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이2014. 8. 18. 00:23

소요사 -  서해의 용이 머물렀다 간다는 4대 명소

 

천안의 위왕사에서 옮겨온 60cm 높이의 종이 절에 비해 한참 크다.

금륜 스님의 글씨도 내용도 멋스럽고 또.............

 

아, 무엇보다 이곳 금성스님은 침묵의 도를 닦으신다.

필답으로만 속세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노란 액체가 스며나오는 바위 앞에서 - 2014.6.8.

 

 

 


 

 

소쇄원 나들이도 갔다.

'콜레스테롤' 걱정에 고기를 피하시는 88세 시누이를 위해 채식부페에 갔다가.

 

 

 

멀리 정자에 앉아있는 멋진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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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4. 8. 17. 22:53

 

 

개학 하자마자 피아노 콩쿨이 열였다고............

꼬마 성빈은 입학하자마자 대회에 나갔고,

우빈 성빈 둘 다  즉석에서 트로피들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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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4. 7. 6. 16:19

 

 

상품이 된 인간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를 보다가

나도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

변기통의 물을 내리고

씩씩하게 지퍼를 올리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으로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면

화장실 벽에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제일 싼 血 팝니다,

자본주의 만세!

 

화장실이 아니라 미안하게도 쾌적한 책상에 앉아서 시를 읽었다. 1970년생 시인의 절규였다. 그들은 젊은 날 왜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지 않는가, 쓸 수 없는가, 가슴 아파하면서 읽었다.

*

단기 4278년 여름 - 서기 1945년이겠지만 그때는 아직 단기였다 - 세상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세계사에서도 현대의 시작을 제2차세계대전의 종말로 보기도 하니 말이다. 엄청난 심적 물적 혼란에서 허우적대던 어느 날 하늘에서 해방이 떨어지고, 배달민족은 자유로운 대한민국(임정)의 국민이 되었다.

정말 새 세상이 열렸다. 원수의 왜놈 쪽발이가 가더니 기독교 천사 날개에 실려 서양 문물이 밀려왔다. 아, 그리웠던 자유. 신체의, 사상의, 표현의, 언론의, 양심의, 결사의, 무엇보다 종교의 자유……. 자유연애, 자유부인, 자유당, 자유주의……. ‘자유’자가 붙으면 무엇이든지 최선의 가치였다. 그렇게 자유를 마시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젊은이들에게 자유를 제대로 넘겨주었는가.

자유라는 개념을 우리는 미국에서 배웠다. 케케묵은 삼강오륜이 낙하하는 속도에 신바람이 났다. 소위 아메리카정신은 청교도정신과 실용주의 그리고 개척정신을 말한다.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신교 신앙과 신의 소명이라는 직업에 따라 성실과 엄격함으로 임하는 경제관은 자본주의를 지원한다. 실용주의는 현실주의, 합리주의, 능력중심을 토대로 해서, 대중적인 것, 편한 것, 실속 있는 것으로 문화코드화 되어 현대 대중사회에 실용적인 ‘글로벌’ 문화로서 전 세계로 확산일로에 있다. 그 둘을 합한 화합물이 개척정신이다. 종교적 열정의 현실체인 미국중심 사고는 영광의 미국과 신의 소명을 받은 미국인으로서의 투지로 연결되어 서부를 개척하고 인디언을 몰아냈으며, 그 후로도 세계 도처로 무한정 진출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 온 세상 저열한 국가들은 미국을 배워나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실용주의 철학, 특히 실용주의 교육이 우리나라 ‘새 교육’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서울대 총장 장이욱,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교육계 원로 오천석 등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사상을 들여왔고,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교육의 가치는 작용의 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 나타나는 유효성으로 매김 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은 결과로서 판단된다고, 오늘날 결과중심주의의 비극이 잉태된 순간이었다. 도덕 교과서에서는 ‘결과보다는 과정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실제 교육은 ‘모로 가도 서울(대)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왔다. 사람들은 서울에 서울대에 최소한 그 비슷한 무게의 대학에 가서 성공했다, 돈과 권력의 합작 세상에서. 신화적으로 성공한 모두를 보라, 게으름부리지 않고 노력하면 다 그렇게 성공한다, 라고 믿고 살라고 가르치고 배웠다.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다. 끝나지 않은, 않을, 가난과 엄청난 자살률은 누구의 말대로 ‘민족적 게으름’ 때문만도, 열악한 환경 때문만도 아니라는 것을. 최고의 대학 카이스트에서 줄 이은 학생들과 교수의 자살이라는 비극은 시스템의 죄였다고. 인간을 자원으로만 간주한 결과중심주의의 경쟁시스템이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독일어에서는 경쟁사회라는 단어를 ‘팔꿈치사회’라고 쓴다. 팔꿈치로 양 옆 사람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인 사회에서, 정직하게 말하자면 승자가 누리는 모든 것은 수많은 ‘루저’들이 제 못나서(?) 누리지 못한 몫이 이동된 것들이다.

최근의 통계들은 믿을 수 없는 수치를 믿으라고 한다.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고 있다.(크레디트스위스) 우리나라도 상위 1%인 50만 명이 전체 토지의 55.2%를 소유하고 있다.(국토교통부) 세계 최상위 부자 85명이 소유한 부가 소득 하위 절반에 달하는 35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다. 세계 부자 상위 1%의 재산은 전 세계 최빈층 절반의 재산을 더한 것보다 무려 65배나 많은 규모다.(옥스팸)

이 수치들은 우리를 슬프다 못해 절망케 한다. 절망타 못해 돌게 만든다. 이 탐욕이라는 이름의 바윗돌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윗돌은 무거운 채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머피의 법칙은 절대적이다. 멈출 수 있는 도를 넘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탐욕의 결과는 행복이 아닌 그 정반대의 참사임을. 진도 앞바다의 비극은 무대극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어느 대학교 교수들은 이번 참사의 근본 원인을 ‘물질적 탐욕에 젖은 나머지 생명의 가치를 내팽개친 황금만능주의, 편법과 탈법의 관행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온 결과중심주의에 있음’이라고 선언했다. 우리 사회를 ‘삶과 생명에 대한 철학 및 성찰이 빈곤한 반인간적 사회’라고 규정했다. 왜? 경쟁적으로 한 줄 서기만을 가르쳐왔으니까. 우리가 가르쳐 낸 것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적자원’, 나아가서 품질 좋은 ‘상품’이었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설마 ‘상품 인간’이 성장하고 있었다니! 사실이었다.

자유는 처음 황홀하게 맞이하던 것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단면에 걸쳐 자유와 윤리, 개인과 국가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밀은 『자유론』(1859)에서 ‘다수의 횡포’에 의한 ‘비주류 소수’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경고했다. 다수가 소수에게 여론과 관습을 내세워 ‘대세에 순종’할 것을 강요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51%의 득표율로 오불관 100% 전횡을 휘두를 수 있는 양당 구도에서의 대통령 권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와 연대감이란 소수에 대한 이해’(하인리히 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하는 개인 또는 단체의 자유라 하더라도,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는 사회가 간섭할 수 있어야 한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사회와 국가의 간섭이, 규제가 있어야 한다.

화두는 어쩔 수 없이 - 아니 당연히 - 다시 참사로 돌아간다. 1,000명이 넘는 재외학자들도 참담한 성명을 발표했고, 제목은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에 울리는 경종’이고, 부제는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와 민주적 책임 결여가 근본적 문제’라고 적시했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정철학의 전환이 없이 새로운 대한민국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국가 - 살아있는 생명체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다른 생명을 소모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운명을 부여 받았고, 자급자족보다는 공동체 속에서 그 수고로움이나 위험부담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은 국가사회를 만들어냈다. 국가는 부여받은 권능으로 욕구의 조정이라는 어려운 역할을 해야만 한다. 우리나라가 어렵사리 끼어든 세계경제 속에서 세계적인 불황이 닥쳤고, 때맞춰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세계 경제가 자본주의로 통합되면서 국제적 경쟁이 가열되자 복지국가들도 흔들렸다. 이때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비대해진 재정적자를 비판하면서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에 반대했다. 시장의 기능과 민간(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세력을 얻은 것이다.

곧 그 역기능이 들어났다.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그리고 재산권을 중시하다보니, 개인과 기업의 무한대의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가운데, 빈부 격차는 날로 커갔다.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이라는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미명의 예컨대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다자간 협상이란 곧 시장개방의 압력이었고,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개인 또한 무한대의 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에 내던져진 상태에선 적나라한 투쟁만이 살 길이 되었다. 사람 가치는 땅으로 땅으로 떨어져가더니, 아예 상품이 되고 말았다.

‘일단 내가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다 보니 평소 과잉보호가 있어서…….’ 1990년쯤에 태어났을 한 스타급 젊은이가 공항에서 팬에 대한 불손한 매너로 비난을 받자 반성문과 함께 내놓은 변명이 그랬다. 쭉정이들이야 공손하겠지만 주력 상품이다 보니…… 그런 뜻은 제발 아닐 것이다. 인간이 상품이라는 인식에는 애어른 구별이 없다. 지난 지자체선거에서 중후한 정치인 한 사람도 자당의 후보를 가리켜 ‘그 이상 더 좋은 상품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웠다.(데일리언 5.27.) ‘상품 인간’은 명품이 되어야만 대접을 받는다. 시장만능주의자들에게 노동과 노동자는 상품생산에 과정으로 참여해있는 부품에 불과하다. 온전한 상품이 못된 불량품 인간은 장기라도 부품으로 내다 팔아야 산다.

이 살인적 경쟁사회에서 인류에게 미래가 있을까? 경쟁은 이익과 승리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호배타적이고, 결과 지향적인 것이기 때문에 강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하지만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것은 물질과 대상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필요와 욕망의 경계를 망각한 인식의 오류 때문이다. 가치의 혼돈 때문이다. 이제도 우리는 젊은이들을 비싼 상품이 되기 위해서 공부만하라고 내몰아야 하는가?

다석 유영모 선생이 한글로 풀어쓴 노자 『늙은이』 20장 첫 말이 떠오른다. ‘써먹기 부터하려는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을 것이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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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프리즘>에 기고

 

 


 

다른 그러나 같은 PEN 문인들

                                                  2014.6.28.~29.

                               제16회 영호남문학인교류에 다녀와서

 

 

열여섯 번 째 영호남문학인교류 한마당 -

어언 대여섯 번 참가하는 행사이지만, 이번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부터 스멀거리는 것은 기대감이 아니라 아랫입술이었다. 출발 전날부터 흉하게 부풀어 오른 입술은 이 부산 나들이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처음 이 교류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 1999년이라는데, 그때 무슨 심정에서 이런 행사를 시작한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대가 열렸다고는 하나 신한국당과 민주당 합당으로 태어난 한나라당의 견제 속에 편치 않는 세월 아니었던가. 어쩌면 금강산 관광의 시작으로 남북문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 그때, 요원한 남북통일에 앞서 가능한 동서화합이 더욱 그리웠을까? 아무튼 최소한의 이해의 숨통을 트는 일을 문학이 문학인이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이 밑뿌리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PEN부산의 회원들과 문인들이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었다. 6월 28일 토요일 정오가 지나 모인 참가자들을 확인하고 출발 신호를 날렸다. 귀찮을 것을 알고서도 주민등록번호며 주소를 수합하여 여행자보험에도 들었고, 걱정할 일은 없었다. 열성 회원들의 열과 성으로 녹두시루떡도 찰밥도 노랗게 익은 참외도 실렸다. 수육에 머리고기에 결정적으로 알싸한 홍어무침까지 실은 버스는 주암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대충하고 나왔을 참가자들의 기운을 돋우었다. 마침 곡성에서 나오는 소설가 한 분도 함께 합류하여 간식을 즐기고 버스에 오르니 서른다섯 명 예정인원이 꽉 찼다. 늘 그러면서도 외지에 가면 길은 서툴러 해운대 학생수련원을 학생수련관으로 찍은 내비게이션 때문에 엉뚱한 곳에 도착하여 PEN부산 회원들을 오래 지치게 했다.

 

늦었지만 서둘러 상견례를 치른다. 밥보다 금강산이 먼저다. 환영사, 답사, 축사, 축사……. 기념품 교환. 무엇보다 부산의 ‘거리 詩’ 축제에 참여했던 PEN광주 회원들의 시화작품을 전달받으면서 문인으로서의 동질성 그 이상의 정을 느꼈다. 부산의 시 축제엔 늘 광주의 시인들을 초청하고 있고, 매년 발행되는 『부산펜문학』과 『국제펜광주』에는 상호 문학작품들을 싣는다. 영어로 쓰는 영미문학도 하나로 이해하고 강의하는데, 하물며 같은 한글로 쓰는 영남문학과 호남문학이 얼마나 다를 것인가 말이다. 오늘 <희곡의 이해>를 강의한 김영관 교수(PEN광주 명예회장)도, <김수영 시인과의 추억>을 들려 준 PEN부산의 시인 김철 교수도 한 올만큼도 동과 서를 나누어 말하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올해의 행사는 무엇을 막론하고 편히 즐길 수 없는 마음이다. 너도 나도 아픈 가슴으로 그것을 느낀다. 외람된 말이지만 답사에서 오늘을 사는, 살아야 할 인연을 논했다.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 ‘유순’ 그 40리 평방의 바위를 1,000년에 한 번 떨어지는 물방울이 뚫어내는 시간이 ‘겁’이라는데, 법륜 스님 말씀 가운데, 지구 안의 같은 나라에서 동시에 태어나려면 1,000겁의 인연이, 하루 정도 같은 일을 하려면 2,000겁의 인연이 있는 것이라 하더이다. 그런 우리가 만났으니, 통한의 4월, 달력을 넘겨 찢고 또 찢어도 찢어도 아픈 봄을 두고도, 한숨을 내쉬다가 깜빡 들숨을 들이쉼으로써 살기로 결정해버렸으니 살기로 합시다. 그 비슷한 너스레는 편한 시간들을 갖자는 부탁의 다른 변형이었다.

우리는 함께 식판을 들고 섞이어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니 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술이 빠지랴. 술술 넘어가는 술에 술 못하는 모범생들은 분위기를 마신다. 이어지는 멋진 자작시 낭송들, 아름다운 노래도, 다른 장끼자랑도 빠질 수 없다. 전문 음악인을 능가하는 기타리스트를 내놓는 부산, 뒤질세라 전문 성악가를 놀라게 할 가수를 내세우는 광주……. 그렇게 따뜻한 저녁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송정, 밤이 내려앉은 검은 바닷가에선 바다가 없어 늘 바다를 그리는 광주사람도, 바다에 물린 부산사람도 구별이 없었다. 젖은 모래 위에 저녁상에서 남겨온 비닐봉지 속의 안주도, 이름 할 것 없이 섞인, 모래까지 섞여 마시는 술도 달콤하기만 했다. 남자가 부르는 이미자도 명가수의 소프라노도 바리톤도 환영이었다. 기계음에서 해방되어, 파도 소리 반주더러도 ‘시끄러봐’라고 우쭐대면서.

 

날이 밝자 짙은 바다내음의 미역국에 도시락반찬이 울컥 생각나는 계란말이에 아침을 먹고 ‘공부’를 떠났다. 친히, 만기침람의 의미가 아니라 그저 넘치는 친절함으로 광주 버스에 오른 부산 회장은 아뿔싸 안내원이 된다.

 

욜로 가입시더, 욜로 욜로.

부산 회장님이 아저씨, 기사님 하다가 기사 선생님까지를 들먹이며 안내해 간 곳은 수많은 멋진 다리들을 지나 감천문화마을과 부산민주공원이었다.

 

 

감천문화마을 -

얼마나 대단한 문화가 숨 쉬고 있는 곳일까. 부러움 반 호기심 반 찾아간 곳에는 문화가 아니라 아픔이 있었다. 그곳이 간직한 역사는 아픔이었다. 관광 상품으로 알록달록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베어나는 것은 슬픔이었다.

 

옥녀봉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산자락에 빼곡히 늘어선 계단식 집단거주지. 산비탈을 이용하여 절대로 뒷집에 해가 가리지 않도록 지어진 주택들에는 굳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벌써 한 세기 전 1918년 조철제 선생이 증산사상을 기반으로 시작한 태극도 신자들 수천 명이 고개 주변에 집단촌을 이루었던 것이 시발이라고 하니 특수한 종교심에서 서로의 해님을 배려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살아 있는 마을이 전시장이 되었다는 생각은 마음 한편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시작부터 특이한 모습들이 외지인을 반긴다. 전영진 작가가 올려놓은 <사람 그리고 새>라는 작품은 추녀 끝에 새들인지 사람들인지 고개를 내밀고 앉아있다. 그래, 사람도 때론 날고 싶어……. 주민들은 개성 있는 색채감각으로 집단장을 했고, 멀리서 보면 색종이로 접었거나 고무지우개를 알록달록 맞춰서 가지런히 세워둔 집에서 산다. 가까이에서 보면 빨래 줄에 널린 빨래들 하며 배시시 살아있는 화분들이 삶을 말해준다. 용두산과 도심이며 항구가 다 내려다보이는 <하늘머리> 전망대에 오르니, 아, 따가운 햇살에도 상쾌한 바람이 맞아준다. <한지의 집>에서는 수공예품을 사느라 한눈을 팔고. <평화의 집> 등의 이름을 가진 골목길 프로젝트를 따라 가노라면 몸을 틀어야 통과할 수 있는 길이, 누군가는 정말 통과할 수 없을 길이 나온다. 전체가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 때문에 PEN부산 사무국장은 아예 혼자서는 다니지 마라, 끝까지 가보려고 하지마라, 미리 경고를 준다.

 

이어진 부산민주공원 -

공원 입구 비스듬한 잔디광장에는 ‘민족통일대장부’와 ‘민족평화여장부’라는 이름의 장승들이 서있다. 이 장승은 진도군민들이 부산시민의 민주정신을 기리며 만들어 보낸 것이라 하니, 영호남 교류는 여기에도 있구나……. 흐뭇한 마음으로 <추모조형물>을 보러간다. 50미터가 넘는 대형 조형물로, 민주항쟁의 연속성과 현재성을 부각하는 상징물이자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열사들을 기리며 분향하는 곳이란다. 한참을 더 올라 <민주횃불>이 있는 곳, 그곳엔 수많은 반사 재질의 작디작은 조각들을 내부에 넣어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이름 없는 별들을 형상화 해냈다고 한다.

 

거짓말. 거기엔 가지 못했다. 설명만 들었을 뿐으로, 몇몇은 ‘분수’를 지키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 산수를 배웠으면 ‘분수’를 아는 것이 사람 도리라고 쿡쿡 핑계대면서. 게까지 올라갈 여력이 없는 몇 회원들을 벗 삼아 힘들다고 아우성인 심장을 쉬게 했다. 일행은 한참 만에 내려왔고, 살며시 음과 식이 그리워질 즈음 버스는 밥집으로 향했다.

 

헤어지는 마당, 건배사 - 초청 측 PEN부산 회장의 건배사에 이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긴장을 풀자고 우스개를 했다. 열여섯 해면 남자 여자가 만나서 부부가 되었다가도 못살고 헤어지기도 하는 세월인데, 우리는 부디 이혼 생각 말고 끝까지 가봅시다. 갈 데까지 가입시더. 양 도시 문인들의 우정을, 행복을, 무엇보다 문운을…… 여러 건배사가 이어지면서 <초원의 집> 점심이 무르익어 갔다. 실제로 오리고기가 익고 있었다. 그곳은 텔레비전에 ‘대통령들이 다녀간 집’ 소개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다녀갔다고 소개되었다고 한다. 몇몇은 깡소주를 노무현식 건배를 하자고 확 비우고 잔을 머리 위로 털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했는지는 아무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낮술에 취하면 어쩌려고?

 

어이없는 사족 하나.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어떤 휴게소에서 회원들을 놓쳤다. 휴식 후 5분 정도를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고, 가벼운 식곤증으로 눈을 감던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잠시 후 버스를 따라잡은 검은 차에서 내린 둘은 별 계면쩍음도 없이 버스에 올랐다. 우리는 금의환향하는 월드컵 선수라도 되는 양 박수로 환영을 하면서 갑작스레 하나가 되어 깔깔댔다. 사고는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는 느닷없는 판소리공부를 하게 되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를 기가 막히게, 임방울보다도 더 임방울 같은 목청으로 내놓는 ‘김싸부’ 덕택이었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 적막 옥방으 찬 자리어 /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거기까지만. 헤어질 시간이 다 되도록 우리는 배웠다, 불렀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내년에 우리가 부산 문인들을 초청하는 자리에서 이 구절을 합창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우리가 영호남 화합에 눈곱만치라도 기여했을까? 의로운 질문은 접어두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아련히 머릿속에서 도돌이표마냥 되풀이되는 가락은 우리가 정녕 남도사람임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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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에 기고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7. 6. 16:14

 제16회 영호남 문학인 교류 한마당 (부산, 2014.6.28.~29.)

                  by  PEN광주 박판석 부회장님, PEN부산 이영수 시인님

 

 

 

 

 

 

 

 

 

 

 

 

 

 

 

 

 

 

 

 

 

 

 

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14. 7. 6. 16:02

인류의 지적 진화와 사회의 발전 단계

무등도서관 201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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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인간에게서 물질에게로 - 실증주의에서 신자유주의까지

 

1. 무신론의 탄생

 

언어는 우리 인간이 만든 것이다. 개념들 또한 인간이 만들었다. ‘신’이란 낱말도 우리 인간이 만들었다. 그러면 이 낱말은 무엇을 지시하는가?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에서 사람들이 ‘신’ 또는 ‘신들’이라는 말로 누구를 또는 무엇을 뜻하였는가?

신은 언제나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마침내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인간이 주인이 되는 듯한 착각은 착각이었다. 이성은 이성해방의 단계에서도 이신론적인 신의 증명을 시도했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 도 영혼이 특별한 실체라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이신론자였고, 앙시앵레짐 타도의 사상적 무기가 된 『백과전서』(1751~1780)의 편집자 디드로(Denis Dideror, 1713~84)의 유물론적 무신론적 경향은 위험시 배척되었다.

인간 이성이 고개를 들고 신의 역사하심을 회의하기 시작할 때조차 신의 존재는 위대했고 그럴수록 존재 증명이 중요했다. 세계는 무수히 많은 불가분의 ‘단자(monade)’로 구성된다고 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도 예외는 아니었다. 악의 존재도 세계 전체의 선한 질서를 위해 필요한 전제라고 설명하는 그의 변신론에 따르면 도덕적 세계질서와 이 세계질서를 보장 하는 선한 신이 반드시 존재한다. 현세는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의 최고의 세계’로 간주되었다. 이 ‘모든 가능한 세계들 중의 최고의 세계’는 곧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베클린(Wilhelm Ludwig von Wekhrlin, 1739~1792)이 쓴 「에담치즈의 8층에 사는 진드기의 독백」(1784)은 웃음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 치즈의 향기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 맛은 낙원과 같구나! 얼마나 영양가 있는 음식인가! 내 집은 편안하기도 하다! 헤아릴 수 없이 온통 먹을 것으로 가득한 이 세상이여! 치즈를 만드신 그분, 우리 진드기를 위해 치즈를 창조하신 그분은 얼마나 전능하고 훌륭하신지! 우리의 존재는 그분의 의지요. 우리의 행복이 그분의 목적이다. […] 더욱이 이 치즈 세계는 가능한 한 최상의 세계다(치즈 주인은 치즈가 너무 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증명하기는 쉽다. 창조주가 더 좋은 치즈를 만들 수 있었다면 그분은 틀림없이 그것을 만드셨을 테니까. 어째서 창조주께서 완전한 것을 뒤로 미루고 평범한 것을 만드셨겠는가! […]

 

가능한 한 최선의 세계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진드기는 한 예일 뿐이다. 모든 생물이 철학을 한다고 가정하면, 그들 모두가 라이프니치 철학의 추종자가 될 것이다. 사자는 사슴을 만들어 준 창조주께 감사하고, 개구리는 메뚜기를 주신 것을 감사할 것이다. 모기는 심지어 인간을 주신 것을 감사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생물을 위해서 이 세계가 가능한 한 최선의 것일까? 분명히 모두를 위해서이다. 모든 생물이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이 세계는 특별히 인간이거나 어떤 생물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앞 강의에서 우리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도와 육체적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불과 지능을 마련했다는 신화를 들었다. 현대적 해석은 인간을 ‘결함이 있는 존재’로 이해하며, 인간의 기술적, 조직적 능력들을 인체의 열등함에 대한 보완으로 파악한다. 결론은 이 세상의 생명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다른 생명을 소모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낙원에서라면 생계유지를 위하여 이기주의자가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낙원은 없다.

 

고대와 중세의 신앙

 

돌이켜 보면 그리스 철학자들은 올림포스의 신들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인간의 작품이라고 선언하였다. 쾌락주의와 견유학파처럼 전혀 다른 행복론에서도 철저히 현세의 삶을 극복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아타락시아(ataraxia, 쾌락)’나 스토아 철학자들이 소망했던 ‘아파테이아(apatheia, 냉담)’의 상태도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태도에 대한 몰두였다.

중세의 중심사상은 현세의 삶에 대한 염려가 아닌 의 존재였다. 최고의 입법자인 신이 존재하므로 도덕적 세계질서도 마땅히 존재한다. 이런 생각이 확고했을 때 인간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은 인간의 모든 노고와 삶에서 겪을 수 있는 불행들과 마지막에 치러야할 죽음이 그 너머 내세에 있는 ‘영원한 삶’, 다시 말해서 모든 근심으로부터 해방되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통해서 보상된다고 믿음으로써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근대 이후의 종교

 

근대에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는 크게 변화하였다. 도덕과 예술이 종교로부터 분화되고, 정치, 경제, 교육 등의 사회제도에서의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신앙의 자유, 철저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대두되었다. 계몽사상과 과학의 발전이 종교의 진리성과 존재의식을 위협하고 있고, 따라서 종교비판도 활발해졌다. 종교는 끊임없이 존재 의의 자체가 문제로 제기되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철학은 전능하고 정의로운 유일자로서의 신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왜 선한 신이 악과 불행을 허락했는지 그 이유에 대해 대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덕적인 이유에서 그런 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이 신을 폐지해 버린다면, 그것이 무신론이었다.

 

● 신의 존재는 헛된 환상

신이 있다면, 나는 그 신이 되고 싶지 않다. 세상의 비극이 내 가슴을 찢을 것이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헤겔의 낭만주의 철학이 여전히 정신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동안, 과격한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9)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의 노예라고 보았다. 의지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을 결국 아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사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심적 이성이 아니라, 영원히 만족치 못하는 맹목적인 ‘생에 대한 의지’이다. 끝없는 괴로움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새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전 자연이 의지에 의해 지배된다. 이 근원적인 맹목적 의지는 자제와 동정심에 의해서 제어되지 않으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고난을 유발한다.

경험적 현상의 세계는 주관의 여러 형식(시간, 공간 및 인과의 법칙)에 의존하는 단순한 표상에 불과하고, ‘물’자체에 해당하는 것은 의지, 맹목적인 생존의지라고 본다. 무기적 자연에서 동식물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전체는 이러한 의지의 객체화와 개별화의 여러 단계일 뿐이다. 따라서 세계는 보편적으로 근거도 원리도 없고, 부단한 욕망에 쫓기어 만족할 수 없는 생은 고통이라고 했다.

 

인간이 자신의 소망들의 이상에 따라 그의 신들을 상상한 것!

구약성서에서는 신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고 말한다.(창세기 1:27) 이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시금석이다. 이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꾸로 신이 인간을 닮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의 『기독교의 본질』(1841)은 신학을 인간학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신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소망들의 이상에 따라 그의 신들을 상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멸성이란 개인의 영혼이 불멸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유적 본질이 불멸함을 의미한다는 주장 때문에 교수직을 포기한 뒤였다.

 

신은 기체로 된 척추동물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헤켈(Ernst Heinrich Haeckel, 1834~1919)은 ‘신은 기체로 된 척추동물’이라고 희화적으로 말했다. ‘생물의 개체발생은 그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생물발생법칙을 제창했고, 환경과의 관계에서의 생물학을 생태학이라고 명명한 그로서는 보이지 않는 인격신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초인의 등장을 바라노라.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가 순종과 겸손 등 노예의 도덕을 강조한다고 비판하기에 이른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쇼펜하우어에 심취했고, 그의 사상을 계승하여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 철학을 선도하게 된다.

특히 『그러므로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다』(1883~1885)는 기독교, 민주주의, 사회주의에 의한 평등권에 반발하기 위해서 쓰인 글로, 기원전 6, 7세기 최초의 종교설립자로서 ‘선’을 수단으로 하는 인간의 해탈을 설교했던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를 불러들여, 시대의 오류를 청산하는 자신의 현자를 창조했다. 산속 10년의 고독 이후 차라투스트라는 하산하여, 현세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나라를 약속한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이제 우리들은 초인의 등장을 바라노라.’ 신들이 죽었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비상을 추구해야 한다. 인간은 낙타에서 사자로 다시 아이로 비상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이고 당찬 인간, 즉 초인이 된다고 역설한다. 아이가 순수하다는 것도 기성의 가치체계를 따르지 않아 신선함이 있고 자연본성에 대해서는 절대 긍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자처럼 부정만 해서도 자유로울 수 없고 낙타처럼 맹목적 긍정만 해서도 안 된다. 사자보다 더 부정적이고 낙타보다 더 긍정적이어야 한다. 강력한 부정은 그대로 창조의 원동력이 되고 절대적 자기 긍정도 도전과 모험을 감행하게 하는 원천이다.

 

 

2. ‘물질’ 인간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기술과 산업은 점점 강하게 생활영역을 침범했다. 과학은 이전에 종교가 행했던 것과 같은 정신적 힘이 되었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 『종의 기원』(1859)에서 가르쳐준 적자생존의 법칙은 신학적 인간관의 천재지변이었다. 돌연변이에 의해 생성된 개체들은 ‘실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자연적이며 종족적인 도태를 겪는데, 이 도태가 그 종의 생활 능력을 신장한다는 것이었다. 생물로서의 인간도 유용한 것의 선택법칙에 따라 단순한 형태에서 발전해온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제 인간도 물질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음이 추론되었고, 포이어바흐를 거쳐 마르크스에 이르면서 물질주의 철학이 유포되었다. 신적 창조주와 이 세상에 내재하는 정신적 원칙에 대한 믿음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으며, 그 자리에 과학과 물질에 대한 믿음이 등장했다.

 

물질’ 인간은 분석될 대로 분석되는 대상이 되었다. 빈의 심리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1856∼1939)의 『히스테리 연구』(1895), 『꿈의 해석』(1900) 같은 저술들은 성적 충동과 공격충동이 모든 인간적인 사유와 행동을 규정하는 기본력이라는 이론을 충격적으로 유포시켰다.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자유에 대한 수세기 동안의 개념이 마침내 환상이라고 폭로되면서, 기독교와 인문주의 인간상은 파괴되었다.

 

실증주의

무신론과 더불어서 서유럽에서 형이상학적 사변을 배격하고 사실 그 자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강조하는 철학적 경향이 등장했다. 실증주의는 실증적으로 주어진 사실만을 타당하다고 하고, 모든 형이상학적 사변을 거부한다. 실증주의자들이 ‘신’은 무의미한 낱말이라고 선언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실험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대상들 가운데는 이 낱말에 부합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가상의 존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도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경험과학들은 순수한 사실의 과학으로 이해되었다.

현실의 모든 것은 물질적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구성물들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고 모든 사태가 야기되는 합법칙성들을 찾아내는 것이 과학의 임무다. 유물론 철학은 실증적인 것, 다시 말해서 물질로 주어진 것만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실증주의자들에게 ‘정신적인 것’은 그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있을 때에만 존재했다.

 

실증주의라는 말은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가였던 생시몽(Comte de Saint-Simon, 1760~1825)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근대 과학이 가져다준 실증적 지식을 인간이 도달한 최고단계의 지식으로서 역사적으로 위치 짓고, 사회현상을 실증적 방법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설명했다. 그 구상을 물려받아 실증주의를 사회학으로서 체계적으로 완성시킨 것은 제자 콩트(August Comte, 1798~1857)였다. 콩트는 『실증철학강의』(1830~1842)에서 실증주의의 핵심 내용들을 제시했고, ‘실증적’이라는 말에 현실적인, 유용한, 확실한, 정확한, 건설적인, 상대적인 등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인간의 인지(지식과 지성)를 동적 발전과정 아래 파악하여 3단계 발전설을 내놓았다. 1) 신학이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신학적 단계’, 2) 회의하는 이성의 ‘형이상학적 단계’, 3) 마침내 ‘실증적 단계’에서는 사물이나 사건의 관찰ㆍ가설ㆍ실험ㆍ추리ㆍ검증 등 근대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참된 과학적ㆍ실증적 지식이 획득된다. 이제 과학이 새로운 종교요 우상이 되었다.

 

환경론

여기에 환경론이 새로이 무게를 갖게 되었다. 인간의 행동이나 역사를 생리적이고 직접적인 환경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하여 합리적으로 설명하고자, 생물 및 인간의 구조 내지 행동에서 환경의 영향을 중요하게 보는 학설이 환경론이다. 특히 지리적 환경에 중점을 두고 인간과 역사의 영향을 강조하는 이른바 지리적 환경론의 사고방식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460?~377? BC) 등 고대 그리스부터 존재하였다. 그것이 중세의 신학적 목적론적인 세계관에 지배되어 일단 자취를 감추었다가 르네상스 이후 합리적 사고의 부흥과 함께 부활하였다.

 

● 모든 인간은 종족, 역사 그리고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콩트의 실증주의적 방법을 써서 과학적으로 환경론적 입장에서 문학을 연구한 것이 Hippolyte Taine(1828~1893)이다. 그의 환경론에 의하면 인간은 환경과 인종 내지는 유전 소양이나 (나중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사회적 여러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이다. ‘인간의 개체란 사회 속에 그리고 사회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모든 인간은 종족, 역사 그리고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며, 그 때문에 도덕적으로 완전히 책임이 있지는 않다.’

 

인간은 유전과 환경에 촉발되어 움직이는 기계

19세기 문학에 있어서도 실증주의는 절대적인 세력을 떨쳤다. 졸라 Émile Zola(1840~1902)는 베르나르(Claude Bernard, 1813~1878)의 『실험의학서설』(1865)을 본보기로 하여 『실험소설론』(1879)을 썼다. 베르나르에 따르면 실험적 방법은 ‘선천적으로 […] 어떤 개념을 실험적 연구를 근거로 성립된 해석으로 후천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제’를 갖는다. 졸라는 같은 의미에서 소설작가는 실험실의 박물학자와 같은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실험에 의해 문예작품을 제작 할 것을 선언했다. 그는 인간을 가리켜 ‘유전과 환경에 촉발되어 움직이는 기계’라 했고, 소설가란 ‘인간이란 기계’를 환경 조건 밑에서 작동시키기 위하여 그것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실험가일 뿐이었다. 이제 ‘형이상학적 인간’이 ‘동물적 인간’으로 바뀐 것이다.

졸라는 텐의 『영국문화사』(1864)의 서문에 쓰인 ‘악덕과 미덕은 다 같이 황산이나 설탕처럼 화합물이다.’라는 구절을 소설 『테레즈 라켕』(1867)의 서문에서 인용했다. 정부와 공모한 남편 살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며, 일단 소설적 성공을 거둔 그는 적나라한 인생의 해부라는 방침 하에 『루공-마카르 총서』(1871~1893)를 썼다.

 

과학적 사회주의

기독교 교리가 휴머니즘적 가치를 갖출 때만 존재 의의가 있다고 선언된 이후, 그 뒤에 남은 것은 철학에서는 유물론이었다. 포이어바흐의 기치 아래 모인 세력은 사회적 혁신세력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간학이나 도덕에 기초하여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회주의자들을 ‘공상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이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이론의 발견이 자신들의 사회주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 의식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흡수했다.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되, ‘신의 이성’도 ‘인간의 맹목적 의지’도 아닌, ‘물질적 상태’가 인간을 인도하며, 그러므로 역사란 일련의 계급투쟁일 뿐이다.(변증법적 유물론) ‘의식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의식을 규정한다.’ 물질세계 곧 경제적 상황이 본질적이며, 바로 그것이 한 시대의 사유와 이념을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에서는 사회의 물질적 생산관계와 생산력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임을 규명하고, 이데올로기나 정치는 물질적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했다. 물질은 곧 정신이다. 이제 관념론뿐 아니라 포이어바흐의 사회의식 없는 유물론적 휴머니즘까지도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옮아갔으며, 그것이 엥겔스와 쓴 『공산당 선언』(1848)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그리고 『자본론』(1867, 1885, 1894) 등에 담겨 있다.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 변증법적 및 사적 유물론의 창시자이자 국제노동자계급운동의 지도자였던 엥겔(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베를린 체류 중에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 되었고, 셸링의 신비적 철학과 헤겔의 보수적 결론, 그 관념론적 변증법의 모순을 비판했다.

엥겔스가 영국의 노동계층의 실태에 대해서 서술한 것을 보면, 탄갱과 철광산에는 4살, 5살의 어린아이들이 일했고, 노동시간은 열 시간을 훨씬 넘었다. 모든 노동자들이 24시간에서 심지어 36시간을 연속적으로 땅 밑에 있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것은 중부유럽의 임금노동자에게도 해당했다. 공장주와 자본가에게는 산업과 기술이 부의 원천이 되었지만, 반대로 급격하게 팽창하는 노동자와 무산자의 집단에게 그것은 여러 모로 빈곤과 곤궁의 원인이었다.

 

 

공리주의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독일에서는 교수가 학자이고, 프랑스에서는 대부분 교수였지만, 영국에서는 의사나 법률가 등 일반직의 대표적 학자들이 있었다.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과 친구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저명한 학자였고, 제임스 밀은 아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을 학자로 키웠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슬로건은 벤담의 제창이었다. 벤담의 저술들이 공리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정립하고 이를 법률에 적용시키기 위한 의도였다면, 윤리이론과 관련된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1863)는 공리주의의 개념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였다. 이들의 사회이론은 전통적 종교관을 경시하고 합리적인 가치관을 강조했다. 문제는 행복의 질적 양적 측량이었다. 밀은 벤담의 양적 행복에 이의를 달고, 질적 공리주의로 응수했다.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천치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취하고 불행은 피하고 싶어 하므로 대다수가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호 계약을 맺은 그런 사회를 꾸려보자는 주장이면서, 밀은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복지, 자유, 평등, 개성, 정치적 권리, 마음의 습관과 도덕성이 보장되는 방향으로 정책이 취해질 것을 주문했다. 또한 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어떤 선을 베풀기 보다는 오히려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불완전한 권리’를 주장하여, ‘소극적 정의론’을 폈다. 이러한 공리주의는 정치와 사회, 그리고 윤리적 방향설정에 기여했다. 정치에 있어서 의회민주주의, 경제에 있어서 복지체제로의 길을 마련했다.

 

실용주의

여기에 비해서 미국은 영국의 보수적인 지도와 체제를 개척적이며 창의적 방향으로 발전시켜 아메리카 정신을 창안해냈다고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가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인간의 지적인 활동이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의심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설을 생각해 내고, 그 가설을 실제로 검증해 봄으로써 문제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실천적 과정을 거쳐 문제가 해결되고 전보다 더 나은 상황을 창출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지식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 유용성을 중시하는 철학적 태도이다. 이처럼 영미의 정신사적 전통은 경험주의 - 공리주의 - 실증주의의 과정을 밟아왔다.

생물학 등을 연구하던 퍼스(Charles Sandes Peirce, 1839~1914)는 현실에 입각한 논리를 추구하다가 개념의 경험성, 현실성, 실용적 가치를 물었다. 그에 대해 미국적 철학적 해답을 내린 이가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였다.

제임스는 관념주의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과제들은 무의미한 공론에 불과하다고 배척했다. 우리에게 경험되는 현상적 사실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보며, 합리론은 순수하기는 하나 비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주지주의적 합리적 사고는 삶을 바꿀 수 없고, 일원론, 유심론, 유물론 등은 망상이며 현실적 실재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철학은 현실에 입각한 경험에서 과제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진리는 논리적인 이론 체계가 아니다. 열매가 곧 진리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값있는 무엇, 태환권이다. 생활에서 현금 구실을 할 수 있는 지식이 진리다. 철학자라면 ‘실천적 경험에 있어 그 신념의 현금가치는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실천적’이나 ‘현금가치’와 같은 용어들은 제임스를 유물론과 과학의 옹호자로 보이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철학에 실용주의를 도입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지나치게 유물론적이며 과학적이라고 그가 간주했던 시대에 오히려 신에 대한 믿음의 창문을 열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신의 존재가 과연 증명될 수 있을지 여부는 물을 필요가 없다. 단지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차이를 초래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

이러한 실용주의 철학을 가장 미국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킨 철학자는 듀이(John Dewey, 1859~1952)였다. 특히 실용주의 교육사상은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전까지는 지식은 진리이기를 바라며, 진리로서의 지식은 그 자체가 목적인 듯 생각해왔었다. 듀이는 전통을 뒤집었다.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 알기보다 행하는 것이 숨김없는 삶의 본성이다. 행동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삶이다. 보다 나은 행동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묻는다. 그 과정에서 지식이 필요할 뿐이다. 지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듀이의 철학을 도구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의 지식은 도구다. 모든 도구가 그러하듯이 그 가치는 도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의 능력, 즉 사용된 결과에 있어서 나타나는 유효성에 있는 것이다.’ - 지식은 의도하고 소망했던 목적에 접근할 때 가치를 인정받고, 그렇지 못하면 유효성과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미국의 정치와 경제, 심지어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이러한 행동주의 원칙이 크게 기여했다.

 

 

3. ‘상품’ 인간

 

자유주의 - 신자유주의

인간이 기본적으로 갈구하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이다. 자유란 다름 아닌 개인의 자유를 지칭한다. 이때 개인이란 개체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개인 주체의 개념이 없는 곳에서 자유 개념은 형성될 수 없다. 오늘날 개인은 개체로서의 인간이자 행위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영국 유물론의 창시자인 베이컨의 유물론 철학을 계승하여 체계화시킨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보다 더 다양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만큼 더 자유롭다.’는 생각에서 인간이 신체적 존재자인 한 그가 시민이든 노예이든 단지 그의 자유로움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 같은 홉스의 생각을 잇는 경험주의자들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감성적인, 정념적인 존재자로 파악하고,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음’이라고 이해했다. 오늘날 자유는 ‘무엇인가부터 벗어남’이라는 소극적 의미 외에 ‘스스로에서 비롯함’이라는 적극적인 뜻 아래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함’이라는 의미와 함께 ‘자신이 세운 법칙에 자신을 종속시킴, 곧 자율적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자유주의

자유주의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봉건적 공동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사상 및 운동인 한에서 인간의 최고의 지향점이 된다. 자유주의의 원리는 1) 보편적 인권의 원리 - 정신적·사회적 활동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원리이다. 2) 보편적 시민권의 원리 - 시민적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정치제도와 정책과 기관을 비판하고, 만들고, 고칠 수 있는 자유를 모든 사람에게 인정하는 원리이다. 로크(John Locke, 1632~1704)에게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시민의 자유를 극대화하자는 것이었다.

자유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단면에 걸쳐 자유와 윤리, 개인과 개인, 개인과 국가 사이의 팽팽한 대립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해방’이거나, ‘자유=강제의 배제’라는 입장은 자유를 중요 관점으로 내세우지만, 자유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자유에 대한 이해가 그 말을 쓰는 사람 각자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1859)에서 ‘다수의 횡포’에 의한 ‘비주류 소수’에 대해 무자비한 탄압을 경고했다. 다수는 소수에게 여론과 관습을 내세워 ‘대세에 순종’할 것을 강요한다. ‘개인의 사사로운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마침내 그 영혼까지도 통제하면서 도저히 빠져 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사회는 이런 방법을 통해 모든 사람의 성격과 개성을 사회의 어떤 한 표준에 맞게 획일화하려 한다. 자유에 관한 매우 간단명료한 하나의 원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의 예외적인 상황으로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시민, 즉, 신흥 중산계급인 부르주아를 위한 것으로, 토지귀족이나 왕권에 반대하고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상을 이상화했지만, 무교육의 빈곤한 계층의 이해와는 무관했다. 노동자에게 있어서 경제적 자유는 부자유의 강제일 뿐, 그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저임금 하에서도 일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유재산제도를 제약하고 소득의 평등화, 약자 구제, 노동자의 권리(단결권), 의무교육제도 등을 요구했다. 자유를 인격의 전면적 발전이라는 점에서 옹호하고 그것을 위한 경제적 조건을 계획경제와 복지정책에서 찾고자 했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가들은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의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였는데, -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는 1914년 8월에 끝났다.’(1919) - 그 요체는 정부가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소득평준화와 완전고용을 이룸으로써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것이다.[영국의 노동당,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신자유주의

1970년대 이후 세계적인 불황이 다가오면서 시카고학파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이론이 대두되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세계 경제가 자본주의로 통합되면서 국제적 경쟁은 가열되었고, 많은 복지국가에서 시장경제의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복지정책을 점차 감소시키는 경제 현상이 대두했다. 신자유주의는 비대화한 정부조직의 재정적자에 대한 비판으로 정부권력의 축소를 요구한다. 대표주자는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이며, 철저한 자유주의시장경제 옹호자로서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정치적·사회적 자유의 창조의 수단으로 자유시장 내에서 정부 역할은 축소되어야 한다고 했다. 프리드먼은 케인즈가 주장했던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정부지출 확대)으로 인하여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통화정책(중앙은행의 통화량 감소정책)을 촉구했다. 소비분석, 통화의 이론과 역사 그리고 안정화 정책의 복잡성에 관한 논증 등의 업적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1976)했다. 그러나 생산성, 경제적 효율성이 감소하여 경제 성장이 둔화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1930년대 영국에서 경제침체 원인과 극복 방안을 놓고 케인즈와 대결했던 하이에크(Frei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는 사회계약론에 반대하여 비계약논리를 내세우며, 외부의 힘으로 창조된 ‘인공적 질서’에 맞서서 스스로 성장한 ‘자생적 질서’를 옹호했다. 사람들의 목적이 다수이며, 그 모두가 원리상 양립할 수 없다면 갈등이 완전히 해소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선택(자유)은 불가피한 조건이다. 이처럼 비계약적 의지론에서 자유원리는 사회진보를 성취하는데 상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본 것이다. 자생적 질서가 보호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인류의 번영을 약속하는 지식의 분업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켜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역기능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재산권을 중시한다.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은 경제의 효율성과 형평성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하며, 소극적인 통화정책과 국제금융의 자유화를 통하여 안정된 경제성장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공공복지 제도의 확대는 정부의 재정을 팽창시키고, 근로의욕을 감퇴시키는 소위 ‘복지병’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일부 선진국에서 복지의 역기능을 줄이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닉슨 행정부의 경제정책, 레이거노믹스], 영국의 대처리즘은 공기업 등 일부 기업의 효율화라는 부분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미약한 성장률 속에 기업 도산과 실업률을 높였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유럽 각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해 세제 혜택 부여와 근로 조건 악화를 무릅썼다. 대기업의 합병, 기업의 해외 이전 가속화와 외국인 노동자 증가는 기업 효율성을 높이기도 했지만, 자유무역과 국제적 분업이라는 이른바 세계화나 자유화라는 용어를 동원하여 세계무역기구(WTO)나 우루과이라운드(UR) 같은 다자간 협상을 통한 시장개방의 압력이 커졌다. 결과적으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갈등을 초래했고, 빈부 격차는 무한대로 확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무한대의 경쟁, 정글의 법칙에 내던져진 것이다.

통계를 보자. 스위스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S)는 <2013 세계 부 보고서>에서 상위 1% 부자들이 전 세계 부의 46%를, 상위 10% 부자들이 86%를 보유하는 등, 부의 집중 현상이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상위 1%인 50만 명이 전체 토지의 55.2%를 소유하고 있다.(국토교통부 2013) 국제구호단체 옥스팸은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사이의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세계 최상위 부자 85명이 소유한 부가 소득 하위 절반에 달하는 35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다. 세계 부자 상위 1%의 재산은 전 세계 최빈층 절반의 재산을 더한 것보다 무려 65배나 많은 규모다.

오늘날 세계화의 추세는 국가 간 상호 의존과 협력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국민국가의 자율성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국가 내부에서도 다원화와 지방자치, 분권화 경향은 주권의 대내적 최고성에 대한 의미의 재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올림픽의 후발 주자로서 선발 주자들의 성공을 과신하고 실패를 외면하면서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

 

● 일단 내가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다 보니……

  ‘일단 내가 우리 회사의 주력 상품이다 보니 평소 과잉보호가 있어서 나도 사실 신경이 많이 쓰였었고…….’(동아, 2014.3.28)

 

이것은 최근 어느 날 스타 OOO의 반성문 중에서 옮긴 말이다. 데뷔 5년 째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탤런트인 그(녀)가 공항에서 선물을 들이미는 팬에게 서운한 대접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서 공식 팬카페에 반성문을 올렸다. 다행이다. 문제는 자신을 ‘회사의 주력 상품’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성공을 해보았자 값나가는 상품에 불과하다. 성공하지 못하면 불량 상품에 그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임금노동자를 옥죄는 ‘보이지 않은 수갑’이 되어버렸다.(패럴먼 Michael Perelman) 개인은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적 이익과 경제적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국부론』(1776)에서의 주장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막강 이론으로 자본주의를 지원해왔다. 이제 시장만능주의자들의 시장에서 선한 보이지 않은 손은 없다. 노동과 노동자는 상품에 과정으로 참여해있는 부품에 불과하고, 그가 임금을 소비하는 소비자일 때만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상품이면서 상품을 소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4. 미래의 길

 

● 새로운 돈의 우상숭배에 반대함

프란체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2013)에서 새로운 돈의 우상숭배에 반대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상황의 한 가지 원인은 우리가 우리들 자신에게나 사회에 미치는 돈의 지배를 조용히 받아들인 이래 우리가 돈에 대해 지니고 있는 관계에서 엿볼 수 있다. 현재의 재정위기는 기 제기된 인간 위기 - 인간 인격의 최고성의 부인이라고 하는 - 안에서 발원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게 한다. 우리는 새로운 우상을 창조했다. 태고의 금송아지 숭배(출애굽기 32:1-35)는 진실로 인간적인 목적을 결여한 돈의 우상숭배와 비인간적인 경제의 독재에서 새롭고 무자비한 외형으로 돌아왔다. 재정과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범세계적인 위기는 순전히 그것들의 불균형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를 위한 관심의 결여에 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필요, 소비의 단위로 축소되었다.’

‘소수의 소득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반면에 그 행복한 소수가 누리는 번영으로부터 다수를 가르는 격차는 마찬가지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이 불균형은 시장과 재정 투기의 절대적 자주권을 방어하는 이데올로기의 결과이다. […] 새로운 독재가 그렇게 탄생했다, 보이지 않게 때로는 보이게, 일방적으로 가차없이 자신의 법과 규칙을 도입하여 시행하는 독재가. 빚과 이익의 누적은 각 나라들로 하여금 자신들 고유의 경제의 잠재성을 인식하기 어렵게 만들고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진정한 구매력을 즐기지 못하게 한다.’

 

치유는 가능한가. 어떠한 방식으로 가능한가. 교황은 ‘교회는 야전병원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부상자들을 돌보는 것이다. 피 흘리는 사람에게 콜레스테롤 수치를 묻지 않는다.’ 라고 대답했다.(타임, 2013.12.23.)

 

공정무역

지구상 어느 한 곳에서 콜레스테롤 수치에 연연하고, 한국에서처럼 성형수술이라는 ‘미의 열풍에 휘몰린’(BBC, 2005.2.3.) 동안, 다른 여러 곳에서 열악한 노동조건 하에서 노동자들이 숨져간다. 방글라데시에서는 2012년 11월에 의류 공장 화재로 112명이 사망했고, 이어 2013년 4월에는 8층짜리 의류공장 건물이 무너져 1,129명이 사망했다. 다국적 의류업체들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피해자와 가족을 지원하는 방안도 협의했고, 상당수 유럽계 의류업체들은 피해자와 가족에 대한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월마트, 시어스, 칠드런스 플레이스 등 미국계 업체들은 지원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한다.(연합뉴스, 2013.11.24.)

이런 것을 구하자는 운동이 공정무역 운동이다. 국가 간에 이뤄지는 무역에서 불공정무역행위를 규제하여 상호 간에 동등한 입장에서 교역을 한다는 것이 공정무역의 기본원칙이다. 다국적기업들이 정작 커피와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등을 제3세계와 같은 저개발국가들에게서 제공받지만,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낮은 임금만을 지급하고 있(었)다. 공정무역은 직접 제품 생산에 기여한 이들이 가져야 할 몫을 다국적기업들이 가로채고 있다는 인식이 나타난 1950년대부터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커피ㆍ초콜릿ㆍ설탕ㆍ수공예품 등이 대표적인데, 공정무역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에 대한 기회 제공, 투명성 및 신뢰 확보, 공정한 가격 지불, 성 평등, 건강한 노동환경 제공, 친환경 등을 원칙으로 한다. 2000년대에 시작된 우리나라의 공정무역 운동은 아름다운가게, 에코생활협동조합, 두레생활협동조합, 한국YMCA, iCOOP생협연합회, 페어트레이드코리아 등 10여 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아울러 ‘윤리적(착한) 소비’소비라는 개념은 공정무역운동을 포함한 소비자운동의 일환으로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자연환경에 해를 끼치는 상품은 사지 않고, 공정무역에 의한 상품을 구입하는 것을 뜻한다.

 

기아 근절

공정무역은 절대적 기아를 구하자는 운동이기도 하다. 말리는 면화를, 세네갈은 땅콩을 수출하고, 아프리카 최빈국 에티오피아는 커피를 수출한다. 하지만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하루 평균임금이 1달러도 안 된다. 커피농장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아무리 높게 잡더라도 소비자 가격의 1%도 되지 않는다. 한국은 식량주권을 획득한 나라이지만, 유엔 194개 주권국 가운데 121개국은 식량주권이 없다고 한다. 지글러(Jean Ziegler) 제네바대학 교수는 오늘날의 기아를 일상적 대량학살이라 했고, 이 문제의 핵심이 초국가적 기업들 간의 경쟁에 있다고 집어냈다. 유엔식량기구(FAO) 발표에 의하면 오늘날의 농업시스템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일일 성인 기준 2200칼로리로 계산해서 120억 인구가 먹고살 수 있는 양인데 - 식량이 남아도는데 - 매일 기아로 5만7000명이 죽고 세계 71억 인구 중에서 8억4200만 명이 기아상태라고 한다. 기아로 죽는 사람은 암살당하는 것이고, 살인자는 동족을 잡아먹는 식인적인 세계 질서다.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결코 문명이 없어서, 열등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훌륭한 농부였고 가정을 책임져온 부모들이었다. 다국적기업에 의해 산업화된 농토에서는 식량을 생산하지 못하고 비싸게 수입된 식량을 구할 돈이 없는 것이다. 기아는 인간의 탐욕이 만든 시스템의 희생자일 뿐이다.

 

미래?

식량주권이 확보되었다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행복도는 높지 않다. 유럽 신경제재단(NEF)의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143개국 중 68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2년 36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행복지수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하위권인 24위를 차지했다. 세계적 자유방임시장경제의 틀 안에 갇혀있는 한,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한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것은 삶의 ‘희소성(인위적 결핍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와 욕망의 경계를 망각한 인식의 오류와 가치의 혼돈에 있다.(식량이 남아도는데 아사자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는 공부를 경쟁적으로 많이 한다.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함이라고 착각한다. 미국의 문명평론가 토플러(Alvin Toffler, 1928~ )는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된 형태의 정보화 사회를 일컬어 ‘제3의 물결’이라고 정의 내렸다. 『제3의 물결』(1980)에서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은 수천 년에 걸쳐 진행되었고,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은 300년 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제3의 물결인 정보화혁명은 20~30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제 우리는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는 『부의 미래』(2006) 에서 부와 혁명을 촉발하는 세 핵심적 원동력으로 시간, 공간과 더불어 지식을 말했다. 그러나 지식은 어느 시점에서 ‘쓸모없는 지식(obsoledge)’이 된다. 제4의 물결인 지식혁명에 미래를 건다. 토플러의 미래 프랙토피아(practopia)는 적극적이고 도달 가능한 세계이다. 변화의 속도를 따르되, 무용지식을 버려야 도달할 수 있는 세계이다.

 

우리는 일을 너무 많이 한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긴 수준이다. 스위스의 노동시간이 1,636시간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다. 노동시간은 삶을 위한 정도로 규제되어 마땅하다. 생명과 안전 그리고 환경 관련 규제는 강화되어도 모자라다. 필립 제닝스 국제사무직노조연합(UNI) 사무총장은 ‘규제완화가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올드 버전이며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친다. […] 규제 완화가 아니라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봉건 피라미드 위에 신 대신 돈이 자리한 시대에 상대적 박탈감은 절대빈곤 못지않게 사람을 절망하게 한다. 인구 10만 명 당 33명,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연속 8년간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 -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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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도서:

- 레슬리 스티븐슨 외, 박중서 옮김,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갈라파고스 2006.

- 빌헬름 바이셰델, 안인희 옮김, 『철학의 에스프레소』, 프라하 2011.

-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정명진 옮김, 청미래 2011.

- 이와타 야오스, 서주지 옮김, 『유럽사상사 산책』, 옥당 2014.

 

 

 

 

Posted by 서용좌
강연-강좌2014. 7. 6. 15:49

인류의 지적 진화와 사회의 발전 단계

무등도서관 2014.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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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 인문주의와 계몽주의의 발흥

 

1. 고대 그리스‧로마의 헬레니즘

 

호모 사피엔스 - 이 말은 고인류를 분류할 때 사용하는 명칭으로, 현생 인류를 ‘생각하는 사람’ 또는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있다고 하는 인간관이다. 인간에게 특질적인 것은 언어와 사고(사유)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한 인식의 한계는 유한성의 인식에 있었다. 이 지식, 인간의 절대적 유한성을 초극하고자 하는 열망이 어느 문화에서나 상대적 무한성이라는 개념으로 정착한 것이 초월적 존재이다. 유사 이래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를 열망해왔다. 그 초월적 권능의 존재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 종교 - 신과 인간의 결합 내지 교감으로서의 종교가 발생했다. 서양의 원류, 고대 그리스에서 도시 수호신의 숭배는 중심 문화의 하나였다.

에게 문명(3650~1100 BC)을 이루어낸 그리스 신화도 다른 민족의 신화들처럼 많은 초자연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미토스(mythos: 이야기)에서 신들의 이야기나 영웅전설 등을 이야기했다.

기원전 7세기에 헤시오도스(Hesiodos)의 『신통기』는 세계의 시초를 제일 먼저 질서정연하게 서술한 작품이었다. 만물은 자연히 이루어져 각기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들도 인간처럼 나중에 생겨난 것이었다. 주신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의 신화가 탄생한 것이다. 인류의 시초는 신들과 마찬가지로 가이아[대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들과 동족이라는 생각이었다.

동물과 인간의 창조 신화가 있다. 에피메테우스가 각 생물들에게 저마다의 특성을 부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맹수들에게는 강한 이빨과 발톱을, 약한 동물들에게는 다양한 의사소통과 온갖 도주의 능력들을 주었다. 인간의 차례가 되었을 때는 남은 것이 없었다. 인간은 벌거숭이에다가 허약한 채로 남겨졌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도와 육체적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지능을 마련해주었다. 물론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네가 관장하던 기술의 능력과 불, 그리고 제우스의 정치술을 신들로부터 훔쳐 인간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스 신화의 대부분은 신들의 자손인 영웅들의 이야기였다. 황금양털에 얽힌 이아손의 이야기, 오이디푸스왕(王)의 기구한 운명, 트로이 전설 등은 가장 총애받는 아이템이었고,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800∼750 BC)가 복합적으로 탄생했다.

 

이어서 그리스 비극 시인들이 나타났다. 비극은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아테네에서 시작된 디오니소스 축제의 연극 경연대회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던 합창이 변형되어 연극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스킬로스(Aeschylos, 525~456 BC)의 경우는 ‘오레스테스 3부작’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정념의 가공할 작용을 주제로 하며 특히 여성심리 묘사에 뛰어났던 에우리피데스 Euripides(484?~406? BC), 그리고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니고 국가에 공헌했던 소포클레스(Sophokles, 496~406 BC)의 『안티고네』 등은 현대극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무엇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공연이 고대 문화의 꽃이었다. 작품 속의 세계관에서 자연과 인간과 신은 같은 질서 속에서 관계를 이룬다. 절대적인 질서는 운명이고, 운명의 종말은 비극이다.

 

철학의 탄생: 자연 연구 - 자연을 따라서

 

신의 계보를 정리하고, 신화 속의 정신과 사상을 통해 공통

된 세계관을 얻어보고자 한 의미에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이미 신화와 철학의 중간에 와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세계와 만물의 현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부른다면 과제는 자연 연구였다. 인간은 자연을 따라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와 만물의 원질(arehé)은 무엇인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탈레스(Thales, BC 6세기)였다. 그의 결론은 이 원질은 ‘물’이라는 것이었다. 답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8~524 BC)는 지구는 둥글다는 생각을 했다. 만물의 원질은 프시케(Psyché, 숨, 호흡, 공기, 영혼, 생명)라고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490~430 BC)는 그것이 불, 물, 땅, 공기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생각은 소박한 실재론으로, 그들에게 철학의 과제는 자연을 연구하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C)는 백과전서적인 박학자로, 동일하면서도 불가분, 불변적인 자립성을 갖는 물질의 단위 ‘아토마(atoma)’를 상정했다. 아토마는 형, 배열, 위치에 따라 서로 구별될 뿐이라 했다. 이는 이후의 물리학 상의 ‘원자’에 해당한다.

 

형이상학 - 자연을 넘어서

 

형이상학은 자연학(천문, 기상, 동식물, 심리 등에 관한 연구)을 넘어서 관념적 사유로서의 학문이 된다. 형이상학은 사물의 본질, 눈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 없는 것, 초경험적인 것을 직관으로 탐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동양적으로 말하자면 기(器)에 대해 도(道)에 대한 학문이라 하겠다.

에게 해의 섬 사모스에서 심오한 종교성과 음악에 심취했던 피타고라스(Pythagoras, 572~495 BC)는 무엇이 만물의 원질인가에 대한 물음보다 어떤 원리와 법칙에서 존재하는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했다. 수학자답게 그는 세계의 원리와 질서는 수의 조화법칙에 의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조화의 질서가 생활과 세계의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윤리적 스승이었다.

그 이후 엘레아(이탈리아) 학파에 속하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 500년 경)는 감각 세계, 변화, 유전하는 만물은 지식의 대상도, 학문과 진리의 내용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존재는 그 본질로서 자기동일성인 것이다. 이렇게 본질의 불변의 실재성을 주장하여, 이어 플라톤의 이데아, 즉 관념적 논리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와는 다르게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C)는 우주의 만물을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로고스(logos)는 오직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사물과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본질이란 사유의 조작에 불과하며, 만물은 쉴 새 없이 유전한다고 생각했다. 동일성 대신 모순이 만물의 변화와 생성을 가능하게 하며, 특히 절대적인 진리란 없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일 뿐이라고 간주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없다는 회의적 가치관은 후일 헤겔을 위시한 변증론의 기초를 놓았다고 간주된다. 이렇게 해서 관념론과 실재론의 기나 긴 싸움의 시대가 열렸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소피스트의 등장

소피스트란 흔히 궤변론자라고 하는데, 소피아는 ‘지혜’이므로,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사람’이란 의미였다. 이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토양 속에서 변론술과 출세의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이었다.

궤변의 금메달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2~411 BC)에게 수여되어 마땅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이다. 이 명제는 철학과 학문의 주체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정향한 인간 표준론이자, 지식과 진리는 상대적일 뿐이라는 진리 상대주의를 드러냄으로써 학문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소피스트들은 우리가 간단히 알고 있듯이 단순히 궤변론자들이 아니었다. 소피스트들에 의해 인간은 역사의 주관자로 작동할 수 있었으니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한 마디에 이 철학의 핵심이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제우스도 아니고, 헤라도 아니며, 헤라클레스도 아닌 인간이 만물의 척도요, 따라서 개별적 인간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는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소피스트들의 주장은 역사 속에서 인간 해방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트의 진행은 허무주의로 귀결되었다. 고르기아스(Gorgias, ? ~380 BC)는 보편적인 덕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개별적인 덕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해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파악할 수 있다고 해도 말로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극도의 허무를 가르쳤다.

 

너 자신을 알라. - 그리스 철학의 정점

극도의 회의주의 속에서 ‘참 지혜와 진리로 이끌어 주는 스승’이 아테네의 철학을 꽃피우게 되었다.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 BC)는 자연 연구에 몰두해있던 철학을 인간성찰의 방향으로 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간의 사고와 가장 가까운 개념은 이성이다. 이성을 통한 진리로의 길은 대화와 토론, 즉 사유의 변증법이다.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어진 확실한 개념의 상태가 공통성이자 보편성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것은 신전에 쓰인 글이었다고 한다. 그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지’를 강조했다. ‘나는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고 있다.’의 상태가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아는 것이 선의 출발’이라고 믿었던 그는 ‘도덕적 신’을 강조하여 신화의 주인공들을 배제함으로써 종교계에 피해를 입혔다.

 

● 현실 세계는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

이상주의의 대명사 플라톤(Platon, 428~347 BC)은 20대에 소크라테스 수학했고, 최초의 자유대학에 해당하는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삼각형은 많다, 원형은 근본적으로 하나다. 정의의 상황과 모습은 여러 개다. 이상적인 정의의 원 모습은 하나다.’ - 이것이 이데아의 출발점이었다.

동굴 안에서 평생 그림자만 쳐다보고 살아 온 사람들의 비유에서, 동굴 안의 눈에 보이는 것이 현상 세계요, 동굴 밖은 지성으로 알 수 있는 실재 세계이다. 즉, 현실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데아 중에 최고의 이데아는 선의 이데아이다. 현상의 세계는 변함으로 참다운 세계가 아니고 이데아만이 변하지 않는 절대 이성의 참된 세계이다.

모든 인간의 의지와 행위는 선의 이데아에 의하여 지배되는 ‘참 실재’의 세계를 목적삼고 있다. 즉,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감성계의 경험적 존재를 목적삼지 않고, 세계 전체의 최고이상의 의미와 목적을 뜻한다. 현인은 영혼의 순화에 의하여 감성계를 벗어나 영혼의 실재화와 이데아 계를 바라는 철학적 진리를 직관코자 한다. 정의 사회, 즉 이상 국가는 4주덕[지혜, 용기, 절제, 정의]이 실현된 상태에 가능하다. 인격과 지혜를 갖춘 철인(철학자)이 통치자가 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기 본분에 해당하는 덕을 발휘하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룰 때 정의로운 국가인 이상 국가가 된다.

 

●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이며, 선으로 가는 과정에 덕이 있다.

필리포스 2세 주치의를 부친으로 두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3~322 BC)는 20년간 플라톤에게서 수학했고,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기도 했다. 아테네 돌아와 소요학파를 이루었는데, 이데아의 실재성을 의심한 점에서 플라톤과 구별되었다. 경험과학적 사유를 통해, 존재하는 것은 현실세계 뿐, 학문적 대상이 되는 것도 현실계라고 생각했다. 이데아는 존재의 ‘원형’[플라톤]이 아니라 현실사물의 형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목적을 가졌는데,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덕을 쌓아야 하는데 이성에 알맞은 덕스러운 활동을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보았다. 윤리사상의 핵심은 ‘참다운 행복이 진정한 선’이라는 입장이었다.

방법론으로서 중용의 덕을 찬미했다. 중용은 지나치거나 부족함이 없는 상태이다. ‘오만 / 긍지/ 비굴’이나 ‘아첨/ 친절 / 퉁명’은 각각 ‘지나침 / 중용 / 부족함’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시대

 

헬레니즘(Hellenism)은 그리스인을 의미하는 ‘헬렌(Hellēn)’이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그리스 문화를 말한다. 굳이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를 때는 헬레니즘이 그리스 안에서 밖을 향해 전파되어 세계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던 시대를 이른다. 이 기간 동안에 그리스인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등 예전의 페르시아제국의 영토 전역을 포괄하는 지역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그 문화는 후일의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성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철학으로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회의학파 등이 나타났지만 공통점은 무사안일을 지향하는 개인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다. 밖으로부터 오는 장애에 극도로 민감했고 자기의 내면에 파묻혀 욕망을 최소한도로 줄이려 하였다. 빵과 물만 있으면 제우스와 부를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은둔주의를 내세운 에피쿠로스(Epikuros, 342?~271 BC)는 이 방면의 전형적인 현자였다. 안티테네스(Antisthenes, 4세기 초)가 창설한 견유학파역시 참 행복은 외부에서 주는 세속적 관심을 떠나 정신적 단순성과 정직한 노동에서 얻어진다고 믿었다. 덕은 행복의 원천이요, 덕에 따른 행위는 무욕과 자기억제를 전제로한다. 내면적 자기만족과 정신적인 자유를 행복으로 간주하여, 윤리적 귀착점은 자연상태로의 복귀이므로, 무욕, 현실과 가정 및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소외성, 반문명, 현실회피, 기성사상 절연을 목표로 한다. 디오게네스(Diogenes, ? ~ 323? BC)는 ‘쾌락에 속하기보다는 차라리 광인이 되겠다.’는 말로써 극단의 청빈과 무욕을 선언했다.

 

스토아철학

이 시기에 동양의 도학정신과도 상통하는 스토아철학(BC 4~2세기)이 이성주의의 기치로서 윤리적 인생관을 펼쳤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견유학파를 계승한 이들의 세계관의 근거는 자연이었다. 자연은 로고스(세계를 합목적으로 지배하는 법칙)와 일치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로고스적인 질서의 특수성을 부여받았다. 그것이 이성이고, 인간 이성은 자연의 로고스와 통하며 자연의 질서는 인간적 사유와 삶의 기반을 만든다. 욕망, 격정 등 자기보존의 본능을 극복하여야만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자연에 따른 생활이고 아파테이아(apatheia, 냉담)라고 불리는 현자의 생활이다.

 

로마 시대

기원전 700년 티베르 강변에서인구 1000명의 농촌 마을로 시작된 로마의 팽창은 헬레니즘 강대국들과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착실하게 세력을 넓혀갔고, 기원전 270년경에는 이탈리아 반도 거의 전부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헬레니즘 세계를 장악하거나, 그 영향권 아래 두게 되었다.

로마의 속주가 된 이후 그리스는 독립과 자유를 상실한 대가로 평화를 유지하며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 시대가 계속된다. 신흥국 로마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이었지만, 철학의 빈곤으로 아테네의 철학, 예술, 사상이 그대로 유입되었다. 로마인들은 지중해 지역과 유럽에 그리스 문화를 발전하여 퍼뜨렸고, 고대 그리스 문명은 언어, 정치, 교육 제도, 철학, 과학, 예술에 크나큰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옥타비아누스가 제정을 시작한 기원전 27년 이후 200년 동안 로마 세계는 국내외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을 ‘팍스 로마나’라 한다.

초기 로마에서는 네로황제의 스승이었지만 그에게 자살을 강요당한 세네카(Seneca, 4 BC~ 65 AD)가 군주아래에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여, 제정체제의 이념적 좌표를 마련했다.

달은 차면 기울듯이 로마 또한 기울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는 전통의 다신교 대신 기독교를 로마의 사실상의 국교로 정립했고, 전통의 로마 대신 비잔티움, 즉 콘스탄티노플을 제국의 새로운 중심지로 세웠다. 그때부터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나뉜 제국은 다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였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 435~493)에 의해 멸망했다. 헬레니즘 문화는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세력을 잃어갔다.

 

 

2. 중세의 헤브라이즘

 

기독교의 융성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고대의 막이 내리고, 1000년을 계속할 중세(476~1453)가 시작된다. 5현제(96~180) 시대에 벌써 신흥 기독교는 100년 경 순교의 극치를 이루면서 성장해갔다. 이 제국에서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의한 기독교 승인은 문화적인 대변혁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헤브라이즘 문화로 바뀌는 계기가 되고, 기독교는 국교로 정해졌다.(394년) 또한 민족대이동(4세기 말~ 6세기 말) 시기에 게르만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유럽역사의 신기원인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게르만족이 이룬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는 서부, 중부유럽의 대부분으로 영토를 넓혔고, 이탈리아까지 정복하여 800년 교황 레오 3세에게 비잔티움제국과 대비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직을 수여 받았으며, 황제가 된 후 교회를 통해 예술, 종교,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비잔티움제국에 헬레니즘이 잔류하고 있는 동안, 신성로마제국에서는 기독교의 문화, 즉 헤브라이즘의 꽃이 핀 것이다.

 

헤브라이즘(Hebraism)의 원형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 즉 구약성서에 기초한 유대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기반을 둔 현세부정의 사상이다. 고대의 시대에는 타계 관념은 있었어도 현세의 가치는 부정되지 않았는데, 이 시기의 종교는 인간은 영원히 이 세상에 전생하며 고통을 경험하여야만 된다든지, 타고난 죄(원죄)의 관념 등을 가르쳤다. 헤브라이즘은 신에 대한 복종과 윤리적 행동을 위하여 다른 모든 이상들을 포기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헤브라이즘의 본질은 ‘양심의 엄격함’으로 규정된다.(매튜 아놀드) 헤브라이즘의 중심에는 절대자인 신이 존재하며 신은 언제나 도덕적인 존재로 상정된다.

 

유대교는 고대 이스라엘 왕조가 바빌론 유수(597~538 BC) 후 모세의 율법을 근간으로 하여 정립된 것이고, 다른 뿌리로는 고난의 종복이 구제받는 구제관이 강해지고 나사렛 예수에 의해 구제가 실현되었다는 믿음이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의 전통과 깊은 관계에서 출발하여 그 형성기에 헬레니즘과 접촉하면서 이에 영향을 받아 이론적 · 철학적 성격을 얻게 되고, 이른바 기독교 신학을 형성하였다.

 

중세의 세계상은 기독교와 봉건제도의 두 축으로 안정되어 폐쇄 응집된 계급으로 분류된 조화된(것처럼 보이는) 질서의 상을 보여준다. 신은 존재의 피라미드에서 최정상이며, 최고의 존재하는 자, 모든 사물의 최초의 운동자이다. 모든 제한, 예외, 이단운동 같은 경계현상을 포함해서 지상적인 것은 최종 목적으로서의 신적인 표상에 따라 정돈된다.

창조의 핵으로서 인간은 정신적-영적이자 선한 세계와 물질적이자 악한 세계를 연결하는 부분이다. 인간은 선과 악, 신과 악마, 구원과 원죄 사이에서 투쟁하는 현신이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 또한 신의 창조물이며, 신에 의해 영도된다. 역사는 구세사이며, 낙원의 추방에서 시작되어 최후의 심판일까지 계속되며, 그 이후에 비로소 신의 왕국이 이 땅에 도래할 것이다. 왕국들과 황제국은 신의 왕국이 우선 지상에서 잠정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이해된다. 개개인은 이 신의 질서 속의 작은 한 부분이며, 그에게는 이 질서 속에 특정한 확고부동한 자리가 점지되어 있다. 개인은 ― 오늘날 현대에서와는 반대로 ― 결코 개인이라고 느끼지 않으며,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느낀다.

 

●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카르타고 출신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50~222)는 기독교 신앙은 이성을 포함하고도 초월하는 신앙적 계시에 의한 것이므로, 때로는 초이성적이며 반이성적 진리적 인식을 호소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명제로, 예루살렘과 아테네는 다른 차원임을, 신앙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어떤 평신도도 플라톤 보다 우위에 있다, 신앙은 철학을 포함하며, 계시는 이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고대와 중세의 인간관에 현저한 차이가 발생했다. 고대 헬레니즘에서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영육의 구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세 기독교의 인간은 영은 신에게 육체는 자연물질에 속하는 양분법으로 나뉘었다. 육에 이르는 길은 타락의 길이며 죄의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생각하여 신학교를 중심으로 금욕주의가 발생했다.

최초의 신학원(교리학교)이 180년 경 알렉산드리아에 설립되었다. 알렉산드리아 신학원의 클레멘스(Clemens, 150~211)는 이교도로서 그리스 철학을 섭렵한 뒤에 기독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의 철학적 이해와 인식을 위해서 플라톤이나 스토아 철학적 방법을 도입했다. 신의 뜻은 유대인에게는 율법으로, 그리스인에게는 철학으로 나타났는데, 둘이 완성된 것이 그리스도의 진리이라고 생각했다.

 

클레멘스를 이은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스스로 거세한 금욕주의자로 신을 향한 인간의 질서에 관해 깊이 사색했다. 세계는 신의 피조물이고, 신은 만물의 영원한 근원, 영원, 불변, 전능, 전지이다. 피조물은 완전자에 대한 동경을 갖는데, 그것이 신앙의 원천이고, 구원에의 갈망이다. 주어진 자유를 오용하여 태만과 과오, 타락의 시계로 떨어진 인간의 지상의 삶은 훈련과 징계의 연속이므로 세속적인 욕망, 결혼, 병역, 관직 등을 버리고 초연한 신과의 일치와 안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교육했다.

 

● 신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 진정한 자유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이자 가장 영향력을 가졌던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뒤늦게 기독교에 귀의하여 고대철학을 극복하고 중세철학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신앙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 신앙이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신학과 철학, 그리고 신학과 일반 학문을 함께 연구하는 중세의 스콜라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신학적 공헌은 은총론으로, 세계는 신의 이데아에 따라 그 의지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원죄를 짊어진 인간은 악을 행하는 자유를 가지되, 구원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며 교회가 이 은총을 매개한다.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가는 신의 영원한 예정에 의한 것이라는 예정설을 세웠다. 그의 결론은 『고백록』(400년)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너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부야말로 진리가 머무는 집이다.’ ‘믿으라, 그러면 인식하리라.’ ‘믿기 위하여 인식하라.’라고 가르쳤다. 인식보다는 진리 자체가 중요하고, 윤리보다 신앙적 구원이 절실한 것이었다.

 

스콜라철학

중세 전반부는 교부철학의 시대라고 한다면, 9세기경에는 교단과 신학원(대학)에서 스콜라철학의 융성을 보게 된다.

 

●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

캔터베리 대주교 안젤무스 (Anselmus, 1033~1109)는 신은 실재이며 완전한 보편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스콜라철학의 본질과 위상, 신의 존재에 관한 본체론적 증명을 시도했다. ‘존재가 있는 이상 최고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최고가 아닌 존재는 최고의 존재에 그 존재성을 의뢰한다. 최고의 존재는 스스로의 본질에 의뢰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고가 되지 못하는 때문이다. 즉, 최고의 존재인 신의 본질은 그 존재성을 포함한다.’ 즉, 본질이 실재를 포함한다는 입장이었다. ‘신이 만일 형이상학적 존재를 가기지 않고 의식 내용에 그친다면, 형이상학적 준재와 의식 내용을 아울러 가지는 자는 신보다도 완전한 것이 되며, 따라서 신의 최고 완전성과 모순된다. 그러므로 신은 형이상학적 존재도 가진다.’

 

프란체스코 교단

영국 출생으로 프란체스코 교단의 창시자였던 알렉산더(Alexander, ? ~1245)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교회철학으로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그에게 스콜라철학의 특징은 ‘범론(summa)’ 즉, 많은 저서를 통해 학자로서 인정받는 관습이었다. 현대적 의미로 논문의 형식이라 할 수 있게, 신학 및 철학적 문제를 제시하고, 답은 성서나 교부들의 말에서 전승되거나, 철학자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서 인용되어야 한다. 마지막은 자신의 생각으로 결론짓는다는 것이다.

 

도미니크 교단

프란체스코 교단이 신앙생활에 더 큰 뜻을 두었다면 도미니크 교단은 학문연구에 더욱 몰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인 알베르투스(Abertus Magnus, 1206~1280)는 ‘보편적 학자(Doctor Universalis)’답게 모든 것을 인용했고, 자연은 아리스토텔레스, 신앙은 아우구스티누스, 의학은 히포크라테스 의존하면 된다고 말했다.

경험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동식물과 광물계의 관찰과 천문학적 연구를 하였는데, 이 영역에서는 경험만이 확실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관찰 결과에 근거하여 주저 없이 정정하면서도, 교육을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학문, 즉, 철학이 불가결하며 이 같은 세속적 학문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선의 교사라고 확신하였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나폴리 귀족 가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기독교 신학과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여 스콜라철학을 대성했다. 근본 사상은 이성과 신앙, 철학과 신학은 엄밀히 구별되지만, 이것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 신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필연적인 조화라고 생각하였다. 철학과 신학의 조화에서 신학은 내용, 철학은 방법이 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인 한에서 진실한 것이다.

또한 자연이 은총에 의해 버림을 받지 않고 완성되는 것처럼, 자연적 이성은 신앙의 전단계로 신앙에 봉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신앙과 이성(은총과 자연의 빛)을 조화시키는 데에 있어 이성에 의해,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며 종교적 진리에 대한 반대를 논박할 수 있다. ‘보편은 개체 중에 존재한다.’는 확신에서 이성과 신앙의 통일을 주장하게에 되었음은 중세신앙의 중요한 변화의 전기가 되었다.

 

● 영혼의 불꽃

다음 세기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1260~1327)는 도미니크교단 소속이었지만 정통 기독교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바꾸어 놓은, 신비학의 창시자에 해당한다. 신비적 체험을 설교하되, 그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합일을 설교하는 정감어린 것이 아니라 지적이며 사변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영혼의 불꽃’이란 개념이다. 사람이 순수하게 신을 생각하고 자기를 벗겨 버리면 마침내 신이 항상 마음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영혼의 근저에 있어서의 신(신의 자식)의 탄생’이다.

완전히 개성적인 것을 향하는 경향 때문에 신비주의적 경건성은 점차 루터의 종교개혁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종교 자체가 전통적인 신앙에서 이탈되었다는 것은 중세의 종말을 의미하며 무신론에의 길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들은 또한 인문주의자들로서 르네상스시대에도 활동한다.

 

 

3.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계몽주의

 

인문주의(Humanism)의 어의는 다양하며, 인간주의, 인본주의, 인도주의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넓은 의미로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인간 또는 인간에 관한 것에서 가장 중시하는 정신태도’로 정의된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특정의 체계적 사상을 가리키기보다도 오히려 인간을 존중하는 윤리적 태도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특히 개별 인간의 이해와 가치 그리고 위엄을 지향하는 철학이자 세계관이다. 관대함,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양심의 자유 등이 인간 공동생활의 중요한 원칙으로 간주된다. 일반적 의미에서는 휴머니즘이라고 하고, 좁은 의미의 역사적 개념을 말할 때는 인문주의라고 한다. 특히 15세기의 이탈리아를 정점으로써 개화한 서구 르네상스와 관련하여 르네상스 인문주의라고도 한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유럽 공통의 문화시대를 지칭한다. 프랑스어로서 ‘재탄생’을 의미하며, 재생이란 한 번 사멸한 고대 문화가 그 시대에 소생한 것을 의미했다. 넓게는 고대의 문화적 재생, 예술과 사상의 재활이라는 범 유럽적 운동을 지칭한다. 특징은 인간 긍정의 지적운동으로, 고대의 재발견과 중세적 정신형태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한다. 그것은 지상적 인간의 활동과 인격을 재평가한다는 의미였다. 중세적인 세계상과 인간상을 극복하고, 전래(고전시대)의 국가질서와 사회질서를 극복한다는 것은 전권신앙의 자리에 비판적인 연구의 정신이 자리하고, 인간은 모든 사물의 척도가 되며, 국가의 이성이 정치의 원칙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단적으로는 인문주의 정신에서 고전적인 고대가 재탄생한다는 뜻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핵심에는 휴머니타스 연구의 정신이 존재한다. 이는 고전적 인간교양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고전 고대의 문학적 연구라는 측면과 보다 좋은 인간을 형성하기 위한 지식추구라는 측면을 겸비하고 있다. 휴머니타스 연구는 과거의 신성연구에 대신해 새로운 시대정신의 모체가 되고, 그것은 피렌체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각지에 공명을 부르고, 르네상스 문화의 번영시대를 실현하게 된다. 여기에 새로운 진보적인 원칙들이 도입되었다. 핵심은 인간성 회복이 중심 과제로, 인간 중심의 학문과 사상의 탄생한 것이다.

 

중세는 종교의 시대였고, 기독교 신앙이 모든 사상계를 좌우, 은총과 조화의 질서가 가장 충만하게 채워진 기간이었다. 철학과 사상은 신학의 그늘 아래, 학문과 예술은 종교적 목적에 봉사, 인간은 신의 뜻과 질서에 순응하면 그만이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 준비된 신의 선물이다. 인간의 영적 실재인 정신의 신에게 속하고, 육신은 물질과 통하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제 중세의 신비적-정신적 경향의 형식언어가 세속적, 수학적-과학적 명증성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비잔틴에서 이탈리아로 온 그리스 학자들의 몫도 컸다. 1400년만 해도 비잔틴에는 서로마가 망한 뒤 여전히 천년의 고대문화를 간직했던 학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정신이 그대로 활발히 살아 있었다. 1453년 비잔티움제국(동로마제국)이 터키에 정복당한 뒤, 많은 그리스 학자들이 침략자 터키인들로부터 도주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그리스-로마 작가들의 원고를 들고 베네치아며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들로 이주했다. 유럽 전역에 예술의 재활과 고대 정신의 재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연원으로 돌아가라!

인문주의자들은 고대의 가치들을 재발견하고, 헤브라이어와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가능하면 새로운 언어로 전달하고자 했다. 성서의 신학적 해석에서도 또 철학적 논의들에서도 가능하면 고대의 원천에서 그 기초를 끌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문주의자들의 구호는 ‘연원으로 돌아가라 Ad fontes’(에라스무스, 1511)였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1469~1536)는 초기 근대의 가장 저명하고 영향력 많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로 꼽힌다. 유명한 저서 『우신예찬』(1509/1511)은 영국인 친구 토머스 모어 Thomas More(1478~1535)에게 헌정한 라틴어로 쓴 아이러니적 교훈서로서, 이탈리아와 영국 체류에서 얻은 경험들을 다루었다. 의인화된 ‘우매’는 ‘자애’, ‘아첨’, ‘건망증’, ‘나태’ 그리고 ‘쾌락’이라는, 소위 치명적 죄악의 이름을 가진 딸들과 더불어 세상을 비굴하게 만들어간다. 철학자와 신학자들의 쓸데없는 논쟁,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위선, 칼과 불을 가지고 기독교도의 피를 흘리게 하는 고위 성직자들, 이런 것들이 모두 ‘우매’의 승리라고 비웃었다.

‘인문주의자의 영주’요, 지적인 자유를 위한 투사는 중세의 구조에 대항해 싸웠고, 유럽의 자유를 위해, 시대정신에 대항해 싸웠다.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정신으로의 복귀를 역설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나왔다. 인문주의란 ‘보다 인간적인 학예’를 초래하려는 운동인데, 가톨릭교회에 속하는 에라스무스가 ‘기독교의 복원’을 원하여 가톨릭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성서의 교정을 시도하고, 고대 학예를 소개함으로써 경화된 사고방식과 견해를 시정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인문주의의 정도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의 역할

원래 고대의 예지와 기독교적 윤리의 연결을 수단으로 내면의 개혁을 추구해갔던 학교와 대학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후일의 종교개혁의 선구가 되었다. 교육기관은 처음에 교회나 수도원의 부속학교가 교육을 담당하는 동안에는 스콜라철학 위주였지만, 12세기 이후 설립되기 시작한 대학의 특색은 성직자의 양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학문의 기틀을 다지는 데 있었다. 대학은 교회의 전래된 스콜라 사상과 결별하고, 교회의 저항에 대항했다. 많은 인물들에게서 발견되는 이러한 운동은 마지막에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서 촉발된 종교개혁의 성립에 기여한 부분이 크다. 루터와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1497~1560)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도 초기에 여기에 속했다.

 

절대주의 사회

17세기 유럽은 정치적으로 왕이나 영주의 무제한의 통치권을 의미하는 절대주의가 폭넓게 각인되었다. 절대국가는 각자가 특정한 계급으로 태어나며 거기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사회위에 군림했다. 이 신분사회 최상부에 귀족이 자리하는데, 그 또한 절대적인 통치자에 의해 많은 부분 권력을 거세당했지만, 그 대신 면세의 특권과 토지소유권을 확보했다. 시민계급은 한편으로는 국가적으로 경영되는 중상주의 경제의 담당자이자 이용자이었고, 그러나 귀족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는 어떤 영향력도 없었고 특권 또한 전무했다. 가장 큰 고통은 농부의 몫이었으니, 국가에 대한 세금과 땅을 갈아먹는 지주에 대한 공납이었다.

신성로마제국 독일을 예를 들면 주민의 75%는 농업으로 생계를 삼고 있었다. 이 대부분의 시골주민들에게 가톨릭과 신교는 왕과 영주들과 결탁하여 소위 ‘신의 뜻’인 그들의 운명에 순명할 것을 설교했다. 무지와 미신(마녀 광신), 편견, 깊은 회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계몽주의

18세기가 되면서 세계상은 달라졌다. ‘종교’라는 오랜 화두 대신 이제는 새 이념인 계몽주의(+고전주의)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유럽으로 확대되어 갔다. 미합중국과 서유럽의 대국들이 점차 강해지고 국가와 사회생활에서 발전의 담당자가 되어간다. 유럽 전역의 의미에서는 산업자본주의와 자본소유 시민계급의 출현으로 귀족계급과 시민계급의 대결이 현실로 닥쳤다.

절대주의의 권위는 도전받기 시작했다. 우선 프랑스에서 시민계급의 일부 특히 지식인들과 몇몇 귀족들이 이 상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사고의 명령에 준해서 그것을 평가했다. 절대주의 대신 자유를, 신분질서 대신 평등을, 편견 대신 경험과 학문적 인식을, 교의주의 대신 관용을 ― 이것이 새로운 이상이었다.

피안에 대한 희망 대신에 낙관주의의 인간은 그의 생의 감각을 차안에서 보아야 했다. 그들은 선을 행해야 했고, 그들의 덕성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처럼 후일의 형벌(지옥, 불)에 대한 공포에서가 아니라 그 정당성과 유용성에 대한 인식에서 전개되었다. 인간은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억압에 대해 ‘계몽’되어야 했다. 인간이 우선 이 억압의 원인들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그들에게 정당한 목표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해방될 것이라고 계몽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이 경우 계몽주의는 ‘인간은 생득적으로 선하고, 그러므로 올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신학관의 세계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합리성과 과학적 세계관을 부각시켰다. 근대 자연관에서 사용된 방법론은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경험으로 보고,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공통점을 추출함으로써 어떤 일반적인 원리를 발견하려는 경험론으로 발전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호로 유명한 영국의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우상을 타파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이해하기 위하여, 자연 과학적 지식의 유용성을 강조하였고, (이는 후세에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인간 지성의 방법을 통한 참다운 지식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고자 하였다. (정복지향적 자연관)

베이컨은 『신기관』(1622)에서 낡은 우상의 파괴를 요청하고 낡은 스콜라식 삼단논법을 비판했다. 파괴해야할 우상으로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 네 개의 우상을 들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투렌 지방의 귀족 출신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베이컨과 마찬가지로 지식 연구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기술을 개발하며, 원인ㆍ결과의 연관을 취하여 인간 본질을 개선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가 염두에 둔 보편학이란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 근거하여 형이상학, 의학, 역학, 도덕 등을 포함하는 학문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그의 성과는 무엇보다 방법적 회의에 있다 하겠다. 방법적 회의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하려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자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그렇게 의심하고 있는 나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한다. 사유의 내용은 의심할 수 있어도 사유한다는 사실과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는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제1원리로 내놓았다. 이 명제는 신으로부터 출발한 객관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신앙으로 강요하는 중세적 스콜라철학에 대항한다. ‘생각하는 나’, 즉 ‘인간의 의식’이 우선한다.

 

●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지라!

30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국토 전체가 크게 황폐화된 독일은 근대화 물결에서 다른 유럽 여러 나라보다 낙후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영국의 경험주의자들과 프랑스의 합리주의자들의 철학은 독일에서도 점차로 정신생활에 대한 교조주의적인 신학자들의 영향을 감소시켜 갔다. 루터 이래로 넓게 퍼진 영혼의 공포와 종교전쟁에 의하여 뒷받침된 비판적인 현세부정을 수반한 이원론적으로 분열된 세계상, 그리고 신앙인들 사이에 여전했던 기적신앙과 유령신앙은 이성의 광명과 새로운 낙관주의 앞에서 후퇴해 갔다.

비판철학의 창시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에게서 계몽주의의 개념 규정이 나왔다.

‘계몽주의란 자신의 잘못으로 된 미성숙상태로부터의 인간의 탈출이다. 미성숙상태는 다른 사람의 인도 없이 자기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을 말한다. 만일 이 미성숙의 원인이 이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인도가 없이 스스로 이용하겠다는 결심과 용기의 결핍에 있다면, 이 미성숙상태는 자신의 잘못으로 된 것이다.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를 가지라!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표어이다.’(1784)

그 외에도 칸트의 ‘정언 명령’ 개념은 현대에까지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다. 정언명령의 2가지 원리 중 보편주의 원리는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것이고, 인격주의 원리는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결코 단순히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도록 행위하라.’는 것이다.

 

● 산다는 것은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일이다.

인간의 이성이 꽃을 피우는 계몽의 시대에 계몽사상가의 좌익을 이루며 계몽주의조차 비판한 루소(J. J. Rousseau, 1712~1778)에게는 ‘모순적’이라는 형용사가 따라 붙는다. 인간은 출신에 관계없이 평등한데 불평등은 사유재산에 기인한다고 하면서도, 작은 소유를 인정하고, 노동을 높이 평가하는 소시민(쁘띠 부르주아)적, 수공업자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물질과 정신은 함께 영원히 존재하는 원리라고 보는 이원론에 서서 영혼은 불멸하다고 보면서 이신론(理神論)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도덕적 관념은 생득적이며, 모든 사람의 판단은 이성에 의해서이고, 개인에게는 자유가, 사회에서는 평등이 보장되는 삶과 국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회학적으로는 봉건적 전제 지배를 격렬하게 공격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강조했다.

『사회계약론』(1762)에서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인데, 지금은 어디에서나 사슬에 얽매여 있다.’고 주장했다.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그에게 인간의 자연적 충동은 건전하고 선량하다. 사회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장소이다. 인간은 한때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지만, 이제는 겉꾸밈과 경쟁, 과시적 소비 속에서 살고 있다. 각종 제도는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인간을 소외시킨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작용을 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계몽주의 자유사상이 정신적 원인이 되었고, 이성적인 힘과 자유의 정신이 프랑스의 정신세계를 일깨워 혁명적 민중봉기를 낳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자유, 평등, 박애 - 여기서 박애정신은 기독교 전통의 사랑이 아니라 휴머니즘 결실로서의 박애정신이다.

 

● 역사는 자유의 전개과정이다.

독일관념론 철학을 완성시킨 체계적 형이상학자 헤겔(Friedrich Hegel, 1770~1831)에게 세계는 ‘정신(Geist)’이다, 그리고 변증적으로 발전한다. 그의 입장은 절대적 관념론으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Friedrich Wilhelm Schelling, 1775~1854)의 객관적 관념론의 모순 대립을 매개하여 통일한 것이자 이 두 입장을 관념론의 웅대한 하나의 철학체계로 종합하여 완성시킨 것이다.

『정신현상학』(1807)에서는 절대자의 자기인식, 곧 절대지의 생성 과정의 역사를 기술했다. ‘사고와 존재의 완전한 동일성’의 주장은 이성적인 것만이 진실로 현실적일 수 있으며 현실적인 것은 반드시 이성적이어야 할 것이라는 근본적 전제를 말한다. 이성개념(절대자)이 정립ㆍ반정립ㆍ종합의 3단계를 거치는 자각의 과정이 변증법이다.

세계정신의 화신인 인류는 역사의 과정에서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점점 더 큰 자유와 완성으로 신적 이성의 확대로 점점 더 크게 발전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세계사를 신의 이성의 단계적인 구현이라고 간주했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객관적 정신의 최고의 형태로서 이성적인 인간은 현대적인 국가를 창출한다고 믿은 것이다.(『정신현상학』)

헤겔 철학에서 인간은 신의 전지에 맡겨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하여 셸링은 개개의 현실적 인간으로서의 실존의 입장에서,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erbach, 1804~1872) 등 헤겔 좌파는 사회적 현실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각각 그들 나름대로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셸링에서 후일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에 의해서 실존주의로, 후자의 입장은 변증법적 유물론, 마르크스주의로 각각 계승된다. 독일관념론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시작되어 헤겔의 사망(1831)으로 끝났다고 간주된다.

 

☞ 2강으로 계속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23. 04:01

유전 때문인가 ... 환경 탓인가

 

소설가 서용좌 '표현형' 펴내

- 광주일보 2014.6.19. 에서 펌

 

 

유전자형인가? 표현형인가?

 

현대사회는 변화무쌍한 시대다. 교유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 삶을 사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 처한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질을 발현하며 산다.

 

소설가 서용좌(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 교수가 신작 장편 '표현형'(푸른 사상)을 펴냈다. 생물학 용어에서 차용한 제목 '표현형'은 인간의 개인적 발현에 초점을 둔다.

 

2010년 '반대밀.비슷한말' 출간 이후 4년 만에 펴낸 작품에서 작가는 인간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정체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소설은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임교수가 되지 못하고 점차 내리막 인생을 사는 지식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의 지식을 빨아먹는다는 점에서 피를 빠는 박쥐와 다음이 없지요. 그는 날고자 하는 꿈 대신, 이야기를 퍼나르는 데 날개를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주인공이자 글을 쓰는 가공의 저자 한금싱늠'샆포세대'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인물로,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를 전전한다. 그를 둘러싼 현실은 녹록치 않다.

 

강의 여건은 날로 악화되고 미래는 암울하다. 그럼에도 그가 버릴 수 ㅇ벗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소설쓰기다.

 

그는 동류항 인간들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유전자형과 표현형 인간에 데한 관심을 늦추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유전자형과 표현형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모습을 추적하기도 한다.

 

작품은 '배달민족' '한국어' '표현형' '은실' '사포세대' 등 모두 11편의 이야기로 구성되 있다. 각각의 제모깅 붙은 잉기는 따로 존재라는 스토리이기도 하지만, 책 제목인 '표ㅕ현형'으로 수럼되기도 한다. 물론 이야기를 전개해주는 주 인물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다.

 

"주인공을 통해 들여다본 삼포세대의 내면은 표류와 공허로 집약이 가능합니다. 한가으이 기적을 일군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특질이요. 성장이라는 화려한 외피 이면에, 심리적 고통을 앓고 있는 이들이 발현하는 양상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서 작가는 '소설시대'로 등단, 장편 '열하나 조각그림', 연작 '희미한 인(생)'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등을 펴냈고, 이화문학상, 국제펜 광주문학상, 광주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11. 11:48

 

가공의 저자 '한금실' 현대인 방황 들춰내다

소설가 서용좌 교수 장편 '표현형' 출간

 

 

2014. 06.08(일) 16:20 확대축소

소설가 서용좌 명예교수

 

   소설가 서용좌 전남대 독문과 명예교수가 화려한 외관아래 앓고 있는 심층부의 심리적

고통과 정신적 방황을 그린 장편 '표현형'을 푸른사상사에서 펴냈다.

 생물학 용어에서 제목을 차용한 이 소설은 가공의 저자 '한금실'을 내세워 머리글에서

부터 스토리 전개, 마무리까지 하게 한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다.

 등장인물이자 글을 쓰고 있는 '한금실'은 프랑스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아 금의환향

인 줄 알고 귀국한 이래 내리막을 걷고 있는 소위 삼포세대이다. 비정규직 강사의 신분

으로 직업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해야하는 세대. 그러나 인간에 관한 관심은 버릴 수

 없다.

 처음 꼭지 '배달민족'에서부터 디아스포라의 방향으로 세계 도처에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유전자의 표현형을 추구하고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인의 한국으로의 엑서더스를 통해 유입된 다문화 가정에 대한

 관심도 들어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돼 인간

 관계의 기본 갈등은 가중된다.

 '배달민족'에서는 서독으로 돈 벌러 떠났던 광부와 간호원 세대, 그에 따른 혼혈자의

정체성 혼돈과 뿌리 찾기를, '한국어'에서는 한국을 꿈으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현장을,

 '표현형'에서는 미국으로 입양된 막내의 삶을 다룬다. '은실'에서는 성수대교 사고를

 계기로 공부를 접고 성공의 대열에서 밀려나간 동생의 문제를, '삼포세대'에서는 너무

 많이 배우고도 '루저'인 한금실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부모 세대를 다룬

 '초혼장'과 '포이동 266번지'에서는 끝나지 않은 최근 역사의 짐과 무게를 드러내

 보인다.

 마지막 이야기 '물'은 물에 빠지는 아이를 쫓아 무작정 물속으로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서용좌 교수는 2001년 장편 '열 하나 조각그림'을 시작으로, 2004년 연작소설

 '희미한 인(생)', 2010년 소설집 '반대말 비슷한 말'을 펴낸 바 있다. 현재 국제펜한국

 본부 광주시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고선주 rainidea@hanmail.net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52

장편소설 『표현형』 

 

푸른사상사, 2014. 5. 31. 발행

변형국판 352쪽, 값 15,000원

 

 

 

 

 

    가공의 저자 '한금실'이 등장인물이면서 써나가는  느슨한 연결의 장편.

    한 꼭지 씩 따로 읽어도 되는......

   

- 차례 -

배달민족

한국어

일기

은실

파도소리

초혼장

포이동 266번지

쥐도 인간이다

삼포세대

표현형

 

 

  추신: 내용보다 멋진, 표지 전체가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넘쳐나는 표지는

          아들 조윤기의 작품. 매달린 박쥐가 일품이다.

 

 

 

 

 

 

Posted by 서용좌
소설2014. 6. 9. 23:51

「청출어람」

배우는 것은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 순자 『권학』에서

 

 

강의가 달랑 하나로 줄어든 지난 해 봄이었다.

3월 한 달을 애매한 마음으로 보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에 대한 구상이 일렁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순간. 그냥 집으로 기어들었다. 마침 시향제를 앞두고 부산하여 아버지랑은 정색으로 대면할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본능적으로 내가 풀이 죽어 온 것을 알아차리신 눈치였다. 이런 저런 준비로 대청소에 음식 장만에 신경을 쏟는 중에도 곁을 살피셨다.

그렇게 일요일 늦은 오후가 되었다. 산에서 함께 왔던 친척들도 다들 떠나고, 집엔 산에서 묻혀 나른 마른 잔디 부스러기들이 뒹군다. 보이지 않게는 얼마나 먼지들이 일고 있을지. 크지도 않은 대청마루와 부엌 바닥을 훔치는데도 숨이 찬다. 시계를 또 쳐다본다. 그날 저녁 꼭 보고 싶은 8시 다큐프로그램 생각을 한다.

금실이 피곤하지. 네가 와서 난 좋았다만. 우리 찜질방 다녀와서 저녁 먹자. 아버지 시장타 안 하실 거다. 은실이랑 애들이랑 다 함께 가자.

어머니가 평소에 안 하시던 말씀을 하신다. 모처럼의 말씀이라 아니요 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애들은 말고요……, 하려다가 그것도 만다. 조카들까지 함께 갈 생각은 없지만, 속 좁은 노처녀 이모 소리 들을 건 없다 싶어 삼킨다.

그렇게 저녁이 늦어지고, 아무래도 부엌 정리도 평소와 같지 않고 늘어지기만 한다. 아버지는 벌써 9시뉴스를 보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9시뉴스를 본다. 한국인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약 3시간이란 통계를 본 적이 있었다. 일 년이면 1,095시간, 그러니까 45일 이상을 텔레비전 앞에서 산다. 평균수명 80세를 생각하면 10년을 그렇게 산다. 물론 나도 그렇다. 뉴스 아닌 픽션, 드라마를 본다. 중간부터 봐도 괜찮고, 중간만 봐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은 단편이다. 어제는 지나가버렸고 내일은 미지수다. 요즘엔 머리가 멍할 때면 아무거나 어수선한 드라마 조각들을 보며 앉아 있곤 한다.

그래도 그날은 머리를 깨우는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었다. <KBS 스페셜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 카프카의 말로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는,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들’ 비슷한 것 말이다. 그런데 시간을 놓쳤다. 다시보기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에 ‘의궤’라는 것에 대해 조금 공부해둘 시간을 벌기도 한다.

 

의궤 - 발음도 어려운 ‘의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예전에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것을 왜 학교에서 들어보지 못 했나 의아했다. 물론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내가 다 기억한다는 말은 아니다. 의궤는 조선 건국 당시 태조 때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는데,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 1601년(선조 31년) 의인왕후의 장례 기록인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와 『의인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라고 한다. 보통 필사하여 소량을 제작했고, 특별히 제작된 한 권은 어람용이고 나머지는 관련기관과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다고.

이 스페셜 프로그램에서 다룬 의궤는 조선왕실의 귀한 기록문서라는 뜻 그 이상이다. 그것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도서 300여 권을 꼬집어서 일컫는다. 사실 프랑스 뿐 아니라 일본 궁내청도 조선왕조 의궤를 81종 167책이나 소장하고 있고, 그밖에 『진봉황귀비의궤』, 『책봉의궤』 2종,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 『화성성역의궤』 등 5종이 새로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만하면 의궤에 관한 기초자료는 공부했다.

프로그램에는 결정적인 인물 박병선이 등장한단다. 박병선 - 인물검색을 한다.

사학자. 1929~2011. 서울대학교 학사, 파리 제7대학교 대학원 역사학 박사과정 수료. 논문은 「버림받은 공주와 민속 신앙에 대한 고찰」로, ‘트레비엔’ 평점을 받았다.

무엇보다 1955년 스물일곱에 (어딘가 자료에는 서른셋이라고 했지만 그건 계산이 틀리다.) 유학길에 올랐다. 동란 후 아직 어수선한 세상에서 최고의 지성과 자유의 상징인 프랑스로 향했다. 스승 이병도 교수는 게 가거든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들이 어딘가에 있을 테니 꼭 찾아 보거라, 라는 당부를 하셨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프랑스에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합리적이었지만, 어디쯤에 있는지,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오리무중 상태의 도서에 관한 당부를 평생 간직했던 제자가 기특할 따름이다. 그는 1967년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있으며, 틈틈이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과 고서점 등을 기웃거렸다. 1890년대에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이 펴낸 『한국서지』 - 고려시대의 『상정고금예문』에서 한말의 『한성순보』까지 3800종 이상의 책을 소개한 목록해설서 - 는 프랑스 내 어딘가에 의궤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에 사실성을 더해주었다.

 

청출어람 - 스승 두계(斗溪) 이병도에게서 ‘더 푸른’ 박병선이 나왔다. 이병도가 한국 역사학계의 거목이건, 식민사관의 대부이건 그게 여기서 중요하진 않다. 진단학회, 분명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를 창설하여 한국사를 연구했지만, 한편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한국근대사학 성립에 기여한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것이 친 체제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실제로 같은 강점기에도 신채호와 박은식 등의 민족주의 계열의 사학이나 백남운 등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강한 정치적 의지와 현실 참여를 바탕으로 반식민주의 사학의 성격을 지녔지 않은가. 시대가 학자에게 변명의 빌미가 되어줄 리 없다. 그렇다고 이병도를 예서 평가해서 뭘 하겠나. 나는 사학자도 아니다.

그 이병도 교수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는 한 제자에게 일렀다. 프랑스인들이 ‘훔쳐간’ 우리 것들을 꼭 찾아보라고. 푸른 대나무 조각을 쪼개어 묶어 역사를 기록한 데에서 온 청사라는 말, ‘푸른 역사’의 스승과 제자다웠다.

나도 모르게 이병도를 변호하는 글들을 찾아 읽어본다. 결정적으로 그는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다. 임나일본부는 일본이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군사적 기구가 아니라, 다만 가야와 왜 간의 무역 담당기구였다고 주장했다. 또 식민사관에서는 고조선의 준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된 위만을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고 하여 위만조선에서 한국사의 단절을 강조했지만, 이병도는 『사서』에 기록된 위만의 상투 튼 머리 모양과 복식으로 보아 그가 원래 고조선 유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순간 이병도는 ‘더 푸른’ 제자 때문에 긍정적 평가 쪽으로 저울이 기운다.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른들, 쪽이 있어 근원이 되었음 아닌가. 어쨌거나 학불가이이(學不可以已), 학문은 그쳐서는 아니 된다는 순자의 권학 말씀이 옳거니.

 

 

다시보기 - 월요일 아침 일찌감치 컴퓨터를 켰다. KBS를 찾아 아이디를 넣고 비밀번호를 넣는다. 서둘다가 한두 번 틀린다.

부욱 하고 휴대전화가 미끄러진다. 속세를 떠나 절로 들어가련다는 선배의 문자메시지에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그 절 이름은 만우절이라고 할 때서야 쿡쿡 웃었다. 이젠 어제의 프로그램은 다시보기가 안 된다는 메시지가 뜨더라도 만우절이라 놀라지 않으리다. 뜬다. <스페셜 프로그램 - 의궤, 잃어버린 역사를 찾다. 박병선 박사>. 광고방송이 가볍게 두 번 지나가고 어스름 화면이 시작된다.

1975년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바깥의 화려한 세상과 대조되는 장면 - 적막한 밤을 밝히는 작은 손전등을 든 손이 먼지가 수북이 쌓여 날리는 책을 쓰다듬는다. 효과도 멋지다. 프랑스국립도서관 베르사유분관의 파손 도서 보관실에서였다.

인종도 나이도 성별도 초월한 듯, 그저 진지한 인간의 얼굴, 그 입에서 유창한 프랑스어가 흘러나온다. 박병선 박사 만년의 모습이다. ‘처음 의궤를 발견했을 때 너무 감동해서 온몸이 마비될 지경이었어요. 당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20년 동안을 한 우물을 파다가 마침내 그 대상을 만났다는 것이 믿어졌겠는가. 중국도서 번호를 지니고 있던 우리 것. 한 사람 사학자가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보물을 알아본 것이니.

그러나 그것은 시작의 순간에 불과했다. 1978년 10월에는 한국에서 의궤 발견 기사가 떴다. ‘강화도사고문서 파리서 발견’이라는 제하에 병인양요 때 프랑스함대가 약탈해간 필사본 등 130종 345권이 112년 만에 발견되었다는 뉴스였다. 더구나 한국에 없는 책들도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보도되었다. 이런 보도에 프랑스국립도서관 측은 곤란해 했고, 냉대는 극에 달했다. 그쪽 입장에서야 내부인인 사서가 ‘여기 우리’ 도서관 분관 창고에 약탈된 도서가 있노라고 그 해당국에 알린 정황으로 해석될 밖에. 결국 권고사직의 형식으로 도서관을 그만 두고, 우리 대사관 한 구석에 마련해준 연구실에서 홀로 의궤 연구에 들어갔지만, 정작 도서관에서는 열람자 신분의 출입마저 제한했다고 한다. 굴하지 않고 매일 도서관을 찾은 그에게 계절이 바뀌고서야 출입이 허락되었지만, 하루 단 한 권의 열람이 조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우면 곧 바로 책을 반환하라고 할까봐서 점심 거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고 했다.

날마다 점심을 거르고? 먹으려고 사는 세상에서? 이건 아이러니가 아니라 결과적인 철학이다. 결국 오늘 하루 잘 살아서 무엇을 위함인가, 다시 내일 잘 먹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렇게 종일 먹지도 못하고 의궤에 매달리기 10년여 세월이 흘렀다. 『조선조의 의궤 - 파리 소장본과 국내 소장본의 서지학적 비교검토』라는 책을 써냈다. 제목과 주요내용은 말할 것 없고, 제작 년도를 분류하여 정리했고, 특히 외규장각 의궤와 한국에 남아있는 의궤 사이의 특징을 비교 설명해 놓은 역작이었다.

다시 이어지는 동영상의 목소리. 그 세월 동안 그는 한국에 의궤를 알리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금실아, 아버지 나가신다.

어머니가 부르시는 소리에 화면정지를 눌러 놓고 내다본다.

아버지, 어디 가셔요?

글쎄다. 그런데 넌 오늘 안 내려 가냐?

가야죠. 이따 오후에. 저 화‧목 수업이에요.

화요일 목요일 이틀만 해?

예.

그럼 나랑 산책할까?

산책을요? 어제 피곤하실 텐데요.

산책이야 늘 다니시지. 언제는 피어선학교, 아니 지금은 평택대학교지, 게까지도 가셨더란다. 이십 리 길이니 가시는 데만 두 시간도 넘는데.

어머니가 거드신다.

거길 왜요?

그냥 걷다 보니 거기까지 갔더라. 올 땐 버스 탔지. 헌데 그 대학이 성경학원 때부터면 백년 넘은 역사니까 대단할까 싶었는데, 왜 거긴 미국, 중국, 일본학과만 있는지 모르겠더라.

…….

거긴 원래 신학대학이잖아요.

내가 암말 않고 있자 또 어머니가 거드신다.

아버진 별 공부도 안한 성 싶은데 교수도 되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실 것이 뻔하다. 아버지 기준으로는 확실한 선진국에 유학해서 박사가 되어온 딸 정도라야 제대로 공부를 한 것이다. 그런 딸이 시간도 제대로 못하는 거의 백수 신세니.

아버지, 오늘 좀 추운데 나가시게요?

춥나? 젊은 애가?

하늘이 비도 올 것 같네요.

핑계는. 너랑 코앞의 평택호에 가본지도 오래다. 여기 서해대교에도 안 가보았지?

거긴 개통된 지 얼마 안 되니까요.

얼마 안 된다고? 십년도 넘은 게 얼마 안 된 세월이냐. 7,000미터가 넘으니 장관이지. 나들이 좋아하지 않는 네 어머니도 다녀왔지 벌써. 그러고 보니 평택이 징검다리네. 아산과 이어 평택호 만들었지, 당진과 연결해 서해안고속도로로 이었지. 넌 이곳 팽성을 땅끝이라 여기는 사람 같아. 바다 쪽으로는 아예 관심이 없으니.

바다요? 바다라는 게 제겐 좀 상징적일 뿐, 바다라는 건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바다…… 뭣보다 여기 바다는 뭐랄까, 막힌 느낌이죠.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남쪽 섬을 생각했다. 섬이라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일 텐데. 그런 느낌은 뭐랄까 신천지에 대한 발상처럼 다가왔다.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나고서도 바다를 바라본 적이 없이 내륙으로 내륙으로 향해서 살아왔다. 이제 난데없이 다른 사람의 섬을 생각하다니. 이건 무슨 억하심정은 아닐 테고. 방향 상실일까.

놔둬라. 혼자 다녀오마.

그렇게 아버지가 나가시고 난 뒤에도 어머니는 눈으로 나를 붙들고 계셨다.

어머니, 왜요?

아버지 말이다.

아버지가 왜요?

아버진 이럴 때 며칠은 정말 우울해 하신다.

거야, 어차피 늘.

잘나가는 청주 한 씨들이 좀 많으냐. 왜 우리 집안만 손들이 귀해가지고. 하긴 아들들 있어도 시제에 소용 없더라만.

설마요.

이 어미가 없는 소릴 하냐. 너희 어려서랑은 시제 음식 도맡아서 장만하던 정문리 당숙모 알지? 당장 그 집 며느리들 둘 다 교회 다니면서는 손 거들어 주기는커녕 참석도 안 해. 조상 숭배하고 하느님 숭배가 상충이라는데, 어디 같은 거라야 상충이 되고 말고 하지.

꼭 그래서가 아니고, 하는 집들도 요즘 간소화 추세라서 그렇죠. 어머니도 좀 간소…….

간소하게 하고 말 게 뭐 있냐. 사람들 모이면 밥은 먹게 해야지.

음복이라는 것도 참석자만 하면 안 될까, 엄마? 다 챙겨서 싸주고 하려니까 엄마가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미래, 그래. 내가 딸만 낳아놓고 무슨 입을 뗀다고.

어머닌 또!

안다 알아. 요즘엔 아들들도 집안 대소사도 나 몰라라 한다는 판국에. 한국도 미국이다 요샌.

어머니, 너무 괘념 마세요. 세상이 바뀐 걸 어떡해요. 미래만 보고 달려도 살아남을까 말까, 과거로 눈 돌릴 틈이 있어야 말이죠. 변명이 아니라 당장 내일 일도.

그도 그렇다. 잘 배우면 잘 배운 대로, 덜 배우면 덜 배운 대로.

어머니, 전 아무래도 너무 배운 것 같아요.

이 말은 내뱉지는 않았다. 내뱉지 못했다. 힘들여 공부 뒷바라지 해 놓으니 너무 배워서 불통이라는 뻔뻔한 말을 어찌 풀어낸단 말인가. 그렇지만 난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인생에 루소가 뭐냔 말이다. 아니 애당초 그런 공부를 하겠다고 작정하기까지 난 도대체 무엇에 씌었을까.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동서양의 진리들을 동등하게 모두 공부해야한다는 원칙을 누가 만들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서 너무 적게 배웠다. 한국과 프랑스가 우리에게 대등할 리 없는데 대등한 것으로, 심지어 석학들이 더 많은 - 더 많이 소개된 - 서양 나라들이 더 위대한 것으로 주입되었다. 내 옷을 지어 입을 줄도 모르면서 다른 나라의 취향에 심미안을 맞추었다.

어머니, 저 컴퓨터 보고 있던 게 있어서.

그래라.

 

나는 방으로 들어오면서 박병선 박사를 떠올렸다. 같은 파리의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것을 찾아 평생을 바쳐온 그와 남의 것을 겉돌다가 중도하차한 나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어떤 갈림길에서 인생이 달라진 것일까. 힘이 빠진 채 까만 화면을 다시 불러낸다.

재생 화면을 누른다는 것이 처음으로 돌아가 버린다. 어스름 화면. 1975년 - 어머나, 내가 태어난 해였네! - 프랑스 파리, 이미 어두워진 거리. 개선문 아래로 차들은 유영하듯 미끄러진다. 막대를 옮겨 아까 멈췄던 곳을 찾아간다.

1982년 KBS 뉴스파노라마에서 <프랑스의 한국 보물들 - 그 종류와 가치>란 제목으로 의궤 사본 297권, 인쇄본 45권, 두루마리 8권의 목록을 밝혔고, 책 15권과 두루마리 1권은 분실된 상태임을 알렸다. 그렇지만 반환은 꿈도 못 꾸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서울대학교 규장각 팀에서 콜레주드프랑스와 공동발행으로 의궤 관련 책을 출판했다. 프랑스어 판으로, 저자는 박병선 박사.

콜레주드프랑스는 16세기 이래 유서 깊은 개방대학이다. 파리에 머물던 4년 동안 라틴구에서 만날 바라보던 그곳이 떠오른다. 아련히, 아픔처럼. 롤랑 바르트도 미셀 푸코도, 움베르토 에코까지도 강의를 했던 곳. 콜레주드프랑스의 관심은 당연히 프랑스 석학들에게 의궤의 중요성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의궤 발견으로부터 근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뜻하지 않게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1993년 9월, 고속철 테제베의 한국도입과 관련해서 프랑스 측이 한국에 공을 들이는 시기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선물로 들고 왔다. 분명히 반환의 제스처였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코 흘러만 갔다.

한국 내에서 반환운동이 일자 프랑스도서관 측은 의궤 전체를 폐물창고에서 본관으로 이전하고 수선과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2010년에는 반환 반대여론이 정점에 이르렀다. 예술분야 전문 일간지 <라 트리뷰드 아트>는 리크네 편집장을 앞세워 아주 강경했다. 프랑스법에 국외문화재 반환 의무가 없으므로, 비록 국제법에서 반환을 요구하더라도 반환할 의무가 없다는, 자구적인 고집이었다.

그런 명석함은 명석함이 아니라 천착에 불과하리라. 하지만 여론몰이에는 그런 말들이 효력이 있다. 다른 곳을 검색해보니 미테랑 대통령이 의궤 한 권을 우리 측에 선물했을 때 파리국립도서관의 어떤 사서는 자리를 내던지며 맞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작 의궤반환 합의 때에는 사서들 272명이 연대해서 반대성명을 냈다고.

이렇게 의궤 반환에 대한 반발성 기사와 탄원서가 넘치며 반대시위가 일고 있던 상황에서도 참 지식인들은 진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우선 문화부장관 자크 랑이었다. 그는 법적으로는 의궤가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재산임이 맞지만, 정신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의궤의 주인은 한국이라고 했다. 파리 제7대학, 제13대학의 교수들도 합세했다. 13대학의 살즈만 총장은 국외 문화재란 거의 군사적 침입이거나 정부 간 협상 없이 가져온 것들이며, 그렇다면 현재의 소유국에서 원래의 소유국으로 돌아가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소유국에서 대중에게 전시도 하지 않으면서 타국의 문화재를 계속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참으로 열린 마음의 소유자들이다. 인류의 문화는 국경을 초월한다. 그런 뜻에서 당시 문화부장관은 박병선을 가리켜 아름다운 한국국민이자 세계국민이라고, 그의 투지와 용기, 그리고 집념을 온 나라 젊은이들이 배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 - 그것은 결국 드러난다. 세상에는 늘 공평무사한 지식인들이 있어온 때문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아버지가 한번은 어느 노령의 일본인 교사가 공개한 일본 고지도들 이야기를 하셨다. 1880년엔가 발간된 <대일본국전도>와 일본문부성이 발행한 1900년쯤의 <수정 소학일본지도>에는 일본영토에서 독도와 울릉도가 아예 들어있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독도가 조선 땅임을 분명히 알았다는 증거가 되는데, 그럼 지도들을 공개한 그가 매국노인가.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간단한 진실이다. 진정한 지식인은 이익과 불이익을 초월하여 진실을 인정하는 자질로서만 평가된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말하는 순간에는 그것이 진실임을 믿어야 한다. 그런 글을 최근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화면을 멈춰놓고 그 책을 찾는다. 어느 독문학 연구서다. 프랑스문학 관련 독서도 현대문학 쪽을 살필 여력이 없던 내가 독문학 서적이라니. 희망 찬 모교 강사시절 유럽문화연구소에서 독문과 강사들과 교류하던 덕이다. 아니, 지금의 지방대학에서 만난 배 아무개 교수 탓일지. 지방대학이라지만 나와 엇비슷한, 어쩌면 더 젊은 나이에 전임이 된, 정말 부러운 위치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자신의 가족사에 관련된 흔적을 찾아 독일로 잠적하다시피 날아갔는데, 그 뒤로 뭔가 얽혀들게 된 것이다. 얽혀들었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그가 나에게 간헐적으로 개인적인(?) 자료를 보내왔는데, 거기에 나치시대의 유명작가가 깊이 관련되어 있던 것이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 때문이었다.

찾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국의 후예인 서독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하인리히 뵐에 관한 연구서였다.

권력자에게 굽히며 자신을 바치는 작가는 강도질보다도 살인보다도 더 가공할 죄를 짓는다. 강도나 살인에 대해서는 명시된 법조항이 있고, 일단 언도받은 죄수에게는 법이 속죄의 길을 터준다. […] 그러나 배반을 자행한 작가는 […] 불문율 앞에 내던져진 까닭에 처벌도 불가능하다. 이 법은 불문율이며, 그 점이 그의 예술, 그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다. 그에게는 어느 하나의 선택만이 있을 뿐, 그가 그 순간 제공할 수 있는 전체를 주거나 - 아니면 무 - 그러니까 침묵이다. 그는 오류를 범할 수는 있다. 그러나 비록 나중에 가서는 오류였음이 밝혀질지도 모를 무엇인가를 발설하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순수한 진실임을 믿고 있어야 한다. - 16쪽의 글이다.

언젠가 같은 작가의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이라는 소설에서도 전범국 독일의 청소년의 심리를 가슴 아프게 따라가며 조금 놀랐던 기억도 있다. 이 연구서에는 제목을 ‘고백’이 아닌 ‘견해’라고 했는데 직역인가 보다. 유년시절에 나치를 경험한 어릿광대는 새 인생에 적응하고자 ‘견해’를 바꾼 어른들의 처사에 울분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경악의 비밀이 상세한 작은 일에 있음을 모른다고. 모른 척 한다고. 큰일을 후회하는 것을 정말 쉬운 일이다. 정치적 과오, 간음, 살인, 반유대주의 등을. 그러나 상세한 -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사실들을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그가 공연을 위해 ‘모으는’ 순간들은 순간적 작은 진실의 총체이며, 이것이 위대한 진실에 이르는 길이라고. 순간은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 그래.

나는 또 옆길로 샌다. 책을 덮자. 유럽 지향으로 굳어버린 내 머리를 다시 다큐멘터리 화면으로 돌린다.

 

직지 - 그런 이름의 책은 경이 그 자체다. 존경해 마땅할 스승과 제자의 집념은 전대미문의 성과를 낳았다. 세계 최초 금속활자의 주인공이 한국이라는 증표라니. 오매불망 고서적들을 뒤지던 박병선 박사에게 프랑스인 동료사서가 ‘아주 오래된 동양책’이 있다고 알려준 덕이었다. 『직지』라고 한자로 쓰인 먼지투성이의 책은 선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정식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며, 주제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그 비슷한 뜻이란다.

발견된 책자는 전 2권 중 하권뿐이었고, 하권은 39장이지만 그나마 제1장은 유실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1377년(우왕 3년)에 흥덕사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과, 주자인시(鑄字印施)라는, 쇠를 부어 만든 글자를 찍어서 배포했다는 기록까지 완벽한 물증이 남아 있었다. 얼마나 떨렸을까. 조선도 아닌 고려 말기에 금속활자본이라니.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1455년을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이는 그보다 근 한 세기를 앞섰다. 확산도 면에서 구텐베르크의 『성서』 배포에 밀렸다지만, 그게 대순가. 1972년 파리의 <유네스코 세계도서의 해 기념도서전>에 『직지』를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노력 끝에 2001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까지, 박병선의 꿈의 한쪽 날개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직지』라는 이름의 책을, 아니 그런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학문이란 것이 얼마나 뾰족한 것인지, 옆의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파리의 하늘에서 그런 위대한 발견이 있었던 사실도 모른 채. 여전히 유일한 그 금속활자본이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음도, 왜 프랑스에 영구 보관될 수밖에 없는 지도 모른 채.

내용인 즉, 한말 주한프랑스대리공사였던 플랑시라는 인물이 구입해서(?) 귀국 때 가져간 것을 나중에 골동품수집가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했고, 그가 1950년에 사망한 뒤 유언에 따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기 때문에 소유주가 분명한 셈이란다.

또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된 『직지』는 목판본이라는 것도 모른 채. ‘흥덕사자’라고 명명된 그 금속활자 자체의 흔적은 아직 오리무중이라는 사실도 알 리 없이. 나는 21세기를 맞는 파리에서 오직 남의 정신만을 파먹고 살았다.

언제라도 흥덕사지엘 가보고 싶어진다. 고인쇄박물관이 있다는 그곳에. 네이버 길찾기에서는 평택과 청주 사이라면 버스로 한 시간이라는 정보가 뜬다. 각각 터미널까지 오가는 길을 더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리라. 성남으로 향할까 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있다는 곳. 자동차라면 청주가기보다 더 가까울 것이나 대중교통으로는 세 시간 반이 걸린다고 뜬다. 아서라, 뒷북이다. 아니, 뒷북이라도 무관심보단 나으려나. 방학 때 집에 오면 들러볼 마음을 묻어둔다.

오디세이 - 다시 <의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끄기 위해서다. 어젯밤 찾아본 기록들로는 1975년의 『의궤』 발견도 획기적인 일이었지만, 반환과정도 오디세이의 귀향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직지』의 사정보단 나았지만, 약탈의 증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의궤』의 오디세이는 그 시작이 병인양요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맞물린 양요들, 병인양요 - 기록들을 찾아본다.

1866년 초 병인박해로 천주교신자 수천이 학살되었고, 프랑스인 선교사 9명도 처형되었다. 화를 면한 3인 중 리델이라는 신부가 청나라로 탈출해서 프랑스극동함대 로즈 사령관에게 응징을 요청했다. 함대는 ‘우리 동포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노라.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우리는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강화도를 점령했다. 10월 16일의 일이었다.

1,000배로 갚아주겠다고? 대단한 복수심이었구나.

강화도엔 왕실의 전적을 보관하는 두 개의 사고가 있었는데, 강화성 내 강화부에 있던 외규장각과 강화읍 남쪽 정족산성 내 전등사 근처의 장사각이었다. 서양인들의 눈으로는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화려한 장정의 신비한 서책에 뜻도 모르고 반할만도 했겠다.

로즈 사령관은 장교들에게 목록까지 만들게 해서 완전한 노략질을 자행했는데, 11월 9일 조선의 정족산성 승첩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를 철수하면서 이들 서책들을 가져갔다.

어쩌면 전쟁기념물 쯤으로 주장될 수 있었을 도서의 약탈 사실은 사령관이 해군성장관에게 보낸 서찰 때문에 폭로되었다. 필요한 책들은 배에 싣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태웠다는 보고내용이 자충수가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으로 계셨던 최석우 신부님이 밝혀냈다. 그분으로서는 병인양요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프랑스인 선교사들 처형 등에 관한 교난 연구가 주목적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의궤 반환의 꼬투리를 찾아주었다.

다시 화면을 본다. 2011년 5월 마침내 의궤 297권 모두가 돌아왔다. 비록 영구임대 형식을 빌려서라지만 어떠랴. 외규장각을 떠난 지 145년이 지나서야 참으로 긴 오디세이를 마쳤다. 그러니까 처음 먼지투성이 의궤를 발견하고 박병선 박사가 마비증상을 느꼈던 그 감동의 순간에서 36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흔적을 찾아 헤맸던 56년만의 일이었다. 56년. 더러는 그 세월을 통틀어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80대 노령에 암 투병으로 휠체어에 앉은 박병선 박사 - 과제의 완벽한 수행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 가을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었던 사람. 그 모습이 처절하리만치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자크 랑, 『의궤』 반환 당시의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말문을 연다. 박병선 박사의 집념, 문화재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면 의궤 환수라는 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다큐멘터리 편을 보았을 뿐으로 나는 멍한 채로 깊은 상념에 든다.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지식인들이 살아있는 사회, 프랑스이므로 반환이 가능했을 것이다. 세계대전 직후에는 나치에 협력했던 비씨 정부의 잔재를 매섭게 단죄했던 그들이다, 평화 시에는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에 혼외자가 참석해도 소동이 일지 않는다. 대통령이 이혼을 반복하거나 미혼의 여성장관이 혼외자를 출산해도 사생활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그런 나라.

하지만 나의 지난 시절은 나에게 무엇인가. 그런 프랑스에 매료되어, 프랑스의 지성에 매료되어, 루소에 심취하여, 프랑스의 혁명적 철학에 몰입했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들이 정말 있었던가. 있었던들 무슨 소용인가.

가지를 늘려 그늘을 크게 키우라 시던 나의 어느 날의 스승님은 뿌리를 단속하라는 말씀을 잊으셨다. 이 바보 같은 제자는 뿌리가 마르면 가지도 그늘도 없다는 단순한 지식을 몰랐다. 스승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생득적으로 간직해야 할 보편 진리를 몰랐다. 괜찮은 제자도 못된 나는 스승이 된 적도 제자를 둔 적도 없다. 십여 년의 계약직 강사 이력이 전부일 뿐이다. 내 지식의 계보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이 나려나 보다.

점심 - 점심 먹자, 아버지도 진작 들어오셨는데, 비가 오기 시작한다고 곧 바로 오셨구나. 넌 뭘 들여다보느라 그렇게…….

어머니는 고개만 내밀고 다시 나가신다.

밖엔 제법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빗물에 적신 초록이 봄을 피워낼 것이다.

얌전히 점심을 먹고 얌전히 인사를 하고 기차를 탈 것이다. 내리면 저녁 때. 아직은 남아있는 강의 준비로 밤을 새울 것이다. 해도 해도 모자라는 공부는 해도 해도 별 들여오는 것이 없지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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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그늘』, 제2호, 시더나무문학회, 85-106쪽.

 

 


 

 

이 감점이라니. 환경정리 심사 결과가 나왔는데, 우리 반 점수가 이게 뭐예요.

생기신 덩치와는 다르게 평소 수줍게 말씀하시는 담임선생님이 그날은 분통을 터뜨리셨다. 중2 때였고, 그때는 환경점리 심사표에 교탁에 꽃을 꽂아두라는 항목이 있었다. 꽃병을 뺀 것은 학급비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급우들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이 당연했다.

저, 그것이…… 선생님, 왜 살아있는 꽃을 죽여서 갖다 놓으라고 하는데요?

뭐시여? 꽃을 죽여? 그니까 까먹은 거이 아니고 일부러 꽃병을 안 갖다 놓았다고? 지시사항을 학생 맘대로 어겨요?

선생님은 급하니까 사투리를 해가며 나무라시다가 가죽 표지의 긴 출석부를 탁 덮으셨다. 다들 숨을 죽였다. 더 대들다가는 출석부로 탁 때려분질랑께, 라고 하실 차례였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갑자기 혼이 나면 간경 뒤집힐지 모른다고 염려하셔서, 출석부로 머리를 탁 치시기 전에 꼭 경고를 주시곤 했다. 그런데 그날은 얼른 다른 주제로 넘어가셨다.

을, 꽃다발을 볼 때마다 나는 중2 때 담임선생님을 떠올린다. 선생님은 담당이 농업이셨다. 실습장에서 감자를 ― 고구마였는데 그땐 고구마도 감자라고 했다. ― 캐는 날이면 굵은 알들은 골라서 근로장학금에 내놓는다 했고, 못생기고 작은 놈들은 가사실습실 가마솥에 쪄서 나누어 먹게 하셨다.

주번, 감자 익었는가 가서 보고 와요.

(다녀와서) 잘 모르겠는데요. 솥뚜껑을 열어 봤는데 연기만 났어요.

연기가 뭐예요, 김이지. 또 김만 보고 오면 어쩐데요. 요렇게 꼬챙이를 만들어 갖고 가서 쿡 쑤셔보고 와야제.

그렇게 무심한 듯 유심한 선생님은 꽃을 죽이기 싫었던 어린 제자의 마음을 받아주셨다. 꽃병에 담긴 꽃은 사람들이 죽인 것이라는 발상은 무심코 불교적 배경에서 생겼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착함이 지나치게 강조된 동화책들 속의 착한아이 신드롬 때문이었는지.

생명에 대한 외경심 ― 그런 거창한 개념을 알기에는 어렸던 중학생 시절의 건방진 선택도 찰나적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꽃다발을 좋아할 수 없다.

결혼식의 신부가 드는 작은 부케도 사랑의 정점을 상징하지만 한편 곧 사라져버릴 최고의 순간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곧 시들 것이니까. 강남 특급호텔들에서는 식장 장식용 꽃값이 천만 원을 웃돈다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

묘소에 가져가는 꽃들은 우습기까지 하다. 조상님들은 이미 풀꽃들과 함께 사신다. 부족하다고 느끼면 꽃나무를 더 심어드리면 될 일 아닌가.

그래도 외할머니 묘소에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상여를, 그러니까 장례차를 생화로 장식해 달라시던 외할머니의 평상시의 유언을 꺽은 것이 그랬다. 할머니, 꽃 몇 백송이 목숨을 꺾어서 함께 데려가시게요? 사치스러운 할머니도 그 말에 꺾이셨다, 차 전체는 말고야…….

하물며 관행처럼 되어버린 (별 볼일 없는) 문학상 수상 같은 자리에서 느닷없이 받게 되는 꽃다발들은 더 없이 곤혹스럽다. 꽃다발을 받으면 미소를 짓는다, 지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한다, 말해야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 것이고, 되갚을 기회를 놓쳐 무례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또 정말로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은 그렇게 내 삶의 환경정리에서 마지막 순위로 밀려난다. 내게는 명사가 아닌 형용사 같은 것, 내용이 아닌 포장 같은 것이다. 꽃을 생업으로 또는 예술적 작업으로 꺾으시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상 최고의 것일지언정 좋아하지 않을 자유는 있지 않겠는가. 마침 나는 무명이고 이 글이 실릴 책도 동문들마저 심하면 공해라고 여기고 챙겨가지도 않을 것이니 누가 읽으랴. 꽃 사랑이나 문학 사랑이나 다 제 눈에 안경일 뿐이리라.(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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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더나무

Posted by 서용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