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0. 12. 21. 22:09

•• 믿거나 말거나, 참 뜻밖의 소식 -
   
무슨 문학상을 받게 되는 것이란다. 2010년도 OOO문학상.

12월 21일, 아침 일찍 운전석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나로서는 이른 시각에.
의례적인 검사이기는 하지만 병원행이었다. 병원행이라 일찍 나선 길이었다.
두번 연속 울린 전화가 미안한 맘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OOO 회장으로 있는 K교수님의 전언이었다.

아무튼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에 대해서.
아무튼 하이에나 짓 멈추기 위해 첫소설 내느라 미쳤던 것이 꼭 10년 전 그 겨울날이다.••
차가운 땅 속의 아버지, 병원의 어머니! 고집덩이 딸이 이젠 소설장이 맞나 봅니다.
상이든 질책이든 소설가로서 취급됨을 전제로 하니 기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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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0. 12. 9. 23:56

 

 



 

거울 앞에서 입 꼬리에 힘을 주어 웃음기를 흘려 본다. 몸과 맘이 수고로울 일을 앞에 두면, 집을 나서기 전에 꼭 거울을 본다. 아직 쓸쓸한 봄, 할아버님의 기제사가 마침 주말에 걸리다보니 여느 때보다는 맘 편하게 집을 나선다. 형님네 대문은 빼곡히 열려있고, 부엌 쪽에서는 벌써 생선 익어가는 냄새가 먼저 내달아와 코를 맞는다.


잘 계셨어요, 숙모님. 일찍 나선다는 것이 늘 늦고 마네요, 형님.

어서 손 씻고 와 앉소. 자네 형님만 뭔 죈가.

형님이 대꾸할 틈도 안 주시고 가닥을 잡으실 양이니, 오늘도 숙모님이 주인공이시다.


동서, 빨리 왔구먼. 오늘은 시간 넉넉하겠어.

고구마 색이 곱네요.

채반에 노랗게 익어있는 얇은 고구마 조각들이 내 손을 기다린다. 뒤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열어 젖혀놓아도 수건 사이로 머리카락 올올이 기름 냄새로 범벅이 될 하루가 시작된다.


어디 쓰겄는가, 밀가루를 되직하게 하소, 뽀얗게 색 내려며는. 고구만가 호박인가 너무 노랗잖은가.

소생이 없어 늘 외로우신 숙모님은 사람들이 모이는 이런 날이면 더 외로움을 타신다. 다행히 음식 솜씨며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단정한 맵시로 젊은 여자들을 누르신다. 형님의 입장에서는 어머님이 안계시고 보니 숙모님께 상의도 하고 도움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둘이서 조금 엇박자 느낌이 든다. 숙모님은 이말 저말을 섞어 하시고 형님은 그저 시늉만 대꾸를 한다.

식혜 솥 열어볼 때 되었네. 밥풀 서너 개 떴는가.

예.

이 꼬막은 씻은 건가 아닌가. 뻘이 그냥 붙어있네.

예.

그런데 참 늦네. 몇 시야, 지금. 여섯시가 되가는데 왜들 안 와?

이번엔 내가 놀란다. 아니 웬 여섯시 말씀을. 여기 아직 육전도 안 끝났습니다. 고추전쯤 마치고 점심 상 보잖아요. 아직 점심도 안 드시고 여섯시라뇨!

박실이는 또 안 오겄지? 숙모님은 엉뚱한 말씀으로 둘러대며 자리를 뜨신다.


형님, 오늘따라 왜 저러셔요? 이 제사 때면 애기씬 시어르신 일이 겹쳐서 언제나 시골에 가잖아요. 설마 다 아시면서.

아마 기다리는 사람 생각에 시계를 헛보신 게지.


그렇게 점심상을 차리고 치운다. 다시 번철이 열을 낸다. 벌써 두부 조각들이 기름에 지글거리고 있다. 점심 후로는 숙모님이 속이 불편하시다고 소파에 누워 계시니 우리만의 부엌에 능률이 더 나는 느낌이다. 실제로 거들어주는 손이 빠졌는데도.


갑작스레 집안에 활기가 차며 숙모님이 몸으로도 부산해지신다. 드디어 서울 사는 시동생 내외가 들어선 까닭이다. 오매, 우리 원장님 오느라 애썼네. 차는 안 막혔나? 답은 거의 듣지 않으시고 바쁘시다. 술참 때가 겨웠으니 시간이 애매하지만 일단 밥상이다. 오래 서울 물 먹다보면 냄새가 너무 진하다고 할 진짜 굴비하며, 홍어, 토속적 음식이 든 접시들로 손이 바쁘다. 부엌은 이제부터는 완전히 조용할 터다. 원장조카 턱 앞에서 음식 먹이는 맛에 푹 빠지신 동안. 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진설 시간이 될 때까지다. 해마다 기제사 때 되풀이 되는 훈계가 시작되면, 할 말은 아니지만 숙모님 입엔 작은 게거품이 돋는다. 게거품은 싸울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님을 그래서 안다. 신바람이 나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완벽한 진설을 위해서, 심지어 상에 올리는 순서까지 정하시는데 어쩌랴. 그것이 이 근년에는 순서가 조금씩 섞이는데, 그걸 종잡을 수가 없다. 좀 있으면 핀잔의 시선이 전자빔처럼 따갑게 공간을 가를 것이다.


아니, 그런데 큰 변형이 생긴다. 오늘따라 진설 시간이 되어서도 원장조카 시선만 붙잡고 계시는 것이 이상 일이다. 제기들이 죄 닦이어 줄을 서 있어도 소용이 없다. 고개는 아예 비뚜름히 고정되어 있다. ‘한 시 오 분 전’이란 별명의 여학교 때 선생님 생각이 난다. 다른 점이라면 그 선생님은 ‘한 시 오 분’과 ‘오 분 전’을 가끔 바꾸셨던 것이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조카 쪽으로 굳은 고개. 주름만 빼면 표정이랑은 영락없이 연인을 바라보는 드라마 주인공의 모습이다. 숙모님이 오 분 전이면 조카는 계속 오 분을 유지해야 서로를 보게 되는 것이라 그것이 썩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뉴스 시간이라도 되면 좋겠다 싶다. 


형님이 그냥 알아서 하세요. 조금 아까부터 부엌으로 섞인 막내동서가 조바심을 낸다.

숙모니임, 저희들이 대충 올려 보아요? 기다리다 못해 형님이 묻는다.

대충이 무에야. 자네들 할아버님 들으실라. 시간이 이르잖아.


서너 시간 서울사람 곁에 앉아계시더니만 신기하게도 서울 말씨에 가까운 억양이 나오신다. 심지어 모음들이 바뀐다. ‘이거 묵어보소’ 라고 할 계제면 ‘요거 먹어 봐’가 된다. 입술을 동그랗게 하면 나이 불구하고 조금 더 귀엽다. ‘응’ 할 자리에는 ‘잉’이라 하시며 웃음기를 흘린다. 원순모음과 평순모음이 둘 다 귀여운데 사용되니 이상하다. 이 말은 순전히 내 직업병에서 온다. 국어선생 기질이 어디 가랴.


신기하셔. 형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들으시려고요.

하긴. 귀도 참 밝으시니 조심하자.

형님 그런데 요즈음 좀 힘드신 일 있어요?

뭐 그냥. 사는 것이 쇼 같아서.

아무 일 없어 보이는 안정감을 특징으로 하는 형님의 입에서 조금 놀라운 단어가 튀어 나온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왠지 조금 뜨끔하다.

아니 내 말은 누구나. 조금은 억지로 참기도 하고.

그럼 속내 다 내놓고서야 어떻게 매끄럽나요? 기름칠을 좀 하는 거죠. 입가에 다시 한 번 힘을 준다. 여기는 시댁이다. 불편해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 사이.

그 정도가 아니라 내 말은. 숙모님 어제 오셨잖은가. 여전히 사뿐 걸음이시긴 한데, 뭔가 조금. 뭐라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암튼 근년 들어 느닷없이 가리는 음식들 땜에 옆에서 손을 못 쓰니 참.

거야, 티비가 범인이죠 뭐. 소가 농약 묻은 풀을 뜯어 먹는다니 우유 못 마셔, 허리둘레를 줄여야, 탄수화물을 줄여야 장수한다는 뉴스에 떡도 뭣도 못 먹고. 막내는 범인을 따로 정한다.

하긴, 내가 괜한 걱정이네. 총하시니까 뉴스 따라 사시지.


찜솥이다 냄비들이다 번철 가에서 눈을 들어 잠시 숨을 쉰다는 게 어째 말들이 샌다. 숙모님 쪽에선 반응이 없다. 막무가내로 당신 조카만 올려다보고 계신다. 살짝 미소 짓다가 조금 찡그리다가. 몇 미터 거리에서, 식당과 거실 사이 커튼 사이로 건너다보니 표정일랑은 그대로 영화다. 디카든 셀카든 등장해야할 판이다.


평소에도 저러세요?

동서는 새삼. 당신 감정에 솔직하신 거지. 지난번엔 며칠 화장실 출입 못한다고 자네한테 전화하셨다며?

거야 내 차로 움직이실까 해서……. 

그래도 오밤중에는 심하시지.

겁을 내셨더라고요, 응급실 가야하는가 싶어서. 가진 않았고요.

겁이란 것이 무서움일까 욕심일까? 암튼 오늘은 우리끼리 그냥 해보세.


사실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조율시이로 시작해 첫째 줄을 다 놓아도 여전히 꼼작 않고 조카만 쳐다보시다니. 시동생의 입장에선 숨이 막힐 지경이라. 손을 끌로 내려와서 진설을 도와달라고 하자 숙모님은 갑자기 깨어나신 듯하다.


감이 곶감이제 뭣들 하는가?

요즘 세상엔 시절이 좋아 감과 곶감이 늘 함께 있다 보니 문제다. 평상시에 숙모는 감이 있어도 곶감자리 다음에 반드시 배를 올려 ‘법에 맞게’ 하라던 분이다. 그런데 오늘은 곶감 다음이 나란히 감이라신다.

어머나, 생선 배들이 왜 이쪽인가? 거 산적이 빠졌구먼, 마저 좀 하지. 어머나, 꼬막 색은 왜 이래, 새꼬막을 샀던가?

산적은 닭찜이 있다고 말라시고, 꼬막 껍질은 덜 깨끗하다고 몇 번을 물리셨잖아요.

어머나, 오늘 내가 그랬어? 내가 요새 이러네. 통 기억이 읎어서는.

거야 저희들도 그럽니다. 숙모님 건강 염려는 마세요. 아까 보니 손도 따뜻하시고, 혈색도 아주 좋으시고요.


혈색 - 그것은 하나의 신호였다. 시동생의 입에서 의사의 전문용어로 혈색이란 말이 튀어 나오자 그것이 울타리를 넘는 신호였나 보다.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시다 말고 숙모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눈을 이상스레 치뜨시는 듯, 새침해져 말없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신다. 우리는 또 어린양이 시작되셨나 보다 하는 생각에 별 신경을 안 쓴다. 무엇보다 나머지 진설을 마쳐야 하고, 우선이라도 부엌 정리를 하고 또 저녁 밥상 차릴 준비를 해야 하니까. 우리 집은 제사 중에 진찬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다 진설해놓고 진찬 때는 메만 올린다. 그리고 초헌 절차가 끝나면 그대로 음식을 드시리라는 여유 시간에 자손들도 저녁을 먹는다.


진지 드시지요.

식사들 하세요.

거실에 큰상 펴고 남정네들이, 부엌 식탁에는 여자들이 이런저런 의자들 보태서 둘러 끼어 앉는다. 숙모님은 어른대접으로 거실 상에 자리한다. 늘 시동생 옆자리다. 아니면 반찬 얹어주시느라 다른 사람들이 수저질하기가 불편할 정도가 되니까. 요거 맛있어, 요거도. 그런데 안 나오신다.


자네가 좀.

형님의 말 따라 숙모님 모시러 들어가 보니 그만 말이 안 나온다. 당신의 빨간 색 바바리를 내려놓고 - 원래 놀라운 옷 치례를 하신다. - 웬 잔잔한 꽃무늬치마에 발을 꿰려는 몸짓으로 버둥거리고 계시니. 형님이 오늘 무색으로 갈아입느라고 벗어 둔 모양인데.


형님, 아니 원장님 좀 와보세요.

급히 물러난 나는 우선 시동생을 불렀고, 밥상에 막 앉아있던 사람들이 방으로 내달으려 하자 시숙이 말렸다. 뭐 별일이시겠나. 다들 저녁을 먹어야 마저 제사를 지내지. 원장도 식사나 하고 들어가 보소.


숙모님은 완전히 정신을 놓으신 것 같다.

이그, 이그 내 농이 어디 간 거야? 난데없이 애들 옷장을 보며 탓을 하신다. 앉은걸음으로 농을 미는 시늉을 하니 겁이 날밖에.

숙모님 농이라뇨. 여기 애들 오면 쓰는 방이잖아요. 숙모님 댁 아니고, 저희 집.

자네네? 내가 그럼 왜 왔어?

할아버님 기일에 오셨잖아요.

그랬어? 그런데 왜 안와? 우리 김 원장 왜 안와?

다시 또 시작이시다. 거의 성화다. 그렇게 몇 번씩을 묻는데 시동생이 들어와 우릴 내보낸다.

걱정 마시고 우선 식사들…….


그렇게 성급해진 마음으로 저녁을 해치우는 동안 귀는 거실로 쏠린다. 물소리 그릇들 소리 사이로 남정네들 이야기가 심상찮게 건너온다. 시동생이 서둘러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일어서는 모양새를 보니 일단 응급실로 가야한다고 결정하나보다. 하필 제삿날 숙모님이 이러셔서 좀 뭣하지만 별 수 있나, 뭐 그런 논리인가 보다. 그리고 산 사람이 우선인 것은 맞다. 숙모님 입장으로는 시아버님 기일에 무슨 동티인가. 어쨌거나 산 며느리가 우선이다. 시동생이 숙모님을 모시고 응급실 행이다. 이곳 의대 출신이라 병원이야 훤하겠지만, 노인 모시고 혼자서는 힘들 것이니 부부동반이다.


크게 도움이 안 되기는 동서가 나보다 더하다. 설거지는 늘 내 차례다. 막내동서가 서열 잘 안 지키는 데 대해서는 숙모님이 이상하게 너그러우시다. 여전히 부엌에서 물소리 그릇소리로 실제인가 이명인가 혼동하고 있을 때 전화소리가 크게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라 더 크게 들리는가. 시숙이 전화 받는 음성만 들어도 일이 예상보다 안 좋은 것 같았다.


거 병원 상황이 썩 안 좋다네. 엠알아이도 해야 할 거라요. 원장 네는 오늘 못 올라가려나 보오.

그건 잘 되었네요. 한 밤중에 차 몰고 가느니.

당신도 참. 시동생 걱정하길 이녁 애들 걱정 같소.

거야 누구라도 밤운전은 좀.


자시에 시작한다는 제사지만, 어머님 살아계실 때 벌써 일찍 차리기 시작한 내력이다. 숭늉이 올라간 지도 한참이고 자정이 되기 전에 벌써 철상이다. 사실 시동생이 의사로서 의심하는 대로 심각한 그 증세의 초기라면 큰일이다. 요조숙녀의 경우에 치매 가능성이 더 많다던 설이 맞나? 그런 불안한 상황이다 보니 함부로 내던져지는 그릇들만 불쌍타. 수저 젓가락이며 국자 등 쇠붙이들을 따로 걷어 내다말고, 컵이나 잔들은 왼쪽으로, 오른 쪽은 사기그릇이라는 규칙도 오늘따라 우왕좌왕이다.


저 여보, 그런대로 일단 퇴원하실 것 같다는 군요. 그러니까…….

다시 시숙의 전갈에 형님은 시동생 내외까지 재울 잠자리 준비에 정신이 없고, 나는 한없는 그릇과 씨름한다. 손아래 동서는 이 대단원이 끝날 즈음에나 숙모님과 함께 돌아올 것이다.


나머지는 나중에 형님에게 들은 대로다. 밤이 늦었다고 형님이 자꾸 밀어내는 바람에 병원 간 사람들을 채 기다리지 않고 집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밤으로 일단 퇴원은 하셨단다. 입원실이 마땅찮고, 또 응급상황도 아니고 해서. 그런데 분명 뇌파에 뭔가는 있더란다. 그래서 숙모님은 김 원장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서 요양병원에 가시게 되는 거란다. 형님은 마리오네트마냥 김 원장이 김 원장 친구에게 가라는 대로, 김 원장 친구가 또 어디로 가라는 대로 여차 여차 날을 받아서 숙모님을 모시고 가면 되는 거란다.


*


숙모님이 나흘 밤을 요양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나는 그곳을 찾을 시간이 절대로 없었다. 금요일엔 잠시 시간이 났지만 숙모님 핸드폰 구입을 내가 맡아서 그 일로 시간이 빠듯했다. 토요일이 되어서야 면회시간 맞춰 찾아간 나에게 환자의 첫마디는 완강하시다.


이 바보들, 더러운 것들과 여기서 못 지내.

그렇게 까진 예상을 못했던 터라 말문이 막힌다.

자네들 귀찮게 안할 것이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내나 같이 말하다가 ‘당신 누구요’ 그러는 바보가 없나, 밥 먹다 토하고, 기저귀에…….


우선 나는 핸드폰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시동생과 통화하시라고 핸드폰을 건넨다. 1번 하나만 누르시면 시숙, 2번은…….

그러는 순간 내 핸드폰이 울리더니 시동생이다. 여기 숙모님, 마침 김 원장이네요.


전화를 바꿔드리고 나니 머리가 어지럽다. 목소리를 금세 바꿔서 저리 나긋나긋 통화하는 숙모님은 멀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쩌면 이것도 내 의무일까. 시동생이기 전에 의사인데, 의사에겐 그러니까 실상을 말해주어야 한다. 숙모님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첫째, 너무도 깔끔하시다. 둘째, 우리들 모두 생활에 균형이 무너진다. 요 며칠 사이 형님은 숙모님이 평소에 드시던 약 갖다드리랴, 다음날은 성당의 월보 갖다드리랴 정신없었을 것이다. 왜 한꺼번에 부탁을 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어렴풋이 안다. 그것이 숙모님의 방식이다. 이태 전에도 어지럽고 몸이 가라앉는다고 요양병원에 한 스무날 계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다. 날마다 무슨 핑계로 사람들 오게 하시고, 병실 내에서 공주다 각시다 하는 별명을 들어가며 사뿐 걸음으로 병원생활을 즐기셨다. 누군가 해온 음식을 다음 찾아온 누군가에게 자랑하시며 나누어 드시면서. 그러니까 장기입원으로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풀죽어있는 다른 할머니들을 더 풀죽이면서 숙모님은 기세가 살아나셨다.


세상의 기운은 온이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에겐 모자라다. 기운을 돈이나 권력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누군가에겐 모자라다. 욕심 중에 기운 욕심이 제일 큰 욕심 같기도 하다. 호주에선가 인류의 수명의 변화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수명에도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진다고 하더니. 하지만 퇴원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비겁하게도 의무를 접는다. 아예 둘째네 의견은 없는 편이 낫다. 애들 아버지가 일 년이면 파견근무 나간 날이 더 길기 때문이다. 또 집안 장손과 의사의 결정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몇 달이 흐른 지금 이 유난한 더위 속에서 숙모님은 어떻게 사시는가. 심기증이라고 하는, 쉬운 말로 건강염려증이라는 병 때문만으로 저리 되신 양반. 병이 아니기에 약도 없는, 아프지 않기 때문에 낫지도 않는 병, 마음의 병. 거식증에 가깝게 몸을 말려가며 어린양이 조금 과했던 숙모님. 십여 년 전과 비교하면 20 킬로그램은 족히 줄었을 몸무게가 더 줄었을까 무섭다.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진짜 의사들에게 ‘걸려서’ 환자복을 입고 지내노라면, 옷맵시도 음식 솜씨도 다 무슨 소용인가. 그 ‘더러운’ 사람들 속에서. 그렇게 되면 숙모님의 어린양은 과녁을 빗맞힌 셈이다.


다 저녁에 전화다.

낼 숙모님 모시고 나와서 계곡에나 잠깐 가볼까 하는데 자네 시간이…….

예, 그러죠. 아직 방학이니까요. 수박이나 미리…….

준비는 되었고. 쇼는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녀.

수더분하기만 한 형님이 전화기를 놓으며 흘리는 말에 흠칫 놀란다.


광주문학 2010겨울호, 186-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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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0. 12. 6. 20:02

미국에서 태어난 손녀 수빈의 초청장은 "사랑하는 할머니 발이 미구와 세요!"

첨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 그래, 빨리 미국에 가마!

유성음과 무성음의 대립이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그 나라 말을 모국어로 쓰는 아이라 그럴 밖에.

다른 때 영어를 섞어 쓰면 꽤 유식한 소리도 쓴다.  아래 서명은 수빈/Chelsea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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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0. 12. 1. 23:30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입니다.

작가가, 소설가가 작품을 쓰는 일은 일종의 도마뱀 꼬리자르기라고, 한 덜떨어진 소설가가 내게 말했다.

뭡니까?

절체절명의 순간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그 피투성이 기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입니다. 몸통을 살려낸 도마뱀은 꼬리만을 물고 허탈해하는 독사에 대해 승리감을 가질 것이고. 꼬리를 자른 선택에 관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도마뱀에게라면 위기 탈출이 절대적 선택이겠지만.

겠지만? 그 이상입니다. 천적을 만났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건 분명 비장의 무기이고, 예컨대 살모사가 아직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틈을 타 도마뱀은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되었지요. 이제 거기에 그 경험을 잘 다듬어서.

다듬어요? 죽다가 살아온 경험을 쓰면 문학작품이라는 말씀이오?

일단 꼬리 잘린 도마뱀은 특별한 경험을 했고, 그런 처절한 경험이 없는 다른 도마뱀들에 비해. 더구나 잘라진 꼬리는 나중에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까요.

그건 좀 다른 문젭니다, 제 생각엔.

다른?

도마뱀을 노리는 적이 주변에 많을수록 꼬리를 재빨리 자르고 도망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그럼 되었지 뭐 또. 게다가 그것을 가공하여.

그래도 꼬리를 자르는 건 도마뱀에게 큰 부담입니다. 꼬리가 없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그 험한 경험을 작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해도 일단 잡아먹힐 위험이 커집니다. 새 꼬리를 만드는 동안에는 몸통 자체도 자라지 못합니다. 동작도 굼떠지고,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도 떨어집니다. 어차피 소설가의 지위야 꼬리 잘린 도마뱀 수준이지만요. 더구나 이제 그 새 꼬리라는 놈은 더 이상 자를 수가 없답니다.

뭐요? 도마뱀 박사가 따로 없으시군요.

게다가 새로 돋아나는 꼬리는 척추가 아닌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다시는 자르지 못한답니다. 소설 한 권 떴다가도 평생 타작만 내놓는 소설가와 다름없지요. 도마뱀으로서도 평생 꼬리 잘라먹은 놈이라는 꼬리표를 함께 달고 사는 것이겠지요. 새 꼬리는 원래 것보다 색깔도 안 예쁘답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 하겠습니까? 소설작품은 취소하고라도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저는 꼬리 자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꼬리를 조금만 물려도 그게 독사라면 금방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잘라야겠지요, 싹둑.

아니 작가님, 뭐 싹둑 잘라낼 원망 같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저 따라서 해보는 소립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그 독으로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일부를, 이를테면 마음, 심장, 가슴 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을 잘라내고도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가공하여 작품화하는 강심장을 가질 수 있을지, 그건 꽤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니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입니다.

그냥 죽거나 그것을 쓰거나?

예, 실존과 방법의 갈림길입니다. 삶의 내용인가 글쓰기인가 하는 갈림길.

도마뱀과 갈림길이라. 우린 오늘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군요.

그와 내가 구동성으로 말했다. 그와 나는 늘 하나이면서 둘인, 둘이면서 하나인 도마뱀이다. 왜 쓰지도 안 쓰지도 못하는지 언제나 답을 모른다. (문학공간 2010.12월호 통권 253호 40-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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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0. 11. 25. 20:22

평생의 반려자로부터 책을 헌정받았다.
결혼 40주년 하고도 1년이 다가오는 날.
영국에서 이미 출판되었던 영문여행기를 확대 재출간했다.
표지는 조각전공의 둘째 아들 몫.

OUT THERE - Travelogue as Self(e)scape
by Cho Mo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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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0. 11. 15. 23:30

[소설시대 18호 권두언]


불모지에서 더 성한 나무, 문학

 

유난히 무덥고 지루했던 장맛비 속의 여름이 갔습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는 벌써 여름을 잊습니다. 잊은 체합니다. 오늘을 살아야 하고 내일을 맞아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잊은 체하는 어제가 오늘을 결정하기에 우리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디디거나 아예 가슴을 부여안고 주저앉습니다. 밖으로는 씩씩하게 걷고 있어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미소까지도 지으며.

이 숙명적인 굴레 - 선택의 오류와 그 결과의 회환에서 오는 결핍의 감정은 그러나 우리들 작가에게는 유일무이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마 신(들)처럼 무오류성의 성질에 인간이 근접이라도 할 수 있었더라면 애당초 문학이고 예술이고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향한 우리의 내면의 충동 뒤에는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한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 숨어 있습니다. 이 동경은 우리들 대부분에 내재해 있는 것이, 인간은 일반적으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감정은 지속적인 상황으로는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결핍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하며, 이 결핍은 배고픔과 아픔 같은 육체적 유형일 수도 있지만, 고독이나 권태라는 정신적 ․ 영적 유형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필수적 소여가 아닌,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향한 달랠 길 없는 동경은 아마도 오늘날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위 문화산업의 동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소비자들을 생의 단조로움으로부터 기분 전환시키는 일이 수요에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로부터의 도주에 있어 그 강도가 격심한 경우는 아마도 작가가 되고야 말 숙명적 요인일까 싶습니다. 때로는 그가 중심에서 너무나 떨어진 곳에 서 있음으로 해서 정상인과의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라 해도, 바로 그 비정상적인 격렬한 사고가 이 사회를 자극해서 정신이 들게 하기도 하는, 그 이상한 숙명 말입니다. 그러기에 문학은 오히려 불모지에서 성장합니다. 작가 스스로 어느 중심에 안주하기보다는 경계인이라고 느끼는 동안 더욱 무서운 기세로 중후한 작품들을 내놓는 증거가 세계문학사에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가까운 예로는 우리의 신문학 운동만 해도 국권피탈의 역경 속에서 폭발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학, 특히 내용적으로 응집력이 있다고 느껴지는 모든 소설은 다음의 세 요소로 약분될 수 있습니다. 하나와 둘의 기본 대립, 예컨대 개인/사회, 시민/예술가, 덕/악덕, 선/악, 자유/부자유, 빈/부, 현세/내세 등을 일컬을 수 있는 대립, 그리고 이 대립의 결과로써 생겨나는 제 3의 요소. 한 소설에서 기본 대립은 적어도 한 사람의 등장인물로부터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으로서 받아들여진 것들입니다. 그리하여 이 결핍은 줄거리를 전개시키고, 계속해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종결 상황에까지 밀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모든 소설은 유일한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으니, 결핍의 지양입니다. 이러한 결핍의 지양을 위한 투쟁이 드라마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해설자/서술자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소설의 장르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간접적’ 접근은 이 적극적 시대에 매우 시대착오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는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이 소설쓰기가 점점 난항에 부딪힘을 우리 모두 실감합니다. 김현 선생은 언젠가 사물을 해석하는 힘의 뿌리가 욕망이라고 전제하고, 세계는 세계를 욕망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생생해지고 활기 있게 되며, 특히 소설은 그 욕망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드러낸다고 적시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엔 우선 소설가의 소설 쓰는 욕망마저 그가 구하는 다른 욕망들에 눌려 변질된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 소설가의 욕망, 소설 속의 인물들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실어 참여하는 독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세상 독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양식은 고도로 발전하여 독자란 그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인문학 일반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위한 지도적인 힘을 상실해 간다는 염려가 식상할 만큼의 언어로 아우성이면 그럴수록, 그래도 우리는 오히려 우리 사회에 문학이 무엇인가를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정보오락의 시대는 우리가 본래적 의미의 인간성을 기억하며 그저 인간답게 사는 일조차 실로 어렵게 하고 있음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인류가 거대 우주를 품기 위해서라면 우선 그 작은 파편인 이 지구와 먼저 화해하고 섞이는 일부터 해야 하겠지만, 그것이 쉬이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첨단과학기술을 자연정복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되게 하는 데 써야함은 우리 모두 깨닫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룡처럼 화석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인류는 몸을 낮추고 키를 줄이며 자연 속으로 흡수되어 살아남기를 모색해야 합니다. 다만 그 첩경은 무엇보다 우리 몸뚱이[재산]를 부풀리고 무한정 먹어대는[소유] 공룡이 되라고 부추기는 파괴적 세력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항할 힘을 꿈꾸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꿈을 꾸는 한, 인생은 늘 불발입니다. 유토피아는 아무데고 없는 곳이니까요. 그러나 이 불발을 성찰하고 이 결핍을 생채기 나도록 파헤집는 문학, 문학 활동이 인류의 꿈을 위한 마지막 보루임을 자각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어딘가를 향합니다. 어딘가를 향해서인가 용케 우리가 방향키를 잡았다 하더라도 바다는 비웃듯이 늘 풍랑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행여 편한 대양이더라도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은 잠시, 한시적 삶에 갇힌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뭔가 애써 소용돌이를 만들거나 다시 폭풍우를 호려내고 맙니다. 잔잔함은 뱃사람을 늘보로 만들 것이고, 정지해있는 한 우리는 살아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요.

<한국작가교수회>는 소설 창작과 그 교육에 관한 연구와 정보를 교환하며 후진을 양성 지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2000년 2월 25일 창립총회를 가지며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온이로 열 살을 먹었습니다. 집필과 강단의 활동으로 온 힘을 소진하는 것, 한 방울의 에너지라도 남아 있다면 잠을 청할 수 없을 정열에 떠는 것 - 우리 한국작가교수회에서 지켜내고자 하는 가치, 온갖 소여의 현란한 폭풍적인 기세에 맞서는 증거로서 또 한 권의 『소설시대』를 내놓습니다. 늘 그렇듯이 편집을 맡아 무진 애를 쓴 편집위원들께, 그리고 원고청탁에 마다않고 좋은 글들 보내주신 여러분께 진정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미미하게나마 사람들의 가슴에 가 닿을 수 있기를 이 책을 펴든 여러분과 함께 꿈꾸렵니다.

 

 

 2010년 때마침 한글날을 기리며,

다시는 ‘언문, 암클, 아햇글’ 등으로 폄하되는 일 없기를,

 ‘그랜드 바겐’을 내놓는 지도층부터 한글사랑의 마음을 일깨우기를 하늘에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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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0. 11. 11. 23:00

프랑스어를 몰라서 후회스러운 거의 유일한 노래 <고엽>듣고 싶어서  
 ▼                                                                           
               

http://www.youtube.com/watch?v=kLlBOmDpn1s&feature=player_embedded

 


Yves Montand - Les Feuilles Mortes 

                                                                      (Poeme de Jacques Prevert)

 

Oh ! je voudrais tant que tu te souviennes

오! 나는 그대가 기억하기를 간절히 원해요

Des jours heureux ou nousetions amis

우리가 정다웠었던 행복한 날들을

En ce temps-la la vieetait plus belle

그 때 그시절 인생은그렇게도 아름다웠고

태양은 오늘보다 더 작열했었지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a la pelle

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Tu vois, je n'ai pas oublie...

제가 잊지못했다는 것 ,당신도 알고 있지 않나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a la pelle

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추억과 후회도 마찬가지로

Et le vent du nord les emporte

그리고 북풍은 낙엽들을 실어나르는군요

Dans la nuit froide de l'oubli.

망각의 싸늘한 밤에

Tu vois, je n'ai pas oublie

당신이 알고 있듯이 , 난잊지 못하고 있어요.

La chanson que tu me chantais.

그대가 내게 들려주었던 그 노래를

C'est une chanson qui nous ressemble.

그건 한 곡조의 노래예요, 우리와 닮은

Toi, tu m'aimais et je t'aimais

그대는 나를 사랑했고, 난 그대를 사랑했어요

Et nous vivions tous deux ensemble

그리고 우리 둘은 함께 살았지요

Toi qui m'aimais, moi qui t'aimais.

나를 사랑했던 그대, 그대를 사랑했던 나

Mais la vie separe ceux qui s'aiment,

그러나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아요

Tout doucement, sans faire de bruit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아주 슬그머니

Et la mer efface sur le sable

그리고 바다는 모래 위에 새겨진

Les pas des amants desunis.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국들을 지워버려요.

 

Les feuilles mortes se ramassenta la pelle

낙엽이 무수히 나뒹굴어요

Les souvenirs et les regrets aussi

추억과 후회도 마찬가지로

Mais mon amour silencieux et fidele

하지만 은밀하고 변함없는 내 사랑은

Sourit toujours et remercie la vie.

항상 미소 짓고 삶에 감사드린답니다

Je t'aimais tant, tuetais si jolie.

너무나 그대를 사랑했었고 그대는 너무도 예뻤었지요

Comment veux-tu que je t'oublie ?

어떻게 그대를 잊을 수 있어요?

 

En ce temps-la, la vieetait plus belle

그때 그시절인생은 그렇게도 아름다웠고

Et le soleil plus brulant qu'aujourd'hui

태양은 오늘보다 더 작열했었지요

Tuetais ma plus douce amie

그대는 나의 가장 감미로운 친구였어요

Mais je n'ai que faire des regrets

하지만 나는 후회 없이 지내고 있어요

Et la chanson que tu chantais

그리고 그대가 불렀던 노래를

Toujours, toujours je l'entendrai !

언제나 언제나 듣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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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10. 10. 9. 00:00

말과 글, 그리고 경계인


“프로메테우스 - 그 의미는 선각자이다 - 는 하늘에서 불을 가져오기를, 그것으로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 그는 그것을 땅이 불타도록 가져온 것이었다. […] 만일 이 금기위반이 […] 부르주아들이 점점 좋아하고 점점 더 돈을 버는 데나 쓰인다면 - 문학은 되돌아가야 한다. 아니, 불을 하늘로 다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 모든 선각자들처럼 지략을 써서 문학은 어떤 길을 찾아야 하고 찾아내야 한다.”


이런, 평생 하이에나가 되어 남의 나라 남의 글 뜯어먹고 사는데 진력이 나서 도망쳤는데, 기어코 마침표를 찍으라 하니 또 그 짓을 되풀이하며 하인리히 뵐의 말과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는군요. “오직 소시지 구이들이 장사나 할 수 있게?” 이 말은 자본주의에 완전히 강점된 이 세상, 이 지구를 향해 통탄의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이 말을 저는 마침 한글날에 즈음하여 이렇게 변형해보고 싶습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시면서, 훗날 남북으로 갈려 살면서 남쪽 대통령이 대북제안을 내놓을 때 하필이면 외국말로 ‘그랜드 바겐’이라고 하고, 우리 땅 멀쩡한 이름 놓아두고 새 이름 짓겠다고 총리실에서 ‘새만금 글로벌 네이밍 공모’를 하라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라고.

우리가 기적 같은 문자를 누린 600년도 채 못 되는 세월을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글자가 그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해서 한문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에게 경시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갑오개혁에서야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지만, 곧 닥쳐온 국권피탈은 다시 극한의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가, 말과 글이 푸대접 받는 환경 속에서 오히려 ‘한글’은 그 이름을 얻고 ‘맞춤법통일안’이 나왔습니다. 세계문학에서의 근대적 사조들인 낭만 · 자연 · 상징주의 등이 한꺼번에 들이 닥치면서 신문학운동이 폭발했던 것도 그 즈음이었죠. 그런가 하면 우리의 신문학이 서구의 문학장르를 채용하면서부터 형성되고 문학사의 모든 시대가 외국문학의 자극과 영향과 모방으로 일관되었다는 ‘이식문학론’은  ‘조선문학’의 정체성을 화두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증거입니다.

말과 글의 예술, 문학의 속성은 바로 그러한 불모지에서 더욱 꿈틀거리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배고픈 천사”의 친구 레오를 주인공으로 한 『숨그네』의 헤르타 뮐러에게 노벨문학상이 결정되었을 때 독일문단에서도 예상작은 아니었던 것이, 바로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경계인이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변인, 경계인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일까 - 그런 이야기를 쬐끔 해보겠습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강연(?)을 상상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여기 까지가 팸플릿을 위한 글이었다.

  강연은 2010년 10월 8일, 한글날을 하루 앞두고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103호실에서.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0. 8. 15. 23:58

병든 고향

 

 아따 거 뉴스 한번 징허데.

징헌 뉴스 한 두 번가.

아 거 즈 각시 죽이고 목매단 놈 말여.

그런 놈 한 둘가.

그래도 이거는 참 험채, 으째 그랄 수가. 친딸 아니던가, 친딸. 친딸을 그래놓고 형살고 나와서는 각시를 차로 밀어?

무슨 일인데들 그러우?


마침내 미아리가 나설 때까지 공능과 월곡 두 여자가 뉴스가지고 죽일 놈 살릴 놈 재판을 한다. 이 청소아줌마들이 잠시 만나는 것은 점심시간이 고작이다. 지하 4층, 그것도 계단 아래. 퀴퀴한 냄새. 바닥은 물이 듬성듬성 고여 있다. 하지만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한 귀퉁이에 이불을 괴어놓았다가, 지난 번 대청소 때 어느 방에선가 내다버린 소파를 가져다 놓았으니 지금은 부러울 게 없다. 이곳은 대학교 평생대학원 건물. 누가 밖에서 들여다본다면 떡 하니 ‘접근엄금’이라는 푯말이 적힌 전기실 맞은편 이 계단아래가 섬뜩하겠지만 대순가.


어마 저거 또 쥐 아이가?

설마, 요샌 아니드만.

나가 그라므 헛소리라?

아니 뭐 헛소리라니. 그냥 당신 겁이 안 많소! 각시 죽인 놈 야그도 벌벌 떨고…….

그기사 암데 가치도 없는 거라서리.


거야 공능이 이해해요, 월곡 저이가 남정네 얘기람 원래……. 미아리가 끼어들어서야 둘은 입을 다물고 김치를 깨문다. 총각김치는 소파 아래 넣어둔 통속에서 익다 못해 쉰내가 나지만 맛있다.


요건 이래 뵈도 중국산 김친 아닌기라.

당신 어깨고 허리고 아파 죽겠다면서도 김친 꼭 해먹나 봐.

그거라도 해 줘야지 어메가 어디 해주는 거이 있어야 말제.

우린 덕분에 돈 안들이고도 웬만한 식당밥보단 낫게 묵네.

그럼 우리가 단돈 86만원 월급 챙기며 식당밥 묵겄어, 미쳤제.


다시 숨을 죽이고 사각사각 총각무우 깨무는 소리만 울려퍼지는 사이 월곡동아줌마는 눈을 감는다. 미쳤제, 하모 미쳤제. 결혼식을 해준다니까 미쳤었제.


친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는 연속극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자리가 국군이었는지 도망친 인민군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 많았다는 피난민 중 하나였는지 가르쳐줄 수 있기도 전에 어머니를 잃기도 하니까. 그렇게 자란 여자애는 더러 밥이다. 남들의 밥이자, 그것이 내 밥이었다. 한 물 두 물 갔을 때서야 뜻밖에 배가 불러왔지만, 반가움 반. 미래가 깜깜한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이었을까? 이리 키울 거라면 말이다. 제대로 가르칠 수도 없던 나날. 정말 상처한 사람이 정말 구원처럼 다가왔었다. 처음으로 들어 앉아 살림이라고 차렸고, 처음으로 따뜻한 나날이었다. 따뜻한, 멍청한 나날은 짧게 끝났다. 무섭게 끝났다. 못된 의붓아비는 연속극 말고도 널렸다. 점잖게 생겨도 소용없다. 악마는 원래 여러 얼굴인 것을. 코앞의 홍당무에 팔렸던 내 발등을 찍고 싶었다. 세상 모든 귀신들에게 빌어서 그날 이전으로 땅덩어리를 돌려놓을 수는 없을지. 밤이면 밤마다 하도 용을 쓰다가 그것이 빠지고 말았다. 그것이 빠진 여자들은 원통한 여자들이다. 그것이 빠져도 내 딸을 되돌릴 수가 없었다. 내사 외롭다 못해 불행을 자초했건만, 내 딸은 어밀 두고서도 요모양이라니. 죄인 어미한테 해죽이 웃으려고 애쓰며 시들어가는 내 딸을 어쩔꼬. 딸 데리고 시집가는 죽일 년! 딸 놓아두고 죽을 수도 없는 죽일 년!


고향을 멀리 떠나왔음 머하노.

밥 묵다말고 갑재기 무슨 소리요?

게서 고향 이야기가 왜 나와, 누구 울리고 싶으우?

고향이 어데면 머고. 그래, 고향이 머라.

......................................................

2010 <흐름 위에 멈춰 선 시간>  한국여성문학인회 6.25 60주년 기념 특집, 246-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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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0. 7. 16. 02:56

헤르타 뮐러가 노벨문학상 탄 일로 걱정? - 말도 안되는 말이렸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었다. 다음호 <소설시대> 편집회의 결과 헤르타 뮐러에 관한 글을 누군가가 집필했으면 한다는 계획때문이었다. 주초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주말이 오기 전에 결정이 났다, 평소에 각인되었던 젊은 독문학자 중에서 퍼뜩 떠오른 얼굴. 조심스럽게 연락을 했다. 밀린 글들로 힘들 것이나 흔쾌히 맡아주겠다고 했다. 난 언제나 행운을 느낀다.
K (곽정연교수), 독특한 열정을 느끼게 하는 그가 마침 헤르타 뮐러 낭독회에 참모 격으로 전체를 꿰뚫게 되어 있었다. 숱 많은 검은 머리를 조금 아무렇게나 하고서 맨 앞줄에 앉아 경청하며 골몰하겠지...... 좋은 글은 따놓은 당상이다.
아 정말 너무나도 행운인 것이다.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