없는 것이 이 바닥이다. 하긴 내가 발이 미치지 않아서이지, 거간꾼 없는 세계나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


왜 그리 스산한가. 기업의 냄새가 풍기는 장례식장은. 능률적으로 ‘치르는’ 영결의 장은 그 나름대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다. 평생에 한두 번 겪는 일일 것인데, 어느 초상에 가보아도 사람들은 놀랍도록 역할을 잘 수행한다. 슬퍼할 때 슬퍼하고, 곡을 할 때 곡을 하고, 대개는 밥을 먹을 때 밥을 먹는다. 밤샘을 위해 화투판도 벌인다, 아주 요절한 마당이 아니라면.


한 분 떠나시고 나니까 다시 한 사람 만나게 되네요…….


문상객들 틈으로 만난 그 사람의 말이었다. 한 열흘 후 쯤 전화가 왔다. 월요일이었다. 저 시간이 좀 나는지? 왜 아니라고 잘라 말하지 않았나? 해가 기울자 겁이 났다.


저녁엔 안 되겠어요. 저녁 외출이 일상적이 아니라서요. 연결된 것만 기뻐하지요.


그렇게 문자메시지 보내놓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마음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앓았다. 흔한 감기 몸살에 흔한 소화불량이지만 정도가 심했다. 머리 속에 맴도는 말. 미리 도망친 벌(?)로 24시간 앓고 있어요……


수요일, 다시 온 전화는 옛날을 생각나게 한 단어 때문에 길어졌다. 누가 먼저였을까, 아무 것도 아닌 옛 일을 끄집어 낸 것이? 아직도 손톱을 물어뜯는지? 지금도 노래를 잘 하는지? 그런 질문들은 애초에 어리석다. 어른이 되어 여전히 손톱을 물어뜯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노래는 한번 잘하는 사람은 계속 잘한다. 


“들어봐요, 어머니가 남기신 메모예요. 머물을래야 머물 수 없고 붓잡을래야 붓잡을 수 없는 세월 다시 만날 수 없는 이 시간 천금보다 귀하도다. ” 평생 간직할 소중한 글은 또 있다고 했다. 누군가가 읽은 간단한 조사:


노인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어머님,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엿함을 보여주신 어머님, 첫 만남에서 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어머님, 참으로 아름답고 귀하신 분이십니다.


이 아리도록 아름다운 글을 내가 들어도 되는가? 그리고는 전화 받기가 망설여졌다. 벌써 금요일이었다. 아니다, 이 사람은 상중이다. 상중이 아니면? 그것도 아니리라. 한참 시간이 흐른 듯 했지만 겨우 일주일이었다.


거짓말 실토하는 게 낫겠어요. 다음날 전화 알고서 선뜻 못 받은 건 빚이 늘 것만 같아서요.


메시지가 원래 더 편하다. 상대와 진정한 소통이 아니라서. 다시 금요일, 비슷한 번호라서 잘못 알고 받은 전화. 그 사람은 정말로 봄나들이 권유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까? 어떻게 그런? 전화를 받고나서 곧 바로 콧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열을 동반한 몸살감기로 변했다. 그것은 바이러스성이었다. 바이러스의 이름은?

 

*


현대는 뒤를 돌아보는 것이 미덕이 아닌 풍조다. 이를테면, 독서 중에 ‘웃기는’ 숫자를 보았다. 현대 사회에서 부부가 혹은 남녀가 사랑에 빠져있는 기간은 평균 3년하고 167일 2시간이란다. 그것도 도시 중심부 3,40대 남녀는 이 수치를 낮추지만, 다행스레 나이든 시골 사람들이 평균치를 높이는 데 기여해주고 있단다. 물론 전문서적이 아닌 ‘소설책’에서 읽은 소리이니 신빙성 있는 자료는 아니다. 소설은 신빙성을 담보하고도 남을 위인 ― 예컨대 미국의 무시무시한 대학의 교수이자 무시무시한 학력의 소유자 ― 이 쓰더라도 신빙성과는 상관이 없다. 이름 하여 픽션이니까. 그래서 소설책에서는 융의 할아버지가 괴테의 손자라나 뭐라나 하는 대목이 나오더라도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괴테는 손자 대에서 확실하게 후손이 단절되었으니까. (그가 그렇다고 확인해주었다.)


한 주인공은 “소설이란 인생처럼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작가의 자만심을 죄는 말의 반죽”일 뿐이라고, “요설”뿐이거나.


내 주인공은 소설을 무엇이라 생각할까? 우선 내 주인공은 박완서의 주인공들처럼 자연스러운 이름도 갖지 못한다. 아직 ‘ㅂ’자 첫 획에도 못 미친다. 내 소설은 며칠째 방치된다. 그가 노트북을 점령한 것이 변명으로 통할까?


*


뷔리당의 당나귀, 귄터 드 브로윈, 동베를린 1968년.

자서전적 분위기로 도서관장을 주인공으로 하여, 사랑, 여성, 결혼, 도덕, 풍속, 현대, 동베를린이 결부된 소설로, 통상적인 삼각관계의 구도 속에서 실제로는 순응 메커니즘, 허위, 모순들의 가면을 벗기는 작업을 시도한다. ‘뷔리당의 당나귀’를 원용하여, 두 여자 사이에서 동일하게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설명해보려는 시도 가운데, 60년대에 이혼율이 세계 최고였던 사생활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개인적 불행과 소외적 상황을 극복하게 해준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왜 개인들은 사적인 행복을 방해받고 있는가? 이러한 주제는 상당히 정치적일 수 있다. 어쨌거나 인간은 당나귀보다는 조금 윗수이다.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필연에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뷔리당이 말한 당나귀는 극심한 기아와 갈증에 허덕이다가 굶어죽는다. 귀리와 물통을 곁에 두고서도 말이다. 그 철학자의 설명은 하필 귀리와 물통 사이 한가운데에 당나귀가 위치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먹고 싶은 욕망과 마시고 싶은 욕망이 똑같은 크기일 경우, 당나귀는 어느 쪽으로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나귀가 필연에 의해 지배된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데, 인간은 자유의지의 덕으로 제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여 물부터 먹든지 귀리부터 먹든지 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원인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필연’에서의 해방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다시 말해 자유의지는 원인도 동기도 없는 성격에서 발원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어떤 행위를 수행하겠다고 결심만 하면, 동기도 없고 불합리하기 그지없는 행위를 수행한다.


우리가 공유하는 노트북에 그가 쓰고 있던 파일이 떠있다. 갑자기 그를 방해하고 싶다. 나는 그럴 때 문자메시지 프로그램을 주로 사용한다. 한달에 100건까지는 무료이고, 무엇보다 저장이 된다. 


SOS: “인간과 동물을 구분지어 주는 건 다름 아닌 동기 없는 행위”라고 말한 게 지드?


맞아, 『잘못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인들 해석에서 자유롭겠나? 신들에게서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준 공적이 기독교 세상 중세엔 철저히 잊혀졌다가, 차츰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라거나 일체의 권위에 맞서 항거하는 양심의 상징으로 부활되더니, 루소쯤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인류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 선구자로 해석된 것이지. 그러나 진보가 또 하나의 미망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여기 지드처럼. 진보가 필연이라면, 필연에서 해방된 자유의지는 인간으로 하여금 여전히 동기도 없고 불합리한 행동을 자행할 일 아닌가. 자유의지의 이름으로. ― 그는 글 숨이 길어서 E메일을 택한다.


한 세월 지나서 카뮈가 “동기 없는 행위”로서의 살인을 제시한 건 처음이 아니었네?


처음이라니. (가)설엔 처음도 끝도 없어. 언어를 소유한 태초의 인간들이 다 말해버렸거든. 누군가 그랬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캄파넬라? 태양 아래 완전히 새로운 형식은 없다고, 보르헤스? 아니 이미 벌써 전도서에 있었던 말이야. 1장 9절:  이미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있을 것이며 이미 된 것이 앞으로도 될 것이니, 해 아래 새 것이 없도다……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지. 그러니까 지드와 달리 카뮈는 자유의지보다는 부조리 개념으로 설명한 것. 부조리 극복의 유일한 길은 간단없는 반항이라고. 오늘은 끝.

추신: ‘뷔리당의 당나귀’도 뷔리당이 처음이 아냐. 벌써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도 언급했던 개념.


그가 바쁘구나. 아님 피곤했을까? 그런데 간단없는 반항? 반응이 아니고 반항? 넌 매사에 행동이 아닌 반응뿐이라고 비난당하지. 반응에서 단 한 걸음 더 나가 행동하기에도 저어하는 주제에 반항이 가당키나 하겠느냐? 그런데 반항하는 인간이 우수하다 그건 맞는 말인가? 반응에 그치는 것이 저열한 인격이라면, 그러니까 나는 당나귀 수준인가?


참, 당나귀는 노새와 버새 사이에서 어떤 반응일까? 나중에 말해줘.


웬일로 계속 당나귀 타령! 헌데 너, 필요 없는 걱정이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 암말이 당나귀 새끼를 낳긴 쉬운지 노새는 번성했지만, 암탕나귀가 말 새끼를 낳자면 난산이어서인지 버새는 드물거든. 그러니까 그건 이론적으로 기 싸움이다. 물이냐 귀리냐? 노새냐 버새냐? 아니, 노새․버새 틀은 순 네 상상이구나. 아내냐 연인이냐,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지? 당나귀보다 월등히 지능이 높은 인간은 ― 도이치 말에서는 답답한 바보 멍청이를 당나귀라 그러는 것만 봐도 당나귀가 멍청한 것은 사실일 것이야. ―  ‘자유의지의 이름으로’ 두 유혹 사이에서 굶어죽는 대신 교묘히 둘 다를 누리려 들지.


연인과 아내 사이에서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죽는 인간은 더 이상 없다. 3년은커녕 일년도 못가서 거덜나는 경우가 희귀한 일도 아니다. 습관을 가치와 혼동하여 어정쩡 결혼에 이른, 그 나름대로 지적인 남녀가 있다고 치자! 누군들 결혼이 가치에 속한다고 확신하기까지 섣불리 자신을 결혼에 내놓겠는가. 결혼이라는 형식을 갖춘 두 단독자의 삶. 그것도 영위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라는 친절. 남편이나 아내는 아내나 남편의 결점 때문에 연인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장 에르프처럼 한 남편이 아름답고 경제적으로 배경을 지닌, 게다가 합당한 일에 충실한, 개성은 없지만 그냥 좋은 여자를 아내로 두었다고 치자! 부족함이 없는 것도 부족함이다. 그에겐 프롤레타리아 출신으로 지적으로 단호하고 개성 있고 확고한 견해를 지닌 연인이면 족하다. 뭔가 정신적 에너지를 북돋우는 자극이면 그만이다. 브로더 양은 젊고 지적이다. 단호한 개성의 매력에 불안도 괴팍함도 멋스럽다, 잠시 동안. 그리고 자극성 향취의 단물은 쉽게 고갈난다. 무맛이라도 풍성한 온수에 푹 담기고 싶을 때 남편은 슬그머니 아내를 찾는 것이다.


그의 말투가 내게 향하는 2인칭이 아니고 3인칭을 향하기 시작하면 나는 침묵해야 한다. 이제 그의 장광설 논리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를 직업으로 산다. 30쪽 되는 작품에서 뭔가를 풀어내어 300쪽 가까운 책을 쓰기도 한다.


나는 다른 생각에 골몰한다.


4월이 산 너머로 지고 있네요. 실제였나? 꿈결 같이 짧았던 시간이 함께 지네요.


이 메시지를 그 사람에게 보내는가 아닌가, 문제는 그 자유의지이다. 휴대전화 멜로디와 함께 번호가 뜬다. 아아~ 여전히 조용한 시각 다시 소리가 부른다. 그 번호. 폴더를 열어본다. 부재중 전화, [화]10:39A, [화]12:05P.


전화 - 집어 들기가 쉽지 않았어요. 5월에도 6월에도 아름다운 꽃들과 즐겁게!


부재중 전화, [수]12:26P, [수]6:44P. 계속 전화를 받지 않으려면 문자메시지라도 보내야 하나? 


*


그 사이 가벼운 지인과 메일을 주고받을 일이 생겼다.


죄송. 4월의 초대장을 건너뛰었었죠. 죽어라 일해야 했거든요.


‘죽어라 일’하는 일이 죽어라 사랑하는 일이었기를 바랍니다. 아니고 정말 죽어라 싫은 일이라면 미련 없이 때려치워야겠지요.


그런데 시만 쓰시는 게 아니고 노래를 잘하신다는 것을 몰랐네요. 저는 무반주로 노래하는 사람에게 무지 약한데, 해서 몇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노래 잘하는 사람에게 쬐끔 휘둘리고 있는데…….


*


휘둘린다고? 너 요새 휘둘린다는 단어를 쓰는 거냐?


그가 당장에 태클을 걸어왔다. 놀랐나 보다, 토막 글로 나무라는 것이. 나는 모처럼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무엇이건 죽어라 사랑하는 일을 북돋아 주는 메일 탓이었는지 용기가 났다. 나는 내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어쩌다가 완강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도 도리가 없음을 안다. 내 위에 있건 내 옆에 있건, 내 안에 있건, 나 보다 우선하는 건 없으리라.  


미안해요. 전화 받기가 뭘까 조금 부끄러운 느낌? 암튼 어려워요. 그냥 잘 지내요!


그냥 잘 지내요! 그냥! ― 그것이 내 심정이다. 감정이다. 감성이 크게 발동할 때면 이성은 숨죽인다. 때를 아는 것도 이성이다. 그는 이성이다. 그는 나를 내버려 두어야 할 순간을 안다. 나는 그에게 노트북을 내어주지 않고 내 젊은 날에 대한 「조사」를 쓴다.


잘 가라, 아무 것도 아니었던 청춘아! 인생은 비록  만나는 지점이 없다는 점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먼데나마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 땅에서 땅으로. 반환점을 훨씬 넘기고서야 네 청춘에 때늦은 조사를 쓰는구나. 머리는 허접 쓰레기 지식욕으로 천만근 무거웠고, 가슴은 송곳 자존심으로 외로웠던 너! 생각으로 들끓는 네 머리는 생각한 것과 말한 것을, 생각한 것과 말한 것과 행동한 것을 구별 못했구나. 반응은 행동이 아니라서 삼갔고, 행동은 행동이라서 삼갔다. 실 인생에 뛰어들어 본 적이 없었던 너. 못 이룰 꿈을 꾸지도 않았고, 아니, 아예 꿈을 몰랐구나. 못 이룰 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시작도 하지 않는 비겁함의 덕으로. 두 개의 가치를 좆아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말라죽을 일도 없었다.


잘 가라, 달지도 쓰지도 않았던, 맹물처럼 무맛의 청춘이여! 시리거나 뜨겁지도 않았던, 치열하지도 아리지도 않았던 청춘이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청춘아! 청춘도 아니었던 청춘……


*


봄비 내리는 아침입니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오늘이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는 말처럼 행복한 주말되시길……


산인데요. 만산의 꽃들이 절규하듯 모양을 뽐내고 싱그런 연초록이 색상을 자랑하는 기를 보냅니다.


고맙게도 위로는 며칠 사이로 예상치 않았던 방향에서 왔다. 내 친구가 아니라 그의 친구에게서. “오늘은 남은 인생의 첫날”이라, 그렇게 산뜻한 오늘이면 되나보다. 열린 창으로 어디선가 초록빛 기운이 밀려든다. 청춘에 대한 「조사」라니, 우선 관습에도 어긋나고 뒤돌아보는 관점 이란 비생산적이다. 어쩌나, 그런데 오늘의 나는 기억의 총계다. 망각은 나를 부인함이다. 하지만 생산이 최고의 가치인 이 세상을 살자면, 이번에는 픽션에 들리어 막무가내인 내가 숨을 죽이고 사라질 차례다. 이성적인 그에게 온 생을 양보하면 된다. 인간이라면, 감성과 이성 한가운데서 당나귀처럼 말라죽을 일이 없다. 숨 쉬고 밥 먹고 태양 아래로 나가자. 태양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이 없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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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