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
‘나는 도마뱀이다.’ 또는 ‘나는 자장면이다.’ 하고 글의 제목을 쓰거나 글을 시작하면 우선 독자의 첫 반응은 거들떠도 안보는 것일 게다. ‘나’처럼 흔한 단어도 식상하지만, 거기다 ‘도마뱀’이나 ‘자장면’같은 엉뚱한 개념을 끌어다 대어 무슨 이야기를 엮어 가겠는가. 식자층이라면 이런 글에 대한 비호감은 말할 나위가 없어진다. 우선 비문으로 보일 테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러니까 안 선생이 우연히 털어 놓은 말로 인해서다. 문단 어디 겨우 끼어 들어온 새내기들이 듣게 되는 비평가운데 비문이라는 지적이 가장 수치스럽다고 한다. 게다가 작가가 자신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서술하게 되면 독자는 제각기 자기 식의 어법을 지니고 있어서 의사소통에 장애가 생길수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단다. 친절한 작가라면 객관화된 문법체계를 따르며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선택해서 친절한 서술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참 친절한 지적이다. 장래 지망생은 물론 어찌 비집고 들어간 이라 해도 가슴 깊이 새겨둘 말이다. 뭘 모르는 나도 동감이다.
그런데 늘 그 도가 문제이다. 비문을 피하고자 문장마다 멈칫거리기 시작하면 한발도 못나가고 마는데, 그것은 어쩌면 오보만도 못할지도 모른다. 잘못 내딛은 걸음은 뒷걸음이나 선회를 통해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고, 움직이고 있다면 살아있고, 살아있다면 무엇인가는 끼적거려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한발도 못 내딛는 졸렬한 그가 문제였다.
*
그가 처음 우리 교무실로 걸어 들어왔을 때가 지금도 역력하다. 보통 때와 다름없이 그 삼월에도 두어 명 인사이동이 있었다. 그는 처음 어딘가에 들어오는 사람의 일상적인 파르스름한 긴장감을 모르는 사람모양 스스럼없음에 외려 눈에 띄게 교무실로 들어섰다. 벌써 조회가 시작되었고, 마침 교감선생이 새로 온 다른 두 사람을 소개하는 순간이었다. 그 둘은 벌써 교무실을 들렸다가 교장실에서 인사를 마쳤고, 이제 다시 공식적인 인사를 하는 참이었다. 신참은 아직 아주 늦지는 않은 것이 다행인 듯 비교적 태연한 걸음으로 교감을 향했다. 인사에 합류 하겠다는 몸짓이었을까? 당황한 것은 오히려 교감으로, 어어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무례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는 그렇게 중간 쯤 오다만 자리에 서서 인사를 시작했다. 동서남북으로 네댓 번 45°는 굽혀서 절을 하더니, 안 진숩니다 그랬다. 말을 할 때 눈을 천정 쪽으로 향한 것은 마땅한 방향을 찾지 못해서였을 것이나, 다른 시선들과 키를 맞추는 효과도 있어 보였다. 고개를 다시 제자리로 하자 내 눈과 부딪쳤는데, 내 옆자리 책상이 비어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냥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다행이 조회가 중단되지는 않았다. 이상한 짧은 정적을 마침 주번교사가 깼다. 그는 하필 첫날부터 지각생들 문제에 열변을 토했고, 이어 새 학년부장들이 자신이 학년부장이라는 것을 부각시키는 각각 한 말씀들을 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곧 일상으로 돌아갔다. 어눌해 보이는 새 등장인물에 조금 쿡쿡거리며.
부임 첫날 지각하는 양으로 보아 이 신참이 학교생활에 적응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괜찮았다. 더는 지각하는 일도 없었고, 도드라지지 않으니 잘 하는 것이다. 첫 순간부터 이마를 찡그렸던 교감 눈에는 영 벗어났다고 해도, 그는 그런 것을 별로 모르는 듯 했다. 그가 개의치 않으니까 교감도 신경을 껐다고나 할까. 전체적으로 - 이 말은 참 미안하지만 -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게 보통이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부서가 문제였다. 수업계라니, 우선 나이에 걸맞지 않았으니 보기에도 그랬고, 보기보다도 더 꼼꼼하질 못했다. 곁눈으로 그 고생을 보는 내가 마음이 약해질 때, 그는 극구 사양하지 않고 슬며시 내 도움을 받았다. 아무튼 고개를 쳐들고 다녀서 강해보이는 인상하고는 많이 달랐다.
그러다 한번 일이 났다.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해야 합니다.
이 무슨 망발인가. 2학년 담임 한 사람이 병가를 냈고, 담임이 없던 그가 그 자리에 투입되는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첫날 하루는 자율학습 시간까지 남아있더니 이틀 째 되는 날 그가 대놓고 불평을 하며 이른 퇴근을 감행한 것이다.
다들 피식 웃었다. 일정한 시간, 그러니까 비담임이 퇴근하는 그런 시간에 퇴근하는 것은 주류에서 밀린 현상에 불과하니까. 그가 보통만 되는 사람이라 해도 이런 기회를 이용해야 맞다. 때는 이때다 싶게, 어쩌면 담임보다도 더 나은 인상을 학생들에게나 주위 동료들에게 심어두었다가 이듬 해 담임을 맡는 일에 신경을 써야할 판이다. 그런데 퇴근해야 한다고? 이유도 밝히지 않는 그의 말을 교감이 들어줄 리도 없다. 여전히 영․수․국이 아니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곳이 학교다. 그런데 사회과 중에서도 정치․경제도 아닌, 하다못해 국사도 아닌 세계사, 그러니까 선택과목 결정에서 아예 저만치 밀리는 과목이면서 큰소리를 치다니. 너무 예상 밖이라 다들 멍했을 것이다.
그렇게 대체교사 없이 넘긴 다음날엔 교감이 드디어 역정을 냈다.
안 선생이 잡다한 과목이라 다행이오. 영․수․국이라 한들 담임 맡기겠소, 어디.
그런데 교감이 단어를 잘 못쓴 건 맞았다, 내 생각으로도. 그 순간 그가 폭발했다.
잡다한 과목이라 하셨소? 잡다한?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신 거 맞습니까? 친절한 말씀까진 아니라 해도 객관적인 말씀을 하셔야죠. 이건 또 바로 비문입니다. 안 선생이 잡다한 과목이다, 나는 도마뱀이다…… 뭐 그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화를 낼 계제가 아닌데 화를 내는 일이라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일로 어처구니 없어하는 것은 다른 동료들의 몫이었다.
아니, 저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건가? 교감이 한 말에 대해서, 중요과목 아니라고 사람 무시하지 마시오, 뭐 그런 식의 대응이야 그럴 수 있다고 기대되었지만, 비문이란 말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교감의 말이 그냥 말이지 무슨 문서가 아니질 않는가. 그러더니 더욱 가관이었다.
잡다한 과목, 잡다한. 잡스러운 것이 한데 섞이어 너저분하다는 말씀이죠. 세계사에 잡스러운 것이 섞였다. 세계사가 너저분하다. 인간의 역사, 그렇지요, 인간의 역사란 것이 너저분한 것이죠. 여러분의 역사가 너저분하다 그 말입니다. 누구 나와 보세요, 너저분하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여기 자신 있게 나설 분……, 교감 선생님 당신……
사태가 심각하게 번질까 두려운 순간 내가 나섰다.
아니, 고깝게 듣지 마쇼, 안 선생님. 영․수․국 아니면 나머지 통틀어서 잡다한 과목들이라고 하지 않소. 뭐 저 또한 그런 잡다한 과목이니 맘 놓고 말합니다만. 그러니 침소봉대할 것 까진 없소, 자 자아.
이렇게 중재랍시고 그를 끌고나오다 보니, 우리는 슬리퍼를 신은 채로 운동장 쪽 담벼락으로 나가 있었다. 해는 벌써 건물 뒤쪽으로 향해서 하늘은 뿌옇게 떠 있었다. 다행히도 기대어 선 붉은 벽돌은 아침나절 햇볕을 받아 아직 따스했다. 그는 털썩 주저앉았고, 나도 따라 그렇게 했다. 우리들 양복바지의 일그러진 모습이 우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잡다한 과목을 맡아 자존심 구겨진 교사들. 보도블록 사이로 돋아난 풀들도 우리 같은 신세로 보였다. 나는 특별히 그를 달랠 생각도,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냥 풀이 짓이겨져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식의 감상은 - 이건 욕된 말이지만 진실이다. 나는 가끔 누군가를 감상하면서 내 생에서 순간이나마 도피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있을 때면 나는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과 더불어 내 삶이 아닌 다른 어떤 곳 먼 데로 떠나가 있는 나를 발견하며 도리어 편안함을 느낀다. 아니, 내가 아예 없는 느낌으로, 뭐랄까, 희뿌연 공간의 편안함이다. 물기도 없어 보이는 풀을 쥐어뜯기를 몇 분간, 그러다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한국어과정에 다닙니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는 공부고, 또 출결이 엄격해서 결석을 하면 수료를 할 수가 없어요.
나는 아직 뿌연 공간에서 떠나오고 싶지 않은 채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단 말입니다. 국어과 교사가 부러워서가 아니라, 국어과 교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한국어를 공부한다고요.
한국어? 국어면 국어지 무슨 느닷없이 한국어요! 이렇게라도 대꾸를 했어야 하는데 아직 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첨엔 어디에서 국어공부를 할까 고민도 했습니다. 방송대? 그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졸업장 같은 것이 제게 필요할까 싶더라고요. 물론 제가 국문과 출신도 아니라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겠지만, 결국 국문과 졸업장도 별 것 아닌 것 같더라고요. 문창과 사람들에 비하면 국문과 사람들도 외도라면 외도인거라. 문제는 제 문장인거죠.
외도라니 누가, 뭐가요?
내 질문에 이번에는 그가 침묵으로 답했다. 다시 아래로 떨어뜨리는 눈빛에 아차 하는 표정이 섞였다.
어라, 안 선생님 글 쓰시나요? 교과서는 아닐 것이고…… 거야 유명 출판사를 업어야 시작이라도 한다는 것이니까.
이번에도 조용했다. 아까 교무실에서 트집하듯 한다면 교과서는 왜 아니냐고 라도 덤빌 판인데. 오히려 내가 뭔가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내 특기는 아닌데.
아니, 교과서는 은근히 좀 태들을 내고 하는 일이라서. 건 그렇고 선생님 혹시 진짜 글 쓰세요? 시인이세요? 단어에 민감하신 걸로 보아……
단어에 민감하면 안 됩니까, 소설가는.
소설가? 아니, 안 선생님, 소설가세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옆 자리 벌써 몇 달짼데 깜깜했소, 미안하게.
이런 참. 예, 맞습니다. 어디 내놓고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이 나라에서는 일단 관문을 통과하면 그렇게 부르더군요. 천 일을 넘게 단편 하나 발표하지 못하고 있어도 소설가.
대단하시네요, 세계사 선생님에 소설가라면. 그럼 역사소설 쪽을? 건 그렇고 사학과는 안 선생이 선택……
바로 그거요. 사학과는 내가 정했지요.
말꼬리를 싹둑 자르면서 내게 덤비다시피 그가 계속한 말은 대충 세계사 교사가 된 내력이었다. 국사에서 세계사로, 세계사에서 세계문학사 쪽으로,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까 문학이 더 매력적이더란다. 역사와 문학, 두 갈림길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완전히 흔들리는 몇 년을 보냈다. 연애와는 담 쌓으니 (내가 설명을 했었던가? 그의 아쉬운 키꼴을?) 유난히 밤 시간은 길었고, 최근세사를 그 나름대로 정리하기도 하고, 습작을, 습작이라기보다는 뭔가를 끼적거리는 습관이 생기더라고. 언젠가 쓸 단 한편의 역사서의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언가를 쓰고 있을 때는 자신의 도덕성을 이마에 새기면서, 언젠가는 단 한편이라도 발표할 수 있을 소설작품의 일부분을 쓴다는 생각일 때는 가슴에 진실성을 물으면서.
헌데 통킹 만 사건이 뇌리에서 계속 맴도는 겁니다. 북베트남 해군 어뢰정 두어 척이 미해군 구축함 매독슨가 머독스 호를 공격했다는 사건 말입니다. 전상자 한 명 없었던 사건이 미국한테는 베트남 참전의 구실이 되었잖습니까. 그러다 나중에 뉴욕 타임슨가 암튼 유력 신문에서 그건 베트남 전쟁도발을 정당화하려고 미국 측이 조작한 사건이라고 밝혀냈잖습니까. 결국 인간세상에서는 그래서 언제나 최소한 두 개의 정의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두 개의 정의?
그러니 역사 기술은 불가능하다, 이거죠. 역사는 거짓인 것이, 왜냐, 그럴듯한 진실을 내놓으려고 의도하니까 그렇지요. 차라리 소설이 진실인 것이, 소설은 있는 그대로의 결핍과 고통과 긴장을 드러내려고 의도하니까요.
나는 그의 말이 어디서 들었던가 읽었던가 그런 느낌에 빠져들었다. 눈만 껌벅거렸다.
의도에 있어서 진실한 쪽이 더 진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역사는 쉽게 버려지더군요. 소설을 쓰기로 덤볐다 해도 쉽지는 않은 것이 소설작법 한 강좌도 듣지 않았으니까요. 암튼 때늦게 엉겁결에 내었던 소설이…… 그런데 문제는 소설가이구나 싶으니까는 이젠 쓰려는 문장 하나하나가 다 맘에 걸리는 겁니다. 비문, 문법에 맞지 않은 문장을 피하려면? 먼저 주술관계, 주어는 반드시 서술어의 의미적 논항이 실현된 것으로 표현하기. 영어에서처럼 주어와 서술어 간에 단수 복수만 맞추라 해도 별 문제가 아닙니다. 영어보다 더 어려운 것이 한국업니다. 최대한으로 비문을 피했다 칩시다. 그 다음 정확하고 적절한 단어선택은 뭡니까. 어떤 문장에서 어떤 단어가 가장 정확하고 적절한지, 그것을 누가 압니까. 더더구나 친절한 서술은 뭡니까. 숨이 막혀서 말을 내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등장시켜놓고 어찌 친절한 달변을 하라 합니까. 그가 말을 우물거리면 작가라면 오히려 그를 따라 우물거려야 정직한 것 아닙니까? 친절과 정직 중에서 작가가 선택해야하는 덕목이 하나뿐이라고 가정합시다. 선생님 같으면 어느 쪽이십니까?
거야 작가가 아닌 나로서는……
관두시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건 또 뭡니까. 제가 이참에 공부를 하다 보니 우리말이 원래 어렵더군요. 중주어나 중목적어가 우리말의 특징이라고요. ‘이 책들을 반을 선생님을 드릴까요?’ - 내가 그렇게 목적어를 셋 씩 그냥 쓴다고 비문인가요? 아까 말대로, ‘사학과는 내가 정했다.’ 그렇게 말하면 주어가 둘인가요? 무엇이 주어인가요. 도식으로만 되지는 않는다 말입니다. ‘나는 자장면임다. - 난 짬뽕이오.’ 두 사람이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비문인가요 아닌가요, 예? 주어와 서술어의 의미적 논항이…….
그가 나를 정색으로 쳐다보며 말을 할수록 나로서는 해줄 말이 더 없었다. 이 친구는 그러니까 여차여차 등단 과정에서의 호의적 충고를 보약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좀생이였다. 보약은커녕 그것이 맹독이 되었나 보다. 한 작품도 더 이상 발표하지 못한 채 다듬고만 있다니 원.
그날 밤 나는 가만히 컴퓨터 세계에서 그의 이름 석 자를 쳐볼까 하는 유혹에 빠졌다. 간단히 쳐보면 될 일을 왜 망설이는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나는 가끔 다른 찾기를 하다가 실수로(?) 걸려 올라오는 시나 산문들에서 재미보다는 공포감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청산유수처럼 심지어 화려한 또는 서글픈 배경음악과 함께 드러나는 글들은 공포 그 자체다. 거기에 널브러진 수많은 글들을 위해서는 ‘수많은’ 보다 더한 수가 있어야 한다, 그 수많은 글들의 수를 안 선생의 말대로 ‘정확하고 적절한 어휘’를 찾아 표현해야한다면. 나는 언제부턴가 원고지에다 직접 손으로 쓰기까지는 않더라도 일단 컴퓨터에서 한글작업으로 쓴 원고를 프린트해서 출판사에 보내는 그런 작가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물론 독자를 만나며 살아가는 것은 완성되어 떠나간 문학작품의 제 운명이라지만, 발행부수가 너무 많다거나 인터넷에 친절하게도 온 몸을 드러내버린 작품들을 대하면 겁이 난다. 이런 표현은 신성모독일지 모르지만, 그럴 땐 손님이 많은 창녀를 떠올리게 된다. 창녀가 직업이면 벗어 보일 손님이 많아야 하듯이, 작가가 직업이면 당연히 읽어줄 독자가 많아야하는 철칙도 외면한 채.
사실 남의 말해서 안됐지만, 작가들의 수입이 원고료에 의존되어 있는 구조는 벌써 살인적이다. 많은 직종이 일을 하면 일의 결과에 관련 없이 보수를 받지 않는가 말이다. 어느 식당의 보조라고 치자,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설거지를 한 하루나 우연히 파리 날린 하루나 같은 보수를 받는다. 우리 교사들의 수업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월급은 하나의 호봉에 준한다. 어제는 잘 했다고 더 받고, 오늘은 덜 잘했다고 덜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소설을 쓰며 하루를 보낸 소설가에게는 아무런 보수도 없다. (‘소설’을 ‘시나리오’로 바꾸어도 같은 구조다.) 다만 그것이 팔려야 돈 비슷한 것을 만져볼 수 있다. 이렇게 매섭게 결과주의를 강조하는 구조는 소설가들을 죽인다, 그 본성에서. 소설가는 돈벌이를 따로 해야 한다, 본성을 반쯤, 아니 더 많이 내어다 팔아가며. 소설가는 몸이 살기 위해서 본성을 죽여 간다. 물론 천재적인 몇 예외는 논외로 하고. 뒤집어 말하면 그런 천재들 몇 사람만 소설가가 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존경해야 마땅할 다작과 출세작에 대해 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누구라도 하필 손님 많은 창녀와 비교했다고 화를 낸다면, 역사적으로 가장 오랜 직업에 대한 편견을 가진 그가 문제일 것이다. 상당수의 저열한 포르노 작가들도 버젓이 예술가 행세를 해도 되는 세상이다. 안 선생이 들으면, ‘저열한’이 ‘포르노’에 걸리는가 ‘포르노 작가들’에 걸리는가 따질 것이다. 포르노가 특별히 저열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우기는 포르노 작가들의 태도는 확실히 저열한 짓이다. 그들이 위선이라고 밀어붙이는 클래식 애호가가 소수이듯이 포르노 취미도 일정한 독자에 한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포르노가 특별히 저열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나도 실은 비겁하다. 정말은 그것은 저열하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상상력을 결정적으로 죽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독서도 영화도 점점 멀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 적나라한 그것들에게 내 겨우 남아있는 상상력을 노략질당하고 무시당하기 싫어서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안 선생이 소설가라는 말에서 감탄보다는 걱정이 먼저 일었다. 그래도 그가 무슨 소설을 썼는가 하는 궁금증이 걱정을 이긴다. 흔치 않은 성에 이름도 썩 편한 발음이 아니어서인지 인터넷 세상에 곧 그가 모습을 드러났다.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있었다. 갑자기 온 세상의 무게가 엄습했다. 나는 그를 찾지 못했어야 했다. 그러면 나는 더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엔 인터넷이 나를 중도에 배신한다. 단 한 편 제목뿐이다. 「도마뱀」. 그가 「도마뱀」으로 입상한 신인공모에서 당연히 기관지가 발행되고 있었는데, 호수별로 제목만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을 읽을 수는 없었다. 도마뱀과 관련해서 다른 데 하나 둘 사이트를 보다가 그냥 말았다.
몸길이는 47mm 정도, 꼬리길이는 44mm 정도이다. 몸통 중앙부에는 28줄의 넓은 비늘이 덮여 있다. 꼬리는 원통모양이며 끝이 뾰족하다. 산간 초원이나 묵은 밭에서 살면서 주로 개구리, 거미, 물고기, 곤충, 지렁이, 노래기 따위를 잡아먹는다. 천적으로는 때까치 등이 있다. 위험에 부딪치면 꼬리를 흔들어 적을 유인한 다음, 꼬리를 잘라 적이 당황하는 동안에 도망쳐 숨는다. 꼬리는 바로 다시 생기지만 꼬리뼈는 생기지 않고 대신 연골 비슷한 흰색 힘줄이 생긴다. - 도마뱀은 적이 나타나면 꼬리를 잘라 버리고 도망을 친다. 도마뱀의 꼬리는 다시 자라고, 도마뱀은 자기의 꼬리를 원할 때 다시 자를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자른 후에 나는 꼬리는 원래 있던 뼈와는 달리 물렁뼈로 이루어진다. - 두 백과사전들에 보니까 서로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잠자리에 들어서는 갑자기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 잠을 청했다. 자른 꼬리를 또 자를 수 있는지, 그 부분이 문제였다. 그것이 꼭 알고 싶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날 나의 은근한 기대와는 달리 그는 조용했다. 한발 가까이 다가갔다고 느낀 것은 나 혼자였다 싶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그냥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다만 그는 부담임 노릇을 확실히 사양하고 제 시간에 교무실을 나섰다. 할 수 없이 교감이 그 시간을 지키는 모양이었고, 실제로 그런 것이 교감의 임무 중에 포함 될 것이었다. 은행에도 가보면 맨 첫줄의 행원이 자리를 비우거나 손님이 많거나 하면 중간에 있는 상관이 빈자리를 메우지 않던가. 우리는 실제로 인해전술이라는 작전도 들어본 민족이다.
며칠 후 나는 교감에게 그의 이야기를 귀띔했다. 사실은 등단한 소설가이고, 꼭 필요해서 국어 관련 강의를 듣는 모양이더라고. 한국어라는 말은 피했다. 복잡해지기만 할 것이 뻔했으니까. 소설가? 하며 놀라던 교감은 이내 승복이랄까 포기랄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소설가를 포함해서 미술이다 뭐다 뭔가 예술 쪽으로 관계된 사람들은 조금은 규범을 모르고 방자한 경향이 있으려니 하고 치부하려는 듯한. 그것이 교감으로도 편할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분류하고 해석해서 감정에 마감을 지어야 했을 것이니까. 진짜 예술가라면 승진이다 점수다 하는 것에 관심을 덜 치대니까 경쟁대열에서 빠져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근평을 손에 쥔 상관으로서 편해지는 점도 있을 테니까.
시간은 생각보다 잘 흘러간다. 벌써 여름방학이 왔다. 다른 직종의 사람들이 늘 부럽다고 말한 방학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상당수 교사들에게는 그렇게 쉬는 방학이 아니다. 승진을 위한 연수나, 그에 따른 교육대학원 공부들도 심심찮지만, 무엇보다 보충수업이다. 영․수․국 이외에도 여러 과목들이 보충수업에 편성되지만, 세계사가 거기에서 빠진 것은 순전히 안 선생 때문이었다. 그는 완강히 방학동안의 수업을 거부했다. 방학동안의 수업을 희망한 교사들은 방학동안의 수업을 거부한 안 선생을 오해했다. 안 선생이 수업을 하지 않음으로서 아무런 손해를 볼 이유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런 심리에 대해서 무어라 말해야 될까, 괜스레 옆자리의 내가, 작가도 예술애호가도 아닌 내가 한참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그가 잠적했다.
그해 가을학기였다. 그동안 태양이 이글거리는 여름을 만끽했을 시점에서 그는 오히려 보릿고개에 누렇게 뜬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침부터 졸고 있는 태에 순간 겁이 나기도 했다. 어디가 몹시 아픈가? 그는 시간만 나면 의자를 뒤로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해를 등지고 앉았으니 해를 보려는 것인가 했다. 초추의 양광이라, 누구든 따스함이 그리운 것 아닌가. 이 햇볕이 가고나면 몇 달 동안 파르스름한 해로 만족해야 하는 계절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자세히 보았더니 그는 해가 아니라 길게 난 창문들 사이 회칠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면을 바라보며 가늘게 입술을 딸싹거리고 있었다. 무서웠다. 갑자기 헛소리를 준비하는 것일까? 정말 무서워지기 시작할 때, 그를 방해해보기로 했다.
안 선생, 거 1학기 총 수업일수가 몇이라 했소? 어디 적혀있을 것인데 어느 파일인지 원……
그는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수업일수 파일이 어떤 거요? 요즘엔 좀 깜빡깜빡하는 게……
그는 영 딴 세상에 가 있었다. 더 이상 방해할 명분도 안서기에 그냥 입을 닫고 마는데, 그가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뭐라 하신 것 같았는데요, 제가 좀.
아니, 되었소.
되었소가 아니라,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 제가 지금 고시준비를 해야 한단 말씀입니다. 이 나이에, 웃으시겠지만, 자격검정시험을 보려고요. 그래서 지금 책을 꼭 열한 권을 사놓고 이것들을 읽어가며 외워야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말문이 막혔다.
선생님, 느닷없이 이런 황금 같은 시간에 그동안 그렇게 터덕거리던 글이 쓰인다 말입니다. 책의 중요도와 두께에 따라 10월 초 시험 일자에 맞춰 계획표를 짜두었죠. 시험은 연 1회 뿐이라요. 해서 저녁이면 동학들이 함께 공부방을 빌리는데, 공부방 아시요, 노래방, 피시방만 있는 게 아녀요, 요즘 대학가엔 공부방이 있어요. 저녁시간은 한 시간에 각자 2000원이니까, 서너 시간 하다보면 김밥 한 줄까지 한 사람당 만원은 써야 해요. 아, 그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맡은 범위를 공부해가서 발표를 해야 하고, 꼭 대학 때 그룹스터디 하는 식이죠. 그런데 이 무슨 조화인지, 책상에만 앉으면 공부해야할 책으로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자판이 유혹을 해대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책에서 배운 한두 가지 사실에 그만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새 글> 폴더를 열고 글을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동안 벌벌 떨고 쓰지 못했던 무수한 문장들, 또 비문이나 아닐까 해서 겁냈던 산더미 같은 문장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겁니다. 어째야 되는 겁니까? 그 샘솟는 글들을 시험 공부한다고 막아놓아요? 그렇다고 스터디에 가서 발표해야 할 분량은 따로 있는데 그걸 소홀히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죠. 나이 더 드신 분도 섞여 있고, 젊은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명색이 저는 교사 아닙니까. 국어과는 아니라 해도 암튼 교사라고 해서, 암튼 스터디 사람들이 저를 상당한 실력가로 오인한단 말입니다. 말이 됩니까? 수학선생이나 사회과선생이나 한국어문법과 무관한 건 마찬가지 아녀요? 더구나 한국문화 과목에선 훨씬 잘 아는 줄 알고요. 비보이가 한국에서 특출한 이유는 사람들 다리가 짧아서 어쩌고 하는 문제가 나오는 판인데, 그게 역사하고 무슨 관계라고! 암튼 놀랍게도 일반인들 생각에 교사는 어느 정도 전지전능한 거예요. 하긴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예쁜 여선생님은 화장실도 안가는 존재일거라고 생각했잖아요. 암튼 이 유능해야할 교사인 내가 맡은 분량의 공부도 해가지 못하면 큰일인데, 몇 년을 터덕거리던 글이 왜 하필 지금 줄줄 나오느냐고요. 겁이 달아나서일까요? 그러니까 비문을 쓰게 된다거나 하는 겁이. 바로 이 공부, 이상하시겠지만, 한국어 공부를 하다보니까 비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비문이 아닌 거예요. 보세요,
그해 영어말하기 대회는 우리 학교에서 이겼다. 일등공신은 아무개, 고장 난 형광등이었다. 수업시간이면 늘 고개를 처박고 앉았던 녀석이 영어이야기를 그 긴 문장들을 그리 술술 외울 줄이야.
잠깐, 그게 단편소설 중에……
아니고요. 그냥, 예컨대. 전 같으면 이런 문장 하나하나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죠. 주어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 우선 주격조사 ‘이, 가’ 있는지 점검하고, 주어와 서술어는 제대로 의미 논항이 되어있는지 검토하고. 선생님, 저는 그동안 거의 한 문장도 영구저장을 할 수 없었단 말입니다.
영구저장?
그 말은 좀 이상합니다만, 예, 이제 더는 고치지 않겠다고 저장해서 <영구저장> 폴더로 보내는 일말입니다. 저는 <영구저장> 폴더에 들어있지 않은 문장은 시집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철직을 만들어 두었지요, 신인상을 받은 그날 밤 결심이었죠. 이제부터 엉성한 글들을 남발해서는 늦깎이 신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으니까요. 그래서 책상에……
후훗.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소리를 감추며 얼른 안 선생이 내 웃음에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둘러대었다. 하지만 이 친구가 좀 꼴통이다 싶었다. 좋은 말로 편집병. 신인작가가 뭐라고 완벽한 문장생산에 목을 매나? 가소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은 심각했다.
예, 뭐. 카프카의 책상입니다. 이 시대 누구라도 카프카에서 자유롭진 못하죠.
난 아닌데. 사실 이런 장난말은 내뱉지는 못했다. 그가 너무 진지했고 또 실은 비집을 틈도 주지 않았다.
그가 일찍 병든 것은 아시죠. 그가 여행을 포기할 때 병 때문이라고들 생각했겠죠. 그는, 제가 정확한 말은 외우지 못하지만, 암튼 이렇게 변명했어요. ‘여행에 대한 내 공포심에는 심지어 내가 적어도 며칠간을 책상에서 떨어져 있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한 역할을 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생각이야말로 실제로는 유일한 바른 생각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현존재는 실제로 책상에 의존해 있으니까. 작가는 본래 정신착란에서 벗어나려면 절대로 책상을 멀리해서는 안 되고, 이빨로 꽉 물고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1)
줄줄 외우시네요! 그 말도 나는 못 건넸다.
그러니 아무 것도 아닌 무명은 당연히 책상에 붙어 앉아야죠. 하지만 죽어라 책상에 붙어있어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썼다가는 고치고, 고치고는 다시 쓰는 소모성 질병의 연속, 그것이 글쓰기였습니다. 습작 때가 아니라 오히려 등단 후에. 그러니까 ‘강한 실험정신에 토대를 둔만큼 사건 전개나 사색적 언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지만……’ 거기까지는 인심 좋은 서두였겠지요, ‘신인들이 항용 빠지기 쉬운 몇 가지의 단점’ 거기서부터……
정말 외우시네요! 이제 그를 방해하고 싶어 끼어들었다. 소용없었다.
거기서부터 저를 옥죄는 시금석이 된 겁니다. 첫째가 친절하지 못한 서술로, 작가의 관념에 의해 대충 넘어가는 식의 서술은 그 작품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독자로 하여금 작품 이해에 큰 장애가 된다는 점. 둘째는 자주 발견되는 비문으로, 작가는 자신의 일상적 언어 습관에 의해서 서술하지만 독자는 제각기 자기식의 어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른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객관화된 문법체계를 따라야 한다는 것. 셋째, 이것도 무척 자괴감이 들게 된 동기인데, 어휘의 정확하고 적절한 선택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심사평을 줄줄이 외우고 있느라……
당연하죠. 그러고는 글쓰기가 아예 어렵게 되었죠. 보세요, 한 문장을 채 다 쓰기도 전에 내가 쓴 단어가 정확하고 적절한가, 한 문장을 마치면 이것은 비문이나 아닐까, 이런 글은 친절한가 아닌가…… 더하고 빼고 앞으로 보내고 뒤로 보내고…… 그러니 어떻게 진전이 됩니까. 나중에는 컴퓨터 자판에서 편집질 하는 것을 피해보고자 옛날처럼 원고지에, 그러니까 이제는 대신 공책에 써보려고 했지요. 그건 기가 막히는 고통이었습니다. 우선 제목보터 쓰고 시작을 한다고 칩시다. 제목의 폰트는 당연히 다른 거죠, 그렇게 컴퓨터에서 써왔으니까요. 그런데 크기는 그렇다 치고, 볼드체가 손으로 써집니까? 그건 또 제목 몇 글자니까 시커멓게 덧칠하며 썼다고 치죠. 이 서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제게 글씨가 남아있지 않더란 말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공책에 소설을 쓴다?
예, 그런데 공책에 써보니 맞춤법이 더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컴퓨터에서는 붉은 줄이 나오거나 뭐 너무 이상한 오자는 저절로 잡아지고 그러지 않습니까. 다 쓰고 나서 <도구>에 들어가서 맞춤법 잡으니까 그때 고쳐도 되고. 하긴 그래도 어휘 자체의 적절성 여부는 컴퓨터가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오자에는 큰 신경을 안 쓰고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공책에 쓰려니 매번 맞춤법이 의심스러워 지는 겁니다. 아니오. 또는 아니요. 그걸 써 놓고도 구분이 안 가면, 선생님 같으면 글을 쓰시겠어요?
내가 왜?
암튼 제2외국어과목이라고 한글 안 쓰시오? 여기서는 ‘쓰시요’ - 하면 틀리지요. 틀리지요는 틀리지요가 맞고. 일단 정확한 맞춤법에 하나하나 고민을 하다보니까, 비문이 되는지 여부는 그 다음이더라고요. 결국에……
결국에 가서는 글을 못 쓰신 이유가……
예, 컴퓨터에서 안 되니 공책에다가, 거기선 더 막히고. 암튼 일단은 국어공부를 제대로 하자 그런 거였지요. 이름이 한국어공부가 되었는데, 조금 빗나간다고나 엇나간다고나 그런 점이 있긴 해도. 암튼 어문규범이다 음운론이다 제대로 한국어공부를 하는데 그걸 제가 빠지고 담임 대타로 바우처 같은 것을 담당해야 하느냔 말입니다. 방학 내내도 시험 준비를. 참 열에 한 맛도 없는 변명이겠지만.
열에 한 맛도? 안 선생, 역시 말이 감칠맛이……
감칠 맛 가지고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사생결단이오, 사생결단. 무어랄까 위기의 순간에서 꼬리를 자르고 도망쳐 살아나는 도마뱀 같은.
앗, 드디어 도마뱀이 튀어 나왔구나. 나는 그 제목을 모르는 척 내숭을 떨어보았다.
난 또. 세상 피해 글 쓰러 들어간다는 말도 아니고, 도마뱀 몸통 자르듯이 글을 써요? 거 도마뱀이 잘라낸 것이 몸통 아니요? 몸통을 자르고 뭣이 더 남아서?
그러기에 사생결단이라 하지 않았소. 꼬리든 몸통이든 자르고 도망쳐야지요.
진짜로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 도마뱀은 그 피투성이 기록으로 작품을 남기는 것입니다. 몸통을 살려낸 도마뱀은 꼬리만 물고 허탈해하는 독사에 대해 승리감을 가질 것이고. 꼬리를 자른 선택에 관해서 의미부여를 하며.
도마뱀에게라면 위기 탈출이 절대적 선택이겠지만.
겠지만? 아뇨, 그 이상입니다. 천적을 만났을 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건 분명 비장의 무기이고, 예컨대 살모사가 아직 꿈틀거리는 도마뱀의 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틈을 타서 도마뱀은 목숨을 건질 수 있으면 되었지요. 이제 거기에 그 경험을 잘 다듬어서.
다듬어요? 죽다가 살아온 경험을 쓰면 된다는 말씀이군요. 아하, 일단 꼬리 잘린 도마뱀은 그런 처절한 경험이 없는 다른 도마뱀들에 비해 아픈 만큼 성숙한다, 뭐 그런? 더구나 잘라진 꼬리는 나중에 다시 돋아난다고 하니까요.
나도 조금 아는 척을 해보았다. 그의 눈이 샐쭉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좀 다른 문젭니다, 제 생각엔.
다른?
도마뱀을 노리는 적이 주변에 많을수록 꼬리를 재빨리 자르고 도망치는 개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은 건 사실입니다.
그럼 되었지 뭐 또요. 게다가 그것을 가공하여…….
그래도 꼬리를 자르는 건 도마뱀에게 큰 부담입니다. 꼬리가 없는 동안에는, 그러니까 그 험한 경험을 작품으로 가공할 수 있다 해도 일단 잡아먹힐 위험이 커집니다. 새 꼬리를 만드는 동안에는 몸통 자체도 자라지 못합니다. 동작도 굼떠지고, 심지어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도 떨어집니다. 어차피 소설가의 지위야 꼬리 잘린 도마뱀 수준이지만요. 더구나 이제 그 새 꼬리라는 놈은 더 이상 자를 수가 없답니다.
뭐요? 도마뱀 박사가 따로 없네요.
새로 돋아나는 꼬리는 척추가 아닌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더는 못 자르죠. 소설 한 편 떴다가도 평생 태작만 내놓다 마는 소설가와 다름없지요. 도마뱀으로서도 평생 꼬리 잘라먹은 놈이라는 꼬리표를 함께 달고 사는 것이겠지요. 새 꼬리는 원래 것보다 색깔도 안 예쁘답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가 중요 하겠습니까? 소설작품은 어찌되건 일단은 살아남아야 쓰는 것이니까 저라면 꼬리든 몸통이든 자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겠지요. 꼬리를 조금만 물려도 그게 독사라면 금방 독이 퍼져 죽을 것이니 잘라야겠지요, 싹둑.
아니 안 선생, 정말 뭐 싹둑 잘라낼 원망 같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말씀이쇼? 그저 따라서 해보는 소립니다. 무엇인가를 끊어내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 아닌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아마 누군가는 그냥 그 독으로 죽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제 일부를, 이를테면 마음, 심장, 가슴 뭐 그렇게 불리는 어떤 것을 잘라내고도 살 수 있을지, 그것을 가공하여 작품화하는 강심장을 가질 수 있을지, 그건 꽤 어려운 선택입니다. 아니 선택이기 이전에 운명입니다.
그냥 죽거나 그것을 쓰거나?
예, 실존과 방법의 갈림길입니다. 삶인가 글쓰기인가 하는.
도마뱀과 갈림길이라. 안 선생은 지금 우리가 오늘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고 말하려는 군요.
*
이렇게 안 선생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새삼 혼란스러워진다. 그에게서 뭔가 전염이라도 된 느낌이다. 나의 위상이라는 것도 내가 담당한 과목의 세력과 같이 바닥이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 중 택일의 운명에다가 수능에서는 한문까지 합쳐져서 8대 1의 관문을 뚫어야 한다. 학생들의 선택 이전에 학교장의, 사립학교라면 설립자님의 인생관에 따라 정해지는 운명을 살아갈 뿐이다.
다음 학년도에는……
교장 교감은 누구라도 염려다. 들으라는 듯이 곁눈질을 해가며 영어가 아닌 외국어 문제를 고민한다.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어쩌자고 무턱대고 서양문학에 정신을 팔았을꼬. 더구나 아무도 그때는 너의 뿌리를 기억해라 그런 식으로 말해주지 않았다. 서양이 희망이었다. 우리 것은 천년 묵은 신앙까지도 타파해야할 미신이었다. 그럴 때 영어와 불어로 자유자재로 아리송한 작품들을 발표한 괴팍한(?) 작가는 충분히 우상이었다. 상상 만으로도 드높은 무엇인가에 이르는 듯 착각이었다. 『내가 아니다』에서 독백하는 여배우의 커다란 입…… 신에게서 벌을 받으면서도 이유도 모르고, 기쁨을 몰랐듯이 그 벌에서 고통도 모르는, 혼란과 매력, 아, 그만두자.
이제 와서는 대놓고 맞장을 뜨자는 여자애들의 입이 더 두려운 나. 기껏 딸보다도 어린 애들이 버겁다니. 내 수업 시간에 다른 참고서를 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덤빈다. 학원에 숙제 해가야 되거든요.
와, 죽을 일이다. 교실은 난장판, 선생은 죽을 판 뭐라 뭐라 하더니만. 내가 학생 때 수업시간에 몰래 소설책이나 읽었던 벌을 그대로 받는다. 물론 그땐 선생님에게 대들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쥐어 박히면 죽는 시늉이 전부였는데.
또 슬리퍼만 신은 채 빠져나온 교정의 담벼락 아래에서 나는 그의 말대로 무명작가 안 진수의 넋두리를 안주삼아 빈손으로 빈 술잔을 들이킨다. 너는 도마뱀, 나는 그러면 빈대다. 네 글에 빌붙어 쓰는 빈대. 진짜 쌉쓰름한 한잔이 그립다, 아니 쌉싸래한. 방언을 썼다간 꼼꼼한 성격의 등장인물인 도마뱀이 화를 낼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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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시대> 19호, 한국작가교수회, 2011.3.31. 136-1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