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이2015. 9. 6. 02:18

세방낙조 - 어딘가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동기간들하고 아주 오랜만에 나들이를 갔다. 진도 세방낙조를 보러 갔다.

전남대학교 자연학습장에서 1박. 어머어마한 팬션에서 시댁식구들과

며칠 보내고 온 여동생에게 미안하게도 자연학습징이라니!

천만다행으로 숙소는 바닷가로 향했고 몇년 안 된 새 건물이라서 쾌적했다.

 

 

 

 

    바닷속으로 해가 들어가는 장면을 볼 수는 없었다.

    그게 다 그렇단다.

 

    이튿날은 진도 바닷길 ▼

 

 

 

 

     진도 바닷길 - (5)/(1)/(7)/(2)/(8) 빠진 번호가 많다, 가슴 아프게.

   <짭뽕드실분>이란 독특한 이름의 식당에서 짭뽕과 짜장면과 콩국수를 먹는 것으로 시작한 진도 1박2일, 세방낙조에 가까운 전남대학교 자연학습장에서 1박, 진도 바닷길가지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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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8. 12. 01:42
이번엔 수빈-형빈 소식.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바닷가.  Big Sur 해변에서.

 

작년 여름에 본 아이들이 부쩍 자랐다.

 

발레를 좋아하는 수빈은 멋진 포즈로 자라고 있다. 아빠랑 많이 닮은, 조금 더 날씬한.

 

외가를 더 닮은 형빈은 점점 더 따뜻한 얼굴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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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8. 12. 01:28

여름 방학이 되자 아이들이 다녀갔다.

우빈-성빈이 마침 성빈 생일에 맞춰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왔다.

 

 

2015.8.1. - 한국 나이로 아홉살 생일이다.

약간 흥분상태였을까? 일찍 깨어난 성빈이 떡 만드는 과정을 함께 했다.

팥도 넣고 찹쌀가루도 넣고....

남은 찹쌀가루를 반죽해서 9자를 만들고 또 하트를 두 개.

그래도 생일케이크가 필요하다. 21세기니까......

촛불 아홉 개가 환했다.

 

생일상엔 육식을 피한다.

미역국에도 마늘과 참기름 양념이 전부, 잡채에도 소고기 대신 유부와 버섯을.

다음날 -

담양 관방천 나들이가서 국수 먹자는 아빠를 떡갈비가 좋다는 성빈이 이겼다.

대통에 담겨져 나온 대통밥도 먹었다.

재활용이 아님을 강조하려고(?) 대통을 가져가도 좋단다.

씻어서 아래 구멍을 뚫으면 예쁜 화분이 될 거라고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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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8. 11. 23:27

2015년 3월부터 7월 초까지 아주 특별한 모임에 참석했다.

매주 목요일 저녁 시청 어느 세미나 실에서.

 

소설 창작교실 - 기성작가와 작가지망생이 두루 함께 면전에서 서평을 하는 방식.

 

서독 전후 <47 그룹>은 서독 최대의 영향력 있는 문단권력자들로 성장하지만 처음에는 낭독 의자를 '전기의자'라고 불렀다. 실제로 혹평 후에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래서는 아니었겠지만, 5월 말에서 일주일을 고열로 입원해야 했고 (하필 메르스와 나란히) 6월에는 거의 참석을 못 했다.

 

 

 

 

       * 작가회의 조진태 회장, 김경희, 이진, 김현주, *

             채희윤 교수, 이원화 총무...  맨 오른 쪽이 임성규.

 

 

          아래는 김선진, <벌거벗은 날의 오후>와 <응혈>을 쓴 젊은 피.

          손잡이까지 달린 예쁜 유리 병에 담가준 레몬티의 상큼함으로

          여름 더위를 견딘다 

 

 

 

 

Posted by 서용좌
수필-기고2015. 8. 11. 23:02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열린다. 국제PEN한국본부 주관, 9월 15~18일 경주.

기념문집을 내는데 6개의 주제 중에서 한 편을 내도록 되어 있다. 

처음 것은 제출 한 것, 나중 것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이다.

 

 

주제: 내게 특별한 우리말

 

대단원을 지나서 다시 한글에

 

다행스럽게도 일제 치하가 아닌 세상에서 이 땅에 태어난 나는 한글전용 의식이 팽배했던 시대에 학교 교육을 받았다. 지금 쓰는 용어인 문법은 말본이었고, 실제로 교과서 제목이 그랬다. 심지어는 전화를 번개딸딸이라고 해야 한다거나 모교는 배꽃큰애기배움터라야 한다고까지 한글 사랑에 목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글을 본격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말 우리글은 공부해야 할 대상이라는 의식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멜로디로 동요를 배우면서 자랐기에 우리 음악도 당연히 7음계라 믿어버렸다, 제법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러니 우리 것은 모두 그냥 저절로 있는 것이고, 뭔가 낯설고 어려운 것이 학문의 대상이리라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자라났다. 그렇게 일생을 살았다, 살았을 뻔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연구논문을 쓰면서 오직 갈수록 멀어지는 그것들을 쫓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느 순간 하이에나로 변해가는 환상에 사로잡히곤 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의 소설들을 파먹느라 자판 위를 달리는 손가락들이 하이에나의 발가락처럼 넷씩으로 변하고, 꼬리에 수북이 털이 돋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그런 순간이면 <새 글>을 열어서 내 글을 쓴다, 갑자기 아주 서툴게. 이런 고백과 함께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설 쓰기는 녹록한 작업이 아니었다. 그제야 내 글을 객관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하려니 내가 소설은커녕 글쓰기를 배워 본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글쓰기를 배워 본 적도 없이 논문이라는 이름의 글들을 써댔다니. 우와, 머리가 터질 듯 했다.

 

번갯불에 콩 볶는 심정으로 남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학교를 뛰쳐나와서 처음 한 일은 한글을 공부하는 일이었다. 누가 보면, 다 살고서 무슨 짓이람, 이라고 핀잔할 지경인데도.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아도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계속 외국어만 파던 대학의 언어교육원 어딘가에서 한국어교사양성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레 교사가 된다는 상상은 어색했지만, 분명 국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때까지도 국어와 한국어의 차이를 따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국어는 다만 나라말인 것을, 한국어라야 고유의 우리 언어를 국제적으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아가며 부끄러움 속에서 단기간이나마 (한)국어를 배웠다. 내친 김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룹 스터디도 하고 혼자 날밤도 샜다. 과락은 면했던지 2차 시험을 보러 갔을 때에는 한참 젊은 면접관들 앞에서 얼얼했지만, 막상 자격증을 손에 쥐자 부끄러움이 더 컸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일진대, 무턱대고 평생 써댄 글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무게로 치면 어떤 것은 1킬로그램을 어떤 것은 2킬로그램을 넘는 것들이었으니 이들을 어쩐다?

 

기억을 왜곡하기로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고는 새로운 한글로, 내게는 새로운 한글로 글을 쓴다. 새로 쓰는 글들이 많아지면 잘 못 썼던 글들이 덮이기라도 하는 양. 덮는다고 사라질 것이 아님을 알지만 모른 체하기로 한다. 어차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밖에 하지 못하니까, 라고 위로를 한다. 나의, 우리의 한글로 글을 쓰면서 외국어 공부할 때만큼 사전을 찾는다. 글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보고 마이크로소프트 워드의 맞춤법검사에도 넣어서 살핀다. 잘은 아니더라도 틀리지는 말자고, 잘 쓰는 건 타고나거나 어떤 은총의 문제이려니 틀리게 쓰는 일이나 말자고 애를 쓴다. 물론 세상 일이 애쓴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알 만큼은 살았다. 그래도 다른 묘수가 없다. 다만 한글을 다시 배우게 된 것이 기쁠 뿐이다. 내 말을, 우리의 말을 늦게라도 다시 찾은 것이 의미라면 의미다. 한 편의 연극일 인생의 대단원을 지난 오늘에서 굳이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아니, 의미를 떠나 나는 그냥 한글에 파묻혀 있다. 내 글쓰기가 세계를 폭로하는가, 사르트르의 말인데, 그건 그 다음 일이다.

 

주제: 한국적인 정서

제목: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어느 민족에게나 그 민족에 알맞고 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정서가 있으리라. 한국인에게도 한국에 알맞고 한국의 특징을 보여 주는 정서가 있어 마땅하다. 그러나 21세기 오늘날에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세계가 한 뭉텅이로 글로벌스탠더드에 입각해서 글로벌경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 보면 우리민족은 새로움에 능하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천재적 감각을 자랑한다. 식민지배의 질곡과 내전의 참상에서 놀라운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 낸 것 또한 새로운 가치를 날렵하게 받아들이고 적응한 결과라고 한다. 유사 이래 공동체 의식 속에서 꿈도 꾸어보지 못했던 ‘자유’가 초고속으로 우리 사회 속으로 이식되었다. 자유연애, 자유결혼,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온통 자유 천지다.

 

거기에 우리는 예부터 우물 안 개구리를 경계하리만치 독선적인 기질이 있다. 사전은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일’을 독선이라고 푸는데, 독선적인 사람은 자신이 독선적인 줄 모르기 때문에 독선적이 된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또한 독선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제는 그 독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깊은 개성적 성찰보다는 유행되고 있는 가치들에서 버무려 낸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데 있다. 유행, 다시 말해서 외면적 평가의 기준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 유행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의 독선은 하늘을 찌르게 된다. 자유경쟁으로 얻은 돈의 위력과 자유선거에 의해 잠정적으로 대표가 된 그들의 독선은 대중을 벼랑 끝으로 유치할 수도 있다. 대중의 위에 군림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기 때문에 회의도 주저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대중은 ‘훌륭히 성공한’ 그들이 내세운 기치를 추종하다 보면 거의 한 줄 서기를 해서 그리로 달려가게 된다. 그들이 내어 건 깃발에는 ‘자유’가 너풀거린다. 대중은 자유를 향해 죽을 경쟁을 한다. 친구도 형제도 팔꿈치로 제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 당위성에 의심을 품지 않는다. 앞서 달리는 사람들을 좇아 모두가 달려가는 길에서 옆도 뒤도 돌아볼 여력이 없다. 물론 다른 가치나 방식을 거론하면 순간에 낙인찍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큰 소리를 낼 조건이 아닐 때에는 더욱 몸을 사려야 한다. 아서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오늘날 한국에는 정서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음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 또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에 내어 줄 틈이 없다. 새것에 취한 채, 학문과 예술마저 유행을 좇느라, 정녕 우리의 문화유산의 뿌리 없이도 앞으로만 내달려도 좋을 것인지. 밥이 부족했을 때 서로 양보했던 우리네 인심은 밥이 넘쳐나는데도 나누기는커녕 빼앗는 현실로 바뀌고 말았다. 국민소득 2500불인 나라에서 연극에 예술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병들고 굶어서 죽어가는 불공정 분배를 자유경쟁의 이름으로 방치하고도 숨을 쉬며 살아간다. 언제부턴가 목소리 큰 사람이 대접 받는 일이 다반사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목소리 큰 아이가 늘 이겼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되어버렸다. 민주주의 공동체도

늘 49%는 51%에 눌려서 소수의견으로 폐기되는 것을 견뎌야 한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은 종말의 시작이다. - 카뮈가 『페스트』 영문판 서문에 썼다는 이 말을 반추해 본다. 대중에게 깃발을 내어 건 위정자들이 이 말을 음미해보면 어떨까. 세계를 주도하는 강대국들이 내건 깃발 만 옳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좇아가는 이 가치 만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이 자유이지 이 경쟁은 공평하지도 않고 심하면 살인적이라고. 나의 자유는 필히 너의 자유를 다소간에 다치게 하는 것이라고. 그 또한 한이 되고 한을 키울 것이라고. 그러니 자유의 천칭 다른 한쪽에 평등을 올려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발언에 별 효력이 없는 한 무명소설가의 부질없는 상상이다.

 

Posted by 서용좌
낙서2015. 7. 19. 17:00

자살

 

매일 누군가가 스스로 죽는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2013년 자살자 수가 1만4427명이라니, 하루 평균 40명, 36분에 1명이 죽는다.(동아, 2014.9.24.)

이렇게 흔한 일상적인 일이 주말엔 뉴스로 떠서 어안이 벙벙하다. 최고의 비밀스러운 조직의 비밀스러운 인적 자원이 자살했는데 왜 비밀 유지가 안 되고 떠들썩하게 공개되는지 참으로 이상하다. 국가를 위한 (그러므로 국민을 위한다는) 정책을 위해서는 비밀과 비밀주의가 용인되고 추천되어야 한다, 라고 배우고 있는데. 비밀이나 비밀주의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라고 배우고 있는데. 내가 잘 못 배우는 것인가.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희생”이라는 해당 조직의 코멘트도 아리송하다. 희생의 사전적 뜻에 비추어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어떤 목적을 위해 목숨을 바쳤나, 설마?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일상 업무가 범죄로 의심받는 순간, 가치 붕괴의 중압감을 버티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회피는 진실을 덮는다는 점에서 절대로 미덕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넘어, 진심으로 명복을 빈다. 헌신적으로 일했는데 왜 죽냐. 아들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였던 그가 아까울 뿐이다.

 

 

자살자의 유서의 효력

 

유서마다 효력이 같지 않다는 것이 세상에서 배우는 예지다.

예컨대 정치권을 돈으로 도배했던 한 기업가가 자살하면서 남긴 목소리와 메모지는 증거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아마 배신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OOO게이트 수사는 어느 선에서 접어 마땅하다. [혹시 수사란 폭과 깊이를 확대할수록 좋은 것이라면, 부패의 원인이 된 2차 사면과 더 원조 원인인 그의 출생까지로 확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공소시효는 여론에 그와 관련된 여죄를 충분히 입력시킨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예컨대 국가를 위한 최고 비밀조직의 직원이 ‘헌신적으로 일해 오다가 무엇인가를 위해 희생’하려고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는 100% 유효하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배신자가 아니니까. 그러므로 “내부사찰은 없었다.”라는 결론이 마땅하다. 더구나 국익과 대통합을 위해서 - 쉿! 조용히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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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7. 3. 22:35

 

호야 꽃봉오리가 피어났다. 세상이 아그파 필름처럼 멀겋게 느껴지는 것이 기분이 가라앉은 요즈음 모처럼 반가운 색깔이다.

 

1984년, 참 옛날이다. 멀리 바닷가 도시에 살던 동생네서 나누어 온 호야 넝쿨이 아직 살아있다. 한참 무르익었을 때 이런 꽃들을 피워냈다. 어느 화원에서도 못 보던 꽃이었다. 그러고는 늙어갔다. 언젠가 새끼를 쳤다. 그 작은 넝쿨도 이제 무르익기 시작했는지, 깜짝 놀라게 어느날 이런 꽃봉오리를 피워냈다. 좁고 긴 베란다 영국식 정원에서 두 번째로 장수하는 식물이다. 

 

첫 번째는 1982년 이전에 아버지가 주셨던 선인장, 금강석. 꽃을 피운 적이 없지만 여태 숨을 이어가고 있다. '엄마는 그것 하나만 들여다 보더라!' 남편은 화초에 무심한 내게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  아마 누구라도. 

 

 

* 영국식 정원: 프랑스식 정원과 대비되는, 자연스럽게 구성된 정원.

                     여기서는 무질서해 보이는 간이 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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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소설2015. 7. 1. 07:14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만약 우리가 부유함에 너무 애착한다면, 우리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예입니다. - 2015.3. 프란치스코 교황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이상한 노랫가락도 뭣도 아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한데 정자형 경로당이었다. 노래를 했을 것 같지 않은 할머니 한 사람만 몸을 웅크린 채 천천히 어딘가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근들근들 세운 무릎이 턱에 닿았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사람들은 다 들로 나간 모양이다.

정자를 반쯤 덮고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동네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다. 얼마나 긴 세월을 여기서 사람들을 보듬었을까.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느낄 수 없으리만치 마르고 갈라터진 몸통 사이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러고서도 연초록 새순을 내면 새날이 새봄이 온다. 늘 보아도 경이롭다.

 

삼월 어느 주말, 벌써 겨울에 있었던 약속으로 옛 도자기 마을을 찾게 되었다. 거기서 만나기로 한 가마 주인은 도자기 굽는 일 뿐 아니라 여러 장르의 예술적 작업을 하는 분이라 했다. 정작 본인은 평범한 주부의 취미생활이라고 한다는데, 그 여러 작품들을 생활과 곁들인 서사와 함께 도록으로 내고자 하는 일 때문이었다.

전화로 일러준 대로 정자 옆에는 몇 발짝 안 가서 비스듬히 놓인 한데 가마가 보인다. 울퉁불퉁 붙어있는 누룩두레는 몇 백 년 되었을 나이를 말해 준다. 그 건너 큰대문집에 묶인 덩치 큰 개는 멀리서도 눈을 맞춘다.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고는 정자에 웅크려 앉은 노인뿐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이 동네 민 아무개 선생님 댁 저기가 맞나요?

어르신……. 누구 어르신 말이여?

아, 할머니 안녕하시냐고요. 그리고 도자기 굽는 민 선생님 댁이…….

선생님 누굴까. 긍께, 그럭 굽는 데믄 사모님 댁? 쩌어그, 누랭이 매진 디 거그. 근디 사모님 왔는강 몰러. 오늘은 못 봤잉께. 글고, 누랭인 등치만 크제 소양 없어.

노인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다 만다. 고개로만 저리 저리 가르쳐주고 나서는 입을 꽉 닫고 먼 데 하늘을 본다.

 

큰 대문 쪽으로 다가가자 컹컹 짓는 개 소리가 동천한다. 그런데 웬걸 곧 멎는다. 정자의 노인 말이 맞다. 순하다.

계셔요?

문을 흔들어 본다. 대꾸가 없다. 빙 둘러 보아도 초인종 같은 것은 없다. 대문이 가만히 열린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어갈 수는 없다. 문틈으로 빼곡히 보이는 집까지는 한참 멀어서 낭패스럽다. 기차역에 내릴 때부터 시도했지만 전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시간 약속을 한 것은 아니나, 와도 좋다고 한 것이 분명 오늘인데.

 

오른 걸음을 다시 내려온다.

저기요, 여기 민 선생님 댁 문은 열렸는데 안에 아무도 안 계시네요.

글씨, 거까장은 모리고. 근디 오늘이 메칠이다우?

예?

메칠이냥께. 경칩이 지났능가. 엊그저끄 찰밥 묵었는디 그새 경칩은 아니겄제라.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여기 민 선생님 어디 가셨을까요?

거까장은 모린당께. 일단지간 여 앉아서 지둘려. 거자 날마다 오긴 오는디. 정심은 우리랑 묵을 때가 많어라.

예, 그럼.

이리 올라 오랑께.

 

 

지금 누구랑 야그하고 있었냐믄…….

할머니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니, 아까부터 혼자 계셨잖아요? 누구랑 이야길 하셔요?

긍께, 남순이, 내 동생허고.

아, 동생 분 생각을 하셨다고요?

그래 말여, 내 동생 남순이.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우리 육촌 가시나 말이여, 갸는 시방도 잘 살어. 우리 남순이가 금메, 웬선놈의 돈 땜시 정순일 따라 서울을 갔어. 가차이 광주까장만 갔더라믄 되얐을 것을.

……?

우리 방골 사람들은 돗자리를 짜서 묵었어. 학교는 문턱만 째까 디레다보다 말었제,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그랬시라. 그래도 울 아부진 우덜 돗자리 짜는 젙엔 못 오게 혔어라. 여자 아그들 볼 거시 못돼야, 허심서. 짠 돗자리를 무지게 큰 둥치로 지고 집을 나서믄 한동안썩 소식도 없었제만, 우덜한테 가시나그 소리 한번 안 허셨어라.

우덜끼리, 참 삼남매 사연도 많았제. 엄니 없이 큰께로 너메 동네 외할매가 더러 오심사 우덜 생일이나 진배없었제만. 그도 복이라고 얼마 못 사싰제. 글다가 아부지가 한번은 먼 아짐을 데꼬 왔어라, 새엄니 자리였제. 새엄니랑 항꾸네 온 짐 속에는, 기도 않차제, 틀이 있더라고. 방골 사람들 생전 첨 보는 틀이라. 솜씨꺼정 좋은디, 틀바느질로 혀갖고 명을 날렸제. 드르륵 박아내믄 순식간에 치매도 되고 내리닫이도 되얐응께. 방골 사람 너나 할 것 없이 등지기 한나썩은 다 얻어 입었을 것이고만. 긍께 사람들은 안 입는 한복덜 어쩌고 해달라고 새엄니한테 내다중께, 새엄니 방엔 니 구퉁이 모다 헌옷들로 한짐이었제.

아, 근디 남순이가 말여, 내 손 아래 동생 말여, 만날 새엄니 방을 기웃거림시롱 말대꾸랑도 잘 허고 멋이든 맨지작거림시롱 틀질에 귀를 세우더라고.

어메, 드르륵, 진짜 신기혀, 성아.

갸는 외약팔을 쩌리 오린팔을 요리 댐시롱 천을 잡고 밀고 숭내를 내믄서 지랄이여, 좋아서. 나는이라 틀에서 나는 소리도 싫도만. 덜덜 들들, 몸까장 떨리도만 그거시 멋이 좋다고. 나야 그냥 광주까장만 가믄 로케트회사에 가넌 거시 소원이었제. 마을서 얼굴도 반반허고 몸도 튼실헌 성들 둘이가 나가 살믄서 모다 부러와 했제. 로케트회사 모링가?

 

느닷없는 큰 소리에 눈을 들었더니 노인은 한참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셔요?

어메, 로케트회사도 모린당가.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그 시간에 젖은 노인은 내게 엉뚱한 타박을 하며 소상히 뭔가를 설명하는 품새였다.

제가 민 선생님을 만나려고…….

아, 온다니께. 날마다 오긴 와여. 긍께 여그서 지둘고 있으믄.

제가 전화 좀 한번 더 해보고요.

털고 일어나서 주위를 거닐며 통화 시도를 해도 잘 안 된다. 신호는 가는데 도통 대꾸가 없다.

 

남순아, 아야, 멋흐냐. 이리 오랑께.

좌우를 두리번거려도 아무도 없는데, 노인은 이제 나를 동생으로 아는지 이름을 불러댄다.

아야, 성이랑 같이 로케트로 가장께, 사람 새로 뽑을 때 우리 데꼬간다 안 허드냐. 멋흐게 혼자 나스냐. 기언치 봉젠가 먼가로 할라고,

얼결에 나는 다시 정자로 올라갔다. 내가 올라가지 않으면 노인이 맨발로라도 내려올 기세였다.

 

 

노인의 이야기를 다 옮길 수는 없다. 첨엔 연락이 안 되는 민 여사님을 언제 또 만나러 오기도 마뜩찮고 해서 좀 기다리려던 것이 요상한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용은 독특한 말법 때문에 알아듣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시간상으로도 왔다 갔다 해서 더욱 어지러웠다. 하도 진지한 그 표정 때문에 자리를 털고 나올 수도 없었다. 딱히 민 여사를 기다릴 만한 다른 장소도 없고.

 

하이틍간 정순이가 설레발을 쳤제. 당숙네가 젤 안 잘 살었냐, 정순이 덕에. 식우곤로가 다 뭐시였냐, 그 집이 젤로 몬자 디레놨제, 대리미도 라지오도 거가 젤 앞섰제. 아야, 멋보담 그 사탕가리 말은 국수 말여, 그 집 말고 어디서 그런 달코롬헌 것을 맘대로 묵었다냐. 어째 딸 많은 집이 더 잘 되얐이야 잉, 남순아.

내게 동생 대하듯 부르는 통에 기분이 묘해졌는데, 또 이내 내가 아무도 아닌 줄 아는 듯 했다.

금메 그렇게 남순이가 정순이 따라 서울을 갔어도 첨엔 멋이 먼지 몰랐제. 갸가 고향 땅도 제대로 못 볿음서 돈을 벌긴 벌었어. 남동생 하나 있는 것, 우리 순길이 말여, 갸는 남순이 덕 봤제. 국민학교 졸업허고 쫌 놀았어도 낭중에라도 중학하고 다 간 거시 남순이 덕이었제. 나는 큰누나가 되야갖고도 못 허는 것을 남순이가 했응께. 그나 울 아부지는 왜 신식 새엄니랑 오래 못 살었는지. 멋이 부족혀서 고렇게 가시부렀는지. 새엄니 탓들도 허더고만이, 동네 으른들이. 초승에 과부되면 또 과부 된다는디, 새엄니가 그랬디야. 원래도 곰방 과부되얐다더라고. 남자 없는 팔자 지닌 여잘 만나믄 남자가 가분다고. 암튼지간에 아부지 저 세상 가시고넌 새엄니랑 우리랑은 뜨제, 쌩 놈 아녀. 오래 같이 산 세월도 없응께. 글고 누가 어쯔고 중학을 보냈겄어, 방촌에서. 그저 돗자리나 짜묵넌 마을인디. 그랑께 남순이 덕에 동생은 성공했제. 째깐혀도 테레비도 우리집이 영 일찍 디레놨당께.

 

그러게 나도 정순이 성을 따라갔지, 성.

이거시 잘된 거여? 너 첨에 광주서 시장서 오천원 육천원 받고 틀질혔을 때도 보신이다 뭐다 밸것 밸것 다 맨들었담성. 그리 혔음 되얐을 것을, 멋허러 욕심은 내갖고.

성, 그래도 서울 가서는 댑방에 만원부텀 시작했으니께 어딘가. 나도 할 만큼은 했지.

그 고생을 혀갖고 종래는 뭐시여. 니가 낭중엔 그놈의 만오천원 소리에 넘어갔담성. 정순이년 땜시.

정순이 성 탓 말어. 이왕지사 고생함서 한 푼이라도 더 준다믄 다들 옮겨갔지. 모다 그랬다고.

웬선놈의 돈이랑께.

 

그 대목에서 나는 너무도 놀랐다. 사투리지만 뭔가 좀 다르게, 목소리까지 달라지면서 두 말을 하고 있음을 알아챈 것은 두어 마디가 지나서였다. 갑자기 무서움증이 들었다.

헐만큼 헌 거이 그거여? 멫 년 뼈꼴 빠지게 허고는 먼 병신이 돼서 왔는디. 외약손 이리 내놔 봐. 시상에, 얼매나 아펐을겨.

노인은 내 왼손을 잡아끌려고 했다. 그 순간 다행스레 사람들이 나타났다. 구세주 다름없었다.

누군디, 먼 일로 여그를 오싯다요?

오매, 이 할매 좀 아픈디, 어쯔고 상대허고 있다요!

불현듯 나타난 아주머니 둘 덕에 나는 앙상한 할머니에게서 풀려났다. 서울사모님은, 여기 사람들은 가마 주인을 그렇게 불렀다, 차가 세워져 있으니 틀림없이 동네 안에 있을 거라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든지, 아예 집안에 한번 들어가 보든지 하라고.

 

 

동네 대문도 열어 놓고, 좀 멍한 사람도 혼자 놓아두고, 편하다면 편하고 느슨하다면 느슨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갈 수는 없지 않나 싶어 망설이고 있다. 그런데 아까 지나간 아주머니 한 분이 그쪽 대문 앞에서 큰 소리로 부르며 손짓을 한다.

쩌그 안에 기시네. 이리 오시쇼. 쩌 안마당이나 웃채에 있으먼 누가 와도 몰라라. 근디 들어가 보도 않고 어쯔고 알것소이.

 

정자의 할머니가 누렁이라 하던 커다란 개가 몸도 가볍게 팔랑거리며 뛰는 모습과 주인이 문을 열면서 나타나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전화로만 인사를 나눈 민 여사인가 보다.

나는 일어나서 그쪽으로 가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자의 노인이 내 옷자락을 쥐면서 쉬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피는 정말 무서웠어라. 남순이랑 둘이서 두 손을 꽉 잡고 뒤얀으로 나가 울었지라. 남순아, 남순아……. 울 엄니럴 으짠다냐. 울 엄니한테서 생각나는 거이라곤 피뿐이랑께.

노인은 지금 피를 보는 양 울먹였다.

엄니가 원래도 빼뺏한 몸이 점점 말라가도 누구나 그런갑다, 엄니덜은 밥을 잘 안 묵응께, 엄니덜이 다 그랬응께, 매일 지쳐빠진 모양을 봄서도 엄닝께 그런갑다 했어라. 그란디 내중에는 피까장 토허더니 얼메 못갔지라. 그란디 남순이가 거그서 서울서 피를 보고는 기냥…….

 

 

동순 씨, 오늘 말 잘하네. 첨 만난 선생님하고.

민 여사는 정자에 당도하여 내겐 눈인사만 하고는 노인에게 말을 건넨다.

누가 선상이여, 여가?

동순 씨, 아무랑도 이렇게 말 잘 해야 써, 그래야 다들 동순 씨 좋아해요.

으응, 그려. 근디 암도 없어.

봄비가 해갈은 안 되었어도 땅이 촉촉하니까 다들 바쁘지. 종자를 심어야 거두제!

어즈께 그놈만치 비가 왔어도 안적 해결이 안 되얐다고?

그래, 해결되려면 좀 더 와야 한대요.

이상한 대화에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는지 민 여사가 배시시 웃는다.

동순 씨, 쉬고 있어요, 응? 곧 있다가 무궁화배추 절이지 한다니까 점심 먹게. 나는 여기 선생님이랑 이야기 좀 해야 하니까.

 

동순 씨라 불리는 노인을 달래 떼어 놓고서야 민 여사가 인사를 한다.

어쩌나, 한 선생님, 너무 미안하게 되었어요. 오늘 내가 휴대폰을 안 가져온 모양이네요. 위채에서 뭐 좀 찾느라고 대문 소리도 못 들었네요. 바쁘실 텐데 미안해서 어쩌나요.

아뇨, 좀 전에 왔는걸요. 동네가…….

아, 동순 씨한테 붙들려 놀랐겠지요. 아무한테나 동생 이야기죠. 말도 이상하죠? 여기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비가 와서 해갈되나, 잘 되었으니 해결되나, 결국 마찬가지 아녀요? 지난 설에는 원래목사님한테 너도 나도 집에서 낳은 계란을 선물한다고 해서, 누굴까 했어요. 누구는 원래부터 목사이고 누구는 신부님 하다가 목사가 된 건지 하고. 내가 교회 안 다니니까 모르기도 하고요. 그랬더니 글쎄, 면에 교회에 두 분 목사가 있는데 원로목사를 원래목사라 그런 거예요. 표준어다 맞춤법이다 하는 것들은 말 그대로 산지기 집 거문고예요, 여기선. 그래서 나는 설 쇠고 나서 원래목사님 집에 계란 훔치러 가야지…… 하면서 따라 웃고 말았지요.

아, 원래목사님……. 그럼 무궁화배추는 무공해 배추?

그래요, 한 선생님은 얼른 알아들으시네. 무공핸들 알겠어요? 그러니 무궁화배추라면서, 저이가 유난히 봄동 겉절이를 좋아하더라고요. 안됐죠 뭐. 여기가 원고향은 아니지만 명색이 시집 온 셈이라고, 좀 시원찮은 여동생이랑 데리고. 그러다 동생 죽고는 저 사람이 조금 멍하죠. 한참 되었어요. 여기 사람들 고생 안 한 사람 없더라고요. 그렇게까지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는지, 강남에 계속 살았더라면 모르고 죽었을 것, 여기 와서 많이 알게 되었어요. 환경이 참 중요해요, 사람은.

그럼 저 할머니는 무슨 사고라도, 피는 또 무슨 말이어요?

그게 이야기가 길죠. 사연 없는 사람 없겠지만. 궁금하세요?

민 여사는 오늘의 본론을 미뤄두고 정자의 노인 이야기를 한다.

 

 

동순, 남순과 순길 삼남매 이야기도 그 시절 모두가 궁핍한 채 살아가던 이야기와 비슷할 터였다. 돗자리 만들어 파는 마을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본 삼남매는 학교 교육은 의무교육까지도 다니는 둥 마는 둥 어려웠다. 새어머니는 재봉틀을 가지고 들어와서 제밥 신식 살림을 차리는가 싶었는데, 아버지가 곧 돌아가시고 덜렁 삼남매만 남자 한 해를 못 버티고 다시 떠났다. 남순에게 재봉틀에 대한 바람만 넣어주고 떠난 셈이다.

남순은 기어코 광주에 있는 시장 뒷전의 영세 봉제공장에서 견습공이 되어 틀질을 배웠다. 돈 오천원 받고 버선, 속옷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틀질을 했다. 그런 어느 명절에 서울에서 일하던 친척 언니를 만났고, 서울 소식에 혹해서 따라가더니 청계천 봉제공장에 취직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는 상승 곡선이었다. 곧 만원을 받았으니 횡재 다름없었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했던 철야작업은 한창 피어나는 젊음도 삼켜버릴 기세였다. 두어 달 지나니까 코피는 일상이 되었고, 시간도 없고 돈도 아끼자고 사먹는 풀빵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면 현기증은 다반사였다. 남순은 어쨌거나 서울 사람이 되어 고향으로 돈을 보냈고, 남동생 순길이는 제 할 일답게 공부를 계속했고 또 잘 해냈다. 맏이 동순은 건전지공장에 나갈 꿈도 접고 살림을 도맡았다. 순길에게 누나들은 어머니요 아버지였다.

그렇게 서울 생활 사오년이 계속되면서 남순은 지쳐가기 시작했다. 꿈은 점점 멀어지는 무지개 같았다. 타이밍이란 약까지 먹어가는 동안 젊다 못해 어린 몸은 파괴되어 갔다. 그들을 졸지 못하게 한겨울에도 찬바람 들어오게 문을 열어놓다가, 그래도 안 되면 나누어주고 먹이는 약이었다. 첨엔들 모르고 먹었고, 나중에는 청해서 먹었다. 졸음 쫒는 귀신. 하지만 약을 먹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졸다가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가 틀 속에 깊이 끼어 들어가 버렸다. 상처가 낫고도 엄지는 병신 모양으로 남았다. 두 가지 출구가 어른거렸다. 쉽게 살기 위해서라면 중랑천 뚝방으로 ‘언니들’의 그림자를 따라 섞이는 길, 아니면 아예 모두 다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뚝방 길로 나서자니 그들도 짙은 화장을 하고도 허무해보이기는 매한가지였고, 죽자니 내려 보내는 월급이 필요한 동생이 걸렸다.

가끔 야학 교사들의 한 마디가 이들의 삶을 지탱시켜주기도 했다. 못 배우고 가난한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다, 라고 가르치시던 ㅅ 선생님. 광릉 숲에 희귀새 한 마리가 죽으면 떠들어대는 신문들이 우리들 노동자 손가락 잘려나가도 행여 굶어 죽어도 한 줄도 보도 안한다. 신문들 믿지 맙시다, 서로를 믿읍시다, 라던 목사님. 차츰 어깨동무가 되는 친구들이 생겼다. 거기서 ㄷ 방직에서 노조 어쩌고 시작도 못해보고 똥물 사건 뒤 면목동으로 옮겨온 친구도 만났다. 그 가발공장은 바느질만 잘하면 대우가 훨씬 낫다는 소문에 남순도 그리로 옮겼다. OO무역주식회사 사원증을 받게 된 기쁨이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든든한 유대가 좋았다. 남순 자신보다 더한 역경에서 대의원까지 올라간 언니도 돋보였다. 초등 졸업도 하기 전부터 진면에서, 누에고치를 삶아서 뽑아낸 솜에서, 실을 뽑아내는 일을 했다는 언니였다. 고향도 가까운 곳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 어느 날 갑자기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 면목동 공장을 충청북도로 옮긴다는 공고가 떴다. 그리고 따라 갈 수 없는 몇 백 명이 사표를 썼다. 설마 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다 정말 폐업공고가 나붙고, 기숙사에 물도 끊고 전기도 끊자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결의’를 하자, 그러자…….

‘우리는 거리에 내쫓겨 올 데 갈 데가 없다. 정상화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러는 사이 누군가 혈서를 쓴다고 했다. 무서웠다. 무조건 무서웠다. 피는 무섭다. 어머니의 피……. 피로 무슨 글자인가를 썼겠지만, 남순은 한일자가 채 그려지지도 전에 그 장소를 빠져 나왔다. 한일자는 ㄷ자의 첫 획이었고, 나중에 알려진 대로 글자는 ‘단결투쟁’이었다. 그것을 다 쓴 언니, 타이밍 같은 것은 내뱉어버리고 삼키지 말라던 언니는 그날 본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새벽에, 아니 깊은 밤중에 쳐들어온 사람들은 - 쳐들어온 것이 맞다고, 남순이 그리 말했다고 - 삼 백 여공들을 팔다리 하나씩 들어서 끌어냈고, 그 중에 그 언니는……없었다. 나중에야 들것에 실려 나왔지만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난 번 평택에 집에 갔을 때, 그러니까 설 연휴에 굴뚝농성 걱정하던 틈에 나왔던 똥물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엷어지지 않은 그 상흔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귀가 아프게 들은 대로 이야그 해줄끄나?

민 여사가 갑자기 정자의 노인과 똑같은 사투리로 말한다.

웬선놈에 돈땜시. 그라고는 야도 내려왔제라. 서울은 통 무섭다고. 그때는 이상시레 날마다 헛소리만 했응께로.

그 언닌 절대 자살 아녀. 그 언니도 남동생 뒷바라지 하고 있었는데 왜 죽어. 엄니도 있었는데 왜 죽냔 말여. 그 언니한텐 엄니가 있었다니까. 글고 꼭 고향 내려와 산다고 했어. 사람이 고향을 잊아뿔믄 못 쓴다고. 시집을 가도 고향 사람 만나고 잡다고 했어. 시집 꿈도 꾸던 사람이 왜 절로 죽겄어. 절대로 아녀, 아니라고.

울 엄니라도 있었으믄 야가 맘을 잘 다스렸겄제. 그래도 고향 내려왔응께 우리 둘이 살어 남았제. 둘 다 박복했던 거시, 남순이는 다시는 틀질을 안 허기로 작정헌 듯 방에만 틀어배겼고, 그런 남순이 놔두고 내가 멋을 혔겄소. 젊은 날 나도 날벼락이었제. 쪼깨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었제만, 우리 사정이 그러코롬 됭께 다 틀려부렀제. 그 사람이 거그서 살림을 차링께 한동네 살기도 하잔코. 그라다 이 동네 나 먹은 남자 따라 왔는디, 야랑 거둬 준당께. 그라도 복이라고 죽어붕께. 그락저락 세월은 가드라고, 눈 깝짝에 가분당께.

우리 순길이 말이라? 순길이는 거장 다 배왔고, 남지기는 지가 알아서 혔고, 그라도 살어 남었는디. 요짐엔 고향도 모린다네. 그거시 흠이라믄 흠이제만, 고향 모리는 사람 어디 한 둘이여야제. 고향에 엄니가 있나 아부지가 있나. 고향도 고향이 아니겄제. 남순이 살았을 적엔, 그때까장은 더러 여글 댕겨가곤 했는디. 인자 멋허러 여글 오겄어라. 나는 지 갈친 누님도 아닌디.

 

 

새삼스레 도자기 굽고 염색하고 바느질한다는 이 분이 돋보였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여기 사투리를 그대로 흉내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얼굴은 영 아니다.

사투리가 너무 자연스러우신데 얼굴은 영 아니시네요.

숭악한 사투리 말예요? 여기 산 세월이 얼만데요. 나 여기 사람 다 되었죠. 강남 집 팔고 내려올 때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전세 놔놓고 가지 그러냐고! 돈으로 말하자면 그 말이 옳았지요. 가만히 있기만 했어도 수십억은 족히 되는 아파트를 그때 시세대로 훌쩍 내놓고 왔으니. 이젠 강남 복판에 재입성은 글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왕창 손해 봤다고만 생각하니까.

그래 이제 완전히 정착하신 거로군요.

정착이고 뭐고, 사는 곳이 집이고 고향이겠죠. 여기 내려와서 배운 것이 얼만데.

배워요?

일테면 외지 사람, 그러니까 도시 사람들이 와서 감탄하는 잔디밭이 얼마나 수고로움의 대가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지요. 하루 세 번, 새벽 한낮 초저녁에 십분 씩 자동으로 스프링클러를 조정해 놓으면 그저 자라는 것이 잔디밭인 줄 알았죠. 게 다리 같이 퍼진 바랭이풀도, 그냥 보면 예쁜 민들레도 잔디밭에선 불청객이죠. 어찌 보면 사랑스런 강아지풀도 고맙지 않죠. 클로버는 어떻고요, 소녀시절엔 행여 네잎클로버라도 찾아볼까 반기는 것 아니었어요? 그런 잡초들, 손으로 하나하나 골라내야 잔디밭이 유지되지요. 아무려나 담장 대신 둘러선 나무들이 얼마나 대단한 꽃들이며 향기를 뿜어주는지. 대문 바로 곁이 조팝나무죠, 오늘 여기 이러다 말겠네요. 다음엔 4월 돼서 오세요. 산야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내 정원에 와 있지, 그 윤기 나는 밤색 가느라단 줄기에 다닥다닥 붙어 피는 하얀 꽃잎들. 바람만 우수수 불어도 죄 저버리지만 한동안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런 걸 서울 복판 살면서 알았겠어요?

조팝나무, 상상이 안 가는데요?

이건 그냥 사치스런 말이라 할지도 모르겠네요. 강남에서라면 절대로 몰랐을 것들로, 그래서 풍요롭다면 좀 거하고, 폭이 넓어진 셈이죠. 물론 감탄할 일만 있는 건 아녜요. 실은 쓸쓸한 일이 더 많아요.

쓸쓸한데도 이곳이 더……?

쓸쓸하죠, 사는 것이, 다. 저이야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그렇다 치고요. 멀쩡한 할아버지 한 분도 벌건 대낮에 혼자 정자에 앉아있어 보았자 나무둥치 신세가 되죠. 바로 저 아래 길가 어느 집 나락 말려놓은 걸 웬 젊은이가 트럭 대놓고 착착 거두어 가더래요. 아, 저 집은 아들인가 조칸가 일이랑 도와주려고 오니 좋겠다, 그랬다는데요. 그거 온통 실어가 버린 날강도였죠. 여기 살면 인심이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사는가, 바닥을 보는 것 같을 때도 많아요.

아무래도 가난 때문에…….

가난이 처음 문제겠죠. 그러다 가난 말고도 가정 문제들이 심상찮게 생겨요. 여기 바로 이 아랫집도 지금 비었지요. 아저씨가 후두암으로 세상 떴어요, 자식도 없이. 아들 딸 데려온 여자랑 늦장가 식으로 합쳐 살았다는데, 여자가 좀 함부로랄까, 자격지심이랄까. 동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하면 그쪽이더라고요. 아무튼 아저씬 일해서, 노동일이죠, 돈 모이면 그 동안 각시 몰래 나한테 조금씩 맡겨서 저축을 했어요. 동생이 특히 주의를 주곤 했더래요, 형한테. 여자 좋은 일 말고 조카한테 뭐라도 남겨줘야 죽어서 찬물이라도 얻어먹을 것 아니냐고 채근이고.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가 임자라고 그러고. 그 얄팍한 살림에도 쪽박 깨지는 소리가 나서 보기 안됐더라고요. 몇 년 그렇게 앓았는데, 결국 세상 뜨자 대충 초상치고는 여자가 동넬 뜨더군요. 동생 예감이 맞았죠. 데려온 애들은 벌써 결혼해 나갔고, 단 둘이 살다가 그냥 가버리더라고요. 이장한테 전화해서 헐값에 집 내놓으란 소리만 했다는군요. 그런 소리 듣고는 내가 갖고 있던 통장을 조카를 줘서 제사라도 지내게 해야 할지, 참 어려운 상황이 되더라고요. 그 여자, 가만있었음 집값 다 되는 저축 돈을 받을 뻔 했었는데, 집은 그냥 살고.

그러니까 가난이……. 우리가 부유함에 너무 애착하면 부의 노예라 하지만, 교황님 말씀이죠, 결국 가난이 모든 것을 망치는 거죠. 그러니 부유함에 돈에 집착할 밖에요. 축적된 돈은 계속 돈을 낳고, 돈은 계속 돈 쪽으로 몰리고. 쇳가루가 지남철에 쏠릴 밖에요.

그래요, 가난이 일상이 되면 뭐가 뭔지 아예 모르는 것 같아요. 보조금만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뭐라는지 아세요? 나는 요로코롬 나라에서 믹인게로 먼 걱정잉가. 정부다 군청이다 면사무소다 그런 개념은 별로 통하지 않죠, 불필요해요. 가끔 봉사단체에서 연탄이나 반찬들 보내주죠. 몸 그런대로 움직이니까 들판에서 이런저런 일 거들면서 함께 먹고 푸중가리도 얻고.

푸중가리요?

아, 푸성귀. 푸성귀를 그리 말해요. 우리 한 선생님은 서울분이겠지요?

서울은 아니고, 평택요.

평택이면 서울이지요, 경기도 살면 다 서울 사는 거죠. 전남 어디 살아도 서울 가면 광주사람이라는데요 뭐.

 

아, 그렇구나. ‘나라에서 믹인게로’ 우리나라 좋은 나라 투표가 나오는 것이구나. 가난은 의식마저 죽인다. 적선으로 의식을 죽인다. 그나마 월급쟁이한테서 세금 걷어 밑바닥에 적선함으로써. 부자는 부를 애착하기를 멈출 리 없고, 기꺼이 부의 노예임을 즐긴다. 돈이 많을수록 행복지수가 높단다. 절대적 가난은 절대적 불행이다. 적선은 가난을 영구히 고착시키는 도구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먹먹한데 노인이 꼼지락거린다.

 

 

남순이넌 왜 안 온당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넋 놓고 있던 노인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어쩜 좋아. 할매, 남순이 서울 도로 갔다고 했잖아. 남순이는 서울이 좋다잖아.

아니여, 나랑 끝까장 여그 산다고 그랬는디.

남순이가 좀 아파서 거기 서울 병원에 있다니까 그러네. 뭣보다 동네 사람들하고 잘 살라고, 그러고 갔다니까 그래. 맨날 남순이만 찾으면 동순 씨도 병원 보내버릴까 보다, 거긴 맨날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하긴 무릎 아파서 잘 못 걸으니 정말 병원에 가야할지 몰라. 보건소 선생 불러줄까?

싫여, 나 암시랑토 안흔디. 집에 갈겨.

금방 여기서들 밥 차릴 건데 왜 가. 오늘 무궁화배추 무친다니까.

무궁화배추 맛있제 잉. 삼천리강산에~

그러고는 노인은 페트병에 물을 채운 베개를 모로 베고 저쪽으로 드러눕는다.

 

 

해가 지는 모습이 어떤 것일지.

나는 삼천리강산에~ 그것이 뭔가 묻고 싶었는데, 민 여사가 불쑥 해 지는 이야기를 했다. 연초록 잎들을 뚫고 비치는 여린 해가 중천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뜬금없다.

해가 꼴깍 산 너머로 넘어가기 까지는 어떻게 살았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렇죠?

해 지는 이야기는 왜 새삼스럽게요?

이 사람을 좀 봐요. 더 심해지면 이장도 어쩌지 못하고 요양원 보낼 거라 그러고 있고. 저기 저 목련, 백목련 피길 누구나 기다리죠. 놀랍게도 큰 꽃잎이 피면 누구라도 압도당하죠. 그러다 봄비라도 주르륵 내리면 절반은 시들어 붙어있지요. 조금씩 조금씩 죽는 거예요. 바닥에 나뒹굴어서도 얼른 죽지 않죠, 두툼한 살 때문에 그렇죠. 차라리 우수수 지는 꽃들이 더 예뻐요, 후두둑 지는 동백이 서럽다 해도 차라리.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랬나요, 송창식 노랜 잘 모르죠, 아마?

참다가 참다가 참을 수 없어서 뚝 떨어지는 꽃이 동백이라 했던가, 시인 김용택의 말은. 동백이건 목련이건 한 때가 있지 않았나. 그냥 풀꽃, 풀꽃처럼도 피어보지 못한 삶도 있는데. 동순 할머니가 아직 회갑도 안 된 나이라니, 정말 가슴이 아팠다. 민 여사가 왜 말을 좀 편하게 놓나 했더니 실제로 더 젊다는 말이다. 훨씬 늙은 몰골을 하고서. 무엇이 이렇게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는 삶을 점지하는가.

 

부유함에 집착하는 노예들은 당당하게 삶을 즐긴다. 평생 부유함 근처는커녕 그림자도 못 밟고 스러질 생은 뭔가. 동순 할머니의 경우 여동생의 트라우마에서 전염된 간접피해치고는 결과가 참담하다. 물론 그 YH사건 현장에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전부 다 후유증으로 폐인이 된 건 아니다. 사건 당시에 임신 중이던 몸으로 활동했고 그 신념으로 일생을 살아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경우도 있다고, 어떤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 성공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든 대다수는 다잡고 살아남았지 않은가 말이다. 직접은 아니라도 그 여세를 몰아 유신정국을 흔들었고, 억울한 죽음도 늦게라도 인정받고 동료들과 시민들의 추모를 받고. 튼실하게 살아남지 못한 책임은 당사자의 신체적 정신적 나약함에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나약함은 죄인가. 모르겠다. 가난은 죄인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괜히 맘 아픈 이야길 했나 보네요.

내가 멍하니 있었던지 민 여사가 물었다.

아, 아뇨. 저도 알 만큼은 알죠. 그런데 여긴 굴뚝새는 없나요?

웬 굴뚝새요? 요즘엔 겨울에도 잘 안 보이던데요. 여긴 소쩍새다 쑥국새다 그런 얘기가 많죠. 솥이 적어 굶어죽었느니…….

시어메 무서워 쑥국도 못 먹고 죽었느니, 그런 이야기. 참 서러운 상상이죠?

나는 얼결에 튀어나온 굴뚝새 이야기를 감추려고 말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저 아래서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벌써 이른 점심시간인가 보다.

나 좀 봐. 여긴 새벽밥 먹고들 들에 나가니까 점심이 일러요. 내가 오늘 작품 이야기는커녕 집 안으로 구경도 못 시켜드렸네요. 그런데 점심 같이 하고 가실래요? 점심 후엔 나도 읍내 나가야 해서.

아뇨, 오늘은 자료만 주셔도.

그래요, 그럼. 저기 차 안에 있어요. 검토해 보시고 나서 한번 만나게요. 난 책 내고 그러는 것 별 뜻이 없는데, 남편이 자꾸 권해서. 담엔 차분히 작품들 보시면서…….

검토라뇨, 잘 감상해보겠습니다.

 

몇 걸음 아래로 함께 걸어 내려오는데 다시 노랫소리가 들린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농부는 밭은 갈고 씨를 뿌린다 ~.

모로 누운 채 말도 안 되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는 사람, 여기 어느 한적한 마을, 아직은 추운 기운이 남아있는 이른 봄, 마을 정자에서 넋을 놓고 있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되었나. 먼저 떠난 동생의 무서운 기억이 전염되었을까. 무서움이 얼마나 무서우면 전염이 될까.

조팝나무 꽃 필 때 오세요.

연락 하셔요, 저는 토요일이 좋은데요.

 

손에는 가벼운 유에스비를 받아들고 맘에는 모로 누운 앙상한 그림자를 무겁게 안고 발걸음을 옮긴다. 삼천리강산에 새봄이 왔구나~. 벌써 들리지 않을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 왔는데도 귓가에 그 요상한 멜로디가 아스라이 따라온다. 새봄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일까, 정말 누구에게나.

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6. 21. 22:19

2015 수빈 형빈 사진들


큰 애가 다녀가면서 사진들이 남았다.

2003년 생 수빈은 Harvard-Westlake 중학교로 진학한다.

2006년 생 형빈은 아직 개구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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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
사사로이2015. 6. 14. 08:19

 

 

몸과 맘, 맘과 몸의 이중주 

 

 

I have said that the soul is not more than the body,

And I have said that the body is not more than the soul,

And nothing, not God, is greater to one than one's soul.... -W. Whitman

 

 

사실일 뻔 했나? 맘으로 지옥을 다녀온 뒤, 서둘러 단편도 하나 내 보내고 밀렸던 사람노릇도 한다고 이틀 연속 점심 외출도 했다. 기쁘게 살아야지. 그러고서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몸이 반란을 한 것?

 

5월 29일, 아직 광주에서는 '메르스'가 중요한 무슨 단어인지 모를 때, 38.4도의 고열과 참을 수 없는 근육통으로  입원, 다음 주에야 퇴원했다.

나중에 열이 오르지 않게 되어서야 동생들은 - 마지막 토요일 형제자매 만나는 날 펑크를 내서 알게된 그들은 메르스 아니였냐고 놀렸다. 

데노간 - 존경할 약이다, 30분이면 웃통을 벗어던지던 열감이 스러진다.

파지돈 - 정체를 알 수 없는 염증을 잡아준 약이다. 인플로엔자, 뇌수막염, C형간염... 어떤 결과도 확정되지 않은 채 고열이 멈추고 염증 수치가 떨어져서 퇴원을 했다.

병원 초입에 "우리 병원은 메르스 청정지역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원인(?): 과로, 장시간 의자에 앉아있기, 스트레스. 어쩌라는 말이냐?

처방: 무위도식, 육식, 무교양. 어쩌라는 말이냐?

 

일단 '목요 소설창작반' 꼼사리를 멈추기로 했다. 딱딱한 시청 세니마실로 밤 외출은 몸에 무리였나 보다. 미발간 창작물을 서로 평가하는 혹독한 정신적 작업도 맘을 다치게 했나 보다. 

 

☆☆☆

 

퇴원을 한 주말, 세상은 메르스로 발칵 뒤집혀 있었다. 5월 20일 처음 메르스 확진 환자를 데리고 있던 d병원이 삼성서울병원임이 드러나자 메르스보다 더 무서운 비밀 뭔가를 보는 것 같았다.

 

퇴원을 한 주말, 사사로이는 서울의 둘째네 온 식구가 왔다. 맘이 다 녹는 편지도 함께 왔다.

"또 아프면 곤란해질 수도 있지 않겠냐" 는 그런 걱정을 한다. 아홉살 성빈이가.

자신이 결혼할 스물아홉에까지 할머니가 살려면 아흔살은 꼭 되게 살아야한다고 주문하는 아이다. 아흔살....

  

 

  

 

   

 

 

퇴원을 한 다음 주말, 서울에 출장나왔던  큰 애가 둘째랑 함께 집에 다녀갔다.

운전을 하고 온다니 둘째가 피곤할까 걱정이었고, Ktx로 온다니 대중교통이 걱정되었다.

바보 에미 맘이여..................

 

책상 용, 나머지 집안에서, 그리고 외출용 가방 속에 - 나는 세 개의 안경이 필요하다.

책상에서 안경을 못 찾으면 숨이 막힌다.  오래 된 책생 용은 안경테까지,

나머지는 도수를 새로 맞춰야 했다. 멀리 살아서 미안해 하는(?) 큰 애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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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용좌