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14. 6. 9. 23:42

 

 

 

「슬픈 족속」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하얀 세상이 비친다. 하얀 세상, 어딜까? 아니, 낮은 지평선 위, 하늘이어야 할 곳은 검회색 천지다. 검회색, 어디에서 보았던 색깔인가.

첨엔 시원한 물속이었다. 따가운 한 낮의 햇볕 속에서 노란 경계석을 넘나들던 여자아이가 사라진 순간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벌써 발은 물에 젖었다. 허리로 가슴께로 물이 올라오는 것은 순간이었다. 꼬마아이의 옷자락을 잡았다고 느낀 순간 뒤뚱거렸을 뿐인데……. 물속은 상상처럼 푸르지 않고 곧 어두워졌다. 어딘가로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색은 검다 못해 붉어지고 있었다. 이 깊은 물속, 어쩌면 지구 속 마그마가 흐른다는 중심으로 빠져드는 느낌……. 어디였더라?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호수,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기슭에 서있다. 비몽사몽간이다. 가볍게, 불과 몇 십 미터를 올라갔던 경사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는 느낌에 뭉클해진다. 깊이는 지구의 중심에까지 뻗히는 인상이다. 얼마나 깊은지 표면은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다시 물속에 빠져든다. 흑수 속으로 깊이.

중국에서 이 영산을 헐어 관광길을 내었다 싶으니 허전하군요.

누군가가 옆에서 불쑥 말을 던졌다.

조약에 따르면 천지 54.5%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나머지 45.5%가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한다느만요.

저기 저쪽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곳이 북한 땅 백두산 아뇨!

예, 진정한 백두의 임자는 말이 없네요.

진정한 백두의 임자 ― 나는 내 말에 정신이 든다. 지금 무슨 말인가. 몇 년 전 이런 말을 했던 기억과 함께 백두산 천지의 검은 물이 덮쳐왔다. 그랬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지만 난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땐 모교에서 희망적인 상황에서 강의를 맡고 있던 시절이었다. 내 인생의 보름달 시기에 슬픔은 저만치, 방학은 방학대로 즐겁기만 했었다. 영어학 전공의 동료가 연길에 학술행사에 참석하는 길인데, 이어 백두산 관광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 좌석에 여유가 있다고. 백두산을 내 발로 밟고 천지의 물을 내 눈으로 본다는 상상은 학회가 있는 이틀을 묵힐 것을 감안해도 해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공항에서 만나죠!

동료의 말을 떠올리며 우선 공항 내 은행에서 133.90으로 환전을 하고 시계를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동료가 불러냈다. 서른은 넘고 마흔 명은 안 되는, 소년에서 노년의 집합이었다. 부모 따라, 남편 혹은 아내를 따라 나선 경우가 몇 있어 보였다.

그렇게 탑승수속을 함께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니 금방 중국이었다. 인천에서 중국남방항공을 이용하여 대련에 도착한 것이다. 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에어포트호텔로 향했다. 비행시간은 인천에서 대련까지, 대련에서 연길까지 각각 한 시간 정도라지만, 중간에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사이 시간이었다.

닌 하오, 젠따오 닌 헌 까오싱!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습해 간 한두 마디 중국어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우리끼리만 말을 하면 되었고, 인천에서 함께 출발한 가이드가 테이블마다 맥주를 한 두병 가져다 놓았다. 우리 테이블에서는 연예인 같은 젊은 아내를 동반한 남자가 혼자서 맥주를 독차지했다. 꽤 예쁜 얼굴을 하고서 다소곳이 계속 술을 따르는 아내가 신기했다. 술을 따르도록 설계된 안드로이드 같았다.

버스 밖으로 보이는 광장이나 노상에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걸춤이라고, 조선족 현지 가이드 말로는 이곳에서는 춤이 일상이라 했다.

길거리에서 춤이 추어질까요, 한샘?

즐거움에 겨워 춤을 추는 것이겠죠!

즐거워 보이지도 않은데요. 춤을 추다보면 즐거워지는지. 하긴, 리듬을 타면 누구라도 즐겁지 않겠어요?

정샘, 아예 즐겁고 싶어서는 아닐까요?

즐겁고 싶어서라면, 그 말은, 즐겁지 않아서 춤을 춘다고요? 왜 꼭 즐거워야 하는지, 삶이란 게 보통 지치고 서럽고 아닌가?

흰소리를 해 가며 돌아온 공항 로비에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쾌찬’이라고 쓰인 곳에 가면 앉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레이프주스를 달라했던 누군가는 파파야주스를 받고 투덜댔다. 대규모 항구도시라지만 중앙과는 다른지, 종업원들의 영어가 시원치 않았다. 셰셰 닌! 우리와 똑같은 얼굴에다 대고 그렇게 말하기도 어색했다. 다음 말도 모르고.

비행기는 놀랍게도 예정시간을 앞질러 출발했다. 목적지 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거리엔 한글과 중국어로 위 아래로 쓰인 간판들이 즐비했다. 비행장에서 곧 바로 향한 곳은 보기에는 중국 식당인데 음식은 퓨전이었다. 맛없는 국이 뜨겁기만 하다더니, 요리접시는 크고 무겁고 개인용 접시는 콩알만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숙소 ‘바이샨따샤’ ― 백산호텔은 싱글과 트윈 룸을 가리지 않고 하룻밤 100불이 넘는, 중앙당에서 지도공작을 나오는 고위급도 게서 묵는다는 대형 호텔이었다. 마음으론 여전히 불편했다. 외국인지 아닌지 도통 애매했기 때문이었을까. 영락없는 닮은 꼴 얼굴들에서 중국말이 튀어나올지 한국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학술 행사장 ― 행사와 관련 없는 몇몇은 하릴없이 시내관광을 나가자고 부추겼지만, 나는 건물 로비에서 책을 읽기로 했었지. 여행길에 바보같이 무거운 양장본을 챙겼으니 읽기라도 해야 덜 억울할 일이었으니까.

[…] 예술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뱉어놓은 말들은 우리의 감성에 해독을 끼친다. […]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은 지식인들의 복수라? 지식인에겐 감성이 없다고? 내 직업이란 것도 해석학 아닌가? 고로 나에게도 감성이 없다? 간단히 며칠 놀자고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어. ‘해석에 반대한다’에 반대하는 글을 쓰고 싶었으니까. 지성과 감성의 이분론이 부당했고, 감성 우위론도 근거가 없다. 태어날 때 감성의 풍요 속에서 태어난다지만, 천천히 계발된 지성 또한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이자 특권이다. 원초적인 것이 우월하다니, 그것도 편견이다. 인간에게서 따로 우월한 특성은 없다. 제 알아서 신체가, 신체의 주인이 쏠리는 쪽으로 개성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켕기는 것들을 메모하다가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갔지. 「내용 없는 신앙심」 등 다른 글들도 저자 손태크의 삶의 방식만큼이나 흡습성 독서를 요구했어. 여행지의 독서로는 많이 무거워, 영락없이 게으른 선비 책장 넘기기 꼴이었지 뭐.

그렇게 이틀이 지났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댄 내게 저녁의 연회는 과분했었지. 처음 보는 버섯단자나 이름을 듣고도 잊어버린 38%의 알코올도 맛이 아련히 떠오른다. 알코올 탓인지 연길 현지의 참석자들도 입을 열었던 것 같아. 1950년대에 태어났다는 어떤 교수는 문화혁명 당시 3년 반 동안을 하방으로 시골로 밀려갔지만, 공장 행을 원치 않고 기어코 공부를 더 하겠다고 고집하던 중, 마침 영어교육에 투입되어 영어가 직업이 되었다고. 기어코 원하는 것은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이루어지는구나,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어. 적어도 그때까진 나도 내 인생을, 미래를,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두통 때문에라도 눈을 뜨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마가 긴장되지 않아서 편안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희미하게 비추이던 세상이 실은 겨우 내 속눈썹 사이로 비친 공간임을 깨닫는다. 눈을 감으니 다시 검회색 세상이 되고, 기억은 검은 호수를 향한다.

마침내 백두산과 천지를 향했지. 8월 초 일요일, 입추라지만 볕은 따가웠다는 기억이야. ‘도로수금소’를 지나니, ‘차굴’이 나왔어. 산삼과 꽃사슴뿐으로, 담비가죽 등을 생업으로 하는 동네를 지나자 어김없이 휴식시간이었어. 40여 분 쉬는 시간에 휴게소는 장사가 짭짤한 모양. 관광버스가 서너 대가 한꺼번에 서있었지 아마.

이어지는 버스 내의 분위기가 뜰밖에. ‘뀀’이라는 꼬치구이에 약술을 한 잔씩을 걸쳤거나, 잘 씻지도 않은 장뇌삼을 질겅질겅 씹은 탓이었나? 현지 안내원은 ‘만경대는 꽃동산, 우리들의 봄동산’이라는 북한 노래는 맛만 보여주고, 순 국산 노래방 수준의 ‘아빠의 청춘’을 감칠 맛나게 뽑았어. 참, 노래 잘하는 사람들…….

반딧불이 억수로 많아요!

안내원의 반딧불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낭만과는 멀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쪽 산에는 ‘피복’이 없단다. 그 민둥산 화전에 웬 반딧불만 유난히 많은데, 알고 보니 파종을 한 뒤 그것을 지키는 주민들의 한숨 섞인 담뱃불이더란다. 파종해 놓은 씨앗, 덜 익은 곡식도 마구 훔쳐가는 인심이라니. 굴뚝에 연기가 나는 것은 일 년에 달포 정도, 그것도 아침과 낮에만. 파종이나 가을걷이 등, 일을 심하게 해야 할 때나.

마음 가득 애절한 동포애가 스멀거릴 쯤 ‘만경 관광 상품 유한공사’라는 곳에 도착했어. 중국에서 건물을 지어주었지만 운영 주체는 북한이라고. 한 더위에도 긴 통치마에 저고리를 받쳐 입은 접대원동무의 자태가 고왔어. 말씨도 조용하고 고왔지. 텔레비전에서 가끔 듣는 조선중앙방송의 아나운서들처럼 가열찬 목소리가 아니어서 신기했지.

상품은 크게 두 종류, 건강 상품과 자수 작품들. 어느 것 하나 가짜일 것 같은 냄새가 없는, 진지하다 못해 약간은 촌스러운 작품들이었어.

한샘, 여기 봄 와 봐요. ‘지저스 래핑’이라뇨! 웬 예수님에 웬 영어죠? 그러고 보니 상품 모두 한국인 관광객을 겨냥한 것이군요. 봐요, 건강 상품들도 한국에서 열을 내는 것들로, 우황청심환, 상황버섯, 뭐죠 이건?

글쎄요, 아예 값이 한화로 표시되어 있군요.

한국 사람들 물건 사기는 좋아하나 봐요.

남의 나라 사람 말하듯?

누가 유럽관광 다녀와서 구찌 백을 샀다고 자랑삼아 얘기합디다.

그게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요?

꼭 샤넬을 사려고 했는데 그 매장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 누가 묻습디다. 어디, 파리에서요? 하니까 그 여자 대답이 가관이어요. 파린가, 어디였지? 도시 이름도 몰라요, 이삼백 짜리 물건을 사고도 그 도시 이름도 모른다니까요.

여긴 그런 명품과는…….

우리 둘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지. 건물 주변으로는 장백산정원이 시작되고, 길가 코스모스와 봉숭아와 맨드라미가 가지런히 심어져 있는 것이 옛날 어릴 적의 정이 묻어났어. 어머니가 우리들 하얀 러닝셔츠에 물감을 들여 주시던 귀여운 패랭이꽃까지도. 그곳이 정말 중국 땅인가 싶었으니까.

버스에 오르니 연변의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어. 1870년대 이주하기 시작한 조선족은 초가집과 벼농사를 특징으로 정착했단다. 두만강 아래쪽으로는 조선족이 많고 백두산 쪽으로 올라갈수록 중국인이 많은데, 지붕 모양을 보고도 구별이 된다고. 사방 기와가 조선족의 집이란다.

기와집 ― 그랬다. 우리 민족은 기와집에서 쌀밥에 고깃국을 탐했었다. 기와집 짓고, 아들 딸 낳아서 쌀밥에 고깃국 먹여 키우는 것, 그것이면 되었었다. 땅 따먹기 놀이처럼 재화를 불리려고 혈안이 되지는 않았었다. 옛날에 우린.

버스는 민송이라는 특별한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계속 달렸어. 소찬에 ― 상마다 삶아져 나온 토종닭도 있긴 했지만 ― 점심을 먹고 나서 막상 백두산 천지를 향할 때는 염려와 달리 하늘이 점점 밝아졌어. 미리 니트로글리세린을 혀 밑에 넣어 녹이는 것을 잊진 않았지. 차편으로 게까지 오른다지만, 고산의 환경을 견딜까 염려스러웠으니까. 어느 만큼에 이르니 모두 하차하여 친환경버스로 바꿔 타야 했지. 거기서부터는 사람 당 두 장의 입장권을 받았을 뿐, 일행의 개념이 없이 숫자대로 태워져서 난감했었지. 번호 붙은 짐짝처럼. 친환경버스로 달리는 시간은 25~30분, 다시 6인승 짚 차로 곡예등정이 20분 정도 소요되었나. 묘기행진에 참가하는 기분으로 흔들거리며 덜컹거렸지. 차창 밖 풍경은 점점 달라졌어. 여러 마리 나란히 서있는 소들의 허리나 엉덩이를 닮은 지형을 지나면서, 구름은 더 걷혀서 안심이었어.

백두산 한 귀퉁이가 갑작스럽게 드러난다. 너무나도 가까이에 솟아 있다. 그 너머가 천지란다. 해는 환하게 모습을 드러내서, 서너 번의 관광에도 천지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사람들로 빼곡한, 저 불모의 언덕 조각이 백두산이라고?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너무 높게 차로 올라온 탓에 뒷동산보다 미약해 보이는 언덕. 모래와 자갈뿐인 산에서 신성은커녕 생명감마저 느끼려야 느낄 수 없다. 백두산 까마귀도 심지 맛에 산다는 말은 비유일 뿐, 까마귀 한 마리 없다.

아, 천지, 깊은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깊게 깊게 내려다보이는 짙푸른 수면, 산에서 뚝 떨어지는 경사면 때문에 경이롭다 못해 가슴이 뭉클해진다. 가슴이 아프다. 삼사백 미터 깊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표면이 움직임도 없이 육중하다. 흑수라 불리 듯 정말 어두움에 쌓여있다. 순간 이 끝이 지구의 중심이라는 확신이 든다. 마그마가 끓고 있다는 그곳. 천지, 그래 그곳이었구나. 그 높은 곳에서 지구의 핵을 실감했던 자리.

여기 사진 열두 장 4만원. 여기 사진 카메라, 여기 번호 잘 봐두세요 ―

유창하지는 않지만 한국말을 하는 왜소한 청년의 옷에는 006이라는 번호가 크게 붙어있었지. 어딜 가나 신흥 자본주의가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었어. 관광객들이 가진 카메라로는 도저히 잡히지 않는 호수 표면을 찍는다는 전제로, 아예 4만원 한국 돈으로 12장짜리 필름에 사진을 찍어주는 직업, 알바, 장사, 그런 것. 그렇게 사진을 찍고 나니 더는 볼 것도 없었지. 한 발짝 더 올라가면 좀 더 잘 보이겠으나, 장님 코끼리 보기는 매한가지일 터.

일행들보다 미리 내려와 보니, 간이건물 한편에선 커피 등을 팔고, 한편에선 기념품을 팔고 있었지. 기념품이라야 백두산 관련 사진들과 그 사진을 담은 열쇄 고리 정도. 늑장부리는 팀은 늘 있기 마련, 안내원이 흔들던 노랑 깃발이 그들을 불렀지만 소용없었지. 다시 짚 차, 친환경버스를 거치니까 입구였지. 왠지 허망했어. 멀리 돌아 돌아 백두산 한 조각 밟아보고 돌아서는 일이 마치 중간에 깬 꿈만 같았지. 처량하기까지.

장백폭포조선족 안내원은 기어코 백두폭포라고 하는데 ― 폭포관광은 도보였지. 비껴 옆 입구를 통해 처음엔 느슨한 기울기로 시작되고. 사람들은 벌써 멀리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계곡을 보고 놀라 탄성을 올렸어. ‘백두산에 걸린 두 필의 비단’을 일 년 내내 볼 수 있다지만, 그렇게 은색으로 빛날 줄은 몰랐으니까.

나있는 평길은 가파르지 않지만, 멀리 바라보이는 폭포를 보면 중간에는 가파른 곳이 있어 보였지. 아니나 다를까, 입장료를 낸 다음부턴 길은 갑작스레 가파라졌고, 더 가파른 층계를 오르자 곧 물이 나타났지.

한 여름인데도 발을 담글 수 없이 차가운 물에 살짝 씻어보는 것이 고작이었어.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두 번은 오를 수 없다 ― 라고 그리스인들이 그랬다던가. 나 또한 분명코 이 쏟아져 내려 흘러가는 물에 다시 발을 적시는 일은 없을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어 노천지수영지가 있었지. ‘노’는 ‘이슬 로’자를 썼더군. 더 큰 간판은 한글로 ‘세계 제일의 성산 백두산 자연유황온천수탕’, 그 아래 한자로 ‘세계 제일적 성산 장백산 천연유황온천욕’이라 쓰여 있었지. 83℃. ― 게서 의견이 갈릴밖에. 온천욕을 하자는 그룹과 아니라는 그룹. 아닌 쪽 사람들이 한 시간을 기다려주기로 했는데, 바깥바람이 좀 셌나. 길가에는 조선족 풍미의 냉면 등이 20, 30, 40위완, 쾌찬은 20위안이라는 선전이 즐비했고. 길 건너엔 ‘순 한국식 음식’, ‘원두커피’라는 팻말도 보였어, 한국 어디 시골처럼. 낡은 집과 어울리지 않는 새 문구들.

현지 안내원이 불러서 안으로 들어갔었지. 센 바람은 피한다지만, 로비의 커피숍 자리에는 앉기만 해도 10위완이었어. 피곤이 차츰 내려앉을 무렵, 옆방에서 우리 곡조의 단소 소리가 애처롭게 건너왔었지. 그리운 옛 임이여, 언제나 오려나~. 애처롭다 못해 찔찔 짰어. 영락없는 몇 십 년 전의 한국 풍경. 입욕한 사람들은 약속된 6시가 지나도록 감감했고, 결국 15분 이상 지나서야 슬슬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버스 안이 갑자기 술렁거렸지. ‘저녁에 소를 잡는다’는 행사 때문. 송아지 값이 한국의 1/10, ‘겨우’ 50만원이라나. 버스 한 대 사람 모두가 먹고도 남을 값이라면 합리적이라고.

식사 후 이어지는 파티는 지난밤의 연속이라는데, 우리는 그때 빠졌기 때문에 실력들을 잘 몰랐지. 그때 벌써 마이클 잭슨이니 뭐니 별명을 갖게 된 인사가 있었지, 첫날 아내가 따라주는 낮 맥주를 한 없이 마시던 사내. 이번엔 가곡을 부르겠다더니, 일행들의 선택으로 「명태」를 부르는 품이 대단하긴 했어. 깡마른 작은 체구에서…….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쫙쫙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 지라도~.

그 사람 뿐 아니라 다들, 정말 다들, 길고 긴 노래, 어렵고도 어려운 노래들을 잘도 불렀어. 배를 움켜쥐어가면서도 불렀으니까. 어디에 살던 가무에 심취하는 민족이 틀림없는 게지. 즐거움이 많은 민족? 삶의 무게, 삶의 슬픔을 즐거움으로 뱉어내는? 속내를 토하는 말은 접고 가무로 상대하니 더 외로울 것 아닌가? 외로움과 슬픔을 음주 가무로 포장해서, 나는 내 노래를, 너는 네 노래를……. 그렇게 함께 외롭게 밤은 깊어 가는 거다.

식중독 뉴스가 다음날 아침 모두를 놀라게 했었지. 그때 묵은 호텔은 장백산대하. 그곳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라 했는데. 5시에 모닝콜 ― 아침 ‘찬청’에 들어가자 그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밤중에 일행 중 한 부인이 병원에 실려 갔다니 놀랄밖에. 우려했던 식중독이었어. 여럿이 배탈을 호소했고, 아예 아침을 굶거나 버스 안에서 운신을 못하는 일들이 벌어졌으니. 누구는 간밤의 송아지를 의심했고, 또 누구는 생간을 세 접시나 비웠어도 멀쩡하므로 송아지는 아니라 했지. 갑론을박. 대개 생각이 모아지기로는 점심부터의 식당 물이 주범이라고. 한국인들은 현지인들과 달리 물에 오염에 약하지. 무슨 대가를 치렀든 단 기간에 몸이 위생에 민감한 문명인으로 대단한 발전(?)을 했으니까. 동료와 나는 내가 ‘향수에 젖어’ 잔뜩 사 들고 간 에비앙 덕분에 탈을 면한 듯 했어. 향수 ― 사오년 파리 생활의 향수가 고작 생수에 머물다니 초라하지만, 그래도 좋은 일 한 번 한 셈 아닌가.

한국에서 간 가이드는 환자일행과 미리 연길로 향했으니까, 그제서부터는 현지인이 안내를 독점했지. 안내원 자신은 친정 쪽 고향은 합천이지만 시댁이 부안 뿌리이다 보니 전라도식 조선시대를 사는 편이라고 우겼어. 남편이 밖에서는 한턱 쏘기가 일품이며, 집안에서는 짠돌이라 어떤 도움도 안 주더란다. 전라도 남자들이 다 그런가? 일행 중에 전라도 부부가 있었는지 다들 그쪽을 바라보는데, 나이 들어 보이는 남편은 웃고만 있었지. 그런데 안내원은 이삼년 전 한국에서 경험한 사건이 있어 ― 한 여성국회의원이 공개석상에서 남성의원의 머리통을 ‘쥐알리는’ 것을 보고 ― 이젠 집에서 남편에게 엇서기도 한다며 깔깔댔지. 한국 여성의 위상이라니!

어쨌거나 56개 민족의 다민족 국가 중국에서 여자는 조선족 여자를 제일로 친다고. 가무에 능하지, 성격 깨끗하지, 남자들 시중 잘 들지…… 자화자찬이지만 귀여운 여자였어. 조선족 여자는 조선족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제일로 쳤었지만, 그건 과거사다. 이젠 돈과 권력과 학력을 지닌 중국남자와 결혼하는 예도 생긴단다. 고등 졸업 후 대도시의 한국기업에 취업했다가, 한국으로 시집을 가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빈자리를 탈북녀들이 들어와서 메운다는데. 다시금 졸다가…….

두통은 여전하지만 배고픔이 눈을 뜨고 싶게 한다. 성긴 속눈썹으로 무거운 눈 뚜껑을 열기가 힘들다.

눈동자가 움직이네요, 잠에서 깬 거 맞지요?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긴장을 불러온다. 아, 나는 아직 이쪽이구나. 그러니까 그쪽, 내가 있었던 쪽. 배고픔도 그렇고 그 목소리 또한 증거가 된다. 안도감에 오히려 넋이 나갈 것 같다. 눈을 뜰까 말까……. 깬 줄 알면 질문을 해댈 것이고, 난 적어도 변명이라도……. 아직 자신이 없다. 배고픔을 참고 눈을 감자,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살그머니 멀미가 인다.

용정을 향한다. 기다려지던 마지막 일정이었지. 처음에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어. 한국에서처럼 호화분묘는 아니어서 대리석이나 화강암 묘석은 아닌 듯 했어. 어쨌거나 나무 말뚝에 페인트로 이름을 남겼더라도 이만 명이 조금 못 되는 조선족은 자신의 문화에 따라 매장되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니, 좀 놀라운 일 아닌가. ‘작은 거인’ 등소평이 첫째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해주었고, 둘째, 매장문화를 변혁하는 데 성공했지만 조선족은 예외라고. 그러니까 어떤 중국인도 토장을 금하며, 물론 비석도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데, 그런데도 조선족은 생일제 외에 추석과 청명에 제사를 드려도 된단다. 조선족 차별을 선입견으로 지녔던 우리로선 차별이 아닌 다름을 인정한 점에 감동하며…….

용정 길거리엔 대하극 『토지』에서 보던 인력거가 눈에 띄었는데, 이것은 3등 택시로서 도문과 용정에서만 볼 수 있는 열악한 생존조건이랬다. 시내에서는 거리에 관계없이 ‘일인 일위완’인데, 당시 우리 돈으로는 1400원 정도. 하루에 서른 번을 운행하더라도 점심 값 등을 제하고 나면 20위완 정도의 수입이라고. 난 왜 하필 화폐단위에 민감했었지? 한국에는, 고향에는 절대빈곤이 없다는 인식인가. 위안인가. 외면인가.

용두레 우물이 있던 땅에 ― 그래서 용정이라고 했다 ― 1860년대 함북에서 살길을 찾아 이주한 조선인들이 집을 앉히고 밭을 일구었더란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 오른쪽 산 위에 비암산의 천년수가 있었단다. 이 소나무 아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 의지를 불태우곤 했으니, 독립군의 보금자리를 그냥 둘 일본이 아니었는지라, 산 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고사시켰다 했다. 그렇게 일송정은 죽어 넘어지고 없고, 용주사마저 문화혁명 때 사찰 탄압 가운데서 사라졌다. 멀리 바라보이는 일송정 터는 왜소하기 그지없고, 「선구자」에 일송정과 함께 나오는 해란강 또한 실망스러웠지. 두만강 지류답지 않게 물은 마르고 모습이 처량했어. 건너가는 용문교 또한 한없이 초라한 그냥 다리일 뿐. 이 허탈함이 또 어디였더라?

미라보 다리 ― 그래, 거대함에서는 남달랐던 미라보 다리, 그곳에서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어. 아폴리네르의 시 한편으로 우리를 이끄는 그곳.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임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미라보 다리는 그러나 영화 때문에 유명해진 퐁뇌프 다리에 비할 수 없이 초라했었지. 그때의 가슴이 멎은 듯 아렸던 기억이 왜소한 용문교를 건너면서 되살아난 거야. 그래, 전설은 전설이어야 해.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미라보 다리엘 가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진실은 초라할수록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 아파오네. 배가 고프면 아프다고 느끼는 착각은 나이 들어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주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설마 소리를 질러 누굴 부를 수도 없겠고. 이 이율배반을 어쩌나, 배는 고프고 눈은 뜨고 싶지 않고.

윤동주의 시비가 서있는 대성중학 ― 「서시」를 새긴 시비는 ‘사립대성중학교’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구관 건물 앞에 있었지. 1921년에 건립되었고 다 무너졌다가 1994년 금성출판사 김낙준회장이 복원했다는 학교는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있었지. 잔디에는 ‘잘 부탁드립니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쓰인 작은 팻말이 우릴 반겼어. 웃음이 나게 촌스러운 문구가 정답다 느낄밖에.

바로 구관건물 2층이 기념전시관이었어. 사진, 화보,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지. 용정 출신의 다른 인사들의 역사 또한 전시되어 있고,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물론 철혈광복단의 15만원탈취사건 등에 대해서도 열심히 설명을 들었어. 현재 2,200명 남녀 조선족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설명을 끝으로, 마지막 방은 방문록을 작성하는 곳이었지. 이름 칸 옆에는 장학금 기부 의사를 표명해도 좋다는데, 어느 화폐이건 어느 액수이건 환영이라고. 초라한 봉투를 내민 손이 부끄러운 김에 서둘러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 쪽에서 문득 조그만 입구를 발견했어. 층계참을 이용해서 책을 전시하는 곳 같았지. 대개가 스치고 지나갈 위치에다, 실제로 그곳을 들르는 사람이 별로 없어 보였어. 하지만 한적하기 때문에 들러보고 싶은 그런 곳. 아니나 다를까 고작 여남은 권의 책들 중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발견하곤 얼마나 기뻤던지. 손바닥 보다 조금 더 넓은, 두께 또한 왜소한 20위완짜리 소책자. 책장을 확 펼치는데 짧은 시가 눈에 들어왔어. 72쪽, 제목은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것이구나, 우리는. 슬픈 몸을 감추고 떨쳐 일어나는, 이것이 우리의 뿌리였구나! 정신이 버쩍 들었지. 난 이 시집을 찾으려고 여기에 왔음을 직감했어.

버스를 타자마자 책을 폈지. 「서시」는 졸업 직전인 41년 11월에 쓴 것이고, 졸업 기념으로 원래 『병원』이라는 시집을 출판하려던 계획은 「서시」를 쓴 이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로 제목이 바뀌었지만 출판은 좌절되었다는 것. 도쿄입교대학 영문과에 유학했다가 첫 여름방학에 용정을 방문한 것이 마지막 길이 되었다는 것. 아, 동생에게 우리말 인쇄물이 앞으로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던 당부는 혜안이었어. 1943년 징병영장 발부 와중에 체포되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2002년 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발행. 용정의 조선족은 용정 땅에 유골로 돌아와서 묻혀있는 윤동주를 잊었고, 1985년에 연변대학 조문학과 교수와 와세다 대학 교수가 함께 윤동주의 묘를 찾았을 때까지도 그와 그의 문학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적혀 있었지. 다행히 용정중학교의 역사과 교사가 ― 언제나 어떤 한 사람이 중요하다 ― 그를 기억하여, 용정 그리스도교인 묘지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냈다니. 지금은 묘소 뿐 아니라 생가도 복원되어 있고…… 그런데 우리 여행 일정에는 거기까진 포함이 되어있지 않았으니 서운할 뿐.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곰들을 보게 되었지. 반달곰의 수명은 25년쯤인데, 동방곰 사육기지에서 집단으로 사육되고 있었다. 총 1,600마리 규모를 자랑하는데, 태어나서 3~5년 사이에는 백두산에 자연 생육했다가 이곳으로 잡아들인다고. 게서 1년간 주 1회의 쓸개즙을 빼는 의무를 다하면 자연수를 누리며 살게 된단다. 죽을 때까지 쓸개즙을 뽑지 않고 자연수를 누리게 해준다니, 퍽도 인도주의적 발상이겠다!

코앞에서 바라본 거대한 곰들은 몸집이 큰 만큼 눈이 작았어. 하지만 말없이 우릴 바라보는 흐릿한 검은 눈알은 영겁의 물, 천지의 표면과 같은 물기에 젖어있었어. 마치 슬픔이 번져난 눈물처럼. 곰들도 울 거라 생각했어, 포유동물이잖아. 사람처럼 발바닥으로 걷는 모습이라니, 갇혀있는 그들이 지능이 낮은 식민지 인종들과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다 싶었어.

그렇게 해서 연길로 돌아와서 다시 대련으로, 이번에는 그곳에서 일박하고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었지. ‘완다구어지판디엔’ ― 대련만달국제호텔은 23층의 최신식 건물로 객실은 383개나 된다는 대형호텔이었지. 숙박료는 60불 정도. 호텔에 투숙한 시간은 거의 11시였는데, 그 시간에도 밤나들이를 가는 일행들 때문에 복도가 떠들썩했지. 아침에 어쩌려고 그러는지, 세상엔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많음에 놀랐어.

어김없이 5시 반, 모닝콜이 울리기도 전에 동료는 부스럭거리고 짐을 챙기고 있었지. 눈도 잘 떠지지 않은 채 집어 삼킨 아침 식사, 단체가 무섭긴 무섭다 싶었어. 늦잠꾸러기인 내가 단 한 번도 늦질 않았으니.

그래도 한 고비가 더 남았었지. 비행장으로 향하던 버스가 어떤 네거리에서 오랫동안 막혀 서 있게 되자 일행들은 조금 술렁였어. 빨리도 이륙할 수 있는 것이 중국항공 아니던가? 그런 불신도 없진 않았지. 무엇보다 우린, 한민족은 늘 조급해. 오랫동안 없었기에, 없음을 체감했었기에 핏속의 허기가 조급증을 일으키는 것 아닐까. 얼핏 풍요의 외관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 같을까, 곧 사라질 신기루일까 봐 두려운 것일까.

탑승수속을 마쳤을 땐 8시가 지나있었지. 8시 20분 발 비행기에 빠듯했어. 백두산 한 귀퉁이, 망연히 만져보았던 마른 흙의 느낌을, 검은 물 표면의 뭉클한 기억을 함께 할 작은 시집이 손 안에 있었지. 언젠가 고서점에서 1958년 발행된 김수영의 『달나라의 장난』을 건졌던 때의 뿌듯함만큼, 아니 그보다 더한 아픔 같은 느낌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쥐고 있었지. 흰 고무신이……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우고……. 내 운동화는 나이키. 캘빈 클라인 청바지를 꿰입은 다리가 조금 민망했어.

이 헐렁하다 못해 벗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힘들게 떠본다. 속눈썹이 성기길 다행이다. 반쯤만 뜨고도 세상이 내어다 보이니까. 창 쪽에 걸린 커튼이 여린 연두색 햇살을 통과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시원한 공기는 초봄이라고 말하지 않고 뭔가 인공의 냄새를 풍긴다. 아래를 보니 넓은 흰 천이 내 슬픈 몸집을 가리고 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노란 경계석이 떠오른다. 나는 그것들을 넘어 물속으로 발을 내딛었던 것 같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거꾸로 곤두박질쳤고……. 나는 아직 기억이 살아있다. 느낌도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나 보다. 눈물이 날 것 같다.

두통은 눈을 뜨지 말라고 명한다. 검회색 하늘이 지붕처럼 내려앉는다. 세상은 온통 검다. 성긴 나무들 숲 사이로 짙푸른 물기가 번진다. 천지에서 퍼 올린 검은 물이 범람하고 있다.

..........................

『광주문학』 2014 봄호(통권 70)호, 49~66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4. 6. 7. 23:29

 

아무 것도 못 하고 안 하고

4월과 5월이 갔다.

밥알이 입안에서 구르고 넘어가려고 하질 않았다.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 가장 오래 함께한 동기간 - 그 예쁜 여동생이,

하도 예뻐서 나는 당연히 예쁜 것을 양보할 수 있었던, 양보해야 한다고 믿었던 아이,

이제 서로 나이가 들긴 했지만, 내겐 아직도 예쁜 여동생이,

객관적으로도 여전히 아름다운 내 동생이 슬픈 일을 맞았다.  

4월 1일 - 함께 봄 햇살을 즐기던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자목련이 머물렀다가 모르는 새 피어버린 하루를 보낸 뒤, 아차.

 

함께 슬퍼하다가, 정신도 못 차리다가, 아! 세월호 ......

 

아이들 비교해서 덜 슬퍼지는 것이 아니라,

슬픔은 300배를 넘어서 기하급수로 증폭했다, 아메바의 무한 세포분열처럼.

바닷물 - 단어로도 글자로도 무서운 말.

 

                                      

 

그렇게 5월도 가고 6월이 되어서야 이곳에 들어오려다가 잠김을 만났다.

만 하루를 소모하면서 다시 열린단다......

 

아들들이 고생이다. 

제 어머니를 주말마다 위로하러 내려오는 조카도 제 어미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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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3. 25. 23:54

 

「목소리」

 

 

목소리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커졌구나, 라고 느껴졌다. 오늘 아버지와 나누시는 가벼운 대화에서 그랬다.

굳이 갖다 놓지 않아도 되거든요. 내가 한다니까요.

빈 밥그릇 국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도 조금 생소했지만, 그걸 그렇게 말리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높았다.

 

설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여유를 두고 집으로 가자고 작정한 것은 명절엔 더욱 허전해하실 부모님 때문이었다. 아들 없이 딸 셋을 둔 부모님의 얼굴엔 딱히 썰렁함은 아니라 해도 뭔가 어색함이 어른거린다. 애써 괜찮다는 과장으로 포장되어 표피가 평상시의 부드러움을 잃는다. 부드러움을 잃은 주름은 갈라질까 말까 바스락거린다.

 

이번 설에도 막내 옥실은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에 사는, 미국인이 된, 미국인과 결혼한 옥실인 만일 한국에 온다더라도 설이 아닌 추석에나 올 뿐이다. 그것도 가뭄에 콩 나듯이. 열여섯 살이 되기 전에 미국의 큰아버지에게로 입양되어 간 옥실을 어머니는 가슴에 두고 사실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마지막 미토콘드리아의 전수자는 너무 멀리 가버렸다. 어머니에게서 딸들로만 유전된다는 미토콘드리아 ― 막내는 정말 너무 멀리 가버렸다. 이름도 제이드가 되어 버렸으니까.

 

둘째 은실은 늘 가까이 있다. 바리데기 ― 일곱 번째 얻은 딸은 아니나 부모님 곁을 유일하게 지키는 은실이 바리데기가 맞다. 언니와 막내에 끼어 치인 부분도 없지 않았을 것이고, 공부도 시쳇말로 다 못해서 그렇다. 은실은 고 1때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너무 가까이서 겪은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대학진학을 접었다. 하지만 일찍 결혼해서, 지금까진 우리들 중 유일하게 손자 손녀를 안겨 드린 효녀다.

 

나 ― 어쩌다 막내서부터 거꾸로 설명이 되었는데 ― 맏이인 나 한금실은 교사의 자녀들이 많이 그러하듯 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은 물론 유학까지 일직선으로 나갔다가 박사가 되어 돌아왔다. 그땐 벌써 은실이 김실이 된 후였으므로, 나는 원래의 금실 대신에 한박사로 불렸다. 더구나 한박사라고 부르기 시작한 아버지의 목소리엔 어딘가 자랑 비슷한 여운이 깔렸다. 지금도, 그 한박사가 명예도 돈도 별로 들여오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건 여전하신 것 같다.

 

아버지는 1944년생으로, 요즈음에 말하는 신중년 세대이시다. 일제 강점기 말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그들은 일제 때 강제징집당한 146만 한국인의 숫자가 말해주듯 많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해야 했던 세대다. 또한 형제들을 사상의 갈등으로 잃기도 한 세대가 그들이다. 국제평화기금이 들어오던 때에는 갑작스레 경제무대에서 은퇴 당한 신중년 세대의 운명 ― 거기에서 아버진 자유로우시다. 교사는 강제 은퇴는 없었다. 대학 공부는 겨우 열에 하나나 했을 이들 세대에서, 아버지도 사범학교 졸업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가 야간대학 과정을 밟아서 대졸에 합류하신 전설적인 분들의 하나이다. 다만 아버지에겐 아들이 없다. 2008년 은퇴하시기 전에는 딸자식이긴 해도 자식인 내가 좋은 자리를 잡을 줄 아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 한박사가 모교에서도 밀려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는 은퇴 후 오륙년의 시간을 우울한 적응기로서 사시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커진 어머니?

 

어머니는 아버지와 묻지 마라 네 살 터울이시다. 6.25 때 기억은 없다 하시는데, 큰 이모는 엄마가 비행기 소리만 나면 담벼락에 붙어 선 채로 오줌을 줄줄 싸는 세 살짜리 겁쟁이였다고 놀리신다. 물론 내 기억으로 어머니가 겁쟁이란 느낌은 없었다.

 

엄마, 정말이세요?

뭘?

엄마 어려선 무지 겁쟁이셨다고?

느이 엄마 지금도 겁쟁이다.

엄마가 겁쟁이?

그래. 엄마가 뭐 딱히 하는 것 봤냐?

하루 종일 평생 하시는 건 뭐고요?

이런 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게지. 엄만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하고 살다가 죽는 게지.

엄마는.

정말이다, 엄마는 한 것이 없다. 딸 셋 낳은 것 말고는.

우리 키우신 건 다 어떻고요.

키우다니, 그냥 너희가 절로 자란 것이지. 내가 뭘 했냐. 품을 팔아 과외를 시켰냐, 차를 태워 나르기를 했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달라졌다. 무심한 듯 말 속에 심지가 생겼다. 뭘까. 설 명절의 부담 때문일까? 설은 아무래도 세배 문화 때문에 공휴일 상관없이 길어지고, 또 어떻게 된 것인지 시도 때도 없이 떡국상이다. 그러려면 음식 수급도 절묘한 솜씨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어머니가 시장보따리를 여럿 챙기셨다. 내가 유럽에서 가져다드린 낡은 무명 홑겹 가방을 여태도 쓰시며, 그 안에 다른 보자기 가방들을 넣으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리 춥진 않았지만 추운 체 하면서 어머니의 팔을 꼈다. 생각처럼 따뜻하지는 않았다.

 

 

외사촌의 전화번호가 떴다. 팔을 풀고, 양손 손가락에 여러 개 시장보따리를 걸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금실아, 오빠야.

아이쿠, 웬 일?

너랑 의논할 것이 좀 있어서.

나랑 의논을? 의논을? 어디 있는데?

그렇게 만난 외사촌은 더블 에스프레소를 훌쩍 마시고서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여전히 따끈한 아메리카노 잔에 손을 굽던 내가 말을 꺼냈다.

오빠, 커피 취향이 바뀌었네! 참, 곤충 연구는 겨울엔 좀 쉬는가?

명색이 학문에 여름 겨울이 있겠어? 금실아, 넌 그런데 왜 결혼 안 하냐?

그러는 오빤 왜 안 하는데?

거야, 나는 남자고.

뭐야, 여름 캠핑장에서랑 똑같은 레퍼토리네. 다른 이유를 대 봐!

외사촌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실은, 환상이 깨진 지 오래였나 봐.

환상이 깨져?

우리 어머니를 봐도 그래.

외숙모를? 외숙모가 왜?

그때 왜, 우리 아버지 갑상선 수술 하실 때.

언제 적 이야기를.

아버지가 수술을 앞 둔 날 밤, 어머니는 병원 침상 곁이 아니라 집에 들어가 주무셨어. 물론 나도 보호자 노릇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었지만 속으론 떨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수술이……. 기분이 묘했어, 어머니가 고생 덜 하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았어. 어머닌 만일의 사태가 걱정도 안 되셨는지.

그거야, 아버지들이 씩씩하시잖아. 울 아버지 돌발성난청 치료하실 때도 열흘 넘게 아버지 혼자서 병원에 계셨는걸.

그건 좀 다르지, 난청하고 암이 비교나 되나? 또 그 뿐이 아니었어. 수술은 잘 되었지만, 퇴원하실 때도 좀 거북했어. 아버진 동위원소 캡슐 치료하고 퇴원을 하셨는데, 퇴원 날 어머니가 아버지더러 호텔에 가서 주무시고 오시랬거든. 식구들이 다 같이 동위원소에 노출되느니, 아버지 혼자 계시다 오시는 것이 맞다고. 생수병 둘을 챙겨 호텔로 따라나서는 날 아버지는 말리셨고, 어머닌 화까지 내셨다니까, 나더러 속이 없다고! 그 세월 지나고서도 부부라는 것이 영원한 평행선이고 남남일까, 난 혼란스러웠어.

그만 둬. 외숙모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셨겠지, 합리적이고. 다 지난 일을 왜 그래. 외삼촌도 건강하시면 되었지. 오늘은 뭔가 다른, 할 얘기가 있다는 것 아니었어?

 

외사촌은 더욱 뜸을 들였다.

그게 글쎄.

오빠 뭐? 누구 사귀는 거야? 집에선 반대하고? 아님 선 자리 나온 거야?

그게 글쎄.

글쎄 라니, 어떤 여자인데? 같이 살기라도 해?

살기는.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래.

 

신경이 쓰인다는 대상은 …… 외사촌은 아예 더듬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 알고 보니 나이는 조금 아래지만 이웃 학과의 연구전임이 된 친구인데, 겨우 한 학기를 멀리서 보고 지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상쾌함과 긴장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단다. 그가 먼저 앉아 있다가 외사촌을 보며 갸웃하고 인사하는 동작, 함께 온 사람이 있더라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앞을 보는 순간, 상대가 아니라 사이 공간을 응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란다. 해서 식당에서 마주치면 자판기 커피를 함께 하자고 청한 적이 여러 번이었단다. 종이컵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마시다가 눈을 치뜰 때면 왼쪽 눈썹이 더 올라가고, 미소 또한 왼쪽 입술 끝이 살짝 더 밀려 올라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뭐야, 같은 이공계면 철저히 다름의 매력 그런 것도 아니고.

취민 달라. 나는 사진을 찍으러 숲으로 들로 돌아다니는 편인데, 그 친구는 사진엔 관심이 없더라고. 대신 영화광이야, 안 보는 영화가 없어.

오빠도 영화 좋아하지 않았던가?

난 근년 들어선 뜨악한 편이었어. 그 친구랑 몇이 어울려 꼭 한번 함께 갔었지. <러시: 더 라이벌> ― 에프 원 그랑프리 실화라고, 뜨거운 가슴이 있는 남자라면 마다하지 못할 영화라고 부추겨서. 헌데 스크린 속의 무서운 질주나 크리스 헴스워스의 매력 대신 그 친구 옆얼굴만 훔쳐보게 되어 못할 짓이다 싶었어.

병이 깊네.

병이라고? 넌 유럽형 인간 아냐?

유럽이 왜 나와, 여기서?

네가 공부하던 파리는 자유의 심장 아냐?

웬 자유? 평등, 박애까지를 다 말하려면 또 몰라.

그게 아니라, 파리에선 동성애자 시장에, 또 대통령들도 사생활은…….

사르코지나 올랑드? 우리 눈으론 좀 고약하지. 난 성적으로 그렇게 자유분방한 쪽이 못 됩니다요, 오라버니!

대통령이 영부인과 이혼하고 석 달 만에 젊은 연예인하고 재혼을 했다! 그런 것 쯤 아무도 상관 않았었지, 프랑스 사람들은.

오빠,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어? 20년간 살았던 부부였어, 것도 이미 재혼으로. 그 사이 아이들도 셋이나 있고. 또 새 여자도 애 엄마고! 아이들 어지럽게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이 해?

금실이 너 고리타분 맹추구나. 그럼 지금 대통령한텐 더 욕을 해대겠네!

남의 인생에 무슨 욕까지야. 하지만 이 사람은 더 심해. 결혼이 아니고 동거관계라서 그러는 말이 아냐. 애를 넷이나 두고서도 첫 여자와 헤어졌다지, 그 여잔 사회당 당수였어. 차라리 그 여자나 대통령이 될 일이지. 암튼 따로 애가 셋 있는 두 번째 여잔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고 있었지, 잠깐. 그러다 또 여배우야? 뇌에서 분비되는 짝짓기 신경물질의 유효기간만 지나면 상대를 갈아치워? 정치적 역량은 역량이고, 난 그런 사람들 너절하다고 생각해. 섹스가 뭔데? 인간사 필수적 요인이라 치더라도 갈아치우는 게 능사는 아냐. 몸도 맘도 그렇게 둔갑을 한다면 그게 철새지 뭐야.

새는 또 왜!

 

내가 잠깐 실수를 했다. 동물학 전공의 외사촌에게 새라는 화두를 던졌으니 전문가적 지식이 쏟아질 판이 되었다. 나는 커피 잔을 얼른 들어서 식어버린 나머지를 홀짝거렸다.

 

 

갈매기도…….

뭐야, 곤충박사님께선 새를 능멸하는 것에도 분개하시나? 갈매긴 또 뭔데?

분개까진 아니지만, 갈매기도 동성애를 인정받는 세상에…….

동성애? 갈매기가 동성애를?

그래, 갈매기의 동성애.

너무 멀리 간다, 오빠.

아냐, 레즈비언 갈매기 부부들 심심찮게 있어. 암컷 두 마리가 함께 둥지를 틀어서는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지.

알을 낳는다고? 암컷끼리?

아니, 미수정란이나 단위생식 그런 게 아냐.

그럼, 알은?

살림은 암컷 두 마리가 차리지만 짝짓기는 각각 주변의 수컷들을 만나는 방식이지. 어쨌거나 번식에 성공하는 거야.

그럼 그건 암컷들의 공동생활이지 무슨 동성애란 이름을 붙여?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오빠, 동성까리 서로 사랑하고 아끼면 동성애야? 그건 아니지. 암수 간에 사랑해서 살림을 차리고 자식 낳자고 성애와 교접이 따르는 것 아냐? 모르긴 몰라도.

로이와 사일로 이야기도 몰라?

누군데?

맨해튼 동물원의 펭귄들, 만화도 나왔는걸. 그 둘은 암컷 펭귄들일랑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뭐냐, 절정행위도 한대, 목을 감고 그러는 성관계를.

설마 아기도 낳았대?

또 아기 이야기냐! 돌멩이를 알처럼 품으려고 해서 유정란을 넣어주었더니 서른 날 넘게 품어서 알을 깨우고 또 길러냈대. 완전한 입양가족 아냐?

글쎄. 입양가족 쪽은 맞지만 부부도 부모도 아냐, 분명.

부모는 아니지만 동성애 양친!

나는 테이블로 시선을 떨어뜨리며 천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녹청색 계열의 체크 패턴의 무늬에 집중하는 척 했다.

오빠, 난 이런 무늬가…….

소용없었다. 외사촌은 이야기를 접지 않았다. 돌리지도 않았다.

 

 

동성애 ― 외사촌의 생각으로 자신은 동성애 성향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일하다가도 문득 그 친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꿈틀거리는데……. 대체 뭐냐, 이건?

내게 그런 걸 묻다니. 외사촌은 아마도 긴 싱글 기간을 보내는 나 또한 그러한 기질이나 성향이 없는지 탐색하는 눈치였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파리에서 한 때 젊음을 보낸 내가 상당히 진보적일 것이라 믿었기에 이해받기를, 뭐 그런 것을 원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맹꽁이 답답이다. 엄격했다, 그 부분은.

 

외사촌은 알리바이 모양 역사 속 유명인들의 동성애 취향을 꿰고 있었다. 다빈치의 젊은 시절의 ‘불경한’ 행위들, 미켈란젤로가 미소년에 보냈던 소네트며 젊은 귀족에게 헌신했던 만년의 애정, 차이코프스키의 조카에 대한 비뚠 열정. 랭보는 어땠는데? 그건 부정 못할 것이라고 외사촌은 들이댔다. 푸코는 어떻고! 심지어 여자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사포의 레스보스 섬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팅게일도 사촌여동생에 대한 사랑을 거절당해서 전장으로 떠나버렸다는 둥. 외사촌은 마치 공부라도 해 둔 양,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신화며, 소위 그리스 사랑 ― 성인과 소년 간의 사랑 ― 또는 고대 아시리아의 보편적 동성애 문화까지 증거로 들이댔다.

 

나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때의 사랑은 분명 우정이 심화된 플라토닉 사랑이라고 못 박았다. 철학을 사랑하듯 동료의 철학을, 철학하는 동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 라고 했던 플라톤의 말을 두고도 갑론을박이었다. 외사촌은 플라톤의 동성애 증거라 했고, 나는 바로 그 말이 동성애가 아닌 정신적 우정에 관한 증거라고 했다. 한 문장이 두 상반된 주장의 증거가 되었다. 나는 ―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적나라한 짝짓기와 가능한 번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행위는, 그러니까 의사 성행위는 암컷과 수컷의 사랑이 아니다, 결코 성애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몇 명의 잘난, 똑똑한, 개성 있는 유명인들이 동성애를 표방하고 경우에 따라서 결혼예식을 한다고 치자. 사실 파리 시장 들라노에만 해도 드러내놓고 동성애자임을 표방하고도 당선된 게 맞다. 2,3년 전 파리에선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50만 명 시위에 들라노에며 녹색당 대통령 후보며 그런 인물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력한 인사들의 성정체성이니까 특별히 존중해야할 필요는 없다. 내 주장은 이야기를 해 나가는 중에 점점 더 완고해져갔다.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음 ― 이게 결혼의 사전적 정의다. 헌법에도 혼인과 가족생활은 양성의 평등을 기초한다고 된 것 같다. 불문율에서도 남녀 양성이 전제다. 남녀 아닌 두 사람이 사랑을 하든, 동거생활을 하든, 흔치는 않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결정이다. 자기결정권의 행사로서 존중되어 마땅하다, 가능하다면 법적으로도. 그러나 남녀의 결혼 또는 동거와 동성의 동거를 동일시하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외사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 예상치 않은 독설에 찔려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기로 했다.

 

왜냐고? 모든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 복제를 위한 본능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가 이루어지기를 전혀 바라지 않는 의미에서 동성결합을 원하는 생물체는 특이종이다. 어쩌면 불완전하다. 이성애와 동성애는, 또는 양성애는 ― 난 그런 이분적인 용어 자체의 도식이 틀렸다고 보는 쪽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닌 것이, 둥근 거울과 네모난 거울 중 어느 것을 살까 하는 소녀의 망설임이라거나, 점심에 설렁탕을 먹을지 순두부를 먹을지 망설이는 직장인의 고민과는 다른 차원이다. 거울은 거울이고 밥은 밥이고, 그런 건 늘 둘 다 똑같은 가치이니까. 하지만 동성애란 ― 성애의 변형일 뿐이다. 그저 만물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암수의 결합이 껄끄럽고 내키지 않은 대신, 동성을 그리워하는 매우 특이한 성향을 동성애라고 할 뿐이다. 동성 간의 사랑, 동성에 대한 사랑 ― 동성애. 뭐라든지 단어는 가능하겠지만, 원래의 성애와는 성격이, 질이 다르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생산적 짝짓기를 변호했다. 생물학자 외사촌 앞에서 점점 더 생물학 이야기로 빠졌다. 적진으로.

동성결합은 유전자 복제가 불가능하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복제라는 원초적 욕구를 모르는, 회피한, 버린 생물체들이 벌이는 사랑은 뭔가 자연의 범위를 벗어난다. 키가 병적으로 너무 작아도 커도, 정상 범위를 벗어나도 똑같이, 돈이나 생산성이 많건 적건 똑같이 그 인격을 존중해야하는 만큼, 동성애 성향이더라도 인격에서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최근 교황님이나 유엔 사무총장이 말하는 성 소수자 동등권 운운도 사회적 인격적인 차별 금지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성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류의 비전은 우리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 놓을 것’ ― 프랑스 추기경의 말이었다, 그때 파리의 동성애자들 시위 때. 어떤 종의 모든 생물체가 동성애 성향이라면 결과는 그 종의 도태다.

 

도태? 그 단어에서 외사촌은 완전히 함구했다.

나는 불확실한 전문용어까지를 동원해가며 개똥철학을 읊어댔다.

밈 ― 문화적 유전자라. 복제 과정에서 진을 살찌운다는 밈이라는 인자, 이 밈의 세력이 대단한 건 증명되었지. 우리가, 수백만 인간들이 예컨대 ‘신’이라거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처럼 확인되지 않은 믿음을 공유하게 된 것들이 그런 작용이라지? 그렇다고 동성애의 밈이 인류의 발전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물체는,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 손해가 나는 방향으로 진화할 리가 없으니까.

 

외사촌은 눈도 껌벅거리지 않았다. 나를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녹음기처럼 지껄였다.

알게 모르게 서양 흉내쟁이인 우리들, 우리 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글쎄. 물론 동성 간 혼인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아니고,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야. 그것이 법으로 인정받는 서양 어느 곳들이 늘어난다고 해서 서양의 결정이니까 법이니까 옳은 것은 아냐. 옳지 않은 법을 몰라서 그래? 단 기간에 만들어진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악행들. 전쟁도 법의 이름으로, 인종청소도 법의 이름으로 행해졌어. 법 이야긴 접자.

 

소수자에 대한 배려 ― 소중한 말이지. 정치적 소수의견, 생물학적 약자, 모두 강한 다수가 배려해야할 대상이지. 성 소수자도 마찬가지. 그가 그 일로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부당하지만, 그것이 자랑은 아냐. 어쨌거나 프랑스에선 사정이 좋아지고 있어.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동성애자에 대한 벌금형이 없어졌지, 120년 동안 ‘사회적 장애’라는 이유로 벌금형을 과했던 법이 사라진 거야. 곧 이어 정신병 리스트에서도 동성애가 삭제되었어. 그렇다고 육신이, 정서가 완벽한 건강상태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젊고 건강한 암수는 원초적 본능으로 짝짓기를 원하게 되어 있으니까.

 

넌 뭐야, 넌 왜 이렇게 사는데? 짝짓기가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라면서?

침묵하던 외사촌이 내 약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침묵했다. 평소에 정리가 된 견해도 아닌 말들을 즉흥적으로 외사촌에게 떠들어대는 나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침묵에 외사촌도 머쓱해졌는지 다시 입을 닫았다. 더 깊은 침묵이 흘렀다. 빈 커피 잔을 들기도 어색해진 나는 테이블보의 녹색과 짙은 청색 사이에 섞여 짜인 버건디 색상의 가느다란 올에 집중해서 비율을 셈하려고 했다.

 

 

아냐. 아니거든!

건너 편 옆 자리에서 제법 큰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다 같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오빠. 아녜요. 쟤네들 좀 봐. 요즘 젊은이들이 저래. 남자애 같은 남자애, 여자애 같은 여자애가 드물어. 유니섹스인지 옷도 저렇게 비슷하게 입고 다니지. 우리 둘 다 쟤네들 쳐다보면서 그게 여자애 목소리라고 느꼈어? 큰 소리로 말하고 있는 쪽이 여자애라니까.

그게 뭐.

남자들 입장에선 여자들이 버거워졌을 거란 말이지. 요즘 괜찮은 남자가 되려면 돈이 엄청 많은 집안이거나 빵빵한 직업이 있거나, 그러고도 키가 커야하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갖춰? 다 갖췄다고 해도 연인에게 헌신하면 헌신짝처럼 버림받는다고들 하지. 바꿔 말해도 그래. 괜찮은 여자란 돈 많은 집 딸이거나 최소한 연금이 보장된 직업이 있다거나, 그러고도 예뻐야 하는데…… 누가 그래. 다 어렵지. 이성에게 들이댈 자신들이 없어진 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지.

 

오빤 대꾸를 않는다.

아님, 저쪽을 봐. 쟤네들은 남자답게 여자답게 차렸네. 하지만 뭣들 하고 있나 봐. 각자 휴대폰 들여다보며 뭘 하느냔 말이야. 뭘 하러 만나서는.

우리처럼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음 아저씬가?

그래, 영락없는 아저씨 아줌마지.

그렇게까지 자조적일 필요는.

자조적이 아니라 현실이 우울하게 하지. 요즘 뉴스 안 봤어? 세계 부유층 85명의 재산이 전 세계 인구 절반이 가진 것과 같다는데 뭐. 1%의 부유층이 50% 빈곤층의 65배 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는 거야. 인구 절반이 버러지야. 절반만 그런가. 아래 절반 보다 나아보았자 상대적 박탈감으로 꼬여있어, 마음들이. 뭔가 자연스러워야 생명력이 넘치고 짝짓기도 하고 싶고 그러지, 후손 번식에 대한 의욕이 솟구칠 것 아냐.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들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서로 위로받고, 가능하다면 유사 성애로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가능성이…….

부의 불평등 문제까지 가냐! 넌 문학연구가 아니라 사회학 했어?

부의 불평등은 ― 전공과 무슨 상관? ― 우리를 지배하는 물신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어. 선진국에서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해하지만 후진국에서는 부패를 조장한다는 말이 맞아. 부의 완강한 대물림 속에서 개천에서 용 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 살 맛 나지 않는 세상이지.

살 맛 나지 않아서, 이성에게 구혼하지도 후손을 구하지 않고 동성 사이에서 안주한다?

뭐, 꼭 그런 말이 아니더라도. 요즈음엔 교육 자체를 포기하고 등 돌리는 젊은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잖아.

그래, 니트라 그러더라. 낫 인 에듀케이션, 엠플로이먼트 오어 트레이닝.

우리나라에선 열다섯 살에서 서른 살까지 니트족 통계가 70만 명도 웃돈다고 본 것 같아. 한줄 서기에 아이들이 죽어 가. 옆자리 짝꿍도 경쟁상대로 보라는 선생님이 무서워서 학교를 도망치는 거야. 대학에서도 희망이 없어 자퇴하기도 하고. 자괴감이나 대인기피증은 당연, 사회구조 전체에서 비껴서있는 것이지. 가부장제로 받침 되는 건전한 사회조직? 어림없어. 반사회적, 아니, 비사회적인 건 틀림없지. 기존의 질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거야. 또 교육을 많이 받음 뭐해? 정규직이 안 되는, 못 되는 점에서 우리라고 다른가? 우리가 어떻게 정상적으로 체제에 들어가? 결혼이 말이나 되냐고. 분업시대 이후론 싫든 좋든 어떤 톱니든 톱니가 되어야 겨우 사는데 말이야.

톱니 인생. 그래 정상적인 톱니만 되어도 다행인 것을.

틈새에도 끼이지 못하니까 다른 돌파구를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라. 어쨌거나 우린 ―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져 나간 것도 아닌데, 오히려 더 불어났는데. 밖에 어둠이 내려앉자 커피숍 공간이 살짝 위로 솟은 느낌에 어디선가 스쳐 오는 바람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린 ― 뭔가 위안이 그리운 시대를 사는 것 같아.

그래. 위안이 그리운 세대, 누가 누굴 위로할 줄 모르는 세대.

그래서 우정도 사랑도 모르는 세대. 간혹 경쟁을 피하게 되면 우정도 사랑이라 믿는…….

 

 

사랑과 우정을 혼동한다고?

외사촌은 눈을 흘겼다. 내가 우정과 사랑을 구별 못한다는 말에 발끈했나 보았다.

넌 감정의 구분이 확실해서 위안은 그립고 누군가는 필요 없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혼자 버티는데?

혼자, 그래 혼자 잘 지내는 편이야. 하지만 글쎄, 난 요즈음 희한하게 아기를 갖고 싶어. 그건 충동이라기보다는 딸을 낳고 싶은 소망, 낳아야 하리라는 의무감에서. 하지만 수컷이 없네! 암컷 갈매기나 같구나. 하긴 무슨 수로 애를 키워? 나 혼자도 버거운 세상에서. 많이 말고, 그냥 먹고 사는 만큼도 어려운 세상에서. 그래도 이참에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아버지 감을 낚겠다고?

감으로 괜찮은 사람이 보이기도 해. 사랑? 가슴이 뭉클하게 아프지는 않아서 사랑은 아니려나? 또 짝짓기 과정이 너무 적나라하겠지만.

뭐야, 넌 그럼 여태?

 

잠시 망설였지만 나는 옛날이야기를 털어놓기로 했다.

처음 남자가 나빴어. 하필이면 극장 안에서 손을 잡았지 뭐야. 난 불 꺼진 극장 안에서 손을 잡히긴 싫었어. 그 무렵 어떤 소설을 읽었었는데, 자연 속에서, 이를테면 풀밭에서 햇볕 아래 누워서 혼자 오르가즘을 느낀 소녀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 그런데 극장은 어둠의 충동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왔어. 사랑은 어둠이어선 안 되는 것 아냐? 암튼 어둠과 관련되는 이미지로서의 사랑은 소름 돋았어.

밝은 사랑?

그래, 밝은 이미지의 남자. 난 분명 남자가 필요해, 내 딸을 위해서.

딸은 무슨. 딸을 낳으라는 보장은 있고? 멀쩡한 처녀가 임신을 원한다니 세상 참.

그래, 바로 임신이야. 임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적 충동은 뭔가 빗나간 것일 게야. 그러니 동성애도……. 맞아, 임신이 좋은 비유야. 임신이란 100%이거나 아니거나 그거야, 누군가 절반만 임신일 수는 없어. 성교도 그래, 임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성교란 반쯤만, 그러니까 성교가 아냐.

생물학자 밥 벌어 먹겠느냐, 어디!

미안해, 공자님 앞에서 문자네 정말. 하지만 사랑은 임신과 같아, 100%이거나 아니거나. 절반만 사랑한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야. 사랑에 어떻게 양이 있어. 양이 있는 것이라면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아길 가질 거라며!

아길 가지려고 사랑하겠다니까, 온이 사랑할 거야. 만일 누군가를…….

누군가를 만나면? 누군가를? 누구를?

그게 글쎄.

넌 말 다르고…….

아냐. 진정으로 하는 말이야. 하지만 오빠, 오늘 이야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해 두자. 오빤 아직 사랑을 모르는 거야, 어쩜 나도. 부부가 되려면 팔천 겁의 인연이 필요하댔잖아. 그런 사람을 만나기까진.

겁?

그래, 겁. 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사방 1유순 크기의 바위를 뚫는 시간.

유순?

소달구지가 하루 가는 거리라니까 최소 40리라고 하지.

평방 40리?

오빠, 내버려 두자, 단위는 잊고 그냥 시간에 맡겨 두자고. 건 그렇고, 오늘 우리 집에 들렀다 가. 설에 또 오기 어려울 텐데 울 아버지 뵙고 가야지.

오늘은…….

가, 가자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쪽은 내내 나였다. 왜 목소리를 높였을까. 무슨 말을 했는지 그저 소리 뿐, 말에 전혀 자신은 없는 채로. 가만 생각해보니 목소리가 커지는 것 자체가 말의 알맹이에 자신이 없다는 신호다. 아니면 진실을 감추려거나.

 

어머니는 요즘 왜 목소리를 높이실까. 혹시 감춰둔 심지가 뭘까? 집을 향하자 어머니가 걱정되었다. 설을 앞둔 일시적 상황이기를 바라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음식 만드시면서 짜증스러운 내색을 보이신 적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늘 그러셨다. 설이래야 수십 명 씩 손님이 오는 대단한 집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북적대고 수선스럽고, 그래도 떠들썩하고 화기 넘치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받쳐주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있는 존재라고 믿는 데에 어떤 의심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어머니는 명절이면 딸들과도 다 함께 하지 못하는 허전함에 더해 아들의 부재를 서러워하실까? 민망해 하실까? 아버지에게 미안함 대신, 그 미안함을 감추려고 목소리를 높이시는 걸까?

 

혹시 아버지는 아들 없이 지내야 할 차례가 다가오면 우리들 몰래 한숨을 쉬시지는 않을까? 그 한숨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자극할까? 유전자 복제에 실패하시고서도 한숨도 마음대로 못 내쉬는 울 아버지.

 

 

아버지이, 선준 오빠 왔어요.

집에 들어서면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안 계셨다.

엄마, 아버진?

내가 느이 아버지 어디 가신 줄 일일이 다 안다니?

어찌할꼬. 어머니의 목소리엔 여전히 싸한 여운이 감돌았다. 울 어머니의 목소리에 심지를 심어 넘은 범인의 정체는 뭘까. 그냥 세월일까. 내 눈으로는 오리무중이다.

........................................

 

『PEN문학』 2014. 3,4월호(vol. 119), 국제펜한국본부, 125~143쪽.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2. 28. 22:58

2014년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  > 전문예술창작지원

  

광주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사업으로

공적으로는 <펜광주> 12호, 개인적으로는 장편소설 발간에 지원했다.

2월초에서 기다리던 2월 말이 되었다.

<펜광주>는 해마다 지원 받아오던 사업이었으므로 걱정이 없었지만.

개인적인 지원은 불안했었는데............. 펜 사무국장의 전화를 받고 뛸듯이 기뻤다.

28일 밤, 늦은 시간의 전화였지만 더없이 기뻤다.

기쁜 마음에 여기 차례를 올려 본다. 원고지 1200 매, 글자수는 20만 자를 넘는다.

 

 

『표현형』

 

  • 배달민족
  • 한국어
  • 일기
  • 은실
  • 파도소리 
  • 초혼장
  • 포이동 266번지
  • 쥐도 인간이다
  • 삼포세대
  • 표현형

 

 

 

글자, 글자들이, 내가 만들어낸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다. 여기저기 폴더에 파일에 숨어서 죽은 듯 쑤셔 박혀 있다. 1975년생인 나는 남들 따라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공부했고, 소위 해외파 박사가 되어 강단에 섰다. 보름달 인생이었다. 하지만 기회의 가능성이 줄자 점점 절망했고, 어차피 컴퓨터에 앉아 옆길로 새며 숨길을 텄다. 하릴없이 동류항 인간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며 유전자형과 표현형 사이를 의아해하며 감탄하곤 했다.

갑작스레 나는 서둘기로 한다. 죽어 널브러진 글자들을 퍼 내버리자. 이 이상한 대리 역할 -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관해서 어설픈 글을 쓰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을 살기를 시작해야 한다. 나의 미토콘드리아가 나에게서 이대로 끝장나리라는 상상이 조금 괴로웠을까.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에게 뭔가 빚을 진 느낌이랄까. 무엇인가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딸을 낳아야 한다. 낳고 싶다. 글을 버리고, 너무 늦기 전에.

- 한금실, 가공의 저자

           

             이것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의 변이다. 주인공이자 글쓴이.

             출판사는 푸른사상사 - 작가교수회 회장 우한용 교수님 덕분이다.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4. 2. 26. 00:34
2014년

 

새해가 되면서 아이들이랑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세배 후 아이들이 무릎에.....

 

 

 

 

 

공교롭게도 설날이 양력 생일이었다.

먼 데 아들 며느리는 목소리만 들려줄 수 있을 뿐,

조금 먼 데서 와서 생일상을 차려준 대표 아들 며느리에게 고맙다.

푸짐해 보이는 지중해 식 샐러드와 잡채, 나물들, 무엇 보다 시루떡....

채식주의자의 상이지만 푸짐하다.

 

 

 

 

 

생일의 큰 기쁨은 역시 손녀들의 카드 - 열한 살 우빈과 여덟 살 성빈 차례대로.  

 

 

 

 

 

 

 

 

 

성빈은 서울에서 만들어 둔 카드를 잊고 가져오지 않아서 급히 만든 것이란다.

언니는 한 시간도 넘게 만들었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우빈의 카드는 정말 정성이 넘쳐난다. 아직 아이인데, 정성들인 시간이 기특하다.

 

 


 

 

 

참, 잊은 것이 있다. 지난 결혼기념일에 조카 윤정이 직접 만들어 보낸 케이크.

보기도 예쁘지만 녹차 가루를 넣었다는 맛이 일품이었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17. 09:03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 - 2013년도 총회

 


 

2013년 12월 14일 빛고을국악전수관 공연장,

총회와 국제펜광주문학상 시상에 이어 펜 한가족의 밤 행사가 있었다.

해마다 비슷한 행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신임 회장에 선출된 것!

 

 

 

 수락 인사말씀 - 오른 쪽에는 2부 펜문학수장자들 오소후 , 전숙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 회장 수락 인사말씀

 

  오늘 2013년 12월

  광주전남 문단사에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백배나 많은 제가 감히 이 자리에 선출되어 수락인사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국제펜광주광역시위원회는 오늘 『펜광주 11호』 발행이라는 역사를 지니고 있고, 오늘까지 10회에 걸쳐 14분의 국제펜광주문학상 수상자를 내었고, 또 무엇보다 15회의 영호남문학인교류활동을 추진해오고 있는 등, 명실공히 한국 문단에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단한 단체를 문단 경력도 짧고 사회성도 부족한 제가 한 동안 노를 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만 앞섭니다.

  돌이켜 보건대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는 저에게 글쟁이로서의 글을 안내해주고 격려해준 유일무이의 단체였습니다. 서생으로 살던 제가 제 글쓰기에 홀렸을 때 저는 처음 무작정 국제펜에 가입하고 싶었습니다. 글쓰는 사람이면 당연히 국제펜에 가입해야한다고, 연대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서 어떻게든 사회에 작용해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소원대로 국제펜한국본부와 국제펜광주광역시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작품발표는 물론 2012년 가을에는 경주에서 열렸던 국제펜인터내셔널 대회에 일주일간 참석할 수 있었으니, 첫 꿈은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거운 짐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 걱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당백으로 애정을 쏟아내어 국제펜광주를 지켜오신 우리 회원 문우 여러분들, 온갖 정열을 다 바쳐 그 기틀을 잡아 올려놓으신 김종 명예회장님과, 전 작품 한영대역이라는 전무후무한 회지를 발간해 오신 김영관 회장님의 혁혁한 활동들을 어떻게든 이어가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장담은커녕. 마치 다음 훌륭한 집행부가 성장 중에 있기 때문에 임시로 수렴청정이나 맡아야하는 기분으로, 어제와 내일을 잇는 딱풀의 기능이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심정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미래의 집행부가 성숙하면 곧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비겁함을 이겼기에 감히 이 짐보따리를 맡게 될 모양입니다.

  존경하는 회원님들, 문우 여러분들, 부디 여러분의 국제펜광주지역위원회에 지니신 애정을 속에만 담아두지 마시고 적극 발휘하시어 이 딱풀 집행부가 굳어버리지 않게 감시도 하시고 도와주시면서 내일을 기약하시게요, 고개 숙여 부탁드립니다.

  잊지 마셔요, 오늘의 집행부와 함께 하셔야 여러분의 내일이 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년 12월 서용좌

 

 

펜문학 수상자 전숙 -

전남여고 42회 후배이자 중학교 시절 내가 잠깐 영어 선생님이었으니 제자이기도.

윤숙희, 김미석, 허만진, 황인미, 전숙..... 김상현, 조숙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12. 22:52

 

서용좌 작가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
광주문인협 내일 시상식

2013년 12월 11일(수) 00:00 광주일보
 

광주문인협회(회장 노창수)가 주최하는 제26회 광주문학상 시상식과

제6회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 시상식이 12일 오후 6시 용산동

삼영웨딩홀에서 열린다.

광주문학상 수상자는 시 부문 조숙형·이춘배 시인이, 시조 부문 김산중 시인이,

수필 부문에는 탁현수 씨가 선정됐다. 그리고 광주문학올해의작품상 수상자는

서용좌 작가(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가 선정됐다. 작품은 ‘광주문학’ 66호에

실린 ‘포이동 266번지’.

한편 이날 시상식에는 시낭송 및 광주문학인의 밤 행사도 함께 열린다.

문의 062-227-0811.

 

 

 


제26회 광주문학상 수상자 선정

2013년 12월 11일(수) 무등일보



 

 

 

 

 

 

 

 

 

 

 

 


 

 

 

 

 

 

 

          조숙형·이춘배·탁현수·김산중·서용좌씨

조숙형·이춘배 시인이 제26회 광주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발표됐다.

광주문인협회(회장 노창수)는 10일 올해 광주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두

시인을 선정했다. 수상작은 조숙형 시인의 시집 '붉은 카펫', 이춘배 시인의

시집 '하얀 강 푸른 별이다.
또 수필 부문에 탁현수 수필가의 '조화를 위한 조율', 시조 부문에 김산중

시인의 '무돌길 따라'가 수상작으로 확정됐다.
올해의 작품상에는 소설가 서용좌씨의 '포이동 266번지'로 결정됐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오후 열린다.

 

 

 

 

 

 

 

 

 

 

 

 

 

 

 

 

 

 

 

 

  수상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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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 수상 인사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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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늦어서 죄송합니다. 피치 못한 사정이 하필 오늘에 중복되어 이제야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못 오는 것은 정말로 예가 아니다 사료되어 불참대신 지각을 무릅썼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늘 2013년 12월 12일, 오로지 글쓰는 일에 전념해 오신 동지 여러분들 앞에서 부끄럽게도 가르치기와 글쓰기라는 이중 얼치기 생활을 해왔던 제가 감히 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게 되어 어리둥절하면서도 한껏 기쁩니다.

  이 상은 아마도 제 글쓰기에 대한 상이 아니라 꼭 써야 할 것을 썼기에 주시는 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문학 2013년 봄호, 통권 66호』에 기고했던 「포이동 266번지」는 사실 저로서는 혼신을 더욱 기울인 작품이었습니다. 포이동 266번지, 지금은 공식적으로 개포4동 1266번지, 속칭 재건마을을 아십니까. 이곳이 주목을 받은 것은 2011년 6월 그곳의 화재 때문이었습니다.

  1981년, 자활근로대란 이름의 45명을 이주시켜 경찰을 지도관으로 두어 통제하던 곳, 나중에는 베트남 참전 상이용사들, 양재천 주변의 넝마주이들을 이주시키면서, 매번 “이곳이 당신들이 살 터전이다.”라고 약속했던 정부와 강남구청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을 배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재건마을에 화재가 나서 총 95가구 중 75가구가 전소했지만, 화재 후 몇 달 씩 수거물을 방치해둔 채 임대주택으로 이전을 종용한답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 임시로 보증금 300에 월세 6만원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 누가 어떻게 무슨 돈으로 신축하련다는 임대주택으로 이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떠올렸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대로 문학의 스승격인 독일 작가 고 하인리히 뵐의 외침을 기억해냈습니다. “문학은 분명코 사회에 의해 쓰레기로, 경멸적이라 선언된 것만을 그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던 경구를 잊지 말자고. 사회에 의해 쓰레기로 선언된 것, 또는 경멸적으로 간주된 것을 그 고결성에서 규정지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작가의 글쓰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그러니 오늘 이 상의 의미는 포이동 266번지 사람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 회원들께서 스치고 읽지 않으셨던 포이동 266번지」를 이 상을 계기로 다시 찾아 읽어주신다면, 그것으로 이 상의 의미는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정신하겠습니다.

 

                                                                             2012년 12월 서용좌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2. 9. 00:49

 

 

 

 

 

 

이 작품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제목의 '스파르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테르모필레 전투를 연관지어 보는 사람도 없다.

번역 손을 놓았다가......의무감에서. 

 

 

 

 

 


 

 

 

 

 

길손이시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하인리히 뵐 원작

 

 

  차가 정지했을 때 모터는 잠시 더 돌아갔다. 바깥 어딘가에서 문이 와락 열렸다. 깨진 창유리를 통해 빛이 차 안으로 떨어졌다. 이제 보니 천장의 전구가 찢겨나갔다. 전등의 나사선만 나사입구에 붙어있었다. 유리 파편이 붙어있는 가물거리는 철사 줄 몇 올에 불과했다. 그러다 모터가 멈췄다. 바깥에선 누군가 고함 소리가 들린다. “사망자는 이쪽으로, 사망자들 데려온 거요?”

  “빌어먹을, 여긴 등화관제도 이젠 안하나?” 운전수가 되받았다.

  “등화관제가 뭔 소용이여, 온 도시가 횃불처럼 불타고 있는데.” 그 낯선 목소리가 악을 쓴다. “사망자 있냐고? 묻고 있잖아?”

  “모르오.”

  “사망자는 이쪽으로, 듣고 있소? 다른 자들은 층계 위쪽으로 미술실로, 알겠소?”

  “예, 예.”

  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다른 자들에 속했고, 사람들은 나를 층계 위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희미한 불빛의 긴 복도로 갔는데, 벽에는 녹색 칠이 되어 있었다. 구부러진 검은 색의 옷걸이 못들이 벽에 붙어 있었고, 6에이, 6비라고 쓰인 에나멜 팻말이 붙은 문들이 있었고, 이 문들 사이에 검은 테두리의 유리액자 안에 포이어바흐의 메데이아가 걸려있는데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은 5에이, 5비라고 쓰인 문들, 그 사이에는 가시 뽑는 소년의 상이 신비한, 불그스레 빛나는 사진이 갈색 액자에 들어 있었다.

  층계 입구 앞 중앙에 있는 큰 기둥도 거기 있었고 그 뒤에는 길고 좁게, 기이하게 만들어진 석고로 된 파르테논프리즈 모형이 누렇게 빛을 내고 있었다, 진짜로, 고풍스럽게. 그리고 모든 것은 사필귀정, 고대 그리스의 중장병이 나왔다. 화려하고 위험스럽게, 깃털장식으로 수탁처럼 보였다. 그리고 계단부 까지도, 이젠 노란 칠이 되어있는 벽에 모두가 순서대로 걸려있었다. 대 선제후들부터 히틀러까지…….

  그리고 거기 좁고 작은 발걸음 중에, 내가 마침내 다시 한두 발짝 들것에 그대로 누워있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특히나 아름다운 특히나 위대한 특히나 화려한 노 프리츠의 사진이 있었다. 담청색 제복을 입고, 빛나는 눈과 크고 황금으로 번쩍이는 가슴에 달린 별모양도.

  다시금 나는 비스듬히 들것에 누운 채 인류의 초상들 사이로 실려 지나갔다. 거기에는 북구의 함장이 독수리눈과 멍한 입을 하고 있었고, 모젤 강 서안의, 약간 마르고 예리한 여인, 양파모양 코를 한 동방의 찡그린 얼굴, 키가 크고 목젖이 튀어나온 산골 배경 영화 프로필, 그 다음엔 다시 복도가 나왔고, 나는 몇 걸음을 다시 들것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운반병들이 두 번째 층계로 오르기 전에 큰 황금 철십자훈장을 위에 붙이고 돌로 된 월계관을 쓴 전몰장병기념비가 보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무겁지 않았고, 운반병들은 서둘렀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이 착각일 수도 있었다, 나는 열이 높았고, 온 군데가 아팠다. 머리도, 두 팔도, 두 다리도, 그리고 심장은 미친 것처럼 뛰었다. 이런 열 속에서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인류의 초상들을 지나쳐갈 때 이번엔 모든 다른 것들이 나왔다.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흉상 셋이 얌전하게 나란히 놓여있었는데, 신기한 모조품으로, 완전히 노랗고 진짜처럼, 고대 풍에다 위엄을 갖추고 벽에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모퉁이를 돌 때에는 헤르메스 기둥도 나왔다. 복도 맨 뒤쪽에는 - 복도는 이 부분에서는 장밋빛 빨강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 아주 맨 뒤쪽에는 제우스의 찌푸린 얼굴이 미술실 입구 위쪽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제우스 상은 아직 멀었다. 오른 쪽으로는 창문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하늘을 온통 붉었다. 검고 두터운 연기구름이 장엄하게 흘러갔다……

  나는 다시 왼쪽을 보아야 했다, 오1에이와 오1비 문들 위쪽의 현판들을 보았고, 갈색의 곰팡내 나는 문들 사이에서는 황금색 액자에 담긴 니체의 코밑수염과 코끝만을 보았다. 그럴 것이 그림의 나머지 반은 쪽지로 가려져 있었는데, “경상 외과”라고 쓰인 쪽지가……

  만일 지금, 나는 스치듯이 생각했다…… 만일 지금…… 그러나 또 토고의 그림도 있었다. 화려하고 커다란, 오래된 상처처럼 납작한, 화려한 복제품이, 앞쪽으로 식민관사들 앞에 흑인들과 무의미하게 총검을 들고 있는 병사 앞에, 무엇보다도 완전히 자연에 충실하게 그려진 바나나 더미들이 있었다. 왼쪽으로 한 더미가, 오른 쪽으로도 한 더미가, 그리고 오른 쪽 더미의 중간 크기 바나나 위에 거기 뭔가 새겨져 있었는데, 내가 직접 거기에 뭔가를 끄적거려 넣었던 게 틀림없는데……

  그러나 이제 미술실의 문이 확 열리고, 나는 제우스 흉상아래에서 흔들거리며 두 눈을 감았다. 난 더 이상 아무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미술실은 요오드며 오물 냄새에 두더지와 담배 냄새가 났다. 그리고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나를 내려놓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담배 한 대 입에 물려주세요, 왼쪽 주머니에 있어요.”

나는 어떤 누군가가 내 호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성냥개비에 불을 붙였고, 타들어 가는 담배를 입에 물렸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증거는 아니야, 라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고등학교마다 미술실이 있는 것이고, 초록색과 노란 색으로 칠해진 벽들에 휘어진 낡은 옷걸이 못들이 있는 현관들이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우리 학교에 와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메데이아가 4에이와 4비 사이에 걸려있다고 해도, 니체의 코밑수염이 오1에이와 오1비 사이에 있다고 해도. 틀림없이 어떤 규정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그것이 걸려있어야 된다고 지정해 놓은 훈령이. 프로이센 인문계 고등학교를 위한 경영지침이. 즉 메데이아는 4에이와 4비 사이에, 가시 뽑는 소년은 그 자리에,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키케로는 복도에, 니체는 저 위 학생들이 철학을 배우는 그곳에 붙여놓으라고. 파르테논 프리즈, 토고에서 온 현란한 그림도. 가시 뽑는 소년과 파르테논 프리즈는 마침내 훌륭하면서도 낡은, 수 세대를 지나오면서 간직된 학교의 필수소장품이 되었다. 그리고 바나나 그림 위에다 낙서를 하려는 발상을 가졌던 것이 비단 나 하나뿐일 리도 없었다. 토고여 영원하라! 라고. 사람들이 학교에서 하는 농담들은 늘 같은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열이 있다는 것, 내가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통증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차 속에서까지는 그게 아직 심했었다. 차가 작게 패인 도로들을 지날 때다마 나는 소리를 질러댔었다. 큰 분화구는 더 나았다. 차는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마치 배가 파도 사이 물고랑을 타듯이 그랬다. 그러나 사람들이 깜깜한 곳 어디에선가 내 팔에 들이밀었던 주사가 이제는 듣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바늘이 어떻게 내 피부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지, 저 아래 다리까지 어떻게 뜨겁게 변하는지를 느꼈었다.

  그게 그럴 수는 없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거리를 차가 달려왔을 리가 없다, 거의 30킬로미터를. 무엇보다도 너는 느끼지 못하잖아, 어떤 감정도 네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잖아, 다만 눈이 그럴 뿐, 어떤 감정도 네게 말을 해주지 않잖아, 네가 너희네 학교에 와 있다고, 네가 겨우 석 달 전에 떠났었던 그 학교에 와 있다고. 8년이란 세월은 사소한 게 아니야, 8년을 지내고서 그 모든 것을 겨우 눈으로만 알아보게 되느냐고?

감긴 눈까풀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마치 영화 같았다. 아래 층 복도, 녹색 칠, 층계 올라와서, 노란 칠, 전몰장병기념비, 복도, 층계 올라와서,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 헤르메스, 니체의 코밑수염, 토고, 제우스 흉상……

  나는 담배를 내뱉고 고함을 쳤다. 고함을 지르는 건 늘 좋았다. 그냥 큰 소리로 외치면 되었다. 외침은 장관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누군가가 내 위로 몸을 굽혔을 때도 나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낯선 숨소리가 느껴졌다, 따뜻하고 그래도 역하게 여송연과 양파 냄새를 풍겼다. 어떤 목소리가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래, 뭐야?”

  “마실 것을 좀, 그리고 담배 한 대 더, 위에 호주머니에 있어요.”라고 나는 말했다.

다시 누군가가 호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다시 성냥을 켰다. 누군가가 타들어가는 담배를 내 입 속에 넣어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내가 물었다.

  “벤도르프.”

  “감사합니다.” 내가 말하고는 담배를 빨았다.

  어쨌거나 나는 정말로 벤도르프에 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고향에 말이다. 그리고 내가 전무후무한 고열에 들뜬 것이 아니라면, 지금 내가 어떤 인문계 고등학교 건물에 와 있는 것은 확실했다. 분명 이곳은 학교였다. 저기 아래 목소리가 소리치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른 자들은 미술실로 옮겨!”라고? 나는 다른 자였다. 나는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아무래도 다른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미술실이 여기에 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라면 내가 왜 잘 못 본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카이사르와 키케로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알아보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오직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분들을 다른 종류의 학교 복도에 벽에 세워둘 거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그가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다시금 여송연과 양파 냄새가 났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는 채로 두 눈을 떴다. 거기엔 지치고 늙은,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이 소방대원 제복 위로 나와 있었다. 늙은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시게, 전우여!”

  나는 마셨다. 물이었다. 그러나 물이 훌륭하진 못했다. 나는 내 입술 끝에서 냄비의 쇠 냄새를 느꼈다.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을 들이마시게 될까 느끼는 것은 참 좋았다. 그러나 소방대원은 내 입술에서 냄비를 빼앗더니 가 버렸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친 듯이 어깨만 으쓱하더니 그대로 더 가 버렸다. 내 옆에 누어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말했다. “소리 질러대 봤자 소용없어. 물이 더는 없거든. 도시가 불타고 있어, 보고 있잖은가.”

  “도시 이름이 뭔데요?” 나는 내 옆에 누어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벤도르프.”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아주 똑바로 내 앞을 보며 창문들을 응시했고 여러 번 천정을 보았다. 천정은 아직 말짱했다. 하얗고 매끄러운 것이,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채로. 그러나 모든 학교의 미술실에는 고전주의 모방으로 석고 테두리를 두른 천장을 둔다, 적어도 양질의 유서 깊은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다 그렇다. 그건 아무튼 분명하다.

  이제 나는 승복할 수밖에 없다, 내가 벤도르프에 있는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의 미술실 안에 누어있다는 사실을. 벤도르프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셋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 알베르투스-학교 - 그리고 이 말을 꼭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 마지막 것, 세 번째 학교가 아돌프-히틀러-학교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학교에는 노 프리츠의 상이 특별히 화려하고 특별히 아름답게 특별히 크게 층계참에 걸리지 않았을까? 나는 이 학교에 다녔다, 8년 동안을. 하지만 다른 학교들이라고 해서 이 상이 똑같은 자리에 걸리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첫 번째 층계를 오르면 그렇게나 똑똑히 눈에 띠어서 시선을 붙잡으리만치 그렇게?

  밖에서는 무거운 대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말고는 조용했다. 다만 섬광의 침식이 밀려닥칠 뿐이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합각머리벽이 무너져 내렸다. 대포는 조용히 규칙적으로 쏘아댔다. 나는 생각했다, 참 좋은 대포로군!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그런 놈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게 생각했다. 맙소사, 대포라는 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것인지, 얼마나 기분 좋은 것인지. 어둡고 거칠게, 그러나 부드럽고, 거의 섬세한 오르간 연주였다. 여하튼 품격 있는 연주. 나는 대포라는 것이 뭔가 품격 있는 요소를 지녔다고 느낀다, 쏘아 올라가더라도. 너무도 품위 있는 인상을 준다, 그림책에서는 정확하게 전쟁을 가리키면서…… 그러다가 나는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전몰장병기념비에 등재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더 큰 황금 철십자를 장식하고 더 큰 돌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서 또 다시 기념비 낙성식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갑자기 나는 알게 되었다, 만일 내가 정말로 우리학교에 와 있는 것이라면, 내 이름도 돌 속에 새겨져서 거기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학교 달력에는 내 이름 뒤에 쓰일 것이리라 - “학교에서 전선으로 징집되어 ……를 위하여 전사했노라고……”

  그런데 나는 점선 안에 들어갈 그 무엇을 위해서였나를 알지 못했고, 또 내가 지금 내가 다녔던 학교에 와 있는지 아닌지를 알지 못했다. 그 일을 나는 기필코 알아내고자 했다. 전몰장병기념비에도 특별한 무엇은 없었고,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어디에나 다 있는 그런 것이었다. 마치 기성복 같은 전물장병기념비였다, 그래, 어딘가 중앙에서 받아다 놓은 것일 테니……

  나는 미술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림들은 다 치워버렸고, 구석에 쌓아놓은 의자들만 몇 개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여러 개가 나란히 있는 높고 좁다란 창문들에는 빛이 엄청 쏟아져 들어왔는데, 마치 그런 것이 미술실에 소속된 것 마냥? 내 가슴은 내게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만일 이 방에 있었더라면 무엇인가가 내게 말을 해줄 법 아니던가, 팔 년 동안 꽃병을 그렸고 서체를 연습했었던 방이라면? 미술선생님이 앞에 받침대 위에다 세워 놓은 좁장하고 섬세한 신비롭게 모방한 로마식 유리병을 그렸고, 모든 종류의 서체를, 고서체, 로마서체, 이탤릭, 장식체 등을 연습했던 곳이라면? 나는 그 시간을 학교생활을 통틀어 가장 싫어했었다. 시간 내내 지루함을 짓씹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제대로 꽃병을 그리거나 서체를 그려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답답한 칠의 지루한 벽들을 마주하고서 나의 저주 나의 증오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속에는 어느 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지웠고, 연필을 깎았고, 지웠고…… 그 뿐 ……

  나는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팔들을 움직일 수 없었고, 오른 쪽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왼쪽 다리만 겨우 움직였다. 나는 사람들이 내 팔들을 몸뚱이에 묶어놓았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꽊 묶어서 절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두 번째의 담배도 뱉어냈다. 밀짚자루들 사이의 통로에다가. 그리고는 팔들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게 너무도 아파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계속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는 것은 언제고 좋았다. 팔들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도 났다.

  그러다가 의사가 내 앞에 왔다. 안경을 벗어들고는 내게 눈짓을 보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의사 뒤로 내게 물을 가져다주었던 소방대원이 서 있었다. 그가 의사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소곤거렸다. 의사는 안경을 다시 썼다. 나는 두꺼운 안경유리 너머로 그의 큰 회색의 눈을, 가볍게 떨리는 동공을 분명히 보았다. 그는 나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너무도 오래 동안이라서 나는 그만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잠시 만요, 곧 당신 차례가 ……”

  그리고서 그들은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를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그들이 가는 쪽을 따라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칠판을 떼어서 비스듬히 놓아두었는데, 벽과 칠판 사이에 침대보가 걸려 있었다. 그 뒤에는 밝은 불빛이 타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천이 다시 옆으로 젖혀지고 아까 내 옆에 누어있던 병사가 다시 실려 나왔다. 운반병들은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문으로 끌고나갔다.

  나는 다시 눈을 감으면서 생각했다. 넌 알아내야해, 어떤 부상을 당했는지, 지금 너희네 학교에 와 있는 것인지를.

  모든 것이 참 냉랭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나를 죽음의 도시의 박물관으로 끌어다 놓은 것처럼. 내 눈이 알아보았지만, 오직 내 눈만이 알아보았지만, 무감각하고 낯설기는 매한가지였던 세상을 지나서. 내가 석 달 전까지 이곳에 앉아있었다는 것, 꽃병을 그리고 서체를 그려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쉬는 시간에 잼과 버터 바른 빵을 들고 내려가, 니체, 헤르메스, 토고, 카이사르, 키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지나서, 메데이아가 걸려있는 아래층 복도를 천천히 지나서, 그리고는 우유를 마시러, 아무리 금지가 되었다 해도 담배를 피우는 모험을 할 수도 있었던 어스름한 작은 방에서 우유를 마시러 관리인에게로, 비르겔러 씨에게로 갔던 것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분명히 내 옆에 누어있었던 그를 아래로 데려갔다, 사망자들이 누어있는 곳으로. 아마도 사망자들은 비르겔러의 잿빛 작은 방에 누어있을 것이었다. 따뜻한 우유 냄새가 나는 곳, 먼지 냄새며 비르겔러의 싸구려 여송연 냄새가 나는……

마침내 운반병들이 다시 들어왔다. 이번에는 나른 들어 올리더니 칠판 뒤로 데려갔다. 나는 다시 둥둥 떠갔다, 이번에는 문 곁을 지나서. 둥둥 떠 지나가면서 나는 그것마저 일치한다는 것을 보았다. 문 위에는 한 때, 그러니까 아직 학교가 토마스-학교라 불릴 때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떼어냈는데, 거기에는 새로이 어두운 노란색 흠집이 생겨났다. 십자가 모양으로 단단하고 분명하게, 그건 마치 그들이 떼어낸, 낡고 희미한 작은 십자가 자체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십자가의 흔적은 벽의 퇴색한 도료 위에서 깨끗하고 아름답게 남아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서 벽 전체를 새로이 칠을 했는데,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칠쟁이가 색조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고, 십자가는 갈색조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런데 벽 전체는 장밋빛이었다. 그들은 투덜대었지만 소용없었다. 십자가는 벽의 장밋빛 위에서 갈색으로 분명하게 남아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들의 페인트 예산이 소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 십자가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잘 들여다보면, 수년 간 회양목 가지들이 걸려있었던 오른 쪽 발코니 위에 분명한 대각선 흔적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아직 학교에 십자가를 걸어놓는 것이 허용되었을 때 관리인 비르겔러 씨가 그 뒤에다 걸어놓았던 것인데……

  그 모든 것은 내가 문을 지나서 칠판 뒤로, 눈부신 불빛이 타고 있는 곳으로 들려가는 순식간에 떠올랐다.

  나는 수술대 위에 누어서 내 몸을 아주 분명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주 조그맣고, 오그라든 모습으로, 머리 위 조그맣고 하얀 전구의 맑은 유리 안에는 가느다란 두더지 색 꾸러미가 마치 특이하고 섬세한 태아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저 위에 있는 그것이 바로 나였다.

  의사는 나를 등으로 돌려놓더니, 탁자 옆에 서서 거기서 기구들을 헤집어 찾고 있었다. 소방대원은 널찍하고 늙은 모습으로 칠판 앞에 서 있었고 나에게 미소를 건넸다. 그는 피곤하고 서글프게 미소를 지었고, 수염 더부룩한 그의 더러운 얼굴은 잠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칠판의 끈적끈적한 이면에서 난 뭔가를 보았다. 내가 이 죽음의 집에 온 이래 처음으로 내 심장을 느끼게 한 무엇이었다. 내 심장 속 어딘가 비밀스런 방에서 나는 깊이 끔찍하게 놀랐고, 심장은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칠판에는 내 글씨가 있었던 것이다. 위쪽 맨 위 줄들이. 나는 내 서체를 안다. 그건 마치 우리가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 마냥 더 나빴다, 훨씬 더 분명했다. 그리고 내 서체의 일치성을 의심할만한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모든 다른 것은 증거가 아니었다, 메데이아도 니체도 디나르 시골 배경 영화 프로필도 아니었고, 토고의 바나나 그림도 아니었다. 문 위에 걸린 십자가도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 모든 것은 어느 학교에서나 다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학교들에서 내 서체로 칠판에 글을 쓸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거기 그것이, 당시에 우리가 써야만했던 그 명구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 저주 받은 생에서 겨우 석 달 전으로 되돌아가서 그때.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아, 나는 안다, 칠판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미술선생님은 화를 내셨다. 나더러 제대로 분할을 못했다고, 서체를 너무 크게 잡았다고. 그래놓고서는 선생님 자신도 고개를 갸웃둥거리시며 그 아래에다 똑같은 크기로 따라 적으셨다,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모두 해서 일곱 번 거기 그렇게, 내 서체가 남아있었다. 고서체, 프락투어, 이탤릭체, 로마서체, 이탈리아 서체, 장식체. 그렇게 일곱 번 분명하게 또 가차 없이. 길손이여, 혹여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소방대원은 이제 의사의 가벼운 부름에 따라 옆으로 비켜섰다. 그래서 이젠 내가 그때 서체를 너무 큰 것으로, 구두점은 너무 많이 택했기 때문에 약간 훼손된 경구 전체를 볼 수 있었다.

  좌측 상박에 동통을 느꼈을 때 나는 솟구쳐 경련했다. 기대어 억제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내 몸을 온통 감았는데, 내겐 팔들이 더 이상 붙어있지 않았다. 오른 쪽 다리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갑작스레 뒤로 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스스로 기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함을 질렀다. 의사와 소방대원은 나를 얼이 빠져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만 주사기의 플라스크를 눌렀다. 플라스크는 천천히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다시 한 번 칠판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소방대원이 내 곁에 바짝 다가서서 그것을 가렸다. 그는 내 어깨를 꽊 붙잡았다. 나는 헤진 그의 제복의 탄내 나는 더러운 냄새를 맡았고 그의 지치고 슬픈 얼굴을 보았을 뿐이다. 그제서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비르겔러였다.

  ‘우유를’이라고 나는 나직이 말했다.

 

주석 ------------------------

1) 메데이아: 안젤름 포이어바흐의 그림(1870). 메데이아가 두 아들을 안고서 남편 이아손의 배신에 갈등하고 있는 그림. 원본은 뮌헨의 노이에 피나테크 소장.

2) 가시를 뽑는 소년: 로마에서 발견된 73㎝의 브론즈 상으로, 고대의 유물로 간주됨. 원본은 런던의 영국박물관 소장.

3) 프리즈: 건축물에서 보는 띠 모양의 장식.

4) 선제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선거인단: 황제 선거는 1198년부터 1806년까지 행해졌다. 마인츠 대주교, 쾰른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국왕의 7인.

5) 노 프리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의 애칭.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제군주로 평가된다.

6) 헤르메스 기둥: 4세기경의 유물로, 86㎝ 석회암 난간모서리 장식. 원본은 파리의 루루브르 박물관 소장.

7) 벤도르프: 라인란트-팔츠 주의 작은 도시, 작품이 발표된 1951년 당시 주민은 13,000명 정도, 현재에도 16,538명이 25㎢ 안에서 거주하는 소도시. (광주 면적의 1/20, 인구는 1/90)

8) 인문계 고등학교 셋: 이것은 허구로, 현재에도 김나지움은 한 곳 뿐.

9) 디나르 족: 유럽 동남부, 발칸 산지 아드리아 해 주변에 거주하는 인종.

10) 제목: 시모니데스의 「테르모필레의 전몰용사의 비」에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어가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외친다. “길손이여. 그대 스파르타에 가시거든 게서 말해주오, 법이 명했던 바대로 우리 여기 쓰러져 있음을 보았노라고. Wanderer, kommst du nach Sparta, erzähle dorten; du habest uns hier liegengesehen, wie das Gesetz es befahl.” 히틀러의 독일이 법의 이름으로 소년들을 징집하고 그 법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가를 외치기 위해 작가 뵐은 레오니다스를 인용했다. 뵐은 그의 작품에서 “전몰, 전사 gafallen : 떨어져 죽다”라는 우회적 표현을 거부하고 기필코 “살해당했다 getötet”는 표현을 고집한다.

11) 프락투어: 옛 독일어 고유의 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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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출처: Heinrich Böll: Wanderer, kommst du nach Spa……(195), in: Romane und Erzählungen 1, Hrsg. v. Bernd Balzer. Köln 1977, S. 195~202.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3. 11. 25. 21:23

삼포세대 

 

 

 

 

 

솔직히, 나는 정복한 것보다는 패배한 것이 낫고, 영구적  소유의 독점적 고형성보다는 임시성과 불확정성의 느낌이 좋다. - 에드워드 사이드, 『도전 받는 오리엔탈리즘』 중에서

 

   

  삼포세대라네, 삼포!

  삼천포가 아니고?

  삼천포는 무슨, 삼포라니까. 우리 같은 루저를 삼포세대라요!

  삼포? 어디선가 듣긴 들었는데.

  그래요, 쓰리 포세이큰 제너레이션!

  뭐요, 셋을 포기한 놈들이라고?

   쳇, 영어라야 얼른 소통되는 우린 바로 바나나족이지, 무슨 삼포족. 겉만 누런, 속은 허여니 뼛속은 양놈들이지.

   김박은 삼천포로 빠지는 게 특지지. 뭘 포기해서 삼포냐, 그럴 물어야지요!

   뻔한 것 아뇨.

  이박, 그래도 읊어 봐요!

  입에 담기도, 그게. 그러니까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모두 포기한 세대란 말이외다.

하나마나 한 소리. 그게 다 직장 문제, 돈 문제 아뇨.

  그래도 그게 ‘불안정한 일자리, 학자금 대출상환, 기약 없는 취업준비, 치솟은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으로 인해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청년층’ 그 비슷한 정의가 있어요. 재작년인가, 신문의 취재팀이 만든 신조어이지만 정곡을 찌를 밖에.

 

  우린 그렇게 삼포세대라 낙인찍혔다. 나 개인적으로는 내가 공부 때문에 공부에 심취해서, 그러니까 제법 고상한 삶의 방식 때문에 연애도 안하고 사는 줄로 착각했었다. 그러나 나도 그들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꼼짝없는 삼포세대.

 

 

  평균인 - 평균인은 누굴까.

  그날 저녁도 외주둥이 굶는다고 소보로빵 한 개로 끼니를 때웠다. 소주와 냉수를 1:3으로 타서 음료수 대신 마셨다. 왜소한 저녁상을 물리고 - 상에서 먹은 것도 아니었지만 - 하릴없이 습관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헤아릴 수 없는 아메바들의 네트워크가 작동한다. 나 아메바는 갑자기 이 시대 평균 아메바 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평균치는 수많은 통계에서 찾아보아 골라내면 될 것 아닌가.

 

  그리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우리’ 중에서 평균적 수입을 갖고, 평균적 자녀 수, 평균적 기대 수명, 평균적 학력, 평균적 직업, 평균적 취미활동 …… 등을 고려하여 대표적 가정의 대표적 사람을 꼽는 일이다. 무엇부터 찾을까. 잠시 통계의 무시무시한 망망대해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사는가가 우선일 것이었다. 우선 가족의 평균 수입, 그런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것은 수치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이므로 통계를 찾기도 쉽고 평균이나 적절한 대표를 찾기도 분명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중소기업을 가정하자! - 사장을 포함한 직원 전체는 70명이고 이들의 총 급여의 합은 2억 1000만원이다. 그러면 이 회사 직원들의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이 통계는 산술평균에 의거한 것으로 결코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자. 대부분의 직원들은 월 300만원은 평생 가도 못 만져 볼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한다. 직원 50명이 1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10명의 작업반장들도 겨우 150만원씩 받을 뿐이다. 이들에게 300은 비현실적인 수치이다. 왜 그런 300만원 평균치가 나오는가. 그것은 과장들 3명이 500만원씩을, 부장 5명이 1000만원씩을, 부사장은 2000만원, 사장은 5000만원을 받기 때문이다.

  70명 중 50명이나 되는 최빈수가 받는 월급은 고작 100만원, 그러므로 대부분의 직원들이 통감하는 월급은 100만원에 불과하다. 70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중앙에 있는 35 또는 36번째 높은 월급을 받는 사람을 대표라고 한다면, 대푯값 역시 100만원에 불과하다. 이 회사의 최빈수와 대푯값은 100만원 월급인데, 평균 월급은 300만원이다. 나는 초장에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열이 났다. 좀처럼 찬물 샤워를 못 하는 내가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왔다. 컴퓨터는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지나쳐서 창 쪽으로 향했다. 밖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웠다.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아스팔트의 미세 먼지가 날아오른다. 작은 도로라서 저 아래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도 보인다. 저들이 평균인일까. 운전자가 평균인일까.

 

  다음 순간, 대한민국 평균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을 예감이 들었다. 일을 원론적으로 생각해보려니 한참을 물러서고 만다. 처음 자리가 아니라 마이너스 어딘가로. 도대체 누가 ‘우리’인가. 우리 국민이라 함은 대한민국 국민을 말한다. 그러나 간단하지가 않다. 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선언에서 비롯되어 그 해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현 우리나라의 건국은 참 오래 걸렸다. 1945년 광복을 맞았어도 다시 미군정의 주둔시기를 거쳐서 1948년 8월 15일에야 정부 수립이 선포된 나라다. 독립 선포 후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 수립을 이루어 낸 것이다.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100,210㎢ 땅에서만. 그러니까 함께 독립선언을 했던 반쪽 123,138㎢를 북에 두고, 이제와 그들의 일인당 국내총생산 1,900달러를 살짝 조롱하면서. 우리는 그들보다 10배 이상 행복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우리를 우리에 한정한다.

  그 한정된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 회원국 중에서 수출입 선 순위권에 진입했다고 희희낙락이다. 1961년 우리가 여전히 전후의 비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생한 기구에 30년도 넘게 뒤늦게 합류한 우리가. 하지만 동시에 평균 자살률도 거의 3배나 더 이룩해(?) 냈다. 인구 10만 명 당 11명이 평균인데 우리나라는 서른 명이 넘는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경제 위기로 유럽공동체에서 퇴출 위기에 내몰렸다는 그리스는 세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그러니 경제가 행복을 절대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국민총소득 2만 달러 시대가 된 것과 자살자의 숫자는 비례하여 증가 일로에 있다.  

  왜?

 

  정말이지 평균 수입을 알아보고자 했던 내 의도는 한 순간에 좌절했다. 대신 여러 경제 지표를 조금 알게 되었다. 국민총생산이란 개념은 어느새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다. 보다 합리적으로 바뀐 것이란다. 국민총생산은 한 국가의 거주자 - 국민 - 가 일정 기간 동안에 생산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마손된 고정자산의 소모분을 포함한 개념이고, 또 예컨대 우리나라 국민이 외국에 진출해서 생산한 것도 모두 포함된다. 그러다보니 기업들의 대외수취소득을 제때에 정확하게 산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어, 우리나라 영토 내에서 이루어진 총생산만을 나타내는 국내총생산으로 바뀌었단다. 그것이 또 1995년에는 국민총소득으로 바뀌었는데,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 기간 생산 활동에 참여해서 벌어들인 소득의 합계란다. 실질 국민총소득은 실제 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실제 구매력을 측정하기 위해서 산출한다. 이 지표는 국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를 보다 잘 반영하기 위해 실질 국내총생산에다 교역조건 변화를 반영한 실질 무역손익을 차감하고 여기에 국외순수취요소소득을 더해서 산출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국민총생산이냐 국민총소득이냐는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다. 국민총소득이 2만 달러가 넘어도 왜 이렇게 허한가. 2012년 국민총소득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34위, 오매불망 우리가 모델로 삼는 미국은 5만 달러에 육박하면서 12위로, 여전히 우리를 훨씬 앞지른다.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에는 뒤지지만, 34위라면 대단하다. 물론 2007년 1인당 국민총소득이 21,632달러를 기록했을 때만 해도 3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다고 호들갑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1만 달러대로 떨어졌다가 2010년 2만 달러대에 재진입할 수 있었고, 3년째 2만 달러대 초반에 머물고 있지만 후퇴는 아니라는 것.

 

  문제는 불평등 성장이다. 한은에 따르면 1991에서 2011년까지 20년간 국민총소득이 연평균 9.3% 늘어났는데, 그동안 기업소득의 증가율은 11.4%인데 비해서 가계소득의 증가율은 8.5%에 불과했다고 한다. 개개인의 실질적인 주머니 사정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성장의 후퇴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그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임을 역설해주는 증거가 아닌가.

  또 1인당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에서 기업과 정부 몫을 빼고 개인이 실제로 쓸 수 있는 소득은 얼마일까. 개인의 근로소득과 재산소득을 합쳐서 거기에서 세금과 사회보장기여금을 뺀 것을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이고 하는데, 우리의 주머니 사정과 가장 밀접한 지표다. 그런데 지난해 1인당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인당 국민총소득의 57.9%에 그쳤다. 한 나라의 소득은 크게 자본에 대한 보수 - 영업 잉여라고도 한다 - 와 노동에 대한 보수 - 피용자 보수라고도 한다 - 로 나뉘는데, 전체 소득 중에서 피용자 보수가 차지하는 비율, 즉 노동소득분배율이 57.9%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미국은 75.3%로 세계 1위, 왜 그 많은 모순을 안고서도 미국이 제일가는 나라인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스페인이나 일본 등은 물론 경제협력개발기구의 평균인 62.3%에도 못 미친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총소득이 별로 늘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정부와 기업이 가져가는 몫이 전체에서 40%를 넘다 보니, 우리 개개인의 주머니는 허할 수밖에 없는 일. 그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의 61.1%에 비해서도 낮아졌다. 그만큼 근로자 몫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국민총소득 22,708달러 중 개인총처분가능소득은 13,148달러 - 그러니까 지난해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실제로 소비에 쓸 수 있는 돈은 (발표 당시 환율 1,126원으로 환산해서) 연간 14,80,457원으로, 대략 월 123만원에 불과했다.

 

  평균급여 - 월 123만원.

이 통계는 나를 울렸다. 마치 경제를 조금은 아는 사람모양, 나라 전체의 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관한 상심 때문에? 그랬다면 그것은 조금은 사치였다. 수치는 통계 속에서 존재했고, 나는 양심적으로 사고하면서 양심적으로 사고한다는 자존감을 지닐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개인적인 모멸감이었다. 나는 평균 123만원 세대에도 끼이지 못했다. 교양학부의 한국어 강의까지를 내려놓은 지금은 부정기적인 수입이 내 생활을 지탱해 주는 수입의 전부였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세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을 감히 들춰 읽지 못하는 것도 자격지심이다. 그 책이 처음 나온 2007년까지도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영순위 강사의 신분을 누리면서 세상 물정 모르고 인문학에 파묻혀 살았다. 승자독식 게임의 법칙도 예감하지 못한 채. 그러다 곧 닥쳐온 나의 추락은 부끄러움에 무조건 움츠러들게 했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 119만을 20대의 평균 소득비율 74%로 곱한 값이 88만원이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40을 바라보며 88만원 수입마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 자리를 비집고 든다 해도 - 아직 가능성은 있다. 국립대학은 매 학기 공채가 있기 때문에. - 동료들 사정을 보면 비정규직 평균임금 수준에 불과하다. 일이 있고, 책상이 있고, 동료가 있는 것, 그것이 그들을, 어쩜 나도 그 속에 다시 끼인다면 나를 지탱해 주는 끈이다. 가족들로부터는 스스로 죄인이 되어 소원해지는 세월이다.

  지금까지는 전통적으로 가족이 가족의 복지를 떠맡았다. 대학생들은 FM(아버지 어머니)장학금에 기대고, 결혼까지를 부모에게 의존한다. 부모 세대는 어렵게 마련한 집을 자녀들 대학 뒷바라지와 결혼자금으로 다시 팔아야 한다. 그러고도 둘째나 셋째에겐 더 이상 뒷받침할 여력이 없다. 중산층에서 이미 밀려나 내려앉았다. 이제는 가족의 부담이 한계점을 넘어섰다. 가족은 소리 없는 신음 소리를 낸다. 가족의 구조와 성질이 이 시대 한국의 특별한 온도와 압력에 이르러 다른 상태로 바뀌는 임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도 일류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면 루저가 되는 세상, 연애는 사치의 극이요, 결혼 또한 비즈니스이다. 딩크족(더블인컴노키즈)은 삼포세대의 로망이다. 너 자신을 알라, 삼포족.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루저인 나 자신을 향해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엉뚱한 곳으로, 정말로 삼천포로 빠졌다. 잠깐, 삼천포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변명이 필요하다. 옛날에 한 장사꾼이 진주장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한산한, 혹은 장날이 아닌 삼천포로 가게 되어 낭패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시발일 뿐, 나는 삼천포에 아무런 유감이 없다. 발길 가본 적도 없으니 좋고 나쁠 수도 없다. 그래도 그 이름 때문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곳 목록에 든다. 진주이건 삼천포이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데, 종류를 가늠할 수 없는 화가 치민다.

 

 

  화 - 화가 나는 일을 당하여 우리는 주로 화를 참는 것이 인자의 길이요, 인자의 도리를 모르면 화로써 망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주입되었다. 하지만 화를 끓이고만 있으면 병이 된다고도 하질 않는가.

 

  분노는 많은 경우에 백해무익이지만, 사람이 분노해야 하는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거나 분노를 모른다면 더 큰 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메시지도 있다. 2차 세계계대전의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을 대변하는 노익장이 남긴 짧은 글, 바로 『분노하라!』는 글이다. 스테판 에셀. 1917년생이니 90을 넘어서 쓴 글이다. 유명한 1917년생들이 다 떠나고 없는 세상에서. 정치라면 러시아혁명도, 케네디도, 박정희도. 문화라면 윤동주도, 윤이상도, 하인리히 뵐도. 에셀은 독일계 유대인으로 일찍 파리에 정착해서 거의 한 세기를 살다간 지성인. 그냥이라도 90 노인의 발언은 경청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이고 그림이고 저작자가 죽으면 값이 올라가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신속하게 번역되었다. 노익장의 분노 예찬 발언은 애늙은이들이 대접받는 동양적인 관점에서는 다소 색다를 수 있다. 아니 온 세계가 난공불락의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된 글로벌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분명코 내민 돌에 정 박힐 일이다.

  프랑스의 현실에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는 모양이다. 알제리를 비롯하여 비 코케시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갈수록 산이다. 이건 엊그제의 일이지만 명색 프랑스 하원의원 질 부르둘레라는 인물이 히틀러가 로마족, 그러니까 쉬운 말로 집시족을 충분히 못 죽였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 일에는 장-마르크 애로 총리조차 법에 따른 처벌을 운운할 지경에 이르렀다지만. 세상은 금권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권력들이 세포분열을 하는 장에 불과하다. 성실한 근로세 납세자는 없다. 바보들이 있을 뿐이다. 세상은 갑과 을만 존재한다.

 

  을순이 - 내 이름은 한금실이 아니고 통상 을순이가 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을식이와 을순이들의 하나. 그러므로 거의 무명 씨. 나에게 분노의 여력이 있을까. 어떻게 분노해야 할까.

 

  첫 발걸음은 관심이다. 반세기 전에, 1960년대 유럽의 사회주의대학생연맹의 여대생들은 ‘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외쳤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의 여학생들은, 여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그들의 관심은 외모와 이력을 통한 개인적인 성공에 있을 뿐이다. 여자 특유의 외모로서 남성 세계를 공략하거나 남성들과 똑같은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 권력에 이르는 길이다. 그 이외는 무관심하다.

스물 세 명인가 네 명인가, 미스코리아 본선 진출자의 외모 사진들이 똑같다고 세계 여론에서 비웃는다. 몇 년 전에는 「한국의 미의 비용」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유수 저널이 한국의 성형수술 풍토를 대서특필했다. 얼굴에 독을 주입하는 것은 일상이고, 가정주부가 심지어 종아리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곳이라고.

 

  그뿐인가. 얼마 전 폴라 비라운인가 그 비슷한 이름의 화장품 경찰관(?)이란 별명의 전문가가 한국에 와서 놀란 것이 바로 화장품 종류였단다. 스킨, 로션, 에센스, 아이크림, 영양크림이라는 필수(?) 코스도 모자라서 앰풀, 트리트먼트, 마사지 제품, 기능성 제품의 홍수들을 보고서 하는 말이, 수많은 종류의 기초 스킨케어 제품들이라야 파격적으로 말하자면 보습제 한 종류란다. 수많은 과정의 덧바름은 오히려 모공을 막아 트러블을 일으킬 수도 있고, 과한 영양분은 타고난 피부 루틴을 방해해서 자연스러운 재생력과 유수분 유지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데……. 나처람 단순 무식한 사람에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피부도 인체의 일부이라면, ‘소식하면 장수한다!’라는 말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피부나 외모가 아니지만, 나만의 이력에 관심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나 또한 사회적 무관심자에 속했다. 죽어라, 아니 충분히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러고도 갑의 근처는커녕 을의 세상으로 낙착되고 말았다. 벌이라면 벌이다. 지식을 생보다 우위에 놓는 죄를 범한 일, 지식에 종사함에 우월감을 가졌던 일에 대한 벌. 이 창살 없는 수감생활 중에 나는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이제서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 무엇을 분노해야하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시작, 모든 새로운 시작은 반성이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다. 반성 시작 -

  나는 공부만 했다. 학문이 생을 의미 있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공부만 했다. 목표를 초월한 학문. 유용성을 생각하는 것은 저열하리라고 믿었다. 쓸모없음 때문에 쓰임이 되는 것이라고, 어쭙잖게 노자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집의 쓰임은 벽이 아닌 빈 공간 때문이라고, 내가 두 발로 설 수 있는 것은 발바닥 크기의 땅 때문이 아니라 주변의 땅, 내가 밟지 않고 있는 너른 땅 때문이라고.

  나는 사치스러웠다. 욕심을, 특히 물욕을 초월한 삶. 그 무슨 사치였는가. 착각 아니면 거짓말. 세 끼 굶으면 군자 없고, 사흘 굶어 도둑질 아니할 놈 없다는데. 취직을 하든지 시집을 가든지 - ‘취집’을 향하여 전진을 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취직을 향한 노력은 적잖이 해왔다. 결과가 없을 뿐이다. 일단 안정된 직장이, 돈이 없으니. 그러면 곧 삼포세대에 속한다. 연애는 무슨. 혹시 연애를 할 수 있다고 쳐도 - 그 정도는 생물학적 짝짓기 본능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렷다, 희망하건대. 하지만 결혼에 이르는 것은 사투에 가깝다. 생물체는 살아남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할 것이므로, 남녀 관계라는 것도 다분히 계산적이 될밖에. 생물체의 상호작용에는 다소간 이해의 충돌이 내재한다고, 어디선가 읽었고, 또 동의한다. 자기 복제를 시도하려는 충동이 사랑이라는 단어로 미화되어…….

 

  틀렸다. 나는 반성 대신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정작 중요한 반성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고 있다. 죽어라 공부하고도 일자리가 없는 것을 내 못난 탓으로만 돌리는 반성은 무의미하다. 부족하다.

  무엇을 더 분노해야 할 것인가. 내 탓은 제 앞가림 못한 데 대한 분노, 제 욕심에서 나온 분노에 불과하다. 애초에 나를, 우리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던 이 사회. 대학정원을 너무 부풀렸던 이 사회에 분노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이 에셀이 말하는 분노, 진정한 사회참여에서 오는 분노이다.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이름의 한 줄서기를 주입시킨 교육. 살벌한 경쟁심을 자유라는 당의정을 우리에게 먹였던 교육. 제 앞가림에만 매진하라고, 늘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평생을 달리라고 가르쳤던 교육 말이다. 그것도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 바로잡을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가 독문학을, 프랑스문학을 선택했던 대입에서 어른들 - 그런 곳을 진학하게 권했던 담임선생님이나 그런 학과의 대문을 너무 홀짝 열어놓고 우리를 습인했던 대학들 모두 - 그때 어른들은 우리가 바나나족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몰랐다는 말인가.

 

  바나나 - 바나나를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바나나는 병문안과 관련된 이미지였다. 아프면 바나나를 사주셨다. 조금 더 자라서는 해괴한 모양이 눈에 들어온 때문에 싫어하게 되었다. 여자아이가 바나나를 먹기는 뭔가 민망한 노릇이었다. 금방 바나나 송이에 꼬이는 하루살이들도 성가셨다. 하필 그 싫은 바나나로 지칭되는 우리들.

가야금과 거문고의 구별도 모르면서 현악기 종류들은 정확히 배워 알았다. 피아노 연습은 지금의 아이들에게도 필수다. 자연 단음계, 화성 단음계, 가락 단음계 구별도 배웠다. 자진머리, 휘머리, 중중머리는 구별할 줄 몰랐다. 조금 알았더라도 엇중머리 라고 하면 멍했다.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을 한국어교원양성과정 공부하면서야 제대로 알았으니, 지식분야인들 바나나 타령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 분야가 더했다. 개화기에 생산된 신문학은 어땠는가. 신소설, 신체시, 신파극 범주를 통틀어 서구문학과의 관련 양상이 문제가 되었다. 비록 김현과 김윤식의 자생적 근대화론이 정설로 굳었지만, 해방 직후에는 이식문학론도 만만치 않았다. 신문학을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 문학의 이식이라고 단언했던 임화의 논의는 그의 정치적 이력으로 묵살되고 만 것이니. 정치는 문학이론 위에 존재한다.

 

  쇼와 시대 이전, 그러니까 1870년대에서 1920년대 중반까지 일본 개화기의 서양 추종 문화가 조선에 그대로 수입 또는 주입되었다는 견해는 왜 백안시 되었을까. 메이지유신의 이름으로 서구의 자유주의 이론을 통한 근대화는 한 마디로 문명개화의 기치아래 수행되었다지만, 사실 일본의 경우는 무사들의 충성심과 사회적 조화라는 전통적 가치도 여전했거늘. 오히려 수입을 통한 수입에 해당되는 우리는 우리의 전통적 가치를 한 동안 망각했었고, 그 기간은 사뭇 길었다.

  예컨대 무당이나 사당패처럼 홀대받던 것이 풍물이었다. 꽹과리, 징, 장구 그리고·북 어느 것도 손데 대면 천하다고 업신여겼다. 그게 사물놀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 난 것이 1978년의 일이었으니, 장구재비 김덕수 패거리가 - 정식명칭 김덕수사물놀이패 - 세계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또 돈을 벌자 그때서야 사람들은 풍물도 사물도 돈이 되는구나, 성공이 되는구나 하고서 관심을 보였던 셈이다. 우리 고유의 정서라거나 문화의 발흥이어서가 아니라, 돈이, 성공이 되니까. 결국 우리는 우리 가락을 연주는커녕 감상도 할 능력을 잃은 채, 국적불명의 음악에 취해서 산다. 글로벌음악, 글로벌문화.

 

  일찍이 매슈 아널드 같은 고급문화론자들이 세속적 오염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던 ‘문화’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유럽의 제국주의 문화였음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확실히 깨달았다. 벌써 반세기 전에. 그 반세기 동안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종속되어 왔다. 유럽세계와 아시아세계의 차이에 관한 감각을 더욱 경직화시키는 압력에, 동양이 지닌 (서양과의)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사고에, 학문적으로 동양 위를 억누르는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그런 교의에. 그러므로 (서양)문화에 근접할수록 고급문화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착각에.

  그뿐인가. 바나나족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글로벌문화 창달에 매진하며 산다. 미국 기업과 맞선 우리 기업이 자랑스럽기만 한가. 스마트폰은 주인의 자리를 넘본다. 눈을 뜨면서 스마트폰을 찾고,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든다. 그것도 ‘엘티이’라야 하지, 행여 ‘쓰리지’는 큰일이 난다. 여전히 ‘투지’를 쓰고 있다면 영락없이 비사회적 죄인이 되고 만다. 인간은 가까운 장래에 번호와 기호로 분류된 코드를 팔이거나 뇌 어딘가에 이식받아 글로벌하게 통제되어 살게 될 것이다. 인간로봇, 아니 아예 로봇으로 진보하기 전에 아직은 바보 같아도 사람 같은 사람이 남아있는 세상을 음미해야할 것 같다.

 

 

  음미 - 또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의 몫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도 굶어 죽는다 하질 않는가. 돈을, 성공을 향한 허기는 끝을 모른다. 산비탈을 한번 돌면 사람들 절반이 사라진다는 무서운 동화가 현실이 되어 있다. 한 단계를 지나면 절반이, 다음 단계에선 또 절반이 탈락하고 우량종만 남는다. 우량종들도 피터지게 경쟁하여 궁극에는 일인자만 남는다. 그 한 사람은 무엇을 향해 살리.

  차라리 삼포세대 바닥 헌장으로 삶아 읊어도 좋을 시가 있다. 스물일곱에 요절했다는 천 년 전 당나라의 문인 이하의 작품이다.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

    서리 맞으면 잡목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비루먹은 개. 이삼십 대 젊은 사람들 거의 절반이 이 무기력에 굴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었다. 어느 온라인 취업포털의 설문에. 이제 사람들을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적응인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겠다고 자기암시로서 통제하는 적응력. 어찌어찌 결혼에 이른다 해도 출산은 망설인다. 출산율은 2012년 기준으로 1.23명, 사람을 세는 정수로 말하자면 한 명이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란다.

 

  난 그렇게 끝나고 싶지는 않다. 비록 객관적인 눈으로 삼포세대 일원이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으련다. 쓸 돈, 쓸 수 있는 돈을, 주머니 사정을 잠시 잠깐 망각하는 바보이고 싶다. 미래를 계획하느라 미리 겁에 질리고 싶지 않다. 겁에 질리지 않으면 포기가 아니다. 다른 유형의 삶. 신자본주의 이론으로 평가받지 않을 삶도 삶일 것이다. 자본주의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살았다. 자식이 제 먹을 것은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던 한참 낙천적인 시절에도.

  낙천적이고자? 설마. ‘모든 것이 부조리함을 의식하는 인간’에게 어차피 실존은 이유도 종극적인 목적도 없을 것이니. 그냥 살 수밖에, 그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리라, 그래야 한다. 둘이 모여서 여섯을 포기하더라도. 셋이 모여 아홉을 포기하더라도. 허기의 노예가 되지 않고서 살아갈 길을 찾기 위해서는. 봄버들이 되는 꿈을 꾸기 위해서라도. (끝)

 

 

 

 

..........................................................................................

 

 부산펜문학 2013  Vol.9., 2013.11.20. 29-42쪽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3. 11. 17. 13:01

 

 

우빈과 성빈이 예인피아노학원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우빈이 곡명 : <하차투리안 소나티나 No. 3, 3악장>

http://youtu.be/mVk0fun8oIo

 

 

성빈이 곡명 : <눈송이 래그타임>
 http://www.youtube.com/watch?v=WynJiwZTMVw

 

 

우빈은 사정을 다 이해하지만,  

성빈은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올 수 없느냐고 '따지듯이" 졸라댔다.

하지만 11월 8일이면 서울 다녀온 일주이로 안되는데다가 9일에 일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세 가지 일이 한꺼번에 -

그중 마지막이 이동원과 장사익 음악회에 초대받은 일이었다. 

 

                  ▼

                             

                         

 

 

가을 비가 주룩주룩 내렸고,

살아있는 자매들 넷, 나부터 민, 진, 희 - 배려가 넘쳐 병(?)이라는 민이 남편이 기사와 기사를 담당했다.(카발리에와 드라이버) 

 

넷의 공통점 - '용'자를 이름에 지니고 있고,

                  박수를 치지 않았고,

                  2G를 쓰며 활영도 하지 않은 것.

 

진이의 후회 : "심장에 남은 사람"을 녹음하지 못한 것!

                             

 

 

 

 

 

긴 어디에서 그런 노래를 들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가슴에 남을' 사람을 병원에서나 쓰는 '심장'이라 하니까.

사람이 '귀중하다'?

우리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쓰지 않고 물건을 귀중해 하니까. 

 

 

나는 <또 기다리는 마음>을 서럽게 서럽게 들었다.

정호승의 시에서 과거형을 현재로 바꾼 의미도 아프게 다가왔다. 

 

 

<찔레꽃> - 장사익은 이 노래를 위해 태어난 것일까?

               육신이 없는듯 가볍고 비장하기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래도 그 사이 나는 다른 찔레꽃 가사를 떠올렸다.     

 

 

<봄날은 간다> - 이동원, 장사익 두 소리로 들었다.

                     이 노래는 이동원이 불러야 하는가?

 

이동원 - 속 없이 말하자면 그가 또 무대에 설까?

그의 흔들거리는 건강이 염려되어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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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