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2. 12. 4. 01:55

 

편지

 

 

                                     베케트의 <행복한 나날들> 중에서 :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어요.

그런데 다 말해버리지요. 할 수 있는 전부를.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죠.”

가을은 은행잎으로 가을입니다.

비가 오거나 아니 오거나.

연구실은 춥지 않으신가요.

 

 

   누군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을에. 이런 편지를 엿보게 된 나는 궁금증에 참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대 밖에서 진부하게라도 이야기를 꾸며봅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자신의 말 대신 명작의 인용 뒤로 숨습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춥지 않은지 가벼운 안부가 전부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신은 연구실이 있는 사람이며, 연구실이 추울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해버린 사람이며, 그래서 당신을 잃었고, 그래도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또 한 가지 사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편지는 아니며 흔히 지금 사람들이 선호하는 이메일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당신과 그 사람은 이메일주소를 아직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실이 두 사람에게 남아있을 뭔가를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구실이 있는 사람의 이메일주소라면 그것은 감추고자 하더라도 감춰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의 이메일주소 노출 정도가 관계의 정도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계?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면 정정하렵니다. 그러나 얼마나 먼 관계인가, 얼마나 사무적인 관계인가, 그런 말을 하고자 할 때도 써야 하는 단어가 ‘관계’인 점을 강조하렵니다. 그러면 오해는 풀릴 것입니다.

   당신은 이런 편지에 답을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봅시다. 당신은 이런 편지를 곧 바로 지워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답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아니, 더 처음부터 시작하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런 편지를 아예 열어보려고도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보낸 사람의 이름만으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당신은 지난 일들에 대해서 돌아보는 진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편지의 성격 상 열려버리기도 합니다, 사소한 잘못으로. 여러 개의 편지들 중에서 하필 하나만 남겨져 있다가 우연히 방심한 순간에 마우스의 작동으로 열려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이 편지는 그래서 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열고 보니 당신의 가슴이 조금 찡합니다. 평상시의 당신의 태도로 보아서 당신이 답을 쓸 리 없음을 아는 사람이 이런 편지를 쓰다니. 아직도 이렇게 마음이 묻어나는 편지를 쓰다니. 한 순간, 아주 짧은 한 순간 마음이 닿았더라도, 스쳤더라도, 만남은 만남인 것을. 당신은 그것마저 부인할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만남은 순간이며, 특히 괘도가 다른 직선의 만남은 순간 중의 순간일 뿐임을 누군들 부정합니까? 그래서 아름다운 순간이 정지하기를 바라는 것이 동서고금 남녀노소의 일입니다. 만일 아름다운 순간이 허락된다면 말입니다. 그래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특히 당신과 같이 이성적이고, 많이 이성적이고, 최고로 이성적인 사람으로서는.

 

   그러므로 당신은 회신이라는 간단한 장치를 뚫어지게 봅니다. 절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답을 쓸 리가 만무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읽지도 않고 지우는 무례를 범하지 않았음에 스스로 뿌듯해할지도 모릅니다. 이성적인 동안에도 매정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충분히 이성적입니다. 이 편지를 더 이상 거기 아이티 세상에 살려두지 않을 만큼 이성적입니다. 간단합니다.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서 편지는 휴지통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전에 어쩌다가 우연히 나의 편지함으로 ‘전달’되어버린 것을. 방해꾼은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휴지통에 쌓인 수많은 쓰레기들 중에 섞여 얼마를 더 연명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원래의 자리에 복원되어 당신의 눈앞에 다시 존재하게 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꿈을 꾸는 것은 자유일 것입니다. 편지는 게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꿀 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고 당신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러나 아무 소용없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이 잠 못 이루는 밤이 끝나지 않아도 희망은 끝납니다. 어느 날엔가는 당신이 휴지통을 말끔히 청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편지를 쓴 사람과는 참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잊었습니다. 당신에게도 비이성적인 순간이 있었음을. 하늘과 바다가 맞닿고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는 절해의 고도. 상상의 자리에서는 당신도 마그마처럼 끓었던 순간이 있었음을. 당신이 이성적인 것은 지나간 순간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서입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훌륭하게도 이성적입니다.

   만일, 만일에 훌륭하게도 이성적인 당신이 조금 흐트러질, 조금이라도 흐트러질 시간이 올까요? 아무리 이성적인 당신도 사람이고, 사람이면 조금 흐트러지는 때가 왜 없을까요? 그래서 당신도 아주 드물게라도 흐트러질 수 있다고 해 봅시다. 물론 이 편지와 관련해서는 이미 편지는 죽어버렸을 때입니다. 그저 전혀 다른 계기로 당신의 몸속에 알코올 성분이 많아졌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매우 인위적으로 이성의 자리를 감성이 꿰찬 겁니다. 아니, 감성이 당신을 송두리째 꿰찼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일이지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조금 상스럽게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고쳐봅시다, 감성이 우위를 점한 때.

   당신에게서 감성이 우위를 점할 때는 드문 일입니다. 그래도 가능한 일입니다. 당신도 사람이니까요. 원래도 감성을 이성으로 누른, 실은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사람이고 보니, 어느 날엔가는 감성이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니까요.

 

   그럼 이제 한번 편지를 쓴 사람을 떠올려 보시지요.

   그(녀)는 - 이렇게 굳이 괄호 속에 (녀)를 쓰는 이유는 누구의 성별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소심 때문이니, 당신도 또는 독자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로 왔습니까? 이 표현은 다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왔다는 말은 옳지 않겠지요? 어디까지나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오게 한 것이겠지요. 당신의 의지가 없었을 때 그(녀)가 당신에게로 왔을 리가 없는 이유는 압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오는 것을 그냥 허용할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혹은 그 순간, 당신이 찰나에 감상적이 된 때문이었겠지요?

   어쩌다가? 어쩌다가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무래도 어떤 외부적인 힘이 작용했겠지요? 말하자면 있었던 것을 있었던 것으로 하고야 마는 자연 법칙 같은 것. 우리가 잊거나 잊으려 한다고 해도 한번 태어난 것은 사라지지 않지요. 우리가, 생명체가 한번 태어나면 그것이 죽어 사라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성분은 어떤 형태든 모양이든 찌그러들 대로 찌그러들어도 썩어서도 어딘가에 남아있게 되는 것처럼. 그러니까 예컨대 한 겨울 바닷가의 눈물 같은 것도 볼의 열기 때문에, 닦아준 손수건에 적셔져서, 또는 덮어버린 입술에 묻혀서, 아무튼 어떻게든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 녹아들어 남게 되지요.

 

   나는 이제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녀)가 갔습니다. 떠났다는 말입니다. 겨울은 떠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하더니, 그때 정말 겨울에 떠났습니다. 유언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겠죠. 물론 지병으로 죽음을 예감하는 사람들이 아닌 바에야 누가 얼마나 유언을 남기나요? 어쨌거나 어느 출판사에서 기획한 책자에 <미리 쓰는 묘비명> 비슷한 코너에 보낸 글이 남았습니다. 물론 보낸 것 보다 더 길게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었답니다. 연습이었는지 모르지만, 여기에 마저 그 편지의 계속이라고 치부하고 읽어보겠습니다.

 

 

 

   마그마를 향하여

 

   은행잎 우수수 지는 어느 늦은 오후.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라는 문자를 보내 왔다. 선배 문우께서.

   아, 그런 오후이면 잠들기 좋은 시간 아닌가.

   비가 내린다면 빗물에 젖은 은행잎 따라 흘러가기 좋을 것이다.

   발길에 찢기어도 여전히 노란 은행잎 부스러기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흘러들기 좋을 것이다.

   그들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아래로 아래로 어디까지 가는가.

   우리는 지표를 뚫고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 것이다.

   몸과 맘 모든 속성들을 끌고 아래로 아래로 간다.

   속성들은 원자와 분자가 되어 밀고 당기고 마그마에 섞일 것이다.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마그마 속에 한데 섞이어

   몸도 맘도 초월한 마그마가 되어 흐를 것이다.

 

 

   마그마 - 얼마나 뜨거우면 돌덩이가 녹을까.

   얼마나 녹아서 ‘돌물’이 되어 흐를까.

   지각 바로 아래 외핵을 둘러싸고 있는 두꺼운 암석층 맨틀에 이르기는 할까.

   아니, 맨틀 최상부의 섭씨 100도를 견디기나 할까.

   맨틀의 대류는 혼돈 과정. 내핵은 고체이고, 외핵은 액체이며, 맨틀은 가소성 고체라.

   지구 표면에서는 낮은 온도로 고체이던 광물질들이 마그마에 이르면 소용없다.

   암석 농축액 마그마, 그 속에 섞인 은행잎 부스러기들은 설마 불순물일까.

   마그마에 섞여 녹으면 지표면의 일들을 기억이나 할까.

   몸을 기억하지 못해도 맘도 잊을까.

   몸은 형체가 사라진다.

   맘은 무엇이 사라질까.

 

 

   몸은 실존의 현장이었다, 인간이면 예외 없이.

   겨울의 나무 - 길고 부실한 몸은 용적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첫아이라서 아이는 버리고 태만 주어다 길렀나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자라났다.

   좋아하는 움직임,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것들…… 있었을까?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탐한 적이 있었을까?

 

 

   단연 아니었다.

   손을 뻗치면 무엇이건 다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바보같이.

   준비성 만점의 (외)할머니는 욕구의 싹이 자랄 틈을 내주시지 않았나 보다.

   할머니가 엄마였다. 어머니는 우리랑 함께 할머니의 딸이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일찍 학교에 보냈다.

   네 살 때 벌써 문전옥답 값으로 가죽 란도셀 가방과 호랑이(?) 모피코트를 준비해놓으셨다 했다.

   그것들을 맸거나 입었던 기억은 없어도 작은 모피코트가 아직도 남아있다.

   내가 천리 길 먼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내가 부모자리가 되었을 때까지도 여전히 할머니의 아기였다.

 

 

   맘은 늘 아기는 아니었다.

   물병자리 B형. 천성적으로 집단과 강요에 약한 고립적 고집적 마음의 소유자.

   체육시간 내내 벤치에 머물며, 소외되어, 마음은 오히려 일찍 성장했다.

   성장? 한껏 조숙하여 개똥철학에 기울었다.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시를 썼다. 첫 발표는 「무제」.

   가소롭게도 인생은 주제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표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건방짐이 오래 갔다.

  

 

   농축된 시를 쓸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유트릴로의 하늘을 따라 그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절대음감으로 피아노를 두드릴 수 없다고, 재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책 속에 정신이 있다고 믿었다. 재능과 달리 읽으면 되는 것이 책이라고.

   책이 유일무이한 벗이었다.

   책들은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거기에 존재했고, 나는 희노애락 감정이 없이 그들과 노닐었다.

   단조로움 속에 단정한 삶이 있다고 믿었다.

   희로애락은 장신구일 터였다.

   장신구는 있어 좋기도 하고 있으면 불편하기도 한 존재가 아닌가.

 

 

   정신에 집중하기를 소망했다.

   육신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그 둘이 똑같은 비율로 섞이지 않을 것이므로.

   더 정신으로 뭉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니까.

   정신은 날개 없이도 한없이 날 수 있을 것이니까.

   어디로? 목적은 없었다.

   목적을 초월할 수 있음을 우수한 자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구체적 목적에 들린 삶을 조금은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목표지향적 삶을, 욕망이 많은 삶을 저열하다고 간주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조금 안쓰러워했다. 건방지게.

 

 

   내 맘은 내 정신은 강했다고 믿었다.

   내 맘은 내 정신은 상처입지 않았다고 믿었다.

   내 상처를 두려워하여 행여 타인에게 상처를 주게 될까 겁을 먹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겁 때문에 결국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구나.

 

 

   예 - 참 어려운 단어였다.

   함께 가자 하면, 예 하고 서두르지 못했다.

   확신이 안 선다는 생각에 더듬거리기만 했다.

   효, 우애, 우정과 사랑의 이름으로도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했으니, 애국애족은 언감생심.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엉터리 산수를 믿지 않았다.

   두 개의 마음을 더하면 둘이 정직한 답이다.

   아니 넷일 수 있다는 상상을 더 신뢰했다.

   왜? 원래 하나의 마음도 늘 하나가 아니니까, 적어도 둘씩이니까.

  

   마음은 늘 갈래였다. 누구의 마음인들 그러지 않았을까. 동시에 둘을 원하기는 오히려 어려웠다. 직장을 쉬이 갈아 치운 것만 보아도 드러난다.

   한번은 다 놓고 소설만을 쓰겠다고 작정하기도 했다.

   그랬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문학작품들을 파먹고 산 세월 동안, 손가락이 하이에나의 그것들처럼 넷으로 변하고 꼬리가 돋는 기분에 소스라쳐서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여러 주제를 섞어 담은 장편 출판을 계기로 어정쩡 소설가가 되었다. 시를 쓰는 젊은 선배는 소설 다섯 편을 쓸 이야기를 한 데 엮어 넣었다고 ‘비경제성’을 탓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여전히 무명이었다.

 

 

   그렇게, 오랜 동안, 적어도 한참 동안 무엇인가로 쏠렸다. 다른 것들을 다 잊었다. 그러다 식었다. 다른 무엇인가로 한참동안 쏠렸다. 그러다 식었다. 오래 식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식을 것이다. 아니, 이제는 시간이 없다.

 

 

   아니오 - 참 어려운 단어였다.

   비가 내리면, 아니오 하고 우산을 쓰거나 집안으로 뛰어들 만큼 신속하지 못했다. 비는 내리면 맞는 법. 사람의 마음도 어쩔 수 없다. 오는 색으로 맞는 법. 비도, 사람의 마음도, 자연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자연을 신앙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아래로 아래로 간다.

   마그마를 향하여 간다.

   뜨거운 돌물은 나의 레테의 강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가 남아 있던 글입니다.

   ‘미리 쓰는 묘비명’ 원고청탁은 그(녀)에게 독특한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죽음이 생경한 것은 아니었으니, 죽음은 삶의 동반자. 살아오는 동안 그놈 또한 늘 뒤를 옆을 맴돌고 있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묘비명이란 단어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터, 무명 소설가에게는 사치스러운 영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인간적으로 문학적으로 존경하는 선배로부터 문자를 받았더랍니다.

 

   파리하고 조금은 세상사가 번거롭고 권태로워 보이는 그대 - 결정적인 묘비명 한 줄이 하늘로부터 온 셈이었답니다.

 

   겨울에 태어난 아이, 나무의 속성으로 태어났다는 그(녀)는 왠지 가을을 마감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다시 생명의 겨울이 오기 전에 막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게 느껴진다고. 그(녀)는 ‘너절한 연습’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가을날 유난히 빗물에 젖어 쌓이는 쌓이다가 찢기는 은행잎들의 미래가 궁금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고 상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뿔뿔이 흩어지는 작은 알갱이. 더 작아지면 먼지가, 액체가 되거나, 기화해서 우주를 떠돌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라도 만날 수 있는, 만나고 싶은 마음들이라면, 대기 속 보다는 땅속을 꿈꾸는 것이 소박할 것이라고. 지표를 뚫고 들어가 마그마가 되어 한데 엉켜 흐를 수도, 다만 스치기라도. 하늘보다는 땅의 그런 이미지가 우리의 미래(?)에 어울린다.

 

 

   마지막 인터뷰

 

   어떻습니까? 이 묘비명의 어딘가에 편지처럼 당신에게로 뻗는 촉수가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조금은 부담이 되시려는지요? 아니, 그거야 모를 일입니다. 책임이 없다면 누구는 어떤 일에서든 자유로울 수 있는 법입니다. 꿈을 꾸는 건 꿈꾸는 사람의 자유이겠지만, 꿈의 대상은 억울할까요? 예, 좀 억울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억울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이 아는 한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 언뜻 무뚝뚝했습니다.

   - 어떤 때에는 타협이 어려웠고요.

   - 많이 정직한 편이었어요.

   - 보기보다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수식어를 줄이고 말해봅시다.

   - 무뚝뚝했습니다.

   - 타협이 어려웠고요.

   - 정직한 편이었어요.

   - 순진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덧붙일 말이 떠오르겠지요?

   - 괴팍했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 타고난 조급함으로 일을 그르치곤 했습니다.

 

   정말 그뿐입니까?

   - 순수? 바보처럼 늘 뭔가에 골몰했던 것 같아요. 그만 하시죠.

 

   아니, 하나만 더. 미안합니다. 제가 좀이 쑤셔서 그만. 골몰했다 하시면 집착 같은 것입니까?

   - 표현에 따라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굳이 말하면 긍정적인 집착, 적어도 타인에게는 긍정적인 집착으로 나타났지요. 그게 자신에게는 부정적인 편이었지요. 자신의 잘못, 부족함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매달렸으니까요. 상대가 무슨 말을 못했지요.

 

   마지막으로, 당신과 그(녀)의 벤다이어그램을 상정한다면 어떤 형식이었나요?

   - 벤다이어그램? 참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집합이라, 합집합의 크기가 커지려면 교집합은 작을수록, 아니, 합집합을 생각할 게제는 아니었지요? 그렇다면 교집합을 키웠나? 그것은 더욱 어불성설, 두 개의 자아 중 하나가 죽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의 세계인 것을.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 아니, 나는 참을 수 없는 교집합의 가벼움을 잘 참을 뿐 아니라 오히려 희망했습니다. 그(녀)가 상대적으로 너무 무거웠던 것입니다. 왜들 가벼움을 탓하나요? 이 지상의 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존재가 왜 무거워야 합니까? 가벼울수록, 깃털처럼 가벼울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부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당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음을 당신의 위트와 유머와 센스와 아이러니와 패러디와 리듬과 심지어 즐겨 쓰시는 모순어법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느꼈습니다. 지금도 느낍니다. 수사학에서 탁월한 당신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여 ‘달콤한 이별’이라 하시렵니까? 아예 오비디우스를 빗대어 ‘이 충만이 나를 가난케 하였도다!’라고 응수하시는 것입니까? 무엇인가 감정이 충만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은 이성의 가난이었나요?

 

   당신 : 바람 불면 은행잎 우수수 져서

   그(녀) : 당신이 스틱스 강을 말할 때에도

   당신 : 어딘 가로 씻겨 내려갈 것 아니오?

   그(녀) : 나는 그것을 암호로 듣지는 않았습니다.

   당신 : 내려가다 썩든가

   그(녀) : 나는 차라리 레테의 강을 믿습니다.

   당신 : 썩은 물이 어딘 가로 흘러 들어가

   그(녀) : 많은 것은 잊히는 것이라고.

   당신 : 스며들어가

   그(녀) : 많은 사람들이 많은 시간들이

   당신 : 지구 복판의 마그마가 끓고 있는 곳에서

   그(녀) : 무엇인가가 지나면

   당신 : 한 조각 성분이 되어서라도

   그(녀) : 그 끝이 좋았던 고통스러웠던

   당신 : 그렇게라도 만날 것 아니오?

   그(녀) : 언젠가는 거의 잊혀진다고.

 

 

   벌써 끝나가는 이야기이군요. 당신은 당신의 말을 하고 그(녀)는 그(녀)의 말을 했습니다그려. 늘 그랬습니까?

   -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랬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제 말만을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당신은 추억에 잠깁니다. 어느 바닷가에서 밤을 지새우던 때를 불러봅니다.

   어느 바닷가. 둥지 틀고 사는 곳에서 260km 또는 450km 쯤 움직인 곳.

   싸구려 불빛에 드러난 군상. 따닥따닥 붙어있는 횟집과 손님을 불러대는 아주머니의 앞치마. 부엌의 행주치마가 아닌 돈주머니. 돈주머니들은 제법 불룩하다. 임신하기에는 늙은 여자들의 부풀어 오른 배 위에서 더 부풀러 보이는 돈주머니 앞치마. 앞서 지나간 손님들의 때 묻는 돈, 그 때 묻은 돈에서 옮겨간 인생의 때로 뒤범벅되어 갑옷처럼 무장된 돈 통.

   일행은 예닐곱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한다. 중요하지도 않은 말들만.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 중요하다. 적당한 간격의 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시간을 죽이려고 할 때.

   왜 시간을 죽여야 하는가. 공적인 일들이 끝나면 일찌감치 숙소에 들어 푹푹 씻고 건강한 잠을 자면 그만인 것을. 그 편이 다음날의 진행에도 합당하다. 그런데 왜 바닷가를 서성이며 시간을 죽이려드는가. 할 말도 없으니 말을 못하고, 할 말이 있어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이나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받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누구도 누구에게서라도 오해받고 싶지는 않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바닷가 부둣가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내가 이전에 여기 유명한 어시장을 갔더랬어요. 어부인이 워낙 생선을 좋아하니까 사가지고 갈까 했었지요. 아니, 아예 돌아오는 길에 어시장엘 다녀오라는 엄명이 떨어졌지요. 해서 시장을 갔었죠. 그런데 아짐씨들이 앉아서 영락없이 붓칠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아예 노란 페인트칠을, 생선에다가. 멍하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그 아짐씨 말이 뭐랬는지 참.

   뭘 보냐고 퉁이나 맞으셨지요?

   퉁만 맞은 게 아니라 혼이 났지요. 아자씨, 집에 아지메는 화장 안하나? 야들도 화장을 곱게 해야 시집을 잘 가는 기지, 이러는 겁니다. 노오란 물색으로 맛있어 보이는 조기가 화장발이라니. 그 다음부터는 조기매운탕 맛이 확 가버리더군요.

   참 섬세하시기는. 그게 어디 오늘 하루 이틀 일이던가요.

   조기 장사는 조기를 속이고, 고춧가루 장사는 고춧가루를 속이지요. 일가 형님이 시골서 그대로 터 잡고 사는데, 글쎄 고추 다듬고 밭두둑에 아무렇게나 버려둔 고추꼭지를 밤 새 실어 가버린다고 합디다. 그걸 어디에다 쓸 것이요, 참. 그러니 누가 고춧가루를 믿고 사 먹을 수 있나요. 그러다 중국물건이 싸고 이문이 난다 싶으니까, 깨 있지요? 야무진 주부들이 시골에 가서 깨를 사가지고 와서 의기양양 하는 것도 다 헛것이라.

   직접 시골에 가서 사도?

   그러니까 깨를 털기 전에, 깨를 터는 것이 무엇인지나 아시오? 깨를 털기 전에 아예 덕석 에다 중국산을 쫘악 깔아놓고 그 위에서 깻대를 턴다는데 말 다했지요. 온 동네가, 다시 말하면 온 나라가 그러는데, 혼자서 순수히 자기 밭에서 난 깨만 팔고 있으면 바보 되는 느낌이라서 별 수 없다지 않소. 불 보듯 뻔한 손해인데다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농촌 사람 야단 못하지요. 서로 속이고 속는 것인데. 요즈음엔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흔치 않다가 가을걷이할 때나 더러 드나든다는군요, 쌀도 실어가고 뭐 그런 정도. 헌데 시골 노인들이 다른 집 자식들을 알고 지내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긴다더라고요. 옛날엔 뉘 집 자식 할 것 없이 누가 하나라도 오면 온 동네가 다 나서서 반겼고, 또 젊은이들도 으레 동네 인사 할 줄 알고 그랬는데. 아무튼 형님네 시골에 하루는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가을걷이해서 쌓아둔 나락가마니를 통째로 실어 가버렸다지 뭐요. 저쪽에 젊은이가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 싣는 것을 노인정에 앉아서 먼발치로 본 노인이 있었다지만, 그 노인 생각으로 저리 천연스럽게 차 대놓고 나락가마니를 실어내니까 그 집 자식이나 되나보다 그랬다지 뭡니까.

   아무리 그런다고 참 노인네도! 어르신이라요, 할머니라요?

물어보나 마나지요. 할머니들이 혼자 노인정에 앉아있기를 하나요? 잔손가는 일이든 어디로든 몰려다니지. 칠십 줄 안 넘은 할아버지가 그랬답니다. 아파서, 병중이라 시들시들하기도 했더래요. 요즘 시골에도 암환자들이 많은 걸 보면 공기 좋은 시골이 별 노릇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시골도 음식들이 개화되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아니, 질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인간이지요. 한번은 사라질.

 

 

   그렇게 당신은 그 밤의 대화에 끼었습니다.

   한번은 사라질.

   마치 생사의 암투에서 해방된 초연한 느낌을 주며 좌중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좌중이라야 어느새 대여섯으로 줄었습니다만. 이제 모두들 당신의 입만 쳐다봅니다. 당신의 개입으로 진부한 어시장 놀음이나 가을걷이 도둑 이야기에서 삶과 죽음으로 이야기의 차원이 바뀌었으니까요. 당신은 처음엔 모르는 척 입을 다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실은 언제나 철학을 시작하곤 하는 당신을 알아보고 있었으니까요. 해서 당신은 그날 밤의 강연(?)을 하게 됩니다.

 

 

   오늘 그것을 되풀이하실 의향은 없으신 거지요? 간략하게라도?

   - 그럼요. 기억도 못합니다. 강연이라니, 그저 알코올 기운에 떠들어댄 개똥철학이었겠지요.

   그렇지만 그날 밤의 강연(?)에서 당신의 영혼과 그(녀) 그것이 불꽃 튀는 접속을…….

   - 그만, 그만 하시죠. 순간은 되풀이 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때는 순간은 영원이 되어버린다고도 했고. 늘 말이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매 순간의 영원성 운운하면, 헤세가 쓴 『싯달타』에서도 나왔던 말 같습니다만. 삶마다의 불멸성과 더불어.

   - 예,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전히 새 말을 합니까? 세상 어디에 새로운 주제가 있답니까? 쪽지 한 장에 매달리시는 댁은…….

   죄송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제가 하는 쪽이라서. 제 역할이 질문 쪽이라서…….

   - 예, 뭐. 그렇다고 제가 답변을 해야 하는 이유라도?

   죄송하지만 처음 주제에 한해서만큼은.

   - 주제가 있었나요? 도대체 인생에 주제가…….

   자 그럼, 그(녀)는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서 떠났습니까? 이 표현은 정말로 수정해야겠는데, 그(녀)가 떠났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당신이 주체로, 당신이 그(녀)를 버렸습니다.

   - (침묵)

   그럼 당신은 왜 그(녀)를 단호하게 자르셨습니까?

   - (침묵)

   당신이 침묵하더라도, 몇 백 년을 침묵하더라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녀)가 이 편지에 쓴 대로, 사람이 말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밖에 없는데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말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진실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물론 당신의 침묵이 그(녀)를 질식시켜서 스스로 단념했다고 말해도 되겠습니까?

   - (침묵)

   하긴 다시 이런 편지를 보냈다면 그 단념이라는 것도 참으로 한심하군요.

   - (침묵)

   예, 이 편지의 답이 침묵인 것을 알았습니다. 진즉에 알고서도 궁금했습니다. 가펑클의 노래를 들어 ‘침묵의 소리’를 실현하시는 군요.

 

 

 

   여기까지입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이 편지와 관련해서 뭔가 의미심장한 주제를 끌어내볼까 혹했던 나는 여기서 단념했습니다. 그러면서 침묵이 얼마나 위대한 무기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빼앗겼거나, 아니 조금이라도 설레었거나 하는 정도만으로도 마음 졸이는 상대였다면 그런 무기가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았으리라 느꼈습니다.

   한편으로, 편지의 수인인은 참으로 말을 아끼는 수준 높은 인격자였습니다. 그것이 내가 알아낸 전부입니다.

   고백하건대, 이야기를 창작하는 대신 누군가에게서 뭔가 실마리를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 애초에 틀렸습니다. 편지 한 마디를 실마리로 하여 쉽게 정신적 투쟁의 흔적 같은 것을 꺼내보려고 했으니. 본격적인 글쟁이가 되려면 아직 멀었음을 느낍니다.

   대신에 조금이나마 배운 것도 있습니다. 물론 사전적으로야 ‘이성’은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더이다. 거기까진 통상 알고 있는 것이지만, 유독 그것을 가리켜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라할 때 늘 고개가 기웃거려졌지요. 그 의심을 이제 확신해도 될 듯합니다. ‘감성’이 ‘이성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라고 정의되면, 처음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감성과 이성의 대응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립개념이 아니라 충돌개념이라는 것. 두 단어를 함께 쓰는 일에는 뭐랄까 물리적 이항이 아니라 화학적인 얽힘으로 폭발성이 내재되어 있으리라는 것. 비슷하게 감성과 이성을 나누어 가졌을 두 사람의 경우에도 어떤 쏠림 현상 때문에 한 사람은 폭발해 버릴 수도, 다른 한 사람은 건재할 수 있으리라는 것. 미션이 가득한 영화에서, 폭발 직전 몇 초를 남기고 뇌관이 제거되는 폭약처럼. 그러니까 폭발 여부는 순전히 에이전트의 활약 덕택입니다. 이 때 에이전트의 이름은 언제나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최후의 보루는 이성이다? 그러한가 봅니다. 그런 것을 배웠습니다.

 

   아차, 덧붙일 말이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도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을 강조한 책을 공유합니다. 아까 당신이라고 지칭된 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 서가를 슬쩍 훔쳐보았거든요. 그리고 편지를 쓴 그(녀)의 다른 노트에서 ‘이성의 자기반성 능력이란 지적 정체성과 변화의 요구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메모를 본 적이 있었답니다. 그 책이 출간되었던 1996년에 - 아니, 훨씬 이후라야 되겠지요, 여태껏 그런 마음이 지속될 리는 없을 테니까요 - 누군가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했음직하다. 어쩌면 ‘당신’ 쪽이. 간접적 이별의 통고로서. 감성 따위를 극복하련다는 통고 같은 것. 그런 경우 이성은 잔인성의 비슷한말이 되겠습니다그려. 호모 사피엔스의 독재. 물론, ‘당신’ 쪽의 철학에 얼마만큼 동조할 것인지는 좀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편지가 영영 사라져버린 데 대한 쓸쓸함을 반추할 길은 없으면서 여전히 자꾸 그쪽으로 내 마음이 적시어지니 말입니다.

......................................................................................................

 

* 『문학세계』 통권 221호, 도서출판 천우, 2012.12.1. 211-226쪽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2. 11. 19. 00:04

 

 

등돌림의 문학

 

 

문학이란 무엇일까 - 늘 있어 왔고 여전히 의심쩍은 이 질문과 더불어 살아가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어른들이 말리는 말씀에 속으로 토를 달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어른이 되어 정말 옛 어른들 말씀대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

 

이 가난하면서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축제가 있어, 세상 각처에서 모여들어 함께 하는 콩그레스가 9월 우리나라 경주에서 열린다. 이름 하여 ‘제78차 국제 PEN 경주대회’ - 세계 최대 문학축제인 이번 대회는 전 세계 102개국 회원국에서 해외 문인들만 해도 300여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이다.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 터키의 오르한 파묵 등 혁혁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도 참가하여 대회의 위상을 높인다. 더러는 펜은 칼보다 강함을 역설해 낸 사람들이다. 강함에는 부와 명예가 따르고. 이 대회는 이들에게 경주라는 역사적 도시를 배경으로 한국의 문화유산을 알리는 기회도 될 것이다.

 

경주대회 참가를 앞두고, 개인적으로는 소잉카를 직접 만나는 일에 조금 설렌다. 다는 몰라도 우리는 비아프라의 내전을 기억한다. 한때 누군가가 영양실조에 걸리다시피 마르면 비아프라 사람 같다고들 놀렸다. 그 비아프라 독립전쟁을 막고 싶었던 젊은이, 그 일로 오히려 투옥되고 감시받고……. 그는 늘 급진적인 글들로 나이지리아 정부와 빈번히 충돌하고 옥고를 치렀을 뿐 아니라, 자의적인 사실상 망명 중에 궐석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독재자가 사망하고서야 귀국이 가능했던 소잉카.

 

그의 경우 흥미로운 것은 종교적 혼재와 상이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자라서 서양문학에 정통한 그가 아프리카의 전통과 가치를 어떻게 조화 속에서 지켜내고자 했는가 하는 과정과 답에 있다. 세네갈의 시인 대통령 셍고르로 대표되는 네그리튀드 - 공통의 흑인 전체성 속에서 일치를 발견한 네그리튀드 운동은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흑인 유산만이 프랑스의 정치적이며 지능적인 패권과 지배에 반대하는 싸움에 있어 최고의 도구라고 믿었던 문화운동이었다. 그러나 소잉카는 네그리튀드에 회의적이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흑인의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이자 무분별한 찬미일 뿐으로, 근대화의 잠재적 혜택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한민족은 한민족이어야 하되, 가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민족주의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잉카가 “인간의 첫째 조건은 문화이고, 메아리 없는 예술은 독백일 뿐”이라고 말할 때, 문화는 대결이 아니라 그저 인간다움의 본태다. 문화를 빼앗는다는 것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박탈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을 모독하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문화 예술의 본질은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 타협보다는 저항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고.

 

예술은 곧 자유다. - 이런 생각은 70년대 국제 PEN 회장이었던 하인리히 뵐의 주장에서도 분명했다. 예술은 자유로움 이전으로, 자유 그 자체이다. “예술은 자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유이니까.” 그러므로 문학을 예술로서 이해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곧 표현의 자유이다. 어떤 가치를 표현하는가?

 

그러나 세상의 가치들은 부유하는 구름 같기 마련이다. 세상이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늘 변화무쌍해서 종잡을 수 없다.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 오늘의 가치들 속에 분명 가난은 퇴물이다. 가난한 아빠는 아빠도 아니기에 『부자 아빠 되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부자에게도 인생은 공평하게 덧없다. 아무리 뜨거운 해라도 곧 있어 지평선 너머로 지듯이, 아무리 빛나는 왕후장상의 인생이라도 저물기 마련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히포크라테스의 이 옛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유한한 인간은 의식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창조해 내는 예술과 더불어 살고 싶어 한다. 빛과 모양과 소리와 글 등으로 인생을 재창조하는 일에 심취한다. 문학은 우리의 정서와 사상을 상상의 힘을 빌려 말과 글, 곧 언어로서 나타내는 예술이다. 문학을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이 예술은 분명 언어 안에서 시작되고 언어 안에서 끝난다. 그러나 이 언어는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음성적 기호의 체계를 넘어선다.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기호체계인 언어를 조직하여 만든 문학은 ‘기호의 기호’라는 특성을 지닌다. 메타언어일 수밖에 없는 이 추상적인 속성은 문학의 이념적ㆍ실천적 기능을 증대시켜 준다. 인류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을 넘어서 문학이라는 상징의 언어로서 공간과 시대를 넘어 교감하며, 총체적인 문화유산을 집적하는 것이다.

 

예술은 학문과 달리 세계를 탐구하고 수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에서 주관적 감수성을 우위에 두는 것이 특징이다. 이성이, 계산적 머리가 각광받는 이 시대가 살만한가, 우리는 고개를 젓게 된다. 감수성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지켜줄 마지막 보루를 염원할 일이다. 초인간적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적 부족함이 인간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최강 인공지능의 로봇은 나노 수준의 오차로도 작동을 멈춰 버리지만, 다리를 절면서도 집을 향해 걸을 수 있는 내가 인간이다. 인간인 나는 해야 할 일을 못하기도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을 안 할 줄도 안다.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우수한 결심 아닌가.

 

지능이 아니라 가슴으로 쓰는 문학 - 문학에서는 픽션일수록 진실하며 진실할수록 픽션이라는 모순이 가능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인간을 현실적 존재에서 초월적 존재로 승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문학의 변용된 세계가 현실의 파괴를 전제로 하지 않고 비판과 개선을 지향하는 한에서 그것은 유희가 아닌 자유정신이다. 반어와 풍자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이다.

 

더구나 문학텍스트는 혼자말로서 존재하지 않고 ‘누구에겐가 말하려는’ 의지를 갖기 때문에, 형상화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인하며 심리적 공감을 소망한다. 그러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가치로의 이입을 꿈꾼다. 유의미한 문학은 독자의 인생에 역시 유의미하게 작용한다. 독자는 예술미의 형태로서의 문학 감상과 더불어 현실에 대한 유추를 지닌 간접적이고 상상 가능한 경험을 얻음으로써 문학의 기능을 완성한다. 이 간접경험이 인생에 대한 성숙된 평가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한 청소년의 문학 독서가 그의 인식의 틀을 형성하며 지적인 발달을 돕고, 개인의 정신세계는 사회의 정신세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시대사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인류의 정신사에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혁명적 전향에 문학의 힘이 절대적 역할을 담당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 이상한 힘이 인류의 역사에 작용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밥이 없으면 살지 못하지만 밥만으로는 인간답게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만찬장에서 음식을 토해내는 도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계속 먹는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서. 누군가 그렇게 밥이 넘쳐나는 풍요로운 생을 산다고 해서 그에게 조화의 감정까지 지속적이지는 않다. 어떤 행복한 인간도, 어떤 조건에 있는 인간도, 완벽한 평형을 느끼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E. 블로흐가 말했던 “전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특질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 불평등, 장애 내지는 결핍을 느끼며, 여기에서 도피하고자 몰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육체적 유형의 결핍보다는 정신적-영적 유형의 결핍에 예민한 것이 인간이다. 상대적 박탈감이 그 뚜렷한 증거이다. 이 결핍은 문학의 세계에서 상상력의 힘으로 줄거리를 전개시키는 힘이다. 이 힘은 문학을 현실의 단순한 반영이나 모사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잠재적 비판으로 존재하게 한다. 현실에 개입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매체로서, 나아가서는 현실에서 이탈하는 경험의 매체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문학은 현실에 등을 돌리는 경우에조차 여전히 현실과의 관계에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 등돌림은 강한 반발이며 부정으로서, 가장 강력한 현실비판 중의 하나로 작용할 수 있다. R. 무질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문학은 “다른 상황”에 대한 꿈이다. 그렇지 않다면 문학은 존재이유도 존재할 공간도 없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렇게 썼다, 친구에게.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담 무엇 때문에 책을 읽는단 말인가? 자네가 쓰는 식으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라고는 전혀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정히 행복할 것이야. 그렇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언감생심, ‘얼어붙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쓰는 일이란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렷다. 누구에게나 허용된 시간도 유한하다.

 

 

등돌림의 문학 - 오늘 그 일을 시작하고프다, 글을 쓰는 것이 숙명이라면. 빛과 그림자가 어울림을 넘어 대결하면 그림자를 향할 일. ‘앞으로 나란히!’ 하고 외치는 경쟁문화가 살인적이라면 뒤돌아서서 살인에 동참하지 않을 일. 또는 강물의 물줄기가 인위적으로 왜곡되면 아무리 더워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을 일을.

 

................................................................................................

 

 

『컬처 프리즘』 2012 Vol.2,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52-55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2. 10. 28. 20:53

재호 하는 일 

             ▼

 

                    http://www.youtube.com/watch?v=ut3HUNZXj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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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2. 9. 15. 12:08

78th국제 PEN 경주대회 (9월 10일~15일)

주제 : 문학, 미디어 그리고 인권

 


 

 

 

 

86개국 문인들이 참석했다. 그 중 38개국 문인들은 초대 손님들이라고. 오르한 파묵이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의 병으로 불참했다고, 아무튼 독일어권 참석자들은 눈에 띠지 않았다. 파묵의 터키는 더러 있었다. 소잉카 덕(?)에 나이지리아 또는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대륙의 참가자들도 많았다. 네팔과, 베트남, 태국, 타이완 등 아시아 사람들도,헝가리, 체코, 드물게 프랑스, 핀란드 등 유럽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정작 가까운 중국과 일본, 그리고 최우호국이라는 미국 참가자들은 눈에 뜨게 드물다.

놀라운 것은 많은 해외동포 문인들.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많이 참석했다, 소속은 '한국 PEN'인 채로.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이니나 씨도. 외롭게 보였지만.

 

여전히 대회 참석을 위해 출국이 저지된 작가가 있는 세상이다. 중국의 Jiao Guebiao, 중국 PEN보다 더 강력한 ICPC멤버로 출국이 저지되었다 한다. 여전히 벨라루스의 알레스 발야츠키 Ales Byalyatski, 필리핀의 에릭슨 아코스타 Ericson Acosta 등은 구금 중이다.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시 통역사들이 능란해서,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가 자유로 동시통역되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일본어가 다른 말로 통역되기도 했다. 좋은 세상이다.

 

 

결과부터

                                                                                                                                                                 

* 레바논 센터 가입안 :

* 망명 북한작가 펜 센터' 가입안  :

        86개 참가국 만장일치로 통과.

        국제 PEN : 145개 센터로 확대

* 2013년 개최예정지 :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유네스코에서 정한 문학수호 도시)

 

 

처음으로

 

 환영사 이길원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장

 

 

 

 

                                   

                                            국제펜 회장 존 롤스톤 소울, 월레 소잉카, 르 클레지오, 이길원 이사장

 

 

 개회사 존 롤스톤 소울 John Ralston Saul 국제PEN 회장

- 'PEN은 풀뿌리 단체 grassroots goorganization'

- Our force comes from our existance above politics - indeed below and all around politics. We exist because we belong to ourselves. We are listened to precisely because of our independence. And that independence has always given us and continues to give us the force to face the most difficult of dictatorships and the most complex of situations. 우리의 힘은 정치를 뛰어넘는 우리의 존재에서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의 아래에도 온갖 주변에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속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바로 우리의 독립성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 독립성이 우리에게 귀기울입니다. 그 독립성이 우리에게 가장 지독한 독재와 가장 복잡한 상황에 맞설 힘을 주어왔고 또 그렇게 계속됩니다.

 

 

 기조강연

이어령 <가장 오래된 미래의 길 The Oldest Road to the Future>

세상사 대조적 현상들을 완벽하게 짜맞춰 준비해오신 명 연설? 특히 '좌-우'에 대한 설명이 좌뇌-우뇌 등을 넘어 끝까지 상대적 대조적 개념으로서 제시되었다. 잠든 곰과 포효하는 호랑이를 비유한 판소리,  '얽어도 장에 가고 굶어도 떡해먹는 사람들' - 한국인의 해학과 여유를 충분히 천착하셨다. 

강연 내내 인터넷 동영상이나 이미지들도 선각자답게 유려하게 사용하시고. 허나 자칫 말 재간으로 비칠까 염려되었다. 나이 때문인지 로버트 푸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 시를 띄어놓고 마르셀 푸르스트라고 두 번씩 그러셨다. 워낙 완벽하다는 대가의 강연에서는 흠만 보이는가?

 

소잉카 <마법의 등불> Wole Soyinka 'The Magic Lantern'

권력자들이 호기심을 누르라고 명했을 때.....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혁명이었다. 변형적인 마음 transformative mind에서 나오는 광범위하고 원초적인 테러를 상상해보라!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 - I create, therfore I am.

 

르 클레지오 <커뮤니케이션은 자연이다> Le Clézio 'Communication is nature'

화려한 마야문명은 사원의 화재 이후 책으로 남긴 역사가 없어서 해독을 못한다.

인쇄술은 특권의 종말이요 지식을 분배를 뜻했다. 다만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도 식민지에서는 성서에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채찍아래 사는 노예들로 넘쳤다. 고향 모리스 섬에는 문맹이 30%.

공부도 일도 않는 '니니 nini'들이 생겨났다. 인간의 목소리인 언어만이 추상과 변화와 리듬에 의해 숭고함을 표현한다. 언어로 인해 인간은 완성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책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중에 접근하리다.

 

 

 Free the World 1

<문학포럼 : 표현의 자유와 미디어>

이문열 : 좌장 역할만 담당한 것이 안되었다. 의견 발표의 기회가 없다니! 

장윤익 : 한국 통일문학의 방향과 북한작가들의 인권문제

임헌영 : 한국, 표현의 자유의 변천사

김영순 : 월북작가 및 북한 문인들의 삶과 현실

도명학 : 북한 문단의 실상

유미리 : 문학 - 자유와 이야기로 통하는 길

  

* 우리나라에서 PEN 국제대회가 세 번째인데, 처음으로 투옥 중인 작가가 없는 상태라 했다.

* 유미리는 머리에 장식까지 완벽한 조선조 의상을 입고 있어서 한국어로 하는 줄 알았다. 시간이 촉박해서인지 급하게 일본말을 읽어내려갔다. 일본문학을 대표한다는 뜻이었을까? 일상 대화는 한국어로 하는 것 같았다.

* 예상대로 북한 망명 문인센터의 PEN 가입의 초석을 다지는 길과도 비슷?

행사 후 뮤지컬 '요덕스토리' 관람이 있었다. 뮤지컬이니 과장되었으리라고..... 애써 그리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김영순 (최승희 제자로, 성혜림과 동기라는 이유로, 성혜림의 사생활과 관련된 정보를 알고있다는 이유로 요덕수용소로 보내졌다는 기구한 운명. 탈북 후 스토리 제공) , 도명학 (탈북 작가)의 증언이 무섭기만 했다.  

 

 

 Free the World 2  

<나의 삶, 나의 문학>

좌장 소울 회장의 빨간 양말과 르 클레지오의 하얀 양말이 두드러졌다. 코케시언은 기본적으로 차림새에는 무신경 한 듯. 

 

좌장. 존 롤스톤 소울.

소울 세계회장은 자유언론에 대한 수필과 소설을 쓰는 작가다. 동반자 에들린 클락슨은 전 캐나다 총독. 홍콩 태생으로 캐나다에 망명가서 총독에 이르렀으니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 'Right Honoroble'이라는 경칭을 함께 부른 내게 감동한 눈치. 한국인들은 아무도 아내(?) 따위엔 관심이 없었나 보다. 그냥 나이가 많고 늙어보인다... 그 뿐. 실제로 언론계 출신으로 클락슨은 첫 결혼 때의 성인데, 연하의 소울과 만나서 그렇게 서로를 돕는 동반자다.

 

 

월레 소잉카.

작가와 의례 - Writer and his Rituals

내가 쓰는 것들은 의례와 관련된다. 다양한 경험을 체계화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은 통제하기도 한다. 의례란 별것도 아니면서 일상 속에 면면히 흐른다. 사회 자체의 표현이 의례요, 사회를 확인하는 것이 의례이고, 계절을 찬미하고, 곡식을 심고 수확하는 것도 의례이다. 비합리적이 아니다, 미신적이 아니다, 영적인 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사회 속에서도 의례는 존재한다. 의례는 어쩌면 권력과도 통한다. 작가는 의례의 남용을 조사하고 비판하고 반대 의례를 창조하는 힘을 키운다. ( 어려운 말인데 소잉카의 출발이 희곡 장르이고, 희곡 장르는 그리스 고전극의 의례에서 출발하기 때문일까?)

그로서는 살아가는 것이 곧 글쓰는 일이라고 했다. 식민지 시대의 교육을 체험했지만, 그 단선적 교육이란 금기사항 뿐이었다고, 그러나 창조성이란 영원한 것이라고.

My life is writing. Creavity is eternal.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의 자유를 몸소 대변한다. 흑인중심주의 네글리튀드에는 동참하지 않고, 독재 정권 하에서는 자발적 망명을 선택하는 지성인. 그에 대한 기대는 그를 혹사하는 일정에 시들고 말았다. 첫날 엘레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1986년 첫 번역 책을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눈을 반짝이던 그가 막상 북사인회장에서는 25분을 늦게 나타나더니 받을 사람 이며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쓰지도 않았다. 오전 중 인터뷰가 세 건이었다고, 더 이상은 못하겠다고 짜증스레 말하고 나서 시작한 북사인회였으니까. 물론 그 헌책 '해설자들'에도 사인을 해주기는 했다, 이번엔 정확한 이름으로.

 

르 클레지오.

갈망이 글을 쓰게 한다 - Desire as a motivation for writing

손으로 씨를 뿌리고 눈으로 수확한다'는 이 말은 고향 모리스 섬의 크레올 말인데, 책을 쓰고 읽는다는 말이란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고독 Solitude를 느끼는데, 영-불 사이 부모를 두고 프랑스령 태어나서 2차대전 상황에서 8살에야 영국군 의사인 아버지를 만났던 기억, 영어를 원한 아버지 ... 그는 따뜻한 옛것을 향한 그리움으로 시를 썼고, 나중에는 오케스트라에 심취하다가 코믹을 썼는데 자신의 선생님을 등장시켰다고. 작가가 되려는 의도가 아니라, 몹시 더운 여름날 차일을 내리로 들어박혀서 쓰고 출판하고 상타고 작가가 되어 있었단다. 이어서 많은 여행 속에서 작가는 인류학자라고 느꼈단다. 미국 인디언과 3년 정도 살면서 느낀 것, 문학은 글로 쓰지 않더라도 이미 존재한다는 것. 아무 것도 영원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예술은 경이, 놀라움이다. 마음은 늘 다른 책들에 사로잡혀 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상황에 대한 갈망이다. 꿈꿀 수 없는 것에 대한 꿈, 다른 상황에 대한 열망,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 현실을 떠남이다?

desire to be another situation, dream the undreamable, longing for another situation,

be someone else...... 한국어로 들었으면 정확히는 들었겠지만, 그의 목소리도 그가 사용하는 단어도 중요했기에 영어로 들었다가 낭패다.  

르 클레지오는 지한파라서 참석했을 것이라는 예상으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의 발언은 무척 솔직하여 감동적이었다. 글쓰기는 그는 자신에게 집중하기라고 말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감동에서 첫 출판 '조서'를 사인 받았다, 북사인회가 아니라 어느 저녁식사 후에.

 

고은.

르 클레지오와는 정 반대로 의도적으로 포장된 선한 의지만을 외우고 있었다. 하필 그 다음이 르 클레지오였다. '푸른 산'과 '흰 구름'에 기대어, 노벨상 수상자들은 손님으로서의 흰 구름에, 자신은 주인으로서의 푸른 산에 빗대면서 동질성 또는 동격임을 스스로 입증하고자 했다.

'관계가 의미를 만든다' - 자신은 실존주의가 아닌 구조주의에 가깝다고, 실존주의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에 있다.' 즉 존재한다는 의미를 언제 어디에 두기 때문에, 우연의 생명체로서의 보편을 믿지 않고, 필연의 존재, 즉 특수성을 믿는다 했다. 시간과 공간과 인간은 함께 존재하느니.

[속으로 반론] 보편이 없으면 특수라는 개념이 생기는가? 보편을 향하지 않으면 특수 이익집단을 생각하는 것 아닌가? 준비된 노벨수상후보자 앞에서 조용해야지!?

한국전 3년간 청년 1/3이 삶을 중단했다. 그 결과로서 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중단된 삶이 내 삶의 의미이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문학을 한다. 내 시의 본질은 애도의 문학이다. 우와! 자신의 문학의 본질을 알아야 노벨상후보자 쯤이 되니보다. (애도에는 100% 공감. 6만년전 어린아이 미라 옆에 히아신스 화석이! - ) 장례문화는 곤충에게도 있다. 5천년 이래의 과거가 오늘의 시가 된다, 시인들은 단명, 요절, 옥사, 자살, 형장의 이슬.... 겨우 30편 쓰고 죽은 시인이 나의 뮤즈, 나의 뮤즈는 과거에 헌신. 발언 자체가 서사시다.  

질문에 답할 때 이웃이 피해를 입을지라도 개인적으로 태풍을, 폭풍을 좋아한다고 - 어쩌나, 인간성의 강한(악한) 면이 폭로되었다.

 

 Free the World 3

<인각사 관광, 패션쇼 '삼국유사', 뮤지컬 '삼국유사' - 군위군>

 

 

 공연들  

* 뮤지털 <요덕스토리>

   탈북작가 김영순의 자전적인 수용소 체험

* 국악뮤지컬 <미소 II - 신국의 땅 신라>

   천신이 세운 신국 신라. 그 신화와 환상의 세계

* 천년지고무

   두드락(타악연주팀) + 정상급 무용수들의 타악 퍼포먼스  

* 퓨전국악

* 가야금

* 대금연주

* 소프라노 (조경화) - 바리톤 (조원용)

 

전체적으로 마이크가 너무 컸다는 느낌. 특히 국악의 경우에 큰 소리는 생경했다. 신라의 공격적 전투적 음악이라 그랬을지, 문외한으로서 그저 큰 소리에 적응이 어려웠다는 말이다. 북한의 실상도 그 잔인함에서 비록 무대라고는 하나 보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가슴만 너무 아팠다. 예술로의 승화? 조금 더 우회의 길을 가야하지 않을지.

 

가장 큰 수확

<문학포럼 : 시조>

시조가 우리문학의 원조임을 확인.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문학 특히 '시조'의 매력에 빠진 대비드 맥캔 교수.'청산리~ 벽계수야~  '를 작은 만돌린 연주와 함께 읊었다. 90세 아버지에게도 영어로 시조를 짓게 권한다는 교수는 한국어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첫날 아침 식탁 문제로 앤(맥캔 교수 부인)의 작은 실수가 친교의 장으로 발전했고, '광주펜'(한영발행)을 전달할 수 있었다. 꼭 읽겠다는 확언과 함께.

 

 

특별한 체험. 시낭송회

 

감동적인 외국 시인들 : 잠비아 PEN 회장 Nicholas Kawinga 'Ourselves'는 너무 감동적이었다. 타이페이 PEN의 I-Chih Chen은 'Children of Myanmar'를 읊어 PEN 작가들의 본래의 소명을 일깨웠다. 물론  트리에스트 회장 Antonio Della Rocca의 'Not Yet' 같은 수준 높은 관조의 시도....

 

한국 : 원래 한/영문으로 시를 집필하여 제출하면 PEN대회 때 발행되는 책자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먼저였다. 공문을 이메일로 받았을 때는 우선 시를 쓸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시인도 아니고.

그러나 패널로 참가할 것은 언감생심, 유일한 참가 가능성이 시를 제출하는 일이었다.  

영어로도 써야한다면 영어로 먼저 써야 '운각'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후 이번에는 '영어로' 낭송회가 있다는 전갈이 왔다. 무지가 용맹 - 그렇게 참가가 결정되었다.

 

 

 

경주 현대호텔 B1 다이아몬드 홀

 

 

* 낭송회가 끝나고 김양식 시인(이대 영문, 80세)  임채문(불문 동기), 서승석(불문 후배) 등과 해후.

  임채문은 예정에 없던 아버지 임학수의 '조선의 소녀' 대독했다. 난 채문을 몰라 보았다. 

  서승석 시인은 프랑스 통으로 안면도 없었는데, 그리 칭찬을 하며 좋아해줘서 얼떨떨!

  함께 몇번 씩 찍은 사진은 어떻게 보내주려나? 연락처도 받지 않고 헤어졌다.

 

알다가도 모를 일.

문무대왕릉, 감은사 석탑, 기림사, 한국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 관광이 있고 소잉카와 르 클레지오 등 노벨상 수상자들과 후보에 거론되곤 하는 시인 고은의 '나의 삶, 나의 문학' 프로그램이 진행될 순간이었다. 몇몇 참가자들이 마이크를 향해 돌진해서 설왕설래 위기촉발 장면이 연출되었다. 개인적으로 관광을 포기한 나로서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은 일이었다. 옆자리 리투아니아 작가에게 물었더니, 바로 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 관람에 대한 항의를 정식으로 할 셈이었단다. 하필이면 일본의 쓰나미 이후 많은 작가들이 원전에 반대하는 입장인데 한국은 원전의 안전을 자랑하는 듯한 관광으로 분노했단다. 그에게 '이해는 하고 또 한편 동감이지만, 항의를 할 적당한 때는 아닌 것 같군요.'라고 얼버무리면서도 속으로는 주최측의 고민을 이해해야 했다. 행사지원금을 받은 터에 어쩔 수 없었다는 후문. 행사 지원금이라는 것이 늘 말썽이다. 순수한 지원이 드물다.

 

 

알다가도 모를 일 하나 더.

군위군의 일각사 관광과 이어서 그곳 만찬 때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단다. 민속줄타기(무형문화재)의 공연, 패션쇼 '삼국유사', 뮤지컬 '삼국유사' 등 공연도 준비되었다. 저녁도 포기하고 불참한 나는 몰랐었지만, 소중한 일주일 중 4시부터 온 저녁을 할애하기에는 그 가치가 의심스러웠다는 후문이다. 물론 우리 이사장님은 다음날 정식으로 '우리는 누군가 손님을 초대하면 온 동네가 다 나서서 도와주는데, 물론 미흡할 때가 많지만, 그래도 손님 가서 불평은 안하는 것이 예의'라고 일침을 놓으셨다, 총회장에서. 분명 부족한 점에 대한 항의가 많았던 모양이다. 서양 사람들의 직선적 표현 때문이려나? 실제로 가치가 적은 곳에 초대한 다른 저의는 제발 없었기를 바란다.

 

 

귀한 만남들  

문단의 늦깎이가 만난 문단 선배들......... 멀다가 가까워진 사람들......... 더해서.

미주 등지에 나가서 안정된 이후 취미활동의 연장으로 시인 또는 수필가가 된 경우 - 개인적으로 성공한 인생이다. 캐나다의 송-손 장로님 부부 등 한국에의 관심과 애정 그리고 삶 자체에 긍정적인, 아름다운 여생(?)을 본 것 같다.

 

 

꼴불견?

물론 게중에는 관광 겸해서 몰려다니며 요란한 20% 선글라스에 보석 장식으로 휘젓고 다니는 품새. 총회장에도 시낭송회에도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한 여자. 분홍색 바지에 분홍색 꽃무늬의 재킷을 입고 - 자못 갖춰입은 모양새. 로비 근처 복도에서 양치질을 해대면서 화장실로 향한다. 아침을 먹고 나오다가 그 꼴을 마주친 나는 구역질을 할 뻔했다. 화장실에서는 옆사람 의식 않고 물기를 뿌리더니, 정작 화장실에 들어가서는 어쩌나 - 끙끙 소리까지 낸다. 그런 은밀한 일을 위해 제각기 객실이 있지 않은가. 100% 한국여자다. - 맞다. 정작 시낭송회에서 요란하게 카메라와 아이패드를 들고 설친다.

 

 

진짜 꼴불견.

내용은 모르지만 총체적으로 부실해보이는 한/영-영/한 시집을 자비로 출판해서 배포하는 모습들. 더러는 88년 PEN 서울대회 때의 사진을 표지에 넣어 현재의 시인과 동일인인가 의심스러운 시집도 있어 ㅋㅋ. 의례적으로 받아든 사람들이 떠날 때는 호텔방에다 버리고 간다는 풍문도 아는지 모르는지. 

 

 

어려움.

룸메이트를 만나는 것도 행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서로 최소한의 피해를 염두에 두며 공간을 나누어 쓰는 일 아닌가. 다르면 다른대로 매력이, 비슷하면 비슷한대로 동질성의 연민으로 며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 예상을 뒤엎기도 한다. 생전 처음 보게 다르면 대처 방법을 모른다. 상대가 지금도 온 세상이 주목해주고 사랑해줄 것이라는 환상과 꿈에 젖은 철부지 노년이라면 도닥여주면 될 것이다? 아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나도 벌써 인내심이 줄어든 노년이다. 

겨우 며칠에 '보고 싶다'는 남편의 말이 귓가에 맴돌아 하루 오후 스케줄을 무시하고 갑자기 짐을 쌌다. 배터리도 꼬마 '잭'도 끼워둔 충전기도 놔둔 채로.  

Posted by 서용좌
English2012. 8. 24. 00:06

 

Some 300 authors from 114 countries will be visiting Korea in September, including Nobel literary prize winners Orhan Pamuk, Wole Soyinka, and Jean-Marie Gustave Le Clezio, to attend the 78th International PEN Congress in Gyeongju, North Gyeongsang Province.

 

9월 경주에서 PEN 인터내셔널 대회열린다는 소식이다.

소잉카, 르 클레지오, 파묵 등 노벨수장자들을 한꺼번에 만나 볼 수 있는 자리다.

참가하는 행운을 '쟁취'했더니 믿어지지도 않게 시낭송의 기회가 생겼다, 영어로.

문제는 시인도 아닌 내가 시를 써야하는 일.  그것도 영어로까지!

 

 

 

 

모순

 

죽어라 글을 쓴다.

예술가다.

 

예술가는

대상을 인식한다.

예술은 표현의 과정을 통해 창작된다.

작가의 세계관이 반영되어야 하고말고!

 

어쩌나.

대상은 무한, 인식은 유한한데.

인식은 나만의 것, 개인적으로.

표현은 너에게서 완성되는데, 사회적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다른 문학작품들 파먹느라

내 손가락은 넷으로 변했다,

남의 먹이를 탐하는 하이에나의 발톱처럼.

꼬리도 스물거렸다. 그런데….

 

내 좁은 눈으로

거대 세상을 인식할 수 있을까.

내 시시한 이야기로

보편 가치를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서툰 표현으로

너를 매혹할 수 있을까.

 

희망씩이나.

내 글은 여전히 무명.

세계관과 표현 사이 모순 때문에.

나와 나 사이의 모순 때문에.

 

 

Contradiction

 

 

Who writes for dear life

Is an artist.

 

An artist

Recognizes the target.

A work is created over the course of the expression.

Weltanschauung of the artist should be reflected!

 

What now?

Subjects are infinite, my cognition finite though.

Cognition belongs to me, personally.

Expression is completed from you, socially.

 

While digging and living in the foreign literary world

My fingers were changing into four

Just like the claws of a hyena who is seeking other’s prey.

Even a tail seemed to be growing. Then….

 

Could I recognize the wide world

Through my narrow eyes?

Could I express the universal values

In my minor tales?

Could I enthrall you

With my inarticulate words?

 

No hope, my writings are still unknown.

Because of the contradiction

Between Weltanschauung and expression,

Between me an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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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독문학2012. 8. 23. 23:45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하인리히 뵐 / 서용좌

  안팎으로 열렸다 닫치곤 하는 현관문의 통풍 속에서 성냥 한 개비가 꺼졌다. 두 번째는 마찰면에서 부러지고 말았다. 그녀의 변호사가 라이터를 대주었으니 친절했다, 보호하듯이 손을 그 앞에 대고서. 그래서 그녀는 드디어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둘 다 좋았다, 담배도 태양도. 그건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영원, 어쩌면 끝없이 긴 마루의 영원성과 불변성이 시계바늘을 멈추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밀려닥치는 군중, 방 번호를 찾아든 사람들은 슈트뢰셀의 여름 바겐세일을 연상시켰다. 이혼과 여름 바겐세일에서 고르는 목욕수건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두 경우 모두 줄서기인데 - 그녀 생각에는 - 이혼의 경우에 마지막 결정이 더 빨리 고지되는 것이고, 그녀는 빨리 긍정적 답을 듣고 싶었다. 쉬뢰더 대 쉬뢰더. 이혼. 나우만 대 나우만. 이혼. 블루츠 대 블루츠. 이혼.

 

  이 친절한 변호사가 이제 정말 말할 것인가, 그가 말해야 하는 것을? 그가 말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말을? 그는 그 말을 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물론 그는 그녀가 전혀 힘들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 말을 친절하게 말했다. 그 말을 친절하게 한 것은 정말 친절한 일이었다. 그리고 물론 그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다음 출두시간에 다시금 법정에, 다시금 줄을 서야 했으니까. 클로츠 대 클로츠. 이혼.

 

  여름 바겐세일에서도 그건 비슷했다. 참을성 있게, 점잖게, 밀치지 않고, 그렇지만 긴장해서 기다리기. 새 목욕수건을 한 장이나마 닳도록 쓰기에는 너무도 늙은 부인이 한 다스 모두를 집어들 때까지, 그리고 이어서 다음 고객이 목욕가운 셋을 집을 때까지. 결국 슈트뢰셀 상회에서는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방식이 있는 셈이다. 뭐든 금방 매진되어버리는 도떼기시장 같은 싸구려 가게는 절대 아니었다. 결국 변호사는 여러 시간을 그녀 곁에 머무를 수 없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이외에는 다른 할 말도 없는 곳에서. 계단 맨 위쪽의 위치는 그녀에게 또 다른 위치를 생각나게 했다. 7년 전에 있었던 시청 앞 맨 윗 계단에서의 위치를. 부모님, 들러리들, 시부모님, 사진사, 이름가르트네 사랑스런 두 꼬마,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던 우테와 올리버. 꽃다발, 하얀 장미로 장식한 택시, 귀에는 여전히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소리가 남아 있는데, 그리고는 택시를 타고서 두 번째 예식장으로 갔었지, 그리고 다시 한 번, 그때는 교회 식으로 했다,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

 

  신랑도 거기에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적인 결과 때문에 빛을 발하면서, 약간은 당황해서. 그리고 이날의 두 번째 성공적인 결과 때문에 분명 자부심을 지녔다. 바로 이 계단 앞에서 이 도시의 가장 힘든 주차장들 중의 하나인 이곳에서 차를 세워둘 장소를 발견해냈다는 사실에서. 여러 다른 종류의 성공적인 결과들이 이혼소송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었다.

 

  이제 죽음이 아니라 법정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그것이 그렇다고 덜 엄숙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혼이 고지되는 법정이 죽음을 결정했다면 - 그렇담 왜 최소한 장례식이 거행되지 않았을까? 시신을 안치해놓은 단, 문상객들, 추도 연설은 왜 없었나? 아니면 최소한 결혼을 되감는 예식은? 사랑스런 작은 아이들, 이번에는 아마도 헤르베르트의 아이들일 테고, 그레고르와 마리카는 그녀에게서 드레스 옷자락을 떼어내고, 신부의 화관을 머리에서 벗겨내고, 하얀 옷을 평상복으로 바꿔주고. 장례식까지는 아닐지라도 공식적으로 결혼식 벗기기 같은 뭔가는 있어야 했다.

 

  물론 그녀는 그가 여기에서 그녀를 기다릴 것을 알았다. 죽음이 결정된 마당에 무의미한 토론의 하나일 뿐인데. 그녀가 아들애를 데리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나온 이후로는 그에게서 아무 것도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음을 그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할 뿐이다. 돈도, “함께 취득한 재산”에 대한 그녀의 지분도, 심지어 명명백백히 그녀 소유였던, 친정 할머니의 유산인 루이 6세 - 몇 세인가는 똑같은 거지? - 때 의자들마저도 원치 않았다. 아마도 그는 어느 날 그녀의 대문 앞에다 그것들을 가져다 놓을 것이다, “불분명한 소유관계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면서. 그녀는 의자들은 물론 마이센 도자기 그릇들도 (서른여섯의 한 세트), 결코 어떤 “가치보상”도 원치 않았다. 아무 것도. 그녀는 참 아들애를 데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잠정적이다. 왜냐하면 그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서 다른 여자랑 - 로테였던가, 아니면 가비였던가? - 아무튼 동서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로테인가, 아니면 가비이던가 (아니면 코니였나?) 결혼식을 하게 되면, 그때 가서는 아들애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누어야 할 아이 머리 위에 검을 들고 있는 솔로몬 왕도 없었다.) 양육권과 관련해서 이 구역질나는 세부사항들은 정리되고 결정되었다. 그러면 의무적인 방문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아이를 정 떼기로 내몰 것이다. (“정말로 생크림을 더 먹지 않으련, 그 새로 산 아노락은 정말 네 마음에 들 거야, 물론 모형비행기도 사주지.”) 하루 동안, 이틀, 아니면 하루 반, 그리고는 아이를 다시 데려다 준다. (“아니, 난 정말 네게 새 아노락을 사줄 수가 없구나, 첫 성찬식에도 안 돼 - 아니면 그게 입교식이었나? - 휴대용 텔레비전도 아냐, 안된다고.”)

 

  담배 한 대 더 피울까? 안 피우는 게 낫다. 이 반회전문이 야기하는 회전력은 그녀로 하여금 새 담배를 피우던 담배에 잇대어 불을 붙이고 싶게 만든다, 지금 예쁜 라이터를 든 이 친절한 변호사가 그녀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하지만 그러한 작은 사소한 일이 헤픈 인상을 강조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아이 문제에 이르면 분명히 탓을 입게 될 것이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 습관은 벌써 이혼 서류에도 기입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듯이 그녀 자신이 간통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사람에 앞서서, 그 역시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이혼서류에 창부라고 기입되어 있었다. 여자는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서는 안 좋은가, 피울 수 없는가, 피우면 안 되는가, 왜 안 좋은가, 왜 할 수 없는가, 왜 안 되는가 등 헛소리는 반대편 변호사로부터 그녀의 “교육 수준”에도 합당하지 않는 “사이비 여성해방론자적” 야단법석이라고 탓을 입었다.

 

  그가 계단으로 올라오지 않고 초대하는 듯이 팔 흔드는 동작만 하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녀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피우던 담배에다 붙이지 않고 새 성냥으로, 이번에는 여름 바겐세일 (같은 법정의) 반회전문이 끊임없이 움직이는데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은 성냥불로 불을 붙였을 때,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목사님도 등록청 관리도 오지 않았다면, 눈물에 젖은 어머니들 시어머니들도, 사진사도, 사랑스런 꼬마들도 오지 않았다면, 최소한 장의사를 오라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장의사라면 무엇인가를 - 무엇을? - 관 속에 넣어 끌고 가 화장을 해서 어딘가에 - 어디에? - 은밀하게 흩뿌릴 것인데.

 

  아마도 그는 그녀 때문에 약속시간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호커 대 호커와의 합병협상들 말이다, 거기서는 인사문제들을 들어야 했을 것인데). 그러나 그는 정말로 의자 몇 개 때문에 호커 대 호커 협상들을 놓치려들까? 그는 이해를 못했다, 그녀가 그를 증오하는 것이 아님을, 그에게서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음을,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져버린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낯설어진 것을, 그녀가 잘 알았었고 결혼까지 했던 누군가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겐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승진에, 집도 지었다. 다만 한 가지, 죽음을 유예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죽었다는 것 뿐 아니라 그녀도 죽었다는 것, 심지어 그에 대한 추억마저도 실패했다. 그리고 아마도 교회들도 - 또 관리들도 이해 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을 일이었다, 이 “죽음이 너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말이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육신의 죽음 이전의 죽음이라는 것 말이다. 그것은 다만 완전히 낯선 사람이 혼인관계의 침실로 들어오는 것이니, 더 이상 소유하지 않은 권리를 끄집어내려는 낯선 이가. 이 사망증명서를 발급하고 그것을 이혼이라고 명명한 법정의 역할은 목사님의 역할이나 등록청 관리의 역할처럼 그렇게 부차적이었다. 그 누구도 망자들을 되살려 놓거나 죽음을 되돌려 놓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담배를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눈짓으로 그를 궁극적으로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더 이상 토론할 말이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그가 그녀를 데리고 어디로 갈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이든파크에 있는 야외 카페로 갈 것이다. 이 시간쯤이면 터키인 여종업원이 막 튤립이거나 히아신스 한 송이가 꽂혀있는 왜소한 청동 꽃병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식탁보를 가지런히 펴고 있을 것이었다. 그곳 - 이 시간쯤이면 - 어딘가 뒤쪽에서는 진공청소기가 돌아가고. 그는 그곳을 늘 “추억의 카페”라 말하곤 하며, 생색내는 듯한 표현으로“섬세하지도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않았지만, 아주 좋았다”고 확인했다. 아니야, 하고 그녀는 다시금 궁극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반복했다, 한 번, 두 번, 마침내 그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실제로 빨간 자동차에 올라탈 때까지. 그는 그렇게 주차장에서 빠져나가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눈길을 주는 일도 없이 떠나갔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녀가 늘 보아왔듯이 그렇게.

아직 아홉시 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계단을 내려와 신문을 한 장 사들고 건너편 카페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계단을 비우고 가버렸으니 그 얼마나 홀가분했던지. 그녀는 시간이 있었다, 생각해 봐야할 일이 좀 있었다. 열두시에 아들애가 학교에서 오면, 아이에게 설탕에 절인 체리를 넣은 팬케이크를 만들고 구운 토마토를 곁들여 줄 것이다, 그리도 잘 먹는 것이니까. 함께 놀아도 주고, 숙제도 하고, 어쩌면 영화관에 갈지도, 어쩌면 심지어 추억의 궁극적 죽음을 확인시켜줄 하이든파크에 갈지도 모른다. 아이는 설탕에 절인 체리며 팬케이크며 구운 토마토를 보며 물론 질문을 할 것이다, 엄마가 재혼을 하려는지.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리라, 아니라고. 그녀에게는 죽음은 하나면 충분하다. 다시 또 슈트뢰셀 상회에서 일할 것이냐고도 물을 것이다. 거기 뒷방에서 아이는 과제를 하거나 원단샘플들을 가지고 놀 수도 있었다. 또 그 슈트뢰셀 아저씨가 그의 머리를 친절하게 쓰다듬어 주곤 했던 곳이다. 아니다. 아니다.

 

  카페의 식탁보가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손의 감촉에 좋았다. 그건 정말로 순면이었고, 은색 스트라이프 무늬가 있는 어스레한 분홍빛이었다. 그녀는 하이든파크에 있는 카페의 식탁보를 생각했다. 그때 칠년 전, 처음 것들은 옥수수빛 노랑으로 상당히 거칠었다. 그 다음 에는 데이지 꽃무늬가 프린트 된 초록색, 그러다 마지막으로는 샛노란 단색으로, 한쪽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그는 닳은 부분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가 정말로 보상받을, 적어도 만 오천, 어쩌면 이만 마르크쯤의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설득하려고 했고, 오늘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정도는 흠 없는 집에 대한 저당으로 간주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그녀는 그에게 늘 “좋은 아내, 분별 있고, 절약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은 아내였다고, 비록 불충한 아내”였지만. 또한 “그들의 생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전적으로 적극적이었고 생산적으로” 동참했었고, 루이왕조 때의 의자들과 마이센 도자기 세트는 실제로 그녀의 자산이라고 설득하려 들었다. 그녀가 이 모든 것들 중 어느 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 데 대한 그의 분노는 그녀가 슈트뢰셀과 저지른 불륜에 대한 분노보다 더 격렬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싸구려 식탁보 닳은 부분을 조각조각 뜯어서 (아마 오늘도 그랬을 것이다.) 바닥에 팽개쳤다. 마침 차와 커피를, 그에게는 차를 그리고 그녀에게는 커피를 가져오던 터키인 종업원의 의심쩍은 눈길하며 - 그건 그녀의 건강에 대한 위협적인 발언과 비웃듯이 재떨이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재떨이는 말하자면 흉물스러웠다, 어두운 갈색으로, 마룻바닥 색깔에다 - 실제로 벌써 세 개비의 꽁초가 들어있었으니.)

 

  네. 커피요. 그녀는 벌써 다시 한 잔을 마시고는 신문을 넘겼다. 여기 카페에서 그녀는 방해받지 않고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무례하게 건네다 보는 눈길이나 아예 떠밀리는 일 없이. 법원 건물의 끝없는 통로 속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일을 생각했다. 그들은 모욕적이라 느꼈던 것 불쾌했던 것 일체를,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았거나 받지 않았던 것 일체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갔다가 내려오곤 했다. 그곳에서는 죽음을 유예할 수 없었던 상냥한 변호사들과 상냥한 판사들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고,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을 이혼시킨 죽음의 시점에 대해서 곰곰 생각하며 미소를 흘리다가 스스로 들켰다. 그건 일 년 전 그들이 그의 사장네 집에서 저녁을 했을 때 시작되었었다. 그가 갑자기 그녀에 관해서 “섬유” 관련업 출신이라고 말했을 때, 그게 꼭 마치 그녀가 카펫 짜는 직공이거나, 베틀 직공, 아니면 일러스트레이터나 된 것처럼 들렸고, 실은 다만 섬유상회의 점원이었지만 그랬다. 그녀는 그 일을 너무도 좋아했다. 두 손으로 모든 것들을 펼쳤다가 다시 개켰다가 하면서, 그건 손에도 눈에도 좋았다. 그리고 구매고객이 뜸한 시간에는 타월들, 침대시트들, 손수건들, 속옷들이며 양말들을 다시금 정돈을 하고, 선반이며 서랍 또는 간에 맞춰서 다시 집어넣곤 했다. 그런 어느 날 이 상냥한 젊은이가 들어와서는, 그는 이제 사망하고 없지만, 속옷들을 보여주라고 했다. 속옷을 살 계획도 아니었고 (돈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서), 다만 그의 성공체험에 관해서 따끈따끈할 때 이야기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야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른 뒤 3년 만에 (“저는 전기공학 출신입니다.”라고 했는데 - 그는 다만 전공이었을 따름이었다.) 디플롬 증서를 땄고, 벌써 학위논문 테마를 받았노라고. 그리고 바로 “제 아내는 섬유업 출신입니다”라는 표현은 직접 미술까지는 아니라 해도 공예미술 정도의 느낌을 줄 것이었고, 그녀가 “예, 저는 섬유상회의 점원이에요, 때로는 파트타임으로 돕기도 하고요.”라고 말했을 때 그가 얼마나 심하게 화가 충천해서 거의 병이 날 지경에 이르렀던지. 돌아오는 길 내내 차속에서 그는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단 한 음절도. 다만 핸들만 경련적으로 붙들고 있던 그 얼음장 같은 침묵.

 

  커피는 놀랍게도 맛이 좋았지만, 신문은 지루했다. (“기업가의 이윤은 너무 낮고, 임금은 너무 높다”라니.) 게다가 그녀가 우연히 엿듣게 되는 것들은 모두 법원 냄새를 풍겼다. ( “사실왜곡.” “소파는 분명히 내 것인데.” “아이는 못 빼앗아가게 할 테요.”) 변호사 예복, 변호사 서류가방. 사무실의 급사 한 사람이 서류들을 가져왔다. 서류는 신중하게 펼쳐졌고, 페이지들은 조심스럽게 넘겨졌다. 그리고 정말로, 이제 두 번째 커피를 그녀에게 가져온 젊은 종업원은 손을 그녀의 어깨에 대면서 말했다.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 다 지나간답니다. 저는 일주일 내내 울었다고요, 다시 말씀드리죠, 일주일 내내요.” 처음에는 그녀가 화를 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벌써 다 지났는걸요.” 그러자 종업원이 말했다. “그리고 저 역시나 잘못한 쪽이었답니다.” 역시나라니? 무슨 말인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잘못을 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이 내게서 어떻게 그런 것을 아는 걸까? 어쩌면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그럴까?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으며 미소를 짓고 있어서? 물론 그녀가 잘못을 했다. 이 죽음을 일찌감치 결정하기를 거부했고, 이 치명적인 몇 달을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았으니. 그가 어느 날 저녁 새 야회복을 가져와서는, 그건 새빨간, 어깨를 깊이 드러낸 스타일이었는데, “회사 파티에 오늘 저녁에 입어요, 우리 회사 사장님과 춤도 추고, 사장님한테 당신이 지닌 모든 매력을 보여주었음 싶네.”라고 말했을 때까지도, 그런데 그녀는 그날 예쁜 유리구슬 장식이 달린 은회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슈트뢰셀과의 사건이 알려지자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당신이 우리네 사장님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을 당신네 사장에겐 죄다 보여주었구먼.”이라고 소리쳤다.

 

  그랬다, 그녀는 그런 짓을 했다. 그가 침실에서 손님방으로 나가고 난 뒤, 그리고 그가 포르노 잡동사니와 채찍을 들고 다시 침실로 되돌아와서는 그의 성적인 성공체험들에 대해서 끔찍한 논쟁을 시작했던 다음날 아침에, 그것들을 그녀는 그에게서 거부했지만 그는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의 직업상의 성공체험들이라는 것에 대한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었다. 그가 노이로제에 빠져있다는 것, 거의 정신병이라는 것. 그녀는 그를 그러한 성공체험에 빠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에게서 채찍을 빼앗았고, 그를 내몰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 물건은 그녀를 얼음장처럼 차갑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여전히 죽음을 결정하지 않은 것, 아들애를 데리고서 택시를 불러서 떠나버리지 않은 것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집의 확장에도 동참하고 있었다니. 손님방, 손님욕실, 텔레비전 방, 서재, 사우나, 아동실, 그리고 목욕 타월, 타월, 침대시트, 쿠션용 솜이나 커튼 천들 때문에 슈트뢰셀에게 가서 할인가격을 부탁해보자고 한 것은 그녀의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슈트뢰셀이 그녀의 눈 속을 깊이 꿰뚫어보며 할인 비율을 20에서 40퍼센트로 올렸을 때, 물론 그것은 그녀로서는 약간 불편해졌다. 그의 눈이 게슴츠레해지며 진열대 너머로 그녀를 잡으려고 했을 때 그녀는 중얼거렸다, “맙소사, 여기서는 안돼요, 여긴 안돼요.” 그리고 슈트뢰셀은 그 말을 잘 못 (혹은 제대로) 알아듣고는 어디 다른 데는 그녀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그와 더불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이 남자랑. 그리고 그와 함께 누웠을 때 그는 지극히 행복해했다. 그는 그러는 동안 상점을 활짝 열어놓았고, 계산대도 감시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옷가지를 벗고 입는 동작마저도 그녀에게는 창피스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아래층 계산대에서 물건들을 포장해줄 때, 그는 할인가격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고 소매가격 그대로 지불하게 했고, 그녀가 문을 잡고 서있을 때에도 입맞춤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확증된 호감에도 불구하고 할인가격을 적용하지 않음”이라는 이 주장을 상대측 변호사는 실제로 슈트뢰셀에게 증언하게 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녀 쪽 상냥한 변호사가 슈트뢰셀이 빠질 수 있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랬다, 그녀는 그 뒤로 여러 번 슈트뢰셀에게 갔었다. “물건을 사려고 간 것이 아니고요?” “아니요.” “얼마나 자주 갔죠?” 그것은 그녀가 알지 못했다, 정말로 몰랐다. 그것을 세어보지 않았다.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장밋빛 방석에 가라앉아버릴 것 같은 불안을 만들어준 것은 슈트뢰셀에게서의 이 부드럽고 감동되고 감동적인 기쁨이었다.

 

  아니다, 그녀는 그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지만 그의 구식 풍의 상점은 그녀에게는 제대로 된 상점이었다. 모든 박스들, 상자들, 서랍들 그리고 실제로 오직 모직과 면제품만을 넣어두었던 창고를 알고 있었다. 틀림이 없는 두 손으로 아주 조금 섞여 들어간 인조섬유 올들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일이라면. 아니다, 그녀는 슈트뢰셀이 늘 그렇게 말하곤 했던 도떼기시장 같은 싸구려 가게들에서는 일할 수 없었다.

 

  아니다,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다시는 그 자리에 있지 않는다, 지금은 살아있는 누군가가 죽으면, 그리고 또 다시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으면. 어쩌면 기혼 남자들이 잔인한 방식으로 음란해지는 시대가 온 것이리라. 그리고 연인들은 구식으로 너무도 장밋빛이라고 할 방식으로 부드럽고 행복해 하는 시대가.

 

  “이 보세요,” 그녀가 계산을 할 때 여종업원이 말했다, “이젠 우리가 더 잘 지내게 되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 젊고 예쁜 여자고,” - 실제로 그렇게 말했다 - “생이 아직 당신 앞에 놓여있어요, 그리고 아이가 당신을 붙잡아 줄 거예요.” 그녀는 카페를 나서면서 종업원에게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들애에게 또 호두케이크를 구어 줄 것이다, 가는 길에 재료를 사가지고 가서.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묻는다면, “내가 정말로 이 여자에게 가야하냐고?”(코니, 가비, 로테?) 묻는다면, 그녀는 “아니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틀림없이 정확한 손을 갈망하고 있을 하운쉬더 크렘 주식회사가 있었다, 슈트뢰셀의 오랜 경쟁사였다. 그리고 또 배송회사도 있었다. 거기라면 그녀는 속옷을 펴거나 매끄럽게 펼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때 막 디플롬을 끝내고 학위논문 테마를 받았던 그 호감이 가는 젊은이 곁에서처럼은. 그녀는 설탕에 절인 체리 대신 훈제청어를 집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그것도 좋아하니까. 청어가 프라이팬 안에서 바삭바삭해지고 반죽이 그걸 감아 돌며 갈색이 될 때, 아이는 엄마 곁에 서 있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하운쉬더 크렘 주식회사에서 점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두 손에 의존할 수 있었다. 어떤 섞여 들어간 인조섬유 올들도 그녀의 손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 

원전 : Bis daß der Tod Euch scheidet, in: Heinrich Böll Werke, Romane und Erzählungen 5 1971-1977, hrsg. von Bernd Balzer, Kiepenheuer & Witsch, 1978, S. 504-512. (L 76, Frankfurt/M-Köln, H. 2, 1976)

『하인리히 뵐 Heinrich Boell』, 제11집, 157-167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2. 8. 14. 16:40

 

 

 

  홉살 우빈이가

  엄마에게 쓴

  생일 카드

 

 

 

    ◀  우빈이

 

         

 

        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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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Future

where powerful

 technologies domin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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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existence with Robots(Final).pptx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2. 7. 19. 01:15

2012. 7. 18. 늦은 저녁 -

6번째 데스크탑으로 바뀌었다, 1988년 시작에서 4반세기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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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영어2012. 7. 9. 10:07

Overprotected    - Britney Spears

 

http://www.youtube.com/watch?v=PZYSiWHW8V0

 

 

I've never seen this music video before until I chose this song for PT in English class. 

Music ia always some sound for me.

젊은이들과 함께 젊은 선생님에게서 영어회화공부를 하다보니 이런 발표를 해야할 일이 생겼다.

유명인이건 아니건 우리는 너무 보호받고 주목받고 하는 동안 자신을 잃는다 -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뮤직비디오는 발표를 위해서 처음 보았다. 내게 음악은 늘 소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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